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석권崙州席捲
1
더디고 힘들었지만 적린은 인적이 드문 오지나 산길을 택해 허주를 통과한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마님과 시비들이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말이다.
지금 허주엔 총동원령이 내려져 있었다. 산길이나 오지를 걷다 도적을 만나면 싸우거나 협상할 수도 있겠지만, 만에 하나 군의 병사들에게 잡힌다면 꼼짝없이 충군充軍될 게 뻔한 노릇이었다.
그 결과 일행은 무사히 허주를 빠져나왔다. 마지막 관문인 대인성의 검문은 삼엄했지만, 성주인 도연각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신들을 그냥 보내 주었다. 하긴 도연각이 보내 준 사람은 비단 자신들만이 아니었다. 피난을 가겠다는 사람들은 모두 성에서 내보내 이웃 윤주로 향하게 해 주었다. 일행이 자연스레 그 속에 섞였음은 물론이었다.
저만치 윤주성이 빤히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적린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님은 위휘군으로 가길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적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두 명의 시비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마님은 앞에 보이는 게 윤주성인지도 모른 채 그저 망연한 표정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실 마님이나 시비들이나 도저히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몰골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우아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봉두난발에 때국물이 잘잘 흐르는 옷과 얼굴들이었다. 솔직히 대인성에서 합류한 허주의 피난민들보다 더 못한 상태였다. 그건 적린이라고 해서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마님,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바로 저기 보이는 곳이 위휘군이 차지하고 있는 윤주성입니다.”
마님에게 다가간 적린은 윤주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내라는 의도에서였지만 그의 목소리 역시 까끌까끌하게 메말라 있었다.
마님은 물론 시비들조차 입을 열지 않았다. 허옇게 메말라 부르튼 입술을 움직였다간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테니까.
그러나 적린의 손끝에 서 있는 윤주성을 보는 그녀들의 멍하니 풀려 있던 눈엔 서서히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털썩!
마님이 그 자리에 쓰러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윤주성을 보느라 시비들이 잠시 방심한 탓이었다.
“마님!”
두 명의 시비들이 동시에 외마디 경악성을 발하며 쓰러진 여인을 안아 일으켰다.
“쉿! 피난민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소.”
적린이 재빨리 두 명의 시비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몇몇 피난민들이 이쪽으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적의에 찬 눈빛이었다.
그 심정을 적린은 알 것 같았다. 나라가 패망해 피난민들은 모두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판인데 그 패망의 원인이 된 인간—지도급 인사, 귀인, 대인, 마님 등—이 제 목숨 살리자고 이 먼 곳까지 피난 왔다는 걸 알았으니 그 눈에 서슬 퍼런 칼날이 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린은 허리춤에 찬 칼을 흔들며 위협의 몸짓을 보냈다.
그들은 이내 눈길을 거두고 다시 윤주성으로 발길을 향했다. 어떻게든 살겠다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다. 남는 것 없는 증오심으로 괜스레 칼 맞을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서둘러야만 한다. 여기에 귀인이 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피난민들 사이로 번져 갈 것이고, 만약 그들이 다시 분개하게 된다면 귀인의 출신지 따위를 따지는 번거로운 짓은 하지 않을 게다. 그저 덤벼들어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울분을 폭출시켜 당장 육시를 만들 게 뻔하다.
“결례인 줄 아오나 소인이 마님을 업겠소이다.”
지금껏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험한 산길을 걸을 때도 적린은 감히 마님을 업겠다고 하지 않았고, 두 시비들도 그걸 허용할 눈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데 오늘은 달랐다. 마님이 워낙 지친 탓도 있었지만 피난민들의 위협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적린이 내민 등에 마님이 순순히 업힌 것도 그래서일 게다.
“최대한 빨리 걸으시오. 절대로 뛰지는 말고.”
적린은 두 시비에게 단단히 일렀다.
누군가가 달리면 그걸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도망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조금 전에 강한 모습으로 피난민을 위협해서 쫓은 적린이 그처럼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한번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적의가 없던 사람들도 덤비게 된다.
다행히 적린의 우려는 단순한 염려로만 끝나게 될 모양이었다. 윤주성이 보이자 피난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걸음을 빨리했고, 더러는 달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입성도 어렵지 않았다. 사전에 무슨 타합이 있었는지 윤주성은 성문을 활짝 열고 피난민들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허름한 군용 장막이긴 했지만 쉴 곳도 마련해 뒀던 것이다.
그중 한 곳을 향해 적린을 발길을 옮겼다. 자신들 역시 피난민 속에 섞여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말린 건 시비 중 한 명이었다. 마님을 이런 곳에 모실 수 없으니 성내에 있는 최고급 객잔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제야 적린은 이들의 신분을 상기했다. 마님이라고 불리며 상당한 무술을 쌓은 듯한 두 명의 시비를 거느릴 정도라면 최소한의 금붙이 정도는 몸에 지니고 있을 터였다.
“나를… 내, 내려 줘요.”
적린의 등에 업혀 있던 마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사이 기운을 조금 차린 것 같았다.
거부하지 않고 적린은 마님을 내려놓았다. 그녀를 업었을 때부터 뭔가 딱딱한 것이 등을 압박해 상당히 불편하던 참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객잔을 찾기 시작했다. 더러 윤주성의 병사들이 보였지만 달리 제지를 하진 않았다. 다른 피난민들 중에서도 비교적 부유한 자들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시비 중 한 명이 선택한 곳은 한눈에 봐도 윤주성에서 가장 고급일 것 같은 객잔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녀들은 그 객잔의 후원을 통째로 전세 냈다. 어디에 숨겨 뒀는지 상당수의 보석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하나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귀빈 대우를 받았다.
객잔에 들게 된 것만으로도 그녀들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적린의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들이 요구했고 그걸 자신에게 전한 고 장군의 말도 그녀들을 위휘군에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윤주성에 들어옴으로써 그건 분명히 달성되었다.
‘과연 끝난 건가?’
아직은 아니라는 게 적린의 생각이었다. 비록 출중한 무예를 가진 두 명의 시비가 있다지만 그녀들을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 윤주성의 성주는 만나게 해 줘야 한다. 그래야 무반으로서의 자신의 임무도 마침내 완수된다.
