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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지연戰國之緣 2 (43/66)

전국지연戰國之緣 2

1

편월이 내성으로 들어간다는 게 알려지자, 거규는 제 발로 찾아와 같이 데려가 달라고 청했다.

장수들도 하나같이 거규를 데려가라고 입을 모았다. 어차피 가겠다고 작정한 편월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테니, 그나마 안전한 방법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설마하니 딸이 아비를 공격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편월은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투항한 걸로 이미 한 번 수치를 당한 거규이기에, 더 이상 난처한 상황에 내놓지 않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거기에 더해 편월은 혼자 성안으로 들어가겠다고까지 했다. 이미 성주가 항복했으니 포란성은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라며, 어딜 가든 거리낄 게 없다면서 억지를 부렸다.

실제로 편월은 혼자 가고 싶었다. 거규에게서 목철린과 비슷한 냄새가 풍기는 걸 느꼈으니, 자신도 거기에 지고 싶지 않았다. 이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훨씬 뒤처지는 무장이 될 것만 같았다.

결국 다섯 명의 무장이 선발되었다. 담개를 필두로 강숙, 맹아, 화응 그리고 눈치와 발이 빠른 노련한 전령 한 명이었다.

이 역시 말이 많았다. 거예홍의 요구대로 성으로 들어가니, 수행원은 더 늘려도 좋지 않겠느냐는 게 모든 장수들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왕에 저쪽의 요구를 들어준 이상 시원하게 해 주는 게 다음을 위해서도 좋겠다고 여겨 다섯 명만 따르게 되었다. 그다음이 있을지 없을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말이다.

그동안 해는 꾸준히 서쪽으로 이동해 어느덧 붉은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유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리다.”

가볍게 한마디 남긴 후 편월은 소질풍에 훌쩍 올라탔다. 수행원으로 뽑힌 다섯 명 역시 재빨리 말에 올라 그를 감쌌다.

“앞장은 내가 서겠소.”

도저히 혼자 들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군주기를 든 화응이 가장 먼저 말을 몰았다. 저 모습만 해도 내성에서 저항하고 있는 적병들에겐 상당한 위압이 될 터였다.

그 뒤를 편월은 묵묵히 따랐다. 긴장된 표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여전히 눈빛은 장난기로 반짝거렸다.

흔치 않게 내성 주변에도 해자는 파여 있었다. 여느 곳과 다른 포란성의 방비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그 앞에서 터무니없이 큰 군주기를 받쳐 든 화응이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위휘군의 승장勝將 편월이 내성에 있는 적의 장수를 만나러 왔노라! 문을 열고 잔교를 내려라!”

마음 같아서는 편월을 휘국의 왕으로 부르고 싶은 화응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정식으로 발표한 게 아니기에 승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라!”

성루에서 누군가 역시 큰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이내 잔교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위휘군이 술렁거렸다. 저렇게 잔교가 내려지면 편월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쉽게 함락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편월이 미리 장수들에게 단단히 일러뒀던 게 바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거예홍의 요구대로 해 주기로 했으니, 괜한 짓으로 체면을 구기지 말라는 얘기였다.

이윽고 잔교가 땅에 닿았고, 화응을 필두로 일행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맨 뒤에서 따르던 강숙은 특히 느리게 움직였다. 자신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서면 이 잔교는 다시 들려질 게고, 그렇게 되면 생사는 온전히 적들의 손에 맡겨진다. 보다 느긋하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잔교를 지나 동굴 같은 성루 아래로 접어들면서 강숙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곧 닫히겠지.’

그러나 놀랍게도 잔교는 들리지 않았다. 성루 아래의 통로를 벗어나자 적병들이 빽빽이 에워쌌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중요한 건 내성의 성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들 봐라?’

강숙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성문을 닫지 않는다는 건 위휘군에 대한 하나의 시위였다. 언제든 들어와도 좋지만, 대신 편월을 포함한 여섯 명은 확실히 죽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게 강숙은 재미있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처럼도 생각되었고, 한편으론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거예홍의 배짱에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말에서 내려라!”

그리 넓지 않은 연무장에 빽빽하게 도열해 있던 적병들 중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편월 일행은 누구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쪽은 어디까지나 당당한 승자의 입장이다. 패장이나 취할 행동 따위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둘러서 있던 적병들이 일제히 창을 곤두세우고 앞을 막아섰다.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더 이상은 한 걸음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화응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해는 완전히 져 버려 화톳불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공간 속으로, 그 커다란 깃발을 든 채 앞으로만 말을 몰았다.

툭!

마침내 가장 가까이 있던 적병의 창끝에 화응이 탄 말의 콧잔등이 닿았다.

“물러서라!”

동시에 화응이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건 이상한 긴장감에 휩싸여 정적만이 감돌고 있던 내성 전체를 들썩거리게 만들기 충분할 정도로 컸다.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지만, 어쨌든 빽빽하게 드리워져 있던 창의 숲이 마치 비단이 찢기는 것처럼 쫙 갈라졌다. 적병들이 길을 내 준 것이었다.

편월은 갈라진 적병들 사이로 난 길에 시선을 던졌다. 저만치 하얀 휘장이 삼면에 둘러쳐져 있었고, 일부러 마련해 놓은 것 같은 탁자엔 장수 한 명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묻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편월은 그 장수가 거예홍임을 알 수 있었다. 여자란 걸 미리 알지 않았다면 썩 훌륭한 무장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창을 짚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늠름했다.

“말에서 내려라!”

적장 중 한 명이 또 한 번 소리를 질렀고, 이번엔 맹아가 그 말을 받았다.

“닥쳐라! 또 한 번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는 자가 있다면 위휘군의 근위대장인 나 맹아가 용서치 않겠다!”

한 소리 크게 고함을 지른 맹아는 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두세 바퀴 힘차게 돌렸다. 창날이 대기를 자르는 파공성이 섬뜩하게 주변으로 번져 나갔다.

그 모든 게 자신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얼굴로 편월은 거예홍에게 다가갔다.

