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지연戰國之緣 I
1
그날도 위휘군은 새벽의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아침 식사를 끝내고 공격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강유는 유난히 서둘렀다. 오늘에야말로 자신들이 성문을 깨고 입성하겠다고 단단히 벼르며 공성 무기들을 세밀하게 점검했다.
그래도 섣불리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아직 본대에서 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너무 나서다가는 많은 희생을 낼 우려도 없지 않다. 그 극명한 예가 바로 오지형의 전사가 아닌가 말이다.
이제 곧 해가 뜰 게다. 그러면 공격 명령이 떨어질 게고, 다른 부대보다 약간 늦게 공격에 가담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강유였다.
“정신들 바짝 차려라. 오늘은 기필코 우리 강국군이 가장 먼저 입성을 해야만 한다.”
“우와아아-!”
강유의 독려에 강국군은 우렁찬 함성으로 호응했다.
‘사기는 이만하면 됐다. 이제 공격 명령만 내려지면…….’
막 동녘 하늘로 솟기 시작한 태양을 보며, 강유는 가슴을 활짝 폈다. 자신의 말에 호응해 준 병사들의 함성이 더욱더 그의 투지를 들끓게 만들었다.
다른 부대에서도 연이어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 역시 공격을 앞두고 각자, 혹은 서로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있는 중이었다.
둥, 두둥, 두둥, 둥, 둥!
이윽고 본진 쪽에서 큰북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격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동시에 사방은 위휘군이 지르는 함성과, 말과 사람이 달려 나가며 내는 먼지가 뒤엉켜 시야가 뽀얗게 흐려졌다.
“기다려라! 아직 더 기다려!”
그 분위기에 휩쓸려 들뜨기 시작한 부하들을 강유는 강하게 제지했다. 지금 공격하는 대열에 같이 휩쓸렸다가는 많은 희생을 낼 수밖에 없다. 위휘군이 성병의 주의를 충분히 다른 곳으로 돌렸을 때 강력하게 치고 들어가야 한다.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강유는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자, 강국군은 모두… 엇?”
공격 명령과 함께 앞으로 떨어져 내리려던 강유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 딱 멈춰 버렸다. 한창 포란성으로 쇄도해 들어가던 위휘군이 중간 지점에서 멈춰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허공에 부유 중인 먼지가 가라앉지 않아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강유도 노련한 무장이다. 대번에 뭔가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성문이 열렸다!’
그게 아니라면 공격군의 발길이 저처럼 중간에서 딱 멈춰질 턱이 없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본진에서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군주기도 어지러이 펄럭거리며 연방 신호를 보내는 게 보였다.
“와아아-!”
여기저기에서 갑작스러운 함성이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강유의 예상대로 포란성의 남문이 활짝 열리며 비무장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게 보였다. 그중에는 소가 끄는 죄인용 함거檻車 한 대도 있었다. 아마 그 안에는 스스로 포박을 받은 거규가 타고 있을 터였다.
돌연 강유는 목덜미에서 어깻죽지에 이르는 뻐근한 통증을 느꼈다. 한껏 기세를 돋웠다가 맥없이 풀어져 버린 육신이 보이는 반응이었다.
성문이 열린 포란성의 모습은 누구보다 본진에 있는 편월의 눈에 가장 잘 보였다.
“공격을 멈춰라! 군사를 돌려! 전령, 전령!”
편월은 연방 고함을 질렀다. 막연하게 거규가 투항할 거라는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이처럼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전령 대령이오.”
“각 부대에 대지급으로 알려라. 성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참수하겠다고.”
“존명.”
그야말로 돌팔매에 쫓긴 참새 떼처럼 전령들은 사방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래 놓고도 편월은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다. 진막 밖에 내놓게 한 의자 주변을 연방 서성거렸다.
“송 군감을 불러라. 송 장군을 불러!”
마침내 편월이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린 것처럼 송지를 찾았을 때, 벌써 그와 담개는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로서도 의외의 사태였던 것이다.
“주군, 거규가 나오고 있소. 그것도 함거에 타고.”
“나도 봤소. 그런데 그를 어떻게 맞아야 할까?”
편월의 질문에 두 사람은 일시지간 말문이 막혔다. 그 점에 대해선 미처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이건 쉽지 않은 문제였다. 싸우다 힘이 부쳐 항복을 하는 적장이라면 이쪽의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발가벗고 투항을 해 오면 거기에 따른 합당한 대우가 있어야 한다. 더욱이 거규는 편월이 좋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 응대가 더욱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함거에 태운 채로 대면할 수는 없소이다. 소장이 영채 밖에 나가 있다가 거 장군을 모시고 오겠소.”
담개였다. 정규군 출신이니만치 누구보다 지금 거규의 심정을 손에 잡힐 것처럼 환하게 알 수 있었다.
그사이 각 부대의 장수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중에서 백월대의 강숙은 지나치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주군, 조심하셔야겠소. 이건 아무래도 속임수요.”
“뭐? 속임수라고?”
“그렇소. 우리가 알기론 포란성에 주둔한 거가군이 일만 이상, 백성들이 약 삼만으로 도합 오만에 이르는 숫자요. 그런데 지금 성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보시오. 병사는 눈을 씻고 봐도 일만이 채 안 될 것 같소이다. 항복하는 것처럼 보여 놓고 뒤에서 모종의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오.”
“속단하지 마시오!”
담개가 커다란 목소리로 강숙의 말을 잘랐다. 마치 자기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동안에 계속된 우리들의 공격으로 거가군이 생각 이상의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소. 저렇게 함거까지 타고 나온 무장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할망정 흉계를 꾸민다니!”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담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럴 땐 역시 노련한 송지가 한몫을 했다.
“그럼 담 장군께서는 항장을 맞는 수고를 해 주시기 바라오. 강 장군도 상황을 좀 더 지켜본 후에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도록 합시다.”
