소설리스트

동맹체결同盟締結 (63/66)

동맹체결同盟締結

1

모든 것을 말하고 난 황후의 용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마치 그 말을 하기 위해 딱 그 시간만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후 앞에서 피를 토했던 광운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빠져 자리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야. 조금만 쉬면 괜찮아지겠지.”

두 사람의 상태가 나빠지는 것만큼 회복이 빠른 편월이 찾아가면 광운은 으레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막주에서 군사를 일으키기 전부터 광운은 재기가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편월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사주는 물론 파양주까지 평정하고, 급기야 건주의 일부까지 병탄한 후에 이처럼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로선 바라던 걸 이루게 된 셈이었으니 긴장이 풀렸다는 말도 틀린 게 아닐 터였다.

그렇다 쳐도 광운의 상태는 너무 위중했다. 막주에 있을 때보다 더 위태롭게 보여 편월이나 유화의 간장을 녹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율천국에 사자를 보내는 일도 지지부진해져서 급기야 해를 넘기게 되었다.

원단元旦!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이다.

당연히 합진성은 북적거렸다. 강숙과 지두룡을 뺀 모든 장수들이 편월에게 새해 인사를 하러 몰려왔기 때문이다. 미처 평정하지 못한 건주의 여러 성에 대해 진무하던 송지도 모처럼 합류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막주의 수군제독 주융도 광운을 병문안한다는 이유로 와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에 비해 분위기는 침중했다. 황후와 광운의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탓이었다.

“이젠 사자의 파견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이미 정사와 부사까지 정해졌으니, 근일 내로 출발시켰으면 합니다.”

모든 장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좌괴는 선언하듯 말했다. 그는 황후와 광운이 회복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전에 서둘러 가겸후와의 동맹 건은 성사시키고 싶었다.

그건 황후의 상태와도 관계가 없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합진성에서 죽는다면 가겸후는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모른다. 독살을 당했다고, 암살을 당했다고 누명을 씌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 더는 미룰 수 없겠지. 어떻소, 곽 장군?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겠소?”

“신명을 다하겠소.”

곽준방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결정된 일이라 망설이고 자시고 할 일도 아니었다.

“수행 인원은 얼마나 필요하오?”

“달리 수행할 인원은 필요 없소이다. 우리끼리만 다녀오겠소.”

이어진 편월의 질문에 곽준방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선 안 됩니다, 곽 장군.”

좌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제 주군도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 당당한 패주요. 거기다 아직 대외적으로 발표할 수는 없지만 황실의 혈통이시오. 거기에 걸맞은 수행을 거느려야만 하오. 오백 정도면 적당할 듯하오만…….”

“오백씩이나?”

곽준방은 놀랐지만, 편월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 역시 좌괴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사실 편월은 좀 더 딸려 보내고 싶었다. 그게 노장이자 위휘군에 편입된 곽가군 대장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여겼다.

편월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니 그대로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곽준방과 좌괴는 오백의 인원을 어디서 차출할지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남은 곽가군 중에서 데리고 가겠다는 게 곽준방의 의견이었고, 좌괴는 위휘군의 근위대 중에서 뽑는 게 좋다고 했다. 서로 다른 군세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맹 장군이 부사를 가니까, 아무래도 근위대 중에서 수행할 병사들을 뽑는 게 좋을 듯하오.”

편월이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곽준방을 대하는 말투나 태도도 마치 수하를 다스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곽준방도 그 점에 대해선 별로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처음 객군으로 왔을 때만 해도 조금 어색하고 불쾌한 빛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이번 패전 후에는 완전히 저자세가 되어 버렸다. 이래서 무장에게는 무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결정되자 곽준방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내일 당장 출발하려면 준비할 게 많다. 촌각의 시간이라도 아껴야만 한다.

“이제 주군께서도 준비를 하셔야 될 듯합니다.”

“준비? 내가 무슨 준비?”

갑작스러운 좌괴의 말에 편월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준비한단 말인가?

그에 비해 좌괴는 뭔가 단단히 결심한 표정이었다. 편월이 죽은 황제의 종제라는 황후의 말을 들은 뒤부터 내내 가슴속에 품어 두고 있던 얘기를 지금 꺼낼 작정이었다.

“황통의 맥은 한시도 끊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대 황제께서 승하하신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갑니다. 더 이상은 비워 둘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끝을 맺는 좌괴의 말에 편월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자신더러 황위에 오르라는 말이었으니 놀라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었다.

황제의 지위 따위는 편월에게 있어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의 소원이었던 성 하나만 가지면 족하리라 여겼는데, 어쩌다 보니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편월이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니다. 땅이 좁아서가 아니라, 가진 무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가겸후가 살아 있기에 안주할 수 없었다.

이건 욕심이라기보다는 무장의 본질이라고 해야 옳다. 이백여 년을 이어 온 난세를 자신이 종식시키고 싶다는 열정은 이 땅의 무장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어 본 일일 터였다.

당연히 거기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이 끼어 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니까, 그걸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주군,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전대 황제의 소생은 어렸을 때 죽고, 후사가 없습니다. 아니, 황통을 이을 사람은 주군이 유일합니다. 이 점 유념해 주십시오.”

보다 강해진 어조로 좌괴가 편월을 설득했다.

“황통을 이으라고? 내가 황제의 종제라서? 웃기지 마. 난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그런데 뜬금없이 나타난 황후의 말을 믿으라고?”

편월의 어투 역시 완강했다. 좌괴의 말이 진정으로 우습다는 듯 말끝에 나직한 웃음까지 매달았다.

거절하는 편월의 말에서 좌괴는 실망감과 아득한 절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역시 나 혼자는 무리다. 다른 장수들도 동원해야겠다.’

때마침 원단이라 위휘군은 물론 막주군과 곽가군의 장수들이 대부분 이 합진성에 모여 있다. 좌괴는 그들을 부추겨 편월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모두가 나선다면 그도 어쩔 수 없이 승낙할 테니까 말이다.

“주군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대 황제를 시해했을지도 모르는 가겸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만에 하나 그가 불궤한 마음을 먹고 황제의 자리에라도 오른다면, 이는 만백성의 불행일 것입니다. 그럼 소생은 이만 물러가서 곽 장군의 준비를 도울까 합니다.”

