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세비감亂世悲感 3 (41/66)

난세비감亂世悲感 3

1

황태자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천하에 내로라하는 무장들에겐 모두 연락했지만, 예상대로 가겸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자들만 참석했을 뿐이다.

그래도 한 가지 의도는 맞아떨어졌다. 황태자의 국상을 선포하자마자, 연일 싸움을 걸어오던 강국이 잠시 창끝을 봉했음은 물론 허주의 조환도 영산 탈환의 의도를 보류할 것 같은 기미를 보였다.

다만 한 군데, 편월이 이끄는 위휘군만이 파양주에서의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들이 포란성을 공격하기 위해 병사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가 오늘 아침 올라온 참이었다.

‘지금쯤 포란성은 떨어졌거나 고전을 거듭하고 있겠군.’

간인들이 정보를 수집하는 시점에서 보고가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차가 존재한다. 그러니 정보란 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되고, 분석해서 정확한 판단까지 내려야 한다.

그 결과 가겸후는 위휘군이 우세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들의 기세는 가히 파죽지세였고, 그건 당분간 꺾기 힘들 터였다.

그래도 좋다고 가겸후는 생각했다. 당면한 문제는 강국 및 허주와의 분쟁이었다. 그게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된 것 같으니, 파양주가 시끄러울수록 오히려 유리해진다.

“전하, 모두가 기다리고…….”

“폐포자를 불러라.”

보차가 고하는 걸 자르며 가겸후는 명을 내렸다. 결코 충동적으로 폐포자를 찾은 건 아니었다. 황태자의 장례식과 관련해 모종의 일 하나를 처리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오면 장례식을 연기하오리까?”

“아니다. 그대로 진행하라고 일러라.”

“하지만 전하께서 제주祭主이신지라 참석하지 않으시면 연기가 불가피하옵니다.”

아들의 죽음에 그 아비가 제주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황제는 궁중 깊숙한 곳에서 슬픔을 달랠 터이고, 장례식은 마땅히 가겸후가 주관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좋아서 제주가 되고자 했던 가겸후가 아니었다. 천하의 뭇 제후나 패자들이 참석한다면, 그 앞에서 위엄을 보이고자 했던 것뿐이었다. 그들이 모두 불참했으니 구태여 귀찮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육 장군에게 대신 하라 일러라. 그리고 속히 폐포자를 불러라.”

재차 이어진 가겸후의 명에 보차는 어쩔 수 없이 폐포자를 찾으러 갔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

이제 마흔 중반에 이른 자신의 나이를 가겸후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또다시 천하 대란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비록 당장은 강국과 융주의 도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건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당면한 고비만 넘긴다면, 그야말로 천하 통일의 대업에도 당당히 손댈 수 있게 될 터였다.

그 전에 가겸후는 황제에게 양위를 받을 생각이었다. 그래야 보다 강력한 힘으로 천하의 뭇 제후나 패자들을 압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급하다고 해서 서툴게 일을 처리하는 건 금물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꾸며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찬탈을 꾀한 역적이 되어 만민의 지탄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부르셨습니까?”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 가겸후를 깨운 건 보차에게 불려 온 폐포자였다.

“가까이 오시오. 장례식은?”

“육 장군이 주도하고 있습니다만, 그건 역시 전하께서 하셔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개의치 마시오. 그보다 좀 더 가까이 오시오.”

거듭 다가오라는 가겸후의 말에 폐포자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누가 들어선 안 되는 얘기란 걸 느낀 탓이었다.

폐포자는 스스럼없이 용상으로 다가가 가겸후의 입가에 귀를 바짝 들이댔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기겁할 모습이었지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 귀에 대고 가겸후는 나직이 속삭이기 시작했고, 폐포자의 얼굴은 차마 마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경직되었다.

“자, 잠시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얘기를 다 들은 폐포자는 말까지 더듬으며 가겸후의 곁에서 떨어졌다.

“이건 짐이 오래 생각했던 일이오. 그러니 폐포자가 고심할 일은 없을 게요.”

귓속말을 할 때보다는 커졌지만, 가겸후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직했다. 그 속엔 은근한 협박의 기미마저 엿보였다.

그런 점은 누구보다 폐포자 자신이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황제에게 선양을 받는다는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은 이상,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냥 두지 않을 가겸후인 것이다.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폐포자의 얼굴에 이윽고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들어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수고하시오.”

예를 갖추는 폐포자의 숙여진 등에 대고 가겸후는 짧게 말했다.

진무각을 빠져나온 폐포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좋아 선양이지 황제는 결코 가겸후의 뜻에 따르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토록 오래 지속된 전국난세 속에서 비슷한 시도나 협박이 한두 번도 아니었을 테지만, 그 모든 걸 이겨 내고 지금까지 황통을 잇고 있다. 그 점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황제를 시해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게 폐포자를 고민하게 만드는 문제였다. 어설프게 처리했다가는 황제를 죽였다는 크나큰 죄과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올 테니 말이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폐포자는 이윽고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길로 내성을 벗어난 폐포자는 외성의 상가 구역에 형성되어 있는 노예시장에 들렀다.

전쟁이 많은 시절일수록 노예시장도 활성화되기 마련이다. 포로로 잡힌 적군이나 적지의 양민들을 사고팔기 때문이다.

오늘 상가 구역은 황태자의 국상이 발표된 탓에 썰렁하기만 했다.

그래도 노예시장은 다른 날엔 미치지 못했지만 수많은 노예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융주나 강국에서 잡혀 오는 포로나 양민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였다.

한참 동안 노예시장을 헤집고 다녔지만, 폐포자는 자신이 원하는 노예를 찾을 수 없었다.

‘상초국 병사들은 포로가 되기보다는 자결을 택한다더니…….’

그렇다. 지금 폐포자는 포로로 잡혀 노예시장에 넘겨진 상초국 병사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그게 황제 시해를 위한 첫걸음임은 그 자신만이 아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시진 이상이나 시장을 헤맸지만, 상초국의 병사는 찾을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폐포자는 이 노예시장을 총괄하고 있는 관리를 찾아 상초국 출신의 노예가 오면 최대한 빨리 연락하라고 일러두었다. 그 정도 해 두면 다음에 강국과의 전투가 벌어지면 아군 장병들은 기를 쓰고 상초국 병사를 사로잡으려 할 게 뻔하다.

