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명장亡國名將
1
배호성이 떨어지고, 유산성이 항복한 걸 계기로 윤주의 각 성들이 위휘군에 급격하게 기울어지고 있다는 소식은 현재 허주성을 공격하고 있는 가겸후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기실 가겸후는 허주의 항복을 받고 싶었다. 그를 너그러이 받아들여 자신의 아량을 천하에 보이고 강국을 치는 것과 동시에 황제의 죽음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천하는 충격에 휩싸여 들썩거릴 게 분명하다. 그때 강국을 철저하게 괴멸시킴으로써 율천국의 위용을 확실히 보이고 자연스레 황제에 등극한다는 게 가겸후의 계획이었다.
물론 당장 그 계획에 차질을 빚을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허주성을 포위한 채 엉덩이 무겁게 버티고 있으면 농성하고 있는 조환의 마누라인 편씨 부인은 항복할 테고, 그 후에 강국을 치면서 황제에 등극하면 된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건 편월이라는 존재였고 그가 이끄는 위휘군의 세력이 날로 커진다는 점이었다.
‘이대로 허주를 괴멸시키고 곧바로 이천강을 넘을까?’
이건 편씨 부인의 항복을 기다리며 가겸후가 몇 번이나 되짚어 생각한 대목이었다. 그만한 힘이 없는 건 결코 아니다. 의지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천강을 넘을 명분이 약했고 사방으로 적을 맞고 있는 형편인지라 자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자의 인내는 언제나 상대에게 으스스한 공포를 주니까 말이다.
그래도 편씨 부인이 항복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을 듯했다. 위휘군이 더 이상 세력을 키우기 전에 제위에 오르고 강국을 멸망시켜야만 한다. 욱일승천하는 편월과 증두신이 손이라도 잡게 되면 토벌하는 데 귀찮아질지도 모른다.
“장 장군을 불러오너라.”
가겸후는 시립해 있는 무장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명했다. 엄확이 죽은 후 새로 대장군에 임명된 장웅張雄을 찾은 것이다.
“존명!”
밖으로 달려 나가는 무장의 등을 바라보던 가겸후의 뇌리에 문득 엉뚱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지금쯤 어디 있을까? 어디서 죽진 않았을까?’
바로 누이동생인 가 황후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녀가 사라진 후 가겸후는 율천국 전체를 뒤지다시피 하며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어디에선가 죽어 누군가의 손으로 매장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겸후는 그녀를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단순히 육친 간의 정 때문이 아니라 옥새의 행방을 아는 게 그녀뿐이라는 판단 탓이었다.
사실 가겸후는 세상 누구보다 누이동생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출가외인이라지만 어떻게 혈육인 자신의 뜻을 그토록 몰라준단 말인가.
‘차라리 어디서 죽어 버린 게 네겐 행복할 게다.’
이 역시 가겸후의 진심이었다. 만약 누이동생이 자신에게 잡힌다면 갈가리 찢어 죽일 것만 같았다.
“부르셨나이까?”
장웅이 들어서면서 누이동생에 대한 가겸후의 증오를 끊어 버렸다.
장웅도 엄확만큼이나 지긋한 나이였다. 평생을 군문에서 구른 관록이 그 얼굴의 주름살에 역력히 배어 있었다.
“장 장군, 허주성에 대한 포위망은?”
“견고하옵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옵니다.”
“알겠소. 그럼 지금 당장 허주성을 공격하시오. 내일 아침까지 성을 떨구고, 편가 계집과 그 일족의 목을 내게 가져오시오.”
“예?”
너무 격렬한 가겸후의 명에 장웅의 두 눈은 커다랗게 불거졌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포위망만 단단히 구축해 두고 섣부른 공격은 엄격히 금했었다. 거기엔 여성을 상대로 싸운다는 심리적 당혹감도 분명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명령이 바뀌었다. 장웅으로선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폐하, 병사들은 아직 저녁도 먹지 못했으니 지금 당장 공격을 하라 하심은…….”
“밥은 교대로 먹도록 하시오. 과인도 모든 병사들이 밥을 먹기 전까진 굶고 있겠소.”
가겸후는 매몰차게 장웅의 말을 잘랐다.
장웅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승리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편가 계집과 그 일족의 목을 모두 베어 오라는 참혹한 명령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미 명령은 떨어졌다. 무장으로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존명!”
장웅은 복명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 즉시 율천국군엔 비상이 걸렸다. 하루가 마무리되는 석양 무렵에 떨어진 공격 명령은 병사들로 하여금 허둥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도 준비는 빠르게 갖춰졌다. 영산 전투 이후 이렇다 할 싸움 없이 포위만 하고 있었던 터라 율천국군 병사들도 좀이 쑤시던 판이었다. 공격 명령에 그들은 신바람을 냈다.
그 덕에 채 반 시진도 되지 않아 허주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는 불화살 공격이었다. 이제 막 석양이 물들어 어둑해지기 시작한 주변이 다시 해가 뜬 것처럼 훤하게 밝아졌다.
율천국군의 공격은 맹렬했다. 무려 이각에 걸쳐 불화살 십만 발 이상을 허주성 안으로 쏴 댔다.
허주성의 반응은 미미했다. 반격은 찾아볼 길 없었고 건물에 불이 붙으면 끄는 게 고작인 듯했다.
불에 대한 대비도 단단히 해 둔 모양이었다. 그처럼 많은 불화살을 쏟아 부었음에도 성내에선 이렇다 할 불길이 치솟지 않았다.
장웅 역시 이 정도 공격으로 뭔가 효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운출령과 제곡관에서 보여 준 허주군의 용맹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줄기가 서늘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비록 여자가 지키고 있어도 허주성 함락을 결코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영산에서 이탈했던 허주군 삼만 중 대부분이 성에 합류한 것 같으니 지금부터 맹공을 퍼부어도 자정은 지나야 떨굴 수 있으리라.
“기호대起虎隊는 앞으로! 충호대充虎隊는 뒤를 받쳐라! 성벽을 넘어 돌입한다!”
장웅의 명에 따라 보병으로 구성된 호기군 중 일부가 저만치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이 위치를 잡자마자 기다란 운제가 각자의 등에 닿았다.
이번 공격에서 장웅은 새로운 전법을 하나 시험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성벽을 넘을 땐 먼저 운제를 걸고 병사들이 기어 올라가는 식이었다.
