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천지절逆天之節
1
가겸후가 황제의 급변을 들은 건 막 자정이 지났을 때로, 그가 이끌던 병력은 지운산에서 약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사만의 병사가 움직이는 것이니 빨리 이동할 수 없기도 했지만, 각 장수들도 출발 때와는 달리 행군을 그리 서둘지 않았다.
보고를 들은 가겸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제대로 무장도 갖추지 않고, 고작 백여 기만 이끌고 지운산으로 말을 내달렸다. 행군 속도에 비하면 이 대응도 놀랍기만 한 것이었다.
왕인 가겸후가 그리 서두르니, 나머지 율천국 병사들도 꽁무니에 불이 붙은 듯 움직였다. 장수들은 부하들을 독려해, 가지고 온 물자는 모두 버려둔 채 간신히 무장만 한 상태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율천국 병사들이 지운산에 도착한 건 축시 말경이었고, 그때까지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가겸후가 이끄는 사만 대군이 도착하자 싸움은 싱겁게 끝나 버렸고, 잔당 소탕의 양상으로 급격하게 변모했다.
그 와중에 가겸후의 온 신경은 황제를 찾는 일에 집중되었다. 점검해 보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전하,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황제 폐하의 곁에는 남궁도 장군이 있었사옵니다.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것이옵니다.”
“닥치시오!”
가겸후는 언성을 높였다. 무사하든 그렇지 않든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찾으시오. 지금 당장!”
“그건 시간이 해결할 것이옵니다. 그보다 사로잡거나 투항한 적들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사옵니까?”
“적이라니?”
“아, 상초국의 병사들 말이옵니다.”
“모두 죽여 버리시오. 한 놈도 남김없이.”
“하오나…….”
뭔가 반박을 하려던 폐포자는 그만 입을 닫고 말았다. 가겸후의 의지가 어떤지 분명히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보고!”
두 사람 사이에 약간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있을 때, 무장 한 명이 뛰어와 엎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포로로 잡힌 상초국 병사를 심문한 결과 이번에 놈들은 삼천의 병력으로 기습을 감행했다 하옵니다.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섬멸했고, 나머지도 포로로 잡거나 투항을 했사옵니다.”
“남은 적은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알겠다. 포로가 되었거나 투항한 적병들은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모조리 참수하도록.”
“예?”
보고를 하던 무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전시라지만 포로나 투항자를 죽이는 건 상례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폐포자였다.
“대왕 전하의 명이시오. 그보다는 황제께서 어떻게 되셨는지도 모르니, 이대로 상초국 놈들을 용서할 수는 없소이다. 명대로 시행하시오.”
이미 가겸후의 지낭智囊으로 알려진 폐포자였다. 그가 말하자 무장도 어쩔 수 없이 서둘러 그 자리에서 물러갔다.
“혹시 다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소인이 가서 지켜보겠사옵니다.”
“괜찮겠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가겸후가 물었다. 폐포자의 말은 상초국 병사들을 죽이는 곳에 참관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옵니다.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옵니다.”
“그리해 주신다면 과인으로선 고맙긴 하지만…….”
차마 청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이건 가겸후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말꼬리를 애매하게 흐리는 걸로 승낙을 대신했다.
폐포자는 곧바로 처형장으로 향했다. 아직 날이 밝지도 않은 상태로 따로 장소를 마련할 수도 없었으니, 인근의 계곡에 상초국의 포로와 투항자들을 모두 몰아넣은 상태였다.
폐포자가 도착했을 때는 한창 상초국 병사들이 죽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상한 일이 있소.”
이번 처형을 책임진 독고기獨孤基가 서둘러 폐포자에게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라니?”
“저들은 모두 우리말을 할 줄 아는 것 같소이다. 그것도 아주 유창하게.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면서 대왕 전하를 배알케 해 달라고 하더이다.”
“그게 바로 놈들의 간계일지도 모르오. 위기에 몰리면 무슨 짓을 못할까! 그보다 숫자는 모두 몇 명이오?”
폐포자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이 얘기를 길게 해 봐야 좋을 게 전혀 없었다.
“부상자까지 합쳐 천삼백육십이 명이오. 나머지는 전투 중에 죽은 것 같소.”
“혹시 놓친 자들은 없소?”
“그 점도 이상했소. 충분히 달아날 수 있었던 자들도 모두 투항을 했으니…….”
“그것도 아마 목숨을 살리려고 그랬을 거요. 여기서 달아 나 봤자 강국까지 무사히 갈 수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병사들을 풀어 지운산 전체를 샅샅이 수색하시오.”
“병사들은 대부분 황제 폐하를 찾고 있소. 그러니 만약 잔당들이 있다면, 잡아 올 것이오.”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동쪽 하늘이 희뿌염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끝난 것 같소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하시오. 한 놈도 살려 둬서는 안 된다는 대왕 전하의 명이시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겠소? 그냥 두더라도 어차피 죽을…….”
“명을 거역하실 셈이오?”
의외로 드센 폐포자의 말에 독고기는 입을 닫고 말았다. 그러고는 서둘러 계곡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계곡에선 시커먼 연기와 더불어 살 타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천 명이 넘는 상초국 병사들의 시신에 일일이 또 한 번의 칼질을 하는 것보다, 아예 흑유를 붓고 태워 버리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다소 미진했지만, 폐포자로서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폐포자가 돌아섰을 때, 우측 산등성이에서 왁자한 함성이 올랐다.
“황제 폐하께서 여기 계신다!”
“부상을 당하셨다! 활에 맞으셨으니 어서 군의를 불러라!”
그 함성이 폐포자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부상이라고?’
잠깐 생각에 잠겼던 폐포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는 이내 황제가 발견된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상태는 의외로 심각했다. 남궁도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보호했지만, 등에 화살을 세 대나 맞았던 것이다.
그중 한 대가 치명적이었다. 왼쪽 등에 꽂힌 화살은 말 그대로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심장을 빗나갔다. 자칫했으면 그 자리에서 절명했을 위기를 모면한 셈이었다.
어쨌든 가겸후는 황제를 곧장 창일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온갖 정성을 다해,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그를 간병했다.