결정을 내린 적린은 우선 먹었다. 그리고 시비들에게 부탁해 새 옷 한 벌을 점소이에게 마련해 오라고 했고 몸을 깨끗이 씻었다.
모든 준비를 갖춘 적린은 오히려 맥이 빠졌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나면 그간의 피로가 풀릴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 반대였다.
적린은 그렇게 한동안 축 늘어진 채 앉아 있었다. 그동안 영혼과 육신을 바짝 당겼던 긴장이 일시에 풀어지면서 온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적린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이 정도라면 세 명의 여인은 더할 터였다. 그녀들이 쉬고 있는 동안 윤주성 성주를 만날 생각이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소.”
시비 중 한 명에게 그렇게만 말한 후 적린은 객잔을 빠져나갔다.
적린은 곧장 내성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곧바로 성주를 만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기별은 해야 한다. 그래야 약속 날짜라도 잡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성 정문에서 적린은 제지를 당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몸이 피곤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율천국 장수 적린이오. 성주를 면담하러 왔다고 전해 주시오.”
수문장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도 그래서였다.
반응은 제꺽 나타났다. 수문장이 직접 안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적린은 성벽의 그늘에 기대앉았다. 신분을 밝혀 버렸으니 이제 율천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가문의 이름을 다시 세우겠다는 꿈도 허망하게 깨지고 말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적린은 생각했다. 무장의 본분은 백성들을 돕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보호해 왔던 사람은 다른 곳도 아닌 율천국의 귀부인이다.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되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생각에 잠겨 있던 적린의 고개가 규칙적으로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잠결 속으로 빠져 든 모양이었다.
삼만의 병력을 합진성으로 보낸 후부터 술을 찾는 날이 많아진 강숙이었다.
그로선 편월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동쪽 하늘엔 온통 전운이 피어올라 있고, 그게 언제 이천강을 넘어올지도 모르는 판에 오히려 윤주를 평정한다고 한다. 아무리 병법을 모른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숙이 다시 한 잔의 술을 비웠을 때, 편장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성주, 희한한 사람이 찾아왔소이다.”
“희한한 사람이라니?”
“율천국 장수 적린이라는 자가 성주께 면담을 요청하더라는 수문장의 보고가 있었소이다.”
“율천국의 장수가?”
강숙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곧 전개될 율천국의 공세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고심하던 참에 그 장수가 와서 면담을 청한단다. 그 저의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신으로 왔던가?”
“예. 아무래도 오늘 들어온 난민들에 섞여서 입성한 것 같소이다.”
“좋다. 만나겠다. 당장 데려오너라.”
“존명.”
편장이 물러가자 강숙은 시비들을 불러 술상을 치우라고 했다. 적장이라고 스스로 밝힌 사람이다. 한 성의 성주가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윽고 예의 편장이 적린을 안내해 안으로 들어왔다.
“율천국의 장수 적린이 삼가 성주를 뵈오.”
적린은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무장으로서 일말의 흐트러짐이 없는 몸가짐이었다.
강숙은 말없이 적린을 쏘아보았다. 확실히 먼 여행길에 초췌해진 모습이었고, 금방 잠에서 깬 듯 얼굴이 부숭하게 부어 있었다.
“성주.”
편장이 나직이 강숙을 불렀다. 상대의 신분이 어떻든 예를 갖췄으면 답례를 해야 한다. 저렇게 노려보기만 한다는 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래도 강숙은 개의치 않았다. 아쉬운 건 어디까지나 적린이다. 예의를 갖추기보다는 그의 태도에서 여기까지 온 저의를 짐작하고자 했다.
비록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지만, 적린의 태도는 당당했다. 강숙의 날카로운 눈길을 조금도 위축됨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기에 온 목적은?”
마침내 강숙은 짤막하게 물었다. 이것도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다. 답례는커녕 곧바로 하대를 했으니 말이다.
과연 적린의 피곤한 얼굴에는 서서히 노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설사 전쟁에 진 패장이라도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게 무장의 도리요. 하물며 이처럼 제 발로 찾아온 자에 대해선 말해 무엇 하겠소. 당신 같은 사람이 위휘군에서 한 성을 맡고 있다니 한심스러울 따름이오.”
적린은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을 땐 자신에 관한 문제는 도외시했었다. 두려워할 게 없다는 얘기다.
이번엔 강숙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아쉬워서 찾아왔을 적린이 저처럼 당당하게 나올 줄은 예상 밖이었다.
강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배운 것 없는 무식한 놈이 과분한 중책을 맡아 잠시 예를 잊었소이다. 잘 오셨소이다. 자, 앉으시오.”
순식간에 돌변한 강숙의 태도였지만 나무랄 일이 못 된다. 난세의 변천 많은 일상에 적응하려는 노력이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그런데 어떤 일로 예까지 오셨소?”
서로 마주 앉게 되자 강숙은 재차 물었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실은 율천국의 귀인 한 분을 모시고 왔소이다. 부인이신데 솔직히 소장도 그분의 정확한 신분은 모르오.”
“호오, 모르는 분을 모시고 그 멀고 험한 길을 오셨소?”
“평소 신세지고 있던 장군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던 터라…….”
적린은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피해 여기까지 왔다는 게 설득력 있게 들릴 것 같지 않았다.
“신세진 분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실 수도 없었겠구려. 어쨌든 여기까지 무사히 호위해 오셨다니, 천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래서 성주께 청이 하나 있소이다. 성주께서 다리를 놓아 그 부인과 편월 대장군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시오.”
“그야 뭐 그리 어려울 게 있겠소. 하지만 그 전에 부인의 신분을 확인해야만 되겠지요. 그래, 부인께서는 어디 계시오?”
적린은 망설임 없이 마님과 두 명의 시비가 있는 객잔을 말해 주었다.
“그대가 병사 몇 명을 데리고 가서 세 분을 모셔 오도록. 먼 길을 오셔서 피곤하실 테니 가마를 준비하라. 오늘 하루는 푹 쉬시게 하고, 뵙는 건 내일로 하자.”
“존명.”
편장이 명을 받고 나가자, 적린의 얼굴엔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그에 따라 피로감도 가중되는 것 같았다.
“주안상을 마련하라. 귀중한 객이 오셨다.”