폐포자가 다음에 들른 곳은 대장간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곳 역시 국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다음 전쟁을 대비하는 무구의 제작은 황태자의 죽음이라고 해서 멈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폐포자가 찾고 있는 게 즐비했다. 바로 상초국의 갑옷과 각종 무기류였다. 율천국의 것과 비교해 못한 것은 폐기하고 나은 것은 복제해서 무기를 개량하려고, 노획물 중에서 상태가 좋은 것들만 모아 뒀던 것이다.

여기서도 폐포자는 관할 관리를 만나 뭔가를 지시했다.

그 일을 모두 끝내고 나서야 폐포자는 다시 진무각으로 향했다. 자신의 계획을 가겸후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 * *

막주로 돌아온 광운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할 일은 물론 죽영의 병구완이었다. 내전에 그녀를 두고, 시녀들로 하여금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게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짬이 날 때마다 들렀고, 밤은 거의 그녀와 함께 보냈다.

약과 명의를 구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침사성은 물론 인근의 이름난 의생들과 약초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기도 했다.

그러나 죽영의 병은 의외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남쪽의 후텁지근한 기후가 악영향을 끼친 건지도 몰랐다.

심정적으로야 그런 죽영 곁을 한시도 떠나기 싫은 광운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할 일이 있었다. 지금도 흑암성에선 연일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테니, 거기에 보낼 보급품과 새로운 병사들을 끊임없이 양성해야만 했다.

특히 수군을 키울 때는 죽은 마용승의 앞을 내다보는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막주로 돌아온 이후 다른 곳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더욱 열을 올렸고, 그 결과 율천국과 상초국의 해전에 대한 걸 낱낱이 알게 되었다.

해전과 육전은 전술은 물론 그 규모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육전의 경우 약 일만의 병사를 잃고 패전을 한다고 해도 그건 그리 큰 손해가 아니다. 다시 일만의 병사들을 보충하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해전의 경우라면 사뭇 달라진다. 우선 병사 일만을 움직이는 데만 해도 근 천여 척에 달하는 병선이 필요하다. 사람은 물론 물자도 함께 날라야 하기 때문이다.

병선 한 척을 건조하는 데 드는 비용이 얼만가. 그게 천 척이 되고, 거기에 병사와 물자를 가득 채운 상태에서 패전한다면 그 손해는 육전의 몇십 배에 이를지도 모른다. 가히 한 번 전투에서 나라 자체의 흥망이 좌우될 수도 있을 터였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마용승은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바다가 없는 파양주에서 한평생을 살았으면서도, 막주를 병탄하자마자 수군의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게 광운으로선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요즘 광운은 죽영의 곁을 떠나면 곧바로 조선창造船倉으로 향한다. 배를 건조하는 건 물론 수군을 양성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광운은 단 한 번도 해전을 치러 본 적이 없었다. 전술은 물론이고 어떻게 병사들을 훈련시켜야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광운은 조금도 의욕이 꺾이지 않았다. 처음 막주에 수군을 양성하겠다고 했을 때는 지금보다 더 백지상태였었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배웠다. 소위 서방정변으로 나가 있는 동안에도 틈틈이 연구했고, 지금은 율천국과 상초국 사이의 해전에 관한 건 뭐든 알아내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 결과 광운은 적어도 ‘해전은 어떤 것이다.’라는 것에 대한 감은 잡게 되었다. 원래가 타고난 전사이니 숙달되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오늘도 광운은 죽영의 병문안을 마치자마자 질풍을 타고 진향강進向江으로 향했다.

진향강은 침사성에서 남쪽으로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곧바로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강이다. 그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예로부터 선박을 제조해 오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질풍은 광운을 조선창까지 옮겨 주었다.

조선창 주변은 가진막 천지였다. 원래 있던 가옥 몇 채를 제외하면, 광운이 본격적으로 수군을 양성하면서부터 지은 것들이었다. 배를 만드는 목수나 훈련을 받고 있는 수병들을 수용하기 위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외곽에서 파수를 보고 있던 병사들의 군례에 가볍게 응대하면서 광운은 곧바로 강변으로 달렸다.

시야를 방해하던 가진막의 밀집 지역을 벗어나자, 거기는 곧바로 강과 바다였다.

그렇다고 시야가 확 트인 건 아니었다. 바다와 강엔 수많은 배들이 들어차 있었다. 이미 완성된 것과 아직 건조 중인 것이 뒤섞인 상태였다. 개중에는 벌써 훈련을 시작해 먼 바다로 나가는 것들도 있었다.

“성주를 뵙습니다.”

광운에 의해 수군 제독으로 임명된 주융朱隆이 제독부에서 황급히 달려 나오며 예를 갖췄다. 배 위에서 나고 자랐기에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났으며, 한때 해적으로도 활약해 비교적 해전에 능한 자였다.

“밤새 별일은 없었소?”

주융의 안내로 제독부 안으로 들어가면서 광운이 물었다.

“염려 마십시오.”

“특히 간인들을 주의하시오.”

“그 점은 늘 명심하고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주융의 대답에 광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련된 탁자에 앉았다.

적의 간인들에 대한 건 광운이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었다. 미미하긴 하지만 막주에도 수군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신도 이 땅을 지배하고 난 이후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건 커다란 이점 중 하나다. 현재 가장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율천국이 해전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으니, 언젠가 그들과 바다에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강력한 수군으로 맞선다면 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광운은 이쪽의 비밀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간인을 보내 율천국과 상초국의 수군을 정탐하고, 그들이 벌인 해전도海戰圖를 구해 전술과 작전까지 연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부들의 보고는 정기적으로 들어오고 있소?”

다소 엉뚱하다 싶은 광운의 질문이었지만, 이것 역시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배만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조류를 알아야 하고, 해저에 있을 암초 같은 것도 파악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광운은 진즉부터 어부들에게 명해 막주 인근의 해도를 작성하게 했음은 물론, 지금은 점차 멀리까지 나가 보게 하고 있다. 나중엔 강국과 율천국 바다에 대한 것도 수중에 넣을 작정이었다.

‘가능하면 상초국으로 가는 해로도 알면 좋겠지.’

비록 강국의 요청에 의해 출병했다지만, 상초국의 목적은 단순히 그것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광운의 판단이었다. 언젠가는 크게 한번 싸울 거라는 예감이 전쟁에 익숙한 그의 본능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비 또한 충분히 갖춰 둬야 하고, 가능하다면 그 본거지인 상초국을 공격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전술이 될 게다.

