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촌진척得寸進尺
1
“보시다시피 깨끗하게 졌소.”
체면도 염치도 없이 병사들 사이에 섞여 배부터 채우고 있던 편월이 송지를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볼때기 미어터지게 음식을 씹고 있던 참이어서 그중 일부가 후드득 밖으로 튀어 나왔다.
“허어, 차암!”
이것이 지금 당장 송지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편월의 입에서 패했다는 소리가 저처럼 쉽게 나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송지는 역시 백전노장이다. 편월의 맞은편에 앉으며 당장 대비책을 언급했다.
“뭐 어떻소? 그런 일이야 다반사인데. 그보다 당장 합진성에 구원병을 보내라고 해야 되지 않겠소?”
“유산성의 군사들은 어땠소?”
“무슨 말이오, 그게?”
질문에 답변은 안 하고 엉뚱하게도 되레 묻는 편월에게 송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 그들의 사기나 전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묻는 거요. 싸워 봤으니 아실 것 아니오.”
“그 일이라면 뭐, 어느 곳이든 원군은 똑같지 않소. 진형만 으리으리하게 갖추고 정작 싸움이 벌어지면 몸을 사리는…….”
“그렇다면 합진성에 연락할 필요는 없겠군.”
“뭐라고요?”
“원군을 부르지 않겠다고 했소.”
편월의 말에 송지는 아예 할 말을 잊어버렸다. 단순한 숫자 계산도 못하는 바보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변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당장 유산성에서 나온 군사만 해도 오천에 이르고, 아무리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해도 벽곡성엔 천 명 이상의 병사들이 남아 있을 게다.
그에 비해 위휘군은 송지가 이끌고 온 독전대 삼천이 고작이다. 그것도 편월을 따라온 패잔병과, 유산성 병력과의 한두 차례 전투로 인해 발생한 부상병까지 포함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좋게 잡아도 두 배에 이르는 적병이고, 게다가 위휘군은 벽곡성에서 패전한 뒤 쫓겨 왔다. 사기가 그만큼 침체되었으니 싸우기 어렵다는 건 뻔한 일이었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여전히 음식을 씹으면서 편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유산성 군사들이야 한 오백 정도의 유군을 조성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 될 게고, 나머지 이천오백은 당장 오늘이라도 벽곡성 공격을 감행하면 될 거요.”
“미쳤소?”
되튕겨 내듯 언성을 높이던 송지의 표정은, 그러나 다음 순간 미묘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이건 아주 무시해 버릴 것만도 아닌 것 같소이다. 지금쯤 벽곡성 놈들은 승리에 들떠 우리가 다시 급습하리란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게고, 유산성 놈들이야 애당초 싸울 의지가 그리 강한 것도 아니니…….”
동의를 구하며 주위를 돌아보던 송지의 말끝은 흐려지고 말았다. 의논 상대라고 할 수 있는 벽곡성 전투에 참가했던 장수들이 한결같이 먹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어서였다. 다만 거예홍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소. 벽곡성을 치자면 지금이 가장 적기일지도 모르겠소.”
“그렇지. 이거야말로 적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이 될 게요. 그럼 그렇게 알고 병사들을 수배해 두겠소.”
거예홍이 자신의 말에 동조를 해 주자 송지는 곧바로 실행에 옮길 듯 몸을 일으켰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유산성 놈들을 맡을 유군이오. 어느 장수에게 맡길 거요?”
“당연히 이 몸이 맡아야 하지 않겠소. 한창 벽곡성을 치고 있는 와중에 뒤통수를 맞는대서야 말이 되겠소!”
편월의 질문에 송지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이었다. 체력이 달려 실전에 가담하기는 어렵지만 적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노련함은 누구 못지않으니까 말이다.
편월도 그걸 수긍한 듯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가 지금 가장 걱정하고 있는 건 그 자신의 몸 상태였다. 지금은 혼몽산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는지 모르지만 약에 취한 채 밤새워 싸운 육신은 무섭게 휴식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편월의 생각에도 바로 지금이 아니면 벽곡성은 치기 어려울 게 뻔하다. 다음으로 미루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 게고 지금이라면 적들의 피로 역시 아군만큼이나 심할 테니 말이다.
꿀꺽!
입에 든 음식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편월은 몸을 일으켰다.
“자, 잠깐! 그 꼴로 가실 생각이오?”
곁에서 같이 식사를 하던 거예홍이 재빨리 편월을 제지했다. 갑옷도 없는 지저분한 전포 차림에다 가슴엔 여전히 아기를 품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가 입을 만한 갑옷을 구해 주시오. 송 군감이 준비되는 대로 다시 벽곡성을 칠 테니까.”
“그랬다가는 아기가 견디지 못할 거요. 우선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야 하오.”
“응? 그런가?”
아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편월이다. 거예홍의 말에 새삼 품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리 주시오. 마침 식사가 끝나는 참이니 뜨거운 물도 있소. 우선 그 물에 씻기면 될 게고… 너는 가서 주군께서 갈아입을 전포와 갑옷을 챙겨 오도록!”
한편으론 편월이 건네는 아기를 받아 들며, 거예홍은 한 병사에게 명을 내렸다.
병사가 달려가는 걸 보지도 않고, 거예홍은 받아 든 아기의 강보를 벗겼다.
“남아로군.”
곁에서 고개를 쭉 빼고 있던 편월이 무슨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는 것처럼 댕그랗게 달라붙은 아기의 고추를 보며 말했다.
“애에게 고추 달린 것 처음 보시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그 더러운 전포부터 벗어 줘요.”
“저, 전포를? 알겠소.”
편월은 전포를 벗었다. 막 해 뜨기 직전의 새벽 대기가 에일 듯 쌀쌀했지만 이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찌익, 찍!
거예홍은 편월의 전포를 거침없이 찢어발겼다. 아기의 배변에 사용할 모양인지 지저분해진 부분은 버리고 쓸 만한 천만 따로 챙겼다.
“물도 주시오. 애를 씻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그때쯤 벌써 거예홍의 행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막 식사를 끝낸 뒤라 약간 한가해진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다시 큰 소리로 울어 재끼는 아기가 그들에겐 신기하기만 했다.
