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월 8
난세기연亂世奇緣
1
벽곡성 쪽에서 솟구친 불길을 거예홍은 처음엔 보지 못했다. 제상대를 이끌고 고생했던 뒤였고, 편월에 대한 분함을 이기지 못해 노기를 억누르느라 뒤척이다 간신히 잠든 탓이었다.
“장군, 잠시 나와 보셔야겠소!”
거느린 아장이 진막 밖에서 고함을 지르는 걸 들은 뒤에야, 거예홍은 간신히 잠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뭔가? 별다른 일이 없으면 깨우지 말라고, 앗!”
아장을 질책하던 거예홍은 다급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벽곡성으로 통하는 어슴푸레한 어둠에 묻힌 계단 위에서 화광이 충천하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보자마자 그녀는 달렸다. 다른 말도 없었다.
“장군, 어딜 가시오?”
“보면 모르나? 적의 야습이다! 주군께서 위험하시다. 모두 출동!”
말이 끝났을 때 그녀는 벌써 마구간에 당도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탈 수 없었다.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미처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군, 갑옷부터 입으시오. 그사이 출동 준비를 해 두겠소.”
뒤따라온 아장이 고함을 지르며 거예홍을 잡아끌었다.
그녀도 순순히 진막으로 돌아가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혼자 달려간다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다 냉정하게 대처해야만 한다.
거예홍이 무장을 갖추고 밖으로 나서자 과연 아장은 그사이 출동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대략 천오백 정도 되는 인원이었다.
하지만 전투력까지 그렇게 계산해서는 안 된다. 저들 중 상당수는 어떻게든 부상을 입고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거기에 구애될 거예홍이 아니었다. 이건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우선은 편월을 구하고, 여력이 있다면 최대한 많은 전력을 퇴각시키는 게 목적이다. 그저 적들의 배후를 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터였다.
“모두 말에 타되 은밀히 움직이도록. 자, 출동!”
거예홍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비록 신병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구구하고 자잘한 명은 오히려 그들의 손발을 묶어 버릴지도 모른다.
병사들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해야 되는지 잘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선두에서 달리는 거예홍의 걱정은 오직 한 가지였다.
‘만약 적들이 또다시 절벽 위에서 공격한다면?’
아군을 구원하기도 전에 자신들이 먼저 전멸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야만 한다. 다른 모든 걸 떠나 한평생 무장으로 이름을 드높인 아버지 거규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한다.
‘과연 그 이유뿐일까?’
달리면서도 거예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벽곡성 쪽에서 난 불을 봤을 때 그녀는 솔직히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편월의 얼굴만이 뇌리에 가득했다.
주군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석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거예홍은 아버지인 거규가 투항을 했을 때에도 홀로 내성으로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었다. 편월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 강할 턱이 없었다.
거예홍의 머릿속이 아직도 뒤숭숭하게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말은 벌써 계단을 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절벽에서 가해지는 적의 공격은 없었다. 아무래도 병력이 달리니 여기까지 매복을 둘 수는 없었으리라.
“이대로 치고 들어가는 거요?”
아장이 옆으로 바짝 붙으며 물었다. 되도록 첫 공격에서 편월을 구해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면 일단 멈춰서 자세한 전황을 살펴야 한다.
문제는 촉박한 시간이었다. 저 정도 불길이라면 벌써 적의 야습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봐야 한다. 전황을 살피고 자시고 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대로 돌격한다. 적들은 무조건 베어 넘겨.”
이게 거예홍이 내릴 수 있는 최상의 명이었다.
“와아!”
“거짓 투항한 벽곡성 놈들을 쳐라!”
그때까지 말발굽 소리 외엔 일절 내지 않던 병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질렀다. 그 속에는 어쩔 수 없는 분노가 스며 있었다.
불과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항복을 약속하면서 포로까지 풀어 줬던 벽곡성 놈들이다.
그런데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아니 불과 몇 시진 만에 이런 비겁한 야습으로 뒤통수를 쳐 왔다. 아무리 적을 속여도 괜찮은 게 전쟁이라지만 이건 용납할 수 없었다.
“우와아아-!”
비록 천오백에 불과했지만, 거예홍의 뒤를 따르는 위휘군이 지르는 함성은 그 몇 배 이상의 인원이 달려드는 것 같았다.
함성과 더불어 달리는 속도도 한결 빨라졌다. 계단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소릴 질렀는데 벌써 거예홍의 시야엔 당황하는 적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거예홍으로선 망설일 게 없는 일이었다.
“길을 터라!”
남자보다 훨씬 큰 목소리로 일갈을 토한 후 수중의 창을 마구 내질렀다.
팍, 파박!
한차례씩 내지를 때마다 거예홍의 창은 정확하게 적병을 꿰뚫었다. 도무지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출중한 무예였다.
하지만 거예홍은 오늘만큼 자신의 솜씨가 둔하다고 느껴진 적이 없었다. 적병 한 명을 거꾸러뜨릴 때마다 팔을 타고 전해지는 강한 반탄감이 유난히 무거운 것 같았다.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뭘 잘못 먹었는지 달리는 게 아니라 금방이라도 제자리에 주저앉을 것처럼 비실대기만 하는 듯했다.
물론 이 모든 건 거예홍의 마음이 조급하기 때문이었다. 벌써 적과 접전을 벌이고 있으면서도 아직 편월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조급증에 그녀는 연방 박차를 가했다.
“장군, 군주기를 찾아보시오!”
삼십여 기를 이끌고 거예홍의 후방을 방어하며 달려가던 아장이 악을 쓰듯 외쳤다.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빠른 시간 내에 편월을 발견하지 못하면 오히려 아군이 당할 판국이었다.
‘미친놈!’
거예홍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지금 이 판국에 자살하려고 마음먹지 않은 다음에야 군주기를 세우고 있을 턱이 없지 않느냐 말이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편월을 대표하는 금색 군주기가 불꽃 속에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저런 미친!”
기어이 거예홍은 속에 담아 뒀던 욕을 입 밖으로 토하고 말았다. 저런 경우가 어디 있냔 말이다. 적에게 야습을 당해 포위된 상태에서 버젓이 ‘나 여기 있소.’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아무리 멍청한 놈이라도 저런 짓은 하지 않는다.
“과연 주군이시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닥쳐!”
아무래도 아장의 생각은 거예홍과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오히려 위험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편월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거예홍은 이런 남자들의 심리가 싫었다. 전쟁은 결코 과시욕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일반 병졸이라면 혹 모를까 일군의 장수, 나아가 한 나라의 왕이 되려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생명을 가벼이 여겨서는 될 일이 아니다. 그게 어디 저 혼자만의 목숨인가?
