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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중비화閨中秘話 (62/66)

규중비화閨中秘話

1

합진성의 내전은 오늘도 음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안주인인 증화강의 기분이 밝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건 증화강을 탓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고 자란 모국인 강국이 망했고, 그 아비인 증두신까지 죽었으니 그녀 아닌 어느 누구라도 기분이 좋을 턱이 없는 일이다.

그 바람에 고역을 치르는 건 유화였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증화강을 일견 달래며 일견 감시를 해야만 했다. 행여 그녀가 자결이라도 해 버리면 무슨 낯으로 편월을 대한단 말인가. 거기다 황후의 간병에도 매달려야 했다. 의생들의 말에 의하면 특별히 다치거나 중병이 든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가끔씩은 의식이 회복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눈만 빤히 뜨고 있을 뿐 입은 전혀 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접근하면 흠칫흠칫 놀라기만 할 따름이었다.

“휴우.”

유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황후는 의식불명이었고, 증화강은 식사를 거부했다.

‘저래서는 얼마 버티지 못하실 텐데.’

증화강의 식사 거부는 유화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이었다. 억지로 떠먹여도 보지만, 도로 게워 내기만 할 뿐 도무지 음식을 삼키지 못했다.

당연히 지금 증화강의 모습은 피골이 상접했다는 말이 어떤 거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되는데.’

그러나 마음으로만 안달을 낼 뿐, 방법은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증화강 본인이 마음을 강하게 먹지 않고는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또 한차례 한숨짓던 유화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증화강에게 가서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오늘도 증화강은 그녀의 거처에 부모 형제들의 위패를 모셔 놓고 향을 사르고 있었다. 그 향 내음이 어떤 불길함을 예고하는 것 같아 유화로선 좋아할 수가 없었다.

“대부인…….”

마치 청자처럼 파리한 안색으로 위패 앞에 앉은 증화강을 유화가 나직이 불렀다.

대답이 있을 턱이 없었다. 증화강은 안에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쩌자고 식음을 전폐하시옵니까? 주군께서 귀성歸城하시면 진노하실 게 분명하옵니다. 하오니 이 미음이라도 조금 드시옵소서.”

유화의 말투는 지극히 공손했다. 어떤 경우에도 증화강 앞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편월의 정실부인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그렇다고 후처가 된 것도 아니었다. 이 어정쩡한 신분이 항상 그녀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화는 강한 성격의 여인이었다. 파양주에서 탈출하여 막주로 향할 때, 죽영과 더불어 병사들 사이에 섞여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들의 수발에 나섰을 정도였다.

유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바야흐로 그 강한 성정이 지금 발휘되려는 참이었다.

“대부인, 어찌 그리 마음을 약하게 잡숫고 계신지요? 눈을 뜨고 앞을 보시오소서. 저 위패들이 지르는 고함이 들리지 않으시옵니까?”

이 말이 증화강의 심중을 관통했다. 그녀의 어깨가 움찔 출렁거리더니 이내 반짝 눈을 떴다.

유화의 말이 사실인 걸까? 그 순간 증화강의 귀에는 위패가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아……!”

자신도 모르게 미약한 비명을 지르며, 증화강은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보였다. 처자식을 죽여야 했던 아버지 증두신의 회한에 찬 모습이 보였고,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가는 가족들의 시신이 감은 눈꺼풀 속에 선명하게 투영되었다.

“피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귀를 열고 눈을 뜨셔서, 저들의 원통함을 마음에 새기셔야 할 일이옵니다.”

이왕에 내친걸음이다. 유화는 더욱 매몰차게 증화강을 몰아붙였다.

“지금은 심약하게 곡기를 끊고 있을 때가 아니옵니다. 원수를 갚아야지요. 조속히 기운을 차려 주군을 닦달해서라도 율천국을 쳐야 할 것이옵니다. 위패 앞에 사르는 이따위 향 한 자루로는 비명에 가신 분들에 대한 공양이 되지 못하옵니다.”

“그, 그만!”

참다못한 증화강은 마침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유화의 말을 막았다.

“모쪼록 마음을 굳건히 가지소서. 대부인께서는 이제 곧 휘국을 건국하실 분의 정실이옵니다. 보다 강한 마음으로 내전을 단속하셔야 할 줄 아옵니다.”

비로소 유화는 목소리를 떨궜다. 자신의 말에 강한 거부감을 보임으로써 증화강이 새로운 마음을 먹었다는 걸 깨달은 까닭에서였다.

“미음을 좀 쑤어 오겠사옵니다.”

정중한 예를 갖춘 후 유화는 조용히 물러 나왔다.

“휴우…….”

증화강의 거처를 빠져나온 유화는 다시금 긴 한숨을 베어 물었다. 물에라도 빠진 사람처럼 전신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그녀는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주방으로 가서 증화강이 먹을 미음을 손수 쑤기 위해서였다.

“작은 부인. 작은 부인.”

유화가 채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내전에서 부리는 시녀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끼면서도 유화는 부드럽게 물었다.

“황후 마마께서…… 황후 마마의 환우가…….”

“허둥대지 말고 소상히 말해 보아라.”

더 듣지 않아도 병상에 있는 황후의 상태가 위중해졌다는 걸 유화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껏 하루에도 몇 번씩 있어 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황후 마마의 숨결이 고, 고르지 못하옵니다.”

“숨결이?”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비록 혼절해 있을 때에도 황후는 숨결만은 고르게 내쉬고 있었던 것이다.

유화는 황급히 황후의 침전으로 향했다. 그러다 갑자기 발길을 세우고 시녀에게 일렀다.

“나 대신 주방으로 가서 미음을 쑤어 대부인께 올려라.”

“하지만 대부인께오선 음식을 전혀…….”

“오늘은 드실 게야. 그러니 서둘러라.”

“예, 작은 부인.”

시녀를 주방으로 보낸 후, 유화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만약 황후가 이 합진성에서 죽는다면 천하엔 뒷말이 무성하게 나돌 게 뻔하다. 어쩌면 가겸후는 편월이 동생을 죽였다고 트집을 잡아 침략을 감행할지도 모른다.

‘그리되게 둘 수는 없다.’