“아, 아니요.”
술을 대접하려는 강숙에게 적린은 한사코 사양했다. 그에겐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성 어딘가에 들 마님을 경호해야 하는 일 말이다.
그러나 강숙은 막무가내였다. 아직 적린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피로할 게 분명한 그에게 술을 먹여 보면 혹 어떤 얘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이게 윤주성을 맡은 이후로 강숙의 달라진 점이었다. 의심이 많아지고 간교해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신중해졌다고 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이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나 보다.
거듭된 적린의 사양 속에서도 술상은 마련되었다.
“자, 한잔 받으시오.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의리를 지켜 여기까지 무사히 오신 적 장군이야말로 이 땅 모든 무장들의 귀감이오.”
예전의 강숙이라면 낯간지러워서라도 하지 않았을 칭찬을 하며 술을 따랐다.
눈만 뜨면 전장을 뒹굴어야 하는 거칠디거친 전국난세의 무장들에겐 의외로 단순한 일면도 없지 않다. 입에 발린 칭찬인 걸 뻔히 알면서도 적린의 얼굴에 뿌듯한 자부심이 떠오른 것만 봐도 그렇다.
당연히 적린은 잔을 받았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추어주는데 계속 사양하는 것도 분명한 결례다.
“오시면서 영산 전투를 보셨을 텐데, 전황이 어떻더이까?”
“전투를 직접 보지는 못했소이다. 하지만 대왕 전하께서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서셨으니 허주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오.”
비록 떠난 몸이지만, 적린은 여전히 가겸후를 대왕 전하로 칭했다.
강숙은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적린이 가겸후를 천시하거나, 욕이라도 했다면 그를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강숙의 말투도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졌다.
“만약 허주가 멸망하면 율천국왕께선 곧바로 이천강을 넘어 이쪽으로 진격하실 것 같소이까?”
“그걸 소장이 어찌 알 수 있겠소. 다만 대왕 전하께서는 매우 신중하신 분이오. 아직 강국과 식운관에서 대치 중이고 또 북에서는 언제 융주가 다시 발호할지 알 수 없소이다. 소장이 듣기론 상초국에서도 대규모 수병을 파견한다고 하니 해상도 안심할 수 없으실 게요.”
“그 말씀은……?”
“소장의 생각으론 당분간 대왕 전하께서는 이천강을 넘지 않으실 게요.”
강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만의 병사를 빼 갈 때 합진성에서 온 소식도 이와 흡사했다. 적린을 어느 정도 믿어도 괜찮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 한 잔 더 드시오. 그럼 율천국왕께선 우리 위휘군을 어떻게 보시는 것 같소이까?”
“그건 정말 모르겠소.”
적린의 대답은 짧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이 문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대답 역시 강숙의 마음에 들었다. 대개 투항을 해 온 자들은 자신을 받아 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심리가 있다. 그래서 많은 말들을 하게 되고, 그중에선 과장되거나 심지어 없는 얘기를 지어내기까지 한다.
그런데 적린은 사실에 바탕을 둔 자신의 짐작과 모르는 것에 확실한 차이를 두고 있다. 그의 성격이 어떤지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이제 강숙은 적린에 대한 의심의 대부분을 떨어 버렸다.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그를 대하고 그가 데려온 여자들을 만날 작정이었다.
그렇게 되자 술자리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처음에 조심스럽게 잔을 비우던 적린도 강숙의 본래 화통한 성격을 대하자 거푸 술을 마셨다. 거기에 편장 몇 명이 가세했다. 강숙이 적린을 그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날 그들은 모두가 대취했다. 잔뜩 기분이 좋아진 강숙은 오늘 입성한 난민들에게 많은 식량을 내리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적린은 간간이 마님과 시비들의 안부를 묻곤 했다. 이 역시 일종의 무례일 수도 있다. 윤주성의 보호를 불신한다는 의미로도 통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강숙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적린이 물을 때마다 부하를 보내 일일이 확인하게끔 했다.
술자리가 끝날 즈음에 강숙은 정중한 어투로 적린에게 말했다.
“이 참에 우리 위휘군과 함께하시는 게 어떻겠소?”
“이유야 어떻든 이 몸은 한 번 나라를 버린 몸이오. 어떻게 낯을 들고 새로운 분을 섬길 수 있겠소?”
명백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강숙의 설득도 끈덕졌다. 술 취한 편장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혹은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급기야 적린으로부터 ‘생각해 보겠다.’라는 답을 듣고서야 강숙은 그를 풀어(?) 주었다. 벌써 새벽이 뿌옇게 밝아 오고 있는 시각이었다.
2
유산성을 포위한 편월은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했다. 낮이면 주로 사냥을 하거나 더러 가까운 물가에서 천렵川獵을 하기도 하면서, 마치 전쟁 따위는 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바로 이게 좌괴의 머리에서 나온 고도의 전술이었다. 위휘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건 비단 유산성만이 아니다. 윤주에 산재한 모든 성들이 촉각을 곤두세운 채 보고 있을 터였다.
그들 눈에 편월의 행동은 분명 싸워서 굴복시키기보다는 항복을 받으려 한다는 걸로 보일 것이다. 유산성이 벽곡성을 돕기 위해 출격을 했다는 것 역시 익히 알고 있을 테니 그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위휘군의 아량은 널리 퍼질 수 있으리라.
게다가 유산성은 산성의 특징상 식수 조달이 쉽지 않다. 억지로 공격하면 사력을 다해 저항하겠지만 그대로 두면 오래지 않아 항복을 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편월이나 좌괴의 심정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유산성과는 달리 광평성과 배호성의 전황이 그리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고 있다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이건 정말 큰 문제였다. 출격하기 전 알아본 바에 의하면 좌괴의 시종인 막종을 통해 흘린 역정보가 효과를 본 것 같았다. 호가군의 활동이 주춤해진 것이다.
그사이 광평성이나 배호성 중 하나는 반드시 떨궈야 한다. 만에 하나 호가군이 포란성으로 쇄도한다면, 비록 곽가군과 합친다 해도 거규로선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두 개 성 중 어느 쪽이든 먼저 떨구는 병력을 빼서 합세하도록 해야 한다.
‘어느 쪽을 치는 게 빠를까?’
