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난측變化難測
1
직접 영산 공략에 나선 조환에게 있어 가겸후가 십만 대군을 이끌고 이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은 발등이 아니라 심장에 붙은 불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 영산을 지키는 율천국의 엄확이 이끄는 군세는 확실하게 이만을 상회한다. 거기다 가겸후의 십만 대군을 보태면 무려 십이만 대군을 상대해야 된다는 얘기다.
그에 비해 허주에서 동원한 병력은 고작 오만 남짓이다. 후방 각처에 남겨 둔 군사를 모두 동원한다고 해도 칠만을 채우기 어렵다. 바로 이게 조환의 애간장을 태우는 점이었다.
영산 공격의 선봉을 맡은 당세홍이라고 해서 조환과 다를 게 없었다. 그로선 월등히 많은 병력을 이끌고도 영산을 완전히 탈환하지 못했으니 연일 조바심을 내며 돌아다니는 요즘이었다.
이렇게 된 건 순전히 율천국 장수인 엄확의 노련함 때문이었다.
엄확은 결코 용장이 아니었다. 나가서 성을 공격하거나 땅을 차지하라면 서툴지 몰라도 들어앉아 지키는 데는 가히 귀신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니 지금껏 당세홍은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하나의 관문을 공격하면 엄확은 거기의 주력을 슬쩍 빼서 유격전을 전개하거나 보급기지를 공격했다.
기실 당세홍도 그리 뛰어난 무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원하게 한판 붙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엄확은 철저하게 결전을 피했다.
물론 그사이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산 전체를 점령하진 못했지만, 허주에서 보자면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운출령雲出嶺과 제곡관制谷關은 수중에 넣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율천국군을 막을 수 없다. 영산 전체를 손에 넣고 견고한 방어 막을 구축한다면 몰라도 이래서는 허주의 멸망은 불을 보듯 뻔한 귀결이 되고 말 터였다.
“아무튼 빠른 시일 내에 서협문徐峽門만은 장악해 둬야 하오. 가겸후는 틀림없이 그곳을 통해 병력을 보내 우리 허주를 침공할 게요.”
당윤홍이었다. 비록 대장군과 선봉의 자리는 형인 당세홍에게 내주었지만, 이 싸움에 있어 공훈만큼은 단연 그가 일등이었다.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고 있나? 여우 같은 엄확 놈이 기어 나와 주질 않으니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당세홍이 짜증스럽게 동생의 말을 받았다. 지금껏 몇 차례 서협문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이유는 방금 한 말 속에 들어 있었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서협문은 영산에서 가장 깊은 서협곡을 이루는 절벽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한마디로 길이 약 이십 리에 이르는 계곡 하나를 통칭하는 지명이란 얘기다.
여느 산이나 있게 마련인 계곡 하나가 양국 공방의 핵심이 된 건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란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는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사뭇 이상할 수도 있다. 율천국에서 영산을 넘어 허주로 가는 길은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가겸후가 건설한 진강도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허주의 조환이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쓸모가 있다. 영산이 비록 대과산맥의 끝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하나의 봉우리에 불과했지만, 험한 걸로만 따진다면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자연히 예로부터 영산엔 관문이나 영채가 많았다. 그 하나하나가 가히 난공불락이라 할 만해서,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가겸후가 허주를 함부로 칠 수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길을 따라 율천국에서 허주로 진군시킨다는 건 막대한 희생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만약 가겸후가 그런 무리를 감행하겠다고 작정하고 그가 이끌고 오는 십만 대군을 투입한다면, 그중 팔구 할은 영산의 귀신이 될 게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허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산엔 딱 하나의 약점이 있다. 그게 바로 서협문이다.
예전 허주가 장악하고 있던 영산에 가겸후가 쳐들어왔을 때, 조환이 이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서문협을 이용해 군사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길이나 관문을 통하지 않고 허주와 율천국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거기였던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율천국의 팽창에 밀린 조환은 영산을 잃었고, 지금 다시 수복하려는 중이다. 그중에서 서협문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허주의 운명이 바로 여기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었다. 엄확은 교묘하게 결전을 피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서협문이 저절로 수중에 굴러 들어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했다가 적의 유격전에 걸려 피해만 커졌을 따름이었다.
“아예 불 질러 버립시다!”
“뭐? 뭐라고 했느냐?”
이어진 동생의 말에 당세홍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당윤홍의 말이 과격했기 때문이다.
“서협문을 불 질러 버리자고 했소이다. 우리가 장악하지 못한다면 서협문은 오히려 우리들의 목을 조르는 흉기가 될 게요. 그럴 바엔 확 불 질러 버리고, 우리와 율천국이 계곡의 한쪽 끝을 각각 차지하고 버티는 거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못 버틸 게 뭐요?”
“오냐. 그렇다면 네게 군사 이만을 줄 테니 가서 버텨 봐라.”
“형님, 아니 대장군은 뭐 하시고 소장에게만 버티라고 하시오?”
“가겸후가 서협문으로만 군사를 보낸다면 나도 기꺼이 같이 버티겠다. 하지만 이 길은 어떡하느냐? 관문은 누가 지키고?”
한심스럽다는 듯 당세홍은 내뱉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질책은 하지 않았다. 자신도 가끔 그 생각을 했던 탓이었다. 그만큼 지금 허주군에 있어 엄확은 얄미운 존재였다.
“아무래도 이 싸움은 숫자가 승패를 결정지을 것 같군.”
지금껏 당씨 형제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조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면 주공의 생각은……?”
“대인성의 도 장군에게 연락해서 후방에 있는 병력을 모두 이끌고 오라고 해야겠지.”
“예엣? 그렇게 되면 후방이 완전히 비어 서쪽으로부터 침공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말은 비록 당세홍 혼자 했지만, 이건 당씨 형제 공통의 생각이었다.
“지금 허주의 서쪽에 있는 건 위휘군이오. 그들을 이끄는 편월은 우리와 동맹을 맺은 강국 증두신의 사위니, 당분간 안심해도 될 듯한데…….”
“이런 시기에 누굴 믿고 후방을 비운단 말입니까? 그보다는 차라리 위휘군에 원군을 요청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원군을?”
너무 파격적이고, 또 앞뒤도 맞지 않는 당세홍의 말에 조환과 당윤홍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을 믿지 못해 후방을 비우지 못한다고 했으면서 오히려 원군을 청하자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내 당세홍의 말뜻을 이해했다. 위휘군에 청한 원군이 도착하지 않아도 허주로선 하등 손해 볼 일이 없다. 와 주면 좋지만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곧 도 장군에게 전령을 보내야겠군. 원군을 청하는 사자는 그쪽에서 파견하는 게 좋을 테니까.”
