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인지난得人至難
1
그날 전투에 편월은 참가하지 않았다. 귀곡탄으로 침투하는 걸 감추기 위한 거짓 공격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소질풍이 회복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다른 말을 탈 수도 있다. 병영에는 명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말들이 많았고, 또 장수들이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편월은 내키지 않았다. 다른 말을 탈 것 같았으면 진즉에 그렇게 했을 터였다. 소질풍이 늙었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오늘 편월은 진막 앞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위휘군의 전투를 지켜보기만 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대부분 신병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실전에서 그들의 호흡이 어떻게 맞아 들어가는지, 어떤 부분에서 삐걱거리는지 파악하고 있어야만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검 사항은, 본대에서 자신이 내리는 명이 얼마나 빨리 병사들 개개인에게까지 전달되고 먹혀드는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전투 시 시기적절하게 병력을 운용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전투를 참관하고 있자니 편월은 실망스러웠다. 어제 형편없는 타격을 입어서 그런지 병사들의 움직임이 한껏 위축되어 있었다.
그게 절대적으로 나쁘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오늘 공격은 양동작전의 성격을 띤 것이니, 최대한으로 희생을 줄이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바위가 굴러 떨어질 때마다 후퇴하고, 화살이 쏟아질 때마다 밀려 내려온다는 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저래서야 귀한 밥 먹고 헛심을 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거 장군이 좀 더 분발하면 좋을 텐데.’
오늘 실전 지휘는 거예홍이 맡았다. 그녀는 선두에 서서 연방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어제 죽을 뻔했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움직임에 활력이 없는 게 멀리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이럴 때 편월은 강숙이나 맹아가 아쉬웠다. 그들이라면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욱 기를 쓰고 전진해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했을 터였다. 설사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이건 양동작전이다.’
강숙과 맹아가 이 자리에 없으니, 자신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심정을 편월은 애써 억눌렀다. 적의 시선을 이쪽에 묶어 둘 수만 있다면, 희생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도 좋은 일인 것이다.
‘어제 죽거나 다친 병사가 이천 정도.’
편월은 어제 입었던 위휘군의 피해로 생각을 돌렸다. 하루치의 전투치고는 너무 많은 희생이었다.
그게 헛된 희생은 결코 아니었다. 오늘쯤이면 초염은 마침내 귀곡탄을 건너 벽곡성의 배후를 칠 터였다. 그땐 어제 죽거나 상한 자들의 이름이 비로소 빛을 발할 것이다.
물론 전사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렸다. 자신에게 있어 전쟁을 치를 때의 최고 가치는 생존이다. 그런데 부하들은 자꾸만 죽어 나간다는 이 지독한 역설은 또 어떻게 극복해야 될까?
“와아앗!”
또 한 번 다급한 함성이 공격하던 위휘군에서 터져 나왔다.
생각을 그친 편월은 재빨리 주의를 집중했다. 이제 바위는 성에서뿐만 아니라 절벽에서도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편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벽곡성 놈들, 계단을 아예 봉쇄하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벽곡성에서 이른바 배수의 진을 쳤다는 얘기다. 병사들은 물론, 백성들 하나하나까지 모두 옥쇄를 각오로 싸움에 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성으로 통하는 길을 스스로 막을 일이 없었다.
이건 편월이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가 군사를 일으킨 건 벽곡성이 자신을 괴롭혔거나, 혹은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직 좌괴라는 사람 하나를 얻기 위함이었으니, 그로 인해 엉뚱한 원한의 씨앗을 이 땅에 심어 두긴 싫었다.
또 다른 하나는 편월이 더더욱 바라지 않는 일로, 벽곡성에서 이미 위휘군의 양동작전을 눈치 채고 있을 경우다. 그러니 정문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 버리고, 후문이라고 할 수 있는 귀곡탄 쪽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걸 다시 한 번 뒤집어 보면 벽곡성은 귀곡탄 쪽의 싸움에 자신이 있다는 것과도 통한다. 그만큼 많은 준비를 갖춰 뒀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문득 편월은 불안해졌다. 지금 귀곡탄에 가 있는 장수는 맹아와 초염이다. 둘 다 용맹하긴 하지만, 우직한 성격들이다. 간단한 속임수에도 넘어갈 공산이 크다.
편월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귀곡탄으로 가 봐야만 될 것 같은 조급증이 발동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달려갈 수 없다는 건 편월도 잘 알고 있다. 다만 맹아와 초염의 성격을 생각해 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주위에 근위대원들이 도열해 있다. 명색이 주군으로서 초조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편월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쯤에서 병사들을 철수시켜야겠군.’
벽곡성으로 통하는 계단은 위에서 굴러 떨어진 바위들로 인해 거의 막혀 버렸다. 더 이상 공격한다는 건 무의미하니 병사들을 물릴 생각이었다.
편월이 그 뜻을 막 기수에게 말하려고 할 때, 또 한차례 다급한 고함이 귓전을 두드렸다.
“와앗, 위험하다!”
“이크, 피해라!”
이건 보다 가까이, 즉 본대에서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편월 주변에 있던 근위대원이 바짝 긴장했다. 혹시라도 적병이 몰래 기습을 가해 온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당연히 편월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장을 기습하는 일은 자신과 광운이 전황이 불리할 때 흔히 써먹던 수법이었다. 적이라고 해서 그 방법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적은 아니었다. 우리에 가둬 둔 한 필의 말이 뭔가에 놀랐는지 마구 미쳐 날뛰고 있었다.
편월은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질풍이 쓰러져 있는 지금, 다른 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앗, 막아라!”
“주군께서 위험하시다. 베어 버려라!”
이제 근처에 있던 근위대원들까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미친 말이 가까이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편월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말 한 마리 날뛰는 것 정도는 어느 병사든 쉽게 진정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한데 그게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피하십시오, 주군!”
근위대원 두 명이 편월을 감싸며 외쳤다. 상당히 급박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편월은 날뛰는 말을 유심히 살폈다. 전신에 새카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말로, 이마에 하얀 초승달 무늬가 보였다.
