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월 7
혼례전후婚禮前後
1
영창십일년 구월 십일, 가겸후는 황태자의 탈상이 끝났음을 만천하에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로써 만 이 년도 살지 못한 황태자의 국상이 끝난 것이다.
가겸후야 어떤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겐 그 사실이 그리 아플 것도 가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편월의 경우는 조금 예외였지만 말이다.
다른 일 때문이 아니었다. 국상이 끝나자마자 강국의 증두신은 딸의 결혼을 부쩍 서두르기 시작했다. 가겸후가 탈상을 선포한 십일 날, 강국의 사자가 도착했을 정도니 얼마나 조급해하는지 알 만했다.
게다가 증화강은 송지와 담개에 의해 치러진 인물 시험에서 무난히 통과했다. 거기에 연일 서두르는 증두신의 뜻이 먹혀들어, 드디어 편월과 증화강의 혼례 날짜가 정해졌다. 시월 일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했다. 정략적인 냄새가 짙게 배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혼례는 기쁜 일이다. 칙칙한 전운만 감돌던 합진성에 모처럼 화사한 기운이 감도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몰래 속병을 앓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혼례에 대한 제반 사항 일체를 위임받은 담개와 송지가 그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나이와 경험을 생각해 선발했던 거지만, 그건 분명 실수였다. 거의 평생 동안 전장을 전전하다시피 했으니 혼례를 본 것도 드물었고, 준비를 해 본 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편월은 성을 네 개나 가지고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신분은 없다지만, 그에 걸맞은 격식을 갖춰야만 한다.
이게 더 어렵다. 일반적인 혼례라면 여염집 아낙에게 물어서 치르면 된다지만, 편월의 경우는 성주 이상의 준비를 갖춰야만 한다. 한데 위휘군 중에선 그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의 똥줄이야 타든 말든, 정작 당사자인 편월은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한창 추수철이라 바쁜 농부들과 함께 들일을 하기도 하고, 갑갑하다면서 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속수무책인 가운데 시간은 흘렀고, 드디어 내일모레 신부의 혼수가 도착하게 된다. 송지와 담개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나 진배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장수들 모두를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그중 쓸 만한 게 한두 개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실패였다. 전쟁에 관한 얘기를 하라면 열 개의 입을 마련해 줘도 모자란다고 할 사람들이, 혼례의 절차나 격식 문제에 대해선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어허, 말씀들을 좀 해 보시오. 날짜가 임박하오. 이대로 있다가는 혼례가 아니라, 낭패를 볼 판이오!”
답답해진 송지가 언성을 높였지만, 그걸로는 장수들의 입을 열 수 없었다.
하긴, 다른 장수들은 아쉬울 게 없는 판이다. 우선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고, 또 실제로 그들 역시 아는 게 없기도 했다.
“허어, 정말 답답하구먼!”
“우리들에게 역정 내실 게 아니오. 자신이 없으면 애당초 그 자릴 사양하셨어야지.”
“뭐요?”
자신의 말에 핀잔을 주는 서진청에게 송지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처음부터 싫다는 우리 두 늙은이에게 억지로 일을 맡긴 사람들이 누구였소? 바로 여러분들이었소! 그런데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고 발을 빼신단 말이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요.”
서진청은 슬그머니 물러섰다. 따지고 보면 송지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신다면, 강국에서 와 있는 사신에게 물어봅시다. 그들도 뽑혀서 온 사람들일 테니, 우리보다는 낫겠지.”
이렇게 말한 사람은 거예홍이었다. 그녀도 위휘군의 장수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오, 왜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던고!”
“그렇지. 그들은 공주를 출가시키려고 온 사람들이니 혼례의 예법에 밝을 게 틀림없을 게요. 그들에게 물어봅시다.”
장수들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거예홍의 말이 캄캄한 어둠에 한 줄기 빛을 던진 셈이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담개가 모두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을 했다.
“혼례란 모름지기 시집을 오는 신부가 신랑 댁의 가풍에 따르는 일이오. 하물며 이건 여염집의 혼사가 아니오. 그런데 처음부터 우리들에게 이렇다 할 기강이 없다는 걸 보일 셈이오? 강국의 사자들에게 혼례 절차나 예법을 묻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요.”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말이오?”
송지가 곧바로 담개에게 따지고 들었다. 말이야 구구절절 옳다고 할 수 있었지만, 당장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말이다.
과연 담개도 입이 막혔다. 무장의 길만 고집하느라 일상의 잡다한 일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자신의 삶이 이 순간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윽박지르실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오. 강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혼사는 세간에서 말하는 ‘내려 주는 혼사’일 게요. 잔뜩 선심을 쓴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거란 말이오. 그런데 처음부터 얕보인다면…….”
두건득이 담개를 옹호하는 듯한 말을 하자, 송지가 물어뜯을 듯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모르는 걸 묻는 게 뭐 그리 얕보일 일이오?”
“얕보이지 않고? 당장 주모가 되실 강국 공주만 해도 우리들을 예법은 쥐뿔도 모르면서 싸움만 일삼는 무식한 놈들이라고 생각하실 게요!”
“이런 난리 통에 싸움만 잘하면 됐지, 또 뭘 더 바라겠소!”
“허어, 그게 나잇살이나 잡수신 분이 하실 말씀이오?”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다들 모여서 소란을 떨고 계시오?”
송지와 두건득의 설전이 한창일 때, 돌연 편월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주군!”
“주군을 뵈오.”
무장들은 황급히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들로선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다름 아닌 편월의 혼례를 위한 회의였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졌소?”
편월이 재차 물었지만,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럴 땐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용기 있게 행동하는 모양이다. 거예홍이 편월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바로 주군의 혼례에 따른 절차와 예법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소이다.”
“그런 게 뭐 필요 있소?”
송지를 돌아보며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여자인 거예홍과는 대화하기가 거북했다.
“혼례는 아주 중대한 일이오. 결코 가볍게 생각지 마시오.”
“그럼 어떤 결론을 내렸소? 한번 들어 봅시다. 그래야 나도 실수하지 않을 테니.”
맹아가 내온 의자에 앉으며 편월은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얘기를 듣겠다는 태도였다.
“저, 그게… 없소.”
“없다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연 송지에게, 편월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오.”
“응?”