사실 광평성이든 배호성이든 그리 강한 게 아니다. 시간만 있다면 둘 다 확실히 떨굴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한 군데를 먼저 깨뜨릴 수밖에 없다.
“주군, 내일은 소생과 배호성 시찰을 나가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진막 한구석에서 열심히 읽기와 쓰기 연습을 하고 있던 편월이 고개를 들었다. 의아해하는 눈빛이었다.
“간 김에 배호성을 뽑아 버립시다. 주군께서도 요즘 무료해하시는 것 같으니…….”
“여기는 어떡하고?”
“여긴 맹 장군에게 맡기면 될 겁니다. 포위만 하고 있으면 되니 누구라도 괜찮을 겁니다.”
“좋아.”
깊이 생각지도 않고 편월은 대답했다. 싸움이라면 언제든 환영하는 성격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일 새벽, 날이 밝기 전에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수행은 백 기면 충분할 겁니다.”
“알았어. 그런데 배호성을 떨굴 작전은 세운 거야?”
“가 보면 무슨 해결책이 생기겠지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좌괴는 대답했다. 생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배호성 주변을 상세하게 그린 지도는 이미 입수되어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고, 그걸 바탕으로 한 가지 작전의 밑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도면상의 작전일 뿐이다. 현지 사정은 또 다를 수 있으니 내일 직접 가 보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배호성은 이삼 일 안에 함락시킬 수 있을 텐데…….’
“보고! 윤주성에서 긴급한 전령이 왔습니다.”
“뭣이? 윤주성에서?”
생각을 가다듬던 좌괴는 펄쩍 뛰듯이 놀라고 말았다. 지금 윤주성에서 전령이 왔다는 건 아무래도 불길했기 때문이다.
‘동쪽의 전황에 무슨 변동이 생긴 건가?’
“들라 해라.”
전령을 부르는 편월의 목소리를 들으며 좌괴는 연방 뇌리를 굴렸다. 만약 가겸후가 예상보다 빨리 허주를 멸망시키고 이천강 도강을 시도한다면 자신의 계획은 깡그리 무너지고 만다.
윤주성에서 왔다는 전령은 병사들에게 들리다시피 해서 들어왔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왔음이 분명했다.
“주, 주군께 이 보, 봉서를…….”
품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보인 후 전령은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편월은 봉서를 받아 들었다. 전장과 전장 사이를 오가는 전령이라면 이런 서찰 대신 구두로 용건을 전한다. 점령지 안을 오가기에 이 같은 방법도 가능한 것이다.
봉서를 뜯어본 편월의 얼굴에서 핼쑥하니 핏기가 가셨다. 그만큼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주군?”
곁에 서 있던 좌괴가 염려스럽게 물었다. 편월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편월은 말없이 서찰을 건네주었다. 말로 할 수 없으니 직접 보라는 뜻이었다.
재빨리 내용을 훑어본 좌괴의 반응도 편월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옥새를 가진 황후가 와 있다는 건 누가 읽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좌괴는 확실히 냉정했다.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편월에게 말을 붙였다.
“이건 하늘이 주신 복입니다. 황후 마마께서 왜 우리에게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걸로 가겸후의 기세는 절반 이상 꺾일 겁니다.”
편월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옥새를 가진 황후란 존재가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익히 알고 있다. 다만 왜 하필 지금인가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황제가 부상당한 걸 계기로 가겸후는 크게 떨치고 일어났다. 허주와 강국이 곧 멸망할 것이고 이제 그 정면에 위휘군이 맞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 황후의 존재는 가겸후의 전의에 불길을 더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친동생이니만큼 배신감 역시 더욱 클 터였다.
“주군의 우려는 소생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겸후는 당분간 이천강을 넘어오지 않을 겁니다. 그건 소생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장담할 수 있습니다.”
진즉부터 편월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좌괴는 말했다.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일이 다급해진 건 사실입니다. 만약 황후께서 윤주성에 계신 걸 알게 되면 가겸후가 아닌 다른 군벌들이 설쳐 댈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 전에 윤주는 확실히 평정해 둬야 합니다.”
좌괴의 말이 빨라졌다. 그로선 황후의 등장이 흥미로운 일이었다. 거기다 옥새까지 가져왔다니 금상첨화였다.
‘천운은 주군에게 있다.’
현 시점은 천하가 다시 예전의 극렬한 분열을 거듭하던 안강 연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마용승이 죽은 후로 파양주가 들썩거리고 황제를 끼고 있던 가겸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옥새가 제 발로 굴러들었다.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만큼 실로 천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머리를 굴리던 좌괴의 표정이 돌연 딱딱하게 굳어졌다.
‘황후에게 옥새를 들려 예까지 보냈다면, 황제는?’
옥새는 황제의 상징이다. 단 일각이라도 몸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물건이다.
“주군, 이건 아무래도…….”
“그만!”
자신의 뇌리를 스친 생각을 말하려던 좌괴를 편월이 황급히 제지했다. 그리고 진막 안에 있는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물러가라. 경계를 엄중히 해서 이 주변엔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맹 장군을 불러오도록.”
‘과연 범상한 인물은 아니군.’
지금 편월을 보고 있는 좌괴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 역시 황제의 변고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부하들을 물리치고 밀담을 나누려는 것일 게다. 그 신중함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부하들이 물러가고 가까운 곳에 있었던 듯 맹아가 이내 진막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병사들 사이에 섞여 한바탕 힘자랑이라도 하고 온 것이리라. 맹아의 이마엔 땀이 그득했고, 갑옷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황제가 죽은 것 같아.”
나직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편월은 내뱉었다.
“뭐요? 아니,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쉿! 조용히 하시오, 맹 장군. 큰 소리로 할 얘기가 아니오.”
놀라 언성을 높이는 맹아를 좌괴가 급히 제지했다. 편월을 대할 때와는 좀 다른 어투였다.
“우선 이걸 읽어 보시오.”
좌괴는 윤주성에서 온 서찰을 맹아에게 건네주었다.
“황후가 왔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만 여기엔 황제에 대한 건 한마디도 없구만.”
황제와 황후를 칭하는 맹아의 말투는 거칠었다. 그리고 서찰의 내용도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였다.
