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동략西視東略
1
유화의 제지에 의해 일단 출병은 중지되었고, 의생들도 강력하게 정양을 권유한 바람에 편월은 한동안 내전에 머물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장수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편월은 고분고분했다. 하루나 길어야 이틀 정도면 내전에서 뛰쳐나올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벌써 나흘간 꼼짝도 않고 틀어박혀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초조해지는 건 오히려 장수들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변 정세에 대처하는 게 늦어지니까 말이다.
그 고민을 해결해 주려는 듯 윤주성의 강숙이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장수들은 기뻐했고, 즉각 내전으로 기별을 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때도 편월은 별다른 말 없이 내전에서 나왔다. 마치 자신의 의지는 하나도 갖지 못한 사람처럼 순순히 무장들의 요구에 따랐다.
어쨌든 모처럼 편월이 참석하자 무장들의 회의는 활기를 띠었다. 그사이에도 이런 모임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결정권자가 불참했으니 어떤 얘기가 나와도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사흘 후면 지두룡 장군은 단독으로 강국으로 치고 들어갈 기세라는 게 강 장군의 전갈입니다.”
윤주성에서 온 사자는 우선 간략하게 강숙의 전갈부터 보고했다.
“단독으로 치고 들어가다니?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가장 먼저 담개가 큰 소리로 사자를 질타했다. 정규군 출신인 그로선 강숙을 통해 들은 지두룡의 결심이 항명에 가깝게 여겨진 탓이었다.
“딱히 지 장군만 책할 일이 아닌 것 같소. 여태 대처 지시를 내리지 않은 우리의 불찰도 적지 않소이다. 내가 지 장군의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게요.”
같은 잡가군 출신이라고 송지가 지두룡을 두둔하고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장이란 모름지기 주군의 명령에 생사를 정하는 법이오!”
“언성만 높이실 일이 아니라 현재 강국의 사정을 생각해 보시오. 아마도 지금쯤 지 장군은 애간장이 바짝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오.”
“그럴수록 진득이 기다리는 게 병법을 아는 무장이 할 도리요. 지금 탄금성에 어느 정도 병력이 있소? 기껏해야 삼만일 게요. 그 병력을 가지고 강국으로 가면 모르긴 해도 바다 속에 빠진 좁쌀 한 알처럼 어느 구석에 있는지 표도 나지 않을 게요.”
“어찌 병력의 다과多寡로만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겠소. 지 장군은 어디까지나 무장으로서 주군의 체면을 세우고, 나아가 우리 위휘군의 기상을 드높이고자 하는 것임을 왜 모르시오!”
“송구하오나…….”
담개와 송지의 언쟁이 격해지고 길어지자 사자로 온 자가 끼어들었다.
“강숙 장군의 전언이 더 있는데, 아직 전하지 못했습니다. 사자의 임무를 마저 끝내게 해 주십시오.”
아직도 전할 말이 남았다는 데야 언쟁을 계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담개와 송지는 사자의 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탄금성의 지 장군이 행동을 일으키면 강 장군도 그에 동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시라는 전갈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니?”
이번에도 담개가 성급하게 사자의 말을 받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강 장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면 사태는 심각하오. 주군, 어떻게 처리하시겠소?”
담개의 이 말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편월만 쳐다보았다. 다들 강숙의 성격을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염려하지 말라니, 우린 마음 턱 놓고 있으면 되겠지.”
“예?”
편월의 대꾸에 모두들 얼빠진 표정이 되고 말았다. 도무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아! 어쩌면…….”
거예홍이 자기 이마를 ‘탁’ 소리가 나게 치면서 입을 열었다.
“만약 지 장군 혼자라면 어떨지 몰라도, 강숙 장군이 같이 간다면 여차할 때 철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아마 강숙 장군은 그걸 노리고 있는 것같이…….”
“말이 되는 소릴 하시오! 강 장군의 성질을 모르시오?”
이어진 담개의 질타에 거예홍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포란성 내성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 강숙이 어떻게 싸웠는지 그녀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 주군, 이제 분명한 명을 내리실 때요. 지 장군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단단히…….”
“아룁니다! 포란성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담개가 다시 한 번 편월을 다그칠 때, 밖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포란성에서?”
장수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이 시점에 포란성에서 사자가 왔다는 건, 서쪽 역시 뭔가 변화가 있었다는 걸 의미하기에 표정들이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주군?”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편월에게 모아졌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왔다는데 만나야지. 불러오시오.”
여전히 시큰둥하게 편월은 내뱉었다. 세상 모든 일에 단 한 점의 의욕도 없는 사람 같았다.
“아무튼 주군, 이번엔 무조건 지 장군을 단단히 눌러 둬야 하오. 지 장군이 저러고 있으니 곁에 있는 강 장군까지 들썩거리는 것 아니겠소. 만에 하나 그 두 장군이 일을 그르치면 우리 위휘군은 오갈 데 없는 꼴이 될 것이오.”
포란성의 사자가 도착하기 전까지 담개는 몇 차례에 걸쳐 편월에게 이 말을 되풀이했다.
그에 비해 포란성에서 왔다는 사자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곽가군과 그 뒤를 쫓고 있을 호윤천 부자에 대한 일임에 틀림없을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담개는 편월과 곽가군의 관계도 잘 알고 있다. 섣불리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라 마라 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이윽고 안내하러 갔던 맹아가 싱글거리는 얼굴로 들어섰고 그 뒤를 따라 포란성에서 온 사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
이처럼 놀란 소리를 발하며 편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포란성의 사자들 중 맨 뒤에 들어선 여상계를 본 반응이었다.
“여 장군!”
또다시 한마디 외치며 편월은 빠르게 걸어가 여상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담개를 비롯해서 뒤늦게 위휘군에 가담한 몇몇 장수들은 안색이 홱 변할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여상계에게 편월을 해칠 마음이 있다면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작 당황한 건 여상계였다. 마중 나왔던 맹아는 예전처럼 편하게 대했지만, 편월에겐 어떤 식으로 말을 하고 또 행동해야 될지 몰라서였다.
그런데 보자마자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처럼 손을 잡히고 말았으니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잘 왔어. 곽가군이 고생한다는 건 벌써 듣고 있었어. 이리 와, 이리.”
편월은 그저 여상계가 반가웠다. 아무 생각 없이 예전처럼 대하며 그의 손을 마구 잡아끌었다.
“주군!”
보다 못한 담개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어쨌든 여긴 공식적인 자리다. 편월과 여상계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런 식의 태도는 곤란했다.