부드러운 어조로 좌중의 분위기를 녹이면서, 송지는 담개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강숙과 한자리에 있어 봐야 언쟁만 심해질 게고, 그 결과 어떤 돌발 상황이 전개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담개를 내보낸 송지의 말은 약간 달라졌다.
“강 장군의 말도 일리가 있소. 우선 성을 나오는 백성들과 병사들을 분리시켜야겠소. 그편이 돌발 사태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게요.”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야 거규를 좋아하고 믿지만, 지금 성에서 나오는 모든 사람이 그와 똑같은 마음이라고 볼 수는 없다. 미리 준비해 두는 게 상책이었다.
“백월대와 청월대가 그 일을 맡도록.”
“존명.”
강숙과 두건득이 동시에 대답하며 달려갔다.
“자리에 앉으시오, 주군.”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는 편월에게 서진청이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거규가 아무리 명장이라고 해도, 지금은 항복한 적장에 불과하다. 승자가 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맞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건 다른 장수들에 대한 위로도 겸하고 있었다. 자신들보다 거규를 더 높이 치는 것 같은 편월의 태도에 다들 약간의 불만들을 가지고 있는 눈치였다. 이렇게라도 해서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 볼 요량이었다.
그 뜻까지 헤아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편월은 의자에 앉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체통이 없다 싶어서일 것이다.
돌연 편월의 뒤에 맹아가 시립한 것을 시작으로, 주변을 근위대원들이 철통같이 에워쌌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불의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뜻과 곧 일국의 왕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위엄을 한껏 살리고자 함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편월 앞으로 걸어왔다. 함거에 탄 채 여기까지 오진 못하겠지만, 거규는 포승이 풀린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아마 담개가 풀어 줬으리라.
“패장 거규, 위휘군의 대장군께 목을 바치러 왔소이다.”
누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었다. 편월 앞에 이른 거규는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담담하게 내뱉었다.
“일어서시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편월은 거규의 손을 잡아끌었다. 결코 이런 대면을 원했던 건 아니었다. 지난날 침사성에서 목철린을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자연스레 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규는 일어서지 않았다. 아예 눈까지 감은 채 목소리를 좀 더 높였다.
“나는 무장으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졌소이다. 그런 몸으로 더 이상 산다는 것도 세상에 대한 빚이 될지니, 이번에야말로 시원하게 목을 베어 주시오.”
“그럴 순 없소.”
거규가 완강하게 죽음을 고집할수록, 편월 역시 그에게 끌리는 마음이 강해졌다.
“소장을 생각해 주시는 그 마음은 고맙소. 하지만 그걸 포란성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오. 더 이상의 정은 이 몸을 구차하게 할 뿐이외다.”
거규의 말과 태도는 누구의 눈에도 이미 죽음을 결심했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왜 아니겠는가. 지난번 합진성 싸움에서 한 번 포로가 됐었던 거규였다. 그때 한 번 편월에게 빚을 졌으니, 더 이상 산다는 것도 그의 말처럼 수치가 될 것이다.
편월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참다운 무장이라고 여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걸까? 목철린도, 거규도…….
물론 이번에도 살려 주라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거규가 받아들이지 않을 게 분명하고, 무장인 그의 이름에 오물을 끼얹는 격의 다름 아니다.
‘어떻게든 저 마음을 돌려야 하는데.’
차라리 싸워서 이기라면 이보다는 쉬울 터였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마음을 돌린다는 건 편월에게 있어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함거에서 내려 곧바로 자결하시려는 거 장군을 주군 앞에 모시고 온 사람은 바로 소장이오. 그러니 거 장군의 처리 문제는 소장에게 일임해 주시길 간청하오.”
꿇어앉은 거규의 뒤에서 정중한 군례를 갖추며 담개가 목청을 높였다.
그게 편월에겐 구원이었다. 죽여 달란다고 해서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설득할 방도도 뾰족이 없었으니 차라리 담개에게 맡기는 게 좋을 듯했다.
거기에 송지까지 끼어들어 도와주었다.
“그게 좋겠소. 거 장군의 처리는 담 장군에게 맡기고, 주군께선 조속히 입성하시는 게 좋겠소.”
“알겠소. 그럼 거 장군은 담 장군에게 맡기겠소.”
편월로선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그는 재빨리 곁에 세워 둔 소질풍에 올라탔다.
“대장군께 한 말씀 올리겠소!”
편월이 막 자리를 떠나기 직전, 거규가 재차 소리를 높여 말했다.
“내성에 들어가실 땐 방심하지 마시오.”
“그건 또 무슨 얘기요?”
거규를 맡은 담개가 재빨리 되물었다. 항복을 했으면서도, 뒤에 또 뭔가 있는 것 같은 말인지라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내성엔 지금 암호랑이 한 마리가 약 삼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들어가 있소이다.”
“암호랑이라니?”
“내 딸년이오.”
“예?”
담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이 꼴이다 보니 간혹 드센 여자들이 나와 남자들 이상의 무용을 떨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담개의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었다. 전장을 뒹굴다 보니 여기저기서 조금은 과장된 얘기를 들은 것에 불과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직접 그 실체를 보게 될 것 같았다.
“늦게 본 자식인 데다 그 어미까지 일찍 죽어 오냐오냐하며 길렀더니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르게 되어 이 아비의 말도 듣지 않는구려. 대장군께는 송구하게 되었소.”
“허어, 과연 명장의 여식이라 남다른 곳이 있는 모양이오. 거 장군은 염려 말고 나와 함께 유군의 진막으로 갑시다.”
그답지 않은 너스레로 담개는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기실 편월도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여자가 이끄는 삼천의 군병이 어떤 저항을 보일지,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담개에게 눈으로 ‘부탁한다’는 뜻을 전한 편월은 그대로 말을 몰았다. 그 뒤를 다른 장수들과 근위대가 와르르 따라 나갔고, 송지만 뒤에 남았다.