그래도 어쨌든 치고 들어가야 될 방향은 설정되었다. 그만큼 일이 쉬워졌다는 의미다. 아직까지 편월이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 통하는 얘기지만 말이다.
“자, 모두 따르라. 공격!”
“우와아-!”
거예홍의 명에 따라 천오백의 위휘군은 타오르는 불길보다 더 뜨거운 기세로 군주기가 있는 곳을 향해 치고 들어갔다.
군주기를 세우는 게 자살 행위라는 건 누구보다 편월이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전장에서는 흔히 적장을 노려 공격을 가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수가 없었다. 전쟁의 잔혹한 면은 질리도록 봐 왔지만 추악한 면을 겪은 건 비교적 적었다.
그런데 채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 말을 바꿔 야습을 가해 온 적들을 보니 전쟁 자체에 환멸감이 들었다.
물론 전쟁이란 게 상대를 이기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적을 속인다고 해서 특별히 지탄받아야 할 이유는 분명 어디에도 없다.
‘그러고 보면 내가 너무 순진한 건가.’
주변에서 하나 둘 쓰러져 가는 아군을 보며 편월은 씁쓸한 자괴감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목철린의 최후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 앞에서도 멋만 찾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그렇다. 후회는 언제나 앞서 가는 법이 없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적의 야습을 한 번쯤 의심했겠지만 당한 뒤에는 어쩔 수 없다. 평소 생각했던 대로 멋지게 죽어 주면 그만이다. 적어도 목철린보다는 훨씬 더…….
그래서 자살 행위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군주기를 세우고 있다. 이건 단순히 멋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속절없이 죽어 가는 아군에게 보라는 것이었다. 그들만 죽는 게 아니라 자신도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걸 알림으로써 작게나마 위로를 주겠다는 의도였다.
돌연 편월은 자신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벌써 두 번째였다. 벽곡성 놈들이 탔을 게 분명한 독을 마신 이후로 간간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쓰러져 혼절할 것만 같았다.
‘다음엔 다리통이라도 깨물어야 하나?’
이미 입술은 더 이상 깨물 곳이 없을 정도로 터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나마 맹 장군이 잘 버텨 주는군.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겠지.’
맹아와 근위대원들은 독을 마시지 않았다. 그래 봐야 새로 보강된 일천 명까지 쳐서 천삼백밖에 되지 않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죽거나 부상을 당해 쓰러져 버린 상태였다. 버티고 있는 건 맹아와 오십여 명의 병사들 그리고 군주기를 지키고 서 있는 초염이 전부였다.
하긴 그들도 얼마나 더 견딜지 알 수 없었다. 맹아는 갑옷이 누더기가 될 정도로 싸우다 부상당했고, 같이 독을 마신 초염은 그저 서 있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편월은 다시 한 번 왼쪽 뒤에 서 있는 초염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꼿꼿이 서 있었다.
‘덩치가 커서 그런가? 의외로 잘 버티는군.’
위휘군에서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하는 건 아무래도 화응이다. 그를 제하면 아마 초염이리라.
그래서인지 독도 다른 사람보다 늦게 퍼지는 것 같았다. 편월조차 순간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지는데 그는 여전히 서 있으니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 장군, 우리도 슬슬 뛰어들어야겠지? 마지막 순간에 맥없이 앉아 죽는 건 멋대가리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말은 그랬지만 지금 편월의 뇌리를 채우고 있는 건 목철린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바로 그 최후의 모습이었다.
초염은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편월의 말을 듣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편월은 개의치 않았다. 그 역시 서 있는 건 물론 말하는 것도 힘겨웠으니까.
꽈드득!
다시 한 번 편월은 팔뚝의 살을 물어뜯었다. 그러고는 대도를 한차례 쓱 훑어 꼬나 쥐었다. 손바닥이 쓸고 간 자루엔 진득한 피가 묻어 나왔다.
“아직도 계셨소!”
편월이 막 달려 나가려는 순간, 맹아가 불쑥 나타나며 고함을 질렀다.
한데 그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고함을 질렀는지 그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입만 벙긋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묘한 건 그 말이 편월의 귀에 또렷이 들린다는 점이었다. 설사 맹아의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눈빛만으로 뭘 얘기하는지 알았을 테지만 말이다.
“자! 총공격이오, 맹 장군. 우리 위휘군의 기개를 유감없이 떨쳐 봅시다!”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기개? 이건 개죽음이오. 벌써 초 장군도 죽은 것 같아. 그러니 지금이라도 몸을 피하시오. 있어 봐야 방해물밖에 안 돼!”
재차 고함을 질렀지만 맹아의 입에서는 여전히 쌕쌕 바람 새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말투 역시 예전 잡가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어쨌든 이번에도 편월은 알아들었고 재빨리 시선을 돌려 초염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버티고 서 있었다. 비록 고통에 못 이긴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지만 옆에 세운 깃발과 더불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편월은 보았다. 부릅뜨여 있는 초염의 눈에 생기라곤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맹아의 말처럼 벌써 죽었거나 적어도 선 채로 혼절해 버린 것이 분명했다.
궁금하다고 해서 초염의 생사를 확인해 볼 여유는 없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자신도 쓰러질지 모르니 그 전에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는 게 편월의 생각이었다.
결심한 이상 망설인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도 시시각각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위휘군의 편월이 바로 나다! 쥐새끼 같은 네놈들에게 용사가 있겠냐마는 공을 세우고 싶은 자는 썩 나서라!”
머리 위에서 대도를 천천히 회전시키며 편월은 고함을 질렀다. 그 바람에 용기가 배가되었고 축축 처지기만 하던 몸에도 새로운 힘이 들어차는 것 같았다.
맹아도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입조차 열 수 없을 정도로 탈진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창을 짚고 편월 옆에 버티고 서긴 했다.
사실 편월이 지른 고함은 적보다는 아군을 먼저 끌어들였다. 여기저기서 흩어져 싸우던 위휘군이 그 소릴 듣고 일제히 몰려들었던 것이다.
당연히 적들도 몰려들었다. 위휘군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 있는 게 그들로서도 상대하기 쉬울 터였다.
이건 편월도 바라던 바였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적을 쫓아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타아압!”
커다란 기합성을 지르며 편월은 가장 먼저 포위망을 좁혀 오는 적병들에게 달려들어 대도를 크게 휘둘렀다.
쉬이잇!
붉은 화광을 반사하는 대도의 날은 벌써부터 피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자가 편월이다! 모두 쳐라!”