그러나 황제는 전혀 차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더 나빠지지도 않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 * *
황제가 사냥 중 상초국 병사들의 기습으로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은 합진성을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아니, 비단 합진성만이 아니었다. 그 일은 천하를 들썩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가겸후가 강국과 상초국에 대해 복수를 선언하고, 율천국의 전 병력을 식운관으로 급파한 것만으로도 세인은 연일 수군거리며 불안해했다.
그 와중에 느긋한 건 편월뿐인 듯했다. 근위대원 몇 명만 거느리고 사냥을 나가는가 하면, 아무 예고도 없이 윤주성에 불쑥 나타나 강숙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송지가 오늘은 한마디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편월을 기다렸다.
“오늘 송 장군의 얼굴에 노기가 서려 있구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화를 푸시오. 그래 봐야 주름만 더 생기니까.”
새벽같이 성주의 집무실에 들이닥친 송지에게 맹아가 유들거리며 말을 건넸다. 약간은 농담조였다.
“맹 장군은 너무 가벼워서 탈일세. 그러니 주군께서 이 비상시국에도 마음대로 하시질 않나. 근위대장이라면, 주군께서 일탈을 하시면 간언을 드릴 줄도 알아야 하거늘.”
송지는 세차게 혀를 찼다. 싸움에 임하면 하나하나가 믿음직한 장수들이지만, 할 일이 없을 땐 경박한 여느 젊은이와 다름이 없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송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자신을 늙은이 취급한 맹아의 말이었다. 가뜩이나 최근 들어 나이를 의식하던 참이었는데, 직접 들으니 상당히 불쾌했다.
‘이래서 싸움이 없으면 젊은것들은 해이해지지.’
싸움이 없었던 날이 요 근래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불과하지만, 그사이 위휘군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졌다는 게 송지의 생각이었다. 단순히 노파심 때문이라고 자위를 해 봐도, 좀처럼 그런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데도 주군은 신경도 쓰지 않고 늘 밖으로만 도시니…….’
“아니, 송 장군? 아침부터 무슨 일이오?”
송지가 생각하는 사이 편월이 들어서며 가볍게 물었다.
이 말도 송지의 신경에 거슬렸다. 마치 와서는 안 될 곳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대체 주군은 요즘 정신을 어디다 두고 계시오?”
송지의 말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거칠었다. 편월이든 맹아든 자신을 늙은이 취급하는 것에 대해 초조해하고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무슨 말이오?”
“황제 폐하께서 부상을 당해 천하가 다시 들썩거리고 있소이다. 이럴 때일수록 주군께서 중심을 잡고 계셔야 병사들의 사기도 해이해지지 않을 것이오.”
“송 장군은 그 말씀을 믿으시오?”
편월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왔던 두건득이 송지에게 되물었다.
“무슨 말? 황제 폐하께서 사경을 헤매고 계시다는 얘기 말이오?”
“그거야 틀림없겠지만, 소장이 의심하는 건 상초국 병사들이 기습을 했다는 거요. 그들이 어떻게 율천국의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는 지운산에 나타날 수 있겠소?”
그 말엔 송지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가겸후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오. 율천국이 상초국을 친다는 건, 바로 강국을 친다는 얘기요. 말할 것도 없이 강국의 증두신은 주군의 장인이니,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도 불똥이 튈 거란 얘기요. 그러니 미리 대비를 해야지.”
송지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해 놓고 보니 정말 당장에라도 강국에서 원군을 청하는 사자가 올 것만 같았다.
“송 장군의 말은 한 치도 틀림이 없소이다.”
담개였다. 이제 막 집무실로 들어오다가 송지의 얘기를 듣고 찬성의 뜻을 표한 것이다.
“그건 진즉에 끝난 얘기였소. 이번 혼례는 강국이 원한 것이었으니, 그들이 군사 원조를 청하더라도 응하지 않기로 했지 않소?”
맹아가 끼어들었다. 편월이 혼례를 올리기 전에도 이 얘기는 한 번 거론됐던 적이 있었고, 그때 분명히 강국의 군사 요청은 거부한다고 결론 냈다.
담개도 그걸 모르지 않았고, 또 아직은 위휘군이 다른 곳에 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할 수도 없는 게 정규군 출신인 담개의 성품이었다. 이젠 정식으로 혼례까지 치렀으니 그 심정은 더욱 강해졌다.
그렇다고 당장 이렇다 할 대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우선 송지의 의견에 찬성하는 걸로 끝내려는 담개였다.
그런데 편월이 시원스레 하나의 의견을 개진했다.
“신경 쓸 것 없소이다. 당장 삼만 정도의 병사를 탄금성으로 파견해 두면 될 게요.”
“탄금성으로? 이왕 보낼 거면 강국을 직접 지원하는 게 좋을 듯하오만?”
“내년 보리 파종이 끝날 때까진 전쟁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탄금성에 병사를 보내 두면 적어도 우리 땅이 침범당하지는 않을 거요. 그거면 족해. 만약 강국의 패잔병들이 피해 오면 받아 주면 되고.”
“흐음.”
담개는 침음성을 토했다. 이런 미적지근한 조치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게 최선일 듯하다. 현재 위휘군은 파양주 땅인 윤주에서 벌써 세 개의 성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가겸후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두 개의 바위에 끼인 계란 신세를 면치 못할 터였다.
“가웅이, 아니 상 장군을 불러 주시오.”
“갑자기 상 장군은 왜 찾으시오? 요즘 간인들을 훈련시키느라 정신없이 바쁠 텐데.”
담개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상가웅은 간인을 훈련시키는 데 한 달의 기한을 약속받았다. 아직 한 달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찾으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이 급해졌소. 다소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각지로 간인들을 보내야겠소이다.”
그 말을 들은 송지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편월은 잊고 있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맹아가 편월의 말을 밖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원에게 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가웅이 불려 왔다. 그사이 심신의 고생이 심했는지, 상당히 꺼칠해진 얼굴이었다.
“간인들의 교육은 어느 정도 진척되었나? 바로 투입해도 무리가 없겠어?”
상가웅이 들어오자마자 편월이 재빨리 물었다. 인사를 갖출 틈도 없었다.
“아직은…….”
얼떨결에 상가웅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기한도 끝나지 않았고, 실제로 미진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하긴 한 달 만에 간인들을 완벽하게 교육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걸 물으시는 거요?”
