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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지연戰國之緣 3 (44/66)

전국지연戰國之緣 3

1

위휘군이 합진성으로 철수해 무장을 채 풀기도 전인 바로 다음 날, 강국에서 출발한 증화강 일행도 성으로 들어왔다.

물론 편월에게 그녀를 만나 볼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사이 훌쩍 불어난 병사들을 재편성하고, 또 몇 차례 싸움에서 공훈을 세운 자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도 편월이 잊지 않은 것 한 가지는 막주로 사람을 파견하는 일이었다. 물론 광운과의 연락을 위한 것이었고, 될 수 있다면 서로를 향해 군사를 움직이자는 얘기도 하고 싶었다.

인원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화응을 포함해서 오래전부터 잡가군에 배속되어 있던 사람이 셋, 그리고 새로 편입된 자가 둘이었다. 그중엔 윤주성 전투 때에 투항해서 이름까지 위휘로 바꾼 자도 끼어 있었다.

처음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부터 편월은 위휘에게 묘한 친근감이 들었다. 그 뒤에 이어진 몇 차례의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른 포상을 거절했을 때는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윤주에 있는 다른 성에 대한 경계도 게을리 할 수 없는 문제였다. 비록 모충은 건주로 쫓아 보냈다지만, 그걸로 윤주 전체를 장악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만하면 올해 추수는 무사히 끝날 것 같으니, 겨울 동안 병사들을 휴식시키는 한편 군사를 더 늘려야 한다.’

사실 편월은 일 년에 세미가 어느 정도 들어오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또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숫자에는 언제나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힘이 모든 것에 우선되는 시대이고, 최근 치른 몇 차례의 전투에서 병력의 부족을 절감했다. 군사만 많았다면,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었을 터였다.

편월은 우선 군사를 오만으로 늘릴 생각이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숫자가 약 사만 정도, 그중에서 강국의 원군 오천을 돌려보내면 일만 오천을 더 충원해야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고, 또한 막대한 경비가 드는 일이기도 하다. 당장 올해 거둘 세미로 병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 편월이었다.

갑자기 편월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계산을 할라치면 이처럼 골치부터 지끈거렸다.

이것도 위휘군이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였다. 전쟁을 하라면 다들 신들린 사람들처럼 잘 싸우지만, 만 명의 군사가 한 달을 지내려면 어느 정도 군량과 부식 그리고 자금이 필요한지에 대해선 주먹구구식으로 대처할 뿐이었다. 있으면 갖다 쓰고, 없으면 보충한다는 식이란 얘기다.

일개 병사로 종군하거나, 일이천 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린 하급 장수라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병사를 오만으로 늘리고, 또 그 군세를 하루 이틀 유지하고 말 게 아니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런 일은 역시 담 장군과 상의해 보는 게 좋겠지.’

아무래도 담개는 정규군 출신이니 이런 일에 대해선 보다 체계적으로 배운 게 있을 터였다. 편월은 곧장 사람을 시켜 담개를 불러오라고 했다.

담개는 송지와 함께 왔다. 그것도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빠른 등장이었다.

“담 장군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그보다 주군께 드릴 말씀이 있소.”

편월이 얘기를 꺼내기 무섭게 담개는 그의 말을 잘랐다. 뭔가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편월은 담개의 말부터 먼저 듣기로 했다. 주변에 있는 나이와 경험이 많은 장수들로부터 배운 게 있다면, 다른 사람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양절이면 황태자의 국상이 끝난다는 건 주군도 잘 아실 게요.”

“물론 알고 있소.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소?”

“국상이 끝나면 강국에선 당장 혼례를 올리라고 할 것이오. 증두신의 딸은 벌써 이 성에 와 있기도 하고.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있으신지 묻고 싶소이다.”

“그건 나의 사사로운 일이오. 그보다 내년 봄까지 병력을 오만으로…….”

“그게 어째서 사사로운 일이오? 이제 곧 우리는 나라를 세울 거요. 그렇게 되면 주군 한 사람의 아내가 아니라 국모를 맞게 되는 셈인데, 어찌 사사로운 일이라 하시오!”

담개의 언성이 격해졌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오늘 이 문제를 매듭지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주공은 증두신의 딸을 만나 본 적이나 있소?”

“만나야 하오?”

“만나지 않고 어떻게 그 사람 됨됨이를 알겠소? 그러니 오늘 중으로라도 만나도록 하시오.”

강요하는 듯한 담개의 말에 편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만나 보는 거야 뭐 그리 어렵겠냐만, 그 사람의 됨됨이까지 아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 일이라면 나보다는 두 분 노장께서 만나시는 게 나을 듯하오. 아무래도 나보다야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실 테니…….”

“허어, 이건 또 해괴한 말씀이로군. 그럼 우리 두 사람이 만나 보고 반대를 한다면 혼인을 치르지 않으실 생각이오?”

“혼인을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소. 강국에는 신세도 지고 있으니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겠지. 다만 그녀의 됨됨이에 따라 그 대우가 달라지겠지. 그러니 두 분이 먼저 만나 보시오.”

“알겠소.”

담개와 송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온 건 편월이 혼인할 결심을 굳혔는지 어땠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걸 확인했으니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소장을 부르신 이유가 뭐요?”

자신의 볼일을 끝내자 비로소 담개는 편월에게 물었다.

“우리 위휘군을 오만으로 늘리고 싶소. 물론 강국의 지원군을 빼고 말이오. 그러자면 어느 정도의 경비가 소요될지 뽑아 주시오. 그리고 우리가 거두는 세미로 충당할 수 있는지도.”

편월의 말을 들은 담개와 송지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들 역시 자신이 없다는 걸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

갑자기 송지가 자신의 무릎을 세차게 내려쳤다.