“그렇게 하는 게 좋겠소. 그리고 너는 따로 군사 이만을 이끌고 서협문을 계속 공격하도록 해라. 나는 나머지 병력을 유군으로 활용하면서 대기하겠다. 운 좋게 엄확이 걸려들면 요절을 내리라.”
“그리 알고 군사를 나누겠소.”
일단 싸움에 대한 명이 떨어지자 당윤홍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소장도 준비를 하겠소이다.”
동생의 뒤를 이어 당세홍까지 나가자 조환은 생각에 잠겼다. 사자를 보내 봐야 십중팔구 위휘군은 지원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지만 지금 조환이 우려하는 건 도연각의 태도였다. 어쩌면 그는 사자를 파견하는 대신 남은 병력을 깡그리 이끌고 영산으로 올지도 모른다.
아니, 정작 문제는 도연각이 아니었다. 그는 냉철하고 용맹한 무장이니 그처럼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게다.
지금 조환이 속을 끓이는 건 자신의 부인 때문이었다. 그녀의 성격상 위휘군에 지원을 요청한 걸 알면 당장 도연각을 부추길 게 뻔하다. 그녀에게서 직접 명을 받게 되면 도연각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게고…….
그녀 몰래 일을 추진할 수도 없다. 편씨 일족은 허주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에 여기서 전령을 출발시키면 다음 날 바로 그 내용을 알 게 뻔하다.
‘이건 차라리 도 장군에게 군사를 이끌고 오라는 명을 내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조환은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부인에 대해선 언제나 머리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방법은 찾아야 한다. 부인 몰래 일을 추진하는 건 어려우니 알아도 별다른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렇다. 강아를 부르겠다고 하면 되겠구나.’
생각에 잠겨 있던 조환은 돌연 자신의 무릎을 소리 나게 쳤다. 스스로도 기막히다 싶은 계책이 떠오른 탓이었다.
‘부인에게 먼저 사자를 보내 강아에게 남은 병력을 모두 이끌고 이곳으로 오라고 하면 부인도 다시 생각지 않을 수 없으리라.’
물론 편씨 부인은 기질이 남달리 강하다. 하지만 이건 자식을 슬하에서 떠나보내 남 밑에서 훈육시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목숨이 걸려 있는 전장에 출전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편씨 부인도 장남인 강아를 대인성의 도연각에게 보낼 때처럼 쉽게 결정하지 못할 터였다. 당연히 총병력을 이끌고 오라는 얘기도 흐지부지될 것이고 말이다.
생각을 정하자 조환은 곧 사람을 불렀다. 가겸후의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일을 추진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갑작스러운 소라고둥 소리와 북소리가 오후의 햇살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었다. 당세홍이 출전하는 모양이었다.
* * *
떠날 때와는 달리 편월의 합진성 복귀는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일만 오천의 병력을 잃은 뒤에 얻은 승리인지라 장졸들은 물론 백성들을 볼 낯이 없어서였다.
그래도 편월이 돌아오자 합진성은 부산스러워졌다. 특히 내전의 시비들은 성문까지 나와서 반겼다. 물론 증화강이 시켰기 때문이리라.
그 모든 걸 무시한 편월은 곧장 성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지금껏 마음을 졸이고 있었을 증화강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는 전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승전을 경하드리오.”
미리 성으로 전령을 보내 엄명을 내린 바람에 성문까지 영접을 나가지 못한 장수들이 편월의 집무실로 들어와 일제히 군례를 갖췄다.
“승전은 무슨, 진 싸움이었소.”
“그렇지가 않소이다. 벽곡성주를 항복시켰으니, 이건 누가 봐도 이긴 싸움이오.”
기가 죽은 편월의 말에 담개가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싸움의 내용이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론 이겼다. 그 점을 크게 부각시켜야 위휘군 전체의 사기가 오르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 벽곡성주도 졌지. 그렇게 따지면 결국 이긴 건 저자뿐이오.”
편월은 이제 막 집무실로 들어서는 좌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좌괴는 여전히 단단히 결박된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벽곡성에서 여기까지 흑풍의 꽁무니에 매달려 걸어왔으니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저자가 좌괴로군.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요?”
좌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담개가 문득 미간을 심하게 일그러뜨리며 코를 실룩였다. 고약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 탓이었다.
“아, 내전의 시비를 하나 불러 주시오.”
그제야 편월도 서둘러 갑옷 끈을 풀면서 지시를 내렸다.
“대체 뭐기에? 아니, 웬 아기요?”
편월의 갑옷 속에서 나온 아기를 본 담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황이야 세세히 보고받고 있었지만 이건 전혀 듣지 못했던 탓이다.
“버려져 있기에 주웠소. 내 생각이 나서…….”
나직이 말하며 편월은 아기를 탁자에 뉘었다. 똥오줌에 범벅이 되어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아니?”
“허어, 그사이 아이를 보셨소? 주군? 재주도 좋으시구려.”
제각기 한마디씩 하며 장수들이 탁자 주위로 모여들었다. 악취에 코를 막거나 여유로운 농담을 던지는 등 제각각인 반응 속에서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바로 아기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근데 사내아이요, 계집아이요?”
“딱 보면 모르겠소? 사내아이지! 또릿하게 생긴 게 장차 큰 장군감이 될 것 같구먼.”
“조용히들 하시오. 애가 깨겠소.”
장수들이 아기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이제 막 개선한 편월이나, 끌려온 좌괴는 뒷전으로 밀려 버렸다.
이런 건가 보다. 자고 일어나면 죽음과 대면하는 난세의 장수들인지라 새로운 생명을 받고 태어난 아기는 경이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나 보다.
“이런, 강보가 온통 젖었구먼. 물부터 가져오시오. 애를 좀 씻겨야겠소.”
“씻길 줄이나 아시오?”
“이래 봬도 애가 다섯이오. 이 정도쯤이야!”
“주군도 좀 씻으셔야겠소.”
웅성거리는 장수들의 얘기를 뒤로하고 담개가 편월에게 말했다. 그의 가슴도 온통 아기의 분비물로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대충 닦고 옷만 갈아입으면 되겠지. 그사이 별일은 없었소?”
사실 씻는 건 그리 급한 게 아니다. 편월은 자신이 없는 동안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를 먼저 물었다.
“강국이 식운관을 잃었소. 멸망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가겸후가 군사를 돌려 영산으로 향했소. 그리고 막주로 갔던 화 장군이 모레쯤 돌아온다고 하오.”
“화 장군이? 무사히 다녀온 모양이군.”
