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룡재회雙龍再會
1
편월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져 정확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호가군에 위기가 닥쳤다는 건 분명히 감지했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할 틈은 없었다. 선두야 무너지든 찌그러지든, 편월의 주변에 있는 적은 그것도 모른 채 공격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편월로선 순간순간이 위기였다. 과다 출혈로 인한 현기증이 자칫하면 방향감각까지 상실하게 만들 것 같았다.
편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호가군은 무너질 게 뻔하다. 삶에 대한 구차한 미련 따위는 없었지만, 호윤천을 살려 두고 죽기는 싫었다.
하지만 그건 편월의 마음뿐이었고, 몸은 그저 본능적으로만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언제 적의 창칼 아래 육신이 난도질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툭!
편월이 입고 있던 갑옷 끈이 잘려 나갔다. 방금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적의 칼에 의해서였다. 이제 편월은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갑옷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면 촌각도 버티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누군가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막주군의 선봉장 수자윤이 여기서 호윤천을 찾고 있노라! 어디에 숨었느냐? 썩 나서라!”
‘막주? 막주군이라고?’
가물거리던 편월의 의식이 번쩍 깨어났다. 막주군이라면 바로 광운이 이끄는 군세다. 그들이 마침내 여기까지 진군한 모양이었다.
편월은 새삼 힘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거기다 수자윤이 지른 고함을 주변의 적들도 들었는지, 이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기회를 편월이 놓칠까. 그는 최후의 힘을 발휘한다는 생각으로 대도를 휘두르며 외쳤다.
“위휘군의 편월이 여기 있다! 막는 자는 죽는다!”
이름을 밝힌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막주군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반응은 있었다. 편월의 목소리를 들은 수자윤은 도끼로 적병들을 마구 찍어 넘기며 접근해 왔다. 아니, 수자윤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었다. 한 마리 밤색 말에 올라앉은 광운이었다.
지금 광운의 눈에는 그야말로 보이는 게 없었다. 편월의 목소리가 들린 곳에서 정작 그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전쟁 경험이 풍부한 광운이다. 그게 바로 편월이 위기에 처했다는 의미란 걸 단박에 깨달았고, 이처럼 빠른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광운은 막주의 대장군이다. 대장군의 이런 행동은 부하 장병들을 광분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대장군께서 적진을 돌파하신다. 모두 따르라!”
“와아아!”
고함을 지른 사람은 고숭이었고, 그 뒤를 막주군이 마구 밀어붙였다.
전세의 역전이니 어쩌니 말할 계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쫓기고 있었던 호가군이다. 막주군의 일격에 당한 호가군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입고 괴멸되기 시작했다.
그게 광운의 관심을 끌 수는 없었다. 그는 오직 편월을 찾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편월! 어디 있는가, 편월?”
연방 고함을 지르며 광운은 적진을 헤집었다. 그의 눈엔 초조한 빛이 가득했다.
싸움에서 이겨 호가군을 괴멸시키면 뭐 하나. 광운에게 있어 그건 편월의 머리카락 한 올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어디 있느냐, 편월? 내가 왔다! 광운이 왔어!”
“여기야, 광운!”
광운이 재차 고함을 질렀을 때 어디선가 편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병이 그득히 모여 있는 한가운데였다.
광운은 지체하지 않았다.
“막주의 대장군 광운이 왔노라! 길을 열어라!”
부르짖는 외침이 끝났을 때 벌써 서너 명의 적병이 광운의 창날에 걸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편월을 포위하고 있던 호가군은 허둥거렸다. 그들에겐 광운 한 사람의 개입도 벅찬 판이었는데, 거기다 막주군이 거센 물살처럼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투항자는 살려 주겠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뒤를 따라온 고숭이 호가군에 투항을 권했다. 무의미한 살생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편월을 가장 빨리 구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광운의 지금 심정이 어떤지 뻔히 알고서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고숭의 의도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 싸우고 있는 호가군은 호윤천의 친위대다. 명색이 최정예들이니 말 한마디에 쉽게 무기를 버릴 자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편월에 대한 공격은 늦춰졌다. 그보다는 호윤천을 보호하는 게 시급하다고 여긴 까닭에서였다.
“상국님이 위태롭다! 상국님을 보호하라!”
호가군 장수 중 누군가 외쳤고, 그 바람에 허둥거리던 호가군 장졸들이 가닥을 잡았다. 대장군기를 중심으로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호가군은 맹렬한 기세로 북쪽으로 달려 나갔다. 어떻게든 호윤천만은 무사히 빼돌리려는 시도였다.
그 와중에 편월과 광운은 서로 만났다.
“편월?”
“광운!”
더 이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막 솟구치기 시작한 해를 가릴 듯한 전장의 먼지와 온갖 소음 속에 선 채, 두 사람은 잠깐 동안 서로를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직 싸움이 끝난 게 아니다. 호가 부자의 목을 친 후에 회포를 풀기로 하자!”
광운의 말이었다. 이렇게 서 있어 봐야 전군의 발을 둔하게만 만들 뿐이다. 곧바로 호윤천을 뒤쫓자는 뜻을 내비쳤다.
“호윤천 한 놈뿐이야. 그 자식 놈은 내가 베었어.”
“그래? 그럼 그 아비의 목을 치러 가자.”
“응.”
편월의 대답을 들으며 광운은 말을 몰았다. 모처럼 둘이서 신 나게 한바탕 설쳐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편월은 뒤를 따르지 못했다. 흑풍에 박차를 가하기는 했지만, 막상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땐 기우뚱 기울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편월은 눈을 떴다.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게 마치 천 근의 바위를 드는 것만큼이나 무거웠다.
“정신이 드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편월은 힘겹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흐릿해서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광…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광운을 알아보지 못할까. 편월은 까칠하니 메마른 입술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 편월. 아주… 아주 훌륭하게 자랐구나.”
“호윤천은?”
감개 섞인 광운의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편월은 물었다. 잔뜩 메마르고 쉰 음색이라 호윤천에 대한 증오가 실제 이상으로 묻어 나왔다.
“호가 놈의 목은 언제라도 딸 수 있다. 그보다 내겐 네가 더 중요해.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어서 쾌차할 생각이나 해라.”
부드럽게 타이른 광운은 밖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 없느냐? 가서 위휘군 장수들을 모시고 오너라. 편월이 정신을 차렸느니라.”
