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룡동면猛龍冬眠
1
혼례를 치렀다고 해서 편월의 생활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들판 한복판에서 둘만의 예식을 올린 후, 단 한 번도 증화강이 기거하는 내전엔 발걸음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편월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병력을 오만으로 늘리는 일이었다. 탄금성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의 성—윤주성, 합진성, 포란성—은 올해 모두 전쟁을 치른 곳이었다. 거둬들인 세미가 작년에 비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모집한 병사들의 숫자는 벌써 칠만에 이르렀고, 나아가 십만을 양성한다고 해도 재정적으로 큰 무리가 없다는 보고가 있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잡가군이었다. 천하가 다시 요동칠 기미를 보이자, 고향에서 괭이질하던 그들은 묵혀 두었던 창과 갑옷에 앉은 먼지를 떨고 달려온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편월은 그들 모두를 수용했다. 다만 잡가군이란 편제는 두지 않고, 정규군으로 대우해 주겠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위휘군의 주력인 정허군도 같은 출신이니 지당한 처사인지도 모른다.
이 처사는 묘하게도 새로 지원한 병사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비록 잡가군에서 받는 수당보다 적은 군료지만, 일단 전투 시 화살 받이 신세는 면할 수 있게 된 까닭에서였다.
개중에는 순전히 돈만 생각해서 불만을 가진 자들도 없지 않으리라.
하지만 위휘군의 대장군, 게다가 이젠 주군으로 불리는 편월이 전설적인 잡가군 출신이란 점에 매료되어 따른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처럼 병력이 착실히 불어난 것은 순전히 개묵 덕택이었다. 그동안 방만하게 운영되던 재정의 체계를 다잡고, 각 성에 비축되어 있던 물자와 재화를 유효적절하게 운용한 결과였다.
편월이 크게 반가워한 건 물론이었다. 전쟁을 치를 때마다 병력이 부족해 병사들 개개인의 투지에 의존해야만 했는데, 이제 그 오랜 숙원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다음으로 편월이 중점을 둔 건, 이미 점령한 성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한 성을 점령했다는 건 거기에 딸린 백성들도 함께 다스려야 한다는 얘기다. 단순히 싸움만 잘하는 장수를 배치해서는 도저히 유지해 나갈 수가 없다.
게다가 포란성에서 탄금성까지 동서로 금을 죽 그어 보면, 그 길이가 물경 천여 리에 이른다. 각 성들 사이의 보다 원활한 연락 체계도 만들어야만 한다.
그 일을 위해 편월은 담개를 윤주성의 성주로 임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담개는 나이를 들어 그걸 고사했다. 보다 젊은 사람으로 기용하라는 얘기였고, 송지도 그에는 반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편월은 강숙을 윤주성에 넣었다. 백성을 다스리는 능력은 의심스러웠지만, 허주도 강국도 결코 마음을 놓을 상대는 아니었기에 취한 인선이었다. 그라면 몸이 불편해서 탄금성에 남은 지두룡과 더불어 동쪽을 튼튼히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이쯤 되니 건국에 대한 얘기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땅의 넓이야 어떻든 십만의 병사를 양성한다면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군벌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나라를 세워 스스로 왕이라고 칭해도 하등 손색이 없다는 얘기다. 그건 편월이 바라기도 했던 일인지라 즉각 추진되었다.
그러나 마음만으로 나라 하나가 뚝딱하고 서는 건 결코 아니었다. 우선 법을 제정해야 되고, 그 법을 집행할 기관을 만들고, 수장首長을 임명해야 한다.
바로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까지 위휘군은 무장들 일색이었다. 필요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서는 백성을 다스리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군사보다는 정치에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당장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걸로 인해 편월은 잠시 잊고 있었던 계천자를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그가 얘기했던 좌괴란 이름이 기억난 것이다.
편월은 이상하게 이 좌괴란 인물에게 신뢰감이 들었다. 거규가 마음을 터놓고 사귀는 계천자가 설마하니 이상한 사람을 추천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좌괴를 맞기 위해 누굴 보내며, 어떤 예를 갖춰야 할지에 대해 논의하려고 몇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사실 좌괴에 대한 얘기는 비교적 일찍 마무리가 된 셈이었다. 계천자가 거규의 추천에 의해 나왔으니, 좌괴에게 가는 건 거예홍이 적임이라고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심때가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건 편월의 작은 욕심 때문이었다. 그는 이 겨울 동안 아직 점령하지 못한 윤주의 다른 성에 간인을 심어 두고 싶어 했다.
말이야 쉽다. 하지만 위휘군은 간인을 양성한 적이 없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윤주에 있는 성 전체에 파견하자면 이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여러 장수들이 대놓고 반대를 하지 않는 건 그 일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한 번씩은 싸워야 하기에, 미리 사정을 정탐해 둘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담 장군은 아까 나가셔서 왜 여태 안 오시는 걸까?”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송지가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편월이 간인을 파견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마자 다녀올 곳이 있다며 나간 담개가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곧 오실 거요. 그보다 식사부터 하고 계속합시다. 배가 고파서 말하기도 힘들구려.”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때로군. 여기로 가져오라고 해도 되겠소?”
두건득의 말을 받아 맹아가 편월에게 물었다. 요즘 들어 장수들은 대개 연무장에 딸린 공용 식당에서 병사들과 같이 먹었고, 편월은 내전에서 따로 식사를 가져오곤 했다. 그래서 물은 것이었다.
“좋도록!”
편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례를 치른 탓인지 그 언행에 한층 무게가 더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에 상관할 바가 없는 맹아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맹아가 빠지자 좌중의 화제는 확 바뀌었다. 지금까지 간인을 파견하자는 문제에서 반전되어, 위휘군에 종군하고 있는 무장들과 병사들의 가족들을 데려오자는 것으로 얘기가 진행되었다.
사실 이건 석축산에 영채를 세웠을 때 이미 한 번 거론된 얘기였다. 송용조 상단의 힘을 빌려 어느 정도 진척을 보기도 했지만, 그 후 연이어진 전투로 인해 지지부진해졌을 뿐이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편월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다들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 어떻게든 다시 합류하려고 하는데, 자신은 이번에 아내를 맞았다.
‘맹 장군도 아내를 맞을 나이가 됐고… 다른 장수들은 어떨까?’
애당초 나이가 있던 몇몇 장수들은 어디에든 가족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맹아나 강숙, 오강 같은 장수들은 혼례를 치렀는지 어쨌는지도 알지 못하는 편월이었다. 그 점이 조금은 미안했기에, 자세히 알아봐서 아직 혼례를 치르지 못한 장수들은 짝을 찾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무턱대고 싸움만 잘해서 될 일은 아니로군.’
애당초 편월은 이 겨울 동안엔 어떤 전쟁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병사가 늘어나면 그들을 훈련시키며, 새로 점령한 각 성의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심어 줄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기를 이용해 무장들이나 병사들의 가족들을 모두 데려오는 것도 좋은 일일 듯했다. 확보하고 있는 성이 네 개나 되니, 수용하는 건 문제가 없을 터였다.
