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운재출戰雲再出
1
편월의 명에 따라 합진성에 거주하는 모든 위휘군 장수들이 한자리에 모인 건 영창십일년도 저물어 가는 섣달 스무 닷새였다.
소집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좌괴를 데려오기 위해 일찍이 벽곡성으로 보냈던 거예홍이 돌아온 걸 환영하기 위함이었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장수들의 안색은 아주 좋아 보였다. 한 달 남짓한 기간에 불과했지만, 별다른 전투 없이 심신을 푹 쉬어 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였으면 의당 술잔이 돌고 웃음꽃이 필 만도 한데, 분위기는 반대로 무겁기만 했다.
“그러니까 좌괴란 사람은 만나 보지도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고 몇 번이나 얘기를 해야 알아들으시겠소? 벽곡성의 성주 놈이 단단히 끼고도는 것 같았소이다.”
송지의 물음에 거예홍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몇 번째 같은 질문에 답하다 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바로 이들의 대화가 오늘의 분위기를 무겁게 하는 주된 이유였다. 위휘군으로선 처음으로 초빙하려던 사람이었는데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섰으니, 전투로 치자면 예봉이 꺾인 셈이었다. 웃는 사람이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계천자가 벽곡성을 치라고 했군.”
편월은 지난날 계천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벽곡성을 쳐서 얻을 건 땅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했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오.”
편월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거예홍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 역시 계천자의 말을 들었던 터라 간 김에 벽곡성의 지세를 자세히 알아보고 왔던 것이다.
“벽곡성 하나 떨구는 거야 뭐 그리 어려우려고. 듣자니 거기 있는 군병은 채 오천이 안 되고, 백성들의 숫자도 이만을 바라기 어렵다던데. 그 정도야 북 한 번 울리면 떨어지지 않겠나?”
“모르시는 말씀이오. 하긴, 그런 말씀을 하실 줄 알고 이렇게 벽곡성의 주변도를 그려 왔소이다.”
호기에 찬 두건득의 말을 가볍게 넘겨 버리며, 거예홍은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그 말투나 행동이 여전히 남자 같았다.
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펼쳐진 두루마리 위로 쏠렸다. 환영식 따위는 벌써 잊혀 버렸고, 그대로 작전 회의로 넘어가 버린 듯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다들 이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개중에 맹아는 벌써 싸움에라도 임한 것처럼 눈을 부라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벽곡성에 출입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계단뿐이오. 길이는 약 오 리 정도로, 정상에 성이 위치하고 있소.”
“이 양쪽은?”
“최소 백 장이 넘는 절벽이오. 성의 뒤쪽도 마찬가지요. 직접 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 아랜 귀곡탄鬼哭灘이란 커다란 강이 성의 뒤쪽까지 삼면을 감싸고 휘둘러 흐른다고 들었소.”
“귀곡탄? 이름부터 으스스하군.”
“그만큼 깊고 물살이 세다는 뜻이라 들었소. 이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을 정도로.”
“그럼 간단하네. 여기 입구만 막고 있으면 성안에 있는 사람은 독 안에 든 쥐 꼴이니, 굶어 죽기 싫으면 항복하겠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호기를 부리는 송지를 거예홍은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은 한심스럽다는 눈빛이었다.
“성 뒤편의 강을 통해 벽곡성의 모든 물자가 유통되는 것 같았소이다. 이 긴 계단을 통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고 편하지 않겠소? 그러니 굶겨 죽인다는 건 꿈도 꾸지 마시오.”
“그럼 강부터 봉쇄해 버리면 되지.”
“무슨 수로? 송 장군은 그토록 물에 능하시오? 그들이야 매일 이용하니 물길이나 여울 등을 잘 알겠지만, 만약 우리가 배를 띄운다면 그 족족 침몰될 게 뻔하오.”
“흐흐흐.”
“후후.”
누구의 입에서 시작된 건지는 모르지만, 거예홍을 둘러싼 장수들은 하나같이 나직한 웃음을 토했다. 재미있는 장난을 꾸미고 있는 악동들의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거예홍의 얼굴이 왈칵 붉어졌다. 기껏 고생해서 얻어 온 정보가 철저하게 무시당한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하, 그러고 있으니 거 장군의 모습이 비로소 여자처럼 보이는군.”
“뭐요?”
맹아의 농담 한마디가 기어이 거예홍의 두 눈에 불길을 확 피워 올렸다. 비무장이라 그렇지, 만약 무기가 있었다면 뽑아 들었을 기세였다.
“아! 참게, 참아. 이거, 내가 나잇값도 못하고 먼저 웃은 것 같군. 사과하겠네.”
송지가 가볍게 군례까지 갖추며 사과하니 거예홍도 더 이상은 뻗댈 수 없었다. 그래도 화를 삭이지 못해, 거친 숨소리가 약간 벌어진 입을 통해 쌔액쌔액 뿜어졌다.
“다른 뜻이 있어서 웃은 건 아닐세. 우리 중에 물귀신 뺨치는 장수가 한 명 있는데…….”
말꼬리를 흐리며 송지는 좌중을 두리번거렸다. 초염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아, 저기 있군. 초 장군, 이리 와 보게.”
송지는 말석에 웅크리고 있는 초염을 손짓으로 불렀다.
“여태까지 얘기는 들었겠지? 어떤가, 할 수 있겠나?”
“무, 물이라면, 어, 어떤 곳이든 자, 자신 있습니다.”
심하게 더듬거리는 특유의 말투로 초염은 대답했다. 자신에 찬 표정이었다.
거예홍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초염을 살펴보았다. 얼굴이나 신체가 어눌하게만 보여, 장수라기보다는 농부 같은 느낌이라 썩 믿음이 가지 않았다.
“들으셨다니 이 강의 이름이 귀곡탄이라 불리는 것도 알겠구려. 그래도 자신 있으시오?”
“내, 내, 고향이 어, 어…….”
“초 장군의 고향이 바로 어약칠협일세.”
더듬거리는 초염의 말을 송지가 대신 했다.
거예홍의 눈에 놀람의 빛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어약칠협의 물살이 얼마나 거센지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까닭에서였다. 거기다 초염이 이천강의 건너편에 밧줄을 묶었다는 얘기까지 송지가 덧붙였을 때, 거예홍의 눈빛은 살짝 달라졌다.
‘이건 해 볼 만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거예홍은 자신이 직접 귀곡탄에 가 보지 않은 게 조금 후회스러웠다.
“자, 주군. 여기까지 얘기가 진행되었소. 이참에 벽곡성을 치는 게 어떻겠소?”