거기에 대해 좌괴가 간략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사이 편월은 멀고 먼 기억의 저 뒤편에 밀쳐 두었던 황제를 회상했다. 율천국에 사자로 갔을 때 그가 얼마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줬는지, 가겸후에게 눌려 있던 황제가 얼마나 작고 왜소해 보였는지, 밀지를 전하기 위해 똑같은 목걸이를 서로 교환했던 것도…….
편월은 무심코 목을 더듬었다. 목이 굵어져 줄이 짧아지긴 했지만 목걸이는 여전히 걸려 있었다.
“그럼 이제 주군께서 황제가 되신단 말이오?”
맹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았다. 거기다 흥분과 기대감으로 인해 심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확실히 천운은 우리 주군께 있는 것 같소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황제에 등극할 수는 없소. 그랬다가는 찬탈로 오해받기 십상이오. 설사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해도 우리 위휘군은 아직 힘이 부족하오. 우선은 윤주를 평정하는 게 급선무요.”
아직도 황제와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는 편월을 대신해 좌괴는 열심히 설명했다.
“그래서 내일 새벽에 주군과 소생은 백 기를 이끌고 배호성으로 갈까 하오. 우선은 그곳을 빨리 떨어뜨려야겠기에…….”
“불가!”
여태 잠자코 듣고 있던 맹아가 돌연 좌괴의 말을 막았다.
“주군은 이제 곧 황제가 되실 몸이오. 그런데 어찌 험한 싸움터에 내보낸단 말이오. 그 일은 소장이 대신 하겠소.”
“맹 장군의 충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은 누구 할 것 없이 힘껏 뛰어야 할 때요. 만약 주군 대신 맹 장군이 배호성으로 가 보시오. 두 장군이 고분고분 승복할 것 같소? 자신을 못 믿어 맹 장군을 보냈다고 주군을 원망할지도 모르오.”
“딴은…….”
맹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명백히 기분 나쁜 일이다.
“그러니 이번엔 주군께서 가시는 게 좋소. 전선을 시찰하신다는 명목으로 가면 두 장군도 가히 언짢게는 생각지 않으실 게요. 대신 맹 장군은 이곳 유산성의 포위망을 단단히 굳혀 두시오. 이건 성 한두 개를 떨구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임무요.”
좌괴는 말끝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그래야 맹아가 조금이라도 더 큰 자부심을 가질 테니까 말이다.
“그럼 소생은 나가서 내일 수행할 인선을…….”
편월에게 말을 붙이던 좌괴는 중간에 입을 닫고 말았다. 그가 너무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본 까닭에서였다.
“술을 좀 가져와.”
“술을?”
편월의 말에 좌괴와 맹아 모두 놀라고 말았다. 진중에서 술을 찾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일은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지 않나 말이다.
“정말 술을 드실 작정이오?”
“황제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허전해서…….”
재우쳐 묻는 맹아의 말에 편월은 힘없이 대꾸했다. 정말 가슴 한쪽을 잃어버린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그날 편월은 밤이 이슥해지도록 혼자 술을 마셨다. 그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한 조상弔喪이었고, 죽은 게 확실시되는 황제에 대한 공양이었다.
* * *
새벽에 출발한 위휘군 본대 백 기는 쉬지 않고 달려 저녁 무렵엔 배호성에 도착했다.
두건득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행을 맞은 것이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좌괴는 곧장 작전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장수들로만 국한했다.
“좌 선생의 뜻은 알겠소. 하지만 저 호수의 물길을 배호성 쪽으로 돌리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소.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경사가 완만해서 수공의 효과가 날지 의문이오.”
“우리에겐 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초염 장군이 있소. 물길을 새로 내는 건 그에게 맡기면 되고, 내일 밤에서 모레 사이에 제법 큰비가 내릴 게요. 경사가 완만하다고 해도 그 정도 물이면 배호성 정도는 잠기게 할 수 있을 게요. 또 배호성의 삼면에 토성을 쌓는 것도 좋겠지. 적에겐 우리들이 장기전을 꾀하는 걸로 보이게 할 수도 있으니까.”
저녁까지 거르고 계속된 회의 결과 좌괴는 수공을 내놓았다. 배호성의 후면에 있는 호수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해 두건득은 반대였다. 그 역시 수공을 생각했지만 지형상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하고 포기해 버렸다.
“일단 초염 장군을 불러 물어봅시다. 호수의 물을 성 쪽으로 돌릴 수 있는지 없는지…….”
물어본다고 했지만, 좌괴의 말투엔 상당한 자신감이 차 있었다.
본대에 배속되어 있다가 편월을 따라왔던 초염은 즉각 불려 왔다.
“좀 둘러보셨소?”
“예.”
말을 심하게 더듬는 초염은 좌괴의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좌괴는 초염에게 호수와 주변 지형을 둘러보라고 일러뒀다. 말로는 정찰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배호성 쪽으로 물길을 내라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수공은 불가능할 것 같소?”
“가, 가, 가능하, 합니다.”
더듬는 자신의 말투가 스스로도 답답했던지 초염은 탁자에 펼쳐진 지도 위에 뭔가를 표시했다.
“그러니까 이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막고 이 언덕을 뭉개면 된다는 말이오?”
“예.”
짤막한 대답과 함께 초염은 배호성 주변에 굵은 선을 그었다.
“이건 아무래도 물을 가둘 보洑를 만들라는 얘기 같군.”
“예.”
“어떻소? 이 정도 일이라면 하루면 충분할 것 같은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좌괴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있는 위휘군은 사만이다. 그중 일만으로 물길을 막고 있는 언덕을 뭉개고, 이만으로는 보를 쌓는다면 하루면 해낼 수 있을 게다. 혹시 있을지 모를 적의 도발은 나머지 일 만으로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
두건득으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초염까지 나서서 가능하다고 하는 일에 반대한다면 자칫 무능하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어서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편월에게 쏠렸다. 대체로 수공에 대해서는 납득한 듯했으니 이제 그의 결정만 남은 셈이다.
“추진해 보시오.”
무거운 어조로 편월은 작전을 승인했다. 지난밤 늦게까지 마셨던 술이 아직도 머릿속에 숙취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단 한 번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줬던 기억 하나만으로도 아쉬움은 가득했다.