편월은 서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어느 부대가 입성을 해서 정리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포란성에서 나온 백성들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성 밖의 일은 청월대가 맡은 모양이었다. 편월의 모습을 발견한 두건득이 한달음에 달려왔고, 백성들과 병사들은 엄격히 분리되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편월은 백성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며 그 앞을 지나갔다. 하나같이 눈에 원망의 빛이 가득했다. 이건 윤주성이나 합진성을 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백성들을 잘 다스렸군.’
백성들이 자신에게 반감을 갖는다는 건, 그만큼 거규에게 승복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랬기에 끝까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게 원통하기도 했을 터였다.
그건 또 다른 생각으로 직결되었다.
‘이곳은 거 장군이 아니면 다스리지 못한다.’
목철린이 죽은 이후 막주로 들어간 광운은 어떻게든 그 땅을 잘 다스린 것 같았지만, 자신으로선 아직 백성들의 반감이 깃들어 있는 곳을 다스릴 자신이 없었다.
마침내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 편월은 잠시 소질풍을 세웠다. 싸워서 이겼다면 의당 말을 탄 채 들어가겠지만, 거규 같은 장수가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해 투항한 성이었다. 걸어 들어가는 게 최소한의 예의일 것 같았다.
편월이 막 소질풍에서 내리려는 찰나 안에서 황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전령, 전령이오!”
강숙이 보낸 것일 게다. 편월을 발견한 전령은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려 구르듯이 소질풍의 다리 아래 무릎을 꿇었다.
“주군께서는 잠시 입성을 보류하시라는 백월대장의 전갈이오.”
“이유는?”
“내성에 들어앉은 적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한지라 다른 부대를 지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인가?”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적이 강해도 성격상 쉽게 지원을 요청할 강숙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건 여자로서, 휘하에 고작 삼천 정도의 병력이 따르고 있을 뿐이다. 강숙이 고전하고 있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흑월대를 입성시키시오. 전령은 안내하라. 직접 가 보겠다.”
뒤를 따르고 있던 오강과 전령에게 동시에 명을 내리며, 편월은 내리려던 소질풍을 몰아 성문을 통과했다.
“자기 딸을 암호랑이라고 부르더니, 강 장군이 고전할 정도면 거 장군의 딸도 여간내기가 아닌 것 같소이다.”
서진청이 바짝 다가오며 편월에게 말을 붙였다. 약간은 장난기가 섞인 음색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성에 완전히 들어갔을 땐 표정들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내성 쪽에서 솟구치는 검은 연기와 치열한 격전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하아!”
편월은 소질풍의 엉덩이에 박차를 가했다. 연기와 소리만으로도 거기서 벌어지고 있을 전투의 상황이 확연하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정말로 강 장군이 고전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어쩌면 그 이상인지도 모른다. 강숙은 그 성격대로 내성을 점령하려고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을 게고, 그 와중에 의외의 일격을 받았다면 생각보다 훨씬 큰 타격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주군, 암습을 조심하시오!”
따르던 장수들이 분분히 편월을 에워쌌다. 비록 투항은 했다지만, 언제 어느 곳에 불칙한 자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외성의 시가지는 조용했다. 저항할 뜻을 가진 자들은 모두 내성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화살이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보다는 부상당했거나 죽어 가는 병사들이 내지른 비명 소리가 더 크게 들렸지만.
“강 장군은 어디 계시느냐?”
맨 앞장을 섰던 맹아가 가장 가까이 있는 병사에게 물었다. 연기와 혼란 중이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금 전에 성벽에 오르시는 걸 봤습니다.”
“뭣이? 네놈들은 대장이 성벽에 오르는데 뒤로 물러섰단 말이냐? 용서할 수 없는 놈이다!”
전투 중 후퇴, 그것도 대장이 선두에서 분전하고 있을 때 병사들이 뒤로 빠지는 건 엄격한 군율 위반이다. 맹아는 옆구리의 칼을 뽑아 들었다.
“맹 장군, 잠깐! 그 병사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소.”
편월이 재빨리 제지했고, 그제야 맹아는 방금 베려고 했던 병사의 옆구리에 박힌 부러진 창대를 보았다.
“우선 강 장군부터 찾아 백월대를 철수시키시오. 그 성격대로 했다간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니.”
주변의 장수들에게 명을 내리며, 편월은 연기 사이로 희끗희끗 보이는 내성의 성루를 올려다보았다. 삼천이라는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아 보이는 적병들이 필사적으로 농성을 하고 있었다.
‘이건 만만치 않겠군.’
적의 숫자가 실제보다 많아 보인다는 건 그만큼 기세가 강하다는 뜻이다. 깨뜨리는 건 쉽지 않을 듯했다.
“흑월대 도착이오!”
그때 오강이 이끄는 흑월대가 몰려왔고, 엇비슷하게 강숙도 갑옷 여기저기에 꽂힌 화살을 덜렁거리며 편월에게 달려왔다.
2
증두신은 떠나려는 딸의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이제 열세 살. 아이에서 소녀로 꽃을 피울 나이였지만, 아비인 증두신의 눈에는 마냥 어리게만 보였다.
“아바마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증두신의 딸 증화강曾華强은 귀엽게 예를 갖추며 아버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네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느냐?”
“예. 소녀는 이제 제 낭군이 되실 분에게 간다고 어마마마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흐음.”
증두신은 침음성을 토하고 말았다. 모든 게 딸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 일은 다분히 자신의 고집에 따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일례로 증두신의 정실은 이 혼례를 반대하다가, 급기야 몸져누워 있는 상태였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딸의 모습도 보러 나오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딸이 병문안을 갈 때마다 틈틈이 혼례에 대해 가르치긴 했나 보다. 자신의 의지 따위는 애당초 가질 수도 없고, 설혹 가졌다 하더라도 관철시킬 수 없는 슬픈 시대의 슬픈 여인상을 자신의 딸과 아내에게서 발견한 것 같아 증두신은 가슴이 아렸다.