그제야 편월도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여상계의 손을 놓은 뒤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사자는 용건을 말하시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송지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예. 포란성의 거 성주께서는 이런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자도 파격적인 편월의 태도에 얼떨떨해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사이를 여상계가 보충했다.
“그러니까 곽가군을 우리 위휘군이 지배하고 있는 영내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거로군. 알겠소. 잠시 기다리시면 주군과 상의해서 답변을 드리겠소.”
사자의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송지가 재빨리 나섰다. 편월이 엉뚱한 약속을 할까 저어해서였다.
과연 편월은 송지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 정도쯤은 해 줘도 좋지 않느냐는 뜻이 역력했다.
하지만 송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로 안 된다는 엄격한 표현이었다.
이번엔 편월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좀 전에 감정이 앞서 실수까지 했고 군사적인 문제인지라 혼자의 생각으로 처리해선 안 된다는 자각도 든 것이다.
부탁하러 온 여상계야 달리 할 말도 없었다. 가라면 가고 기다리라면 기다려야 될 뿐.
윤주성에서 온 사자까지 물러가고 난 뒤, 담개는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편월에게 단단히 한마디 할 작정이었다.
그 눈치를 모를 송지가 아니었다. 재빨리 담개를 제지했다. 지금부터는 회의가 열릴 참이다. 그 전에 장수들 앞에서 편월을 질타해서 좋을 건 없었다.
“두 군데서 온 사자를 모두 접견했소이다. 둘 다 잠시도 미뤄 둘 수 없는 사안들이었소. 자, 이제 주군의 생각을 들어 봅시다.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오?”
“좌괴를 부르시오.”
송지의 말에 편월은 엉뚱하게 좌괴를 찾았다. 숱한 희생을 치르고 얻은 사람이었으니 이 기회에 그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뭇 장수들은 별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반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편월이 그처럼 집착하는 자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이 강하게 작용된 탓이었다.
다시 편월의 눈앞에 나타난 좌괴는 결박된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디 갇혀 있었는지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편월은 좌괴에게 의자를 주고 사자의 얘기를 모두 들려주라고 했다.
설명은 송지가 했다. 포란성과 윤주성 및 탄금성의 정세뿐만이 아니라, 내친김에 허주에서 원군을 청하는 사자가 왔다는 얘기까지 들려줬다.
“애석하지만, 강국과 허주는 이번에 반드시 멸망할 것이오.”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될 건지를 말해. 난 이번에 곽가군과 우리 위휘군을 통합했으면 좋겠는데…….”
의외로 냉정하고 불손한 어투로 편월이 좌괴의 말을 받았다.
좌괴는 잠깐 편월을 쏘아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고 말았다. 공식 석상에선 처음이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초반에 기를 꺾자는 의도가 보여 일견 가당찮게도 여겨졌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웠다. 어차피 계천자의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편월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벽곡성주까지 묶었으니 이제 와서 새삼 조소나 머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국과 허주에서는 되도록 많은 장병과 유민들을 거둬들이시오. 그리고 이천강에 걸린 두 개의 다리를 불태워 버리면, 당분간 율천국은 그 이상 서쪽으로 나오지 못할 게요.”
“그렇다면 곽가군의 요청은?”
“그건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일이오.”
좌괴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정하게 말했다.
“이유는? 나는 한때 곽가군에 배속된 잡가군의 일원으로 싸웠었고 그 사람들과 친분도 돈독한데…….”
“바로 그게 이유요!”
계속되는 편월의 말을 좌괴는 언성을 약간 높여 잘라 버렸다.
“나도 십여 년 전, 막주의 목철린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들어서 잘 알고 있소. 그때 귀하와 광운 장군이 곽가군에 배속되어 있었다는 것도. 그러니 그들에게 길을 내준다거나 위휘군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
편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좌괴의 이야기는 구체적이지 못했다.
“모르시겠소? 영내를 통과시키지 말라는 건 어떤 바보라도 자기 세력권 내에 다른 군벌은 들이지 않기 때문이요. 졸자들의 사소한 말다툼도 곧잘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니까. 귀하와 곽가군의 사이가 좋으면 좋을수록 이건 피해야만 될 일이오.”
좌괴가 부연 설명을 하자 비로소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좀 전에 귀하는 위휘군과 곽가군을 통합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얘기요!”
좀 더 통렬한 어조로 좌괴는 편월의 바람을 일축시켜 버렸다.
“만약 두 군세가 통합된다면 그대로 고스란히 위휘군의 기치를 내걸 수 있을 것 같소? 천만에! 곽가군의 장군들은 한때 귀하의 상관이었소. 그들이 고분고분하게 귀하에게 머리를 숙일 것 같소? 그렇다고 귀하가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생각이오?”
질문은 편월을 향한 것이었지만 좌괴의 시선은 실내에 있는 무장들을 천천히 훑었다.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로선 그저 곽가군과 통합되면 세력이 커지는 것만 생각했지 그다음의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좌괴의 시선이 마지막에 멈춘 곳은 편월이었다. 만약 그가 곽준방 밑으로 들어가겠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야?”
“곽가군을 선봉으로 세워 서쪽으로 치고 나가는 거요.”
“뭐라고?”
듣고 있던 장수들 입에서 하나같이 놀람에 찬 외침이 발해졌다. 동쪽으로 달려온 곽가군의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치고 나가겠다니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포란성 거 성주의 조치는 너무도 훌륭했소. 군량과 물자를 대 주면서 시일을 끌다 보면, 곽가군은 자연스레 뒤를 따라온 호윤천군과 싸우게 될 거요. 그때 우리들도 힘을 합하는 거요. 단, 전력을 다해서는 안 되오. 우리의 주력을 투입할 곳은 따로 있으니까.”
“따로 있다니?”
“이 윤주에 성이 위휘군이 차지한 곳만 있다고는 생각지 마시오. 지금은 동서로만 길게 뻗어 있지만, 남북에도 많은 성이 있소. 곽가군이 호윤천군을 막아 주고 있는 사이에 적어도 윤주에 산재한 성만은 모두 손에 넣어야 하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건 수군이오.”
모두들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좌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는’ 해야 될 일이라고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던 일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자 금방이라도 현실이 될 것만 같이 느껴졌다.
“수군? 윤주에 수군을 양성할 곳이 있나?”
“듣자니 막주의 광운 장군께서 상당한 수군을 양성하신 것 같소이다. 광운 장군이야 귀하의 아버지와 진배없는 분. 최악의 경우엔 빌리기라도 해야 하오.”
말을 하면서 좌괴는 눈으로 상가웅을 찾았다. 위휘군에 포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가 간인이나 정보를 총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진즉부터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소.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재 막주엔 최소 삼만에서 최대 오만의 수군이 양성되고 있소. 그사이 더 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좌괴의 눈길을 받은 상가웅이 간략하게 얘기했다.