반색을 띤 편월을 보는 담개의 눈에 여린 안도감이 어렸다. 혹시라도 장인의 나라인 강국의 문제에 개입하려고 할 것 같아 은근히 불안했던 것이다.
“모레라면 어쨌든 파양주 호윤천의 세력권에선 벗어났겠군. 어쩌면 포란성에 닿았을지도 모르겠고…….”
“그보다 곽준방 장군이 이끄는 곽가군이 동쪽으로 향했다고 하오. 이유는 황제 폐하를 공격한 상초국과 그들을 끌어들인 강국을 친다는 거요.”
“곽 장군이? 그건 어디서 들어온 얘기요?”
“그사이 상 장군이 키운 간인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소이다.”
“가웅이가… 그렇군. 유산성의 출격도 우리보다 먼저 파악했었지. 이젠 제법 톡톡히 한몫하는군.”
실제로 편월은 뿌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무 약해 빠졌다는 생각을 했는데 비록 용맹한 장수가 되지는 않았지만 위휘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성장한 걸 보니 가슴이 뿌듯했다.
“곽 장군을 어떻게 대하실 생각이오?”
이건 담개에게 있어 또 하나의 난제임에 분명했다. 강국은 그냥 두고 볼 수도 있겠지만 곽준방은 경우가 다르다. 그와 광운 그리고 편월이 어느 정도 끈끈한 관계인지 익히 알고 있으니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갑옷과 전포를 모두 벗어 거의 벌거숭이가 되다시피 한 모습으로 편월은 담개를 쳐다보았다.
“글쎄…….”
편월은 말꼬리를 흐렸다. 담개, 곽준방 두 사람 모두 정규군 출신의 올곧은 장수들이다. 잡가군 출신의 장수들과는 다른 생각이 있을 게 분명하다.
“만약 곽가군이 우리와 합세한다면 전력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이오. 그러니 우린 마땅히 이를 맞아들여야 하오. 필요하다면 포란성의 거 장군을 출격시켜서라도.”
담개의 어투는 강경했다. 같은 정규군 출신인 곽준방과 그가 이끄는 곽가군이 고난을 겪고 있는 걸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으리라.
“후후후…….”
저만치 있던 좌괴가 웃은 건 바로 그때였다. 아기를 둘러싼 장수들의 왁자한 소음 속에서도 편월과 담개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왜 웃는가?”
비록 포로와 같이 결박된 좌괴였지만 그에게 말을 거는 담개의 어투는 은근했다. 그를 얻기 위해 편월이 많은 고생을 했다는 걸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위휘군의 전신은 정허군이라고 알고 있소. 그런데 지금 곽가군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들의 주군이라는 사람의 위치가 어떻게 되겠소?”
“뭐? 그게 무슨 말인가? 주군의 위치가……?”
빠르게 되묻던 담개는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강하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한 가지 생각 탓이었다.
‘그렇군. 곽 장군이 과연 주군의 휘하에 들어오려고 할 것인가? 설사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명에 고분고분 따를까?’
분명히 편월은 한때 곽준방 밑에 있었다. 그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묘한 것이다. 특히 위계질서가 엄격한 군문에서, 한때 자신 밑에 있던 사람의 명을 받는다는 건 쉽사리 수용하기 힘들 터였다.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은?”
편월도 좌괴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확실히 곽준방을 예하에 두기엔 부담스러웠다.
“곽가군이 내세운 명분은 상초국이나 강국을 친다는 거겠지만 그들은 호윤천에게 쫓기고 있을 게 분명하오.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궁벽한 군사란 얘기요. 그러니 그들을 받아들이되 흔쾌히 받아 준다는 내색을 해서는 안 되오. 어디까지나 그들의 입에서 도와 달라는 소리가 나온 후에 수용하는 게 좋을 게요.”
“하지만 그들이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상초국이나 강국을 치겠다고 하면?”
담개가 물었다. 자신이라면 결코 쉽사리 도와 달라는 말을 할 것 같지 않았고 그건 곽준방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땐 막아야지 별수 있겠소. 세상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자기 영내를 다른 군세가 통과하는 걸 묵과한단 말이오.”
내용이 비정한 것치고는 좌괴의 어투는 어디까지나 담담했다.
“지금 곽가군의 뒤는 호윤천이 바짝 쫓고 있을 게 분명하오. 아직도 호윤천이 장악하고 있는 각 성에서는 곽가군을 막을 게 분명하고. 그러니 곽준방은 위휘군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게요. 그때 그들을 받아들이되, 결코 포란성에서 더 이상 동쪽으로 진출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오. 거기서 호윤천군을 막아 싸우도록 하면 될 게요.”
좌괴의 말에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둘 만한 얘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개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혼돈만 거듭되는 난세라지만 곽준방을 대하는 게 너무 몰인정하다고 여겼다.
“내전의 시비가 왔습니다.”
누군가 커다란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오, 알겠다. 아기를 내전으로 보내도록. 잘 보살피라고 일러라.”
편월은 재빨리 명을 내렸다. 곽준방에 대한 걸 당장 결정하지 않게 된 게 무엇보다 반가웠다.
아기를 내전으로 보내자 그 자리엔 즉각 연회석이 마련되었다. 그러고는 각자의 무용담이 떠들썩하게 실내에 들어찼다.
그때에도 좌괴는 결박된 채 한쪽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2
막주로 갔던 화응과 일행이 돌아왔다. 그들을 환영하는 연회가 또 한 번 질펀하게 벌어졌고 그 중간에 편월은 슬쩍 좌석을 빠져나왔다.
편월은 서둘러 내전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빨리 유화를 보고 싶어서였다.
“주군, 어딜 가시오?”
바쁜 편월의 발길을 막은 건 송지의 목소리였다. 연회석에서부터 따라온 모양이었다.
“아, 내전에 잠깐…….”
겸연쩍은 표정으로 편월은 대꾸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지금 내전으로 유화를 보러 가는 자신의 꼴이 우습게 여겨졌다.
“내전엔 누굴 보러 가시는 거요?”
송지의 어투는 엄격했다. 편월이 무얼 바라고 있는지 익히 아는 까닭에 필요 이상으로 딱딱해졌는지도 모른다.
“유화 아가씨를 반기는 마음이야 소장도 누구 못지않소.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오.”
“때가 아니라니?”
“아직 유화 아가씨의 신분이 정해지지 않았소이다. 지금 내전엔 증 부인께서 계시오. 그런데 신분도 정해지지 않은 유화 아가씨를 주군이 찾아가신다면 내전의 기강이 흐트러질 게요.”
편월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송지가 말하는 뜻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유화를 보고 싶다는 감정도 커다랗게 작용했다. 자신에게 있어 첫 번째 여자인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쉽사리 희석되는 게 아니었다.
