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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단초逆戰端初 2 (60/66)

역전단초逆戰端初 2

1

사흘 동안 감곡산 수림을 태운 불길이 이윽고 외천성으로 옮겨붙을 즈음 편월이 이끄는 위휘군은 패주하는 호가군을 맹추격 중이었다.

그사이 난계성을 떨구고 호가군의 군량을 불사른 곽가군이 합류했음은 물론이었다.

이런 식의 맹추격에 대해서 좌괴는 처음부터 반대였다. 뒤에 너무 많은 건주의 성을 남겨 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언제 배후를 찔릴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편월은 막무가내였다. 이 기회가 아니면 호윤천의 숨통을 끊을 수 없다고 느낀 것이다.

또한 호윤천은 산재한 건주의 성에 들어갈 여유가 없었다. 그만큼 위휘군의 추격이 그 꼬리를 바짝 물고 있었다.

어쩌면 건주의 성에선 호윤천을 버리려고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호가군을 받아들이려고 성문을 열었다가는, 위휘군까지 쏟아져 들어올 것 같은 위험을 느꼈으리라.

그 점은 누구보다 호윤천이 잘 헤아리고 있는 듯했다. 그는 어떤 성에도 들어가려 하지 않고, 곧장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어느새 또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사방이 물새의 머리 빛깔처럼 희뿌염해지며, 대지에서부터 어둠이 퇴적되기 시작했다.

“오늘 추격은 여기까지 합시다.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그리 능숙지 못한 기마술로 간신히 편월을 따라잡으며, 좌괴는 소리를 높였다. 이건 추격전의 기본이다. 밤중에 적의 대군을 추격하다가 역습이나 매복에 걸려 오히려 낭패를 본 경우가 흔하다.

편월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대로 추격을 계속하면 내일 새벽녘에는 호윤천을 잡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좌괴의 말도 무시할 수 없다. 비록 승리한 여세를 몰아 추적 중에 있지만, 단순히 병력만 따진다면 호가군에 비해 아군이 월등히 많은 것도 아니다. 무리한 추격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소. 병사들도 지치고 배가 고플 게요. 마침 야영하기에도 딱 좋은 지형이니, 오늘은 여기서 머무는 게 어떻겠소?”

추격전이 시작된 이후 줄곧 편월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송지가 좌괴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편월은 사방을 살폈다. 송지의 말이 맞았다. 야트막한 구릉과 평지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지형이라 대군이 야영하기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좋소. 전군을 정시시켜 야영 준비에 들어가시오. 각 부대별로 기마술에 능한 병사를 열 명씩 뽑아 척후를 내보내는 걸 잊지 말고. 호윤천과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인근에 어떤 성이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겠소.”

“존명!”

편월의 명은 곧바로 전령과 기수를 통해 각 부대로 전달되었다.

“본진은 저 구릉 위에 설치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송지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막 어둠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려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구릉이었다.

“좋을 대로.”

편월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본진 따위야 어디에 설치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 언제쯤 호윤천의 덜미를 잡을 수 있는가 하는 거였다.

어쨌든 편월의 허락이 떨어졌다. 근위대를 비롯한 본대에 배속된 병사들 중 일부가 일제히 송지가 가리킨 구릉으로 달려갔다. 본진을 형성할 막사 등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군량 사정은 어떻소?”

편월의 질문에 송지는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쫓기든 추격을 하든 병사들은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러나 추격전 자체가 곧 속도전이니, 보급 부대까지 일일이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군량 사정이 어렵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 한 일이다.

그래도 보고는 해야 할 터. 송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애당초 추격을 시작할 때 병사들 각자에게 사흘 치의 식량을 지참하라고 일렀소이다. 그러니 오늘이나 내일 아침이면 지참한 식량들이 바닥날 것이오. 보급대와의 거리는 엄청나게 벌어졌을 게고…….”

차마 끝을 맺지 못하는 송지의 말을 편월은 귀담아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역시 사정을 익히 아는 까닭에서였다.

“난계성을 떨군 곽가군이 군량을 좀 탈취해 오지 않았을까?”

“그들도 합류하면서 사흘 치만 지참했을 거요. 속사정을 살펴보면 다른 부대보다는 좀 낫겠지만, 별반 차이는 없을 거요.”

“이 근처에 있는 성들 중에서 우리에게 협조해 줄 성은 없겠소?”

“그렇지 않아도 소생이 오늘 밤 중으로 만율성滿栗城에 다녀올까 합니다.”

이 대답은 좌괴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편월과 송지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끼어든 참이었다.

“만율성?”

“예로부터 성안이나 성 밖에 밤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지요. 지금 성주는 고작 일곱 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힘으로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면 곧장 항복할 것입니다.”

좌괴의 말에 편월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무리 난세라지만 고작 일곱 살짜리에게 협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주군,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우리가 아니더라도 일곱 살짜리 성주가 기업을 잇기는 어려운 세상이오. 차라리 협조하는 조건으로 우리가 보호해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오.”

송지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이건 인정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귀착歸着될 수도 있는 일이다.

“알았어. 되도록 부드럽게 협조를 요청해 봐. 항복이란 말은 가능한 사용하지 말고.”

“존명!”

“병력은 얼마나 필요하시오?”

말 위에서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좌괴에게 송지가 물었다. 여전히 군감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 당연히 물어봐야 했다.

“오천은 있어야겠소이다.”

“아니, 오천씩이나?”

“성으로 들어가는 건 백 명이면 충분하오. 나머지는 성 밖에서 시위를 하는 거지요.”

좌괴는 이제 막 세워진 본진의 막사 쪽으로 가는 편월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너무 거칠게 하지 말라는 조금 전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송지는 달랐다. 이왕 결정된 일이면 어설프게 하기 싫었다.

“그렇다면 한 일만 정도 데려가는 게 어떻겠소?”

“병사들도 쉬어야지요. 내일도 새벽부터 추격전이 시작될 테니.”

편월의 뒤를 따르며 좌괴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자신감이 확고한 모습이었다.

“오늘 밤 해시에 떠나 내일 인시경에 첫 전령을 보내겠소. 그 후론 한 시진에 한 번씩 보내겠소. 최대한 많은 군량을 확보해서, 최대한 빨리 합류하겠소이다.”

“허 참!”

송지로선 탄성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좌괴의 말을 듣다 보니 어느새 일이 모두 성공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만약 이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송지가 이처럼 마음 가벼이 들어 넘겼을 리 없다. 지금껏 ‘된다’고 해서 이루지 못한 일이 없었던 좌괴의 말이었기에 무턱대고 믿어도 좋을 듯했다.

본진의 막사에 들어가니 투구를 벗은 편월 앞으로 식사가 날라지고 있었다. 물론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곧 모여들 장수들의 것까지 준비되는 중이었다.