“물길을 돌리고 언덕을 뭉개는 일은 오강 장군이 일만의 병사를 이끌고 가게 해 주시오. 초염 장군도 같이 돕고. 주의할 점은 극히 은밀히 진행해야 된다는 점이오. 힘드시더라도 오늘 밤부터 시작해 주시오.”
“승복!”
“스, 승복!”
오강과 초염은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배호성의 삼면에 보를 쌓는 일은 거예홍 장군이 맡아 주셔야겠소. 병사 이만으로 내일 아침부터 시작하시오. 실상은 보를 쌓는 거지만, 적의 눈에는 어디까지나 장기전을 각오한 토성을 쌓는 걸로 보이게 해야만 하오.”
“승복!”
“두 장군은 남은 일만의 병사로 혹시 있을지 모를 적의 도발에 대비해 주시오.”
“알겠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소. 내일 밤부터 비가 내릴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거 확실한 거요?”
두건득이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날이 많이 풀렸다지만 아직은 봄이다. 그처럼 많은 비가 내릴 턱이 없다는 얘기다.
“이 몸이 배운 것 중엔 일기를 짐작하는 법도 있었소. 내일 밤에 틀림없이 비가 내릴 게요.”
“이건 중요한 일이오. 만약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호수에 있는 물만으로는 제대로 된 수공이 이루어지지 않소이다.”
“알고 있소. 바로 그 비에 의지해 이번 수공을 계획했다고 생각해 주시오.”
좌괴는 어디까지나 자신만만했다. 앞으로 내릴 비가 아니라 이미 내린 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좌 선생이 그렇다면 믿어야지. 그럼 각자 맡은바 소임을 다하도록 하게.”
두건득은 좌괴의 말을 수긍했다.
“언덕을 뭉개도 물길을 막아 두는 걸 잊지 마시오. 그리고 일이 끝나도 초 장군은 이천의 병력을 이끌고 그 자리에서 대기하시오. 내일 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신호를 할 터이니, 그때 물길을 막은 곳을 터뜨리고 합류하도록 하시오.”
“스, 승복!”
“그럼 오 장군은 지금 즉시 출발해 주시오.”
이미 편월의 승낙은 떨어졌다. 좌괴는 더 이상 그의 뜻을 묻지도 않고 일을 진행시켰다.
오강과 초염이 서둘러 진막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오늘 밤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니 급하게 병사들을 수배해야만 한다.
“따로 오천 정도의 병력을 빼서 오 장군이 파내는 언덕의 흙을 옮기도록 하면 보를 쌓는 데 도움이 될 게요.”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소.”
좌괴의 말에 거예홍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 정도는 자신도 생각할 줄 안다는 의미였다.
가벼운 군례를 갖춘 후 거예홍도 밖으로 나갔다. 내일을 위해 일찍 쉬어 두기 위함이었다.
진막 밖이 어수선해졌다. 오강이 병력을 수배하느라 그런 것일 터였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떠날 땐 조용하기만 했다. 말에 재갈을 물리고 발굽엔 짚이라도 둘렀으리라. 물론 어디까지나 은밀히 일을 진행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모든 일이 끝났다는 걸 좌괴가 보고할 때까지, 편월은 조금은 멍해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3
좌괴의 예상은 적중했다. 작전 회의를 했던 다음 날 밤 술시 경부터 하늘의 별이 하나 둘 어둠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해시가 되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예홍의 어깨를 적신 건 빗물이 아니라, 불똥이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작업했지만, 보는 팔 할 정도밖에 완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오강은 벌써 작업을 끝내고 귀대해 있다. 초염과 이천의 병사가 호숫가에 남아 물막이 둑을 터뜨릴 시기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긴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다. 뭔가를 만들어 쌓기보다는 파헤치고 부수는 게 쉽기는 하다.
게다가 배호성의 방해도 만만찮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성에서 뛰쳐나와 흙을 나르는 병사들을 습격하곤 했다.
물론 두건득이 일만의 병력을 다섯으로 나눠 적절히 대응하기는 했지만 한 번씩 습격을 당할 때마다 작업은 상당 시간 지체되었다.
“거 장군, 서두릅시다. 물막이 둑은 그리 높지가 않소.”
밤새 작업했던 오강과 팔천의 병사들까지 거들었지만 보를 쌓는 일은 더디게만 진행되었다. 흙이 비에 젖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좌괴도 편히 앉아 있지 못했다. 연방 호수로 전령을 보내 수위를 확인하곤 했다.
자시가 되자 수위는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들 정도로 불었다. 여기서 물막이 둑을 터뜨리지 않는다면 물길은 의도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흐를 우려도 없지 않았다.
보가 완성된 건 아니지만 좌괴는 전령을 시켜 물막이 둑을 터뜨리라는 명을 전하게 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본진을 이 리 정도 뒤로 물려 비교적 지대가 높은 곳에 다시 자리를 잡게 했다.
정작 고생인 건 병사들이었다. 물이 쌓은 보를 넘어 진지까지 적실 것을 대비해 모든 천막을 걷고 물자와 장비까지 단속하게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위휘군은 맨몸으로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는 얘기다.
그 속에는 편월도 섞여 있었다. 좌괴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말렸지만 병사들이 비에 젖을 때 혼자만 진막 안에 들어앉아 있을 성격이 되지 못했다.
“언제 시작하나?”
쏟아지는 빗소리 때문에 묻는 편월의 목소리는 높았다.
“지금쯤 전령이 호수에 도착했을 테니 이제 곧 시작될 겁니다.”
좌괴의 보고가 끝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호수 쪽에서 불화살 한 대가 올랐다. 물막이 둑을 터뜨리겠다는 신호였다.
“시작됐군. 다들 정신 바짝 차려라!”
편월은 다시 한 번 엄격한 어투로 말했다. 보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혹시라도 물이 넘칠 때를 대비하라는 얘기였다.
좌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내린다는 건 예상했지만 그 양까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너무 많이 내린다면 배호성은 물론 위휘군까지 그 물의 영향을 받을 터였다.
이래서 작전을 세우는 게 어렵다. 아군과 적군의 심리는 물론, 일기까지 모두 고려해서 입안하지만 하늘의 뜻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두두두!
