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비감亂世悲感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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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환과 그의 정실인 편씨 부인은 금슬이 썩 좋은 부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냥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는 주변에서 볼 땐 아슬아슬하다 싶을 정도로 위태로울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엔 꾸준히 자식이 생겨 이남 일녀를 슬하에 두고 있다. 생각해 보면 웃기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대륙의 배꼽인 허주를 지배하는 조환도 아내인 편씨 부인에겐 한 수 양보하는 처지였다. 오늘이 있기까지 처가의 도움이 컸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성격적으로 밀린다는 게 보다 정확했다.
대대로 허주에 뿌리박고 살아온 편씨 문중은 묘하게도 아들보다 딸이 귀했다. 그리고 그 딸들은 하나같이 남자 못지않은 성품이었다.
그렇다고 외모가 밉다거나 성정이 거칠어 남자처럼 행동한다는 건 결코 아니다. 집요한 성취욕과 한번 말을 내뱉으면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고집이 드세다는 얘기다.
바로 그런 점이 어쩌면 오늘의 조환이 있게 된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내조라는 명목으로 남편을 꾸준히 밀어붙였으니, 되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될 일이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밖에서 일을 마치고 내전으로 든 조환에게, 편씨 부인은 저녁보다 먼저 말부터 꺼내 놓았다.
“윤주성의 싸움은 어떻게 되었나요?”
“쯧쯧쯧.”
다짜고짜 묻는 부인을 보며 조환은 우선 혀부터 찼다. 하다못해 ‘수고했다’는 말부터 하면 어디가 덧나나 말이다.
“당신도 벌써 마흔을 넘긴 나이요. 좀 더 자중토록 하시오.”
조환이 가볍게 타박했지만, 편씨 부인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환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싸움에선 정허군, 아니 위휘군이 이겼소. 그래도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오. 합진성으로 후퇴한 윤주군이 여기저기 구원을 청하고 있으니.”
지리적으로 가깝다 보니 낮에 있었던 위휘군의 전황은 벌써 조환의 귀에 들어와 있었다.
“그럼 당분간 서쪽은 근심할 필요가 없겠군요. 이때 대인성에 있는 도 장군을 불러 영산을 탈환하도록 하세요.”
“또 그 얘기요? 군사적인 문제라면 나도 있고 뭇 장수들도 있소. 그러니 맡겨 두시오.”
“아녀자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건 천첩도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너무 미적지근하게 일을 하시는 것 같아 한마디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겠어요. 서쪽이 시끄러운 이때에 잃은 땅을 되찾지 않는다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오겠어요. 그러니 결단을 내리세요.”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자신의 결심을 듣기 전에는 결코 시선을 거두지 않겠다는 표정의 부인을 보며, 조환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기실 조환은 이 아내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외모는 물론이고 자신이나 가족들을 알뜰히 챙기는 걸 보면 정말이지 업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대하면 답답하게 숨이 막혀 왔다. 바깥의 억센 장수들 앞에서 보였던 위엄도, 이 부인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힘을 잃고 말았다.
방금 편씨 부인이 했던 얘기는, 조환은 물론이고 뭇 장수들 사이에서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었다.
그걸 한마디로 미적지근하다고 잘라 말하는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환은 난감하기만 했다.
반면 아내의 이런 태도와 눈빛에서 조환은 엄청난 힘을 얻기도 한다.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는 사이 고함 한 번 지르면 영산을 다시 탈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래선 안 된다.’
조환은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천하는 다시 들썩이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섣불리 처신을 그르치면 이만큼 키워 온 허주는 어느 바람에 날린 건지도 모르는 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 일만은 내게 맡겨 두시오. 서쪽이 소란스럽다고 하지만, 그건 곧 정리될 게요. 위휘군이 지금은 비록 기세를 떨치고 있지만 결국은 패망할 것이오. 아무래도 숫자가 적으니 말이오. 그다음은 어디겠소? 호윤천은 틀림없이 우리 허주로 창끝을 돌릴 거요.”
“천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또 부인은 엉뚱한 얘길 할 생각이오?”
“엉뚱한 얘기가 아니에요. 지금까지 위휘군의 행적을 보면 그들은 쉽게 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지금이 아니면 영산은 영영 탈환하기 어려울지도 몰라요. 최근엔 율천국의 가겸후도 상초국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다지 않아요. 왜 그쪽의 위협은 간과하시는 건가요? 게다가 가겸후는 우리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배후를 노렸던 자인데.”
“허어, 참!”