어쨌든 빨랐다. 추격을 멈추라는 명이 내려진 지 고작 반 시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진막이 세워지고 장수들의 식사가 준비되고 있다. 이만한 기동력은 다른 군세에서는 보기 힘들 터였다. 그 예로, 같이하고 있지만 곽가군은 여전히 행동이 느린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비결은 이렇다. 우선 식사 문제를 보자면, 편월은 그 옛날 파양주에서 먹었던 군량을 항시 잊지 못했다. 물을 붓고 동봉된 숯에 불을 붙여 끓이기만 해도 훌륭한 고기 죽이 되었던 그 음식 말이다.

그 후로 편월은 틈만 나면 그것을 생각했고, 마침내 똑같이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그보다 좀 더 낫게 개량하기도 했다.

파양주에서 먹었던 건 물을 붓고 숯으로 끓여야 했다. 하지만 편월이 개량한 건 그냥 뜨거운 물만 붓고 조금만 기다리면 됐다.

간단한 것 같아도 이 차이는 크다. 병사들이 일일이 숯을 피워야 된다면, 그중에서 빠르고 늦는 사람이 분명히 생긴다. 시간이 많을 때야 상관없지만, 급박한 작전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저런 차이는 지휘관을 곤혹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 배고픈 병사를 이끌고 전쟁을 치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끓는 물만 붓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각 부대별로 한꺼번에 끓여서 병사들에게 일괄 지급하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막사의 문제도 그렇다.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그 위에 휘장을 치고 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편월은 아예 하나의 막사를 세우는 기둥 전체를 한꺼번에 통합할 수 없을까 하고 고민했다.

그 고민을 해결해 준 사람은 윤주 출신 목수인 장오張五란 자였다. 그는 막사에 쓰이는 기둥 수를 대폭 줄였고, 거기에 교묘한 각도로 못질을 해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즉, 이동 시엔 접어서 하나로 묶을 수 있고, 야영 시에 펼치면 그대로 막사를 세울 수 있는 기둥이 되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일일이 기둥을 하나씩 박아 세울 때보다 훨씬 시간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었다.

각설하고,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장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때에도 가장 늦은 건 역시 곽준방을 비롯한 그 예하 장수들이었다. 그들에겐 위휘군과 같은 준비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 우선 드십시다.”

편월의 말에 장수들은 일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점심도 거른 채 내처 달리기만 했던 추격전이었다.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도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곽준방만은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아무리 위휘군에 얹혀 있는 객군客軍이라지만, 자신과 편월은 애당초 신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어느새 편월은 쑥쑥 성장해 자신을 압박해 오고 있다. 지금 당장만 해도 식사를 하자는 한마디에 장수들은 일제히 따르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심복들까지도.

“대장군, 뭔 생각이 그리 깊으십니까? 어서 드시지 않고요.”

곽준방의 왼쪽에 앉아 있던 팽요가 한마디 했다.

“으응? 아, 어서 드세.”

그제야 곽준방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잡한 심사는 쉬이 편해지지 않았다.

‘내 생각이 너무 고루한가?’

이건 곽준방의 뼈아픈 자기반성이었다. 지금 위휘군엔 담개를 비롯한 정규군 출신의 장수들이 많다. 심지어 한 성의 성주였던 거규도 있고, 그들 모두는 편월에게 주군이라는 칭호를 망설임 없이 붙이고 있다.

‘시대는 다시 풍운에 휩쓸리고 있거늘…….’

확실히 그랬다. 비록 지난날처럼 우후죽순 격으로 호걸 패주들이 난립하는 건 아니지만, 벌써 강국과 허주가 멸망했다. 또한 한때 대륙의 삼 할을 차지했던 파양주도 막주군의 손에 거덜 나다시피 했고, 이제 곧 그 마지막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호가군도 괴멸될 게 뻔하다는 게 곽준방의 생각이었다.

겉보기엔 정돈되어 가는 듯한 게 사실이다. 여러 나라가 합쳐지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곽준방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곧 천하의 향방을 결정할 거대한 바람이 불 것임을!

그게 율천국과 위휘군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고, 호시탐탐 이 땅을 노리는 상초국으로부터 불어올 수도 있다.

그런 와중에 자신만 신분 타령을 하고 있는 게 옹졸한 소행인 것 같아 곽준방은 견디기 힘들었다. 곧 거대한 바람이 닥쳐올 것을 알면서도, 그 바람에 맞설 힘을 비축하지 못한 자신의 용렬함도 아프게 새겨졌다.

“주군, 그럼 소생은 만율성에 다녀오겠습니다.”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친 좌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모쪼록 너무 거칠게 일을 처리하진 마.”

편월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자기보다 연상인 좌괴를 마치 어린아이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괴는 정중한 예를 갖추고는 막사를 빠져나갔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지 곧바로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뒤흔들며 멀어져 갔다.

“만율성엔 무슨 볼일로……?”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흐리며 곽준방이 물었다. 방금 달려간 말발굽 소리로 미루어 짐작건대 족히 오천은 될 병력이었다. 그 정도 병력이 움직이는 작전을 모른대서야 아무리 객군이라도 아군이라고 할 수 없다.

“아, 군량미를 좀 빌어 볼까 해서요.”

경어를 쓰긴 했지만 이번에도 편월의 대꾸는 가벼웠다. 오천의 병력이 움직이는 작전을 가벼이 여기는 건지, 아니면 곽가군 자체를 우습게보는 건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어느새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곽준방은 발견했다.

‘내가 꼬마 장군을 질시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군량미를 얻고자 하는 작전을 알지 못했다고 해서 화를 낼 이유가 없다. 어쨌든 그건 생사를 다투는 전쟁이 아니니까 말이다.

‘여기서 화를 내면 안 된다. 바람이 일고 있는 이 시대를 잘 읽어야 한다.’

편월에게 뭔가 얘기하고 있는 담개를 보면서 곽준방은 심중의 노기를 가라앉혔다.

‘저만한 인물도 심복하고 있다면, 꼬마 장군에게 뭔가 있다는 의미다. 내 마음을 고쳐야 한다.’

그것만이 곽가군이 살길이라고, 한평생 전쟁으로 자고 깬 노장 곽준방은 생각했다.

물론 이건 이성만의 외침이다. 감정은 여전히 편월을 어린 잡가군으로만 여겼고, 심지어 지난날 조천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대장군?”

또다시 팽요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만큼 곽준방의 얼굴은 심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오?”

송지 역시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만이 아니라 막사 안에 있는 모든 장수들의 시선이 곽준방에게 몰려 있었다.

“허허허허.”

곽준방은 너털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의 무안함을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다.

“아무래도 나이는 속일 수 없나 보오. 요 며칠 좀 무리를 했다고 이런 꼴을 보였으니…….”

말꼬리를 흐리며 곽준방은 또다시 커다란 웃음을 토해 냈다.

‘정녕 늙었구나. 이젠 아예 폐물이 되고 말았어.’

바로 이게 웃음으로 감추려는 곽준방의 진정한 속내였다.