적들로선 조금도 불리할 게 없는 싸움이었다. 야습은 성공적이었고 위휘군은 독을 마신 상태라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했다. 편월만 제거하면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비록 중독되어 몸은 무거웠지만 일단 싸움에 임한 편월은 한 마리 흉포한 야수였다.
게다가 그 야수는 상처까지 입었다. 비록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해한 것이라지만 몸에서도 연방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야수가 무섭다면 상처 입은 야수는 더더욱 무섭다. 거기다 가장 확실하게 적을 죽일 수 있는 무예를 가진 야수라면, 이미 사람으로선 상대하기 버거워진다. 지금 편월의 모습이 적들 눈에는 딱 그렇게 비쳤다.
역설적이게도 편월의 상태는 정반대였다. 기합과 더불어 첫 번째 대도를 휘두른 순간, 칼은 적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사고와 의식을 베어 버린 것 같았다.
우선 온갖 소음이 사라져 버렸다. 절대 고요의 상태에서 자신보다 적들의 움직임이 훨씬 느리게 보였다.
이건 결코 낯선 현상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율천국의 사자로 갔을 때 처음 나타나더니, 그 후로 아주 드물게 찾아들곤 했다.
이런 상태에 빠진 편월에게 있어 적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느릿하게 움직이는 사물일 뿐이고 그건 베어 버려야 할 존재일 따름이었다.
쉬이잉!
편월의 대도가 허공을 갈랐다. 칼날에 일렁이는 불빛 한 조각까지 세세하게 보일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른 건 짙은 피 무지개였다. 거대한 맷돌보다 훨씬 느리게 회전하는 편월의 대도 앞에 적들은 더욱 천천히 뛰어들었고, 육신은 종이보다 쉽게 잘려 나갔다.
곧이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에 눈이 어두워 무턱대고 덤비던 벽곡성 병사들은 편월의 칼질 한 번에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잘려 나가자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도움이 될 턱이 없다. 몰려서 있는 적병들 한가운데로 편월이 뛰어들었다 싶자, 무정한 대도는 잔혹한 그 날을 번뜩이며 또다시 피를 찾았다.
“놈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무얼 망설이는 거냐? 쳐라! 쳐!”
적장이 연방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의 눈에는 다른 위휘군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편월만이 목표였다.
비록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바람에 편월은 보다 쉬운 싸움을 할 수 있었다. 많이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베어 버려야 할 ‘것’들이 스스로 눈앞에 나타나 주니 아주 수월했다.
문득 충천하는 화광 속에서 은빛 반짝이는 꽃 한 송이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이파리까지 창백하게 탈색된 그 꽃은, 그러나 이내 선홍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와중에 느닷없이 꽃이 필 턱이 없다. 맹렬한 불길 속을 누비는 편월의 대도가 뿌리는 차가운 칼날 빛이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건 적들의 숨을 턱 막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공을 누비는 편월의 대도가 그려 내는 궤적이 겉으로는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였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다. 칼날이 닿는 범위 내에 있는 건 모두 잘라 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는 벽곡성 병사들이었다. 이제 남은 위휘군이라고 해 봐야 불과 십여 명,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모두 도륙할 수 있을 터였다.
적장으로서 안타까운 건 활 공격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완전히 포위된 적은 숫자의 위휘군을 상대로 화살을 쏴 대다가는 오히려 맞은편에 있는 아군이 더 큰 피해를 당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물러서지 마라! 놈들은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다! 조금만 더 밀어붙여라!”
적장으로선 이렇게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좀 희생되더라도 아군끼리 서로 화살을 쏴 대서 죽고 죽이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병사들이라고 그걸 모를까. 잠시 주춤거렸던 그들은 보다 큰 함성을 지르며 편월에게 덤볐다.
여전히 편월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도 서서히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휘두르던 대도도 실제로 느려졌고 무엇보다 다리가 심하게 휘청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치릿!
적병이 내지른 창이 편월의 옆구리를 길게 찢고 지나간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러나 결과적으로 더욱 비참해진 건 적병이었다. 몸에 상처를 입는 순간 편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반사적으로 휘두른 대도에 놈은 두 동강이 나 버렸으니 말이다.
놈을 벤 것과 동시에 편월은 어리둥절해졌다.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온갖 소음과 열기가 한꺼번에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편월을 힘들게 한 건 육신의 피로였다. 이젠 정말이지 대도를 들고 있을 힘도 없었다. 무기와 자신은 한 몸이라는, 어렸을 적부터의 사고와 훈련이 없었다면 진즉에 떨어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겠군.’
다시 돌아온 현실을 의식하면서 편월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굳건히 서 있는 초염의 몸에 두어 자루의 창이 갑옷을 꿰뚫은 채 꽂혀 있었고, 맹아를 비롯한 서너 명이 그 곁에서 사력을 다해 싸우는 중이었다.
‘이만하면 된 것 같군.’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아군보다, 자신의 발밑에 수북이 쌓여 있는 적병들의 시신을 보며 편월은 일말의 만족감을 느꼈다. 저만큼 베었으니 저승길이 심심치는 않을 터였다. 하나같이 자신에게 보복을 하겠다고 아귀처럼 덤빌 테니까.
“자, 덤벼라. 물러서는 자는 내가 용서치 않겠다!”
이 말은 순전히 편월의 객기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으니 적을 끌어들이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과연 벽곡성 병사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장군도 아닌 적장에게서 저런 소리를 들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팔이 심하게 떨리기는 했지만, 편월은 대도를 들어 정면을 겨눴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일 게다. 앞으로도 이 땅 위의 전쟁은 계속되겠지만, 그 속에서 대도를 휘두르는 자신의 모습은 찾을 수 없으리라.
편월은 한차례 기합이라도 토하고 싶었다. 새도 죽을 땐 ‘짹’ 소리를 낸다고 했으니 자신의 최후에도 뭔가 한마디 멋진 말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입술을 깨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무슨 고함이란 말인가. 그런 기력은 남겼다가 적에게 쏟아 붓는 게 좋다.
돌연 적들의 공격이 빨라졌다. 그들 역시 편월의 체력이 다한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남들보다 늦게 되면 그만큼 공훈도 적어지니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좋다고 생각하며 편월은 대도를 힘껏 휘둘렀다. 남은 힘을 모두 쏟아 부은 공격이라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씨와웅!
대도의 시린 칼날이 불길 속에서 또 한 번 차디찬 꽃을 피웠고, 이내 진득한 핏물로 채색되었다.
땡그랑!
편월의 대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육신도 크게 휘청거린다 싶더니 천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다! 쳐라!”
“와앗!”