그 순간 편월은 이상한 전율을 느꼈다. 자신의 이름과 말의 이마에 박힌 무늬의 연관성을 떠올린 탓이었다.
“비켜라.”
“안 됩니다. 우선 자리를 피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직접 나서 말을 잡으려는 편월을 근위대원들이 한사코 제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삐도 안장도 없는 말은 너무도 힘차게 날뛰고 있었다. 근 백여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달라붙어 있었지만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편월은 더욱 말에게 마음이 끌렸다. 병사들이 창을 겨누고 연방 밧줄을 던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들을 차 던지거나 목에 올가미를 건 채 이리저리 내달렸다.
“비켜라!”
재차 세차게 내뱉으며 편월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근위대원들을 튕겨 버렸다. 그러고는 날뛰는 말에게 재빨리 접근했다.
“모두 물러서라! 말을 다치게 하지 마!”
병사들에게 명을 내리는 것과, 편월이 말 등에 뛰어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참, 말로 하니 이렇게 쉽다. 하지만 안장도 고삐도 없이 길길이 날뛰는 말에 올라탄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말굽에 채이거나 짓밟혀 병신이 되기 십상이고,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걸 편월이 쉽게 해냈으니, 말에 이끌려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은 일제히 탄성을 토했다.
하지만 정작 말 위에 올라탄 편월은 그렇게 여유나 부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고삐와 안장이 없는 승마는 어렸을 때부터 익숙했지만, 지금은 차원이 달랐다. 미친 것 같기도 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기도 한 이놈의 말은 사람이 올라타자 더욱 광분해서 날뛰었다.
삽시간에 진막 주변으로 뽀얀 먼지가 피어올랐다. 한 마리 말이 날뛰며 피워 올린 것치고는 너무 짙어서, 병사들의 눈엔 편월의 모습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일단의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고함을 지른 건 거예홍이었다. 막 철수하던 판에 본대 진막 근처에서 먼지가 이는 걸 보고 혹시 적병의 기습이 아닌가 싶어 부랴부랴 달려온 참이었다.
“주군께서 미친 말을 타고 계십니다.”
“뭐야? 아니, 왜 그런 경솔한 짓을?”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거예홍은 자욱한 먼지를 쏘아보았다. 말에 타고 있는 편월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거예홍은 이내 말을 몰아 먼지를 뚫고 들어갔다. 편월을 도와주려 함이었다.
거예홍이 설치는 말에 막 접근했다 싶을 때, 돌연 시커먼 구름 덩어리 하나가 그녀의 눈앞으로 확 덮쳐 왔다.
“우웃!”
만약 거예홍이 예사 여인이었다면 분명 뾰족한 비명을 질렀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남자 못지않은 무장이었기에, 짧은 경호성을 토하며 그 구름을 향해 창을 곧추세웠다.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거예홍은 이제 곧 팔에 전해질 둔중한 충격에 대비했다. 그녀가 구름 덩어리라고 본 건 기실 편월이 탄 말이었고, 자신의 창에 꼼짝없이 꿰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 줄기 세찬 바람이 거예홍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싶은 순간, 편월이 탄 말은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아무도 따라오지 마라! 흐하하하!”
달리는 말 위에서 지른 편월의 고함과 웃음소리가 거예홍을 비롯한 병사들의 귀를 세차게 두드렸다.
실제로 지금 편월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소질풍도 예사 말이 아니었지만, 지금 타고 있는 이놈은 그보다 나으면 낫지 절대로 못하지 않았다.
자고로 장수는 물론 기병들은 말을 제 몸같이 소중하게 아껴 왔다. 어떤 경우엔 사람보다 더 귀하게 취급하기도 했다. 사람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훌륭한 무장이 될 수도 있지만, 명마란 천성적으로 타고나야 하기 때문이다. 잡마雜馬를 아무리 길들여도 결코 천리마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말은 타고난 명마다. 어떤 이유에서 이처럼 설치는지는 몰라도, 사람의 손길에 의해 잘 훈련된 흔적이 엿보였다. 그렇기에, 알지 못하는 편월이 타니 이처럼 날뛰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편월은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주인이 따로 있다면 어떻게든 양보를 받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 당장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갈기를 움켜쥔 손에 힘을 가하며, 편월은 허벅지로 말의 옆구리를 바짝 조였다. 이 미친 질주를 좀 더 계속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별로 없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말이다.
말은 더욱 거칠어졌다. 편월의 손아귀에 잡힌 갈기도 고통스러웠을 게고, 그보다는 옆구리가 조여 숨이 차오를 게 분명했다.
상황이 더욱 위태로워졌지만, 편월은 내심 반겼다. 이게 말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라는 걸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만약 네가 내 말이 된다면…….”
편월은 한꺼번에 말을 맺지 못했다. 너무 거칠게 날뛰는 말에 타고 있으면 사람의 호흡도 가빠지기 마련이었다.
“널 흑풍이라고 부르겠다. 물론 네 주인이 양보해 줘야겠지만.”
그 말을 들은 것일까. 돌연 말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더니, 고개를 아래로 해서 바닥을 강하게 찧었다. 그와 함께 뒷발을 허공 높이 거세게 차올렸다.
“훗!”
자신도 모르게 편월은 경호성을 토하고 말았다. 방금 말이 취한 동작으로 인해 그대로 튕겨 나갈 듯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편월에게 있어 승마는 또 하나의 천성에 다름 아니었다. 갈기를 쥔 손의 힘을 적절히 조절해 허공에 뜬 몸을 가누는가 싶더니, 다시 말 등에 내려앉아 옆구리를 더욱 바짝 조였다.
끼히히힝!
말도 이건 의외였나 보다. 편월이 여전히 떨어지지 않자 크게 한 번 울부짖더니, 이번엔 좌로 우로 일정한 규칙도 없이 방향을 바꾸며 설치기 시작했다.