확실히 좌괴는 노련했다. 이 자리에서 더 이상 말해 봐야 편월의 반감만 강하게 할 뿐이란 걸 깨닫고는 곧바로 물러나려고 한다. 차라리 나가서 장수들을 설득하는 게 보다 빨리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방법일 터였다.

마치 좌괴가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증화강이 시녀들을 거느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사이 그녀는 섭양을 잘 했는지 어느 정도 예전 모습을 회복했다.

“주군께 문안 여쭈옵니다.”

증화강은 편월에게 날아갈 듯한 예를 갖췄다. 이제 곧 한 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과, 지아비에 대한 존경의 염이 가득해 보였다.

“어서 오시오, 부인. 그런 거추장스러운 예의는 거두시라니까요.”

웃음 띤 얼굴로 편월은 증화강을 맞았다. 그사이 그도 부부 사이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것일까. 아내를 맞는 남편의 태도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오늘은 원단이옵니다. 예를 갖추는 게 당연하지요.”

“원단이라고 해서 뭐 특별할 게 있겠소. 자, 이리 앉으시오.”

편월은 증화강에게 자신의 옆 자리를 권했다. 시녀들이 눈치 빠르게 다과를 준비해 놓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 왔사옵니다.”

“부탁이라니? 뭐든 말씀해 보시오.”

증화강의 말을 편월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올해엔 유화 언니의 위치를 확실히 정해 주소서.”

“뭐라고?”

편월은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증화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말을 한 증화강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잘근 씹었다. 기실 이보다 더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었다. 바로 부모 형제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생각보다 쉽게 뱉어 낼 수 없었다. 작년에 성으로 돌아온 편월이 엄중한 부상을 입었기에 더더욱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원수를 갚자면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고, 그러면 죽는 건 적만이 아니라 같은 편 사람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우선 유화의 문제부터 꺼냈다. 언젠가는 해결해야 될 일이니 오늘 같은 원단에 꺼내는 게 좋을 듯해서였다.

“허허허.”

돌연 편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상태였다.

편월은 속이 뜨끔했다. 웃음으로 마음을 달래려고 했지만, 그것도 잘되지 않았다. 유화의 일은 분명 자신의 실수였고, 증화강은 그 점을 매섭게 꼬집은 것이다.

“허험, 험. 알겠소. 장수들과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지.”

일단 편월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부부란 어떤 거라는 걸 알게 됐는데, 후처나 첩을 거느리는 일을 알 턱이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을 듯했다.

편월이 어색해하는 걸 본 증화강은 더 이상 머물기가 난처했다. 원단부터 괜한 얘기를 한 게 아닌가 하는 후회 속에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이만 물러갈까 하옵니다.”

“오, 그러시오.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편히 좀 쉬시오.”

편월로서는 증화강이 간다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문밖까지 그녀를 배웅한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이런 문제는 역시 광운이 제격이겠지만, 그는 지금 아픈 상태다. 자칫 심기를 어지럽힐지도 모르는 일을 물어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노장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면, 남는 사람은 좌괴뿐이다.

‘좌괴는 혼인을 했나?’

그러고 보니 편월은 좌괴에 대해 모르는 게 아직도 많다. 그가 속 시원히 대답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서둘지 말자.’

증화강의 말이 백번 지당하지만, 괜히 일을 서둘러서 격식에 어긋나게 할 수도 없다. 그러기엔 편월의 마음에 유하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

‘여자를 거느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군.’

“주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생각에 잠겨 있는 편월을 깨운 건 송지의 목소리였다.

“아, 송 장군.”

“원단부터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소장이 오는 것도 모르고 계시는 거요?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한 해가 될 테니 정신 바짝 차리시오!”

여기 오기 전에 송지는 이미 좌괴로부터 언질을 받은 바 있었다. 다짜고짜 질책하는 듯한 말을 내뱉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뭐 올해라고 해서 별다를 게 있겠소?”

“무슨 말씀!”

송지는 언성을 높여 편월의 입을 막았다.

“저간의 얘기는 좌 선생을 통해 모두 들었소이다. 황후 마마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주군께서는 황통을 이으실 분이외다. 작년에 그 사실을 알았으니 올해는 마땅히 절차를 받아 등극을 하셔야 되지 않겠소이까! 이처럼 중차대한 사안이 놓여 있으니 올 한 해는 특히 중요하다는 것이외다.”

송지의 허연 수염발에 침이 튀었다. 그만큼 열변을 토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사실 송지는 지금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그저 전쟁 잘하는 꼬마로 알게 된 편월이었다. 그러다 막주에서 전공을 세우고, 급기야 정허군의 대장군이 되었을 때만 해도 그를 대할 때 어느 정도 장난기가 섞여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위휘군이 창설되었을 때는 조금 달랐다. 일개 잡가군으로 몸을 일으켜 한 나라의 왕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고스란히 편월에게 걸어 보기도 했다.

한데 바로 그 편월이 죽은 황제의 종제라고 한다. 이 하늘 아래 유일하게 황통을 이을 수 있는 핏줄이라는 의미다. 그를 모시던 사람들의 피가 끓지 않을 수 없는 얘기였다.

“송 장군도 내가 황제가 되길 원하시오?”

편월은 시큰둥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어렸을 때 봤던 황제란 직위는 그에게 있어선 그저 번거로운 행사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활을 쏘기에도, 칼을 휘두르기에도 불편한 옷 따위나 걸친 살아 있는 인형 같은 느낌이었을 뿐이다.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외다. 주군의 운명이 그러한 것을요.”

송지는 운명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편월이 황실의 혈통이란 걸 거듭 일깨워 주려 함이었다.

“한낱 백성들도 조상의 음덕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소이다. 하물며 황실의 혈통이 되시는 주군께서 그 막중한 소임을 잊고 계시다니요? 오랜 전란에 시달리는 억조창생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주군께서 제위에 오르셔야 하오.”

송지는 궁중에서나 쓰일 만한 용어들을 내뱉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 미리 좌괴에게 귀띔받을 걸 그대로 옮기는 중이었다.