하지만 증두신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바로 이게 딸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입을 열었다.
“네 낭군이 될 사람은 이제 곧 포란성까지 손에 넣게 된단다. 그때는 정식으로 너와 혼례를 올리게 되겠지. 그 전까지 넌 아무래도 합진성에서 기다려 할 것 같은데, 낯선 곳에서 괜찮겠느냐?”
“예. 그 이야기도 들었어요. 낭군이 되실 분은 지금 한창 전쟁 중이라죠? 그분이 개선하실 때까지 어마마마처럼 성안의 모든 일을 감독하면 된다고 들었어요.”
증화강은 영민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한 번 들었던 건 결코 잊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증두신의 질문에도 또박또박 대답할 수 있는 것이었을 테고…….
그게 증두신은 오히려 슬펐다. 이 어린 딸은 아비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는 것이겠지만, 배운 대로 재잘거리는 인형 같은 말투는 그대로 가슴을 도려내는 예리한 비수가 되었다.
게다가 딸은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채, 무턱대고 제 어미처럼만 하면 된다고 믿고 있다. 이제 곧 그 속에 깃든 눈물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 걸 생각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증두신이었다.
문득 증두신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처럼 약한 마음을 가지고 딸을 보낸다면 미리부터 불행을 예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딸의 장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은 이상, 거기에 걸맞은 마음을 가지고 가게 해야만 한다.
“어디를 가든지, 또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든지 꼭 한 가지 사실만은 명심해라. 너는 이 강회 땅에 기반을 둔 강국의 공주다. 이 점만 단단히 가슴에 새겨 둔다면 앞으로의 처신은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증두신의 말에 증화강은 생긋 웃었다.
“그 점은 소녀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훌륭하신 아바마마와 자상하신 어마마마께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았고, 또 이렇게 떠나게 되어 소녀는 기쁠 따름이에요.”
말은 그랬지만, 증화강의 눈엔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처럼 눈물방울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열세 살 어린 나이라지만, 증화강도 잘 알고 있다. 지금 부모 곁을 떠나면 다시 만날 기약을 할 수 없다는 건 물론, 가고자 하는 목적지인 합진성이란 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만큼 험악한 시절이라는 것을…….
그래도 부모 앞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억지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잔뜩 억누른 오열 소리는 엉뚱한 곳인 증화강의 뒤에서 들려왔다.
시녀들이었다. 이번에 증화강을 따라 합진성으로 가게 된 그녀들은, 이 어린 공주의 말이 의젓하면 의젓할수록 더욱 애처로워 기어이 울음을 토한 것이었다.
“기쁜 자리에 불경스럽다. 당장 울음을 그치지 못할까!”
증두신의 곁에 배석하고 있던 이환이 커다란 목소리로 시녀를 꾸짖었다. 속내야 어떻든 경사스러운 공주의 국혼을 위해 가는 길이다. 미리부터 눈물을 보인대서야 그 앞길이 염려스러웠다.
“나무라지 마세요, 이 장군. 저들도 이 못난 몸을 따라 살던 땅을 떠나게 되었어요. 그 점이 나는 미안할 따름이에요.”
“고, 공주 마마…….”
이환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나이 어린 공주의 배려심이 자신보다 더 강한 것 같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공주는 그만 떠날 준비를 하라. 그 전에 내전에 들러 병석에 있는 중전께 문안드리는 걸 잊지 말고…….”
자칫 자신의 목소리마저 떨릴 것 같아 차마 말을 맺지 못하는 증두신이었다.
“그럼 소녀는 이만 떠나겠사옵니다. 다시 뵈올 때까지 옥체 보중하시옵소서.”
증화강은 그 자리에서 날아갈 듯 대례를 올렸다. 그러고는 시녀들을 거느리고 조용히 물러갔다.
“너무 심려 마옵소서. 공주 마마를 호위해 가는 마홍馬鴻은 소장의 막하 중에서도 뛰어난 자이옵니다. 군사도 고르고 고른 정예로 천 명을 선발해 뒀고, 합진성까지는 별다른 적도 없을 터이니 무사하실 것이옵니다.”
“이 장군이 수배한 일이니 빈틈은 없겠지.”
증두신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직은 눈꺼풀 속에서 아른거리는 딸의 모습을 되새기고 있는 탓이었다.
“공주가 얼마나 더 자라야 이 아비의 심정을 알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입 밖으로 내뱉어진 증두신의 독백에 이환의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전하…….’
하마터면 이환은 소리 내어 부를 뻔했다. 그만큼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지금 증두신의 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환이었다. 왜 선왕의 원수인 광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편월을 받아들여 사위로까지 맞았는지, 또 어린 딸을 이처럼 서둘러 보내야 했는지를 말이다.
‘하긴 요즘 들어 상초국의 압력이 부쩍 커졌지.’
바로 이게 증두신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원인이었다.
일찍이 증두신은 상초국의 지원을 끌어들인 걸 자책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위급하더라도 다른 나라, 이민족의 힘을 빌렸다는 걸 늘 께름칙하게 생각했다.
처음 이환은 증두신의 그런 생각을 기우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정말 성심껏 싸워 주는 상초국의 우의에 감복한 점도 있었지만, 최악의 경우 싸우게 되더라도 설마 질쏘냐 하는 사뭇 무장다운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런데 증두신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상초국은 지나치게 많은 지원병을 보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이젠 노골적으로 강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겸후가 국상을 발표한 이후로 식운관을 사이에 둔 크고 작은 전투들은 물론, 해전도 잠정적으로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상초국의 대원수 소촌은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지금이 율천국을 칠 기회라며 총공격을 감행하자고 증두신에게 압력을 가했다.