이제 편월은 조금씩 여유를 되찾았다. 말이 이런 행동을 보인다는 건 지쳐 간다는 증거다. 조금만 더 버티면 굴복할 터였다.
끼히히힝!
다시 한 번 힘차게 울부짖은 말은 훌쩍 도약한다 싶더니, 급격히 곤두박질쳤다. 조금 전 편월을 떨굴 뻔했던 것과 똑 같은 동작이었다.
이번에 편월은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같은 수법에 두 번 속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걸 끝으로 말의 동작이 급격히 둔해졌다.
“후유…….”
그제야 편월은 긴 한숨을 토했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 않았지만, 벌써 한 시진이 훌쩍 넘게 둘이 실랑이를 벌인 것이다.
편월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부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 같았다.
“자, 이젠 돌아가자. 너도 네 주인에게 가 봐야지.”
푸르륵!
목을 두드리며 한 편월의 말에, 말은 거친 투레질을 해 댔다. 아직은 완전히 승복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편월이 이끄는 대로 달리기는 했다. 주인을 찾아가자는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후로는 비교적 고분고분했다.
돌아가면서 편월은 또 한 번 놀라움을 삼켜야 했다. 낯선 사람을 태운 말이 설치다가 잠잠해지는 건 지쳤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놈의 말은 한 번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하자 무지하게 빨랐다. 한 시진 넘게 날뛴 뒤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았다.
그 덕에 편월은 빠르게 복귀할 수 있었다.
“괜찮으시오?”
편월의 모습을 보자마자 거예홍이 서둘러 물었다. 그녀는 편월을 찾기 위해 수색대까지 결성해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이 말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보시오. 정말 훌륭한 말이오.”
“그 말의 주인은 소장이 알고 있습니다.”
거예홍에게 한 편월의 말을 들었는지, 근위대의 아장 중 한 명이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대체 누군가?”
“감조甘助라는 자로, 어제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뭣이?”
“주군께서 그 말을 타고 가신 후 마구간을 담당하는 자에게 알아봤습니다. 어제 제 주인인 감조를 태우고 돌아온 이래, 여물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오늘 시신을 묻는 걸 보고는 미쳐 날뛰다 마구간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런가.”
편월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힘 좋고 잘 달려서 명마라고 생각했는데, 심성은 그 이상이었다. 죽은 감조에겐 안된 일이지만, 정말 탐이 나는 말이었다.
“알겠다. 그럼 이 말을 우선 소질풍과 같이 넣어 두도록. 참, 이 말의 이름은 이제부터 흑풍이다.”
말을 하면서 편월은 흑풍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처음엔 고개를 젖혀 거부하던 흑풍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편월의 손바닥에 대고 연방 푸르릉거리는 콧김을 불어 댔다. 마치 제 주인 감조의 죽음을 알아 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푹 쉬어라, 흑풍. 내일부터는 나와 함께 전장을 누벼 보자꾸나.”
흑풍의 목을 쓰다듬으며 편월은 부드럽게 말했다.
끼히히힝, 푸르륵!
우렁찬 울음과 투레질 소리로 흑풍은 대답을 대신했다.
2
물론 초염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맹아도 나름대로는 자맥질과 수영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귀곡탄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히며, 기가 죽고 말았다.
천 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물살을 상상해 보라. 그걸 그대로 옆으로 눕혀 둔 게 바로 귀곡탄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었다. 오죽하면 아직은 한겨울인 정월에도 얼지 않고 흐를 정도였다.
“초 장군, 정말 해내실 수 있겠소?”
아직 쌀쌀한 바람이 감도는 와중에도 샅만 가린 차림에 단도 하나 달랑 차고 물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초염에게 맹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귀곡탄에 맨몸으로 뛰어든다는 건 자살 행위와 같다고 여겨졌다.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씰룩거리던 초염은, 그냥 웃고 말았다. 더듬거리는 말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바, 밧줄을…….”
여전히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초염은 맹아의 손에 들린 밧줄을 가리켰다.
“밧줄은 염려 마시오. 내 팔이 빠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니.”
귀곡탄을 도강하기 위해 선발된 인원은 총 천 명이었다. 그중 삼백이 밧줄을 몸에 감고 먼저 건너기로 했다.
맹아는 그 삼백 명 병사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정말 귀신이 울부짖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격류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치곤 겁이 없어 보였다.
솔직히 맹아는 이걸 좋다고 해석해야 할지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적과 맞부딪쳐 싸우는 중이라면 겁 없고 용맹한 게 나쁠 리 없다.
그러나 지금 상대는 무시무시한 격류다. 너무 자신만만하게 덤비다간 낭패를 당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주, 주군께서 자, 잘해 주셔서, 이쪽은 여, 염려 안 해도…….”
“그래도 조심하시오. 비록 적은 보이지 않지만, 아무런 방비도 없이 비워 두진 않았을 테니까.”
맹아는 얼른 초염의 말을 받았다. 그대로 두면 하루 종일 걸려도 하고 싶은 말을 마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부, 부탁하오.”
짧게 한마디 더듬은 후, 초염은 발치에 놓여 있는 큼지막한 돌을 집어 들었다. 저처럼 세찬 물살에 쓸려 가지 않으려면 저만한 준비를 해야 되리라.
맹아는 그것도 걱정이었다. 아무리 자맥질에 능하다고 해도 돌을 들고 물속에 들어간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전쟁이 인간 광기의 산물이라지만, 이렇게 미친 짓까지 해야 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초염이 돌을 주워 들자 그를 따르기로 한 삼백의 병사들도 각자 준비한 돌을 들었다. 그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씩 물로 들어갔다.
“밧줄은 튼튼히 고정시켰나?”
맹아는 밧줄을 책임진 오백의 병사들에게 물었다. 하나같이 염려 없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 벌목할 자들은 나를 따르라.”
