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일후사落日後事 (49/66)

낙일후사落日後事

1

황궁!

말이 좋아 구중심처지 여기는 이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자가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옥 같았다. 건물은 번드르르했지만, 그 외곽을 가겸후라는 절대 무력자가 지배하는 창일성이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황궁 분위기가 유달리 무겁게 느껴지는 건 단지 갇혀 있다는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지운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상초국의 기습을 받은 황제의 용태가 날로 악화되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간신히 눈을 떴다. 지난번에 혼절한 이후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혹은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정신이 맑았다. 늘 심신을 혼곤하게 만들던 미열도 씻은 듯이 사라져 개운했고, 상처 부위도 깨끗이 나은 것 같았다.

황제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런 기분이라면 어디든 훨훨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달리기는커녕 상반신조차 침상에서 일으킬 수 없었다.

그래도 황제는 실망하지 않았다. 아예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한결 나아졌으니까 말이다.

힘겹게 고개만 돌려 황제는 사방을 살펴보았다. 눈에 익은 천장과 벽들 그리고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자신과 고락을 함께했던 황후가 탁자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오랜 간호에 지친 탓이리라.

황제는 계속해서 실내를 살폈다. 황후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두 명의 황비[後宮]조차도…….

‘그럴 테지.’

이 역시 황제는 별로 서운하지 않았다. 힘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난세에선 크나큰 죄악인데, 거기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 누가 그런 사람에게 신경을 쓰겠는가.

“황후…….”

황제는 조용히 아내를 불렀다. 대답을 들을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이 아내를 대할 때마다 황제는 안타까웠다. 그 오라비의 능력이면 자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과 혼인을 할 수도 있었으리라. 실력 없는 황제에게 출가해서, 육친과 남편 사이에 끼어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어도 좋았단 얘기다.

“황후…….”

자신도 모르게 황제가 다시금 나직이 불렀을 때, 마치 듣기라도 한 것처럼 가 황후가 반짝 눈을 떴다.

“어머!”

황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정신을 차렸다는 걸 알기도 전에, 자신이 잠들었다는 게 송구하고 민망했던 것이다.

뒤이어 부산하게 몸을 일으키던 황후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비로소 황제가 눈을 뜨고 있는 걸 발견한 탓이었다.

“저, 정신이 드셨나이까? 어의를 불러오지요.”

“그만두시오.”

어의를 부르려는 황후를, 황제는 가만히 제지했다. 이렇게 둘만 있고 싶었다.

사실 지금 황제의 마음은 여느 때보다 훨씬 편했다. 가겸후도 병실에까진 감시의 눈길을 두지 않았을 테니, 그야말로 혼인한 이후로 황후와 단둘이서만 있게 된 상황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폐하, 아직은 옥체에 무리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어의를 불러옴이 마땅한 줄 사료되옵니다.”

“아니요. 난 이제 틀린 것 같소. 그 전에 천지신명께서 보살펴 황후와 단둘이…….”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이제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셨으니, 조금만 더 정양하시면 쾌차하실 것이옵니다. 미리부터 심약해지지 마시옵소서.”

불경스러운 일인 줄 알면서도 황후는 황제의 말을 잘랐다. 왠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얘기가 듣기 싫어서였다.

황제는 힘없이 웃었다.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탈색된 미소였다.

“부탁이 있소.”

“무엇입니까? 신첩臣妾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시켜만 주시옵소서.”

황후의 두 눈엔 삽시간에 투명한 물막이 부풀어 올랐다. 그가 봐도 황제는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의 평온한 모습은 사람이 죽기 전에 나타난다는 그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대는 옥새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이오. 짐이 죽거든 그 옥새를 가지고 편월에게 찾아가 몸을 의탁하시오. 다른 사람은 안 되오. 반드시 편월에게 가도록 하시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터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황제는 말꼬리를 흐렸다. 기분과 달리 육신은 그 말을 하는 것도 힘에 겨웠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폐하께서 붕어崩御하시면 신첩도 따르겠나이다. 저세상에서도 모실 것이오니…….”

“그건 안 되오.”

황제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하지만 격렬한 걸로만 따진다면 전장에 나선 장수 못지않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황통은 이어져야만 하오. 짐을 따르겠다는 경망한 생각 따윈 버리시오. 그러니 짐이 죽고 나면 반드시 옥새를 가지고 편월에게…….”

이번에도 황제는 말을 맺지 못했다. 조금 전보다 더욱 거칠어진 호흡을 가누느라 눈까지 지그시 감았다.

“알겠사옵니다, 폐하. 하오니 이제 말씀은 그만 하시고, 쉬시는 게 좋겠사옵니다.”

“명심하시오. 황후의 오라버니는 무서운 사람이오. 짐이 죽으면 그대에게 옥새의 행방을 추궁할 것이오. 또한 그대가 편월에게 가는 것도 막을 게 분명하오.”

여전히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황제가 안타까웠지만, 황후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지아비의 유언이라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대에게 무거운 짐을 맡긴 것 같아 미안하오. 하지만 황통은 반드시 편월에게 전해져야만 하오. 편월에게…….”

말끝이 잦아든다 싶더니, 황제는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가르릉거리는 거친 숨결뿐이었다.

“누구 없느냐? 어의를 불러……!”

사람을 부르려던 황후는 문득 입을 닫았다. 아직 누구도 불러서는 안 된다고 깨달은 탓이었다.

황후는 다시 한 번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거친 호흡은 여전했지만, 얼굴엔 서서히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는 듯했다.

‘옥새부터!’

황후는 재빨리 황제가 누워 있는 침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직위고 체면이고 모두 던져 버린 모습이었다.

그녀는 침상의 뒷면을 뒤졌다. 언젠가 황제가 바로 이곳에 옥새를 숨겨 뒀다고 했었다.