장웅은 거기에 약간의 변화를 주고 싶었다. 지금 앞으로 나간 병사들을 운제에 실은 채 그대로 성루로 밀어 올리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사소한 변화다. 하지만 이게 성공한다면 앞으로의 공성전은 획기적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비마군飛馬軍 출격!”
병사들을 곧바로 성벽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다. 그 전에 기병으로 하여금 선제공격을 가하는 게 순서다.
“와아아아-!”
우두두두!
우렁찬 함성으로 대기를 깨뜨리고, 말발굽으로 지축을 두드리며 일만에 이르는 비마군이 일제히 성벽을 향해 진격했다. 동시에 그들은 또다시 불화살을 발사했다.
“기호대, 충호대 진격!”
이제 막 드리워진 초저녁의 어둠과 비마대가 일으킨 먼지로 인해 시야가 흐릿해졌을 때 장웅의 입이 열리며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엔 함성 따위는 없었다. 선두에 서서 달리는 기호대 한 명당 충호대 이십여 명이 붙어 조용히 먼지를 뚫고 성벽으로 접근해 갔다.
기호대가 허주성 주변으로 둘러 파인 해자 근처에 이르렀을 때, 돌연 거대한 함성이 올랐다.
“우와아아아-!”
이건 충호대가 지른 것이었다. 지금부터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운제에 오른 기호대를 성루까지 밀어 올려야 한다. 그것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운제는 무겁다. 그 끝에 사람까지 달려 있으면 더 무겁다.
그러나 충호대는 스무 명이다. 거기다 손이 비는 비마군까지 가세했으니 기호대원은 손쉽게 성루까지 쭉 밀려 올라갔다.
“와아앗!”
돌연 성루에서 허주군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연방 쏘아진 불화살의 연기와 비마군이 일으킨 자욱한 먼지로 인해 기호대의 습격을 미처 간파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때다! 총공격!”
때를 놓치지 않고 장웅은 명을 내렸다.
두두두두둥!
북소리가 급격히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다른 율천국군은 물론 운제를 성루에 걸친 충호대원들도 일제히 성루를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충차를 동원하라, 충차!”
장웅의 부장 중 한 명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공성전의 가장 중요한 건 물론 성루 확보고 그건 성문을 열기 위해서다.
그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성루에 올라간 공격군이 성문을 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단숨에 성문을 깨뜨리는 건 충차만 한 게 없다.
이렇게 얘기하면 충차만 동원하면 성문이 반드시 깨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역시 오해다. 충차는 속도가 느리기에 성루를 장악하지 못하면 농성하는 성병들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공격군이 성루를 장악한 뒤에 충차를 동원하는 게 정석이다.
그러니 지금이 충차를 동원하기에 적기인 셈이다. 성병들은 성루에 오른 율천국군을 막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콰두두둑!
말발굽과 바퀴 소리를 요란스레 내면서 한꺼번에 십여 대의 충차가 허주성의 정문을 향해 짓쳐 들었다.
“본대도 공격에 가담한다! 진격!”
장웅은 총공격의 명을 내렸다. 충차까지 동원되었으니 허주성은 얼마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곧바로 선두에 서서 빠르게 달렸다. 단순히 공훈을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죽은 조환 일가의 목만은 자신이 손수 베어 주고 싶었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일 테니까 말이다.
쿠웅, 쿠궁!
문과 성벽을 가리지 않고 충차가 간헐적으로 허주성에 부딪치는 소리가 전장을 내리덮었다. 전국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고군분투했던 허주의 기반이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되면 지휘 같은 건 이미 장웅의 손을 떠나게 된다. 전쟁이라는, 인간이 만들어 낸 최악의 괴물은 이제 본격적으로 눈을 뜨고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 공격은 비단 허주성의 정문만 노린 게 아니다.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던 모든 율천국군이 공훈을 노리고 한꺼번에 성벽에 달라붙어 있으리라.
그건 곧 허주성이 깨진다는 걸 의미한다. 율천국군과 성내에서 난전이 벌어질 게고, 자칫 흥분한 병사들에 의해 조환 일가가 무참한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 차후 가겸후의 평판을 생각해서라도 그건 막아야만 한다.
“전령!”
말을 달리면서 장웅은 주변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그 말에 따라 장웅의 본대에 소속되어 있던 삼십여 명의 전령이 일제히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각 군의 지휘관들에게 전하라. 절대로 조환 일가에게는 손을 대지 말라고. 만약 어기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군법으로 그 책임을 묻겠다고 전하라.”
“존명!”
전령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고 장웅은 달리는 속도를 조금 더 빨리했다.
“와아아-!”
돌연 율천국군 사이에서 커다란 함성이 올랐다. 마침내 허주성의 성문이 깨진 것이다.
장웅은 마음이 급해졌다. 일단 성문이 깨지면 모든 장병들은 일 번 돌입의 공을 다투게 된다. 이 혼전 중에서 자신의 명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사이 조환 일가는 무참하게 당해 버릴지도 모른다.
자연 달리는 장웅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대장군, 아직은 위험합니다. 조금 천천히 입성하시길.”
부장 중 한 명이 장웅을 말렸다. 성문은 깨졌지만 그때부터 격심한 시가전 양상을 띠게 된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는 얘기다. 부하로서 자신의 상관이 그런 위험에 노출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장웅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주변에서 호위하는 부하 장병들을 따돌리고, 이제 막 허주성으로 쳐들어가는 율천국군 사이에 섞여 들었다.
성내는 예상대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눈에 불을 켜고 공을 세우려는 율천국군, 그에 맞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허주군. 그 와중에 살려 달라며 절규하는 투항자도 보였다.
백성들의 모습은 더욱 비참했다. 그들은 변변한 저항이나 도망도 가지 못한 채 이미 살기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율천국 병사들에게 도륙당하고 있었다.
장웅은 그런 행위들을 말리지 않았다. 이 전국시대 어느 성이나 패전하게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곧장 내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편씨 부인 역시 그곳으로 철수해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고 있을 터다. 그 후엔 일가족 모두 자결할 게 뻔하고.
그들의 자결을 말릴 생각이 장웅에겐 전혀 없었다. 다만 그 자리를 지켜 주는 게 적장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고 나중에 가겸후에게 면목도 서게 된다.
내성 역시 자욱한 전화에 휩싸여 있었다. 아직 함락되진 않았지만 이미 패배가 기정사실화된 허주군이다.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그곳에 장웅이 나타나고, 뒤처졌던 측근 부장들에 의해 운반된 대장군기까지 펄럭이자 공격하던 장병들은 깜짝 놀랐다. 틀림없이 공격을 독려하러 왔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장웅도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마상에 앉아 전투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럴 때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공격의 강도를 조정하라고 하면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 잠자코 있다가 성이 깨진 후에 재빨리 행동하는 게 좋다.