기본적으로, 지금 물속으로 들어간 병사들은 도강해서 벽곡성을 곧바로 공격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몸에 묶은 밧줄을 꼬아서 그물을 엮는 게 주 임무였다.
그와 함께 지금 맹아가 이끌고 가는 이백의 병사들은 상류로 올라가 벌목을 해서 그 나무들을 귀곡탄에 띄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나무들은 초염 등이 엮은 그물에 걸릴 터이고, 그게 축적되면 훌륭한 다리가 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진정한 공격은 그 후에 시작될 것이다.
병사들을 이끌고 가면서 맹아는 편월에게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벽곡성의 정면에서 적의 시선을 끌어 주는 바람에 자신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맹아가 이 임무를 반긴 건 결코 아니었다. 성격상 적과 마주 서서 싸우는 게 좋지, 뒷구멍에서 나무나 베어야 되는 건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아가 이쪽으로 온 건, 아직도 그가 초염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뭔가 실수를 할 것만 같았다.
‘초 장군만 잘해 주면 오늘 중으로 근사한 다리가 생기겠지.’
뒤따르는 이백의 부하들을 보며, 맹아는 다시 한 번 확신을 가졌다. 적과 마주 서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무만 베면 되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울까.
역시 걱정되는 건 초염이었다. 그가 이천강에 밧줄을 걸었던 것은 알고 있지만, 귀곡탄은 또 다르다. 큰 돌멩이까지 가지고 물에 들어가야 할 정도니, 이건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이 아니었다.
어쨌든 임무는 임무다. 맹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보다 잘해 내기 위해 부하들을 독려했다.
위휘군의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귀곡탄과 접해 있는 동굴 속에서 좌괴는 초염과 맹아의 움직임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기실 좌괴는 상류로 올라가는 맹아의 부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뭘 하든 도강만 막으면 그들은 헛일을 하는 게 될 테니, 오히려 열심히 해 주길 바랐다.
“좌 선생, 성의 정문은 저대로 놔둬도 되겠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 사람은 벽곡성 전체의 대장군 직을 수행하고 있는 고융高隆이었다.
좌괴는 씁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뭐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시오?”
“위휘군이 계단을 막은 바위들을 치우고 있소이다. 이대로 두면 오늘 중으로 다 치워 버릴 것이오.”
고융의 말을 들으며, 좌괴는 속으로 경멸감을 짓씹었다. 명색이 무장, 그것도 한 성의 군 통수권을 거머쥐고 있는 자가 저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디다 쓰겠는가.
하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벽곡성의 병력이라고 해 봐야 고작 삼천에 불과하다. 전투가 가능한 백성들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오천에 이르지 못한다. 그 숫자로 위휘군 일만 오천을 상대하려니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게 무슨 걱정이오. 적이 치우면 우린 또 막으면 되지. 바위야 절벽을 깨뜨리면 얼마든지 생길 것 아니오.”
경멸에서 우러난 짜증을 지그시 누르며 좌괴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도 성주께서 여간 걱정하시는 게 아니오. 같은 방법이 두 번씩이나 먹히겠냐고 하시면서…….”
“성주께 전하시오. 만에 하나 정문이 뚫리면 싸울 수도 있지만, 귀곡탄의 수송로가 막히면 싸우지도 못하고 몽땅 굶어 죽게 될 거라고 말이오.”
좌괴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성에는 약 두 달 정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다. 그걸 믿고서 당장 눈에 보이는 걱정만 하는 성주란 사람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좌괴는 약간의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어차피 자신은 위휘군으로 갈 결심이었다. 그 시간이 두 달이 걸리지 않는다면, 벽곡성 사람들은 굶어 죽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결론이 나온다. 성주나 고융을 비웃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뱉어 버린 말이고, 또한 이 수송로도 중요한 곳이다. 가당치도 않은 걱정에 쫓겨 양보할 수는 없었다.
“일러뒀던 건 제대로 준비가 되었소? 적이 강 중간쯤 건너온 것 같은데…….”
“언제든 말씀만 하시오. 저렇게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까.”
말과 함께 고융은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많은 노궁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장전되어 있는 건 화살이라기보다는 창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만큼 컸는데, 그 끝엔 그물이 걸려 있었다.
그 점을 생각해 보면 이 화살도 작게만 느껴진다. 그물을 물에 가라앉히기 위해 많은 추가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쇠심줄을 꼬아 만든 그물이오. 웬만해서는 끊어지지 않을 게요.”
자신감을 약간 회복한 얼굴로 고융이 말했다. 단시간 내에 이걸 마련하느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조금은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터였다.
좌괴는 터무니없이 큰 화살 끝에 매달려 있는 그물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필요 이상으로 튼튼하게 짠 것이었다.
좌괴의 점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물과 연결된 도르래의 강도도 잊지 않았다.
‘이 정도면 물에 들어간 위휘군 모두는 사로잡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예봉은 꺾을 수 있겠지.’
사실 좌괴로서는 위휘군을 단 한 명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갔을 때 별다른 반감이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어제 전투에서는 위휘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지만, 그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벽곡성은 벌써 떨어졌을 터였다.
“준비하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망설일 것 없소. 이제 마음껏 쏘시오.”
“알겠소. 자, 발사!”
고융으로선 자신이 애써 준비했던 것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목소리도 우렁차게 명을 내렸다.
퓨쉬쉬쉬쉿!
한동안 노궁이 발사되는 소리가 동굴 안에 그들먹하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귀곡탄 위에 자리한 하늘의 일부가 컴컴하게 가려졌다. 거대한 그물이 활짝 펼쳐진 까닭에서였다.
퓽, 퓨퓽!
화살이 물을 꿰뚫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초염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만약 이게 단순한 화살 공격뿐이었다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어떤 병기든 물의 저항을 만나게 되면 살상력이 크게 떨어지니까.
한데 이건 뭔가 달랐다. 물살을 헤치는 소리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위기감이 확연히 느껴졌다.