“마침 좋은 사람이 한 명 있소. 포란성에서 투항한 사람인데, 왜 주군도 한번 보시지 않았소? 개묵이라고…….”

“오, 나도 기억이 나오. 그때 편지를 써 줬었지. 그러고 보니 사 장군이 계산에 밝은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었소. 그런데 그가 지금 여기 와 있소?”

“예. 거가군에 편입되어 있소이다. 지금 불러오리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소. 송 군감이 알아서 처리하고 보고만 해 주시오.”

“알겠소. 그리고 탄금성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허주와 강국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었소.”

송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 같은 난세의 이합집산은 흔한 일이었고, 허주와 강국이 동맹을 맺는다고 해서 위휘군이 손해 볼 건 없기 때문이다.

“가겸후가 어지간히 압박을 하고 있는 모양이구먼.”

담개가 슬쩍 끼어들었다. 허주와 강국이 유난히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전격적으로 손을 잡을 만큼 친밀하지도 않았다. 둘 다 율천국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지 않았다면 동맹은 생각지도 않았으리라.

“우리에게 나쁠 건 없겠다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쁘다니? 이건 오히려 반가운 일이오. 우리가 서쪽으로 향하면서 늘 신경을 썼던 건 허주가 아니오? 그런데 허주가 주군의 장인 나라와 손을 잡았으니 배후는 안심해도 될 거요.”

“그렇다고 전적으로 믿지는 마시오.”

송지의 말은 괜한 게 아니었다. 시대의 험난함은 그대로 인간 불신으로 이어져 도대체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어느 정도의 의심은 항상 간직한 채 사람이든 사물이든 대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우리가 언제 증두신을 믿었소?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담개도 한마디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광운에게 갈 사람들의 준비가 끝났을 거요. 그들을 불러 주시오.”

나가려는 두 사람에게 지시를 내린 후, 편월도 몸을 일으켜 출입구와는 다른 쪽 문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창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사람도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하고, 밖으로 나가면 합진성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전망대의 구실도 겸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곳에 서서 편월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윤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합진성이니만큼 성주의 집무실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편월은 오히려 그게 답답했다. 평생을 전장으로만 뛰어다닌 탓에 차라리 야외의 허름한 진막이 훨씬 편했다.

‘이것도 적응해야 되겠지.’

어렸을 때는 큼직한 성 하나만 가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 꿈이 이루어져 이젠 네 개의 성과 석축산 산채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어느 정도 불편한 것은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튼튼한 바닥과 난간으로 되어 있어, 보행에 아무런 불편 없이 집무실을 한 바퀴 돌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전망은 말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합진성의 구석구석은 물론, 외성 밖으로 펼쳐진 아스라한 평야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

‘이만한 성을 갖고 있으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졌다는 건 역시 백성들을 잘못 다스린 탓일까?’

지난번 전투 때 불타거나 파손된 건물들을 복구하는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편월은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윤주성을 지키고 있던 오치는 그 백성들은 물론 병사들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그런 상태로는 애당초 싸움이고 뭐고 해 볼 수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합진성의 경우는 얘기가 조금 달랐다. 어디에도 모충이 학정을 한 흔적은 없었다. 비축된 군량이나 물자가 엄청났지만, 그건 그만큼 성이 크다는 의미지 백성들을 쥐어짠 건 아닌 듯했다.

제대로 다스려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하겠지만, 다른 걸 떠나서 한 가지만 봐도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바로 군량이나 물자를 쌓아 둔 창고가 멀쩡하다는 것 말이다.

학정에 시달려 과도한 세미를 내는 백성들은 언제나 통치자에게 불만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통치자가 약해지거나, 이번처럼 싸움에 져서 성을 버리고 쫓겨 가면 백성들은 단번에 폭도로 변한다. 그동안 뺏긴 걸 되찾기 위해 양곡이나 물자를 비축해 둔 창고를 열고 약탈을 감행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합진성에선 어디에도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백성들은 모충에 대해선 불만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모충이 그처럼 말도 안 되는 패전을 하게 된 건 다른 데 이유가 있다는 뜻이 된다. 편월은 그게 궁금했다. 뛰어난 무장은 승전보다는 패전에서 더 많은 걸 배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주군, 부르셨소이까?”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화응과 위휘를 비롯한 다섯 명이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모두가 평범한 농부 차림이었다.

“준비는?”

“언제라도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오. 건주나 파양주는 모두 신경이 곤두서 있을 테니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서 움직이시오.”

“염려 마십시오. 결코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광운에게 주는 내 전갈은 단단히 숙지했소?”

“이 속에 새겨 두었습니다.”

화응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다 표정을 살짝 굳히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소청이 있소이다.”

“청이라니? 말해 보시오.”

“소장이 돌아올 때까지 강국 공주와의 혼례를 연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 혼례를 연기하라고?”

편월은 어리둥절해졌다. 설마 화응이 이런 청을 하리라곤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탓이었다.

그러다 퍼뜩 깨달은 바가 있었다. 어쩌면 화응은 유화를 데려오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편월은 강한 눈빛으로 화응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화 장군,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마시오.”

화응의 얼굴에 서려 있던 긴장이 천천히 풀어졌다. 편월이 자신의 속내를 짐작하고 먼저 말해 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이건 소장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오. 우리 근위대 전체의 생각이오.”

세찬 화응의 대꾸에 편월은 문득 맹아를 떠올렸다. 이건 분명 그가 조장한 것일 터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강국의 공주와 혼례를 치를 것이오. 이건 내가 가지고 있는 유화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요. 그러니 화 장군은 맡은바 임무에만 충실하시오.”

편월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말투 자체에는 저항하기 힘든 힘이 실려 있었다.

“알겠소. 하지만 광운 장군이 모시고 가라고 하신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소.”