“요즘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간인들을 좀 빨리 파견했으면 싶은데…….”
“단순히 사정을 염탐하는 거라면 어렵지 않겠지요.”
“그럼 가능하다는 얘긴가?”
“말씀드렸다시피 단순히 염탐만이오. 다른 임무를 줘서 보내는 건 아직 위험하오.”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그저 필요한 정보만 습득해 오면 돼.”
“그런데 보낼 곳은?”
“당연히 율천국과 강국, 허주지. 그리고 특별히 뛰어난 자를 골라 파양주에도 파견해야 되겠고…….”
“알겠소.”
명색이 위휘군의 간인들을 책임지게 된 상가웅이었다. 그 정도는 짐작했다는 듯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보낼 수 있나?”
“오늘 중으로 가능하오.”
“좋아. 그럼 준비해 줘.”
“그럼 소장은…….”
“아뢰오!”
얘기를 끝낸 상가웅이 물러가려고 예를 갖추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성으로 들어온 자들 중 하나가 주군께 배알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모용추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하옵니다.”
“모용 대인이?”
편월의 얼굴에 반색이 돌았다. 어떤 경우라도 모용추나 송용조 상단은 반가운 존재였다.
“어서 뫼시어라!”
편월을 제쳐 두고 두건득이 명을 내렸다. 본의 아니게 보급대를 맡았을 때 모용추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편월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곧바로 모용추가 불려 왔다.
“천한 장사꾼이 위휘군의 대장군을 뵈옵니다.”
모용추는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그 역시 곧 휘국이 세워질 것임은 알았지만, 아직은 가시화된 게 없기에 편월을 대장군으로만 불렀다.
“예를 차릴 건 없소. 어서 오시오. 기별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환한 웃음으로 편월은 모용추를 맞았다.
“파양주의 송 대인께 급변이 생긴 것 같아 돌아가는 중이옵니다.”
“뭣이? 송 대인께? 대체 무슨 일이오?”
지리적으로는 위휘군이 파양주에서 가까웠지만, 아무래도 정보는 상단을 장악하고 있는 모용추보다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편월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모용추는 그사이 영욱성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되도록 상세하게 전했다.
“그럼 곽 장군이 이끄는 곽가군도 위험에 처해 있다는 얘기요?”
묻는 편월만이 아니라 막주전 당시 곽준방의 지휘하에 싸웠던 잡가군 출신 무장들의 얼굴에 일제히 우려의 빛이 떠올랐다.
“그래서 소인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사옵니다. 아무래도 송 대인께도 위험이 닥칠 것 같아서…….”
“그래서는 안 되지!”
송지가 거친 어투로 모용추의 말을 잘랐다. 새삼 거론할 것도 없이 현재 위휘군의 모태가 된 정허군과 곽가군은 인연이 깊다. 그들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서야 심정이 편할 수 없었다.
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편월에게 쏠렸다. 곽가군의 위기를 안 이상 그 역시 가만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편월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모두를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안됐지만, 곽 장군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잘 헤쳐 나가실 거요. 송 대인도 마찬가지고.”
울컥하는 뭔가를 느꼈지만, 송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다른 장수들도 같은 기분일 터였다.
사람 개개인의 감정이야 어떻든 현실은 냉정한 계산을 먼저 요구한다. 지금 위휘군의 처지로써는 곽준방이나 송용조를 돕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기실 위휘군에 가장 시급한 건 강국의 문제다. 옹서지간이라는 관계를 떠나더라도, 가겸후가 증두신을 쳐 없앤다면 당장 뒤가 시끄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모용추도 그 점은 납득한 듯, 달리 서운한 기색을 띠지 않았다. 누구보다 많고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아, 소장은 주군의 명을 실행하러 가겠소.”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상가웅이 입을 열며 예를 갖췄다.
“소생도 이만 떠날까 합니다. 한 가지 청이 있사온데…….”
“뭐든 말씀해 보시오. 할 수 있는 거라면 모두 들어 드릴 테니까.”
“대장군께서 계시는 성에 우리 상단의 총단을 두고 싶사옵니다.”
“그 일이라면 달리 말씀하실 것도 없소이다. 우리 위휘군이 점령한 곳이라면 어떤 곳이라도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편월은 흔쾌히 승낙했다. 반겼으면 반겼지, 결코 거절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음이 촉급해서 소생은 이만 하직하올까 하옵니다. 다시 뵈올 때까지 옥체를 보중하시옵소서.”
모용추는 서둘러 하직을 고했다. 지금도 고초를 겪고 있을 송용조를 생각하면 날개가 없는 게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모용 대인도 몸조심하시오. 다음엔 보다 좋은 소식이 있을 게요.”
편월도 말리지 않았다. 말려서 될 일도 아니었다.
모용추가 떠나고, 그때부터 합진성은 부산스러워졌다. 탄금성으로 파견할 삼만의 병사들을 수배하기 때문이었다.
그 소란 속에서 각지로 파견되는 간인들도 은밀하게 성을 나섰다. 그중에서 편월이 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벽곡성엔 상가웅이 직접 가고 있었다.
오강이 이끄는 삼만의 위휘군은 이튿날 탄금성으로 떠났다.
2
황제가 상초국 병사들의 습격으로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증두신은 그냥 웃고 말았다. 강국과 허주의 압박에 시달린 가겸후가 지어낸 말이라 여긴 탓이었다.
그러나 가겸후가 직접 사만 대군을 이끌고 식운관으로 왔고, 거기에 연이어 율천국 병사들이 증원되자 더 이상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육우맹이 오만의 병사를 더 이끌고 옴으로써, 율천국은 십오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식운관에 투입한 것이 되었다.
그제야 증두신은 당황했지만, 이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상초국 대원수인 소촌을 불러 놓고 진상을 확인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소촌은 펄쩍 뛰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우린 가겸후를 노렸을 거요. 힘없는 황제가 아니라!”
그 말에 증두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고 해도 그런 작전을 전개한다면 무력한 황제보다는 가겸후를 노렸을 테니 말이다.
“이건 율천왕의 간교한 음모요! 이걸로 우리끼리 내분을 보인다면, 그건 바로 적이 바라는 일이오.”