송지가 편월에게 물었고, 모든 장수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최근 싸움이 없어 다들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으니, 기대에 찬 눈빛들이었다.
그러나 편월은 전혀 엉뚱한 걸 입에 올렸다.
“식운관 싸움은 어떻게 되는 것 같소?”
순간적으로 모든 장수들의 어깨에 실려 있던 힘이 확 풀려 나갔다. 아무래도 편월이 장인 나라인 강국의 안위부터 먼저 염려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말로야 일진일퇴를 거듭한다지만, 강국으로선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반면 율천국은 상당히 여유 있는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례로, 가겸후는 황제를 문안한다는 핑계로 지금 창일성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근근이 버티고 있는 강국이 만약 일거에 무너진다면, 그다음 가겸후의 창끝에 나서게 되는 건 바로 위휘군이었다. 그러니 단 한 명의 병사라도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시 두런거리는 소리가 실내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현실을 파악하자 벽곡성을 친다는 기대는 씻어 버리고, 모두가 식운관 싸움에 대해 한마디씩 내뱉은 것이었다.
“얼마 전 탄금성에서 지 장군으로부터 전령이 왔는데, 아무래도 강국이 위태롭다는 전망이었소.”
“또한 윤주성의 강 장군으로부터 전령이 와 있소. 탄금성으로 병력을 이동시킬 테니 허락해 달라고…….”
송지와 담개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어 얘기했다. 이게 식운관 싸움에 대한 최근의 소식이었고, 움직임이었다.
“강 장군이 그런 경솔한 말을?”
“탄금성에 더 이상의 병력을 넣으면 가겸후의 신경만 건드릴 텐데.”
담개의 말에 이끌린 몇몇 장수가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말이야 달랐지만 내용은 같았다. 지금은 신중을 기할 때라는 얘기였다.
비록 강국과 싸우고 있지만 가겸후 역시 위휘군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다른 곳으로 출병하면 모르지만, 탄금성으로 들어간다면 십중팔구 강국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게다.
뒷날을 생각한다면 이건 예사로 여길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하나의 전쟁을 치르고 나면 병사는 물론 국가 전체가 지치게 된다. 곧바로 다른 전쟁을 찾아 나설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게 그처럼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지라, 한번 눈 밖에 난 군벌이 있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서 지금은 가겸후의 신경을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그렇게 따지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송지였다. 입만 열면 용감한 말을 하지만, 모두들 가겸후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
조금 전 거예홍의 말에 필요 이상으로 용맹스러운 말을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젊은 장수들이 행여 주눅 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제 몇 마디 말로 그 점이 보다 확실해진 이상, 이대로 그냥 둬서는 안 된다. 위휘군의 군감으로서나, 오늘이 있기까지 잡가군 시절부터 피땀 흘려 온 걸 생각해서라도 뭔가를 해야만 한다.
“주군께 소청이 있소!”
갑자기 터져 나온 송지의 말에 좌중의 장수들은 깜짝 놀라 입을 닫았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는 컸다.
“청이라니?”
“소장에게 군사 일만을 딸려 벽곡성 정벌을 명해 주소서.”
“뭐?”
이건 편월도 의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송지처럼 늙은 장수가 나섰으니, 아연해져서 되물었다.
사실 편월도 내심 벽곡성을 쳐야겠다고 작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강국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 이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터였다.
그래서 내심 자신이 직접 출정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송지가 나섰으니, 일견 의표를 찔린 감도 없지 않았다.
“소장에게 군사 일만을 딸려 주시면, 한 달 내로 반드시 벽곡성을 떨구겠소이다.”
“아니, 이건 소장에게 맡겨 주시오. 젊은 놈들을 두고 어찌 송 군감께서 직접 나서시려는 거요? 주군, 소장이 가겠소이다.”
“아니, 소장에게…….”
그제야 송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챈 장수들이 일제히 들고일어섰다.
왜 아니겠는가. 맹아의 말대로 비교적 젊은 장수들이 즐비한데, 최고령인 송지가 출정한다면 다들 쥐구멍에 머리를 처박아야 할 판인데.
“그만!”
편월은 소리를 높여 장수들의 말을 중단시켰다. 싸움이라면 지치지도 않고 늘 이런 모습들을 반복한다. 사기 측면에서 보면 고무적이지만, 지휘자의 입장이 되고 보면 결코 좋은 현상인 것만도 아니었다.
“벽곡성을 치는 일은 내게 맡겨 주시오.”
단호한 어투로 편월은 장수들을 억눌렀다. 그러지 않으면 이들은 절대 조용해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역효과가 난 모양이었다. 대뜸 담개부터 눈을 부라리며 편월에게 따지고 들었다.
“주군에게 맡기라니? 그럼 직접 출전하시겠다는 말씀이오?”
“뭐? 주군께서 직접 나서신다고?”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주군께서 합진성을 비우신단 말이오?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하시오!”
어떤 맥락에서 보면 담개는 날카로운 면이 없지 않았다. 편월의 말 한마디에서 그 속내의 한편은 짐작했으니까.
그런데 나머지 장수들은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담개의 말에 마치 편월이 직접 출전하기로 벌써 결정이나 난 것처럼 대놓고 반발했다.
“조용히! 여러분, 모두 조용히 하시오.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소. 그러니 제발 조용히 하시오!”
송지가 큰 소리로 장수들을 진정시켰다. 그런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내가 가장 먼저 주군에게 청을 드렸소.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양보해 주시기 바라오. 비록 나이가 들어 미덥지 않게 여길지 몰라도, 벽곡성 정도는 충분히 떨굴 수 있소이다.”
“송 장군 말에 동의를 표하오.”
송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담개가 거들어 주었다. 비슷한 나이다 보니 젊은 장수들에게 밀리기 싫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불현듯 편월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를 갖는다는 건 이처럼 번거로운 걸까?’
‘주군’이라는 호칭을 듣기 전에는 싸우고 싶을 때 싸울 수 있었다. 누군가의 지휘를 받았든 자신이 직접 지휘를 했든 간에 지금만큼 구속되지는 않았다. 그저 성 하나 갖자는 소원을 풀려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었고, 이제 저들은 자신의 행동까지 제약하려 든다. 미칠 노릇이었다.
‘날 위한다고 저러니 모른 척할 수도 없고…….’
그래도 할 건 확실히 해야 한다.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주군이고 대장군이고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이 일만큼은 다들 두말 마시오. 벽곡성은 내가 직접 치겠소.”
“안 될 일이라고 벌써 말씀드렸소이다.”
