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월 9 완결
역전단초逆戰端初 1
1
그날은 단연 거예홍의 독무대였다. 두 명의 적장을 베었다는 것보다는 그녀의 걸쭉한 욕설과 예쁜 용모가 호가군의 시선을 사로잡고 놔주지 않았다.
기실 좌괴의 예측이 약간 어긋난 날이기도 했다. 호가군에서 먼저 도발할 것이라 여기고 거기에 따라 이쪽도 선봉을 정하기로 했는데, 거꾸로 거예홍을 먼저 내세우고 말았다.
이유야 어쨌든 그건 성공적이었다. 호가군은 여태 곽가군이 빠진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기치와 군기들은 그대로 뒀으니 단시간에 알아차리긴 어려울 터였다.
그렇다고 방심한 건 결코 아니었다. 오늘도 두 명의 장수를 잃은 호가군이 한꺼번에 난전으로 몰고 나온다면, 위휘군으로선 어려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좌괴가 가장 부심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지금 좌괴의 가장 절실한 바람은 곽가군의 빠른 행동이었다. 일만 육천이면 난계성 정도는 쉽사리 떨구고 군량을 불태울 수 있을 터이고, 자신들의 먹을거리가 잿더미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호가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으리라.
전황이 재미있게 되는 건 그다음부터지만, 그때까지가 위휘군의 고비일 수밖에 없다.
지잉!
돌연 호가군의 영채에서 징소리가 들리더니, 예의 석소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반가운 일이었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적어도 오늘 하루는 호가군의 시선을 더 붙들어 둘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화 장군.”
“벌써 준비되어 있소.”
“꽹과리를 울려라!”
화응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좌괴는 명을 내렸다. 거예홍이 지금껏 잘해 줬지만, 아무래도 석소패의 상대는 화응이 제격이다.
철수 명령에 따라 거예홍은 재빨리 말 머리를 돌렸다. 뒤에서 석소패가 욕을 퍼부었지만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영채문을 통과하는 것과 교차해서 화응이 밖으로 나왔다. 동시에 석소패의 걸쭉한 욕설이 들려왔다.
“이놈아! 오늘은 다리가 튼튼한 말로 골라 왔느냐? 뭣하면 내가 한 마리 선사하랴?”
“오냐, 이놈아! 네놈의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작달막한 다리로는 당치도 않을 테니, 어디 가서 긴 걸로 하나 얻어 걸치고 오너라!”
화응도 지지 않고 거친 목소리로 맞대거리를 했다. 하지만 곧장 석소패에게 공격을 가하진 않았다.
어차피 오늘 석소패와의 싸움은 호가군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다. 서두를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그보다 화응은 오늘만큼은 석소패가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야 보다 오래 시간을 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화응의 의도는 적중했다. 어제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한 석소패는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곧장 뛰어들었다. 짧은 박도의 간격 안에서 싸울 의도였던 것이다.
거기에 말려들 화응이 아니었다. 말을 슬쩍 뒤로 물리며 삭초도를 크게 휘둘렀다. 석소패를 도발하기에 딱 좋은 행동이었다.
과연 석소패는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화응의 긴 삭초도 탓에 간격을 좁히지 못하자 입에 거품이라도 물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욕을 퍼부었다.
“에라이, 빌어 처먹지도 못할 놈아! 벌써부터 꽁무니를 빼냐? 사타구니에 달린 불알이 아깝다. 덤벼라, 이놈아!”
“나는 아까우나마 달렸다만, 네놈의 작달막한 몸뚱어리엔 달려 있을 것 같지도 않구나. 정히 아쉬우면 내 말에 달린 거라도 떼어 주랴?”
“뭐, 뭐라고?”
능글맞은 화응의 응대에 석소패의 얼굴은 달아올랐고, 위휘군의 진영에서 일제히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심한 놈! 다리 튼튼한 말을 가지고 오라 했더니, 주둥이에 살만 붙여 왔구나. 오늘 네놈의 주둥이를 썩썩 썰어서 술안주나 해야겠다.”
“그 전에 네놈의 그 모가지나 잘 간수하랏!”
크게 부르짖으며, 화응은 득달같이 말을 몰아 석소패에게 쇄도했다.
물론 본격적으로 드잡이질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연히 자신의 간격 안에서만 삭초도를 휘둘러 석소패의 목을 노렸다.
석소패는 말 그대로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오늘의 참전은 호윤천의 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예쁘장한 적의 여장수와 상대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어제 한 번 쫓아 보낸 놈이 다시 나타나서는 이처럼 부아를 돋우고 있다. 그나마 화응이라는 적에게 가졌던 약간의 호감조차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놈아, 여긴 뭐 하러 나왔느냐? 그렇게 꽁무니나 빼려면 차라리 아까 그 계집이나 내보내라!”
석소패는 또 한 번 냅다 욕설을 내질렀다. 동시에 그는 공처럼 바닥을 굴러 화응이 탄 말 아래로 접근을 시도했다.
그러나 호락호락 당할 화응이 아니었다. 이미 한차례 석소패와 손을 나눠 봤으니, 그가 바닥을 구를 때 벌써 말을 멀찍이 물러나게 했다.
“우우우.”
“에라이, 비겁한 놈!”
호가군의 진영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한사코 정면 대결을 피하는 화응을 도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화응도 사람이다. 그것도 위휘군에서 내로라하는 장수다. 적의 야유를 받자 울컥하며 성미가 치밀어 올랐다.
더욱이 석소패의 싸움 수법은 이미 파악한 상태다. 정면으로 겨룬다면 몇 합 만에 놈의 모가지를 날릴 자신도 있었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고 화응은 생각했다. 위휘군의 장수인 이상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해 군사인 좌괴가 애써 세운 작전을 망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화응은 말을 몰아, 아예 굴러 오는 석소패 주변을 빙빙 돌았다. 싸울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화응이 탄 말의 발굽과 땅 위를 뒹구는 석소패의 몸 탓이었다.
그 바람에 어려움을 겪는 건 양군의 병사들이었다. 싸우는 두 사람은 보기 힘들었고, 자욱한 먼지 속에서 서로가 휘두르는 병기만이 간혹 번쩍거렸기 때문이다.
싸움판을 지켜보고 있는 호윤천의 눈빛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대로 군사를 돌려야 하나? 아니면 위휘군을 짓밟고 앞으로 나가야 하나?’
바로 이게 호윤천의 고민이었다.
어제저녁 호윤천은 진즉부터 파견해 뒀던 간인의 보고를 받았다. 광운을 필두로 한 막주군에 의해 자신의 기반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후방이 어지럽다는 얘기고, 그래서는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를 리 만무하다.