그러나 쉬이 발견되지 않았다. 막연히 침상 밑에 은닉해 뒀다는 말만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황후는 조급해졌다. 자신이 부르는 소리는 듣지 못했더라도 지금쯤이면 누군가 황제의 용태를 살피러 올 때가 되었다. 그 전에 찾아야만 한다.

딸각!

다급하게 움직이던 그녀의 손끝에 딱딱한 돌기가 만져졌다 싶자, 작은 보퉁이 하나가 그녀의 배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황후는 재빨리 보퉁이를 살펴보았다. 붉은 비단에 싸인 네모진 상자인 것 같았다. 직감적으로 그녀는 옥새를 찾았다는 걸 알았다.

침상 아래에서 나온 황후는 재빨리 흐트러진 매무새를 고쳤다. 그러고는 품속 깊숙이 옥새를 갈무리했다. 상자는 그리 작은 게 아니었지만, 궁중의 폭 너른 예복으로 별로 표를 내지 않고 숨길 수 있었다.

황후는 다시 한 번 황제를 살폈다. 죽음의 그늘은 더욱 짙은 그림자를 그 얼굴에 드리웠고, 집중하지 않으면 호흡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게 누구 없느냐? 폐하의 용태가 심상치 않다. 어의를 불러오너라.”

황후가 사람을 불렀을 때, 돌연 침상에 누워 있던 황제의 몸이 크게 꿈틀거렸다.

“폐하?”

마치 실에 끌려가는 연처럼 황후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폐하?”

황후는 황제의 상체를 세차게 흔들었다. 한눈에 봐도 호흡이 끊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생명의 기운은 남아 있었나 보다. 황제는 자신의 가슴에 얹힌 황후의 손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폐하…….”

다시 한 번 부르면서 황후는 어리둥절해졌다. 이상하게 슬프지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럴까? 어쩌면 황제의 죽음보다 더 막중한 일을 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황통을 전해야 하는 일 말이다.

시비들이 어의를 데리고 들어오는 바람에 실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황제가 죽었다는 걸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갑자기 곡성이 터져 나왔다. 시비들이 황제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그제야 황후도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시비들의 곡성에 동화된 게 아니라, 자신의 손을 잡은 황제의 손에서 서서히 체온이 빠져나가는 게 절실히 서러워서였다.

그렇게 황제는 세상을 떠났다. 영창십이년 정월 초이레의 일로, 향년 이십구 세였다.

하늘이 무너진 것과 진배없는 황제의 죽음은, 그러나 세상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때마침 창일성에 돌아와 있던 가겸후가 철저하게 통제했다.

황제의 죽음은 가겸후에게도 조금 뜻밖이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너무 빨랐다.

그래도 가겸후는 웃었다. 앞으로의 일이 의도했던 것과는 달라지겠지만, 결국은 이루어질 게다. 필요한 건 그때까지 약간의 시간일 뿐이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가겸후는 폐포자를 찾았다.

* * *

신년 축하가 막 끝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위휘군 일만 오천은 벽곡성을 노리고 합진성을 출발했다.

연도엔 합진성에 사는 백성들이 거의 모두 몰려나와 병사들을 전송했다.

편월은 백성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패전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싸우면 반드시 이겼던 위휘군에 대한 긍지 높은 신뢰였다.

뿌듯한 자부심이 편월의 가슴을 채웠다.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건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얼마나 걸리겠소? 송 장군은 한 달이라고 했소이다만…….”

맹아가 곁으로 말을 바짝 붙이며 편월에게 물었다.

“한 달이면 충분하겠지.”

“그래도 주군이 직접 나섰는데 송 장군보다는 빨리 끝내야 되지 않겠소?”

“이건 단순한 전쟁이 아니오. 승리보다는 사람을 얻는 게 더 중요해.”

“그래도 이겨야만 좌괴란 자도 얻을 수 있지 않겠소?”

편월이 담개와 송지만을 불러 이 전쟁을 치르기로 얘기했던 이면의 심정은 이미 위휘군 전체에 알려진 뒤였다. 그러니 맹아도 이처럼 가볍게 말을 할 수 있었다.

편월은 그저 웃고 말았다. 맹아의 말이 너무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선발대 오천,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성문을 완전히 빠져나오자 선봉장을 맡은 거예홍이 다가와 보고했다.

“좋도록 하시오.”

“그럼.”

짤막하게 대답한 후, 거예홍은 앞으로 말을 달려 나갔다. 선발대에 소속된 오천 명의 기보병도 그녀와 보조를 맞췄다.

“우리도 서두르는 게 좋겠군. 선발 오천으로는 버거울 게야.”

“그렇게 서두르실 일이 아니오. 가는 길목에 있는 유산성游山城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선발대는 그냥 지나칠 테지만…….”

“일부러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그쪽에서도 우릴 도발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 뒤통수를 맞으면 어떻게 하시려오?”

“유산성에서 출격하기 전에 벽곡성을 떨구면 되겠지.”

편월은 자신만만했다. 벽곡성의 병사를 최대한 오천으로 잡아도 위휘군은 그 세 배에 해당한다. 최악의 경우 병력의 일부를 빼서, 유산성에서 나오는 적을 상대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래도 협공을 당하면 쉽지는 않을 게요. 소장의 생각으로는 가는 길에 유산성을 떨구고 가는 게 좋겠소이다.”

“전령!”

맹아의 얘기를 듣고 있던 편월이 돌연 큰 소리로 전령을 불렀다.

“대령이오!”

“즉시 선발대의 거 장군에게 달려가라. 가서 유산성에서 어떠한 도발이 있더라도 상대하지 말고 곧바로 벽곡성으로 직행하라 일러라.”

“존명!”

전령이 달려가는 걸 보며 맹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은 서운함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이 싸움에서 편월이 너무 자신만만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물론 맹아도 이 싸움에서 진다고는 만에 하나라도 생각지 않았다. 물귀신보다 더 자맥질에 능할 것 같은 초염이 있고, 비록 대부분 신병들로 구성되었다지만 나름대로는 최정예로 가려 뽑은 일만 오천의 병사가 있다. 진다는 건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맹아는 편월과 함께 숱한 전투를 치렀고, 그때마다 이겼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게 불안의 요인이라면 요인이었다.