다른 장수들이 또다시 왁자하게 떠들려는 걸 제지한 후, 담개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편월의 생각이야 어떻든 자신들에겐 또 자신들만의 입장이 있는 것이다.
무거운 정적이 실내에 내려앉았다. 그만큼 이번에 내뱉은 담개의 말은 위압적이었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제 뜻을 굽힐 편월도 아니었다.
“이번만은 반드시 내가 가야만 하겠소.”
낮은 목소리였지만, 담개보다 훨씬 단호한 어조였다. 그만큼 속에 깃든 의지도 강하게 사람들의 귀를 두드렸다.
“대체 이유가 뭐요? 왜 그리 벽곡성에 집착하시는 거요?”
담개가 따지자 편월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걸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말씀을 하시오! 이유만 합당하다면 소장도 더 이상 말리지 않겠소.”
말없이 자신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편월이 답답하다는 듯 담개가 언성을 조금 높였다.
“좋아. 말할 테니 담 장군과 송 장군은 따라오시오.”
말하기 무섭게 편월은 밖으로 나가 버렸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담개와 송지가 그 뒤를 급히 따랐다.
요즘 증화강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혼인 초기만 해도 코빼기도 볼 수 없었던 편월이, 근자엔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기 때문이었다.
이건 증화강으로선 질색이었다. 강국 왕실의 내전에서만 살다시피 했던 그녀로선, 밖에서 남자가 들어온다는 건 곧 아버지였다. 그것도 사전에 항상 통고를 했었다.
물론 정식으로 혼인을 치렀으니 남편인 편월이 언제 나타나도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월을 볼 때마다 긴장하게 되는 건 평소 끊임없이 자신에게 하는 시비들의 말 때문이라고 증화강은 생각했다.
다른 내용이 아니었다. 강국에서부터 데려온 시비들은 틈만 나면 부부의 잠자리에 대해 얘기를 해 댔다.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남편을 받들어야 되는지 등등…….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증화강은 전신이 화끈거렸고, 그게 편월을 대할 때면 긴장으로 이어졌다. 언제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까 하고 말이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생각에 잠겨 볼을 붉히고 있던 증화강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제 곧 편월이 점심을 먹으러 올 시간이다. 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만두시오, 주군! 여긴 내전이 아니오? 우린 들어갈 수 없소이다.”
“내가 괜찮다는데 뭘 꺼려하시오. 여기가 아니면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아무 말 말고 들어오시오.”
증화강이 막 시비들을 부르려고 할 때, 내전 입구에서 남자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증화강은 질겁하며 놀랐다. 혼자 와도 어려운 편월이 누군가를 데려오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은근히 화가 치밀기도 했다. 강국에 있을 땐 어머니의 허락 없이는 아버지도 함부로 외간 남자들을 내전에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집집마다 가풍이 다르고, 나라마다 풍속이 다르다. 아직 위휘군이나 합진성의 풍속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려니 하고 서둘러 맞을 준비를 했다.
“아!”
편월이 데려온 사람을 봤을 때, 증화강은 짧은 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다행히 전에 한 번 봤던 담개와 송지였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증화강이 시비들을 거느리고 인사를 하자, 편월은 어떻든 두 사람의 노장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예를 갖췄다.
“오늘은 두 분 노장과 함께 식사를 하겠소. 부인도 같이 합시다.”
“예?”
편월의 말에 증화강의 눈이 더욱 크게 뜨였다. 밥 한 끼 먹는 거야 뭐 그리 대수겠냐마는, 이래서는 내전의 법도가 서지 않는다. 명색이 자신은 위휘군의 주군인 편월의 아내가 아닌가. 그에 걸맞은 예법을 갖춰야만 한다.
“뭘 하고 있소? 어서 준비하지 않고.”
“아, 예.”
이어진 편월의 채근에 증화강은 황급히 예를 갖췄다.
그러나 시비를 거느리고 돌아서는 그녀의 표정엔 매서운 다짐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2
“허허허허!”
“마냥 그렇게 웃으실 일만은 아니오. 난 우리가 정말 늙은 것 같아 못내 서운하구먼. 그래도 기분은 좋소이다, 허허허.”
편월과 점심을 먹고 헤어진 후 연방 웃음을 날리는 담개를 말리던 송지도 마침내 같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리 어린 주군이 그렇게 깊은 마음을 쓸 줄 누가 알았겠소, 허허허.”
“어리다고만 하지 마시오. 벌써 열여섯인가 열일곱이오. 장부 나이 그 정도면 한몫할 때도 됐지.”
“그런가? 난 주군이 아주 어린 예닐곱 살 때부터 봐 와서 그런지 마냥 어리게만 생각되는구려. 내 나이 먹는 건 생각지 않고.”
환하게 웃는 얼굴의 뒤끝이 조금 흐려지는 송지였다. 역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서글픈 노릇인가 보다.
“난 또 한 가지 주군께 놀란 게 있소.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을 땐 등에 식은땀이 흘렀는데, 그것도 다 계획하고 한 일이라니, 나 차암.”
송지의 심정을 민감하게 눈치 챈 담개가 화제를 돌렸다.
“허어, 그 얘기요? 실은 나도 놀랐소. 곱게만 자라셨을 부인께서 언제 이 전국 사나이들의 삶에 대해 들어 보셨겠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군의 얘기를 듣고 있는 모습이 꼭 토끼 같더이다.”
“허허허.”
주름진 눈을 한껏 크게 뜨면서 증화강의 표정을 흉내 내는 송지의 모습에, 담개는 또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부인께서도 각오를 새롭게 다지셨을 게요. 그래야지. 모름지기 죽음을 딛고 살아가는 난세 사나이의 아내가 되었으면, 독한 마음을 가져야지.”
다른 얘기가 아니다.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편월은 두 명의 노장에게 벽곡성을 칠 작전과 인원을 선발하라고 했다. 거기에 대해선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이 싸움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일부러 장황하게 강조했다.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 전사할지도 모르겠다고까지 했을 땐 어지간한 담개나 송지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편월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화강의 표정을 봤을 때, 두 사람은 왜 편월이 그런 얘길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난세를 사는 자들의 마음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장가를 들더니 주군은 또 훌쩍 자라신 것 같았소이다.”
“그러게나 말이오. 그러니 남자는 모름지기 아내를 얻어야 되는가 보오. 그런데 송 군감은 한 번도 가족 얘기를 하지 않는 것 같던데…….”
“그건 담 장군도 마찬가지 아니오. 그보다 담 장군은 정말 이 싸움이 필요할 것 같소이까? 아무리 우리 위휘군에 무장들뿐이라지만, 사람 하나 얻겠다고 주군이 직접 출전하신다는 건 좀 생각해 볼 문제이지 않소?”