“그건 알겠는데 수군을 빌려서 어쩌려고?”
“지금 가겸후는 황제 폐하를 공격한 강국과 상초국을 친다는 명분을 내걸고 있소. 곽가군 역시 발 빠르게 그 명분을 세워 호윤천군의 포위를 빠져나왔고. 이대로 가면 강국과 허주는 확실히 망하겠지만, 바다 건너 섬나라에 있는 상초국군은 배를 이용해 모두 빠져나갈 것이오. 그때 우리가 놈들을 모두 수장시켜야 하오.”
“우리까지 나설 필요가 있을까? 율천국의 수군이 너무 강해서 상초국 놈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하던데?”
“단순히 전쟁의 승패만 놓고 따진다면 율천국과 상초국을 붙여 두고 어부지리를 노리는 게 마땅할 게요. 하지만 이건 명분의 싸움이오. 뒷날 강국이 무너지고, 상초국군이 모두 물러간 뒤에 우린 가겸후에게 할 말이 없어지는 거란 말이오. 우린 어떻게든 상초국을 치는 싸움에 가담해야 하오. 그래야 뒷날 천하에 위휘군의 이름이 우뚝 설 것이오.”
시간이 지날수록 좌괴의 어투는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듯 도무지 막히는 구석이 없는 얘기들이었다.
듣고 있는 장수들도 후끈 달아오른 건 마찬가지였다.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투에선 날고뛰는 달인들일지 몰라도 좌괴처럼 앞날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새로 눈을 뜬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일 터였다.
“좋아. 그렇다면 곽가군은 우선 그렇게 눌러두면 되겠고 탄금성엔 당장 명을 내려야 하나? 윤주성으로 철수하고, 괘공교와 제운교를 끊어 버리라고?”
“아니요.”
편월의 말에 좌괴는 간단하게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그러고는 목이 타는지 낮은 헛기침을 토했다.
눈치 빠른 장수 중 한 명이 재빨리 좌괴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지금 당장은 철수할 필요가 없소. 아니, 내가 보기엔 탄금성보다 더 급한 건 허주요. 그러니 내일이라도 허주의 대인성에 있는 도연각 장군에게 사자를 파견하시오. 그들이 청한 원군에 대한 건 조금도 언급하지 말고 언제든 피난처를 제공할 테니 사세가 불리하면 윤주성으로 오라고 말이오.”
“조환이 아니라 도연각에게?”
“이번 영산 전투가 끝나면 조환은 살아남지 못할 거요. 거기에 대비해서 조환은 미리 큰아들 조강을 대인성에 있는 도연각 장군에게 보냈고…….”
말끝에 좌괴의 시선은 다시 상가웅을 찾았고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여 그 말에 긍정을 표했다.
“그러니 우린 최대한 빨리 대인성으로 사자를 보내 사세가 위급해지면 허주의 대공자인 조강을 보호해 주겠다고 하는 거요. 조강이 오게 되면 도연각 장군도 자연적으로 따라올 게요.”
“그건 강국도 마찬가지겠군.”
“그렇소. 다만 강국은 허주가 망한 뒤의 얘기요.”
“여기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는 분은 말씀하시오.”
편월은 좌중을 돌아보며 무겁게 말했다. 그 어투에서 벌써 모종의 결심을 굳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두들 서로의 얼굴만 휘둘러볼 뿐 말이 없었다. 지금껏 당장 내일의 전투만을 걱정하고 막연히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만 가졌었다.
거기에 좌괴는 미래의 위휘군이 어떤 형태를 갖춰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천강만 단단히 누르고 있으면 가겸후는 당분간 허주에서 서쪽으로 나오기 힘들 거요. 그사이 우리 위휘군은 부지런히 서쪽을 공략해야만 하오. 잊지 마시오! 대륙의 서쪽 구석에 있는 파양주의 마용승이 천하 사대 패주 중 한 명이 된 것은 그 땅에 있는 철과 금이 기반 되었다는 사실을! 그러니 우린 반드시 그 땅을 차지해야만 하오.”
자기의 말속에 벌써 두세 차례 ‘우리’라고 한 걸 좌괴는 물론 무장들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얘기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취해 있었다는 의미였다.
“좋아.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일단 편월의 재가는 떨어졌고, 그다음 할 일은 여러 장수들과 좌괴가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 회의의 주도권이 좌괴에게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다음 날, 합진성에서 나온 일단의 사람들이 두 갈래로 갈라져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그중 동쪽으로 향한 무리는 이천강에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졌다.
2
오늘도 군사 회의가 열렸지만 조환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어제 가겸후는 십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영산에 도착했고, 그 전에 꾸준한 공략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협문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젠 어떤 계책을 세워도 먹혀들 여지가 없었다.
딱 하나 조환의 뜻대로 된 게 있다면 바로 장남 조강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편씨 부인은 후방의 남은 병력을 깡그리 끌어 모았지만, 그걸 둘로 나눠 하나는 영산으로, 다른 하나는 후방인 대인성으로 보냈다. 아들을 염려한 어미의 처사였다.
그 바람에 영산에 진주한 허주군은 팔만을 상회하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편씨 부인은 여전히 허주성에 머물길 고집했다. 조환의 마음 같아서는 그녀도 가족들을 이끌고 대인성으로 갔으면 싶었는데 말이다.
또한 도연각이 들어가 있는 대인성에 위휘군의 사자가 왔다는 전갈도 있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조환은 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걸 직감했다. 위휘군이 자신들을 도와줄 작정이라면 사자를 파견할 게 아니라 곧바로 병력을 파견했을 테니까.
그러니 오늘 회의는 전투 하나하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다. 율천국에게 굴복할 것이냐, 아니면 최후까지 저항하다 다 함께 망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자리라고 하는 게 보다 정확했다.
물론 조환은 이미 결정했다. 이제 와서 가겸후에게 머리를 숙일 것 같았으면 지금까지 그 고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죽을 때까지 싸울 결심이었다.
그렇다고 허주의 장졸 모두에게 자신의 결심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 주면 고맙지만 설사 거부한다고 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조환의 결심이야 어떻든 회의는 열띠게 진행되고 있다. 앞날이 빤히 보이기는 서로 마찬가지이지만, 무장 된 자로서 차마 항복하거나 후퇴하자고 할 수 없어 분위기는 주전론 일색이었다.
“운출령과 제곡관에 각기 사만의 병력을 주둔시키면, 아무리 가겸후라고 해도 쉽사리 허주로 진격하진 못할 게요. 주공, 이제 명을 내려 주시길.”