증두신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비록 가문이 스스로 왕을 칭하며 강회 땅에서 군림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황실의 신하인 것이다. 황태자의 국상 중에, 황제가 있는 나라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수록 상초국의 압력은 가중되었다. 특히 최근의 해전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 수군 도독 송평은 거의 눈이 뒤집혀 버렸을 정도다.
비단 압력만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증두신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게 분명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딸을 출가시키고, 아들들까지 은연중에 피신시킬 방도를 강구하는 것 같았다.
강국 제일가는 무장으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환의 심정도 결코 편한 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상초국 지원군을 돌려보내거나 일전을 벌여 물리치고 싶었지만, 그건 그저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십만을 훌쩍 넘겨 버린 그들을 이길 힘이 자신들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이환은 최근 들어 한 가지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 전하와 그 가족 분만큼은 무사히 위휘군으로 보내 드린다. 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하긴, 이런 생각을 하는 무장은 이환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 위기를 의식하고 있는 강국 장수들의 일치된 심정이리라.
“황태자의 국상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소?”
별안간 증두신이 맥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적어도 다음 달 중양절(음력 9월 9일)까지는 계속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한 달이라… 그 후가 걱정이로군.”
여전히 나직한 증두신의 말에 이환은 가슴이 콱 막혀 오는 걸 느꼈다. 왕이 탄식을 토하면 신하는 죽음으로 그 심려를 덜어 줘야만 한다. 결심은 이미 단단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입 열어 고할 말도 달리 없으니, 속만 끓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뢰옵니다!”
돌연 반무장 차림의 장수 한 명이 뛰어 들어와 증두신 앞에 부복했다. 국상 중이라지만 율천국과의 분쟁이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기에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저런 차림이었다.
“허주에서 우리나라로 오던 사신 일행이 지금 탄금성에 억류되어 있다 하옵니다.”
“허주에서?”
증두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주의 조환이 사신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분명 와 있는 것 같으니 그에 대한 대책은 논의를 해 봐야 한다.
“알겠다. 물러가서 하명을 기다려라.”
보고를 한 부하를 물리친 후 증두신은 이환에게 물었다.
“조환이 사신을 보냈다니, 이건 또 무슨 일일 것 같소?”
질문을 받았지만 당혹스럽긴 이환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던지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무장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조환의 심정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는 있었다.
“어쩌면 동맹을 맺자는 사자인지도 모르겠사옵니다. 허주의 조환도 지금 율천국에 영산을 빼앗겨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으니.”
“동맹을 맺자고? 흐음.”
증두신은 낮은 한숨을 토했다. 이미 상초국과 맺은 동맹을 후회하고 있던 참이었다. 거기에 허주까지 연계된다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 심정을 이환은 빤히 알 수 있었다. 알기에 보다 자신에 찬 어투로 말할 수 있었다.
“그건 소장의 추측일 뿐입니다. 자세한 것은 사신들을 만나 보면 아실 일이옵니다. 그러니 서둘러 탄금성에 통고해 그들을 보내라고 하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만나 보면 안단 말이지.”
“그들의 말을 들어 보고 채택하고 말고는 전하의 마음이옵니다. 피하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알겠소. 속히 탄금성으로 전령을 보내도록 하시오.”
“존명.”
가볍게 예를 갖춘 이환은 자신이 직접 명을 내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밀영密影은 게 있는가?”
이환이 나가자마자 증두신은 천장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대답은 증두신이 앉은 용상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증선회가 죽었을 때 연미각으로 가던 이환의 발길을 막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허주로 간인을 파견해야겠다. 조환이 어떤 심정인지 최대한 빨리 알아 오도록.”
“존명!”
“또 하나, 그대의 손이 닿는 시녀 두세 명을 공주 측근에 넣어 줬으면 좋겠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의 경우 공주를 보호할 수 있도록.”
“이미 손을 써 두었습니다.”
“그런가? 수고했네.”
“그럼…….”
말이 끝났을 때 이미 밀영의 그림자도 사라져 버렸다.
문득 증두신은 허전한 외로움을 느꼈다. 이 아득한 천하에 홀로 버려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울적한 심정을 떨어 버렸다. 가장 마음에 걸리던 딸은 어떻게든 출가를 시켰다. 이제 두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일만 남았다.
“내전으로 간다고 일러라!”
소리 높여 알리며 증두신은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병석에 있는 부인에게 들를 생각이었다.
* * *
공격 명령을 내린 호윤천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 공격을 가하기 전에 호윤천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곽준방에겐 물론 내성에 있는 구문생에게도 사자를 보냈다. 조용히 물러간다면 치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두 군데 모두에서 무시당했고, 오늘 아침 내성으로 보낸 최후의 통첩까지도 구문생에 의해 깨끗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게 결정적으로 호윤천의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국립 모자를 남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다시 찾아와야만 한다.
‘난전 중에 죽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이 역시 호윤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기씨 부인을 통한 미인계로 마용승까지 암살했던 터였다. 그 부인이나 아들이라고 해서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싸움의 와중에 마국립 모자가 죽는다면, 그 죄를 곽준방 무리에게 전가시킬 수도 있다. 호윤천의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는 싸움이었다.
정작 호윤천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건 밖에 주둔하고 있는 곽준방이 거느린 삼만 대군이었다. 인근 성에 배치시켜 둔 부하들에게 군사를 동원하라고 파발을 보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곽준방이 당장 도전해 온다면 번거로워진다. 최대한 빨리 내성을 함락시켜야 한다.’
하지만 내성에 들어앉은 구문생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거느리고 왔던 삼백의 정예병과 마국립 모자를 따르는 자들을 규합하여 약 천 명으로 농성을 하니 단시간 내에 깨뜨리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대장군에게 전령을 보내 공격을 서두르라고 일러라.”
생각을 거듭할수록 조급해지는 호윤천이었다.
