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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비감亂世悲感 2 (40/66)

난세비감亂世悲感 2

1

그날 최선봉이라 할 만한 동문 공격을 맡은 백월대의 분전은 놀라웠다. 병사들 개개인이 뭐에 홀린 사람들처럼 오로지 앞으로만 진격할 뿐이었다. 그 선두에서 강숙이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딱히 백월대만이 아니었다. 오늘은 영채까지 깡그리 비우고 총공세를 가하라는 명을 내린 것과 함께, 편월도 여전히 진두에 서서 합진성의 동문 공격에 가담했다.

누가 뭐래도 합진성 공격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건 강국의 지원군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싸움 이상으로 맹렬한 공격을 감행해 가장 먼저 서문을 깨뜨릴 정도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당연한 일로서 그건 위휘군을 강하게 자극했다. 하나같이 지원군에 져서야 될쏘냐 하는 각오로 이를 악물고 공격에 가담했다.

자연히 전투는 시작부터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위휘군은 공성 무기가 거추장스럽다는 듯 아예 맨몸으로 성벽에 달라붙어 밧줄을 이용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어느 부대의 누가 가장 먼저 성루에 오르느냐 하는 시합이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그 북새통 속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맹아였다. 싸우느라 그런 게 아니라 한사코 최선두로 나서려는 편월을 말리느라 정신없었다.

지난번 윤주성 공격 땐 편월을 놓쳤던 맹아였다. 성벽을 먼저 오른 건 자신이었지만, 어쨌든 대장군을 해자에 뛰어들게 했다는 건 근위대장으로서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만사 제쳐 두고 편월 옆에만 붙어서 움직이고 있는 맹아였다.

편월로선 그게 성가셔 미칠 지경이었다. 지난밤 의기소침해 있던 강숙을 부추긴 건 자신이었다. 그가 목숨을 도외시한 채 싸우고 있는데, 자신만 주군이랍시고 뒤에서 뒷짐 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편월이 다시 말을 달리며 성루를 향해 화살을 날렸을 때, 맹아가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또 이러실 거요? 이제 주군은 정허군의 대장군이 아니라 휘국의 왕이란 말이오! 이렇게 몸소 나설 일이 아니란 말이오!”

“지금은 왕이니 주군이니 따질 때가 아냐. 봐라. 서문이 불타고 있다. 지원군이 곧 성에 돌입할 거야.”

“그게 어떻단 말이오? 주군은 나중에 전과를 보고받고, 그에 걸맞은 논공행상을 베풀면 되는 거요. 정말 개뿔도 몰라!”

맹아의 입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편월이 얌전히만 있어 준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걸 하지 못해 울화통이 터지는 판이었으니, 가리지 않고 마구 퍼부었다.

후두두둑!

돌연 주변에 화살과 함께 돌들이 마구 떨어졌다. 그만큼 성과 가깝다는 얘기였다.

“이만큼 오셨으니 충분하오! 이제 돌아갑시다. 그래도 누구 하나 주군께서 뒤에 웅크리고 계셨다고 말할 사람은 없소이다.”

맹아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편월은 계속해서 성벽 쪽으로 접근해 갔다.

편월은 지금 이 싸움에, 정확하게는 강숙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용맹하게 싸우면 싸울수록 자신의 어깨는 더더욱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싸움을 끝까지 하고 싶었다. 그게 강숙에 대한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정녕 저들이 모두 죽어 나자빠져야 물러서시겠소?”

소질풍의 고삐를 잡아 마구 흔드는 한편, 맹아는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근위대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편월은 애써 외면했다. 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익히 아는 까닭에서였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날 보호할 필요는 없다. 근위대도 마음껏 공을 세우라. 이건 명령이다!”

단호한 편월의 말에 맹아는 멍청해져 버렸다. 고집이 세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군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었다는 얘기다.

“에잇, 정나미 떨어지는 주군이로군!”

쥐고 있는 소질풍의 고삐를 거칠게 놔 버린 맹아는 곧바로 말을 몰아 저만치 달려가며 고함을 질렀다.

“근위대 돌격! 목숨을 아끼지 마라! 모두 주군의 앞길에 시신을 눕혀!”

그건 악이 받친 외침이었다. 아니, 그게 맹아의 본모습인지도 모른다. 처음 편월의 눈에 띄었을 때 그는 가장 먼저 죽어 전장을 장식하는 꽃이 되겠다고 했다. 바로 지금 그 심정이 다시 격발된 건지도 모른다.

“우오와아-!”

특유의 함성을 지르며, 근위대원들이 일제히 편월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렇다고 편월을 방치한 건 아니었다. 근위대는 빗발치는 화살과 돌멩이 속에서 길을 열고 있었다. 맹아의 말대로 자신들의 시체로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것 같았다.

“하아!”

편월도 모처럼 소질풍에 마음껏 박차를 가했다. 결사의 각오로 공격하고 있지만, 근위대원들은 쉽사리 죽을 자들이 아니다.

게다가 저렇게 마음껏 활동하게 내버려 두는 게 자신을 지킬 때보다 희생이 줄어들기도 한다.

하지만 근위대가 곁을 떠나자 당장 편월에겐 위기가 닥쳤다. 군주기를 본 적들이 화살과 돌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편월을 막지는 못했다. 그로선 드물게도 방패를 사용해 막으며 연방 활을 쏴 댔다.

보기에 따라선 그건 하나의 신기였다. 한쪽 팔뚝에 방패를 건 채 활을 쏜다는 건 범인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편월은 아주 능숙했다. 예의 손에 잡히는 대로 세 대든 다섯 대든 화살을 날리는 사법도 똑같았다.

당연히 전통은 금방 비워졌지만 편월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전통!”

주변에 대고 고함을 지르자 화응이 재빨리 두 개의 전통을 건네주었다. 오늘 공격에 대비해 미리 단단히 지시를 내려 뒀던 것이다. 위휘군이 결성된 이후로 그는 군주기를 지키는 장수가 되어 한시도 편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상당했나?”

화응의 팔뚝과 가슴 언저리에 부러진 화살이 꽂혀 있는 걸 본 편월이 물었다.

“가볍소.”

화응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 역시 편월이 이처럼 진두에 서서 싸우는 건 반대였다. 기수가 되었으니 근위대 십여 명과 더불어 늘 측근에 붙어 있을 뿐 실제로는 그 역시 성벽에 달라붙어 공격을 가하고 싶었다.

화응의 심정이야 어떻든 편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땅에서 전쟁을 없애고 싶다는 건 어쩌면 혼자만의 욕심인지도 모른다. 바로 거기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들을 보면서 뒷전에 물러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연 달리는 소질풍의 속도는 빨라졌고, 편월이 쏘는 활도 더욱 빈번해졌다. 이제 방패는 그저 장식처럼 팔뚝에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깃발을 들어라.”