“송 장군, 우리 중에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장수들이 있는지 알아봐 주시오.”
불쑥 내뱉어진 편월의 한마디에 실내가 조용해졌다. 너무 뜬금없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지는 이내 편월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그보다 자신 역시 그 점에 대해 무심했다는 반성이 먼저 가슴을 두드렸다.
하긴, 이건 누굴 탓할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몰려 있으니, 아무리 전우라고 해도 타인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건 금방이라도 알아볼 수 있소. 저녁까진 보고드리리다.”
송지가 말을 마쳤을 때, 담개가 누군가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어?”
담개가 데려온 사람을 본 편월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은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상가웅이었던 것이다.
그사이 상당히 변한 상가웅의 모습이었다. 원래가 편월보다 두 살 많았으니 성숙한 건 그렇다 쳐도, 유순하기만 했던 눈매는 찾아볼 길이 없고,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는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몸도 상당히 탄탄해 보이는 게, 그동안 무예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좋아 보이는군. 잘 있었나?”
“주군을 뵈오.”
상가웅은 편월에게 정중한 군례를 갖췄다. 사뭇 어색하기만 했던 예전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우리 사이에 너무 딱딱하게 예를 갖출 건 없어.”
말은 상가웅에게 했지만, 편월의 시선은 담개에게 향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것이었다.
“대인성에서 적중 돌파를 감행해서 우리가 석축산에 들어갔을 때 상 공자가 소장을 찾아왔소. 아무래도 전투는 자신이 없으니, 군에서 다른 할 일이 없겠느냐면서…….”
“그래서?”
편월은 귀가 솔깃해졌다. 평생 군과는 인연이 닿지 않을 것 같던 상가웅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정말 까맣게 잊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담개를 찾아가 할 일을 물었다니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소장은 처음에 상 공자에게 병법을 가르칠 작정이었소. 그런데 그것도 틀렸더랬소. 이미 상 공자는 어느 정도 병법을 알고 있었으니, 더 가르칠 게 없었소. 결국 용인술用人術, 즉 간인을 부리는 법을 가르치기로 했소. 이건 적성에 맞았는지 그동안 침식도 잊고 공부를 하더이다.”
“호오!”
편월은 탄성을 토했다. 이런 걸 선견지명이라고 한다면 다소 무리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편월의 뇌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건 바로 그 한마디였다. 비록 말 그 자체가 온전히 떠오른 건 아니고, 뜻만 그렇다는 얘기였지만 말이다.
“그러니 상 공자에게도 일할 기회를 줘 보시는 건 어떻겠소? 소장의 생각으론 믿어도 좋을 듯하오만.”
담개의 얘기가 끝났을 때, 편월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상가웅을 돌아보았다. 체구는 커졌다지만, 전장을 떠돈 장수들에게서 풍기는 아릿한 살기 같은 건 여전히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만만히 볼 수 없는 뭔가가 확연히 느껴졌다.
저게 바로 기세라는 걸 편월은 잘 알고 있다. 뭔가에 자신감을 가진 사람에게서만 발출되는 무형의 힘이었다.
“얘기는 대충 들었고, 뭐가 필요한가?”
편월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간인을 양성하고 운용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었다면 담개든 상가웅이든 이처럼 당당하게 나설 수 없었으리라. 자신은 그저 필요한 걸 지원만 해 주면 된다.
“한 달만 말미를 주시오.”
“뭐? 그것 가지고 되겠어?”
상가웅의 대답에 편월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급한 시기에 빨리 일이 추진되면 좋지만, 너무 서두르면 애당초 안 한 것보다 못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한 달이면 충분하오. 단, 인원은 소장의 마음대로 차출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그럼 정말로 한 달 안에 인원을 선발하고 훈련시켜서 파견할 수 있다는 말이야?”
“만약 한 치라도 어김이 있다면 군령에 따라 처벌해 주시오.”
군문에는 농담이나 거짓 약속이 있을 수 없다. 편월은 그걸 확인하려는 듯이 상가웅을 빤히 쏘아보았다.
상가웅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차고 예리한 빛을 반짝이는 눈동자에 더욱 힘을 주며 마주 보았다.
“좋아! 한 달이다. 그리고 이왕 간인들을 파견한다면, 장수들이나 병사들의 가족들에게도 연락이 닿게끔 하는 게 좋겠군. 그렇게 할 수 있지?”
“문제없소이다.”
“수고했소, 담 장군. 가웅이도 이리 와 앉아. 오늘은 오랜만에 식사나 같이하지.”
“호칭을 고쳐 주시오.”
“그러는 게 좋겠소. 상 공자도 이젠 어엿한 위휘군의 장수 중 한 명이니까.”
“담 장군께서도 앞으로 그 공자란 호칭은 말아 주셨으면 하오.”
“뭐라고? 허허허.”
자신에게 맞받아친 상가웅의 말에 담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한편으론 가슴이 뜨끔해지기도 했다. 편월에겐 호칭을 고치라고 해 놓고서, 정작 자신은 그러지 못한 점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럼 소장은 이만 물러가겠소.”
“아니, 왜? 이제 곧 식사가 나올 텐데…….”
“촌각이 아깝소. 지금부터 바로 일을 시작하겠소.”
“맡겼으면, 마음껏 해 보도록 그냥 두시오.”
곧 식사가 나올 참에 물러가겠다는 상가웅에게 편월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담개까지 거들고 나서자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젊은 사람들은 무섭구려.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또 달라.”
상가웅이 물러간 쪽에 시선을 둔 채, 송지가 감탄사를 토했다. 그는 군감이었으니 간혹 상가웅을 본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을 감탄시키지 못하는 젊은이라면 쓸모가 없지. 어서 성장해야 우리도 편하게 쉴 수 있지 않겠소. 이젠 갑옷이 너무 무거워.”
“엄살 그만 부리시오. 아직도 전장을 누비시는 모습을 보니 정정하시더구만. 나야말로 이젠 늙어서 폐물이 돼 버린 것 같소이다.”
송지와 담개가 상가웅을 두고 자신들이 늙었음을 한탄하는 얘기를 계속했다.
얼핏 들으면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얘기지만, 편월은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에게 어서 큰 인물이 되라는 채찍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주군께선 초야는 치르셨소?”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탓일까. 오강이 불쑥 큰 소리로 물었다.
편월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까닭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오 장군, 강국의 공주는 이제 열세 살이시오. 아직 부부 관계를 치르는 건 무리일 게요.”
편월을 대신해 서진청이 오강의 말을 받았다. 그저 떠오른 대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 것이었다.
“여자의 성장은 남자보다 빠르오. 그러니 열셋이라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닐 게요.”
“아니, 송 장군까지?”
옆에서 끼어든 송지에 말에 서진청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무리 주군인 편월의 일이라지만, 그 부부간의 일을 입에 올리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부부간의 일도 전쟁만큼이나 부지런히 영위해야만 되는 거요. 얼른 아드님을 보셔야지.”