“대장군께서 보고 계신다. 모두 힘을 내서 더욱 세차게 밀어 붙여라!”
“와아!”
장수들은 연방 노성을 터뜨려 부하들을 독려했고, 병사들 역시 더욱 힘차게 공격에 가담했다.
‘새벽까지도 버티지 못하리라.’
분발한 병사들의 기세를 본 장웅의 판단이었다.
그처럼 느긋하게 전황을 지켜보던 장웅의 표정이 갑자기 살짝 굳어졌다.
‘혹시 조환 일족은 벌써 이 성을 탈출한 게 아닐까?’
모름지기 전시의 성에는 비밀 통로가 한두 개는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허주엔 여기 말고도 다른 성이 몇 개 더 있다. 특히 천하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도연각이 버티고 있는 대인성은 공략하기 어려울 게 분명하다.
그런 곳을 두고 있는 조환 일족이 그처럼 쉽사리 자결한다고 믿는 건 너무 속 편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 점을 깨달은 장웅은 말을 몰아 곧장 앞으로 달렸다.
“전력을 다해 공격하라! 불화살을 총동원해 조속히 성문을 태워 버려라!”
이건 장웅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함이었다. 그만큼 그는 초조해 있었다.
자연히 율천국군도 필사적이 되었다. 대장군이 직접 선두에 나서 공격을 독려한다는 이 드문 모습에 또 한 번 자극을 받은 탓이었다.
돌연 주변이 한층 더 훤해졌다. 불화살 공격이야 진즉부터 감행하고 있었던 터지만 이번엔 정말 총동원해서 쏴 대고 있는 결과였다.
마치 거대한 화톳불이라도 사르는 것처럼 내성 전체가 벌겋게 물들었다. 금방이라도 불길에 휩싸일 것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내성 역시 준비를 단단히 해 둔 모양이었다. 이처럼 맹렬한 불화살의 공격에도 별로 동요되는 기색 없이 여전한 저항을 보였다.
“충차는 왜 오지 않는가? 충차를 찾아오라.”
외성의 성문을 깨뜨렸던 충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격심한 난전이 계속되고 있을 성내를 통과하기가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서너 명의 전령이 명을 전하기 위해 달려갔고 이윽고 두 대의 충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대한 빨리 성문을 깨뜨려라. 조환 일족이 안에 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장웅은 직접 충차의 선두에 서서 외쳤다. 성문이 깨지면 가장 먼저 돌입할 결심이었다.
쿠르르릉!
육중한 소리와 함께 충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많은 말과 사람이 붙어서 끌었기에 속도 또한 빨랐다. 이 정도라면 단번에 성문이 깨지고 말 터였다.
꽈아, 쿠웅!
두 대의 충차가 거의 동시에 성문에 부딪쳤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문에서 들린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성문이 크게 흔들렸다.
“와아! 밀어붙여라!”
충차는 뒤로 빠지고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성문에 붙어 밀어 대기 시작했다.
물론 위에선 화살이나 돌멩이, 심지어 끓는 물까지 쏟아졌다.
그러나 성문에 달라붙은 병사들은 그들의 동료들이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방패에 의해 상당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허주군의 몇 배에 달하는 율천국군이 엄청난 지원을 퍼부어 주었다. 바로 아래로 공격을 퍼붓기 위해 몸을 내린 허주의 병사들은 어김없이 화살 밥이 되어 성벽 아래로 무참하게 떨어져 버렸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린다 싶더니 마침내 내성 문이 서서히 뒤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쿠웅!
둔중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완전히 넘어졌을 때, 율천국군은 일제히 안으로 짓쳐 들었다.
그 선두엔 장웅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2
오늘도 도연각은 대인성의 성루에 올라 동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주성이 있는 쪽이었다.
율천국의 가겸후가 영산을 넘어 허주성을 포위했다는 기별은 진즉부터 듣고 있던 참이었다. 주공인 조환이 영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은 그 전에 도착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참는 이유는 꼭 한 가지였다. 바로 조환이 자신에게 부탁했던 그 아들 조강 때문이었다.
나라가 망해도 사람만 살아 있으면 다시 되찾을 수도 있다. 바로 국토 수복이라는 것으로, 지금껏 역사를 통해 여러 번 증명되기도 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자신의 판단과 처신이 중요하다. 온 허주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영산이 뚫린 이상 가겸후와 싸워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 한순간의 분기를 참지 못해 그와 싸워 자신도 죽고 조강마저 죽이게 된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도연각이 세우고 있는 계획은 유사시에 이천강을 넘어 위휘군에 투항하려는 것이다.
정허군의 후신인 위휘군도 한때는 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독한 사냥꾼이라도 제 발로 찾아든 짐승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더욱이 지금 위휘군엔 사문기도 들어가 있다. 한때 영원, 양림 땅의 지배자였던 그는 강국의 증두신에 의해 멸망당했다.
바로 그 사문기를 위휘군의 편월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심지어 일군의 장수로까지 삼았다. 사문기로선 옛 땅을 수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의외인 건 편월의 태도였다. 사문기를 도와주는 것 같았지만 정작 그는 강국의 사위가 되었다. 이 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건 편월과 사문기의 일이고 자신들의 입장은 또 다르다. 특히 예전 대인성 싸움에서 자신은 편월을 한 번 살려 준 적도 있었다.
거기에 기대는 건 아니지만 대인성에서 이끌고 갈 병력 일만 이천에, 위휘군의 병력을 조금만 더 얻어 보탠다면 얼마든지 재기가 가능하다.
어쩌면 위휘군과 더불어 율천국을 멸망시킬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 어린 편월이 얼마나 싸움과 전쟁에 능했는지 익히 아는 까닭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공을 세운다면, 적어도 성 하나쯤은 맡겨 주리라. 그 정도라도 공자의 여생은 걱정할 게 없다.’
그러면 죽을 날이 머잖은 자신이 저승에 갔을 때 주공인 조환을 대할 면목이 조금은 생기리라.
문득 도연각은 한 가지 일에 대한 후회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왔던 위휘군의 사자를 만나지도 않고 내친 것에 대한 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이 뭘 원하고,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뒀으면 좋았을 걸 싶었다.
“도 장군, 허주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소?”
