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룡패력老龍覇力 (58/66)

노룡패력老龍覇力

1

마침내 광운이 이끄는 막주군은 영욱성 공격에 착수했다.

광운으로선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평생 유일하게 사랑했던 죽영이 늘 자신을 기다려 주던 곳, 잡가군으로 떠돌던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해 줬던 곳.

이제 그곳을 공격한다고 생각하니 전의보다는 오히려 어떤 슬픔 같은 게 느껴졌다.

기실 광운은 영욱성에 대한 공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대신 편월과 약조한 대로 사주의 중간쯤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막주에서 이끌고 왔던 장수들이야 어쨌든 간에, 사주를 지나면서 새로이 합류한 장수들은 세찬 반대를 했다. 파양주를 석권해야 제대로 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이들의 주장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막주군보다 새로 합류한 군세가 더 많아 근 십이만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들은 항복한 군세에 불과하다. 승자의 입장에서 강하게 억누를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대장군인 광운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건 병법에도 어긋나고 운영의 묘도 살리지 못하는 행위이다. 막주군이야 처음부터 자신을 믿고 따랐으니 약간의 불만 정도는 감수하겠지만 새로 합류한 군세는 다르다. 불만을 품고 진중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결과 오늘의 영욱성 공격이 이루어졌고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는 게 광운의 예측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광운이 이끄는 군대는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하다. 게다가 여기까지 오면서 숱한 성들을 공략해서 떨구었다. 성 공격엔 이골이 났다는 얘기다.

거기다 광운은 영욱성을 속속들이 안다. 그사이 변화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인 성곽이나 문의 구조 같은 건 바뀌지 않았을 게다. 취약점을 알고 공격을 하니, 성병으로선 방어하기 힘들 수밖에 없을 터였다.

“대장군, 괜찮으시오?”

막주에서부터 광운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했던 상림호였다.

지금 상림호는 광운의 심기를 묻는 게 아니었다. 그의 몸 상태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죽영이 죽은 후 상심한 광운은 한때 재기 불능이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벌에 나섰고 서서히 상태가 좋아지는 듯했다. 그래서 장병들 사이에선 ‘천생 전귀’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주의 효명성에 든 직후 광운은 피를 토하며 혼절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꼬박 하루를 의식불명의 상태로 지냈다.

그 후로 상림호는 촌각도 광운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상태를 점검했다.

“감회가 새롭소.”

그 점을 잘 아는 광운은 슬쩍 흘려 대답했다. 실제로 마음에 비해 몸 상태가 나쁜 편도 아니었다.

상림호는 순순히 수긍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자신에게는 솔직히 얘기하는 광운이기 때문이다.

“성병이 얼마쯤 될 것 같소이까?”

“호윤천이 대부분 이끌고 동쪽으로 갔을 테니 이만 정도? 많아도 삼만은 넘지 않을 거요.”

“소장의 생각도 그렇소. 아마 오늘 중으로 떨어질 게요.”

역시 장수들의 생각은 비슷한 모양이다. 상림호 역시 영욱성이 오늘 중으로 떨어진다고 예측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 벌써 제일 대가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구려.”

상림호가 전황을 보고했다. 물경 십이만에 이르는 대군이고 보니, 일일이 호기군이니 백기군이니 나눌 수가 없어서 그냥 숫자로 부대를 나눴다. 제일 대는 막주군으로서 늘 선봉을 담당했다.

광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직접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게 되었고, 상림호가 하는 이런 형태의 전황 보고엔 여전히 익숙지 않아서였다.

그런데도 상림호는 사뭇 즐거운 듯이 크고 작은 전투 시엔 이런 식으로 전황 보고를 했다. 예전의 신분이야 어쨌든 지금은 광운이 대장군이란 걸 확실히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제삼 대의 충차와 운제가 총동원된 모양이오. 곧 성이 뚫릴 것 같소이다.”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린다고 각 부대에 전달하시오.”

“이미 전달되었소. 각 장수들의 군령장軍令狀도 받았고.”

상림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막주군 대장군으로서 광운이 방금 내린 명령은 지금까지 성을 깨뜨릴 때마다 하달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을 어기는 자가 없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광운은 서슴없이 군법을 적용해 참수할 자는 참수하고, 태형에 처할 자는 태형에 처했다.

그 결과 최근 몇 개의 성에선 본의 아닌 피해 외에 의도적으로 병사들이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힌 적은 없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겐 적절한 보상도 해 줬다.

“대장군의 마음 씀씀이에 소장은 또 한 번 탄복했소이다.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음으로써 우리 막주군은 어딜 가나 환영을 받게 되었고, 또 뒤에 남겨진 성도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되지 않았소.”

흐뭇한 어투로 상림호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사실이었다.

난세의 백성들은 본능적으로 병사들을 피하게 된다. 그들이 가는 곳엔 언제든 전쟁이 벌어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들의 몫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막주군은 달랐다. 처음에야 백성들도 피했지만, 지금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게 되었다. 개중에는 음식이나 술을 제공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물론 광운은 그런 걸 바라고 명령을 내린 건 아니었다. 잡가군으로 떠돌면서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이루어진 일이었다.

“충차가 성문을 두들기는구려.”

쿠웅!

상림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충차가 성문에 충돌하는 소리가 본진에 앉은 광운의 귀에도 들렸다.

“대장군, 막주에서 전령이 당도했습니다.”

“뭐라고? 막주에서?”

광운보다 먼저 상림호가 놀란 어투로 되물었다. 막주에 무슨 변괴가 있지 않는 한 전령을 보낼 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령이 가져온 건 위급한 전갈이 아니라, 한 통의 서찰이었다. 막주에 남겨 둔 진도수가 보낸 것이었다.

서찰의 서두에 진도수는 광운에 대한 염려부터 잔뜩 늘어놓았다. 광운이 쓰러졌다는 걸 어떻게 안 모양이었다.