“난 주군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이오. 앞으로 나라가 서면, 나가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치內治의 비중도 그만큼 커지게 되오. 그때를 대비한 포석이라면 얼마든지 싸워도 좋다고 생각하오.”
편월은 벽곡성을 직접 치겠다고 했고, 처음과는 달리 두 사람도 그 뜻을 납득했다.
다만 송지는 못내 찜찜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사람을 얻기 위해 싸운다는 것도 그랬고, 편월이 직접 가는 건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벽곡성의 성주도 대세를 보는 안목이 있을 거요. 가서 포위만 하고 좌괴인지 뭔지 하는 작자를 내놓으라고 하면 될 일인데, 번거로이 군사를 움직일 것까지 뭐 있겠소?”
“오히려 난 그 점이 더욱 좋았소.”
여전히 불만에 차서 내뱉는 송지의 말을, 담개는 웃으며 반박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시오. 만약 송 장군을 얻기 위해 누군가 전쟁까지 불사했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소? 그냥 짐짝처럼 넘겨지는 것보다는 훨씬 강한 충성심을 가질 것 아니겠소? 또한 앞으로도 사람을 얻기 위한 전쟁이라면 나는 찬성이오. 다만 그 사람의 능력이 문제지.”
여기서도 두 사람은 출신의 차이를 보였다. 담개는 정규군에서 잔뼈가 굵었기에 사람의 중요성과 그걸 얻기 위한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해 잡가군으로 전전했던 송지는 담개보다는 그런 의식이 희박했다. 사람이 필요하면 모여든 자들 중에 골라서 쓰면 됐고, 그걸 위해 전쟁까지 불사한다는 것도 얼핏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편월의 결심은 굳었다. 이제 팔만을 훌쩍 넘겨 버린 위휘군의 신병들에게 실전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도 한두 차례 전쟁은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송지도 강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병사는 얼마나 동원하는 게 좋겠소? 주군은 일만이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론 아무래도 불안하고.”
“마음 같아서는 이만 이상을 동원하고 싶소이다만, 주군이 허락지 않을 것 같으니 일만 오천이 어떻겠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그들은 장수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되셨소?”
거예홍이 가장 먼저 성급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한 번 실패했던 일인지라 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식사들도 하지 않고 여태 기다린 건가?”
거예홍의 질문에 대한 답보다, 송지는 사람들이 식사도 거른 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켕겼다. 자신들은 내전에서 아주 맛있는 점심을 대접(?)받고 왔으니까 말이다.
“주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더이까?”
맹아가 재차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편월이 두 노장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근위대장으로서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출전이 결정되었네. 주군께서 직접 나서실 게야.”
“뭐요?”
“기어이 고집을 꺾지 않으셨단 말이오? 대체 두 분 노장께선 뭘 하셨단 말이오?”
장수들이 격렬한 반발을 보였다. 애당초 편월의 출전을 앞장서 반대했던 두 사람이 지금 와서 손바닥 뒤집듯 다른 얘기를 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대들은 우리 두 사람을 믿는가?”
“그야 이를 말씀이오. 하지만 벽곡성 정도를 치는 데 주군께서 직접 가실 일은 아니지 않소? 보는 사람이 웃을 것이오. 위휘군엔 사람이 없다고.”
“글쎄, 우리들을 믿는다면 이번만은 주군의 뜻대로 하시도록 해 주세.”
두 사람도 편월의 속내를 그대로 얘기할 순 없었다. 자신들을 빤히 쳐다보는 장수들 앞에서,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해서 전쟁을 치른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장수들은 다시 웅성거렸고, 담개와 송지는 잠시 지켜보았다. 여전히 강경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두 명의 노장을 믿고 따르자는 쪽도 없지 않았다.
“총군세 일만 오천, 그 외에는 유동적이오!”
얘기가 끝없이 겉돌 것 같자 돌연 담개가 언성을 조금 높여 말했다. 한꺼번에 가닥을 잡아 버리려는 의도였다.
과연 이건 성공적이었다. 다들 전쟁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들인지라, 인원이 발표되자 당장 거기에 소속될 생각부터 하게 된 것이다.
“우리 근위대가 빠질 수야 없지.”
“아무래도 우리 위휘군의 최정예는 적월대지. 이번 전투는 우리 적월대가 맡겠소.”
맹아와 서진청이 거의 동시에 한마디씩 하며 나섰다. 싸움을 한다니 나이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성급해진 모양이었다.
“한 말씀 올리겠소!”
이번엔 거예홍이었다. 의도적으로 굵게, 그리고 크게 목소리를 내다 보니 묘한 중성적 음색이 되어 사람의 귀에 파고든 바람에 삽시간에 실내가 조용해졌다.
“벽곡성의 사정은 한 번 다녀온 소장이 가장 잘 알고 있소. 그리고 우리 거가군은 위휘군에 편입된 이후 아직 이렇다 할 공이 없었소이다. 이 기회에 그 임무는 우리 거가군이 맡고 싶소.”
“거 장군의 뜻은 잘 아네. 하지만 좀 전에 말했다시피 이번에 동원될 병력은 일만 오천일세. 이것도 주군께서 원하시는 것보다 오천이나 더 많은 걸세. 어느 한 부대가 맡는다는 건 있을 수 없네.”
송지가 나서서 부드러운 말로 거예홍의 뜻을 눌렀다.
처음 거예홍이 포란성에서 데려온 거가군의 숫자는 칠천이었다. 그게 위휘군 전체의 병력이 늘면서 이젠 그럭저럭 일만을 상회하게 되었다. 거가군 단독으로도 인원을 채울 수 있게 되었고, 그 말은 다른 장수들은 뒷전에 물러서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는 다른 사람들의 불만이 너무 커진다.
“우리는 모두 이걸 알아야 하네. 벽곡성을 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 든든히 버티고 서서 서쪽의 사정에 따라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의 기반을 지키는 일 말일세.”
담개가 송지를 거들고 나섰다. 아직은 정식 군사 회의가 아닌지라 말투가 부드럽고, 자연스레 하대를 했다.
“확실히 이건 생각해 봐야 될 일이로군. 주군이 안 계실 때 우리들의 안방이 유린당했대서야 말이 안 되니까, 우리 청월대는 합진성에 남겠소.”
두건득이 담개와 송지를 도와주었다. 그 역시 나이가 적지 않은지라, 이 일이 혈기만 세워서는 안 된다는 걸 안 모양이었다.