“존명!”
밖에서 달려오던 아장 한 명이 다시 달려 나가며 복명했다.
안간힘을 다해 편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운의 막사인 것 같았다. 여기서 그는 혼자 간호를 했던 모양이다.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맹아를 필두로 위휘군 장수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속에는 수자윤과 고숭도 섞여 있었다.
“주군, 괜찮으시오?”
“괜찮소. 그런데 나 때문에 호윤천을 놓친 모양이더군.”
“그거야 하찮은 일. 놈은 어디에도 의탁할 곳이 없으니, 언제라도 잡아 죽일 수 있소.”
“다른 일은?”
“좌 군사에게서 전령이 왔소이다. 우행성과 마두성을 공격해서 장악했다는 전갈이었소.”
“애썼군.”
짧게 치하하며 편월은 눈을 감았다. 나른한 졸음이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편월은 애써 다시 눈을 떴다.
“호윤천의 행적은 항상 파악하고 있도록.”
“염려 마시오. 주군께서 완쾌되실 때쯤이면 놈의 모습도 이 세상에서 사라진 뒤일 게요.”
맹아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들으며 편월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정말 잠 속으로 빠져 든 것이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서 장군은 속히 주군을 모시고 합진성으로 돌아가시오. 소장은 일만의 군사를 이끌고 호윤천을 추격하겠소.”
여기 오기 전에 위휘군 장수들끼리 차후의 일에 대한 논의가 있었나 보다. 맹아는 거침없이 말을 뱉었다.
“주군을 조속히 합진성으로 모시는 건 찬성일세. 하지만 호윤천을 추격하는 건 곽가군과도 상의해 봐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서진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곽가군을 편든다는 얘기를 들을까 저어하는 눈치였다.
“위중하신 주군을 딱히 멀리 합진성까지 모실 일이 뭐 있소? 좌 군사께서 우행성과 마두성을 장악하셨다니까, 우선 거기로 모셔 정양시키는 게 옳은 일일 것이오.”
오강이었다. 그는 과다 출혈로 생명의 고비를 겪고 있는 편월을 보다 빨리 안정시키자는 뜻을 피력했다.
“오 장군의 말도 일리가 있네만, 주군은 반드시 합진성으로 모셔야 하네. 거기엔 주모가 계시지 않나. 누구보다 주군을 지성껏 간호하실 게야. 또 동쪽 율천국의 움직임도 주시해야 하고.”
서진청의 말에 오강은 반박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겸후의 동정은 그 자신도 신경 쓰였다. 강국과 허주를 멸망시킨 기세로 어떤 도발을 해 올지 알 수 없었다.
“꼭 곽가군과 상의를 해야겠소? 그들은 이번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는데. 병사가 오천이나 남았을지…….”
여전히 맹아는 호윤천을 추격하는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건 곽준방의 성격을 익히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천이 아니라 다섯 명만 남았다고 해도 뜻을 꺾을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반드시 곽가군과 상의해야 한다고 보네. 만약 우리 독단으로 행동한 걸 알면 그 성미에 어떤…….”
“잘 아니까 몰래 하자는 거요. 상의를 해 보시오. 나올 말은 뻔한 것 아니겠소? 그러는 사이 호윤천은 꼬리 자른 도마뱀처럼 숨어 버릴 것이고!”
맹아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로선 누워 있는 편월을 보는 것만으로 눈알이 뒤집힐 것 같은 심정이었다. 객군에 불과한 곽가군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는 건 도저히 성미에 맞지 않았다.
“서 장군의 말씀이 옳은 듯하이. 듣자니 호윤천의 목을 누가 먼저 베는지 시합을 한 것 같더군. 그렇다면 의당 곽가군과 상의해야 하네.”
“대장군…….”
망연히 부르기만 했을 뿐 맹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광운이 누구인가. 막주에서 자신을 이끌어 줬던, 말하자면 우상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의 한마디에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의할 것도 없는 일이오. 우리 곽가군은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힘을 잃었소. 성한 병사는 채 삼천도 되지 않으니…….”
곽준방이었다. 막사로 들어오기 전에 맹아와 광운의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대장군.”
광운이 곽준방을 불렀다. 끈끈한 정감이 어린 음색이었다.
이전에도 광운은 곽준방을 잠깐 봤었다. 하지만 그땐 아직도 전투가 계속되고 있던 터라 눈인사만 교환했었다.
“광운 장군.”
곽준방의 목소리도 약간 떨렸다. 그라고 왜 감회가 없겠는가. 자신에게 배속된 잡가군을 지휘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십 년도 훨씬 넘은 옛날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 서로의 입장도 정반대가 되었다. 곽준방이 이끄는 곽가군은 위휘군에 얹힌 객군이 되고 말았고, 광운의 막주군은 막주와 사주, 파양주 전부와 건주의 일부까지 석권하고 있다. 금석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곽준방이 저러니 다섯 명의 휘하 장수들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호가군에 역습을 당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으니 창피할 만도 했다.
“원하신다면 우리 막주군의 병력을 얼마간 지원해 드릴 수 있소이다만.”
광운은 조심스레 곽준방의 속내를 떠보았다. 정말 원한다면 실제로 병력을 지원해 줄 작정이었다.
“그만두시오. 쫓기는 호가군에 역습을 당해 패배한 몸이오. 더 이상은 군을 지휘할 자신이 없구려.”
곽준방의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세상을 다 살아 버린 것처럼 허탈한 모습이었다.
“대장군, 일승일패는 병가지상사요. 이만한 일에 어찌 그리 의기소침해지셨소? 기운을 내시오.”
광운은 안타까웠다.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해도 곽준방만 한 장수를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사세가 불운하여 조천성에서부터 호윤천에게 쫓겼고, 위휘군의 객군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가 또 한 번의 참패를 맛봤다. 의욕이 꺾일 만도 했지만, 그 일로 인해 폐인이 될까 싶어 불안스러웠다.
산전수전 다 겪은 무인이 설마 그만한 일로 폐인이 될까 하겠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도 없지 않았다. 특히나 이름 높은 명장일수록 그건 더 심하다.
“이 몸은 이제 늙었소이다. 그만 일선에서 물러나고 싶어요.”
“대장군, 아직은 소장들을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물러나시다니요? 당치 않은 말씀은 거두십시오!”