한평생을 무인으로, 무장으로 살아온 곽준방이다. 천성이 음험한 건 아니었지만, 난세를 헤치며 살다 보니 자연스레 속내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게 곧바로 생명과 직결되는 경우도 왕왕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젠 표정 하나 감추지 못하게 된 모양이다. 속마음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냈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만약 적이었다면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 되었으리라.

“하긴 곽가군은 이번에 고생이 많으셨소. 난계성을 떨구자마자 곧장 추격전에 합류했으니, 그 노고가 얼마나 컸겠소.”

“그렇다마다요.”

담개의 치하에 송지와 서진청이 거의 동시에 맞장구를 쳤다. 같은 노장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어투였다.

곽준방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얼굴에 드러난 속내를 숨기고자 했던 거짓말에, 위휘군의 노장들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줬다. 그들의 순수함에 비해 자신은 너무 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주군, 곽가군에 후미를 맡기는 게 어떻겠소? 뒤에 남겨 둔 성들도 억누르고, 보급대와의 연결도 꾀하고…….”

“당치도 않은 말씀!”

편월을 향한 담개의 말을 곽준방은 커다란 목소리로 잘라 버렸다.

“호윤천은 윤 대부인과 마 공자를 죽인 장본인이오. 자연 우리 곽가군과는 철천지원수와 진배없소이다. 그런데 우리더러 후미에 남으라니? 그럴 수는 없소이다. 호윤천의 목은 기필코 내 손으로 직접 딸 작정이오! 이 점 유념해 주시오.”

곽준방의 목소리는 우렁우렁하게 진막 안을 울렸다. 사람까지 달라진 것처럼 눈빛이 새파랗게 살아났고, 수염은 뻣뻣하게 곤두섰다.

진막 안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호윤천을 벼르고 있는 건 편월도 마찬가지였다. 두 군세의 대장군이 모두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으니,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이건 좋은 현상일 수도 있다. 두 개의 군세가 한 가지 목표로 통합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군세, 즉 이들이 모두 무장이라는 점에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공명심에 불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게 바로 부와 명예를 상징하는 것이고, 나아가 이 전국난세에서는 절대적 가치 중 하나가 된다. 어떤 경우든 양보라는 말은 쉽게 떠올릴 수 없다는 얘기다.

곽준방의 말에 가장 마음을 졸인 사람은 팽요였다. 지장인 그로서는 금방이라도 편월이 곽가군 단독으로 호가군을 공격하라고 할까 봐 염려스러웠다.

이제 장수들의 시선은 편월에게 꽂혔다. 특히 위휘군에 소속된 장수들의 눈엔 화광이 일렁거렸다. 누구보다 호윤천을 베겠다는 주군의 뜻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튀어나온 편월의 한마디에 뭇 장수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이러면 어떻겠소? 우리 위휘군과 곽가군이 시합을 하는 거요. 어느 쪽이 먼저 호윤천의 목을 베는지! 물론 군사의 수는 똑같이 할 거요.”

“주군!”

담개와 송지가 동시에 편월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다른 건 몰라도 곽가군과 똑같은 숫자로 호가군을 치겠다는 말이 가장 걸렸다.

곽가군은 잘해야 일만 오천이다. 그 숫자에 맞춰 위휘군을 동원한다면 고작 삼만이다.

그에 비해 호가군은 아직도 칠팔만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었다. 비록 쫓기는 군세라 사기는 형편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시합이라고 표현했지만, 편월의 말이 장수들에겐 장난기가 섞인 걸로 들렸던 것이다.

곽준방도 곤혹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이 시합을 받아들인다면 편월의 장난기에 동조하는 것 같고, 거절하자니 도전을 피하는 것 같아 찜찜했다.

그 같은 곽준방의 찜찜함을 덜어 준 건 맹아와 오강이었다.

“그거 재미있을 것 같소, 주군. 당연히 우리 근위대는 포함시켜 주시겠지요?”

“거기다 우리 흑월대가 가세하면 얼추 숫자가 맞는군.”

확실히 이들은 젊었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보다는, 아직은 전쟁 그 자체를 즐기는 기색이 다분했다.

하긴 무턱대고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젊은 혈기가 곧바로 전군의 사기 진작으로 연결되는 단초가 되니까 말이다.

여하튼 두 사람의 발언으로 진막 안이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시합에 대한 찬반이 엇갈린 탓이었다.

하지만 그건 길지 않았다. 편월의 뜻이 워낙 완강했고, 그걸 도전이라 여긴 곽준방도 동조의 뜻을 표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따라 위휘군 장수들 사이에선 또 한차례 설전이 벌어졌다. 곽가군이야 있는 병력을 그대로 움직이면 되지만, 오만에 이르는 위휘군 병력 중 어느 부대가 이 시합에 참가하느냐를 놓고 서로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젊은 장수들의 뜻이 대폭 수용되어 근위대와 흑월대 전부 그리고 적월대 일부를 포함한 일만오천의 병력이 선발되었다.

거기에 담개는 또 하나의 조치를 첨가했다. 자신과 송지를 제외한 편장 급 이상의 장수들을 모두 편월에게 딸렸다.

그렇다고 뒤에 남은 군세가 그저 보급이나 관장하며 편안히 있는 건 아니었다. 그대로 스쳐 지나온 성들 중에서 불온한 기미가 보이는 곳은 깨뜨리고, 혹은 항복시키는 임무가 주어졌다. 바야흐로 위휘군으로서는 전력을 다한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셈이었다.

2

시합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좌괴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만율성의 일을 훌륭하게 처결하고, 담개와 합류한 뒤의 일이었다.

“뭐가 그리 우습소?”

담개는 의아하게 좌괴를 보며 물었다. 그가 불같이 화를 내며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말하리라 예상한 탓이었다.

“너무 기뻐서 웃는 것이오. 하하하. 이제 주군은 가히 한 나라를 다스려도 될 만한 경륜을 갖추셨소이다.”

“그럼 좌 선생은 주군의 행위에 동조하신단 말씀이오?”

“이르다 뿐이오. 나라고 해도 그 이상 좋은 계책은 세울 수 없을 것이오.”

“계책이라니? 어린애 장난 같은 그 시합에 무슨 계책이 있단 말이오?”

“아주 훌륭한 계책이지요. 이제 곧 곽가군은 우리 주군의 휘하에 들어올 것이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 시합에서 우리가 이긴다는 말이외다.”

“허어, 참.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를 해 주시오.”

뜬구름 잡는 듯한 좌괴의 말에 담개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우선 우리 위휘군이 만에 하나 호가군에 패할 가능성이 있소?”

“그야 위휘군 전체가 출동했다면 질 리는 없소이다. 하지만 고작 삼만의 병력으로 그 배가 넘는 군세를 추격하고 있으니,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소이다.”

“뒤에 우리 삼만 오천이 버티고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패할 리는 없소이다. 그에 비해 곽가군은 어떻소?”