돌연 맹아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로써 찜찜했던 기분을 날려 버리고, 오롯이 승리를 향한 노력만 경주할 작정이었다.

“초 장군을 불러라.”

편월은 초염을 찾았다. 이번 벽곡성 공격에 있어 그가 가장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기에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생각이었다.

후미에서 따로 하나의 부대를 인솔하고 있던 초염은 즉각 불려 왔다.

“부, 부, 부르…….”

“준비는?”

더듬거리는 초염의 말투가 답답해서 편월은 재빨리 중간에 가로채서 물었다.

“와, 완벽하게 주, 준비…….”

“좋아. 그럼 초 장군은 한발 먼저 귀곡탄으로 달려가시오. 작전은 이미 합의가 되었고, 다른 지시 사항은 없소. 잘 싸우시오.”

“조, 존명!”

초염이 물러간다 싶자, 특별히 자맥질에 능한 병사들로 구성된 일천 명이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본대에서 떨어져 나갔다.

“잘해 낼까요?”

말을 심하게 더듬는 바람에 초염은 사람들에게 어눌하게 인식되어 있다. 맹아가 약간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난 그를 믿어.”

조금도 망설임 없이 편월이 대답했다.

“자, 좀 더 서두르자. 선발대가 도착하자마자 본대가 다다른다면 적들도 간담이 서늘해지겠지.”

말과 함께 편월은 소질풍을 몰아 훌쩍 앞으로 달려 나갔다.

* * *

절벽과 계곡 속에 묻힌 벽곡성 앞으로 위휘군이 밀려든 것은 정월 열 하루 날이었다. 선발대가 도착하기 무섭게 본대까지 가세해, 까마득한 계단 저 아래는 그야말로 사람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걸 내려다보며 좌괴는 웃고 있었다. 저들이 왜 이렇게 밀려왔는지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계천자 늙은이,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비록 이십 대 후반에 불과하지만, 계천자와는 나이를 잊은 교분을 맺고 있는 좌괴였다. 서로 만난 자리에서도 언행을 따로 가리지 않았기에, 속으로 그를 욕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위휘군이 이렇게 나올 것이란 사실을 좌괴는 미리 통보받았다. 아울러 계천자는 어지간하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주라는 권유까지 했다.

좌괴도 그 말에 따를 생각이었다. 이 벽곡성은 자신이 머물기엔 너무 궁벽하고 협소하다. 구만리 창천을 날아야 할 대붕을 조롱 안에 가둘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쉽게 따라가서는 안 되겠지.’

쉽게 얻은 물건은 쉽게 질리는 법이다. 그건 사람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터였다.

‘이쯤에서 위휘군에 일격을 가하는 것도 좋겠지.’

좌괴는 위휘군을 철저하게 두들길 결심이었다. 그만한 자신감도 있었고, 벽곡성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이면 충분했다.

그래도 유산성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나중에 한꺼번에 위휘군에 귀속되게 하려면 필요 없어도 끌어들여야 한다.

‘아무래도 귀곡탄부터 노리겠지?’

벽곡성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위휘군이 몰려오지는 않았을 테고, 가장 기본적인 것만 알아도 그들은 귀곡탄을 공략할 게 너무도 뻔했다.

다시 한 번 위휘군의 진형을 살핀 후, 좌괴는 발길을 돌렸다. 이제 벽곡성주를 설득해 한차례 싸움을 치를 차례였다.

2

호윤천은 솟구치는 화를 누를 길이 없었다.

‘선수를 뺏긴 게 천추의 한이다.’

다른 게 아니었다. 포위당해 있던 곽가군에서 먼저 상초국에 선전포고를 한 일 때문이었다.

사실 그 자체로야 그리 문제 될 게 없었다. 정작 호윤천의 노기를 자극한 건, 곽가군의 선동에 넘어간 성주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압박도 만만치 않았다. 개중에는 당장 군사행동을 일으켜 자신들을 공격할 뜻을 비치는 자도 있었다.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황제에게 그처럼 충성을 바치는 성주들이 많다는 건 확실히 의외였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그 하나는 곽가군과 성주들의 요구대로 포위망을 풀고 함께 상초국 토벌에 동참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회에 곽준방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에게 동조하는 성주나 장수들이 점점 늘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여기서 숨통을 아예 끊어 둬야 한다.

나머지 하나는 속전속결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최대한 빨리 이 싸움을 끝내고, 동요하는 성주들을 다독일 수도 있다. 어차피 그들은 눈앞의 이득을 아주 도외시할 수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이틀 내로 이 싸움을 끝낸다.’

결정을 하자마자 호윤천은 아들을 비롯한 장수들을 모두 불렀다. 그들을 독려해 싸움을 일찍 마치기 위함인 것은 물론이었다.

장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누구도 전투에 참여한 흔적은 없고, 어딘지 맥이 빠져 보였다. 요즘의 분위기를 극명하게 대변해 주는 모습들이었다.

“지금부터 한 시진 뒤에 총공격을 감행하겠소. 이번 공격은 적을 섬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요.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호윤천은 단숨에 말했다.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장수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함이었다.

“불가하오!”

호윤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명의 장수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높였다.

“불가하다니? 이건 회의가 아니라 명령일세.”

다시금 단호하게 내뱉으며, 호윤천은 일어선 장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뜻밖에도 유웅과 위화룡이었다.