흥분한 소촌은 침까지 튀기며 말했다. 아직은 이쪽 말에 서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말투도 좀 거친 편이었다. 진막에 나와 있으니 그 역시 무장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증두신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이게 가겸후의 음모든 아니든 그건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은 십오만에 이르는 율천국 군사들을 어떻게 막아 내느냐 하는 거였다.
사실 병사의 숫자로만 따진다면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상초국의 지원군과 강국의 전력을 기울이다시피 했으니, 이쪽도 십오만이나, 혹은 더 많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강국이나 상초국의 지원군을 깡그리 동원해야 그리된다. 수군을 비롯해서 다른 여유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그에 비해 율천국은 식운관에 투입한 병사들 외에도 아직은 여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융주에 동원한 오만의 병력에도 전혀 손댄 흔적이 없고, 허주의 조환이 노리는 영산에도 일만 이상이 새로 투입된 것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이건 상당한 위협이었다. 이쪽이 식운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율천국의 수군이 진파구를 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가겸후는 바로 그걸 노리고 식운관에 대대적인 병력을 투입한 건지도 모른다. 성동격서聲東擊西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말이다.
“수군의 복구는 어느 정도 되었소?”
아무래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기에 증두신은 물었다.
“대왕 전하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복구는 거의 다 됐습니다. 하지만 공세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준비가 되었다면 의당 공세를 취해야지.”
“창피한 말씀이오나, 이대로 나서 봐야 승산이 없습니다. 지난번의 전철을 밟을 뿐입니다.”
소촌의 말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증두신은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오죽했으면 일국의 대원수가 저런 말을 할까 싶어 오히려 측은해지기까지 했다.
“무슨 대책이 없겠소?”
증두신은 배석하고 있던 수군도독 송평에게 물었다. 해전에 대해선 문외한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현재로썬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적들의 궁노가 워낙 강력해서…….”
송평은 말꼬리를 흐렸다. 증두신이 원하는 건 해전에서 이길 방도를 묻는 것이지, 율천국 병기의 우수성을 말하라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우리나라 왕께서 대대적인 지원군을 준비하고 있으니, 이쪽에서 안내할 사람만 파견하시면…….”
끼어들었던 소촌의 말꼬리도 흐려졌다. 그다음이야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서로가 아는 일이었다.
“그럼 해전은 포기하는 거요?”
끈질기게 왕자 중 한 명을 보내라는 소촌의 말에서 벗어나기 위해 증두신은 화제를 돌렸다.
“당분간은 방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들이 상륙할 만한 해안에 병사들을 주둔시켜야겠지요.”
“그럼 식운관은?”
질문을 던지면서 증두신은 진즉 식운관을 탈환해 두지 못한 게 못내 후회스러웠다. 거기만 장악하고 있었다면, 병력 이삼만의 가치는 충분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 뒤에 하는 후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현 상황에서는 어떻게 싸워야 최선을 다한 것이 되는가만 남았을 뿐이다.
“이 장군, 해안을 끼고 있는 각 성에 총동원령을 내리시오. 성을 지키는 병사는 물론, 백성들도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준비를 하라고 이르시오.”
“존명!”
식운관을 치기 위해 동원한 병사들을 뺄 수는 없는 상태에선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조속한 시일 내에 조환이 영산을 탈환하고 율천국을 쳐야 되는데.’
길게 끌면 분명 불리한 싸움이다 보니, 증두신은 조환의 선전을 바라게 되었다. 그러다 남의 힘에 의지하려는 자신이 너무 나약해 보여 피식 웃고 말았다.
“전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부하 장수에게 증두신의 명을 전한 이환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소촌과 송평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는 은근한 압력이었다.
“소장들은 다시 한 번 병사들의 배치를 둘러보겠습니다.”
눈치 빠르게 소촌이 송평을 재촉해 진막을 빠져나갔다.
“무슨 말이오?”
“위휘군 삼만이 탄금성에 들어갔다는 보고이옵니다.”
“그들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지.”
증두신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만한 일은 군략을 조금이라도 아는 장수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그 군사들에게 지원을 요청해 보심이 어떻겠사옵니까? 남도 아니니 반드시 도와주리라 생각되옵니다만.”
“이 장군.”
증두신은 조용한 목소리로 이환을 불렀다.
“위휘군이 왜 탄금성까지만 왔겠소? 만약 우리가 청해서 들어줄 것 같았으면, 그들이 먼저 원군을 보내 주겠다고 했을 것이오. 그들은 탄금성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겸후를 압박할 수 있소. 더 많은 건 바라지 맙시다.”
“하오나 전하, 우린 그들이 대인성에 갇혀 있을 때도, 또 서쪽으로 세력을 뻗칠 때도 도와주었나이다. 그러니 이번엔 우리 쪽에서 도움을 청해도 수치가 될 건 없사옵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시오. 만약 이 장군이 편월이라면 어떻게 했겠소?”
“그야…….”
곧바로 대답할 것 같았던 이환의 말은 그러나 막히고 말았다. 자신이 편월이라고 해도 같은 조치를 취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처럼 비정한 난세에 강국을 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위휘군은 탄금성까지 들어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일을 도모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 위휘군은 양쪽으로 적을 맞을 형편이 못 되오. 그저 그들의 힘을 배경으로 두는 것으로 만족합시다.”
“알겠사옵니다.”
대답은 했지만, 이환은 다른 걸 계획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는 대로 탄금성으로 사자를 파견할 생각이었다. 물론 원군을 보내 달라는 말을 전하는 게 주된 목적이지만, 그게 안 되더라도 위휘군과의 연락만은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런데 이 장군의 생각은 어떻소? 상초국의 왕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면 우리가 율천국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소?”
묻는 증두신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지금까지 와 있는 상초국의 원군만 해도 그에겐 상당한 부담이었다. 거기다 상초국 왕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온다면 그야말로 숨통이 막힐 것만 같았다.
“분명히 도움은 될 것이옵니다. 하오나 저들이 지금도 왕자 한 분을 보내라는 둥 허튼소리를 일삼고 있는데, 저들의 왕이 직접 온다면 어떤 요구를 해 올지 소장은 염려스러울 따름이옵니다.”
이환도 증두신과 같은 생각이었다. 특히 그는 무장이기에 지원군이란 껍질을 뒤집어쓴 상초국의 위협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좀 쉬어야겠소. 겨울철 출병이라 병사들의 고생이 심할 게요.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그럼…….”