생각에 잠겨 있던 도연각을 깨운 건 조강이었다. 그 역시 아비인 조환이 영산에서 전사했고, 지금은 어미인 편씨 부인이 허주성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근자에 이르러 핼쑥하니 마른 얼굴이었다.
“아직은 없소이다. 어떤 경우에도 조급해하지 마시오. 그게 바로 무장의 마음가짐이외다.”
도연각의 말투는 엄격함을 넘어 나무라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강을 맡길 때 조환은 도연각에게 아들을 잘 훈육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사부의 자격으로 대해도 된다는 의미였다.
조강은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나 행동은 과연 한 지방을 차지한 무장의 자식답다 싶었다. 열두 살 치기는 여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오늘은 화살을 몇 대나 쏘셨소?”
“이백 대.”
“승마는?”
“한 시진 탔소.”
“검술 공부는 하셨소?”
도연각의 질문에 조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일 치 검술 공부는 아직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럼 해가 지기 전에 검술 공부를 하고 저녁엔 병서를 읽도록 하시오.”
“알겠소.”
이번에도 조강은 나이답지 않은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어디론가 가 버렸다. 당연히 검술 공부를 하기 위함일 게다.
조강의 저런 면이 도연각은 좋았다. 저만한 나이의 아이들에게 자신처럼 무섭게 대하고 그리고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면 대개는 두려워한다. 아니면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하지만 조강에겐 그런 면이 없었다. 다소 약해 보이는 듯한 외모지만 그 속엔 강한 끈기가 들어 있다. 저런 사람이라면 딱히 주공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가르쳐 볼 만한 것이다.
도연각은 몸을 돌려 성루에서 내려갔다. 할 일도 있으니 언제까지나 이처럼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연각이 허주성에서 왔다는 전령을 맞은 건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두 사람인 그들은 전령이라기보다는 패잔병에 가까웠다. 성을 빠져나오면서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었는지 익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도연각은 직감했다. 지금쯤 허주성은 초토화가 되었고, 편씨 부인 역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걸 말이다.
그러니 전령의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들어 봐야 비참한 마음만 들 테니까.
하지만 편씨 부인의 최후만은 알아 둬야 한다. 이들이 그걸 봤는지에 대해선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물어는 봐야 한다.
“다른 말은 들을 것도 없다, 부인께서는?”
“크흐흑!”
도연각의 말이 떨어진 순간 두 사람의 전령은 약속이나 한 듯 오열을 토했다.
“당장 울음을 그치지 못할까! 그래서야 어찌 전령의 소임을 다하겠느냐?”
“예.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둘 중 한 명이 비교적 냉정한 성격인 모양이다. 얼굴 가득하던 눈물을 손바닥으로 대충 닦아 낸다 싶더니 비교적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성의 몸으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셨으나 이미 승패는 돌이킬 수 없다 판단하시고, 일족을 이끌고 타오르는 불길에 몸을 던지려 하셨으나…….”
“그런데?”
“적들이 워낙 빨라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포로가 되셨단 말인가?”
“예. 포로가 되셔서… 부인께선 일족과 더불어 깨끗하게 자결하셨습니다. 적장도 최대의 예우를 갖춰서…….”
“닥쳐라! 아니, 알겠다. 수고했다.”
버럭 고함을 질러 전령의 말을 끊은 도연각은 곧장 목소리를 떨궜다.
그렇다고 노기가 풀린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도연각의 얼굴엔 온갖 감회가 서린 표정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빠르게 명멸되었다.
그러던 도연각의 두 눈에서 문득 물빛이 번들거렸다. 눈물이었다.
장수들은 몰라도 한 지방의 패주들이 최후의 순간에 불에 뛰어들어 죽으려는 건 딱 한 가지 이유에서다. 바로 시신이나 목을 적들의 손에 넘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건 우선적으로 죽은 자의 치욕이 된다. 특히 여성인 편씨 부인의 경우엔 그런 심정이 더했을 터였다.
그리고 적 왕의 시신이나 목은 승자의 자랑을 넘어 적의 잔당을 토벌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효수해서 가장 앞장세우거나 혹은 시신 자체를 그렇게 한다면, 한때 그의 부하였던 사람들은 감히 저항하지 못한다. 화살 한 대 날리기도 힘겹게 되고 만다.
전령의 말에 의하면 적장은 편씨 부인이 자결할 때 정중한 예를 갖춰 줬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신 자체가 훼손되지는 않았을 게고 어쩌면 목 없는 동체는 어디에 잘 매장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조환과 편씨 부인의 목은 가겸후의 손에 들어갔을 게 뻔하다. 지금부터는 조금도 미적거리고 있을 수 없게 됐다.
눈가에 번진 눈물을 대충 훔치며 도연각은 몸을 일으켰다. 이어 동쪽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죽은 주공과 편씨 부인 그리고 그 일족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다.
그게 끝나자 도연각은 빠른 걸음으로 조강을 찾았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걸 얘기하고, 그에 대한 마음가짐을 단단히 일러두기 위함이었다.
가는 도중 도연각은 대인성 전체에 비상을 걸었다.
* * *
도연각의 예상대로 그 시각 가겸후는 조환과 편씨 부인의 목을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오늘의 안주인 셈이다.
그러나 가겸후의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 모금씩 술을 넘길 때마다 쓰디쓴 약을 마시는 것처럼 입맛이 고약했다.
‘항복을 해 줬더라면…….’
지금까지도 가겸후의 가슴에 남아 있는 아쉬움이었다. 이제 곧 황제의 죽음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를 작정이었다.
그때를 대비해서 조환의 항복을 받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적어도 허주만은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걸 대놓고 반대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서쪽에서 일어날 반감에 대해 허주를 방패로 내세울 수도 있다. 자신이 제위에 오른다고 하면, 천하의 무장들은 한 덩어리로 뭉쳐 저항해 올 테니 말이다.
게다가 자신의 인자함도 보여 줄 수 있다. 힘으로 누르면 저항하는 무장들도, 부드럽게 대하면 오히려 감동하는 경향이 다분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행보를 빨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생인 가 황후가 가지고 사라진 옥새를 대신할 가짜 옥새도 이미 만들어 놓았다.
‘새벽에 식운관으로 출발한다.’
허주의 잔당 소탕은 장웅에게 오만의 군사를 주어 명해 두었다. 대인성에 들어앉은 도연각이 걸리긴 했지만 그 정도 병력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강국에서도 가겸후는 우선 증두신에게 항복을 권해 볼 작정이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다.