확신에 찬 장담의 말 뒤에 좌괴는 곽가군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의 지원 없이 곽가군 단독으로 호가군을 친다면 오히려 역습을 당해 위기에 처할 거요. 그대로 둔다면 말할 것도 없이 전멸!”

이번에도 단호하게 말을 맺은 좌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던진 말의 의미가 사람들의 가슴에 정확히 파고들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곽 장군이 그렇게까지 사태를 몰고 가지 않으려면 당연히 주군의 품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오. 지금까지는 상초국을 친다는 명분을 가졌던 객군이었더라도, 그때부터는 패군이 되는 것이오. 자고로 패군은 받아 주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복속되는 게 상례였소.”

아무도 좌괴의 논리에 반박하지 못했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합으로 인해 아군의 사기는 한껏 고무되었을 것이오.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적과 아군에 동시에 작용되니, 평소보다 두 배의 힘으로 싸울 것 또한 뻔한 이치가 아니겠소?”

“주군께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소.”

“하하하.”

약간의 의심과 우려를 표명하는 담개의 말에 좌괴는 가볍게 웃었다.

“주군을 가볍게 생각지 마시오. 듣자니 그분은 갓난아기 때부터 전장을 누비셨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이미 전쟁의 귀신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오. 전쟁이 어디 힘만으로 하는 것이오? 온갖 전략과 계책, 계략이 난무하는 게 바로 전쟁이오. 뒷날 주군을 뵙거든 여쭤 보시오. 이 모든 게 벌써 주군의 머리엔 다 들어 있을 것이오.”

“모르겠어, 모르겠소이다.”

평생 올곧게 무장의 길만 걸어온 담개였다. 병법이나 작전에는 누구 못지않지만, 이런 간계와 비슷한 계략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의 술회는 그의 진심이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송지의 입장은 약간 달랐다. 그 역시 잡가군 출신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든 편월이 칭찬받으니 저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돌았다.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지요. 소생은 우선 이 우행성宇行城과 마두성馬頭城을 떨궈야 된다고 생각하오만.”

한차례 편월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은 좌괴는 곧장 다음 할 일에 대해 언급했다.

“아니, 그럼 군사께서는 주군과 합류하지 않으실 작정이오?”

송지가 깜짝 놀란 듯 물었다. 그는 의당 좌괴가 편월에게 달려갈 줄로 알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의 주군께는 소생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오. 그보다는 앞장서 달리고 계신 주군의 후방을 깨끗하게 해 두는 게 소생의 임무라고 생각하오.”

딱 잘라 버리는 좌괴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이내 조금 전에 거론했던 문제로 돌아갔다.

“만율성은 이미 항복했으니, 다음은 우행성과 마두성을 칠 병력을 나누는 일인데…….”

“꼭 그들을 쳐야만 하는 거요? 만율성처럼 항복을 권유해도 되지 않겠소이까?”

송지였다. 그로선 가능하다면 싸움 없이 인근 성들을 제압하고 싶었다. 병사 한 명이라도 소중한 때이니, 군감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었다.

“만율성은 성주가 어려 단순한 위협만으로 굴복시킬 수 있었소. 그러나 이 두 곳의 성주는 역전의 명장이오. 항복 따위는 생각지도 않을 터, 어떻게든 깨뜨릴 수밖에 없는 곳이오.”

“흐음.”

“이 두 곳을 깨뜨리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또 하나 있소. 우행성과 마두성은 건주에서도 이름난 성이오. 그러니 두 곳을 함락시킨다면 건주의 다른 성들은 우리에게 감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오.”

이번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두 개의 성을 쳐서 나머지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한 일이다. 또한 그건 일선에서 호윤천을 바짝 추적하고 있는 편월에게도 지대한 힘이 될 터였다.

“내가 우행성을 맡겠소. 병력은 일만 오천이면 될 게요.”

담개가 먼저 자청하고 나섰다. 남은 병력은 삼만 오천, 그 중에서 일만 오천을 원했다.

어차피 남은 위휘군을 지휘할 사람은 지금으로썬 자신과 송지뿐이다. 자연히 마두성은 송지 몫이 될 게고, 그에게 조금이라도 많은 병력을 붙여 주고 싶었다.

송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워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조속히 일을 처리하는 게 상책이란 판단에서였다.

두 사람의 마음이 결정되자 좌괴는 차분한 어조로 작전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 * *

마침내 외천성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광운의 마음은 밝지가 않았다. 성에서 저항하던 일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모두 전멸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 어떤 장수가 승리를 바라지 않을까마는 광운은 이런 식의 승리는 결코 바라지 않았다. 전멸이라니? 이들이 과연 그처럼 격렬하게 저항할 이유가 있었을까?

‘두려웠던 걸까, 우리 막주군이?’

광운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최후까지 저항했을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이고, 그게 자신이 이끄는 막주군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명예라는 것도 있다. 성주로서, 무장으로서 타인의 힘에 굴복하기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말단 졸자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그들에겐 목숨까지 버려 가며 지켜야 할 명예 의식이 희박하다. 항복해도 용서받을뿐더러 설사 도망치더라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래도 화공은 너무 우악스러웠어.’

이제 와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이지만, 광운은 수자윤에게 화공을 허락한 걸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지는 외천성을, 최소한의 병력을 희생시키면서 얻고자 했던 자신의 욕심 탓이라는 반성에 뼈가 아렸다.

“대장군. 대장군 어디 계시오?”

어디선가 고숭의 목소리가 광운을 찾았다. 아직도 완전히 꺼지지 않은 곳은 불길에서 내뿜는 연기가 자욱이 깔려 있어 시계가 흐려진 탓이었다.

“여길세.”

“아직 위험한데 어찌 혼자 계십니까?”

다급하게 찾던 것과 달리 고숭은 광운의 신변부터 염려했다.

“적은 모두 전멸하지 않았나. 뭐가 위험할 게 있다고…….”

광운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래도 개운치 않은 승리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찾아온 겐가?”

“아, 수군제독 주융 장군으로부터 전령이 왔습니다.”

“뭣이? 주 제독에게서? 그래, 내용은?”

“아직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대장군께 직접 아뢸 모양입니다.”

“알겠네. 앞장서게.”

두 사람은 자욱한 연기를 헤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전령은 성의 정문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의식이 있긴 했지만, 수군의 몸으로 먼 길을 말로 달렸으니 지칠 만도 했을 터였다.

“성주님을 뵈옵…….”

“됐다. 그대로 쉬면서 얘기해라. 전갈은 뭔가?”

일어나 예를 갖추려는 전령을 제지하며 광운은 부드럽게 물었다.

“전선 일만 척, 수군 삼만 오천이 예진포睿眞浦 앞바다에 정박 중.”

말을 더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전령은 간단명료하게 보고했다.

“그래? 드디어 왔는가?”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감탄하고 있는 광운의 혼잣말이었다.