이환은 정중한 예를 갖추고 증두신의 진막에서 물러 나왔다. 그 순간 이환의 뇌리에 또 다른 생각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최악의 경우 대왕 전하와 가족만은 무사히 피신시켜야 한다.’
물론 이건 최악의 경우에 국한된 것이지만, 이왕 사자를 파견한다면 이 점도 분명히 해 두고 싶었다. 왕과 그 가족은 물론, 혹시라도 강국이 패했을 때 그 패잔병들을 거둬 달라고 말이다.
별것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이건 중요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위휘군이 가겸후에게 겁을 먹고 있다면 강국이 패했을 때 패잔병들은 갈 곳이 없어진다. 율천국과 싸울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내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환은 걸음을 재촉했다. 당장 싸움이 벌어져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기에, 뭘 하든 서두르는 게 좋을 터였다.
* * *
북쪽의 대지엔 찬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을 섣달 초이레 날, 화응을 비롯한 위휘군의 밀사는 추위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막주의 침사성으로 들어갔다.
이 침사성은 화응에게도 추억이 깊은 곳이었다. 목철린이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고 자결했을 때 그도 편월, 광운과 더불어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화응은 침사성에 들어오면 곧바로 광운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수문 장수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기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게 한 성의 성주를 만나기 위한 절차 중 첫 단계였다.
처음에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던 수문 장수는 워낙 자신만만한 화응의 태도에 주눅이 든 표정으로 안으로 달려갔다. 통보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곧 광운 장군께서 달려 나오실 걸세.”
화응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왔다는 걸 알면 광운은 틀림없이 만사 제쳐 두고 맞아들일 터였다.
그러나 기다림은 의외로 길었다. 수문 장수가 다시 나와 전갈을 했다고 알려 준 지도 벌써 반 시진이 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요? 오다 보니깐 흑암성 전투도 잠잠한 것 같던데.”
기다림이 지루해진 화응이 수문 장수에게 슬쩍 물었다. 곧바로 제대로 전갈을 했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큰 실례이기에 삼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문 장수의 태도도 다시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맞아들이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걸로 성주인 광운이 이 손님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꾹 참고 있던 위휘의 눈빛도 점차 사나워졌다.
“어떻게 된 거요? 오기만 하면 광운 장군이 맨발로 달려 나와 맞을 거라더니?”
위휘는 우선 화응에게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다분히 수문 장수를 의식한 얘기였다. 곧바로 그에게 저리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나도 이럴 줄은 몰랐네. 막주에서 고생하신다기에, 주군께서 우리를 보내 불원천리 달려왔건만…….”
“그러니 돌아갑시다. 벌써부터 이러니 만나 봐야 뻔할 뻔 자 아니겠소?”
“그건 안 되지! 어쨌든 우린 명을 받고 왔네. 뵙지도 않고 돌아간다면 체면이 서지 않을 걸세.”
화응과 위휘는 서로 언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이 먼 막주까지 오는 사이 서로 눈빛만 봐도 속내를 알 정도로 친해진 탓에 이런 연기도 할 수 있었다.
다른 세 사람도 죽이 맞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 같은 표정으로 화응과 위휘를 뜯어말렸다.
“우리끼리 이러면 어떻게 하겠소? 두 사람 모두 좀 참으시오.”
“그렇소. 이런 한심한 꼴을 보이면 막주의 사람들이 비웃을 게요. 그래도 명색이 광운 장군께서 아드님처럼 키운 분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으면서도 이것밖에 안 되냐고.”
이 말이 결정적으로 수문 장수의 마음을 흔들었다. 성주인 광운에게 아들과 다름없는 편월이 있다는 걸 익히 아는 까닭에서였다.
“이러지들 마시오. 내가 다시 한 번 안에 통보를 드리고 오겠소.”
말을 끝내자마자 수문 장수는 다시 안으로 달려갔다.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시간에 낯선 사람들이 언쟁을 벌이는 모습을 상관이 본다면 질책을 당할까 싶은 우려도 없지 않아서였다. 한 성의 성문이란 곳은 언제나 치안과 질서가 잘 유지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 모습에 위휘군의 밀사 다섯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 때 짓는 표정과 비슷했다.
“막주의 무장들도 귀여운 구석이 있구먼.”
“그러게 말이오.”
“임무가 끝나고 난 뒤에 저 사람과 술이라도 한잔… 어?”
우스갯소리를 하던 화응의 눈이 약간 커졌다. 좀 전에 들어갔던 수문 장수가 벌써 나오는 게 보였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수문 장수는 저쯤에서부터 고함을 질렀다.
“다섯 분을 빨리 모시라는 명이시오! 어서 소장을 따르시오!”
비록 목소리는 컸지만, 말투는 확 달라진 수문 장수였다.
다섯 명은 망설일 것도 없이 그 뒤를 따랐고, 너른 연무장에 접한 어느 건물로 안내되었다.
거기서 다른 무장 한 명이 밀사들을 환대했지만, 여전히 광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먼 길에 노고가 크셨습니다. 소장은 정웅鄭雄이라 하오.”
“광운 장군께서 혹시 편찮으시기라도 하신지요?”
정웅의 인사에 정중하게 답례하면서 화응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광운의 이런 응대에 속으로 조금 서운하기도 했고, 말처럼 진심으로 걱정도 되었다.
“아닙니다. 곧 나오실 겝니다. 그 전에 밀사 분들의 용건을 소장이 대신 들어 두라는 명을 받았소이다.”
‘용건을 다른 사람에게?’
화응의 표정이 가볍게 굳어졌다. 자신들 용건의 대부분이 군사적인 것이다. 거기다 편월이 개인적으로 광운과 유화에게 전하는 말도 있는데, 직접 들어 주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광운이 그랬다는 데야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냥 정웅에게 얘기를 할 수밖에.
“우리 위휘군과 막주군은 너무 동떨어진 곳에서 파양주를 공격하고 있으니 효과가 떨어진다는 우리 주군의 말씀이셨소. 이 점, 광운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그 고견을 듣고 오라는 명이셨소이다.”