약 오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편월은 비로소 소질풍을 세웠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소장의 뒤를 따르소서.”

말에서 뛰어내린 맹아가 비스듬히 편월의 왼쪽을 가린 상태로 앞장을 섰다. 오른쪽에는 화응이 깃발을 든 채 따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거예홍 주변에 있던 적장 중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 나와 말했다.

“회담에 무기는 필요 없을 터, 잠시 맡아 두겠소.”

“흥!”

편월의 뒤를 따르고 있던 담개가 세찬 코웃음을 날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자고로 병기는 장수의 혼백이라고 했소. 자기의 혼백을 남의 손에 맡기는 얼빠진 무장은 우리 위휘군에는 없소이다.”

관록에 있어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도 담개를 따를 자가 없다. 그가 한마디 하자 이상한 중압감이 주변을 압도했다.

하지만 적장도 만만치 않았다.

“권해서 듣지 않는다면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한마디 던지는 것과 동시에 옆구리에 찬 칼 손잡이를 잡았다. 정말로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대로 보내도록.”

거예홍이었다. 일부러 목에 힘을 준 탓인지, 여자치고는 굵직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에 적장은 서너 걸음 물러섰다. 그래도 칼 손잡이를 쥔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기미가 보이면 단칼에 베어 버리겠다는 기세였다.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편월은 천천히 걸어 거예홍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시오. 어려운 걸음을 하셨소이다. 자, 앉으시오.”

거예홍은 가벼운 군례를 갖추며 편월에게 의자를 권했다. 말투가 완연한 남자였다.

편월은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항복하시오.”

“하하하!”

거예홍이 남자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편월의 맞은편에 앉았다.

“항복하라고? 뭔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그대들은 우리 수중에 있소.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항복을 한단 말이오?”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어쨌든 다시 이 성에서 살아가야 할 백성들의 터전을 더 이상 파괴하지 않기 위해서.”

편월의 어조는 강경했다. 마치 자신이 적진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니라 거예홍을 위휘군 한복판에 불러다 놓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여기 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소. 아니, 만약 우리가 죽기라도 한다면 위휘군의 손 속도 더욱 독해지겠지. 그만큼 희생이 커질 거라는 얘기요. 부디 아버님을 본받으시오. 그만한 용장이 투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라는 말이오.”

편월로선 드물게 긴 얘기를 하며 거예홍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놀라고 말았다. 불빛에 비친 거예홍의 용모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자의 미색에 홀려 할 일을 잊어버릴 편월은 아니었다. 더욱 강한 눈빛을 거예홍에게 쏟아 부었다.

거예홍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편월이 어리다는 얘기는 익히 듣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막상 마주 앉고 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탄탄한 체구와 그보다 더 단단한 배짱을 가진 한 명의 훌륭한 무장으로 비쳤다.

거예홍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자칫 흔들릴 뻔했던 자신의 마음을 다잡은 것이었다.

“위휘군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런 희생을 낼 필요도 없었소. 그러니 지금이라도 군사를 물린다면 우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거요.”

여전히 남자 같은 말투인 거예홍이었다.

편월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의미에선 거예홍의 말이 맞았다. 합진성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처럼 싸우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 위휘군의 창설 목적을 거 장군의 영애令愛는 아시는가?”

난데없이 끼어든 담개의 말에 거예홍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질문의 내용 자체가 엉뚱하기도 했고, 또 나이가 들었어도 부하가 대장들의 회담에 입을 열었다는 점이 거슬리기도 했다.

그 기분은 그대로 거예홍의 부하들에게도 전달되었나 보다.

“무엄하다!”

진즉부터 칼 손잡이를 잡고 있던 적장이 기어이 뽑아 들었고, 동시에 주변의 적병들도 거뒀던 창날을 다시 겨눠 들었다.

“멈추지 못할까!”

탁자를 내려치며 거예홍이 재빨리 소리를 치지 않았다면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성질 급한 강숙과 맹아 역시 그때는 병기를 뽑아 들고 있었던 것이다.

“무기를 거두시오.”

편월이 묵직한 어조로 말했고, 강숙과 맹아가 먼저 병기를 거둬들였다.

그 속에서 담개는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위휘군의 목적은 이 지긋지긋한 난세의 종식에 있네. 그걸 위해서라면 우리 주군은 어떠한 난관이라도 헤치고 나갈 결심을 굳히고 계시네.”

“난세종식을 입에 올리면서 우리를 공격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아니오?”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거 성주가 먼저 우리에게 걸어온 싸움일세.”

“그 역시 일의 선후가 뒤바뀐 말이오. 위휘군이 먼저 윤주성을 치지 않았다면 아버님께서도 출병하시지 않으셨을 게요.”

거예홍이 조리 정연하게 따지고 들었다. 그 속에는 ‘너희 위휘군이 침략군이다.’라는 뜻을 은근히 풍기고 있었다.

“우리 위휘군은 애당초 정허군에서 시작되었네. 정허군이 누구의 군대인가? 돌아가신 선대 진남후인 마용승 공의 군대였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선대 마용승 공이 돌아가시자마자 호윤천 일가가 어린 당금 진남후를 끼고 온갖 작태를 저지르고 있네. 내가 하나 물어보겠네. 거 장군께서 출병하신 게 진남후의 명이었나, 아니면 호윤천의 명이었나?”

“물론 진남후의…….”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던 거예홍의 말꼬리가 급격히 흐려졌다. 명령은 분명 진남후의 이름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걸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은 동서남북도 구별하지 못할 것 같은 어린 마국립이 뭘 안다고 군사를 동원하겠는가 말이다.

“말했다시피 우리 위휘군은 마용승 공에 의해 만들어진 군대일세. 그러니 우린 호윤천 일가의 전횡을 그대로 묵과할 수 없네. 위휘군의 궁극적 목적은 난세의 종식! 이걸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서쪽으로 가서 호윤천 일가를 응징하는 걸세. 그때까지 우리 위휘군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일세.”