이어진 건 군사적인 보고였다. 그동안 꾸준히 양성한 수군이 이제는 제법 쓸 만하게 되었다는 것, 보병 역시 필요한 만큼 확충해 두었으니 언제든 지시만 내리면 곧바로 보내 주겠다는 것, 또한 그동안 거둬들인 세미의 현황에 대한 것도 빼놓지 않았다.

문득 광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 서찰은 군사적 보고의 형식을 띠었지만, 순전히 자신의 안위에 대한 염려에서 적은 것이란 점을 간파한 까닭에서였다.

이러라고 진도수를 막주에 남겨 둔 게 아니었다. 그라면 한눈팔지 않고 오직 군무에만 충실하리라고 여겨서였다.

“전령은 듣거라!”

돌연 광운은 소리를 높여 서찰을 가져온 전령을 불렀다.

“대령이오.”

“지금 즉시 막주로 돌아가라. 가거든 진 장군에게 내가 복귀할 때까지 근신하고 있으라고 전하라.”

“근신?”

“군무에만 매달려도 촌각의 시간이 없을 터에, 이처럼 내 안위가 걱정되어 서찰 따위나 보내서야 어떻게 믿겠나? 그러니 지금 당장 말을 달려 돌아가 내 말을 전하라.”

“조, 존명!”

서슬 퍼런 광운의 말에 전령은 더듬거리며 복명한 후 몸을 돌렸다.

“전령!”

광운은 재차 전령을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만들어 물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사주를 지나쳤을 때, 그곳의 분위기는 어떻던가? 혹시 불온한 기색이 떠돌지나 않던가?”

“다른 곳은 알지 못하겠으나, 소관이 지나온 곳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령이라면 최단 거리로 달려왔을 게고 그 노선은 광운의 뇌리에 훤하게 떠올랐다. 그곳이 안정적이라면 다른 곳도 가히 염려는 없을 터였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광운의 질문은 중요한 것이었다. 기껏 정복해 둔 땅에서 반기라도 드는 곳이 있다면, 그야말로 배후를 찔린 꼴이 된다. 정벌에 나선 군세가 가장 유념해야 될 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알겠다. 어서 돌아가 내 말을 진 장군에게 똑똑히 전하라.”

“존명!”

전령은 튀듯이 돌아서 재빨리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상림호가 슬쩍 따라붙었다.

뻔히 알면서 광운은 상림호를 말리지 않았다. 아마 그는 전령을 붙들고 자신이 진도수에게 했던 말을 전하지 말라고 하든가, 아니면 한결 유화시켜서 전하도록 당부할 터였다.

“와아아!”

지금까지 웅웅거리던 전장 소음을 압도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드디어 성문이 깨진 모양이었다.

광운은 의자에서 일어나 말에 올랐다. 성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위험한 일이지만 본진을 형성하고 있던 장병들은 말리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막 돌아온 상림호까지 제지하지 않는 건 지금까지 광운이 늘 그래 왔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이 뚫릴 때마다 광운은 되도록 빨리 입성하려고 애를 썼다. 백성들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비록 명령이 하달되었다고는 하나 일단 전장 심리의 지배하에 놓인 장병들은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오죽하면 아군끼리 한편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발생하겠느냔 말이다.

잘 훈련된 군사들도 이럴진대 만에 하나 그들이 백성을 상대로 난행을 저지른다면 어떻겠는가?

그걸 막기 위한, 일종의 의무감으로 광운은 늘 입성을 서둘렀다. 지금껏 명령이 잘 지켜졌다지만 언제나 방심은 금물인 것이다.

광운이 움직이자, 일만으로 구성된 본진 역시 둔중한 무게감을 가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본진을 구성할 때 광운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당연히 막주군이 주축이지만, 새로이 합류한 군세에서도 적당한 인원을 차출했다. 그래야 공평하니까.

본진의 입성은 빨랐다. 따지고 보면 십이만의 병력 중 실제 공격에 가담한 숫자는 삼분지 일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있던 병사들도 본진이 지나갈 때면 어김없이 길을 열어 주었다.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렬한 난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본진은 곧장 내성으로 향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이 영욱성의 내성은 광운에게 추억이 서린 곳이다. 마용승으로부터 처음으로 인정받았던 곳이었으니 말이다.

의외로 내성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수비 장수가 항복을 결정한 탓이었다.

그 덕에 본진은 쉽사리 내성을 접수했고, 광운은 곧장 적금각으로 들어갔다.

감회가 새로웠다. 예전에 마용승은 이곳에서 천하의 사분지 일을 질타했었다. 그가 가고 없는 지금, 애써 키운 군세는 배반을 일삼고, 심지어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을 했다.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굴 탓할 일은 결코 아니다. 시국이 이 꼴이다 보니 사람이 지조를 지키며 살기가 어려워졌을 뿐이다.

“대장군, 호윤천 일족을 끌고 왔습니다. 자, 어서 꿇어라.”

말소리에 돌아보니 험악한 인상의 장수 한 명이 여러 명의 여자와 아이들을 꿇리고 있었다. 호윤천의 일족인 모양이었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소장의 생각으로는 참수하여 효수하는 게 마땅하다고…….”

“수 장군.”

광운은 조용히 장수의 말을 막았다. 그는 사주의 한 성을 맡고 있던 수자윤首子閏이었다. 항복한 후에 광운에게 심취하여 물불 가리지 않고 충성을 바치는 중이었다.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소? 그러니 풀어 주고, 살던 집에서 예전대로 살게 하시오.”

“하오나 이들은 적장의 일족! 마땅히 목을 베어 효수하는 게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자와 아이를 베어야 진작되는 사기라면, 그런 사기는 애당초 필요 없소. 여태 우리가 어떻게 싸워 왔는지 돌이켜 보시오. 다들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수 장군, 이들을 집까지 잘 호위해 주시오.”

목을 치라는 수자윤에게 자신들의 호위를 맡긴다는 말에 호윤천 일족은 잔뜩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광운은 염려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벌써 수자윤의 표정엔 승복한 기색이 역력했다. 단순한 성격인지라 방금 들었던 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 덤빌 터였다.

“자, 가자. 일어서.”