“아!”
이어진 송지의 말을 듣고서야 서진청은 납득한 표정이 되었다.
난세를 사는 사나이들의 목숨은 짧다. 그러니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리고 많은 자손을 봐 두는 게 좋다. 거기다 아들이라면 금상첨화다.
그걸 여자 입장에서 보자면 약간 우습게 해석된다. 남자들은 죄다 전쟁에 나가 죽거나 병신이 되기 십상이니, 항상 남자들의 숫자가 부족하다. 그러니 한 남자에게 여러 명의 아내가 있는 것도 자연스레 용인되고, 그중에서 아들을 낳아 가계를 잇는 게 최대한의 소망인 여자들이 많아졌다. 거기에 맞추기 위해 몸의 성장도 그만큼 빨라진다면 너무 억지일까?
어쨌든 그건 엄연한 사실이니 증화강의 나이만 생각하고 방치해 둬선 될 일이 아니다.
서진청도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편월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편월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혼례는 치렀지만, 지금까지 그건 다만 정략의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받아들인 걸로 충분하다고 치부해 버렸다는 얘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월의 가슴에 여자란 존재로 들어앉아 있는 건 유화뿐이었다. 정허군의 이름으로 영욱성을 떠나기 전에 치렀던 그녀와의 첫 경험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데, 어떻게 다른 여자를 안아 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편월은 단 한 번도 자식을 낳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광운이 그랬듯이, 자신 역시 전장을 떠돌다 인연이 닿는 애가 있으면 그렇게 키우리라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불현듯 떠오른 의문 하나에 편월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이미 유화와는 한차례 관계를 가졌다. 그 일로 그녀가 아이를 가진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아이가 생기는가 정도는 편월도 익히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 식사요!”
맹아를 선두로 숙수熟手들이 음식을 들고 들어왔지만, 편월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기를 보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껏 편월은 갓난아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아이를 볼 때의 느낌이 어떨까?
“주군 것은 없소!”
“응? 뭐, 뭐라고?”
마치 고함을 지르는 듯한 맹아의 말에 편월은 화들짝 생각에서 깨어났다.
“왜 그리 멍청하게 계시오? 주군의 식사는 내전에 준비하라고 일러뒀단 말이오.”
“번거롭게 그럴 게 뭐 있소. 내 것도 여기로 가져오시오.”
“글쎄, 없다면 없는 거요. 그러니 내전으로나 가 보슈.”
맹아는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편월로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맹아는 분명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마치 안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혹시 장수들이 짜고 이러는 게 아닌가 싶어 다시 한 번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누구의 얼굴에서도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산전수전 다 겪은 무장들이 짰다고 해서 표시를 내겠느냐마는.
“맹 장군의 말이 맞소. 앞으로 식사와 잠은 내전에서 하시는 게 좋겠소.”
송지까지 거들자 편월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쯤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짠 게 분명하다.
편월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장수들이 한통속이 되어 하는 일에 괜히 버텨 봐야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
“들어간 김에 좀 쉬고 있겠소. 얘기가 마무리되는 대로 보고해 주시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뱉으며 편월은 몸을 일으켰다. 이게 오히려 장수들의 의표를 찌르는 일이 될 터였다.
“편히 쉬시오.”
“다른 일은 걱정 마시고, 푹 쉬고 계시오. 보고는 제때에 드릴 테니.”
장수들이 편월의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씩 했다. 그러고는 왁자하게 떠들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편월은 내전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슴속에선 벌레 한 마리가 꼼지락거리는 것처럼, 묘한 가려움이 느껴졌다.
어쨌든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2
곽가군의 영욱성 공격으로 숨통이 트인 사람 중 한 명은 바로 송용조였다.
물론 군자금을 대라는 호윤천 부자의 압박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가 곽준방을 치기 위해 조천성으로 병사를 몰고 가 버리자 행동의 자유는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자 송용조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놀라운 활동력을 보였다. 이미 심복인 모용추를 통해 상단의 중심은 탄금성으로 옮겨 둔 상태였지만, 그래도 할 일은 많았다.
그중 첫 번째가 파양주에 산재해 있는 금광의 덕대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일이었다. 누가 뭐래도 파양주에서 가장 가치가 나가는 건 금과 철이다. 그것만 꽉 쥐고 있으면, 설사 어느 군벌이 대두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게 없었다.
그다음으로 치중한 건 천하에 산재해 있는 송용조 상단과의 연락망을 더욱 긴밀히 갖추는 것이었다. 상단의 정보는 그 정확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그 전달의 빠르기 역시 세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가만히 앉아서 천 리 밖의 일을 알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 일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천하가 다시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 들 것만 같다는 게 송용조의 판단이었다. 이럴 때 자칫 한발 잘못 디디게 되면 그동안 쌓았던 기반 전체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기 십상이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선 정확한 정보를 항상 입수해야만 한다.
요즘 들어 송용조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건 위휘군의 움직임이었다. 편월에게 호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길을 걸을 낌새가 보이면, 당장 다른 군벌과 손을 잡을 용의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우선은 조천성의 곽가군을 돕는 게 좋다. 호윤천 부자의 주의를 그곳으로 쏠리게 만들면, 사주까지 진출한 광운 장군의 북진도 빨라질 테지.’
처음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혼란도 반길 만한 일 중 하나다. 그만큼 부를 축적할 기회가 많이 때문이다.
그러나 송용조 정도의 대상인들은 어떻게든 천하가 안정되길 바란다. 이미 이윤을 낼 수 있는 모든 길을 장악하고 있으니, 안전을 도모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천하는 송용조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가려고 하고 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일찌감치 큼지막한 싸움을 벌여 누가 되든 한 사람이 틀어쥐는 게 그로선 가장 좋은 일이 된다. 그걸 위해 우선적으로 지원해 줄 사람으로 떠오른 게 바로 편월과 광운이었다.
문제는 편월과 광운이 가장 우선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보다 빨리 이 어지러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면, 그들과 적대 관계에 있는 군벌들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게 송용조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게 천하를 더욱 큰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송용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호윤천 부자가 조천성으로 출병한 지금이 영욱성에서 탈출할 가장 좋은 기회란 걸 알면서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안전을 이처럼 도외시하는 건 일종의 속죄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송용조는 서신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파양주에 흩어져 있는 각 성의 성주들 중 자신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낼 것으로, 곽준방을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게 정 어려우면 적어도 호윤천 부자에게서 군사를 내라는 요청이 와도 응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곽가군은 한숨 돌릴 수 있으리라.’
이 서신은 늦어도 내일 저녁이면 각 성으로 전달되리라. 그걸로 당장 해야 될 가장 시급한 일은 끝내는 셈이었다. 앞으로 한 달 정도만 호윤천 부자를 조천성에 묶어 둘 수 있다면, 그사이 막주의 광운은 사주 전체를 수중에 넣고 직접 파양주에 압박을 가할 수도 있을 터였다.