유화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대로 황후가 죽더라도 그건 절대로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해선 안 된다. 가짜 황후를 내세우고, 그 시신은 부리던 시녀 하나가 죽어 나간 걸로 가장해서 처리할 결심이었다.

결정을 내린 유화는 다시 황후의 침전으로 향했다. 증화강의 앞에서 물러 나올 때와는 달리 안정된 걸음걸이였다.

“작은 부인을 뵈옵니다.”

황후 곁에서 간병하던 의생들과 시녀들이 유화에게 예를 올렸다.

“환우가 좀 어떠시오?”

유화는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의생에게 물었다. 말투도 증화강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작은 부인’이란 호칭에 걸맞은 언행을 하려는 것이었다.

“여전히 이렇다 할 증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숨이 고르지 못하신데, 저희들로서도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돌아가실 정도로 위중하시오?”

재차 묻는 유화의 말에 의생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 확답을 내지 못했다. 그만큼 황후의 상태가 까다롭다는 의미였다.

침상에 누워 있던 황후의 숨결이 돌연 거칠어졌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크게 들이쉬는가 하면, 아주 깊이 내쉬기도 했다.

“마마.”

안타까이 부르면서 유화는 침상으로 다가가 황후를 살폈다. 그녀의 안색은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애당초 율천국 공주로 태어난 여인이었다. 그러다 비운의 황제를 만나 황후가 되었으니, 그녀의 일평생은 구중심처에서만의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궁궐을 벗어나고, 나고 자란 율천국을 떠나 이곳 합진성까지 왔다. 그간의 고초가 얼마나 힘겹고 모질었다는 건 지금 그녀의 상태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유화는 침상에 놓인 수건을 들어 황후의 이마에 맺힌 납빛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쾌차하셔야 하옵니다. 그러지 못하신다면 천녀賤女의 처리에 대해 원망을 품으실 것이옵니다.’

유화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그녀로서는 황후가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어떤 형태로든 편월에겐 이득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 기원이 통한 것일까. 황후의 숨결이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의생이 재빨리 황후의 맥을 짚었다. 차차 고르게 되어 가는 그녀의 숨결에 비해 의생의 표정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떻소?”

유화의 질문에 의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유화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시녀의 급한 전갈을 받고 이 방에 들어왔을 때의 황후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호흡이라도 안정되었으니 다른 일을 떠올릴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변화가 생기면 다시 찾아 주시오.”

의생들과 시녀들에게 당부의 말을 한마디 남긴 후, 유화는 황후의 침전을 빠져나왔다. 때마침 조금 전에 미음을 쑤라고 보냈던 시녀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대부인께서는 미음을 좀 드셨느냐?”

“거기까진 확인하지 못하였고, 대부인께서 작은 부인을 찾으십니다.”

“나를?”

“네. 서둘러 모셔 오라는 분부셨습니다.”

“알겠다.”

대부인인 증화강이 찾는다는데 머뭇거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화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찾아 계시옵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유화를 증화강은 잠깐 동안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증화강에게도 유화는 거북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도 연상이고, 자신보다 먼저 지아비인 편월과 알고 지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앉으세요. 듣자니 황후 마마의 환우가 위중하시다던데, 좀 어떠시던가요?”

증화강의 질문을 받은 유화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과연 조금 전까지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마음이 상해 있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얘긴가 하고 미심쩍어서였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화는 증화강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파리한 안색에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확연히 달라진 게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눈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빛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죽어 버린 눈이었다면, 지금은 무언가를 처절하게 희구하는 살아 번들거리는 눈이었다.

‘됐다. 대부인께서 회생하셨어.’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유화는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한때 숨이 고르지 않아 긴장을 했사온데, 이제 좀 진정이 되셨사옵니다. 하오니 대부인께서도 보다 많은 음식을 섭취하시어 조속히 회복하시길 기원드리겠나이다.”

“출정하신 주군의 소식은 듣고 계신가요?”

어쩔 수 없이 증화강도 지아비를 모시고 있는 아낙이다. 편월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유화는 가슴이 메는 걸 느꼈다. 편월의 안위를 묻는 증화강의 심중을 충분히 알 것 같아서였다.

지금의 증화강에게 누가 있는가? 친정인 강국은 멸망했고, 그때 그녀의 부모 형제들은 모두 죽었다. 이제 그녀의 한숨을 달래 줄 사람도, 눈물을 닦아 줄 사람도 편월뿐인 것이다. 그의 안부를 묻는 그녀의 말이 더욱 애틋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전장에서 무슨 변고를 당하신 건 아닌지…….”

“그럴 리 없사옵니다. 주군께오선 갓난아기 때부터 전장을 누비신 분이옵니다. 누구보다 전쟁을 잘 아시니, 변고를 당할 만큼 위중한 지경엔 빠지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좋겠어요, 언니는…….”

“네?”

다소 엉뚱한 증화강의 말에 유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셨다지요. 그러니까 그런 신뢰를 가지고 계시나요?”

‘아아.’

유화는 속으로 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증화강은 자신과 편월 사이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었다.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유화는 매사에 조심을 거듭했다. 언행에 자그마한 빈틈이라도 있으면 곧바로 편월과 증화강 사이에 끼어들려는 것처럼 보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은 방금 들었던 증화강의 한마디에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그토록 조심했는데, 그토록 삼갔는데…….

“대부인. 두 장군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며 배알을 청하옵니다.”

밖에서 들려온 시녀의 목소리는 그대로 유화에겐 구원이었다.

“무슨 일인지 그대가 대신 여쭈어 보고 오너라. 아직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힘은 없지만 매서운 어투로 증화강은 시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만나기 싫은 게 아니라 만나러 나갈 기력이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게다.

“천녀가 대신 만나도 될는지요?”

유화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내전에까지 통보할 두건득이 아니란 걸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아니, 편월이 출정한 이후로 합진성의 수비 장수로 남은 두건득은 내전에 어떤 전갈을 주기는커녕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전 같은 건 없는 줄로만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 두건득이 지금 긴히 알릴 게 있다고 한다. 유화의 가슴은 왠지 모르게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고, 급기야 증화강 대신 만나 보겠다는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한차례 흘낏 쳐다봤을 뿐, 증화강은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두건득은 분명 대부인인 자신을 만나고자 했다. 유화가 나설 일이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유화는 나섰고, 그건 대부인인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라고 증화강은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릴 기력이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말릴 수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이 편월의 정부인이라지만,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는 결코 아니다. 그 점에서는 유화가 더 나을지도 모르고, 바로 그게 증화강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세요.”