편월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장철벽銅牆鐵壁으로 지어진 성을 탈취하라고 하면 코웃음 치며 설칠 장수들이, 한낱 혼례 때문에 이처럼 곤혹스러워한다는 게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편월로서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막상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해 보니 역시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이건 자신의 일이다. 이 문제를 장수들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함께 고민하는 것이 옳을 듯했다.
“계속 말씀들 나누시오. 듣고 있다가 나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얘기하겠소.”
편월의 말에 장수들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염치가 없어도 유만부동이지, 자신의 혼례 절차를 의논하는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다니?
거기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얘기까지 하겠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거나, 신경이 아주 무딘 게 틀림없을 듯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가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편월이 모른다면 또 모를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새삼 내보내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자, 얘기는 강국의 사신들에게 물어보자는 데까지 나왔소. 그 의견에 담 장군께서 반대를 하셨는데, 또 반대하시는 분이 계시오?”
송지가 재빨리 나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더 미적거리고 있어 봐야 서로 간에 어색한 공기만 더 짙어질 테니 말이다.
그래도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애당초 방법이 없었던 데다 당사자인 편월까지 버티고 있으니 한층 더 말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을 깬 건 편월이었다.
“그런데 혼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뭐요? 그것만 제대로 지키면 될 것 같은데…….”
이 말에도 무장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중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지라 선뜻 뭐부터 꼽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아무래도 혼수가 중요한 것 아니겠소? 저쪽보다 못하면 기가 죽을 테니…….”
“그거야 물건이니 마련하면 되는 것이고, 이건 역시 의식이 화려하고 장엄해야 할 것이오. 그러니 주군의 혼례 날은 우리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백성들에게도 가장 깨끗한 옷을 입으라고 합시다.”
“겉모습이 뭐 그리 중요하겠소? 누더기를 입고 있어도 사람으로서 갖출 예의만 확실히 지키면 오히려 그 혼례는 더욱 빛나 보일 것이오. 그러니 강국의 사자들에게 예법과 절차를 물어봅시다.”
답답한 침묵 속에 잠겨 있던 무장들이 일제히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각자의 성격에 따라 중요하다 싶은 걸 꼽으니, 당장에 실내가 떠들썩해졌다.
“잠깐! 잠깐만 조용히 하고 내 말을 들으시오.”
묵직한 담개의 말에 따라 무장들은 일제히 입을 닫았다.
“여러분들께서 하신 말씀들이 다 옳소. 사람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는 혼례가 되고 보면 뭐든 중요하지 않은 게 어디 있겠소. 하지만 정작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 같구려. 그 혼례를 치르는 건 사람이오. 그래서 소장은 혼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맞아!”
담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편월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담 장군의 말씀이 맞소. 아무렴! 혼례는 사람이 치르는 거지. 그 당사자인 내가 있고, 또 강국의 공주도 이 성에 와 있소. 그럼 준비는 다 된 거구만. 나머진 여러분에게 맡기고 난 또 들에나 나가 보겠소. 맹 장군, 갑시다.”
누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편월은 맹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정말 큰 문제 하나를 해결했다는 듯 그 어깨가 무척 가벼워 보였다.
남아 있는 무장들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있다는 걸 누가 모르는가? 다만 그 사람이 보다 훌륭한 혼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하고자 이처럼 골머리를 싸매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아무튼 편월이 그렇게 나가 버리고 나자, 실내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당사자가 저처럼 무관심하니, 다른 사람들도 의욕이 날 턱이 없었다.
“아! 오늘 들어오기로 한 세미가 있었지. 자, 먼저 실례하겠소.”
두건득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 하면서 자리를 떴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장수들은 제각기 핑계 하나씩을 대면서 자리를 떴고, 결국 송지와 담개만 남게 되었다.
송지도 부아가 치밀었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이가 죄였다. 여기서 자신이 성질대로 집어치워 버린다면, 젊은 장수들이 비웃을 것이다.
‘혼자라도 강국의 사신들을 찾아가 봐야겠군.’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힌 담개에게 같이 가자고 해 봐야 헛일일 게 틀림없다. 오늘 밤에라도 조촐한 주효를 마련해 강국 사신들을 찾아보는 게 그나마 연장자로서의 도리일 것 같았다.
“올해는 더 이상 싸움이 없었으면 좋겠군.”
“예? 뭐라고 하셨소?”
“싸움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소. 주군도 혼례를 치르고 나면 좀 쉬셔야 할 것 아니겠소. 우리들도 마찬가지고…….”
‘하긴 전장을 달리기에 우린 너무 늙었어.’
송지는 담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이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이가 의식되었다.
‘물러나려면 주군의 혼례가 끝난 뒤가 딱 적기인데…….’
나이가 들면 군무에 해직시켜 달라고 요청을 할 수는 있다. 그러면 대부분 여생을 즐길 만큼의 포상을 내려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해 주는 게 관례다.
그러나 송지는 그렇게 하기 싫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군문을 떠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할 것 같았던 꿈이 실현되려는 시기이기도 하다. 편월을 앞세워 나라를 세우는 일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핑계를 찾아야 하고, 편월의 혼례는 더없는 호기이기도 하다. 분위기를 쇄신한다는 핑계를 세워 나이 든 장수들은 일선에서 물러앉게 하면 자연스러울 터였다.
‘에구,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물러앉는 것도 좋지만, 지금 당장은 편월의 혼례를 치르는 게 급선무다. 강국 사신들을 만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면서, 송지는 몸을 일으켰다.
강국 사신들이 머물고 있는 접빈관에 도착했을 때, 송지는 해연히 놀라고 말았다. 오늘 밤 근무인 장수 몇몇을 뺀 모든 무장들이 다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담개도 그중에 섞여 있었다. 목적은 혼례에 따른 예법과 절차를 알아보기 위함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송지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뭐라고 하든, 우직하게 편월만을 위하는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 너무 즐거웠다.
안쓰러운 건 강국의 사신들이었다. 위휘군의 무장들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만도 기겁할 노릇인데, 혼례에 대한 질문들이 가히 협박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한마디 할 때마다 그들은 움찔움찔 놀라기만 했다.
이처럼 웃지 못할 상황 속에서 하룻밤이 지난 후에야, 송지와 담개는 내일 있을 혼례를 그나마 준비할 수 있었다.
