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적초난輕敵招難
1
연일 골머리를 썩인 통에 요즘 호윤천은 흰머리가 부쩍 늘어나 버렸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조천성에 가둬 두고 있던 곽가군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곽준방에게 동조하는 성주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 말은 곧 자신들에게 적대하는 군벌이 많아졌으며, 그들의 결속이 공고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한 일로 칠 만한 게 있다면, 그들이 향한 곳이 남쪽이 아니라 서쪽이라는 점이었다. 그건 막주에서 봉기한 광운과 연합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었다는 뜻이므로, 호윤천의 입장에선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고 안도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기실 지금 파양주의 최남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사주의 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호윤천으로선 더 이상의 원군을 파견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막주에 기반을 둔 광운은 날로 그 세력을 더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불과 얼마 전에 도착한 흑암성의 급보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앞으로 보름을 버티기 힘들 것 같다고 했으니, 어쩌면 지금쯤 벌써 성이 함락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럴 때 조천성에서 나온 곽가군과 그에 동조한 성주들이 서쪽으로 향했으니, 호윤천으로선 일단 앞뒤로 적을 맞는다는 최악의 경우만은 피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쪽으로 향한 곽가군의 말 머리가 언제 다시 이쪽으로 향하게 될지 모르고, 남쪽에선 광운이 이끄는 막주군이 차근차근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니 어떤 형태로든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여기서 호윤천이 택한 건 곽가군에 대한 추적을 중단한 일이었다. 그건 곧 남쪽으로 파견할 지원군을 결성하겠다는 뜻과 통했다.
말할 것도 없이 파양주라고 하는 건 예전 마용승이 한창 전성기일 때 차지했던 땅덩어리 전체를 아우르는 명칭이다.
그러나 호윤천이 진정으로 의지하고 있는 기반은 원래 의미의 파양주, 즉 대륙의 서북쪽에 위치한 한 주州뿐이다.
당연히 호윤천으로선 이 기반을 포기하거나 공격당하게 할 수 없었다. 원통한 마음을 누르고 곽가군의 추적을 중단한 것도, 남쪽으로 급파할 원군을 결성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곽가군이 무사히 서쪽으로 향하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성주들은 아직도 많았고, 호윤천은 아들인 대장군의 명의로 그들에게 곽준방과 그를 따르는 도당을 치라는 명을 내렸다. 죄목은 마용승의 후계자인 현 진남후인 마국립을 진중으로 납치해서 죽였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마국립의 죽음도 호윤천이 얻은 하나의 소득이었다. 곽가군이 조천성에서 일제히 치고 나와 포위망을 돌파했을 때 얻은 정보였다.
그때 호윤천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일시적으로 곽가군에 동조했던 성주들도 마국립의 죽음을 알게 되면 이탈할 게 분명하고, 심한 경우 곽준방을 살해할 수도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곽가군에 동조한 성주들이 어리석거나, 혹은 곽준방의 간계가 뛰어나서 어떻게 무마시킨 모양이었다.
그 점이 아쉬웠지만, 호윤천도 일세를 풍미했던 지장이자 용장이었다. 거기에 연연해서, 해야 될 일을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오늘도 호윤천은 아들인 호유진과 더불어 남쪽으로 파견할 병력의 규모와 장수들의 인선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 흑암성이 떨어졌다는 보고는 없었지만, 일단은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그런데 묘한 손님이 찾아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한사코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대장군도 아닌 호윤천을 직접 만나야 한다며 우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호윤천은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일렀다. 이런 일은 결코 희귀한 게 아니었다. 근래와 같은 비상시국에선 사람들의 행동도 정상적이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신변의 경호만은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아들은 다른 곳으로 가 있게 하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무장 열 명으로 하여금 무기를 휴대한 채 동석게 했다.
부하들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선 자는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날카로운, 한눈에도 무장임을 알아볼 수 있는 삼십 대 후반의 장한이었다.
“주위를 물리쳐 주십시오.”
호윤천에 대한 간단한 예를 끝내자마자, 사내는 약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들은 모두 나의 수족과 다름없는 심복들이오. 이들이 없는 자리에서 나눠야 될 말이라면, 나는 그대와 얘기를 나누지 않겠소. 그보다는 어디서 오신 뉘신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가 아니겠소?”
호윤천은 능란하게 응수했다. 전국을 헤치며 살다 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몇 마디 말로써 측근들에 대한 신임을 내세우는 건 물론, 사내로 하여금 더 이상 구구한 말을 늘어놓지 못하게 했다.
과연 이건 효과를 발휘했다. 사내는 도열해 있는 무장들을 한차례 쭉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비천한 이름이나 밝히려고 먼 길을 찾아온 게 아니오. 그보다 율천왕 전하로부터 중요한 전갈을 이 안에 담고 왔소이다.”
다시 목소리를 낮춘 사내는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동시에 품속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내 호윤천에게 건네주었다.
이 역시 밀사나 사자를 파견할 때 흔히 있는 일이었다. 중대한 밀담을 서찰에 적으면, 혹시라도 밖으로 유출될 수도 있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자는 의미였다.
서찰을 읽은 호윤천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서찰에는 진짜임을 나타내는 가겸후의 수결과 직인이 찍혀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놀라움과 경계심이 발동한 탓이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껏 가겸후와는 인연이 전혀 없는 호윤천이었다. 아니, 오히려 가겸후는 마용승이 죽은 이후 직접 황제와 연결될 끈을 모색하는 호윤천을 줄기차게 방해만 했다.
그런데 지금 가겸후의 밀사를 자처하는 자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호윤천으로선 놀랍기도 하고 그 용건이 궁금하기도 했다.
“율천왕께서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이 늙은 장수에게 무슨 용건이 있으시다는 거요?”
“하하하.”