담개의 말엔 다소나마 억지와 궤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담개가 얘기를 하자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거예홍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거기에 편월이 덧붙였다.

“난 스스로 세운 맹세가 하나 있소. 늘 주먹만 한 눈물방울을 매달고 사는 여자가 둘 있소. 물론 이 빌어먹을 전쟁 때문이오. 난 그녀들이 더 이상 울지 않게끔 하겠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했소. 그걸 위해서 피를 뿌려야 한다면, 난 결코 마다하지 않겠소.”

거예홍의 두 눈을 빤히 직시하면서 편월은 힘차게 말을 맺었다. 주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화톳불의 맹렬한 불꽃이 그대로 녹아든 것 같은 눈동자였다.

“내일 진시 말까지 기다리겠소. 그때까지 저항이 계속된다면, 어쩔 수 없이 짓밟을 수밖에 없소.”

말을 맺으며 편월은 몸을 일으켰다. 이로써 최후의 통첩은 끝났다. 이젠 돌아가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이대로 보낼 작정이시오?”

말에 올라 느릿하게 멀어져 가는 편월 일행을 보며, 적장 중 한 명이 거예홍에게 따지듯 말했다.

“보내 줘라.”

거예홍은 짤막하게 명을 내렸다. 이쪽이 분명 무리하게 요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왔다. 고이 보내 주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패배하게 되리라.

‘그런데 누굴까?’

다시 의자에 앉으며 거예홍은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편월이 말했던 두 여자에 대해 이상하게 구애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난세종식이 위휘군의 목적이라던 담개의 말이 아직도 귓속에서 잉잉 소리를 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거예홍은 농성하던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투항해 왔다.

위휘군이 열렬히 환영한 건 물론이었지만, 그 태도가 가벼운 건 결코 아니었다. 적이 항복한 게 아니라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아군을 다시 만난 것처럼 은근했다.

그 와중에 정작 가장 반가워해야 될 거규의 표정만은 마치 돌처럼 잔뜩 굳어 있었다. 별다른 희생 없이 투항한 딸을 맞는 기쁨을, 이 완고한 무장은 사뭇 그다운 얼굴로 맞은 것이었다.

어쨌든 아침부터 포란성은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위휘군과 거가군이 한 덩어리가 되는 잔치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누가 뭐래도 그걸 가장 반긴 건 백성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파괴된 가옥과 짓밟힌 전답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게다가 최우선적으로 복구해 주겠다는 편월의 약속까지 곁들여졌으니,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병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장수들이 모인 편월의 본진에도 예외 없이 푸짐한 음식이 마련되었고, 그 자리가 곧바로 다음의 거취를 정하는 회의석이 되었다.

“아무래도 이 포란성은 거 장군 부녀께서 맡아 주셔야겠소. 그편이 복구를 하는 데도 빠를 것이오.”

거규에게 술잔을 건네주며 편월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다.

“이 몸은 항장이오. 항장이 자기 성에 남아 백성들을 다스렸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소이다. 그러니 소장은 이대로 위휘군에 배속되어 충성을 다하고 싶소이다.”

“거, 자꾸 항장, 항장 하지 마시오. 거 장군께서 자꾸 그러시면 나도 얼굴을 들 수 없을 거요.”

거규의 말에 담개가 타박을 하고 나섰다. 술이 몇 순배 돌지 않았음에도 벌써 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말에 여러 장수들이 웃은 건 담개의 취기 탓이 아니었다. 한때 그도 건주 작미성의 수비 장수로 있다가, 광운이 이끄는 잡가군에 의해 성이 함락되어 투항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 장군의 말씀대로 더 이상 항장이라는 얘긴 하지 마시오. 그리고 거 장군에게 포란성을 그대로 맡기는 건 주군의 명이라 생각하시오. 설마 첫 명령에 항명을 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송지가 끼어들었다. 거규가 다시 한 번 다른 말을 하면 군감으로서 용서치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장난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내 딸년에게 거가군 칠천을 붙여 줄 테니, 데리고 다니시다 어디든 쓸모 있는 곳에 써 주시오.”

“칠천? 현재 거가군의 총병력은 얼마요?”

거규의 말에 편월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재우쳐 물었다.

“일만이 조금 넘을 거요.”

“그걸로는 부족하오. 우린 곧 합진성으로 물러가 당분간은 정비를 할 계획이오. 이 포란성은 곧장 건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소. 병사가 삼천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알면, 호윤천이 어떤 도발을 해 올지 모르오. 그러니 따로 군사를 낼 생각은 마시오.”

“그럼 딸년에게 붙여 주는 군사 대신 위휘군을 그만큼 포란성에 주둔시켜 주시오.”

이건 거규의 진심이었다. 혈육도 믿지 못하는 난세에, 오늘 항복한 자신을 믿게 하자면 이러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장수들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거규를 믿는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로선 묵은 숙제 한 가지를 해결하는 방법이 될 것도 같았다.

위휘군이 합진성으로 철수한 건 이틀 뒤였다. 그 속에는 거가군 칠천을 이끄는 거예홍이 따랐고, 뒤에 남은 건 위휘군 오천을 새로 사가군이라는 이름으로 결성한 사문기가 거규를 도와 포란성을 다스리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광운에게 사람을 보내야겠다.’

소질풍에 올라앉아 느긋하게 흔들리면서, 편월은 모처럼 광운의 얼굴을 떠올렸다.

2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를수록 곽준방은 초조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인근에 있는 성에서는 연방 영욱성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를 진발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내성에 있는 구문생과는 전혀 연락할 길이 없었다. 목을 조르는 답답함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느껴지는 게 요즘이었다.

물론 총공세를 가하면 다른 성에서 지원병이 오기 전에 영욱성을 떨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곽준방의 입장이었다. 호윤천 일가를 너무 궁지에 몰아넣으면 마국립 모자의 안위가 위태롭게 된다. 만에 하나 그들에게 불상사가 생긴다면 저승에 갔을 때 전대 주공인 마용승에게 얼굴을 들 수 없게 되리라.