화응은 뒤를 따르는 십여 명의 근위대원 중 한 명에게 깃발을 맡긴 후 곧바로 말을 몰았다.

성이 있는 쪽은 아니었다. 오히려 후퇴하는 게 아닌가 싶게 아군의 영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화응은 결코 몸을 뺀 것이 아니었다. 영채 근처에 흩어져 있는 운제 하나를 집어 들고는, 다시 맹렬히 성벽을 향해 말을 몰았다.

원래가 타인보다 덩치가 큰 화응이다. 운제를 혼자 들고서도 별로 무거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말이 헐떡거렸다. 유난히 큰 덩치인 화응과 운제의 무게까지 부담하려니 힘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쓸모없는 놈!”

한 소리 내뱉으며 화응은 말에서 뛰어내렸다. 차라리 자기 발로 달리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였다.

그렇다고 적이 쏘는 화살이 피해 가는 건 아니었다. 남다른 행동을 하고 있으니 공격은 집중되었고, 화응은 운제를 머리 위에서 바람개비처럼 휘돌려 그것들을 막았다. 눈으로 보면서도 선뜻 믿기지 않는 신력이고 괴력이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한 화응에겐 해자도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우야아압!”

듣는 사람의 고막을 파열시킬 듯 큰 고함과 함께 화응은 그대로 해자에 뛰어들었다.

“화응을 감싸라! 화살과 돌멩이를 막아!”

이미 맹아를 비롯한 근위대원 대부분은 밧줄에 매달려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편월의 명은 남은 병사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해자로 뛰어들어 화응의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아주 큰 바위가 굴러 떨어지지 않는 한 크게 다칠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았다.

“끄하아압!”

다시 한 번 괴성을 지르며 화응은 운제를 성벽에 기대 세웠다.

“자, 올라가라! 어서 올라가!”

위에서 밀어낼 경우를 대비해서 운제를 단단히 움켜쥔 화응은 연방 아군을 독려했다. 그들이 오를 때까지 이대로 버틸 심산이었다.

“와아!”

그걸 반기는 환성은 성벽 위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화응이 세운 운제 근처에서 밧줄에 의지해 성벽을 기어오르던 위휘군이 지른 것이었다.

그들은 재빨리 운제에 발을 디뎠고, 밧줄을 타고 오를 때보다 더 빨리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적들도 필사적으로 성루에 걸쳐진 운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기울어진 각도 탓에 팔만으로는 짧으니 장대를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제는 별로 밀리지 않았다. 워낙 힘이 센 화응이 버티고 있고, 또 그를 보호하는 십여 명의 근위대원, 더불어 이미 거기에 매달린 위휘군의 무게 탓이었다.

그렇게 되면 성벽은 이미 장애가 되지 않는다. ‘와앗!’ 하는 함성이 위에서 들린다 싶더니, 운제를 밀던 힘이 금방 사라져 버렸다.

“너희들도 올라가. 깃발은?”

자신을 보호하던 근위대원에게 명을 내린 후, 화응은 곧장 깃발을 찾았다. 맡은바 직무만큼은 투철히 해내겠다는 의지였다.

하긴 그라고 해서 왜 성루에 뛰어오르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서는 각자의 임무가 무엇인지 희석될 소지가 크기 때문에 참았을 뿐이다.

깃발을 받아 든 화응은 곧장 편월을 찾았다. 혹시 자신이 운제를 잡고 있는 동안 성루에라도 오른 게 아닌가 싶어 걱정되었다.

다행히 편월은 해자 근처에서 연방 활을 쏘고 있었다. 그제야 화응은 성루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가장 먼저 올라갔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알 턱이 없었다. 벌써 성루엔 제법 많은 수의 위휘군이 올라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 와중에 화응의 눈길을 잡아끄는 인물이 있었다. 윤주성의 투항병 중에서 근위대에 배속된 위휘라는 자였다.

‘제법이군.’

위휘군 최고의 거한이라고 할 수 있는 화응의 눈에 들 정도로 위휘의 무공은 뛰어났다. 한 자루 창을 다루는 솜씨는 마치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웠고, 성루를 누비는 몸놀림은 제비처럼 민첩했다.

“와아!”

돌연 동문 쪽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성벽에 오르지 않은 위휘군 중 일부가 충차를 움직여 성문을 들이박은 탓이었다.

“주군, 저쪽으로!”

동문 쪽을 가리키며 화응이 편월에게 말했다. 성루를 점령했다면 성문이 깨지는 건 시간문제다. 미리 가 있다가 가장 먼저 뛰어들자는 뜻이었다.

편월은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이제 와서 자신이 직접 전투에 가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성문으로 가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게 더 나을 터였다.

짙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한 성루를 오른편으로 끼고 그들이 동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성문은 깨진 뒤였다.

“장군의 뒤를 받쳐라! 모두 성으로 돌입해!”

장수 중 한 명이 벌써 성으로 뛰어든 게 분명했다. 군주기를 앞세운 편월 일행이 도착했음에도 병사들은 깨닫지 못한 채 한사코 성문에 달라붙었다.

“화 장군, 우리도 들어가지.”

“예? 뭐라고 하셨소?”

편월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화응이 되물었다. 지금 성안은 지독한 난전이 벌어지고 있을 게 틀림없다. 거기에 간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편월은 막무가내였다. 화응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곧바로 소질풍을 몰아 북적거리는 성문 안으로 달려갔다.

“주군을 따르라!”

화응으로선 십여 기의 근위대원들을 독려할 수밖에 없었다.

성안으로 들어선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저기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건 낙성될 때의 전형적인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맥이 빠져 버린 느낌이었다. 치열하긴 했지만 실전이 아닌 훈련을 보는 듯했다.

물론 기세가 오른 위휘군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탓도 있었지만, 편월은 결코 그것만으론 납득되지 않았다.

‘뭔가 있다.’

공성전의 경험이 비교적 적은 편월에게도 이건 사뭇 이상한 일이었다.

“위험하오, 주군. 좀 정리된 뒤에 다시 오시는 게…….”

“여기도 내성이 있겠지? 거기로 간다.”

이건 편월의 즉흥적인 말이었다. 밀리는 성병들이 결국 다시 집결할 곳은 내성뿐이다. 아직 완전히 이겼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우선 거기부터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말뿐이 아니었다. 편월은 그대로 소질풍을 몰아 한창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앗, 주군!”