호윤천의 말에 사내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늙어 일선에서 물러난 장수라는 겉치레 겸양 때문이었다. 누가 뭐래도 지금 파양주를 주무르고 있는 건 바로 그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사내의 방자한 행동을 책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등장과 용건은 호윤천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내도 자신의 행동이 지나쳤다는 걸 깨닫고는 이내 정색을 회복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율천왕 전하의 전갈을 말씀드리겠소. 지난번 황제께서 지운산으로 사냥을 나가셨을 때 강국과 연합한 이국의 폭군이 기습을 감행해, 현재 황제의 옥체에 상처를 입히는 불칙한 짓을 저질렀소. 이에 과인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그 징벌에 착수하고 있소. 그런데 어찌 대장군께서는 속히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수수방관만 하고 계시는 거요? 강국과 상초국은 짐이 친히 다스리겠으나, 한 가지 걱정은 허주의 조환이오. 그러니 대장군께서 이참에 의병을 일으켜 허주를 친다면, 뒷날 반드시 황제 폐하께서 막대한 은상을 내리실 테니, 거기에 기대 대장군의 숙원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속히 거병하시오.”
간략하게 요지만 밝힌 사내의 말이었다.
“도대체 그 막대한 은상이란 게 무얼 얘기하는 거요? 도무지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서는 납득할 수 없소이다.”
“삼가라! 이는 강국과 결탁한 이국의 폭군들을 치자는 의병에 대한 얘기다. 은상 따위의 하찮은 일로 본말을 흐리지 말라.”
은상부터 들먹이는 부하 장수를 호윤천은 호되게 나무랐다. 물론 호윤천의 관심도 온통 그 은상에 쏠려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대가 없이 피 같은 병사들을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호윤천은 사내의 입을 통해 벌써 그 은상에 대해 들었다고 믿었다. 가겸후는 분명 오랜 숙원이란 말을 했고, 그건 바로 자신이 죽은 마용승을 대신해 진남후에 봉해지는 것이다. 더 이상 확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선뜻 군사를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진남후의 작록이 좋아도, 그건 아직 먼 얘기다. 당장 발밑에 붙어 있는 불을 등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율천왕 전하의 말씀은 지당한 것이오. 오늘날 황실이 아무리 피폐해졌다고 해도, 우리 모두는 황제 폐하의 신하 된 몸이오. 그러니 당장 군사를 일으켜 황은에 보답하는 게 지극히 마땅한 일이오. 하나…….”
말꼬리를 슬쩍 흐리며 호윤천은 사내의 안색을 살폈다. 무표정한 걸 보니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율천왕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파양주에도 지금 난제가 산적해 있는 실정이오. 어린 진남후를 시해한 곽가군이 도당을 결성해 난동을 부리고, 창피하지만 남쪽의 막주에서 광운이 일으킨 서방정변을 아직도 진압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오. 게다가 멀리 윤주에서는 편월이라는 애송이가 위휘군을 결성해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는 중이오. 그러니 율천왕 전하의 말씀에는 깊이 공감하나, 당장 군사를 움직일 수는 없는 형편이오. 밀사께서는 돌아가시거든 이 점을 잘 말씀드려 주시기 바라오.”
호윤천으로선 드물게 솔직한 말을 했다. 그만큼 가겸후와의 연대가 중요하고, 진남후라는 관작에 연연해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거기에 대해서도 율천왕 전하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뭣이? 거기에 대해서도?”
“예.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근자에 파양주의 대장군은 몹시 분주하실 게요. 어린 진남후를 보필하여 내정을 돌봐야 하고, 동쪽과 남쪽에서 일어난 병란에도 대처해야 하니, 그 수고가 얼마나 크시겠소. 그런데 마침 강국의 증두신과 편월이란 아이가 옹서지간이 되었으니, 이는 바로 하늘이 주신 기회요. 짐이 강국과 상초국을 도모하고자 마음먹었으니, 증두신의 사위인 편월도 당분간은 지금의 위치에서 꼼짝하지 못할 게요. 그사이 허주를 공격하면 될 게요. 물론 남쪽의 소란이 남았지만 그들이 사주를 치는 동안, 대장군의 능력이면 충분히 허주를 평정할 수 있을 게요.”
“흐음.”
사내의 말에 호윤천은 침음성을 토했다. 가겸후가 파양주의 일을 까맣게 모른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비교적 상세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곽가군의 행태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 모를 리가 없다.’
호윤천은 생각을 고쳤다. 가겸후는 그 일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쁘게 해석하면 자신을 보다 쉽게 끌어들이기 위해서, 좋게 보면 어차피 곽가군이 서쪽으로 향했으니 편월과 합류할 테고, 그걸 한꺼번에 강국에 묶어 두면 된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건 일거에 위휘군과 곽가군을 쳐부술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만약 상당한 병력을 남겨 놓고 곽가군의 뒤를 추격한다면, 어쩌면 가겸후의 말대로 광운이 사주를 점령하기 전에 일이 성사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군사를 내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다. 남쪽에 광운이라는 실질적 위협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지만, 가겸후를 더욱 바짝 달아오르게 만들 필요도 있다. 그래야 이쪽의 가치가 오르고, 소위 그 ‘은상’이라는 것도 훨씬 두터워질 테니 말이다.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지금 당장은 도저히 출병할 수 없는 상황이오. 하나 대의명분이 분명한 싸움이니 이 호 모某는 결단코 율천왕 전하를 따를 것이오. 그러니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도록 나 대신 잘 부탁드려 주시오.”
호윤천의 언동은 어디까지나 진중했다. 가겸후와 연결된 이 끈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본심을 그렇게 내보인 것이었다.
“알겠소이다. 대장군의 뜻에 그릇됨이 없도록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고맙소. 먼 길 오시느라 피로하셨을 터이니, 한 며칠 여독을 풀고 가시오. 여봐라! 이분을 객관으로 모셔…….”
“지금 이 몸엔 천하의 중대사가 걸려 있소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커다란 불충이 될 터. 이대로 길을 떠나겠소이다.”
말을 끝낸 사내는 그대로 훌쩍 일어나 예를 갖추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미처 누가 말릴 사이도 없었다.
그걸로 족하다고 호윤천은 생각했다. 지금은 자신은 물론 가겸후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다. 그 연락을 담당하는 자가 늦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호윤천은 즉시 다른 곳에 가 있게 했던 아들을 불러 회의를 계속했다. 다만 그 의제가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졌음은 물론이었다.
* * *
율천국을 이탈한 뒤, 천신만고 끝에 괘공교를 건너게 된 호훈은 다리 가운데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아득히 높은 곳에 얼마 전에 지나쳐 온 대인성이 보였다.
“휴우.”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새어 나오는 한숨을 호훈은 미처 제어하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살길이 열렸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거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목숨을 살렸다고 해서 당장 앞길이 훤하게 열리는 건 결코 아니었다.