초염은 재빨리 손목에 감고 있던 가느다란 줄을 두 차례 당겼다. 허리에 감고 있는 밧줄 외에, 물에 들어온 병사들끼리 연락을 취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고, 방금은 철수하라는 신호였다.
물속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전해져 왔다. 다들 지녔던 돌멩이를 놓고 밖으로 나가면서 일으킨 파문이었다.
초염도 물을 헤치고 위로 부상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제대로 살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초염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 수 없었다. 귀곡탄 수면 전체를 덮은 듯한 그물이 자신을 오히려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분명 경악할 일이었다. 적진이 있는 반대쪽 기슭엔 뭔가 조치를 취해 뒀으리라 예상했지만, 이처럼 무식하게 그물을 덮어씌우리라곤 꿈에서도 상상치 못했다.
초염은 차고 있던 단도를 침착하게 빼 들었다. 이럴 때 발버둥 치며 허우적거리면 그물은 더욱 엉켜들기만 할 뿐이었다.
한편으로 초염은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각자 알아서 빠져나가라는 뜻이었다.
동시에 초염은 서서히 몸을 휘감아 들어오는 그물을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 어지간한 것이라면 이 정도로 충분히 자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물은 끄덕도 없었고, 초염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자신은 괜찮지만, 벌써 한계에 이른 병사들도 없지 않으리라. 그들을 위해서라도 조속히 이 그물을 잘라야만 한다.
꽈악!
초염은 그물을 움켜쥐었다. 그냥 단도를 휘둘러서 끊어지지 않는다면, 한 가닥씩이라도 잘라 낼 생각이었다.
그때 몸이 한쪽으로 확 끌려갔다. 그물이 당겨진 것이다.
초염은 울컥 분노가 치미는 걸 느꼈다. 적들이 자신들을 마치 물고기 잡듯이 잡으려는 것 같아서였다. 자연히 초염의 손길이 빨라졌다. 싸우다 잡힌 것도 아니고, 이렇게 물고기처럼 사로잡힌다는 건 그야말로 치욕이었다.
툭!
드디어 그물의 한 가닥이 잘렸다.
하지만 그때, 벌써 적이 내민 갈고리가 초염의 몸을 찍어 올렸다.
* * *
사르르-.
향에 피어난 연기가 허공으로 길게 뻗치다가 다시 옆으로 휘늘어졌다.
벌써 두 시진 가까이 광운은 그 향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죽영의 위패를 모신 사당 안, 연기는 마치 살아 있을 때 그녀가 가끔 춰 보였던 춤사위와도 비슷하게 보였다.
‘이젠 떠나야겠소.’
자기 속으로만 하는 이 말도 벌써 몇 번째인지 광운 자신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정작 이 위패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광운의 모습이 조금 달라졌다. 유화를 화응 등에게 딸려 보낼 때만 해도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얼굴이었다.
물론 완전히 예전처럼 된 건 아니었다. 아직은 건강하다기보다는 위태로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광운은 침사성을 떠날 생각이었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여기는 그에게 기쁨보다는 아픈 추억이 많은 곳이다. 목철린의 최후도, 죽영과의 영원한 이별도 바로 여기서 생긴 일이었다.
또 하나 광운의 결정을 도운 건 자기 수명에 대한 자신감 상실이었다. 죽영이 죽은 이후로 지나치게 술을 가까이했던 게 가장 큰 원인이지만, 어쨌든 이제 그도 곧 쉰의 고비를 넘긴다. 죽음을 준비해야 될 때란 얘기였다.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설사 막주에 기반을 둔 자신의 힘으로 파양주 전체를 평정하진 못한다 해도, 적어도 편월에게 걸리는 압력만은 덜어 줘야 한다. 그래야 죽어 황천에서 죽영을 만났을 때 할 말이라도 있다.
‘그 전에는 죽을 수 없다.’
향이 거의 타들어 갔고, 광운은 부시를 쳐서 새로운 향에 불을 붙이며 생각했다.
죽영은 단지 떠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건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바로 편월과 유화가 그들이었다.
어떤 인연으로 이 험난한 세상에서 만나, 같은 공간에서 호흡했는지 광운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들에 대한 책임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젠 떠나야겠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오.’
어쩌면 떠난다는 것보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광운은 선뜻 일어서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무척이나 외로울 게요.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나도 곧 가리니…….’
광운이 떠나도 이 사당엔 향이 끊어지지 않을 게다.
하지만 광운이 피워 주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위패 앞에서 사르는 향이 죽은 자의 혼을 위로하는 행위라면, 죽영의 넋이 누구의 공양을 가장 흔쾌히 받을 것인지는 너무도 자명했다.
다시 하나의 향을 더 피운 후, 광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젠 정말 떠날 생각이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영영 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죽영의 위패를 가지고 가고 싶다는 마음을 광운은 지그시 억눌렀다. 그 옛날 편월을 갑옷 속에 넣고 전장을 누볐듯이, 그렇게 항상 지니고 다녀도 괜찮겠다고 여겼다.
‘이젠 죽영도 쉬어야 한다.’
바로 이게 광운이 마음을 접은 이유였다.
어쩌면 죽영은 평생 단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쉰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랬던 사람의 위패를 안고 또다시 전쟁터에 나선다는 건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다시 한 번 속으로 얘기한 후, 광운은 조용히 사당을 빠져나왔다.
“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게.”
밖으로 나온 광운은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흑암성에서 전령이 왔다는 전갈이 있었사옵니다.”
“흑암성에서?”
무감동하게 대꾸하며 광운은 걸음을 옮겼다. 흑암성에서 온 전령이라고 해 봐야 내용은 뻔할 터였다. 그동안의 전황과, 하루속히 회복해서 다시 지휘에 임해 달라는 것 말이다.
연무장 한편에서 전령은 기다리고 있었다.
전령이 전달한 내용은 광운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서수가 흑암성에 머물고 있다는 게 의외라면 의외였다.
‘서 선생이 와 계신다면, 영욱성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군.’