파리하게 시든 음색으로 증화강은 허락하고 말았다. 시녀를 통해 아는 것보다는 낫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감사하옵니다, 대부인.”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유화는 증화강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외전으로 통하는 복도를 마구 달렸다.

두건득은 내전과 외전을 구분하는 중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인께서는?”

증화강이 아닌 유화가 나오자 두건득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는 지금까지 증화강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몸이 편치 않으셔서 천녀에게 대신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하긴 작은 부인께 아뢰어도 상관이 없겠지. 주군께서 내일 귀성하신다는 전령이 왔소이다.”

“네? 내일?”

“그렇소. 한데 이번 전투에서 주군께서 부상을 당하신 듯하오.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출혈이 많았다고 하더이다. 이 점 유념하셔서 주군의 간호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해 주시오.”

털썩!

두건득이 말하는 사이 유화는 바닥에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 버렸다. 어지간한 부상이라면 표도 내지 않을 편월이었다. 내전에 간호를 명할 정도로 많은 피를 쏟았다면 엄중한 부상을 당한 게 분명하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작은 부인, 정신 차리시오. 주군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지 않소!”

두건득이 황급히 유화를 부축해 일으켰다.

“작은 부인께서 마음을 단단히 다지셔야 할 것이오. 황후께서도 환우가 위중하시지 않소이까. 이럴 때 작은 부인마저 허둥거리신다면 누가 있어 주군을 간호할 것이오. 그러니 힘을 내시오.”

“알았어요.”

유화는 아랫배에 지그시 힘을 줬다. 두건득의 말 그대로였다. 내전의 주인이랄 수 있는 증화강이 그 모양이니 편월의 간호를 맡긴다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또한 내전에는 황후도 자리보전하고 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어깨에 걸린 책임인 것 같아 유화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켜야만 했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소. 이번에 주군과 막주의 광운 장군이 서로 만나신 모양이오. 광운 장군도 같이 이리로 올 모양이오.”

“광운 아저씨께서…….”

유화에게 있어 광운은 언제나 반가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유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자신이 막주를 떠나 편월에게 올 때 광운의 상태를 떠올린 까닭에서였다.

그때 광운은 의생들도 재기가 힘들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죽영을 잃은 심적 충격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거의 모두 황폐해진 것이다.

그런데 광운이 내일 편월과 더불어 이 성에 온다고 한다. 그건 그가 막주에서부터 여기까지 전쟁을 치르면서 왔다는 의미이고, 그의 몸 상태를 잘 아는 유화로서는 반가움보다 걱정이 더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전갈을 드렸으니 소장은 이만 물러가겠소.”

볼일을 마친 두건득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내전 근처에 머무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는 태도였다.

한동안 선 채로, 멀어져 가는 두건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화도 이윽고 몸을 돌렸다. 편월이 내일 돌아온다면 맞을 준비를 해야 하고, 그 일을 할 사람도 자신밖에 없기에 지금부터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2

편월이 귀성하기로 한 날이 밝았다. 성 안팎은 깨끗하게 비질이 되어 있었지만, 내전은 아직도 술렁거렸다.

지난밤을 꼬박 새우면서 시녀들을 지휘해 편월을 맞을 준비를 한 유화는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아직도 미진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특히 황후와 대부인의 신병이 신경 쓰였다. 황후야 그렇다 쳐도, 증화강의 초췌한 모습을 보면 편월이 뭐라고 할 것인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유화는 아직 편월이 엄중한 부상을 당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현재 증화강의 상태로 과연 견뎌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유화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한 번 내전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특히 그녀는 황후의 침전을 세심하게 살폈다.

의외로 오늘 황후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새벽까지는 혼수상태였는데 지금은 일어나 탕약을 들고 있었다.

“마마.”

유화가 나직이 부르자 의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된다는 의미였다.

“누구냐?”

탕약 그릇을 물리친 황후는 유화에게 물었다. 오랜 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던지라 자신이 있는 곳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 합진성 내전의 작은 주인이옵니다.”

의생이 대신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화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합진성? 그럼 여기가 편월 장군이 있는 곳인가?”

황후의 반말은 자연스러웠다. 율천국의 공주로 태어났으니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을 부리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그렇사옵니다. 이제 곧 돌아오실 겁니다.”

“주인 없는 곳에서 내가 너무 많은 폐를 끼치는 것 같군. 편월 장군이 돌아오시면 내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시게.”

“알겠사옵니다.”

“잠시 눕고 싶네. 다들 물러가 있도록 하게.”

“예, 마마.”

물러가란다고 해서 의생까지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유화는 공손히 예를 갖춘 후 시비들을 거느리고 황후의 침전에서 물러 나왔다.

다음으로 유화가 들른 곳은 증화강의 거처였다. 이제부터는 편월도 머물게 되겠지만 말이다.

“좀 어떠시옵니까, 대부인?”

“괜찮아요.”

증화강의 대답은 또렷했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엔 핏기가 없었고, 앉아 있는 것조차 힘이 드는지 이마엔 팥알만 한 땀이 가득했다.

“좀 쉬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아니에요. 주군께서 오시는데 누워 있을 수는 없겠죠. 그나저나 수고 많으셨어요. 밤을 꼬박 새우신 것 같더군요.”

증화강은 당당해지려고 노력했다. 돌아온 편월은 유화만 총애할지도 모른다. 질투는 하지 않되, 정실부인으로서의 위치만은 확고하게 장악하고 싶었다.

“당치 않으시옵니다. 마땅히 천녀가 해야 할 일이옵니다.”

“그렇지 않아요. 의당 내가 할 일이지만, 내 몸이 이러니… 주군을 맞는 것도 언니가 대신 해 주세요.”

“아니옵니다. 주군은 마땅히 대부인께서 맞으셔야죠. 조금 쉬시면 기운이 나실 것이옵니다. 성문까지는 나가시지 않더라도, 중문에서 주군을 맞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좀 쉬소서.”