누군가 식후 배급으로 병사들에게 나눠 주려고 했던 뜨거운 물이 든 통을 건네줬고, 거예홍은 거기에 천을 적셔 아기의 몸을 닦았다.
“허어, 그놈 우는 소리가 우렁찬 걸 보니 장군감이로군.”
“저 고추 좀 보게. 마치 번데기가 붙은 것 같구먼. 이크, 또 싼다.”
“날씨가 추워 감기 걸리겠네. 얼른 물을 더 가져오세.”
병사들이 각기 한마디씩 하며 거예홍 주변을 에워쌌다. 그중 몇 명은 물을 더 가지러 가기도 했다.
거예홍은 말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추운 날씨인지라 이처럼 사람들이 모여들면 냉기는 차단되고 온기가 전해진다. 아기가 감기에 걸릴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얘기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응원 속에서 아기는 목욕이 끝나고 조금 전에 찢었던 편월의 깨끗한 전포에 싸였다.
“자, 이거라도 좀 먹이시오. 진중에 있는 염소젖이오.”
누군가 거예홍에게 대통을 내밀었다. 아기가 있는 걸 보고는 지금 막 짜 왔는지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대통을 받아 든 거예홍은 아기의 입가에 염소젖을 조금 흘렸다. 제대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아기는 그 자그만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젖을 삼키려 했다.
“옳지, 잘 먹는다. 그래. 먹어라, 먹어.”
“탈 나지 않을까? 아직 눈도 떼지 못했는데, 엄마 젖이 아니라 염소젖을 주면?”
“그렇다고 저 갓난애에게 우리가 먹는 걸 줄 순 없잖은가. 굶기는 것보다는 저렇게라도 먹여야지.”
이번에도 둘러선 병사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했다. 이 살벌한 진중에 난데없이 등장한 아기는 그만큼 생경한 존재였다.
“너무 많이 먹이는 것은 좋지 않소.”
대통에 든 염소젖이 절반쯤 줄자 거예홍은 더 이상 주지 않았다.
그러자 아기는 마치 벌에 쏘인 것처럼 커다란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먹는 음식이 염소젖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것마저 잃었다는 상실감을 느낀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출동이다! 출동 준비!”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전령들이 각 소부대를 돌며 고함을 질러 댔다.
동시에 조금 전 거예홍의 명을 받고 달려갔던 병사가 갑옷 한 벌을 가져와 편월에게 건네주었다.
“아기는 어쩔 셈이오?”
“거 장군이 잘 다루니 당분간 맡아 주시오.”
“뭐요? 아기를 데리고 싸움을 하란 말이오? 난 그럴 수 없소!”
자신에게 아기를 맡길 듯한 편월의 말에 거예홍은 딱 잘라 거절해 버렸다. 가뜩이나 어제 전투에선 제상대에 배속되어 심통이 나 있는 참이었다. 아기를 맡게 되면 오늘도 제대로 싸울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아무래도 오늘은 벽곡성을 떨굴 수 있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가장 먼저 돌입하는 영예를 차지하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편월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거예홍의 거절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아기를 받아 들었다.
“어쩌실 생각이오?”
거예홍이 조금은 불안한 음색으로 물었지만 편월은 대답하지 않고 조였던 갑옷 끈을 느슨하게 했다.
“설마? 정말 그렇게 아이를 안고 싸우실 생각이오?”
재차 던져진 거예홍의 질문도 무시한 채, 편월은 아기를 갑옷 안에 넣고 단단히 고정시킨 후에야 입을 열었다.
“성가시긴 하군. 빽빽 시끄럽게 우니깐 말이오. 하지만 걱정 마시오. 광운도 이랬으니까.”
“하지만 그러다 애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차피 버려진 아이였소.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싱긋 웃으며 대답한 후 편월은 옆에 서 있는 흑풍의 등에 훌쩍 올랐다.
끼히히히히힝-!
흑풍은 한차례 길게 울면서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그놈 역시 편월이 잠에서 깨어 싸우러 가는 걸 감지하고 기뻐하는 듯했다.
돌연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송지가 배정한 대로 병사들을 편성하기 위해 각 편장이나 아장들이 부하들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이제 곧 준비가 될 거요. 엉? 근데 정말 그렇게 하고 싸우실 거요?”
송지가 달려오며 말을 하다가 아기를 갑옷 속에 품은 편월을 보고는 놀란 듯이 물었다.
편월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래도 송지는 알아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송 장군, 군감으로서 좀 말리시오. 저래서는 위급할 때 아기는 물론 주군의 생명도 위태롭겠소이다.”
송지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고 짐작한 거예홍이 격한 어조로 말했다. 군감의 말이라면 아무리 주군이라 해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송지는 더 이상 그 점에 대해선 따지지 않았다. 위휘군 중 그 누구보다 편월과 광운에 대해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그래도 한 가지 우려하고 있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되도록 선두에는 나서지 마시오.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으니 본대에 남아 지휘에 전념토록 하시오.”
송지의 어투는 비교적 강경했다. 아기에 대해선 뭐라 하지 않았지만 작전에 관해선 군감의 직분을 충분히 이용했다.
이번에도 편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투 시 뒤에 물러앉아 지휘만 하라는 건 그로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걸 익히 알기에 송지는 거예홍을 돌아보았다. 편월을 부탁한다는 무언의 눈빛이었다.
“초 장군은?”
문득 편월이 물었다. 아기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후론 보지 못했다.
“아직도 잠들어 있소. 초 장군은 우리가 데리고 갈 테니 염려하지 마시오.”
“아니요. 초 장군도 벽곡성 공격에 가담시키시오. 가다 보면 정신이 들겠지.”
“그건 그렇고, 만약 벽곡성을 떨궈 좌괴란 자를 잡았을 때 그를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오? 설마하니 아군에 이만한 피해를 입힌 자를 그대로 쓸 수는 없을 것 아니겠소?”
송지는 단호한 어투로 물었다. 벽곡성이 이만한 저항을 한다는 건 뒤에서 좌괴가 계략을 내놓기에 가능한 일이란 걸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사람을 구해 쓰는 건 좋지만 이번에 아군이 입은 피해에 대한 책임은 추궁해야만 한다. 그래야 뭇 장수들의 반감을 줄일 수 있다.