이 역시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속내야 어떻든 증두신은 편월의 장인이다. 이 점을 활용하면 편월은 물론 위휘군 전체를 조종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에 증두신에겐 미끼를 던져 봐야겠군.’
조환에겐 항복한 뒤에 뭘 어떻게 해 주겠다는 구체적인 제안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허주 땅만 고스란히 유지하도록 해 주면 되겠지 싶었다.
어쩌면 그게 허주군의 투항 유도에 실패하게 된 원인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약육강식의 시대이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무장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 손에 넣은 허주를 준다고 하면 증두신은 어떻게 나올까?’
이 점이 자못 궁금하고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어정거리며 기어 나오는 인간의 행태를 보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가겸후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바로 이번에 군사를 일으킨 의도였다.
‘황제를 시해한 상초국과 그를 도운 강국을 벌하는 거였다.’
새삼 그 사실을 떠올리며 가겸후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허주를 멸망시키고 말았다는 아쉬움과 또 조환과 편씨 부인의 머리를 상대로 마신 술이 너무 과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깨닫게 되자 가겸후는 무서울 정도로 빨리 마음을 비웠다. 강국이 항복함으로써 얻는 이득도 지워 버렸다.
뿐만 아니라 이젠 설사 증두신이 제 발로 걸어와 항복을 한다 해도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강국은 허주보다 더욱 철저하게 짓밟아야 되는 건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밖에 누가 있는가? 이 목들을 치워라!”
돌연 가겸후는 고함을 질렀다. 허주와 더불어 조환과 그 일족을 멸망시켰다고 마음이 산만해진 자신에게 내는 자책의 일종이었다.
“대령했사옵니다.”
장수 한 명이 들어와 정중한 군례를 갖췄다.
“식운관으로 떠날 준비는 잘되고 있는가?”
“염려 마시옵소서. 이미 준비는 끝냈고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나이다.”
“내일 인시에 출발한다. 만약 시간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용서치 않겠다.”
“존명!”
“좋아. 물러가라.”
그 말에 장수는 조환과 편씨 부인의 목을 챙겨 들고 잠깐 멈칫거렸다. 대체 이 목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몰라서였다.
하지만 가겸후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왠지 그의 기분이 무척이나 나쁜 것 같아서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수가 나간 후, 가겸후는 곧바로 침상에 몸을 실었다. 새벽에 떠나려면 잠을 자 둬야 하기 때문이다.
예정대로 다음 날 인시, 가겸후는 대군을 거느리고 식운관을 향해 길을 떠났다.
또한 율천국군의 행군 속도는 무리다 싶을 정도로 빨랐다. 밤에 수면을 취하는 건 고작 두 시진. 그리고 식사를 할 때 약간씩 짬을 내어 쉴 뿐, 오직 식운관을 향해 달리다시피 움직였다.
그 결과 율천국군이 식운관에 도착한 건, 허주를 떠난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은 아흐레째였다. 그야말로 질풍 같은 행군이었다.
그렇게 허주를 감싸고 있던 전운은 강국의 하늘로 옮겨 드리워졌고, 마침내 가겸후는 황제의 서거를 만천하에 선포했다.
* * *
다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허주의 멸망은 인구에 회자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마치 뒤를 쫓듯이 들려온 황제의 서거 소식은 무장들을 포함한 천하 만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물론 예전에 황제가 사냥을 나갔다가 상초국군의 기습으로 중태에 빠졌다는 건 익히 알고들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황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개중에는 간혹 죽길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회복될 거라는 바람을 가졌으리라. 그게 이백 년 세월 동안 떠돌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황제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염려이자 측은지심일 테니까 말이다.
한데 이처럼 맥없이 덜컥 죽어 버렸다니 천하는 가마솥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당장 무장들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가겸후의 뜻에 따라 강국과 상초국을 쳐서 황제의 복수를 하자는 자들이 있는 반면, 기회는 지금이라며 천하 사냥에 노골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그 와중에 또 다른 의미로 황제의 죽음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호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지금 합진성에 들어와 있었다. 막주의 광운에게 가기엔 너무 멀고 또 위험하니까 그와 관련이 있는 편월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태 위휘군의 책임 있는 장수 급과는 전혀 만나지 못했다. 누구의 소개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가는 것 역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어 지금껏 애만 태우던 중이었다.
그 참에 황제의 서거 소식이 들렸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의미였다.
때마침 편월도 배호성 공격을 마치고 며칠 전에 돌아왔다. 그사이 휴식과 정비를 마치고, 다시 군사를 몰아 포란성으로 간다고 들었다.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 편월이나 고위급 위휘군 장수를 만나야만 한다. 그래서 가겸후의 천인공노할 음모를 알려야만 한다. 그게 지금쯤은 참수를 당했을 독고기의 원한을 풀어 주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 호훈은 합진성의 내성 앞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있는 중이다. 편월을 비롯한 고위급 장수들은 모두 이곳에 있을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물론 외성의 각 성문을 책임진 장수들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그들은 편장이나 아장 정도의 신분인지라, 자신이 지닌 비밀을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겼다.
스스로의 감회에 젖어 있던 호훈의 눈앞에서 내성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일단의 병사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두건득과 좌괴였다.
‘왔다.’
호훈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저만한 호위를 받을 정도라면 신분도 상당할 게 뻔하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소청이 있소이다!”
앞뒤 잴 것도 없이 호훈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으며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웬 놈이냐? 무엄한 짓은 용서치 않겠다. 썩 물러가라!”
두 사람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호훈에게 창을 겨누며 다그쳤다.
“수상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오. 다만 장군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을 뿐이오.”
“그렇다면 정식 절차를 밟아라. 이런 무례는 용납할 수 없다.”
“긴급한 일이라 그렇소이다. 장군, 부디 소생에게 독대를 허락해 주시오.”
병사들과 말을 주고받던 호훈은 시선을 들어 두건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가히 수상한 자 같지는 않구나. 다들 창을 거두도록. 그리고 독대라는 건 온당치 않다. 바로 이 자리에서 말하도록.”
일단 의심은 풀었지만 독대는 허락지 않는 두건득이었다. 요즘 들어 위휘군의 위세에 의지하려는 갖가지 청탁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극히 은밀한 사안이오. 사사로운 일을 말씀드리려는 게 아니니, 부디 허락해 주시오.”
“한번 들어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또 한 번 이어진 호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괴가 은근한 어조로 권했다.
“뭐, 좌 선생께서 그러신다면… 따라오너라.”
두건득 역시 호훈의 태도에서 뭔가 있다는 걸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성벽 아래 양지 쪽으로 갔다.