그래도 호윤천 일족을 다루는 수자윤의 말투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수자윤과 엇갈리듯이 이번엔 상림호가 광운을 찾아왔다.

“이상한 손님이 찾아왔소이다, 대장군.”

“이상한 손님이라니? 어떤 사람이오?”

“송용조라고 하면서, 대장군께서 아실 거라고 하던데…….”

“알다마다요. 지금 어디 계시오?”

광운은 반색을 띠었다. 송용조에겐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중 하나도 제대로 갚질 못했는데, 제 발로 찾아와 주니 반갑기 짝이 없었다.

송용조는 금방 불려 와서 광운에게 정중한 예를 갖췄다.

“미천한 상인이 삼가 막주군 대장군을 배알하옵니다.”

“예를 거두시지요, 송 대인. 많은 은혜를 입은 몸으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광운은 재빨리 송용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사이 부쩍 늙어 앙상한 뼈마디만 느껴지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다행입니다. 이렇게 살아 계시고, 또 이 싸움의 와중에 아무 해도 입지 않으셨으니…….”

“늙어 죽지 못해 창피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대장군의 대업 성취에 자그만 밑거름이 되라는 하늘의 뜻인 줄 알고 노구를 이끌고 이렇게 왔습니다. 부디 추하다고 욕이나 하지 말아 주십시오.”

“추하다니요? 아직 정정하시니 보다 많은 일을 하셔야지요. 그런데 저분은 뉘신지요?”

그제야 송용조 뒤에 공손한 자세로 서 있는 장한을 본 광운은 의아한 듯 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모용추가 아니어서 더욱 의외였다.

“아, 소인이 데리고 있는 율우라는 애입니다. 대장군의 막하에 두며 부려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그럼 모용 대인은……?”

율우에 대한 인사도 잊은 채 광운은 모용추를 입에 올렸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전란의 시대니만큼 혹시 불길한 일이라도 당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아, 그 아이는 지금 위휘군의 막하에서 활동하고 있을 겁니다. 소인의 상단 대부분을 지금 탄금성으로 옮겨, 그 아이에게 관리를 맡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 그렇군요.”

“율우라고 합니다.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광운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도는 걸 본 율우가 재빨리 그리고 간략하게 인사를 올렸다.

“광운이라고 하오. 어쩌다 보니 막주의 대장군 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예전부터 송 대인께 많은 은혜를 입었소이다. 잘 부탁드리겠소.”

“이건 소인이 대장군께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가져온 것입니다. 한번 살펴보시길.”

광운과 율우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송용조가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었다.

“대장군께선 이제부터 동쪽으로 향하시겠지요. 이건 소인의 입김이 미치는 성주들의 명단입니다. 막주군의 길을 심하게 막지는 않을 겁니다.”

“아!”

광운은 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이거야말로 자신에게, 또한 막주군에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여기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단지 동쪽으로 향할 때의 진로와 계획에 커다란 도움이 될 건 확실했다.

그날 밤, 적금각에선 조촐한 술자리가 벌어졌다. 광운과 상림호, 송용조와 율우가 어우러진 자리였다.

밖에선 여전히 전장 정리와 잔당 소탕의 소음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2

“와아!”

위휘군의 진영에서 또 한차례 함성이 올랐다. 화응이 휘두른 삭초도削草刀에 의해 호가군 장수 한 명이 허공을 움켜쥔 채 거꾸러졌기 때문이다.

벌써 세 번째였다. 위휘군 첫 번째 장수로 출전한 화응은 그 거대한 덩치에서 솟구치는 타고난 신력으로 호가군 장수 셋을 이미 황천으로 보낸 것이다.

이쯤 되면 호가군은 기세가 꺾일 만도 한데 여전히 징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의 장수가 영채를 열고 나왔다. 작달막한 키에, 신장보다는 가슴이 더 너를 것처럼 느껴지는 자였다.

“나는 파양주 땅 권패산拳覇山에서 이름 석 자를 드높게 떨친…….”

“짖지 마라. 개새끼 이름은 알고 싶지도 않다!”

화응은 적장의 이름조차 듣지 않으려 했다. 뱉은 말 그대로 그의 눈엔 적장이 개새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짓밟아 버릴 듯 곧장 말을 몰아 덤벼들며 삭초도를 휘둘렀다.

“고얀 놈, 감히 나 석소패石小覇를 무시하다니! 내 오늘 네놈의 그 못생긴 모가지를 비틀어 주마!”

기어이 석소패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장은 한 자루 귀두도를 휘두르며 겁 없이 화응의 삭초도에 덤벼들었다.

화응으로선 꼴같잖은 일이었다. 자신은 말을 타고 있고 놈은 보병이다. 이런 차이도 모르는 석소패를 단칼에 해치우고 보다 인간답게 생긴 자와 싸우고 싶었다.

씨이잇!

섬뜩한 소리를 울부짖으며 낫처럼 생긴 화응의 삭초도가 석소패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순간 투구 속 화응의 눈은 웃고 있었다. 이 한 수로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석소패의 목이 확실히 잘리리라고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달콤한 게 아니었다.

채앵!

금속끼리 부딪치는 쇳소리가 요란하다 싶더니, 돌연 화응의 눈앞으로 두툼한 손바닥 하나가 화악 다가왔다. 귀두도로 삭초도를 막은 석소패가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훌쩍 도약하며 화응의 갑옷 자락을 잡아채려는 중이었다.

경악할 노릇이었지만 화응은 백전 연마의 장수였다. 허리를 뒤로 젖히며, 막힌 삭초도의 자루를 힘껏 당겨 오히려 석소패의 손목을 노리고 후려쳤다.

석소패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착지하더니, 화응의 다리를 노리고 냅다 귀두도를 휘둘렀다.

이번에 가해진 석소패의 공격은 화응에게 있어선 가렵지도 따갑지도 않은 것이었다. 기병에게 있어 다리는 약점 중 하나이니 그에 대한 대비도 잘 알기 때문이다.

까앙!

또 한차례 금속음이 들렸다. 화응의 삭초도 자루가 석소패의 귀두도를 막은 결과였다.