‘자, 이제부터 어디로 간다?’
바로 이게 호훈에게 있어 당장, 그리고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처음 율천국을 빠져나올 때만 해도 호훈은 허주의 조환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했다. 경황도 없었고, 또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허주에 도착해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 그들은 영산을 사이에 두고 율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기면 괜찮겠지만, 지기라도 하는 날엔 자신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된다.
또한 그 전쟁에서 허주가 이길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다.
호훈은 다시 곰곰이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속에는 가겸후가 황제를 시해한 비밀을 품고 있다.
이건 작금 천하에 할거하는 군웅들에겐 다시없을 희소식이 될 터였다. 공공연히 가겸후의 잘못을 질타하고, 그를 칠 동맹군을 결성할 소지를 제공할 테니 말이다.
문제는 대체 누가 가장 앞장서 그 일을 주동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점은 머리 좋은 호훈이라도 선뜻 판단할 수 없는 난제였다. 당장 율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강국과 허주는 당연히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또한 날로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하고는 있다지만, 위휘군 역시 말도 안 된다.
아무래도 그 일에 가장 적임인 자는 파양주의 진남후나, 최근 그에 반기를 들었다고 알려진 막주의 광운 외엔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두 곳은 너무 멀고, 또한 자신의 얘기를 진남후나 광운이 믿어 줄지도 의문이었다. 결정적인 물증은 없고, 독고기의 얘기와 자신이 겪었던 황당한 갑옷 증발 사건이라는 방증만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비밀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호훈에겐 커다란 위협이기도 했다. 만약 누군가를 골라 털어놨는데 그자가 가겸후와 내통하고 있거나, 혹은 장차 있을지도 모를 이득에 눈이 먼 자라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황당한 얘기 같겠지만,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지금과 같은 난세엔 비일비재한 일이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 하나 있다면, 자신이 율천국군의 저물창을 담당했었다는 사실이었다. 창고엔 의식주를 위한 물자만 있는 게 아니라, 간혹 군사나 내정에 대한 기밀 사항을 보관하는 함들도 들어오곤 했다.
처음 호훈이 그 상자에 손을 댄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창고를 담당한 자로서 뭐가 있는지 알아야 된다는 심리도 작용했을 터였다.
물론 함들은 모두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봉인이라는 것도 창고를 맡은 자들이라면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심지어 평소에 어느 정도는 소지하고 다니기도 한다.
이 역시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저물창엔 그 외에도 봉인된 함들이 수두룩했고, 가끔 내용물의 상태를 점검해야 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일일이 상관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얻은 뒤에야 봉인지를 새로 받는다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뭐든 빨리빨리 해치워야 되는 군문에선 그런 번거로운 절차들은 흔히 생략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게 열어 본 함에는 사실 이렇다 할 것이 별로 없었다. 간혹 율천국의 군사적 요충지에 대한 주변 지형과 병력 배치도 정도가 그나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호훈은 그것들을 꼼꼼하게 필사했다. 모든 걸 장부에 기장하는 습성에 기인한 탓도 있겠지만, 영민한 그는 언젠가 요긴하게 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적어도 그 모든 걸 외워 두면 자기 진급에 도움이 됐으면 됐지 결코 손해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때 입수한 모든 것이 지금 그의 두뇌와 메고 있는 봇짐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이 정도 밑천이라면, 천하의 어떤 군벌을 찾아가도 홀대받지는 않으리라. 그들은 율천국의 사정을 속속들이 모르니까 설사 자기가 가진 것들이 다소 틀렸더라도 알아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호훈은 다시 발길을 옮겼다. 오늘 중으로 탄금성에 들어갈 작정이었다.
다리 건너편 끝에는 작은 목책이 보이고, 위휘군이 검문을 하고 있었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에겐 장사치에게 발부되는 통행증이 있으니 어디든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터였다. 이 역시 저물창에서 일한 덕분이었다.
2
그날 위휘군의 공격은 맹렬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편월이 진두에 섰고, 귀곡탄 도강 작전이 실패한 후 복귀한 맹아도 성격 그대로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다른 장졸들도 용맹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방 굴러 떨어지는 바위와 화살에 숱한 희생을 냈지만, 마침내 벽곡성의 성벽 가까이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가장 바쁘고 용감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거예홍이었다. 오늘 편월로부터 그녀에게 떨어진 명령은 부상자들을 돌보라는 것이었다.
얼핏 듣기엔 쉬운 일이었다. 일선에서 적과 직접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니 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전투를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적과 맞부딪쳐 싸우는 사람이야 무예가 출중하거나, 혹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용감하거나, 아니면 운이 좋아 적을 죽이고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다. 아니, 설사 죽는다고 해도 적어도 왜 죽는지는 알 수 있다. 요컨대 자신의 의지가 개입될 틈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얘기다.
그에 비해 부상병을 돌본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우선 싸울 적도 없는 상태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거나 굴러 떨어진 돌멩이 아래 일그러져 죽어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칼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심지어 ‘꽥’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숫제 억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임무였다.
처음 이 명을 받았을 때 거예홍은 거절했다. 그녀 역시 일선에서 싸우고 싶어서였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거가군을 대표하는 장수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편월은 단호했고, 그녀는 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단 받아들인 이상 누구보다 잘해 내고 싶었다.
당연히 그녀는 제 몸의 안전을 돌보지 않았다. 장수가 이럴진대 그녀에게 배속된 이천의 병사들이 주춤거릴 이유가 없었다.
‘공격군이 부족할 텐데…….’
비교적 가벼운 부상을 입은 병사 몇 명을 대충 치료한 후 다시 공격에 투입시키며, 거예홍은 계단 위쪽에 있는 벽곡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다시피 이번 벽곡성 공격에 투입된 위휘군은 도합 일만 오천이었다.
그게 지난 몇 번의 공격으로 인해 발생한 사상자가 약 삼천에 이르고, 귀곡탄을 건너다 포로로 잡힌 병사 역시 삼백가량 된다.
그리고 오늘 그녀를 장수로 급조된 제상대濟傷隊에 이천이 딸렸으니, 지금 공격하는 병력은 채 일만이 안 된다.
거기다 공격군은 계속해서 사상자를 내고 있다. 제상대의 병력 중 벌써 삼 할가량을 잃었으니, 성벽에 달라붙어 있는 병사들이야 말해 무엇 하랴.