좌중의 분위기가 주전론으로 굳어지자 형보다 강경한 당윤홍이 조환에게 최종 결정을 하라고 말했다.
“그럼 모두가 싸울 결심인가?”
“이를 말씀이오!”
“소장들은 죽기를 각오로 주공을 따르기로 했소이다.”
장수들은 한결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진심은 아니란 걸 조환은 알고 있었다. 장수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당장은 분위기에 휩쓸려 용기백배하고 있지만, 각자의 부대로 돌아간 뒤엔 현실적인 계산을 하게 될 터였다. 그때 그들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대로 움직이는 게 이들의 진심이 될 게다.
그래도 좋다고 조환은 생각했다. 이들 모두가 지금의 생각을 돌려 몸을 뺀다고 해도 하등 서운할 것도 없었다.
다시 한 번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옛날 영산에 쳐들어왔던 가겸후의 본진에 단신으로 달려들었듯, 이번에도 혼자서 싸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좋소. 그렇다면 당 장군은 병력 사만을 이끌고 제곡관으로 가시오. 이곳 운출령은 내가 직접 지키겠소.”
강한 조환의 말에 장수들은 잠시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후방으로 피신시키고 싶었지만 듣지 않을 게 분명했다.
“자, 어서 움직이시오. 그리고 당 장군은 잠시 남으시오.”
이어진 조환의 명에 다른 장수들은 모두 나가고 당세홍만 남았다.
“주공, 달리 분부하실 일이라도?”
“당 장군은 이 싸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야 가겸후가 오기만 하면 우리의 용맹한 병사들이 놈의 목을…….”
“정말 그리 생각하시오?”
다급하게 이어진 조환의 질문에 당세홍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병력이 팔만으로 늘었다지만, 제곡관과 운출령에서 가겸후의 십이만 대군을 막기는 역부족이다. 혹 서협문을 미리 장악하고 있었다면 몰라도…….
“당 장군에게 부탁이 있소. 병사 오천을 이끌고 적정을 염탐하러 가는 척하며 곧바로 대인성으로 가 주시오. 내 가족은 물론이고 백성들도 피할 사람은 모두 대인성으로 피하라고 하시오.”
“주공!”
뜻밖의 말을 들은 당세홍은 얼굴색까지 변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런 명은 듣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당세홍을 잘 아는 조환이었다. 싸움터에 내세우면 직책만큼 해내지 못하지만 누굴 보호하라면 그는 능력 이상을 발휘한다. 일례로 정허군이 대인성을 쳤을 때 처남인 편사중도 훌륭히 보호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당 장군만이 아니오. 이 싸움이 불리하다고 느끼고 전장을 이탈하거나 투항하는 그 누구에게도 난 책임을 묻지 않을 작정이오. 그러니 이 부탁은 꼭 들어주시오.”
“하오나 소장은 허주군의 대장군이올시다. 대장군이 전장을 이탈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으니, 이 일은 소장의 동생에게 맡겨 주소서.”
“작은 당 장군으로선 미덥지가 못하오.”
이건 조환의 진심이었다. 형제 중 딱히 한 명을 지칭한 게 아니다. 싸움에선 당세홍이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누군가의 안전을 맡기기에 당윤홍은 너무 과격하다.
“하오면 정녕 소장이 가야 하오리까?”
동생을 믿지 못해 자신을 보낸다는 데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수긍하는 눈빛으로 당세홍은 질문을 던졌다.
“당 장군 아니면 믿고 맡길 사람이 없소. 우리 가족도 가족이지만, 그보다는 최대한 많은 백성들이 전란을 피하도록 조치해 주시오. 내 뜻을 대인성의 도 장군에게 잘 전하고…….”
“명은 받들겠사오나, 그 시기는 소장이 결정하겠나이다.”
“알겠소.”
고개를 끄덕여 조환은 선선히 당세홍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건 정말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전장 이탈이나 투항도 용서하겠다고 했지만,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대장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말도 되지 않는다. 아마 당세홍은 싸움이 시작된 직후에 움직일 것이다.
“그럼 이로써 이승에서의 작별이 될 것 같으니 소장에게 술 한 잔 내려 주시옵소서.”
‘조금만 더 용맹했으면 나무랄 데 없는 장수인데…….’
술을 달라는 당세홍의 말에 대한 조환의 생각이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당세홍도 용맹하긴 하다. 비록 싸움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그 재능이 발휘되어서 탈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별주를 달라는데 마다할 수는 없다. 조환은 소리를 질러 간단한 주안상을 봐 오라고 했다.
당세홍은 딱 한 잔의 술만 마셨다. 그러고는 길게 정중한 군례를 갖춘 후 진막을 빠져나갔다.
‘내일이면 가겸후는 총공격을 감행하리라.’
남은 술을 혼자 마시면서 조환은 생각에 잠겼다. 여기까지 이르도록 곱씹고 곱씹어서 이제 바닥이 날 때도 되었다 싶었건만 최후의 결전을 앞두자 가슴은 또 다른 감상으로 젖어 들었다.
‘부인은 결코 피하지 않을 것이다.’
당세홍이 아니라 그 할아비를 보내도 편씨 부인은 허주성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리라. 오히려 갑옷을 차려입고 앞장서 싸워, 쳐들어오는 율천국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줄 터였다.
그래도 백성들을 피난시키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않을 게다. 모두들 떠나보낸 뒤에, 텅 빈 윤주성의 정문에 홀로 장창을 짚고 버티고 서 있을 게 분명하다. 그 모습을 상상하며 조환은 웃었다.
‘이 천하 어디에 그런 마누라가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와의 혼인은 무장으로서 불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드센 성격과 처가의 위광에 눌려 큰 소리 한 번 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살을 맞대고 살아온 한 남자로서 평가하면 그녀는 최고의 아내였다. 살뜰히 자식들을 키웠고 밖으로 나서면 자신의 체면을 지켜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번 안아 주고 올 걸 그랬나?’
출전할 때, 시비들을 모두 물리치고 내전의 입구까지 따라 나와 배웅을 해 주던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조환은 또다시 웃었다.
그러다 조환은 문득 갑옷 속으로 따스한 훈기가 감도는 걸 느꼈다. 이번 출전을 앞두고 아내가 손수 지은 전포를 입고 있는 탓이리라.
조환은 남은 술잔을 한꺼번에 비워 버렸다. 마지막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다면 자신의 한평생은 행복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행복할 때 죽을 준비를 하러 가 볼까.’
벌떡 몸을 일으킨 조환은 진막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말을 준비하라! 적정을 살피러 가겠다! 율천국의 졸개들이 얼마나 몰려왔는지 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
조환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호기롭게 울려 퍼졌다.