장수들의 불만도 곽준방에겐 커다란 압력이었다. 장졸들은 모두 무방비나 다름없는 조천성에 가족을 두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서둘러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터였다.

“조천성에서 전령이 왔소이다.”

여상계가 보고를 했지만, 곽준방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안 들어도 뻔한 얘기를 전하러 왔을 테니까 말이다.

“함지성咸池城의 유웅劉雄이 본격적으로 군사를 동원하고 있다는 전갈이오. 목적지는 우리 조천성이 분명한 것 같소.”

그 말에도 곽준방은 대꾸하지 않았다. 함지성에서 군사를 동원해 영욱성으로 달려온다면, 조천성은 그 길목에 위치하게 된다. 유웅으로선 치지 않고 지날 수 없다는 얘기다.

곽가군의 한 부대가 또다시 성벽으로 쇄도하고 있나 보다. 와아, 하는 함성이 영욱성 쪽에서 들려왔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소이다. 장수들도 겉으론 의연한 척하지만, 속들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거요.”

곽준방의 맞은편에 앉으며 여상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듣기에 괴롭다는 건 알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런 상태로 싸움을 계속한다는 건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각 성에 격문을 보내는 게 어떻겠소? 아직도 전대 주공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성주들이 많을 것이오. 그들을 규합할 수 있다면 호윤천 일가도 공자를 마음대로 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하지만 우리는 늦은 감이 없지 않네. 군사를 일으킨 순서도 그르쳤고…….”

비로소 곽준방의 입이 열리며 회한에 가득 찬 말이 토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곽준방은 자신이 너무 서둘렀다는 걸 후회하고 있었다. 윤 대부인의 명에 의해 우선 군사부터 일으킨 게 실수였다. 여상계의 말처럼 각 성에 격문부터 돌려 반反호윤천의 힘을 규합했어야 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오. 우선 영욱성을 함락시켜 호윤천 일가를 징벌한 다음 공자를 받들고 농성하고 있으면 명분은 서게 될 것이오.”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호윤천은 분명 공자께 위해를 가할 걸세. 적어도 인질로 삼아 안전한 곳까지 달아나려고 하겠지.”

“그럼 이대로 손발을 묶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사면으로 적을 맞자는 말씀이오? 조천성이 유웅에게 함락된다면 우린 당장 군량을 보급받을 곳조차 없어지게 되오.”

“오늘 밤 대대적인 야습을 감행할 걸세.”

“예? 그럼 드디어?”

여상계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처럼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자고 해도 꿈적도 않던 곽준방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그럼 곧 장수들을 불러오겠소.”

밝은 표정으로 여상계는 달려 나갔지만, 곽준방의 얼굴은 반대로 더욱 어두워졌다.

‘이번에도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닐까?’

여태 미루던 결전을 이처럼 서둘게 된 결정적 원인은 함지성의 유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곽준방은 유웅을 잘 알고 있다. 이제 마흔 중반에 든 자로서, 젊었을 때부터 의기가 굳고 병법에 밝아 마용승의 사랑을 받던 무장이었다.

그런데 마용승이 죽고 나자 창을 거꾸로 쥔 모양이었다. 유웅을 탓하기보다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사리 변절하도록 만든 이 시대가 곽준방은 원망스러웠다.

‘건주와 사주의 병력이 달려오지 않는 걸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건주는 바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윤주를 휘젓고 있는 편월 때문에, 사주는 흑암성을 두고 광운과 일진일퇴를 벌이고 있는 서방정변 때문에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처지가 못 된다. 그것만 해도 곽준방에겐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구문생을 뺀 나머지 장수들이 하나 둘 곽준방의 진막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선을 다해 싸운 것도 아니고 계절도 중추절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낮에는 덥다. 다들 이마에 땀이 흥건한 상태였다.

‘이제 다들 나이가 들었군.’

그 모습을 보며 곽준방은 새삼 자신의 나이를 떠올렸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써 일흔을 바라보게 되었다.

“야습을 감행하신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오?”

우효금이 가장 먼저 다급하게 물었다. 그는 구문생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다는 얘기를 크게 반기고 나섰다.

“그럴 작정일세.”

“선봉은 소장이 맡겠습니다.”

곽준방의 입으로 확인하자마자 우효금은 선봉을 자처하고 나섰다.

“야습에 선봉이 어디 있고 후미가 어디 있나? 침착하게 작전을 세워 보게.”

“그렇다면 이 야습을 우리 호기군에 맡겨 주십시오. 설마하니 삼만을 총동원하지는 않으실 테니, 우리 호기군이 단독으로…….”

“서둘지 말래도!”

곽준방은 소리를 높여 우효금의 말을 막았다.

“기습의 기본이 침착하고 은밀해야 된다는 걸 잘 알면서 이처럼 허둥대는가? 하물며 지금 계획하고 있는 건 야습이 아닌가? 그렇게 서둔다면 어떻게 믿고 맡기겠나?”

자신도 모르게 곽준방은 짜증을 내고 있었다. 우효금을 책망하고 있지만, 기실 서두르고 있는 건 자기 자신임을 자각한 탓이었다.

“우선 야습의 규모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겠소이다. 그래야 작전도 세울 수 있을 게요.”

팽요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들어 곽가군의 작전은 그가 거의 도맡아 짜다시피 했다.

“총공세일세.”

“그렇다면 야습이 아니겠군요. 양동작전을 세워야 한다는 말씀인데…….”

말을 하면서 팽요는 탁자 위의 도면을 들여다보았다. 새삼 확인할 것도 없이 손바닥처럼 빤히 아는 영욱성의 내부를 그린 지도였다.

“보시다시피 영욱성은 가히 철옹성이라 할 만하오. 내 집보다 더 환히 알고 있는 우리들도 이처럼 고생할 만큼 말이오. 게다가 우리가 조천성으로 간 뒤에 내부를 개조했다면, 우리가 모르는 곳도 있을 것이오. 이 점에 유념해서 내 말을 들어 보시오.”

팽요는 모든 장수들이 집중하도록 한 마디 한 마디 충분히 의미를 두고 말했다.