빗줄기를 뚫고 한 떼의 기병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막이 둑을 터뜨린 초염의 부대가 합류한 것이었다.
“물은 어느 정도 흘러내렸소?”
좌괴가 성급하게 물었다.
“고, 곧 성을 자, 잠기게…….”
“알겠소.”
더듬거리는 초염의 대답을 끊은 좌괴는 손을 펴, 내리는 비를 받았다. 여전히 기세가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공은 실패인가?’
“물이 차오른다!”
좌괴가 암울한 생각에 잠겨 들 때, 앞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보에 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좌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물은 그저 내리는 비가 고인 것에 불과할 게다. 호수의 물이 본격적으로 밀려들 때부터가 진짜 승부의 시작이다.
그건 긴 기다림을 필요치 않았다. 어두워서 보이진 않았지만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온다!”
먼 곳에서부터 병사 한 명이 소리치며 말을 달려왔다. 물의 진행 속도를 알리라고 미리 대기시켜 뒀던 자들 중 한 명이었다.
번쩍, 꽈르릉!
그 순간 한 줄기 뇌전이 어둠을 가르며 천둥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들려왔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낙뢰한 모양이었다.
굳어져 있던 좌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번개가 친다는 건 대기가 불안정하다는 얘기다. 비가 그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물이 어느 정도 찼는가?”
좌괴는 소리쳐 물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한 자 정도입니다.”
“두 장군 준비해 주시오.”
수위를 감시하는 병사의 보고를 듣자마자 좌괴는 두건득을 찾았다.
“지금쯤 성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을 게요. 적들은 분명 물길을 막거나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고 성을 나올 게 분명하오. 그들을 치시오.”
“알겠소.”
두건득은 즉각 승복했다. 이건 사전에 타합된 일이었다. 달리 말이 필요 없었다.
“유군 출동!”
두건득의 명에 따라 일만에 달하는 유군이 말발굽 소리도 우렁차게 진을 떠났다.
갈 곳은 뻔하다. 보를 쌓지 않은 곳, 즉 물이 성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었다.
“보가 버텨 낼까?”
편월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처에 있는 거예홍에게 들릴까 조심한 것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는 보를 쌓느라 막심한 고생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한 시진 내에만 비가 그친다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안 그치면?”
이어진 편월의 질문에 좌괴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일단 물이 범람하게 되면 보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십중팔구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다시 뇌전이 작렬했다. 번개가 치고 난 뒤에 남는 특유의 냄새가 빗물에 녹아들어 있었다.
“반드시 그칠 것입니다.”
무엇이 좌괴에게 이런 확신을 주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의 어조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번개라는 불확실한 현상을 믿고 이러는 걸까?’
좌괴 자신이 어리둥절해져서 스스로에게 물어봤을 정도였다. 그러나 필승의 신념으로 임해도 얼마간은 패배의 확률이 있는 게 전쟁이다. 이만한 자신감도 오히려 부족할지 모른다.
‘어쨌든 사 장 높이다. 믿어 볼 수밖에…….’
원래는 배호성의 성벽 높이와 같은 오 장으로 쌓을 계획이었다. 그게 여의치 않아 사 장으로 되었지만, 그 역시 만만한 건 결코 아니었다.
“수위가 세 자에 이르렀습니다!”
보 위에서 수위를 감시하는 병사들의 보고가 들려왔다.
“이제 슬슬 반응을 보일 때가 됐는데…….”
좌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른 게 아니다. 물이 세 자나 찼다면 벌써 성에서도 알아차렸을 게다. 물을 막기 위해 출격을 하거나 어쩌면 이 본대를 향해 곧바로 덤벼들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좌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성루만이 아니라 성 전체가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 훤하게 밝아졌다. 병사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한밤중의 물난리에 당황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사수들은 준비하라!”
이어진 좌괴의 명에 병사들은 일제히 보에 기어 올라갔다. 성에서 치고 나올 적병들을 노리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오늘 밤처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하는 화살 공격은 효과가 신통치 않을지도 모른다. 당장 목표를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좌괴는 생각했다. 지금 성은 물론 그 주변엔 온통 물이 그들먹하게 들어차 있다. 말이든 사람이든 기동력이 떨어질 게 뻔하고 둔해진 목표물엔 눈먼 화살이라도 잘 먹히는 법이다.
“따로 명령을 기다릴 건 없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싶으면 발사하도록.”
좌괴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명이 떨어졌을 때, 문득 빗줄기가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되면 이긴 건가?”
편월의 말이었다. 그 역시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자 먼저 물어본 것이다.
“아직은 아닙니다. 적의 최후 저항이 있겠지요. 그걸 격퇴시킨 후라야 적은 항복을 결심할 겁니다.”
좌괴의 대답에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도 성이 물에 잠겼다고 해서 맥없이 항복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편월은 시선을 돌려 배호성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불야성처럼 훤했지만, 왠지 들뜬 당혹감이 느껴지는 불빛이었다.
* * *
배호성 성주인 연조인燕助仁은 곤한 잠결에 빠져 있다가 보고를 받았다. 성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아뿔싸!”
연조인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었다. 눈앞에 쌓이는 토성에만 신경 쓰느라 위휘군의 다른 공격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하는 후회는 아무 소용도 없다.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다.
“대체 어디서 흘러온 물이냐?”
질문을 던지면서 연조인은 빠르게 갑옷을 챙겨 입었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성을 잠기게 할 수 있는 물이라면 뒤편에 있는 호수를 터뜨린 게 분명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다.’
연조인은 다시 한 번 낭패감을 곱씹었다. 평소엔 호수 주변의 초지에 많은 말들을 방목했다. 당연히 병사들을 파견해 말들을 감시하고 보살피게 했다.
그런데 위휘군의 공격을 받은 이후로 그 말들을 모두 성안으로 들여놓았다. 적들에게 노획되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게 실수였다. 설사 말들은 끌어 오더라도 감시병들은 남겨 뒀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 수공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터였다.
밖으로 달려 나가던 연조인은 흠칫하며 그 자리에 멈췄다. 감시병을 남겨 두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혹시 적에게 투항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었다.’
그랬다. 확실히 연조인은 병사들의 이탈을 저어했다. 이 전국 난세에서도 배호성은 비교적 전쟁을 덜 겪은 편이었다.