‘지금 당장 군사를 돌린다면?’
이미 빼앗긴 파양주는 어쩔 수 없다손 쳐도 건주 정도는 장악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 뭐 하나? 건주를 차지한다고 해서 호가군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광운과 편월에게 협공을 당하게 될 게 뻔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눈앞의 위휘군을 짓밟고 윤주를 석권하는 일 말이다.
문제는 위휘군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점이다. 단시간 내에 격파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어제저녁 간인의 보고를 받은 직후, 아들인 호유진은 군사를 둘로 나눠 대응하자고 했다. 위휘군과는 장기전을, 뒤를 엄습해 오는 막주군과는 속전속결하자는 의견이었다.
호윤천은 그 의견을 일언지하에 묵살해 버렸다. 여기서 군사를 나눈다는 건 곧바로 호가군의 전멸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물론 호윤천이 그동안 그저 위휘군만 상대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광운이 이끄는 막주군의 동향까지 미리 예측하진 못했지만, 동쪽으로 향하면서부터 율천국의 가겸후에게 은밀하게 사자를 파견해 놓은 상태였다. 내용이야 말할 것도 없이 군사적 동맹을 맺자는 것이었다.
그건 호윤천 스스로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그사이 가겸후는 허주의 조환과 강국의 증두신을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게다가 예전에 가겸후는 그 자신이 먼저 군사적 동맹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많은 일들이 생겨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실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당장 눈앞에 대치하고 있는 위휘군은 큰 문제가 아니다. 요는 배후에서 무서운 기세로 엄습해 오고 있는 막주군이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가겸후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이기는 것만이 아니다. 가겸후와 더불어 천하를 양분할 수도 있다.’
이건 희망 사항이라는 걸 호윤천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에 부풀어 있는 건, 가겸후가 파양주와 막주만 자신에게 줘도 괜찮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건 현 시점에선 그저 바람일 따름인지라 호윤천의 미간은 아직 활짝 펴지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는 냉혹한 현실이 펼쳐져 있다. 화응과 석소패는 여전히 자욱한 먼지 속에서 난전을 벌이는 중이고, 위휘군 역시 충천한 사기로 무장한 채 잔뜩 도사리고 있다.
우선은 이걸 타개해야만 한다. 그래야 가겸후와의 동맹이든 뭐든 맺을 수 있을 게 아닌가 말이다.
“상국 합하閤下, 난계성에서 전령이 왔사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호윤천에게 누군가 고했다.
“난계성에서? 무슨 용건이던가?”
호윤천은 다급하게 물었다. 난계성은 호가군 전체의 군량을 비축해 둔 곳이다.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급한 전갈은 아니옵고, 군량미 비축 수량에 대한 보고였사옵니다.”
“그런가? 그래,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오늘 중으로 들어올 것을 합하면 구십만 섬으로, 아마 내일 중으론 백만 섬을 훨씬 넘길 것 같다 하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당분간 군량미 걱정은 없겠군. 난계성주에게 전하라. 이번에 군량미를 대 준 모든 성주들에게 내가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존명.”
보고한 부하가 나가자 비로소 호윤천의 표정은 조금 밝아졌다.
전쟁은 분명 힘의 우열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 힘을 유지시켜 주는 게 재력이고, 군에서의 재력은 군량미로 나타난다.
바로 그 군량미가 백만 섬이나 비축되어 있다. 이 사실을 사방에 알린다면 각지에서 떠돌던 잡가군이 구름처럼 몰려들 게 뻔하다. 광운과 편월의 협공을 받을 경우에 대한 대비로는 그만한 것도 다시없을 터였다.
“징을 쳐라! 오늘 싸움은 이걸로 끝낸다.”
돌연 호윤천은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아직 오전이었지만, 지금부터 작전 회의를 할 참이었다.
징, 지잉, 징!
징소리가 울렸고, 화응과 석소패가 서로 한두 마디씩 주고받는 욕설 소리도 아련하게 호윤천의 귓전에 이르렀다.
어쨌든 그걸로, 그날 장수끼리의 싸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 * *
이즈음 가겸후는 대대적인 해상 봉쇄 작전에 돌입하고 있었다. 강국을 멸망시킬 때 상초국 원군이 마치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처럼 일부 부대만 남기고 모두 철수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륙에 남은 상초국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이제 곧 그들의 왕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온다는 정보를 접했으니, 거기에 대비한 것이었다.
가겸후는 이 해전에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폐포자가 개발한 거대한 노궁 덕에 그동안 상초국 수군과의 수전에서 연전연승을 해 왔다. 이번에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절대적으로 이겨야만 한다는 게 가겸후의 생각이었다. 해외 이민족이자 황제 시해의 혐의를 덮어쓴 상초국을 철저히 괴멸시킨다면 자신의 황제 등극은 보다 손쉬워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작 폐포자는 가겸후의 대규모 수군 동원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상초국에서도 이쪽의 전법을 겪었으니,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서 올 것이란 게 그 이유였다.
결국 두 사람은 다소 격렬하다 싶은 언쟁을 벌였고, 그 결과 폐포자는 자신의 집에 연금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가겸후가 폐포자의 말을 아주 무시한 것만은 아니었다. 새로이 수군총령水軍總領 직을 만들어 임항林恒을 발탁했다.
임항은 중주 출신의 사람이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 태어나 수군총령에 임명되었다면 다소 이상하겠지만, 거기엔 이유가 있다.
여섯 살 때 임항은 마을을 지나가는 상인으로부터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로 그는 쭈욱 바다를 동경했고, 급기야 아홉 살 때 무단으로 상단을 따라 궐주로 들어왔다.
그 후로 그는 궐주의 동쪽 바다에서 살았다. 형편이 좋을 땐 어부로, 궁해지면 해적 노릇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급기야 연안 지방 관리에게 추포追捕되기에 이르렀고, 때마침 그 지방 순시에 나선 가겸후의 눈에 띄었다.
어쩐지 가겸후는 첫눈에 임항이 좋아졌다. 자신보다 열 살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연상일 듯했지만 마치 또래 같은 친근감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가겸후는 임항의 죄를 사면하고, 자신의 측근 호위로 임명했다. 물론 최말단의 직급이었다.
그래도 임항의 바다에 대한 동경은 지속되었고, 그 점을 오래지 않아 가겸후도 알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가겸후의 결단은 빨랐다. 곁에서 떼어 놓기는 아쉬웠지만, 임항을 연안 지방 관리로 임명했다. 불법적인 일만 아니라면 바다에서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파격적인 특혜까지 줬다.