그렇게 되자 이야기는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딱히 한 부대만의 출전보다는 새로 모집한 신병 위주의 부대를 재편성해서 벽곡성을 치자는 얘기로 의견들이 모아졌다.
“자넨 어딜 가는가?”
얘기가 완전히 매듭지어지기도 전에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는 개묵에게 송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만 오천의 출전이라지만, 삼만의 인원이 한 달간 공격할 수 있는 물자를 확보해 두겠소.”
확실히 개묵은 병참이 체질에 맞나 보다. 언제 출전할지 시일도 잡히지 않았는데 벌써 물자 확보를 염두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걸 알고서야 개묵을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에선 병사가 가장 중요하고, 그 병사를 유지하는 게 바로 물자니까.
개묵이 나가고 나자, 분위기는 급속하게 군사 회의 성격을 띠어 갔다. 그중에서 가장 열을 내고 있는 건 거예홍이었다. 그녀가 이번 공격의 선봉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 * *
난세에 나고 자란다는 건, 혈관 속을 흐르는 핏방울 어느 구석엔가 전장의 냄새가 알싸하게 배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건 곧바로 지금 증두신의 모습과도 통한다. 평복을 입고 있을 땐 다소 유약하게 보이던 외모도, 갑옷으로 중무장을 하니 무쇠의 등뼈를 가진 강인한 무장에 다름 아니었다.
오늘 전투도 별로 성과가 없었다. 아니, 엄밀히 얘기하면 패전이라고 할 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두신은 손수 군주기를 든 채 오연하게 버티고 서서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전하, 이제 병사들을 거두는 게 가한 줄 아뢰오.”
진두에 서서 지휘를 하다 막 돌아온 이환이 잔뜩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메마른 겨울 대지의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쓴 듯 갑옷도 사람도 온통 허옇게 변한 모습이었다.
증두신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입을 꽉 다문 채 오직 식운관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사실 지금 증두신은 울고 싶었다. 철수 명령이 없기에 강국의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식운관에 매달리지만, 이내 ‘와’ 하고 무너져 내려온다. 그때마다 움직이는 병사들의 수가 확연하게 줄어든 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 진격에 백여 명…….’
적어도 그만한 숫자의 병사들이 한 번에 희생된다고 증두신은 판단했다.
딱히 증두신이 아니더라도 부하들이 그처럼 덧없이 죽어 나가는 걸 본다면 가슴 아플 게 틀림없다. 거기다 지금 증두신은 하나의 극명한 비교를 보고 있었다. 바로 지원군이라는 상초국군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싸움에 대한 열의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저 뒤에 처진 채 함성만 올리고 있었다. 자연히 사상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러고도 왕자 중 한 명을 내놓으라는 요구는 그치질 않으니, 증두신으로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전령!”
돌연 증두신은 목소리를 크게 하여 전령을 불렀다.
“대령이오!”
“당장 소촌에게 달려가 알려라! 도대체 상초국군은 뭘 하고 있느냐고! 시체들만 모인 군병이냐고 묻더라고 일러라!”
“존명!”
말의 내용이 너무 격한 것에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던 전령은 이내 군례를 갖춘 후 말을 달렸다. 그 역시 상초국군의 모습이 너무 심하다고 여겼던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저런 상태라면 증두신이 했던 말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소촌을 추궁할 터였다.
“이제 와서 상초국군이 덤벼든다고 해도 오늘 전투는 이미 글렀습니다. 조속히 철수시키는 게 병법의 이치에도 맞을 겁니다.”
이환은 거듭 권했다. 평소보다 어투가 거칠었지만, 여기가 전장인 걸 감안하면 심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증두신은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지금이 철수할 시기란 걸 알면서도 정작 명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일까?
모든 계산을 다 해 본 결과 이기지 못하는 싸움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전쟁을 시작했고, 그 때문에 더욱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건 확실히 증두신의 미련이자 집착이었다. 만약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다고 여겼다면, 이 정도 패전이면 진즉에 물러섰을 터였다.
그러나 상대는 천하제일의 세력을 자랑하는 가겸후. 그렇기에 어떤 경우가 되어도 그 목덜미를 물어뜯어 주고 싶은 충동이 끊임없이 증두신을 괴롭혔던 것이다.
“전하!”
다시 한 번 말리려고 이환이 불렀을 때, 증두신은 오히려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앗, 전하!”
“따르라!”
이환은 물론 증두신의 근위대가 질겁하고 뒤를 따랐다.
“귀 있는 강국 장졸들은 모두 듣거라!”
말을 달리면서 증두신은 커다랗게 목청을 높여 외쳤다.
“나 증두신은 바로 여기가 내 뼈를 묻을 곳이라고 결정했노라! 의기가 있는 자는 따르고, 두려운 자는 달아나도 좋다! 자! 공격이다, 공격!”
들고 있던 군주기를 높이 쳐들며 증두신이 소리치자, 여기저기에서 ‘와아!’ 하는 화답의 함성이 올랐다.
“안 됩니다, 전하!”
이환이 황급히 증두신의 말고삐를 잡아채려 했지만, 그는 벌써 저만치 내달리고 있었다.
“거긴 길 한복판이오! 길가로!”
뒤를 따르게 된 이환은 그렇게 고함을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증두신은 식운관으로 통하는 대로의 복판을 달리는 중이었다. 커다란 군주기까지 펄럭이고 있으니, 당장 적의 공격이 집중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막아라! 전하를 막아!”
이환은 다급했지만, 증두신의 행동이 강국군에 미친 영향은 컸다. 물러나 쉬고 있던 병사들은 물론, 비교적 가볍게 다친 부상병들까지 일제히 군주기를 따라 식운관에 달라붙었던 것이다.
증두신이 이걸 노리고 있었던 건 물론 아니었다. 그저 여유로운 강자인 가겸후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데 그 일침이 의외로 커지려는 것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왕이, 그것도 목숨을 보살피지 않고 식운관으로 통하는 대로의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걸 본 강국 병사들의 눈이 뒤집힌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전하보다 먼저 죽어라! 늦어서는 충성이 되지 못한다!”
“길을 열어라! 강국의 전하께서 가신다!”
“와아!”
여기저기에서 발악에 가까운 함성이 들린다 싶더니, 순식간에 증두신의 주변엔 사람의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그러고는 곧장 식운관을 향해 저돌적으로 밀고 올라갔다.
희생은 엄청났다. 적의 입장에서 보자면 길 한복판에 형성된 사람의 덩어리만큼 좋은 먹잇감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건 이성이 선행된 사람들의 계산일 따름이었다. 한번 광기에 휩싸인 강국군은 한 명이 쓰러지면 두 명이, 두 명이 쓰러지면 네 명이 보태진다는 식으로 증두신을 에워싸고, 역류하는 물결처럼 식운관에 부딪쳐 갔다.