다급하게 부르는 화응의 미간에 짜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마음대로 해 버리기엔 맹아처럼 어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편월이 하는 일을 순순히 받아 주는 건 성질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편월은 틀림없이 했던 말대로 내성으로 곧장 달려갈 게 뻔하다. 알면서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목소리가 들리는 위휘군은 나를 따르라!”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싸움판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화응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근위대원 십여 명만 이끌고 이 난장판을 헤치고 내성으로 간다는 건 자살 행위의 다름 아니다. 그러니 되도록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려고 군주기를 휘두르며 외친 것이었다.

이건 상당한 효과를 보였다. 일단 성에 뛰어들면 그때부턴 난전이다. 작전이 먹혀들 소지는 거의 없어져 버리고, 오로지 개개인이 지닌 무공과 경험에 의지해 싸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럴 때 군주기를 펄럭이며 화응이 고함을 질렀으니, 위휘군의 하나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그게 비록 눈앞에 있는 적을 두고 내성으로 달리는 걸 의미했지만 말이다.

사실 뒤에 남은 적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성루에 있던 위휘군이 점차 아래로 쳐 내려오고 있었고, 새로운 병력도 꾸준히 동문을 통해 입성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화응은 서둘러 말을 달렸다. 편월의 무공이야 익히 인정하지만 여긴 시가지다. 불시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어디까지나 신중해야만 한다.

저만치 앞서 가는 편월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화응은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까지 잘 싸울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수중의 대도를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적병들은 짚단처럼 쓰러졌고, 그 앞엔 길이 열렸다.

다시 한 번 편월이 대도를 높이 쳐드는 게 화응의 눈에 보였다.

그러나 대도는 허공에 그대로 멈춰 버렸고, 대신 편월의 몸이 금방이라도 말에서 떨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맞았다!’

이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편월의 겨드랑에서 가슴까지 꽂혀 있을 모양을 화응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아!”

당연히 화응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이 편월을 이 성에서 빼내야만 한다.

이미 편월이 터놓은 길이다. 화응이 그에게 접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주군!”

화응이 세차게 불렀을 때 편월은 자기 왼쪽 가슴 옆에 꽂힌 화살을 부러뜨리고 있었다.

“봅시다. 얼마나 다쳤는지.”

“대수롭지 않아.”

부러뜨린 화살대를 던져 버린 뒤 편월은 대도를 고쳐 쥐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화응은 생각했다. 편월이 부러뜨린 화살대의 길이를 봤을 때 그의 몸에 박힌 건 화살촉 정도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다친 걸 안 이상 그냥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주군, 더 이상은 안 되겠소. 자, 이쯤에서 물러갑시다.”

화응은 재빨리 소질풍의 고삐를 잡으려 했다. 강제로라도 편월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금 늦은 뒤였다. 화응이 깃발로 인해 고삐를 잡는 것에 실패한 사이, 편월은 벌써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팍!

“깃발을 들어라!”

화응은 깃발을 바닥에 세차게 꽂았다. 기수의 임무도 중요하지만, 이 경우 그건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마치 쫓고 쫓기는 것처럼 마구 달린 두 필의 말이 내성 정문에 이르렀을 때, 거긴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이 합진성은 일선에 있는 성이 아니다. 그나마 외성엔 비록 해자를 둘렀지만, 내성엔 겨우 흉내 내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모습을 보면 이건 차라리 항복을 기다리는 성처럼도 보였다.

화응은 재빨리 소질풍의 고삐를 낚아채며, 마치 씹어뱉는 것처럼 말했다.

“이건 아무래도 적의 함정이 분명하오. 그러니 서둘러 물러갑시다.”

“그렇군. 이건 확실히 이상해.”

편월 역시 고개를 끄덕였을 때 누군가 든 군주기를 앞세운 위휘군이 함성 소리도 우렁차게 달려왔다.

그들 역시 내성 주변의 광경에 흠칫 놀란 모양이었다. 갑자기 고함 소리가 사그라지며 편월과 화응의 눈치를 살폈다.

“망설일 것 없다! 전군 일 리 밖으로 철수해서 다른 병사들과 합류한다!”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편월을 대신해 화응이 큰 소리를 질렀을 때 돌연 왈칵 소리라도 낼 것처럼 내성의 성벽이 그대로 위휘군의 머리 위로 넘어졌다.

2

내성의 성벽 자체를 그대로 넘어뜨리는 게 거규로선 이미 패색이 짙은 합진성을 버리고 적중 돌파를 감행하는 첫 단계였다.

이건 거규가 고심해서 세운 작전이었다. 바위를 던지거나 활을 쏜다면 피하거나 막을 수도 있겠지만, 벽이 통째로 덮쳐 온다면 오직 그 범위 밖으로 몸을 빼내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건 여러모로 윤주군에 유리한 효과를 가져다준다. 우선 이제 막 모여들기 시작한 위휘군이 제대로 몸을 빼낼 수가 없다. 몰려오고 물러가는 혼잡 속에서 그들의 피해는 기대 이상으로 클 게 분명하다.

거기다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성에서 치고 나갈 땐 선두의 부대가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말할 것도 없이 성문 바로 앞에 운집하고 있는 적병들 때문이다.

그러니 하다못해 성벽의 높이만큼만 적들이 물러서 줘도 그 피해는 반감되고, 나아가 이쪽에서 공격을 감행할 소지도 없지 않다. 벽이 완전히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아군의 사수들에게 활을 쏴 대라고 명령해 둔 것도 그 점을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과연 일은 거규가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성벽이 넘어져 시야가 트이자 윤주군은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고, 그 공격을 받은 위휘군은 그대로 무너지거나 혹은 어지럽게 물러서려고 난리 법석이었다.

그걸 확인한 거규는 커다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전군 돌격! 곧장 서문을 치고 나간다! 선봉은 거가군!”

벌써 이 작전은 각 장수들을 통해 병사들에게 전달된 상태였다. 이처럼 간략한 명으로도 충분할 터였다.

“쳐랏!”

함성과 함께 윤주군이 일제히 무너진 성벽을 디디며 치고 나갔다.

“와앗!”

윤주군과 달리 위휘군에서 올린 건 함성이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웠다. 그들로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격인지라 당연한 일이었다.

위휘군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성벽이 통째로 무너진다는 것도 그들로선 전혀 뜻밖이었는데, 그 뒤에 이어진 윤주군의 화살 공격은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놈들을 죽여라! 지금까지 당한 복수다!”

“우와아!”

윤주군은 그야말로 눈이 뒤집혔다. 이름 없는 개천에서의 첫 싸움으로 연전연패를 했던 앙갚음을 톡톡히 하겠다는 심사였다.

“싸우는 건 나중의 일이다! 당장 방향을 돌려 서문으로 향하라. 어서 움직여!”

거규가 연방 독려했지만, 이미 광기에 사로잡힌 윤주군이었다. 거가군이 아무리 그들을 이끌려 했지만 도무지 먹혀들지가 않았다.