편월로부터 수군을 지원 바란다는 요청을 받고 그동안 줄곧 안달하고 있던 광운이다. 자신이 막주에 있었다면 당장 보내 줬을 텐데, 아무래도 진도수를 통하다 보니 모든 게 지지부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수군이 출동해서 예진포까지 왔다고 한다. 그것도 전선 일만 척에 병력 삼만 오천까지 싣고서!

외천성에서 원치 않은 승리를 얻은 찜찜함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리는 걸 광운은 느꼈다. 편월이 자신에게 바랐던 걸 해 줄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리라.

“그런데 예진포는 어디인가?”

불현듯 고숭이 물었다. 막주 출신인 그로선 건주의 지리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칠백 리쯤 떨어진 곳일세. 일만 척의 전선이 정박하기엔 비좁을 텐데, 주 제독이 고생이 많겠구먼.”

천하를 떠돌던 잡가군 시절을 떠올리며 광운이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럼 우리의 행군 경로를 바꿔야 합니까?”

지금까지 막주는 정동으로 진로를 정하고 진격했다. 주융과 합류하려면 방향을 남쪽으로 조금 트는 수밖에 없다.

“아닐세. 어차피 예진포는 대선단이 정박하기는 좁으니 다음 기항지寄港地까지는 따로 움직이는 게 좋겠네.”

“그럼 다음 기항지를 어디로……?”

조심스러운 고숭의 질문에 광운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기실 그로서도 항구에 대해선 육지만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선뜻 적당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하세. 우리 측 전령을 열 명 정도 예진포로 보내게. 수군과 동행하다가, 다음 기항지가 결정되거든 두 명씩 보내도록 말일세.”

“그게 상책일 듯합니다.”

수군은 아무래도 말을 잘 다루지 못해 전달이 늦을 수밖에 없다. 보병의 전령을 보내 활용한다면 보다 빨리 서로의 뜻을 소통할 수 있을 터였다.

“여기 계셨소이까? 얼추 시신들을 수습하고, 성의 정리가 끝났소이다. 약 천 명만 주둔시켜도 여차할 때 훌륭한 발판이 될 것 같소이다.”

수자윤이었다. 그가 공격을 주도했으니, 그 뒷정리 역시 그의 몫이었다. 그걸 대충 마치고 보고차 온 모양이었다.

“수고 많았네. 수군의 주 제독이 전령을 보냈기에 여기서 만나고 있던 참일세.”

“수군이? 그들이 왔소이까?”

“예진포에 있다는군.”

“그래, 얼마큼의 병력을 데리고 왔답디까?”

역시 수자윤도 전국의 무장이다. 다짜고짜 수군의 숫자부터 물었다.

고숭이 배와 병력을 말해 줬다. 이만하면 어지간한 수자윤도 깜짝 놀랄 거라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수자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는 대륙의 서쪽 끝 자락인 사주 출신이다. 한평생 바다를 본 일조차 없으니 일만 척의 전선이 얼마만한 규모인지 알 턱이 없었다.

와두두둑!

돌연 한 떼의 기마 부대가 동쪽으로부터 달려왔다. 약 스무 기에 이르렀다.

“누군가? 기치를 확인하라.”

광운이 재빨리 명을 내렸다. 이제 막 외천성을 함락시킨 참이었다. 병사들의 긴장이 풀렸을 건 자명한 사실이다.

이럴 때 뒤늦게 외천성을 지원한답시고 누군가 덤빈다면 그야말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아, 척후를 보냈던 부대요. 뭔가에 놀란 듯 다급한 행보인데…….”

수자윤이 확인하는 사이, 성안에서 한 부대의 병력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뭣들 하는 게냐?”

다급하게 물어 놓고, 수자윤은 흐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달려오는 척후병들이 적이 아닐까 하고 경계하러 나온 자들이라는 걸 깨달은 까닭에서였다.

“염려 마라. 아군이다! 척후병이야.”

수자윤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성안으로 물러가지 않았다. 대신 정연하게 도열해서 척후병들을 기다렸다.

바로 이런 점에서도 막주군의 사기를 엿볼 수 있다. 이제 막 외천성 전투가 끝난 뒤라 모두들 피곤할 게 분명하다. 달려오는 자들이 아군임을 알면 다들 성안으로 돌아가 쉬고 싶기도 할 게다.

광운은 그런 병사들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사이 척후병들이 당도했다. 그들을 인솔한 아장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가득했다.

“동쪽 약 이백 리 지점에 호가군 출현!”

보고는 간략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컸다. 누가 뭐래도 파양주의 주력은 호가군이다. 바로 그 파양주 전체를 삼키고, 바야흐로 건주의 절반을 석권하고 있는 막주군으로선 최대의 적을 만난 셈이었다.

“비상! 비상이다! 전원 무장을 갖추라!”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수자윤이 성안으로 달려가며 고함을 질렀다. 그는 파양주의 위급을 안 호가군이 군사를 돌린 것으로 판단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농성을 하시겠습니까?”

고숭의 생각도 수자윤과 비슷했다. 그래서 농성을 하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편월이 패한 걸까?’

두 사람과 달리 광운은 편월의 안위부터 염려했다. 뒤에 적을 두고 군사를 돌릴 호윤천이 아님을 익히 아는 까닭에서였다.

돌연 광운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편월이 그리 쉽게 패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거기다 위휘군은 파죽의 기세로 세를 불려 나갔다. 아무리 호윤천이 파양주의 주력이라고 해도 쉽사리 패할 리 없었다.

“그럼 야전을 할 생각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고숭의 말에 광운은 화들짝 놀라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야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예? 농성을 하실 거냐고 여쭸을 때 대장군께서 고개를 가로젓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야전 준비를 서둘 수밖에요.”

“내가?”

다시 캐묻는 광운의 말에 이번엔 고숭이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장난이라면 이렇게 질 나쁜 장난도 다시없을 터였다. 이제 곧 코앞까지 밀고 올 적을 둔 마당엔 더 그렇다.

고숭의 멍한 표정을 대하고서야 광운은 사태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머리를 흔들었던 걸 떠올린 것이다.

“그러게. 야전으로 호가군을 맞으세. 어차피 대부분 타 버린 성에서 농성한다는 건 어려울 테니까.”

“존명!”

큰 소리로 복명한 후 고숭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백 리라…….’

그 정도 거리라면 내일 이맘때면 호가군과 조우할 수 있을 거라고 광운은 생각했다. 벌써 미시도 끝나 갈 무렵이니, 그들도 어딘가에서 하룻밤 야영을 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준비만은 서둘러 갖춰 둬야 한다. 승전 뒤에 오는 병사들의 해이도 다시금 단단히 비끄러매 둬야 하고.

문득 광운의 시선이 여전히 앞에 도열해 있는 척후대로 향했다.

“척후대는 듣거라!”

돌연 광운이 척후대를 부른 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껏 척후를 하느라 고생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수고를 해 줘야겠다.”