* * *
증화강은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자신이 편월과 혼례를 올린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았고, 이 합진성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그만큼 시간이 많았으니 증화강으로선 이번 혼례에 대한 마음의 준비만큼은 단단히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강국을 떠날 때도, 이 합진성에 도착해서도 별다른 마음의 동요 없이 기다리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막상 혼례 날이 닥치자 걷잡을 수 없이 설레기 시작했고, 모든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심지어 지금까지 편월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조차 무슨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여겨졌고, 결국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말았다. 마음의 준비 따위와는 상관없이 증화강은 결국 여자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디 편찮으세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공주 마마.”
강국에서 따라온 시비들이 증화강을 보자마자 뱉은 첫마디였다.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안색은 창백했고, 푸석한 부기까지 자리 잡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유, 이를 어째? 오늘이 혼례 날인데…….”
시비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여자로서 가장 예쁘게 보여야 할 날에 얼굴이 저 모양이니 큰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 마마, 이쪽으로 오세요.”
시비들은 우선 증화강을 욕실로 데려갔다. 어쨌든 우선 목욕부터 시켜야 화장을 하고 옷을 입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증화강은 마치 허깨비처럼 시비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가슴은 여전히 콩닥거리고,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어 버려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다행히 강국에서부터 증화강을 받들었던 시비들은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능숙한 손길로 목욕을 시키는가 싶더니, 어느새 화장대 앞에 앉혀 얼굴을 단장해 주기 시작했다.
“이제 다 됐어요. 어때요, 공주님?”
화장을 끝낸 시비가 증화강에게 거울을 보라고 권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사이 그녀의 얼굴은 확 달라져 있었다. 푸석하니 윤기가 없던 피부는 어느새 정갈하니 제자리(?)를 찾았고, 거기에 더해 화장까지 했으니 미모가 한층 더 돋보였다.
“자, 이제 옷을 입으셔요.”
증화강을 일으켜 세운 시비는 우선 그녀의 옷을 벗겼다. 속옷부터 강국에서 가지고 온 걸로 갈아입히기 위함이었다.
“아, 언제 봐도 공주님은 너무 아름다우셔요.”
시비들은 일제히 탄성을 토했다. 단순히 입에 발린 아부가 아니었다. 실제로 증화강의 나신은 같은 여인이 봐도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얼른 옷을…….”
증화강은 시비들을 재촉했다. 이제 곧 있을 혼례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 그럼…….”
시비들은 바쁘게 증화강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시간은 아직 멀었지만, 미리 준비해 둔다고 해서 나쁠 건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창 준비를 하고 있는 곳에 강국의 사신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공주를 직접 배알하지 않고, 휘장 하나를 사이에 둔 방의 바깥쪽에서 시비들에게 주의 사항을 들려주고 돌아갔다. 혼례 날 신부의 얼굴을 신랑 아닌 다른 남자가 먼저 보면 불행해진다는 관습 때문이었다.
“시간은 오시 정각이래요. 신랑 되실 분이 연회장에 먼저 가 있으실 테니, 공주 마마께선 시간에 맞춰 입장하시면 된답니다.”
벌써 증화강은 이 이야기를 들었다. 한 겹의 휘장은 사신들의 목소리를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제 다 됐어요. 이 면사面紗는 연회장에 가시기 전에 쓰도록 하세요.”
시비는 증화강이 보고 있는 화장대의 거울 옆에 신부용 면사를 내려놓았다.
쾅!
문짝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고함에, 증화강은 물론 시비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누가 강국 공주인가?”
2
연회장에 둘러앉은 장수들의 얼굴에는 모처럼 환한 웃음이 피어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갑옷도 벗어 버리고, 나름대로는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차려입고 있으니, 다들 인물이 훤하게 보였다.
“그런데 주군께선 너무 열심히 준비하시는 것 아니오? 시간이 다 돼 가는데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니…….”
두건득이 송지에게 잔을 권하며 유쾌하게 말을 붙였다. 그의 말대로 바야흐로 정오를 향해 치닫고 있는 시각이었다.
“아무리 주군이라도 혼례 날이니 떨리시겠지. 느긋하게 기다려 봅시다. 나이 든 우리까지 덜렁거려서야 되겠소?”
“그야 그렇지만, 솔직히 소장도 떨리긴 떨리는구려.”
“예끼, 어디 두 장군이 혼례를 치르시오?”
“하하하!”
두 사람의 대화에, 주변의 장수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오간 말 자체야 그리 우스울 것도 없지만, 한결같이 자신의 일처럼 마음 설레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탓이었다.
“포란성의 거 장군도 참석하셨으면 좋았을걸. 그분과는 마음 놓고 술 한 잔도 하지 못했으니, 오늘 같은 날 오셨으면 확 터놓고 한잔하는 건데…….”
“그 술잔 소장이 받겠소.”
왁자하게 떠드는 와중에 강숙이 한마디 내뱉었고, 그 말에 곧바로 거예홍이 맞장구쳤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대신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걸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잠깐 움찔했지만, 강숙은 시원하게 거예홍에게 잔을 내밀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그녀는 어느새 위휘군 장수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잔을 받는 거예홍을 보며, 강숙은 눈 가장자리 가득 웃음을 떠올렸다. 포란성의 내성을 공격했을 때, 그 수비 장수가 여자인 걸 알고서 물러났던 기억이 새삼 뇌리에 떠올랐다.
거예홍은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다시 강숙에게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처음 백월대가 공격해 왔을 땐 내심 당혹스러웠소. 그처럼 용맹한 군세는 처음 봤던지라… 자, 소장의 잔도 받으시오.”
“오, 용맹한 장수가 주는 잔을 마다할 순 없지.”
하마터면 아리따운 소저가 주는 잔이라고 할 뻔했던 강숙이었다. 그래서는 오히려 실례가 되겠다 싶어 용맹한 장수라고 말을 급히 바꾸었다.
그 탓인지 몰라도 거예홍은 썩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강숙에게 따랐던 술병을 내려놓더니, 몸을 일으켜 연회장 한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이 좋은 날에 흥을 돋울 볼거리가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미숙하나마 소장이 검무劍舞를 춰 볼까 하오.”
“오, 그거 좋지! 기대하겠소이다.”
“와아!”
생각지도 않았던 거예홍의 행동에 장수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반겼다.
그중에서 눈치 빠른 편장 한 명이 재빨리 한 자루 검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창!
거예홍은 스스럼없이 검을 뽑았다. 예사롭지 않은 빛을 뿌리는 걸 보면 가히 명검이라 할 만했다.