준비된 붓을 든 송용조는 신중하게 서신을 적기 시작했다. 은혜를 입혔다고 해서 너무 고압적인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마냥 무르게만 쓴다면 이쪽이 가볍게 보일 우려가 있다. 한 줄 한 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시간은 많이 걸렸다. 송용조가 붓을 놨을 땐 벌써 짧은 초겨울 해가 서쪽으로 한참 치우친 뒤였다.
그래도 서신 내용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송용조는 다시 한 번 읽어 볼 생각도 않고 꼼꼼하게 봉했다.
“누구 있는가?”
“대령이오!”
송용조의 부름에 응한 사람은 모용추가 탄금성으로 간 이후로 측근에 부리고 있는 율우栗宇라는 마흔 안팎의 장한이었다.
“지시해 뒀던 사람들은 준비가 되었는가?”
“대인의 하명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네. 이 서신을 최대한 빨리 정해진 성으로 보내도록 하게. 그걸 위해서 모든 편의를 제공토록 하고.”
“알겠습니다.”
송용조가 내민 봉서를 공손하게 받쳐 든 율우는 조용히 물러갔다.
그러자 문득 썰렁한 한기가 송용조의 전신을 엄습해 왔다. 피부가 느끼는 한기는 결코 아니었다. 실내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다 싶은 화로가 놓여 따뜻한 훈기를 발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건 분명 외로움이었다. 평생 상도商道에만 뜻을 두고 성가成家를 하지 않았기에 송용조에겐 자식이 없었다. 평생에 걸쳐 이룩한 기반을 송두리째 건 도박을 앞두고 보니, 그 점이 새삼 뼈에 사무쳤다.
‘나도 늙었군. 이런 삿된 생각을 하다니.’
천하의 재보는 일개인의 영달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고, 곧 천하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걸 젊은 시절에 깨달은 송용조였다. 그래서 계산하기도 힘들 정도의 재산을 모았으면서도, 자신은 항상 엄격하게 절약을 실천해 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자식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건 역시 나이 탓이라고 송용조는 치부했다.
“차를 가져오너라.”
송용조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밖을 향해 지시했다.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선 한 잔의 차를 조용히 음미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차가 나왔고, 그걸 다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흐트러진 송용조의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해괴한 일이로고…….’
송용조는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진 자신이 부리는 사람들 모두를 한 가족으로 생각했다. 그중에서 특히 모용추와 율우는 친자식 이상의 애정을 가지고 대했으며, 가르쳤다.
그런데 오늘 불현듯 천지간에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는 건 왜일까?
‘나 역시 범상한 장사치에 불과했던가?’
지금껏 마음먹은 일을 추진함에 있어 단 한 번도 재산을 아낀 적이 없었다. 어차피 재화는 천하의 것이니, 내 손에서는 빠져나가더라도 다른 사람을 살찌울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고 여겼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뭔가를 시도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비록 천하의 혼란을 보다 빨리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라 해도 역시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그동안 축적해 뒀던 것들이 아까워진 건 아닐까?
“누가 있는가? 가마를 준비하라!”
돌연 송용조는 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해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으니, 외출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호윤천 부자가 없는 지금, 이 정도 자유는 허용되었다.
가마는 이내 준비되었고, 송용조는 그날 끼니도 거른 채 밤이 이슥해지도록 영욱성 내를 돌아다녔다.
* * *
조천성을 둘러싸고 있는 호윤천 부자와 유웅의 군세 외에도, 곽가군을 괴롭히는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마국립의 죽음이었다.
영욱성에서 마국립이 위급한 걸 알고 곧바로 철수했지만, 그 뒤로 차도가 전혀 없었다. 점차 혼절해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싶더니 방금 전,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곽준방을 비롯한 다섯 편장은 마국립의 주검 앞에 깊은 허탈감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욱성에서 호가 부자의 목이나 자를 걸 그랬소이다.”
그중에서 비교적 냉정한 팽요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비단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장수들도 한결같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의생 놈 때문이오! 당장 저놈부터 끌어내 목을 베어야만 직성이 풀리겠소.”
여상계도 노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실제로 자기의 말을 실천하려는 듯 마국립의 시신에 매달려 있는 의생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만두게, 여 장군.”
곽준방이 엄격한 목소리로 만류했다. 지난번 영욱성 싸움 시에 여상계는 호윤천 부자를 치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때 철수 명령이 내려졌으니 그로선 더욱 분통이 터질 일, 그냥 두면 정말 의생을 베어 버릴지도 모른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네. 의생도 최선을 다한 거니 그만 화를 거두게나.”
곽준방이 말리는데 듣지 않을 수 없는 여상계였다. 의생을 한차례 날카롭게 쏘아본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를 정하는 게 급해졌네. 마 공자의 서거가 알려지면, 호윤천이 어떤 간계를 꾸밀지 모르네.”
“우선은 마 공자의 서거를 극비에 부쳐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리고 마 공자의 이름으로 각 성의 성주들에게 호윤천 부자를 치라는 격문을 보내는 거요. 일단 호가 놈들만 처치하고 난 뒤에 마 공자의 서거를 발표해도 늦진 않을 게요.”
팽요의 말에 이어 여상계가 뒤를 받쳤다. 지금으로썬 이게 최선책이었다.
“그러자면 역시 저 의생은 베어 버리는 게 좋겠소.”
의생의 처단에 대해 여상계는 이상하게 집착을 보였다.
하긴, 틀린 얘기도 아니다. 현재까지 마국립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곽준방을 비롯한 다섯 편장 그리고 의생뿐이니 말이다.
만에 하나라도 무장들 입에서 이 일이 새어 나갈 염려는 없다. 그러니 의생의 입만 단속하면 되고, 죽여서 그 입을 없애 버리는 것보다 더 확실한 비밀 보장은 없다.
편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곽준방에게 쏠렸다. 의생의 처리에 대한 그의 의도를 묻는 눈빛이었다.
“의생이 무슨 죄가 있는가? 난 저 사람을 죽일 수 없네.”
곽준방의 어투는 단호했다. 안팎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자신이 흔들린다면 모든 게 끝장날 수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굳건한 모습을 보여 줘야만 한다.
“대장군의 말씀이 맞소이다. 죄가 있다면 바로 소장에게 있을 것이오. 그러니 자결로써 벌을 대신하겠소이다.”
지금까지 말없이 앉아 있던 구문생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곧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결이라니? 기다리시오, 구 장군!”
우효금이 재빨리 구문생을 제지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대체 구 장군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난 윤 대부인은 물론 마 공자도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했소. 그 죄는 죽음으로도 씻기지 않을 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소이다.”
“이 무슨 경솔한 말이오? 대장군, 보고만 계실 참이오?”
우효금이 언성을 높였지만, 곽준방은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마국립 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 비록 윤 대부인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지만, 너무 경솔히 군사를 출병시킨 면도 없지 않았다.
“대장군!”
다른 장수들까지 입을 맞춰 불렀을 때에야 곽준방은 눈을 뜨며 무겁게 말했다.