“황제라는 게 그토록 막중한 자리라면 송 장군이나 하시오.”

“주군!”

탕!

송지는 세차게 탁자를 내려쳤다. 답답해도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누구는 황제를 하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데, 편월은 저렇게 시큰둥하기만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주군께서 제위에 오르는 게 어찌 개인의 일이라 하겠소? 주군을 따르는 사람들이 겪은 지난날의 고난을 생각하시오. 그들이 영화를 바라고 주군을 따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땅히 합당한 보답은 있어야 하지 않겠소?”

계속된 송지의 열변에 편월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 것이다.

편월은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무용만으로 따진다면 가히 한 지방을 다스리며 제후로 군림할 만한 면면들이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황제에 올라야 하는 걸까?

“이건 망설일 일이 아니외다. 비록 위휘군이 창설되고, 휘국 건국의 말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루어진 건 아무것도 없소이다. 하지만 장수나 병사들은 내일이면 또 어떤 전장에 나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오. 그들이 한낱 잡가군으로 죽기를 바라겠소? 부귀는 바라지 않으나, 명예만은 갖고 싶을 것이오. 황제를 보필해서 천하의 병란을 다스리고, 억조창생을 간난에서 구제하는 것 이상의 명예가 어디 있겠소? 이 점 깊이 상량해 주시길!”

편월은 멍청한 표정으로 송지의 입을 쳐다보기만 했다. 원래가 이처럼 말이 많고, 또 달변가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치 뭔가에 씐 사람처럼 열변을 토하고 있다.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송지의 말은 편월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한마디 한마디가 결코 예사로이 들어 넘길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당장 ‘그래, 나 황제 할게.’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은 귀찮다는 생각이 여전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제가 된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될지 편월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주군!”

그러나 송지는 당장 확답을 받아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다. 부릅뜬 눈으로 편월을 노려보며 목청껏 그를 불렀다.

“알겠소. 내 얼마간 생각해 보겠소.”

“생각하실 일이 뭐 있소이까? 지금 황위는 비어 있고, 그 자릴 이을 사람은 주군뿐인데.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시오.”

편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장들을 거느릴 때의 불편함이 송지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들은 비교적 단순하다. 그런 만큼 한번 고집을 세우면 웬만해선 꺾지 않는 우직함도 있다. 편월의 결단을 채근하는 송지의 성급함도 바로 그런 곳에서 기인한다.

“아무튼 당장은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소. 그보다는 내일 떠날 곽 장군의 일이 잘 성사되길 바랍시다.”

편월은 유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언제부턴가 좀처럼 말로써 장수들과 다투지 않게 된 게 최근 들어 더욱 현저해진 모습이었다.

송지는 당장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좌괴로부터 받은 귀띔이 고갈되기도 했거니와, 쟁점에서 슬쩍 비켜서는 편월의 태도가 너무도 노련했다.

“오늘 소장은 이대로 물러가지만, 다른 장수들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게요. 주군께선 조속히 결단을 내리시는 게 좋을 거요.”

협박 비슷한 소리를 한마디 남긴 후 송지는 밖으로 나갔다. 편월의 말처럼 곽준방의 출발에 미비한 점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자신도 돌아가 봐야 한다. 아직은 건주의 많은 성들이 완전히 굴복한 게 아니니까.

송지가 나간 후 편월은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귀찮은 일이 더 자꾸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피해 가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건 성격상 맞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편월은 몸을 일으켰다. 광운에게 가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즈음 광운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많은 의생들이 이번에야말로 재기가 불가능할 것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묘한 건 황후의 상태였다. 광운이 점점 더 위중해질수록, 그녀의 용태는 차츰 회복되어 갔다.

2

편월의 예상대로 장수들과의 지리한 설전이 계속되었다.

내용이야 뻔했다. 하루에도 몇 명의 장수들이 번갈아 찾아와 편월의 황제 등극을 종용했다.

그런 와중에 서서히 지쳐 가던 편월과 장수들을 구원해 준 일이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바로 가겸후가 스스로 제위에 올라 황제라고 선포한 것이다.

당연히 천하의 이목은 율천국으로 쏠렸다. 하긴 천하라고 해야 가겸후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면 편월에게 복속된 곳뿐이었으니, 위휘군의 시선만 쏠렸다고 하는 게 정확할 터였다.

당연히 위휘군 장수들 사이에서는 율천국 정벌에 대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논리는 명료했다. 편월이 전대 황제의 종제이니 당연히 황실의 정통성은 그에게 있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가겸후는 정통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대 황제를 시해했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도저히 그가 제위에 오르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와는 별도로 장수들은 편월에 대한 압력의 수위도 높였다. 그가 망설이고 있으니 가겸후가 망동을 부리는 것이라며, 연일 황제에 등극할 것을 채근했다.

솔직히 편월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가겸후의 음모야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지만, 지난 초이틀에 그와 동맹을 맺자는 사자를 파견한 참이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섣불리 행동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 참에 하루는 황후가 편월과 장수들을 찾았다.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전갈이었다.

황후의 거처에 당도한 편월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장수들은 같이 불렀으니 거기 있는 게 당연하다고 쳐도, 증화강과 유화까지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편월에게 황후가 정중한 예를 갖췄다. 장차 황통을 이어 갈 사람에 대한 극공의 태도와 형수로서의 자애로움을 잃지 않은 동작이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편월도 엉거주춤 예를 갖췄다. 장수들은 몰라도, 아내와 유화와 함께 황후를 대면하자니 묘하게 어색한 감정이 들었다.

“오늘 여러분들을 뵙자고 한 건 한 가지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듣자니 내 오라버니가 황제에 등극했다고 하더군요. 그건 잘못된 일입니다. 황통은 엄연히 여기 계신 선제先帝의 아우님 되시는 편월 장군께서 이으셔야지요. 이 점 여러 장수들께서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혼자서 몇 번이고 연습을 했을 게 분명하다. 황후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끝낸 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듯 고개를 외로 꼬았다.

슬퍼하고 있다!

누구의 눈에도 지금 황후의 모습은 그렇게 보일 터였다. 그녀의 옆얼굴 선을 따라 구르는 파리한 낯빛엔 분명 눈물보다 더 짙은 회한이 타고 흘렀다.