“성 밖으로 내보낸 간인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곽가군의 동정은 어떻다더냐?”
연방 명을 내리면서도 스스로 너무 조급해하고 있다는 걸 호윤천은 강하게 의식했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곽준방이 공격해 오기 전에 내성을 함락시키자니 어쩔 수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 호윤천에게 호유진이 다가와 군례를 갖췄다. 술에 절어 있던 얼마 전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고, 무장을 하고 있는 모습은 대장군의 직책에 걸맞게 늠름했다.
“왜 이리 더디냐? 성에 있는 자들을 모두 합쳐 봐야 고작 천 명도 되지 않는다. 곽준방이 행동을 일으키기 전에 조속히 끝내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저녁때나 되어야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늦다! 우리 병사는 이만이다. 그에 비해 곽준방은 삼만에 이르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 놈이 공격을 감행한다면, 우린 가뜩이나 모자란 군사를 나눠야 한다. 그리되면 내성 공략도 어려울 테니 그 전에 함락시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마국립 모자는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지 알고 있겠지?”
“그야 물론!”
“다른 사람에게 맡겨선 안 된다. 그들만은 네 손으로 직접 처치해야 한다. 물론 은밀하게.”
호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강한 눈빛으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후 재빨리 달려갔다.
그 모습을 호윤천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다른 어떤 것보다 아들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게 가장 기뻤다.
하지만 상황은 호윤천으로 하여금 그 좋은 기분을 오래 간직하게 놔두질 않았다.
“보고, 성 밖의 곽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뭐라고?”
덜컥, 소리를 내면서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호윤천의 전신을 휘감아 돌았다.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었지만, 이건 너무 빨랐다.
그래도 호윤천이 누군가? 젊은 시절부터 각종 전장을 누비며, 종내는 파양주의 대장군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전령은 대장군에게 가서 내성을 공격하고 있는 병력 중 절반을 외성으로 돌리라고 일러라.”
기실 단 한 명의 병사도 내성 공격에서 빼고 싶지 않았지만, 호윤천은 어쩔 수 없이 명을 내렸다. 만에 하나 곽가군이 성안으로 들어온다면 자신들로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외성으로 달려가는 호윤천의 눈에, 성 밖에서 자욱이 피어오른 먼지가 먼저 보였다. 곽가군 삼만이 일으키는 것이었다.
3
농성하고 있는 적의 장수가 여자란 걸 안 강숙의 표정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맹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 콩 먹고 배앓이 하는 얼굴이라고 했다.
어쨌든 그 사실을 안 강숙은 백월대를 모두 철수시켜 버렸다. 여자를 상대로 싸우는 건 사나이의 체면을 깎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마 그 때문일 게다. 다른 장수들도 선뜻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어떻게든 일번 돌입을 노리던 다른 때를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한 현상이었다.
하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여자를 상대로 이겨 봐야 명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승리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치욕이다. 공격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싸우고 싶지 않은 건 편월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성주인 거규는 투항을 한 상태였다. 담개와 송지가 어떻게 그를 설득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그 딸이 농성하는 내성에 무차별 공격을 퍼붓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쟁은 기분 내키는 대로 해서 될 게 아니다. 특히 포란성에서 투항한 백성들이 강한 반감을 품고 있는 마당에 거규의 딸이 의외로 선전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떤 소동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편월은 소질풍을 몰아 내성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방패 부대 앞장서라!”
맹아가 재빨리 곁으로 다가서며 근위대에 명을 내렸다. 아직도 내성에선 저항이 완강해 화살이 심심찮게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편월은 맹아가 걱정할 정도로 성에 바짝 다가가지는 않았다. 성병들이 보이는 곳에 말을 멈춘 채 그들의 배치 상태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편지를 한 통 써 보내는 게 좋겠군.”
“예?”
“성안으로 편지를 쓰라는 말이오. 아버지가 투항을 했으니 저항을 그만두고 나오라고. 화살에 묶어서 쏘면 누군가는 뜯어보겠지. 그런데 거 장군의 딸 이름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봤소?”
편월의 질문에 맹아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흘낏 쳐다보았다. 거규에게 그걸 물어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걸 잘 알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대답을 해 두고선 가장 가까이 있는 근위대원을 불렀다. 담개에게 가서 넌지시 거규의 딸 이름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린 건 물론이었다.
“그럼 맹 장군이 편지를 한 통 써 보시오. 농성하고 있는 여장군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도록 글을 잘 닦아서…….”
“자, 잠깐만, 주군!”
맹아가 당혹스럽게 손을 휘저으며 편월의 말을 잘랐다.
“소, 소장이 아는 글이라곤 겨우 내 이름 석 자를 쓸 정도요. 편지라니? 다, 당치도 않소이다.”
연방 고개를 가로젓는 맹아의 얼굴은 아예 사색으로 질려 버렸다. 천군만마의 적병을 향해 혼자 돌격하라고 해도 저보다는 나은 표정이리라.
“그러니 편지는 주군께서 직접 쓰시거나 다른 사람을 물색해 보시오.”
“실은 나도 간신히 읽고 쓰는 정도요. 허어, 이거 참.”
편월은 탄식을 토했다. 편지로써 투항을 권유한다는 방법을 떠올렸을 때만 해도 기찬 생각이라고 스스로 흐뭇해하기도 했다. 정작 중요한 걸 간과하고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 중에 편지를 쓸 만큼 글을 익힌 사람이 있을까?’
위휘군의 주축이랄 수 있는 잡가군 출신의 무장이나 병사들은 어림없을 터였다.
하지만 담개나 사문기라면 무예를 익히는 틈틈이(?) 글공부를 했을지도 모른다.
“사 장군은 지금 어디 계신가? 찾아서 데려오도록.”
편월은 근처에 있는 근위대원에게 명을 내린 후 말을 돌렸다.