보다 못한 여상계가 버럭 언성을 높이며 나섰다. 반드시 이겨야만 되는 싸움에서 패했다는 수치감은 자신에게도 있다. 그걸 다독여 주지는 못할망정 맥없는 소리를 늘어놓은 곽준방이 이 순간만큼은 야속스러웠다.
“그렇소이다. 아직은 대장군께서 우리 막주군이나 위휘군의 힘이 되어 주셔야 하오.”
광운도 힘찬 어조로 여상계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곽가군 장수들의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광운의 말속에 자신들이 위휘군이나 막주군에 배속되어야 한다는 뜻이 은연중에 들어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무튼 꼬마 장군, 아니 편월 장군부터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급선무일 게요.”
“당장 채비를 갖추겠소이다.”
곽준방의 말에 서진청이 재빨리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인근의 성으로 철수하는 게 어떻겠소? 우리 막주군이 외천성을 점령해 뒀소이다만…….”
광운은 말꼬리를 흐렸다. 점령을 했다지만, 외천성은 많이 파괴된 상태다. 이 많은 병력이 들어가 휴식을 취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광운을 곤혹스러움에서 구해 준 사람은 고숭이었다.
“외천성은 아직 싸움의 뒷정리가 끝나지 않아 어수선한 상태입니다. 삼가 대군을 맞기엔 어려울 듯합니다.”
맹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고숭의 말이 고깝게 들린 탓이었다. 마치 위휘군이 저들에게 큰 피해나 줄 것 같아서 미리 차단한다는 수작쯤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막주군이 제때에 당도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편월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주군의 목숨을 구해 준 군세에 대고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말이다.
“그보다는 마두성으로 가는 게 좋겠소. 거기엔 좌 군사가 있으니, 그분과 의논해서 향후의 거취를 결정하는 게 좋겠소.”
오강이 나섰다. 여기서 설왕설래해 봐야 결정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설사 결정된다 해도 그게 옳다는 보장 또한 없다. 차라리 좌괴에게 가서 물어보는 게 나을 듯했다.
맹아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모든 사람들이 호윤천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럼 호윤천은 이대로 달아나도록 두자는 거요?”
자연적, 묻는 맹아의 말투도 곱지 않았다.
“주군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호윤천의 행적만은 놓치지 말도록! 그러니 우린 그자가 어디로 가는지만 파악하고 있으면 되네. 나머지는 주군께서 일어난 후에 결정하도록 하세.”
맹아는 선뜻 오강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호윤천을 쫓아가 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대세는 그 반대다. 장수들은 무엇보다 편월의 안전을 최우선시하고 있었다.
맹아는 새삼 편월이 어떤 존재인지 실감했다. 그는 위휘군만이 아니라 막주군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막주의 대장군인 광운이 저렇게 염려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맹 장군,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호윤천의 뒤는 우리 막주군이 책임지고 쫓겠네. 그러니 자네들은 곽가군과 더불어 합진성으로 돌아가게.”
“안 될 말씀!”
맹아는 광운의 말을 한마디로 딱 잘라 버렸다.
“주군께서 정신이 드시면 틀림없이 광운 장군을 찾으실 게요. 그때 곁에 계셔야 되지 않겠소?”
“딴은…….”
맹아의 말에 오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광운으로서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 역시 편월이 정신을 차리는 대로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긴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소장은 병력을 수배해서 호윤천의 뒤를 쫓겠소. 나머지는 여러분들께서 알아서 하시오.”
“대체 병력을 얼마나 데리고 가겠다는 건가?”
서둘러 나가려는 맹아를 제지하며 오강이 물었다.
“우리 근위대만 있으면 충분하오.”
“그걸로는 안 되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 그러니 흑월대를 포함하고, 따로 병사를 보충해 일만을 데리고 가게.”
“일만씩이나 필요하겠소?”
“내 말대로 하게.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주군께선 우리 모두를 꾸짖으실 걸세. 난 그렇게 당하기 싫네.”
“일만… 알겠소.”
“그럼 난 막주군과 위휘군의 이름으로 건주에 있는 각 성에 격문을 돌리겠네. 호윤천을 도와주는 곳은 당장 공격을 감행하겠다고!”
광운도 한마디 덧붙였다. 위휘군은 몰라도 막주군은 이미 건주에서는 공포로 통한다. 자신이 격문을 보낸다면 선뜻 호윤천을 돕겠다고 나설 성은 없을 터였다.
“광운 장군께서 그리해 주시면 실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큰 힘이 될 게요.”
오강이 광운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사이 맹아는 밖으로 나갔다. 한마디라도 더 하고 있을 시간조차 아깝다는 태도였다.
“허어, 급한 성미는 그대로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광운과 오강이 웃음 섞인 농담을 주고받을 때, 벌써 진막 밖에서는 말발굽 소리가 마구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맹아가 같이 갈 병사들을 선발하는 모양이었다.
2
누구에게나 운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그게 막힐 때는 스스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금 당장 그렇게 불운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호윤천을 들 수 있다. 편월을 죽이기 직전에 들이닥친 막주군에 당한 호가군 친위대는 그 병력이 삼천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중 절반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부상병들이었다. 휴식과 정비가 시급한 실정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호가군은 무턱대고 가장 가까운 성을 찾았다. 그게 공교롭게도 마두성이었다는 게 호윤천의 가장 큰 불행이었다.
이건 결코 호윤천이 바보 같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마두성에 구원을 청하는 전령을 파견하기 전에 성루에 걸린 기치를 세심하게 살폈고, 달리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마두성은 좌괴가 점령한 뒤였다. 그러니 사자는 그 자리에서 잡혔고, 성문이 열리고 쏟아져 나온 건 지원군이 아니라 온통 위휘군뿐이었다.
호윤천과 그의 친위대는 필사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건 헛된 것에 불과했다. 수적으로도 워낙 열세였거니와 또 제대로 쉬지도 못했기에 병사들은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사자를 파견한 지 채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호윤천을 비롯해 살아남은 호가군 병사들은 고스란히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좌괴로선 호윤천을 생포한 게 뜻밖의 소득이었다. 바라던 것에 비해 너무 큰 수확인지라 잠시 당황했을 정도였다.