기가 찬다는 듯 조환은 입을 닫고 말았다. 내전에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천하의 정세는 환하게 꿰고 있다. 처가에서 알려 준 것이겠지만, 그 정보를 분석하는 능력은 가히 탁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니 번번이 조환이 밀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엔 그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휘하의 장수들이 하나같이 위휘군의 패배를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마시오. 나라고 해서 팔짱만 끼고 있는 건 아니니까!”
드물게도 조환은 강경한 어조로 편씨 부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실제로 지금 조환은 강국의 증두신과 연합할 계획을 세웠고, 그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 목하 장수들과 토의 중이었다.
이건 만약 증두신이 처음 상초국을 끌어들였을 때처럼 연전연승하고 있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얘기다.
하지만 지금은 율천국의 거대한 저력에 증두신이 밀리고 있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물론 전적으로 거기에만 매달려 있는 건 아니다. 연합 제의를 거부당했을 경우까지 생각해서 토의하고 있기에 여태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다른 때보다 강경해진 남편의 어투에 편씨 부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갔다. 만약 그때 시비들이 저녁을 날라 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한바탕 언쟁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서쪽은 역시 도 장군이 단단히 눌러두고 있는 게 좋겠고, 증두신과의 연합만 이루어진다면 영산은 쉽게 탈환할 수 있으리라.’
음식을 씹으며 자신의 구상을 하나씩 가슴속에 그려 가던 조환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강이를 이대로 둬도 괜찮겠소?”
조환은 맏아들인 조강을 거론했다.
“강이가 왜요?”
속이 풀린 건 아니지만 아들이 화제에 오르자 편씨 부인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엔 강이를 대인성으로 보내 도 장군 밑에서 훈육을 시켰으면 하오만…….”
“강이를 대인성으로?”
“아무리 엄하게 가르친다고 해도 부모의 슬하에 있어서는 이 세상의 험함을 모르는 법이오. 그러니 지금부터 도 장군에게 보낼까 하는데…….”
“좋아요.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어요.”
편씨 부인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에 따라선 조강이 자신의 친자식이 아닌 것처럼도 생각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세 명의 자식들은 모두 편씨 부인의 소생이었다. 조환에게 첩이 두 명이나 더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에겐 애가 없었다.
그렇게 보면 편씨 부인의 행동은 확실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세상 여느 어머니 같으면 자식을 슬하에서 떼어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편씨 부인은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조강의 나이가 이제 열한 살인 걸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듣자니 위휘군의 대장군은 이제 열여섯 살 된 편월이라는 소년이라지요? 그렇게 보면 우리 아들은 정말 많이 늦었네요. 당장 내일이라도 대인성으로 보내세요.”
오히려 말을 꺼냈던 조환이 뜨악한 표정으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적어도 한두 번의 반대는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한술 더 뜨고 있다. 이러니 매사에 기가 눌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조환은 한시름 놓았다. 설마 아들을 맡긴 장수를 불러 영산을 탈환하라고 닦달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편씨 부인은 집요했다.
“그렇다면 영산 탈환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겠군요. 우리 친정의 오라비나 동생들은 안 되겠고, 그나마 쓸 만한 장수로는 당씨 형제가 있겠군요. 그들에게 군사를 줘서…….”
“그만!”
소리를 지르며 조환은 젓가락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식사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 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 듯했다.
편씨 부인도 더 이상 남편을 말리지 않았다. 안에서는 드세지만 밖에서는 남편의 체통을 깎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의 하나였다.
사실 조환은 겉모습처럼 화가 많이 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내전을 벗어나는 그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무엇보다 아들인 조강의 문제를 시원스레 처리한 게 마음에 들었다.
* * *
여기저기서 울리는 말 울음소리를 아련히 들으며 편월이 잠에서 깼을 때, 진막 주변엔 온통 안개가 가득했다. 주변이 허허벌판이란 것과 한여름이라는 걸 감안하면 다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건 합진성을 공격하려는 위휘군에 있어선 상당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맹 장군, 각 부대의 장수들을 소집하도록!”
눈을 뜨자마자 편월은 밖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 안개를 놓친다면 일기를 이용한 작전에 서툴렀다고 뒷소리를 들을 터였다.
“존명!”
맹아가 복명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게, 몇 개의 말발굽 소리가 흩어져 갔다. 각 부대로 전령들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주군.”
부르는 소리와 함께 맹아가 진막 안으로 들어오며 뜨거운 물 한 잔을 내밀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야외에서 자게 되면 몸이 굳는다. 그걸 녹이라는 의미였다.
“이 안개가 얼마나 지속될 것 같나?”
“아무리 빨리 걷힌다고 해도 두 시진은 족히 걸릴 거요.”