생각을 하면서 광운은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진도수를 불렀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수군과 신병 양성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그리고 바다에 내보낸 어부들의 동향에도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점은 염려 마시오소서. 소장의 근심은 오직 성주의 용태입니다. 이렇게 가시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진도수의 어조엔 충성이 가득했다. 광운이 막주로 와서 처음으로 측근에 둔 무장이었기에, 그 정도 남다를 게 틀림없었다.
“자네와 나는 무장일세. 무장이 죽을 곳은 전장뿐, 어찌 다른 곳을 바라겠나.”
“하오나 이대로는 너무…….”
“염려 말게.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네. 그 삶에 충실하러 가는 길일세. 언젠가 닥쳐올 죽음에 미안하지 않도록 말일세.”
나직이 내뱉으며 광운은 질풍에 몸을 실었다.
수행원은 달랑 두 사람뿐이었다. 제대로 죽기 위해 침사성을 떠나는 광운의 행렬은 그처럼 초라했다.
3
전쟁을 알고, 몸소 치른 이후로 이처럼 짜증 나는 싸움을 편월은 처음 하는 것 같았다.
도무지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어떠한 전략과 전술을 세워서 싸워도 속속들이 파헤쳐져 결과는 항상 패전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큰 타격은 초염이 포로로 사로잡혀 간 일이었다. 그 일로 인해 귀곡탄을 넘어 벽곡성을 공격한다는 계획은 백지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편월은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심하게 이겨서는 안 된다는 처음의 마음은 점차 희석되고, 어떻게든 벽곡성을 짓밟아 버리고 싶었다. 새로 얻은 말인 흑풍이 없었다면, 진즉에 전격적인 공격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의 마음을 달래 주는 흑풍을 타고 편월은 오늘도 질주하고 있었다. 따르는 수행원은 아무도 없었다. 조용히 생각해야 할 게 많아 일부러 떼어 놓고 왔던 것이다.
정말이지 흑풍은 예사로 흔히 볼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통상 말은 한 번 굴복하면 그 사람을 따르게 된다.
그런데 흑풍은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편월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지금은 잘 달리고 있지만, 언제 어떤 형태로 날뛸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긴 그게 편월은 즐거웠다. 좋은 말을 얻었다는 기쁨과, 예측이 힘든 상황에 대처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싸움만 뜻대로 되면 좋겠는데…….’
오늘 편월이 흑풍을 타고 달리는 건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직접 출전하는 걸 대부분의 장수들은 반대했었다. 그걸 무릅쓰고 일만 오천이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왔다.
그런데 전황은 나아지는 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공격을 할 때마다 아군의 피해가 늘어 갈 뿐이었다.
그래서는 동료 장수들을 볼 낯이 없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야만 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계단을 막은 바위들은 벽곡성 주변의 절벽에 널려 있고, 초염이 사로잡힌 지금 귀곡탄 쪽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다. 뭔가 획기적인 작전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들어갈 수 없다면, 놈들을 끌어내야겠는데.’
사실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숫자도 우세하지만, 위휘군은 병사 하나하나가 아주 용맹하다. 맞붙어 싸운다면 한나절이면 승리할 터였다.
문제는 벽곡성에 있는 적들도 그 점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기어 나오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바로 그게 작전이고, 그렇게 만들어야만 훌륭한 장수라고 할 수 있다.
문득 편월은 광운이 아쉬웠다. 그라면 아주 절묘한 작전을 세워 이 상황을 타개했을 게 분명했다.
별안간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광운보다 나은 무장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광운을 떠올리자 이상하게 질투심이 솟구쳤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편월은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광운을 질투하는 것 자체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아니었다.
‘여긴 어디쯤일까?’
사방을 돌아보던 편월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주변 경관이 너무 낯설기 때문이었다.
이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주전장이 될 벽곡성 주변의 지형은 대강 익힌 편월이었다. 그걸 잘 알기에 측근들도 이렇게 혼자 말을 달리도록 놔뒀는지도 모르고.
한데 이곳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흑풍은 지나치게 먼 곳까지 달려왔나 보다.
“워워!”
편월은 흑풍을 세웠다. 부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싸움판에서 시기적절한 지시를 내릴 수가 없게 된다.
“돌아가자, 흑풍.”
편월은 흑풍의 방향을 돌렸다.
“네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보자. 하아!”
나직하게 내뱉은 편월은 흑풍의 엉덩이를 뒤꿈치로 강하게 찍었다.
끼히히히힝-!
목을 길게 빼고 한차례 울부짖은 흑풍이 힘차게 대지를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과연 빨랐다. 귓전으론 연방 바람 소리가 지나갔고, 승마에 익숙지 못한 사람이라면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할 것 같은 속도였다.
일단 흑풍이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편월의 마음도 보다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잘 달리던 흑풍이 돌연 앞발을 번쩍 치켜들며 그 자리에 멈췄기 때문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말에 익숙한 편월조차도 자칫 낙마를 할 뻔했을 정도였다.
“이놈, 또 변덕이 도졌느냐?”
편월로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 흑풍은 자신에게 완전히 승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승복하지 않아서 멈춘 거라면 좀 더 날뛰어야 한다.
편월은 유심히 흑풍을 살폈다. 한군데 시선을 고정시킨 채 바짝 긴장해 있다는 게 잔등으로 느껴졌다.
이런 경험은 편월에겐 아주 익숙했다.
‘적이다!’
소질풍도 이랬다. 편월은 미처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말은 짐승의 뛰어난 감각기능으로 적의 살기를 먼저 알아차리곤 했다.
‘좋지 않다.’
그저 한 바퀴 질주하리라 마음먹었기에, 갑옷은 입었지만 투구는 쓰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도가 안장에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편월은 대도를 거머쥐었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썩 나서라! 위휘군의 편월이 바로 나다!”