화응은 의외로 강경하게 반발했다. 정허군이 결성되기 전에 짧게 신세졌던 기억을 여태 지우지 못하고 있는 탓이었다.

어쩌면 그건 외롭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일의 삶을 기약할 수 없는 잡가군으로 떠돌아다니다 보면 아주 작은 인정에도 쉽사리 감동하는 법이다.

그보다 화응의 말이 편월을 놀라게 했다. 정말이지 광운은 유화를 보낼지도 모른다. 그럴 땐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자못 혼란스러웠다.

편월이 유화를 싫어하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여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증두신의 딸과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다분히 정략적인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지만, 그래도 유화 아닌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게 되었다는 건 부담일 수밖에 없다.

편월이 말이 없자 화응은 재차 강조했다.

“만약 광운 장군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소장은 거역하지 않을 생각이오.”

그 말을 끝으로 화응은 정중한 군례를 갖춘 뒤 물러갔다.

‘흐음.’

홀로 남은 편월은 내심 긴 한숨을 삼켰다. 갑자기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되자 차라리 잡가군으로 떠도는 게 더 속 편하겠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불현듯 편월은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어렸을 땐 광운이 있는 자리에서, 좀 더 성장해서는 장수들이나 병사들과 어울려 더러 마시긴 했지만, 이처럼 혼자 있을 때 생각나는 건 처음이었다.

‘이래서 다들 술을 마시는 걸까?’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라면 ‘맛없다.’였다. 대체 왜 이런 걸 돈까지 내면서 마실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그런 기분이 되자, 술을 마시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편월이 막 사람을 불러 술을 준비시키려 할 때, 무장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군례를 갖췄다. 사람들 위에 서다 보니 술도 한 잔 마음대로 할 틈이 없었다.

“거 장군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거 장군이? 안으로 모시도록.”

거 장군이라면 거규의 딸인 거예홍을 말하는 것이다. 거가군 칠천을 이끌고 지금 위휘군에 배속되어 있는 참이었다.

투구만 벗었을 뿐 갑옷을 단단히 차려입은 거예홍은 묘한 매력을 풀풀 날리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노인을 한 명 대동한 상태였다.

“어서 오시오. 그런데 이분은?”

거예홍을 맞으며 편월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노인이었다.

“계천자計天子라는 별호를 가지신 어른이오. 아버님이 종종 찾아뵙고 배움을 청하기도 하셨소.”

여전히 거예홍의 말투는 남자 같았다. 목소리도 여느 여성보다 훨씬 굵었지만, 그게 그녀의 미모를 손상시키지는 못했다.

계천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집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전혀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분은 왜 데리고 오셨소?”

편월로선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예홍이 까닭 없이 데려오진 않았겠지만,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오셨소. 병법이든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든 뭐든 통달하신 분이니, 주군께 큰 도움이 되실 거라고…….”

“아니, 아니지.”

거예홍의 말을 계천자가 중간에서 잘라 버렸다.

“나는 이미 늙은 사람이야. 만약 내가 여기 있다면, 저 사람과는 끝없이 싸우게 될 걸세. 젊은이는 젊은 사람과 어울려야 해.”

계천자의 말투에 편월은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다. 자신을 함부로 ‘저 사람’이라 부른 게 특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거예홍은 전혀 개의치 않는 걸 보니 계천자의 원래 말투가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어르신을…….”

“자네 부친은 이 늙은이와 뜻이 잘 맞았지. 하지만 젊은이들은 달라.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한창 설치던 때와는 시대 자체도 변했지. 역시 저 사람 곁에는 젊은 사람이 어울려.”

“그럼 어르신께서는 달리 생각해 두고 계시는 분이 있으신지요?”

거예홍의 질문에 노인은 잠시 입을 닫았다. 조금은 곤혹스럽다는 표정이 미간에 서려 있었다.

편월은 잠자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대화로 짐작해 보건대 거규가 계천자를 추천해 자신 곁에 있도록 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이 있긴 하지. 하지만 그를 얻으려면 한바탕 싸움을 치러야 할 걸세.”

“그는 누구고, 어디에 있습니까?”

거예홍이 다그쳐 물었지만, 계천자는 대답하지 않고 편월을 빤히 보기만 했다.

편월은 불쾌했다. 계천자의 말투가 그랬고,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자신의 가슴속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계천자에게서 은연중에 풍기는 위엄에 압도된 점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계산에 밝은 개묵을 본격적으로 발탁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것도 인연인 것 같으니 내 한 가지만 말해 두겠소. 조속한 시일 내에 벽곡성碧谷城을 치시오. 거기서 얻을 건 땅이나 성이 아니라 사람이오. 이름은 좌괴左傀!”

그 말을 끝으로 계천자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르신.”

“난 당분간 자네 부친에게 신세를 져야겠네. 이참에 바둑 실력이나 좀 늘도록 도와줄 생각일세.”

거예홍이 불렀지만, 계천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버렸다.

“그럼 소장도 이만.”

거예홍 역시 황급히 군례를 갖춘 후 계천자의 뒤를 따랐다.

그때까지 편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쾌한 기분은 떨쳐 버릴 수 없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야릇한 설렘도 느껴졌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벽곡성을 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좀 더 뒤에, 적어도 이 가을 추수가 끝난 후에 생각해 볼 문제였다.

2

정오가 지났지만,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공성전이 아니라 시가전으로 바뀌었기에 더욱 치열하고 처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밤부터 계속된 이 전투는 다른 누구보다 곽준방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평생토록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무장이라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문생이 마국립을 무사히 구출해 왔고, 그 사실이 이 늙은 장수를 고무시켰다. 그대로 쓰러져 버릴 듯한 피곤함을 잊고 진두에 서서 지휘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윤 대부인이 죽은 건 유감이지만, 누구도 그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마국립을 구했으므로 적어도 진남후의 후계는 이어졌다고 위안하며, 싸우고 또 싸울 뿐이었다.