“하명하소서!”

스무 명으로 구성된 척후대는 마상에서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여기서도 잔뜩 고양된 사기가 여실히 돋보였다.

“다시 돌아가서 호가군의 동태를 살펴라. 그들의 행보가 진격인지 아니면 후퇴인지를 소상히 살피라는 얘기다.”

“후퇴…라니요?”

이번엔 척후대장인 아장 혼자서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그들로선 생각지도 못한 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만 알고 당장 출발하라. 단, 섣불리 판단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주의 깊게 관찰하고 돌아와 보고하라.”

“존명!”

께름칙했지만, 아장은 복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대원들의 땀이 식기도 전에 다시 말 머리를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호가군은 여기서 괴멸된다. 막주군과 위휘군의 협공에 의해!’

아득히 멀어져 가는 척후대의 뒷모습을 보며, 광운은 흐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지금 광운이 떠올린 건 호가군이 위휘군에 패해 쫓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을 뒤에 둔 채 군사를 돌릴 호윤천이 아니고 보면 그건 상당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거기엔 편월에 대한 믿음도 한몫했다. 수군의 지원까지 요청했던 편월이 그리 쉽게 패하지는 않았으리라.

돌연 성안에서 북소리와 소라고둥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수자윤과 고숭이 병사들을 독려해 전투태세를 갖추는 중일 터였다.

광운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역시 한층 강화된 마음가짐으로 호가군을 맞을 작정이었다.

결정적으로, 광운의 예상은 빗나갔다. 낮이라야 당도할 것 같던 호가군이, 그 새벽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3

다른 건 몰라도 시합이 시작된 이후로 양군의 사기가 더없이 충천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편월과 곽준방이 시합을 하기로 했던 그 새벽에 시작된 이 추격전은 꼬박 하루를 넘기는 중이었다. 야영이니 취사니 하는 것들도 모두 잊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생쌀을 씹고, 질풍처럼 달리는 와중에 잠깐씩 졸면서 호가군의 꼬리에 바짝 달라붙었던 것이다. 평소보다 훨씬 고무된 사기가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달려라! 곽가군에 지는 날이면, 내 손수 네놈들의 볼기를 치겠다!”

맹아가 반쯤 쉰 목소리로 또 한 번 고함을 질렀다. 시합이 시작된 이후 계속된 독려였다.

그에 비해 편월은 어딘지 느긋한 기색이었다. 달리는 속도야 병사들과 보조를 맞춘 터라 질풍 같았지만, 시합 그 자체엔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편월은 곽가군의 동정만은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위휘군과 약 삼십여 리 정도의 간격을 두고 호가군을 쫓는 중이었다. 그러니 수시로 척후를 보내 그들의 사기와 추격 속도를 점검해야 했다.

그 점을 다른 장수들은 오해했다. 곽가군의 동정을 수시로 살피는 건 어디까지나 편월이 이 시합에서 이기고 싶다는 걸로 해석했다.

“자, 좀 더 힘을 내라! 이 새벽이 밝기 전에 호가군 놈들을 짓밟을 수 있다. 자, 달려라!”

“와아!”

다시 한 번 독려하는 맹아의 말에 근처의 병사들이 일제히 호응했고, 그건 물결처럼 일만 오천에 이르는 위휘군 전체로 번져 나갔다.

맹아의 말이 정확하다고 편월은 생각했다. 지금이 축시 말경이니, 늦어도 인시 중반이면 호가군과 접전을 벌일 수 있을 터였다.

돌연 편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새하얀 이가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빛을 발하는 것 같은, 어찌 보면 사악한 웃음이었다.

“전군 정지! 정지!”

미소를 머금은 채로 편월은 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기수가 재빨리 신호를 보냈고, 향전도 연방 허공을 찢었다.

그러나 명은 제꺽 먹혀들지 않았다. 곽가군보다 빨리 호가군을 따라잡기 위해 사력을 다해 달리던 탓이었다. 정지라는 명령이 내려오리란 건 애당초 생각지도 않았다.

“정지라니, 이 무슨 망발이시오?”

가장 먼저 편월에게 달려든 건 맹아였다. 거리가 가깝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병사들을 독려했던 게 일시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아서였다.

“주군, 시합을 포기하실 작정이오? 이대로 곽가군이 공을 세우게 두실 셈이오?”

오강도 거들었다. 그에게 있어 호가군과의 싸움이 큰 전쟁이라면, 곽가군과의 시합 역시 작은 전쟁이었다. 그 역시 파양주의 잡가군으로 막주 토벌에 앞장섰던 전력이 있었으니까.

“전군 한 시진간 휴식을 취한다. 그사이 취사를 하고, 생리 현상도 해결하도록!”

누가 뭐라든 편월은 신경 쓰지 않았다. 명을 내리고는 자기가 가장 먼저 말에서 내렸다.

“물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지급하라. 그동안 나는 한숨 자겠다.”

그러고는 흑풍의 배 밑으로 들어가 벌렁 드러눕는 편월이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갑자기 휴식 명령이라니?”

“그러게나 말이오. 지금도 곽가군은 뭐 빠지게 호가군을 쫓고 있을 텐데.”

다른 장수들도 모여들어 한마디씩 하는 바람에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아 참!”

그 소음 속으로 편월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곽가군의 동태에 눈을 떼지 마시오. 맹 장군은 이각 간격으로 척후의 보고를 받아 두시오.”

“곽가군의 동태야 뻔한 것 아니겠소? 지금도 호가군을 추격, 이각 후에도 호가군 추격. 그러다 우리보다 먼저 호윤천의 목을 따겠지!”

맹아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그래도 이미 떨어진 명이니 시행해야만 한다. 주변에 있던 근위대원 몇 명이 괜스레 핀잔을 들었다.

편월은 약하게 코를 골았다. 그저 시늉만 하려던 게 정말 잠이 들고 만 것이다. 그만큼 요 며칠간 무리했다는 의미다.

물이 끓었고, 그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던 군량이 왔음에도 편월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군! 주군!”

다소 들뜬 모습의 맹아가 놋그릇 깨지는 소리로 편월을 불렀다. 병사들을 독려하느라 목이 쉰 탓도 있었겠지만, 의외의 사태에 놀란 모습도 없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편월의 코 고는 소리가 멈췄다. 그러고는 재빨리 흑풍의 배 밑에서 굴러 나왔다.

“붙었나?”

맹아가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편월은 질문을 던졌다. 마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듯한 음색이었다.

“어? 어떻게 아셨소?”

“전황은? 곽가군이 이기고 있나?”

이어진 편월의 질문에 맹아는 아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실 지금 호가군이 역습을 가해 곽가군이 위기에 처했다는 척후의 보고를 받고 오던 길이었다.

“그 반대요. 이대로 두면 곽가군은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오.”

“출동! 전군 출동이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편월은 명을 내렸다.