‘거가군을 출동시켰어야 했다.’
지금에 이르러 그녀는 바로 이 점을 후회하고 있었다.
애당초 이 벽곡성을 칠 작전 회의 때부터 거가군 칠천은 철저하게 배제됐다. 보호해 주기 위한 고마운 배려이자 신병들의 훈련을 겸한다는 의미도 있었으니, 그녀도 별생각 없이 따랐다.
대신 거예홍은 선봉으로 배속되었다. 한차례 벽곡성에 와 봤던 경험이 있었으니 말이다.
한데 그게 경솔한 판단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용맹한 장수라도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는 병사들을 지휘한다는 건 약간의 무리가 없지 않았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전쟁에서의 사소한 무리는 곧바로 승패와 직결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는 승패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예홍이 처음부터 벽곡성을 가볍게 본 건 사실이었다. 아니, 거예홍만이 아니라 위휘군 전체가 벽곡성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니 송지 같은 노장도 일만이면 한 달 내에 떨굴 수 있다고 큰소리 떵떵 치기도 했고.
어쨌든 지금 와서 후회하는 건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든 이 난국을 타개할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가장 간단한 건 원병을 청하는 일인데 그건 이미 도착해서, 유산성에서 출병한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 중이라고 편월이 말했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원군에 대한 건 거론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남은 게 없다. 전군이 전멸을 각오하고 보다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것 말이다.
그 점은 오늘 공격에 나선 편월과 맹아가 누구보다 확실히 자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저처럼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진격만 되풀이하고 있을 터였다.
‘나도 공격에 가담해야겠다.’
지금 그녀의 뇌리를 가득 메운 생각이었다.
거예홍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제상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사상자의 숫자는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거예홍은 생각했다. 위휘군이 성벽까지 밀어붙여, 절벽 위에서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쏴 대던 적병들도 그쪽으로 몰려갔을 테니 말이다.
“뒷수습을 부탁한다!”
바로 곁을 따르고 있는 아장에게 큰 소리로 명을 내린 후, 거예홍은 말에 뛰어올랐다.
아장은 재빨리 거예홍의 말고삐를 거머쥐며 소리쳤다.
“여긴 이제 삼백이면 충분하오.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가시오.”
“알겠다. 그대가 병력을 수습해서 공격해 가담시켜라. 나는 먼저 가겠다.”
거예홍도 사양하지 않았다. 삼백의 인원이면 제상대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사상자의 숫자가 줄어들었던 것이다. 물론 저 위는 또 다르겠지만 말이다.
“하아!”
말에 박차를 가한 거예홍이 빠르게 계단을 달려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뒤에 남은 아장이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삼백만 남고 나머지 제상대는 공격에 가담한다! 나이 쉰을 넘었거나, 아직 열다섯이 되지 않은 병사들은 남아라! 나머지는……!”
“와아!”
“공격이다! 적을 쳐라!”
아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제상대 전체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벽곡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스스로 판단해서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고 여기는 자들도 속해 있었다.
“멈춰라! 우리의 임무는 사상자를 구호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 모두 멈춰라!”
당황한 아장이 그들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봇물이 터진 것과 같은 제상대의 기세였다. 막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이건 순전히 아장의 실수였다. 다른 곳에서 적과 싸우느라 동료들이 쉴 새 없이 죽거나 다치는데, 제상대는 그들을 구호하기만 한다. 그 일 역시 중요하고, 자신들의 희생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군인들이다. 아군이 싸우는 걸 보면서 피를 끓이며 울분을 삭이고 있었으리라.
게다가 그들은 대부분 신병들이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공훈을 세우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공격에 가담하라는 명을 들은 이상, 뒤에 남아 부상병을 구호해야 된다는 임무 따위는 이미 잊어버렸다.
당황한 상태로 아장은 뒤로 처졌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전투에 참가하지 못할 만큼 심한 부상을 당해 뒤에 남은 부상병들이 서로에게 의지해 철수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게 아장의 결심을 굳혔다.
“미안하다. 무사히 철수하도록.”
부상병들에게 한마디 남긴 후, 아장도 창을 꼬나 쥐고 성을 향해 돌진했다.
벽곡성을 공격했던 첫날부터 편월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딘지 모르게 낯익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벽곡성은 분명 처음이었고, 흑풍을 타고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알지 못하는 곳들뿐이었다.
그러다 오늘에서야 편월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벽곡성이나 주변의 지형이 익숙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전투에 임한 자신이나 위휘군의 모습이 언젠가의 한때와 비슷했던 것이다.
‘초우산의 관문을 돌파할 때였지.’
영창원년. 마용승은 광운과 자신을 율천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때 가겸후의 마수를 피해 귀환하던 중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초우산 관문을 넘을 때가 바로 지금과 흡사했다.
그때 아군은, 광운이 유군을 맡고 자신이 본대라 할 수 있는 병력을 이끌고 초우산의 정면으로 치고 올랐다. 의당 ‘앞으로, 앞으로!’만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뒤에선 가겸후의 명을 받은 추살대가 따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결과 절반가량의 동료들 시신을 남겨 두고 간신히 돌파할 수 있었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봐도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너무 비슷하다. 뒤를 따르는 적은 없지만, 위휘군의 주군이라는 압력은 그 당시보다 더 초조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또한 그때와 다른 면이 있기도 하다. 그땐 방법을 모르는 상태로 임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바로 무작정 ‘앞으로!’가 그것이었다. 그때 통했으니, 지금도 성공할 터였다.
“자, 이제 성이 코앞이다! 일거에 성벽을 무너뜨리자!”
벽력같이 자신의 귀를 두드린 맹아의 고함에 편월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전장을 가득 메운 각종 소음이 그들먹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주군, 뒤처지지 마시오!”
지금까지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던 맹아가 한 소리 크게 외치더니 돌연 앞으로 와락 달려 나갔다.
만약 다른 때였다면 편월이 맹아를 말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맹아의 용맹과 저돌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였다.
게다가 많은 희생자를 냈던 지긋지긋한 계단을 거의 다 올라온 상태였다. 지리적 손해를 극복했으니, 이젠 마음껏 싸우기만 하면 된다.
“가자, 흑풍. 오늘에야 네 진가를 발휘할 때다. 하아!”