“대장군.”

북문에 면한 연무장에 본진을 두고 지휘하고 있는 곽준방에게 여상계가 물이 든 대통을 내밀었다.

“이제 전투가 한고비 넘은 것 같소이다. 해 지기 전에 끝낼 수 있을 겁니다.”

“호윤천을 너무 가볍게 생각지 말게.”

한 모금 마신 대통을 다시 넘겨주며 곽준방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피로에 전 목소리는 금방 물을 마셨음에도 까칠하게 메말라 있었다.

여상계도 호윤천을 쉽게 생각지는 않았다. 전투가 한고비 넘었다는 것도 성내에 흩어져 있던 호윤천군을 내성으로 몰아넣었다는 의미일 따름이다. 거기서는 아직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보다 백성들은 어떻게 됐나?”

“많은 사상자가 나긴 했지만 손이 닿는 백성들은 모두 성 밖으로 피신시켰소이다.”

여상계의 대답에 곽준방은 긴 한숨을 토했다. 마용승의 후계를 세우기 위한 싸움이었다지만, 그 와중에 죄 없는 백성들이 치른 희생은 그대로 상처로 남는다. 세상 어떤 걸로도 결코 상쇄될 수 없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거듭할수록 호윤천 부자에 대한 곽준방의 적개심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호윤천 부자는 반드시 죽여야만 하네.”

이건 곽준방이 의식하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 밖으로 새어 나온 것이었다.

“달리 말씀하실 것도 없는 일이오. 그들을 살려 두면 언제 어디서 또 음모를 획책할지 모르오. 이 기회에 아주 씨를 말려 버려야지.”

단호하게 말을 맺으며 여상계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자신의 부대가 공격에 투입될 차례였다. 이렇게 번갈아 쉬어 주지 않으면 병사들은 창을 들 힘까지 모두 소진한 채 그대로 널브러져 버릴 터였다.

“이번엔 반드시 호윤천 부자 놈의 모가지를 베어 가지고 오겠소.”

다시 한마디 한 후 여상계는 투구 끈을 졸라매며 부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말이야 씩씩하기 짝이 없었지만, 곽준방은 크게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여상계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호윤천이 그만큼 녹록지 않다는 얘기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팽요가 이마 가득한 땀을 닦으며 걸어왔다. 그을음과 먼지 그리고 피를 잔뜩 덮어쓰고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지독한 놈이오.”

진막 안에 있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털썩 엉덩이를 걸치며, 팽요는 숨 가쁜 한마디를 내뱉었다. 물론 호윤천 부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상황은 어떤가?”

“내성에 몰아넣고 연방 공격을 가하고 있지만, 놈들도 죽기 살기로 저항하고 있소. 쉽지 않겠소이다.”

여상계와 달리 팽요는 상황을 다소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곽준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 됐든 지면 진남후에게 반기에 든 역적이 되는 싸움이다.

게다가 당금 진남후인 마국립은 곽가군의 수중에 들어와 있다. 호윤천으로선 어떻게든 이 상황을 역전시켜야만 한다. 생명을 돌보지 않고 저항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시간을 너무 끄는 것 같아 염려스럽소. 유웅이 움직였다면 인근의 다른 성에서도 그냥 있지는 않을 텐데.”

팽요의 걱정은 그대로 곽준방의 것이기도 했다. 그 역시 이 싸움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시간이라고 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오늘 중으로 이 싸움을 끝내야 될 걸세.”

“그러기엔 병사들이 너무 지쳤습니다.”

“그건 적들도 마찬가지일세. 오히려 우리보다 더 지쳐 있을 걸세. 이 기회에 호윤천 부자를 제거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걸세.”

곽준방의 말에 팽요는 입을 닫았다. 호윤천 부자를 죽이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탓이었다.

갑자기 진막 안쪽의 장막 뒤에서 잡아 찢는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곽준방이 야전에 진을 칠 때 침소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오, 공자께서 깨어나신 모양이군.”

곽준방은 반색을 띠었다. 구문생이 구출해 왔을 때부터 마국립은 잠이 든 것처럼 혼절해 있었다. 업혀 있었다지만, 그처럼 격렬했던 싸움판을 뚫고 나왔으니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얼굴이라도 잠깐 볼까? 많이 놀라셨을 테니.”

몸을 일으킨 곽준방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장막 안에서 달려 나온 사람이 있었다. 곽가군에 종군하고 있는 군의軍醫였다.

“공자께서 좀 이상하옵니다.”

“뭐라고? 이상하다니?”

군의의 얼굴이 심상치 않은 걸 본 곽준방은 그대로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국립은 침상 위에서 마구 몸부림치고 있었다.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그 어린 얼굴의 칠공七孔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대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파르르 떨리는 음색으로 곽준방은 군의에게 물었다. 처음 구출해 왔을 때만 해도 비록 혼절은 했지만, 몸엔 아무 이상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깨어나자마자 저 모양이다.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지 않고서는 저럴 리가 없다.

“어떤 일인지 당장 알아내라. 당장 치료를 시작해!”

발악하는 것처럼 명을 내리면서, 곽준방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단순히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약 이대로 마국립이 죽기라도 한다면, 곽가군은 그야말로 진남후의 대를 끊어 버린 만고의 역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건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일이다. 만에 하나 마국립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고, 그게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곽가군의 진중으로 데려가서 독살을 시켰다고 해도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치료가 어렵사옵니다. 아무래도 진중이라 약도 부족하고.”

“뭣이? 그럼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이냐?”

“조속히 성으로 돌아가시는 게…….”

“그건 안 된다!”