맹아 역시 밖에서 안개의 농도 등을 점검했나 보다. 대답하는 말투에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렇다면 오전 내내 안개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공격군으로선 놓칠 수 없는 호기였다.
“적의 동태는?”
이 안개를 아군만 이용하라는 법은 없다. 적도 은밀히 성을 나와 이 영채에 공격을 감행할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된다.
“쥐새끼 한 마리 움직이는 기미가 없습니다.”
이 역시 자신만만한 맹아의 대답이었다. 지난번에 근위대 자체의 정보망 부족을 절감한 이후, 그는 나름대로 합진성 주변에 어젯밤부터 사람을 풀어놨다.
“식전 싸움이 되겠는데. 병사들이 배고프다고 하지 않을까?”
“일찍 공격을 시작한다면 적들도 밥 먹을 틈이 없을 거요. 같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싸워야 한다면 사기가 오른 아군이 이길 건 틀림없소.”
“하지만 우린 바깥 잠을 잤고, 적은 어쨌든 이슬은 피했다. 이 점을 간과하지 말도록.”
말하고 있는 사이 연거푸 말들이 진막 앞에 와 닿는 소리가 들렸다. 전갈을 받은 각 장수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일 터였다.
“이제 와서 새삼 무슨 회의요? 그냥 준비되는 대로 공격하는 거지!”
흑월대의 오강이 가장 먼저 진막 안으로 들어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뻔히 아는 일로 시간 낭비를 말자는 얘기였다.
“오 장군, 주군일세. 예전처럼 그런 어투는 곤란하지 않겠나?”
송지가 뒤따라 들어오면서 가볍게 타박을 주었다. 정허군과 위휘군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 지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과연 오강은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그 역시 나라를 하나 세웠을 때 편월을 왕으로 옹립하는 것에 대해 찬성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언행도 분명 고쳐야만 한다.
장수들이 줄지어 몰려와 안에 마련된 탁자에 가 앉았다. 마지막은 강국의 원군 대장 오지형이었다.
“강 장군은?”
편월이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강숙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진을 치느라 병사들이 모두 지쳤다며, 오늘은 뒤에 남아 영채를 지키겠다고 전령을 보냈더이다.”
“강 장군이?”
편월보다 다른 장수들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강숙의 성미를 익히 알기에, 송지의 이 보고가 뜻밖으로 들렸으리라.
잠시 웅성거리던 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편월에게로 쏠렸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하는 눈빛들이었다.
“좋겠지. 어차피 누군가는 영채를 지켜야 하니까.”
마치 혼잣말처럼 나직이 내뱉으며, 편월은 탁자로 걸어가 펼쳐 놓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합진성 주변을 그린 지도라지만 상세한 건 아니고 중요한 지점만 개략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별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지만 지금으로썬 의지할 만한 게 이것뿐이었다.
“백월대가 빠지면 오늘 선봉은 누구에게 맡기실 생각이오?”
이번에도 오강이었다. 어제 선봉을 백월대에 빼앗겼으니 오늘은 흑월대가 선봉을 맡겠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오늘 선봉은 이 몸이 맡고 싶소.”
강숙의 바람을 일그러뜨리며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강국의 오지형이었다.
“명색이 우린 지원군이오.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다 할 전공이 없소이다. 그러니 오늘 성 공격의 선봉은 반드시 이 몸이 맡아야겠소.”
“원군으로 와 주신 것만 해도 공훈은 충분하오. 그러니 오늘의 선봉을 맡지 않아도 될 것이오. 주군, 오늘 선봉은 흑월대에 명해 주시오.”
“그렇게 되면 돌아갔을 때 우리 주군을 뵐 낯이 없소이다. 이럴 땐 우리 지원군에 양보를 해 주시는 게 미덕일 게요.”
“다른 거라면 모두 양보해 드리겠소. 하지만 오늘의 선봉은 이 오강의 목을 걸고서라도…….”
“그만!”
편월은 오강과 오지형의 언쟁을 제지했다. 안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처럼 선봉 다툼이나 할 여유는 없었다.
“안개가 걷히기 전에 전원 공격에 가담하시오. 지금부터 각자 공격할 곳을 정해 주겠소.”
편월의 어투는 강했다. 지금부터 자신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걸 용납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우선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성의 동문은 근위대와 흑월대가 맡겠소. 남문은…….”
“불가하오!”
편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지가 반박을 나고 나섰다.
“주군께서 직접 공격에 가담하신다는 건 언어도단이오. 이곳 영채에 남아 전체를 지휘하시도록.”