* * *
조환의 예상을 깨고, 가겸후가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린 건 닷새 뒤였다.
이건 다분히 전략적인 행위였다. 허주군이 흔들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그들 중 달아날 자는 달아나고, 투항할 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가겸후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 닷새 사이에 허주군은 많은 이탈자가 생겨 애당초 팔만이던 병력이 이젠 오만도 바라기 어렵게 되었다.
그 와중에 가겸후를 당혹케 한 건, 허주군 중에서 투항자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승산 없는 싸움에 목숨은 버리기 싫어도 결코 적에겐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는 기개를 엿본 것 같아 한때 등골이 으스스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병사들의 마음을 다잡은 조환의 능력에 감탄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기엔 자부심이 너무 강한 가겸후였다.
“명령을 내려 주소서, 대왕 전하.”
이번 율천국 십이만 대군의 대장군인 엄확이 가겸후에게 정중한 군례를 갖추며 말했다.
“전군 공격!”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겸후는 명을 내렸다. 닷새가 지나도록 이탈하지 않는 허주군은 목숨 걸고 싸우겠다고 결심한 자들일 게다. 더 이상의 기다림도 망설임도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다.
둥둥둥둥, 뚜우우, 뚜우!
북소리와 소라고둥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율천국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가겸후를 둘러싼 본대 일만을 뺀 나머지 십일만이 일제히 함성을 울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애당초 작전 따위는 세우지 않았다. 이 영산 전투는 이번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각 군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과시용이라고 할 수 있다. 철저하게 짓밟아서 자신에게 승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줘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게 오늘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다. 오만 대 십이만. 얼핏 무모하다 싶을지 몰라도 이미 허주군은 사기가 떨어진 상태다. 차근차근 짓밟아 공포심을 최고조로 이끌어 내야만 한다.
“엄 장군, 언제쯤 오늘 전투가 끝날 것 같소?”
“지금이 묘시니, 늦어도 신시까지는 결판이 날 것이옵니다.”
“나와 내기를 해 보겠소? 이 싸움은 오시 정각이면 끝날 거요.”
“어찌 대왕 전하와 내기를 하겠사옵니까. 싸움이 일찍 끝나면 쌍방의 피해를 그만큼 줄일 수 있어 좋겠지만, 그래도 적은 오만에 이르는 병력이옵니다. 오시까지는 힘들 것이옵니다.”
“그럴까?”
말끝에 가겸후는 살짝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지금 가겸후는 엄확의 말에 의해 기분이 약간 상한 상태였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기 위해 인해전술이라는, 고금에도 다시없을 전법을 택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대장군이라는 작자의 말은 나약하기 짝이 없다. 저러니 기껏 점령하고 있던 운출령과 제곡관을 잃고도 저렇듯 뻔뻔하게 낯을 들고 있는 것일 터였다.
“운출령 쪽의 아군이 밀린다. 좀 더 힘을 내라고 전하라!”
돌연 엄확이 전령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의 말대로 운출령 공격에 나선 율천국군의 선봉이 패퇴하여 밀려 나오는 게 보였다.
“저 기치는?”
“예. 조환이 운출령에 있나 봅니다. 저 기치는 조환의 것이 분명하옵니다.”
비록 거리는 멀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조환의 기치는 크고 화려했다.
“흐음.”
침음성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가겸후는 나직이 내뱉었다. 적어도 조환은 이 천하를 지탱했던 네 개의 군벌 중 한 군데의 주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환은 지금 최일선에 나와 싸우고 있다.
‘예전에도 저렇게 내 본대에 단신으로 뛰어들었었지.’
오늘 일부러 본대에 일만이나 되는 대군을 남긴 것도 예전의 그 일이 무의식중에 남아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조환은 확실하게 죽는다. 올해 안에 가겸후는 제위에 오를 작정이고 허주는 그 앞에 던져지는 제물이자 발판이 될 터였다.
‘사흘이면 허주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
조환이 강력한 군벌이긴 하지만 허주 자체가 그만큼 큰 땅덩어리는 아니다. 이 천하를 지탱하는 숱한 주州 중에서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사흘이면 그 전체를 초토로 만들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다음은 강국이다.’
가겸후의 생각은 먼 앞날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허주를 초토화시키면 위휘군은 틀림없이 이천강의 괘공교를 불태울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목적은 강국을 멸망시키기 직전에 황제의 서거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증두신의 목은 황제의 영전에 놓여 그의 넋을 위로하고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걸 축하하게 되리라.
‘위휘군과 파양주를 치는 건 내가 제위에 오른 다음이다.’
사실 가겸후에게 있어 가장 껄끄러운 존재는 편월이다. 그가 황제의 사촌 동생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살려 둘 수 없다.
그래서 별로 필요치도 않은 호윤천 따위에게도 손을 잡자는 사자를 보냈다. 허주와 강국을 멸망시키고 제위에 오르면 당분간 위휘군에 손댈 여유는 없다. 호윤천은 그사이 편월을 견제하는 역할만 해 주면 충분하다.
‘올해 안에 제위에 오르고, 나라의 병사를 오십만으로 늘린다. 그사이 융주도 완전히 토벌하고…….’
“앗, 저, 저런!”
곁에 있던 엄확의 다급한 일갈이 가겸후의 생각을 깨웠다.
가겸후는 재빨리 전장으로 시선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엄확이 왜 소리를 질렀는지 알게 되었다.
‘조환…….’
확실히 조환이었다. 터무니없이 크고 화려한 기치를 앞세우고, 약 일만에 달하는 허주군을 이끌고 이쪽을 향해 돌격해 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허를 찔린 율천국군은 마치 베가 갈라지는 것처럼 그 앞에 길을 열어 줬다.
순간적으로 가겸후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고, 그때도 조환을 막지 못했었다.
반사적으로 일어서려던 가겸후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앉아 버텼다. 조환이 이끄는 병력은 기껏해야 일만이다. 여기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전멸당할 게 분명하다.
그 뒤에는 문제 될 게 없다. 설사 예전처럼 조환이 혼자 본대에 닿는다고 해도, 그걸로 끝인 것이다.
‘오너라, 조환!’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봐 주겠다고 생각하며 가겸후는 조환의 기치가 움직이는 걸 주시했다.
“적장이 움직였다! 그 목을 이 몸이 받아 오리라!”
가겸후의 기다림을 깬 건 엄확이었다. 조환이 확실하게 전장에 나타난 걸 확인하자 그대로 훌쩍 말에 올라 달렸다. 그의 편장과 아장이 우르르 뒤를 따랐음은 물론이었다.