‘만약 힘으로 눌러 성루에 우리의 기치가 걸려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포박된 채 자신 앞에 꿇어앉혀진 호윤천을 내려다보며 좌괴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좌괴는 너무 거칠게 성을 점령하지 말라고 했던 편월의 말을 철저히 지켰다. 그래서 한편으론 공격하면서도, 한편으론 회유책을 썼다.
이게 먹혀들었다. 마두성주 공욱孔昱은 포위당한 지 한 시진 만에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해 왔다. 제대로 싸울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의 농성은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공욱이 겁 많고 용렬한 장수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건주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이다. 만약 그가 헛된 명성을 좇아 최후까지 저항을 시도했다면, 병사들은 물론 애꿎은 백성들까지 엄청난 피해를 봤을 터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공욱은 세태의 흐름을 헤아릴 줄 아는 장수라고 할 수 있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날로 세력을 더해 가는 위휘군에 저항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한 시진 정도 농성하는 걸로 체면을 세우고는 곧바로 투항했던 것이다.
상례로 따지면 그 즉시 성루에 걸린 기치는 위휘군의 것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하지만 좌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싸워서 뺏은 성이 아니기에 공욱의 성주 지위를 그대로 인정했다. 어차피 건주의 모든 성에 위휘군의 병력이 주둔할 수 없다는 걸 감안하면, 앞으로도 이 같은 조치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인질 한두 명 정도는 받아 둘 작정이었다.
여하튼 이 모든 게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호윤천에게는 그게 지독한 불운으로 연결되어서 탈이지만 말이다.
좌괴는 눈을 감고 있는 호윤천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지난 며칠간 계속된 추격전으로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좌괴로선 호윤천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 격동의 시대에 서로가 적이 되었기에 오늘의 이런 만남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렇다고 사로잡힌 적장에 대한 예우를 갖춰 주기도 싫었다. 호윤천에 대한 처치는 오직 주군인 편월만이 할 수 있다 여기고, 그때까지는 어디까지나 전쟁 포로로 대우해 줄 생각이었다.
“호윤천을 비롯한 호가군 장수 급들은 모두 성에 있는 석옥에 투옥하고, 나머지 병사들에게는 그 뜻을 물어보라. 항복해서 위휘군에 복속되겠다는 자는 받아들이고, 귀향하겠다는 자들은 무장을 해제시켜 돌려보내라. 끝까지 저항할 마음을 버리지 않는 자들은 각 부대별로 분산시켜 엄중히 감시하도록!”
“패장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서 내 목을 쳐라.”
좌괴의 지시가 끝나기 무섭게 호윤천은 눈을 번쩍 뜨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초췌한 가운데서도, 한때 파양주의 대장군을 지냈던 무장으로서의 기개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대의 처치는 우리 주군께서 하실 게요. 만약 내 임의대로 손을 댄다면, 그 성미에 내게 어떤 벌을 내리실지 모르오.”
“주군? 그 애송이가 주군이 되었나?”
호윤천은 망연히 내뱉었다. 주군이라는 한마디. 그 자신도 듣고 싶어 무척이나 추구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편월이 훨씬 빨랐다. 마용승의 지원으로 오천의 잡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는 윤주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주군으로 불리고 있다. 호윤천은 자신의 삶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일어서라!”
위휘군 병사들이 호윤천을 비롯한 호가군 장수들을 거칠게 끌고 갔다.
“자결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감시하라.”
“존명!”
호윤천의 자결은 지금 좌괴가 가장 마음 쓰는 부분이었다. 어떻게든 편월과 대면할 때까지만이라도 살려 둬야 한다.
그렇게 마두성이 술렁거리고 있을 때, 오강이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 이쪽에서 먼저 보내고자 하던 참이었던지라 좌괴는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우울한 것이었다. 바로 편월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막주의 수군이 도착했다는 전갈은 반가웠다.
“우선 주군을 이곳으로 모시라고 전하게. 맹 장군이 호윤천을 추격한다지만, 그자는 우리가 여기 잡아 뒀으니 당장 철수하라고 이르게.”
“그, 그게 사실이오이까?”
좌괴의 지시를 들은 전령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로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네. 그러니 피로하더라도 이대로 다시 돌아가 내 뜻을 전하게.”
“조, 존명!”
전령의 소임은 상관의 말을 한마디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이다. 병사는 군례를 갖춘 후 곧바로 대기시켜 둔 새 말을 타고 달렸다.
전령을 돌려보낸 좌괴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무리 호윤천을 힘들이지 않고 사로잡았으면 뭐 하나. 위휘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편월이 위중지경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자신도 모르게 좌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 편월이 위중하다는 전령의 말을 들은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아무도 없었다. 마두성주 공욱은 호윤천과의 대면을 어색해할까 봐 일부러 뺐고, 다른 장수들도 모두 포로로 잡힌 호가군을 다루느라 분주했다.
‘주군을 이 마두성에 모실 수는 없다. 조속히 합진성으로 모셔야 한다. 그렇다면 애써 경영한 건주가 텅 비게 되는데…….’
좌괴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편월은 반드시 합진성으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 동쪽의 가겸후를 견제해야 한다.
문제는 그저 편월이 합진성에 가 있다고 해서 가겸후에 대한 견제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란 점이다. 그에 걸맞은 힘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위휘군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가겸후에겐 미치지 못한다. 이런 판에 지금껏 차지한 건주에도 얼마간의 병력을 남겨 두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니, 좌괴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막주군에 도움을 청한다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편월은 몰라도, 좌괴의 입장에선 그들도 외부 군세의 하나일 뿐이다. 어쩌면 미구에 그들과 창칼을 겨눠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시대는 이처럼 냉혹하다.
‘율천국의 병력은 얼마나 될까?’
이건 아무리 해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상가웅이 최선을 다해 간인들을 부리고 있지만, 지금껏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상가웅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어제는 십만이던 율천국군이 오늘은 이십만으로, 오늘 만여 척이던 전선이 내일이면 또 몇 척이나 불어날지 알 수 없었기에 보고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는 좌괴가 아무리 뛰어난 군사라고 해도 마땅한 전략을 수립할 수가 없다. 병법의 기초는 우선 적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좌괴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병력 문제에 연연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생각해 보려는 의도였다.
일단 마음을 비우자.
좌괴의 머릿속에는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될 문제가 떠올랐다.
‘상초국의 잔당 소탕과 곧 이어질 놈들의 대대적인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
강국의 요청으로 이 땅에 들어왔던 상초국군의 주력은 대부분 물러갔고, 그 잔당 소탕에 가겸후가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좌괴도 익히 알고 있다.