이건 아마 송지가 아니더라도 다른 장수들 중 누군가 했을 말이었다. 나라를 세우기로 작정을 한 미래의 군주가 직접 공격에 나선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편월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뜩이나 우린 병력이 부족하오. 그런데 백월대가 빠졌으니 그 자린 당연히 근위대가 채워야 하오. 그러니 두말 마시오. 여기 서문은 지원군이 맡아 주시오. 공격이 시작되면 구원을 청하려는 전령들이 마구 달려 나갈 것이오. 그들을 완전히 차단하시오. 남문과 북문은 나머지 위휘군이 각기 나눠 맡도록!”
단호하게 말을 맺으며 편월은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비록 어리다지만 그 눈빛에 깃든 엄격함만은 누구도 감히 마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긴 불만이 있다손 쳐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을 터였다. 지원군이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 위휘군의 경우는 그 지원군의 장수인 오지형 앞에서 자신들의 주군인 편월에게 항거한다는 인상을 주기 싫었을 테니 말이다.
“납득했다면 곧바로 움직이시오. 무리하게 성을 떨굴 건 없소. 안개가 있는 동안 최대한 타격만 가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성안에선 분명 동요가 있을 거요.”
이건 송지의 말이었다. 그는 편월의 심정이 어떤지 알 것 같았기에, 군감의 자격으로 각 장수들에게 얘기한 것이었다.
“그렇게 알고 근위대를 준비시키겠소.”
맹아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싸움에 참가하게 되어 기쁘다는 듯 연방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걸 시작으로 각 장수들은 하나 둘 진막을 빠져나갔다.
‘오늘의 첫 공격은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한다.’
편월의 진막을 빠져나온 오지형은 유난히 서둘렀다. 오늘은 어떻게든 첫 공격의 공훈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오지형은 지금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그저 생색만 내도 충분한 지원군이면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게 뻔한 동문 공격을 자청했을 정도였다.
이건 정허군이 위휘군으로 바뀌면서부터 생긴 변화였다. 당사자들이야 어떻든 오지형의 눈에는 나라를 만든다는 그 꿈이 반드시 실현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도 이젠 주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파양주 안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지원군이라고 해서 몸을 사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위휘군을 도와, 그들이 건국했을 때 그 일익을 담당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내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게 아니다.’
이게 오지형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오지형이 나고 자란 강국은 지금 율천국과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초반엔 상초국의 지원에 힘입어 다소 유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밀리는 형국이었다.
그럴 때 만약 휘국이 세워진다면, 강국으로선 막강한 우방을 하나 얻는 셈이 된다. 위휘군의 전투력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지형이 확인하고 있으니까.
‘휘국이 생긴다면 우리 강국의 사위 나라가 된다.’
혈육도 믿지 못하는 이 난세에 옹서지간이라 해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건 오지형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생판 남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라면 사위의 도움을 받는 게 낫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자기 진막으로 돌아가는 오지형은 연방 채찍을 가했다. 오늘은 선봉을 맡으리라고 단단히 결심했기 때문에, 미리 부하들에게 대기하고 있으라고 명을 내려 뒀다. 자신이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출동이 이루어질 터였다.
뚜우우-! 둥, 두둥!
천지에 가득한 안개를 뒤흔들며, 위휘군 측에서 첫 고둥 소리와 북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지원군인 오지형의 군세가 울린 것이었다.
2
전투가 시작되면 가장 바쁜 사람은 누가 뭐래도 송지였다. 각 부대를 돌며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관찰함은 물론 느슨한 곳이 있으면 독려도 하고 다녀야 한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에는 그 모든 걸 편월에게 보고함으로써 논공행상에 있어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니 각 부대는 송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운다.
이 말은 그가 없는 곳에선 각 부대가 꾀를 부린다는 얘기가 아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송지의 눈이 번뜩이고 있을지 모르니, 항상 최선을 다하지만 그가 부대에 나타났다고 하면 더욱 힘을 낸다는 뜻이다.
그러니 송지는 어느 부대에 가도 환영을 받는다. 자기들의 전투력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송지는 경원시당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감독을 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빨리 편월에게 자신들이 싸우는 걸 보고해 달라고 각 부대의 장수들은 그를 밀어 보내기도 한다.
바로 지금 송지가 적월대에서 그런 꼴을 당하고 있었다. 합진성의 남문 공격을 맡은 서진청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기색이었다.
“보시다시피 우린 잘 싸우고 있소. 다른 부대에나 가 보시오.”
“허어, 이건 오자마자 축객령이로군. 그래도 이 몸은 군감이오. 오늘 적월대가 어떻게 싸우는지 봐야겠소이다.”
“보나마나 뻔하지, 뭐. 이 성이 무너질 땐 우리 적월대가 가장 먼저 돌입할 게요. 그러니 주군께 그렇게 보고하시오.”