‘글공부도 좀 더 해야 하는가?’
글을 모른다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문보다는 무를 더욱 중시하고 있기에, 거기에 따른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당장 오늘처럼 편지 한 통을 쓰려고 해도 그렇고, 서면으로 올라오는 각종 보고나 통계들도 간신히 해독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맹아가 곁에 바짝 따라붙었지만 편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맹아도 그리 할 말이 없었다. 거규의 딸 이름도 몰랐고, 글도 제대로 알지 못하니 근위대장으로서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적정은 다 둘러보셨소?”
“이 중에 글을 잘 쓰시는 분이 계시오?”
편월이 돌아온 걸 본 장수들이 물었지만, 그건 맹아의 또 다른 질문으로 막혀 버렸다.
“뜬금없이 무슨 글을……?”
“그러게. 전쟁터에서 글을 찾아 뭐 하누?”
맹아의 말을 들은 장수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흔들었다.
“주군께서는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써서 성안으로 보낼 생각이시오. 그런데 이렇게 글을 몰라서야…….”
맹아도 차마 말을 맺지 못했다. 그 역시 글을 모른다는 점에선 다른 무장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쉽지 않을 듯하오. 외성에 있는 양곡 창고와 무기 창고를 점검해 봤는데, 모두 절반 이상이 비어 있었소. 내성으로 가져간 게 분명할 게고, 그 정도 양이면 적어도 반년 이상은 농성할 수 있을 게요.”
두건득이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병참의 책임을 맡다시피 했으니, 성 밖에서의 일이 끝나자마자 창고들부터 세밀히 조사한 모양이었다.
“그때까지 누가 기다린담? 오늘 중에라도 당장…….”
“그러는 서 장군께서 한번 공격해 보시오. 기꺼이 선봉을 양보하리다.”
서진청이 나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강숙이 그 말을 받았다. 한차례 공격을 가했다가 상대가 여자인 걸 알고서 물러섰던 참이었다.
그런데 서진청은 마치 아주 쉬운 일인 것처럼 얘기하니 자신도 모르게 불쑥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우리 적월대가 선봉을 맡겠다는 건 아닐세.”
서진청도 아차 싶었는지 슬그머니 발을 빼 버렸다.
그러던 차에 거가군의 갑옷을 입은 낯선 자를 데리고, 사문기가 땀을 흘리며 달려왔다.
“부르셨소이까?”
“저 사람은 누구요? 보아하니 투항한 장수 같은데.”
편월은 사문기가 데려온 사람에 대해 먼저 물었다. 그가 데려왔으니 믿어도 되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는 위휘군의 장수들이 거의 다 모여 있다. 작전에 대한 말도 나올 게 분명하니, 보안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아, 이 사람은 포란성의 창고를 담당했던 개묵介이란 장수요. 주군께 인사시키려고 데려왔소이다.”
“개묵이라 하오. 뭐든 협조해 드리라는 거 성주의 명에 따라 이렇게 왔소이다.”
개묵은 편월에게 정중한 군례를 갖췄다. 하지만 그 동작 하나하나에 투항한 자의 수치심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눈동자에도 역시 거규의 말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허리 숙이지 않았을 것이란 빛이 감돌았다.
“잠깐 얘기를 나눠 봤는데 계산하는 데는 아주 귀신같았소이다. 거 장군의 말에 의하면 무예도 출중한 것 같고.”
“계산? 그렇다면 글도 잘하겠군.”
편월보다 먼저 맹아가 반색을 띠며 물었다. 지금껏 편지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글은 조금 알지만, 무슨 일로 그러시오?”
되묻는 개묵의 어투는 퉁명스러웠다. 자발적으로 하는 협조가 아닌지라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편지를 한 통 써 줘야겠소.”
“편지라니?”
“내성에 들어가 있는 거 장군의 딸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요.”
“하하하하!”
돌연 개묵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왜 웃소?”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맹아가 물었다. 자신의 말끝에 개묵이 웃음을 터뜨리자 기분이 나빴다.
“그런 편지라면 얼마든지 써 드리겠소. 하지만 아가씨가 투항할 거라는 기대 따위는 애당초 하지 마시오. 지필묵을 갖다 주시오. 지금 당장 쓰리다.”
개묵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자 어안이 벙벙해진 건 오히려 위휘군의 장수들이었다.
“그러니까 편지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말이오?”
편월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쨌든 편지를 쓴다는 건 자신의 생각이었다. 끝까지 관철시키거나, 아니면 창피를 당하기 전에 그만둬야 한다.
“편지 한 장에 마음을 움직일 아가씨였다면 성주께서 투항하실 때 같이 성을 나가셨을 거요.”
“하긴…….”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그래도 한 통 써 주시오. 이건 거 장군의 따님에 대한 마지막 예의요.”
이어진 편월의 말에 이번엔 개묵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감언이설로, 싸우지 않고 내성을 손에 넣으려는 수작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처럼 단순한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필묵을 주시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개묵이 말했고, 그건 곧바로 준비되었다.
“앞으로 쓸모가 많은 사람이오.”
사문기가 편지를 쓰고 있는 개묵을 눈으로 가리키며 편월의 귀에 나직이 속삭였다.
“두 장군께는 미안한 얘기지만, 지금까지 우리 병참은 말 그대로 주먹구구식이었소. 그 점에 있어선 개 장군에게 좀 배워도 좋을 것 같아 데려온 거요.”
“그가 도와줄 것 같소?”
“그거야 주군…께서 하시기 나름 아니겠소.”
사문기는 아직도 편월을 주군으로 부르는 데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때 영림과 양원 지방의 패주로 군림했었던 과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사문기가 다시 과거의 신분의 되찾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의 원수인 강국을 멸망시키고 싶을 뿐이었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제대로 도와줄 것 같지 않으니, 좀 더 두고 보도록 합시다.”