그러니 병사들도 백성들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한두 명의 이탈이 자칫 전체에 영향을 미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나까지 이래선 안 된다.’
병사들의 이탈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새 자신의 가슴속에서도 적에 대한 공포로 샘솟고 있음을 느낀 연조인은 마음을 다잡았다.
“백성들은?”
밖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며 연조인은 큰 목소리로 물었다.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행위였다.
“모두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낮은 지대에 있는 백성들은 벌써 집의 절반이 잠겼습니다.”
“물은 어느 정도냐?”
“네 자 정도 깊이입니다. 점점 더 차오르고 있습니다.”
“그 정도 물이라면 당장 무너질 집은 없으리라. 병사들을 모아라. 성 밖으로 치고 나가 물길을 막아야겠다.”
“하지만 밖엔 적의 매복이 있을 게 분명합니다. 섣불리 나갔다가는…….”
“닥쳐라! 그럼 싸워 보지도 않고 이대로 물귀신이 되잔 말이냐? 서둘러 병사들을 모아라. 물이 더 차오르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럼 병사들을 두 갈래로 나누심이 옳은 줄 아뢰오.”
“둘로?”
“물길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들이 쌓은 토성이 둑의 역할을 해서 물이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저것 역시 터뜨려야 할 줄 압니다.”
부장의 말에 연조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병법적으로 생각한다면 한 군데 틀린 곳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배호성에 있는 병력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이만 남짓이다. 그들 중 일부를 남겨 동요하는 백성들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보면, 성 밖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병력은 일만 오천을 넘기기 어려울 게다.
‘그 정도 병력으로 가능할까?’
분명 성 밖엔 적의 매복이 있을 것이다. 그걸 뚫고 물길을 막거나 토성을 무너뜨리려면, 하다못해 빗자루에라도 갑옷을 입혀 병사로 가장시켜야 할 판이다. 그만큼 병력이 모자란다는 얘기다.
‘어쩌면 거기에 한 가닥 활로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쪽이 병력을 나누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면 적들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두 곳으로 동시에 치고 나가면 그중 한 군데는 성공할지 모른다.
“알겠다. 그대가 병사 칠천을 이끌고 성을 나가 물길을 막으라. 난 나머지를 이끌고 정면으로 치고 나가 적의 토성을 허물겠다.”
“존명!”
이번의 명에 대해 부장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물길을 막는 게 토성을 허무는 것보다 훨씬 힘들 게 뻔하다. 성주에게 보다 쉬운 일을 맡기는 게 무장으로선 당연한 일이다.
그 직후부터 배호성은 술렁거렸다. 진즉부터 대기하고 있던 병력은 즉각 두 개로 갈라졌고 향전을 신호로 앞뒤에서 동시에 치고 나가기로 했다.
그사이 물은 또다시 차올라 근 다섯 자에 육박하고 있었다. 인마의 기동력이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그 점이 연조인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벌써 말 다리가 거의 잠겼고, 보병들의 허리까지 물이 찼다. 한 시진만 더 지나면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터였다.
“성문을 열고, 신호를 올려라!”
삐이이잇!
연조인의 명에 따라 향전이 올랐고 성문이 물살 속에서 육중하게 열렸다.
“진격! 적이 쌓은 토성을 무너뜨려라!”
우렁찬 명을 내리며 연조인은 가장 앞장서 성문을 빠져나갔다. 예상대로 말이 마음껏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적이 쌓은 토성을 허물어뜨려야 한다.
“와아!”
병사들도 커다란 함성을 토하며 연조인의 뒤를 따랐다. 자기 자신은 물론 서로에게 힘을 주려는 외침이었지만 그건 차라리 발악에 가까웠다. 허리까지 찬 물속의 움직임은 그처럼 사람들의 기를 꺾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병사들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자신들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만다는 위기감은 성주인 연조인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그들의 후미까지 모두 성문을 빠져나갔다 싶기 무섭게 돌연 허공을 꿰뚫는 화살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흡사 그칠 듯 가늘어진 빗줄기가 한여름의 세찬 소나기처럼 다시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성문을 막 빠져나온 칠천에 이르는 병사들 중 거의 삼분지 일이 들고 있던 병기 대신 허공을 움켜쥐며 거꾸러져 물속으로 잠겨 들었던 것이다.
“위축되지 마라! 진격이다, 진격!”
그래도 연조인은 연방 병사들을 독려했다. 여기서 멈추면 피해는 오히려 가중된다. 최선의 방법은 이대로 적의 토성까지 전력으로 달려들 수밖에 없다.
그건 비단 연조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기병이나 보병들도 한 덩어리가 되어 토성을 향한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 무모한 결정이었다. 이럴 땐 차라리 정면 돌격보다는 소수의 수영을 잘하는 병사를 뽑아 은밀히 위휘군의 보에 구멍을 뚫는 전법을 택했어야 했다. 이미 말들도 달리기보다는 헤엄친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무리한 공격은 더 많은 희생을 치르게 할 뿐이었다.
또 한차례 화살 소리가 잠결에 찾아든 악몽처럼 귀로 파고든다 싶더니 그게 그쳤을 때 연조인 주변에 살아 있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때는 벌써 연조인도 몇 대인가 화살을 맞은 뒤였다. 간신히 낙마는 면하고 있었지만 뒤쪽에서 밀려오는 물살에 의해 표류하는 배처럼 이리저리 쓸려 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성주, 소장의 손을 잡으시오.”
누군가 손을 내밀었지만 연조인은 그걸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단 두 차례에 걸친 적의 공격으로 칠천에 이르는 병력을 거의 전부 잃었으니 성주라는 말을 듣는 것도 창피했다.
“성주! 어서, 억!”
또 한 번 연조인을 부르던 장수의 말이 다급하게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연조인의 전신에도 갈고리 달린 밧줄이 휘감겼다. 장수 급 인물들은 되도록 사로잡으라는 좌괴의 명에 따라 위휘군의 병사들이 던진 것이었다.
그렇게 연조인이 포로가 됨으로써 배호성은 위휘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이다. 수공을 시작하고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한 결과였다.
이로써 위휘군은 윤주를 석권하기 위한 발판을 다진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