“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걸 주군께 보고하는 게 바로 기만이라는 거요. 그러니 이 몸은 적월대의 싸움을 좀 더 지켜보다… 이크!”
말을 하던 송지는 갑자기 목을 움츠렸다. 화살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투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다가는 눈먼 화살에 꼬치처럼 꿰이기 십상이오.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시오.”
서진청은 더 이상 송지와의 입씨름이 지겹다는 듯 말을 몰고 달려가 버렸다.
“이래서야 군감 노릇도 못 해 먹겠군.”
송지는 투덜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자리는 뜨지 않았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진 않지만 다른 부대가 싸우는 걸 세심하게 관찰해야 되기 때문이다.
물론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었다. 성질 같아서는 적과 어울려 한바탕 싸우고도 싶었고, 군감인 자신을 무시하는 장수들을 질타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송지는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저들이 자신을 진정 귀찮게 여기는 것처럼도 보인다. 또 한편으론 조금이라도 빨리 저들의 공훈을 편월에게 자랑하려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가려 자칫 볼 수 없는 궁극적인 마음 하나는, 바로 자신의 안전을 바라고 있다는 걸 잘 아는 송지였다.
‘하긴 대인성에서도 담 장군에게 밀려났었지.’
비단 여기에서뿐만이 아니다. 예전 대인성에서 탈출할 때 송지는 맨 뒤에 남아 유군에 합류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담개는 기를 쓰고 돌파구를 열어 자신을 편월이 있는 본대로 보내 줬다.
“제길, 날씨마저 도와주질 않는군.”
바닥에 침을 뱉으며 송지는 말에 올랐다. 아직도 주변엔 안개가 자욱해 아군이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었다. 좀 더 전장에 다가가야 할 것 같았다.
오십 기의 부하들을 거느린 송지가 안개 속을 더듬어 합진성 쪽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전방에서 한 떼의 기마 부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전열을 재정비하라! 이번에야말로 성문을 불살라 버려야 한다!”
적월대와 더불어 남문 공격에 투입된 담개의 목소리였다. 한차례 공격에 나섰다가 물러난 모양이었다.
송지는 빠르게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여! 담 장군, 수고 많으시오.”
“오셨소?”
투구를 벗은 채 얼굴 가득한 땀과 안개의 습기를 닦고 있던 담개는 약간 짜증스럽게 송지를 맞았다.
“노익장이라더니 담 장군의 용맹은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는 것 같소이다그려.”
진심으로 탄복했다는 듯 송지가 말을 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 담개는 마치 나이를 거꾸로 먹는 사람처럼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흥!”
담개는 가벼운 코웃음으로 대꾸했다. 송지의 말이 입에 발린 아부가 아니란 걸 잘 알지만, 체질적으로 이런 노골적인 칭찬이 싫었다.
“적의 저항은 어땠소? 밖으로 쳐 나올 기미가 있더이까?”
“그건 송 군감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오. 우린 그저 싸울 뿐!”
퉁명스레 대꾸하며 담개는 다시 투구를 썼다. 지금 공격에 가담하고 있는 적월대와 교대하려면 곧 출발을 해야만 한다.
“준비되었느냐?”
“와아-!”
“좋다. 유군 출격!”
옆에 있는 송지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담개는 다시 한 번 유군을 지휘해 안개 속에 가려진 합진성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송지는 진심으로 탄복을 금치 못했다. 정확한 나이는 물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담개도 자신과 비슷할 터였다.
그런데 그 활동력을 보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 담개가 여전히 일선에서 젊은이 못지않게 싸우는 반면 자신은 이제 전장에서 각 부대를 찾아다니는 것도 간간이 피로를 느낄 정도였다.
‘단련의 차이일까?’
그건 아니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는 송지였다. 그 역시 젊은 장수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평상시에 각종 무예의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신력의 차이도 아니었다. 담개에게 정규군의 명예가 있다면, 자신에게는 잡가군의 끈질긴 근성이 도사리고 있다. 어느 쪽이 우위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평소의 생활 습관에 기인된 문제일 터였다. 주린 배를 참지 못해 잡가군에 몸을 담은 송지와, 나름대로 좋은 출신인 담개는 그 먹을거리부터가 달랐으리라. 그 차이가 나이 든 지금 나타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물론 그걸 순순히 인정할 송지가 아니었다. 역시 자신의 마음가짐과 단련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며 말 머리를 돌렸다. 지금부터는 북문 쪽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안개는 여전히 얼굴에 닿으면 빗물처럼 흘러내릴 정도로 짙었다.