유화는 거절하는 증화강을 부축해 침상에 눕혔다. 그녀는 마른 짚단처럼 가볍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유화는 시녀들에게 당부했다.

“주군께서 오시면 우선 연회에 참석하실 게다. 그 연회가 파할 즈음에 대부인을 모시고 중문으로 나가도록 해라. 그 전까진 편히 쉬시게 하고.”

“알겠사옵니다.”

시녀들은 공손히 대답했다. 기실 그녀들은 정실인 증화강보다 유화를 더 두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강한 성정 탓이었다.

“다시 한 번 내전을 돌아보겠사옵니다.”

증화강의 거처를 빠져나온 유화는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연회 준비도 서둘 겸, 정신을 차린 황후가 먹을 음식도 준비해야 한다. 증화강의 것은 물론이고.

주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숙수熟手들은 연방 음식을 만들어 냈고, 시녀들은 그 음식을 일사불란하게 접시에 담는 중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화는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주방은 더 이상 지시하지 않아도 무탈하게 준비할 것 같았다.

다음으로 유화의 발길이 향한 곳은 외전으로 통하는 중문이었다. 병사 한 명과 가장 어린 시녀 한 명을 대기시켜 편월의 정확한 귀성 시간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려 뒀기에 확인차 가는 길이었다.

편월이 돌아올 때 유화는 성문까지 마중 나갈 생각이었다. 작은 부인으로 불리는 신분으로선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지만, 그녀는 괘념치 않기로 했다. 오랜 전쟁에 시달린 병사들에게 가장 큰 위안이 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기든 지든 전쟁에는 항상 고통이 따른다. 패배한 병사들이 겪는 고초야 언급할 것도 없고,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는 병사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아픔은 있게 마련이다.

그때 가장 위안이 되는 건 가족이나 친지들 그리고 아는 사람들의 웃으며 반겨 주는 얼굴들이다. 그걸 보며 병사들은 비로소 이겼다는 것과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파양주에서 탈출할 때 상림호의 군세에 섞여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싫도록 봤던 광경이었다.

“작은 부인을 뵈옵니다.”

“연락은 없었느냐?”

예를 갖추는 시비에게 유화는 빠른 어조로 물었다. 지금 가장 시급히 알아야 할 것은 편월의 정확한 귀성 시간이었다.

“아직…….”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시녀는 주눅이 들어 말을 맺지 못했다. 성에 들어와 일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유화의 무서운 성정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 온 탓이었다.

“그러냐. 대기하고 있다가 연락이 오는 대로 곧장 알려야 하느니라.”

“알겠사옵니다.”

다시금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시녀를 뒤로하고 유화는 내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뢰오!”

외전 쪽에서 커다란 고함이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유화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지시를 내려 뒀던 병사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뢰오. 지금 막 두 장군께서 주군을 영접하러 나가셨습니다. 한 시진 이내에 주군께서 귀성하실 듯하옵니다.”

병사는 중문 밖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유화에게 보고했다.

“알겠네. 수고가 많았네.”

병사의 노고를 치하한 후, 유화는 재빨리 주방을 향해 걸었다. 가장 먼저 시행해야 할 건 연회의 준비다. 병사들은 외성에 따로 마련된 장소에서 음식을 들겠지만, 장수들은 내성 성주의 거처에 모여들 게 뻔하다.

‘부족하지 않을까?’

유화는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이제 곧 편월을 만난다는 기대감과 장수들의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음식은 백 명분을 준비하라고 해 뒀다. 위휘군과 막주군, 곽가군에 배속된 장수들만도 얼추 그 정도는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모자랄 것만 같았다. 음식이 남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도 있지만, 모자란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한 시진 내로 주군께서 귀성하시네. 숙수들은 오십 명분의 음식을 더 만들어야겠네.”

주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유화는 숙수들에게 고함을 지르다시피 목소리를 높였다.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며 내는 소음 탓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가 없었다.

분명 무리한 지시였다. 음식은 숙수들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재료를 들여와야 하고, 그걸 다듬어야 한다.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히 숙수들 사이에서 불평을 토로하는 자도 나왔다. 그들은 축시부터 불려 나와 지금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 쉰 명분이나 더 추가하라니 짜증이 치밀 만도 할 터였다.

그러나 숙수들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날도 아닌 성주이자 주군인 편월이 오랜 전쟁 뒤에 돌아오는 날이다. 그보다 더한 양의 요리를 하라고 해도 군말 없이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럼 부탁하겠네.”

일러두고 유화는 다시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성문으로 마중을 나가기 전에 황후와 증화강의 상태를 한 번 더 살펴 두려 함이었다.

먼저 황후의 침전부터 들렀다. 의생이 잠이 들었다면서 물러가라고 했다.

증화강의 거처에서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쉬고 있으리라 여겼던 그녀가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몸치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인, 좀 쉬시지 않으시고요?”

아직 편월은 성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거기다 연회가 파하면 해가 넘어간 뒤가 될 공산이 컸다. 지금부터 성장하고 기다리자면 여간 고역이 아닐 터였다.

“연회가 파할 때쯤에 알려 드리겠사옵니다. 그때 준비를 하셔도 늦지 않으실 텐데…….”

“아니에요. 주군께서는 전쟁을 치르고 개선하시는 거예요. 다소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편하게 맞을 수는 없어요.”

증화강은 완강했다. 그것도 정실의 위치를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이라면, 보는 사람이 눈물짓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것이라 해도 좋았다.

유화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성문까지 편월을 마중 나가겠다는 생각도 버렸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증화강의 모습은 온몸으로 그걸 저지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광운 아저씨는 만날 수 있겠지.’

편월을 만나려면 그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다. 그 전에는 광운을 만나는 게 고작일 터였다.

물론 광운이라고 해서 반갑지 않을 턱이 없다.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서서 탈이었지만.

“언니는 성문까지 마중을 나가시겠죠?”

“아, 아니옵니다. 어찌 제가 감히…….”

갑작스럽게 던져진 증화강의 질문에 유화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양하실 것 없어요. 언니가 나 대신 성문까지 나가 주군을 맞으세요.”