편월 역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흑풍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낙성시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여태 당했던 걸 톡톡히 갚아 주리라 마음먹었다.
“와아!”
성문을 향해 이름 그대로 검은 바람처럼 돌격하는 편월의 뒤에서 우렁찬 함성이 올랐다. 보지 않아도 위휘군이 뒤를 따라 진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오를 갖춰라! 방패 부대 앞으로!”
진두에 선 맹아는 연방 밀고 올라오는 병사들을 지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편월도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병사들과 보조를 맞췄다. 혼자 나선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지난번에 잠깐 살펴봤지만, 편월은 더욱 주의 깊게 벽곡성을 관찰했다. 다행스럽게도 해자가 없었다. 성문만 깨뜨리면 곧바로 낙성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하긴 무엇보다 훌륭한 수비 방편인 긴 계단이 있는데 해자 따윈 필요 없었으리라.
거기다 성문을 깨뜨린다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충차는 물론이고, 운제 같은 비교적 가벼운 공성 무기라도 여기까지 가져오는 게 예삿일은 아니었다.
‘순전히 사람으로 밀어붙여야겠군.’
그 수밖에 없지만, 그것도 어렵다. 여기까지 오는 계단이 좁은 탓에 진군한 기마병의 숫자가 너무 적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오백 기 정도 될까?
그렇다면 지금 맹아의 지휘는 적절한 것이었다. 계단을 통과하기 위해선 저돌적인 진격이 필요했지만, 여기서부턴 체계적인 공격이 필요하다. 특히나 변변한 공성 무기가 없을 땐 말이다.
“전령!”
“대령이오!”
“당장 달려가 제상대의 거 장군에게 전하라. 최대한 많은 말들을 끌고 오라고 말이다.”
“존명!”
편월이 명을 내리자마자, 전령은 곧바로 말을 달려 계단 아래로 멀어져 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까지 다른 공성 무기를 가져오는 건 무리다. 그나마 이동시키기 쉬운 말을 가져와 공격하는 게 최선이었다.
“피해 보고! 전사…….”
“아직 전투가 끝난 게 아니다. 보고는 나중에 듣겠다.”
장수 중 한 명이 달려와 마상에서 소리치는 걸 편월은 막아 버렸다.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도 맞았지만, 그보다는 듣는 게 두려웠다.
맨 선두에서 계단을 돌파했던 편월이지만, 뒤따르는 병사들의 희생이 얼마나 큰지는 익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예전 어느 전투에서도 없었던 제상대까지 편성해 운영했다.
사실 제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편월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부대였다. 지난번에 성벽 가까이까지 접근해 본 결과 공격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많은 아군의 희생을 요구하는지 절감했던 것이다.
그런데 벌써 피해를 보고하겠다고 한다.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마음 편히 오늘 전투에 임할 수 있을 터였다.
“주군, 전황은?”
갑자기 들려온 거예홍의 목소리에 편월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그녀였다.
“어떻게 된 거요, 거 장군? 제상대는?”
“절벽에서 가하던 적의 공격은 완전히 끊어졌소. 그래서 공격이 시급하다 싶어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을 이끌고…….”
“닥치시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큰 목소리로 편월은 거예홍의 말을 막았다.
“도대체 군명을 어떻게 알고 있소? 거 장군의 오늘 임무는 부상병들의 구호요!”
“알고 있소이다!”
거예홍도 만만찮게 고함을 지르며 편월에게 응수했다.
“소장이 군무를 이탈했다는 건 잘 알고 있소이다. 그 죄에 대해서는 벽곡성을 함락한 후에 스스로 벌을 청하겠소. 자, 이제 전황을 말씀해 주시오.”
“말을 이동시키라는 명을 듣지 못했나?”
“들었소. 그에 대한 조치는 취했으니, 이제 곧 말을 끌고 올 거요. 그보다 전황은 어떻소? 작전은?”
거예홍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오늘 그녀는 단 한 번도 싸우지 못했으니, 전황과 작전이 궁금하기도 할 터였다.
그래도 거예홍은 너무 심한 감이 없지 않았다. 명령받은 군무를 이탈한 것도 모자라, 큰 소리로 대들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긴 전장이다. 지금도 선두에 도열한 방패 부대의 방패엔 연방 적의 화살이 날아와 꽂히고, 더러는 귓전을 스치며 멀리 날아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군명보다는 승리가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곳이다.
편월도 거예홍도 물론 이 점을 잘 알았다. 그랬기에 이처럼 언성을 높이는 것도 불사하는 것이었다. 서로가 생각하는 승리의 방책이 다를 때 장수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니, 이들은 주변에 병사들이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주군, 명을 내려 주시오! 이제 북 한번 울리면 성은 떨어질 것이오!”
병사들의 대오를 정비한 맹아가 달려오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씨근거리는 호흡을 토하고 있는 걸 보면 금방이라도 벽곡성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기다리시오. 곧 말이 도착할 게요. 보병들만 진격했다가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오.”
거예홍을 상대할 때와 달리 편월은 맹아에겐 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임무에 충실한 자와, 그러지 못한 자의 차이를 이런 태도로 구분 지은 것이었다.
빠드득!
거예홍은 이를 갈았다. 그녀에게도 편월의 의도가 여실히 보였기에 분한 마음을 삭일 수 없었다. 제상대의 임무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공격까지 지원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너무 무참하게 짓밟힌 게 억울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거가군을 데리고 왔어야 했다.’
그녀는 또 한 번 같은 후회를 잇새에 넣어 지그시 짓씹었다. 거가군만 있었다면 단독으로 한차례 공격을 감행해 공을 세울 수 있었을 터였다. 어쨌든 그녀는 군무를 이탈했다고 질책받고 있으니, 한 번 더 감행한다고 해서 별반 달라질 게 없지 않은가 말이다.
돌연 말 울음소리와 함께, 돌바닥을 두드리는 말발굽이 내는 소음이 후방에서 요란하게 들려왔다.
“오, 드디어 오는군. 맹 장군, 기마에 능한 병사들을 골라 말을 지급하시오.”
“존명이오!”
제꺽 대답한 맹아는 곧장 진을 형성하고 있는 병사들에게로 말을 몰았다.
“오우와!”
기묘한 함성이 위휘군 사이에서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성문이 열리고, 백기를 든 장수 한 명이 말에 탄 채 느린 속도로 달려 나오는 걸 본 까닭에서였다. 전형적인 항복의 사자였다.