“대체 무슨 일이냐? 혹, 우리 위휘군에게 억울한 피해를 당하기라도 했느냐?”
“그게 아니올시다.”
일단 말할 기회를 얻긴 했지만, 호훈은 어디서부터 말머리를 풀어 나가야 할지 순간적으로 막막해져 버렸다.
‘이럴 땐 곧장 용건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마침내 생각을 굳힌 호훈은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를 시해한 자들은 상초국군이 아니오.”
“뭐라고!”
너무 뜻밖의 말에, 내지른 두건득의 외침이 지나치게 컸나 보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병사들이 놀라서 달려올 지경이니 말이다.
“모두 물러가라!”
두건득은 호위 병사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재차 호훈에게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이라고 생각되면 당장 이 자리에서 목을 치겠다.”
“목숨이 아깝다면 어찌 이런 짓을 하겠소. 내가 알고 있는 점을 말씀드릴 테니 판단은 장군께서 하시오.”
일단 말해 둔 뒤 호훈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독고기에게 들었던 얘기와 자신이 직접 겪었던 상초국군의 갑옷에 대한 얘기를 해 줬다.
“흐음.”
얘기를 모두 들은 두건득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새겨졌다. 호훈의 얘기가 추측에 가까웠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다는 건 여실히 느껴졌다.
“따라오너라.”
두건득은 호훈을 데리고 내성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혼자서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3
윤주성을 출발해 합진성에 도착하기 무섭게 가 황후는 시름시름 앓더니, 급기야 음식조차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졌다.
당연히 배호성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편월의 정식 대면 요청도 거절당했다. 옥새의 ‘옥’ 자도 구경 못 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좌괴를 비롯한 뭇 제장들은 안달을 했지만, 편월은 그저 무덤덤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여태 황후나 옥새 없이도 잘해 왔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황후에 대한 편월의 감정은 그다지 좋은 게 아니었다. 광운과 더불어 사자로 파견되었을 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때 황제는 자신들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황후들 탓에 못했었다. 결국 밀지로 대신하긴 했지만 직접 듣는 것보다 못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아무 미련 없이 포란성을 지원할 병력을 수배하고 이제 내일이면 출발할 예정이다.
좌괴와 장수들은 이번만큼은 직접 나서지 말라고 말렸다. 그냥 성에 머물면서 황후의 쾌차를 기다려 그녀와 만나는 게 중요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편월은 한마디로 잘라 버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싸움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바로 호윤천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곽가군이 있고 그 속엔 그리운 얼굴들도 있다. 가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 출동에는 각 군기에 삼베 끈을 하나씩 묶는 게 좋겠소. 서거하신 황제 폐하에 대한 조의의 뜻으로 말이오.”
“그게 좋겠소.”
“동의.”
작전 회의 끝 무렵에 나온 담개의 말에 장수들은 일제히 찬성의 뜻을 표했다.
“어쨌든 이번에 합진성 수비를 맡은 두 장군은 불만인 것 같던데, 주군께서 적당한 포상을 내리셔야겠소.”
“포상? 두 장군이 그걸 바랄 것 같소?”
또다시 내뱉은 담개의 말에 송지가 약한 반대의 뜻을 폈다. 포상을 내릴 일이 있으면 군감인 자신이 건의해야 될 일이다. 그 일을 제대로 못 한 데 대한 쑥스러움도 없지 않았다.
위휘군에서도 포상이란 말이 드물지 않게 나돌긴 했었다. 그게 바로 누군가의 전공을 인정한다는 뜻이니 천하의 어느 군세에서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여태 위휘군 내에서 실제 포상이 이루어진 건 단 한 건도 없었다. 재정이 넉넉지 못했던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누구도 그걸 바라고 싸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거절하는 건 두 장군의 마음이지만, 이럴 때 포상을 내리는 건 주군의 몫이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시오. 여러분들 중 만약 두 장군과 임무를 바꾸라고 한다면 순순히 승복하실 분이 있소?”
담개의 질문에 모두들 묵묵부답이었다. 무장은 모름지기 나가서 싸워야지, 들어앉아 지키는 게 본연의 임무가 아니라는 의식이 머릿속에 가득한 사람들이다. 출동 기간 중 합진성 수비를 맡은 두건득과의 임무 교체를 탐탁히 여길 턱이 없었다. 설사 엄청난 포상이 주어진다고 해도 말이다.
실제로 지금 두건득은 약간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 외성을 시찰하러 간다는 핑계로 이 자릴 떴다. 이번에 각자의 임무를 짠 좌괴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에서 따라나섰고.
담개는 편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부하를 위로하는 건 주군께서 의당 하셔야 될 일이오. 두 장군에게 포상을 내려 서운해하는 그 마음을 위로해 주시는 게 옳은 줄 아오.”
“두 장군에게 포상을 내리자는 담 장군의 말씀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소. 하지만 우리 위휘군은 이제 겨우 군량의 걱정 없이 병력을 움직이게 됐소이다. 설마 쌀 한 섬, 비단 한 필을 포상으로 내리자고 하시는 건 아닐 터, 재정이 없소이다, 재정이.”
“이 자리에 개 장군, 개묵을 불러 물어봅시다.”
얼굴을 살짝 상기시키며 말하는 송지에게 담개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좋겠소. 당장 개 장군을 부르시오. 그의 얘기에 따라 포상을 결정하겠소.”
여태껏 말없이 듣고만 있던 편월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언행의 무거움과 신중함은 가히 주군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개묵은 곧바로 불려 왔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그의 손엔 두툼한 장부가 한 권 들려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송지가 재빨리 물었다. 편월이 있는 자리니 결례인 것 같지만, 군 작전 회의 석상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개 장군, 우리 위휘군의 정확한 재정 상태는 어떤가?”
포란성에서 투항했던 개묵은 위휘군에서 편장의 지위로 종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송지도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직접 보고를 드리는 것보다 이걸 보시는 게 더 빠를 것입니다.”
개묵은 들고 왔던 장부를 내보였다. 송지가 재빨리 받아 들고 펼쳐 보았다.
“이, 이게 사실인가?”
장부의 기장記帳 내역을 본 송지가 해연이 놀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황금 삼백 관, 은 삼천칠백 관, 비단이 오천 필…….”
차마 더 이상은 읽지 못하고 송지는 편월에게 장부를 넘겨주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위휘군의 재정은 몇십 배나 많았다.
‘이젠 정말 물러날 때가 된 거다.’