호윤천은 정수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덮어쓴 기분이었다. 유웅이 누군가? 함지성의 성주로, 이번에 자신을 돕기 위해 일부러 군사를 동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반대를 하고 있다. 어떤 이유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거느린 군의 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촉망되는 장수라 여겨 평소 총애했던 위화룡까지 유웅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건 놀라움을 넘어 위기감까지 느껴지는 일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유웅은 외부의 군세다. 그러니 그는 자신에게 간혹 항명을 할 수도 있다. 어차피 그가 군사를 낸 건 현실적 이득도 배제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위화룡은 다르다. 군문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막하에 데리고 있으면서 키운(?) 무장이었다. 그가 항명을 하고 나섰다는 건 직속부대 전체의 결속이 위태롭다는 의미였다. 뭔가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지금은 황제 폐하께서 위중하시오. 그러니 집안싸움은 당장 거두고, 상초국부터 치는 게 시급한 일인 줄 아오.”

“소장의 생각도 같소이다.”

마치 미리 맞춘 것 같은 두 사람의 말에 호윤천은 무거운 침음성을 삼켰다.

“유 성주, 그게 이유요?”

“그렇소이다.”

“바로 그게 곽가군이 노리는 점이라는 걸 왜 꿰뚫어 보지 못하시오? 놈들은 그런 얄팍한 수로 우리의 단합을 깨려는 거요.”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황제 폐하의 신하 된 도리로, 먼저 상초국부터 치는 게 옳다고 생각하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만약 우리가 포위를 푼다면, 그 즉시 곽가군은 우리에게 역습을 가해 올 것이오. 그걸 모르겠소?”

“소장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유웅을 나무라는 호윤천의 노성이 끝나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위화룡이 나섰다.

“그대는 닥치고 있으라!”

아버지를 대신해 호유진이 위화룡을 질타했다. 그 역시 자신의 직속 부하가 항명하고 나선 데 대해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위화룡은 말없이 호윤천과 호유진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대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섰거라! 서지 못할까!”

호유진이 고함을 질렀지만, 위화룡은 듣지 않았다. 진막을 빠져나가 자기 부대로 돌아가 버렸다.

“저자를 당장 잡아 대령시켜라!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호유진은 펄펄 뛰었다. 이제 위화룡이 아버지의 작전에 항명한 건 안중에도 없었다. 대장군인 자신의 명까지 우습게 여기는 점에 대해서만 화가 치밀었다.

호윤천도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대로 버려두면 또 다른 동조자가 나올지 모르니, 아깝지만 위화룡을 벨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몇몇 무장들이 달려 나갔다. 위화룡을 잡으러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돌아왔다.

“위 장군은 자기 부대를 이끌고 떠났습니다.”

“뭣이?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워낙 기세가 등등해서… 일전도 불사할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무엄한!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가 놈을 막아라! 당장 잡아 대령하라!”

이제 지시고 뭐고 모두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대장군의 위엄도 땅에 떨어져 버렸고, 자칫 진중 반란으로 이어질 듯한 긴장감만이 팽배했다.

다시 몇 명의 무장이 황급히 달려 나갔다. 고함이 몇 마디 들린다 싶더니, 말발굽 소리가 진동했다. 대장군의 근위대가 벌써 출동한 모양이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건 유웅이었다. 자신과 뜻을 같이했던 위화룡에 대해선 주살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니 자신도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유웅은 후회하지 않았다. 곽준방을 치는 건 작은 일이지만, 황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상초국을 치는 건 큰일이다. 모름지기 무장이라면 보다 큰 명분에 따라야 한다.

“소장의 생각은 이미 밝혔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소.”

말을 끝내자마자 유웅은 재빨리 진막을 빠져나갔다. 위태로운 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건 비단 그만이 아닐 터였다.

호윤천 부자는 유웅을 제지하지 못했다. 벌써 위화룡에 의해 극단적인 항명 사태가 발생했다. 괜히 함지성의 병력까지 들썩거리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버님.”

“내게 물을 것 없다. 대장군은 네가 아니더냐.”

말을 해 놓고 호윤천은 내심 ‘아차’ 싶었다. 지금까지는 아들을 제쳐 놓고 자신이 모든 명령을 내렸다. 지금에 와서 대장군 운운하는 건 책임 회피에 다름 아니었다.

호윤천은 다시금 후회가 생겼다. 왜 진즉부터 아들을 강하게 키우지 못했을까?

비범한 재능을 타고났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자라는 것도 절대 아니었다. 자신의 그늘이 너무 짙었기에 거기에 가려 제대로 성장하지도, 꽃을 피우지도 못했을 터였다.

호윤천은 다시 한 번 아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전 병력을 이끌고 지금 즉시 조천성을 공격하거라. 최대한 빨리 떨구도록.”

호유진은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전 병력을 자신에게 위임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강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게 기회란 걸 직감한 탓이었다.

호유진은 곧 밖으로 나갔고, 출전을 알리는 북소리와 소라고둥 소리가 뒤를 이었다.

감정에 못 이겨 이탈을 하긴 했지만, 위화룡으로서는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혼자라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을 터이고, 최악의 경우 자결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오백에 달하는 부하들의 목숨을 생각하니, 어떤 결정도 선뜻 내릴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위화룡은 부하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들은 한사코 따르고 있다. 이제 곧 추격대가 따라붙을 것이고, 모두들 군무이탈로 참수형을 면치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막무가내였다. 저들의 목숨만큼은 책임을 져야만 한다.

“장군, 뒤편에서 먼지가 일고 있소. 추격대임이 분명하오.”

부관이 빠른 어조로 보고했다. 위기감을 느꼈다기보다는 한바탕 싸우자는 권유가 담긴 어투였다.

그걸 알면서도 위화룡은 동조할 수 없었다. 아직은 호가군의 본대와 너무 가깝다. 여기서 싸운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게 뻔했다.

‘우선은 최대한 멀리 몸을 빼낸다.’

당장 위화룡이 취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무엇보다 앞서 부하들의 안전을 확보한 뒤에, 자신은 자결을 하든가 자수를 해서 처분을 기다릴 작정이었다.

“장군, 추격대의 전령이오. 그런데 백기를 들고 있소.”