“딱 정해진 날짜에 보고가 올라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끊어지지 않는 걸 보면 어부들이 잘해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답과 함께 주융은 커다란 종이 한 장을 탁자에 펼쳤다.

광운은 잠자코 그걸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해도로, 막주 주변은 물론 강국 인근의 조류나 암초 등이 제법 소상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여기에 조금만 더 보태면 강국까지는 무사히 진출할 수 있겠군. 배를 만드는 일은 어느 정도 진척되었소?”

“오늘 쉰 척이 진수되면 목표의 약 칠 할을 달성하게 됩니다.”

“수군의 훈련 정도는?”

“모든 훈련을 잘 소화해 내서 사기가 충천합니다. 다만 충원되는 숫자가 많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광운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막주에서 모집해 훈련시킨 병사들은 최우선적으로 흑암성으로 보낸다. 당장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군은 늘 병력 부족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배는 만들어 내는 대로 숫자가 척척 불어나지만, 사람이야 어디 그럴 수 있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광운까지 난감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파양주와의 싸움은 그리 오래 끌지 않을 것이오. 잠시만 더 고생해 주시오.”

“그보다 만약 수군의 준비가 갖춰지면 정말 강국을 치실 작정이십니까?”

이어진 주융의 질문에도 광운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저의가 뭔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편월과 증두신의 딸이 혼약을 맺었다는 건 막주의 장수들도 대부분 아는 사실이었다.

또한 편월과 광운의 사이도 부자지간 비슷하다는 걸 잘 아니, 자칫하다가는 두 사람 사이에 의가 상할 염려도 없지 않다. 주융은 바로 그 점을 짚고 나선 것이다.

“대비를 하자는 거요. 시대가 이러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소.”

광운으로선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장인과 사위 간에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세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한탄이었다.

“성에서 긴급한 전령이 왔습니다!”

돌연 제독부 밖에서 커다랗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령기를 꽂은 병사가 여행객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광운은 한눈에 그 여행객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편월의 동정을 알아보라고 파견한 간인이었다.

“전령은 물러가도록.”

주융이야 수군 제독이니 그에게 비밀을 지킬 것까지는 없다. 그래서 광운은 전령만 물러가게 하고, 간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허군의 동정은?”

“이젠 정허군이 아니라 위휘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합진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위휘군?’

편월이 이끄는 군사가 합진성을 함락시켰다는 것보다, 정허군이 위휘군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점에 광운의 관심은 더욱 끌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편월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것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성을 갖겠다고 했던 편월이었다. 이제 드디어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정허, 아니 위휘군의 숫자는?”

“이제 합진성까지 떨궜으니, 그 숫자는 삼만을 넘어 사만을 바라보게 됐을 거라 추정됩니다.”

“알겠다. 물러가 쉬어라.”

더 이상의 것은 묻지도 않고 광운은 간인을 내보냈다. 사실 더 이상 궁금할 것도 없었다. 편월이 사만 정도의 병력을 가졌고, 그 주위에 노련한 잡가군 출신 무장들이 있는 한 크게 염려할 일은 없었다.

‘나도 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군.’

편월이 동쪽에서 그처럼 분전하고 있다면, 호윤천 부자의 시선도 자연히 그쪽으로 쏠리게 된다. 현재 흑암성에 걸려 있는 압력이 상당히 줄어들 건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거기에만 의존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여기서도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야 편월이 움직이기 쉬워질 테니 말이다.

‘급한 건 장정들을 모으는 일인데, 곧 추수를 할 시기니…….’

비록 막주가 더운 지방이기는 해도 사시사철 폭염만 내리쬐는 건 아니다. 여기도 씨앗을 뿌리는 시기나 그 결실을 거두는 때가 분명히 존재한다. 작물의 성장이 다른 지방보다 빠르기에 이곳의 농부들은 오히려 다른 곳보다 더 바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장정을 내는 집에 대한 세미를 감면해 주는 일이 있더라도 병사들을 증원시킬 필요가 있다.

‘만약 사주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면 편월과도 손이 닿을 수 있을 텐데…….’

막주에서 곧바로 편월과 합류하려면 바다로 강국까지 가는 수밖에 없지만, 사주에서는 육로로 통할 수도 있다.

그런 희망을 가슴에 채우며, 내일 막주 전체에 내붙일 장정 모집 방문의 글귀를 다듬는 광운이었다.

2

광운이 파견한 간인의 보고는 비교적 정확했다. 포란성 공격에 나선 편월의 군세는 강국의 지원군까지 포함해서 삼만 오천이었으니까 말이다. 처음 윤주성을 칠 때 채 일만에도 미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비약적인 증가였다.

포란성을 공격한 지 열흘이 지나면서, 편월은 그 점을 곱씹어 보기 시작했다. 아군의 승리 요인과 투항한 적병들이 어째서 고스란히 위휘군에 흡수되어 충성을 다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거였다.

사실 이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병력이나 장비 면에선 분명 위휘군이 열세란 건 누구의 눈에도 확연히 보인다.

그런데도 싸울 때마다 이기고, 병력도 물자도, 심지어 성과 땅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간다. 거기엔 분명한 요인이 있을 것이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적들의 사기가 형편없다는 점이고, 그건 주로 하루하루 지급되는 군량의 많고 적음이 가장 큰 이유다.

군량이라고 해서 단순히 양곡만 있는 게 아니다. 고기를 비롯해서 젖이나 계란 같은 다른 음식들도 제공할 수 있는 각종 가축들과 각종 야채, 소금도 거기에 포함된다.

병사들이 가장 큰 불만을 토로하는 건 바로 그 가축의 분배에 있다. 양곡은 비교적 적정량이 배급되지만, 고기는 말단 졸자들에게 돌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식욕이 사람의 욕구 중 가장 으뜸인 점을 감안하면, 그걸 충족시키지 못하는 군의 사기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다음은 적정한 부를 축적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만을 꼽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정규군은 강제로 징집되는 경우가 많기에, 하루하루 지급되는 군량과 소액의 군료軍料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게 규칙이다.

하지만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노획한 적의 전리품이나, 적지의 양민에게서 수탈한 것은 그대로 개인의 소유로 인정해 주는 게 관례다. 병사들은 그걸 팔거나 혹은 모아서 군 복무가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하게 된다.

그런데 왕왕 그 노획물을 상납하라는 지휘관도 없지 않다. 상명하복의 명령 체계가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군인지라 어쩔 수 없이 따르지만, 병사들의 가슴속에 깃든 불만은 삭일 수 없었다.