그 결과 임항은 가히 ‘해귀海鬼’라 불릴 정도로 바다에 대해 정통했고, 오늘날 초대 수군총령 직에 임명된 것이다.
여하튼 가겸후는 임항을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그는 지금도 새로운 전법 개발과 신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을 터였다.
‘상초국 놈들, 어서 빨리 오너라.’
이게 가겸후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일찍 괴멸시켜야, 그만큼 황제에 등극하는 시간도 빨라질 테니 말이다.
“전하, 파양주의 호 상국에게서 사자가 왔나이다.”
환관 보차의 고하는 소리에 가겸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라는 상초국 놈들은 오지 않고, 피라미 같은 호윤천이 보낸 사자가 도착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겸후는 이내 생각을 고쳤다. 지금은 전력을 다해 상초국을 상대해야 될 때다. 그사이 위휘군이나 막주군을 막아 줄 사람은 호윤천밖에 달리 없다는 현실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어서 뫼시어라.”
“예이-.”
부드러운 가겸후의 말에, 길게 끌리는 환관 특유의 대답을 한 후 보차는 물러갔다.
이윽고 가겸후 앞에 나타난 호가군 다섯 사자들의 몰골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옷은 대충 갈아입은 것 같지만, 얼굴에 드리워진 피로감만은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파견되었을 때는 가겸후가 한창 강국 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을 시기였다. 자연 사자들은 강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천강을 사이에 두고 버티는 위휘군의 눈을 피해야만 했을 걸 생각하면 그 노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다. 강국을 멸망시킨 가겸후는 곧바로 궐주 창일성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자들은 발길을 궐주로 돌려야 했고, 오늘에야 비로소 가겸후를 만날 수 있었다. 쇠로 만든 사람이 아닌 이상 피로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어서 오시오. 먼 길에 노고가 크셨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부드러운 가겸후의 말에 사자들은 눈물을 왈칵 쏟을 것 같은 음성으로 대답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래, 호 상국은 어떻게 지내오?”
“여전히 강건한 모습으로 전군을 지휘하고 계시옵니다.”
“그것참 다행한 일이오. 그런데 사자의 용무는……?”
가장 기본적인 인사치레만 한 후, 가겸후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건 분명 결례다. 아무리 가겸후가 왕을 칭하고, 그 힘이 천하를 덮을 정도라고 해도 사자를 대할 때는 나름대로 예의가 있는 법이다. 그걸 무시한다는 건 어떤 용건도 중요시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사자들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 건 물론이었다. 그 먼 길을 돌아 이렇게 찾아왔건만, 문전박대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으니 무릎에 힘이 빠져 서 있기조차 힘겨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가겸후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응대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들으나 마나 동맹을 맺고 원군을 달라는 거겠지. 한 삼만 정도만 보내도 호윤천은 감지덕지하리라.’
이게 가겸후의 계산이었다.
“사자에겐 용무가 없는 게요? 그저 문안차 왔다면 수고하였소이다.”
“아, 아니옵니다, 전하.”
이어진 가겸후의 말에 사자들은 일제히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그중 한 명이 급히 입을 열었다.
“파양주의 호 상국은 지난번에 전하께서 제시하셨던 군사적 동맹 제안이 결실을 맺지 못했음을 늘 아쉬워하였습니다. 그러다 이참에 건주까지 오셨으니, 그때의 일을 매듭짓자고 하시며 저희들을 보냈습니다. 이 점 통촉해 주시옵소서.”
사자의 말을 들은 가겸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데도 한사코 자존심을 세우려는 호윤천의 행태가 못마땅했다.
“흐음, 호 상국이 파양주에 있을 땐 답을 미루더니, 건주까지 밀려와서야 동맹을 하겠다? 그것참 반가운 말이군.”
사자들에게 있어 가겸후의 말은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가겸후는 ‘밀려왔다’고 표현했지만, 그는 벌써 호윤천이 막주군에게 파양주 전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래서는 도무지 입을 뗄 수 없다.
“내 앞뒤로 적을 맞은 호 상국의 어려움은 익히 알고 있소. 그러니 곧 원병 삼만을 내겠소. 그 정도면 급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게요.”
“성은이, 성은이…….”
사자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가겸후의 말이 너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돌아가거든 호 상국에게 전하시오. 내가 지켜보고 있겠노라고! 이 말은 호 상국이 차후 또다시 어려움에 처하면 돕겠다는 뜻이니 오해하진 마시오. 그리고 부디 잘 싸우라고 전해 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파양주의 호 상국은 결코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귀한 사자들께서 오셨다. 어서 연회를 준비하라!”
감사의 인사를 하는 사자의 말을 끊으며, 가겸후는 명을 내렸다. 호윤천에 대한 혐오감은 여전히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그의 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철저히 이용해야만 한다.
그날 밤 창일성은 호윤천의 사자들을 환대하는 연회로 들썩거렸다. 그 속에서 사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린 건 물론이었다.
2
창일성에서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던 그 밤, 위휘군 진영에선 군사인 좌괴가 초조감으로 연방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서성대고 있었다.
‘곽가군이 너무 늦다. 늦어.’
힘과 힘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전쟁에도 전기라는 게 있다. 그걸 놓치면 우세한 전력을 보유하고서도 지는 경우가 왕왕 나타난다.
전쟁을 위한 작전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차라리 시도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좌괴는 지금이 호가군의 군량미를 불사를 가장 알맞은 시기라고 판단했다. 당장 내일만 되어도 호가군이 힘으로 밀어붙일지 모르니 말이다.
이건 좌괴의 막연한 예감인 것만은 결코 아니다. 위기에 몰린 군세는 종종 전멸을 각오하고 총력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지금 호윤천의 군세는 확실히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으로는 열세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앞엔 위휘군이 버티고 있고, 뒤에선 광운의 막주군이 마구 짓밟고 오는 중이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초조해져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 시기가 바로 지금쯤이라고 좌괴는 판단하고 있었다. 더 지체해서 막주군이 건주까지 장악해 버리면 이미 늦다. 호윤천처럼 뛰어난 무장이 그 정도 판단도 하지 못할 턱이 없다.
그러니 호가군의 군량미를 불사르는 건 오늘이나 내일 중이어야 하고, 기왕이면 오늘이 좋다.
‘내가 곽가군을 너무 과대평가했을까?’
곽가군에 대한 건 편월이나 정허군에 소속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기만 했지 좌괴가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이 점이 그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갑자기 들려온 편월의 목소리에 좌괴는 화들짝 놀라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 오셨습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편월을 대하는 좌괴의 태도는 정중해졌다. 황제가 죽었다는 걸 알고 난 이후 그는 어쩌면 편월을 통해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일찍 죽어.”