“장부의 축첩蓄妾은 흠이 되지 않는 법이오. 하나 주군은 이제 곧 일국의 왕이 되실 분이오. 자고로 내전이 어지러운 상태로 큰일을 도모한 예는 없었소.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정식으로 유화 아가씨를 맞도록 하시오.”
“정식으로?”
“그렇소. 우선 증 부인께 유화 아가씨에 대한 얘기를 하고 길일을 택해 약식으로나마 혼례를 치르는 거요. 그 후에 내전에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게 올바른 처사요.”
“하지만 지금 유화는 내전에 들어가 있지 않소? 그런데 새삼 다른 날에 거처를 정해 주라는 건…….”
“유화 아가씨는 소장의 집에 있소이다.”
“뭐?”
“화 장군이 돌아오자마자 소장이 유화 아가씨를 집으로 모셨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증 부인이 있는 내전에 유화 아가씨를 보냈다면 그 혼란이 어땠을 것 같소? 그러니 당분간은 우리 집에 모시겠소이다.”
“그럼 송 장군의 집으로 가서 만나면 되겠군.”
“천만부당하오! 길일을 택해 정식으로 내전으로 들어가시기 전엔 주군께서도 소장의 집엔 발길을 삼가 주시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내전의 안정을 위해서요.”
편월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증화강은 여태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런 곳에 유화를 불쑥 보낸다는 건 스스로 생각만 해도 낯 뜨거운 노릇이었다.
“유화를 집으로 데려간 건 잘하신 일이오. 고맙소.”
나직이 사의를 표하며 편월은 연회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송지의 말에 틀린 구석은 한 군데도 없었고, 맞다면 따르는 게 좋다.
연회장 입구에는 화응이 서 있었다. 편월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가 오자 조용히 군례를 갖췄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화응의 말에 편월은 송지의 눈치를 살폈다.
“소장은 먼저 들어가 있겠소.”
송지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화응이 무거운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십시다.”
“그럼 좀 걸을까?”
화응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편월은 다른 말은 일절 없이 앞장서 걸었다.
“죽영 부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뭐?”
어렵게 입을 연 화응을 다그치듯 편월의 목소리는 높았다. 죽영이 죽었다는 말이 그만큼 충격이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그 얘길 왜 이제야 하는 거야?”
편월은 두서없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껏 화응은 죽영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안됐지만 그건 사적인 일이었소. 여러 장수들이 계신 자리에선 할 수가 없었소이다.”
요컨대 공사를 가려 말을 하지 않았다는 화응의 얘기였다.
“도대체 어떻게? 광운은 뭘 하고 있었고?”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죽영 부인께서는 영욱성에서부터 고초를 겪다가 거기를 탈출하신 뒤 효명성에서도 무리하게 일을 하셨나 보오. 그뿐 아니라 상림호 성주께서 호윤천군에 쫓겨 광운 장군과 합류하실 때까지 일반 병사들을 수발하느라 무척 고생을 하셨나 보오. 그래서 막주의 침사성에 오셨을 땐 이미 기력이 소진하셔서…….”
더 이상 상세한 얘기를 듣지 않아도 편월은 죽영이 어떤 고생을 했을지 뻔히 알 것 같았다. 싸우는 병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도 않고 해치웠을 성격이니까 말이다.
“죽영 부인께서 가신 후에 광운 장군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소. 우리가 떠날 때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신 모습이었지만 소장의 눈으로 보기엔 머지않은 것 같았소이다.”
“뭐? 광운도?”
편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영이 죽은 마당에 또다시 광운까지 위독하다고 한다.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지며 전신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주군, 괜찮소?”
격렬하게 떨고 있는 편월이 화응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으며 부축을 하려고 했다.
“놔!”
편월은 신경질적으로 화응의 손길을 떨쳐 냈다. 그게 너무 격렬해서 자기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사실 지금 편월도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죽영이 죽고, 광운마저 위태로울 정도로 쇠약하다는 말을 듣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저절로 떨렸기 때문이다.
“주군.”
화응이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불렀다. 당장이라도 편월이 잘못될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광운이… 사주를 장악하면 동쪽으로 오겠다고 했었지?”
“그렇소. 광운 장군은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소.”
“여, 연회를 중지시키고 장수들 회의를 소집…….”
“무슨 말씀이오? 연회를 중지시키라니?”
뜬금없는 말에 화응이 재차 물었지만, 편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짓으로 연회장만 가리킬 따름이었다.
“아, 알겠소. 명에 따르리다.”
화응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가는 정말 편월이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화응이 연회장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편월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죽영이 죽었다.’
그 사실이 정말 와 닿지 않았다. 마치 몹쓸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추위와 함께 식은땀이 등허리 가득 배어 나왔다.
편월은 엄마를 모른다. 자신의 존재조차 잊고 싸움에 몰두할 때면 아주 간혹 어떤 여인의 영상이 보일 때도 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건 언제나 죽영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죽영이 죽었단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엄마라는 존재를 느끼게 해 줬던 사람이 이젠 없어진 것이다. 마치 밑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절벽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듯한 허망한 추락감이 가슴 가득 들어차 있어 견디기 힘들었다.
‘어쩌면 광운도…….’
곧 자신의 곁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장 서쪽으로 치고 나가 광운과 합류할 결심이었다.
잠시 후 장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신 나게 연회를 즐기다가 화응의 급보를 받고 모두 놀란 표정들이었다.
“주군, 어디가 편찮으시오?”
송지가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물었을 정도로 편월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얼굴은 물론, 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으니 말이다.
“출동 준비. 전군… 출동…….”
여기까지 말한 후 편월은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그로부터 편월은 혹독하게 앓았다. 위휘군에 배속된 군의들이 총동원되었고 인근에서 이름난 의생들을 모두 불러 모았지만 이렇다 할 병명을 짚어 내지 못했다.
다만 의생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편월이 그동안 너무 무리했다는 것이다. 그 위에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 일시간 몸이 제 기능을 못 하는 거니 좀 쉬면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딱히 무슨 병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니 장수들로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반가워하기엔 편월이 처리해야 될 일이 너무 많았다. 당장 허주에서 출발한 사자가 윤주성에 들어왔다는 기별이 왔다. 늦어도 이틀 안으로 합진성에 도착할 게 뻔하다.
허주에서 사자가 왔다면 그 내용이야 뻔하다. 원군을 요청하는 것일 테니, 편월이 직접 다뤄야 되는 문제다.
하지만 편월은 벌써 사흘째 온전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간혹 눈을 뜨더라도 광운과 죽영의 이름을 몇 차례 부른 후 다시 혼절하듯 잠들어 버리곤 했다.