왜 아니겠는가. 방금 했던 황후의 말은 자신의 친오라버니를 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가슴 저미는 아픔과 슬픔이 없다면 거짓말일 게다.

이제 당황한 건 편월을 비롯한 장수들이었다. 물론 언젠가 한번은 가겸후와 자웅을 결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이국인 상초국의 위협도 상존하고 있고, 그걸 물리치기 위해 동맹을 맺으려는 사자가 파견된 상태였다. 가겸후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시점이었다.

물론 황후의 말도 지당한 것이다. 엄연히 전대 황제의 종제라는 혈통이 있는데, 가겸후가 제위에 올랐다는 건 분명 찬위고 찬탈이다. 이 땅에 뜻이 있는 자라면 결단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편월에게 쏠렸다. 이럴 땐 군사행동을 일으키기보다는 차라리 맞불을 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즉, 편월도 황제로 등극하는 것 말이다.

다른 장수들이 말했을 때와 달리 오늘 편월은 즉각적인 거절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 자신의 친오라비를 치라고 한 황후다. 거절이든 찬성이든 결코 가볍게 처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제 뜻이 아니에요.”

여전히 외면한 채 황후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붕어하신 황제의 뜻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옥새를 제게 맡기시며 편월 장군께 전하라 하신 거고요.”

“주군!”

황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괴가 세찬 어조로 편월을 불렀다. 이래도 제위에 오르는 걸 반대할 거냔 의미였다.

“주군…….”

좌괴에 이어 편월을 부른 건 증화강이었다. 비록 목소리는 낮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열정이 담긴 음색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증화강은 편월을 통해 가문의 원수를 갚기 바라고 있다. 그가 제위에 올라야 이미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고 나선 가겸후와 동등한 입장에서 싸울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여전히 편월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의생들의 부축을 받은 광운이 안으로 들어왔다. 창백하다기보다는 이젠 정말 사색이 완연한 안색이었다.

“광운?”

놀라서 부르는 편월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광운은 황후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픈 와중에도 예를 잃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황후 역시 놀란 표정으로 예를 받았고, 그 후에야 광운은 편월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살다 보면 피해 갈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오. 또 피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고.”

“광운!”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편월은 큰 목소리로 광운을 불렀다. 그의 말투가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마지막 할 일을 하는 사람처럼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대저 사람의 삶에는 운명과 천명이라는 것이 있소이다. 그대가 나를 만난 것이 운명이라면, 그건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을 게요. 나와 결별만 했으면 그대의 삶도 달라졌을 테니까.”

광운은 잠깐 말을 맺었다. 납빛 땀이 이마에 깨알처럼 맺혀 있는 걸 보면, 이 짧은 말을 하는 것도 상당히 힘든 모양이다.

“그러나 천명이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오. 그대가 황실의 혈통이라는 게 바로 그 천명. 대체 어디로 물러서고, 어떻게 비켜 가겠다는 말이오?”

“광운…….”

힘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편월은 광운을 불렀다.

기실 그건 부른 게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듣고 있기엔 너무도 엄청난 얘기인지라 미미하게나마 저항해 본 것이다.

“광운 장군의 말씀이 맞아요. 황제의 자리는 단 일각도 비워 둘 수 없어요. 거기다 이 몸의 오라버니도 호시탐탐 황제의 지위를 노리고 있어요.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인 줄 알아요.”

황후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그녀로선 괴로운 입장이었지만, 어쨌든 황통은 편월에게 이어지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바로 정통이니까 말이다.

편월은 조용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열망에 들뜬 눈빛들이었다.

“지금 당장은 대답할 수 없소. 좀 더 시간을 주시오.”

편월의 어투는 단호했다. 더 이상의 반발은 허용치 않겠다는 태도였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말이다.

사람들도 당장 편월의 허락을 기다린다는 건 무리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 * *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편월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장수들이 연일 찾아와서 권하는 지루한 설전이 합진성에서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동맹을 위해 율천국으로 갔던 사자들에게서 첫 번째 연락이 왔다. 가겸후가 내놓은 조건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가겸후가 어떻게 황후께서 여기 계시는 걸 알았을까?”

가겸후가 내건 조건을 적은 봉서를 읽은 편월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 첫 조항이 바로 황후를 돌려보내라는 것이었으니, 약간의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가겸후의 요구를 수용할 건지 거부할 건지를 결정하는 게 시급합니다.”

좌괴의 어조는 냉정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들리도록 가장한 탓이었다.

계산적으로 따지면 황후의 이용 가치는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로부터 옥새를 얻었고, 편월이 전대 황제의 종제라는 얘기도 들었고, 또한 가겸후의 음모에 대한 것도 알게 되었다. 계속해서 그녀를 합진성에 머물게 하는 건 이쪽의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도의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일반 백성들이라 해도 그리 쉽게 넘겨줄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황후의 신분이다. 보호해 주는 게 합당한 처사다.

그러나 지금은 전시다. 허울 좋은 명리보다는 실속을 찾을 때란 얘기다.

“무슨 결정이 필요해? 이 조건은 들어줄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하지만 주군, 지금은 가겸후와의 동맹이 가장 중요한 사안입니다. 상초국의 침범이 임박한 것 같으니…….”

“안 된다면 안 돼!”

편월의 의지는 강경했다. 지금쯤이면 가겸후도 옥새가 없다는 걸 알았을 테고, 그걸 황후가 빼돌렸을 거라는 추측은 삼척동자라도 할 수 있다. 지금 그녀를 보내면 틀림없이 오라비 손에 죽게 될 것이다.

“그렇소이다, 주군. 원래가 협상이라는 건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 법. 우선은 거절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하오.”

담개의 말이었다. 무장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그로선 아무래도 좌괴만큼 모든 걸 계산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담 장군의 말씀은 지당하오. 그렇지만 밀고 당기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소. 그러니 최후의 순간에는 어떻게 할지 미리 결정해 두는 것도 좋지 않겠소이까?”

“서둘 건 없어!”