거규로선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는 광경이었다.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서문을 돌파한 이후가 가장 큰 고비다. 여기서 시간과 힘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거가군은 명에 따르지 않는 아군을 쳐라! 최악의 경우 죽여도 상관없다!”

기어이 거규는 극단적인 명을 내리고 말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윤주군은 전멸을 면치 못할 터였다.

생각해 보라. 외성이 깨진 합진성의 최후 보루는 내성이다. 그런데 그 성벽을 스스로 넘어뜨리며 뛰어나왔으니, 최단 시간 내에 적중 돌파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확실히 거가군의 군기는 남달랐다. 그 혼란한 와중에도 내려진 명을 철저히 이행했다.

“윤주군은 서문으로 향하라! 불복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

여기저기서 고함을 지르며 윤주군을 몰아대는가 싶더니, 급기야 십여 명의 아군 목을 실제로 베어 버렸다.

그건 단번에 효과를 발휘했다. 광기에 휩싸여 위휘군에 짓쳐 들던 윤주군의 발길을 멈칫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노련한 거규가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우리의 목적을 상기하라! 자, 가자!”

지체 없이 내린 거규의 명은 이번엔 제대로 먹혀들었다. 위휘군을 치던 윤주의 병사들이 제꺽 뒤를 따랐다.

거규는 최대한 빨리 달렸다. 앞에 있는 병사들을 빼내야 뒤따라올 아군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다.

아마 지금쯤이면 본대를 이끈 모충도 출발했을 게다. 여기서 머뭇거리다 그들과 합류하게 된다면 아군은 다시 혼란에 빠질 공산이 크다. 아니, 단순히 혼란에 빠지는 정도라면 조금 전과 같은 극약 처방으로 어떻게든 수습을 할 수는 있다. 만에 하나 위휘군이 본대를 쳐서 모충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현재 윤주군의 대장군은 그니까 말이다.

다행히 병사들은 더 이상 광분하지 않고 잘 따라 주었고, 위휘군의 피해도 의외로 컸는지 반격이라고 할 만한 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거규가 마음을 놓은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긴장의 끈을 더욱 바짝 당기는 중이었다.

‘절반이 희생된다고 해도 성공이다.’

처음 이 작전을 세웠을 때부터 속으로 계산했던 숫자였다.

원래 윤주군은 사만으로 편성됐다. 그게 첫 전투에서 칠천 정도의 병력을 잃었고, 합진성의 외성 수비에 일만을 투입했다. 그중엔 거가군 삼천도 포함되었고, 그들은 지금도 싸우고 있는 중일 터였다.

그래서 이번 적중 돌파에 동원된 인원은 이만 삼천 명 내외였다. 그중 절반을 잃어도 성공한 셈이라니 얼마나 위험한 작전인지는 익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작전의 핵심은 대장군인 모충을 구하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호윤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건주에 나와 있는 항려의 생질甥姪이니, 설사 나머지 군사가 전멸을 한다고 해도 그만은 건주까지 보내 줘야 한다.

‘포란성까지만 가면 우선은 안심이겠는데.’

애당초 동원했던 거가군의 절반 이상이 희생되었지만, 그래도 포란성엔 정병 일만이 대기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아성牙城이기도 하다. 합진성처럼 호락호락 함락되진 않을 터였다.

그사이 아직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있는 윤주의 다른 성은 물론 건주에서도 원군이 올 것이다. 그때까진 어떤 일이 있어도 버텨야만 하고, 버틸 자신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역시 가장 큰 난관은 서문을 빠져나간 이후가 된다. 위휘군은 분명 뒤를 추적할 게고, 그걸 본대를 이끌고 오는 모충이 과연 잘 막아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처음 이 작전을 세울 때부터 거규는 일부러 후미대를 두지 않았다. 일단 서문 쪽의 위휘군을 돌파한 후에 거가군이 뒤로 처져 뒤를 끊을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우측에 적 기습, 아악!”

거규의 바로 앞에서 달리던 병사 한 명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말에서 곤두박질쳤다.

“상대할 시간이 없다. 전속력으로 전진!”

“방패를 세워라, 방패!”

어차피 절반의 희생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작전이다. 앞을 막는 적들을 일일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서문이오. 아직도 혼전 중인데…….”

“생존한 아군 중 따를 의사가 있는 자들만 데려간다.”

기수의 보고에 이번에도 거규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촌각도 아끼겠다는 의도였다.

“윤주군이다! 적중 돌파를 감행하고 있다. 막아라!”

서문 근처에서 싸우고 있던 위휘군이 필사적으로 거규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부터다! 사력을 다해 뚫고 나가라!”

“살아남은 윤주의 병사들도 모두 뒤를 따르라!”

거규와 그의 편장의 입에서 동시에 폭갈이 터져 나왔다.

“와아, 쳐라!”

“거가군을 따르자!”

대답도 양군에서 거의 함께 터져 나왔다. 위휘군은 윤주군을 막기 위해, 생존한 윤주군은 철수하는 자기편과 합류하려는 외침이었다.

이 경우 유리한 건 당연히 윤주군 쪽이다. 위휘군이야 의외의 역습이나 다름없지만, 그들에겐 한 가닥 구명줄인 것이다. 사력을 다해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껏 오른 기세 그대로, 거규는 서문을 안에서부터 돌파해 나갔다.

기세는 좋았지만, 거규가 적중 돌파 지점으로 서문을 택한 건 중대한 실책이었다.

오늘 서문 공격은 강국의 지원군이 맡았다. 가뜩이나 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오지형은, 성루에 가장 먼저 오르는 공을 백월대에 뺏긴 터라 내심 분기를 삼키고 있던 참이었다.

그 속에 거규가 적중 돌파를 하겠답시고 뛰어들었으니, 오지형으로선 다시없을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뒤로 물러서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오지형은 연방 노호를 터뜨렸다. 자신은 그렇지 않았지만, 강국 병사들의 뇌리엔 원군이라는 인식이 가득 박혀 있었다. 적당히 싸우는 척만 하려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독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공격 지점을 정할 때 편월은 분명히 말했다. 구원을 청하러 가는 윤주군일지라도 결코 놓치지 말라고.

그런데 이건 구원을 청하러 가는 규모가 아니었다. 윤주군은 서문을 택해 적중 돌파를 감행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만약 뚫리게 된다면 공훈은커녕 여기까지 원군을 거느리고 온 의미조차 퇴색되어 버릴 터였다.

“강국군은 여기서 모두 죽는다! 버텨라. 물러서지 마!”

이건 오지형의 진심이었다. 윤주군의 숫자가 오천의 강국군으론 막을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만 벌면 위휘군이 온다. 그때까지는 목숨을 줄여서라도 윤주군을 막아야만 한다.