군의의 말을 곽준방은 성급하게 잘라 버렸다. 이제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호윤천을 궁지에 몰아넣은 참이었다. 여기서 손을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소인으로서도 달리 손쓸 방도가 없사옵니다.”

“끄으음!”

신음과도 같은 기성이 터져 나왔다. 얼굴까지 벌겋게 상기된 걸 보면, 그가 지금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대장군, 잠시 이쪽으로.”

팽요가 재빨리 곽준방을 끌어당겨 예의 의자에 앉혔다. 순간적인 노기를 참지 못해 군의를 베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진정하고 계시기를.”

다시 한 번 말한 후 팽요는 장막 안으로 들어가 군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를 하라고 지시한 후 나왔다.

곽준방도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칠 만큼 용렬한 위인은 아니었다. 잠시 쉬자 냉정을 회복할 수 있었고, 곧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소장은 마 공자를 구해 낸 것으로도 충분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되오. 대장군의 의중은 어떠신지요?”

계속되는 곽준방의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진 팽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만 철수해도 괜찮지 않느냐는 은근한 권유였다.

그 점을 모를 곽준방이 결코 아니었다. 다만 손아귀에 다 쥐었던 호윤천 부자의 목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온다고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막 안에서 들려오던 마국립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군의가 모종의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겠지만, 그 정적이 오히려 두 사람의 가슴에 불안한 그늘을 던져 주었다.

“대장군,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팽요는 조바심이 났다. 언제부턴가 곽가군의 작전은 모두 세우다시피 하게 되었으니, 곽준방이 빨리 어떤 결단을 내려야 거기에 맞춰 병력을 운용할 수 있을 터였다.

“팽 장군의 생각은 어떤가?”

마침내 곽준방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자신으로서는 결단을 내리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우선은 철수를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마 공자를 모시고 있는 한 명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걸 앞세워 각 성의 성주들을 회유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 병사들이 너무 지쳐 있습니다. 당장 철수는 안 하더라도 쉬게는 해 줘야 합니다.”

“여기서 물러가야 하는가?”

곽준방은 나직한 탄식을 토했다. 이성은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고 속삭였지만, 감정적으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갑갑한 공기를 깨뜨리며 군의가 장막 안에서 나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선은 안정을 시켰습니다만, 조속히 성으로 옮겨 제대로 된 치료를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군의의 이 말이 곽준방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천천히 병력을 빼서 철수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게. 호윤천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존명!”

곽준방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팽요는 진막 밖으로 달려 나갔다. 촌각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누굴 남겨 둬야 하는가?’

주력은 조천성으로 철수를 시켜야겠지만, 적어도 일만 정도는 남겨 끝까지 호윤천 부자를 공격하고 싶은 곽준방이었다. 다섯 편장 중 누가 그 일에 적격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여기서 철수를 한다면 호윤천은 입김이 닿는 성주들을 움직여 조천성을 공격해 올 게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병사 한 명이 아쉬울 터였다. 누굴 남기고 간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노릇, 전원을 조천성으로 철수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곧 조천성으로 돌아갈 것인즉, 그대는 지금부터 공자 곁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말도록.”

마국립의 상태가 마치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군의에게 곽준방은 엄격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화들짝 놀란 군의는 다시 장막 안으로 사라졌고, 곽준방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부터 하나 둘 돌아올 장수들에게 자신의 뜻을 설명해 줘야 한다.

곽준방이 진막 밖에 마련된 의자에 앉자마자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주변을 지키는 병사들을 붙잡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장군을 뵙게 해 주시오! 결코 수상한 자가 아니오. 서수라고, 서수라고 하면 대장군께서는 아실 게요. 그러니 제발 뵙게 해 주시오!”

‘서수?’

고함 속에 섞여 나온 이름을 들은 곽준방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데려오너라.”

곽준방은 얼른 명을 내렸다. 서수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게 사뭇 의아한 일이었다. 마용승이 죽은 후에도 그는 호윤천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곽 장군.”

병사들을 대할 때와 달리 서수는 조용하고 단정한 어투로 인사를 했다. 그에게 있어 곽준방은 대장군이 아니었기에 호칭도 다른 장수들과는 달랐다.

“용케도 그 북새통에서 몸을 빼내셨소이다그려. 그래, 그동안 잘 지내셨소?”

곽준방의 어조는 다분히 뒤틀려 있었다. 지금 서수는 호윤천에게 빌붙어 있다가 사세가 불리해지자 몸을 빼낸 변절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을 간파한 탓일까. 갑자기 서수의 눈매가 붉어지더니 주르륵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생에 대한 곽 장군의 생각이 어떻든 이 몸은 상관치 않겠소. 다만 윤 대부인의 서거는 애통하기 짝이 없소이다. 그 시신만은 따로 밀장密葬해 뒀으니, 다른 날에 곽 장군의 손으로 후히 장사를 지내 주시기 바라오.”

“뭣이? 윤 대부인의 시신을?”

곽준방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마국립을 구하기 바빠서 그랬지만, 구문생도 거둘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윤 대부인의 시신이었다. 그만큼 격전이 치열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수가 그 시신을 거둔 모양이었다. 그걸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했을 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조금은 틀린 게 아닐까 하고 곽준방은 생각했다.

“그래, 시신을 모신 위치는?”

“내성의 연못가에 있는 해묵은 매화나무 아래 묻었소이다.”

“큰일을 하셨소이다. 애쓰셨소.”

“그 말씀은 감당하기 어렵소이다. 측근에 있으면서 공자께서 성장하실 때까지 무사하시길 바랐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죽어서도 선대 진남후를 뵐 낯이 없소이다.”

울먹이는 통에 서수의 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도 그 속에 깃든 충정만은 누구의 귀에도 절절하게 들렸다.

“충성을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다행히 공자께서 여기 계시니, 몸을 아껴 뒷날을 도모하시는 게 좋을 거요.”