“뭣이? 백기를?”

이번 보고에는 위화룡도 고개를 돌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통상적으로 전투 시의 백기는 항복을 의미한다. 하지만 추격대가 자신들에게 항복해 올 턱이 없었다.

그런데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위화룡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전령으로 보이는 일기가 백기를 휘날리며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너희들은 계속 달려라. 내가 저자를 만나 보겠다.”

“무슨 말씀이오? 장군께서 계시는 곳이라면 우리 모두 있겠소.”

“이건 명령이다!”

“어차피 호 대장군의 명령도 듣지 않고 뛰쳐나온 우리들이오. 또 한 번 항명한다고 해서 죄가 더 무거워지지는 않을 거요. 전원 정지!”

위화룡의 말에 아랑곳없이 부관은 깃발을 흔들어 부대를 정지시켰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위화룡은 후미로 말을 달렸다. 전령을 맞기 위함이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위화룡 부대가 멈추자, 추격대도 그 자리에 서 버린 것이다.

위화룡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전령이 급속히 다가왔다.

“위 장군은 잠시 멈추고, 우리 장군을 만나 주시기 바라오!”

사람이 당도하기도 전에 그가 지른 고함이 먼저 위화룡의 귓전을 때렸다.

“그대 장군의 이름은?”

“근위대 편장 민교閔嶠!”

위화룡이 물었을 때 전령은 면전에 도착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민교라면 호유진의 근위대에 배속된 편장 중 한 명으로, 위화룡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전령의 볼일은?”

“우리 장군을 만나 주시오. 그분께서도 위 장군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며, 그 뜻에 함께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소.”

“뭣이?”

순간적으로 위화룡의 얼굴엔 반색이 떠올랐다. 무단으로 군무를 이탈한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건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것도 하나의 간교한 술책일지도 모른다는 전국 무장의 본능이 되살아난 탓이었다.

그래도 만나자는 데야 피할 도리가 없다.

“좋다. 양 진영의 중앙에서 만나도록 하자.”

그렇게 해서 위화룡과 민교는 단 한 명씩의 부하만 이끌고 만나게 되었다.

“만나자고 하신 용건은?”

위화룡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이 회담은 민교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위 장군과 뜻을 함께하고 싶소이다. 측근에서 지켜보니 호윤천 부자는 그야말로 야심 덩어리였소. 이젠 정나미가 떨어졌소이다. 그에 비해 곽준방 장군은 무장의 사표師表와도 같은 분이시오. 어떻게든 그분을 돕고 싶소이다.”

민교의 말은 열에 들떠 있었다.

“그래서 소장도 이탈을 결심했소이다. 날 따르는 부하 칠백도 같은 생각이오. 그러니 합류하게 해 주시오.”

위화룡은 민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글거리는 눈빛 어디에서도 거짓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뜻 믿는 건 아니었다. 근위대라면 호윤천 부자의 수족과도 같은 자들만 배속되는 곳이다. 거기서 뛰쳐나왔다는 게 가장 믿기지 않았다.

“소장을 믿지 않으신다고 해도 개의치 않겠소. 이대로 돌아가 호가군의 배후를 치고, 조천성으로 들어가 곽 장군과 합류할 계획이오.”

위화룡이 말이 없자, 민교는 몸을 돌려 말에 오르면서 얘기했다.

“어딜 가시든 건승을 기원드리겠소.”

그 말을 끝으로 민교는 말 머리를 돌렸다.

“잠깐!”

위화룡은 민교를 불러 세웠다. 만약 민교에게 자신을 잡을 생각이 있었다면 이처럼 번거롭게 일을 진행할 필요가 없다. 어쨌든 그가 거느리고 온 병사들의 숫자가 더 많으니, 그대로 공격을 감행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건 믿어도 좋다는 얘기다. 게다가 호가군의 포위망을 뚫고 조천성의 곽가군과 합류한다는 계획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병사 오백으로는 힘든 일이지만, 민교와 합쳐 천이백이라면 해 볼 만하다.

“민 장군과 함께하겠소.”

“오, 오! 고맙소. 그럼 내게 하나의 계책이 있소. 어쨌든 정면으로 호가군을 뚫고 들어가는 건 힘들고 희생이 많을 테니, 우선 위 장군이 우리에게 추포追捕된 것처럼 꾸밉시다. 그러면 일이 보다 쉬워질 거요.”

“좋소.”

위화룡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어차피 믿기로 작정한 민교였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서는 오히려 수치가 될 터였다.

이제 천이백으로 불어난 군병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호윤천 부자의 고심이 그대로 곽가군의 호재가 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서너 명의 성주만 호응해 줘도 괜찮다고 여겼던 팽요조차 의아해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계획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간접적이고, 원거리 지원에 불과하다. 지금 당장 가해지고 있는 호가군의 총공격은 목전의 위협이 되어 곽가군을 바짝 조이는 중이었다.

이게 궁지에 몰린 호윤천 부자의 발악이라는 건 팽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격은 더욱 치열하고, 집요했다.

“대장군은? 대장군은 어디 계신가?”

팽요는 다급히 곽준방을 찾았다. 적의 공격은 점차 치열해지는데 일선에서 지휘를 해야 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국립이 죽은 이후로 곽준방은 의욕을 상실한 사람 같았다.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이고, 작전을 건의해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런 모습에서 팽요는 곽준방의 노쇠를 의식했다. 그만한 무장은 단순히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쉽게 늙지 않는다. 평생을 간직했던 고고한 자부심이 무너졌을 때 한꺼번에 삭아 들고 마는 법이다.

팽요는 곽준방의 그 좌절이 염려스러웠다. 마국립의 죽음을 숨겼다는 사실이 무장으로 살아온 그의 평생 자부심에 오물을 끼얹은 것이라면, 그는 이대로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방지해야 한다.

근처에 있는 부하에게 곽준방을 찾아 모시고 오라고 지시한 후, 팽요는 서둘러 성루로 올라갔다.