적장의 명에 따라 짓쳐 들던 적병들은, 그러나 함성이 아닌 비명성에 가까운 고함을 터뜨리며 우왕좌왕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편월이 쓰러지기 직전 갑자기 두 갈래의 힘이 배후로부터 엄습해 포위망을 마구 흩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말, 하나는 거예홍이 이끄는 위휘군이었다.
다른 건 전혀 개의치 않고, 거예홍은 막 바닥에 처박히려는 편월을 잡아채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맹 장군과 초 장군을…….”
이게 의식이 있는 편월이 마지막으로 뱉은 말이었다.
2
육우맹이 이끄는 율천국군 십만, 수비를 위해 동원된 강국과 상초국 연합군 칠만이 한꺼번에 대치하자 식운관은 그야말로 산보다 사람이 더 높이 치솟은 꼴이 되고 말았다.
십만 대 칠만!
얼핏 수치상으론 율천국이 훨씬 유리할 것 같지만 실전은 그렇지 못했다. 뭐니 뭐니 해도 강국은 식운관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공략이 마음처럼 수월치 않았다.
육우맹으로서는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는 하루하루였다. 가겸후로부터 십만의 병력을 얻어 식운관 공격에 나선 지 벌써 닷새. 그사이 죽거나 다친 병사만 해도 벌써 일만 가까이 되는 희생을 치렀지만, 이렇다 할 전과가 없었다.
이게 무장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마지막 기회라는 걸 육우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필코 식운관을 탈환해야 했고, 나아가 강국까지 멸망시켜야만 했다.
그런 초조함이 육우맹에게서 수면을 앗아 갔고, 오늘도 먼동이 채 밝아 오기 전부터 진막 밖에 나앉아 공격을 독려하게 만들었다.
오늘의 선봉은 육우맹의 직속이라고 할 수 있는 일만 오천의 적기군이었다. 거기다 흑기군 일만 오천과, 백기군 일만 오천을 보탠 총 사만 오천의 군세로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오늘 중으로 반드시 식운관을 점령한다.’
이게 육우맹의 결심이었다. 최정예라 할 만한 적기군까지 투입했고 상황에 따라선 전군을 이끌고 자신도 공격에 가담할 생각이었다.
“공격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적기군의 전갈이오.”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령이 지른 고함 소리가 먼저 육우맹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알겠다. 공격 개시의 신호를 보내라.”
육우맹도 지체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그만큼 조급증을 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두둥!
이제 막 밝아지려는 새벽의 대기를 두 발의 향포響砲가 갈가리 찢어발겼다.
“우와아아-!”
“우우우-!”
마치 거대한 둑이 터지며 격류가 쏟아지는 듯한 함성이 울려 퍼진 건 거의 동시였다. 마침내 적기군을 선두로 한 율천국군 사만 오천이 식운관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육우맹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숱한 붉은색 기치를 휘날리며 진군하는 적기군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피의 물결이 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았다.
‘쳐라, 쳐!’
곁에 부하들이 없었다면 육우맹은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이럴 땐 정말이지 소규모 부대를 지휘하는 편장이나 아장이고 싶었다. 가장 선두에 나서서 싸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거칠 것 없이 밀고 올라가 일거에 식운관을 삼켜 버릴 것 같던 적기군의 붉은 물결이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적의 매복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전령! 적기군의 양익인 흑기군과 백기군도 공격에 가담하라고 일러라.”
“존명!”
명을 받은 전령이 쏜살같이 말을 달려 멀어져 갔다.
아마 조금 있으면 적기군에서 상황 보고차 전령이 올 게다. 그 전에 육우맹은 벌써 다음 명을 내린 것이다.
이게 육우맹의 무서운 점이었다. 일만 오천이나 되는 대군의 진퇴를 마치 한 사람의 움직임처럼 꿰뚫어 보고 있다. 게다가 상황 판단도 정확했고, 그에 따른 결단도 빨랐다.
이번 신호에 향포는 동원되지 않았다. 흑기군은 몰라도, 백기군은 기습 공격을 담당한 일종의 유군이었다. 포성을 울리면 자칫 그들이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어서였다.
“보고, 적기군은 적의 매복 공격에 당해 고전 중.”
“알고 있다. 대기하도록.”
마치 육우맹의 판단이 맞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전령이 달려와 보고를 했다.
“우우우와아-!”
재차 격류와 같은 함성이 식운관 쪽에 쏟아진다 싶더니, 적기군을 오른쪽으로 끼고 진격하던 흑기군이 돌연 방향을 틀어 적기군과 합류했다.
그러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주춤거리며 밀리던 적기군이 흑기군의 지원에 힘입어 다시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단번에 상황이 호전된 건 아니다. 적의 저항도 의외로 거세고 질겨, 적기군과 흑기군이 연합한 삼만의 병사들로서도 쉽사리 깨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오래가지 못하리란 건 육우맹의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잘 버텨야 이삼각 정도일 게다.
“황기군으로 하여금 뒤를 받치도록 하라.”
“존명!”
대기하고 있던 또 한 명의 전령이 토끼보다 빠르게 달려 말에 올랐다.
“본대도 대기하라. 언제 투입되어도 좋을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갖춰 두도록.”
“존명!”
육우맹의 바로 뒤에서 복명하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이내 여기저기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하들에게 명을 내리는 본대 소속 장수들의 외침이었다.
그 준비로 주변이 어수선해진 가운데 육우맹은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마음이 조급하다고 해서 작전까지 서두르는 건 금물이다. 준비는 철저히 해 둬야겠지만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전황을 살펴봐야만 한다.
“대장군, 대왕 전하로부터의 전령이오.”
“뭣이? 전하께서?”
순식간에 육우맹의 미간이 싹 흐려졌다. 이건 들어 보나 마나 왜 아직 식운관을 점령하지 못했느냐는 질책일 게 뻔하다.
하긴 육우맹으로선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군사 오만만 주면 하루 만에 식운관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십만으로 벌써 닷새째다. 가겸후의 입장에선 짜증이 날 만도 했다.
“이리 데려오너라.”
육우맹이 무거운 마음으로 명을 내렸을 때, 벌써 전령은 발아래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왕 전하의 전갈은?”
“예. 식운관만 도모하면 진군을 멈추고 병사들을 휴식시키라는 명이십니다.”
“뭐?”
육우맹은 어리둥절해졌다. 강한 질책의 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엉뚱한 얘기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불쑥 반발심이 치솟았다.
“전하께선 어인 연고로 그런 명을 내리셨는가? 혹 어떤 장수가 나의 용병에 불만을 품고 참언讒言을 한 건 아닌가?”
“거기까진 소인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전령의 대답에 육우맹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손 쳐도 일개 병사로선 알 수가 없을 터였다.