이제 이환도 자신을 잊어버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어느새 그 역시 가장 먼저 성벽에 매달리고 있었다. 지휘관으로서의 냉정보다는 무장으로서의 투쟁 본능이 앞선 행동이었다.
대저 이성은 물론 목숨까지 도외시해 버린 광군狂軍의 끝은 두 가지로 귀결된다. 대승을 하거나, 아니면 전멸을 당하거나.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 승리의 신은 강국군의 손을 들어 줄 모양이었다. 패색이 짙어 가던 와중에 촉발된 증두신의 돌발적 행동이 일거에 전세를 뒤엎어 이제 곧 식운관을 점령할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거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건 상초국 지원군이었다.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던 그들은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것이다.
상초국군은 비단 해전에만 능한 게 아니었다. 대륙의 남자보다 왜소한 체구였기에, 성벽을 타고 넘는 몸놀림이 날렵하기 짝이 없었다. 뒤늦게 가담했지만, 성벽에 매달린 인원의 절반이 상초국군이라는 결과를 도출시켰다.
그게 또 한 번 강국군을 도발했다.
“쥐새끼 같은 상초국 놈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 쳐라! 치고 올라가!”
“서라, 이 상초국 개새끼야! 거기 서!”
여기저기에서 욕설이 마구 터져 나왔고, 그 뒤를 이은 건 피 터지는 강국군의 분전이었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지만, 이건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든 상초국은 강국의 지원군이자 연합군이었다. 저런 쌍욕으로 대할 상대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강국의 병사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불리할 땐 관망하다가, 유리하다 싶을 때 뛰어들어 승전의 공훈을 독차지하려는 상초국군의 흑심을.
그걸 알기에 적과 비슷한 적개심으로 그들을 대한 것이었다.
화르륵!
돌연 식운관의 관문에 거대한 불길이 솟구쳤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 이성을 잃지 않고 흑유를 준비해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거의 동시에 성루에서도 함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환을 필두로 한 강국의 병사들이 성벽을 타고 오르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그제야 증두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깨닫고 보니 군주기를 쥔 왼팔에 화살 한 대가 관통해 있었고, 갑옷 여기저기에도 십여 대가 꽂혀 덜렁거리는 게 보였다.
비단 증두신만이 아니었다. 그가 탄 말에도 수많은 화살이 꽂혀 있어,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잘 버텨 줬다 싶을 정도였다.
“성벽은 상초국군에 맡긴다! 강국군은 성문으로!”
몇 번이나 같은 고함을 지르며, 증두신은 군주기를 휘둘렀다. 이대로 같이 섞여 있게 했다가는 곧 한편 싸움으로 전개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 싸움에서 상초국군에 대한 강국군의 증오는 깊었다.
“자, 나를 따르라!”
또 한 번 세차게 군주기를 휘두르며 증두신은 불타고 있는 성문을 향해 말을 달렸다. 기를 흔들 때마다 관통당한 상처의 아픔이 뼛골에 스몄지만, 승리의 짜릿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망 오천칠백.
부상 일만 이천.
그날 식운관을 탈환하기 위해 강국군이 치른 희생이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패전보다 못한 승리였다.
3
광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화응은 가슴이 답답했다. 죽영이 죽었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래도 요즘 광운의 모습은 너무 심하다는 게 화응의 생각이었다. 폐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일보 직전에 가 있으니 보는 사람으로선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옆에서 뭐라고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광운과 죽영이 어떤 사이였는지 세세하게 알지 못하기에, 화응 역시 속만 끓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유화 아가씨만 모시고 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현재 광운의 상태로 봤을 때 군사적인 얘기를 심도 있게 할 수는 없다. 아쉽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고, 유화만 편월에게 데려갈 방도를 강구하는 화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위휘가 화응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닐세.”
화응은 위휘를 대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가 광운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 자체만으로야 별다를 것도 없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화응은 광운에 대해 세세하게 얘기해 줬고, 어떤 부분은 다소 과장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위휘는 광운에게 크나큰 기대와 동경심을 품게 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작 만나 본 광운은 폐인에 가까운 모습이었고, 그건 고스란히 화응에게 부담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언제까지 머무르실 생각이오?”
이어진 위휘의 질문에 화응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유화를 데리고 가겠다는 말은 그녀에게나 광운에겐 아직 입 밖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니 떠나는 날짜를 정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광운 성주를 이해할 수 없소. 이 나이에 남녀 간의 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 시대가 어디 그런 자잘한 것에 연연하게 해 주기나 하오? 시쳇말로 널리고 널린 게 여잔데, 그만 툭 털고…….”
“그만 하게!”
화응은 강한 어투로 위휘의 입을 막았다.
“남녀 간의 정이란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게 아닐세. 두 사람만의 내밀한 사연들을 타인이 어떻게 속속들이 알 수 있겠나.”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하잖소! 황제도 저 모양이라 천하가 다시 술렁거리고 있는 판에.”
위휘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바짝 독기가 서려 있는 눈빛이 강숙이나 맹아와 흡사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어쩌긴! 당장 광운 성주를 만나 우리 주군의 전갈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어 내야지.”
“그럼 자네가 가 보게. 밀사의 전권을 위임하겠네.”
“뭐요?”
일견 무책임하게도 들리는 화응의 말에 위휘는 다시금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도 광운에게 대답을 독촉할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그의 상심이 깊다는 걸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위휘군은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속히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위휘는 마음을 다잡았다.
“알겠소. 그럼 우리들을 대표해서 내가 광운 성주를 만나고 오겠소.”
대차게 한마디 내뱉은 위휘가 몸을 일으켰을 때, 밖에서 두 명의 무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성주께서 오십니다.”
“뭐?”
위휘군 밀사들은 하나같이 서로를 쳐다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나누었던 화응과 위휘의 대화를 모두 들은 것 같은 광운의 등장이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온다는데 맞지 않을 수는 없다. 밀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예를 갖췄다.
“오, 편하게 지내고들 계셨소이까?”
들어서며 던진 광운의 인사는 가벼웠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또한 외모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수척해져서, 예전의 천군만마 사이를 누비던 광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광운을 광운답지 못하게 만드는 건 그 눈빛이었다. 맑은 정기가 번뜩이던 눈은, 그사이 술과 심신의 피로에 찌들어 누런 황달기까지 보였다.
“삼가 성주를 뵈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도, 화응은 자꾸만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아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사이 더욱 수척해지셨다.’