싸악!
한차례 검이 움직인다 싶더니, 거예홍은 검을 거꾸로 쥐고 두 손을 모았다. 일종의 예의였다.
그렇게 거예홍의 검무는 시작되었다. 날카롭게 내지르는가 하면 강하게 도약하고, 그러다 부드럽게 휘늘어지고…….
그녀가 쥔 검은, 빛을 번뜩이며 허공에 화려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음악은 없었다. 아직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합진성인지라, 악단까지 동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거예홍의 검무에 전혀 장애가 되지 못했다. 마치 그녀는 한 마리 새가 된 것처럼 자유롭게 연회장을 누비며 화려한 율동을 선보였다.
보고 있던 장수들은 하나같이 어깨를 덩실거렸다. 그만큼 거예홍의 검무는 좌중을 흥겨움으로 몰아넣었다.
“검무에 상대가 없어서야 촉 없는 화살이지.”
돌연 한마디 불쑥 내뱉으며 강숙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대도가 들려 있었다.
또 한차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무릇 검무에는 상대가 있는 게 훨씬 보기 좋으니 말이다.
그러나 강숙이 움직이자마자 장수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하하, 저것도 춤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아무렴 어떻소? 재미만 있으면 되지. 내 살다 살다 저렇게 멋대로인 검무는 처음 보는구먼, 하하하!”
장수들의 웃음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강숙의 춤사위는 우스웠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숙은 제 흥에 겨워 연방 어깨를 추석거리거나 허리를 뒤틀면서, 대도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그 모습이 마치 곡예단의 꼽추 춤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절름발이가 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도 보였으니, 구경하는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춤에 깃든 기세도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거예홍의 검무가 유장하면서도 경쾌하고 밝은 것이라면, 강숙의 그것은 어딘지 칙칙하면서 섬뜩한 살기를 느끼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움직임이 이질적이거나, 혹은 서로를 거부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극명하게 다른 두 기세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연회장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웃고 떠들던 장수들이 하나 둘 조용해졌다. 무예라면 모두 내로라하는 사람들인지라, 거예홍과 강숙의 춤사위에 실린 기세를 느끼지 못할 턱이 없었다.
그 정적이 싫다는 듯 돌연 강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침 해 바라보며 대문을 나섰건만…….”
“허어, 차!”
강숙의 노래 한 마디가 끝나자 오강이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장단을 맞췄다. 그는 벌써 몇 번인가 들어 본 모양이었다.
“죽음의 그림자만 저만치 앞서노라.”
“허어, 차아!”
“허위대며 따른 곳은 먼지 자욱한 전장의 한편…….”
“허어, 차!”
이젠 오강만이 아니라 다른 장수들까지 손과 입을 맞춰 소리를 냈다.
“혈진血塵 속을 자맥질하는 덧없는 부유柞ᄠᅵᆨ(하루살이)의 삶!”
타앙!
대도의 자루로 바닥을 강하게 내려치며, 강숙은 노래를 끝맺었다. 따지고 보면 운도 맞지 않는 가사에, 곡조도 엉망인 음률이었다.
그에 따라 거예홍의 검무도 멈췄다. 아니, 그녀는 강숙의 노래가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이미 춤을 그쳤다.
이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유치하지만, 강숙이 부른 노래를 들으며 자신들의 삶을 되새겨 본 탓이었다.
“좋은 검무였소. 자, 한 잔씩들 하시오!”
담개가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강숙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걸 시작으로 연회장은 다시 왁자한 소음으로 들어찼다. 개중에는 이 경사스러운 날에 죽음을 떠올린 자신이 불경스럽다는 생각을 한 자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만들어진 그 흥겨움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시비 차림의 여인 한 명이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냐! 여긴 여인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물러가라!”
“괴, 괴한이…….”
연회장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여인을 잡고 다그쳤지만, 그녀는 경황없이 뜻 모를 말만 주절거렸다.
“그 여인은 우리 강국에서 공주를 모시고 온 시비 중 하나요. 대체 무슨 일인가?”
강국의 사신 중 한 명이 그녀를 알아보고 재빨리 다가오며 물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시비가 이처럼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찾아왔다면, 공주의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자, 정신을 차리고 말을 하거라. 공주께서 갑자기 편찮으시기라도 하느냐?”
강국의 사신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지만, 시비는 아직도 허둥거리기만 했다.
“어허, 위휘군의 장수들께서 계시는 자리다. 어찌 이런 경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가!”
“괴한이 공, 공주님을 납치…….”
“뭣이? 자세히 말해 보거라. 괴한이라니?”
연이어진 사신의 호통에 시비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더듬거리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혼례 준비를 하고 있던 공주의 방에 반무장 차림의 괴한이 뛰어들어 공주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사람들, 특히 위휘군 장수들의 얼굴이 핼쑥해지며 핏기가 가셨다. 자신들의 본거지로 삼을 작정이었던 이 합진성에 괴한이 나타나 공주를 납치해 갔다는 건, 그야말로 엉덩이를 걷어차인 꼴에 다름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호윤천 부자의 짓이오. 우리가 강국과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진출하고 있으니, 이 혼례를 깨뜨리려는 게 틀림없소.”
“너무 단정적으로 말씀하지 마시오. 이 혼례를 반기지 않는 건 비단 호윤천 부자만이 아닐 거요. 허주도 있고, 가겸후도 간과해서는 안 되오.”
장수들이 제각기 생각을 입에 올렸다. 전혀 근거 없는 의심이었지만,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처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담개와 송지는 시비에게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합진성에 괴한이 출현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말해 보게. 괴한이 언제 나타났나?”
“이각, 이각 정도 지났습니다.”
그사이 시비는 어느 정도 냉정을 회복한 것 같았다. 담개가 묻는 말에 비교적 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곧장 알리지 않았나?”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공주 마마의 신변엔 그분을 지키는 시비도 있었을 터, 그런데 그처럼 쉽게 공주께서 납치를 당하셨단 말인가?”
“워낙 창졸지간에 당한 일이라… 하지만 두 명의 시비가 곧 뒤를 따랐사옵니다.”
“그래, 괴한의 생김새는?”
이어진 담개의 질문에 시비는 미간을 모았다. 괴한의 모습을 떠올리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그는…….”
시비는 더듬거리면서도 되도록 자세히 괴한의 모습을 묘사하려고 진땀을 흘렸다.