단호하게 내뱉은 편월의 말에 좌괴는 잠시 입을 닫았다. 오늘은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달리 할 말이 있었기에 재차 말을 이었다.

“당장 황후 마마의 거취 문제는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주군의 결심만은 들어야겠습니다. 이는 차후 가겸후와 동맹을 맺는 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내 결심?”

“황후 마마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직위라는 건 촌각도 비워 둘 수 없습니다. 하오니 주군께선 조속히 등극의 절차를 밟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또 그 얘기야? 내가 황제가 되는 것과 동맹이 무슨 상관이야?”

“위휘군의 주군으로서 협상에 임하시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황제의 이름으로 가겸후를 상대하는 게 보다 유리할 것입니다.”

“소장의 생각도 같소이다.”

좌괴의 말에 담개가 찬성의 뜻을 표했다. 하긴 누가 얘기했던 간에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말이다.

편월은 짜증이 치밀었다. 장수들 입장에서 보면 다른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에겐 같은 소리로 들렸다.

귀찮았다. 위휘군의 주군이라 불리는 지금도 이런데, 만약 황제가 된다면 성가신 일은 더욱 많아질 게 뻔하다. 이래서 등극을 꺼리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이 율천국의 기치 아래에서 싸우자는 것인데, 이것 역시 허용해선 안 되겠지?”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첫 번째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한 거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전비를 공평하게 부담하자는 건데, 아무래도 병력은 율천국이 우리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지만, 이것마저 거절한다면 협상 자체가 결렬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들어주자는 말인가? 우리에게 그만한 자금은 있고?”

“광운 장군이 점령한 파양주에서 막대한 금이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다 송용조 공의 도움도 크니까, 전비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해결된 거로군. 이대로 곽 장군에게 통보해 주도록.”

명을 내리며 편월은 장수들을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다른 할 말이 있으면 듣겠다는 뜻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작 그들이 듣고 싶었던 말을 편월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불만을 풍기는 침묵만을 내보이고들 있었다.

“광운의 상태는 어때?”

염려 섞인 음색으로 편월이 물었다. 요즘의 광운은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다. 유화가 보살펴 주고는 있었지만, 도무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 질문에도 장수들은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편월과 광운이 어떤 사이인지 잘 알기에 전혀 나아지지 않은 그에 대한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오늘 중으로 이 결정된 사항을 통보할 전령을 파견하도록. 난 광운에게 가 있지.”

좌괴에게 지시를 내린 후 편월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며칠간 광운을 보지 못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우선 광운이 자신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고, 편월도 만만찮게 바빴다. 막주의 수군제독인 주융으로부터 해전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내전의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어느새 편월도 내전이 어지러우면 자신의 일에도 지장을 받는다는 걸 알 정도로 나이가 든 것이다.

편월이 나간 후 좌괴는 장수들을 잠깐 제지했다.

“우리들만이라도 주군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할 것 같소이다. 황제를 대하는 것처럼 모시면, 주군의 결심도 보다 빨라질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오.”

이 말에 장수들은 뜨끔했다. 특히 노장들은 안색마저 살짝 바뀌었다. 주군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편월을 꼬마 장군으로 인식했던 점도 없지 않았다.

“좌 선생의 말도 일리는 있소. 하지만 우리 같은 무부들은 황실의 예절 같은 것에 그리 밝지가 못하오. 누구든 잘 아는 사람을 모셔다 가르침을 청하는 게 좋겠소이다.”

“황후 마마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께 부탁드리면 될 겁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수긍을 하면서도 담개는 말꼬리를 흐렸다. 황후를 대하는 건 아무래도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황후만큼 황실의 예법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 테니까.

“그럼 소생이 이 길로 가서 부탁을 드리겠소.”

좌괴가 몸을 일으키자 다른 장수들도 모두 서둘러 일어섰다. 광운이 부른 막주의 원군 중 선발대가 오늘 중으로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들을 맞아 새로이 부대를 편성하자면 얼마 동안은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쁠 터였다.

편월이 들어갔을 때 광운은 잠들어 있었다. 그 곁에 앉아 유화가 그를 보살피는 중이었다.

“오늘도 여전한 거야?”

계속된 간호로 피로한 눈빛을 하고 있는 유화에게 편월은 물었다. 현재 광운의 상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의생들보다는 오히려 그녀일지도 모른다.

유화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여는 것도 힘겨울 정도로 피곤한지, 아니면 말로 광운의 상태를 설명하는 게 민망해서인지 알 수 없는 동작이었다.

“오셨소?”

돌연 광운이 눈을 뜨며 편월에게 말을 걸었다. 잠들어 있었던 게 아닌 모양이다.

“광운, 제발 그 말투 좀 고치면 안 돼?”

새삼 말할 것도 없이 편월에게 있어 광운은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다. 비록 자신의 혈통이 밝혀졌다고 해도, 저런 식의 말투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가겸후와의 동맹은 어찌 되었소? 듣자니 사자들에게서 전령이 왔다던데…….”

병상에 있으면서도 광운은 들을 건 모두 듣고 있었나 보다.

편월은 가겸후가 내건 조건을 얘기해 줬다. 아울러 자체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한 사항도 덧붙였다.

“사자들이 위험하겠군.”

“뭐? 그들은 사자일 뿐이잖아. 설마 가겸후가 사자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광운의 말에 편월이 깜짝 놀라 덧붙였다. 전시에 적으로부터 파견된 사자를 목 베는 경우는 간혹 생긴다.

하지만 위휘군은 지금까지 한 번도 율천국과 싸운 적이 없었다. 비록 어렸을 때 좋지 않은 기억이 있긴 했지만, 거기에 연연한다면 가겸후는 졸장부라 불리는 신세를 면치 못할 터였다. 게다가 이번 사자는 싸우자는 것도 아니다. 서로가 힘을 합쳐 이국인 상초국의 침입을 막아 내자는 의도로 파견되었다. 그들이 위험할 거란 생각은 애당초 편월의 뇌리엔 있지도 않았다.

“가겸후는 자기의 친부까지 몰아낸 자요. 그 후로 율천국의 성세는 더욱 강해졌고, 그만큼 그가 가진 자부심도 클 거요. 그가 제시한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오.”