유화는 대답 대신 그저 고개만 살짝 숙였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다.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마중을 나가고 싶다는 감정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이성과의 싸움을 유화는 아직도 명쾌하게 매듭짓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준비는 모두 끝났나요?”

“예.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해 준비해 뒀사옵니다.”

“그래요. 주군의 취향은 언니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의당 내가 할 일이었는데…….”

이번에도 유화는 말을 잃었다. 편월의 취향은 자신이 더 잘 알 거란 대목에서 통렬한 야유를 느낀 탓이었다.

“천녀는 이만 물러가옵니다. 모쪼록 무리는 하지 마시기를…….”

“그래요. 언니도 준비할 게 많겠지요.”

유화는 묵묵히 증화강의 거처에서 물러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한숨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기실 유화는 편월이나 광운을 맞기 전에 자신도 몸단장을 하려고 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인다면 두 사람도 가슴이 아플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증화강의 마지막 말은 유화로 하여금 몸단장까지 포기하게 만들었다. 무섭게 메말라 있어 누구의 눈에도 곱게 보이지 않을 그녀에 비해 자신이 더 예쁘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래도 목욕은 하고 옷은 갈아입어야 한다. 지난밤을 꼴딱 새우며 준비하느라 전신이 땀과 먼지 투성이였다.

유화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한숨은 증화강의 입에서도 새어 나왔다. 동경에 비친 자신은 아무리 봐도 한심한 모습이었다.

‘언니는 어떻게 그리 강할 수 있을까?’

증화강은 유화의 모든 게 부러웠다. 그 강하고 활달한 성격이, 지칠 줄 모르는 육체의 건강함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보다 훨씬 편월과 친밀한 점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런데 내 꼴은?’

다분히 정략에 의해 혼인했고, 그 탓인지 몰라도 남편인 편월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나타난 유화는 결정적인 쐐기가 되고 말았고.

그래도 친정인 강국이 대륙의 열강으로 버티고 있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아버지가 그토록 노심초사하며 지키고자 노력하는 가문의 기업을 보존하는 데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탠다고 자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친정인 강국이 망하고, 가족들은 모두 죽어 버렸다. 증화강으로선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의지처까지 모두 잃은 셈이었다.

그건 확실히 위축되는 일이었다. 편월은 물론 위휘군 무장 전체와, 심지어 내전에서 부리는 하녀들과도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곡기를 끊었다. 표가 나는 자결은 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라도 목숨을 끊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어제 유화에게 한마디 들었다. 그게 가슴을 도려내는 비수가 되었고, 급기야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어떻게든 가족의 원한은 갚아야만 한다고…….

‘그 목적을 달성해 줄 분이 오늘 돌아오신다.’

편월은 현재 증화강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애정이야 있든 없든 아내로서 그에게 부탁할 작정이었다.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죽으려고 했던 몸이다. 거절당했을 때 자결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증화강은 창피함을 느꼈다. 어째서 자신은 죽음부터 먼저 생각하는지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언니처럼 될 수는 없을까?’

또 한 번 증화강은 유화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그래 놓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시기와 질투에 가깝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이래서는 지게 되는 것임을 증화강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은 그저 듬직하게 자리를 잡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초조한 것은 정실인 자신이 아니라 후처도 첩도 아닌 유화일 게다.

그걸 알면서도 증화강은 한사코 초조해졌다. 어떨 땐 차라리 자신과 유화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훨씬 속 편했을 거라고 여기기도 했다.

“미음을 좀 쑤어다 주겠느냐?”

머리를 매만지는 시녀에게 증화강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아찔한 현기증이 덮쳐 왔기에 무엇이든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알겠사옵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재빨리 대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증화강이 먹을 것을 찾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잠깐만.”

돌연 증화강은 막 방을 빠져나가려는 시녀를 불러 세웠다.

“미음을 쑤어 올 게 아니다. 듣자니 병사들이 전장에서 따로 먹는 음식이 있다고 하더구나. 그걸 좀 가져오너라.”

“대부인, 그런 거친 음식은 아직 삼가시는 게…….”

“아니다. 주군도, 또 주군을 위해 싸우는 병사들도 모두 먹는다고 하지 않느냐. 나 또한 그게 어떤 맛인지 알아 둬야겠어.”

증화강은 고집을 부렸다.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내뱉자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게 들었다.

“알겠사옵니다.”

어쩔 수 없이 시녀는 복명을 하고 물러갔다. 증화강이 먹지 않아서 문제지, 뭐든 먹겠다고 하면 가져다주면 된다. 먹고 나서 탈이 나는 게, 굶어서 탈 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 끝났사옵니다.”

머리 손질을 끝낸 시녀가 공손히 한쪽으로 물러났다.

증화강은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스스로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비쩍 마른 여인이 거기 있었다.

한차례 크게 어깻숨을 몰아쉰 증화강은 동경에서 시선을 떼고 말았다. 또다시 한심하고 비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대부인…….”

시녀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증화강을 불렀다. 뭔가 꺼내기 힘든 얘기를 할 기색이었다.

증화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괴감에 사로잡혀 시녀가 하는 얘기도 듣지 못했다.

“대부인, 주군께서 부상을 당하셨다고…….”

“뭐라고?”

아무리 넋을 놓았다고 해도 편월이 부상당했다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턱이 없다. 깜짝 놀란 증화강은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하지만 증화강은 휘청거리며 탁자를 짚었다. 조금 전보다 더 강한 현기증으로 인해 눈앞이 캄캄해졌기 때문이다.

“대부인!”

경악한 시녀들이 달려와 증화강을 부축했다.

“어서 침상으로 모셔라, 어서.”

비교적 나이 든 시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다. 의자에, 의자에 다시 앉혀 다오.”

“그러다 쓰러지시옵니다. 그러니 침상에 누우소서.”

“아니라고 하질 않느냐!”

증화강의 언성이 높아졌다. 힘이 없어 뾰족하게 갈라졌지만, 시녀들을 제지하기엔 충분했다.

여기서도 증화강은 약간의 자격지심을 느꼈다. 만약 유화였다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어도 시녀들이 말을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증화강은 조금 전에 얘기했던 시녀에게 물었다.

“그보다, 어서 고하여라. 주군께서 부상을 당하셨다니? 중상이라고 하시더냐?”