또 하나를 덧붙인다면, 비겁한 지휘관 역시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 중 하나다. 겁에 질려 자기 혼자만의 살길을 찾거나, 무능해서 너무 무리한 명을 부하들에게 내리기에 병사들의 마음은 이반될 수밖에 없다.

편월은 윤주성 싸움을 돌이켜 보았다. 성주인 오치는 무능한 인물은 아니지만, 확실히 부하들과 백성들에게 무리한 명을 내렸다. 그 결과 너무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합진성의 경우는 무능력한 지휘관을 가진 군이 어떻게 패전하는가 하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 준 전형이다. 숫자만 믿고 거들먹거렸던 모충은 지금 이 윤주 땅에선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렇게 따지면 두 번의 큰 전투—윤주성과 합진성 함락—에서 승리한 원인이 뭐였느냐 하는 답은 금방 나온다.

하지만 아직도 편월이 이해하기 힘든 건 투항한 적병들의 태도다. 위휘군은 군량만큼은 균등하게 배급하지만, 군료는 단 한 푼도 지급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백성들을 약탈하는 건 더더욱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병사들이 가장 큰 불만을 가질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까지 투항했던 적병들은 장수나 병졸을 막론하고 별다른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위휘군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더욱 용맹하게 싸웠다. 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다음 전투도 쉬워질 터였다.

“주군,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오?”

“아, 송 군감. 오늘 전투는 어땠소?”

송지의 부름에 생각에서 깨어난 편월은 벌써 석양이 물들고 있는 걸 깨닫고는 빠른 어조로 물었다.

“의외로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소이다. 아무래도 거규를 살려 보낸 건 실수인 듯하오.”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송지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편월이 실수했다는 말을 혹 다른 병사들이 들을까 싶어 꺼리는 눈치였다.

“아니요. 포란성이 맥없이 떨어졌다면 나는 오히려 실망했을 거요.”

“그렇긴 하지만 이래서는 너무 소모적이오. 합진성에서 많은 양곡을 확보했다지만 병사들의 숫자도 늘었으니 조만간 군량이 떨어질 게요. 계속 이렇게 전진만 하다가는 보급선이 끊길 위험도 있고…….”

“송 군감은 내가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아니, 그렇다면 정말 거규와 무장으로의 승부를 즐기고 계신단 말이오?”

어쩔 수 없이 송지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지난날 거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편월이 여기서 발길을 멈추고 있다고 여긴 탓이었다.

“주군, 이럴 바엔 차라리 합진성으로 군사를 돌리는 게 상책이오. 만약 다른 성에서 공격해 온다면 합진성은 그야말로 비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 우린 겨우 마련한 발판까지 잃고, 앞뒤로 적을 맞는 꼴이 될 것이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소. 우리가 합진성을 비운 게 벌써 열흘이 넘었소. 공격할 마음이 있는 자들이라면 여태 기다렸겠소? 윤주의 다른 성은 아마 꼼짝도 하지 않을 거요. 그건 당장 이 포란성에 구원병이 단 한 명도 오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소.”

“그렇다면 오늘 밤에라도 야습을 감행하는 건 어떻겠소? 포란성엔 약 일만의 병력이 있지만, 우린 그 세 배가 넘소이다. 총력을 기울인다면 밤새 떨굴 수 있을 거요.”

송지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그로선 이런 어정쩡한 체진滯陣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순히 일상생활의 불편 때문이 아니었다. 적이 만약 대규모 기습을 감행해 온다면 이런 허술한 영채로는 막아 내기 힘들 터였다.

“나는 지금 증가된 우리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중이오. 그사이 거규가 투항해 오면 더 좋고.”

“거규가 투항을?”

병사들을 훈련시킨다는 말엔 송지도 수긍할 수 있었다. 세상에 실전보다 더 나은 훈련도 없으니, 새로 충원된 자들도 금방 위휘군과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되리라.

하지만 거규가 투항을 한다는 것엔 고개를 갸웃거리는 송지였다. 살려 주겠다고 해도 무장의 긍지를 앞세워 거부했던 그런 자들은 어지간해서는 머리를 숙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 점은 누구보다 편월이 잘 알고 있을 게다. 그런데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약속이나 있었던 것처럼 느긋하니, 송지로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보고! 합진성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돌연 밖에서 병사 한 명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합진성에서?”

송지는 놀란 표정으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벌써 화톳불이 밝혀질 시각이다. 이 시간에 합진성에서 전령이 왔다는 건 불길한 소식일 공산이 컸다.

하지만 편월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역시 가슴을 두드리는 한 가닥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었지만, 마음 쓰지는 않기로 했다.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당장은 손쓸 방도가 없고, 그렇다면 일의 성격에 따라 차분히 대응해 가면 되는 것이다.

“허어. 이거 희한한 일이오, 주군.”

밖으로 나갔던 송지가 전령 차림의 병사를 데려오며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오?”

“강국에서 사자가 왔다는구려. 이제 곧 여기 도착할 모양인데, 그대가 자세히 보고를 드리게.”

일단 말문을 트자 송지는 전령에게 그다음을 넘겨 버렸다.

“들으신 대로 강국의 사자가 합진성에 온 것은 오늘 아침이었습니다. 용무는 연일 전투를 치르고 있는 위휘군을 위문하고, 또 부상당한 오지형 장군을 대신할 사람을 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령의 보고는 간결했다. 더 이상 덧붙인다면 그건 자신의 사견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들은 그대로를 말할 뿐이었다.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특별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우호적인 군벌들 사이에선 전투를 치르는 상대에게 사자를 보내 노고를 위로하고 약간의 물건을 보내는 건 전국의 상례다. 이제 곧 장인이 될 증두신이 위문사를 보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한 일도 아니란 얘기다.

“됐다. 그만 물러가도록. 정말 이상한 일이지 않소?”

전령을 내보낸 송지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윤주성이나 합진성을 떨궜을 때만 해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증두신이 무슨 일로 사자를 보냈다고 생각하시오? 게다가 밝은 날도 아니고 해도 다 저문 이 시간에…….”

“그야 이제 곧 사자가 도착한다니 들어 보면 알겠지. 그런데 황태자가 죽어 국상을 치른다던데, 우린 이렇게 계속 싸워도 괜찮겠소?”

편월이 화제를 돌렸다. 국상이 갖는 의미는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황제의 아들이 죽었는데도 계속 전투를 치른다는 건 좀 께름칙했다.