“득촌진척得寸進尺(한 치를 얻으면 한 자를 바라게 된다는 말로, 욕심은 끝이 없다는 뜻)…….”
“뭐?”
나직한 편월의 말에 송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야말로 엉뚱하다면 너무 엉뚱한 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편월의 속내가 어떤지 짐작한 송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벽곡성을 공격할 병력을 따로 저쪽에 집결시켜 두었소. 자, 갑시다.”
송지는 곧장 말 머리를 돌렸고 편월을 비롯한 패잔병(?)들은 우르르 뒤를 따랐다.
“초 장군이 깨어나는 대로 맹 장군은 그와 함께 다시 한 번 귀곡탄으로 가도록.”
“불복! 거긴 초 장군만으로도 충분하오.”
편월의 명에 맹아는 물어뜯을 듯한 눈빛이 되어 대꾸했다. 정말이지 귀곡탄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편월도 이번 공격엔 맹아를 선두에 세우고 싶었다. 비록 의표를 찌른다고는 하지만 그 긴 계단을 돌파하자면 그의 저돌적인 용맹이 필요했다.
하지만 편월이 걱정하고 있는 건 맹아의 피로였다. 자신이 이처럼 힘든데,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한 그는 더할 게 분명했다.
돌연 맹아가 말에 박차를 가해 앞서 달려 나갔다. 혹 편월이 귀곡탄으로 가라고 고집을 부릴 것 같아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편월은 고함을 질러 맹아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건 가슴에 품은 아기의 울음이 그쳤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편월은 재빨리 갑옷 자락을 열어 보았다. 혹시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뇌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아기는 단지 잠이 들었을 뿐이다. 비록 염소젖이지만 조금 전에 먹었던 걸로 포만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문득 편월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맨 살갗에 아기의 가벼운 숨결이 와 닿을 때마다 전율할 것처럼 간지러웠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뭔가가 뭉클하며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분명 편월이 갓난아기를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예쁘거나 귀엽다고 느끼지도 않았고, 그저 주름투성이의 빨간 고깃덩어리가 꼼지락거린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기묘하게 생겼다는 처음의 생각은 씻은 듯이 날아가 버렸고, 오히려 품에서 꺼내면 허전해질 것만 같았다.
‘과연 광운도 날 이렇게 안고 싸웠을까?’
불현듯 스친 생각에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기가 같이 있다는 느낌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아무래도 움직임은 불편한 게 사실이었다.
물론 걷기와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광운의 등에 업히긴 했지만 그때까지 그가 어떻게 했을지 궁금했다.
“우와아아아아-!”
둥두두두두웅-!
편월이 다가가자 천오백의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올리고 북을 두드렸다.
그 순간 아기가 움찔했고 편월 역시 깜짝 놀라 손을 번쩍 들었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다행히 아기는 깨지 않았다. 원래 뜨지 못했던 눈을 더욱 꼭 감은 채 쌔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이러고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지금으로썬 편월이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깨서 꼼지락거리거나 울기라도 한다면 아무래도 신경이 흐트러져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편월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함성과 북소리는 멎지 않았다. 출전하기 전에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라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함성과 북소리가 뚝 멎었다. 맹아가 군주기를 번쩍 쳐들었기 때문이다.
‘저걸 언제 챙겼지?’
편월의 눈에 놀람의 빛이 짧게 스쳤다.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초염은 군주기만큼은 지켜 냈나 보다. 귀감이 될지는 몰라도 한편으론 무모하기도 한 행동이었다.
하긴 이 시대 어느 구석에 무모하지 않은 게 있을까? 사람도, 전쟁도…….
뭔가를 지키려는 사람도, 그걸 뺏으려는 사람도 모두가 어딘가 하나쯤은 무모하고 비이성적인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난세고 전국인 것이다.
‘이젠 멈춰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딱히 안 그래도 좋다고 편월은 생각했다. 누군가는 나서서 이쯤에서 이 왜곡된 시대를 바로잡아야만 한다.
‘그걸 위해서라도 오늘은 반드시 벽곡성을 점령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너무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질 것만 같은 모순이고 역설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뒤집어 보면 그런 모순과 역설이 판을 치고 있기에 난세인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깨부수기 위해 흘리는 피라면 조금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게 편월의 생각이었다.
‘묘한 일이야.’
지금까지 편월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가슴에 아기를 품고 있는 지금, 그건 더욱 강렬하게 자신을 움직이게끔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았다.
이쯤에서 편월은 대기하고 있는 장졸들에게 한마디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야 사기가 더욱 오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만두기로 했다. 가슴에 아기가 자고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말이든 하게 되면 방금 했던 결심이 희석될 것 같아서였다.
말 머리를 돌려 벽곡성 쪽으로 선 편월은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동시에 곁에서 맹아가 들고 있는 군주기도 하늘을 향해 우뚝 세워졌다.
“전군 출동!”
낮지만 단호한 어투로 내뱉으며 편월은 들었던 손을 힘차게 아래로 내렸다.
둥둥두둥!
“우오와아-!”
진군을 알리는 힘찬 북소리와 함성이 뒤를 이었다.
2
확실히 적은 의표를 찔린 모습이 역력했다. 이제 갓 날이 밝아 밥도 채 짓기 전에 위휘군이 들이닥쳤으니, 벽곡성의 병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피로하기도 했다. 이겼다고는 하지만, 지난밤을 거의 꼬박 새웠다는 점에선 위휘군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체력에선 위휘군이 월등히 나았다. 피로한 건 지난밤 전투를 치른 병사들이지, 오늘 새로 공격에 가담한 독전대가 아니니까 말이다.
심리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밤중엔 신 나게 공격했다가, 그 밤이 끝나 가는 새벽엔 오히려 공격을 당하고 있으니 벽곡성 수비는 어이가 없다 싶을 정도로 맥없이 무너졌다.
“여기가 바로 지난밤 아군이 불바다 속에서 속절없이 죽어 갔던 곳이다! 오늘은 놈들을 불태워 주자. 쳐라, 쳐!”