* * *
파양주의 영욱성도 그날은 짙은 안개 속에서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걸 기다리고 있던 곽준방은 우효금과 구문생을 좌우에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갔다. 뒤에는 오백여 기병이 따르고 있었다.
마용승 생전에 곽준방은 영욱성 가까이에 있는 몇 개의 성 중 하나인 조천성朝天城의 성주로 임명되어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마용승이 죽었고, 장례식 이후로 곽준방은 영욱성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호윤천 부자의 전횡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성문이 열리기 무섭게 곽준방이 영욱성으로 들어서고 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흔들리는 마상에 앉아 곽준방은 눈을 감고 수하들이 수문 위사들과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많이 변했군.’
그 변한 게 곽준방은 불쾌하기까지 했다. 예전의 영욱성이었다면 이런 번거로운 수하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윤 대부인은 왜 날 불렀을까?’
짐작 가는 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곽준방은 속단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처럼 세상이 뒤숭숭할 때일수록 중심을 확고하게 잡고 있어야 한다.
잠깐 지체한 후 곽준방 일행의 입성이 허락되었다. 아무리 호윤천 일가가 엄명을 내렸다고 해도 일개 수문장이 막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내성으로 들어선 곽준방은 곧장 적금각으로 향했다. 원래는 집무창에 들러 대장군인 호유진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게 순서였지만, 무시해 버렸다. 이걸로 트집을 잡는다면 그땐 정말 실력 행사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내성엔 그래도 호윤천 일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곽준방을 보자 모두 예를 갖추기 급급할 뿐 누구도 제지를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곧바로 드시라는 분부십니다.”
이미 말은 내성에 들 때 모두 내린 뒤였다. 도보로 도착한 적금각 입구에 있던 장수가 곽준방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곽준방의 미간에 또렷한 주름이 그려졌다. 무장이 이처럼 속삭인다는 건 누군가를 꺼려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호윤천, 이자가……?’
한동안 와 보지 않은 사이 호윤천 일가가 야망의 그늘을 더욱 자욱하게 드리우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마용승의 후계자인 마국립이 사는 이 적금각에까지 말이다.
“수행은 되도록 적은 인원을…….”
“알겠네.”
곽준방은 나머지 부하들을 모두 남기고, 우효금과 구문생만을 대동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아니면 여기서 밤을 새웠는지 수척해진 얼굴로 윤 대부인은 곽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가 대부인을 뵈옵니다.”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입구 근처에서 곽준방은 정중한 군례를 갖췄다. 평소라면 이런 만남 자체가 허용되지 않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 곽 장군, 이리 가까이 오세요.”
윤 대부인은 반갑게 맞았다. 나이야 곽준방보다 어리지만, 마용승의 정실로 긴 세월을 보내면서 닦인 위엄이 저절로 묻어나는 언행이었다.
“황송하옵니다.”
다시 한 번 예를 갖춘 후 곽준방은 윤 대부인 가까이 다가갔다. 마국립은 아직 자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장, 대부인의 존안을 우러러 뵙게 되니 감개가…….”
“인사는 그만 거두시고 어서 앉으세요.”
윤 대부인은 예를 갖추는 곽준방을 제지하며 탁자 앞에 앉기를 권했다.
“하온데 어인 일로 소장을 부르셨나이까?”
곽준방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아무래도 윤 대부인과 한방에 있다는 게 거북했기 때문이다.
윤 대부인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곽 장군,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나요?”
“예?”
의아한 눈빛으로 곽준방은 윤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이건 너무나도 의외인 얘기였다.
“들으신 대로예요. 조천성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나요?”
“대체, 대체 군사들은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시는지요?”
곽준방의 질문에 윤 대부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병사의 숫자를 알기 전에는 말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일만의 병사들이 상주하고 있사옵니다.”
“최대한으로 모으면 얼마까지 가능할까요?”
“무리를 한다면 삼만까지는…….”
“지금 곧바로 조천성으로 돌아가 병사들을 모아 주세요. 준비가 되는 대로 다시 이 영욱성으로 나와 우리 모자를 지켜 주세요.”
윤 대부인의 말끝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 어쩌면 울음을 삼키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곽준방으로선 윤 대부인의 상태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방금 들었던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였나?’
마국립을 앞세워 호윤천 일가가 전횡을 일삼고 있다는 건 곽준방도 익히 알고 있었고, 그 꼴이 보기 싫어 지금껏 영욱성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참은 것도 순전히 마국립의 안전을 염려해서였다. 호윤천이 어떤 짓을 하든 진남후의 후계자만 무사히 자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윤 대부인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와 저들 모자를 지켜 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삼만의 병사를 모으세요, 곽 장군. 그에 대한 비용은 이 몸이…….”