“그럼 편월 장군께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되도록 동맹을 맺고 싶어 하십니다. 당장에 군사를 합쳐 싸우지는 못하겠지만, 되도록 서로를 향해 파양주를 치다 보면 의외로 일찍 실현될지도 모른다고 하셨소이다. 그게 안 되면 최소한 비슷한 시기에 파양주를 공격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말씀도 덧붙이셨소이다.”
“그렇구려. 대강의 뜻은 알았으며, 이제 다시 들어가 보고를 드리고 성주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준비한 게 없어 우선 차를 가져오라 일러뒀소이다. 맛없다는 말씀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시길.”
“오히려 환대에 감사드릴 따름이오.”
또 한 번 정중한 인사를 주고받은 후 정웅은 안으로 들어갔다.
“와, 놀랐소. 화 장군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정웅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위휘가 정말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말을 붙였다. 덩치는 정말 곰만 한—어쩌면 더 클지도—사람의 말투와 행동거지가 너무 세련되었다 싶어서였다.
한차례 피식 웃어 준 후 화응은 잠깐 딴생각에 잠겼다. 좀 전에 정웅한테는 군사적인 것만 얘기했다.
그런데 만약 광운이 앞으로도 계속 자신들과의 개인적인 시간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었다. 밀사의 용건은 모두 다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웅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되었다.
그때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고운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차를 내왔습니다.”
당연히 다섯 명의 시선은 그쪽으로 돌아갔다. 시비 둘을 거느린 기품 있는 여인 하나가 막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는 중이었다.
“저, 저…….”
그녀들을 본 화응이 내뱉은 첫 번째 소리였다. 그중에서 방금 예를 갖춘 여인이 바로 유화임을 알아본 까닭에서였다.
“화 아저씨.”
유화도 화응을 알아보곤 나직이 불렀다. 잔잔한 떨림이 깃든 음색이었다.
그렇게 굳어진 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록 같이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광운이나 편월을 매개로 한 그들의 정은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다시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별안간 화응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위휘군의 호기장군 화응이 삼가 유 아가씨께 인사를 올리오.”
“아니, 아저씨?”
유화는 물론 특히 시비들이 깜짝 놀랐다. 용맹하기로는 벌써 이 막주까지 이름이 닿아 있는 위휘군, 그중 호기장군이라는 장수가 이처럼 정중한 예를 갖춰 여자를 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들로선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시비들의 놀람이야 어쨌든, 화응과 함께 온 네 사람도 극공의 예를 갖췄다. 편월을 모시고 있는 그들이 주군의 여인 앞에서 편하게 서 있기만 할 턱이 없었다.
3
황제를 습격했던 상초국 포로들을 죽이는 책임을 맡았던 율천국 장수 독고기는 요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일이 항상 뇌리에 들러붙어 있는 탓이었다.
요즘 들어 독고기를 더욱 괴롭히는 건 바로 투항했던 상초국 병사들의 언행이었다. 그들은 분명 자신과 같은 말을, 그것도 아주 유창하게 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왕을 만나게 해 달라고 말이다.
이쯤 되면 누구나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그렇게 무참하게 학살하기 전에 적어도 한 번 더 심문은 해 봤어야 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그들 모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말았다. 비록 전시이고, 명에 의한 것이라지만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요즘 독고기는 술을 자주 마셨다. 그렇게 따졌을 때 자신이 가겸후와 같은 전장인 식운관에 투입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이처럼 자유롭게 음주를 할 수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오늘 밤도 독고기는 자신의 소속인 예비대 저물창貯物倉에서 몰래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여길 책임진 참장이 그와 절친한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고기가 반병 정도의 술을 마셨을 때, 창고 안으로 사람이 들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하지만 독고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시간에 여기에 올 정도면 바로 그 참장임을 잘 아는 탓이었다.
“어서 오게, 호 장군.”
“독고 장군, 벌써 시작하셨소이까?”
독고기의 목소리에서 취기가 느껴졌는지 호 장군이라 불린 호훈胡薰은 약간의 타박과 함께 그 앞에 털썩 소리를 내며 거칠게 주저앉았다.
“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말도 마시오.”
장수와 참장이라는 신분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의 말투는 달랐지만, 서로 대하는 점에 있어선 정말 스스럼이 없었다. 또한 속내를 알고 보면 직급이 높은 독고기보다 호훈이 훨씬 똑똑하고 배운 것도 많았다. 당연히 계산도 빨라 저물창을 맡게 되었겠지만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솔직한 말로 우리 같은 예비대야 할 일이란 게 뻔하잖소. 언제 투입될지 모르니 훈련이나 열심히 하고, 전장에 보낼 물자를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잖소.”
“그야 그렇지. 자, 한 모금 하게.”
“그런데 애써 비축해 뒀던 갑옷을 폐기하라니? 그래 놓고 또 급하면 나만 닦달할 것 아니오.”
“갑옷을 폐기시키라니? 이 전시에?”
“그러게나 말이오.”
거듭 생각해도 화가 난다는 듯 호훈은 술병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그게 사실이라면 큰 문제일세. 장수들의 회의 시 이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겠네. 허 참, 요새 우리 율천국엔 이상한 일만 벌어지는군.”
“뭐? 그럼 독고 장군도 황당한 경우를 당하셨소?”
“음, 아닐세.”
뭔가 얘기하려던 독고기는, 그러나 재빨리 입을 다물며 대신 술병을 물었다. 아무리 장수로서 명에 따라 실행한 일이라지만, 역시 상초국 포로들을 모두 죽인 건 입에 올리기 께름칙했다.
이렇게 되면 물어본 사람은 더욱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호훈은 벌써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의 것 역시 알고 있어야 서로 균형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상관이자 친한 친구 같은 사이라도 양보하기 힘든 문제였다.
“그러지 말고 말씀해 보시오. 내 이야기는 모두 들으시고, 장군만 입을 닫으시겠다는 거요?”
“술이 다 떨어졌네.”
“술이야 얼마든지 있소이다. 멀쩡한 갑옷을 갖다 버리는 판에 술 따위를 아낄까. 그러나 먼저 말씀을 들은 뒤에 내겠소이다.”
“맑은 정신으로 이야기하기 힘드네.”
“도대체 뭐기에……?”