“이건 주군께서 고집하신 싸움이오. 그렇게 마음에 걸리신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합진성으로 철수해 조의를 표합시다.”

기회다 싶었는지 송지는 얼른 편월의 말을 받았다. 어쨌든 이 포란성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는 건 질색이었다.

“강국에서 사자가 온다니, 대체 무슨 얘깁니까?”

맹아가 안으로 들어서며 큰 소리로 물었다. 방금 물러갔던 전령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그리 크게 생각지 않았는지, 이내 다른 말을 내뱉었다.

“언제까지 저 작은 성에 막혀 계실 겁니까?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오늘 밤에라도 우리 근위대가 야습을 감행해 성문을 열겠습니다.”

전쟁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는 전황이 비슷하게 보이나 보다. 맹아 역시 송지와 같은 요구를 하러 온 것이었다.

“이제 곧 사신이 온다니, 맹 장군은 그 준비를 서둘러 주시오.”

편월은 맹아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사실 다른 어떤 것보다 사신을 맞는 게 가장 급한 일이기도 했다.

그걸 잘 알기에 맹아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제발 엉뚱한 소리나 안 했으면 좋겠는데.”

“엉뚱한 소리라니?”

혼잣말을 주절거리는 송지에게 편월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사신이 온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먼저 밥을 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뚱하게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지루해졌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강국은 지금 상초국까지 끌어들여 율천국과 싸우고 있소. 특히 요즘은 해전에서도 연패를 면치 못하고 있는 듯하니 우리에게도 군사를 내라고 할지도 모르오. 그땐 어떻게 하시겠소?”

“우리가 강국을 도와줄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오천의 원군을 보내 줬소. 그리고 증두신의 딸까지 맞겠다고 했소이다. 의리상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소이다.”

“원군도 딸도 우리가 원했던 건 아니오. 그쪽에서 먼저 나섰던 거지.”

“그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천하의 이목이 있으니…….”

“천하의 이목을 생각했다면 나라를 세우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소.”

‘뭐라고?’

단호한 편월의 말에 송지는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삼켜야 했다. 듣기에 따라선 이만한 폭군이나 폭장暴將도 다시없다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신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비록 이쪽이 원하지 않았더라도, 도움을 받았다면 그걸 갚을 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다음에 자신이 위급에 처했을 때 또 다른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군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단 한 치 앞의 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을 하기에 신의는 더욱 중요해진다. 그래서 늘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아니, 다른 모든 걸 떠나서 군이라는 큰 조직도 따지고 보면 ‘사람’이라는 개개인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신의가 쌓인 걸 키우지 못한다면, 군이라는 조직도 결국 여느 도적 떼나 다름없는 것으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다.

바로 그 점을 편월이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아 송지는 기가 막혔다.

“사신들이 영채 밖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나가서 맞으실 겁니까?”

그때 맹아가 들어와서 보고하지 않았다면, 송지는 그 문제에 대해 더 따져 봤을지도 모른다.

“좀 기다리게 해 두고, 다른 장수들을 모두 불러오시오. 다들 모이면 송 군감이 가서 사신들을 데려오고.”

가벼운 어투로 편월이 지시를 내렸다.

그 말에는 송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 휘국의 왕이 될 사람이 사자를 영접할 이유는 없었다.

맹아가 곧바로 밖으로 달려 나갔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송지 역시 몸을 일으켰다. 지금부터 천천히 사자를 영접해 데리고 오면 다른 장수들도 모두 모여 있을 터였다.

이윽고 장수들이 모두 모였을 때 송지가 다섯 명의 강국 사자들을 데리고 진막 안으로 들어왔다.

“연일 계속되는 위휘군의 승전을 경하드리라는 왕명을 받고 온 강유姜儒가 삼가 대장군을 뵈오.”

스스로 강유라고 밝힌 자는 평범한 문사 차림을 한 사십 대 중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깍듯한 군례를 갖췄다. 겉과 달리 무장인 게 분명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 많았소.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시오. 자, 앉으시오.”

상대가 무장임을 알자 편월은 더욱 편하고 능숙하게 강유를 맞았다.

“이건 강왕 전하께서 위휘군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보내신 작은 성의입니다.”

탁자에 마주 앉자마자 강유는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놓았다. 선물로 가져온 목록을 적은 것일 터였다.

편월은 그걸 받아 그대로 두건득에게 넘기며 말했다.

“고맙게 받겠소. 강왕께서는 평안하시오?”

“율천국과의 분쟁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심기 미편하시지만, 건강엔 아무 이상이 없으십니다.”

강유의 말에 위휘군 장수들의 어깨가 긴장으로 잠깐 굳어졌다. 그들도 행여 증두신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긴장을 깨며 송지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허어, 이건 이상한 말씀이구려. 지금 강국은 상초국의 원군을 얻어 연전연승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송지는 노련했다. 혹시라도 다음에 강유의 입에서 나올지도 모를 군사적 원조를 청한다는 말을 미연에 막아 둔 셈이었다.

강유도 그걸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잔잔하게 웃으며 할 말을 계속해 나갔다.

“오 장군의 용태는 어떻습니까? 전하께서도 염려가 크십니다만…….”

“아무래도 회생은 어려울 듯하오. 이 점에 대해선 달리 드릴 말씀도 없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무장이 전장에서 죽는 건 당연한 일이니, 오 장군도 그리 원통해하지는 않을 거요. 즉시 본국으로 이송하고, 그 자리를 소장이 맡으라는 지시를 받고 왔소이다.”

“그럼 강국의 원병은 그대로 있는다는…….”

반색을 띠며 끼어들던 맹아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강국의 원병이 그대로 남는 걸 반긴다면, 그만큼 위휘군이 약하다는 걸 의미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전하께서는 이참에 대장군과 공주님의 혼례를 정식으로 치렀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빠를수록 좋다시면서요.”

강유는 말끝에 단단히 힘을 실었다. 아무래도 이 사자의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건 불가하오!”

이번에 큰 소리로 반대하고 나선 건 담개였다.

“적과 교전 중인 장수가 진중에서 혼례를 치렀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소. 그 일은 아직 시기상조니, 사자께서는 돌아가셔서 잘 말씀드려 주시오.”

“그러면 저 포란성을 떨군 이후엔 혼례를 치르겠다는 말씀이군요. 그때까지는 기다릴 수 있을 겁니다. 본국의 공주께서 근처 합진성까지 오셔서 기다리셔도 좋고요.”