쉿!

처음보다 훨씬 줄어든 호선을 그리며 화응의 삭초도가 재차 석소패의 목을 노렸다. 자루에 막힌 귀두도를 거둘 틈도 주지 않은 재빠른 공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화응은 허공을 긋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가뜩이나 작달막한 석소패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화응은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사람 같지도 않은 작자의 무공이 이처럼 뛰어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말도 서서히 지쳐 가는 게 느껴졌다. 화응의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그를 싣고 오래 버티는 말이 없었다. 벌써 네 번째 격전인 걸 감안하면 그나마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그 순간 화응은 한 가지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자신은 말을 탄 채 장병에 속하는 삭초도를 사용하고 있다.

그에 비해 석소패는 보병에다 단병인 귀두도를 휘두른다.

이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화응은 석소패와 접근전을 벌였다. 유리한 점이 몽땅 지워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알아낸 건 실전에 곧장 적용해야 한다. 화응은 말을 옆으로 서너 발짝 물려서 석소패와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그러고는 삭초도를 휘둘렀다.

확실히 석소패는 당황한 듯했다. 그 작은 키를 이용해 피하거나 귀두도로 막으면서 끊임없이 접근을 시도했다.

그걸 알면서 멍하니 당할 화응이 아니었다. 석소패가 거리를 좁힐 때마다 말을 그만큼씩 물려 항상 같은 간격을 유지했다.

그렇다고 당장 승부가 갈리는 것도 아니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석소패의 몸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어떤 땐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화응의 삭초도를 피하며 그에게 접근하곤 했다.

양 진영도 어느새 조용해졌다. 도대체 몇 합이나 주고받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위휘군이든 호가군이든 이런 싸움은 처음 보는 게 분명했다.

돌연 두 사람의 싸움판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화응의 말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꼬꾸라져 버린 것이다.

“와앗!”

당연히 위휘군의 진영에선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올랐고, 호가군에선 반대였다.

다행인 건 바닥을 구르던 화응이 재빨리 자세를 잡고 일어섰다는 점이었다.

그만한 덩치에 갑옷까지 입었다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민첩한 동작이었다.

그래도 석소패가 공격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 줬던 그의 몸놀림이라면 화응의 목 정도는 쉽게 딸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석소패는 화응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조소에 가까운 웃음만 지었을 뿐이다.

“말을 갈아 타고 오너라. 여기서 기다리마.”

석소패의 말이었다. 처음과 똑같은 조건에서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럴 필요 없다. 허약해 빠진 말 따위는 없어도 네놈의 모가지 정도는 얼마든지 칠 수 있다.”

화응 역시 지지 않고 대꾸하며 석소패 앞에 버티고 섰다.

그 모습이 또한 가관이었다.

우람하다는 점에서는 둘이 비슷했지만 한 명은 지나치게 키가 크고, 또 한 명은 아예 바닥에 붙은 듯 작으니 보는 사람이 포복절도할 만한 광경이었다. 만약 전쟁터만 아니라면 말이다.

돌연 위휘군의 진영에서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응에게 철수하라는 신호였다.

화응으로선 불만이었다. 선봉 장수로 나선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기왕에 물러나라고 할 바엔 차라리 전군이 달려들어 난전을 벌이는 게 낫지 않느냔 말이다.

“가 봐라. 다음에 또 보자. 그땐 기필코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어 주마.”

이렇게 비꼬는 석소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마디 쏴 주고 돌아설 수밖에 없다.

“네놈이야말로 어디 가서 뒈지지 말아라. 그 짧은 모가지를 기필코 잘라 줄 테니.”

으르렁거리듯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와아!”

양 진영에서 또 한차례 함성이 올랐다. 선전한 두 사람을 환영하는 인사였다.

“시끄럽다! 뭐가 그리 좋다고!”

영채로 들어서면서 화응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세 명의 적장을 베었다는 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고, 석소패에게 절반의 패배를 했다는 사실만 기억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수고했소, 화 장군.”

“소장은 화 장군의 무공에 탄복했소이다. 대단하오, 대단해.”

본진 막사로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장수들이 화응에게 찬사를 보냈다. 위휘군과 곽가군이 뒤섞인 상태였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 진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앉은 편월과 곽준방의 모습이었다. 한결같이 웃음 띤 얼굴로 화응을 맞아 주었지만, 정작 둘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수기장수 화응, 적장 셋의 목을 베고 돌아왔소이다.”

화응은 편월에게 전과를 보고했다. 의도적으로 곽준방 쪽은 보지 않았다.

하긴 이게 욕먹을 일은 아니다. 연합군이 결성되어 그 총대장이 결정되었다면 모르되, 지금 화응의 입장에선 곽준방에게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다.

“수고했소. 오늘 전공은 화 장군이 단연 일등이오.”

편월의 치하에 화응은 깊숙이 군례를 취한 후, 곧바로 송지에게로 다가갔다.

“왜 철수를 명하셨소? 말이 없다고 해서 내가 싸우지 못할 거라 보셨소? 설사 내가 다소 불리했다고 칩시다. 그땐 전군이 영채를 열고 나와 난전을 벌이는 게 병법 아니겠소. 그런데 이게 뭐요? 이래서야 아군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소?”

말은 송지에게 하고 있었지만 기실 화응은 편월에게 따지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은 그가 최종 명령권자가 아닌가 말이다.

“철수의 꽹과리는 내가 치라고 한 거외다.”

“뭐?”

갑작스레 끼어든 좌괴의 말에 화응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의 작전이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 여겨졌다.

그러나 이왕 돋운 기세다. 맥없이 그냥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긴 싫었다.

“어디 들어 봅시다. 왜 그랬소?”

“화 장군은 앞으로도 며칠간 더 그 석소패란 자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오.”

“뭐라고? 그럴 거면 아예 오늘 승부를 가리도록 둘 것이지…….”

“누가 뭐래도!”

이어지는 화응의 반발을 좌괴는 약간 언성을 높여 끊어 버렸다.