* * *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증화강이었다. 화장을 마치자마자 낯선 사람에게 끌려 나와 말에 태워진 채 성 밖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해칠 의사는 없나 보다.’
반무장을 한 모습이나 손을 마구 끌어 댄 행동은 난폭했지만, 그 속에서 살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난세에 태어났기에 증화강은 부모로부터 과잉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경향이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끌려간다는 것보다는 성을 떠난다는 사실이 그녀는 더욱 불안했다.
돌연 증화강은 화들짝 놀라 자칫 달리는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생판 모르는 남자 앞에 앉아, 그 목에 전력으로 매달려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손을 놔 버린 탓이었다.
“위험해!”
다행히 남자는 상당한 승마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증화강을 부드럽게 부축해서 안정을 되찾게 해 주었다.
하지만 증화강은 그게 고맙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을 깨물며 남자의 따귀를 강하게 쳐 버렸다.
짜악!
증화강의 손바닥은 너무도 시원하게 남자의 뺨에 작렬했다. 때린 그녀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을 정도였다.
“이번 한 번뿐이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당장 쫓아내 버리겠다.”
“대체 누구기에……?”
증화강은 차마 말을 맺을 수 없었다. 강국의 공주로 태어나 귀하게만 자란 그녀가 언제 이처럼 오만불손한 자를 상대해 봤겠는가 말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방금 남자가 했던 말의 내용 때문이었다.
‘나를 쫓아낸다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는 없다. 바로 자신의 남편이 될 편월이 그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증화강은 좀 더 태연해질 수 있었다.
“당신이 편월인가요?”
“둔한 여자로군. 이제야 알다니.”
“뭐라고요?”
“위휘군이 주둔하고 있는 합진성에서 그대를 이처럼 마음대로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생각했나? 처음부터 그 정도는 알았어야지.”
“기가 막혀.”
실제로 증화강은 어이가 없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쳐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다짜고짜 끌고 왔으면서, 자신을 몰라본다고 둔하다 하니 화가 치밀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가 편월임을 안 이상 성질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엄습해 왔기에 증화강은 안절부절못했다.
‘혼례식을 제대로 치를 수 없을 텐데…….’
이게 어린 신부의 가슴을 어둡게 만드는 걱정거리였다.
하긴, 혼례식 따위는 올리지 못해도 상관없다. 다만 그 일로 인해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염려스러울 뿐이었다. 만약 이 합진성에서 자신이 창피라도 당한다면, 그건 고스란히 아버지의 수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더 이상 무례한 행동은 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도록 해요. 사람들이 기다려요.”
“무례하다고? 뭐가?”
“우리의 혼례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이러고 있으면 그 사람들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잖아요. 그건 큰 실례예요.”
“흥!”
편월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증화강이 벌써부터 아내 노릇을 하는 건가 싶어 조금은 아니꼬웠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편월도 이젠 부부가 어떤 관계라는 걸 알게 된 까닭에서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자니 왠지 진다는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가끔 잡가군의 나이 든 병사들과 어울렸을 때 들은 말에 의하면, 여자는 그저 초장에 확 잡아야 된다고 했다.
“그렇게도 의식이 중요한가? 그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우리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
“도대체…….”
다시금 증화강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여자에게 있어 혼례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다. 그래서 보다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르려는 것이다.
그런데 편월은 그런 의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곱게 간직했던 소녀로서의, 또 여자로서의 의식 한편이 짓밟힌 것 같아 증화강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끝없이 달릴 것만 같았던 말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보시오!”
지금까지 마구 해 대던 반말과는 조금 다른 말투에 증화강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의 한복판이었다.
“여기가 바로 지난 일 년간 백성들이 피땀을 흘렸던 곳이오.”
“네?”
증화강으로선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햇살은 비록 화창했지만, 살갗 속으론 제법 쌀쌀한 바람이 파고든다. 혼례복이 그리 두껍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편월은 이런 곳에 끌고 와서 뭘 보라는 것일까? 텅 빈 들판뿐이데…….
‘뜻 없는 얘기나 하려고 예까지 데려오지는 않았을 텐데…….’
증화강은 총명하다. 그녀는 편월이 한 말이 이 들판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보이지 않나? 정말 둔한 여자로군.”
팔을 쭉 뻗어 사방을 가리키며 편월이 다시 한 번 말했을 때, 증화강은 온몸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여기까지 끌고 와서는 연방 둔하다고 하니 어떤 여자라도 화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증화강은 다시 한 번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추수가 끝난 뒤의 벼 그루터기들이 빼곡히 들어찬 논과 혹시라도 흘려 있을 낱 알갱이를 찾는 참새 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증화강은 퍼뜩 깨달았다. 편월은 분명 백성들이 일 년간 흘린 피땀의 장소라고 했다. 추수가 끝난 뒤의 이 들판은 분명 그 말에 부합하는 장소였다.
“그럼 여기까지 데려오신 건…….”
“이제 알았나? 우리의 혼례를 올리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될 것 같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잘 봐 둬. 땅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곡식을 풍성하게 키워 그걸 다시 돌려준다. 그리고 또 남았지. 백성들이 그 결실을 거둬 간 뒤에도 남은 걸로 저 참새들을 먹여 살린다. 난 저 땅처럼 되고 싶어. 이 난세의 불쌍한 백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저 땅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입을 열 때마다 편월에게 가로막혔지만, 증화강은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약간의 반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 집어 틀린 얘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혼례식은 이 자리에서 하는 게 좋아. 어차피 사람을 결합시켜 주는 건 의식 따위가 아니니까.”
이 말에도 증화강은 약간의 반발을 느꼈다. 의식을 통해서 부부는 서로에 대한 책임과 애정을 약속하는 것이다.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반발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의식이라는 겉치레보다는 실질적인 걸 더 중요시하는 편월에게서 이상하게 안도감과 신뢰가 느껴졌다.
“나와 혼인을 했다고 해서 마음 놓아선 안 돼. 난 이 세상의 불쌍한 여자들은 모두 보듬어 줄 생각이니까.”
“세상의 불쌍한 여자들을 모두?”
“그래. 따지고 보면 그대도 불쌍하지. 이런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편월의 말에 증화강은 가슴 가득 짜릿한 아픔을 느꼈다. 아버지인 증두신도 예전에 한 번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거죽성으로 밀고 들어오는 숱한 난민들을 보며 한 말이었다.