당연히 증화강도 편월의 수발에 매달렸다. 내전에 남자들이 드나드는 걸 싫어하는지라 그녀는 두 명의 시비만을 이끌고 성주의 집무실에 기거하다시피 했다.
이쯤 되자 사람들의 원망은 엉뚱한 화응에게 토해졌다. 불길한 소식을 다른 사람과의 상의를 통해 거르지도 않고 편월에게 곧바로 전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화응은 그 모든 원망을 감수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군문엔 거짓 보고가 있어선 안 되니 장수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처럼 뒤숭숭한 합진성에 마침내 허주의 사자들이 도착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편월도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아직 완전히 자릴 떨치고 일어난 건 아니지만, 더 이상 혼절을 거듭하진 않았다.
하지만 깨어난 편월의 첫마디가 모든 장수들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출동 준비는?”
이건 바로 편월이 혼절하기 직전에 했던 말이었다. 그만큼 그의 의지가 강하다는 얘기다.
지금 당장 군사를 일으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지라 송지는 말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 문제를 거론하실 때가 아니오. 우선 주군의 몸부터 추스르시고, 며칠 뒤에 허주에서 온 사자들을 만나셔야 할 게요.”
“그따위는 내 알 바 아냐. 당장 전군 출동 준비!”
“주군의 심정은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좀 더 냉정하게 천하의 정세를 살펴보시오. 아니, 다른 걸 떠나서 지금 서쪽으로 전군을 움직인다면 그건 바로 우리의 안방을 비워 주는 것과 마찬가지요. 가겸후에 의해 당장 강국이 무너질 형편이고 그 불똥이 허주에 튀어서 저렇게 사자까지 보냈소. 그러니 이 점을 잘 통찰하시고, 부디 냉정을 찾으시오.”
기실 좀 더 강한 어투로 말하고 싶었던 송지였다. 편월이 지독하게 앓고 난 뒤끝이라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편월은 입을 닫은 채 외면해 버렸다. 송지의 말을 수긍한다는 게 아니라, 거부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송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편월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 쉽사리 설득시킬 수 없다는 걸 익히 아는 까닭에서였다.
‘이러면 달리 방도를 강구해야겠는데…….’
생각을 하고 있는 송지의 눈에 두 명의 시비를 거느린 증화강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송지의 뇌리엔 한 사람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그사이 경황이 없어 잊고 있던 유화였다. 그녀라면 편월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경우 자신이 편월에게 했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증화강의 묵인이 있은 후에 유화의 존재를 알리고 내전으로 들여보내는 게 좋다고 했던 얘기 말이다.
‘어쩔 수 없다. 주군을 말릴 방도는 이것뿐인 듯하니 한번 시도는 해 봐야지. 뒤에 불상사가 생기면 내가 모두 책임지겠다.’
결심을 하고 송지는 조용히 증화강을 불렀다.
“부인?”
“예, 송 장군.”
증화강은 송지를 비롯한 위휘군의 몇몇 노장들을 비교적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부르자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이제 주군께서는 혼절에서 깨어나셨으니 여긴 곧 뭇 장수들이 군무를 보는 곳이 될 게요. 그러니 이제 부인께서도 내전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소?”
“그럼 지금 당장……?”
조심스레 말꼬리를 흐리며 증화강은 편월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그녀에겐 부군의 의견이 가장 소중한 모양이었다.
편월 역시 의아한 눈빛으로 송지를 응시했다. 왜 자신에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말을 꺼냈느냐는 의문이었다.
그러다 편월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송지는 자신과 단둘이서만 모종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걸.
“그동안 수고했소. 내 염려는 말고 내전으로 돌아가시오. 내가 깨어났다는 걸 장수들이 알면 우르르 몰려올 테니…….”
“알겠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연락 주세요.”
아주 공손하게 대답한 뒤, 증화강은 조용히 물러갔다.
“그럼 소장도 이만 물러가겠소. 너무 오래 머물면 의생들이 싫어할 게요.”
“뭐?”
생각지도 않았던 송지의 태도에 편월은 멍청해지고 말았다. 뭔가 단둘이서 할 얘기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물러가겠다니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편월의 마음이야 어떻든 송지는 곧바로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설득을 하기 위해선 약간의 충격도 좋으리라 생각해 사전에 알리지 않고 유화를 데려올 작정이었다.
잡가군 시절부터 편월과 함께했던 장수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송지의 집도 내성 안에 있었다. 그 덕분에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유화를 데려올 수 있었다.
실은 그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었지만, 의외로 유화가 망설였다. 처음 합진성에 왔을 땐 빨리 편월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며칠 동안 송지의 집에 머물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곰곰이 생각해 봤던 것이다.
그 결과 편월에게 있어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어정쩡한 것인지 유화는 절실히 깨달았다. 부인도, 후처도 아닌 존재로 그를 만난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를…….
하지만 유화는 송지를 따라나섰다. 당장 출동하려는 편월을 말릴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었다.
가는 길에 만난 모든 무장들이 그녀를 환대했고 그게 부담이 되었지만 유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편월이 누워 있는 집무실 앞에 서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송지는 유화를 잠깐 기다리게 해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의생들을 내보내기 위함이었다.
서너 명의 의생들이 우르르 유화의 곁을 스쳐 지나간 후 송지는 그녀를 안으로 불렀다.
“어? 언제 왔어?”
유화를 본 편월의 반응은 담담했다.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을 오늘 다시 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유화까지 그렇게 편월을 대할 수는 없었다.
“천한 계집이 위휘군의 주군을 뵈옵니다.”
공손하게 말하며 유화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려고 했다. 이게 그사이 달라진 신분에 대한 당연한 일이었다.
“이거 왜 이래? 일어서!”
편월은 강하게 유화를 제지했다. 며칠간 앓은 관계로 목소리엔 비록 힘이 없었지만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감정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편하게 하시오.”
송지도 절을 하려는 유화의 팔을 재빨리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광운은 어때?”
편월은 죽은 죽영 대신 광운에 대해 먼저 물었다. 아무리 가슴이 찢어져도 이미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다. 산 사람을 먼저 챙기는 게 나은 일일 수밖에 없다.
“잘 지내세요. 하지만 지금쯤 주군께 실망하고 또다시 술만 드시고 있을지 몰라요.”
“뭐? 내게 실망을?”
“그래요. 광운 아저씨는 죽영 언니의 죽음을 훌륭히 이겨 내시고 지금쯤 상 성주님과 함께 흑암성에서 열심히 싸우고 계실 거예요. 어쩌면 사주로 치고 나가고 계실지도 모르고요.”