“동문으로 가시오. 아무래도 거기가 버티기 힘들 것 같소이다.”

팽요를 보자마자 우효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직은 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에 따라 팽요는 동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거기가 조천성에서 가장 취약한 곳이었다.

“와아앗!”

돌연 공격하던 호가군 쪽에서 기묘한 함성이 들려왔다.

“웃! 저건 또 뭐야?”

살펴보던 팽요의 입에서도 놀람에 찬 외침이 발해졌다. 호가군의 후미가 크게 어지러워지며, 거기서 마치 또 하나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우리에게 호응하는 성주가 드디어 공격에 나선 건가?’

이게 맨 처음 팽요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동시에 팽요는 기치를 확인하려고 애썼다. 어디의 군세인지는 알아야 치고 나가든, 성문을 열고 받아들이든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건 진중 반란이다!’

기치를 확인한 팽요는 확신을 가졌다. 호윤천의 직속부대와 또 다른 군병들이 마구 설치고 있는 중이었다.

적의 속임수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팽요는 다시 한 번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어떻게 봐도 거짓으로 싸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기회다!’

생각한 순간 팽요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커다란 고함을 질러 댔다.

“성문을 열고 치고 나간다! 모두 공격!”

3

“공격, 공격하라! 물러서지 마!”

편월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한 거예홍은 연방 병사들을 독려했다.

벽곡성으로 오르는 기나긴 계단, 그 위에서 지금 위휘군은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주군, 일단 병력을 물리는 게 좋겠소.”

곁에서 같이 전진하고 있는 편월에게 거예홍이 거센 어투로 얘기했다. 이대로 계속 공격을 감행하다가는 정말이지 전멸을 면치 못할 추세였다.

벽곡성의 수비는 완강했다. 성병들은 경사진 계단 아래로 연방 바위를 굴려 내렸고, 거기에 막힌 위휘군은 절벽 위에서 쏴 대는 화살에 꼼짝없이 노출되고 말았다.

편월도 이 모든 상황을 냉정한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이 싸움은 생존이나 적개심 때문에 시작한 게 아니기에, 어느 때보다 이성적으로 임하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그게 거예홍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진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당연히 편월도 지금은 군사를 물릴 때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할 수도 없고, 희생만 늘어날 뿐이었다.

하지만 편월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초염에게 시간을 벌어 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돌연 편월은 소질풍에 박차를 가했다. 벌써 십 년 넘게 같이 전장을 누볐던 이 말은 지금까지도 지친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와두둑!

소질풍은 굴러 내려오는 바위를 훌쩍 넘어 달려 올라갔다.

“앗, 주군!”

거예홍이 기겁하며 편월에게 따라붙었다. 가뜩이나 선두에서 독려하던 참에, 이렇게 홀로 뛰쳐나가니 고립되는 걸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편월은 막무가내였다. 굴러 떨어지는 바위도, 빗발치는 화살도 안중에 없다는 듯 오직 계단을 달리기만 했다.

계단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굴러 내려오는 바위나 쏟아지는 화살만이 위협이 아니라, 여기저기 파손된 곳에 발을 디딜 때마다 소질풍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이번에 우리 작전은 전원 전사하자는 거요?”

놀라운 기마술을 발휘해 편월을 따라잡은 거예홍이 재차 소리쳤다.

“난 한 발의 화살을 쏘고 싶을 뿐이야!”

편월도 고함으로 대답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이처럼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하는데도 성안에 들어앉아 영악하게 수비만 하고 있는 벽곡성 놈들에게, 적어도 화살 한 대는 먹여 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위휘군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첫 번째 공격에서 이처럼 많은 희생자를 냈으니, 그들의 사기는 상당히 저하되었을 게 분명했다. 더욱이 대부분 신병들로 구성되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의 사기를 위해서도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자신들의 주군이 이 어려움을 뚫고 적의 성채에 화살을 날렸다면, 다음번엔 더욱 용맹하게 싸울 테니 말이다.

또다시 커다란 바위 하나가 쿵쾅거리며 굴러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너무 전진한 편월과 거예홍에게 적의 화살 공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굴할 편월과 거예홍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말에 박차를 가해 더욱 빠른 속도로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우와아!”

돌연 뒤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렸다. 미처 합류하지 못한 병사들이 지른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편월은 부쩍 힘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맹 장군이 알면 기겁을 하겠군.’

문득 편월의 입가에 실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쯤 초염과 함께 귀곡탄을 건널 방도를 강구하고 있을 맹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처음 맹아에게 초염을 도와주러 가라고 했을 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근위대장은 촌각도 주군 곁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편월은 맹아를 달래야만 했다. 아무래도 초염 혼자에게만 맡겨 두면 불안하니, 가서 제대로 하는지 살피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라면서 말이다.

그러고 나서야 맹아는 마지못한 듯 초염에게로 갔고, 편월은 이처럼 마음껏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은 여유가 있는 것 같소! 웃고 계신 걸 보니!”

쏟아지는 화살을 방패로 막으며, 거예홍이 고함을 질렀다. 이 와중에도 웃고 있는 편월이 신기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편월에겐 조금의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계단의 폭도 넓어졌기에, 자연히 절벽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는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 말을 들은 편월은 웃음을 거뒀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너무 크게 이겨서 원한을 남겨서도 안 되고, 져서는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어려운 싸움이다. 어디까지나 신중하게 대처해야만 한다.

저만치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공간이 급격히 넓어졌다. 아무리 작다고 해도 성은 성인지라 정문 앞은 확 틔워 놓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쯤에서 활을 쏴도 되겠지만 이왕이면 적장 중 한 명을 맞히고 싶었다. 그러자면 좀 더 접근해야 한다.

“하아!”

“이만하면 충분하오. 말이 더 못 견디겠소.”