“장군, 너무 앞서지 마시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장수가 직접 적과 부딪치는 걸 그냥 지켜볼 군세는 없다. 강국군의 편장 중 한 명이 오지형의 옆으로 바짝 말을 붙이며 그를 제지했다.

오지형이 그 말을 들을 턱이 없었다.

“날 막지 마라! 적을, 적을 막아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편장을 따돌린 오지형은 그대로 윤주군의 장수기가 펄럭이고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적장은 발길을 멈추라! 내가 바로 강국에 그 사람 있다고 알려진 오지형이노라! 무명武名을 세웠다고 생각하거든 발길을 멈추고 내 창을 받아라!”

이제 오지형도 서서히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여기서 반드시 공을 세워야 한다는 조바심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오지형은 상대를 잘 골랐다. 자기 이름을 외치며 내지른 창끝이 노린 건 바로 거규였으니 말이다.

거규에게 있어 그건 무척이나 성가신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동해서 본대까지 빼내야 할 판에, 이런 방해를 만났으니 짜증이 치밀었다.

자연히 잔뜩 힘이 실린 거규의 창은 빠르고 날카롭게 오지형을 찔러 갔고, 입 또한 거칠어졌다.

“막는 놈은 죽는다. 비켜라!”

“이름을 밝혀라! 무명 졸자는 상대하지 않는다!”

오지형도 강국에선 가리고 뽑혀서 국경인 탄금성을 맡았을 정도의 장수다. 내질러진 거규의 창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으르렁거렸다.

“윤주 포란성주가 바로 이 몸이시다!”

“오호라!”

거규가 신분을 밝히자 오지형은 탄성을 토했다. 상대를 제대로 만났다는 기쁨과 더불어 자칫 잃어버릴 것만 같았던 이성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이자를 놓치면 안 된다.’

거규라면 이름 없는 개천의 전투에서 윤주군의 후미를 맡아 훌륭하게 철수했던 장수로, 오지형도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

바로 그 거규가 가장 먼저 서문 밖으로 치고 나왔다는 건 적중 돌파의 선봉에 섰다는 얘기의 다름 아니다. 이자만 잡고 늘어지면 윤주군의 발길은 자연 늦어질 테고, 그사이 위휘군이 몰려오면 그걸로 승패는 결정되고 만다.

물론 거규는 그 반대의 입장이었다. 적장이라고 해서 승부를 내거나, 또 지체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오지형은 성가신 벌레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두어 차례 창을 내지르는 걸로 떨쳐 버리려 했지만, 그 벌레(?)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매서운 반격으로 하마터면 가슴 한복판을 꿰뚫릴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거기다 벌레는 입도 걸었다.

“명색이 한 성을 맡고 있는 놈이 적에게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가? 윤주에는 그렇게 사람이 없는가?”

한 소리 크게 내지르며 오지형은 거규에게 바짝 붙어 연방 창을 휘둘렀다.

그걸 양측의 다른 병사들이 그냥 두고 볼 턱이 없었다. 편장은 편장끼리, 병사들은 병사들끼리 서로 자기편의 장군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움에 임했다.

사실 이런 것도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전장에서 장수끼리의 일대일 싸움은 드물지 않았고, 그럴 때 다른 병사들은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의 승패를 나누자는 싸움이 아니다. 거규로선 어떻게든 빨리 군사들을 빼내야 하고, 반대로 오지형은 그걸 막아야 한다. 제대로 일대일로 붙을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렇지만 형세의 유불리는 확연히 드러났다. 갈 길 바쁜 윤주군의 발을 느리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오지형은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윤주군의 적중 돌파를 눈치 챈 위휘군도 서서히 서문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거규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선봉인 자신들의 발이 묶이면 자연히 뒤에 남은 모충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말이다.

“거가군은 산개하여 적을 맞으라!”

이건 바로 전면전을 벌이라는 명령이다. 흩어져 싸우다 보면 길도 열리고, 그리하여 뒤의 아군이 앞으로 치고 나올 수도 있다는 계산이었다.

“잘됐다. 위휘군 놈들을 쳐라!”

“와아, 뒈져라!”

그 명에 주변 일대는 삽시간에 난전으로 빠져 들었다.

“적을 치고 길을 열어라! 거가군은 여기서 뼈를 묻을 각오로 싸워라!”

어차피 벌어진 싸움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적중 돌파고 뭐고 없이 전멸해 버릴 공산이 크다.

자연히 거규의 창도 더욱 날카로워졌다. 조금 전처럼 피하려고만 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창에 거규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강국군 병사 몇 명이 찔려 꼬꾸라졌다.

그걸 보고 있는 오지형의 눈초리가 위로 길게 찢어졌다.

“네 이노옴!”

한 소리 크게 외치며 그 역시 주변의 윤주군을 짓밟으며 곧장 거규에게 접근해 창을 내질렀다.

“감히!”

거규는 오지형의 창을 받아넘겼다 싶자 그대로 창대로 그의 옆구리를 휘갈기려고 크게 휘둘렀다.

오지형도 역전의 명장이다.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다 싶은 순간 창을 세워 옆구리를 방어하며, 동시에 말을 한 바퀴 회전시켜 거규의 머리를 노리고 다시 내질렀다.

그 두 사람의 싸움에 다른 병사들은 끼어들지 못했다. 제각기 적을 맞아 그 적을 죽이거나 자신이 죽어 가고 있는지라 그들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으리라.

하긴 오지형이나 거규에게 있어선 차라리 이게 편했다.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음껏 그들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심경까지 같은 건 결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지형은 더욱 느긋해진 반면, 거규는 더욱 다급해졌다.

싸움에 있어서 그 차이는 실력 이전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백전연마의 장수라고 할 수 있는 거규의 호흡이 당장 거칠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거규에게 있어 이건 치명적인 일이었다. 거친 호흡으로 휘두르는 창이 제대로 노리는 곳에 들어가기는 만무했고, 일 합 일 합이 지날수록 몸의 피로도 가중되었다.

그건 곧바로 거규의 위기와 직결되었다. 그가 휘두른 창을 피해 버린 오지형이 오히려 그의 넓적다리를 찔러 크게 들어 올렸다.

“어억!”

짤막한 비명과 함께 거규는 그대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쩍 벌어진 허벅지의 상처에선 연방 뭉텅이 피가 흘러내렸다.

그걸 놓칠 오지형이 아니었다. 말 머리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일어서려는 거규의 어깨에 다시 한 번 창을 내질렀다.

거규도 맥없이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어깨를 찌른 오지형의 창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싶은 순간, 자신의 창을 그의 옆구리 깊숙이 쑤셔 박았다.