“오늘 싸움의 백미는 화 장군과 석소패 사이에 벌어진 것이었소. 양군이 넋을 잃고 봤을 정도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며칠간 더 싸워 주셔야 한다는 거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로군.”

“좀 전에 화 장군께선 양군이 난전을 벌여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되면 결과는 어떻게 될 것 같소?”

“당연히 우리의 승리지. 난전이야말로 우리 위휘군의 장기 중의 장기 아니오.”

화응의 대답에 좌괴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뭇 장수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곽가군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함께 행동했던 위휘군의 장군들도 처음 듣는 좌괴의 말에 호기심이 동한 표정이었다.

“지금 우리와 호가군이 난전을 벌인다면, 한 시진 이내에 우리의 참패로 끝날 것이오. 이 말엔 내 목을 걸 수도 있소이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패전 예고에 장수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군문에서 이런 경우는 있을 수도 없었고 만약 있다고 한다면 참수로 다스릴 만한 사안이었다. 전군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장수들은 놀람 가운데서도 수긍의 빛을 떠올렸다. 특히 지금까지 호가군을 상대했던 곽가군과 거규가 그랬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말씀드리리다. 우리의 총병력은 육만 오륙천. 물론 곽가군의 일만 오륙천이 포함된 숫자요.”

좌괴는 우선 아군의 병력부터 얘기하며, 곽가군의 숫자가 훨씬 적다는 걸 은근히 부각시켰다. 편월의 입지를 넓혀 주기 위함이었다.

“그에 비해 호가군은 십만은 확실히 넘을 거요. 지금도 꾸준히 불어나고 있고. 그건 아직까지 호윤천에게 호응하는 건주의 성이 많다는 거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오. 오늘은 십만이지만, 내일은 십오만이 될지 이십만이 될지…….”

“그때는 포란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이면 되지 않겠소?”

이건 거규의 질문이었다. 포란성주로서 수성만큼은 자신 있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건 더더욱 안 될 말씀이오. 만약 호가군이 그 많은 군세로 포위를 한다면 우린 손도 발도 내밀지 못하게 되오. 그사이 호윤천은 병력을 빼서 우리가 애써 차지한 성들을 공격할 건 뻔한 사실이오. 게다가 우리가 곤궁해진 걸 보면 그동안 우리에게 항복했거나 마음을 주고 있던 윤주의 각 성들 역시 일제히 다른 마음을 품을 거요. 농성은 절대로 안 되고, 승부는 결단코 평야에서 지어야 하오.”

“하지만 병법에는 적이 적을 땐 나가서 치고, 많을 땐 들어앉아 지키라고 했소이다만……?”

이건 팽요의 말이었다. 그 역시 곽가군에선 지장으로 꼽히는지라 한마디 거든 것이다. 그 속에는 자신들을 포란성에서 받아 주지 않았던 점을 은근히 비꼬고 있기도 했다.

“그건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을 때나 취할 방책이오. 일종의 궁여지책.”

“그럼 방도가 있단 말이오?”

“없고서야 어찌 뭇 장수들 앞에서 이처럼 입을 놀릴 수 있겠소.”

“그게 뭐요?”

몇 명의 장수가 동시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요원의 불길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적은 군사로 대군을 이길 수 있는 방법엔 뭐가 있겠소?”

“그야 몇 가지 있지. 기습과 야습, 매복 등등…….”

“그렇다면 대군이 먼 길을 원정했을 때 가장 곤란한 점이 뭐겠소?”

“군량 수송. 하지만 호가군은 건주의 각 성에서 지원을 받아 별 무리가 없다고 알고 있소.”

“바로 그 점이오! 건주 각 성에서의 지원, 우리가 노릴 건 바로 이 한 점이오.”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후 좌괴는 천천히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침까지 꼴깍 삼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새 편월과 곽준방도 집중하고 있었다.

“건주의 각 성에서 보급을 받으니 호가군의 군량 사정이 나쁘지는 않을 거요. 하지만 그 군량이 건주 각 성에서 곧장 호가군으로 수송되는 건 아닐 거요. 그러자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번거로운 일도 있을 테니까. 아마 여기나 여기, 이 두 성 중 한 성에 모아서 보급할 게 뻔하오. 우린 이곳을 공격하는 거요.”

좌괴의 손가락은 지도 위의 두 점을 차례로 짚었다. 건주에 위치한 난계성亂溪城과 관호성貫濠城으로, 호가군의 영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그럼 애당초 그처럼 빙빙 돌려 말씀하실 게 아니라 여기에 적의 군량미가 쌓여 있다. 공격해서 불태워 버리자고 하실 일이지, 젠장!”

성급한 맹아가 타박을 주었지만 좌괴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 별말이 없었다.

의미 없이 그저 얘기를 돌린 건 아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가 집중할 수 있고 누구에게 어떤 임무를 줘도 실패할 공산이 적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럼 문제는 이 두 개의 성 중에서 어디에 군량이 쌓여 있느냐는 거로군. 좌 선생은 어디라고 생각하시오?”

“그건 상 장군께 하문하시기를.”

담개의 질문을 좌괴는 슬쩍 상가웅에게 돌렸다.

“간인들을 부려 본 결과 적의 군량은 틀림없이 난계성으로 모여들고 있는 게 확인되었소이다.”

“그렇다면 공격해서 불태울 일만 남은 셈이군. 이 일은 우리 흑월대가 맡겠소이다.”

오강이 성급하게 나섰다. 전쟁에서 적의 군량을 불사르는 건 어떤 경우에든 일등 공훈이 된다. 누구든 탐낼 만한 임무가 아닐 수 없었다.

“잠깐!”

오강에게 제동을 건 사람은 팽요였다.

“가뜩이나 아군은 병력이 부족한 판이오. 그런데 거기서 또 병력을 빼서 야습을 감행한다는 건 위험하지 않겠소?”

팽요의 질문에 좌괴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서 화 장군과 석소패의 싸움이 필요한 거지요. 다들 거기에 눈길이 쏠려 아군의 병력이 얼마쯤 빠져도 눈치 채지 못할 거외다.”