제법 어른스레 말하면서, 편월은 진막 깊숙이 위치한 의자에 걸터앉았다.
“실은 곽가군의 행동이 너무 느리다고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염려 마.”
편월은 그 한마디로 좌괴의 우려를 잘라 버렸다.
“곽 장군은 오늘 밤 중으로 난계성을 떨구고, 호가군의 군량미를 태워 버릴 거야. 아마 그중 일부는 노획해 올걸.”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편월은 말했다. 그게 오히려 곽가군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뢰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좌괴로서는 달갑지 않은 부분이었다. 곽가군과 함께 생활했던 지난 얼마 동안 그의 우려는 그대로 나타났다. 바로 곽준방과 그의 무장들이 보인 편월에 대한 태도 말이다.
겉으로야 어쨌든 존칭을 사용하긴 했다. 그 속에는 쫓겨 온 군세라는 굴욕감도 조금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편월을 보는 곽준방의 눈빛은 예전에 잡가군을 대하던 그것과 같았다. 적어도 좌괴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이건 확실히 정리해야 한다. 위휘군 장수들만의 회의를 열어서라도.’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위휘군의 모든 장병들이 비상대기 상태다. 곽가군이 작전에 성공하면, 동시에 일제히 쳐 나가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좌괴가 방금 세운 계획은 빨라도 눈앞의 호가군을 물리친 뒤가 된다는 얘기다. 우선은 곽가군의 성공을 빌 도리밖엔 없다.
“주군의 말씀이시니 소생도 마음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좌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일 때, 무장을 갖춘 맹아가 달리는 듯한 빠른 걸음으로 진막 안에 들어왔다.
“아니, 여태 무장도 갖추지 않고 뭘 하고 계셨소?”
여전히 평상복 차림인 편월을 본 맹아의 첫마디였다.
“오늘 곽가군이 성공할 것 같소?”
“성공하든 하지 않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게 무장의 마음가짐이오. 주군도 잘 아시지 않소?”
“그런가? 그럼 내 무구를 여기로 가져오도록 하시오.”
편월은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이 점 또한 최근에 변한 편월의 모습이었다. 예하 장수들과 어지간해서는 말로 다투지 않는 것 말이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다. 예전 같았으면, ‘뭘, 좀 있다 해도 될걸.’이라는 한마디쯤은 분명히 했을 터였다.
이건 좌괴의 마음에 들었다. 한 부대, 나아가 한 지방을 다스리는 패자가 되려면 저 정도의 무게감은 있어야 한다.
곧바로 무구가 도착했고, 맹아의 도움을 받으며 편월은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척후조를 보내지 않아도 괜찮겠소?”
편월의 갑옷 끈을 졸라매며 맹아가 물었다.
“너무 조이는군. 그런데 어디로 척후조를 보낸단 말이오?”
“두말할 필요 없이 곽가군을 찾는 거지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기에 여태 방귀 소리 하나 나지 않느냔 말이오? 설마하니 난계성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지는 않을 테고…….”
“그 점이라면 염려 마시오. 곽 장군은 반드시 해낼 테니. 그보다 병사들의 사기는 어떻소?”
“당장이라도 호가군에 짓쳐 들 기세들이오.”
“그건 곤란하지. 곽가군이 내일 이른 새벽에 움직일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힘을 써서는 안 되지. 교대로 수면을 취하게 하시오. 밥도 충분히 먹어 두도록 하고.”
“그럼 주군은 곽가군이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에 작전을 감행하리라고 믿으시오?”
“그럼 맹 장군은 믿지도 않으면서 날 무장시키고 있는 거요?”
똑같은 말투로 되묻는 편월의 말에 맹아는 대꾸할 수 없었다.
어느덧 편월의 무장은 갖춰졌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좌괴의 심정은 또다시 불편해졌다.
‘이래선 안 되겠다.’
편월이나 맹아를 비롯한 정허군 출신의 장수들이 곽가군을 믿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대화를 다른 장수들이나 병사들이 듣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레 자신들이 속한 위휘군과 곽가군을 비교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위험해진다. 비교는 의심을 불러오기 마련이고, 의심은 처음엔 미약하지만 그냥 두면 나중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만약 오늘 중으로 곽가군이 작전에 성공하고, 뒷날에 혹시라도 위휘군이 어디서 한차례 패하기라도 한다면 장병들은 곧바로 편월에게 등을 돌리고 곽준방을 흠모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막아야만 한다.
하지만 좌괴는 자신이 놓인 미묘한 위치를 재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허군과 곽가군은 한때 생사를 도외시한 채 한 덩어리가 되어 싸웠던 소위 ‘전우’들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굴러 온 돌에 불과하다. 비록 지금은 군사 대접을 받지만, 목숨 걸고 싸웠다는 전우애라는 인간 감정에 비치면 그 직책은 빛을 잃어버릴 공산이 크다.
‘어쨌든 주군의 마음부터 돌려야 한다.’
“자, 나가 보자고.”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편월이 밖으로 나가면서 말을 붙였다.
“그럼 본진에서 뵙겠습니다.”
“본진으로 가시는 게 아니라 아마 각 부대를 시찰하실 거요.”
좌괴의 말에 맹아가 약간 퉁명스레 내뱉었다. 군사로서 그렇게 주군의 뜻을 모르냐는 핀잔이 역력했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예전부터 편월의 최측근에 있던 사람일수록 좌괴에 대한 반감(?)은 짙다. 그중 근위대장인 맹아가 가장 심했다.
물론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좌괴는 아니었다. 그 역시 맹아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어?”
밖으로 나온 좌괴는 낮은 경호성을 토하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벌써 말을 타고 있을 줄 알았던 편월과 맹아가 진막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걸 본 까닭에서였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주군, 빨리 본진으로!”
“그래야겠군. 말!”
별안간 두 사람은 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서둘러 말을 타고 본진으로 달렸다.
얼떨떨했지만 좌괴도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서툰 기마 솜씨로 말을 본진으로 몰았다.
‘내 진막도 본진으로 옮겨야겠군.’
일군의 군사는 지휘관과 함께 있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좌괴는 번거로움을 피해 조용히 생각하기 위해 일부러 본진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신의 진막을 세웠다. 그게 지금 이 같은 불편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본진에는 벌써 각 부대의 장수들이 모여 있었다. 한결같이 조금씩은 흥분된 모습이었다.