적이 있다는 걸 알면서 꽁무니를 빼는 건 편월의 적성이 아니었다. 그는 당당히 이름을 밝히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돌연 주변의 바닥이 들썩거렸다. 그러고는 하나 둘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땅을 파고 그 안에 은신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디서 온 떨거지들인가? 소속을 밝혀라.”
편월은 무겁게 내뱉었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단지 몸에 밴 습관일 뿐이었다.
“우리들은 유산성에서 온 병사들. 정찰을 나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소득을 얻게 되었군.”
적장 한 명이 앞으로 썩 나서며 말했다. 히죽이 웃는 미소가 얄미운 놈이었다.
편월은 재빨리 적의 숫자를 가늠해 보았다. 족히 쉰 명은 넘을 듯했다.
문득 편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적들 역시 정찰병답게 가벼운 무장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말도 없다. 어디 근처에 모아 뒀겠지만, 이런 상태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건 그게 아니었다.
‘유산성이 움직였다.’
이건 사실 처음 벽곡성을 공격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고려했던 일이었다. 다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지금 벽곡성을 공격하는 위휘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만약 유산성의 병사들에게 뒤통수까지 얻어맞게 되면 어이없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미리 알게 된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제 편월은 유산성이 움직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적어도 불시에 기습을 당할 일은 없을 터였다. 물론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갔을 때나 그렇다는 얘기지만 말이다.
“자! 흑풍, 한바탕해 보자.”
목덜미를 두드리며 가볍게 말한 편월은, 이내 흑풍의 옆구리를 세차게 걷어찼다.
이럴 땐 선공이 최선이었다. 흑풍이라는 희대의 명마가 있으니 그대로 달아나도 되겠지만, 편월은 아예 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오직 싸워서 뚫고 나간다는 마음뿐이었다.
“쳐라!”
공격해 오는 걸 멍청하게 눈 뜨고 지켜볼 사람은 없다. 놈들도 편월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나 유산성 병사들은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단순히 숫자만 믿고 덤비기엔, 편월은 너무 뛰어난 무장이었고 흑풍은 지나치게 명마였다.
슈와웅!
특유의 거대한 대도가 편월의 수중에서 한 바퀴 돌아 공기를 갈랐다 싶자, 근처에 있던 적병 셋이 한꺼번에 잘려 나갔다.
그사이 흑풍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배후로 접근한 적병을 걷어차는가 하면, 미친 듯이 날뛰면서 놈들의 접근을 막았다.
편월은 흑풍을 적장 곁으로 몰아갔다. 이럴 땐 적의 우두머리부터 베어 넘기는 게 가장 좋다. 그래야 이 실속 없는 싸움도 일찍 끝낼 수 있다.
“앗, 막아라!”
“장군께서 위험하다!”
적병들도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장수가 위험에 처하자 또다시 편월 곁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편월로선 사양할 일도 피할 일도 아니었다. 수중의 대도를 거푸 휘두르며, 적장과의 거리를 꾸준히 좁혔다.
“향전을 쏴라! 대기하고 있는 아군에 구원을 청해!”
편월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자 적장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피했다.
편월의 미간에 깊은 주름의 골이 세워졌다. 방금 적장이 취한 행태에 구역질이 치민 탓이었다. 싸움판에서 제 한 목숨 살겠다고 부대 전체를 끌어들이는 건, 장수는 물론 말단 졸자들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그런데 적장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 짓을 지시하고 있다. 적이라는 걸 떠나서 같은 사나이로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켜라! 자신의 본분을 잊은 자를 베겠다!”
한 소리 크게 내지르며 편월은 흑풍을 마구 몰아붙였다.
와두두둑!
흑풍은 도무지 두려움이라고는 모르는 말 같았다. 적병들이 창을 곧추세우고 있는데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길을 만들었다.
삐이이잇-!
그때 누군가 한 발의 향전을 발사했다.
그와 함께 한 자루 창이 편월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적병 중 한 명이 내지른 것이었다.
예사 무장이었다면 이건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이 됐을 터였다. 하지만 편월은 대도 자루로 가볍게 받아넘기며, 오히려 창을 휘두른 적병의 목을 일격에 날려 버렸다.
“조금만 더 버텨라! 신호를 보냈으니 이제 곧 구원병이 올 게다!”
편월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빼면서 적장은 연방 고함을 질렀다. 비겁한 겁쟁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럴수록 편월의 짜증은 농도를 더해 갔다. 반드시 놈을 죽여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을 가로막는 적병 셋을 또 베었을 때, 적장은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 있었다.
“서지 못할까!”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며, 편월은 흑풍의 엉덩이를 세차게 걷어찼다.
확실히 흑풍은 싸움을 위해 태어난 명마였다. 편월에게 엉덩이를 차이자 그대로 훌쩍 도약해서 병사들의 키를 넘어 버렸다.
“아아악!”
이제 다급해진 건 적장이었다. 편월이 근처에 가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급급했다.
‘저런 놈도 있구나.’
지금까지 편월이 봐 왔던 가장 비겁한 무장을 들라면 대인성을 지키던 당세홍이었다.
하지만 당세홍은 지금 눈앞에 있는 자에 비하면 아주 훌륭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살다 살다 저런 자는 또 처음 보았다. 그리 길게 산 건 아니지만 말이다.
당연히 편월의 살기는 짙어졌다. 차라리 당당하게 맞붙어 싸웠다면 하다못해 미운 감정으로 베지는 않았으리라. 인간적인 경멸감과 더불어 죽는다면, 그 죽음도 가히 편치는 않을 터였다.
그사이에도 적병들의 방해가 있었지만, 흑풍은 몇 차례 도약으로 편월을 적장 곁에 바짝 붙여 주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편월의 대도가 적장의 목을 그었다. 제 딴에는 막아 보겠다고 창을 치켜들었지만, 그것까지 잘려 나갔다.
“앗, 장군!”
적병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토해졌을 때, 지축이 흔들리며 멀찍이 뽀얀 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적의 지원군이군.’
그건 일부러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먼지가 일어난 방향이 유산성 쪽이었던 것이다.