처음 품었던 좋지 않았던 마음을 싹 씻어 버린 곽준방은 오히려 서수를 위로했다. 그러고 보니 광운과 관계가 깊었던 죽영이 서수의 도움으로 막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떠올랐다.

“우린 곧 조천성으로 철수할 거요. 그때 서 선생도 함께 가십시다. 가셔서 공자를 보필하시면서 우리들도 도와주시오.”

“철수를 하신다니요? 이제 곧 호윤천 부자를 죽일 수 있는데, 여기서 물러나실 생각입니까?”

펄쩍 뛸 듯이 따지고 드는 서수에게 곽준방은 어쩔 수 없이 마국립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자신도 끝장을 보고 싶지만, 진중에서는 치료를 할 수 없으니 훗날을 기약하자면서 달래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은 서수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아직은 호윤천 부자의 명운이 다하지 않았다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서 선생께서도 준비를 서둘러 주시오. 지금 공격하는 병사들이 물러 나오면 그길로 곧장 철수할 것이오.”

“아니, 소생은 조천성으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뭐?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이오?”

“소생은 막주로 가 볼까 합니다.”

“막주라면, 광운 장군에게?”

“그렇습니다.”

“딴은…….”

곽준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광운에게 사람을 보내 연락을 취할 참이었다. 영욱성을 공격하느라 미처 일을 시작하지 못했는데, 서수가 그곳으로 가겠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럼 굳이 조천성으로 가자고 강요하진 않겠소. 대신 광운 장군에게 내 말을 전해 주시오.”

“곽 장군의 뜻은 알고 있습니다. 서방정변이니 뭐니 해서 사주에 묶여 있을 게 아니라 곧바로 파양주로 치고 올라오라는 말씀이겠지요.”

“바로 그렇소!”

“알겠습니다. 이곳의 상황과 더불어 상세히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광운 장군으로 하여금 곽 장군께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소.”

“그럼 소생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갈 길도 멀고, 또 얼쩡거리고 있으면 철군하시는 데 방해만 될 테니…….”

“경황 중이라 인사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소. 부디 몸조심하시오.”

곽준방도 더 이상 잡지 않고 서수를 전송했다.

진막 앞을 떠난 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쪽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광운에게 가고 싶었다.

3

강국과의 동맹을 크게 반기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허주의 노장 도연각이었다.

지난번 정허군과의 전투 이후로 대인성주로 부임한 도연각은 그때부터 초조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혹시라도 조환이 정허군의 배후를 치라는 명을 내리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사실 도연각은 편월과는 싸우기가 싫었다. 부하들 앞에서는 애송이니 하룻강아지니 하는 말로 그를 칭했지만, 그건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도연각은 편월이 좋았다.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전장을 누볐다는 게 신기했고, 갓 열 살이 넘었을 때는 일군의 장수가 되어 그 진퇴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늙어 오그라든 혈관에도 새로운 피가 힘차게 요동치는 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 참에 강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편월이 증두신의 사위가 된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그와도 더 이상 싸울 일은 없을 터였다.

“도 장군, 오늘은 한가해 보이는구려.”

연무장 한편에 서서 병사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도연각에게 조강이 다가오며 말을 붙였다. 어른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지만 얼굴과 목소리에서 앳된 티가 역력했다.

“나오셨소, 공자?”

“무예 수련을 마치고 오는 길이오. 이제 도 장군께 병법 강의를 받을 차례지요?”

조강의 말에 도연각은 소리 내어 웃었다. 뭐든 배우려는 태도가 귀엽기도 했고, 드센 성정의 어머니 때문에 일찍 그 슬하를 떠나야 했던 게 안쓰럽기도 했다.

“오늘은 병법 따위 집어치우고 병사들이 훈련하는 거나 잘 지켜보도록 하시오.”

“알겠소.”

대답한 조강은 정말이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훈련을 받고 있는 병사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엇이 보이오?”

약 이각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도연각이 나직이 물었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교육이라 생각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조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소.”

“병사들의 움직임을 잘 보시오.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아실 게요.”

도연각의 말에 조강은 다시 한 번 병사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

조강이 탄성을 토한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뭔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보셨소?”

“첫째와 셋째, 즉 홀수 열은 창을 내지른 후 오른쪽으로 돌고, 짝수 열은 왼쪽으로 돌아서 다시 합류하는군요!”

자신이 뭔가를 발견했다는 게 자랑스러웠으리라. 조강의 목소리는 열에 들떠 한껏 높아졌다.

“목소리를 낮추시오. 병사들의 훈련에 방해가 되고, 또 장수는 평소에 언성을 높이지 않는 법이오.”

도연각은 엄격하게 질책했다. 조환이 맏아들을 자신에게 보낸 건 제대로 된 무장으로 키워 달라는 뜻일 게다. 그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가볍게 지나칠 수가 없다.

“저게 바로 진법이라는 거요. 지금 병사들이 훈련하고 있는 건 파쇄진破碎陣으로서, 많은 적들이 운집한 곳을 돌파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오.”

“알겠소.”

한차례 타박을 들을 탓일까. 조강의 목소리는 다시 낮아졌고, 말투 또한 어른을 흉내 냈다.

“이제 점심때가 다 됐구려. 오늘은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오. 명심해야 될 것은 병사들부터 먼저 배식한 후에 남은 걸 먹도록 하시오. 모름지기 장수 된 자는 그래야 하오.”

“알겠소.”

지지 않겠다는 듯 눈동자를 반짝이며 조강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가 보시오. 할 수 있다면 병사들에게 직접 밥을 퍼 담아 줘 보시오.”

도연각은 조강의 등을 떠밀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이래야만 한다. 편월은 저 나이 때 벌써 한 부대를 지휘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조강은 힘차게 달려갔다.