가겸후는 말리지 않았다. 조환과 엄확이 붙으면 아무래도 엄확이 밀릴 게 분명하다. 그때까지 조환이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서의 얘기지만 말이다.
‘그대의 저승길에 주는 내 선물이라 생각하게.’
만약 엄확이 조환에게 죽는다고 해도 가겸후로선 하등 아까울 게 없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 싸워 준 적장에게 주는 기념품으론 그만한 것도 없을 터였다.
북과 소라고둥 그리고 기수들이 휘두르는 깃발의 펄럭임이 내는 소리가 돌연 커다랗게 가겸후의 귀를 진동시켰다. 운출령에서 내려온 조환의 허주군이, 율천국군이 펼친 인해전술의 한복판까지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사이 허주군도 절반 이상 줄었고, 진격하는 속도도 현격하게 떨어졌다. 두텁게 펼쳐 둔 인해전술이 여실히 효과를 보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조환과 허주군은 멈추지 않았다. 비록 느렸지만 꾸준히 율천국군을 뚫고 진격해 왔다.
그걸 보면서 가겸후는 묘한 쾌감까지 느꼈다. 바로 저게 조환의 모습이라며, 저래야만 죽이는 쪽도 맛(?)이 날 것 같았다.
다시 한차례 요란한 북소리가 울린다 싶더니 허주군을 둘러싼 율천국의 포위망이 더욱 두터워지고 좁아졌다. 바야흐로 최후의 일격이었다.
그 근처에서 뽀얀 먼지가 뭉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속으로 달려드는 엄확의 모습이 보였다.
가겸후는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능력은 부족했지만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한 장수의 마지막을 똑똑히 기억해 두려는 의도에서였다.
먼지로 인해 사람들의 움직임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기치들이 격렬하게 서로 얽혀 드는 걸 보며 미루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어서, 조환! 어서 나와!’
가겸후는 속으로 조환을 응원했다. 엄확 따위로는 결코 그를 막지 못한다. 그는 어떻게든 저 먼지구름 속을 빠져나와 자신에게 대들 거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걸 가겸후는 바라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환이 죽어서는 안 된다. 저길 뚫고 나와 자신의 눈앞에서 최후를 마쳐야만 한다.
“와아앗!”
마치 먼 천둥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먼지 속에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일기가 섬전처럼 빠르게 튀어나와 곧장 가겸후를 향해 달려왔다.
“과연, 조환!”
가겸후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수는 벌써 전사했는지, 자신을 상징하는 기치를 직접 든 조환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를 보호하라!”
본대의 근위대원 중 누군가 소릴 질렀고 그 즉시 사람의 장벽이 가겸후 주변에 만들어졌다.
“물러서라!”
가겸후는 엄청나게 큰 고함을 질러 자신을 보호하려는 근위대원들을 물리쳤다. 그래야 조환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니까 말이다.
근위대원들은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가겸후의 시야는 확보해 줬지만, 그대로 조환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여전히 조환은 멈추지 않았다. 그 큰 기치를 세차게 나부끼며, 그보다 더 격렬한 기세로 자신을 덮쳐 오는 가겸후의 근위대원들에게 부딪쳐 갔다.
‘끝이다.’
가겸후는 확신했다. 아무리 조환이 성정이 용맹하고 무예가 출중해도, 한 손에 기치를 쥐고 싸우는 것엔 한계가 있다. 그도 더 이상은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가겸후의 예상은 틀렸다. 조환은 근위대의 장벽마저도 뚫고 나왔다.
하지만 그건 가겸후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모습이기도 했고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다. 조환은 이미 목이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도 조환은 달렸다. 여전히 한 손에 기치를, 다른 손엔 장군도를 든 채 가겸후를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율천국군은 선뜻 그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목이 잘린 상태에서도 달리는 한 인간의 의지가 그들의 손발을 묶어 버린 탓이었다.
“막아라! 말을 잡아!”
뒤늦게 누군가 고함을 질렀고, 순식간에 조환의 모습은 가겸후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정중하게 장사를 지내 주도록.”
눈을 감으며 가겸후는 조용히 내뱉었다.
그리고 다음 날, 율천국군은 영산을 넘어 허주로 쏟아져 들어갔다.
3
가겸후가 허주를 치느라 바쁠 때, 편월도 정신없이 움직였다. 좌괴의 건의에 따라 곽가군을 지원하면서 윤주에 산재한 다른 성들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그 첫 번째로 지목된 곳이 유산성이었다. 그들은 지난번 벽곡성 공략 때 병력을 내어 위휘군을 방해했던 전력이 있던 터라 철저히 괴멸시키자는 쪽으로 얘기가 모아졌다.
거기에 반대 의견을 개진한 사람은 좌괴였다.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소. 윤주의 성들을 하나하나 무력으로 깨뜨릴 여유가 없다는 얘기요. 그러니 유산성은 일단 포위만 해 두시오. 그러면 그들은 오래지 않아 항복할 게요. 그때 주군께서 아량을 베푸신다면 다른 성들도 감읍해서 앞 다투어 투항해 올 것이오.”
좌괴는 분명 말 중에 편월을 ‘주군’으로 칭했다. 비록 긴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만 그 호칭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위휘군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래서 놈들이 승복하겠소? 앞에서 항복해 놓고, 뒤에 가서 다시 반기를 든 예는 얼마든지 있소이다.”
송지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무장으로서 적의 항복을 기다린다는 소극적인 전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송지의 말투도 이상했다. 좌괴에게 극존칭은 아니지만 분명히 존대를 하고 있다. 은연중에 그를 위휘군의 군사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윤주의 다른 성들이 반기를 드는 건 뒤에 파양주가 있기 때문이오. 그러니 곽가군으로 하여금 호윤천군을 단단히 틀어막을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거고. 반기를 들어도 파양주로부터 아무 지원이 없다는 걸 알면 그들도 우리에게 승복할 수밖에 없을 게요.”
“딴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현재 윤주 내에 있는 성채들 중 단독으로 위휘군에 저항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로선 유일한 희망이랄 수 있는 호윤천만 단단히 눌러두면 감히 대적하겠다는 생각조차 품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주군의 아량만 보여서는 그들의 근본까지 승복시킬 수는 없소이다. 그러니 다른 곳은 잠자코 투항을 받아 주되, 이 두 곳만은 반드시 쳐서 깨뜨려야 하오.”
말과 함께 좌괴는 탁자에 펼쳐진 지도 위의 두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배호성背湖城과 광평성廣坪城?”
“그렇소. 이 두 곳만은 반드시 무력으로 진압해야만 하오.”
“이유는?”