“항복인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으며 편월은 등자를 딛고 몸을 세웠다.
“설마 받아 주실 작정은 아니겠지요? 지금에 이르러 하는 항복 따위는 절대로 승복할 수 없소이다.”
혼자 분을 삭이고 있던 거예홍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대로 싸움이 끝나면 그녀에겐 군무를 이탈한 죄만 남을 뿐, 공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게 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우린 벽곡성을 탈취하고, 성주나 병사를 죽이러 온 게 아니오. 그저 사람 하나 얻자고 온 거요. 이제라도 항복한다면 반가운 일이 아니겠소?”
편월의 어조는 부드러웠고, 실제로 만면에 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흥!”
거예홍은 세차게 콧방귀를 뀌었다. ‘빠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뒤잇는다 싶더니, 그녀는 곧장 말을 달려 아래로 내려갔다. 이 항복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 뒤를 이제 막 도착한 제상대가 허겁지겁 따라 내려갔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들의 장수였으니, 어딜 가든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예홍의 심정이야 어떻든 그날 중으로 벽곡성의 항복은 받아들여졌다.
그동안의 치열했던 전투와, 많은 사상자를 낸 위휘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격적이고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에 따라, 포로로 잡혔던 초염을 비롯한 삼백 명의 위휘군이 인도되었고, 다음 날 묘시 정각에 성주와 좌괴가 나와 정식으로 성을 인도하겠다는 서약문에 조인했다.
3
벽곡성이 항복을 결정하기도 전에, 가겸후는 직접 강국과 한창 전투 중인 식운관으로 출동했다. 하지만 공격을 서두르진 않았다.
이미 황제는 죽고 없지만, 천하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런 만큼 강국을 멸망시키는 일엔 시기를 적절하게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의 죽음을 발표한 직후, 강국을 멸망시킨다!
바로 이게 가겸후와 폐포자가 결정한 강국의 멸망 시기였다. 그래야 천하를 울릴 파급효과가 가장 크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겸후의 심정도 모르고, 강국 공격의 대장군이 된 율천국 오기총감 육우맹은 연방 조급증을 내고 있었다. 오늘은 전령을 보내는 것으론 성이 차지 않았는지 아예 직접 대본영으로 찾아와 총공격의 명을 내려 주길 재촉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나이를 의식한 탓인지도 몰랐다.
“천하의 이목을 생각하소서. 전하께서 몸소 이 궁벽한 전장까지 어보를 움직이셨는데, 저깟 식운관 하나 떨구지 못해 웅크리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웃을 것이옵니다. 지금이라도 명을 내려 주시면, 오늘 중이라도 식운관을 깨뜨리겠나이다.”
“육 장군.”
격앙된 육우맹의 언성에 비해 가겸후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깔렸다.
“이 싸움은 감히 황제 폐하의 옥체에 상해를 입힌 불칙한 무리들을 정벌하는 게 그 목적이오.”
“그 점은 소장도 익히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조속히 강국과 상초국 무리들을 쳐야 할 줄 아옵니다.”
성마르게 가겸후의 말까지 끊으며 얘기했지만, 육우맹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가겸후든 자신이든, 아니 율천국의 조야 모두가 단 한 번이라도 황제를 제대로 대우해 줬느냔 말이다.
그런데 지운산에서 일이 터지자 가겸후는 유별나게 ‘황제 폐하’를 앞세우고 있다. 이 모든 게 강국을 집어삼키기 위한 계책이라는 게 빤히 보이는 육우맹으로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글쎄, 더 들어 보시오. 그처럼 정의로운 싸움을 하는 우리들을 감히 누가 비웃는단 말이오? 그런 자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강국이나 상초국과 한통속임이 분명할 테니, 그게 누구든 우리 율천국군이 내려치는 철퇴를 피하지 못할 게요. 다만 과인이 우려하는 건 불칙한 무리들은 단번에 응징을 해야 된다는 거요.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우리가 역습을 당하게 된다면, 이야말로 천하가 웃을 게요. 우리 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건 정말로 가겸후가 염려하는 점이었다. 그동안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강국과 상초국 연합군의 숫자도 십오만에 이르러, 자신이 동원한 병력과 거의 맞먹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상초국에서 또 다른 지원군이 온다는 기별도 있었다.
사실 상초국에서 온다는 원군에 대해 가겸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배를 이용해 올 게 분명하고, 자신에겐 그들보다 우수한 수군이 있으니 먼 바다에서 차단해 수장시켜 버리면 그만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역시 가겸후의 가장 큰 고심은 병력이었다. 막말로 적이 강국과 상초국뿐이라면 앞으로 십만이나 이십만의 병사들 정도는 더 동원할 여력이 있다.
그러나 지금 율천국은 삼면으로 적을 맞고 있는 중이었다. 영산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허주가 그렇고, 북방의 융주 역시 잠시도 안심할 수 없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초국의 지원군까지 차단할 걸 염두에 두면, 삼면이 아니라 사방 모두가 적으로 둘러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 창일성에선 폐포자가 연일 신병을 모집하고, 맹훈련을 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훗날을 생각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하긴, 가겸후가 공격을 서둘지 않는 건 보충될 신병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파양주의 호윤천에게 파견했던 밀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사방에서 적을 맞고 있다고는 하지만, 융주와 바다 쪽은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다. 가장 시급한 곳은 역시 허주와 대치하고 있는 영산으로, 만약 영산이 뚫린다면 율천국의 서쪽은 그야말로 손도 댈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게다.
‘빠르면 열흘, 길어도 보름이면 소식이 당도하겠지.’
그때까지의 인내라고 가겸후는 생각했다. 엉덩이 무겁게 버티고 앉아 이쯤에서 증두신에게 은근한 압박을 가하는 한편, 허주의 조환을 문책하고—황제의 복수전을 방해한다는 이유로—호윤천을 선동해 이 싸움에 가담시키는 공작을 계속해 갈 작정이었다.
호윤천에 대해서 가겸후는 상당히 낙관하는 편이었다. 그 역시 내부적으로 소란스럽지만, 마용승이 죽은 이후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게 그 증거였다.