편월이 또 한 번 박차를 가했을 때, 곁에 있던 거예홍이 소질풍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편월은 소질풍을 살펴보았다. 화살 막이용 보호대를 부착하고 있긴 했지만, 족히 열 대는 넘을 듯한 화살이 전신에 꽂혀 있었다.

그러나 소질풍은 여전히 힘차게 내달렸다. 이 나이 든 말은 역전의 명장보다 더 노련하게 적의 공격을 헤치며 나아갔다.

“조금만 더 견뎌라, 소질풍. 하아!”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하며, 편월은 활을 꺼내 들었다. 화살은 한꺼번에 다섯 개였다.

거예홍은 편월이 활을 든 건 처음 보았다. 게다가 한꺼번에 다섯 발의 화살을 재니 의아하게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다섯 발이 실제로 발사되었고, 하나같이 성루에 있는 적병들에게 날아가 꽂히는 걸 봤을 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무예라면 자신 있는 그녀로서도 신기에 가까운 사법射法이었다.

몇 차례의 사격으로 전통을 모두 비워 버린 편월은, 그제야 소질풍의 머리를 돌렸다.

“자, 이제 내려갑시다.”

편월의 어투에는 한결 여유가 흘렀다. 목적했던 바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으니, 오늘 싸움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예까지 왔으니 소장도 화살 한 대는 날리… 웃!”

편월처럼 자신도 활을 쏘려던 거예홍이 갑자기 경호성을 토하며 바닥에 처박혔다. 타고 있던 말이 앞으로 꼬꾸라졌기 때문이었다.

“거 장군!”

한발 앞서 내려가던 편월이 재차 말 머리를 돌렸다. 거예홍의 말에 돌아봤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가 바닥에 처박힌 것도 알아채지 못할 뻔한 순간이었다.

“자, 손을!”

다른 건 따질 여유가 없었다. 이제 막 몸을 일으킨 거예홍의 손을 잡은 편월은 그대로 당겨 소질풍의 등에 그녀를 태웠다.

“부탁한다, 소질풍. 하아!”

편월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소질풍은 그야말로 바람을 가르며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소질풍이 힘에 부친다는 건 편월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여자라지만, 중무장한 거예홍의 무게까지 감당하는 건 확실히 무리일 게다.

그러나 소질풍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코로는 연방 거친 숨결을 내뱉고, 입에선 거품이 뿜어져 나왔지만 오로지 앞을 향해 달리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간혹 그 몸에 ‘퍽, 퍽’ 소리를 내며 화살이 꽂혔지만 그때 잠시 움찔했을 뿐, 이내 더욱 힘차게 계단을 박차며 나아갔다.

편월로선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오늘 소질풍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애당초 자신이 너무 무리하게 벽곡성에 접근했던 것이다.

문득 편월은 맨 처음 자신이 가졌던 말을 떠올렸다. 이름도 지금과 같은 소질풍이었던 그 말은, 율천국에 사자로 갔다가 탈출할 때 광운이 베어 버렸다.

그때 편월은 너무 어렸다. 광운이 베었던 그 당시에는 조금 슬펐지만, 이내 그 말에 대한 기억은 잊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소질풍은 다르다. 무려 십 년 동안 자신을 태우고 온갖 전장을 함께 헤치고 나왔다.

만약 잃어버린다면 무척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서 죽일 수는 없다.’

이게 지금 편월이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이 말만큼은 천수를 다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편월은 벽곡성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던 자신의 행동을 무섭게 자책했다.

“와아!”

“주군을 보호하라! 방패를 동원해!”

갑자기 왁자한 함성이 편월의 귀를 두드렸다. 깨닫고 보니 어느새 계단은 끝났고, 아군이 일제히 몰려들어 자신들을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돌아왔다.’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릴 뻔했지만, 편월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는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본대의 진막을 향해 달렸다.

“수고했다, 소질풍. 너는 역시 멋진 놈이야.”

진막 근처에 이르러 편월이 소질풍의 목을 토닥이며 말했을 때, 돌연 땅바닥이 불쑥 솟아올랐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편월과 거예홍은 바닥에 처박혔다. 무사하게 귀환한 것을 알아차린 소질풍이 그제야 무릎을 꺾고 쓰러진 것이다.

“일어나라, 소질풍! 어서 일어서!”

먼저 몸을 일으킨 편월이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고 있는 소질풍에게 고함을 질렀다. 강한 쇳소리가 섞여 있는 음색이었다.

그 말에 따라 소질풍도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건 헛된 발버둥일 뿐이었다. 몇 차례 목을 치켜들고 울부짖던 소질풍은 이내 바닥에 축 늘어져 버렸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 담고서…….

“주군, 다친 곳은 없습니까?”

무장들이 편월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편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진 채, 바닥에 쓰러진 소질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려 내시오.”

“예?”

갑자기 내뱉어진 편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무장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방법은 묻지 않겠소.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저 말을 다시 살려 내시오.”

다시 한 번 강하게 내뱉은 후, 편월은 진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오늘의 패배가 씁쓸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성루에 서서 편월의 진퇴를 모두 지켜본 좌괴의 미소도 그리 밝은 건 아니었다.

‘아직 멀었군.’

이건 편월의 첫인상에 대한 좌괴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분명 편월은 용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처럼 많은 바위와 화살 공격을 뚫고 성벽 가까이 접근해 활까지 쏘고 돌아간다는 건 예사 무장이라면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좌괴는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편월이 예사 무장이라면 크게 칭찬을 했겠지만, 그는 앞으로 나라를 세워 군주가 될 몸이다. 전쟁도 저런 식으로 치러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 철저히 그 습관을 뜯어고쳐 줘야겠군.’

좌괴는 다시 한 번 위휘군을 철저히 두들기겠다고 작정했다. 단순히 자신의 몸값(?)을 올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앞으로 모시게 될 주군이 저처럼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설친다면, 자신의 미래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정면 공격이 실패했으니, 이제 뒷문을 두들기겠지.’