자신도 모르게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든 작든 싸움을 하려면 적장의 성격까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이 어떤 작전으로 응대해 올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 편월은 확실히 소홀했다. 동맹이 성사되든 말든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대처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오늘부터 막주군의 선발대가 도착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소? 내가 그들을 이끌고 탄금성으로 가겠소. 그 후에 오는 병력도 곧바로 그쪽으로 보내 주시오. 듣자니 탄금성엔 증두신의 장자인 증화린도 있다고 하니, 만약 가겸후가 사자들에게 위해를 가하면 곧바로 옛 강국의 영토로 쏟아져 들어갈 듯이 시위를 벌이는 거요.”

“안 돼!”

광운의 말을 편월이 세차게 거부했다. 지금 그의 상태로는 군사를 이끌기는커녕 자기 한 몸 간수하기도 어렵다. 들을 가치조차 없는 얘기였다.

“두 개의 군세가 하나로 뭉쳐 싸우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오. 다행히 막주군의 장수들은 내 뜻을 잘 따라 주지만, 병사들 개개인까지 그렇다고 할 순 없소. 그러니 당분간 막주군의 지휘는 내가 아니면 안 될 게요.”

“아저씨.”

이번엔 유화가 광운을 불렀다. 비록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반대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

“무장이 죽을 곳은 전장이오. 이렇게 침상에 누워 있어서 내가 낫는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되긴 힘들 것 같소이다. 그러니 무장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시오. 그동안 잘 쉰 덕에 기운도 상당히 돌아온 것 같으니…….”

유화를 대하는 광운의 말투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편월을 황제의 종제로 대하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문득 광운은 몸을 일으켰다. 마치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 볼 듯한 기세였다.

“주군…….”

유화가 안타까이 불렀지만, 편월은 선뜻 광운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무장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달라고 했다. 과연 그걸 막을 수 있을까?

눈을 감은 편월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자신이 광운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신 역시 전장에서의 죽음을 고집했을 게 틀림없다.

남들의 눈에야 어떻게 비치든, 무장에게는 그들만의 고집과 긍지가 있는 법이다. 어차피 재기가 어렵다면 광운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좋을 듯했다.

“갑옷을 가져다줘.”

조용히 유화에게 이른 후 편월은 밖으로 나와 버렸다. 손수 광운의 갑옷을 입혀 주고 싶었지만, 그리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피한 것이다.

빠르게 복도를 걷는 편월의 귀에 외성 쪽에서 떠들썩한 소음이 들려왔다. 막주군 선발대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3

두 번째로 위휘군의 사자를 접견하고 돌아온 가겸후의 얼굴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 그가 내세운 조건 중 단 하나만이 관철되었기 때문이다.

“전하, 너무 심려치 마시오소서. 이제 겨우 한 번의 절충이 있었을 뿐이옵니다. 이런 동맹을 체결할 때는 어디까지 여유를 가지고 대처하셔야…….”

“닥치시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여유가 있던가? 언제 상초국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판국인데, 이따위 협상으로 시간을 끌어도 좋단 말인가!”

가겸후는 호통으로 폐포자의 말을 막았다. 기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조속히 황후를 데려와야 보다 빨리 황위에 등극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아직 입 밖에 내선 안 된다. 비록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오래전부터 부리던 신하이고 장수라고 해도, 지금은 비밀을 고수해야 할 때다.

“설사 오늘 당장 상초국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우리 율천국이 일시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해상은 전선으로 봉쇄를 했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해안에도 철통같은 방어 막을 구축해 뒀사옵니다. 하오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오소서.”

가겸후의 속내를 잘 알면서도 폐포자는 엉뚱한 말만 늘어놓았다. 우선은 진정시키고 보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가겸후의 노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기에 더욱 심화가 끓었다.

“말 한번 잘하셨소. 우리 율천국의 힘만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초국이라면, 굳이 위휘군과 동맹을 맺을 필요가 뭐 있겠소? 사자로 파견된 자들을 모조리 끌어내 참수에 처하시오!”

“불가하옵니다, 전하.”

“불가하다? 좋소. 그 불가한 이유나 들어 봅시다. 만약 그 이유가 부실하다면 아무리 그대라고 해도 용서치 않겠소!”

“알겠사옵니다. 하오면 우선 사람들을 물리쳐 주시기 바라옵니다.”

가겸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사람들을 물리치라는 건 은밀히 할 얘기가 있다는 의미다.

“오늘은 수고가 많았소. 다들 물러가 쉬시오.”

폐포자의 말대로 가겸후는 주변의 사람들을 물리쳤다. 어떤 얘기가 나올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 이제 말해 보시오.”

“이번 동맹은 반드시 성사시키셔야 하옵니다.”

폐포자는 우선 결론부터 딱 잘라 내놓았다.

“게다가 전하께서 내거신 세 가지 조건 중 딱 하나만 저들이 들어줘도 만족하셔야 하옵니다.”

“뭣이? 딱 한 가지라고?”

“그러하옵니다. 그건 바로 두 번째 조항이옵니다. 즉, 장차 상초국과 싸울 때 위휘군은 모두 우리 율천국의 기치 아래 서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그건 과인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런데 어째서 유독 그 조항만이 중요하다는 거요?”

가겸후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스스로는 조건 중 첫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만약 황후 마마께서 옥새를 가지고 가셨다면, 지금쯤 옥새는 위휘군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옥새와 황후 마마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옵시는지요?”

“만약 황후가 옥새를 그대로 은닉하고 있다면?”

황급히 되물었지만, 이건 자신의 희망에 불과하다는 걸 가겸후도 잘 알고 있었다. 황후 스스로 율천국을 빠져나간 게 분명한 듯하니, 벌써 옥새는 위휘군의 편월 수중에 들어갔을 터였다.

“만약 옥새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면, 황후 마마를 돌려받아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옵니다. 하오나 만약 황후 마마께서 더 중요하시다면 지금 당장 전하의 뜻대로 사자들의 목을 베소서.”

가겸후는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황후보다는 옥새가 중요하다는 건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걸 잘 알면서도 묻는 폐포자가 얄밉기까지 했다.