“돌아가서 전하께 똑똑히 고하여라. 무릇 장수 된 자는 한 번 출정하면 때때로 왕명을 거스르는 작전도 감행하는 법. 나는 오늘 중으로 식운관을 깨뜨리고 그 여세를 몰아 강국까지 쳐들어가겠다고 전하여라.”
“하오나 대왕 전하께서는…….”
“그대는 전령이다. 나와 전하 사이의 말만 전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알고 당장 물러가렷다.”
“조, 존명!”
새파란 육우맹의 서슬에 전령은 마지못해 예를 갖추고 몸을 일으켰다.
“대장군, 정녕 대왕 전하의 뜻에 거스를 생각이시오?”
전령이 물러가길 기다렸다는 듯 군감으로 따라와 있는 오대궁吳大穹이 물었다.
“전장에 나선 장수의 마음가짐이 어떤지는 오 장군도 잘 아실 것 아니오.”
오대궁의 질문에 육우맹은 우회적으로 대답했다. 자신의 심정을 알아 달라는 은근한 술회였다.
“딴은…….”
“병력이 자그마치 십만이오. 이걸로 식운관만 공략하고 멈춘다면 천하 사람들이 비웃을 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오대궁에게 육우맹은 더욱 고삐를 조이며 말했다.
“오 장군도 생각해 보시오. 비록 군감의 직책에 계시니 대왕 전하의 명을 충실히 이행하셔야겠지만, 이만한 군세로 강국을 멸망시키지 못한다면 그 공이 반감될 게 아니겠소?”
“더 이상 말씀하실 것 없소이다. 오늘 중으로 식운관을 탈환하고 내일은 강국의 거죽성에서 승리를 축하하도록 합시다.”
“고맙소, 오 장군.”
오대궁도 어쩔 수 없는 무장이었다.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죄는 크지만 강국을 멸망시킨다면 그 공훈으로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다.
단지 그뿐이라면 왕명을 거스른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공과功過는 서로 상쇄되어 무無가 될지 몰라도, 다른 무장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이건 결코 떨쳐 버리기 힘든 매력이었다.
“본대도 준비하라. 적기군이 적의 매복을 돌파하는 대로 우리도 공격에 가담한다.”
힘차게 명을 내린 후, 육우맹은 투구를 눌러썼다.
* * *
율천국의 공격이 집요했지만, 증두신에게 있어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가겸후가 십오만에 이르는 대군을 식운관에 집결시켰을 때부터 각오를 단단히 다졌고 지난 닷새 동안 이 정도 공격은 늘 있어 왔다.
“오늘따라 놈들의 공격이 유난스럽군요.”
증두신의 뒤에서 이환이 한마디 건넸다.
“가겸후가 육우맹을 질책했겠지.”
“그래도 오늘은 유별난 것 같습니다. 본대까지 움직이려나 봅니다.”
“나도 보고 있소.”
증두신의 어투는 무거웠다. 이쪽에서 설치한 매복에 적의 선봉이 걸린 것까진 좋았지만 그것도 시간을 약간 벌어 준 것에 불과했다. 율천국군은 더 거대한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그저 밀어붙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본대까지 들썩거리고 있으니 공격에 나선 적들은 더욱 기를 쓰고 진격을 되풀이하고 있다.
“와아앗!”
돌연 목책에 매달려 수비를 하고 있던 강국군이 일제히 함성을 토했다. 뭔가에 놀란 게 분명했다.
증두신과 이환도 그게 뭣 때문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두 부대로 나뉜 백기군의 한 개 부대가 목책 앞을 공격하는 한편, 또 하나의 부대는 적기군과의 접전이 한창인 곳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은 소장에게 맡기시고, 전하께선 삼만을 이끌고 관을 내려가셔서…….”
“난 아무 데도 가지 않겠소.”
“후퇴를 하시라는 게 아니오이다. 삼만의 정병을 이끌고 여기와 거죽성 사이 어디 적당한 곳에 매복을 하시라는 얘기요!”
이환이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든 증두신을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냥 후퇴만 하라고 해서는 말을 들을 증두신이 아니었다. ‘매복’이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게 증두신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분명했다. 당장 거부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증두신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이환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매복은 상초국에게 맡깁시다. 어차피 그들은 싸움에 열성을 보이지 않으니까.”
“전하!”
이환은 목소리를 높였다.
“싸움에 열의가 없는 놈들에게 어떻게 매복을 맡기겠습니까? 그러니 매복은 전하께서 맡으셔야 합니다.”
“만약 내가 병력을 이끌고 식운관을 내려간다면 상초국의 병사들은 분명 동요할 게요. 그들 역시 병력을 빼내려고 할지도 모르고.”
“하오면 그들 중 일부도 데려가십시오. 어차피 여기 있어도 별 도움도 되지 않고, 전하께서 매복을 하시면 저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언쟁을 거듭하고 있는 사이, 벌써 근처에 화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중 절반 정도는 불화살이었다.
“율천국의 백기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속히 병력을 이끌고 나가 매복을 하십시오.”
이번에 이환은 말뿐만 아니라 증두신을 잡아끌었다. 목책 아래로 내려 보내기 위함이었다.
“알겠소, 이 장군. 소촌에게 병력 이만을 거느리고 날 따르라고 하시오.”
“들어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의외로 식운관에서 나갈 뜻을 비친 증두신에게 이환은 군례를 갖추며 말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싶으면 이 장군도 곧바로 철수하시오. 식운관을 사수할 필요는 없소이다. 또 철수하면서 적들을 과인이 매복해 있는 곳으로 유인할 수도 있으니.”
“명에 따르겠사옵니다.”
복명하자마자 이환은 즉각 병력을 빼기 시작했다. 소촌에게 알려 이만의 상초국군을 보태, 도합 오만의 병력이 증두신을 따라 식운관을 빠져나갔다.
‘이제 마음껏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애당초 이 전쟁은 시작했을 때부터 승산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니만큼 이환의 걱정은 오로지 증두신의 안위였다.
그런데 이제 증두신이 자신의 말에 따라 매복하기 위해 식운관을 빠져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이환은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증두신이 식운관을 빠져나간 건 매복을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매복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유동적이다. 압도적인 힘에 밀리면 후퇴하게 마련이라는 얘기다. 성이나 관문에서처럼 옥쇄를 각오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초국군을 딸려 보낸 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사태가 불리하다 싶으면 상초국군은 매복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철수할 게 분명하다. 그때 조금이라도 염치가 있는 자라면 증두신을 팽개치고 저희들만 달아나지는 않으리라.
“화살을 쏟아 부어라! 매복에서 철수하는 아군을 지원해야 된다!”