어느새 벽곡성 정문 앞까지 진격한 맹아가 연방 병사들을 독려하며 불화살을 날렸다. 그의 말처럼 지난밤 당했던 화공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거예홍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제 제상대를 이끄느라 마음껏 활약하지 못했던 만큼 오늘은 최선두에 서서 맹렬한 진격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편월은 느긋했다. 처음 송지에게 이 공격을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전쟁이란 얼마만큼 정확하게 적의 의표를 찌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말이다.
더구나 지금 품속엔 갓난아기가 안겨 자고 있다. 마음껏 설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입장이었다.
초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편월의 예상대로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마상에서 건량으로 배를 채우고는 곧장 물질에 능한 병사 이백을 이끌고 귀곡탄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렇게 맹아와 거예홍이 열어 둔 길을 따라 편월이 벽곡성 앞에 도착했을 땐, 벌써 성문은 불이 붙어 검은 연기를 연방 토해 내고 있었다.
‘병력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한눈에 전황을 파악한 편월은 새삼 병력 부족을 절감했다. 변변한 공성 무기도 갖추지 못했으니 숫자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넉넉잡고 일천만 더 있었어도…….’
벽곡성은 한 시진 내로 무너뜨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런 상태라면 오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다른 모든 걸 떠나 그만큼 병사들의 희생이 많아질 걸 생각하면 단순히 이긴다고 해서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단시간 내에 끝내야겠는데…….’
생각을 하던 편월은 피식 싱거운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거야 전쟁에 나선 모든 지휘관뿐만 아니라 하급 병사들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탓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바로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것 말이다.
“자, 조금만 더 그렇게 자고 있거라. 나도 한 바퀴 돌아 봐야겠으니까.”
아기에게 속삭인 편월은 활을 꺼내 들었다.
“꿈에서라도 잘 봐 둬라. 활은 이렇게 쏘는 거다. 이랴!”
다시 속삭인 편월은 곧바로 흑풍에 박차를 가했다. 아직은 거리가 먼 탓도 있었지만 이처럼 움직여야 적의 화살에 맞을 확률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긴 움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활을 쏘는 편월에겐 아무런 제약도 되지 못했다. 그가 날리는 화살은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성루에 있는 적병들에게 꽂혀 들었다.
“와앗, 협문이 열린다!”
“적병이다, 적병이 몰려나온다!”
돌연 성문 가까이 접근해 있던 위휘군이 함성을 울렸다. 불타는 성문 옆에 붙은 협문으로 적이 몰려나왔기 때문이다.
이건 편월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불타는 성문은 곧 무너질 터이고 그렇게 되면 벽곡성 병사들은 성내에서 공격을 당하게 된다. 그보다는 역습을 가하고 나섰으니 가히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만했다.
‘이것도 좌괴란 자의 계책일까?’
한 번도 보지 못한 좌괴의 모습을 그리려고 애쓰면서 편월은 적들이 몰려나오는 쪽으로 흑풍을 몰았다.
“이제부터 조금 흔들릴 게다. 그래도 참아 다오.”
아기에게 말하면서 편월은 안장에 걸린 대도를 집어 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적과 부딪치며 싸워야 한다. 신중을 기하긴 하겠지만 아기의 안전까지 장담하는 건 어려웠다.
하기야 버려진 그 순간부터 이 아기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버린 건지도 모른다. 자신이 광운에게 발견되어 전장을 전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듯, 어쩌면 이 아이도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건지도 모른다.
‘죽는 것도 자기의 운명!’
그렇다면 서로의 생사를 도외시한 채 우선 싸우고 볼 일이다. 자신이 죽으면 아이도 확실히 죽게 되겠지만 자신이 산다면 아이가 살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바로 이게 더욱 용감하게 싸워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압!”
기합성과 더불어 휘두른 편월의 대도에 가장 먼저 그와 맞부딪친 적병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잘 봐 둬라. 싸움은 이렇게 하는 거다.”
갑옷에 완전히 싸여 있어서라기보다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해 볼 수도 없는 아이였지만 편월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운도 자신에게 똑같이 했을 테니 말이다.
적병도 위휘군을 밀어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일단 계단까지만 몰아내면 다시 절벽 위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으니 당연한 전법이었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게 된 건 비등한 병사들의 수였다.
성을 수비하던 병사들이 문을 열고 뛰쳐나오는 건 대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전멸을 각오한 적중 돌파거나, 혹은 지금처럼 성벽에서 밀어내야만 되는 상황에서 선택한다.
지금 벽곡성은 분명 후자에 속하는 경우다. 이때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은 공격군보다 월등히, 적어도 배 이상의 병력으로 시도해야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벽곡성의 병력이나 공격하는 위휘군이나 비슷한 숫자다. 함부로 시도해서는 안 될 전법이란 얘기다.
그러니 편월로선 한편으론 반가웠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좌괴의 작전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혹시 함정인가?’
이미 한차례 야습으로 호되게 당했던 편월이었다. 상식 이하의 작전을 구사하는 적에게 움찔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여기서 움츠러들어서는 안 된다. 설사 어떤 함정이 있더라도 무리를 하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적이다. 그걸 깨부수지 못한다면 후회만 남을 터였다.
“적들이 몰려나왔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다시 맹아가 저 앞에서 설쳐 댔다. 그 역시 싸움에 익숙한 장수인지라 지금이 마구 몰아칠 때라는 걸 안 것이다.
“주군은 뒤로 빠져 애나 보시오!”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편월은 급히 시선을 돌렸다. 거예홍이 스쳐 지나가며 한 말이었다.
편월은 웃음이 치밀었다. 통상 저런 얘기는 남자가 여자에게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아무리 전장을 누비는 장수의 신분이라지만 그 본질까지 바꾸지는 못한다. 여자의 몸으로 저런 말을 태연히 내뱉는 거예홍의 존재가 특별한 이유이기도 했다.
맹아와 더불어 그녀까지 선두로 치고 나가자 밀려 나오던 적들의 기세가 주춤거렸다.
그건 치명적이었다. 비슷한 병력으로 감행한 무리한 작전이 한 번 막히자 그 뒤는 걷잡을 수 없는 붕괴뿐이었다.
“놈들이 물러선다! 계속 밀어붙여라. 성으로 밀고 들어가!”