그걸 위해서라도 호윤천은 군사를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게고, 일단 출병한 게 확인되면 그때부턴 대대적인 선전 공작이 시작될 게다. 허주를 치기 위해 파양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당연히 조환은 뒤가 켕겨서라도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할 게고, 그사이 영산에 투입한 병력 중 일부를 빼서 일거에 강국을 치면 된다. 황제의 죽음을 정식으로 발표하는 건 바로 그 직전이 좋을 터였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그다음엔 위휘군을 칠 작정이었다. 동에선 자신이 짓뭉개 나가고, 서에선 호윤천이 밀고 들어온다면 편월이든 위휘군이든 견딜 재간이 없을 터였다.
‘그다음이 바로 내 꿈이 실현될 때다!’
“전하,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천하에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라도, 또 군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단시간 내에 강국을 제압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 첫 시작은 당연히 식운관 탈환이 될 것이오니, 명령만 내려 주시면 오늘에라도 도모를 하겠사옵니다.”
다시금 육우맹의 세찬 채근이 가겸후의 생각을 방해했다.
하긴 육우맹은 아직 황제의 죽음을 모른다. 그러니 저렇게 조급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득 가겸후는 육우맹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열여덟 살에 선왕의 유폐 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자신을 도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오로지 충성 하나로만 일관해 왔다.
그런데 늘그막에 폐포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자리를 꿰찰 조짐을 보이니 조급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알겠소. 육 장군의 뜻이 정히 그렇다면 전군을 이끌고 가서 식운관을 공격하시오.”
가겸후는 육우맹의 뜻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강국을 멸망시키려면 식운관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금 일찍 탈환해 둬도 괜찮을 것이다.
“감사하옵니다. 하나 전군을 동원할 필요는 없사옵니다. 소장에게 군사 오만만 주시면, 오늘 중으로 식운관을 도모하겠나이다.”
“오만은 아무래도 부족하오. 그러니 십만을 데리고 가시오. 또한 너무 조급히 서두르지 마시오. 우리 율천국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하면서 천천히 공격하시오.”
“존명!”
육우맹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명을 받았다. 그 역시 오만은 부족하다고 알고 있는 까닭에서였다.
신이 난 육우맹이 춤이라도 추는 듯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나간 후, 가겸후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대체 황후는 어디로 간 걸까?’
사실 이건 군사적인 문제만큼이나 큰 비중으로 가겸후의 속을 끓게 만드는 일이었다. 육친의 정 따위에 연연한다는 건 물론 아니었다.
황후가 사라진 이후 가겸후는 황궁 전체를 대대적으로 수색했지만, 바라던 옥새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지니고 잠적한 게 분명했다.
그건 가겸후의 꿈에 굵직한 손톱자국을 낸 것에 다름 아니었다. 옥새가 사라짐으로써 앞으로의 일은 더욱 험악하고 살벌하게 진행될 테니 말이다.
‘차라리 어디서 죽어 버리면 좋으련만…….’
솔직한 가겸후의 심정이었다. 그게 황후가 이리저리 방황하다 다른 군벌의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었다.
육친끼리 너무 비정한 짓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어버이라도 단 하나 양보하지 못하는 게 바로 권력이다. 그래서 가겸후도 힘으로 친아버지를 치고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황제를 끼고돌았던 지난 십 몇 년 동안 가겸후는 그 권력의 달콤함을 어느 정도 맛봤다. 사해가 굴복한 건 아니었지만, 공공연히 비난하거나 저항하는 것도 없었다.
단순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랬는데, 만약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된다면 어떻겠느냔 말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겸후는 온몸에 짜릿한 쾌감이 느껴지곤 했다.
바로 이래서 가겸후는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아서는 게 있다면, 그게 설사 하늘이라도 베고 지나갈 결심이었다.
돌연 북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육우맹이 성급하게 출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 *
이상하게도 그날 밤 편월은 잠이 오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항복한 벽곡성에서 주효를 마련해 와서, 상하 장졸들이 모두 오랜만에 그간의 피로를 씻을 수 있었다.
편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역시 몇 잔의 술을 마셨고, 다른 날보다 일찍 쉬기 위해 임시로 마련된 막사의 침상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삼 경쯤 되었나?’
계곡 사이로 불어 지나는 사나운 바람 소리를 들으며 편월은 잡념에 사로잡혔다.
이제 날이 밝으면 벽곡성을 정식으로 인수하게 된다. 솔직히 힘으로 쳐서 깨뜨린 경우는 많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까닭 없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은 초저녁에 마셨던 술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바람 소리 사이로 순라병의 딱따기 소리가 들려왔다.
‘맹 장군이 고생하는군.’
현재 위휘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은 벽곡성 바로 앞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혹시 야습이라도 당한다면 속수무책이니 주둔지로 철수하자는 주장이 팽배했다.
그 의견을 편월이 잘라 버렸다. 야습은 대비하기에 따라 이쪽이 이길 수도 있지만, 만약 벽곡성주가 밤새 딴마음을 먹는다면 다시 그 지긋지긋한 계단을 돌파해야 된다는 게 이유였다. 자신도 그 짓을 또 한 번 반복하긴 싫었다. 게다가 벽곡성 측에선 당장 포로들을 풀어 줬다. 이게 결정적으로 의심을 풀게 만들었고, 시식을 통한 독 검사를 마친 후 주효는 병사들에게 배급되었다.
하지만 승복하지 못한 맹아는 일천의 병력을 급조해 근위대를 보강했다. 그들에겐 벽곡성에서 가져온 주효에는 입도 대지 못하게 했고, 이렇게 깊은 밤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딱따기 소리를 듣자 편월은 마음이 편해졌다. 소리 그 자체보다는 맹아와 근위대를 믿기 때문이리라.
그제야 편월은 늘어지게 긴 하품을 했다. 초저녁에 마셨던 술이 이제야 취기를 유발시키는 듯 배 속도 훈훈해지는 것 같았다.
‘자고 일어나면…….’
그토록 열망하던 좌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계천자가 추천했고, 자신을 이처럼 고생시켰으니 필시 대단한 인물일 게다.
그 생각을 하며 편월은 쏟아지는 잠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날이 샜나?’
잠에서 깼다 싶자 가장 먼저 편월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을 떠 보니 여전히 주위는 캄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직은 한밤중이란 얘기였다.