입이 딱 벌어졌지만, 오지형은 신음조차 발할 수 없었다. 옆구리에 벌겋게 달군 인두가 파고든다 싶더니 곧바로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쓰러질 순 없다.’

눈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오지형의 뇌리를 가득 메운 생각이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상처가 깊다는 건 알 수 있다. 만약 거규가 창을 뽑거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크게 움직인다면 그건 곧바로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을 터였다.

이건 순전히 오지형의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부상당해 낙마한 거규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점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맞찌른 상태에서 두 사람은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먼저 발견한 건 강국군이었다. 아무래도 윤주군은 자신들의 작전에 차질을 빚게 되어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나 보다.

“장군!”

강국의 편장 중 한 명이 먼저 오지형에게 접근해 그를 부축했고, 그 뒤로 병사들이 거규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생포… 생포하라.”

편장의 어깨에 기댄 채, 오지형은 간신히 한마디 내뱉었다. 그사이 한 줄기 선혈이 그의 입 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적장을 죽이지 마라. 생포해서 끌고 가.”

오지형의 명을 병사들에게 전달한 뒤, 편장은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바닥에 뉘었다. 옆구리에 박힌 창은 창대만 부러뜨렸을 뿐 뽑지는 않았다. 그편이 더 안전했기 때문이다.

“전황은……?”

간신히 그 한마디만 물은 오지형은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성공이오, 장군! 적들은 발이 묶이고, 적의 본대도 위휘군이 치고 있소이다. 그러니 정신 차리시오!”

편장이 소리 높여 말하면서 흔들었지만, 오지형은 깨어나지 않았다. 이미 얼굴이 검게 변색되기 시작했고, 한 가닥 숨결만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3

합진성에서 윤주군이 적중 돌파를 감행하고 있을 즈음 가겸후는 대소 신료를 모두 물리쳐 텅 빈 진무각 안을 서성거렸다.

“어의御醫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는가?”

여전히 서성거리는 발길을 세우지도 않고 가겸후는 큰 소리로 물었다.

“아직은 아무 전갈이 없사오나, 그리 걱정하실 일은 아니라고 사료되옵니다. 어의의 말로는 황태자 전하의 병은 단순한 홍역인 것 같으니…….”

“닥쳐라!”

가겸후는 대답하는 보차의 말을 막아 버렸다.

“무슨 놈의 홍역이 한 달을 넘긴다더냐? 치료도 효험이 없고.”

가겸후의 어조엔 상당한 짜증이 묻어 있었다. 황태자가 고열로 자리에 누운 게 벌써 한 달째다. 보차의 말처럼 어의는 홍역이라고 진단했고, 알맞은 처방을 내렸다.

그러나 황태자의 용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열은 더욱 펄펄 끓었고, 발병 이후 보름이 지났을 때부터는 의식 없이 하루를 지내는 때가 많았다.

바로 그 일 때문에 가겸후는 지난 한 달간 거의 침식을 잊었을 정도였다. 황태자의 생명이야 뭐 그리 중요하겠냐만, 만약의 경우 자신의 대망이 무너진다고 생각하자 심신을 편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고로 인명은 재천이라 했사옵니다. 황태자 전하의 환우가 심각하오나, 그로 인해 대왕 전하의 옥체까지 상할까 심려되옵니다. 하오니…….”

“닥쳐라!”

가겸후는 보차의 입을 또 한 번 막아 버렸다. 어떤 말로도 지금 그의 심정을 달래 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사실 지금 가겸후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바로 보차다. 환관의 특성상 내전에까지 드나들 수 있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보차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벌써 두 번이나 제지를 당했고, 세 번째는 가겸후가 그냥 말로 끝내지만은 않으리란 것 역시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가겸후 역시 서성거리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황태자가 다섯 살이 되면 황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게 하고, 그 어린 조카를 을러 언젠가는 자신이 황제가 되려던 야망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의에게서 연락이 왔사옵니다.”

만약 누군가 고하는 소리가 없었다면, 가겸후의 발길은 언제까지나 멈추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뭐라 하더냐?”

사람이 미처 발아래 부복하기도 전에 가겸후는 성급하게 물었다. 결코 어떤 기대를 품은 음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차피 닥쳐올 절망이라면 보다 빨리 겪고 싶다는 기색이 다분했다.

“아,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 힘드실 거라고…….”

보고를 하는 자는 어의에 딸린 궁중의 의생이었다. 그가 가겸후의 심정을 알 턱이 있을까만, 황태자의 환우가 회복되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 목소리는 떨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인가……?”

가겸후는 망연히 그 말을 되풀이했다. 마치 넋이 나가 버린 사람 같았지만, 기실 그의 머리는 지금 맹렬하게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알겠다. 물러가라.”

다시 내뱉어진 가겸후의 어조는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한 가닥 희망까지 지워 버리니, 벌써 그의 마음은 차가운 이성을 회복했던 것이다.

의생이 물러가는 것과 함께 가겸후도 율천왕의 상징이랄 수 있는 옥좌에 가 앉았다. 지난 한 달간 이어졌던 서성거림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육 장군과 폐포자를 불러라.”

일단 이성이 회복되자, 가겸후는 더 이상 황태자 문제에 매달리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는 또 하나의 골칫거리인 강국과의 분쟁에 마음을 옮겼다.

명을 전하러 가는 보차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비록 가겸후에게 종사하고 있지만, 그가 황제의 위를 넘보는 일엔 결코 찬성할 수 없었다. 또 다른 황자가 탄생하면 그의 야망이 이어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기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육우맹과 폐포자는 금방 불려 왔다. 지난 한 달간 이제나저제나 가겸후가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의 환우가 위중하시어…….”

“전황은?”

황태자의 병에 대한 위로의 말을 하려는 육우맹의 말을 가겸후는 질문으로 막아 버렸다.

“해전은 연전연승, 육전은 지지부진.”

가겸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폐포자가 간단명료하게 했다.

실제로 율천국이 당면하고 있는 전황은 폐포자의 말에서 더 이상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었다. 거대한 쇠뇌를 고안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해진 이후로, 그건 노궁에도 활에도 활용되어 해전에서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육전에서는 상초국 병사들의 전투력도 무시할 수 없어, 강국과 접한 군사적 요충지인 식운관息雲關을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도 식운관을 완전히 탈환하지 못했소?”

원래 식운관은 율천국의 영토였다. 그게 강국, 정확하게 말하면 상초국과의 전쟁 이후 뺏긴 셈이 되고 말았다.

“글쎄요. 오늘 식운관의 주인은 어느 쪽인지 아직 보고가 없었소이다만…….”

입가에 옅은 미소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폐포자가 나직이 대꾸했다.