역시 맹아였다. 적이 잠깐 주춤거린 틈을 노려 단번에 치고 들어간다 싶더니 기어이 일 번 돌입의 영예를 차지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걸 보는 편월의 가슴은 오그라들었다. 지금 맹아는 이 전장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 피곤한 상태일 것이다. 너무 무리하다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하아!”
편월은 거칠게 흑풍을 몰았다. 맹아의 뒤를 이어 거예홍도 두 번째로 뛰어든 것을 봤지만, 그것만으론 안심할 수 없었다.
“물러서랏! 에잇, 길을 열어!”
신경질적으로 내뱉으며 편월은 연방 대도를 휘둘렀다. 가슴에 아기를 품고 있다는 생각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거기에 신경 쓰느라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보다 열심히 싸우는 게 훨씬 나으니까 말이다.
편월이 막 성문으로 돌입하기 직전 돌연 후방에서 아군의 함성이 들려왔다.
“와앗, 백기다! 성루에 백기가 올랐다!”
“적이 항복했다! 이겼다!”
그 소리에 편월은 다시 흑풍을 몰아 성문에서 떨어졌다. 그래야 성루가 보이니까.
확실히 검은 연기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성루에 백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속지 마라! 놈들은 지난밤에도 저런 간교한 수단으로 아군에 야습을 감행했던 놈들이다. 항복 따위는 없다! 쳐라, 쳐!”
누군가 목쉰 소리로 위휘군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난밤 야습에서 살아남은 아장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그건 묘한 힘을 가지고 위휘군의 가슴을 울렸다. 비록 거의 대부분이 야습을 당하지 않은 독전대였지만, 그 얘기는 익히 알고 있는 상태였다. 같은 일이 다시 한 번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듣는 이의 분노를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우우우-!”
기묘한 함성이 위휘군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흥분해서 내지르는 전장의 외침이 아니라 차분하게 억눌리고 정제된 분노가 폭출된 듯한 소리였다.
“자, 나를 따르라! 들어가서 벽곡성을 깡그리 불사르고 놈들을 남김없이 죽여 버리자!”
“와아아!”
“개새끼들을 죽여라!”
이번에야말로 악이 받친 고함을 지르며 위휘군은 성벽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몰려갔다.
“멈춰라! 전군 멈춰!”
맹아의 목소리가 성루에서 울려 퍼진 건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그건 벌써 분노에 잠겨 이성을 잃은 위휘군의 발길을 제지할 수 없었다.
“멈춰라! 전군 정지! 불복하는 자는 베겠다!”
들어갔던 협문을 막아서며 거예홍까지 소리를 질렀다. 실제로 거부하고 난입하는 자는 벨 듯한 기세였다.
‘무슨 일이 있나 보군.’
편월은 재빨리 말을 몰아 협문 쪽으로 다가갔다.
“주군께서 가신다. 길을 열어라.”
그 말은 흥분한 위휘군의 귀에도 들어박혔나 보다. 협문을 향해 쇄도하는 병사들이 분분히 길을 비켜 주었다.
“무슨 일이오, 거 장군?”
“적이 항복했소. 아니, 적중에 반란이 일어난 것 같소.”
“반란이라니?”
“자세한 건 모르겠소. 우리가 들어왔을 때 백기가 휘날렸고, 성주는 포박된 상태였소.”
“성주가? 어디 있나?”
편월로서는 한밤중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평소와 말투가 달라졌다는 것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저쪽이오.”
거예홍이 가리키는 곳으로 편월은 눈을 돌렸다. 한 명이 단단히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뒤로 몇 명의 병사와 민간인 한 명이 역시 부복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전형적인 항자降者의 모습이었다.
‘좌괴?’
편월은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싸움이 한창인 이곳에 민간인이 있다면 좌괴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병사들을 진정시키시오.”
거예홍에게 말한 후, 편월은 그쪽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아, 주군!”
마침 성루에 올라가 고함을 질렀던 맹아도 서둘러 뛰어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자가 벽곡성주라고 하오. 그리고 저 사람은 주군이 찾으시던 좌괴.”
맹아는 호들갑스럽게 사람들을 소개(?)했다. 일 번 돌입의 영예를 안았으니 얼굴 가득 자랑스러움이 들어차 있었다.
편월은 포박된 채 꿇어앉은 벽곡성주 앞에서 흑풍을 멈췄다. 그러나 말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감히 위휘군에 저항한 죄 죽어 마땅하나 모,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성주는 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며 구명을 청했다. 무장의 기개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자였다.
“성주를 포박한 자는 누군가?”
“나요.”
벽곡성주를 무시한 채 묻는 편월의 질문에 좌괴가 고개를 똑바로 쳐든 채 대답했다.
“이유는?”
“이자에게 벽곡성은 너무 큰 옷이었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설치다가는 넘어지기 십상이오.”
“단지 그것뿐인가?”
“시류를 볼 줄 모르는 멍청한 면도 있소. 이런 자에게 백성을 맡긴다면 백성들은 한시도 편히 살 수 없을 게요.”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이자는 항복할 시기를 놓쳤소. 거짓 항복에 이은 야습까지는 내 계책이었지만, 야습으로 위휘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준 뒤 다음 날 깨끗이 항복했어야 했소. 그랬다면 위휘군에서의 이자의 가치도 한결 높아졌을 거요. 한데 이자는 음식에 혼몽산을 넣고 그것도 모자라 화공까지 감행했소. 항복의 시기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항복할 길마저 스스로 막아 버린 멍청한 자요.”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편월의 눈매가 점차 가늘어졌다. 누가 보아도 살기임에 분명한 빛이 그 사이에 번뜩이고 있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직접 만나 본 좌괴는 편월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 자신이 모셨던 성주를 함부로 대하는 게 특히 거슬렸다.
‘죽여 버릴까?’
만약 좌괴가 무장이었다면 편월은 이런 망설임도 없이 베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극명한 예로 지금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벽곡성주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있잖은가 말이다.
그러나 좌괴는 무장이 아니라 서생이다. 게다가 그가 보인 태도나 내뱉은 말 중에선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점은 여느 무장보다 나아 보여 마음에 들었다.
“주군?”