그런데 왜 깼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편월의 귀에 마치 거센 소나기가 메마른 대지를 두드리는 것과 같은 소리가 타닥, 타다닥 하고 들려왔다.
편월은 무심결에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이제 청년이 되어 진막에서 밤비를 맞는다는 감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편월이 느낀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저 정도 소리를 내면서 소나기가 내린다면 의당 습기도 함께 느껴져야 한다. 한데 진막 안을 떠도는 것은 겨울 특유의 건조한 냉기뿐이었다.
편월은 몸을 일으켰다. 쉽지 않았다. 아직 잠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탓인지, 전신이 마치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려고 편월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을 때, 돌연 진막 바깥이 훤하게 밝아졌다. 마치 해가 갑자기 불쑥 솟구친 듯한 광경이었다.
‘야습이다!’
침상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편월은 알 수 있었다. 소나기가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건 뭔가 타는 것이었고, 마침내 그게 불길이 되어 진막 밖을 밝히고 있는 것일 터였다.
“와아!”
“앗, 야습이다. 비상! 적의 야습이다!”
편월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사방에서 요란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편월의 귀에는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먼 곳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가는 것처럼, 명료하게 들리지 않고 그저 윙윙하는 이명처럼 여겨졌다.
편월은 재빨리 침상을 빠져나와 대도를 집어 들었다. 모처럼 갑옷을 벗은 가벼운 전포 차림이었지만, 몸이 이상하게 무거워 생각만큼 동작이 민첩하지 못했다.
‘독인가?’
그 외에는 지금 자신의 몸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편월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독이 든 음식을 의심한다면 당연히 벽곡성에서 내온 주효뿐일 테고, 그건 사전에 철저하게 시식을 거쳐 검사를 마쳤다.
어쨌든 지금은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잔뜩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막사를 빠져나온 편월은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흔히 ‘불바다’라고 표현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주군, 적의 야습입니다. 비겁한 놈들!”
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불바다를 헤치고 온 맹아가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확실히 주효를 먹지 않은 그들의 몸은 가벼웠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시오. 뒤는 내가 맡겠소. 자, 주군을 모시고 주둔지로 내려가라.”
“존명! 자, 이쪽이오. 주군.”
맹아의 명에 따라 십여 명의 병사가 편월의 전포 소매를 잡아끌었다.
“놔라! 다른 병사들은? 왜 아군은 저항하지 않는가?”
격렬하게 떨리는 어투로 편월이 물었다. 자신의 몸 상태로, 다른 병사들도 모두 중독되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불길에 타 죽거나 적병에게 도륙되는 걸 본다는 건 견딜 수 없었다.
“저기다! 위휘군의 대장군이 저기 있다! 쳐라!”
“와아, 잡아라!”
불길 저 너머에서 고함이 들린다 싶더니, 한 부대의 적병들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주군, 시간이 없소! 어서 피하시오!”
맹아가 편월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동시에 창을 휘두르며 적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 뒤를, 남아 있던 병사들 대부분이 따랐다.
“자, 주군. 어서!”
이제 편월 곁에 남은, 불과 십여 명에 이르는 병사들은 힘으로라도 그를 끌고 가려는 듯 거칠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놔라! 나는 못 간다!”
말을 마치는 것과 더불어 편월은 주변에 있는 병사들을 떨쳐 버리고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꼬꾸라질 듯 다리가 휘청거렸다.
편월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떻게 혼자만 살겠다고 갈 수 있단 말인가. 그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여기다 진을 치라고 한 건 자신이었다. 그 책임도 역시 오롯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위휘군의 대장군인 줄 알고 목을 받으러 왔소!”
누군가 한 소리 크게 지르며 창을 내지르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건 놈의 실수였다. 아무리 중독되었다지만, 지금 편월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건 그 이상의 독기였다. 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도가 불길과 열기, 그리고 결정적으로 놈의 육신을 양단하며 빛을 튕겨 냈다.
“위휘군의 대장군 편월이 여기 있노라!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는 썩 나서 내 칼을 받아라!”
불길 속에 우뚝 버티고 선 채 편월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할 수만 있다면 적병 모두를 자기에게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단 한 명의 아군이라도 몸을 뺄 수 있도록 말이다.
“미쳤소!”
어디서 나타났는지 맹아가 옆으로 다가오며 악이 받친 고함을 질렀다. 왜 아직 피하지 않았느냐는 강한 질책이었다.
편월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뇌리를 메우고 있는 건, 바로 여기가 죽을 자리라는 것뿐이었다.
“제기랄, 이젠 빠져나갈 구멍도 없군.”
또 한 번 맹아가 악이 받쳐 으르렁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적병들이었고, 아군은 고작 삼십여 명 정도였다.
그래도 다른 곳에선 아군이 더러 생존해서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간간이 욕설과 고함 그리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군. 그 불길, 아주 시원해서 쓸 만하다. 빌어먹을 주군을 모신 시간이 내겐 가장 큰 행복이었소. 고맙소.”
편월과 등을 맞대고 서며 맹아가 말했다. 그 역시 여기서 죽을 각오인 게 분명했다.
그래도 여전히 편월은 말이 없었다. 침사성에서 죽은 목철린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여전히 윙윙거리는 이명과 나른한 육신 탓에 쉽지 않았다.
“와앗!”
별안간 편월을 둘러싸고 있던 적의 포위망이 크게 출렁거렸다. 그러고는 몇 명인가 적병이 불길 속으로 처박힌다 싶더니,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다가왔다.
“주, 주군. 괘, 괘, 괜찮…….”
초염이었다. 그 역시 중독이 되었는지 심하게 휘청거리는 발길로 편월을 찾아왔던 것이다. 상황이 급박해지니 말도 더욱 심하게 더듬었다.
문득 편월은 웃음이 치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왠지 초염은 희극적으로 보였다. 어쩌면 저승에 가서도 저렇게 말을 더듬다가 염라대왕의 속을 뒤집어 놓을지도 모른다.
“맹 장군의 말처럼 불길이 아주 시원하군. 죽기엔 딱 좋은 자리야.”
“하하하!”
편월의 말에 맹아가 커다란 웃음을 토했다. 그러고는 곧장 적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다음은 편월이 그리고 초염이, 그 뒤를 남은 삼십여 명의 위휘군이 차례로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와아앗!”
포위하고 있던 적병들 속에서 불길보다 더 맹렬하고 드높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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