“황후 마마께서 계시든 안 계시든, 옥새 따위야 있든 없든 전하께오선 황위에 등극하셔야 하옵니다. 하오니 다른 것은 양보를 하시더라도 두 번째 조건만은 반드시 관철시키셔야 하옵니다.”

여전히 말없이 가겸후는 폐포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황후 마마가 안 계시고, 옥새가 없다고 해도 위휘군으로 하여금 우리 율천국의 기치 아래서 싸우게 한다면 그건 복속이나 다름없는 것이옵니다. 만약 이 조건만 관철시킨다면, 차후 전하께서 등극하실 때 저항도 그리 심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런 뜻이었나?”

비로소 가겸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폐포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목표가 등극에 있는 이상 황후나 옥새보다는 실질적으로 위휘군이나 편월을 배하에 두는 게 좋다. 게다가 지금 위휘군에는 이 땅 위에 산재한 군벌의 절반 이상이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을 율천국의 기치 아래 둔다는 건 곧 대륙의 모든 군세의 한쪽 무릎을 꿇리는 것에 다름 아니란 의미다.

“모쪼록 이 동맹을 성사시키기 바라옵나이다. 두 번째 조건만 관철된다면, 전하의 바람은 거의 이루어지는 거나 진배없음이옵니다.”

“알겠소. 하지만 과인은 당분간 화를 낼 작정이오. 괘씸하기 짝이 없는 위휘군의 소행에 대해서 말이오.”

“지당하신 처사이옵니다.”

폐포자는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노기를 표출할 때는 너무 거칠고 과격한 주군이지만, 이처럼 뜻이 잘 통할 때도 있었다.

“하오면 지금 당장 위휘군의 정사를 부르오리까? 전하의 꾸중이 있으실 거라고 미리 귀띔을 해서…….”

“그것도 좋겠지.”

가겸후는 성급하게 대꾸했다. 화를 내겠다고 작정한 이상 늦출 이유는 없었다.

“알겠사옵니다. 곧 곽준방을 불러오겠사옵니다.”

폐포자가 물러가고, 가겸후는 생각에 잠겼다. 곽준방에게 어떤 말로 화를 낼지에 대해서였다.

‘하긴 생각할 것도 없군.’

이건 두 번째 조건을 관철시키고자 보여 주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을 터였다.

“전하, 대수성에서 긴급한 전령이 왔사옵니다.”

육우맹의 목소리였다. 곧바로 전령을 데리고 오는 듯 여러 명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가겸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수성이라면 위휘군이 주둔하는 탄금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성이다.

‘설마 위휘군이 선공을?’

순간적으로 가겸후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자신은 보기 좋게 속은 것이다. 겉으로는 상초국의 침입을 막기 위한 동맹을 제의해 놓고, 그 허를 노려 기습적으로 강국을 친다는 각본이란 말이다.

“주군이시다. 예를 갖춰라.”

육우맹이 데리고 온 병사는 후줄근하게 늘어져 있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을 터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괜찮다. 그대로 보고하도록.”

“이, 이틀 전부터 탄금성에 마, 막주군이 집결하기 시작했사옵니다.”

“숫자는?”

가겸후를 대신해 육우맹이 재빨리 물었다. 율천국의 오기총감장답게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 거론한 것이다.

“이틀 전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오만이었사옵니다. 그 후에 늘어난 숫자에 대해서는 또 다른 보고가 있으리라 생각되옵니다.”

“막주군임은 분명한가?”

“정탐했던 간인의 보고로는 확실하다고 하옵니다. 뿐만 아니라 수군도 이미 연미포 앞바다에 정박했다고 하옵니다.”

“알았다. 수고했다.”

가겸후는 간단하게 치하한 후 전령을 내보냈다. 중요한 건 탄금성의 정세이지 막주 수군의 동정이 아니었다. 그런 건 이미 위휘군 사자들의 입을 통해 모두 들었기 때문이다.

“위휘군이 군사행동을 시작하려는 게 분명할 듯하옵니다. 우리도 즉각 대수성으로 군사를 파병하는 게 시급하옵니다.”

숨도 쉬지 않고 육우맹은 단숨에 말해 치웠다. 최근 들어 자신이 조금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이런 기회에 다시 한 번 가겸후의 총애를 받아 보고 싶은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되겠지. 그렇다고 다른 곳의 군사를 돌릴 수는 없으니, 우선 해안 방비에 동원된 병사들에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영을 내리시오.”

“단지… 그뿐이옵니까?”

의아한 듯 육우맹이 되물었다. 당장 대수성에 군사를 넣어도 어찌 될지 모르는 판에, 단순히 경계 태세만을 강화하라는 영을 내린다는 건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명을 이행하시오. 해안 방비에 동원되었다지만 대수성과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오. 지금은 위휘군과의 동맹을 목전에 둔 시점이니 좀 더 지켜보도록 합시다.”

방금 폐포자에게 위휘군과의 동맹이 반드시 결성되어야 한다고 설득당한 가겸후다. 탄금성에 막주군이 들어왔다고 해서 곧바로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시는 길에 위휘군의 정사인 곽준방에게 들러 속히 오라고 일러 주시오.”

이렇게 되면 육우맹도 어쩔 수 없다. 군례를 갖춘 후 물러갈 수밖에.

곽준방은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육우맹이 나간 것과 거의 동시에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가겸후는 곽준방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아니,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화급을 다투는 전령이 또 한 명 왔기 때문이다.

처음 가겸후는 전령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급한 전갈을 받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그보다는 곽준방에게 자신의 확실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겨서였다.

그러나 전령이 수군총령 임항이 보냈다는 걸 알자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현 시점에서 수군의 동정은 가장 민감한 사안인 것이다.

폐포자의 귀띔으로 조금은 긴장하고 있던 곽준방은 하릴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가겸후는 물론 그 소식을 들은 모두를 경악케 하기에 충분했다.

내용은 이랬다.

며칠 전부터 진파구 앞바다는 해무가 자욱하게 끼었다. 미시 말경이나 되어야 겨우 맑은 하늘이 보일 지경이었다.

적인 상초국 수군은 그 해무를 이용해서 접근했다. 폐포자가 개발한 거대한 노궁에 당한 경험이 있기에 일부러 작은 쾌속선을 이용하기도 했다.