호훈은 후끈 달아올랐다. 독고기는 결코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이처럼 자신과 술잔을 기울일 때는, 아주 중요한 군사기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줬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다르다. 벌써 취기가 올라 있음이 분명한데도 입을 열지 않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알겠소. 내 얼른 한 병 더 가져오리다.”
“한 병으로는 부족해.”
독고기의 말을 뒤로한 채 호훈은 재빨리 집무창 안을 달렸고, 이내 술은 물론 한 움큼의 육포도 가져왔다. 이건 식량에 속하는지라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물건임을 감안하면, 정말 궁금하긴 했나 보다.
그러나 독고기는 묵묵히 술병만 기울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 드시고 얘기부터 해 보시오. 그러다 장군께서 먼저 쓰러지시겠소.”
호훈은 독고기의 술병을 재빨리 낚아챘다. 그새 거의 비어 있었다.
사실 군대에서 만들어 저장하는 술은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독하다. 우선 인원이 많고 수송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기에 부피를 줄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병사들에게 지급할 때는 상당량의 물을 타야만 한다.
한데 독고기는 그 원액을 한 병 넘게 혼자 병나발 불었으니, 호훈이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염려대로 독고기는 벌써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게 마셨으니 멀쩡하다는 게 외려 이상하지만, 호훈은 얘기를 듣지 못할 것 같은 안타까움에 그의 따귀를 세차게 때렸다.
“장군, 말씀을 해 주셔야지. 이건 약속 위반이오.”
술을 갖다주고, 취하니 정신 차리라고까지 해 주는 호훈의 정성(?)이 통했는지 독고기는 쓰러진 채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지운산 사냥… 황제 폐하께서 습격당하셨…….”
“그건 나도 알고 있소. 근데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소?”
너무 작고, 취해서 연방 끊기는 독고기의 말이 호훈은 너무도 답답했다. 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의 입에 귀를 바짝 댄 것도 그래서였다.
“근데 상초국 놈들이 우리말을 유창하게… 오해라며, 전하를 만나게 해 달… 딸꾹, 근데 무시하고 싸그리 기냥… 끼꾹!”
“싸그리 기냥 어쨌단 말이오?”
“다 죽였어, 다아! 투항자, 딸국, 부상자… 사, 상초국 놈들, 도, 도망도 가지 않고… 투항해서 우, 우리말로 전하를 찾는데… 그래서 내, 가슴이, 가슴이… 웨엑!”
기어이 독고기는 구토를 해 버렸고, 그건 고스란히 호훈의 얼굴에 끼얹혔다.
독고기가 오늘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를 본의 아니게 확인하게 된 꼴이었지만, 호훈은 구토물을 내려다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게 더러운 경우를 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뇌리에 떠오른 전혀 다른 생각 탓에 그의 전신이 차갑게 굳어 버렸던 것이다.
‘상초국 놈들이 우리말을 유창하게 했다고?’
이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호훈의 빠른 두뇌는 취한 독고기의 몇 마디 말에 자극받아 헐레벌떡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자 호훈은 벌떡 상체를 세웠다. 귀와 머리에 묻어 있던 독고기의 토사물 잔해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폐기한 갑옷도 상초국 갑옷이었다!’
그랬다. 명에 따라 호훈이 울분을 토하며 폐기했던 것 역시 상초국의 갑옷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갑옷들이 저물창으로 들어왔을 때도 머리에 떠올랐다. ‘왜 하필 적의 갑옷을 들이느냐?’ 하고 물었을 때, 그 성능이 율천국 것보다 나아서라는 이유였다.
직무상 호훈은 그 숫자를 적지 않을 수 없었는데, 모두 오천 벌이었다.
그러려니 하고 잊고 지내다, 비번 날 하루 쉬고 다음 날 창고에 가 본 호훈은 깜짝 놀라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상초국 갑옷 중 상당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대로 두면 모가지가 달아날 노릇인지라 즉각 조사에 착수했지만,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게다가 그 일에 대한 문책도 없었다. 마치 애당초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제야 호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를 맡고 있다 보면 권력자의 착복을 왕왕 목격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재고 숫자만은 파악하고 있어야겠기에 알아봤더니, 남은 상초국 갑옷은 채 이천 벌이 되지 않았다. 만약 그뿐이었다면 권력자의 직권을 이용한 ‘제 배 채우기’ 한판으로 치부하고 호훈의 뇌리에서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 방금 들었던 독고기의 얘기가 보태지면, 어떤 이야기의 밑그림 하나가 그 윤곽을 드러낸다. 물론 이건 독고기의 말이 전적으로 맞았을 때 가능한 얘기였다.
그 점에 있어 호훈은 독고기를 믿었다. 입이 무겁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없는 얘기를 지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지금 독고기는 엉망으로 취한 상태였다. 취중의 말이 모두 진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저렇게 취해서 횡설수설하는 상태에서의 거짓말은 있을 수 없다는 게 호훈의 판단이었다.
‘이건 역모다!’
비교적 명석한 두뇌를 가진 호훈이 이처럼 무서운 결론을 쉽게 내린 건 또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황제가 사냥 도중에 상초국의 기습을 받아 중태에 빠졌다는 사실은 천하 만민이 모두 안다. 그러니 그 뒷얘기도 무성했고, 호훈 역시 나중에 들은 얘기 중 하나가 상초국 병사들의 숫자가 삼천이라는 것이었다. 없어진 갑옷의 숫자와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호훈의 전신은 걷잡을 수 없이 후들거렸다. 이건 율천국의 상층부에서 개입한 냄새가 너무나 짙다.
그러니 만일 자신처럼 이 일이 황제 시해와 역모에 관련된 걸 알고 있거나, 혹은 냄새라도 맡고 있는 자가 있다면 살려 둘 턱이 없다.
누가 알겠느냐고? 두 사람만 비밀을 지키면 된다는 말은 모자라도 턱없이 부족한 생각의 소산이었다. 오늘만 해도 독고기는 술에 취해 모든 것을 나불거렸다. 내일 또 다른 사람을 붙들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의 주사는 최근 들어 더욱 심해지는데…….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대로 영영 사라지는 것 말이다.
그러자니 독고기가 마음에 걸렸다. 저처럼 취해 있는 사람을 업고 갈 수도 없고, 두고 가자니 언젠가 저 입 때문에 처형을 당할 게 뻔했다. 자신이 얘기했던 상초국 갑옷 삼천 벌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불리하게 적용될 게다.