화응이 광운을 본 건 처음 침사성에 왔을 때의 일로, 공식 환영회장에서였다.
그리고 근 이십여 일 만인 오늘 사석에서 다시 보니, 그사이 광운의 몰골은 더욱 형편없이 변해 버렸다. 그 점이 화응은 가슴 아팠다.
“자, 다들 앉읍시다. 진즉부터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렇게 늦고 말았소. 널리 이해해 주시오.”
이 말을 하는데도 힘이 드는지 광운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잦아들기만 했다.
뭐라고 답례를 해야 하지만, 화응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들은 성주의 환대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시기를.”
화응이 말이 없자 위휘가 눈치 빠르게 나서 광운에게 답례했다.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지만, 또한 빠뜨려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시절이 험악한 난세일수록 사람들은 더욱 형식적인 예에 치우치게 된다. 일단 무기를 뽑아 들면 사생결단 내게 되니, 그 전에 작은 실수라도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게는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전장에서도 개인 간의 예절이 있고, 보다 크게는 전쟁이나 전투에서도 상호 간에 지켜야 할 암묵적인 규범이 생겨난 것이다.
“자, 자. 우리 딱딱한 인사 따위는 이제 걷어치우고… 자네와는 정말 할 말이 많네, 화응.”
화응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광운이 말했다. 성주라는 직위 따위는 집어던져 버린, 예전 잡가군 시절의 모습과 말투 그대로였다.
그게 또 화응을 울컥거리게 했다. 광운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를 내려고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그 모습이 슬퍼 보였다.
하지만 화응은 마음을 다잡았다. 위휘의 말대로 언제까지 여기에 눌러 있을 순 없다. 할 얘기를 하고, 얼른 돌아가야만 한다.
“성주께 삼가 한마디 여쭐까 하오.”
“그렇게 딱딱하게 그러지 말라니까. 그래, 뭔가?”
너무 정중하게 예를 갖춘 화응에게 살짝 미간을 찌푸렸던 광운은, 그러나 이내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물었다.
“성주께서는 우리 주군의 전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그걸 알고 돌아가야만 우리들의 소임을 다한 게 되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 주시기 바라오.”
“오, 그거?”
제꺽 입을 열긴 했지만, 광운의 표정에 귀찮다는 빛이 살짝 떠올랐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화응 등이 위휘군을 대표해서 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답을 해 줘야 한다.
“보다시피 내 몸이 이 모양일세. 창피한 이야기지만, 내게 있어 죽영이란 사람은 무척 의미가 깊었나 보네.”
광운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혹 흐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착각할 정도였다.
“나도 물론 위휘군과 연합을 하고 싶네.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군. 그러니 오늘은 큰 틀만 잡도록 하세. 조만간, 그러니까 내 몸이 낫는 즉시 난 서쪽으로 진격하겠네. 그 점은 틀림없이 약속할 수 있네.”
“성주의 뜻은 그대로 우리 주군께 전하겠소이다.”
“그리고 또 하나, 가는 길에 유화를 데리고 가도록 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광운의 말에 화응은 오히려 입이 막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안도감이 들었다. 반드시 유화를 데리고 오라는 맹아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낼지 고심하던 참이었다. 광운이 먼저 얘기를 꺼내니 차라리 홀가분했다.
“성주의 분부는 그대로 받들겠으나, 한 가지 알아 두셔야 할 일이 있소이다.”
화응은 편월이 혼인했다는 사실을 얘기할 참이었다. 모르고 있다가 합진성에 가서야 알게 되면 유화가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기에 미리 조치를 취할 셈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편월이 혼인했다는 얘기를 들은 광운의 첫 번째 반응이었다.
“돌아가거든 편월에게 내 말을 반드시 전하게. 되도록 많은 아내를 얻으라고. 자손을 번창시키는 것도 좋지만, 한 여자만 사랑하게 되면… 그 대가가 너무 클 수도 있네.”
광운의 마지막 말은 얼핏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낮았다.
하지만 화응의 귀에는 벽력보다 더 크게 울렸다. 그만큼 광운의 말이 불길하고도 절실하게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재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광운의 말을 들은 화응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저렇게 되는 걸까? 그 대상이 이성이라는 점에서 보다 깊이 이해를 해야 할까, 아니면 못났다고 손가락질을 해야 할까?
아무튼 지금 화응의 눈에 비친 광운은 시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시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유화 아가씨는 따로 찾아뵙고 말씀을…….”
“아니, 그럴 것 없네. 곧 유화가 주효를 장만해서 이곳으로 올 걸세. 오늘은 아무 격식 없이 그저 옛날로 돌아가 허심탄회하게 한잔하세.”
다른 때와는 달리 이 말을 하는 광운의 표정은 활짝 밝아졌다. 모처럼 옛 전우인 화응과 술을 마신다는 생각에 그저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화응은 이 술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아무리 좋게 봐 줘도 광운은 술을 마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화응은 웃으며 대꾸했다.
“고맙소이다. 성주께서 주시는 술 맛을 단단히 기억했다가, 돌아가서 우리 주군께 보고드리겠소.”
이럴 수밖에 없었다. 광운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일수록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 술자리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마 광운도 화응의 말에서 그런 기미를 느꼈나 보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우이. 편월이 무척 보고 싶은데, 기회가 있을까?”
“그따위 약한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갑자기 화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광운을 호위하고 왔던 무장이 흠칫 놀라 칼자루에 손을 댔을 정도였다.
“괜찮네. 이 사람은 한때 내 전우였네.”
광운이 긴장하고 있는 호위 무장을 달랬다. 특히 강조한 ‘전우’라는 말 속에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어쩌면 잡가군으로 마음껏 활동하던 예전의 그 시절을 뇌리에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흘러 버린 세월만큼이나 달라진 서로의 위치에 서서, 광운과 화응은 제각기 안쓰러운 마음으로 상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유화가 주안상을 날라 온 건 두 사람에게 있어 일종의 작은 구원이었다. 아니었다면 이 서먹한 분위기는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으리라.
“유화도 거기 앉거라.”
가져온 음식을 차려 놓고 나가려는 유화를 광운이 제지했다.
유화도 뭔가 생각한 게 있었나 보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광운 곁에 앉았다.
“자, 우선 한 잔씩들 하세.”
술병에 든 술을 자기 잔에 채운 광운이 먼저 한 모금 마셨다. 독이 없음을 증명해 보이는 시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서글픈 일이다. 한때는 서로의 목숨을 맡겨도 좋을 전우였는데, 지금은 해칠 마음이 없다는 걸 증명해 보여야 콩 한 조각이라도 접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난세를 사는 사나이들의 마음가짐이다. 특히 밀사로 와 있는 사람들은 자기 한 몸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사명을 다하기 전에 죽는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 조심이 제일이고, 광운도 그걸 충분히 배려한 행동이었다.