문제는 머지않은 미래에 상초국 국왕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이 땅을 침략할 것 같다는 첩보다.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내야 한다.
‘그러자면 가겸후와 화친을 맺어야 하는데…….’
상초국과의 싸움은 대규모 해전이 될 공산이 컸다. 아니, 설사 그들이 상륙을 시도하더라도, 상초국 병사들은 단 한 명도 이 땅에 발을 딛게 하지 않겠다는 게 좌괴의 결심이었다.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겠다는 의도에서였다.
땅 위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어떤 형태로든 백성들은 피해를 입는다. 그게 징발이든 노략질이든 힘없는 민초들은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다. 아니, 딱히 그런 강압적인 수단이 아니어도 피해는 발생한다. 백성들이 애써 경작했던 농경지에 병사들이 주둔하는 것만으로 황무지가 되고 만다. 꽃이 시든 자리에는 꽃이 피지만, 전쟁이 할퀴고 간 자리엔 원한만이 남는다. 바로 민초들의 농도 짙은 원망이 자리 잡는다는 얘기다. 이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해전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다고 내 양심이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
상초국을 물리친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다음엔 가겸후라는 절대 강자와 결판을 내야 한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지상전을 펼쳐야 하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쳐야 한다. 그렇기에 적어도 이국의 군세인 상초국에 의한 피해만은 덜어 주고 싶다는 게 좌괴의 양심이었고, 작은 위안이었다.
‘가겸후는 이미 수군을 동원하고 있다. 상초국을 막기 위해선 그와 제휴할 수밖에 없다.’
막주의 수군 규모가 전선 일만 척에 병력 삼만 오천이라고 했다. 율천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지만, 저 정도 병력과 전선이라면 가겸후도 쉽사리 거절하긴 어려울 게다.
문제는 가겸후가, 상초국과 해전을 벌이려는 모험을 감행하겠느냐에 달렸다. 지금까지의 전적을 보면 율천국이 다소 우세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근자에 이르러 그 우세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듯했다. 해상봉쇄를 서둘렀음에도 상초국의 주력을 고스란히 놓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지상전에 비해 해전은 엄청난 경비가 소요된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런 소모전을 가겸후가 과연 치르려고 할는지.
어쨌든 좌괴는 가겸후에게 사자를 파견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제장들과 회의를 거쳐야 하고 편월의 재가도 얻어야 하지만, 이것만큼은 어떻게든 성사시킬 작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마두성을 정리하고 주군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은 건가?’
당장 좌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성주인 공욱을 찾아 나섰다.
* * *
좌괴가 기다리던 편월이 마두성으로 온 건 다음 날 미시경이었다. 일행 중에는 광운을 비롯한 막주군 장수와 곽준방을 필두로 한 곽가군 장수들의 모습도 보였다.
편월을 본 좌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전령을 통해 들었던 것보다 훨씬 상태가 나빴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가겸후와의 제휴 건은 꺼내지도 못하겠군.’
주군의 부상이 심각한데 군사에 관한 일로 심기를 무겁게 해 줄 수는 없다. 좌괴는 편월에게 가겸후와 손을 잡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뭇 장수들과 상의를 할 수는 있다. 특히 수군은 막주군 소속이니 광운과는 반드시 얘기를 나눠야만 한다.
사실 좌괴는 광운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상전은 편월 하나로도 족한 판에 그의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이 등장했으니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피할 좌괴가 아니었다. 또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좌괴는 막주군에 할당된 건물로 광운을 찾아갔다.
“평소 위명이 자자한 광운 장군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소생은 위휘군의 밥을 축내고 있는 좌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다시없을 광영입니다.”
좌괴는 광운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소장이야말로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좌 선생의 대명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소. 이렇게 뵙게 되니 눈이 다시 뜨이는 기분이구려.”
광운도 점잖게 좌괴를 맞았다. 편월이 이끄는 위휘군의 군사라는 생각에 더욱 관심이 끌린다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소장을 찾아 주셨소? 다른 일로 많이 바쁘실 터인데…….”
“광운 장군께 긴히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의논?”
광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좌괴는 위휘군의 군사다. 군사적인 일이 있다면 의당 위휘군의 장수들과 하는 게 맞을 터였다.
“다름이 아니라 광운 장군께서는 작금의 천하 정세를 어떻게 보십니까?”
시작부터 좌괴는 거창하게 밀어붙였다. 광운의 경륜이나 세태를 보는 눈이 어떤지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허허, 좌 선생 앞에서 천하의 정세를 논하려니 면구스럽구려. 탓하지만 않는다면 내 생각을 말씀드리리다. 호윤천이 사로잡힌 지금 천하는 두 개의 축으로 간신히 안정되기 시작한 것 같소이다.”
“두 개의 축이라고 하시면……?”
좌괴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두 개의 축이 어디 어디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행여 그중 하나가 막주군이라고 한다면 광운과의 대화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휘국과 율천국이 아니겠소!”
광운은 딱 잘라 말했다. 또한 ‘휘국’이라는 단어도 썼다. 지금까지 편월과 그 측근들에 의해 구상에만 그치고 있었던 걸, 그는 당당하게 인정한 셈이었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마다요. 내가 막주에서 어렵게 군사를 일으킨 건 모두 편월에게 도움이 되고자 함이었소. 달리 무슨 이견이 있을 수 있겠소?”
광운의 말에 좌괴는 재빨리 수자윤과 고숭을 돌아보았다. 광운 개인의 뜻이야 어떻든 휘하의 장졸들은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점을 우려한 행동이었다.
다행이랄까. 수자윤과 고숭의 얼굴에서 별다른 불만의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걸 광운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그저 따르기만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좌괴로선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진실로 광운과 막주군의 뜻이 그렇다면 후방을 맡기는 일만이 아니라 최일선에서 싸우라 해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첫 대면이다. 벌써부터 무리한 부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약간의 경계심도 없지 않았다. 광운의 말이 가려운 곳을 너무도 시원하게 긁어 주는 것이었던지라 오히려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여하튼 좌괴로선 말을 꺼내기가 쉬워졌다. 설사 광운의 진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미 입 밖으로 뱉어진 말이다. 적어도 지키는 시늉만은 할 터였다.