장수든 병사든 다들 또 한바탕 혼란에 휩싸였다. 한 시진을 채우지도 못하고 내려진 출동 명령 때문이었다.

그래도 준비는 상당히 빨랐다. 병사 개개인이 이 시합에서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충만했기에 미진한 휴식에도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출동하는 거요?”

큰 소리로 물어 놓고 맹아는 내심 아차 싶었다. 답을 듣지 않아도 뻔했다. 이 시합의 목적이 바로 호윤천의 목을 누가 먼저 따느냐였으니까 말이다.

진격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근위대를 필두로 위휘군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전력 질주하는 군마軍馬에게 있어 삼십 리는 한달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발한 지 채 이각도 지나지 않아 위휘군은 한창 공세를 취하고 있는 호가군의 옆구리를 찢으며 치고 들어갈 수 있었다.

“와아앗!”

호가군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위휘군의 돌격은 맹렬했다.

하지만 그 대응만큼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침착하고 체계적이었다. 마치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호윤천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뒤를 쫓는 군세가 두 개라는 건 알고 있었으리라. 곽가군을 먼저 공격한 건 그들이 더 빨리 추격해 왔기 때문일 뿐 결코 위휘군의 존재를 잊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래도 호가군은 쫓기던 군세다. 시합에 이기기 위해 한껏 사기가 고무된 위휘군을 상대하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호윤천은 어디 있느냐? 썩 나와서 목을 늘여라!”

위휘군에서 가장 살맛 난 건 뭐니 뭐니 해도 맹아였다. 수중의 절풍검을 마치 나무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종횡무진으로 호가군의 진형을 누볐다.

가히 파죽의 기세였다. 맹아가 지나간 자리에는 호가군 장졸들의 시신이나 부상자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나뒹굴었다.

편월을 비롯한 다른 위휘군 장수들인들 손 놓고 멀거니 구경만 할 사람들인가. 그들도 각자 한 소리 크게 지르며 호가군을 마구 찍어 넘기기 시작했다.

“그 아들 호유진을 죽인 편월이 여기 있다! 호윤천에게도 뼈다귀가 있거든 지금 복수하라!”

호윤천을 자극하는 고함을 지르며 편월도 연방 대도를 휘둘렀다. 그 칼날과 흑풍의 발굽에 걸린 호가군은 썩은 짚단처럼 허물어져 갔다.

“호윤천은 어디 있느냐? 쥐새끼처럼 숨지 말고 썩 나서라!”

편월만이 아니었다. 위휘군 장수들은 한결같이 호윤천을 찾았고, 그 고함은 전장 구석구석까지 쩌렁하게 울렸다.

당연히 호윤천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특히 아들의 원수인 편월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창을 쥐고 곧장 달려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호가군에도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약 백여 명의 막하 장수들과 오천 명의 친위대원들은 한사코 그를 일선에 나서지 못하게 만류했다. 여차하면 이대로 전장 이탈까지 불사할 참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목적은 오직 호윤천을 살리는 데 있는 것이다.

사실 호윤천에게 있어 지난 하루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새벽부터 쫓긴 거야 그렇다 쳐도, 적들이 밤새 추격전을 계속할 줄은 몰랐다.

뭐 거기까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다. 전쟁이란 왕왕 적의 의표를 찔러야 승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새벽에 막주군을 만났을 땐 정말이지 혼비백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외천성은 이미 그들에게 떨어졌고, 하마터면 준비 없는 조우전을 벌일 뻔했다.

호윤천으로선 황급히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왔던 방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남쪽으로 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곽가군의 추격은 빨랐다. 군사를 돌리고 채 백 리도 달리지 않았을 때, 후미가 벌써 공격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역습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훌륭하게 성공했다. 무엇보다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윤천은 위휘군에 대한 대비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들도 추격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언제 아군을 물어뜯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대비는 허사가 될 모양이다. 비록 지금도 병력은 많지만 위휘군의 기세가 워낙 강력했다.

거기다 곽가군도 재정비를 갖추기 시작했고, 이내 체계적인 역습으로 돌아섰다. 명장으로서 곽준방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상국, 이미 패한 싸움이옵니다. 미련을 거두시고 어서 피하소서!”

부장 중 한 명이 호윤천의 말고삐를 잡아끌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호가군은 패색이 역력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직도 우리에겐 오천의 정예가 남아 있사옵니다. 어디에 가도 새로 기반을 잡기엔 충분하옵니다.”

“나는 못 간다.”

“상국!”

큰 소리로 호윤천을 불렀지만, 부장은 이미 그를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대신 그의 말고삐를 당겨 달리기 시작했다.

“후퇴한다. 친위대원은 따르라!”

“놔라! 놓지 못할까?”

호윤천은 연방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뒤따르는 오천의 친위대원이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한창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전장의 소음에 가려 들리지도 않았다.

전장을 이탈하는 호윤천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편월이었다. 눈에 띈 이상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호윤천은 달아나지 마라! 게 섰거라!”

편월은 흑풍의 옆구리에 연방 박차를 가했다. 아마 이처럼 거칠게 말을 몰아붙이는 것도 처음일 게다.

끼히히힝!

흑풍도 맹수의 포효와 같은 긴 울음을 토하며 마구 달렸다. 눈엔 인광과도 같은 빛이 번쩍거렸다.

자연히 그 앞을 가로막는 자는 없었다. 편월이 대도를 휘두를 것도 없이 흑풍의 발굽에 차이거나 밟혀 그대로 길이 열렸다.

“앗! 주군, 위험하오!”

홀로 호윤천의 추격에 나선 편월을 발견한 오강이 맹렬한 속도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발길은 막히고 말았다. 패색이 짙다고는 하지만 완강히 저항하는 호가군도 없지 않았고, 오강의 말은 흑풍처럼 천하의 명마가 아니었다.

“주군이 위험하다! 주군을 보호하라!”

주변에 몰려든 적병을 베어 넘기며, 오강은 연방 고함을 질렀다.

그런 오강의 외침을 뒤로하고 편월은 맹렬한 속도로 달렸다. 흡사 흑풍의 발굽에서 불꽃이 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입도 쉬지 않았다.

“아들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거늘, 그 애비 되는 자가 늙은 목숨이 아까워 달아나느냐? 상대해 주겠다! 도망치지 말고 덤벼라!”

호윤천이 듣는다면 뼈아픈 야유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런 게 통하는 것이 전쟁이다. 이보다 더한 욕도 일반적으로 통하니까 말이다.

설사 호윤천이 이 욕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전장 이탈을 감행한 그들이 말 머리를 돌려 편월을 상대할 까닭은 없었다. 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내처 달리기만 했다.

그러나 흑풍이 어디 예사 말인가. 편월이 추적한 지 일각이 될까 말까 했을 때 벌써 그 후미를 낚아챌 수 있었다.

호가군 측에서도 그냥 두고 볼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이들은 호윤천의 친위대다. 가리고 추려서 뽑은 자들인지라 무예나 용맹 또한 출중했다. 편월의 앞을 막아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길을 열어라! 막는 자는 죽는다!”