“다들 알겠지만, 영욱성에서 그나마 취약하다 할 수 있는 곳은 북문 쪽이오. 거긴 지금 표기군인 여 장군이 맡고 있소. 가장 강한 곳은 여기 동문으로, 우리의 야습 부대가 노릴 곳이오.”

“뭐? 그건 좀 말이 이상하구려. 왜 약한 곳을 두고 강한 곳을 노린단 말이오?”

주립건이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말은 여전히 빨랐다.

“북문 쪽이 취약하다는 건 호윤천 일가도 우리 이상으로 잘 알고 있을 거요. 당연히 대비도 철저히 하고 있을 거요. 그건 이미 몇 차례 공격을 해 봤으니 다들 아시지 않소? 그래도 오늘 밤 우리 주력은 이 북문을 두드려야 하오. 마치 함락시킬 것처럼 말이오. 그사이 야습을 맡은 부대는 동문을 깨고 들어가는 거요.”

“그렇다면 이건 야습이라기보다는 전면적인 공격이 되겠군.”

곽준방이 끼어들었다. 팽요의 계획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애당초 성을 상대로 야습을 하겠다고 생각하신 대장군께서 틀리신 거요.”

팽요는 가볍게 곽준방의 말을 받아넘겼다. 어쩌면 오늘 밤 전투에서 끝장을 보려는 작정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 견고한 동문 쪽의 성벽을 오르는 일이오. 적들의 신경이 온통 북문 쪽에 쏠려 있을 때 쥐도 새도 모르게 넘어야 하오.”

“그건 우리 호기군이 맡으리다.”

우효금이 다시 나섰다. 아무래도 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내지 못하면 구문생에게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좋을 것 같은데 대장군의 생각은 어떠시오?”

팽요는 곽준방의 뜻을 물었다. 작전은 자신이 세우지만, 결정은 어디까지나 대장군의 몫이니까 말이다.

“그토록 원하니 맡겨도 되겠지. 실수하지 말도록.”

“좋소. 그럼 호기군 중에서 정예로 오천을 뽑으시오. 명심할 것은 성벽을 넘어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내성에 있는 구 장군과 합류하는 일이오. 그러니까 호기군의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공자 모자를 보호하는 일이오.”

“알겠소.”

“내성에 접근할 때도 조심하시오. 구 장군이 호윤천 일가의 병사들로 오인하고 공격을 가할지도 모르니. 그럼 다른 장군들은 각자 공성 무기와 병사들을 점검하시오. 마치 성문을 깨뜨릴 것처럼 맹렬하게 공격을 감행해야 되오.”

“염려 마시오.”

“깨뜨릴 것처럼이 아니라, 아예 깨뜨려 버리겠소.”

어떤 의미에선 호기군의 들러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장수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그저 마음껏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속이 후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진짜 성문을 깨고 돌입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이 팔월 칠일이니 초저녁엔 달이 뜰 거요. 어둠에만 너무 의지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요.”

팽요가 한마디 덧붙였다. 밤에 달이 뜨는 게 뭐 대수로운 일이냐 싶지만, 군사작전에 관계가 되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그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 됐나? 그럼 당장 병사들을 물리고 배불리 먹인 뒤 푹 쉬게 하게. 놈들 눈에도 우리가 야간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장수들이 팽요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싶자, 곽준방이 결론을 짓듯이 말을 맺었다.

그 말을 쫓듯이 장수들이 진막을 빠져나갔고, 동시에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군사를 거두는 신호였다.

비록 반달에 불과했지만 남국인 막주의 달은 투명할 정도로 밝았다.

하지만 이 밤에 광운은 그 달을 올려다볼 여유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죽영의 상태가 급작스레 악화되어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벌써 한 시진째, 광운은 땀에 젖은 죽영의 손을 잡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비어 버렸다.

지금 광운이 느낄 수 있는 건 그저 죽영의 손이 불덩이처럼 뜨겁다는 것뿐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엔 납빛 땀만이 가득한데, 도대체 이 열기는 어디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말인가.

“아저씨, 물이라도 좀 드세요.”

유화가 물이 든 찻잔을 내밀었다. 지난 한 시진 사이에 광운의 입술이 새하얗게 부르텄던 것이다.

광운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치 유화의 말도 들리지 않고, 코앞에 내밀어진 찻잔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저씨.”

다시 한 번 부르며 유화는 광운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아!”

화들짝 놀라며 광운은 비로소 유화에게 시선을 맞췄다.

“많이 수척해졌구나.”

광운은 간신히 한마디 내뱉었다. 성대에 모래가 잔뜩 끼어 까칠하니 메마른 음색이었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언니가 어떻게 될지…….”

유화의 말끝은 울먹임 속에 묻혀 버렸다. 애써 억누르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흑흑 흐느끼는 오열이 되고 말았다.

광운은 유화를 위로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위안을 받고 싶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언니를 좀 더 보살펴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저씨. 흑흑…….”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유화는 입술을 깨물고 울기 시작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죽영이 저렇게 위독하게 된 건 자신의 책임인 것 같았다. 영욱성에서 탈출한 이후로 계속 이어진 무리한 생활들…….

그때 왜 말리지 못했을까? 왜 좀 더 보살펴 주지 못했을까?

부모에 의해 팔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죽영은 부모보다 더 자상하게 자신을 보살펴 줬다. 그 은혜를 손톱만큼도 갚지 못했는데, 벌써 그녀의 생명은 마지막 심지를 태워 버린 촛불처럼 이지러지려 하고 있다.

그게 유화는 못 견디게 안타깝고 서글펐다. 뭔가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아무나 붙잡고 따져 보고 싶기도 했다. 이제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살 만하게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의생은… 의생은 뭐라고 하더냐?”

문득 광운의 입이 열리며 나직한 질문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대답은 이미 광운도 알고 있었다. 죽영의 상태를 듣고 달려왔을 때, 의생들은 하나같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다.