“아, 그래서 소장에게 석소패와 거듭 싸우라고 한 거였군. 그 일이라면 맡겨 두시오. 내일도 선봉으로 나서 일생일대의 연기를 한번 해 보이리다, 하하하!”

화응이 호탕하게 웃으며 가슴께의 갑옷 자락을 쳤다. 아까 싸울 때 석소패에게 잡힐 뻔했던 곳으로, 철커덕거리는 쇳소리를 내며 울렸다.

“내일 선봉은 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소. 화응 장군은 석소패만 상대하도록 하고, 거 장군?”

“예!”

“예!”

두 마디 대답이 동시에 들렸다. 거규와 거예홍이 함께 대답한 탓이었다.

“거예홍 장군을 부른 거였소. 적의 움직임에 따라 거 장군이 내일 선봉으로 나서야 할지도 모르겠소. 준비해 주시오.”

“승복!”

“그리고 이 난계성 공격은 곽가군이 맡아서 해 주시오. 호가군의 배후에서 불길이 오르면 성공한 걸로 알겠소. 봉화를 피워 주면 더욱 좋고.”

“아니, 곽가군 전체를?”

“그렇소. 기껏 시작한 공격에 병력을 아껴 실패했다고 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소. 공격에 성공한 이후 곽가군은 유군으로 활동하면서 호가군에 대한 지원을 차단해 주시오.”

“아군의 병력이 너무 부족하지 않겠소?”

“그 점이라면 미력하나마 이 몸이 막아 보이겠소.”

좌괴의 이 말을 끝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회의는 매듭을 지었다.

군사 행동에 있어 망설임은 금물, 결정되자 장수들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야음을 틈타 곽가군은 호가군의 영채를 우회하기 시작했다. 기치도 군기도 없었다. 그건 영채에 고스란히 남겨 적의 눈을 속이는 도구로 활용될 터였다.

3

영욱성을 점령한 지 닷새가 지난 후 광운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일선 지휘관 급까지 다 모으면 백 명이 훌쩍 넘는지라 성주 급만 모았다. 그래도 스무 명이었다.

그 자리에서 광운은 중대한 선언을 했다. 사주와 파양주에서 합류한 성주들은 모두 각자의 성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성주가 오래 성을 비우면 민심이 동요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파양주를 평정했으니 각자 돌아가 백성들의 생계를 돌보라는 얘기였다.

거기엔 몇 가지 조건이 붙었다. 각 성에서 낸 병력의 절반을 남길 것. 다만 이천 이하의 병력을 낸 성은 해당 사항 없음.

사실 성이라고 해서 똑같은 규모와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만큼 병력을 적게는 오백에서 많게는 이만 이상을 막주군에 낸 곳도 있었다.

이런 실정이니 광운은 작은 성은 그대로 유지시키되 규모가 큰 성은 힘을 좀 빼 두자는 의미에서 내린 조치였다.

이천 이하의 병력을 낸 작은 성의 성주들은 말할 것도 없이 환영이었다. 광운이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걸 극히 싫어했던지라 약탈은 꿈도 꾸지 못하고,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의 비용은 고스란히 자신들의 성에서 충당해야 됐으니 말이다.

비교적 큰 성의 성주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오랜 전쟁에 시달렸기에 예전의 안락한 생활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들의 비용은 여전히 각 성주가 내야 한다는 말엔 약간의 불만을 나타냈다. 특히 일만 이상의 병력을 낸 성주들이 심했다.

생각해 보라. 군사 한 명이 하루에 한 되의 곡식을 소비한다. 그게 일만 명이면 일백 섬.

이것만 해도 엄청난 비용인데 군사들의 의복이나 신발, 심지어 무기의 보충이나 수리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야말로 엄청난 액수이니 불만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불만들을 한 방에 잠재운 건 수자윤의 행동과 이어진 광운의 한마디였다.

수자윤은 성주들이 불만을 토로하자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고는 보기에도 섬뜩한 도끼를 들고 들어와 그대로 탁자를 내리찍었다.

쿵!

“뒈지고 싶어? 너희들 성을 고스란히 남겨 둔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불만이야, 불만이! 지금 당장 군사를 돌리면 네놈들은 갈 곳 없는 개 꼬라지야. 정신들 차려!”

광운은 수자윤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서너 번 저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주들도 입을 다물었다.

수자윤의 성격을 익히 아는 탓도 있었지만 그가 한 말도 틀리지 않았다. 작은 성주들이야 싸울 생각도 없이 막주군에 편입되었지만, 큰 성주들은 대개 한두 차례 저항한 후에 항복했다. 난세의 관습에 의하면 쫓겨나거나 참수되어도 할 말이 없는 위치들이었다.

그런데 광운은 흔쾌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성도 허물지 않았다. 공격 시에 파손된 부분은 어쩔 수 없었지만 되도록 온전하게 유지하게끔 조처했다.

거기에 덧붙여진 광운의 한마디가 결정적으로 성주들의 마음을 녹였다.

“내가 요구하는 건 군량뿐이오.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소.”

광운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송용조가 극력 지원하겠다는 약조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차마 식량까지 신세질 수는 없었기에 군량만큼은 성주들에게 부담시킨 것이다.

성주들로서야 승복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것만 해도 비용의 절반이 삭감되었으니 말이다.

기실 광운은 막주군의 살을 좀 빼고 싶었다. 사주를 정벌할 때는 몰랐는데 파양주를 정벌하면서부터 너무 많은 대군이다 싶었다. 그게 십이만에 이르고 보니 이건 흡사 지나치게 비대해진 돼지 꼴이라 한번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였다.

동쪽으로의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러니만치 둔중한 대군보다는 날렵한 정예병이 훨씬 강한 위력을 발하리라.

아무튼 성주들이 승복한 즉시로 병력이 나뉘었다. 이천 이하를 냈던 작은 성주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 즉시 군사들을 수습해 돌아갈 채비를 하고, 남은 성주들은 각자 낼 병사의 수와 군량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약간의 문제가 된 건 수자윤이었다. 그는 약 칠천의 병력을 냈는데 그들을 고스란히 이끌고 막주군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건 말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광운은 선선히 허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새로 구성된 막주군은 수자윤의 칠천까지 합쳐서 육만 오천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 광운은 성주들을 내보내고 상림호를 찾았다.