송지는 처참한 자괴감에 잠겼다. 군감으로서 위휘군의 재정이 이처럼 불어났다는 걸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나이 탓만은 아니었다. 그 때문이라면 담개 역시 자신과 비슷해야 되는데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직무유기이고, 근무 태만이다. 이번 포란성 전투만 끝나면 물러나야겠다.’
송지의 솔직한 심경이자 결심이었다.
장부를 받아 든 편월은 시큰둥하게 대충 훑어본 후 담개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포상의 규모만 결정하면 되겠군.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기실 편월은 그 점이 막막했다. 여태 한 번도 포상을 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두 장군의 위치나, 지금까지 위휘군에서 세운 공훈 등을 생각하면…….”
“듣자니 소장에 대한 포상을 논의 중이신 것 같은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오. 우선 이자의 얘기부터 들어 보시는 게 좋을 듯하오.”
돌연 두건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좌괴가 호훈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아진 건 물론이었다.
장수들은 살짝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두건득에 대한 포상을 얘기했고 그걸 본인이 들은 것 같아서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으란 거요?”
편월의 말이 없었다면 이 어색한 공기는 한동안 머물러 떠나지 않았을 터였다.
“자, 조금 전에 내게 했던 얘기를 다시 한 번 말씀드려라.”
두건득의 말에 호훈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반복했다.
얘기를 들은 장수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가겸후의 소행에 분개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 와중에 자괴만이 조용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까지 들은 호훈의 말을 분석해 보면 그건 모두 정황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겸후는 이미 황제가 죽었다는 발표를 했다. 그다음 수순이야 뻔한 것, 스스로 제위에 오르겠다는 것일 게다.
이 순간 좌괴가 가장 아쉬운 건 황후의 용태였다. 그녀만이 확실한 사안을 알 수 있을 테니, 그녀의 한마디만 들을 수 있었으면 싶었다.
물론 호훈의 말도 전혀 쓸모없는 건 아니다. 이 사실을 천하에 공표하면 또 한차례 혼란이 일어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장수들도 제각각의 반응을 보인 것처럼 가겸후를 치겠다고 들고일어설 무장들도 없지 않을 터였다.
“이제 허주까지 망했소. 그리고 지금 가겸후는 강국을 공격하고 있는 중이오. 그마저 무너진다면 다음은 우리 차례, 하루속히 강국에 원군을 보내야만 하오.”
“강국에 원군을 보내자니? 그 일은 이미 끝난 게 아니오.”
“그때는 상초국 놈들이 황제를 기습한 줄 알았을 때였소. 그런데 지금 보니 가겸후가 음험한 음모를 꾸민 거였소. 그걸 알고서도 강국이 멸망당하는 걸 지켜보자는 말이오?”
“확실한 증거가 없잖소, 증거가!”
“더 이상의 증거가 무슨 필요가 있소. 저자는 자신을 율천국 저물창 참장이라고 했소. 오죽했으면 나라를 버리고 우리에게까지 와서 고변을 했겠소.”
“그 말을 어떻게 믿겠소. 입으로 만든 신분이 모두 다 옳다면 나는 황제라고 하겠소.”
“그, 그건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서로 격렬하게 언쟁을 벌이는 장수들 사이로 호훈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증명한다고? 어떻게?”
“우선 이걸 봐 주십시오.”
호훈은 뭔가를 내밀었다. 율천국의 창고에서 얻은,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여긴 문서들이었다. 이걸 그는 장사치처럼 가장하고, 봇짐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문서들은 당연히 좌괴가 읽게 되었다. 그가 가장 정확하게 진위 여부를 판별할 것 같아서였다.
“비록 시일이 지난 것들이지만 모두 진짜요. 가겸후의 직인도…….”
“그것 보시오. 내가 뭐랬소. 그러니 이참에 강국에 원군을 파견해야 되오. 이미 준비도 끝났으니 이대로 곧장 출발만 하면 될 게요.”
강국에 원군을 파견하자고 주장했던 장수가 기세등등하게 또 한 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게다가 강국의 증두신은 누가 뭐래도 우리 주군의 장인이오. 감히 황제를 시해한 가겸후를 토벌하여 천하에 명분을 세우고 장인을 도움으로써 무장의 의리를 다하는 거요. 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소.”
이번엔 누구도 선뜻 반대 의견을 피력하지 못했다. 천하에 명분을 세우고, 무장의 의리를 다한다는 말이 장수들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기 때문이다.
“듣고 보니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오. 지금 포란성에 파양주군이 밀려와 있지만, 거기엔 거규 장군이 계시오. 게다가 호윤천에게 반기를 든 곽준방 장군도 계시오. 당장에 어떻게 될 위험은 없다는 거요. 그러니 기왕에 준비한 병사들을 이대로 강국으로 돌려…….”
“그건 안 될 말씀이오!”
이건 좌괴의 말이었다. 그로선 드물게도 언성을 높인 것이었다.
당연히 장수들은 놀랐고, 실내엔 갑작스러운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모든 시선이 일제히 좌괴에게 집중되었다.
“이자가 율천국 저물창 참장이었던 게 확실한 것과, 이자의 말대로 가겸후가 황제를 시해했다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오. 여전히 확실한 증거가 없소이다. 증거가 없는데 군사를 움직여 가겸후를 친들 그건 천하에 명분을 세우는 게 아니오.”
잠시 말을 끊은 좌괴는 뭇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누구도 반박은커녕 입도 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우리의 땅에 적이 들어와 있소. 그걸 두고 장인이랍시고 강국을 돕는다는 건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모든 걸 망치는 일에 다름 아니오. 그러니 강국에 지원군을 파견하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좌괴는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이쯤 되면 장수들의 시선이 편월에게로 돌아가는 건 기정사실이다. 장인 나라를 돕는 것에 극력 반대하는 좌괴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강국에 원병을 파견하는 건 반대요.”
편월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터였다. 다만 허주의 조환과 그 부인의 목이 무참하게 잘렸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아주 조금은 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편월이라고 해서 장인의 거취에 신경 쓰이지 않았을까. 다만 미운털이 박혀 있는 호윤천이 급기야 자신이 확보하고 있는 땅까지 쳐들어왔으니 이참에 단단히 혼을 내 줄 결심이었다.
물론 호윤천이 작정하고 쳐들어온 건 아닐 게다. 곽가군의 뒤를 쫓다 보니 이렇게까지 되었겠지만, 이유가 무슨 상관인가. 이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인데…….