그 역시 사실이었다. 식운관은 율천국이나 강국 모두에게 중요한 거점이다. 그러니 매일 공방전이 벌어지고, 그때마다 점령군이 바뀌곤 했다.

“수군을 진파구에 상륙시켜 강국의 중심부를 곧장 치는 건 어떻겠소?”

“불가합니다.”

이어진 가겸후의 질문에도 폐포자는 간단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수군이 상초국을 이기는 건 장거리 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상륙을 하려면 접근전은 불가피합니다.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게다가 우리는 진파구 근처의 조류나 암초 등 바다 밑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상륙은 불가합니다.”

“흐음.”

가겸후는 무거운 침음성을 토했다. 황태자의 일도 그렇고, 육전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겨우 해전에서 승리하는 걸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허주의 동정도 심상치 않소이다.”

육우맹이 불쑥 내뱉었다. 처음부터 자신은 배제된 것 같은 불만이 깃든 탓에 목소리 역시 필요 이상으로 컸다.

그렇다고 가겸후에겐 대놓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 자연 육우맹의 시선은 폐포자에게 향했다.

“허주의 조가 놈이 영산 탈환을 노리고 그 주변으로 병력을 속속 모으고 있는 기색이오. 이에 대한 대책도 강구해야 될 게요.”

폐포자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벌집을 쑤신 것 같은 파양주의 일이야 율천국 입장에서 보면 환영할 만했지만, 아무래도 허주는 턱밑에 세워 둔 비수의 다름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율천국에선 영산 수비에 쪼갤 병력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일 계속되는 강국과의 육전에 상초국과의 해전, 거기다 융주를 단속하는 것도 여간 머리 아픈 일이 아니었다.

물론 병사들은 꾸준히 모집하고 있었다. 다만 제대로 훈련이 안 된 채 전투에 투입했다가 전멸당한다면, 그들에게 들인 엄청난 비용까지 날아가게 된다.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육우맹으로서도 답답한 노릇이었다. 병력 오만만 있으면 당장 영산으로 달려가 허주군을 깨뜨리고, 또 지금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위휘군까지 무찌르고 그들이 차지한 파양주 땅을 고스란히 수중에 넣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율천국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육우맹이었다. 그러니 영산을 수비할 대책만 거론했지, 병력을 달라는 말은 아예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영산의 수비는 누가 맡고 있소?”

“엄확嚴穫 장군이 칠천의 병력으로 주둔하고 있습니다.”

“허주에서 동원한 병사의 수는?”

“어제 올라온 보고로는 이만 이상이라 합니다.”

“칠천 대 이만이라…….”

가겸후는 입속에서 그 숫자를 나직이 내뱉었다. 아무리 계산을 거듭해 봐도 승산이 없었다.

게다가 이만이라는 숫자도 어제 올라온 보고에 의한 것이다. 영산과 여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사이 허주의 병사들이 얼마나 많이 불었을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영산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지금 서쪽의 강자인 파양주는 막주와 윤주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때가 아니면 서쪽으로 진출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 교두보로서 허주를 치자면 영산은 그 숨통에 해당한다. 맥없이 양보해도 좋을 곳이 아니란 얘기다.

“융주에 파견한 병력 중 이만을 영산으로 빼는 건 어떻겠소? 엄확은 용맹에 비해 지혜나 용병술이 많이 달리는 사람이니…….”

가겸후의 말을 들은 육우맹과 폐포자의 표정은 각기 달랐다.

육우맹은 일말의 희망을 가진 눈빛이었고, 폐포자는 암담한 그늘이 얼굴 가득 드리워졌다.

“계절상 지금 융주에서 병력을 뺀다면 적비 일당은 더욱 발호할 것입니다. 그 점만은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이만의 병력을 뺀다고 해도 융주엔 삼만이 남소. 그 정도라면 적비가 융주 외의 다른 곳을 침탈하는 건 막을 수 있지 않겠소?”

“놈들의 기동력을 생각하십시오. 삼만으로는 그들이 융주 인근의 다른 곳을 약탈하는 걸 막기는 힘들 것입니다.”

“새로 모집한 병사들이 있지 않사옵니까. 그중 오만만 소장에게 주신다면 이 기회에게 허주까지 쳐서 대왕께 바치겠나이다.”

가겸후가 영산으로 병력을 동원할 뜻을 비치자, 육우맹이 재빨리 나섰다. 그동안 수군만 너무 키웠다는 걸 의식하고서 따로 병사 십만을 더 모았던 것이다.

“불가하외다. 아직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신병들을 전투에 투입할 수는 없소이다.”

“아무리 신병이라도 지휘하는 장수에 따라선 강병이 될 수도 있소이다. 이 몸에게 지휘를 맡겨 준다면 한 달 내에…….”

“육 장군.”

가겸후가 조용한 어조로 육우맹을 제지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역시 신병을 동원해서라도 허주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신병을 전투에 투입했을 때 따르는 위험 역시 가겸후는 잘 알고 있었다. 졌을 때 입게 될 비용과 인원의 손실은 물론, 자칫 율천국 전 병사의 사기까지 저하시킬 수 있다.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머릿속은 온갖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건 물론이었지만.

그 침묵의 공간 속으로 보차가 발소리도 없이 들어왔다.

“지금 막 황태자 전하께서…….”

보차의 말끝은 흐느낌으로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모두 알 수 있었다. 황태자가 죽었다는 의미였다.

“그런가? 기어이 살리지 못했단 말이지?”

가겸후의 말은 짧았다. 이미 포기하고 있던 일이라 더 이상의 애착은 갖지도 않았다.

“온 천하에 국상을 선포하라. 각국의 왕들은 물론 한 성의 성주 이상 되는 자들은 모두 참석하라고 일러라.”

지금처럼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 말이 전혀 먹혀들지 않으리란 건 가겸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겸후는 황태자의 장례식을 되도록 성대하게 거행할 작정이었다.

이건 전혀 쓸모 없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의 장례식이다. 직접 참석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지금 치르고 있는 크고 작은 싸움들은 모두 중단할 게 분명하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석 달 정도의 시간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신병들의 훈련을 조속히 끝내도록 하시오. 그리고 간인을 파견해 진파구 근처의 해도海圖를 작성하도록 하시오.”

“존명!”

“모두 물러가시오. 혼자 있고 싶소.”

가겸후의 말에 다들 조용히 예를 갖추고 물러가기 시작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황제는 아직 젊으니 얼마든지 후사를 더 볼 수 있을 겁니다.”

가장 늦게까지 남았던 폐포자가 지극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역시 가겸후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러가시오.”

가겸후가 재차 무거운 어조로 말한 뒤에야 폐포자는 진무각을 빠져나갔다.

‘흐음.’