“소상히는 모르옵니다. 다만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을 뿐이옵니다.”

“가거라. 가서 주군의 상태가 어떠신지 소상히 알아 오너라.”

증화강은 허둥거렸다. 편월은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만약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재기하지 못한다면, 남은 그녀의 삶까지도 온통 먹빛으로 물들고 말 것이다.

시녀는 곤두박질칠 것처럼 서둘러 달려갔다. 그녀로선 이처럼 강경하게 말하는 증화강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시녀는 곧장 되돌아왔다.

“대부인, 주군께서 외성의 정문을 통과해 입성하셨다고 하옵니다.”

“뭐라고? 벌써 입성을 하셨어?”

증화강은 다시 몸을 일으켰고, 시녀들이 황급히 부축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중문까지 나가서 주군을 맞아야지.”

“주군께선 먼저 연회에 참석하실 겁니다. 내전에 드시기까진 아직 시간이 많사옵니다. 진정하시고, 좌정하시옵소서.”

나이 든 시녀가 증화강을 말려 다시 의자에 앉혔다.

증화강은 순순히 따랐다. 그녀의 생각에도 편월이 곧바로 내전으로 올 것 같지 않았다.

“지금 시각을 알아보아라.”

왜 시간이 궁금했는지 증화강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냥 무심코 뱉어졌을 뿐이다.

편월이 합진성에 돌아온 시각은 오시를 넘긴 때였다.

3

연회가 시작되자 유화는 다시 분주해졌다. 먼발치에서나마 편월을 본다든지 광운을 찾아간다든지 하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편월이나 광운을 전혀 보지 못한 건 아니었다. 부족한 것이 없는지 간간이 연회장을 엿볼 때마다 얼굴만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색까지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었다. 편월이든 광운이든 그저 부상을 당했다니까, 또 한 명은 심하게 위태로울 때 그 곁을 떠났으니까 유화의 눈에는 불안스럽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유화는 오래 지켜볼 수 없었다. 연회는 여기서만 베풀어지는 게 아니었다. 외성의 드넓은 연무장이나, 심지어 성 밖에도 병사들이 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그 재료만은 챙겨서 보내 줘야 한다. 정말이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게 바쁜 유화의 발길을 시녀 한 명이 멈춰 세웠다.

“작은 부인, 대부인께서…….”

“대부인께서 왜?”

유화는 재빨리 재우쳐 물었다. 혹시라도 증화강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대부인께서 한사코 연회장으로 나오시겠답니다.”

“뭐라고?”

언성을 높였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한 성의 성주 부인은 연회에 참석할 자격이 충분하다. 그녀로서도 오랫동안 전쟁에 지친 병사들을 위로한다는 명분을 세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증화강의 상태였다. 강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가 먹은 건 어제의 미음뿐이었다. 도저히 몸을 움직일 상태가 아니란 얘기다.

설사 몸을 움직일 수 있다 해도 나아질 건 없다. 부상을 당한 편월이 그처럼 여윈 증화강을 본다면 편한 마음이 들지는 않을 터였다. 두 사람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이다.

“대부인께오선 주군께서 부상당하신 걸 알고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말려야 하느니라. 내가 곧 가겠다. 먼저 가서 대부인을 말리고 있거라.”

“예, 작은 부인.”

시녀를 보낸 후 유화는 다시 주방으로 달렸다. 거기서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후 곧바로 증화강의 거처로 향했다.

증화강은 시녀들과 실랑이 중이었다. 몸이 따르지 않는 마음뿐인 고집이었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다.

“대부인, 어찌 이러시옵니까? 주군께서 내전으로 드실 때까지 쉬시지 않으시고요.”

“어째서 내게 말을 해 주지 않았나요? 주군께서 심한 부상을 당하셨다면서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대부인께서 자중을 하셔야지요. 지금 대부인께서 연회장에 가신다면, 주군께옵선 놀라실 것이옵니다. 부상 끝에 그런 충격을 받으신다면 더욱 위중해지실지도 모르옵니다.”

증화강은 말이 없었다. 어째서 유화 앞에만 서면 이렇게 위축되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주군께오선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아 보였사옵니다. 하오니 심려 마시고 좀 쉬시옵소서.”

“연회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나요?”

증화강은 간신히 이렇게 물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준비하고 치러야만 될 일이었다. 유화가 잘하고 있을 거라 믿었지만, 내심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심려 마오소서. 장수들은 물론 병사들까지 하나같이 즐거워하고 있사옵니다.”

“수고가 많아요. 내 언니의 노고는 잊지 않겠어요.”

“노고라니 당치 않으시옵니다. 천녀는 이만 물러가오니, 대부인께오선 쉬고 계시오소서. 주군께서 내전으로 드실 즈음에 다시 기별을 올리겠나이다.”

“부탁해요.”

증화강의 당부를 뒤에 남긴 채 유화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할 일은 많이 남아 있다. 그녀는 우선 연회장으로 다시 방향을 잡았다.

군문의 연회가 으레 그렇듯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장수들의 입에선 공훈담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맹아와 수자윤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맹아가 위휘군을 대표한다면, 수자윤은 막주군의 선봉을 도맡다시피 한 인물이다. 할 말도 많고 언성도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곽가군의 장수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호가군의 역습에 걸려 괴멸되다시피 했으니 달리 할 말도 없을 터였다.

당연히 그 모습은 편월과 광운의 눈에도 띄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장수들끼리의 연회는 이만 파하고, 각 부대로 돌려보내는 게 좋겠군.”

“그게 낫겠어. 이래서야 단합은커녕 불만만 쌓일 것 같아.”

광운의 말에 동조한 편월이 이윽고 좌괴를 불렀다.

“장수들은 이제 그만 각자의 부대로 보내 병사들을 위로해 주라고 해. 곽 장군과 담 장군은 남으라고 하고. 아, 상 장군도 찾아보도록.”

좌괴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편월은 광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막주군 장수 중에서 누구 남길 사람이 없는지 묻는 눈빛이었다.

광운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주군은 자신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 즉시 좌괴는 파연罷宴을 선언했다.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장수들은 재빨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이 역시 군문의 연회에선 항용 있는 일이었다. 누가 뭐래도 병사가 있기에 자신들의 존재가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위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였다.