광운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어떻게든 죽영을 살려 내라며, 금방이라도 의생들을 죽일 것처럼 광태를 부렸다.

그런다고 현실이 바뀔 턱이 없었다. 오히려 광운의 절망만 더욱 깊어져 갈 따름이었다.

죽영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이처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리라고는 광운 자신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훌쩍 떠나서는 몇 년이나 전장을 떠돌다 돌아가면, 그녀는 늘 그 자리에서 반겨 줬다. 많은 남자들을 상대해야만 되는 기녀의 신분이면서도, 그 시선과 가슴은 늘 자신을 향해서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진즉 몰랐을까? 왜 좀 더 빨리 알아차려서 그녀를 따뜻하게 다독여 주지 못했을까? 이렇게 부여잡은 손 안에서, 시나브로 빠져나가는 그녀의 생명을 의식하고 있자니 이토록 애처로운데…….

돌연 광운은 고개를 쳐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시울이 화끈거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빨리 눈을 깜박거려 봐도 굵은 눈물은 눈초리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 언니!”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놀란 목소리를 낸 유화의 말에 광운은 황급히 죽영을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영영 감겨 있을 것만 같았던 그녀의 눈이 뜨여 있었다.

“죽영…….”

제 딴에는 제법 큰 소리로 부른 이름이었다. 이미 목이 콱 잠겨 간신히 새어 나오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죽영은 웃었다. 겨울날, 냇물 가장자리에 서려 있는 살얼음처럼 투명한 미소였다.

덜컥!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광운은 자신의 심장이 발등 위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 정말이지 마지막이란 느낌이 강하게 뇌리를 강타했다.

“괘, 괜찮소?”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광운의 이 말도 제대로 된 소리가 되지는 못했다.

죽영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자리에 누운 이후로 흑백이 더욱 뚜렷해져 오히려 파랗게 보일 정도로 맑은 눈동자로 광운을 그윽이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죽영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이 애를… 편월을 잘…….”

그리고 죽영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리덮였다.

“죽영!”

“언니!”

두 사람이 동시에 죽영을 흔들었다. 이래서는 너무 허망하다. 아무리 사람의 목숨이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처럼 가벼운 난세라지만, 그녀만은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애끓는 마음이 통한 것일까. 죽영의 눈이 다시 스르르 뜨였다.

“미안해요. 그리고 나는… 참 많이 행복했어요.”

그게 죽영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말간 빛이 급격히 스러진다 싶더니, 이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입가에 떠올린 미소만은, 한때 그녀가 이 세상을 살았다는 증거인 양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언니! 언니이!”

유화가 죽영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울부짖었다. 이젠 영원히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꼭 한 번만이라도 그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광운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죽영이 죽은 그 순간, 그는 오히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막주를 지배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도 역력히 실감되었고, 그래서 울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태어나서 유일하게 마음을 줬던 여인이 다시 볼 수 없는 길을 떠나 버렸고, 이 비정한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고독이 이처럼 절실한데…….

“으허엉…….”

기묘한 소리를 토하며 광운은 바닥으로 무너져 버렸다. 울지 말아야 한다는 이성의 벽을 허물고 쏟아진 처절한 통곡이었다.

3

곽가군의 공격은 유시경에 시작되었다. 이만 오천에 달하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영욱성의 북문에 공격을 가했다. 그 진두에는 곽준방이 직접 나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호윤천으로서도 최선을 다해 방어를 할 수밖에 없다. 성의 각 문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두고, 모두 북문으로 집결시켰다.

솔직히 지금 호윤천은 허둥거리고 있었다. 영욱성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통틀어 봐야 채 이만이 되지 않는다. 그중 절반은 내성 공격에 투입시켰고, 각 문에도 얼마간의 병사들을 남겨 뒀으니, 북문을 수비하고 있는 군사는 고작 오천에 불과했다.

거기에 비해 곽준방이 이끌고 온 곽가군은 삼만이다. 그게 일제히 북문을 집중 공격하니 병력 부족은 물론 평소 취약한 곳인 줄 알면서도 보수를 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태함을 질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성을 공격하고 있는 병력을 뺄 수는 없었다. 설사 성이 함락되더라도, 마국립 모자만 수중에 넣으면 자신들의 안전은 보장되니까 말이다.

“전령! 전령은 어디 있느냐?”

“대령이오.”

“즉시 내성으로 달려가 대장군께 공격을 서두르라고 일러라. 촌각이 급하다. 최대한 빨리 성을 깨뜨리라고 일러라.”

“존명!”

전령이 달려가는 걸 확인할 사이도 없이 호윤천은 성병들에게 명을 내렸다.

“흑유를 부어라! 적병들을 단 한 치도 접근시키지 마라!”

호윤천도 죽은 마용승의 눈에 들어 대장군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비록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사력을 다해 지휘를 하자 그 기세는 결코 무시해도 좋을 정도가 아니었다.

호윤천의 명에 따라 성병들은 아래로 흑유를 들이부었다. 그러고는 곧장 불화살을 쏴 댔다.

순식간에 영욱성의 북문 주변은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해자는 물론이고, 흑유에 젖은 땅까지 훨훨 타올라 마치 초열지옥焦熱地獄을 연상시켰다.

불길은 성벽은 물론 하늘까지 그을리기 시작했다. 달빛조차 시커먼 연기 속으로 잠겨 들었다.

이건 성병들에게도 유리하다고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위로 솟구치는 연기와 불길에 사수들은 제대로 겨냥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곽가군의 움직임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호윤천은 생각했다. 오천으로 삼만을 막아야 하는 싸움인 것이다. 다소 무리한 작전일지라도, 곽가병이 직접 성벽에 달라붙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쉬지 말고 화살을 퍼부어라! 맞지 않아도 좋다. 놈들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만은 반드시 막아라!”

계속된 호윤천의 명에 사수들은 연방 시위를 당겼다. 그야말로 보지도 않고 마구 쏴 대는 식이었다.