“섣불리 자결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닐세. 만약 자결을 해야 된다면, 내가 가장 먼저 할 걸세.”
편장들에게 있어 곽준방의 이 말은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그 심정이야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결이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입에 올릴 일은 아니었다.
그 바람에 구문생의 기세는 저절로 누그러졌다. 더 이상 고집을 피웠다가는 곽준방까지 자결하겠다고 나설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각 성에 격문은 보내겠지만, 난 거짓말은 하지 않겠네. 사실 그대로 공자의 서거를 밝히고, 각 성주들의 판단을 기다리겠네.”
“불가합니다!”
곽준방의 말에 팽요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이의를 제기했다.
“그건 팽 장군의 말이 맞소이다. 아직은 마 공자의 서거를 성급하게 발표할 때가 아니오.”
곽준방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난세 권력자의 죽음이란 게 이렇다. 어디에 대고 말을 할 수도, 마음 놓고 애도를 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마 공자가 몇 살이었지?’
곽준방은 마국립의 나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아직은 삶이라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어리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처럼 어린 자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있다면 아비가 진남후에 봉해졌다는 것과, 시대가 빌어먹을 난세라는 것뿐이다. 가련키만 한 그의 죽음까지 숨겨서 어떤 이익을 도모한다는 건 차마 못 할 짓이다.
게다가 만약 여기서 마국립의 죽음을 숨겨 호윤천 부자를 이긴다 해도, 그건 한평생 지향해 온 긍지 높은 무장으로서의 삶에 먹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달리 선택의 방도가 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난 마 공자의 서거를 숨길 생각이 없네. 오늘 중으로 각 성으로 보내는 격문에 그렇게 밝히고, 내일 날이 밝는 것과 동시에 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호윤천 부자에게도 알릴 작정일세. 그렇게 알고 모두 상복을 입도록.”
“그건 너무 뒤가 없는 말씀이오. 우선 격문을 보내 성주들의 반응을 본 뒤에 결정하시는 게 좋을 듯하오.”
“팽 장군의 말이 옳소이다. 이대로 마 공자의 서거를 밝힌다면 군략을 모르는 멍청이였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오.”
곽준방의 한마디에 분위기는 대번에 달아올라 마치 끓는 가마솥을 방불케 했다.
곽준방의 주름진 미간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이건 어쩌면 도피일지도 모른다. 무장의 길이라는 현란한 말로 포장한, 비겁한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마국립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하거나, 호윤천과 일전을 벌여 전사라도 한다면 자신의 이름만은 길이 남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있는 편장들만 해도 오랜 세월 동안 고락을 함께해 온 수족과 같은 사람들이다. 게다가 이 조천성엔 병사와 백성들을 포함해서 육만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 그들의 운명까지 자기 고집에 걸어도 좋은 것일까?
“대장군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싸울 수 있음에도 싸우지 않는 건 무장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팽요가 입을 열었고, 구문생을 제외한 다른 편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곽준방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 정도는 훤하게 알 만큼 그들은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거짓과 속임수도 하나의 군략이라고 했소. 어리석은 패전이야말로 무장의 수치일 것이오. 이길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전쟁이오.”
“그렇소. 대장군께서도 지난번 목철린을 칠 때 광운 장군과 잡가군을 속이지 않으셨소? 한편도 그처럼 감쪽같이 속이신 분이, 어찌 적을 속이는 데 이처럼 망설이시는 거요?”
“소장들은 일찍이 군문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대장군과 함께 죽기를 각오한 몸이오. 만약 대장군께서 자결이라도 하신다면 우리들도 뒤를 따라… 앗!”
말을 하던 여상계가 돌연 기성을 발하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 아!”
여상계의 옆에 앉아 있던 우효금도 짧은 탄성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마국립의 시신을 보살피고 있던 의생이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의생에게 다가갔고, 그때 벌써 사태를 눈치 챈 장수들도 뒤를 따랐다.
여상계가 안아 올린 의생의 얼굴은 이미 시커멓게 죽어 가고 있었고, 칠공에서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극약을 삼킨 게 분명했다.
“소생이 불민하여, 공자를 돌아가시게… 이 몸의 죄를 용서하시옵고… 부, 부디 호가 역적 놈들을… 크르륵.”
기묘한 소리와 함께 입에서 검은 피가 왈칵 솟구친다 싶더니, 말조차 맺지 못하고 의생은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무장들은 굳어진 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자결을 택한 의생의 뜻이 극명하게 와 닿은 까닭에서였다.
“이래도 계속 고집을 부릴 생각이시오? 이 의생까지 자결로써 비밀을 지키고자 하는데?”
의생을 안은 채 여상계가 부르짖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 그를 베어 버리려고 했던 자신이 지금은 너무나 창피해졌다.
곽준방으로서도 이건 의외의 사태였다. 가뜩이나 부담을 느끼고 있던 그의 가슴에, 의생의 죽음은 커다란 바윗돌을 던진 것에 다름 아니었다.
“대장군께서 정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겠다면, 우리 호기군만으로 호윤천 부자와 일전을 벌이겠소.”
“어찌 호기군만 보내겠소. 우리 표기군豹旗軍도 합류하겠소.”
의생의 죽음은 편장들의 결단을 끌어냈다. 그들은 곽준방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호윤천 부자와 일전을 벌일 결심이었다.
“우선 의생의 시신부터 수습합시다. 마냥 그렇게 안고 계실 건 아니지 않소.”
역시 팽요는 냉정했다. 다들 흥분한 와중에서도 할 일을 제대로 짚어 나갔다.
하긴 의생의 시신을 거둔다고 해도 당장 밖으로 옮길 수는 없다. 일단 실내의 한편에 눕히고 천을 덮어 둘 수밖에 없었다.
“대장군께서 죽이지 않으려고 하셨던 의생까지 저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그 뜻은 대장군께서 더 잘 아실 것이오. 그러니 더 이상 고집을 부리신다면 의생의 죽음이 헛될 뿐만 아니라 지하에 계신 전대 진남후께서도 피눈물을 흘리실 것이오.”
“말을 삼가게. 돌아가신 분을 그리 쉽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되네.”
곽준방은 엄하게 질책했다. 그냥 듣고 있으면 팽요는 더욱 자극적인 말로 자신을 선동하려 할 것이 뻔했다.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소이까? 소장의 귀에는 아내와 자식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절규하시는 전대 진남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그만 하게!”
기어이 곽준방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그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가? 우리에겐 원수를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가?”
이어진 곽준방의 목소리는 지극히 낮았다. 꼭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에겐 그 속삭임이 마치 진군의 북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드디어 곽준방의 마음이 돌아선 걸 의미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싸움은 호가 부자의 목을 베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걸세. 다들 각오를 다지도록.”
“여부가 있겠소이까.”
“그럼 팽 장군이 얘기를 해 보게. 앞으로 우리 곽가군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되는지…….”