“그럼 광운 장군께서는 천하가 이대로 안정될 것으로 보십니까?”
“그건 아니오. 항차 휘국과 율천국은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야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상초국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으니…….”
“바로 그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좌괴는 언성을 높여 광운의 말을 막았다.
“지금 천하의 백성들은 오랜 전란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싸움만으로도 지쳐 버릴 판인데, 항차 외국 군세의 발아래 짓밟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듣자니 상초국에선 국왕이 직접 나서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을 단 한 명도 이 땅에 발을 딛지 못하게 하겠다는 게 소생의 결심입니다만…….”
‘네 뜻은 어떠냐’고 묻는 눈빛으로 좌괴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니까 해전을 벌여야 한다는 말씀이구려. 나 역시 거기에 대비한 건 아니지만 일찍이 수군을 키워 왔소이다. 하지만 섬나라인 상초국의 수군을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구려.”
“힘을 모아야지요.”
광운의 대답이 긍정적으로 나오자 좌괴의 어투엔 점점 더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가겸후와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가 거느린 전선과 수군의 숫자도 숫자지만, 율천국은 벌써 상초국과 몇 차례 해전을 벌인 경험이 있습니다. 그걸 활용해야지요.”
“말씀의 취지는 알겠소. 하지만 가겸후가 쉽게 응하겠소? 그라면 율천국의 힘만으로 상초국을 물리치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오.”
“그럴수록 가겸후는 힘을 아끼려고 할 겁니다. 지금 그는 해상봉쇄를 기도하고 있는데, 상초국과의 전쟁으로 만약 심한 타격을 입는다면 우리 위휘군을 상대하기에 부담스러울 테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가겸후의 입장에서도 외국의 군세가 이 땅을 짓밟는 건 바라지 않을 겁니다. 이 점을 잘 설득하면 그와의 제휴가 성사될 듯도 합니다만.”
“하면 누굴 보낼 생각이오?”
“정 사람이 없다면 소생이 직접 가도 좋소이다.”
“좌 선생이 직접?”
광운의 표정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과연 편월이 좌괴를 율천국으로 보낼지 어떨지…….
“그 전에 막주군이 보유한 수군의 전력이 어떤지 정확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좌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느 군세든 간에 정확한 병력은 기밀에 속한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더러는 숫자를 줄이기도 하고 늘리기도 해서 적을 현혹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운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막주의 수군을 총동원하면 전선 일만 오천, 병력은 오만에 이를 것이오. 이보다 더 많으면 많지, 결코 적진 않을 것이오.”
“그걸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감사합니다. 그걸 바탕으로 가겸후와의 연합을 추진해 보겠습니다.”
“우선 편월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게요.”
광운의 말에 좌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것보다는, 주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태도가 조금 거슬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거론할 좌괴가 아니었다. 지금은 막주군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다. 일부러 광운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겠지만, 괜스레 거슬릴 일도 하지 않는 게 좋다.
“광운 장군의 뜻이 소생과 같아 찾아뵌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중한 예를 갖춘 후 좌괴는 밖으로 나갔다.
‘과연 일군의 군사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군.’
광운도 좌괴와의 만남이 흡족하기 짝이 없었다. 조만간 막주군과 위휘군은 통합될 게고, 그때도 그에게 군사의 직책을 맡겨도 좋을 것 같았다.
‘이제 편월만 쾌차하면 된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그건 편월의 상처가 다 낫고 다시 위휘군의 주군으로 복귀한 뒤에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광운은 마음속으로 또 한 번 편월의 쾌차를 빌었다.
3
호윤천이 참패를 당하고, 어이없을 정도로 허망하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은 가겸후의 귀에도 들렸다.
‘어리석은 자로군. 제 발로 적지에 어정어정 걸어 들어가다니.’
호윤천의 행위야 우스운 것이었지만, 그저 웃어넘기기엔 그의 존재가 아까운 가겸후였다. 그가 잡힘으로써 이제 위휘군의 배후를 어지럽힐 군세는 없어졌으니 말이다.
‘이젠 정녕 혼자 싸워야만 하는가?’
문득 가겸후는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사방에 적이 있을 때가 좋았다. 서쪽엔 조환이, 남쪽엔 증두신이 있을 땐 이런 기분에 잠길 새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갔고, 위휘군이라는 강력한 적수가 남았다. 막주군까지 통합한 그들의 힘은 이제 자신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가겸후에게 있어 편월은 도저히 살려 둘 수 없는 존재였다. 항차 황제가 될 야심에 불타고 있는 판에 그 일족이 살아 있다는 건 크나큰 장애일 수밖에 없다.
편월을 너무 방치했다는 자책감이 가겸후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처음 위휘군이 결성되었을 때 곧바로 쳐부수었어야만 했다. 이렇게 크고 난 뒤에는 달리 어찌해 볼 방도가 없었다.
‘황제 등극을 서둘러야 되는데…….’
밀어붙이기로 한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황제가 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은 명분이 약하다. 기다리고 있는 상초국은 아직도 침공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점 역시 가겸후를 초조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들이 쳐들어오기만 한다면 일거에 때려 부수고, 그걸 기화로 황제에 오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때는 천하의 누구라도 자신을 말리지 못하리라.
“전하, 폐포자가 배알을 청하옵니다.”
길게 늘어지는 보차의 목소리에 가겸후는 긴 상념에서 깨어났다.
“폐포자가? 집에서 근신하라 일렀거늘!”
“화급한 일인 줄로 사료되옵니다.”
“흐음.”
가겸후는 침음성을 토했다. 어지간한 일 같으면 보차가 저처럼 두 번씩이나 얘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폐포자에게 바쁜 볼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특별히 대면을 허락하겠다. 데리고 오도록.”
“망극하옵니다.”
보차가 빠른 걸음으로 물러갔다.
폐포자는 이내 모습을 보였다. 보차의 통보를 잔뜩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오?”
가겸후의 어투는 거칠었다. 폐포자의 공은 인정하지만, 자신에 대해 거역하는 것은 용서치 않겠다는 투였다.
“황제 등극을 서두르심이 옳은 줄 아뢰러 왔사옵니다.”
“뭣이?”
가겸후의 표정에 경악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만큼 폐포자의 말은 예상 밖의 얘기였다.
“아직은 명분이 없소.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소이다.”