“비용은 염려 마시옵소서. 하오나 호 대장군이 과연 조천성의 병력을 영욱성에 들이려고 할는지요?”
“그 점은 염려하지 마세요. 곽 장군이 오실 때쯤 안에서 우리들도 호응하겠어요.”
“그러면 안심이옵니다만…….”
곽준방은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리 안에서 호응해서 성문을 열어 준다고 해도, 물경 삼만에 이르는 대군이다. 그들이 영욱성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면 호윤천 부자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땐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과연 공자를 무사히 지킬 수 있을지…….’
바로 이게 곽준방의 걱정이었다. 공성전이 됐건, 아니면 성내에서 시가전을 벌이건 간에 마국립 모자의 안전은 바람 앞의 등불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윤 대부인은 아직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곽준방의 삼만 대군이 영욱성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안심할 수 있다는 눈치였다.
‘차라리 이분들을 조천성으로 모신다면?’
마국립 모자의 안전만을 생각한다면 그게 가장 최선일지도 모른다. 물론 영욱성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하지만, 오늘 거느리고 온 부하들의 실력이라면 그 일은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작 문제는 그다음이다. 누가 뭐래도 영욱성은 대륙의 서쪽을 지배하는 주성主成이자 주도主都이다. 진남후를 계승할 마국립이 여길 떠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천생 군사를 동원할 수밖에 없겠군. 그 뒤의 일은 하늘에 맡기자.’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게다가 여긴 적보다 더 엉큼한 호윤천 부자가 도사리고 있는 영욱성이다. 비록 오백의 용맹한 부하를 거느리고 왔지만 조속히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럼 소장은 이만 물러가 명을 봉행하오리다.”
“오, 서둘러 주세요.”
윤 대부인도 굳이 곽준방을 말리지 않았다. 뭔가를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곽준방도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제야 윤 대부인이 왜 사람이나 밀서로 명을 내리지 않고 자신을 직접 불렀는지 절실히 깨달은 탓이었다.
‘이 적금각에도 호윤천의 밀정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구나.’
새삼스럽게 곽준방은 적금각 내부를 둘러보았다. 여기까지 밀정이 스며들어 있다면 시간이 촉급하다는 얘기다. 조속히 군을 동원해 와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소장은 이대로 하직을 고하겠사옵니다. 다시 뵐 때까지 부디 옥체 보중하시기를.”
“서둘러 주세요, 곽 장군.”
“구 장군은 병사 삼백과 여기에 남아 윤 대부인과 공자의 신변을 지키도록 하게.”
곽준방은 일부러 윤 대부인이 듣는 데서 구문생에게 명을 내렸다. 그래야 측근에서 경호를 해도 서로가 부담이 적을 터였다.
“존명.”
복명을 하자마자 구문생은 그대로 윤 대부인 뒤에 가 섰다. 다른 명령이 없는 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다시 한 번 윤 대부인에게 목례를 갖춘 후 곽준방은 밖으로 나갔다.
“오늘 수행한 병사들 중 정예들로만 삼백을 뽑아 구 장군과 함께 남기도록 하게.”
그 명을 듣는 우효금의 입가엔 살짝 미소가 돌았다. 다시 뽑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저들 오백은 조천성의 최정예들이다. 아무나 지목해도 된다는 의미였다.
적금각 밖에 이른 두 사람이 병사들을 수배하고 있을 때 장수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외쳤다.
“대장군의 명이오! 곽 장군은 당장 대장군부로 오시라는 전갈이오!”
그 말을 들은 곽준방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마주치기 싫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과 젊은 호유진이 감히 자신을 오라 가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뿐, 곽준방은 그대로 말에 훌쩍 올랐다.
“조천성에서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으니 오늘은 이대로 물러간다고 전하라.”
“하지만 대장군의 명은 지엄했습니다. 명도 없이 군사를 이끌고 이 성에 난입한 것도…….”
“난입이라니? 말이 지나치다! 그대의 눈엔 우리가 폭병으로 보이는가?”
곽준방의 입에서 대뜸 노갈이 터져 나왔다. 비록 나이는 들었다지만 한평생 장수로 살아온 그였다. 호통을 지르자 그건 그대로 주변을 압도하는 위엄이 되었다.
“하, 하지만 대, 대장군께서…….”
“대장군에겐 이렇게 일러라. 조천성에 급변이 생겨 우린 먼저 간다고. 그리고 혹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구문생 장군을 남겨 두고 가니, 연락할 일이 있거든 그를 통해서 하라고 해라. 그렇게 얘기하면 알아들을 게다.”