실제로 곁에 두고 가르쳐 보니 조강은 그저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다. 두뇌가 썩 명석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예에 재능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연각은 조강을 가르치는 게 재미있었다. 모든 걸 열심히 배우려는 바로 저런 자세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좀 더 지켜본 후 도연각은 창고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담전성에서 한 달 치 군량이 도착하는 날이다. 그걸 잘 확인해서 입고시켜야 한다.

거기엔 또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었다. 이 대인성은 허주의 서쪽 끝에 있는, 말하자면 변방이라고 할 수 있다. 조환이나 다른 장수들의 최근 동정을 알자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심복을 통할 수밖에 없고, 군량이 올 때마다 그 사람이 와서 정보를 전해 주는 것이다.

도연각이 창고에 도착했을 때 이미 군량은 입고가 끝난 상태였다. 감독하고 있던 무장들이 정중한 군례를 갖췄지만, 도연각은 가볍게 넘기며 인부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들 많았소. 이걸로 어디 가서 목이나 축이시오.”

도연각은 인부들에게 제법 묵직해 보이는 전낭을 건네줬다. 군량이 들어올 때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장군께 감사드리고 배를 채우고 오게. 나는 그동안 장군께 오늘 입고한 물품과 수량을 보고드리고 있겠네.”

인부들의 두령인 듯한 자가 동료들을 보냈다. 그가 바로 도연각의 심복이었고, 둘만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주공의 근황은 어떤가?”

인부들이 사라지자 도연각은 재빨리 물었다.

“강국과 동맹을 맺은 후로 얼굴이 부쩍 밝아지셨습니다. 황태자의 국상만 끝나면 곧바로 영산을 탈환하시겠다고 잔뜩 벼르고 계십니다.”

“물론 그때는 강국도 식운관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겠지?”

“어디 식운관뿐이겠습니까. 상초국군의 수군들도 이번에야말로 설욕을 하겠다면서 연일 맹훈련을 거듭하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알겠네. 그 외에 다른 소식은?”

“비록 강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주공께서는 위휘군의 동정에 마음을 쓰고 계십니다. 그들은…….”

“위휘군이라니? 아, 정허군이 그렇게 이름을 바꾸었다지.”

무의식적으로 심복의 말을 끊은 도연각은 겸연쩍은 듯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에겐 정허군이 더 친숙해졌나 보다.

“그들은 예상 이상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포란성까지 함락시키고 건주를 넘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서쪽으로 가고 있지 않나? 그런데 왜 주군이 신경을 쓰고 계시는가? 강국과 동맹까지 맺은 마당에…….”

“지금은 위휘군이 욱일승천의 기세지만, 파양주의 저력을 결코 만만히 보셔서는 안 됩니다. 위휘군의 서진이 막혔을 때, 그들이 동쪽으로 창끝을 돌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이 점을 주공께서는 마음에 두고 계시나 봅니다.”

심복의 말을 들은 도연각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 이상 편월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 싶어 한시름 놨던 참이었는데, 조환의 생각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편월의 생각이 어떤지를 먼저 알아봐야겠군.’

심복의 말로 미루어 짐작건대 조환은 편월이 먼저 도발하지만 않으면 굳이 공격할 의사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역시 중요한 건 편월의 의중이다. 그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혹시 발생될지도 모를 양자 간의 싸움을 미연에 방지할 가능성도 생긴다.

“그러니까 양곡은 총 오천 섬이고, 기타 부식 등을 합쳐서…….”

심복이 엉뚱한 말을 꺼냈으므로 도연각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몇몇 장수들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매번 고생이 많소이다. 이제 그만 동료들과 어울려 목이나 축이시오.”

심복이 들고 있는 장부에 수결을 해 주며 도연각도 다른 말을 꺼냈다. 이 관계를 다른 장수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도연각은 물론 다가온 장수들에게도 예를 갖춘 후 심복은 총총히 사라졌다.

“강국의 사자가 성을 지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강국에서 오는 사자라면 지난번 우리 쪽이 간 것에 대한 답례겠군. 통과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공자께서 병사들과 같이 식사를 하시던데, 그대로 둬도…….”

“내가 그렇게 하시라고 한 걸세. 오늘은 우리들도 병사들과 같이 먹도록 하세.”

더 이상 중요한 일은 없는 것 같아 도연각은 장수들을 이끌고 병사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남국의 장례식은 짧다. 덥고 습기가 많은 기온 탓에 시신이 일찍 부패하기 때문에 아무리 성대하게 한다고 해도 사흘을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죽영의 경우에는 달랐다. 벌써 닷새가 지났건만, 광운은 그녀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았다.

오늘도 광운은 뚜껑을 닫지 않은 죽영의 관 앞에 식음도 전폐한 채 앉아 있었다. 실은 그녀가 죽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죽영의 얼굴은 죽을 때 그대로였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도 지워지지 않았고, 수의 대신 평소 즐겨 입던 옷을 입은 그녀는 도저히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은 냉혹한 법이다. 광운 자신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신은 벌써 부패가 시작되어 들척지근한 시취尸臭를 풍기고 있었다.

그사이 측근들은 몇 번이나 광운에게 시신을 매장하자고 했다. 시취 때문이 아니라 죽영을 잃은 두 사람—광운과 유화—이 너무도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지나면 건강까지 해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실제로 유화는 지금 혼절해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성의 노인 분들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병사가 들어와 나직한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시취가 역겨웠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광운은 묵묵부답이었다. 병사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실제로 광운은 외부의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오로지 자신의 내부에서 죽영과 공유했던 기억 속으로만 침잠沈潛하고 있었다.

“성주님.”

한동안 기다려도 광운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병사는 그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평소라면 감히 생각도 못 할 불경스러운 행동이었다.