잠시 말을 맺은 유화는 편월을 지그시 쏘아보았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할 말은 하겠다는 태도였다.
“광운 아저씨는 늘 말씀하셨어요. 위휘군의 얘기가 들려올 때마다 저렇게 잘 자라 줘서 고맙다고, 내가 잘못 키우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셨어요. 그리고 또 말씀하시길, 편월은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난 서쪽에서 기반을 굳혀야지. 편월이 동서를 모두 감당하기는 어려울 테니, 그 한쪽은 내가 담당해야지. 설사 내가 죽더라도 이 일은 꼭 해 달라며 상 성주께 늘 부탁하시는 걸 들었어요. 그때 상 성주께서 ‘만약 편월이 서쪽으로 온다면?’ 하고 묻자 ‘그처럼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난 지하에서도 후회하며 탄식할 거요.’라고 대답하시는 걸 제 귀로 똑똑히 들었어요. 그런데 듣자니 전군을 출동시켜 서쪽으로 향한다고 하셨다고요?”
“흐음…….”
편월은 깊은 침음을 토했다. 방금 들은 얘기들이 모두 유화가 한 게 아니라, 마치 광운이 직접 자신을 질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시려면 가세요. 아마 그 얘길 들으시면 광운 아저씨는 웃으실 거예요. 그리고 두 번 다시는 편월이란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으실 거예요.”
“알았어.”
다시 한 번 못을 박듯이 한 유화의 말에, 편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일단 다시 송 장군의 집으로 데려가시오. 가기 전에 내전에 들러 지난번에 주워 온 아기도 함께 데려가 유화에게 키우도록 하시오. 아무래도 그 사람은 너무 어려서 힘든 것 같으니…….”
편월의 말에 유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의 입에서 나온 ‘그 사람’ 이란 호칭이 너무 자연스럽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송지는 입가에 미소까지 띠며 물었다.
“그렇다면 출동에 대한 명은 거두시는 거요?”
“아직 완전히 철회한 건 아니오. 그 점에 대해선 좀 더 생각해 보겠소.”
“존명. 자, 갑시다.”
편월은 확답하지 않았지만, 송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하고 유화를 채근해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이어 무장들이 편월의 쾌유를 축하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 * *
포란성주 거규는 눈앞에 있는 사자에게 어떤 대답을 줘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말을 뱉었다.
“여 장군의 뜻은 알겠소. 하지만 이 몸은 파양주를 떠나 다른 주군께 몸을 의탁한 무장이오. 곽가군의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요.”
“이것 보시오, 거 장군!”
탕!
여 장군으로 불린 이는 다름 아닌 곽가군의 여상계였다. 거규의 말에 그는 탁자를 치며 언성을 높였다. 배석해 있던 포란성의 장수들이 흠칫하며 긴장했을 정도였다.
“한때는 우리 모두가 파양주의 진남후이신 마용승 공을 모시던 사람이었소. 그래서 믿고 찾아왔는데, 얼마 안 되는 군량과 우리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지 못하시겠다는 거요?”
여상계의 말을 듣는 거규의 표정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한때는 동료였지만 지금은 각기 추구하는 바가 달라 마음대로 그들을 환영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군량은 내 드리겠소. 하지만 우리도 비축분이 넉넉지 않아 원하시는 대로 드리지 못함을 해량해 주시오.”
거규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 곧 보리를 파종할 시기다. 군량 창고도 훌쩍 비었고, 이건 일반 백성들의 곳간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을 터였다. 아무리 옛날의 동료였다고 해도 원하는 대로 내줄 수는 없었다.
여상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거규를 노려보았다. 까놓고 말해서 사정이야 서로가 빤히 알고 있다.
하지만 부탁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건 완전 거지 취급에 다름 아니다. 거규가 부족하나마 군량을 지원해 준다면 감사히 받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게다가 군량미보다 더 중요한 건 곽가군이 쉴 장소이고, 그건 의당 이 포란성이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게 정작 중요한 점이었다. 위휘군의 서쪽 최첨단에 위치한 이 포란성에 곽가군을 들인다는 건, 그 동쪽에서도 곽가군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해 준다는 암시인 것이다. 황제를 습격한 상초국과 그 동맹국인 강국을 친다는 명분을 세운 곽가군에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런데 그 점은 거규에 의해 정면으로 거부당했다. 곽가군을 아군으로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고 영지를 지나게 해 주지도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건 곽가군을 완전히 진퇴양난으로 밀어붙이는 일이다. 뒤에는 호윤천군이 득실거리는 건주 땅이니, 위휘군이 지배하고 있는 윤주로 들어가지 못하면 결국 모두 전멸하게 된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 포란성을 공격하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건 바로 두 개의 바위틈에 낀 전병 신세가 되고 만다는 의미다.
다시 한 번 거규를 노려보며 여상계는 자신이 이 사자의 임무를 맡은 걸 극심하게 후회했다. 팽요가 왔었다면 좀 더 지혜롭게 대처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알겠소. 그렇다면 소장이 이대로 합진성까지 가서 꼬마 대장, 아니 위휘군의 대장군에게 직접 부탁드려 보겠소. 거기까지의 통행증이나 발부해 주시오.”
이게 고작 여상계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사자는 우리가 파견하겠소. 그 편이 더 빠를 게요. 여 장군은 적지만 우리가 제공하는 군량을 가지고 다시 복귀하시는 게 어떻겠소?”
이어진 거규의 제안에 여상계는 잠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군량을 가지고 당장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연 그 말대로 편월에게 사자를 파견해 줄지 의문이었다.
도움을 청하러 온 여상계로선 지독한 의심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선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태는 같은 편이라고 해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 어디 가서 이런 의심을 품었다고 얘기한다면 전시의 무장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었다고 칭찬을 해 줄 터였다.
“군량은 내 부하 중 한 명을 시켜 운반해도 충분할 게요. 거 장군께서 약간의 병력만 딸려 주시오.”
“그리하리다.”
거규는 선선히 여상계의 청을 수락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도 저처럼 했을 게 분명했다.
“모두 들었겠지? 일이 급하니 서둘러 시행하도록.”
거규는 배석한 장수들에게 명을 내렸고 그들 중 몇 명은 복명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간단한 주효를 마련해 오고 그대들도 자릴 피하도록 하라.”
거규는 남아 있는 무장들도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오랜만에 여상계와 단둘이 앉아 그간의 파양주와 곽가군의 사정을 보다 소상히 알고 싶어서였다.
주효는 이내 마련되었다. 평소 거규의 성정이 어떤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소박하지만 정갈한 차림이었다.