가겸후는 입 밖으로 토해지려는 침음성을 애써 눌러 삼켰다. 폐포자는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다. 언제 황태자를 낳고, 적당하게 자랄 때까지 기다린단 말인가.

그렇다고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금물이다. 천하가 어지러울수록 모든 걸 조용하고 무리 없이 진행해야만 한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가겸후는 더 이상 황태자 문제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당면한 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몰두하기 시작했다.

* * *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신시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위휘군으로선 썩 만족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 비록 합진성을 함락시켰다지만, 윤주군의 대장군인 모충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충의 뒤를 추격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점심도 먹지 못하고 전투를 치른 병사들의 체력이 바닥난 걸 알기에, 편월은 더 이상 적을 몰아치지 않았다.

병사들이 전장 정리를 하고 있는 가운데, 편월 역시 근위대가 급히 둘러친 휘장 속에 들어앉아 군감인 송지로부터 전과를 보고받고 있었다.

“비록 적의 대장군은 놓쳤지만, 포란성주인 거규는 생포했소이다. 그리고 놈들이 미처 불 지르지 못한 양곡과 많은 재보를 건졌소이다. 그 양을 대충 환산하면 우리 위휘군이 일 년은 너끈히 버틸 정도였소이다.”

“아군의 피해는?”

편월은 조용히 물었다. 적을 얼마나 죽이고, 얼마나 많은 물자를 노획했느냐 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급했다.

“보다 정확한 숫자는 각 장수들의 보고를 집계해 봐야 알겠지만, 소장이 판단하건대 대략 이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같소이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전투 중 오지형 장군이 심각한 부상을 당한 일이오.”

“오 장군이? 그래, 상태는 어떻소?”

편월이 다급하게 재우쳐 물었다. 오지형의 부상은 단순히 그 일개인의 문제에 국한된 게 아니다. 경우에 따라선 강국의 원군들이 철병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 위휘군에서 강국의 원병 오천이라는 건 무시하지 못할 전력이다. 그게 한꺼번에 빠져나간다면 앞으로의 군사적 행동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걸 보면 상당한 중태인 듯하오이다.”

보고를 들은 편월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의식이 없을 정도의 중태라면 윤주성으로 후송을 한다고 해도 회생을 바라기는 어려울 터였다.

“알겠소. 오늘 하루 더 지켜보고, 정 어렵다 싶으면 강국에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시오. 그리고 적의 동태는 어떻소?”

편월은 화제를 돌렸다. 고민을 한다고 해서 오지형이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설 것도 아니니, 그보다는 당면한 문제를 처리하는 게 낫다.

“적들은 가까운 포란성엔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건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요. 포란성은 비교적 작은 성이니 총공세를 감행한다면 하루 이틀이면 떨굴 수 있을 게요.”

“우선 병사들을 정비하는 게 급선무요. 오 장군이 잘못된다면 강국의 원군들도 동요할 게 뻔하니, 이 점 유념하시오.”

“만약 강국군이 돌아가겠다면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시오?”

송지의 질문에 편월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직은 그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 때가 아니었다.

편월의 침묵이 어떤 의미라는 건 송지도 익히 안다. 그래서 슬쩍 말을 돌렸다.

“주군의 말씀대로 포란성을 치는 건 잠시 보류하는 게 좋겠소. 이 합진성까지 수중에 넣었으니, 관할하는 식읍만 해도 족히 오십만 호가 넘을 게요. 우선 이 토대부터 다지는 게 좋을 듯하오.”

사실 이건 송지의 본심이 아니었다. 율천국과 강국이 서로 물고 물리는 분쟁을 거듭하고 있는 이때야말로 서쪽으로 한껏 세력을 뻗쳐야 된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합진성까지 손에 넣었으니 나라를 세우는 데 필요한 백성이나 경제적 여력은 마련된 셈이다. 미리부터 그 왕이 될 사람의 뜻을 꺾어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맹아가 밧줄에 묶인 거규를 데리고 왔다.

비록 포박된 상태였지만, 거규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있었다. 지난번 오지형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를 싸맨 피 묻은 천이 오히려 그의 위용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포란성주입니다. 주군 앞이다. 무릎을 꿇어라.”

편월에게 깍듯한 군례를 갖춘 맹아는 간략하게 거규를 소개하며 윽박질렀다.

“패장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다. 더 이상의 수모는 받기 싫으니 어서 목을 쳐라.”

거규는 담담한 어조로 맹아의 말을 받았다. 그 표정이나 태도에서 한 점의 두려움이나 비굴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순간 편월은 아주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 침사성에서 봤던 목철린의 최후가 떠올랐던 것이다.

‘확실히 비슷하군.’

무장으로서 목철린은 편월에겐 하나의 이상형이었다. 늘 죽음이 따라다니는 전장을 전전하는 삶이다. 그 죽음이 닥쳤을 때야말로 가장 당당하게 대처하고 싶었다.

편월은 거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어쩌면 그 마음속에는 목철린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편월은 이런 사람이 좋았다. 비록 적으로 만난 사이지만, 죽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들지 않았다.

“풀어 주시오, 맹 장군.”

“주군!”

너무도 뜻밖인 편월의 말에 맹아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를 불렀다.

하지만 거규의 반응은 그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패장이 제 발로 걸어갈 곳은 없다고 했다. 어서 죽여라.”

이어진 거규의 말에 송지와 맹아의 표정은 뜨악해졌지만, 편월은 오히려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바로 저런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표정을 더욱 굳히며,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 뒤 포란성을 공격하겠소. 그때 무장으로서 다시 승부를 가립시다.”

“뭣이?”

이번엔 거규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빛이 어렸다. 풀어 줄 뿐만 아니라 공격 날짜까지 알려 주면서 무장으로서의 승부를 가리자고 한다. 이런 경우는 더러 얘기 속에서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직접 겪게 되니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규도 백전연마를 거친 명장이다. 이내 강한 눈빛으로 편월을 쏘아보았다.

편월도 지지 않았다. 거규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포란성에도 백성들은 살고 있을 터, 성주라면 그들의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마시오.”

“정말 무장으로서 나와 겨루고 싶은 건가?”

말이 끝나자마자 거규가 물었지만, 편월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탁자에 마련된 합진성의 내부 지도에 시선을 떨구었다.

송지가 재빨리 맹아에게 거규를 데리고 나가라고 눈짓을 보냈다. 내부에 알력이 있는 것 같은 모습을 적장에게 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주군, 정말 살려 보내실 생각이시오?”

맹아가 거규를 데리고 나가길 기다려 송지가 편월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듣지 않아도 송지는 알 것 같았다. 지도를 보고 있는 편월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본 탓이었다. 진심으로 거규와의 승부를 바라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극명한 증좌證左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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