깜짝 놀랐다는 듯 광운의 전신이 퍼덕거렸다. 마치 뇌전에라도 맞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광운은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던 병사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광운은 누군가를 만날 상태가 아니라고 기다리는 노인들에게 얘기할 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결같이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이었다. 침사성 내의 최고령인 자들로서, 대부분 백 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오늘은… 이 늙은이들이 성주께… 조, 조문드리러 왔소이다.”

대표인 듯한 노인이 힘겹게 말을 건넸다. 워낙 나이가 많아 여기까지 오는 데도 숨이 찼던 것이다.

광운은 돌아보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알았던 것에 비해 턱없이 적기만 한 죽영과의 추억 쪼가리들을 하나씩 소중하게 되새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성주!”

쿵!

노인이 지팡이로 바닥을 찍으며 큰 소리로 광운을 불렀다. 그래 봐야 목구멍에서 바람 새는 소리만 커졌을 뿐이지만 말이다.

“도대체 어쩌시려는 거요, 성주? 죽은 분이 어떤 분이란 건 우리도 잘 알고 있지만, 그러기에 편히 쉬실 수 있도록 보내 드려야 하는 거 아니겠소?”

쿨럭, 쿨럭!

단숨에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격한 기침을 토했다. 확실히 길게 얘기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노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기침이 멎자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돌아가신 분이야 물론 불쌍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백성들이 있소이다. 그들을 이끌어 주셔야 할 성주께서 이처럼 무기력하게…….”

쿨럭, 쿨럭!

다시금 기침이 노인의 말을 막았다. 저러다 숨이라도 넘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 병사가 그의 등을 두드려 주기까지 했다.

“그만 됐네!”

병사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친 노인은 곧장 광운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수중의 지팡이를 번쩍 쳐들더니, 그대로 그의 정수리를 향해 강하게 내려쳤다.

빠악!

금방이라도 폭삭 꼬꾸라질 것 같은 노인의 어디에 저런 힘이 있었을까? 지팡이는 광운의 머리를 깨뜨려 피가 튀게 만들었다.

“어억!”

놀람에 찬 비명은 병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설마 노인이 광운을 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임무가 성주를 지키는 것임을 감안하면, 이건 참수감이었다.

광운도 그 충격을 느낀 게 분명했다. 어깨가 크게 출렁거린다 싶더니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돌아보았다.

‘헉!’

병사는 또 한 번 튀어나오려는 신음성을 삼켜야 했다. 지금 보고 있는 광운의 모습이 귀신 형상의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닷새간 먹지도 자지도 않았기에 광운의 얼굴은 퀭하니 말랐고, 거기에 방금 깨진 머리에서 솟구친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니 간담이 작은 사람이 봤다면 틀림없이 경기를 일으켰을 터였다.

“내 말을 들으셨소, 성주?”

여전히 질타하는 듯한 노인의 말에 광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죽영을 내려다보았다.

투두둑!

새하얀 죽영의 얼굴 위로 광운의 붉은 피가 몇 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광운은 그걸 닦지도 머리의 위치를 바꾸지도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더운피가 전해져, 멈췄던 죽영의 심장이 다시 뛰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성주님…….”

병사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죽영이 죽은 후 광운이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인지라 약간의 희망이 묻어 있는 음색이었다.

“유화는?”

메말라 터진 광운의 입술이 열리며 나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 시진 전에 혼절을 해서… 지금 의생이 돌보고 있으니 곧 괜찮아질 겁니다.”

광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힘이 부치는 것처럼 말이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광운은 계속 죽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탓에 더 많은 피가 그녀의 얼굴과 옷에 젖어 들었다.

“성주, 치료부터 하셔야…….”

광운의 상태도 물론 걱정되었지만, 그보다는 시신에 묻은 피를 닦아야 하기에 돌려서 말한 것뿐이었다.

“관 뚜껑을…….”

“예?”

광운의 목소리가 워낙 낮았던 탓도 있지만, 그 내용도 너무 뜻밖이라 병사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되물었다.

“관 뚜껑을… 내가 직접 덮겠다.”

“그, 그럼 이대로?”

피를 닦지도 않고 뚜껑을 덮겠느냐고 물으려던 병사는, 그러나 입을 다문 채 급히 옆에 놓여 있던 관 뚜껑을 집어 들었다. 행여 광운의 마음이 변할까 싶어서였다.

관 뚜껑을 받아 든 광운은 잠깐 휘청거렸다. 지난 닷새 동안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 몸으로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웠다.

꽈악.

광운은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이미 심하게 메말라 터져 있던 터라 금방 피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고 정성스레 뚜껑을 맞추었다.

동시에 실내에 있던 병사와 노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누구도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 어깨의 떨림으로 볼 때 오열을 삼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탕!

첫 번째 못이 박혔다. 그건 죽영의 나무 관에 박히는 게 아니라, 그대로 광운의 심장에 꽂히는 거대한 나무못이었다.

탕, 탕!

차례로 하나씩의 못이 박힐 때마다 광운은 자신의 생명도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걸 느꼈다. 대신 금속보다 더 차가운 이별의 슬픔만이 켜켜이 쌓여 갈 따름이었다.

거대한 능에 안장할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광운은 죽영을 화장했다. 질 좋은 향나무 장작만 사용했기에, 한동안 침사성 안팎은 그 향기가 가시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주변에 드리워 줬던 고마운 그늘처럼 말이다.

뼈 역시 광운이 직접 수습했다.

아직도 식지 않아 더러 벌겋게 달아 있기도 한 그 뼈들을, 광운은 뜨겁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곱디곱게 빻았다.

그 가루들을 광운은 두 개의 병에 나누어 담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유화가 뒷날 물었을 때 그중 하나는 편월의 것이라고 했다.

난세가 가져다준 또 하나의 이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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