능란한 강유의 응대에 담개는 속으로 뜨끔했다. 포란성은 마음만 먹으면 오늘 밤에도 떨어뜨릴 수 있다. 혼례를 늦추려고 했던 말이 오히려 빼도 박도 못할 기일을 정한 것과 비슷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그처럼 난처해하고 있는 담개를 구해 준 건 송지였다. 그는 역시 노련했다.

“사자의 말씀이 맞소이다. 우리 위휘군이 포란성을 떨구면 곧바로 주군과 귀국 공주의 혼례를 거행하겠소이다. 그러니 강국의 원병들도 보다 힘을 내 주시기 바라오.”

이렇게 말하며,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장수들을 둘러보며 송지는 자신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점에 있어 송지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전의 대화에서 알게 된 게, 편월이 거규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송지가 파악한 거규는 성격상 절대로 항복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대치는 오래 끌 수밖에 없고, 그사이 다른 일이라도 생긴다면 혼례는 더욱 늦춰지리라.

거기에 편월도 적절하게 맞장구쳐 주었다.

“알겠소. 그 점에 대해선 이쪽도 틀림없이 준비할 테니 안심하시오. 주연이라도 대접해야겠지만 진중이라 아무 준비도 갖추지 못했소. 서운하시겠지만 이대로 오 장군과 인수인계를 서둘러 주시오. 내일 아침이면 또 공격을 해야 될 테니.”

“알겠소이다. 그럼 이만.”

왔을 때와는 달리 간결한 군례를 갖춘 강유가 맹아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동시에 진막 안이 술렁거렸다. 방금 편월이 내린 결정에 대해 장수들이 각기 한마디씩 해 댄 탓이었다.

“정말 주군께서는 조속한 시일 내에 혼례를 올리실 참이오?”

그중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편월에게 바로 질문을 던진 건 담개였다. 그로선 강유에게 말실수를 했던 책임이 있으니, 이 문제가 보다 민감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편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송지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고 있으니, 그가 여러 장수들을 설득할 수 있을 터였다.

뭔가 알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장수들이 돌아갔을 때, 그제야 근위대 중 한 명이 편월의 저녁을 들고 들어왔다.

3

영욱성에서 십 리 떨어진 곳에 영채를 세우는 곽준방의 마음은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윤 대부인의 명에 따라 군사를 동원하기는 했지만, 호윤천 부자의 반응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과 같았다. 영욱성 안으로 단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얘기다.

‘구 장군이 잘해 줘야 할 텐데.’

조천성에서 군사를 출발시키기 직전에 접수된 정보에 의하면, 호윤천은 자신의 병사들을 동원해 마국립 모자가 있는 내성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있다고 했다.

그다음은 더 들을 것도 없었다. 호윤천은 구문생과 병사 삼백을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겠다는 걸 조건으로 마국립 모자를 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곽준방이 믿을 수 있는 건 구문생과 그에게 딸려 준 삼백의 장졸들뿐이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 상황이 전개되든, 마국립 모자의 안위는 순전히 그들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병력을 동원한 것 역시 결코 헛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밖에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호윤천 부자에 대한 무력시위로는 충분하니, 그들이 함부로 마국립 모자에게 손을 대지는 못할 것이다.

‘조심해야 될 것은 호윤천을 따르는 머저리 같은 무장들!’

만약 자신이 여기에 영채를 세우고 호윤천 부자와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뜻을 비친 걸 알면, 파양주의 다른 성주들도 술렁거릴 게 분명하다.

개중엔 물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무장들도 없지 않을 테지만, 비교적 영욱성에 가까이 있는 성은 대개 호윤천의 수족들이 들어가 있다. 그들이 군사를 동원해 공격해 온다면, 곽준방으로선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더 곽준방을 곤란하게 만들 일은 텅 비어 있다시피 한 조천성이 공격당하는 것이다. 윤 대부인의 명에 따라 총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삼만을 깡그리 동원시켰기에, 지금 성에는 늙은 병사 이천이 간신히 지키는 흉내만 내는 실정이었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함락시킬 수 있다.

사실 지금 곽준방의 입장에서 조천성을 잃는다는 건 발판이 사라진다는 걸 의미한다. 무엇보다 삼만이나 되는 대군의 보급기지가 없어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준방은 이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안에서 호응하면 쉽게 군사들을 영욱성 안으로 넣을 수 있을 거라던 윤 대부인의 말은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고, 자칫 잘못하면 진남후를 정식으로 계승한 마국립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오명을 들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게 인간으로서, 또 무장으로서 가야만 할 길이다.’

오직 이 하나의 생각이 곽준방으로 하여금 가졌던 모든 걸 버리게 만들었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특히 무장은 살아 있는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죽음과 곧바로 연결된다.

그러기에 곽준방도 무문에 발을 디뎠던 그때부터 삶과 죽음의 구별 따위는 잊어버렸다. 어떻게 죽을 것이냐에 대한 답이 나오면,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건 저절로 떠오르게 되니까 말이다.

곽준방은 무장으로 죽고 싶었다. 나이 들어 초라하고 앙상하게 메마른 모습으로 죽기보다는, 격렬하게 삶과 죽음이 부딪치는 전장의 한가운데에 자신의 시신을 눕히고 싶었다. 그러한 평소의 신념이 발현된 것이 바로 지금의 총출동이었다.

곽준방에게 있어 다행스러운 일은 수족과도 같은 다섯 편장들이 서슴없이 자신의 뜻에 따라 주었다는 점이었다. 그중 한 사람인 구문생은 지금 영욱성의 내성에서 마국립 모자를 보호하고 있는 중이다.

개개인의 능력만 따진다면 벌써 한 성의 주인이 되어도 부족하지 않을 다섯 명의 편장들이 자신을 따라 준다는 것만으로도, 무장으로서의 곽준방은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대장군, 영욱성에서 사자가 왔소이다.”

병사들이 영채를 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곽준방의 뒤에서 여상계가 낮은 목소리로 고했다. 그사이 나이가 들어 얼굴엔 주름이 뚜렷해졌고, 구레나룻이 멋지게 자라 있었다.

“들어 봐야 뻔한 얘기겠지. 그냥 돌려보내도록.”

“하지만 안에는 구 장군이 있소이다. 혹시라도 타협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니 한번 만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대장군!”

여상계가 얘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우효금이 다시 곽준방을 부르며 다가왔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곽준방을 대장군이라 불렀다. 조천성을 맡았다는 걸 감안하면 의당 성주라고 부르는 게 당연하지만, 그 속에는 호유진을 대장군으로 인정하기 싫다는 반감이 깃들어 있는 탓이었다.