“확실히 호가군은 술렁거리고 있소이다. 곽 장군이 난계성을 공격하고 있는 게 분명하오. 이럴 때 우린 호가군을 급습해야만 하오. 그래야 놈들이 원군을 보내지 못하지.”
오강이었다.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갖는다는 듯 갑옷의 앞가슴께를 주먹으로 세차게 두드렸다.
“그래도 보다 신중해야 하네. 만약 이게 호가군의 함정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이건 담개의 말이었다. 아무래도 노장이다 보니 그는 신중했다.
“함정이면 어떻소? 그대로 뭉그러뜨리는 거지.”
“소장의 생각도 같소이다.”
맹아가 오강에게 동조하고 나섰다. 벌써부터 손이 근질거리는지 연방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거기서부터 장수들의 의견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지금 당장 호가군을 치자는 소장파와, 보다 신중하게 좀 더 기다려 보자는 노장파로.
그 광경을 본 좌괴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의 진막에서 본진까지 달려오는 동안 아무것도 느낀 게 없었다.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 밤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장수들은 뭔가를 느낀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었다.
‘이게 바로 실전 감각인가?’
후방에 앉아 작전을 짜는 건 장수들이 자신을 따르지 못한다고 좌괴는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전장에서의 감각은 자신이 저들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장 지금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상황을 이미 파악한 장수들은 각자의 신념대로 행동하길 주장하고 있는데, 자신은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다. 자괴감을 짓씹을 수밖에 없는 좌괴였다. 만약 이럴 때 누군가 자신의 뜻을 물었다면, 이냥 허물어질 수밖에 없을 듯했다.
다행이랄까. 누구도 좌괴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이건 작전을 수립하는 게 아니라 기정사실화된 기습의 시기에 대한 결정만 남은 것이다. 굳이 군사에게 묻지 않아도 될 사안이었다.
“잠깐! 모두 조용히 해 보시오. 누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 같은데?”
서진청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논쟁에 말려들지 않고 바깥의 동정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순식간에 진막 안이 고요해졌다. 과연 서너 필의 말이 다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보고 오겠소.”
채 말을 맺지도 않고 맹아가 후다닥 달려 나갔다.
그제야 사람들은 아직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장수를 찾았다. 상가웅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상 장군이 참석하지 않았군.”
담개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맹아가 상가웅을 데리고 들어왔다. 아니, 상가웅뿐만이 아니었다. 위휘군 복장을 한 병사 한 명이 오랏줄에 묶인 적병 하나를 끌고 들어왔다. 전령인 듯 갑옷에 전령기가 꽂혀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저자는 또 누구고?”
담개가 빠른 어조로 물었다. 그 음색엔 약간의 우려가 묻어 있었다.
이제 장수로서 어엿하게 한몫을 하는 상가웅이지만, 그에게는 까닭 모를 책임감을 느끼는 담개였다. 그의 부친이 효명성주 상림호로, 같은 정규군이란 게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난계성에서 호가군으로 가는 전령 중 한 명을 잡아 왔습니다.”
“뭣이? 그럼 곽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단 말인가?”
“틀림없습니다. 다만 모든 전령을 다 차단하진 못했기에 지금쯤 난계성의 위기가 호가군에 알려졌을 겁니다.”
“좋아!”
지금까지 말없이 듣고만 있던 편월이 돌연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전군 출동! 선봉은 나와 근위대다!”
“존명!”
선봉에 선다는 말을 듣자마자 맹아는 재빨리 복명하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동시에 밖에선 부산스러운 사람 목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이내 북과 소라고둥 소리가 밤공기를 산산이 깨뜨렸다.
“선봉에 서시겠다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린 집어치우시오.”
담개가 가장 먼저 편월을 제지하고 나섰다.
“담 장군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오. 세상의 어느 군세가 총대장과 근위대를 선봉으로 세운단 말이오? 그러니 선봉은 역시 우리 흑월대가 맡겠소.”
오강이 담개를 편들면서 슬쩍 선봉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렇게 되면 서진청도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고, 이내 진막 안은 다시 선봉 다툼으로 왁작거렸다.
“그만!”
또다시 편월이 고함을 질렀다. 그 바람에 장수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명은 그대로 시행된다. 적은 십만이 넘는 병력. 그런데 우린 고작 오만이다. 부상병까지 총동원되어야 할 판이야. 총대장이고 나발이고 없다. 모두 출격!”
말투는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한 편월이었지만, 그 추상같은 명령은 가히 일군의 지휘자다웠다.
이제 더 이상 토를 다는 장수는 없었다. 모두 각자의 부대로 가기 위해 진막 밖으로 달려 나갔다.
“좌 선생에겐 뒤를 부탁하지.”
“염려 마십시오.”
한마디 당부의 말을 두고 나가는 편월의 등에 대고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좌괴는 대답했다.
그에게 무슨 힘이 있어 모두 출동한 뒤의 텅 빈 자리를 지키겠는가마는 이건 좌괴의 진심이었다.
기실 이번 야습에 위휘군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합진성엔 두건득이, 윤주성과 탄금성엔 각기 강숙과 지두룡이 남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싸움에 패한다면 편월도 목숨을 잃을 공산이 크다. 패잔병을 이끌고 합진성으로 철수하진 않을 거라는 얘기다. 그만큼 호윤천에 대한 그의 증오감은 깊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장수들의 거취는 저절로 정해진다. 편월 없이는 그들의 삶도 무의미해질 테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이 싸움 한판에 위휘군이 깨끗이 망하느냐 아니면 호가군을 무찌르고 건주까지 석권하느냐가 달린 셈이었다.
그러니 좌괴는 마음 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기면 지킬 이유도 없고, 진다면 그대로 자결해 버리면 그만이다.
두두두두두둥-!
뚜우우, 뚜우-!
북과 소라고둥 소리는 여태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이쯤 되면 야습이 아니라 전면전이 되고 말 터였다.
좌괴는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막 선봉으로 출격하는 편월과 근위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각 부대들이 다투어 따랐다. 호령하는 장수들의 고함이 연방 터져 나왔고, 그에 맞춰 사기를 돋우기 위한 병사들의 함성이 뒤를 이었다.
좌괴는 호가군 쪽을 쳐다보았다. 그쪽도 확실히 동요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그때, 좌괴가 보고 있는 호가군 뒤쪽에서 시뻘건 화광이 치솟았다. 그 광경은 마치 거대한 화산의 분화구가 매서운 불길을 내뿜는 것 같았다.
“성공했구나!”
좌괴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불길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곽가군이 드디어 난계성을 떨구고 적의 군량미를 태우기 시작했다는 것 말이다.
그건 막 출동한 위휘군의 사기와 곧바로 직결되었다.