그날 밤 곽가군은 성문을 열고 나가 호윤천군에 대대적인 야습을 가했다. 각 성으로 파견될 전령들이 무사히 빠져나가게 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3
처음 사나흘 정도의 일정으로 잡았던 황제의 사냥 여정은 무려 열흘로 길어져 버렸다. 생각지도 않았던 비가 연 닷새나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일로써, 황제는 사냥의 취소를 원했다. 때에 맞지 않는 큰비는 각지에 피해를 냈을 것이니, 그 구호부터 하는 게 우선이라는 이유를 세워서 말이다.
그러나 가겸후는 듣지 않았다. 피해가 난 곳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성주들이 알아서 복구를 하겠지만, 황제의 사냥은 모처럼 나섰으니만큼 중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때 황제는 늘 질 수밖에 없고, 어가는 비가 그친 다음다음 날인 섣달 초사흘에 목적지인 지운산에 들어섰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지난 닷새간 하늘에 있는 비는 모두 쏟아 버렸는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했다.
어가가 사냥터에 닿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과 몰이꾼들이 만세를 외치며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그 숫자가 상상 이상이었다. 처음엔 우선 오천 명만 동원키로 했지만, 중간에 황제의 발길이 묶여 있는 사이에 무려 열 배에 달하는 오만의 병력으로 늘렸다. 그들 모두가 새로 모집한 병사들로, 마치 지운산 전체를 뒤덮고 있는 듯했다.
“화답을 해 주소서. 모두가 폐하의 병사들이옵니다.”
어가 곁을 바짝 따르고 있던 가겸후가 은근한 목소리로 권했다. 의당 황제가 할 일이기도 했다.
“아니요. 율천왕께서 대신 하시오.”
피곤한 목소리로 황제는 사양했다. 너무 엄청난 병사들의 숫자에 질리기도 했지만, 자신이 나서면 가겸후가 싫어한다는 걸 익히 아는 까닭에서였다.
과연 가겸후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말등자를 딛고 서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와아! 만세, 만세, 만만세!”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만세를 외쳤다. 황제나 받을 수 있는 저 소리가 지금은 오롯이 가겸후에게만 집중된 것이었다.
“어험, 험!”
가겸후의 뒤를 따르던 폐포자가 헛기침을 토했다. 너무 지나친 행동은 삼가라는 무언의 주의였다.
그걸 모를 가겸후가 아니었다. 즉각 행동을 멈추고 뒤따르는 무장들에게 명을 내렸다.
“폐하께서 진막으로 드실 것이다. 서둘러 준비하도록.”
이제 와 새삼 준비할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사냥 기간 내내 황제가 머물게 될 진막엔 훈훈한 화톳불이 피워져 있을 건 물론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을 테니 말이다.
명을 내린 가겸후는 천천히 어가에서 떨어져 나왔다. 자신과 황제의 진막은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몰이꾼들을 풀어놓으시오. 과인은 이대로 사냥에 참가하리다.”
“황제 폐하께 말씀을 올리지 않아도 될는지요?”
“어차피 사냥에는 참석지 않으실 게요. 천천히 짐을 푸는 동안, 과인은 멧돼지라도 몇 마리 잡아 올 생각이오.”
오늘 가겸후는 약간 들뜬 것처럼 보였다. 예전 같으면 일부러라도 황제를 앞세우는 행동을 했을 터인데, 오늘은 전혀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폐포자로선 어쩔 수 없었다. 가겸후는 한다면 하는 사람인 것이다. 괜스레 나섰다가 미운털이 박힐 필요는 없을 터였다.
명은 그대로 하달되었고, ‘와아!’ 하는 함성도 드높게 몰이꾼들이 일제히 숲으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이파리를 떨군 나뭇가지들을 뒤흔드는 북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예리한 눈으로 가겸후는 몰이꾼들이 달려간 숲의 지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미 무장을 한 상태인지라, 어디서든 짐승이 나타날 조짐만 보이면 곧바로 달려갈 작정이었다.
가겸후의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우측으로 이삼 리 떨어진 숲에서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왓!’ 하고 들린다 싶더니, 노루 한 마리가 껑충 뛰어나왔다.
거의 동시에 가겸후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활로 잡기엔 거리가 먼 탓도 있었지만, 되도록 창으로 찔러 잡고 싶었다. 그래야 몸도 제대로 단련이 될 것 같았다.
“전하께서 가신다! 노루를 몰아라!”
측근 무장들이 우르르 가겸후를 따르며 고함을 질렀다. 첫 사냥감은 아무래도 그가 잡게 하는 게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가겸후의 기마술은 뛰어났다. 왕위에 있다고 해서 게으름을 부리는 게 아니라, 한시도 무예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였다.
말은 삽시간에 노루에게 바짝 접근했고, 가겸후는 안장에 비끄러매 뒀던 창을 집어 들었다.
가겸후의 전신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노루를 놓칠까 염려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려는 태도였다.
궁지에 몰린 노루도 필사적이었다. 한 번 도약에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 몰이꾼들을 따돌리곤 했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았다. 노루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와두두둑!
마침내 말이 노루 곁으로 바짝 붙었다 싶은 순간, 가겸후가 쥔 창날이 반짝하며 햇살을 튕겨 냈다.
콰콱!
창은 어김없이 쭉 빠진 노루의 목덜미에 꽂혔고, 그토록 기세 좋게 날뛰던 놈도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 네발을 접고 말았다.
그래도 가겸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내처 달리며 창을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닥에 끌려가던 노루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겸후가 한 팔로 창에 꿰인 놈을 들어 올린 것으로, 대단한 완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아! 대왕께서 노루를 잡으셨다!”
“만세!”
또다시 만세의 함성이 지운산 전체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황제가 진막 속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겸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젠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린 노루를 한 바퀴 돌려 저만치 내팽개쳐 버렸다.
“다시 짐승들을 몰아라! 노루는 너무 시시하니 좀 더 큰 놈으로 몰도록 하라!”
가겸후의 명은 깃발로 전달되었고, 또다시 병사들과 몰이꾼이 뒤섞여 지운산을 누비기 시작했다.
가겸후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금방 노루를 잡느라 격렬하게 움직였음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호흡 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우익이 약하다. 좀 더 기세 있게 밀어붙이도록.”
가겸후는 다시 한 번 기수에게 명을 내렸다.
통상 사냥은 군사훈련과 병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곳의 지리를 익히는 건 물론, 같은 편과의 보조를 맞추는 데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늘 동원된 병사들은 모두 신병이다. 이런 사냥을 통해 지휘 체계를 확실히 습득하고, 거기에 복종하는 훈련을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다.
“와아앗!”
또 한차례 함성이 올랐을 때, 몰이꾼의 대열이 마치 터진 둑처럼 쫙 갈라졌다. 산의 반대편에서 올라온 다른 무리들이 벌써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짐승들을 마구 몰았기 때문이었다.
“좋아!”
가겸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했다. 이번엔 많은 짐승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중에서 그가 노리던 멧돼지를 비롯해 맹수들도 더러 보였던 것이다.