뒷문이란 벽곡성의 뒤편, 즉 귀곡탄으로 통하는 곳을 말한다. 성의 보급을 순전히 거기에 의존하고 있기에 상당히 중요한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좌괴는 거기에도 철저한 대비를 해 뒀다. 위휘군이 어떤 공격을 감행할지 모르지만, 그쪽에선 오늘보다 더 큰 피해를 볼 터였다.

“좌 선생, 성주께서 찾고 계시오. 오늘의 승리를 크게 기뻐하고 계시니, 아마 큰 상을 내리실 게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좌괴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주를 만나는 게 싫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미소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이 좀생이 같은 성주를 대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진 잘해 주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저 아래 까마득히 보이는 위휘군의 진영을 둘러본 뒤, 좌괴는 성주의 거처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 * *

뿌지직!

벌겋게 단 인두가 살갗을 태우며 역한 노린내가 물씬 피어올랐다.

폐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필요한 일이긴 했지만, 사람을 고문하는 자리에 참관한다는 건 고역이었다.

“자, 말해라. 창고의 흔적으로 봤을 때 절대 네놈 혼자 있었던 게 아니다. 누구와 같이 있었느냐?”

축 늘어진 독고기의 머리칼을 움켜쥔 심문자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며, 몇 번이나 말해야… 믿어 주겠소. 나 혼자, 나 혼자 였소.”

벌써 며칠이 지났는지도 독고기는 알지 못했다. 저물창에서 취해 곯아떨어졌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 이 장소였다.

처음 독고기는 자신이 저물창의 술을 몰래 마신 것 때문에 문책을 받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라 지운산에서 상초국 병사들을 학살한 일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독고기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바로 혼자서만 술을 마셨다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호훈을 감싸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밤이면 밤마다 자신에게 악몽으로 찾아들었던 지운산의 사건을, 그가 세상에 널리 퍼뜨려 주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말고 순순히 불어라. 이실직고를 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너랑 같이 있었던 놈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놈은 너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 놈을 위해 네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지 않느냐.”

“나는… 혼자였소.”

“에잇!”

심문자가 다시 인두를 쳐들었을 때, 고문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폐포자를 불렀다.

“대왕 전하께서 찾아 계시오.”

폐포자는 내심 반겼다. 역겨운 노린내와 비릿한 피 내음이 배어 있는 고문실이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이제 그만두고 그자는 참수형에 처하게. 목은 네거리에 효수하고…….”

심문자에게 지시를 내린 후, 폐포자는 서둘러 고문실을 빠져나왔다. 바깥의 공기가 그렇게 달콤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저자의 입에서 뭔가를 얻기는 틀렸고, 무단으로 이탈한 자에 대한 조사를 좀 더 서두르라고 해야겠군.’

독고기를 심문하는 것과 병행해서, 폐포자는 각 부대에 이탈자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할 것을 명해 뒀다. 지금쯤이면 그게 올라와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율천국의 병력만 한 군을 유지하다 보면 이탈병들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건 다반사지만, 보다 큰 문제는 문책을 두려워한 지휘관들이 쉬쉬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폐포자는 처음부터 엄명을 내렸다. 숨기다 적발되는 지휘관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군법에 따라 문책을 하겠다고 말이다. 아마도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숫자의 이탈병들이 보고될 것이다.

하지만 폐포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 예비대에서 이탈한 병사들이었다. 그 숫자는 결코 많지 않을 터였다.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폐포자는 어느새 가겸후 앞에 나아가 있었다.

“황제는 비록 죽었지만, 과인의 대업은 계속해서 추진해야겠소.”

폐포자를 보자마자 가겸후가 대뜸 내뱉은 말이었다.

“새삼 거론하실 일도 아닌 줄 아옵니다.”

가겸후가 말한 대업이란 바로 황제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폐포자는 공손한 어투로 찬성의 뜻을 표했다.

반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걸 위해 가겸후는 황제의 죽음까지 철저하게 감췄고, 혹시 반대하는 자가 없는지 독기 서린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 서슬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니, 폐포자는 가겸후가 두려워서 동조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평생 모셔야 될 사람이 왕인 것보다는 황제인 게 훨씬 낫다. 전형적인 출세 지향형인 인간의 야심도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전에 강국을 멸망시켜야겠는데, 선생의 생각은 어떠시오?”

“그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옵니다. 강국을 멸망시켜 대왕의 위엄을 보이신다면, 차후 생길지도 모를 잡음이 상당 부분 소멸될 것이옵니다.”

폐포자의 대답에 가겸후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강국보다는 허주를 멸망시키는 게 훨씬 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국을 택한 건 증두신과 편월이 옹서지간이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쳐야 될 편월이라면, 미리 손발을 잘라 두는 것도 좋겠지.’

이런 생각으로 가겸후는 강국 증두신의 목덜미를 향해 칼날을 겨누기로 했다.

“그럼 최대한 빨리 강국을 멸할 수 있는 계책을 만들어 보시오.”

“아뢰옵니다!”

가겸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차가 안으로 들어와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후 마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사옵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황후가 없어지다니? 다시 잘 찾아보도록 하라.”

“황공하오나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뭐라고?”

자신도 모르게 가겸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벌써 해가 저물려고 하고 있다.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면 분명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얘기다.

“그 얘기를 왜 이제 와 하는가?”

“소인들도 설마 하고 구석구석 찾아다니다 보니…….”

“찾아라! 반드시 찾아서 데려와.”

언성을 높인 가겸후의 목청이 가늘게 떨렸다. 황제가 죽은 후 황궁을 샅샅이 뒤졌지만 옥새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 행방을 알고 있을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황후인데, 그녀가 사라졌다는 건 자신의 꿈이 그만큼 멀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얼뜨기 같은 계집…….’

전신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다는 걸 가겸후는 여실히 느꼈다. 다름 아닌 육친인 황후에 대한 증오이자 분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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