“와아아!”
“이겼다, 이겼어!”
적과 부딪치기도 전에 벌써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위휘군의 발길은 저절로 빨라졌다.
이제 위휘군은 선봉도 후미도 없어져 버린, 글자 그대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곧바로 호가군을 향해 짓쳐 들었다.
위휘군과 호가군 사이의 거리는 십 리 남짓이다.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영채들이 더러 서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낮에처럼 장수들의 일대일 싸움을 위한 것과 적정을 정탐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물론 거기에도 적병들이 주둔하고 있어서 활을 쏘며 저항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사기가 오를 대로 올라 이미 거대한 물결이 되어 버린 위휘군의 발길을 막지 못했다.
“하앗!”
적이 세운 영채를 가장 먼저 넘은 건 편월이었다. 그를 태운 흑풍은 마치 보이지 않는 날개라도 가진 것처럼 영채의 목책을 가볍게 훌쩍 넘었다.
놀란 적병들이 창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편월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놈들은 뒤에 오는 아군에 맡겨도 충분할 터였다.
편월의 눈은 오직 호가군의 본진에 꽂혀 있었다. 정확하게는 거기에 있을 호윤천을 찾는 중이었다.
‘반드시 목을 벤다!’
이게 바로 이 싸움에 임하는 편월의 집념이었다.
진다는 생각 따위는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다른 조건 없이 이런 난전을 벌인다면 병력에서 열세인지라 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호가군의 후방에선 그들의 군량미가 불타고 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등에 업은 상태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차라리 창을 부러뜨리고 어디 촌구석의 농부나 되는 게 훨씬 낫다.
“하아!”
편월은 흑풍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끼히히힝!
그에 호응하듯 흑풍은 더욱 거칠게 내달렸고, 근처에 얼쩡거리던 적의 잡병들이 이리저리 튕겨 나갔다.
드디어 저만치 적의 본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편월은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단신으로 적의 본대로 치고 들어가자니, 저절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광운과 함께 잡가군으로 떠돌 때, 많은 병력의 적을 치기 위해 두 사람은 종종 곧바로 적의 본대를 노리곤 했다. 그 당시의 기분과 감각이 대도를 쥔 손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호윤천은 어디 있느냐? 나 편월이 그 쭈그렁 모가지를 가지러 왔노라!”
머리 위에서 대도를 크게 한 바퀴 돌리며 편월이 외쳤다.
동시에 흑풍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두세 명의 잡병을 차 던졌다.
3
회계천回溪川을 발등에 감고, 감곡산嵌谷山에 등을 괸 외천성外遷城의 하루는 안개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만에 달하는 막주군의 눈에는 불과 오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외천성의 전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침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시각. 수자윤은 벌써부터 광운의 진막에서 그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벌써 닷새째요, 대장군! 대체 언제까지 이처럼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하실 작정이오? 오늘은 소장에게 명을 내려 주시오. 점심 먹기 전에 성문을 열어 보이리다!”
수자윤의 목소리는 거칠고 높았다. 이미 닷새 전에 외천성을 포위해 놓고서, 광운이 아무런 군사행동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 장군도 말씀 좀 하시오. 이러다가는 막강한 우리 막주군의 위명에 금이 가겠소이다.”
이번에 수자윤은 고함의 상대를 고숭으로 바꿨다. 막주에서부터 광운과 함께하고 있는 중년의 장수였다.
“성주께 깊은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고숭은 가볍게 대꾸했다. 광운을 부르는 호칭이 수자윤과 다른 건 그가 막주 출신인 까닭이다.
“그러니 이 기회에 대장군의 그 생각을 좀 알아야겠소이다. 벌써 닷새요, 닷새! 그 정도면 다른 성을 하나 더 깨뜨리고도 남을 시간이오.”
“수 장군, 빠른 진격만이 능사는 아닐세.”
“응? 그 무슨 대장군답지 않은 말씀이오? 지금 위휘군은 호가군을 맞아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게요. 조금이라도 빨리 우리가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광운의 말에 수자윤은 여전히 큰 목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로서는 전쟁 도중에 미적거리는 이런 식의 행군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 장군, 우리 병사들은 지금 많이 지쳐 있네. 그들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하네. 그리고 나는 수군을 기다리는 중일세.”
“휴식? 수군?”
광운의 설명에도 수자윤은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연전연승한 병사들에게 뭔 놈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오? 또 수군의 장점이 뭐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정박할 곳만 찾으면 합류할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오늘 중으로 외천성을 깨뜨리고 진군합시다!”
이어지는 수자윤의 강변에 광운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제지했다가는 그의 사기를 꺾을 우려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벌써 닷새나 쉰 병사들은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제각기 무구를 정비하면서,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알겠네. 그렇지만 만약 내가 명령을 내린다면 어떤 방법으로 외천성을 공격하겠나?”
사실 외천성은 난공불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앞을 흐르는 회계천은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깊다. 등을 기대고 있는 감곡산 역시 산이 험준하고 골짜기가 깊어 병사들을 기동시키기 여간 어려운 곳이 아니다. 이런 지리적인 상황들을 무시하고 정면에서 공격한다면, 판판이 실패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화공이오, 화공!”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듯 수자윤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얼굴엔 득의의 기색이 역력했다.
“화공이라니?”
“외천성 뒤에 있는 감곡산을 깡그리 불 지르는 거요. 물론 바람의 방향을 살펴야겠지만, 감곡산이 불타면 외천성도 무사하진 못할 거요.”
“그렇다면 성에 있는 일반 백성들은?”
지금까지 광운이 성 공격을 할 때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 바로 일반 백성들의 안전이었다. 이 난세의 가장 큰 피해자일지도 모르는 그들은 어떤 경우가 됐든 보호받아야 한다.
“공격하기 전에 성에다 알려 주는 거요. 일반 백성들을 피신시키라고! 외천성의 성주가 어떤 작자인지 몰라도, 기본이 된 인간이라면 우리 말을 들을 거요.”
수자윤은 자신만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수자윤은 어제 외천성으로부터 화살 전문傳文을 한 통 받았다. 병사들이야 최후까지 저항할 것이지만, 백성들만은 안전하게 성 밖으로 내보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대한 답을 아직 수자윤은 하지 않았다. 광운이 백성들을 아낀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광운에게도 아직 얘기하지 않았다. 확실한 화공이 결정된 후에 말해도 늦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과연 외천성의 성주가 우리의 말에 따라 줄까요? 그럴 작정이었다면 포위되자마자 그쪽에서 먼저 요청이 있었을 텐데?”