편월의 눈치가 심상치 않자 맹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어쨌든 벽곡성은 이제 항복했다. 무엇보다 그 처리부터 먼저 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도 간헐적으로 싸우고 있는 양군의 병사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
편월도 그 점은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문답은 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일단 항복은 받아들이겠소. 성주의 포박을 풀어 주고 부하들을 단속시키라고 하시오. 대신…….”
여전히 마상에 앉은 채 편월은 좌괴를 내려다보았다.
“저자를 포박해서 감금하시오.”
“예?”
맹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좌괴 한 사람을 얻자고 일만 오천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고, 그토록 심한 고생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막상 얻고서 포박, 감금하라는 건 또 무슨 심보냔 말이다.
하지만 맹아는 이내 군례를 갖추며 복명했다. 이제 막 접수한 성이고 성주를 비롯한 나머지 병사 앞에서 주군의 명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상한 자로군요.”
부하들을 시켜 좌괴를 묶으라고 지시한 맹아가 편월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포박을 당하면서도 저렇게 웃고 있으니…….”
이어진 맹아의 말엔 불쾌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승리한 자들이 오히려 패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좌괴의 태도가 여유로웠기 때문이다.
“으앵, 으앵!”
편월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품속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크, 깬 모양이군.”
편월은 재빨리 갑옷 속을 들여다보았다. 답답했는지 아기는 손발을 버둥거리며 울고 있었다.
“아, 알겠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라. 맹 장군, 뒤를 부탁하오.”
맹아에게 한마디 남긴 후, 편월은 재빨리 말을 달렸다. 거예홍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아기를 품에 안고 싸우는 걸 처음 봤음에도 맹아는 전혀 낯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광운과 편월의 관계에 대해 무수히 많이 들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좌괴의 표정은 조금 달라졌다. 지금까지 입가에 떠돌던 여유로운 미소가 묘하게 뒤틀리며 굳어졌던 것이다.
“앗, 적이다!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역시 함정이었구나! 쳐라, 죽여라!”
돌연 성 안쪽에서 병사들의 함성이 떠들썩하게 들려왔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맹아는 그대로 말을 달렸다. 여기의 일은 편월의 명대로 처리했으니,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는 곳으로 가 봐야 한다.
고함이 들린 곳에 도착한 맹아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새로운 적이라고 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초염이 이끄는 이백의 아군이었기 때문이다.
더듬거리느라 말만 느렸던 게 아니라 이번에 초염은 행동도 굼떴던 모양이다.
3
식운관 공격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적어도 육우맹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우선 식운관은 완전히 점령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어쨌든 오늘 중으로 가겸후를 맞아들일 준비는 끝났다.
최악은 점령한 후 강국군을 추적하는 사이에 일어났다. 마지막 순간에 놈들은 한꺼번에 무너지듯 관關을 버리고 후퇴했고, 이참에 강국을 아예 멸망시키리라 작정했던 육우맹은 즉각 추격전에 나섰다.
그때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창 기세를 올리며 강국군을 추적하다 매복에 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건 정말이지 육우맹의 의표를 찌르는 일격이었다. 매복해 있던 강국군의 진두엔 증두신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고, 그걸 알게 되자 쫓기던 놈들까지 돌아서 필사의 각오로 역습을 감행해 왔다.
결과는 참패였다. 전사자와 중경상자를 합쳐 일만 이상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다시 식운관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열이 뻗친 육우맹은 즉각 병사들을 재정비해서 다시 출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가겸후로부터 명이 내려왔다. 식운관을 탈환한 공로가 지대하니 일단 멈추고 병사들을 휴식시키라는 것이었다.
사실 저건 가겸후가 처음부터 내렸던 명이었다. 그걸 육우맹이 한 번 거부하고 추적에 나섰으니, 두 번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겸후가 오늘 식운관으로 들어온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봐도 자신의 행위가 과過가 됐으면 됐지 공은 되지 못할 것 같아 육우맹은 불안했다. 애당초 명에 따랐다면 물경 일만 이상이나 되는 병력을 희생시키지 않았어도 됐을 테니 말이다.
육우맹은 관문 앞에 도열한 병사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일만의 의장대가 가겸후를 맞기 위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보며 육우맹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 나이만큼 산 것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언제 죽어도 여한 따위 있을 리 없으니, 당당한 모습으로 가겸후를 맞기로 했다.
오래지 않아 가겸후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가 하사한 구석 중 일부인 마차와 일산이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의장대에 배속된 백 명의 고수가 한꺼번에 북을 울렸고, 그에 맞춰 병사들은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두웅!
“대왕 전하, 만세!”
두웅!
“대왕 전하, 만세!”
두웅!
“만세, 만세, 만만세!”
일만의 의장대뿐만 아니라, 관문 목책 위에 도열해 있는 병사들까지 같이 고함을 지르자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천지가 들썩거렸다.
그 사이로 가겸후가 탄 마차는 서서히 들어섰고 병사들의 함성은 더욱 높아졌다.
육우맹이 재빨리 마차로 다가가자 함성이 씻은 듯 끊어졌다.
하지만 마차 밖으로 가겸후의 모습이 보이자 만세 소리는 다시 터져 나왔고 북을 비롯한 취타대의 연주가 울려 퍼졌다.
비록 마차와 일산을 갖춘 행렬이었지만, 정작 가겸후는 갑옷을 단단히 차려 입은 모습이었다.
“대왕 전하를 뵈옵니다.”
“수고 많았소, 육 장군.”
아직도 귀청이 터질 듯한 함성과 음악 속에서 정중한 군례를 갖추는 육우맹에게 가겸후는 우선 치하부터 했다.
“증두신은 어떻게 되었소? 듣자니 식운관 아래의 매복에선 그가 앞장을 섰다던데?”
이어진 가겸후의 질문에 육우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증두신을 죽이지 못한 걸 책망하고 있다고 느낀 탓이었다.
“아깝게 놓쳤사오나, 다음엔 반드시 그자의 목을 베어 바치겠나이다.”
비록 육우맹의 목소리는 높았지만 주변의 함성으로 인해 가겸후의 귀에만 간신히 들렸다.
“알겠소. 그만 들어갑시다.”
“예. 이제부터 이 식운관은 영원히 우리 율천국의 소유가 되었사옵니다. 전하부터 어보를 옮기시지요.”