“자, 우선 한잔 받으시오. 먼 길을 오시느라 노고가 크셨소.”
“고맙소.”
거규는 우선 여상계의 잔부터 채웠다. 나이로 보나, 마용승 생전에 성을 얻었던 자신의 신분으로 보나 이런 대작은 파격이라 할 수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강의 사정은 막주를 다녀온 화응 장군을 통해 듣고 있었소. 하지만 자세한 속내야 어찌 알 수 있겠소. 그저 곽가군의 분전에 멀리서 응원을 보낼 수밖에…….”
확실히 노련한 거규였다. 궁금한 점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고 곽가군의 선전에 대한 칭찬부터 얘기했다.
여상계 역시 그걸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얘기를 할 수 없는 건, 역시 마국립의 죽음 때문이었다.
이미 마국립의 죽음은 옛 파양주에는 모두 알려졌다. 그러나 이곳 윤주에는 거규처럼 위휘군으로 들어간 성주는 모르고 아직도 호윤천의 입김이 작용하는 성주들은 알고 있다. 거규 역시 예전엔 마용승을 모셨던 무장임을 감안하면 모르는 걸 일부러 알려 줄 필요가 있을까 싶어 망설여졌다.
“곽 장군은 어떠시오? 그분의 연세도 이 몸과 비슷하다고 알고 있는데…….”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우리 무장들을 꾸짖으며 선전하고 계시오.”
차라리 얘기가 곽준방 개인에게 향하자 여상계는 마음이 편해졌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대답한 것도 그래서였다.
“여전하시다니 부럽구려. 이 몸은 이제 나이가 들어 그저 쉬고 싶은 생각뿐이오. 곽 장군처럼 군사를 지휘하며 전장을 누비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오.”
“무슨 말씀을! 윤주를 지나면서 거 장군의 용맹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소이다. 특히 항려의 생질인 모충을 무사히 구해 낸 건 가히 달인의 솜씨였다고 말이오.”
“자, 한 잔 더!”
화제가 자신에 대한 찬사로 이어지자 거규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다시 여상계의 잔을 채웠다. 위휘군에 몸을 의탁한 지금, 모충을 살린 건 조금도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꼬마 대장과…….”
짧았지만, 어색한 침묵이 머쓱했던지 여상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다 편월에 대한 호칭이 다시 예전처럼 나온 걸 깨닫고는 입을 닫았다.
“괜찮소. 우리 주군과 광운 장군에 대한 얘기야 이 몸도 예전부터 듣고 있었소. 정말 전쟁 하나는 귀신처럼 치르더군. 그래서 이처럼 쉽게 몸을 의탁했는지도 모르지, 허허허.”
“광운 장군이 사주에서 의외로 고생을 하고 계신 모양이오. 그들의 북진이 조금만 더 빨랐어도 우리들은 한결 손쉽게 호가 부자를 제압했을 텐데…….”
“호윤천 일가의 전횡은 이 몸도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익히 듣고 있던 참이오. 그런 점에서 곽 장군의 거병은 우리 무장들의 기개를 만천하에 떨친 일이었소.”
이들의 얘기는 사뭇 겉돌기만 했다. 장차 편월의 태도에 따라 어쩌면 적으로 돌아서야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탓이었다.
이 점은 두 사람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그러니 대화는 간간이 끊기고 서로의 눈이 마주치면 옅은 미소를 떠올리며 술잔을 비웠다.
“동쪽의 정세는 어떻소? 가겸후가 본격적으로 강국과 허주의 공략에 나섰다는 얘기를 들었소이다만.”
이번에도 짤막한 침묵을 먼저 깬 건 여상계였다. 그로선 아무래도 부탁하러 온 입장인지라 마냥 입을 닫고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소식은, 율천국이 식운관을 점령했다고 하오. 그리고 가겸후는 주력을 이끌고 영산으로 향했다고 하오.”
“영산으로? 그렇다면 황제 폐하를 습격한 강국과 상초국은 어떻게 하고?”
어쨌든 곽가군이 대외적으로 세운 명분은 강국과 상초국을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여상계는 이처럼 당연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거야 알 길 없지만, 아무래도 가겸후가 강국을 치고 있는 사이 허주의 조환이 영산 탈환을 위해 군사를 움직인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오. 아무리 황제 폐하를 위한 출병이라고 하지만 뒤가 시끄러워서야 제대로 싸울 수 없지 않겠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천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강국과 상초국을 그대로 둔단 말이오?”
“가겸후는 한차례 식운관을 뺏겼었소. 그걸 다시 되찾았으니 한동안 강국은 눌러둘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오. 게다가 아무래도 강국보다는 허주를 치기가 쉽지 않겠소. 쉬운 적부터 먼저 무너뜨리고, 그 뒤에 강국을 다시 칠 작정인 것 같소.”
“하긴 생각해 보면 우리 곽가군으로선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소. 기껏 달려갔더니 가겸후가 모두 해치워 버렸다면, 우린 흙먼지만 잔뜩 마신 꼴이 됐을 테니까. 아무튼 이번에 꼬마, 아니 편월 대장군을 만나 타합을 볼 때 많이 도와주시기 바라오.”
여상계의 말에 거규는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곽가군이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야 어떻든 그 실상은 호윤천 부자에게 쫓기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조차 여의치 않으니 이처럼 자신에게 와서 아쉬운 소릴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게 딱해서 거규는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옛 파양주 각 성의 분위기는 어떻소? 거기도 호윤천 부자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무장들이 많을 텐데…….”
“우리가 어떻게 윤주까지 올 수 있었겠소? 지나는 곳에 있는 성주들은 호윤천의 눈치를 살피느라 대놓고 도와주진 못했지만 다들 은근히 길을 터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소. 더러 싸움을 걸어 온 곳도 있었지만, 그 역시 거짓 싸움 한 번으로 길을 비켜 주더이다.”
“그렇구려. 그래도 고초가 크셨소이다. 자, 한 잔 더!”
거규가 다시 술병을 들었을 때, 한 명의 무장이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
“군량 일만 섬과 합진성으로 파견할 사자가 준비되었습니다.”
“오, 그런가? 빨리도 준비했구먼. 군량을 호송해 갈 병력도 준비되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알겠네. 그럼 여 장군, 따로 배웅은 하지 않겠소. 우리 주군께 잘 말씀드려 뜻하시는 바가 이뤄지길 빌겠소.”
“고맙소. 오늘 대접받은 이 술맛, 소장은 잊지 않고 단단히 기억하겠소.”
두 무장의 작별은 짧았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건 서로가 잘 알고 있기에 쓸데없는 정에 얽매이지 않고 거규는 보냈고, 여상계는 떠났다.