“하아!”
망설이지 않고 가겸후는 박차를 가했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사냥을 할 작정이었다.
“대왕 전하, 위험하시옵니다!”
그 바람에 혼비백산한 건 측근 무장들이었다. 맹수까지 섞여 있는 짐승들 한가운데로 가겸후를 보낼 수는 없으니, 그들은 더욱 빨리 말을 몰아 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짐승들 속으로 파고들었고, 마치 전장에 나선 것처럼 매섭게 창을 휘둘렀다. 가겸후에게 접근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짐승들은 마구 죽어 나갔다. 그건 사냥이 아니라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개중에는 말과 사람에게 덤비는 맹수도 없지 않았다. 그 결과 한두 명이 낙마하기도 했지만, 그걸로 이 도살장에서 빠져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처음 노루를 잡았을 때와 달리 가겸후는 침착했다. 그는 오늘 목표로 했던 멧돼지만을 노렸고, 마침 큼지막한 놈이 눈에 띄었다.
이제 가겸후에게 다른 짐승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목표로 했던 멧돼지를 향해 말을 몰아갈 뿐이었다.
“전하!”
무장들이 분분히 가겸후를 에워쌌다. 짐승들의 공격은 직접 받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휘두르는 창에 다칠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만큼 이곳이 난장판이라는 얘기다.
가겸후도 측근들이 자기 때문에 마음을 쓰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노렸던 멧돼지만큼은 기어이 잡고 싶어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멧돼지도 만만치 않았다. 놈을 몰아대는 몰이꾼은 물론, 기마 장수들의 말까지 그 억센 대가리로 연방 처박으며 달아나려고 했다.
그걸 보며 가겸후는 창을 고쳐 쥐었다. 이런 식으로는 멧돼지에 접근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차라리 던져서 잡자는 생각이었다.
드디어 말과 멧돼지 사이의 거리가 최대한으로 좁아졌다 싶은 순간 가겸후는 창을 힘차게 던졌다.
휭!
대기를 시원하게 가르며 날아간 창은 보기 좋게 멧돼지의 옆구리에 콱 들이박혔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꽂힌 창을 덜렁거리며 멧돼지는 여전히 달렸고, 가겸후도 재빨리 활을 꺼내 화살을 먹였다.
티티티팅!
가겸후는 연속적으로 다섯 발의 화살을 쐈다. 그건 고스란히 멧돼지에게 명중되었고, 마지막 한 발이 앞다리를 관통했을 때 놈도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와아! 만세, 만만세!”
지운산 자체가 내지르는 것처럼 큰 함성이 다시 한 번 병사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가겸후는 이게 좋았다. 그래서 기를 쓰고 이놈을 잡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짧게 한차례 손을 흔드는 걸로 가겸후는 병사들의 환호에 답했다. 아직도 잡을 짐승이 지천에 널렸고, 그중에서도 저만치 보이는 호랑이를 잡아 볼 생각이었다.
가겸후가 막 말에 박차를 가했을 때, 무장 중 한 명이 황급히 다가오며 불렀다.
“전하, 전령이옵니다!”
“전령? 사냥터에서 무슨 전령이란 말이냐?”
“하오나 지금 분명히 오고 있다는 전갈이 왔사옵니다. 우선 만나 보시는 게 가한 줄 아뢰오.”
“귀찮군.”
퉁명스레 내뱉었지만, 가겸후는 말을 멈춰 세웠다. 무장의 말을 들어 보니, 인근의 다른 성이나 창일성에서 오는 전령인 듯했다. 만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뜻하지 않은 비로 인해 피해가 컸나?’
당장 가겸후의 뇌리를 스친 생각은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은 지워졌다. 국상이 끝났으니 이제 슬슬 허주의 조환은 물론 강국의 증두신도 움직이기 시작할 게다. 그쪽에서 날아든 소식일 가능성이 컸고, 은근히 기다리던 참이었다.
“사냥을 계속하라! 오늘 가장 큰 짐승을 잡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우렁찬 목소리로 한마디 남긴 후, 가겸후는 자신의 진막이 마련된 곳으로 말을 몰았다.
“노고가 크셨습니다, 전하. 수확은 어떠신지요?”
애당초 사냥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폐포자가 진막 앞에 나와 가겸후를 맞았다.
“노루와 멧돼지 한 마리뿐이었소. 그런데 어디서 오는 전령이오?”
“육 장군이 보낸 것 같은… 아, 마침 도착한 모양이옵니다.”
가겸후가 진막에 마련된 의자에 앉기도 전에,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전령이 다른 무장들에게 들리다시피 해서 모습을 보였다.
“직접 고해도 좋다. 무슨 일인가?”
가겸후가 곧장 용건을 물었지만, 전령은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파른 호흡 탓이었다.
그 상태를 잘 알기에 가겸후는 채근하지 않았다.
“허, 허주의 오, 오만 대군, 헉, 허억…….”
마침내 전령이 입을 열었지만, 여전히 거친 호흡에 가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허주의 군사가 움직일 곳은 영산뿐이니까 말이다.
“조환이 드디어 움직였나 보군.”
“그, 그러하옵…….”
“전령을 데려가 쉬게 하라.”
폐포자가 가겸후를 대신해 명을 내렸다. 전령의 말은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전하, 어떻게 하시렵니까? 조환이 움직인 이상 강국의 증두신도 식운관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할 것이옵니다.”
“예상하고 있었던 바요.”
가겸후는 침착했다. 만약 허주와 강국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더욱 이상했을 터였다.
“하긴 그 때문에 사냥터에 동원한 병력도 열 배로 늘렸사옵니다만, 대왕 전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효과가 반감될 것이옵니다.”
“그런 건 상관치 않겠소. 이대로 황제를 만난 뒤, 난 병력을 이끌고 곧장 식운관으로 향할 테니 뒤는 알아서 처리하시오.”
“알겠사옵니다.”
단호한 가겸후의 말에 폐포자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아니, 그 역시 이걸 기다리고 있었으니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면 그만이었다. 오늘 사냥은 허주나 강국에 알려졌을 게 분명하고, 그때를 노려 조환과 증두신은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게 틀림없다.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이번 사냥의 병력을 열 배로 늘린 것이다. 여기서 가겸후가 군사를 이끌고 식운관이나 영산으로 곧장 가면, 강국의 증두신 정도는 쉽사리 깨뜨릴 수 있을 터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았는데, 그때 대왕 전하도 같이 계시면 좋은데…….’
진막 밖으로 나가는 가겸후를 배웅하는 폐포자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뒤에 남아 자신이 해야만 될 일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당장 사냥을 중단시키고, 병력을 집결시켜라. 촌각을 다툰다. 서둘러라!”
가겸후가 황제의 진막으로 말을 달리는 사이, 폐포자는 주변에 있는 장졸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가겸후가 황제에게 급보를 전하고, 사만의 병력을 이끌고 지운산을 내려간 것은 신시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어떤 일이 있든 황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가겸후가 가 버리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 홀가분한 기분까지 들었다.