“호윤천이 보낸 사자가 기다리고 있소이다. 가서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소.”

우효금은 여상계보다 좀 더 강경했다. 지난번 구문생과 함께 영욱성에 갔다가 그만 남기고 왔기에 누구보다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꼭 만나야 하는가?”

“일단 그쪽의 말을 들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은연중에 놈들의 의중도 알 수 있을 테고, 어차피 이대로 싸움으로 몰아가서는 불리한 건 우리 쪽이지 않소이까.”

“좋다. 사자를 이리 데려오도록.”

목숨을 맡겨도 괜찮을 만큼 믿고 있는 두 명의 장수가 권하자, 곽준방도 더 이상 거부하지 못했다. 의자를 가져오게 해서 거기 앉은 채 사자를 기다렸다.

병사들에 둘러싸인 사자는 끌려오다시피 곽준방 앞에 나섰다. 그래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걸 보면, 제법 기개가 있는 자인 것 같았다.

“조천성주 곽준방은 예를 갖추고 대장군의 명을 받으라.”

“무엄한 놈!”

사자의 첫마디가 끝나자마자 팽요가 노갈을 터뜨리며 칼을 뽑아 들었다. 한 칼에 베어 버릴 기세였다.

“그만!”

곽준방은 우선 팽요를 제지했다. 비록 한 성의 성주지만, 무장으로서는 대장군인 호유진보다 서열이 낮은 게 분명하다. 사자는 그 예법을 밟은 것뿐이었다.

“내가 그 말에 따르지 않으리란 건 그대도 잘 알고 있을 터, 사자는 전할 말만 남기고 돌아가라.”

곽준방의 어조는 어디까지나 조용했다. 눈앞에 있는 사자도 그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것뿐이다. 화를 낼 것도, 질책할 일도 아니었다.

“조천성주는 어찌하여 사전에 보고도 없이 군사를 동원했는가? 그 이유를 듣고자 하니, 내일 아침까지 대장군부로 출두하라.”

듣기가 힘들 정도로 오만불손한 사자의 말투였다.

하지만 곽준방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조용히 물었다.

“그대의 직책과 이름은?”

“수문편장 위화룡魏和龍이오.”

“자, 받아라. 그대의 용기가 가상해서 주는 선물이다.”

진심으로 위화룡의 용기를 칭찬하며, 곽준방은 짚고 있던 장검을 내밀었다.

그러자 돌연 위화룡이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이제 사자의 용무가 끝났으니, 지금부터 소장이 곽 장군께 한 말씀 올리겠소이다. 우선 과분한 선물은 거두어 주십시오.”

사자로서는 대장군인 호유진의 대리인이니 고자세를 유지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늘과 같은 곽준방이었다. 위화룡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얘기할 수 있었다.

“부디 내일 아침에 사자 한 명을 대장군부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대장군은 내성을 포위한 채 곽 장군의 태도에 따라 공격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곽 장군께서 허리를 숙이시라는 게 아니라, 우선 대장군의 마음을 진정시켜 내성 공격을 늦추게 하라는 얘기입니다. 이 점 부디 통촉해 주소서.”

위화룡의 목소리는 열기에 차서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충심에서 우러나는 말이란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나더러 속임수를 쓰라는 건가?”

“이렇게 대치하고 있다면 이미 전쟁! 승리를 위해서라면 작은 속임수도 하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위화룡의 말을 듣는 사이 곽준방은 약간의 혼란을 느꼈다. 사자로 뽑혔을 정도면 호유진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위화룡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오히려 이편을 염려하는 것 같고, 그 말 속에 진심이 느껴진다.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게 좋다. 곽준방은 다시 한 번 장검을 내밀었다.

“그 일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한 후에 결정하겠다. 그리고 이건 내 마음으로 내리는 것이니 받아 두도록 하라.”

“장군, 지금 내성엔 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포위된 채 두려움에 떨고 있소이다. 이 점 깊이 통찰하시어…….”

“사자의 임무는 끝났다. 이제 돌아가라.”

보다 못한 여상계가 위화룡의 어깨를 당겨 일으켜 세웠다. 그사이 주립건이 곽준방의 장검을 받아 들었다. 가는 길에 전해 줄 요량이었다.

“청이 있소이다, 대장군.”

위화룡이 물러가자마자 우효금이 비장한 어투로 말을 뱉었다.

“내일 사자를 대장군부에 보내 달라는 말이겠지.”

“그렇소이다.”

“그 일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겠다고 말한 바 있네. 그리고 설사 사자를 보낸다고 할지라도 우 장군은 안 돼.”

“대장군, 소장과 함께 영욱성으로 갔던 구 장군이 혼자만 남았소이다. 그에 대한 교섭의 실마리를 찾는 거라면 소장 말고는 달리 적임자가 없을 것이오.”

곽준방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우효금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를 성안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다.

그때 위화룡을 보낸 여상계와 주립건이 돌아왔다.

“사자는 무사히 돌아갔는가?”

“예. 그런데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고 갔소이다.”

“재미있는 얘기라니?”

“지금 성에는 약 이만의 군사가 있다는 얘기와, 그들 중엔 호윤천 부자의 뜻에 반감을 품고 있는 자들도 없지 않다고 했소이다. 비록 그 수는 적지만.”

“안에서 그런 알력이 있다면, 그걸 이용하는 수도 있겠소이다. 그렇다면 어쨌든 사자를 파견해야 될 것 같소이다.”

여상계의 말이 끝나자마자 팽요가 재빨리 나섰다. 벌써 그의 머리는 어떻게 해야 영욱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하는 방법을 강구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장수들도 모두 모였고, 이왕 말이 나온 참이라 얘기는 그대로 회의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팽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좀 더 기다려 보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영욱성 내부에서 알력이 있다면 굳이 이쪽에서 서둘러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조천성과의 연락망은 더욱 보강시키자고 의견을 모았다. 발판을 단단히 굳혀 두고, 인근 성들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변화를 기다리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밤이 되자 여상계가 이끄는 한 부대가 은밀히 움직여 조천성 쪽으로 향했고, 그 꼬리를 물 듯이 삼삼오오 짝을 이룬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 * *

미시 말경이 되자 위휘군은 징과 꽹과리를 울려 군사들을 거둬들였다.

그 신호에 따라 또 하루치의 전투를 접으며, 강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한 싸움이었다.