“우선 이 배호성은 이름 그대로 성의 뒤쪽에 거대한 호수와 초지草地를 가지고 있소. 예로부터 말을 먹이기 좋은 곳이었고 그래서 거기 백성들은 부유하게 살고 있소. 의식이 넉넉한 사람들은 남에게 고개를 잘 숙이지 않는 법이오. 넓고 비옥한 들을 가지고 있는 광평성도 같은 이유요.”
“그러니까 말을 키울 수 있는 장소와 식량을 조달할 근거지를 마련하자는 얘기군.”
“만약 그들이 투항한다면?”
지금껏 묵묵히 듣고만 있던 편월이 끼어들었다.
“상 장군을 시켜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결코 쉽사리 투항하지 않을 것이오. 만에 하나 투항을 한다면, 그 성주는 물론 백성들도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야 하오. 병사들을 우리 위휘군에 배속시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까지?”
“이건 단순히 성 한두 개를 차지하는 일이 아니오. 윤주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일이오.”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편월에게 좌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일은 흔히 있는 거요. 주군, 그보다도 배호성과 광평성을 치려면 굳이 유산성을 포위할 일도 없을 듯하오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유산성의 항복을 받는 건 주군의 아량을 널리 보이기 위함이오.”
“알았어. 거기에 맞춰 군을 편성해 봐.”
편월만은 여전히 좌괴에게 함부로 대했다.
좌괴도 그 점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편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지도 위에 장수들의 명단을 올려놓았다.
“이 광평성 공격엔 담개 장군을 대장군으로 해서 송지 장군과 서진청 장군이 맡아 주시오. 병력은 사만.”
“승복이오!”
좌괴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명된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이 배호성은 두건득 장군을 대장군으로 해서 오강 장군과 거예홍 장군이 공격하시오. 병력은 역시 사만이오.”
“승복!”
“주군께서는 근위대와는 별개로 일만의 군사를 이끌고 유산성을 포위해 주셔야겠소.”
“좋아.”
편월은 흔쾌히 대답했다. 비록 직접 싸움은 하지 않고 포위만 하는 거라 성에 차진 않았지만 자기 혼자의 기분으로 좌괴가 낸 첫 작전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좌괴가 나눈 병력을 합하면 대충 잡아 봐도 구만이다. 그만한 숫자의 병력이 합진성에 있을까?
답은 ‘없다’이다. 간신히 십만을 바라볼 때 강숙의 지휘 하에 놓인 윤주성에 삼만을 넣었고, 다시 벽곡성 전투에서 일만 오천의 병력을 고스란히 잃었으니 말이다. 여기엔 애당초 탄금성에 있는 병력은 계산하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물론 그사이 윤주성과 탄금성에선 병력이 훨씬 늘었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그들 중에선 단 한 명도 빼올 수 없다. 그만큼 동쪽의 정세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좌괴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병력을 분담했다. 그에게 어떤 대책이 있는 게 분명하고 보면 그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편월이었다.
거기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사람은 담개였다.
“좌 선생의 뜻은 잘 알았소. 하지만 우리에겐 그만한 병력이 없소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총동원한다고 해도 오만 오천 남짓이오. 좌 선생의 구상에는 어림도 없는 숫자지.”
“윤주성의 병력 중 삼만을 빼오면 될 거요.”
“윤주성의 병력을?”
좌괴의 대답은 장수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은 전 대륙이 가겸후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곧 허주가 멸망할 테고 그 후에 율천국군과 정면으로 맞서야 되는 건 바로 윤주성이다.
한데 바로 그 윤주성에서 병력을 빼오라고 했다. 허주가 망한다고 당장 가겸후가 이천강을 넘어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겠지만, 방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인다 싶으면 언제라도 치고 나올 테니 말이다.
그 점을 의식했는지 좌괴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겸후는 허주와 강국을 멸망시키고 나면 당분간 움직이지 않을 거요.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배후를 들쑤실 공산이 크오.”
“배후라니?”
“호윤천!”
딱 잘라 말한 후 좌괴는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가겸후로선 강국과 허주를 멸망시킨 후라도 상초국이라는 만만찮은 적이 있소. 듣자니 상초국의 왕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온다고도 하고… 게다가 융주는 여전히 가겸후의 이마에 얹힌 혹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소이다.”
“하지만 융주엔 오만 대군을 주둔시켜 그들을 거의 제압했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상초국의 수군도 패전을 거듭하고 있으니, 가겸후가 과연 신경이나 쓸까?”
“그래도 의식하지 않을 순 없지요. 입장을 바꿔 주군께서 가겸후의 처지가 되신다면 과연 그 모든 걸 무시하고 오직 공격에만 나설 수 있으시겠소?”
되묻는 좌괴의 말에 편월은 일시지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자신 역시 선뜻 공격에만 나설 수 없겠다 싶어서였다.
“그러니 우린 그사이 서둘러 윤주를 평정하고, 광운 장군에게 수군을 빌려 와야 하오.”
“어떻게든 상초국 놈들은 그냥 살려 보내선 안 된다는 얘기군.”
“상초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겸후에게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함이오.”
좌괴는 유난히 명분을 강조했다.
물론 싸움에 있어 명분은 필요하다. 그게 있어야 군의 성격이 어떤지 결정되고 병사들의 사기도 오른다. 그래서 출정을 할 때면 늘 당당한 명분을 천명하곤 한다.
“좋아, 어쨌든 결정되었으니 곧 윤주성에 사자를 보내 강 장군에게 병력을 요청하도록. 물론 그 취지도 잘 설명하고.”
“존명!”
편월의 명에 모두가 군례를 취했다.
“병사들을 나누는 건 아무래도 윤주성의 삼만이 온 뒤에야 정할 수 있을 것 같구려.”
일단 공격이 결정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각 장수들의 직속군 외에 남는 병사들을 각 부대에 배속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일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윤주성에서 올 병력이 자그마치 삼만이니, 그 전에 섣불리 병사들을 배정했다간 자칫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개가 이 말을 한 것이다.
“그야 당연한 말씀이오. 그사이 우린 기본적인 준비만…….”
“두 분 장군께 드릴 말씀이 있소.”
담개와 송지의 대화에 두건득이 끼어들었다.
“말해 보시오.”
“두 분 노장과 우리 젊은 사람이 같은 병력을 이끌고 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오. 그러니 우리에게 배당될 병사들 중 일만을 떼어 드릴 테니 부디 사양치 말아 주시오.”
“뭐라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담개와 송지 두 사람 모두 표정이 굳어진 채 두건득을 쏘아보았다.