상초국 수군의 전법은 간단했다. 일단 쌍방의 배가 붙으면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는 식이었다. 그 와중에 적의 전선에 불을 질러 태워 버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일단 접근을 허용한 이상 율천국 수군엔 승산이 희박했다. 그처럼 많은 노력과 막대한 비용을 들인 배들이 속절없이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율천국 수군이 전멸을 면할 수 있었던 건 수군총령 임항의 필사적인 지휘 덕이었다. 그 바람에 절반 정도의 전력은 급하게 해안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싸움은 해안으로 번졌다. 여기서의 공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상초국 수병들은 맹렬하게 상륙을 시도했지만, 이미 해안에 방어 막을 구축해 둔 율천국 병사들도 이를 격렬하게 물리쳤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작은 쾌속선을 타고 움직이는 상초군 수군들을 해안에서 활로 공격하는 것이었으니 어려운 것도 당연했다. 미리 방어 막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상륙전이 벌어져 가겸후가 힘써 병탄한 옛 강국 땅이 순식간에 초토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결정적으로 상초국이 불리해진 건 안개가 걷히면서부터였다. 일단 시야가 확보되자 율천국 병사들이 쏘는 화살은 보다 정확하게 적병들을 맞히거나, 불화살로 괘속선을 불지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어제 하루 동안 벌어진 율천국과 상초국의 전초전인 셈이었다.

“아군의 피해는?”

침중한 어조로 가겸후가 물었다. 육전보다 해전의 패배가 훨씬 더 타격이 크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피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인이 출발했을 때는 정확하게 파악할 길이 없었사옵니다.”

황당한 답변이었다.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하고 전령으로 달려왔다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전령을 책망하지 않았다. 이 역시 전시에 아주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경황없는 싸움이었다는 의미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싸움의 시작과 동시에 한 번, 중간 즈음에 한 번, 그리고 끝났을 때 아군의 전공과 피해를 파악해 보내는 게 상례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전령을 기다려야 하는가?”

“그보다 전하, 바다에 안개가 짙게 낀다면 당분간 적들의 공격은 계속될 것이옵니다. 하오니 그에 대한 대비가 시급한 줄 아뢰옵니다.”

폐포자가 가겸후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또한 위휘군과의 동맹도 조속히 타결 짓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시급한 건 바다만이 아니오. 지금 탄금성에는 연일 막주군이 밀려들어 오고 있소이다. 이 점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육우맹이 폐포자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위휘군과의 동맹을 거론한 것에 대한 불만이 역력한 음색이었다.

“이미 동원된 병력이나 전선을 빼고, 우리에게 남은 건 얼마나 되오?”

“곧 진수할 만한 전선이 칠천여 척, 한 달 이내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약 일만여 척에 달하옵니다. 수군은 대기 중인 병사가 약 오만, 훈련에 임하는 자가 약 삼만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물론 병사들은 해전에만 대비한 게 아니옵니다. 육전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끔 훈련을 시켰사옵니다.”

폐포자가 막힘없이 보고했다. 평소 율천국군의 사정에 대해선 소상하게 파악해 두었다는 의미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옵니다. 율천국 본국은 물론이고, 이번에 병탄한 허주와 강국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모두 합하면…….”

“그만!”

가겸후가 폐포자의 말을 막았다. 율천국이 총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굳이 듣지 않아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익히 알고 있다.

“폐포자, 바다의 적을 칠 수 있는 방법은?”

“적의 정확한 병력을 알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된 작전을 세울 수 없사옵니다. 하나 사태가 급박한지라 한 가지 계책을 말씀 올립니다. 우선 속히 위휘군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수군으로 먼 바다에 정박해 있을 상초국 수군의 배후를 치도록 하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그 후에 곧 진수할 우리의 전선 칠천여 척이 가담한다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 듯하옵니다.”

“흐음, 막주의 수군이 벌써 연미포까지 와 있다니 당장 상초국 수군의 배후를 쳐도 늦지 않겠군. 좋소. 지금 당장 사자를 만나 동맹을 수락하겠다고 하겠소. 또한 우리의 전선도 조속히 투입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시오.”

몇 가지 사안이 있으면, 그중 어느 것이 더 중대한지에 대한 판단과 결단이 누구보다 빠른 가겸후였다. 게다가 그 실행력 역시 무섭도록 치열하다. 장수들은 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존명!”

장수들은 모두 물러갔고, 폐포자만 남았다.

“조금 전에는 과인이 막주 수군의 동원이 늦지 않겠다고 했소이다만, 합진성까지 사자가 돌아가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지 않겠소?”

“위휘군에도 간인들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늦어도 내일쯤이면 이 소식이 들어갈 터, 만약 위휘군에 소인 같은 자가 한 명 있다면 당장 수군의 진발을 명할 것이옵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시오?”

“처음 위휘군이 창설되었을 때만 해도 그들은 그저 싸움에만 강했을 뿐 군사의 진퇴에 절도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윤주성과 합진성을 장악하면서 갑자기 움직임에 한 치의 틈도 찾아볼 수 없었사옵니다. 소인이라고 해도 그보다 더 나은 병법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제의해 온 동맹에 관한 것도 함정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야 된다는 말이오?”

“그리 생각되지는 않사옵니다. 막주에 군사를 넣은 것이야말로 전하의 성격까지 꿰뚫어 본 용병이라 사료되옵니다.”

“과인의 성격까지?”

“그러하옵니다. 전하의 자부심과 과격함이라면 사자들의 목을 벨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서, 막주성에 군사를 넣어 시위를 벌인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자로군. 그래도 사자들에게 확답은 줘야겠지. 불러오시오.”

“존명.”

폐포자는 조용히 허리를 숙인 후 물러갔다.

아직은 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누그러지지 않은 창일성에 돌연 후끈한 열기가 감돌았다. 각 전선에 나가 있는 지휘관에겐 연방 전령들이 내달렸고, 율천국 동쪽 바다에 마련된 조선창에도 불같은 독촉이 떨어졌다.

바야흐로 율천국에선 벌써 겨울이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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