가겸후의 어조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많이 풀린 상태였다. 폐포자가 황제 등극을 거론했으니, 그에 대한 대책도 반드시 세웠을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이젠 명분만 찾을 때가 아니라고 사료되옵니다. 위휘군과 막주군이 통합되었다면 그것만 해도 우리 율천국으로선 벅찬 상대이옵니다. 하물며 그들이 천하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고 있음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 힘은 더욱 커질 것이옵니다. 전하의 등극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옵니다.”
가겸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집에 연금된 상태에서도 폐포자는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도 어제저녁에나 들은 소식을 벌써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과인이 등극해야 될 이유가 그것뿐이오?”
“그 이상 더 큰 이유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이는 서둘러 시행함이 가한 줄 아뢰오.”
‘아부를 하는 건가?’
폐포자의 성격을 잘 아는 가겸후는 그의 말이 회의적으로 들렸다. 내쳐지고 보니 어떻게든 다시 복귀하고 싶어 아부를 하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가겸후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경우에도 폐포자는 아부를 할 사람이 아니다. 다른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말해 보시오. 과인이 등극해야 될 이유가 정녕 그것뿐이오?”
가겸후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전하, 실은… 이건 확인되지 않은 사항임을 유념해서 들어 주소서.”
“말해 보시오.”
“실은 황후 마마께오서 합진성에 계시는 것 같다는 징후가 포착되었사옵니다.”
“뭐라고?”
가겸후로선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여동생은 황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아니, 그보다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옥새를 그녀가 가지고 있을 공산이 컸다. 그게 만약 편월에게 전해진다면?
“대체, 대체 그 같은 첩보는 어디서 들은 것이오?”
가겸후는 재우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확인된 건 아니라고 미리 말씀드렸사옵니다. 하지만 소신이 사사로이 부리는 간인이 윤주성에서 적린을 보았다고 하옵니다. 고귀한 신분으로 보이는 세 명의 여성 분과 함께…….”
“적린이 대체 누군가?”
폐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겸후는 또다시 성급하게 물었다. 도무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폐포자는 적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어김없는 사실이렷다?”
“세 명의 여성이 누군지는 지금도 계속 확인하고 있사오나, 적린이 윤주성으로 간 건 분명하옵니다. 거기에서 다시 합진성으로 옮겨 갔사옵니다.”
“끄흐음.”
가겸후는 기묘한 신음성을 토했다. 들을수록 그 세 명의 여성이 가 황후 일행일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여동생이 사라진 날, 그녀가 부리던 시녀 두 명도 함께 자취를 감췄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어떻게…….”
가겸후는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미 황제의 죽음은 천하에 발효한 뒤였다. 그 배후에 상초국이 아닌 자신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황제로 등극하기는커녕 천하의 공적이 될 건 뻔한 일이다.
“그러니 등극을 서둘러야 하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위휘군 내에서는 황제의 죽음에 대해 세세하게는 모르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그들이 작은 낌새라도 눈치 채기 전에 전하께오서 등극을 하신다면 뒤에 다른 말을 할 자는 없을 것이옵니다. 설혹 있다고 해도 그때는 대역의 죄를 물어 징벌하시면 될 것이옵니다.”
아직은 천하가 소란으로 들끓고 있는 난세이다. 우선 저질러 놓고, 저항하는 자들은 힘으로 제압한다고 해서 손가락질받을 일은 아닌 것이다.
“만약 황후가 옥새를 가지고 갔다면?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게 가짜라는 게 들통 나지 않겠는가?”
“옥새 따위엔 연연하지 마시옵소서. 그보다는 등극의 절차를 서둘러 시행하심이 옳은 줄 아뢰오.”
“흐음.”
이번에도 가겸후는 즉답을 피했다. 아무리 침착해지려고 해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폐포자는 확실치 않다고 했지만, 어느 정도 자신이 없고서는 이런 말을 할 턱이 없다.
‘어이한다? 정녕 이 일을 어이해야 좋단 말인가?’
“전하!”
폐포자가 언성을 조금 높여 가겸후를 불렀다. 대답을 독촉하는 것이다.
“상량해 보겠노라.”
지금 가겸후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게 다였다.
“조속히 서두시는 게 가한 줄 아뢰오.”
“상량해 보겠다고 하질 않소!”
조금은 짜증스럽게 가겸후가 내뱉었다. 서둘러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었다.
“알겠사옵니다.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더 이상 채근해도 가겸후로부터 답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깨달은 폐포자는 조용히 예를 갖추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폐포자.”
나직이 깔린 음성으로 가겸후는 폐포자를 불렀다.
“예, 전하.”
“내일부터는 그전처럼 출사하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다시 한 번 깊숙이 허리를 숙인 후, 폐포자는 물러갔다.
‘자객을 보낼까?’
무의식중에 생각 하나를 떠올린 가겸후는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스스로도 너무 무참하고 잔혹하다고 여긴 탓이었다.
자객을 보낸다면 그건 의당 가 황후를 죽이기 위함이다. 아무리 험악한 세태라 해도 친동생을 죽인다는 건 꺼려지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미워도 말이다.
‘그럼 역시 황제 등극을 서두르는 게 좋을까?’
아무 명분도 쌓지 못한 지금 자신이 황제에 오른다면 부작용이 엄청날 게다. 특히 편월을 필두로 한 위휘군은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 게 뻔하다.
그게 두려운 건 아니다. 그들이 저항하고 반기를 든다면 힘으로 억누르면 그만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게다. 막주군을 흡수한 위휘군은 폐포자의 말처럼 천하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땅을 차지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성해지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게다가 상초국의 동태도 신경 쓰였다. 한창 위휘군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양쪽으로 적을 맞게 되는 셈이다. 어떻게든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내가 먼저 상초국을 친다?’
급기야 가겸후는 이런 생각까지 떠올렸다. 그가 얼마나 초조한지 극명하게 보여 주는 예였다.
‘침착하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자.’
가겸후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황제로 등극한다는 가슴 뻐근한 기대감과, 동생인 가 황후가 편월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불안감, 위휘군과 상초국을 상대로 동시에 전쟁을 벌였을 때의 대비책 강구 등으로 그날 가겸후는 밤을 잊었다.