막대한 물자의 낭비지만, 호윤천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부유함에 있어선 천하제일이라는 얘기를 듣던 마용승이 거처하던 영욱성이다. 당연히 군량과 무구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으로 비축되어 있었다. 이 정도 소모하는 걸로는 표가 나지도 않을 터였다.

이 순간 호윤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바로 시간이었다. 아들인 호유진이 내성을 깨고 들어갈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곽가군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딛고 있는 바닥 전체가 화염을 뿜으며 타고 있는 와중에도, 모래 부대를 들고 와 진화를 하면서 꾸준히 성벽에 접근해 왔다.

“적의 충차가 움직인다. 충차를 불태워라!”

연기에 눈이 따가운 건 호윤천도 남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곽가군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평생토록 전장을 전전하며, 다른 무장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오른 자의 관록과 경험이 여실히 발휘되는 장면이었다.

갑자기 호윤천의 후방에서 우우, 하는 함성이 올랐다. 내성에서도 싸움이 고비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버텨라! 무기를 아낄 건 없다. 쏴라, 쏴!”

방금 들린 함성으로 인해 호윤천은 잔뜩 고무되었다. 지금까지의 내성 공격이 그리 모질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 사력을 다한 곽가군의 공격을 받고 보니, 더 이상 가릴 게 없다고 호유진도 생각한 게 분명했다. 들려오는 함성만으로도 공격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낙성되기까진 시간문제일 터였다.

“불이 꺼져 간다! 흑유를 더 쏟아 부어라!”

명을 내리는 호윤천의 목소리에도 가일층 힘이 실렸다.

호윤천이 분전하면 할수록, 우효금의 호기군은 보다 쉽게 영욱성의 동쪽 성벽을 오를 수 있었다.

그다음은 더욱 쉬웠다. 동문 쪽이 가장 견고하다고 믿은 호윤천은 이곳에 불과 오백의 병사만 남겨 뒀고, 그들은 변변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호기군에 의해 전멸당하고 말았다.

“서둘러라. 아무래도 내성 쪽의 동정이 심상치 않다.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 말고 오직 내성을 향해 달려라.”

호기군 오천이 모두 성벽에 오르지 않았음에도, 우효금은 병사들을 몰아 내성 쪽으로 달렸다. 그래도 백 명을 남겨 성문을 열어 두라는 지시는 잊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부대를 이끌고 올 걸 그랬소.”

우효금 곁에서 달리던 편장이 나직이 속삭였다. 생각보다 훨씬 쉽게 성벽을 넘고 보니, 단숨에 함락시킬 수도 있겠다는 아쉬움을 느낀 탓이리라.

“우리의 목적을 잊지 말게. 우린 성을 치는 게 아니라 내성에 있는 마 공자 모자와 구 장군을 무사히 구출하는 게 임무일세.”

우효금은 엄격한 어조로 편장을 짓눌렀다. 자칫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가는 임무를 실패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장군, 앞에!”

다급한 편장의 말에 우효금은 고개를 들어 내성 쪽을 쳐다봤다. 훤한 불빛이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이놈들이 기어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우효금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호윤천의 병사들이 내성의 성문과 망루를 불사르고 있는 것일 터였다.

멋들어진 우효금의 수염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시대가 험악하다고 해도, 한때 주인으로 모셨던 사람의 자식이고 아내가 있는 성이다. 저처럼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서둘러라. 시간이 촉박하다.”

우효금은 병사들을 독려했다. 성문과 망루가 불타기 시작했다면, 안으로 난입해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 전에 적의 배후를 쳐야만 한다.

“우와아아-!”

우효금이 갑작스럽게 고함을 질렀다. 빨리 달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적들의 이목을 돌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래야 놈들이 성에 돌입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함성은 호기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백성들은 모두 어디론가 몸을 피했거나, 혹은 불을 끈 채 집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터라 조용해진 영욱성을 이상한 힘으로 휘감아 가는 고함이었다.

우효금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그와 호기군이 내지른 함성은 또 다른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바로 내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구문생에게 상당한 힘을 실어 줬다는 점이었다.

사실 싸움터에서 들리는 소음과 함성은 지독한 것이다.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건 물론 상관의 명령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데 구문생은 함성을 듣자마자 곧장 구원병이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랜 세월 곽가군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본능과도 같은 감각 덕이었다.

“들리느냐? 지원군이 온다! 조금만 더 참아라!”

“장군, 대부인께서 나오고 계시오.”

구문생이 연방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는 곳에 전령이 달려와 보고를 했다.

“뭣이? 대부인께서? 아니, 왜?”

“적금각이 불길에 휩싸였소이다. 그래서 대부인께서 부득이 공자를 모시로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호위는? 호위는 누가 하고 있는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구문생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적금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다급해서 다리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불칙한 자가 공자 모자께 위해라도 가하면 안 된다.’

이게 지금 구문생의 뇌리를 메운 고민의 전부였다.

곽준방이 남기고 간 병사 삼백은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싸움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호윤천 부자에게 투항하기 위한 선물로 마국립 모자의 목을 베어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걸 미연에 방지해야만 한다.

“구 장군!”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구문생은 달리던 발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적금각이 있는 곳에서 솟구친 맹렬한 불길로 인해 사방은 비교적 밝았지만, 부른 사람을 금방 찾을 수는 없었다.

“여기예요, 여기!”

다시 한 번 소리가 들려왔을 때에야, 구문생은 아직은 불이 붙지 않은 건물의 댓돌 그늘에 몸을 숨긴 몇 명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인? 공자는 무사하시오?”

먼저 윤 대부인의 얼굴을 확인한 구문생은 성급하게 마국립의 안부를 물었다. 급한 김에 말투가 불손하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그보다 이 내성이 함락되는 건가요?”

확실히 윤 대부인은 여걸이라고 할 만했다. 전혀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침착하게 전황부터 물었다.

“아니요. 외성의 전투가 치열해졌고, 또 구원군도 성안으로 들어온 것 같소이다. 염려 마십시오. 자, 가십시다.”

윤 대부인의 품에 안긴 마국립을 받아 들며 구문생이 재촉했다. 적금각을 집어삼킨 불길은 바람을 타고 시시각각 이쪽으로 번지고 있는 중이었다.