고숭이 우려 섞인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수자윤의 말에 부정적인 생각이었다. 그의 말처럼 백성들을 피신시킬 생각이 있었다면 진즉에 연락이 왔을 터였다.
“대장군, 우선은 공격을 허락해 주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백성들의 피해는 최소화하겠소.”
수자윤은 다시 한 번 광운을 다그쳤다. 명령을 받은 후에야 외천성에서 온 서신을 내보일 참이었다. 그게 보다 극적일 테니까 말이다.
광운은 여전히 난색을 표했다. 더 이상 수자윤을 말리는 건 사기에 관계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외천성에 화공을 가한다는 건 너무 과격하다.
“고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나?”
광운은 고숭의 뜻을 물었다. 그는 수자윤보다는 부드러운 성미니까 보다 유화적인 작전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수 장군에게 한번 맡겨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뭐?”
기대와 다른 답을 들은 광운의 눈이 약간 크게 뜨였다.
“거보십시오, 대장군. 고 장군도 소장과 같은 뜻이지 않소이까. 그러니 당장 명령을 내려 주시오. 오늘 중으로 외천성의 성문을 깨뜨려 보이겠소이다.”
수자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고숭까지 자신을 역성들고 나선 까닭에서였다.
이쯤 되면 광운도 어쩔 수 없다. 수자윤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밖에 있는 병사들도 들었을 테고, 계속해서 말리면 정말로 사기가 저하될지도 모른다.
“알겠소. 그럼 수 장군 뜻대로 공격해 보시오. 단, 백성들의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오.”
“흐흐흐.”
광운의 당부에 수자윤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품속에서 한 장의 서신을 꺼내 놓았다. 외천성에서 보낸 화살 전문이었다.
“이런, 이런!”
서신을 읽어 본 고숭은 연방 혀를 찼다. 수자윤이 이처럼 감쪽같이 자신들을 속일지 몰라서였다.
기가 막히는 건 광운도 마찬가지였다. 진즉에 이 서신을 내놨다면 이처럼 시간을 끌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수자윤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광운은 뭔가를 깨달았다. 만약 이 서신부터 본 뒤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면 수자윤의 체면은 살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막주군의 장수로서 대장군을 설득했다는 걸 장병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으리라.
“이 서신대로라면 오늘 중으로 외천성 공격은 불가능하겠군. 백성들을 피신시키는 데만도 하루 종일 걸릴 테니까. 그래도 준비는 해 둬야 할 터, 병력은 얼마나 필요한가?”
“이만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성에 서신을 보내 오늘 중으로 백성들을 피신시키라고 하겠소.”
“그러는 게 좋겠군.”
“소장은 이만 물러가서 준비를 하겠소. 흑유를 좀 사용할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감사합니다.”
수자윤은 깎듯이 군례를 갖추고는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뜻이 통한 게 여간 기쁘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감곡산 정상 너머로 검붉은 노을이 채색되었다. 그와 동시에 울창한 수림에선 노을보다 붉은 불길이 피어올랐고, 뒤 바람을 맞은 불길은 외천성으로 외천성으로 밀려들었다.
* * *
배후의 난계성 쪽에서 불길이 올랐을 때, 호윤천은 패배를 절감했다.
‘왜 그리 망설였던가?’
자신은 보다 빨리 결정을 했어야만 했다. 되돌아가서 건주를 건지든지 아니면 눈앞의 위휘군을 짓밟았어야 했다. 병력의 차이를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 자신은 우유부단하게 처신했고, 그 결과 난계성의 군량미를 적으로 하여금 태워 버리게 하고 말았다.
‘첫 번째 전령이 도착했을 때 제대로 대처하기만 했어도…….’
난계성이 공격당하자마자 전령이 왔었다. 물론 구원을 바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도 호윤천은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병력을 빼내면 당장 위휘군이 치고 들어올 것 같아, 그 대비를 하느라 그만 때를 놓치고 말았다.
“아버님, 어찌 정신을 놓고 계십니까? 지금이라도 병력을 수습하면 반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여봐라, 어서 대장군을 무장시켜 드려라!”
호유진이 진막 안으로 뛰어들며 연방 소리를 질렀다.
어쩌면 호유진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호가군은 위휘군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병력이다. 지금은 혼란에 빠져 대처가 어렵지만 제대로 수습만 하면 반격도 가능하거니와 최악의 경우 본진만은 무사히 후퇴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호윤천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자신보다 나은 무장은 없다는 자부심이 한순간의 망설임으로 산산조각 난 지금, 상처 입은 자존심은 육신의 기력마저 앗아 가 버렸던 것이다.
“아버님!”
“전군의 지휘를… 맡기겠다.”
이게 호윤천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무장은 갖추십시오. 후퇴를 하든 반격을 하든 그 모습으론 안 됩니다.”
그 아비에 비해 용렬하긴 했지만, 호유진도 어엿한 장수다. 가장 시급한 것이 뭔지 분간할 줄 안다는 얘기다.
자신의 명에 따라 아장들이 아버지를 무장시키는 걸 확인한 호유진은 재빨리 밖으로 달려 나갔다. 병력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밖으로 나온 호유진은 눈알이 뒤집힐 것 같았다. 아군인 호가군이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걸 본 탓이었다.
“당황하지 마라! 적의 숫자는 적다. 침착하게 부대별로 정렬해서 대항하라!”
대장군기를 휘두르며 호유진은 연방 고함을 질렀다. 그 주변을 많은 편장과 아장들, 즉 직속부대의 장수들이 에워쌌다.
“날 지킬 필요는 없다! 각 부대로 달려가라. 가서 장병들을 정돈하라고 일러라. 적의 숫자는 적다. 그러니 체계적으로 대항하라고 일러라!”
“존명!”
전령이고 뭐고 찾을 상황이 아니었다. 곁에서 호유진의 명을 들은 자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달려갔다.
물론 호유진을 지키는 장수 몇 명은 그대로 남았다. 아무리 다급해도 전군의 지휘를 맡은 사람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호유진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대장군기를 펄럭이며 호가군이 취약한 곳이라는 판단이 서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 바람에 호유진의 호위를 맡은 장수들도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면서 병사들까지 보살펴야 하니, 이 난장판에 가장 분주한 게 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연적으로 경호에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호가군의 대장군인가? 나 편월이 상대하겠다!”
본대의 일각을 무너뜨린 편월이 어느새 호유진에게 바짝 접근해 그 무지막지한 대도를 휘둘렀다.
“막아라!”
“어딜 감히!”