가겸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호위를 맡고 있는 근위대원들이 그의 주변을 삼엄하게 에워쌌다.
“전하, 소장에게 다시 한 번 강국 정벌을 명해 주소서. 비록 불의의 일격을 받았지만, 증두신은 지금 제정신이 아닐 것이옵니다. 이럴 때 치면 강국은 조만한 전하의 수중에 들어올 것이옵니다.”
“서두르지 마시오. 일이란 다 때가 있는 법이오.”
“지금이 바로 그때이옵니다.”
“허어, 서두르지 말래도. 천천히, 천천히…….”
육우맹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가겸후는 성큼 앞장서 걸으면서 손을 들어 병사들의 환호에 답했다.
그렇게 가겸후는 임시로 마련된 영왕전迎王殿으로 들어갔다.
사실 영왕전이라는 이름은 그럴듯했지만, 여기가 식운관이라는 하나의 관문이다 보니 소박하다 못해 누추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가겸후는 문제 삼지 않았다. 거친 통나무를 다듬어 그 위에 호피를 깔아 둔 의자에 앉아 다시 한 번 육우맹의 노고를 치하했다.
“육 장군 덕에 내 오랜 숙원이던 식운관을 손에 넣게 되었소. 그 공훈은 누가 뭐래도 일등이오. 수고하셨소.”
“당치 않으시옵니다, 전하. 소관이 부족하여 이참에 강국을 멸망시키지 못했사옵니다. 그 점에 대해 이처럼 죄를 청하니, 벌하여 주시옵소서.”
가겸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육우맹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했다.
이건 육우맹의 진심이었다. 명령까지 어기면서 공격에 나섰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않대도! 그보다는 영산 전투가 시급한 모양이오. 조환이 어지간히 각오를 하고 나섰는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구려. 그래서 이번엔 과인이 직접 나설까 하오. 하니 육 장군은 군사 삼만을 거느리고 이 식운관을 단단히 지켜 주기 바라오.”
“예엣?”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쳐들어 육우맹은 가겸후를 쳐다보았다. 이건 정말이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명이다.
“강국에 대한 공격은 추후 과인이 다시 지시를 하겠소. 그때까지는 이 식운관만 단단히 지키도록 하시오.”
“하오나 전하, 지금 강국은 괴멸 직전이옵니다. 만약 여기서 숨 돌릴 틈을 준다면 그들은 다시 발톱을 드러낼 것이옵니다. 게다가 상초국에서도 더 많은 원군이 당도하게 되면, 그 뿌리를 뽑아 버리는 건 어렵게 되옵니다. 이 점을 통촉해 주시오소서!”
“상초국 원군이 싸우는 꼴은 육 장군도 보지 않았소. 그런 자들이야 더 많이 몰려온다고 해도 크게 걱정할 것도 없을 게요. 설사 온다고 해도 강력한 우리 수군으로 바다에 수장시켜 버리면 될 게요.”
육우맹은 말문이 턱 막혔다. 가겸후는 더 이상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육우맹이 완전히 승복한 것도 아니었다.
‘이건 누군가 뒤에서 날 음해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제 조금만 더 공격하면 강국을 멸망시킬 수 있는 지금, 가겸후가 자신을 제지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육우맹은 그 인물이 누군지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폐포자였다.
폐포자의 능력이야 육우맹도 인정하고 있는 바였다. 특히 수전에선 그가 없었다면 지금도 상초국에 고전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만약 거기까지였다면 육우맹도 폐포자와 친교를 두텁게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선을 넘어 가겸후와 자신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점은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알겠소, 육 장군? 과인은 오늘 하루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에 병력을 이끌고 영산으로 가겠소. 그리 알고 준비를 해 주시오.”
“조, 존명!”
육우맹은 머리를 조아리며 복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책임져야 될 부분도 분명히 있으니, 지금은 한 발짝 물러설 때였다.
“그럼 소장은 명을 받들어 만반의 준비를 갖추겠나이다.”
“오, 수고해 주시오.”
그 자리에서 물러난 육우맹은 즉각 병력을 나누기 시작했다.
다음 날.
가겸후는 십만을 상회하는 대군을 이끌고 식운관을 출발해 영산으로 향했다.
이게 황제 서거의 소식을 천하에 알리기 위한 시기 조절이란 걸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 * *
적린赤麟은 대대로 율천국에 종사해 온 무가 집안의 자손이었다. 조부의 대에는 상장군에 이르기도 했지만, 가겸후가 선왕을 칠 때 반대했다는 이유로 가산이 적몰되고 파직되는 수모를 겪었다.
비록 집안은 몰락했지만 무장으로서 적린의 자부심까지 망가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바로 그 무장으로서의 자긍심이 적린으로 하여금 생판 처음 보는 여인 셋을 호위하여 진강도를 걷게 하고 있었다.
‘고 장군의 말씀에 의하면 고귀한 분들이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국경을 넘겨 드리라는 걸까?’
이건 세 명의 여인을 맡은 이후로 늘 적린을 괴롭히던 의문이었다.
하지만 일을 부탁한 고 장군은 자세한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목숨을 걸고 나라 밖으로 내보내 주라고만 했다.
이상한 부탁이었지만, 적린은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고 장군이 적극적으로 탄원歎願해 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적씨 가문은 씨도 남지 않고 가겸후에게 참살당했을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적린은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시비인 듯한 두 명의 여인이 한 명을 호위하는 형국이었다.
사실 일행의 속도가 느린 건 순전히 호위를 받는 한 명의 여인 탓이었다. 그녀는 먼 길을 걸어 본 적이 없는지 조금만 가도 피곤해했고, 약간의 고통도 견디지 못했다.
그에 비해 나머지 두 명의 여인은 적린으로서도 가끔 섬뜩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예사롭지 않은 무예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건 적린에게 있어 작은 위안은 될지언정 안도감을 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무예가 출중하다고 해도 여인의 몸으로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과 싸우는 건 무리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지금 율천국은 이 진강도의 끝인 영산에서 허주와 전쟁 중이다. 평화 시에도 검문이 엄격하기로 소문났으니, 지금은 아예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적린이 처음 이 여인들을 맡았을 때 편하게 국경을 통과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맡은 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대로 무장으로 봉공하고 있으면서 율천국의 모든 국경은 익숙했고, 가문 비전의 알려지지 않은 통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데리고 가야 할 사람들이 여자들이라는 점이었다. 비밀 통로가 왜 비밀 통로이겠는가. 가려져 있는 만큼 위험하기에 그렇게 불린다. 잘 훈련된 병사들도 지나기 힘든 길이니, 여자들에겐 오죽하겠는가.