‘이들이 정말 서로 적일까?’

이런 의문이 강유의 가슴을 가득 채웠을 정도로 전투는 미적지근했다.

우선 공격을 가하고 있는 위휘군을 보자면, 선봉인 백월대가 먼저 공성 무기를 동원해 맹렬하게 기세를 돋우며 동문으로 진격해 간다. 그때는 다른 문의 공격을 맡은 부대들도 동참하는 건 물론이다.

그런데 성병들의 저항이 거세진다 싶으면, 선봉인 백월대는 옆으로 빠져 다른 부대와 교체했다. 그러고는 난데없이 성을 한 바퀴 휘돌아 서문을 공격한다는 식이었다.

‘농성하는 적병들의 얼을 빼 놓자는 것도 아닐 테고.’

정녕 위휘군의 의도가 그것이었다면 분명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편월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농성병들로 하여금 어딜 공격당하게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긴 농성 중인 거가군의 움직임도 강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휘군의 공격이 바짝 다가왔다 싶으면 맹렬하게 활을 쏴 대다가, 서로 교체하느라 잠시 소강상태가 되면 우르르 다른 곳으로 몰려가 버리곤 했다. 어떻게 보면 서로가 짜고서 훈련을 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 여기며, 강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 장군은 왜 여기까지 군사를 몰고 왔을까?’

원군으로서는 윤주성과 합진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지원을 해 준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운 것이다. 그때 군사를 돌려 귀국을 했다고 해도 누구 하나 뭐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지형은 무슨 까닭에선지 철병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합진성 전투에선 필사적으로 싸운 것 같았다. 그 결과 자신은 전사하기까지 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오늘은 단단히 따져 봐야겠군.’

대개 전투에 대한 강평講評은 승패가 완전히 결정되었을 때 하는 게 상례다.

하지만 위휘군은 매일같이 모여 그날그날의 전투에 대해 서로가 의견을 교환하는 형식으로 강평을 한다. 아직 날도 저물지 않은 시각에 싸움을 접었으니,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달리 할 일도 없겠지만 말이다.

속속 돌아온 부하들이 영채 주변을 정리하는 걸 본 강유는 측근 몇 기만 거느린 채 곧바로 본진이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본진에는 벌써 위휘군의 장수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마에 땀 한 방울 비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오늘 전투가 느슨했다는 얘기다.

데려왔던 부하들을 기다리게 한 후 강유는 곧장 편월 앞으로 걸어가 부르짖듯이 말했다.

“우리 지원군에 야습을 명해 주시오!”

너무 엉뚱한 얘기였고, 터무니없이 큰 목소리였는지라 모여 있던 장수들도 일시지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무슨 일로 그리 고함을 지르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앉으시오, 강 장군. 앉아서 차근차근 말씀해 보시오.”

송지가 강유를 가로막고 의자를 권했다. 군문에선 별것 아닌 일로 흥분해서 칼을 뽑아 드는 경우도 없지 않기에, 미리 차단한 것이었다.

강유 역시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소리를 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 말 없이 송지가 권하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야습을 감행하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아무래도 송지는 편월에게는 말을 시키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강유 곁에 의자를 바짝 당겨 붙이며 물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요. 이 지지부진한 싸움을 우리 지원군의 야습으로 끝맺고 싶소이다.”

“호오, 정말 듣기에도 용맹한 말씀이외다. 아닌 게 아니라 귀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우리 위휘군도 이처럼 연전연승하지는 못했을 거외다.”

송지는 한껏 지원군을 띄워 주었다. 상대적으로 위휘군의 전력을 약하게 인식시켜 두기 위해서였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별말이 없었지만, 현재 강국은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어떤 싸움이라도 쉽게 이기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군사를 돌려 도와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걸 미리 차단하자는 의도였다.

그런 심려 깊은 송지의 뜻을 지금의 강유가 알 턱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편월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우리 지원군만으로 야습을 감행하겠으니 허락해 주시오. 다른 분들의 도움은 필요 없소.”

“강 장군은 우리가 야습을 할 줄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 같소?”

흥분한 강유와 달리 편월의 어조는 나직했다.

“그렇다면 무얼 망설이고 계시는 거요? 후딱 해치워 버리지 않고.”

“지금이 어떤 철이오?”

“예?”

화제에서 확 벗어나 버린 것 같은 편월의 질문을 받은 강유는 그만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 지기 싫다는 오기가 강유의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이제 팔월에 접어들었으니 곧 바람이 차가워질 게요. 그 전에 포란성을 떨구고 병사들에게 휴식을…….”

“바로 그 점이오!”

지금까지와는 달리 강한 어투로 편월은 강유의 말을 잘랐다.

“강 장군의 말씀대로 벌써 팔월이오. 추수를 시작할 때란 얘기지. 혹시 우리 위휘군이 지나온 길을 살펴봤소? 난 내 병사들에게 최대한 농토를 짓밟지 못하도록 했소. 저길 보시오.”

말을 하던 편월은 포란성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싸우고 있는 성 주변의 흔한 풍경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저기에도 원래는 민가가 있었소. 작전상 어쩔 수 없이 불태워 버리긴 했지만, 그 역시 내가 바라던 바는 아니었소. 그런데 지금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해 성을 떨군다고 생각해 보시오. 죽는 백성들도 많겠지만, 들판 가득한 곡식을 추수하지 못해 올겨울 굶어 죽는 사람들도 속출할 거요. 난 그렇게까지 해서 이기기는 싫소.”

“과연!”

무릎을 치면서 탄성을 토한 건 강유가 아니라 송지였다. 비로소 거규가 투항할 거라는 막연한 편월의 자신감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거규는 훌륭한 무장이자 포란성을 맡은 성주다. 그렇다는 건 단순히 싸움만 잘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 이상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얘기와 통한다.

그렇다면 거규에게 무장으로서 승부를 내자고 청했던 편월에게 다분히 승산이 있다. 그가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한다면, 결과가 뻔한 싸움은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자, 강 장군. 우리 주군의 뜻을 아셨을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오. 이제 곧 저녁이 나올 것 같으니, 오늘은 다 같이 한잔합시다.”

아직도 승복하지 못한 듯 어깨를 잔뜩 추켜세우고 앉아 있는 강유를 송지가 부드럽게 달랬다.

그날 밤은 위휘군 전체에게 한 바가지씩의 술이 내려졌다.

그렇다고 취해서 흥청거리거나 자신의 임무를 망각할 정도로 군기가 해이해진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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