문득 호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그 자릴 떠났다. 이게 빠른 두뇌를 가진 그의 선택이었고, 지금으로썬 그저 독고기에게 행운을 빌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 호훈의 모습은 율천국 내에선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 *
황제의 피습 소식을 가장 늦게 들은 곳 중 하나가 바로 조천성이었다. 지리적으로 멀고, 또 호윤천군에 포위를 당하고 있는 까닭에서였다.
안된 일이지만, 황제의 중태 소식은 곽가군에 있어 멋진 호재라고 팽요는 생각했다. 황태자의 국상이 끝나자마자 들은 그 소식은 마국립의 죽음을 그만큼 희석시킬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현재 파양주 각 성의 성주들은 마국립의 죽음을 모르는 상태다. 호윤천은 어렴풋이 의심하고 있겠지만, 이젠 그것도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호윤천도 당분간은 갈피를 못 잡겠지.’
그사이 이 난국을 타개하지 못하면 천추의 한이 되리라는 게 팽요의 생각이었다.
지금쯤이면 파양주 아니라 온 천하의 성주들이 들썩이고 있을 거라는 게 팽요의 판단이었고, 그에 따라 한 가지 계책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단 천하는 제쳐 두고, 파양주만 따져도 크고 작은 성이 부지기수다.
개중에서 남달리 황실에 대한 충의가 두터운 성주라면 당장 상초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할지도 모른다. 가겸후에게 협조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비교적 냉정하게 계산을 하는 자라면, 후사 없는 황제가 죽의 뒤의 천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팽요가 노리는 건 바로 전자, 즉 충성심이 있는 성주들이었다.
계획은 이렇다. 우선 곽가군이 먼저 상초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 그렇게 되면 그 적은 자연히 그들을 끌어들인 강국이 된다.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각 성에 격문을 날린다. 감히 황제 시해를 기도한 상초국을 토벌하고자 하니 뜻 있는 자는 궐기하라는 내용이 될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바로 호윤천에게 휴전을 제의하는 일 말이다.
어차피 곽가군이 상초국을 치자면 조천성을 나갈 수밖에 없다. 그때 길을 열어 달라는 게 휴전의 조건이다.
호윤천은 망설일 수밖에 없으리라. 덮어놓고 휴전 제의를 무시하기엔, 황제의 피습 사건은 너무나 큰 일이다.
그때 힘을 발휘하는 게 바로 충성스러운 성주들이다. 그들은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호윤천에게 압력을 가해 조천성의 포위를 풀라고 할 게다.
그 압력에 못 이겨 호윤천이 포위를 풀든 말든 곽가군으로선 하등 손해날 일이 없다. 아니, 어떤 경우든 커다란 이득을 보게 된다.
우선 포위가 풀리면 그다음부터는 이쪽의 뜻대로 천변만화를 기도할 수 있다. 일단 성에서 나가 광운 장군이 이끄는 막주군과 합세하든, 선포했던 대로 서진을 해서 강국으로 진격을 하든 말이다. 가는 길에 편월과 합세해도 좋고.
가장 좋은 건 호윤천의 뒤통수를 치는 거지만, 그건 곽준방의 성격상 바랄 일이 못 된다.
만약 호윤천이 계속 고집을 부려 포위를 풀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그땐 벌써 성주들의 성향이 모두 드러났을 터이니, 곽가군의 취지에 동조하는 성주들과 연합해서 이 싸움을 보다 재미있게 끌어 갈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역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가 됐든 팽요의 계획에서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제가 되는 건 기회주의적인 성주들이었다. 그들은 아마 이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어 어느 한쪽의 승산이 뚜렷해질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게 뻔했다.
물론 마국립의 죽음은 여전히 곽가군의 진퇴를 어렵게 만드는 항쇄項鎖로 남는다.
하지만 팽요가 계획한 대로만 일이 진행된다면 파양주의 각 성 성주들은 둘로 나뉠 것이다. 나뉘어서 서로의 입장을 얘기하느라 언성을 높이는 가운데 마국립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그리 크게 작용하지 못할 게 뻔하다.
‘서너 명의 성주만 응해 줘도 재미있겠는데.’
확실하게 곽가군과 뜻을 같이하는 성주가 서너 명만 있다면, 그들에게 호윤천의 배후를 치라는 역할을 맡길 수도 있다.
팽요는 머릿속으로 파양주 성주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과연 어떤 사람이 자신들에게 동조를 해 줄까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팽요는 의자에서 펄쩍 뛰어 일어섰다. 자신조차도 그만큼 놀랄 정도의 생각이 퍼뜩 스쳤기 때문이었다.
‘만약 호윤천도 상초국을 치겠다고 나선다면?’
팽요는 스스로를 매섭게 질책했다.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간과한 채 자기 계획의 달콤함에만 빠져 있던 자신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한심스러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각 성주들의 의중이야 어떻든 파양주는 하나로 뭉칠 것이고, 곽가군은 무조건 귀대라는 명분 정도로 호윤천에게 투항을 해야 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파양주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니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지경에 처할 게 분명하다.
팽요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엔 어떻게 하면 호윤천이 참전을 선포하지 않게 하느냐는 것에 대해서였다.
사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상대가 호윤천이라는 희대의 용장이자 지장이고 보면 어지간한 계책 정도는 단박에 꿰뚫어 보리라. 뭔가 그의 의표를 푹 찌르고 들어갈 비상수단이 필요하다.
고민에 잠겨 있던 팽요가 자신의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친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다. 마 공자의 죽음을 이용한 고육계!’
바로 이게 팽요가 부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어차피 마국립의 죽음은 알려질 게다. 그걸 조금 이용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을 터였다.
게다가 이 계책이 성공한다면, 아직 매장도 하지 못한 마국립의 장례를 적의 손으로 훌륭하게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역시 곽준방이었지만, 이 경우 팽요는 그도 모르게 일을 진행시킬 작정이었다.
누굴 이 계획의 주연으로 내세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길게 하지 않았다. 바로 자신이 호윤천의 품속으로 뛰어들 결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혼자만 알고 계획을 진행시킬 수는 없기에, 팽요는 발길을 서둘러 여상계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