“저기, 좀 쉬었다 가자는 마님의 말씀이에요.”
시비 중 한 명이 적린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이 편한 길과도 머잖아 작별인데…….’
적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쉬고 다시 출발한 지 채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오늘 중에 목표했던 곳까지 당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조금만 더 갑시다. 쉬기에 좋은 곳이 있으니…….”
“하지만 마님께서 몹시 힘들어하십니다. 그러니 조금만 쉬었다 다시 출발하시지요.”
시비의 말투는 어디까지나 조심스럽고 공손했지만, 말을 거두는 경우는 없었다.
적린으로선 따를 수밖에 없었다. 힘들다는 사람을 무리하게 이끌고 가 봐야 역효과만 난다.
그렇다고 여기서 쉴 수는 없다. 진강도는 군사용 도로인지라 언제 어디서 병사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아니, 적린이 걱정하는 건 병사들이 아니다. 그들의 움직임이라면 미리 간파하고 피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정작 조심해야 될 건 전령들이다. 지금은 한창 전쟁 중이니 그들은 수시로 이 진강도에 출몰할 터였다. 실제로 지난 며칠간 아슬아슬하게 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알겠소. 길가에서 쉬는 건 위험하니 저기 언덕 위로 조금 올라갑시다.”
그 말에는 시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들도 노출된 곳에서 쉰다는 것에 대한 위험은 알고 있었으니까.
이쪽은 은폐되면서, 사방을 감시하기 좋은 곳에 적린은 일행을 쉬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경계했다.
이럴 때 적린이 하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가 하는 것이었다.
‘옛 명성을 되찾으려면 지금이 좋은 때인데…….’
무장을 필요로 하는 곳은 당연히 전장이고, 지금 율천국은 사방의 적을 치느라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있는 중이다. 이럴 때 공을 세운다면 적씨 가문은 다시 한 번 이름을 떨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은인의 부탁이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여자 세 명을 국외로 내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고 장군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힘을 써서 자신을 다시 군문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공을 세워 당당히 복귀하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한평생 그저 그런 무장으로 세월만 허비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제 가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시비가 예의 공손한 어투로 알려 왔다.
“그렇소이까? 지금부터는 길이 좀 험해질 게요. 그리 알고 마님께 마음 단단히 잡숫고 계시라고 일러두시오.”
시비에게 말한 후, 적린은 먼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인들이 뒤질세라 재빨리 따라붙었다.
일행이 다시 진강도에 올라서 일 리쯤 갔을 때, 뒤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전령이다! 그것도 오 명 이상!’
생각과 동시에 적린은 여인들에게 피하라는 신호를 하며 자신도 길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마님이라는 여인이 빨리 움직이지 못해 그녀들의 모습이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 길은 군사들만 사용하는 곳이다. 그대들은 누구기에 여길 지나가는 건가?”
전령들 중 한 명이 여자들 앞에 말을 세우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 와중에도 두 명은 더욱 빠르게 말을 몰아가던 길을 재촉했다.
‘좋지 않다.’
미리 몸을 피해 아직 발각되지 않은 적린은 내심 낭패감을 씹었다. 전령의 숫자는 예상대로 다섯이었고, 그중 둘만 가고 셋이 남았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한꺼번에 다섯 명의 전령을 파견한다는 건 다섯 군데에 전갈을 하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극히 소중한 내용을 전혀 차질 없이 전달해야만 될 경우에 택하는 방법이다.
근데 두 명의 전령이 달려간 곳에 있는 건 영산이다. 한 군데만 전달하면 된다는 얘기다.
‘이건 극히 중요한 사안이로군.’
“아악!”
은신한 채 생각을 거듭하는 적린의 귀에 다급한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남은 전령 셋이 여인들에게 창을 휘두르며 위협한 탓이었다.
‘좋지 않다.’
같은 생각을 반복하며 적린은 몸을 움직였다. 세 명의 전령을 해치우는 건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
문제는 두 명이 먼저 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라도 동료가 도착하지 않은 걸 알게 되면 그들은 대대적인 수색을 가할 터이고 앞길은 더욱 험난해질 게 분명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게 급선무니 전령들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적린은 몸을 날려 그 중 한 명을 베었다.
“앗, 웬 놈이냐?”
남은 두 명이 적린의 존재를 발견했지만, 제대로 손쓸 여유도 없었다. 어느새 시비들이 비수를 뽑아 들고 갑옷과 갑상 사이로 찔러 넣어 배 속을 완전히 휘저어 버렸기 때문이다.
“마님을 말에 태우시오. 그대들도 타고.”
적린은 서둘렀다. 발각되지 않는 게 최선이었지만, 일은 벌써 벌어져 버렸다. 적의 말이지만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야 한다.
“자! 마님, 어서!”
시비들도 서둘렀지만 마님은 승마에 익숙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잔등에 앉자마자 움직인 말 때문에 다시 떨어질 듯 몸이 옆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앗, 마님!”
시비가 그녀의 상체를 받쳐 낙마는 면했지만, 그 바람에 마님의 품에서 작은 보퉁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용물이 드러났다.
‘앗, 저건?’
시비 중 한 명이 재빨리 주워 다시 보퉁이에 쌌지만, 이미 그걸 본 적린의 눈은 커다랗게 불거지고 말았다. 아주 고위층 인사들이나 사용하는 직인임을 알아본 까닭에서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놀라 버린 적린이었다. 만약 그게 옥새라는 걸 알았다면 혼백이 달아났을지도 몰랐으리라.
‘이거, 어깨가 더 무거워졌군.’
고 장군이 어떤 사람을 부탁했는지 아직도 알지 못했지만 적린은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비 중 한 명이 같이 타고서야 마님은 겨우 안정이 되었다.
그제야 일행은 말을 타고 진강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짧은 거리에 불과할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