이상하게 그 난민의 행렬은 여자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자들도 간혹 눈에 띄긴 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팔이나 다리 한쪽이 없는, 혹은 그 외의 다른 신체적 장애로 인해 흔히 ‘병신’으로 불리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라, 증화강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끌려 나가 죽거나 다쳐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지아비나 가장을 잃은 여인들의 슬픔만이 가득한 세상이라 난세라고 한다는…….
아버지의 슬픔 섞인 친절한 설명을 들었어도 그녀는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자신의 평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날일지도 모르는 혼례 날에 지아비인 편월에게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그 의미까지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다 해도, 적어도 이런 말을 들었다는 건 반드시 기억해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 저더러 불쌍하다고 하셨는데, 전 강국의 공주로 태어나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무엇 하나 부러운 것 없이 살았어요. 불쌍하다는 말은 온당치 않아요.”
아마 이게 오늘 증화강이 편월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기까지 일방적으로 끌려와 지금까지 당한 것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대가 가장 불쌍한지도 몰라. 난 내일이라도 일이 터지면 전쟁터로 달려가야 할 몸이다. 혹시라도 내가 전사하게 되면, 그때부터 그댄 생과부가 되는 거야. 혼자서 이 험한 세계를 살아갈 수 있겠나?”
“하지만 제 아버지는 강국의 왕이시고……!”
반발적으로 말하던 증화강이 갑자기 입을 닫았다. 한 번 출가하게 되면 여인은 남편 집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미 자신에겐 돌아갈 집 따위는 없다는 얘기가 된다. 조금 전에 억지로 새겨 두고자 했던 난세 여인들의 가련한 삶이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얘기로구나 싶어 증화강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이제야 우리가 있는 곳을 찾았나 보군.”
편월의 말에 증화강은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여태 그의 품속에 안겨 있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대로 있어도 돼. 이제 우린 부부니까.”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리는 증화강을 더욱 힘주어 안으며, 편월은 소질풍을 몰아 저만치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마주 달리며 소리를 질렀다.
“혼례식은 끝났소! 지금부터 잔치요! 마음껏 즐기시오!”
편월의 고함에 답하듯, 다가오던 사람들도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시비에게 괴한의 인상착의를 듣자마자 사람들은 그가 편월임을 알아차렸다. 그다음부터는 그가 있는 곳을 찾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날 합진성엔 질펀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무장이나 병사들, 백성들 할 것 없이 아주 오랜만에 전쟁을 잊고 즐겁게 지낸 날이었다.
3
편월이 증두신의 딸과 혼례를 치렀다는 소식은 가겸후에게 있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강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때라 더욱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편월이나 강국에 대해 당장 손쓸 수는 없었다. 그보다 훨씬 급하고 중요한 일이 지금 막 시작되려는 참이니까 말이다.
그 시작이 바로 오늘의 사냥이었다. 국상 중이던 그동안의 우울함을 떨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뜻으로, 황제부터 율천국의 만조백관이 모두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장소는 대과 산맥의 한 줄기가 궐운평야 쪽으로 흘러내려 불쑥 돌출되듯이 솟구쳐 있는 지운산至雲山이었다. 평야에 면하고 있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높이나 산세가 만만치 않게 높고 가팔랐다.
“준비에 차질은 없겠지? 황제 폐하께서도 행차하시는 사냥이니 만전을 기해야 할 게요.”
“그 점은 심려 마오소서. 벌써 오래 전부터 준비한 일이옵니다. 조금도 소홀한 곳이 없을 것이옵니다.”
가겸후 곁에 바짝 붙어선 폐포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가 갑옷 차림이었지만, 그만은 여전히 낡아 빠진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지금 지운산에는 어느 정도의 사람이 가 있소?”
“예, 병사들과 몰이꾼을 합쳐 약 오천가량이 먼저 가 있고, 뒤이어 훈련이 끝난 신병들이 모두 참가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허주나 강국이 움직이길 기다리면 되나?”
“쉿! 그 말씀은…….”
돌연 폐포자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주위를 살폈다. 가겸후에게 말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가겸후도 뭔가 생각했는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중간에 숙소와 쉬어 갈 곳에 대한 점검도 철저히 했겠지?”
“여부가 있사옵니까. 심려치 마옵소서.”
궐주 창일성에서 지운산까진 삼백 리가 넘는다. 다름 아닌 황제까지 참여하는 사냥이니 가는 발길이 더딜 수밖에 없다. 도중에 적어도 이삼일은 묵어갈 곳을 준비해야 되고, 그 점에 대해 가겸후가 확인한 것이었다.
“이 사냥에 대해 대왕 전하께서 심려하실 일은 없사옵니다. 소생의 마음에 걸리는 건 다만 황후 마마의 심기가…….”
폐포자는 말꼬리를 흐렸다. 최근 들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태자를 잃은 후로 가겸후의 동생인 가 황후의 태도가 확연히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오라비가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했지만, 국상이 진행되는 내내 이쪽을 노골적으로 피했다.
가겸후도 그 점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폐포자가 입을 열자마자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겼다.
“어리석은 것! 한낱 아녀자의 얕은 정에 이끌려 큰 것을 보지 못하니, 쯧쯧쯧.”
“오랫동안 바라셨던 아드님을 잃은 뒤이옵니다. 그 마음의 고통이 크셨으리라 생각되옵니다.”
이건 폐포자의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 아니었다. 권력자의 혈육을 대상으로 속에 든 말을 곧바로 표현할 수 없었기에 내뱉은, 일종의 아부였다.
“흥.”
가겸후는 세찬 콧방귀를 날렸다. 죽은 뒤에 그토록 마음이 상할 거라면, 왜 진즉 다른 황자들을 생산하지 못했느냐는 원망이 그의 가슴에서 부글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지난 일이다. 이 사냥이 끝나고 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릴 터이고, 그때 여동생은 오라비의 위대함을 새삼 실감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황제는 왜 이리 늦는가?”
“황후 마마와의 작별이 길어지고 있나 보옵니다.”
“에이, 칠칠치 못하게…….”
짜증스럽게 내뱉던 가겸후는 급히 말꼬리를 흐렸다. 방금 하려던 욕의 대상이 황제임을 자각한 탓이었다. 아무리 무력한 존재라 할지라도, 부하들 앞에서는 말조심을 해야만 한다.