호유진의 주변에 흩어져 있던 호가군 장수들이 한꺼번에 왈칵 편월에게 덤벼들었다. 그들로서도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편월을 상대한다는 건 애당초 역부족이었다.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비하려니 손발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편월은 지금 한껏 기세가 오른 상태였다. 적의 본진에 단신으로 뛰어드는 건 특기(?) 중 하나고, 호가군의 군량미도 성공적으로 불살랐다. 대도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였다.
“조무래기들은 상대하지 않겠다. 호윤천은 썩 나서 목을 늘여라!”
한 소리 크게 내지르며 편월은 수중의 대도를 휘둘렀다. 정작 베인 사람은 없었지만, 몰려들던 적의 장수들이 움찔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 피하거나 막기에 급급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적장들로선 아주 잠깐 멈칫거린 것에 불과했지만, 편월과 흑풍에겐 호유진에게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벌어 주었다.
“와앗!”
자신도 모르게 호유진은 경악성을 토하고 말았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편월의 공격이 그만큼 급작스러웠다는 의미였다.
어쨌든 호유진은 그 아비로부터 대장군 직을 이어받은 장수다. 이내 놀람을 누르며 창으로 침착하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편월에게 따돌려졌던 호가군 장수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주군께 손대려거든 먼저 이 맹아에게 허락을 받아라!”
“여기 흑월대의 오강도 있다!”
맹아와 오강이 가세함으로써 호가군 장수들은 발이 묶이고 말았다. 거기에 담개를 비롯한 위휘군의 노장들도 우르르 몰려들자, 이미 호유진을 보호한다는 건 꿈속의 얘기가 되고 말았다. 그보다 자신들의 안전을 먼저 도모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호유진임을 알아본 편월은 적잖이 실망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호윤천을 노리고 있었다. 한데 그 아들을 벤다는 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편월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비건 아들이건 모두가 적이다. 차례로 베다 보면 결국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터였다.
씨아옹!
편월의 대도가 재차 허공을 핥았다. 노리는 건 호유진의 목이었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채앵!
창을 버린 호유진은 커다란 장군도로 편월의 대도를 막았다. 두 개의 병기 사이에서 튄 불꽃이 어둠 속에서 명멸했다.
“더러운 배신자 놈! 허주를 치라고 군사를 줬더니, 오히려 우리에게 창을 겨눠? 용서치 않겠다. 받아라!”
호유진은 악을 쓰며 편월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편월과 위휘군은 분명 자신들의 뒤통수를 친 배신자일 수밖에 없다. 치솟는 노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편월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정허군이 충성을 바칠 대상은 마용승이었다. 그가 죽었으니 어떤 행동을 하든 자유다. 호유진의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그래도 욕을 먹고 기분 좋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편월의 대도엔 더욱 힘이 들어갔고, 어둠을 가르는 칼날도 한층 날카로워진 듯했다.
호유진은 허둥거렸다. 다른 군사적인 면은 몰라도, 실전 경험만은 편월에 비해 턱없이 뒤떨어진다. 한 번씩 대도가 날아들 때마다 이젠 마지막이다 싶은 생각이 먼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호유진도 평소 단련을 거듭해 온 무장임엔 틀림없다. 금방이라도 편월의 대도에 당할 것 같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곤 했다.
‘달아나자.’라는 생각이 호유진의 머리에 떠오른 건 벌써 십여 합이 교환된 뒤였다.
호유진은 자신이 도저히 편월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게다가 주변에 있던 부하 장수들도 맹아를 비롯한 위휘군의 장수들에게 차례로 죽어 나갔다.
하지만 호유진의 발길을 막는 건 아버지였다. 조금 전에 봤을 때 세상을 모두 잃은 것 같은 낙담한 모습이라 어쩌면 여기서 옥쇄해 버릴지도 모른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가 피할 시간만은 벌어야 한다.
별안간 호유진은 말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힘차게 고함을 질렀다.
“호가군은 듣거라! 상국님을 모시고 모두 후퇴하라. 집결지는 차후 각 부대로 연락하겠다!”
오늘 밤 들어 호가군에 처음으로 내려진 후퇴 명령이었다. 게다가 그건 대장군 직을 물려받은 호유진에게서 나온 정식명령이었다. 장병들이 앞 다투어 전장에서 몸을 빼는 건 당연했다.
그건 흡사 무너진 둑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어쨌거나 호가군은 십만이 훨씬 넘는 대군이다. 오만 남짓한 위휘군의 기습으로 혼란에 빠진 자들도 있었지만, 체계적으로 저항한 부대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후퇴 명령 하나에 한꺼번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십만이 넘는 병사들이 앞 다퉈 달리기 시작하자 자기편의 발길에 짓밟혀 죽거나 부상하는 자가 속출했다.
“다른 놈들에겐 곁눈질도 주지 마라! 오직 호가 부자의 목만 친다!”
달아나는 호유진의 뒤를 맹렬하게 쫓으며 편월도 고함을 질렀다. 누가 뭐래도 호가군의 중심은 호윤천과 호유진이다. 그들만 죽이면 나머지는 저절로 흩어지거나 투항할 것이다.
“섰거라! 위휘군의 편월이라고 한다! 먼저 내 창을 받아라!”
누군가 편월의 앞을 가로막으며 창을 내질렀다. 호가군의 아장 중 한 명인 듯했다.
편월로선 불의의 일격이었다. 무너져 달아나기 바쁜 호가군 중에서 이처럼 용감하게 자신에게 덤빌 자가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편월은 급히 고삐를 당겼다. 흑풍이 왈칵 앞발을 들었고, 그 바람에 적장이 찌른 창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그다음은 편월의 반격이었다. 흑풍의 앞발이 땅에 닿는 것과 동시에 휘두른 그의 대도는 여지없이 적장의 육신을 두 동강 내고 말았다. 비명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육신이 아픔을 호소하기도 전에 이미 적장의 혼백은 구천을 떠돌게 되었기 때문이다.
편월은 다시 달렸다. 그 한 번의 방해로 인해 호유진은 멀찍이 멀어졌고, 달아나는 자기편 속으로 곧 사라질 참이었다.
“호유진!”
편월의 입에서 거대한 외침이 토해졌다. 동시에 그는 호유진의 등판을 향해 수중의 대도를 강하게 던졌다.
쉬잇! 퍼억!
어둠을 일직선으로 가른 대도는 그대로 호유진의 등짝까지 꿰뚫었다.
“크아악!”
섬뜩한 비명은 그 뒤에도 길게 이어졌다. 부상당한 채 낙마한 호유진의 몸뚱어리가 같은 편의 발길에 짓밟혔기 때문이다. 그렇게 호유진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죽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