모친의 품을 떠난 마국립이 울음을 토하며 버둥거렸지만, 구문생은 무시하고 등에 업어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마국립을 갑옷 속에 품고 싶었던 구문생이었다. 그러기엔 너무 컸기에 등에 업어 단단히 묶고, 근처에 널브러진 시신에서 갑옷을 벗겨 그 위에 덮었다. 이만하면 어설프게 날아든 화살에 몸이 상할 염려는 없을 터였다.

“자, 이쪽으로.”

윤 대부인을 안내하면서, 구문생은 비로소 자신을 뒤따라온 부하가 한 명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윤 대부인도 성루로 데려가야 할 것 같았다. 거기서 기다렸다가 지금 달려오고 있는 아군과 합류하는 게 지금으로썬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윤 대부인을 부축한 구문생이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방에서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보지 않아도 성문이 깨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방에서 기묘한 함성이 들렸지만 호유진은 개의치 않았다. 설사 적이 얼마간 성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내성에 진입해 마국립 모자만 손에 넣으면 그건 그리 큰일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불타던 성문이 깨졌고, 동시에 호유진은 가장 먼저 안으로 뛰어들었다.

“대장군, 위험합니다!”

편장 중 한 명이 호유진의 뒤에서 덮쳐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무엄하다! 물러서라!”

느닷없이 바닥에 처박힌 호유진은 마구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다. 여전히 자신을 쓰러뜨린 편장이 등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익!”

한차례 용을 써서 편장을 떨군 호유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멍청하게 굳어 버렸다.

편장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등에 네 대의 화살이 꽂혔고, 그중 하나는 목을 관통시킨 상태였다.

호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볍게 생각했던 조금 전의 고함이 이처럼 무참한 현실이 되어 나타났으니 말이다.

돌연 사방이 어둑해졌다. 달이 구름에 가린 것도 아니었고, 자욱이 피어오르는 연기 탓도 아니었다. 물 한 방울 새어 나가지 못할 정도로 공간을 빽빽이 메운 화살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장군!”

호유진의 주변으로 사람의 방벽이 만들어졌다. 쏟아지는 화살로부터 그를 보호하자면 어쩔 수 없었다.

“적이 외성에 돌입했나 보오. 어떻게 하시겠소?”

방패로 호유진을 감싸고 있던 장수 한 명이 결정을 종용했다. 이런 때 망설인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것과 직결되니까 최대한 빨리 판단해서 명을 내려야 한다.

“내성으로 들어간다.”

그 아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호유진도 범상한 장수는 아니었다. 급박한 와중에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마국립 모자를 손에 넣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명을 내렸다.

명은 즉각 이행되었다. 여전히 호유진을 둘러싼 사람의 방벽은 재빨리 움직여 활짝 열린 내성으로 뛰어들었다.

그 역시 쉽지 않았다. 성문이 깨지기 전부터 대기하고 있던 곽가군이 일제히 창을 곤두세우고 밀고 나왔다.

하지만 그 숫자가 너무 적었다. 내성 공격에 투입된 호유진군의 숫자는 약 일만, 그 앞을 막아선 삼백도 채 되지 않는 병력은 그리 큰 방해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곽가군은 구문생까지 자리를 비워 체계적인 명령 체계도 흐트러진 상태였다. 한차례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일부는 성문을 확보하고 들어오는 적을 막아라.”

내성으로 들어서자마자 호유진은 명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은 앞장서 가로막는 곽가군을 치면서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하지만 곽가군, 정확하게는 우효금이 이끄는 호기군은 호유진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고, 또 맹렬했다. 미처 성문을 확보하기도 전에 들이닥쳤으니 말이다.

삽시간에 성문 주변은 지독한 난전이 벌어졌다. 피아간에 일만 오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뒤섞여 제각기 설쳐 대니, 같은 편과 싸우는 경우도 여기저기에서 속출했다.

호유진은 이 싸움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든 마국립 모자의 신병을 확보해야만 하고,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엔 죽여 버려야 한다. 결코 곽준방군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

그처럼 바라고 있는 호유진의 눈에 구문생의 모습이 보인 건 행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 대부인을 부축하느라 이 난장판 같은 상황을 자세히 살필 겨를도 없는 모양이었다.

호유진으로선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재빨리 구문생의 곁으로 접근한 뒤 다짜고짜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구문생도 노련한 장수다. 여러 곳으로 신경이 분산된 상태에서도 위험을 직감하고 옆구리의 칼을 뽑는 것과 동시에 비스듬히 홱 휘둘렀다.

스칵!

구문생의 칼이 호유진의 창날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제대로 휘둘렀다면 그대로 잘라 버렸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다급했다.

호유진은 창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 여세에 밀려 구문생은 칼을 놓쳐 버렸다.

사실 싸움에 관심이 없는 건 구문생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겐 마국립 모자를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에, 수중의 칼을 놓치자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윤 대부인을 잡아끌며 달리기 시작했다.

“서라, 구문생! 비겁하게 달아나려느냐?”

악이 받친 고함을 지르며 호유진은 구문생의 칼이 박힌 창을 힘껏 던졌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부하에게서 활을 받아 들었다.

호유진이 어떤 악담을 퍼붓든지 간에 구문생이 일일이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잡아끌던 윤 대부인의 손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자 멈춰 서서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구문생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호유진이 던진 창이 윤 대부인의 등을 꿰뚫고 가슴에 그 예리한 창날을 삐죽이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인!”

커다란 목소리로 윤 대부인을 부르던 구문생이 갑자기 뒤로 튕겨 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의 가슴엔 호유진이 쏜 화살이 꽂혀 있었다. 갑옷을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문생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윤 대부인의 생사보다는 마국립이 더 소중했고, 그는 아직 등에 업혀 있다. 이따위 화살 한 대에 쓰러져서 될 일이 아니었다.

구문생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저만치 보이는 우효금의 부대, 호기군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곳이 목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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