“강국을 지원하지 못해 정 아쉬운 분들은 이 점을 기억해 주시오. 만약 가겸후가 황제를 시해한 게 사실이라면, 그건 우리만 알고 있는 일이오. 최악의 경우 그걸 빌미로 가겸후에게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도 있을 게요. 그러니 이 사안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에 부쳐 주시오.”
좌괴의 말에 장수들은 한결같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그것도 현재 가장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가겸후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건 어떤 경우든 기분이 좋았다.
“그럼 다들 각자 부대로 돌아가셔서 내일 출발에 차질이 없도록 하시오. 그리고 저 호훈이란 자는 두 장군께서 맡아 주시오.”
‘맡아 달라’고 했지만, 그건 철저히 감시하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그걸 모를 두건득이 아니었다.
“알겠소.”
두건득의 말을 끝으로 장수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편월에게 가벼운 예를 갖추고는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모처럼 내전에 드시는 게 좋을 듯하오.”
“나도 그럴 생각이야.”
다들 나가고, 좌괴가 은근히 권한 말에 편월은 선뜻 응했다. 오늘은 유화가 아니라 증화강을 찾을 작정이었다. 장인을 도우지 못하는 미안함을 약간이나마 보답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슬슬 주군께도 후사가 있어야 되지 않겠소?”
“웃기는 소리 마!”
농담 반 진담 반인 좌괴의 말을 무시한 채 편월은 내전으로 향했다.
* * *
도연각의 입술은 허옇게 부르텄고, 더러 물집이 잡힌 곳도 보였다. 요 며칠 사이의 고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백성들 때문이었다.
성을 버리고 퇴각해 위휘군에 합류한다고 했을 때 대인성에 살고 있는 백성들 대부분이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할지도 모른다. 허주에서 보면 대인성은 국경에 있는 성인지라 유동 인구는 많아도 실제로 주거하는 가구는 별로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대인성의 현 실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피난할 백성들은 모두 대인성으로 가라는 지시에 따라 지금 대인성에 십만이 넘는 난민이 유입되었고, 약 일만에 달하는 가구 수를 감안하면 그 숫자는 거의 십오만에 육박할 터다.
그 많은 백성들이 피난 보따리를 챙겼다. 기왕에 대인성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야 그게 간단한 일이었지만, 여기에 붙박여 살던 사람은 다르다. 보따리를 챙기는 손길도 서툴고, 챙길 물건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은 도연각의 예상을 훌쩍 넘었고, 그사이 오만에 이르는 율천국군을 거느린 장웅은 허주의 각 성을 깨뜨리며 꾸준히 접근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 점이 도연각의 입술을 부르트게 만든 이유였다.
그렇다고 따르겠다는 백성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어제는 조환의 명으로 얼마 전부터 대인성에 머물게 된 당세홍에게 오천의 군사를 주어 선발대를 구성했다. 준비된 백성들부터 먼저 출발시키기 위함이었다.
백성들은 한도 끝도 없이 밀려왔다. 밤에도 쉬지 않고 그들은 남부여대해서 앞서 떠난 행렬의 꼬리를 거머쥐고 놓지를 않았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한다면 이처럼 처절한 광경도 찾기 쉽지 않을 터였다.
오늘 새벽을 기해 도연각은 이천의 병력으로 중진을 꾸렸다. 그 장수는 조강에게 맡겼다. 마지막까지 남겠다고 한사코 우기는 걸, 백성들을 보호하라는 말로 꾸짖어 보냈다.
당연히 후미는 도연각의 몫이다. 남은 병사는 오천. 이걸로 장웅의 추적군을 따돌리거나 격파하면서 이동해야 한다.
후회 따위는 없다. 이건 도연각뿐만 아니라 후미를 맡은 오천의 병사 모두의 한결같은 마음이다.
이윽고 마지막 피난민 일가가 성을 출발했을 때, 선발대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보고, 선발대 오천을 비롯한 백성들이 무사히 괘공교를 건너 위휘군에 합류했습니다. 위휘군은 상당히 우호적으로 맞아 줬습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이렇게 말했지만 도연각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혹시 병사들만 괘공교를 건넜다면 위휘군은 곧바로 반격을 가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가는 군사를 공격할 수는 없었으리라.
‘우리가 백성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이 우릴 보호한 거로군.’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도연각은 싱긋 미소를 떠올렸다.
“보고!”
또 한 명의 보고자가 숨 가쁘게 달려와 군례를 갖췄다. 율천국군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파견한 척후병이었다.
“율천국군이 기산祁山 요새를 깨뜨리고, 맹렬한 속도로 접근 중입니다.”
“알겠다.”
무겁게 대꾸한 후 도연각은 주위에 도열한 장병들에게 입을 열었다.
“모두 들었겠지. 기산 요새가 뚫렸으니 이제 적들은 한 시진 이내에…….”
“장군, 청이 있소이다. 부디 이 성에서 적들과 일전을 벌이도록 해 주시오.”
“닥쳐라!”
갑자기 뛰쳐나와 싸우게 해 달라는 편장 중 한 명을 도연각은 무거운 고함으로 억눌렀다. 그러고는 이내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고 말했다.
“싸우고 싶은 심정이야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성은 후미의 공격엔 무방비나 마찬가지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
도연각의 말에 편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대인성은 어디까지나 적의 공격에 강하게 버티도록 지어졌다. 후미라고 하면 허주 땅. 그들에게 대비한 게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지금 장웅은 바로 그 배후에서 치고 들어오고 있다. 농성을 한다고 해도 그건 말뿐이고, 곧바로 난전이 벌어질 게 뻔하다.
“저 백성들을 봐라. 저런 속도로는 한 시진 내에 괘공교를 건너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게다. 우선은 저들을 독려해 다리를 건너게 하고, 만약의 상황엔 일전을 불사한다. 그땐 목숨을 아끼지 말도록!”
“존명!”
오천의 장병이 내는 복명 소리에 조휴령 전체가 쩌렁거렸다. 그만큼 강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럼 성에 불을 질러라. 그리고 곧장 출발해서 후미의 백성들과 보조를 맞춰라. 느린 사람은 이끌어 주고, 혹 쓰러진 사람이 있거든 업어서라도 괘공교를 건너게 하라. 단 한 사람의 백성도 뒤에 남기지 마라.”
“존명!”
또 한차례 우렁찬 복명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불길을 예고하는 검은 연기가 대인성 여기저기에서 뭉클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뒤로하고 도연각은 천천히 말을 몰아 조휴령을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