부쩍 커진 목소리로 이환은 명을 내렸다.
“보고! 매복했던 아군 오천, 모두 전멸!”
“뭐라고?”
누군가의 보고에 이환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여태 증두신에게 신경 쓰느라 미처 전황을 살펴보지 못했는데, 그사이 매복 나갔던 병사들이 모두 전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환은 마음을 다잡았다. 오천이 전멸했다는 건 충격이었지만, 어차피 전쟁엔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 정도에 흔들려 지휘를 잊는다면 그보다 훨씬 큰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
“알겠다. 일부는 목책에 붙은 불을 끄고 나머지는 사력을 다해 적을 막아라!”
이환은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자칫 약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고, 증두신이 병력을 빼서 나가는 걸 본 병사들의 사기 저하를 막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전황은 점차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적의 백기군은 물론, 매복을 돌파한 적기군과 흑기군까지 목책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적들을 막아라! 모두들 여기가 죽을 자리라 생각하고 적을 막아라! 화살을 아낄 건 없다. 쏴라, 쏴!”
전황에 아랑곳없이 이환은 더욱 힘차게 병사들을 독려했다. 혹시라도 이길 가능성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쯤 한창 매복을 하고 있을 증두신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함이었다.
이환은 입으로만 명을 내리는 게 아니었다. 직접 활을 쏘기도 하고, 장대로 목책에 걸쳐진 적의 운제를 밀어내기도 했다.
그 때문일까. 다소 위축된 것 같았던 강국군은 부쩍 힘을 내서 방어하기 시작했다.
“적들이 밀리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막 목책에 기어오른 적병 한 명을 창으로 찍어 떨어뜨리며, 이환은 재차 목이 터져라 외쳤다.
확실히 적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일거에 깨뜨리려던 예봉이 꺾인 모습이었다.
“목책에 붙은 불을 꺼라! 화살과 돌을 보충하도록!”
이환은 연이어 명을 내렸다. 적의 공격이 누그러진 이때 마땅히 해 둬야 할 일들이었다.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도 율천국군의 공격을 물리친 게 의외였던 듯 동작들이 한층 민첩해지고 힘이 넘쳤다.
하지만 이환의 마음이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다음에도 막아 낼 수 있을까?’
이제 적의 본대까지 움직이고 있다. 다음 공격이면 이 목책은 무너지고 말리라.
그래도 상관없다고 이환은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은 여기서 뼈를 묻으리라 결심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또 놈들이 밀려올 게다. 조금도 물러서지 말고 용맹한 강국군의 기개를 보여라!”
“와아아!”
이환의 독려에 병사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응답했다. 하나같이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얼굴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환은 까닭 모를 한기를 느꼈다. 과연 이래도 좋을까 하는 회의가 든 것이다.
이 식운관이 무너진다고 해서 곧바로 강국이 멸망하는 건 아니다. 여긴 앞으로 치르게 될 숱한 전장 중 한 곳에 불과하다. 그 중요도는 엄청나게 크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옥쇄하는 건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패배가 눈에 보인 싸움에서 병사들 모두를 데리고 전사한다면 사뭇 기개는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강국 전체의 전력을 따지면 분명 크나큰 손실일 수밖에 없다.
‘최대한 전력을 보전해야 한다.’
설사 전원이 전사를 하더라도 이 식운관에서는 안 된다. 증두신이 살아 있는 한 강국이 멸망한 건 아니니 죽더라도 그 곁에서 죽어야 한다.
이환은 즉시 측근 편장들을 불러들였다. 전황이 불리하다고 여겨져 후퇴를 명할 때 어느 부대부터 먼저 빠져나갈지 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혼란을 줄이고, 희생도 최소한이 될 테니 말이다.
그 지시가 끝났을 때, 마침내 율천국군도 적기군을 선봉 삼아 다시 식운관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3
어디를 어떻게 달렸는지 거예홍은 알지 못했다. 거칠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 말을 세워 보니 고작 백여 기가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드르릉, 드릉!
다시 한 번 코 고는 소리가 거예홍의 귀를 진동시켰고, 진원지를 확인한 순간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등에 얼굴을 묻은 편월이 코를 골았기 때문이다.
비단 편월만 코를 고는 게 아니었다. 그 소리는 어둠 속에 도열해 있는 아군 사이에서도 새어 나오고 있었다.
“누구냐? 누가 또 이 와중에 잠을 자는가?”
“초 장군입니다.”
“뭐? 기가 막히는군.”
거예홍은 혀를 찼다. 세상 누가 지독한 패전 뒤에 이처럼 코까지 골면서 잘 수 있겠는가. 그것도 마상에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편월이 혼절하기 직전에—정확하게는 잠에 빠진 것이겠지만—한 말은 맹아와 초염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맹 장군은?”
“여기 있소.”
피로에 찌들어 한껏 늘어지는 맹아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거예홍은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사실 맹아와 초염을 챙길 여유까지는 없던 상황이었다. 오직 편월을 구해 내기에도 급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싸움은 패했지만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주군은 좀 어떠시오?”
맹아가 다가오며 물었다. 지독한 난전을 치르느라 갑옷은 누더기가 되다시피 했고 타고 있는 말엔 마구馬具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잠이 든 것 같소이다.”
“벽곡성 놈들이 음식에다 혼몽산昏咋散을 탄 게 분명하오. 그렇지 않다면 주군께서 저리 잠드실 이유가 없고, 병사들도 그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게요.”
맹아는 어금니를 뿌드득 갈아붙이는 걸로 말을 맺었다.
벽곡성 놈들의 작태를 괘씸하게 생각하는 건 비단 맹아만이 아니었다. 일단 위기를 넘기고 나자 그들에 대한 적개심이 모든 병사들의 가슴에서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 우선은 여기가 어딘지부터 파악하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겠소?”
거예홍은 맹아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싱겁게 웃고 말았다.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까닭에서였다.
생각해 보라. 벽곡성과 그 주변에 대해 거예홍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남에게 물어서 될 일이 아니란 얘기다.
거예홍은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직은 어둠 속인지라 정확한 지형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지형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사방이 확 트인 논이었으니 말이다.
‘다화평多禾坪 어디쯤인 것 같은데…….’
“우선은 좀 쉬어야겠소. 한 발짝도 움직이기 힘들군.”
생각에 잠겨 있는 거예홍에게 맹아가 말하며 그대로 말에서 내렸다. 실은 그냥 떨어졌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만큼 피로하다는 증거였다.
“적이 추격해 올지도 모르오. 그러니 좀 더 가서 쉬는 게 좋을 듯하오.”