“아, 소장의 말을 오해하지 마시오. 두 분 노장의 용맹함이야 이미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다만 이번 싸움은 우리 위휘군이 윤주를 장악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중요한 것이오. 그러니…….”
“그러니 우리가 두 장군에게 병력을 양보하겠소.”
송지가 재빨리 두건득의 말을 끊었다. 상당히 불쾌하다는 어투였다.
하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송지는 누구보다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는 사람이었고, 늙었다는 말을 가장 싫어하니까 말이다. 두건득은 그처럼 타오르는 송지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
세 사람뿐만 아니라, 실내 전체가 어색한 침묵에 빠졌다. 전시에 선봉 다툼은 흔한 일이지만, 병사들을 배치하기 전에 병력을 양보하겠다는 설전은 처음인 까닭에서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편월에게 쏠렸다. 이럴 때의 판정은 그밖에 할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편월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이 희한한 상황이 사뭇 재미있는 것 같았다.
“보고드립니다. 포란성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때마침 들려온 보고가 없었다면 이 어색한 침묵은 조금 더 지속되었으리라.
게다가 포란성에서 전령이 왔다는 말도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긴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전령이 아닌 사자를 보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전령이 왔다니 내용은 들어 봐야 할 터, 담개가 굵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어서 들라 이르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갑옷 차림의 병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와 부복했다.
“파양주의 호가군과 곽가군이 전면전으로 돌입! 거 성주께선 주공의 명을 기다리고 계시오.”
그 말에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이곳 윤주성도 출전을 앞두고 있는 마당이니 포란성에서의 싸움은 되도록 연기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참이었던 것이다.
“알았으니 전령은 물러가 쉬도록.”
모두를 대신해 명을 내린 건 좌괴였다. 그만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는 냉정한 모습이었다.
전령이 물러가자 좌괴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미 예상했던 바요. 주공께선 거 성주에게 적절히 곽가군을 지원해 주라는 명만 내리시오. 그러면 거 성주는 큰 실수 없이 호가군을 견제할 수 있을 게요. 하지만 윤주의 각 성에 대한 공격은 서둘러야겠소이다. 장군들께선 지체 없이 일을 진행시키시오.”
“알겠소이다.”
일제히 대답한 장수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 속에 섞여 좌괴도 물러 나왔다.
“이제 오십니까?”
성주의 거처를 빠져나오자 연무장 입구에서 건장한 체구의 이십 대 청년이 좌괴에게 정중한 예를 갖췄다.
“기다리느라 수고했다, 막종莫宗.”
좌괴는 막종에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시종으로 부리던 자였다. 당연히 벽곡성에서도 같이 싸우다 포로로 잡혀 온 걸 자신이 빼낸 것이다.
“집으로 가시지요. 새로 지은 거라 어수선하지만 우선 청소는 해 뒀습니다.”
좌괴가 위휘군의 장수들에게 인정을 받은 건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집을 배정받은 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아마 막종은 그 집을 정리하고 맞으러 나온 모양이었다.
“알겠다. 앞장서라.”
집을 배정받긴 했지만 좌괴는 여태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막종에게 안내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인님의 의견이 그대로 받아들여졌습니까?”
좌괴의 말에 따라 앞장서 걸으며 막종은 물었다. 진정으로 궁금하다기보다는, 주인의 앞날에 대한 우려 때문인 듯한 표정이었다.
“모두들 귀가 막힌 사람들뿐이야.”
“그럼……?”
“주공이고 장수들이고 간에 하나같이 원대한 꿈이 없어. 그들은 모두 포란성으로 몰려온 호가군을 눈썹에 붙은 불처럼 생각하고 있더군. 내가 건의한 웅대한 전략은 아예 씨도 먹히지 않았어.”
“그렇다면 출병은 않겠군요.”
“출병이야 하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속임수야. 정작 노리는 건 호가군이지.”
“아쉽군요. 주인님의 말씀에 따랐다면 윤주는 그냥 얻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막종은 진심으로 애석하다는 듯 말끝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혀를 찼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조금 전 회의에서 분명 좌괴의 말은 전폭적으로 모두 수용됐다. 하지만 막종에게 한 말은 그와는 전혀 상반되는 얘기였다.
바로 이게 좌괴의 치밀한 점이었다. 요즘 세상에 이만한 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디서나 적의 간인들이 눈을 번쩍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다닌다. 그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막종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좌괴가 저어하는 건 그 주변의 사람들이었다.
솔직히 좌괴는 막종이 어떤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두 다 알지는 못한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적의 간인들과 끈이 닿아 있다면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닌 것이다.
“바로 이 집입니다.”
막종의 말에 좌괴는 고개를 들어 집을 보았다. 내성을 벗어나지 않은, 편월이 거처하는 곳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선뜻한 느낌이 들었다. 새로 지은 집 특유의 나무 냄새는 아직도 축축했고, 톱밥이나 대팻밥이 구석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막종의 말처럼 급하게 청소를 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래도 좌괴는 웃었다. 새집이 생겨서라 아니라, 위휘군이 자신을 이렇게 인정해 주는 게 기뻤다.
‘계천자 늙은이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준 건 분명 계천자였다. 벽곡성에 있을 때부터 편월에게 출사하라고 강력하게 권했고 또 자신을 추천하기도 했다.
‘지금 포란성에서 거 성주와 바둑 따위를 즐기고 있다고? 그 늙은이에게 두어 줄 글이나 적어 보내야겠군.’
솔직히 지금까지는 계천자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좌괴였다.
하지만 그가 포란성에 있다면 거규와 곽가군에 지대한 힘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점을 편지에 적어 보내리라고 생각하며 좌괴는 실내로 들어섰다.
“지필묵을 준비하여라.”
‘향서청饗書廳’이라는 작은 편액이 걸린 너른 방의 탁자에 앉자마자 좌괴는 명을 내렸다.
막종은 지체 없이 대령했고 더불어 차까지 한 잔 곁들였다.
그날 저녁, 좌괴는 막종에게 은자를 주며 모처럼 성내 저자에라도 나가 실컷 놀라는 말을 했다. 내일 포란성에 심부름 갈 일이 있으니, 그 전에 즐기라는 얘기였다.
당연히 막종은 펄쩍 뛰었다. 주인이 시키는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데 무슨 돈이냐면서 말이다.
그래도 좌괴는 막무가내였다. 혼자 조용히 생각할 것도 있으니 나갔다가 새벽에나 오라면서 통행패까지 내줬다.
이렇게까지 하는 데야 막종으로선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좌괴가 내민 은자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좌괴는 다시 향서청의 탁자로 돌아와 앉았다. 밖으로 나간 막종이 오늘 자신에게 들은 얘기를 누군가에 해 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그의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