편월의 눈에 그들이 보일 턱이 없었다. 자신의 목을 향해 내질린 창을 왼팔로 걷어 내며, 오른손의 대도를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적병은 그대로 왈칵 말에서 떨어졌다.

동시에 또 하나의 창과 대도가 편월의 면전으로 불쑥 날아들었다. 오천에 이르는 적병들 속에 뛰어들었으니, 이 정도는 이미 각오한 바였다. 아니, 설사 각오가 없었다고 해도 난전은 편월의 특기 중 하나였다. 일대일 대결도 좋지만 이렇게 마구 좌충우돌하며 적을 쓸어 넘기는 것도 기분 짜릿한 일이었다.

편월은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곧 낙마할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지만, 그건 보는 사람의 착각에 불과했다. 옆으로 몸을 누인 순간 벌써 그의 대도는 앞으로 맹렬하게 내질렸고, 창을 휘두르던 적병은 마치 산적처럼 칼날에 꿰이고 말았다.

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편월은 재차 대도를 휘둘렀다. 그를 공격했던 나머지 적병이 덧없이 허공으로 두 다리를 치켜들며 말에서 떨어져 거꾸로 처박혔다.

그러나 적병은 오천이다. 셋을 베니 이번엔 열이 몰려 편월을 에워쌌다.

투구 밑에 도사린 편월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이런 싸움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모처럼 잡가군으로 떠돌던 시절의 피가 혈관 속에서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무래기들은 상대치 않겠다! 호윤천을 불러라!”

재차 호기롭게 외치며 편월은 종횡무진으로 적진을 누볐다. 흑풍 역시 따로 조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였다.

“위휘군의 수괴 편월로 알고 있다. 내 창을 받아랏!”

또 한 명의 장수가 편월을 가로막으며 다짜고짜 창을 내질렀다. 호가군의 편장 중 한 명 같았다.

편월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대도 자루로 적의 창을 걷어 내며, 그대로 한 바퀴 휘둘렀다.

퍼억!

대도의 날이 그대로 꽂혀 들며 적의 투구를 찌그러뜨렸다. 자연히 그 안에 들어 있던 놈의 두개골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호가군엔 이렇게 사람이 없느냐? 위휘군의 허수아비라도 네놈들보다는 낫겠다!”

또 한 명의 적병을 찍어 넘어뜨리며 편월은 호기롭게 외쳤다. 이왕에 먹은 마음이다. 오늘은 질펀한 피의 비를 한번 덮어쓸 작정이었다.

“방자한 놈. 받아라!”

또 다른 장수 한 명이 편월의 욕에 견디다 못해 말 머리를 돌려 대적해 왔다. 보기에도 섬뜩한 철퇴가 그의 손에서 날아왔다. 이건 편월에게도 창졸간의 일이었다. 앞으로 달리다 갑자기 돌아서며 철퇴를 날렸으니, 피하기도 빠듯했다.

편월은 다급하게 수중의 대도로 철퇴를 막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촤르륵!

철퇴에 달린 쇠사슬이 대도에 휘감겼다. 편월은 재빨리 그걸 떨쳐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적이 강한 힘으로 잡아당기니, 하마터면 대도를 놓칠 뻔했다.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겉으로 보기엔 호리호리한 듯하지만, 기실 편월도 가히 장사 소리를 들을 만큼 힘이 셌다.

하지만 적도 만만치 않았다. 놈의 주 무기인 만큼 철퇴의 운용이 자유로울뿐더러 엄청난 힘으로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편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이라도 대도를 움직일 수 있다면 단칼에 적을 베었겠지만, 그로선 무기를 뺏기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위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편월이 철퇴에 걸려 꼼짝도 못하자 삽시간에 적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자가 바로 위휘군의 괴수이다. 그 목을 치면 곧바로 일등 공훈이다!”

“와아! 쳐라!”

이쯤 되면 편월은 더 이상 무기를 고집할 수 없었다. 한껏 버티고 있던 대도를 놔 버리며, 곧장 흑풍을 몰아 철퇴를 쥔 적장에게 덤벼들었다. 그사이 편월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장군도를 뽑아 들었다. 그건 말 위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적장의 목을 향해 일직선을 그렸다.

“크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적장은 그토록 고집하던 철퇴를 놓치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편월은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대도를 주워 들었다. 흑풍을 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이지 절묘한 기마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처럼 출중한 기마술도 당면한 위기를 피해 가게 하지는 않았다. 몰려든 적들이 일제히 각자의 병기를 내밀어 편월을 공격했다.

“하이얍!”

커다란 기합성과 함께 편월은 대도를 휘둘렀다. 마음 같아서는 크게 한 바퀴 돌려 사방의 적들을 일거에 베고 싶었지만, 이미 적들은 지나치게 접근한 상태였다. 고작 두 명을 베는 게 전부였다.

당연히 편월도 부상을 당했다. 팔과 등에 입은 창상은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었지만, 허벅지를 훑고 지나간 적의 병기는 상당히 깊은 상처를 남겼다.

‘으음!’

편월은 속으로 신음을 씹어 삼켰다. 화끈한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번져 갔던 것이다.

물론 이 정도 상처에 위축될 편월이 아니었다. 두 명을 베고 생긴 공간 속으로 흑풍을 몰아가며, 더욱 맹렬한 기세로 대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지금 편월은 난생처음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허벅지의 상처에서는 엄청난 피가 쏟아졌고, 뒤를 맡길 동료도 하나 없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죽음은 언제나 등 뒤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의 위기가 크다고 해서 새삼 심각하게 여길 필요는 없었다.

대도로 두어 명의 적을 더 찍어 넘기며, 편월은 사방을 살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호윤천만은 직접 베고 싶었다.

저 앞에 대장군기가 펄럭거리는 게 보였다. 적진 깊숙이 뚫고 들어온 건 확실한 모양이다. 이런 경우 대장군은 항용 가운데에 있는 게 상례니까 말이다.

하지만 빤히 보면서도 편월은 접근할 수가 없었다. 말이 쉬워 오천이다. 여남은 명을 베었다고 표가 나는 것도 아니다. 호윤천의 목을 베기보다는 자신의 안전부터 염려해야 될 판이었다.

“길을 열어라! 막는 자는 죽는다!”

편월은 또 한차례 고함을 질렀다.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찼지만, 실제로는 아찔한 현기증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허벅지 상처의 출혈은 그만큼 심각했다.

“가자, 흑풍!”

편월은 새삼 흑풍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이대로 똑 바로 호윤천을 향해 달릴 참이었다. 그 전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흑풍도 편월의 뜻을 알았나 보다. 빽빽하게 들어찬 호가군의 병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뚫고 달렸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호가군 대장군기 주변의 기치가 마구 흔들린다 싶더니, 마치 뭔가에 부딪친 것처럼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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