남은 사람들은 지밀전至密殿으로 장소를 옮겼다. 상가웅이 부리는 간인들을 교육시키고 통제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연회 중임에도 불구하고 경계가 삼엄했다.

좌괴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은 상가웅이 지밀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소서. 개선을 축하드리옵니다.”

상가웅은 정중하게 군례를 갖췄다.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그로선 편월에게 축하 인사를 하는 것도 당연했다.

“상 장군도 수고가 많았소. 자, 다들 앉읍시다.”

상가웅의 배려였을까, 탁자는 원탁이었다. 상석과 하석의 차이가 없는 거기엔 푸짐한 주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좌괴는 연방 편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한마디 하라는 의미였다.

이건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편월이 장수들에게 노고를 치하한다는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그의 위치는 정해지게 된다. 위휘군과 막주군 그리고 유명무실해졌다지만 곽가군까지 아우르는 총대장으로서!

편월은 입을 열었다. 좌괴의 지시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여긴 자신의 성이니 주인으로서 의당 한마디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몸을 아끼지 않는 여러분들의 분전에 힘입어 이번에 호윤천 부자의 목을 칠 수 있었소. 이 한 잔의 술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간단하게 말한 편월은 손수 술병을 들고 각 장수들의 잔을 채웠다.

이렇게 되면 장수들도 편월에게 축하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호가군을 맞아 싸운 주력은 위휘군이니까.

“축하하네.”

“승전을 축하드리오.”

각자 한마디씩 한 후 장수들은 일제히 잔을 비웠다.

“호가군이 사라진 지금, 우리에게 남은 적은 율천국과 상초국이오.”

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든 좌괴의 말에 광운과 곽준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겸후가 적이 될 건 뻔한 이치고, 상초국 역시 미구에 크게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예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중 시급한 건 역시 상초국이오. 이유는 그들이 이방인이라는 것이오.”

좌괴는 ‘이방인’이라는 말에 의도적으로 힘을 줬다. 장수들의 결기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이들이 장수가 아닌 일반 백성이라 해도 외국 군세가 이 땅에 발을 딛는 건 싫어할 일이다.

“또한 상초국과는 육전을 벌일 수 없소이다. 해전을 치러야 하는데, 그러자면 막주의 수군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외다.”

“대체 상초국 수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요?”

광운이 물었다. 어쨌든 수군을 보유하고 있는 건 자신의 막주군이다. 최일선에 나가 싸워야 할 테니 적에 대해 알아 둬야만 한다.

“아무래도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인지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상가웅의 대답이었다. 위휘군의 첩보를 맡은 장수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렇겠군. 어쩌면 막주에 있는 진 장군이 상초국의 사정에 밝을지도 모르겠군. 상 공자, 너무 마음 쓰지 말게나.”

광운은 부드러운 어조로 상가웅을 위로했다. 공자라는 호칭은 여전했지만, 말투는 자연스러운 하대였다.

“막주에서 그걸 어떻게 알아?”

편월이 재미있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연회에서 몇 잔의 술을 마셨지만 여전히 창백한 안색이었다.

“딱히 상초국을 감시할 목적은 아니었지만, 막주의 어부들에게 바다 위의 동향을 주시하고 이상한 점은 즉시 보고하라고 일러뒀었다.”

“그들이 상초국까지 갔을까?”

“농부든 어부든 백성들을 무시하지 마라, 편월. 그들은 살기 위해 우리들이 상상도 못 하는 일까지 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잡을 고기만 있다면 어부들은 상초국보다 더 먼 곳까지 갈지도 모른다.”

편월을 비롯한 장수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수의 신분으로 보면 백성들의 모습은 하찮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숱한 장수와 병사들이 전장에서 덧없이 죽어 가도, 백성들은 그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어떤 고통, 어떤 치욕을 당하더라도 그들은 끈질기게 이 땅에 붙박여 살아가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백성이 없이는 군인도 있을 수 없다. 자고 나면 전쟁을 치러야 하는 병사들이 생산에 종사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니, 물자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군인들은 백성들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전쟁을 치른다. 군대를 결성해 세력을 넓히는 군주나 패주들의 욕심은 철저하게 뒤로 감추고서 말이다.

아무튼 백성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치르는 전쟁에서도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애써 경작한 땅이 황폐화되고, 가족의 생계를 이어 갈 식량을 공출당하고 약탈까지 당한다. 그러면서도 군인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막주에 전령을 보내야 되겠는데…….”

“막주까지 보낼 필요는 없겠지. 주 제독이 막주의 선단을 이끌고 예진포를 출발해 연미포燕尾浦로 향했으니, 전령은 그쪽으로 보내면 될 게다. 상초국 수군의 사정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면 주 제독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연미포라면 합진성에서 동남쪽으로 삼백여 리 떨어진 곳이다. 경험 많은 전령과 좋은 말을 이용하면 하루면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고숭 장군에게 이 취지를 전하고 전령을 보내라고 하게.”

광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상가웅에게 말했다. 전령을 파견하려면 막주군 중에서 뽑는 게 좋다. 광운은 고숭에게 그 일을 일임하려는 것이었다.

상가웅은 재빨리 부하들에게 명을 내리고 다시 돌아왔다.

“상초국의 보다 확실한 전력은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강하다고 여기는 게 옳을 듯하오이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상초국과 싸우기 위해선 율천국과의 연합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소이다. 이 점에 대해 곽 장군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좌괴는 곽준방의 의견을 물었다. 군사적인 도움이야 미미하겠지만, 같은 편 장수에게 예의를 갖춘 셈이었다.

하지만 곽준방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기들끼리 사전에 결정하고, 자신은 사후 통보만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다.

당연히 곽준방은 말이 없었다. 실질적인 무력을 거느리지 못한 장수는 내놓을 의견도 없는 법이다.

잠깐 기다리던 좌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이 없으시다는 건 곽 장군께서도 동의하신 거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율천국으로 파견할 사자를 뽑아야겠는데, 혹시 심중에 두고 계신 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라오.”

이어진 좌괴의 말에는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자칫 잘못되면 가겸후에게 목이 잘릴 수도 있다. 선뜻 누군가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소장에게 맡겨 주시오. 아무래도 이런 일은 나처럼 나이 든 사람이 제격 아니겠소.”