“상 성주께서 이 영욱성을 맡아 주셔야겠소. 군사 일만 오천을 딸려 드리겠소.”

“이게 무슨 말씀이오? 소장더러 여기에 남으라니? 소장은 대장군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겠소. 그러니 여긴 다른 분께 맡기시오.”

상림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태도가 너무 완강해서 오히려 웃음을 자아낼 지경이었다.

“실은 나도 상 성주께 이 부탁을 드리면서 무척 송구해하고 있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무거운 짐?”

“그렇소. 상 성주께서 여기 계셔야 우리가 여태 고생한 결실이 맺히는 거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만약 막주군이 동쪽으로 출격한 뒤, 방금 나간 성주들 중에서 누군가 반기를 들면 어떻게 하겠소?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우리 막주군은 헛고생을 하게 되는 거요. 그걸 단단히 눌러 주시오. 다른 사람은 미덥지가 못하오. 상 성주께서 맡아 주시오.”

상림호가 두말하지 못하게 광운은 단호한 어투로 못을 박았다.

“또한 각 성주들의 군량이 이 영욱성으로 운반될 게요. 그걸 때맞춰 우리에게 조달해 주셔야겠소. 물론 조달엔 상 성주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소이다. 송 대인의 상단을 이용하면 빠르고 정확할 게요. 다만 얼마의 군사를 딸려 호위만 해 주시면 될 게요. 말하자면 상 성주께선 우리 막주군의 보급 대장이 되신 거요, 허허허!”

광운은 소탈한 웃음으로 말을 맺었지만, 상림호는 그럴 수 없었다. 마음의 갈등이 격심했기 때문이다.

상림호 역시 무장이기에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작전에 실패한 경우는 전투나 전쟁 그 자체에선 완전히 패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보급이 잘못되면 언제든 패하기 마련이다.

“끄흐음!”

마침내 상림호는 신음에 가까운 침음성을 길게 토하고 말았다. 광운의 청을 수락한다는 의미였다.

“고맙소, 상 성주. 이제야 마음 놓고 동쪽으로 향하게 됐소이다. 허허허!”

“대장군은 영악한 분이오. 신뢰를 이용해 사람을 이렇게 부려 먹다니…….”

“미안하오. 뒷날 크게 사죄드리리다.”

“가시거든 꼬마 대장에게 안부나 전해 주시오.”

“여부가 있겠소.”

“못난… 아들놈도 잘 부탁드리겠소.”

상림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자식을 둔 어버이의 솔직한 심경이겠지만, 무장이라는 이유로 그 정마저 숨겨야 했기에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염려 마시오. 지금쯤 상 공자도 훌륭한 무장으로 성장했을 게요.”

“기대도 하지 않소이다. 그보다 이별주는 한잔해야 하지 않겠소?”

상림호의 말에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어졌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조차 할 수 없는 이별을 앞둔 술잔이다. 말보다는 까닭 모를 뭉클함이 먼저 솟구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광운은 막주군을 세 갈래로 나눴다. 선봉은 수자윤이 맡았으며 군사는 일만, 본진은 광운이 일만, 후미는 막주 출신 장수인 고숭高崇이 맡았다.

그렇게 막주군은 동쪽으로 향했다. 여름 햇살 아래 길바닥이 새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 * *

‘자근자근 짓밟는다’라는 말이 있다. 식운관을 넘은 가겸후의 율천국이 바로 그렇게 강국을 유린하고 있었다.

증두신은 속수무책이었다. 마음먹고 나선 가겸후에 의해 자근자근 짓밟히며 거죽성까지 쫓겨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게 벌써 보름 전이었다. 곧바로 가겸후가 공성전을 전개하리라고 예측했지만 그냥 포위만 한 채 율천국군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겸후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우선 진파구를 장악한 후 수군을 총동원했다. 이는 혹시 있을지 모를 상초국왕의 지원을 차단하고, 또한 기왕 강국에 들어와 있는 상초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강국에 산재한 다른 성들을 하나씩 떨구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는 고응성에서, 멀리는 대수성까지 차례로 철저하게 허물어 버렸다.

그 와중에 묘하게도 대수성과 인접한 탄금성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탄금성이 비록 강국의 영토 안에 있지만 이미 위휘군에 양도된 상태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자칫 위휘군이 개입할 우려가 있고 그건 강국 괴멸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가겸후는 증두신이 거죽성 안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의 손발을 차례로 잘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밭 가득 파란 보리에 풋 이삭이 막 피기 시작한 오늘, 드디어 가겸후는 거죽성 공략에 나섰다.

이 일엔 가겸후가 직접 진두에 나섰다. 강국 공략은 어차피 자신이 제위에 오르기 위한 명분을 쌓기에 다름 아니다. 이미 황제의 죽음은 발표해 뒀으니 마음껏 과시해도 좋을 터였다.

그 바람에 죽을 맛인 건 오기총감장 육우맹이었다. 왕인 가겸후가 직접 선두에게 섰으니 그는 늙은 몸에 채찍질을 해 대며 그보다 앞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율천국군은 들뜬다기보다는 꼭지가 홱 돌아 버린다. 하나같이 눈을 이마에 올려다 붙인 채 기를 쓰고 성벽에 달라붙었다.

공성 무기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장웅이 허주성 공격 시에 사용해서 효과를 봤던 방법대로 운제 하나에 한 명씩 매달아 그대로 성벽으로 밀어 올리는가 하면, 충차는 충차대로 성문이든 성벽이든 가리지 않고 연방 들이박았다.

거죽성의 저항도 필사적이었다. 이미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고 알게 된 터라 백성들까지 총동원된 상태였다. 아낙들이 화살이나 돌을 나르는가 하면, 늙은 영감은 자신의 몸을 던져 성루에 걸쳐진 운제를 밀어내기도 했다.