거예홍이 말렸지만 맹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어디론가 걸어가는가 싶더니, 어떤 말에서 사람을 하나 끌어 내렸다. 초염이었다.
‘저 말은?’
맹아의 행동을 지켜보던 거예홍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초염이 타고 있던 말은 바로 얼마 전에 편월이 얻어 흑풍이라고 이름 지은 놈이었기 때문이다.
제 등에 실려 있던 초염이 내려지자 흑풍은 거예홍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등에 기대 잠들어 있는 편월에게 코를 갖다 대곤 거푸 푸르릉거렸다.
‘이 말이 주군을 태우고 싶다는 건가?’
거예홍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 역시 흑풍이 명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라면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어쨌든 거예홍은 편월을 흑풍의 등에 실었다. 말의 뜻을 달리는 해석할 수 없었고, 또 그가 무겁기도 했기에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여기는 다화평의 한쪽인 것 같소이다. 일전에 주군께서 송 군감이 이 근처까지 병사를 냈다고 했으니 우선 그들과 합류하는 게 좋겠소.”
거예홍이 말했지만 누구도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혹은 마상에서, 혹은 길바닥에 널브러진 채 잠에 빠졌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자는 제상대에 소속된 대여섯 명뿐이었다.
“깨워라. 여기서 잠들면 안 된다!”
거예홍은 거친 어조로 명을 내렸다. 잠들어 있는 병사들의 피로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 수가 없다. 송지의 독전대와 합류하지 못하더라도, 벽곡성의 추적에 대비해 최대한 멀리 몸을 빼내야만 한다.
“일어나시오, 맹 장군.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움직입시다.”
맹아는 거예홍이 직접 깨웠다. 너덜너덜해진 갑옷의 앞자락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지만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앗, 적이다! 적의 추적이다!”
할 수 없이 거예홍이 이렇게 소릴 질렀지만 한번 잠든 맹아는 도무지 눈을 뜨지 않았다.
“큰일 났다! 주군께서 위태롭다!”
“으응?”
편월이 위험하다고 고함을 지른 뒤에야 맹아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어디? 적은 어디 있나?”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진 채 맹아는 입으로는 말을 뱉으며 손은 창을 찾는 듯 여기저기 더듬었다.
“일어나시오. 여기서 자다가는 적의 추적을 받기도 전에 얼어 죽을 거요.”
허둥거리는 맹아를 잡은 거예홍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주군은? 주군은 무사하시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맹아는 편월의 안위부터 물었다. 근위대장으로서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르지만, 거예홍은 좀 지나치다 싶었다.
‘하긴 나도 그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지.’
돌이켜 생각해 봐도 거예홍은 자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주군을 구하는 건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지휘관으로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건 너무 무책임하고 위험한 작전이었다.
“주군은?”
“잠드신 것 같소. 하지만 저대로 두면 동사할 우려도 없지 않소. 그러니 조속히 송 장군의 독전대와 합류할 방법을 모색해야 될 것 같소.”
맹아가 재차 물었을 때 거예홍은 조금 전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편월이나 초염의 상태에 대해선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혼몽산은 독이라기보다는 약으로서, 절대안정을 취해야 되는 환자를 깊이 잠들게 만든다. 그러니 독 검사를 했을 때도 아무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알겠소.”
맹아는 의외로 순순히 따랐다. 채 일각에도 미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수면으로도 좀 살 것 같은가 보다.
그사이 잠들었던 병사들도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제상대원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독전대가 있는 곳을 아시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소. 하지만 삼천의 병력으로 유산성에서 나온 오천의 적을 막고 있다니,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요.”
“하긴…….”
맹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팔천에 달하는 군사들이 대치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표가 난다. 특히 지금처럼 밤이면 화톳불을 피우기 때문에 알아내기가 더 쉽다.
“그럼 움직입시다. 날이 새면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이번엔 맹아가 서둘렀다. 벽곡성의 추적도 걱정되었지만, 날이 밝으면 독전대가 유산성 병력과 싸움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동할 건 자명한 사실이고 야영할 때보다 찾기가 더 힘들어질 터였다.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이동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딱히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유산성 쪽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아무래도 독전대는 그 근처에서 싸우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일행의 선두에 서서 달리는 거예홍은 주변을 살피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벽곡성 근처의 지리를 어느 정도 안다고 하지만, 밤중에 길을 찾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익숙한 지형도 아니었다. 벽곡성 근처에 다화평이라는 너른 들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실제로 여길 와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계절은 유리하게도, 불리하게도 작용했다. 날이 밝지 않은 새벽의 대기는 살을 에는 듯했지만, 땅이 온통 얼어붙어서 논이고 밭이고 가릴 것 없이 말을 달릴 수 있었다.
“정지!”
돌연 거예홍이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이오?”
“앞에 민가가 몇 채 있는 것 같소이다.”
뒤에서 달려온 맹아의 질문에 거예홍은 긴장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에 맹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캄캄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땐 후각이 시각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번에 맹아를 도운 건 후각이 아니라 청각이었다. 맹아는 고막을 진동시키는 묘한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양이인가?’
그건 확실히 고양이 울음소리와 흡사했다.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야생 고양이라고 해도 인가에서 떨어져 전적으로 홀로 살아가진 않는다.
특히나 아직은 겨울이다. 눈이 녹지 않은 산중에서 먹을거리를 찾지 못한 야생 짐승들까지 인가로 내려와 먹을 것을 찾는 계절인 것이다. 하물며 고양이라고 다를까.
맹아는 거예홍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까?’ 하고 묻는 눈빛이었다.
이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겼다면 몰라도, 이쪽이 패잔병이란 걸 알게 되면 농민들은 폭도로 변해 공격을 가해 올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목을 베어 벽곡성에 바치면 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자신들의 행적에 대해 고변을 할 수도 있다. 아직 송지의 독전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벽곡성의 추적을 받는다면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패잔병들의 세력이 강할 때는 음식을 구하기 위해 촌락을 약탈하고 자신들의 행적을 지우기 위해 마을 하나를 깡그리 없애 버리기도 한다. 백성들이 그들의 목을 베거나 고변을 하는 건 난세에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저놈의 고양이, 어지간히 우는군.”
피해 가자는 거예홍의 신호에 따라 방향을 바꾸며 맹아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때까지 고양이는 줄기차게 울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밤에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패전한 뒤끝이니 더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여긴 어디야? 그리고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들려온 고함 비슷한 큰 소리에 일행은 깜짝 놀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편월이었다. 언제 깨어났는지 그는 말 등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꼴이 가관이었다. 자다 깨서 미처 정신이 들지 않아 그랬는지 몰라도, 그는 흑풍의 등에 거꾸로 앉아 하품을 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어질지 모르는 편월의 큰 목소리를 막기에 급급했다.