* * *
마두성으로 들어온 지 사흘째. 마침내 편월은 힘겹게나마 혼자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 즉시 편월이 광운과 만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감개가 무량했다. 헤어져 있던 지난 세월 동안 쌓인 얘기가 산더미 같아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건 광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로서는 다른 무엇보다 편월의 성장이 눈부셨다.
정허군을 내는 조건으로 마용승은 두 사람을 갈라놨었다. 어린 편월을 보낸 후 광운으로선 하루도 걱정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편월은 어엿한 휘국의 주인이 되어 있다. 비록 정식으로 건국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위휘군에 소속된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자신까지도!
“광운 장군께서는 막주군이 위휘군의 지휘를 받아도 무방하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말이 없자 배석한 좌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 쳐도 군사적인 문제, 특히 막주군이 위휘군에 통합되었다는 얘기를 먼저 꺼내는 건 무슨 까닭에서일까?
당연히 여기엔 좌괴의 숨겨진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바로 두 사람의 위치에 대한 거였다.
말할 것도 없이 편월은 위휘군, 다시 말해 이제 곧 건국될 휘국의 주군이다. 아무리 광운이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지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과 같은 행동은 거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막주군이 위휘군에 통합되었다는 것부터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광운도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일조일석에 편월을 대하는 태도를 고칠 수는 없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만하기 다행이야. 좌 선생의 말대로 우리 막주군을 위휘군에 맡기기로 했어. 유용하게 써 주면 고맙겠군.”
“고마워, 광운.”
편월이 아무리 똑똑해도 좌괴의 말속에 담긴 뜻까지 알아차리기엔 아직 어리다. 과다 출혈로 창백해진 얼굴에 미소를 그려 내며 광운에게 고맙다고만 했다.
좌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언질을 주었음에도 예전과 똑같이 서로를 대하는 두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한편으로 좌괴는 단단한 벽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편월과 광운,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낄 자리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계천자의 말을 좇아 편월을 따르는 이유와 보람이 없어지고 만다. 무예를 익히지 못했기에 장수로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대신 그 장수들을 부릴 수 있게끔 병법을 연구했다.
그 결과 계천자의 눈에 들었고, 욱일승천의 기세로 마구 세력을 불리고 있던 위휘군의 군사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와서 새삼 광운에게 밀린다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할 수는 없다. 그래 봐야 역효과만 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주군, 호윤천을 어떻게 처리하실 작정이십니까?”
좌괴는 화제를 돌렸다. 지금으로썬 호윤천의 처치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편월은 광운을 돌아보았다. 그의 의중을 묻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광운은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의견을 개진한다면 지휘권을 모두 맡긴다는 말에 위배되고, 또 좌괴를 비롯한 위휘군 장수들과 알력을 빚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주군.”
“목을 베어야겠지. 그게 곽 장군을 위로하는 일이 될 거야.”
좌괴가 재차 불렀을 때에야 편월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말을 뱉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시행하겠습니다. 호윤천의 목을 벤 후에 주군께선 조속히 합진성으로 돌아가십시오. 거기서 정양을 하시면서, 가겸후와의 제휴를 추진하십시오.”
“가겸후와?”
편월은 놀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가겸후와 손을 잡으라니?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재빨리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가벼운 한숨을 던진 후 좌괴는 입을 열었다. 상초국의 위협이 엄연히 상존해 있고, 그들과는 해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설했고,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율천국의 수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애써 설명했다.
그러나 사실 좌괴의 장황한 설명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상초국과 해전을 치러야만 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 벌써 편월은 왜 가겸후와 손을 잡아야 하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좌 선생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어.”
광운이 한마디 덧붙였다. 다섯 살 그 어린 나이에 마용승의 사자로 율천국에 갔다가, 가겸후의 추격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긴 편월이다. 행여 그때의 감정으로 이 군사적 동맹까지 저버릴까 싶어 염려가 되었다.
“물론 가겸후가 어려운 조건을 제시할지도 모릅니다. 어지간한 건 들어주는 한이 있어도 이 동맹은 성사시켜야 합니다.”
편월이 말이 없자 좌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빛이 형형한 걸 보니 어떤 일이 있어도 편월을 설득시키겠다는 결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
“사자로 갈 사람은 정했나?”
“허락하시는 겁니까?”
편월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괴가 확인하듯 되물었다. 사자 인선 운운하는 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허락이고 뭐고 벌써 결정된 것 같군. 광운도 찬성한다고 했고.”
편월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좌괴는 기뻤다.
“아직 사자는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주군의 뜻만 확고하다면 그 일은 합진성으로 돌아가신 후에 결정하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좋도록 해.”
편월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빨리 좌괴를 내보내고 광운과 단둘이서만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럼 소생은 나가서 곧바로 호윤천의 형을 집행하겠습니다. 죄목은 마용승 공 일가를 참살한 것으로 하면 될는지요?”
“좋도록.”
“주군께서도 합진성으로 가실 채비를 하십시오. 호윤천의 목을 치는 대로 곧장 출발하셔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편월은 대답을 대신했다. 그 역시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이 마두성에 오래 머물긴 싫었다.
밖으로 나온 좌괴는 그길로 위휘군과 곽가군 그리고 마두성의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호윤천의 형 집행에 참석시키기 위해서였다.
위휘군 장수들이 가장 먼저 모습을 보였다. 좌괴는 맹아에겐 편월이 떠날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추라고 일렀고, 오강에겐 직접 호윤천의 목을 벨 것을 명했다.
거기다 곽가군 장수들이 들이닥쳤고, 이내 가벼운 설전이 벌어졌다. 팽요가 호윤천의 목만은 자신이 직접 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패전 이후 기가 꺾인 곽준방이 양보했고, 결국 오강이 직접 호윤천의 목을 치기로 했다.
비단 호윤천만이 아니었다.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호가군 장수 십여 명도 함께 참수해서 그 목을 성루에 효수하기로 했다.
“지체할 일이 아니오. 조속히 시행하시오.”
좌괴는 서둘렀다. 상초국이라는 외국의 침입을 막고, 또 천하를 다투는 일에서 율천국을 이기자면 할 일이 많다. 눈알이 팽팽 돌 만큼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
이미 명을 받은 병사들이 호윤천과 호가군 장수들을 옥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북소리와 소라고둥 소리를 뒤로하고 편월은 마두성 정문을 나섰다. 그 성루에는 호윤천과, 끝까지 그와 뜻을 같이했던 호가군 장수들의 목이 나란히 효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