얘기를 끝내고 편월이 움직이자, 두건득이 사문기 곁으로 다가왔다.
“고맙소, 사 장군.”
“응? 뭐가 말이오?”
“얘기는 대강 들었소. 잘하면 따분한 병참 임무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더군.”
사문기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두건득을 쳐다보았다. 혹시 비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두건득의 눈은 정말 고맙다는 빛을 띤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문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잡가군 출신이라고 하지만, 이쯤 되면 정말이지 전쟁병 환자라고 할 수 있다. 정규군이라면 싸우기 싫어서라도 병참 부대에 배속되길 원하는데, 그게 따분했다고 하니 기가 질릴 노릇이었다.
“증두신의 딸이 곧 올 거라고 들었는데…….”
사문기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 역시 오지형이 죽은 후 강국 원정군의 장수가 강유로 바뀐 건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한 말 중에 증두신의 딸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는 걸 말이다.
두건득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사문기가 증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그래도 바로 코앞에서 눈을 빤히 치켜뜨고 묻는데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곧장 온다는 말은 없었소. 우리가 준비가 될 때까지 합진성에서 기다려도 좋다고 했지.”
“그랬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사문기는 몸을 돌렸다. 복받치는 감정이야 왜 없겠냐만, 복수의 대상은 증두신의 딸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큰 강국 전체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편지가 다 됐소. 한번 읽어 보라는 주군의 명이시오.”
맹아가 이제 먹물이 마르기 시작한 편지를 사문기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는 위휘군의 장수들 중 그가 글을 가장 잘 알 것 같다고 편월이 판단한 모양이었다.
편지를 받아 든 사문기는 대충 훑어보았다. 썩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쪽의 뜻만은 잘 나타나 있었다.
“좋군.”
간단하게 대답한 후 사문기는 편지를 맹아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그걸 화살 끝에 묶은 맹아는 곧장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직접 성안으로 쏘려는 게 분명했다.
때를 같이해 전군에 취사 명령이 내려졌다. 벌써 해는 중천을 지나려 하고 있었다.
내성에서 답장이 온 것은 신시가 막 시작된 직후였다. 장수들은 다시 한 번 모여들었고, 그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유시 말경에 편월이 수행원 다섯 명만 데리고 직접 내성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자세한 건 그때 얘기하자면서 말이다.
“이건 더 볼 것도 없소. 애당초 투항할 의사가 없는 거요.”
“소장의 생각도 그렇소. 우리가 뭐 아쉬워서 주군을 내성에 들여보내겠소? 어린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장수들은 분격해 마지않았다. 입장이 바뀌어 위휘군이 열세에 몰려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아무튼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요. 주군께서 성안으로 들어가면, 그길로 끝이오.”
“개 장군의 생각은 어떻소?”
제각기 한마디씩 하는 와중에, 편월은 개묵의 의견을 물었다. 거규의 딸에 대해선 여기 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난 이미 말씀드렸소. 어떤 일이 있어도 아가씨는 투항하지 않을 거요.”
“그럼 내가 성으로 들어가면 그 즉시 목 없는 귀신이 될 거란 얘기요? 참, 그 여장군의 이름이 거예홍巨霓虹이라고 하던데, 맞소?”
“이름은 맞소. 그리고 아가씨는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 아니오.”
“그럼 믿고 들어가도 좋다는 말이오?”
“그건 안 됩니다!”
편월과 개묵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맹아가 큰 소리로 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건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설사 거예홍의 성품이 개묵의 말과 같다고 해도, 달랑 다섯 명만 거느린 편월을 내성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다.
그렇게 목청껏 자기 의견들을 얘기하고 있을 때 송지가 달려왔다. 이곳의 상황을 모르지는 않겠지만, 그의 얼굴은 희색이 만연했다.
“거 장군이 자결할 뜻을 거뒀소. 투항한 백성들과 병사들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뭐든 협조하겠다고 했소이다.”
“그건 반가운 일이군.”
“그런데 답장이 왔다고 들었소. 어려운 조건이 달려 있다던데…….”
말꼬리를 흐리며 송지가 의자에 앉자, 맹아가 재빨리 편지의 내용을 얘기해 줬다.
“흐음, 그건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뭣이? 그럼 송 군감은 주군을 사지에 몰아넣자는 말이오?”
“맹 장군, 진정하고 내 말부터 들어 보게.”
송지는 잔뜩 흥분해서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지르는 맹아를 부드럽게 달랬다.
“우선 주군께서는 이 포란성의 백성들이 입을 피해를 걱정해서 성주인 거 장군을 투항시켰네. 그런데 그 딸이 저항한다고 해서 무력을 써서 죽이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래서 투항을 권하고 있는 게 아니오. 듣지 않는 건 저쪽이니, 공격을 당해도 할 말이 없겠지.”
“그건 맞는 말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과 입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닐세. 만약 거 장군의 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우리 주군은 당장 냉혹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날 걸세. 그렇게 되면 우리 위휘군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걸세.”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오? 주군을 성안으로 보내겠다는 건 빼고…….”
“내 말은 주군께서 성으로 가시는 게 좋겠다는 걸세. 단 수행원 중에 거 장군도 포함시켜서.”
“뭐?”
맹아를 포함한 여러 장수들에게 송지의 말은 놀랍기만 했다. 편월을 성안으로 보내겠다는 것도, 그 수행원에 거규를 포함시키겠다는 것도 말이다.
“거 장군과 함께 갈 수는 없소. 너무 무참한 짓이오.”
“그렇소. 부녀간에 상당히 어색한 자리가, 아니 그럼 주군께선 성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이오?”
편월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던 서진청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편월이 성으로 갈 뜻을 내비쳤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렇소.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아.”
실제로 편월은 웃고 있었고, 눈빛도 짓궂은 장난을 꾸미고 있는 꼬마처럼 반짝이는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