술이 돌았다. 최고급으로 준비를 했는지, 입술에 닿기 전에 벌써 그 향기가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유화는 이번에 화응을 따라 편월에게로 가거라.”
빈 각자의 술잔을 다시 채우며, 광운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했다.
유화는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이런 말이 나오리란 걸 예견했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여기 있겠어요.”
“아가씨!”
말을 꺼낸 광운보다 화응이 먼저 큰 소리로 유화를 불렀다. 그로선 이런 그녀의 반응이 조금 뜻밖이었다. 체면상 한 번쯤 뒤로 빼는 것치고는 너무 단호했다.
“지금 광운 아저씨께는 제가 꼭 필요해요. 그러니 전 아무 데도 가지 않겠어요.”
말을 끝내는 것과 함께 유화는 앞에 놓인 술잔을 홀짝 비웠다. 자신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려는 행동이었다.
“아가씨, 지금 주군께서는…….”
유화를 설득하려던 화응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편월에 대해 얘기를 하면, 그가 혼인을 했다는 사실도 반드시 알려야 한다. 어떻게 그 얘기를 면전에서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화응은 광운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가 대신 말머리라도 열어 줬으면 싶었다.
그걸 눈치 챈 것일까. 광운은 유화를 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편월이 혼인을 했다는구나. 하지만 아직 신부가 어리니 내전을 다스리기는 어려울 게야. 네가 가서 힘이 되어 줘라.”
“혼인을……?”
이 말은 확실히 유화에겐 충격이었나 보다.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광운과 화응을 연거푸 둘러보았다.
화응은 그 눈길을 받기가 괴로웠다. 편월이 혼인한 게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여겨져,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만 싶었다.
이럴 땐 아무래도 정이 덜한 사람이 말하기 편한 법이다. 위휘가 나선 것도 그래서일 터였다.
“성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 주군께서는 곧 나라를 세우실 분입니다. 그때 무엇보다 안정된 내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군께서도 마음 놓고 일을 보실 수 있을 테니까. 다른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위휘군에는 유화 아가씨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위휘 딴에는 한껏 공손하게 한 얘기였다. 그래도 처음 듣는 사람은 시비조로 들렸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유화는 그 말을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비어 있는 자신의 술잔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편월은 내가 양원 땅 평사릉 전투에서 말도 못 할 정도로 비참한 패전을 한 뒤에 주운 아이였다.”
문득 광운이 입을 열어 나직이 내뱉었다. 비록 목소리엔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편월에 대한 얘기를 하는 그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난 그 아이의 운명이 미웠단다. 탯줄이 잘리기도 전에 모친을 잃어야만 하는 이 비정한 난세가 싫었지. 그래서 난 그 아이에게 어떻게든 살아남는 방법만을 가르쳤다. 끝까지 살아남아, 이 빌어먹을 시대의 끝이 어디인지 보라고. 그때 한껏 비웃어 주길 바라면서,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갑옷과 무기를 줬다.”
광운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어쩌면 내가 지나쳤는지도 모르지. 그 갓난아기를 갑옷 속에 넣고 전장을 누볐으니까. 그렇게 편월은 네 살 때 처음으로 적을 향해 활을 쐈고,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적병을 죽였지.”
꼴깍!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거짓말일 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네 살 먹은 어린아이가 전장에서 활을 쐈다는 말이 선뜻 와 닿지 않았다.
“나는 그 애에게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르치진 않았다. 오직 살아남는 법만 가르쳤지. 그 방법이 가히 틀리지 않은 모양이구나. 지금 편월은 아주 훌륭하게 자라 줬으니까.”
얘기에 심취한 사람들이 아무도 따라 주지 않아, 광운은 스스로 자신의 잔을 채워 마셨다.
“하지만 난 한 가지 점에서 분명히 실패를 한 것 같구나. 바로 편월에게 제대로 된 가족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 말이다. 이 난세가 끝날 때까지 편월은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이대로라면 그때가 되어도 그는 고아가 될 것 같구나. 유화야, 네가 편월의 가족을 만들어 주려무나. 많은 아이를 낳아서, 편월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괜찮도록 키워 주렴. 부탁이다.”
광운이 머리를 가볍게 숙였지만, 유화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꽉 깨문 입술이 연방 씰룩거리고, 술잔을 쥔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게 여실히 보였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 화응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주군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건 후사입니다. 하지만 증 부인은 올해 겨우 열셋, 아직은 몇 년 더 기다려야 하지요. 얼른 대를 이을 아드님이 생겨야 주군께서도 마음 놓고…….”
전장에 나가 싸울 수 있다고 얘기하려다 화응은 뒷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유화에게 있어 너무 잔인한 얘기라고 깨달은 탓이었다.
“화응의 말에 따르도록 해라. 네가 내 곁에 있으면… 난 죽영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아저씨…….”
유화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광운을 불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가 자신에게서 죽영의 그림자를 볼 거란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다.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왜 자신의 존재가 광운에게 끊임없이 죽영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알고서 이대로 있을 순 없다. 자신이 위휘군으로 가는 건 편월이나 광운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죽은 죽영을 위해서라도 이 막주를 떠나야만 한다.
그렇게 결심하자 어쩔 수 없이 유화의 가슴엔 편월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열 살 어린 나이에, 부모의 손에 팔려 갔던 죽영루. 그리고 시장에서 편월이 사 줬던 발환과 손에 쥐여 줬던 동전 몇 닢…….
그 모든 게 유화에겐 가슴 아린 추억이자 그리움이 아닐 수 없었다.
“가겠어요.”
유화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가려고 마음먹었다.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광운은 또 마음 아파할지도 모른다.
“그래, 결심해 주었느냐? 고맙다.”
“감사드립니다.”
광운과 함께 위휘군의 밀사들도 유화에게 사의를 표했다.
화응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상하게 군사적인 합의를 끝낸 것보다 유화를 데려가게 됐다는 게 더 막중한 일을 해낸 듯했다.
그 점을 겸연쩍게 생각하면서, 화응은 다시 한 번 광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재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과 같은 불길한 생각이 또다시 화응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화를 대동한 위휘군 밀사 일행이 침사성을 떠난 건 해가 바뀐 영창십이년 정월 초사흘이었다. 아무래도 일행에 여자가 끼게 되니 준비할 게 많아 출발 시일이 그만큼 늦춰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