담개였다. 다들 말이 없자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아니요. 담 장군은 위휘군의 기둥이시오. 그러니 몸을 보중하셔야 하오이다. 이 일은 이 몸이 맡겠소.”

“아니요. 곽 장군이야말로 곽가군을 재건하셔야 되지 않소이까? 역시 이 일은 소장이 가야겠소이다.”

“부탁이오. 이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 이 몸은 지나치게 오래 산 것 같았는데, 이제야 죽을 자리를 찾은 것 같소이다. 그러니 부디 거두어 주시오.”

곽준방은 담개를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진심이 깃든 행동이었다.

담개로선 할 말이 없었다. 죽을 자리를 찾았다는 곽준방의 말에는 철저한 기백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비장감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한 점도 가식이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건 곽준방의 진심이었다. 호가군에 허탈한 패배를 당한 후 그는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다. 이런 시대에 곽가군을 재건한다는 건 꿈처럼 요원한 일이고, 그렇다고 자결을 한다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끝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장졸들의 앞길만은 터 줘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 참에 가겸후와의 동맹 건이 나왔다. 비록 사후에 통보 받았다는 찜찜함이 없지 않았지만, 자신이 맡아야 할 중차대한 일임엔 틀림없었다.

‘반드시 성사시킬 것이다!’

자신이 가서 가겸후와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킨다면 적어도 위휘군 내에 남은 곽가군은 어깨를 펴고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좌괴는 편월의 눈치를 살폈다. 누가 뭐래도 결정권은 그에게 있다.

“부사는 내가 결정하겠소.”

편월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사는 곽준방으로 결정되었다는 걸 은연중에 표현한 말이었다.

“하오면 부사로는 누가 좋겠습니까?”

좌괴는 이야기를 대뜸 진척시켰다. 서둘러서 나쁠 게 없는 일인지라 늦출 수 없었다.

“맹아와 여상계 장군. 나머지 한 명은 광운이 정해 줘. 막주군 중에서.”

“삼 군을 망라해서 부사를 파견한다? 괜찮군. 그럼 우리 막주군에선 고숭 장군을 파견하겠네.”

“출발 일자는…….”

“주군, 급한 전갈이옵니다!”

편월이 뭔가 말을 하려고 할 때, 밖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뭐냐? 들어와서 고하라.”

상가웅이 재빨리 대답했고, 평복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원래 병사였지만, 간인으로 길러지고 있는 자 같았다.

“황후께서 주군을 찾는다는 내전의 전갈이 있었습니다.”

“황후께서?”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편월과 좌괴, 담개는 황후가 정신을 차렸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은 황후가 여기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황후께서 여기 계시나?”

“어쨌든 가 봐야겠군. 다들 같이 갑시다.”

“아, 아니, 우리들은…….”

광운의 질문에 즉답을 피한 편월이 권하자 곽준방은 손사래를 쳤다.

“마음에 두실 것 없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거절하려는 곽준방에게 이번엔 좌괴가 권했다. 단순히 예우 차원에서 한 말이 아니었다. 이런 시기에 편월과 황후의 독대는 좋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얼떨떨해하면서도 광운과 곽준방은 따라나섰다. 그들로서도 황후를 만난다는 건 다시없는 광영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가겸후와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황제가 죽었다고 해도 황후는 여전히 황후다. 가장 우선적으로 명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장수들은 서둘러 황후의 침전으로 향했다.

“주군만 드시라는 분부시옵니다.”

황후의 침소 앞에서 나이 든 시녀가 장수들을 제지했다.

“상관없어. 이들은 나와 같으니까.”

시녀를 밀치고 편월은 안으로 들어갔다. 황후라는 신분은 존중하지만, 개인적으론 그녀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어렸을 때 황제와의 만남을 방해했던 기억 탓이었다.

황후도 별달리 꺼려 하진 않는 것 같았다. 일부러 꾸민 건 아니지만 합진성에 온 이후로 가장 깨끗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장수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황후에게 예를 갖췄다. 편월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황후가 편월 앞에 무릎을 꿇고 맞절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황후의 말에 장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후 마마, 받잡기 민망하옵니다. 예를 거두소서.”

편월로서도 경악할 노릇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아니에요. 황제의 종제從弟께 형수가 갖추는 예입니다. 괘념치 마세요.”

실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종제라면 바로 사촌 동생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그건 바로 편월이 그렇다는 말이고, 황후가 직접 얘기했으니 틀린 것도 아닐 터였다.

쿨럭!

충격 때문이었을까. 광운이 돌연 기침을 터뜨렸다. 한 사발의 피가 더불어 토해졌다.

“광운!”

편월이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광운을 불렀다. 황후의 앞인 걸 감안하면 불경한 행동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괜찮다. 예의를 잃지 마라, 편월.”

오히려 광운은 편월을 나무랐다. 아직은 모든 게 얼떨떨하지만, 황후의 앞에 있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설사 황제의 종제가 맞는다고 해도 예를 잃어서는 안 된다.

시녀들이 핏자국을 재빨리 지웠지만, 피를 토한 사람이 황후 앞에 있을 수는 없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광운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황후 역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일어서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제가 외람되어 황제 폐하의 종제를 부른 건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제가 어떻게 폐하의 종제가 되는 것이옵니까? 소장은 의아할 뿐이옵니다.”

“그 점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말씀드리려고 외람되이 모셨습니다. 우선 이걸 받으세요.”

황후는 비단 보자기에 싸인 묵직해 보이는 물건을 내밀었다.

“이건……?”

“옥새입니다. 붕어하신 황제께서 종제께 전하라는 물건입니다.”

황후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걸 듣는 사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전신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특히 좌괴의 동요는 눈에 띄었다. 그로서는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었다. 편월을 돕기로 했을 때, 그는 천하의 패주를 보필하는 꿈을 꿨다.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을 모시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터였다.

“황제께서는 모든 걸 얘기하셨습니다. 종제께서 어릴 적 율천국으로 오셨을 때 차고 계시던 목걸이를 보시고선…….”

황후는 조용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편월의 출생에 관한 것이 있었고, 미심쩍은 황제의 죽음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

사람들은 경악하는 와중에도 황후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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