밖으로 나가는 여상계의 뒷모습을 보며, 거규는 곽가군의 뜻이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 * *
위휘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동쪽 끝에 해당하는 탄금성에 있는 지두룡은 요즘 살이 쑥쑥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율천국이 강국을 초토화시켜 버릴 것 같아 연일 사자를 보내 상황을 보고하고 있음에도 여태 이렇다 할 대답을 듣지 못한 까닭에서였다.
이제 지두룡은 결정을 내릴 작정이었다. 그사이 꾸준히 모은 병력이 약 삼만에 이르고 백성들도 십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선 백성들부터 윤주성으로 이주시켜야 한다.’
이건 한 성을 맡은 무장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될 일이었다.
지금 윤주성엔 강숙이 들어가 있다. 그 역시 처음 이끌고 왔던 위휘군에, 나름대로 모아들인 장병들을 합치면 오만은 헤아릴 만한 병력을 갖추고 있을 테니 여차하면 그쪽으로 철수해서 버티면 강국을 무너뜨린 율천국의 예봉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윤주성으로 물러간다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데 있었다. 전국의 무장들은 왕왕 주군의 명과 배치되는 행위라도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군사를 움직일 때가 없지 않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격을 감행할 때 얘기다. 있는 성을 버리고 물러갈 때의 독단적 행위는 비겁자라고 손가락질받기 십상인 것이다.
어쩌면 지두룡은 훌륭한 장수가 아닐지도 모른다. 잡가군 출신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지난 침사성 전투 때 한쪽 발까지 잃었다. 무장임을 떠나 한 사람으로서도 타인들보다 모자란 부분(?)이 없지 않다.
그 점을 잘 알기에 지두룡은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다리로도 안전하게 말을 타기 위해서 수천 번은 낙마를 했고, 제자리에 선 채로 사방의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손에서 피가 배어 나올 때까지 창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 결과 지금은 부하들과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 존경을 얻어 내게 되었다. 그 모든 게 이 탄금성이 있기에 가능했고 그래서 지두룡은 이 성을 버리기 싫었다.
그러나 이 성에서는 율천국의 군세를 막을 수 없다. 이천강을 건너 제운교를 끊고, 석축산 영채와 윤주성을 연결하는 긴밀한 방어 막을 구축해 도강하는 적을 막아야 한다. 그게 병법이다.
‘뻔히 알지만 난 그럴 수 없다.’
진심이었다. 이대로 합진성에서 아무 말이 없어 단독으로 행동하게 된다면, 지두룡은 탄금성의 병력을 이끌고 강국으로 쳐들어갈 작정이었다.
어떤 형태의 것이 되었든 후퇴란 건 명에 의해서 하는 것뿐이다. 그게 무장이 마땅히 해야 될 도리라고 생각했다.
‘강국에 파견한 사자가 돌아오길 기다려 그 얘기를 들어 보고 거취를 결정하리라.’
탄금성은 원래 강국 땅이다. 그래서 지두룡은 주기적으로 강국의 사정을 알기 위해 사자를 파견하곤 했고 율천국과의 분쟁이 본격화되면서부터 그 빈도가 더욱 잦아졌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속셈으로 보낸 사자가 바로 그제 탄금성을 출발했다. 통상 열흘 정도 걸리니, 이제 칠팔 일 정도 지나면 돌아올 터였다.
만약 그때까지 합진성에서 별다른 명이 없다면, 그 후로 지두룡은 오롯이 혼자 결정하고 행동할 결심이었다. 뭐 버려진 셈 치면 되지 않겠냔 말이다.
“윤주성의 강 장군이 오셨습니다.”
“그래? 어서 뫼시어라.”
밖에서 들린 부하의 보고에 지두룡은 화들짝 생각에서 깨어났다.
강숙이 이 탄금성에 오는 건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가 윤주성으로 들어간 이후로 이런저런 핑계로 들락거리곤 했다.
“강국의 전황에 대한 보고는 없었소?”
“합진성은 여전히 침묵 중이오?”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자마자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는 싱겁게 웃어 버렸다. 이미 둘 다 그 답을 알고 있는 까닭에서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인 행차요?”
“지 장군이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서 왔소이다. 참다못해 강국으로 치고 나가시는 거나 아닌지 해서 말이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소.”
두 사람도 한때는 서로가 말을 놓던 사이였다. 위휘군이 창설되고 각자 장수가 되면서 말투도 이처럼 달라졌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지 장군도 잘 아실 게요. 여기서는 그저 꾹 눌러 참고 있다가 강국의 유민이나 패잔병을 수습해 철수하시는 게 지 장군이 할 일이오.”
“명이 있기 전엔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소!”
강숙의 설득에 지두룡은 자신의 고집을 조금도 꺾지 않았다.
“지 장군, 싸움이라면 이 강숙도 마다하지 않는 성질이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잡가군에서 막싸움을 하던 때가 아니오. 그러니 우리 모두 자중합시다. 며칠 앓고 계시던 주군께서도 이제 일어나셨다고 하니 곧 합진성에서 명이 내려올 게요.”
“뭐? 언제 주군이 편찮으셨소?”
“한 닷새 매섭게 앓으셨나 보오.”
“그 얘길 왜 내겐 알려 주지 않았소? 그것도 모르고 난…….”
“지 장군이야 강국 정세를 살피고 그에 따라 대처를 하셔야 하니 다른 곳에 정신을 쏟을 겨를이 어디 있었겠소. 그래서 일부러 알리지 않고 있다가, 쾌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달려온 거요.”
확실히 강숙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듯했다. 맹아와 더불어 급선봉을 도맡다시피 했던 과격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차분히 지두룡을 설득하는 품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저께 사자를 강국으로 또 파견했소이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 말이 없다면, 난 내 뜻대로 하겠소.”
“알겠소. 그때까지 주군께서 아무 명도 내리지 않으신다면 나도 윤주성의 병력을 이끌고 지 장군과 합류하겠소.”
단호한 지두룡의 말에 강숙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싸움 좋아하는 예전의 성정이 되살아난 건 결코 아니었다.
‘일단 합류해서 싸우다, 여의치 않으면 지 장군과 함께 철수한다.’
그렇게 되면 지두룡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혼자서 탄금성 병사들을 이끌고 싸운다면 혹 옥쇄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자신과 윤주성 병력이 함께하면 전멸을 각오한 공격 따위는 쉽사리 감행하지 못할 터였다.
‘근데 슬슬 손이 근질거리는군.’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지두룡을 바라보며 강숙은 난감한 미소를 떠올렸다. 가슴속에서 싸우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만 꿈틀거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