누가 감히 지옥을 말했던가. 이게 바로 지상에 옮겨 놓은 참다운 지옥의 그림이다. 누구의 얼굴을 봐도 살기에 찌든 악귀나찰의 상이고, 보이는 모든 곳엔 피와 시체만이 넉넉하게 넘치고 있다. 아마 염왕이 봤더라도 손으로 얼굴을 가렸으리라.

가겸후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증두신이 설마 백성들까지 동원하리라곤 예상치 못했지만 이제 와서 멈출 순 없었다.

아니, 조금이라도 빨리 이 처참한 지옥도를 지워 버리기 위해서라도 더욱 강하고 독한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증두신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겐 만호후萬戶侯에 봉하겠다. 서둘러 공격해서 공을 놓치지 마라!”

선두에 섰다지만 가겸후의 주변엔 무장들이 빽빽이 호위를 하고 있다. 그가 한 말은 금방 양옆으로, 혹은 앞뒤로 전달되어 삽시간에 전군에 퍼져 나갔다.

“그대들도 가라. 가서 공을 세우라!”

자신을 호위하는 무장에게까지 가겸후는 소리를 질렀다. 그만큼 그는 증두신의 목을 얻기 위해 광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장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겸후가 탄 말이 한 발 전진하면 똑같은 보조로 움직일 뿐 그를 조금도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았다.

후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가겸후와 호위 무장들의 머리 위로 운제 하나가 밀려 떨어졌다. 율천국군 병사 서너 명과 백성 두 명도 함께였다.

운제에서 떨어졌으니 병사들이 부상을 입고 꿈틀거리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백성 둘은 즉사를 했는지 꿈쩍도 하지 않고 율천국군의 발길에, 혹은 그들이 탄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었다.

“에에익!”

돌연 가겸후는 수중에 들고 있던 검을 마구 휘둘렀다. 호위 무장들이 황급히 방패로 막았다.

다시금 가겸후는 화가 치밀었다. 지금은 병사들에게 짓이겨져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지만 방금 떨어졌던 백성 둘은 중년의 남녀였다. 어쩌면 부부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곧 황제가 되고자 하는 가겸후다. 그런데 자신의 다스림을 받고 자신을 우러러봐야 할 백성들이 이처럼 격렬하게 저항을 하고 있다. 이 점에 화가 치밀었고 그 화는 고스란히 증두신에게 돌아갔다.

“비켜라. 내가 직접 충차를 지휘하겠다! 썩 비키지 못할까!”

노기와 살기에 휩싸인 가겸후의 음성은 잔뜩 잠겨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먹혀들지 않았다. 다만 그가 한 말은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충차를 지휘하는 장수에게 전해졌다.

그 결과는 곧장 나타났다. 쿠웅, 쿵,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싶더니 ‘와아!’ 하는 함성이 올랐다. 드디어 거죽성의 성문이 열린 것이다.

“전하, 성문이…….”

“알고 있다. 가자!”

가겸후는 재빨리 말을 몰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증두신을 사로잡아 가능하면 직접 목을 베고 싶었다. 그 전에 그 얼굴에 침이라도 한번 뱉은 뒤에.

성안의 난전은 성 밖보다 더 처참했다. 율천국군은 상대가 강국의 병사이든 백성이든 가리지 않고 도륙해 댔다.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란 의미였다.

묘한 건 강국의 백성들이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적병들을 피해 달아나기 급급했을 텐데 그들은 오히려 율천국군의 창칼 앞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렇게 해서 강국 병사들에게 반격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증두신은? 증두신은 어디 있는가?”

주변의 참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겸후는 입성하기 무섭게 증두신을 찾았다.

“전하, 내성 쪽으로!”

호위 무장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른 뒤에야 가겸후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잡아라! 반드시 증두신을 사로잡아!”

내성 쪽으로 달리면서 가겸후는 연방 고함을 질렀다.

가겸후가 그토록 찾던 증두신은 내전인 교밀전巧密殿에 부인과 첩들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 가는 시신들이었지만 말이다.

지금 증두신은 웃고 있었다. 율천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해맑은 얼굴이었다.

증두신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진파구 앞바다를 가득 메운 율천국의 전함들, 하나씩 함락되어 간 각 성과 처형된 성주들…….

그러나 정작 증두신을 웃게 만든 건 백성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허주의 조환과 그 부인의 목이 잘려 가겸후의 놀림감이 되었다는 걸 다들 알기에, 그들은 증두신이 온전히 죽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스스로 적들에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소.”

정말이지 증두신에겐 지금이 태어난 이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처럼 못난 자신을 군주라고 따르며, 죽은 뒤에도 창피를 당하지 말라고 스스로 사지에 뛰어든 백성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코딱지만 한 나라 하나 다스리면서 무에 그리 바쁜 게 있다고 제대로 신경 써 주지도 못했건만 마지막까지 함께하겠다는 가족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저 우스운 건, 그 행복을 느꼈을 때가 바로 죽을 때라는 지독하디지독한 역설이었다.

그러나 증두신은 그마저도 잊기로 했다. 오직 지금 가슴속에 뿌듯이 들어찬 이 행복감만 간직하고 가기로 했다.

물속처럼 고요하던 교밀전 안으로 갑자기 왁자한 소음이 밀려들어 왔다. 율천국군이 마침내 예까지 들어온 것이다.

“이제 나도 뒤를 따르리라.”

나직하게 한마디 내뱉은 후, 증두신은 손에 들고 있던 부시를 쳤다.

확!

아주 작은 불꽃이 일었다.

그러나 그 불꽃은 이내 화르륵 소리를 내며 교밀전 전체로 퍼져 나갔다. 미리 흑유를 부어 놓은 까닭에서였다.

“하하하하!”

그 속에서 가겸후는 소리 내어 웃었다. 몸에 붙은 불길로 인해 육신은 뜨거웠지만, 가슴속은 이상스러울 만큼 시원한 청량감이 들어찼다.

이로써 강주 증가의 왕통은 사 대 백이십여 년 만에 그 막을 닫고 말았다.

마지막 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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