가겸후가 없다고 해서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건 물론 아니었다. 당장 진막 밖에도 보호를 핑계로 장졸들이 감시하고 있고, 또 좀 있으면 폐포자가 온다는 전갈도 받았다. 어디에 있든 황제는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지필묵을 준비해 주게.”
돌연 생각났다는 듯 황제는 명을 내렸다. 벌써 열흘 넘게 보지 못한 황후에게 서신이라도 한 장 쓸 생각에서였다.
밖으로 나가겠다면 어땠을지 몰라도, 안에서 요구한 건 제꺽 준비되었다.
붓을 든 황제는 술술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율천국에 온 이후 한 번도 궁 밖으로 나오지 않다가 이렇게 나오니 참으로 상쾌하다는 것과, 며칠 되지 않았지만 벌써 황후의 얼굴이 그립다는 둥 자못 부부의 애정이 가득한 내용이었다.
사실 서신의 내용은 다분히 가겸후를 의식한 것이었다. 누구를 시켜 보내도 결국 그의 수중에 떨어질 테니 말이다.
황제가 서신을 봉해 수결까지 마쳤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기 시작했고, 기다렸다는 듯 폐포자가 알현을 청했다.
이 역시 예법에 어긋나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폐포자가 가겸후에겐 소중한 인물일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벼슬이 없는 평민에 불과하다. 단독으로 황제를 알현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허수아비는 자기 의지를 가질 수 없으니, 왔다면 만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폐하의 존안을 우러러뵈니 다시없는 광영이옵니다.”
황제 앞에 나선 폐포자는 예절만은 깍듯이 갖췄다.
“영산이 허주의 공격을 받고 있다니, 율천왕의 심려가 크겠소. 그대들이 잘 보좌해 주기 바라오. 짐도 곧 환궁하리다.”
이 대면을 길게 끌고 싶지 않는 황제였다. 가겸후가 바랄 만한 얘기를 입에 올렸다.
그런데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전령은 분명 허주의 조환이 영산을 공격 중이라고 전했다.
한데 가겸후는 오히려 식운관으로 가겠다며 병사를 움직였다. 비록 강국의 증두신도 조만간 움직이겠지만, 먼저 공격당하고 있는 곳을 둔 채 딴 곳으로 향한다는 것엔 역시 고개가 갸웃거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환궁이라니, 천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율천왕은 폐하께서 울적함을 떨어 버리실 때까지 마음껏 사냥을 하시라고 소인에게 단단히 당부하고 갔습니다. 하오니 아무 심려 마시고, 내일부터 사냥으로 심신을 단련하시기 바라옵니다.”
폐포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연 밖에서 정적을 찢는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이게 무슨… 우헉!”
소리가 들려온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기껏 해야 일 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웬 놈들이 소란을 부리느냐? 진정하지 않으면 군법으로… 으악!”
“앗, 적이다! 적의 기습이다!”
병사들 사이의 진중 반란은 간혹 일어나는 일이고, 그건 성에 있을 때보다 밖에서 야영을 할 때 더욱 빈번하다. 그리고 그 대상들은 흔히 ‘적’이라 불린다.
황제의 진막을 지키는 무장들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계신다! 야료를 부리는 자를 즉각 처단하고, 그 지휘관을 잡아 오너라!”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의 무장이 명을 내린다 싶더니, 십여 명의 장졸들이 진막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폐하, 안심하시옵소서. 일부 병사들이 난동을 부리는 듯하나, 곧 진정될 것이옵니다.”
“그대들은 폐하의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도록. 나는 밖의 상황을 살피고 오겠다.”
안으로 들어온 무장 중 한 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폐포자도 크게 외치며 밖으로 내달렸다.
분명 예기치 않았던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의외로 침착한 태도로 상황을 주시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떠돌아다녀야 했던 전력이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앗, 이쪽으로 몰려온다! 병사들을 모아라!”
“적은 상초국 병사들이다!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으악!”
이제 훨씬 더 가까이 들리는 고함에 진막 안 장졸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상초국 병사라는 한마디 때문이었다.
“누가 나가서 지원을 청하라. 폐하를 보호해야만 한다.”
장수의 명에 따라 병사 한 명이 재빨리 진막 밖으로 달려 나갔다.
“으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더불어, 바로 그 병사가 온몸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힌 모습으로 되튕겨 들어온 건 다음 순간이었다.
“적들이 가까워진 것 같사옵니다. 이 자리를 피해야겠으니, 소장을 따르소서.”
장수는 황제를 데리고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살이 날아들 정도면, 아무리 두꺼운 천으로 만든 진막이라도 견딜 재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초국 놈들이 불화살을 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여길 벗어나는 게 좋다.
“경의 뜻대로 하시오.”
황제는 여전히 차분했다. 이 모든 게 마치 남의 일인 양 침착하게, 황후에게 썼던 서신까지 챙겼다.
“뒤를 막아라!”
재차 엄하게 명을 내린 후, 장수는 황제와 더불어 진막 깊숙한 곳으로 갔다. 앞으로 나갔던 병사가 화살에 당했으니, 다른 곳을 찢고 밖으로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폐하, 잠시만.”
그 경황 중에도 장수는 한쪽에 걸려 있는 황제의 갑옷을 챙겼다. 혹시라도 사냥에 참가하면 입으라고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밖은 벌써 아수라장이었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율천국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상초국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이쪽으로!”
들고 나왔던 갑옷을 어깨에 걸쳐 주며, 장수는 황제의 손을 잡고 마구 끌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말을 탔으면 싶었지만, 그건 위험했다. 차라리 이 혼란을 이용해 도보로 빠져나가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
돌연 뒤쪽에서 화광이 솟구쳤다. 조금 전까지 황제가 있던 진막이 불타고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뒤에서 상초국말인 듯한 알아듣지 못할 고함이 들려왔다. 황제가 빠져나간 걸 알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게 틀림없을 터였다.
갑자기 장수는 황제를 이끌고 어두운 덤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가만히 엎드려 계십시오, 폐하.”
만 명이나 되는 병사가 야영하던 곳을 도보로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안전하다 싶은 곳에 은신해 있는 게 좋았다.
쉬쉬쉬쉿!
화살이 허공을 꿰뚫는 파공성이 들렸을 때, 장수는 황제를 덮어 눌렀다. 이건 상초국의 병사들이 쏘는 게 분명할 터이고, 자신의 몸으로 막는 한이 있어도 황제만은 철저히 보호해야만 한다. 딱히 자신들을 겨냥하고 쏘는 건 아니겠지만, 화살엔 눈도 없으니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알 수 없었다.
“경의 이름이 뭔가?”
아래에 깔린 황제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오랜만에 진정한 보호를 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투 자체도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남궁도南宮禱라 하옵니다. 자, 이제 조용히 하시길.”
남궁도가 대답하는 도중에 일단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화살이 허공을 나는 소리가 또 한 번 밤공기를 찢었다.
개중에는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가까이 떨어지는 것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