“출발이 너무 지체되면 병사들이나 백성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소. 그러니 황제 폐하께 다시 사람을 보내도록 하시오.”
“존명!”
복명한 후 폐포자는 느릿하게 가겸후의 곁에서 멀어져 갔다. 황제까지 참가하는 사냥인 걸 알고 이미 창일성 안팎의 병사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총동원되어 전송을 나와 있는 참이었다. 더 이상 지체되면 그들이 술렁일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황제를 부르는 데 아무나 보낼 수는 없다. 자신이 직접 찾아가야 한다고 폐포자는 생각했다.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면, 확실히 하는 게 좋은 법이다.
황제도 오늘은 무장을 갖춘 차림이었다. 비록 실질적인 힘은 없지만, 갑옷을 입고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서 있는 모습이 여느 장수 못지않게 늠름했다.
하지만 황제의 얼굴은 어두웠다. 멋지게 기른 수염이 아니었다면, 그 그늘이 더욱 짙어 보였을지도 모른다.
다름 아닌 황후 때문이었다. 웬일인지 그녀는 한사코 이번 사냥을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황제의 발밑에 꿇어 엎드려 울면서 만류하고 있는 중이었다.
“체통을 지키시오. 황후께서 바닥에 엎드려 있으면 아랫사람들이 불편해하오.”
그러나 기실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황제 자신이었다. 여동생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건 가겸후의 귀에 곧바로 들어갈 게고, 그 뒤는 귀찮은 질문이 이어질 게 뻔하다.
“그러니 이번 사냥은 중지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천첩이 이처럼 바라고 있나이다.”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건 황후께서 더 잘 아시지 않소? 그러니 어서 물러나시오.”
“율천왕은 폐하의 신하이옵니다. 가지 않겠노라고 한 말씀만 하시면 되는 일을 어찌 안 된다고만 하시옵니까?”
‘뻔히 알면서 그런 소릴 하시오!’
하마터면 황제는 그렇게 소릴 지를 뻔했다. 가겸후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자신의 무력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황후가 아닌가 말이다.
“그만 일어서시오. 율천왕은 짐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거요. 그러니 지체해선 안 될 일이오.”
엄격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로 황제는 말했다. 이제 겨우 자신과 부부의 정을 쌓기 시작한 이 아내에게까지 그 오라비의 진노가 미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후도 쉬이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정히 그러시다면 다른 날로 미루시옵소서. 이제 바람도 차가워졌는데, 원행遠行을 하시다 자칫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스럽사옵니다.”
“그 점은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나이다.”
황후의 말에 대한 대답은 엉뚱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마침 도착한 폐포자였다.
“어서 오시오.”
말로는 반겼지만, 폐포자를 대하는 황제의 심정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황후와 같이 있는 이런 곳까지 허락도 없이 불쑥 찾아드는 불경함 때문이었다.
“폐하, 율천왕이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어서 행차를 하시지요.”
“알겠소.”
황제로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우물쭈물하면 황후가 나서게 된다.
그래서 이쪽의 뜻대로 되면 좋겠지만 그래 봐야 헛일이고, 결국 그녀의 입장까지 난처해지고 만다. 그 전에 움직이는 게 상책이었다.
황후가 엎드려 있는 곳을 피해 황제는 걸음을 옮겼다.
“폐하!”
뒤에서 황후가 불렀지만, 황제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겸후가 이처럼 요구하는 일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이미 자신들 부부에겐 없었다.
황제의 어가御駕가 창일성의 서문을 빠져나온 건 미시 중반 무렵이었다.
* * *
딸을 출가시킨 이후로 증두신은 부쩍 활기를 되찾았다. 국상도 끝났으니 이번에야말로 식운관을 완전히 수중에 넣겠다며 의욕을 불태우는 중이었다.
두 명의 아들 중 장남인 증화린曾華隣은 이미 대수성으로 보냈다. 만약의 경우 탄금성으로 가서 편월에게 몸을 의탁하라는 말도 은밀히 해 뒀다.
차남인 증화용曾華勇은 슬하에 데리고 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가 닥치든 보호할 수 있는 힘 정도는 자신에게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아니, 최악의 경우 부자가 함께 죽어도 괜찮다는 각오도 서 있었다. 장남인 증화린만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가계는 이어질 테니까.
‘이제 국상도 끝났으니 허주도 전력을 기울여 영산을 탈환하려고 할 게다. 그때를 기해 우리도 식운관을 장악한다.’
최근 들어 증두신은 육전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상초국의 수군이 연전연패하는 까닭도 있었지만, 역시 전쟁의 승패는 바다보다는 땅에서 확실히 갈린다는 걸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식운관을 점령한다면 상초국의 압력도 훨씬 가벼워지겠지.’
망루에 올라 각 부대별로 집결하기 시작한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증두신의 생각은 거듭되었다.
실제로 수군의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상초국의 지원병들은 근래에 이르러 눈에 띄게 유순해졌다. 국상 초기에만 해도 이런 기회가 없다며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자고 했던 걸 돌이켜 보면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 식운관까지 강국의 힘으로 점령한다면, 상초국은 이름 그대로 지원군으로만 활용할 수도 있을 터였다.
거기다 하루가 다르게 세력이 커져 가는 위휘군도 있다. 지금 당장은 그들의 손을 빌린다는 게 낯간지럽지만, 언젠가는 유용하게 쓸데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허주의 움직임인데…….’
아무래도 강국 단독으로 식운관을 도모하는 건 무리다. 허주가 영산을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고 난 뒤에 공격을 감행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 시기에 대해서도 증두신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심복인 밀영이 벌써 허주에 간인을 파견해 뒀으니, 그 보고에 따라 결정하면 그만이었다. 그동안은 병사들을 보다 강하게 훈련시켜 둬야만 한다.
“전하, 전하!”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증두신은 망루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이환이 부산스러운 발길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오, 이 장군?”
“큰일 났사옵니다, 전하.”
아래에서 큰 소리로 말하던 이환은 주위를 의식하고는 입을 닫은 채 망루를 달려 올라왔다.
“좀 침착하시오. 큰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오? 혹시 합진성으로 간 화강이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아니옵니다. 지금 상초국의 대원수 소촌이 이리로 오고 있사옵니다.”
“그게 무슨 큰일이란 말이오? 그동안 작전 회의석에서도 여러 차례 만났었는데…….”
“그자가 엉뚱한 소릴 할 것 같사옵니다.”