“쉿, 조용히 하시오. 지금 인가를 지나는 중이오.”
맹아의 주의를 듣고서야 편월은 상황을 대충 인식한 모양이었다. 서둘러 흑풍의 등에서 똑바로 고쳐 앉았다.
“백여 기뿐인가? 나머지는?”
“전멸이오. 살아남은 자들도 투항을 했거나 포로로 잡혔겠지.”
편월의 질문에 거예홍이 거칠게 대꾸했다. 주위에 사람들만 없다면 한 대 후려갈겼을지도 모른다. 적을 너무 믿다가 일만 오천에 달하는 병력을 깡그리 잃은 장수는 맞아도 싸다.
“후후후…….”
“지금 웃음이 나……!”
갑작스레 터져 나온 편월의 나직한 웃음에, 거예홍의 미간이 다시 일그러지며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비록 웃고는 있었지만 고개를 떨구고 있는 편월의 모습이 너무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주군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하던데…….’
이 얘기는 거예홍도 듣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편월이 토한 웃음이 그녀에겐 우는 걸로 들렸다.
“그런가? 졌나?”
편월은 또다시 나직하게 내뱉었다. 듣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깊은 회한이 밴 음색이었다.
따지고 보면 편월이 참전했던 모든 전투에서 이겼던 것만은 아니었다. 승전에 비해 그 횟수가 적긴 했지만, 더러는 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서 기억을 할 수 없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지휘를 받아 싸웠을 때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고집으로 우겨서 한 싸움이 아니란 얘기다.
그런 만큼 편월의 낙심은 컸다. 애당초 자신이 직접 출전하지 않았으면? 맹아의 말을 좀 더 귀담아듣고 벽곡성 앞에서 야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후회들이 꼬리를 물고 솟구쳐 올라 편월을 괴롭혔다.
“후우…….”
“누가 가서 저놈의 고양이 좀 잡아 죽여!”
편월이 길게 한숨을 토했을 때 맹아가 신경질적으로 명을 내렸다. 그때까지 고양이는 쉬지도 않고 울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 한 명이 즉각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 역시 울음소리가 신경에 거슬렸기에 속으론 잘됐다 싶었다.
“앗, 장군! 이쪽으로 와 보십시오!”
고양이를 잡으러 신 나게 달려갔던 병사가 돌연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무언가에 단단히 놀란 모양이었다.
“떠들지 마라. 대체 무슨 일이냐?”
맹아가 병사에게 주의를 주며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엇, 이게 뭐야?”
맹아도 경악성을 토했다.
“이건 아기잖아. 주군, 이리 와 보시오.”
“뭐? 아기가?”
편월보다 거예홍이 훨씬 놀라며 맹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정말 아기로군.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울고 있을까?”
맹아에게서 강보에 싸인 아기를 받아 든 거예홍이 의아한 듯 내뱉었다.
하지만 그 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역시 난세가 그려 낸 비극적인 그림의 한 장면이니까 말이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태어난 아기들은 그 생명을 보장받지 못한다. 부모가 전란의 칼바람에 휘말려 죽거나 지금처럼 버려지는 일이 부지기수니까.
태어난 아이를 버린다고 해서 손가락질받는 경우도 드물다. 자기 한목숨 유지하는 것도 급급한 판에 아이의 생명까지 지켜 주기는 힘들다. 차라리 버려두면 더 나은 사람에게 구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디 봅시다.”
뒤늦게 다가온 편월이 거예홍에게서 아기를 받아 들었다.
“기묘하게 생겼군.”
갓난아기를 본 편월의 첫마디였다. 밤이라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아직 눈도 뜨지 못했고, 얼굴엔 가는 주름만이 가득해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낯선 동물의 새끼를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연방 시끄럽게 울어 대고 있다. 마치 집 잃은 고양이 새끼처럼 말이다.
‘꽤나 성가신 놈이로군. 나도 이랬을까?’
아기를 안아 든 편월은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쩌면 처음 광운에게 발견되었을 때도 이러지 않았을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놈같이 시끄럽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소리 없는 오열이 진정한 남자의 눈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니, 이런!”
가슴에 아기를 안고 있던 편월이 돌연 미간을 찌푸리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오? 이크, 쌌구만.”
가까이 다가서던 맹아가 급히 뒤로 말을 물렸다. 편월이 안고 있던 아기의 강보에서 물이 떨어지면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오줌과 똥을 동시에 싼 것이다.
“이리 주시오.”
거예홍이 편월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쟁에서 남자보다 훨씬 용감하게 싸우는 무장이라고 해도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 아기를 보니 모성 본능이 우러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편월은 아기를 건네주지 않았다. 똥오줌에 강보가 온통 젖었지만 불결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감기가 들 거요. 얼른 소장에게 주시오.”
거예홍이 다시 한 번 채근했을 때 편월은 입고 있던 전포 속에 아기를 집어넣었다.
따뜻했다. 아기가 배설한 오물이 아직 식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체온이 전해 주는 온기가 가슴을 곧장 두드리는 것 같았다.
“주군! 어떻게…….”
거예홍이 기겁을 하며 편월을 말리려 했지만 맹아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제지했다.
맹아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엔 ‘왜?’라는 의문이 가득했다. 거예홍 역시 편월과 광운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맹아는 편월과 광운, 두 사람 모두와 함께 잡가군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들의 끈끈한 유대에 대해 거예홍보다 구체적이었다.
“자, 가지. 내 기억으론 송 군감이 저쪽에 진을 쳤던 것 같아.”
맹아와 거예홍의 감정이야 어떻든 편월은 앞장서 말을 몰았다. 어쨌든 여기서 송지를 만난 사람은 자신뿐이니 안내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지독하게 패한 뒤였지만 이상하게 편월은 기분이 좋았다. 가슴에 품은 아기 때문에 기껏 말랐던 전포는 다시 젖었고, 냄새도 고약했지만 말이다. 하긴 이 정도의 냄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며칠 동안이나 전장을 뒹굴다 보면, 이보다 더 고약한 악취를 맡거나, 자신이 악취를 풍길 때도 있었다. 이 정도라면 차라리 향기롭다고 해도 괜찮다.
어쩔 수 없이 일행은 편월을 따랐고, 그들은 날이 어렴풋이 밝아질 때 송지가 이끄는 독전대와 합류했다.
때마침 독전대는 아침을 짓고 있던 중이라 여기저기에서 구수한 밥 냄새를 풍겨, 편월과 그 일행의 배 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울리게끔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