‘근데 저건 또 뭐지?’
먼지를 지켜보던 편월의 눈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먼지구름은 한군데서 생긴 게 아니라, 또 하나가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벽곡성 공격에 나선 아군이 있는 쪽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직 안전만을 생각한다면 지금 편월은 몸을 빼야만 한다. 적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달리면, 그들은 흑풍을 따르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편월은 궁금했다. 우선 유산성에서 어느 정도 병력이 나왔는지, 그리고 왜 저렇게 두 군데로 갈라져 있는지 알고 싶었다.
물론 그걸 기다리는 일도 결코 한가한 것만은 아니었다. 장수를 잃은 적병들이 더욱 기를 쓰고 덤볐던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유산성 병사들은 상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자신들의 장수를 죽였다는 것과 편월이 위휘군의 수뇌라는 것만 알고서, 공훈에 눈이 어두워 앞뒤 가리지 않고 설쳤다.
그 결과는 언제나 자명하게 나타난다. 바로 그들의 비참한 죽음 말이다.
싸움에 임한 편월은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가 휘두르는 대도는 그 날보다 더 비정하게 적의 육신을 베고 생명을 거둔다. 아니, 어쩌면 바로 그게 더 자비로운 행위인지도 모른다. 편월은 두 번의 칼질이 필요 없을 만큼 정확하게 적의 급소를 베었으니, 상대적으로 고통이 적은 죽음을 줬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어쨌든 삶과 죽음 중 택일을 하라면, 누구 할 것 없이 삶을 택하는 게 정상이다. 병기를 가지고 싸움에 나설 땐, 적어도 그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된다는 얘기다.
편월로선 불만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쉴 새 없이 대도를 휘두르는 와중에도 각기 다른 곳에서 접근해 오는 두 군데 먼지구름을 살피는 여유까지 보였다.
‘아니, 저건?’
접근해 오는 건 분명 군세였고, 그중 한 무리는 틀림없이 위휘군의 기치였다. 병력은 약 삼천가량으로 추정되었다.
‘누굴까?’
확실히 지금 벽곡성을 공격하고 있는 위휘군의 일부는 아니었다.
편월은 다른 쪽에서 접근하는 군세의 기치도 확인했다. 이건 낯선 것이라 유산성의 병력이 틀림없을 게고, 숫자는 약 오천가량으로 보였다.
다시 덤비는 적병 하나를 베어 넘기며 시선을 돌린 편월의 눈에, 이제 보다 가까워진 위휘군의 기치가 선명하게 보였다.
‘송 군감이?’
그렇다. 그건 분명 송지가 대장으로 있는 독전대督戰隊의 기치가 틀림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왜 지금 여기에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편월은 출동 명령을 내린 적이 결코 없었고, 이 일에 대한 건 보고조차 받은 기억이 없었다.
물론 기분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벽곡성 공략이 고전을 거듭하는 지금, 삼천에 이르는 지원군의 등장은 사기를 위해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연유야 어떻든 내용을 알아보려면 당장 송지를 만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산성의 병력도 몰려오고 있으니, 이 무의미한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죽기 싫은 자는 길을 열어랏!”
한 소리 크게 내지르며 흑풍을 몰아갔을 때, 편월의 앞을 실제로 막아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용감한 적은 벌써 죽었고, 남은 적병들은 비로소 현실을 인식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해 달리면 그 만남이 훨씬 빨라지는 게 세상의 당연한 이치다. 하물며 골라 뽑아 훈련시킨 군마를 탄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몇 차례 도약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흑풍은 벌써 송지 앞에 편월을 데려다 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송 군감?”
인사조차 생략해 버린 채 편월은 다급하게 물었다.
“유산성이 움직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담 장군이 우릴 보낸 거요.”
송지는 간략하게 대꾸했다.
“대체 그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요?”
일선에 나와 있는 자신도 오늘 기습을 당하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합진성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알고 이렇게 출동했으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상가웅, 상 장군에 의해 알아낸 거지 달리 무슨 수단이 있었겠소?”
‘그렇군. 가웅이였군.’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가웅에게 간인을 부리는 모든 권한을 맡겼으면서도, 이번 출동 전에 한 번도 그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그 점이 지금 조금 후회되었다.
“기치를 보아하니 저들이 유산성 병사들인 것 같구려. 여기서 치실 생각이시오?”
“우선 송 군감께서 저들을 막아 주시오. 병력이 부족하겠지만, 곧 지원병을 보내리다.”
“그럼 여기서 싸우라는…….”
말을 하려던 송지는 이내 무슨 생각을 떠올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건 바로 편월의 자존심이었다. 자신은 일만의 군사로 한 달 내에 벽곡성을 떨굴 수 있다고 했던 것에 비해, 실제로 그는 일만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왔음에도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만약 오늘 출동한 삼천의 병력까지 보태게 된다면, 속내야 어떻든 일만 오천으로도 모자라 다시 지원을 받은 셈이 된다.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이 이끌고 온 삼천으로 유산성의 군세를 막으라는 진정한 이유라고 송지는 생각했다.
“알겠소이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적은 유산성이 아니니, 따로 지원군을 보낼 필요는 없소이다.”
“저들이 이쪽보다 숫자가 많을 것 같은데…….”
“거듭 말씀드리지만, 유산성은 우리의 적이 아니오. 그러니 굳이 승패를 결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요컨대 적당히 상대하면서 적을 여기다 묶어 두기만 하면 되고, 그건 병력이 조금 부족해도 충분히 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알겠소. 그럼 나는 이대로 돌아가 부대와 합류하겠소.”
편월도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방금 송지가 했던 말은, 자신이 조금 전에 자존심을 세운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편월은 인사도 없이 흑풍을 몰았다. 물론 부대와 합류하기 위함이었다.
내처 이 리쯤 달렸을까. 뒤에서 ‘와아!’ 하는 함성이 들렸다. 송지의 독전대와 유산성 군사들이 충돌하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