“엉뚱한 소리라니? 설마 식운관 공격을 중단하라는 건 아니겠지?”
“그 일이라면 소장이 이렇게 달려오지도 않았을 것이옵니다. 그들은 아마 왕자 저하 중 한 명을 상초국으로 보내라는 요구를 할 듯하옵니다.”
“뭣이?”
순간적으로 증두신은 말문이 막혔다. 과연 그런 일이라면 역전의 명장인 이환도 이처럼 놀라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대체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소?”
“방금 상초국의 진막에 보급 물자를 전달해 주고 온 유 장군에게 들었사옵니다. 아마 그들이 회의하는 걸 지나다 들은 모양이옵니다.”
“이놈들이 감히!”
증두신은 망루의 난간을 강하게 내리쳤다. 이환도 직접 들은 얘기는 아니지만, 군문의 보고에 거짓이나 과장이 있을 수는 없다. 그건 바로 이 말이 사실이란 걸 의미한다.
“자세한 건 소촌이 도착하면 들어야겠지만, 그 전에 전하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준비? 대체 무슨 준비를 할 수 있겠소?”
증두신의 말에 이환은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아버지인 전대 강왕 증선회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침착하기만 했던 그였다.
그런데 아들 한 명을 볼모로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증두신은 흡사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조금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이환의 지레짐작일 뿐이었다. 지금 증두신은 어느 때보다 냉정한 정신으로 말을 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지금 강국의 힘으론 상초국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할 수 없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만약 그게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라 거부하게 된다면, 그때는 일전을 불사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율천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상초국과 싸우게 된다면 강국은 그 뿌리조차 남기 어려울 게 뻔하다. 준비 같은 건 있을 턱도 없고, 해 봐야 말짱 헛일이 되고 말 게다.
“만약 저들이 그리 무리한 요구를 대왕 전하의 면전에서 한다면 소장에게도 생각이 있사옵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소천을 쳐 죽이고……!”
“이 장군.”
흥분해서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는 이환을 증두신이 조용한 어조로 불렀다.
“아직 우리는 상초국으로부터 어떤 얘기도 들은 게 없소. 그들의 얘기를 들은 연후에 우리가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게요.”
“마땅히 그리하셔야지요.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대하실 건지에 대한 마음가짐만은 단단히…….”
“내가 그들 앞에서 추태라도 보일 것 같소?”
얘기가 계속될수록 조용해지는 증두신의 어조에 이환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말은 웃기는 것이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준비를 한단 말인가?
“난 여기 있겠소. 이 장군은 내려가 소촌이 오길 기다렸다가 데려오시오.”
“그럼 여기서 만나시겠사옵니까?”
“그렇소.”
“알겠사옵니다.”
이환은 예를 갖춘 후,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망루에서 달려 내려갔다.
내려온 이환은 곧장 편장과 병사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소촌과 그가 이끌고 올 수행원들을 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환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병사들의 배치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촌이 백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거죽성에 들어왔다.
그 점이 또 이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좋은 소식은 늦기 마련이고, 빨리 오는 소식은 불길한 게 대부분이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이환은 소촌을 증두신 앞으로 안내해 갔다.
“대왕 전하를 뵈옵니다.”
소촌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중한 예를 갖췄다. 입고 있는 갑옷이 무색해 보일 지경이었다.
“어인 일이오? 수군의 복구는 모두 끝났소?”
증두신은 이환이 깜짝 놀랄 정도로 유연하게 소촌을 맞았다.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하옵니다. 그보다 오늘은 우리 국왕께서 소장을 통해 지시하신 일을 전해 드리고자 왔사옵니다.”
“호오, 귀국의 왕께서? 그래, 대체 무슨 일이오?”
“다름이 아니라 이 나라 왕자 중 한 분을 우리나라의 귀빈으로 모시고 싶다는 전갈이옵니다.”
“모자란 아들놈을 귀빈으로 맞아 주시겠다니 고맙기 짝이 없구려. 하지만 아직은 어린지라 먼 뱃길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으니, 사양하겠다고 전해 주시오.”
너무도 능숙하게 소촌을 요리(?)하는 증두신을 보며, 이환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딸을 출가시키고, 장남을 대수성으로 보낸 이후 부쩍 기력을 회복했다 싶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허어, 이건 소장의 말이 부족했던 것 같사옵니다. 실은 조만간 우리 국왕께서도 강국으로 건너오실 의향을 비치셨습니다. 그 길잡이로 왕자 중 한 분을 보내신다면, 양국의 동맹이 더욱 공고해지리라 생각되옵니다.”
“그렇다면 더욱 우리 쪽에서 사양해야 될 일이라 생각되오. 귀국 왕의 안내를 맡는 막중한 일에 어린아이를 보내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되면 꼴이 우습게 되지 않겠소?”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그리고 사리에 맞게 받아넘기는 바람에 소촌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런 자리에서 당황스러운 빛을 보일 정도로 연륜이 낮은 소촌이 아니었다.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큰왕자님의 보령이시면 적당할 듯하나, 그분을 보내라고 한다면 무례한 짓이겠지요. 우선 우리나라 왕께 대왕 전하의 뜻을 전하겠사옵니다.”
“오, 모쪼록 과인의 뜻을 오해하지 않으시도록 잘 전해 주시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하오면 소장은 이만.”
처음보다 훨씬 정중한 예를 갖춘 후 소촌은 망루에서 내려갔다.
“소장은 탄복했사옵니다.”
소촌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이환은 감격에 찬 눈빛으로 증두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심하지 마시오. 다음에는 더욱 강하게 요구를 해 올 게요.”
이환과는 달리 증두신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소촌이 그처럼 쉽게 물러간 게 오히려 더 찜찜했다. 그 점은 이환도 물론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제 시간을 좀 더 벌게 되었으니, 이쪽도 보다 철저한 준비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식운관부터 친다!’
이건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힘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난세이다 보니, 상초국의 지원군이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식운관을 강국군이 장악하게 되면 그만큼 발언권이 강화된다. 왕자를 볼모를 보내라는 따위의 요구 정도는 거부하거나, 적어도 무한정 연장시킬 수는 있을 터였다.
“다시 한 번 병사들을 점검해 보시오. 허주가 움직이는 걸 보고, 그 후에 우리들도 출병합시다.”
“존명!”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힘차게 복명한 이환은 서둘러 망루를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