그 말을 끝으로 곽준방은 그대로 말을 몰았다. 이백의 군사가 뒤를 따랐고, 남은 삼백은 호유진의 전갈을 가져온 장수를 포위하듯 둘러싸 버렸다.
그 속에서 곽준방은 말을 달렸다. 호유진이 결코 자신들을 곱게 돌려보내 줄 리 만무하다. 최악의 경우 무력으로 성문을 돌파하게 될지도 모른다.
“구 장군이 걱정됩니다. 차라리 소장이 남을걸.”
말을 가까이 붙이며 우효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신들이 이대로 영욱성을 떠나 버리면, 남은 구문생의 고초가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구 장군은 잘해 낼 걸세.”
아닌 게 아니라 곽준방은 구문생을 신뢰하고 있었다. 우효금이라면 그 성격상 자칫 호윤천 부자와 정면으로 충돌할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그라면 그처럼 극단적인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터였다.
“성문이 보입니다. 우릴 막을 기세 같은데 그대로 돌파를 하시렵니까?”
“말할 것도 없는 일!”
성문에 병사들이 도열하는 걸 본 우효금이 묻자, 곽준방은 잘라서 대답했다. 저 문을 돌파하게 되면 지금부턴 싫어도 호윤천과는 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난세가 갖는 또 다른 아픔의 한 단면이었다.
“서시오! 대장군의 엄명… 어억!”
곽준방 일행을 막아서려던 수문 장수가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성을 빠져나온 후 곽준방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3
서녘 하늘을 검붉게 불 싸지르는 노을과 함께 그날 전투는 끝났다.
두건득에게 전장에 남아 있는 부상자들과 아군의 시신들을 수습하라고 명한 후 편월은 진막을 빠져나와 말에 올랐다.
“어딜 가십니까? 이제 곧 저녁이 나올 텐데.”
“밥은 백월대에서 먹기로 하지.”
“주군께서 백월대로 가신다! 모두 준비를…….”
“쉿! 맹 장군과 둘이서만 가자.”
근위대에 명을 내리려는 맹아를 편월이 황급히 제지했다. 정말이지 조용히 가고 싶었다.
“안 될 말입니다. 주군께서 가시는 곳엔 우리 근위대가 늘 함께해야 합니다.”
맹아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는 송지와 담개 같은 노장들에게서 번번이 꾸중을 듣고 있던 참이었다.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전투 시 편월을 최선두로 내세우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데 만약 편월을 혼자 보낸다면 두 노장은 또다시 길길이 날뛸 게 분명하다. 그게 아무리 아군인 백월대의 진지라고 해도 말이다.
“이건 강 장군을 조용히 만나기 위한 방문이야. 괜한 호들갑 떨 것 없어.”
“주군은 이제 대장군이 아니오. 장수를 만나실 일이 있으면 부르면 될 게요. 직접 가실 게 아니라.”
“다른 때라면 불러도 되겠지. 하지만 오늘은 내가 찾아가고 싶다. 그러니 조용히 따라오든가 아니면 여기 남아.”
편월의 어조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 나왔다. 이럴 땐 정말 주군이라는 직위와 호칭이 싫었다.
맹아는 재빨리 소질풍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안 그러면 편월이 금방이라도 말을 달릴 것만 같아서였다.
“기어이 가시겠다는 거요?”
“그래. 그러니 혼자라도 따라오려거든 아무 말 말고 따르고, 아니면 여기 남아.”
“알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말해 놓고 맹아는 급히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와중에 근위대원 한 명에게 은밀히 편월의 행선지를 일러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편월도 맹아까지 떼어 놓고 갈 생각은 없었나 보다.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말이 다가오자 비로소 소질풍의 옆구리를 가볍게 걷어찼다.
두 필의 말은 발밑으로 드리워지기 시작한 어둠을 깨뜨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만났던 몇 차례 수하는 맹아가 대신했다. 편월이 이처럼 단출하게 백월대로 향하는 걸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서라. 창천蒼天.”
“현지玄地.”
백월대의 경계병이 긴장된 목소리로 수하를 해 왔고, 맹아가 즉각 대답했다.
“근위대장이다. 강 장군은?”
맹아는 서둘러 물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볼일을 마치고 본대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진막에 계십니다.”
경계병이 대답했을 땐 편월과 맹아의 말은 그 자리를 출발한 뒤였다.
경계병의 말과 달리 강숙은 진막에 있지 않았다. 밖에 피워 둔 화톳불가에 의자를 갖다 놓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강숙이 모두 물러가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두 필의 말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냈지만, 강숙은 돌아보지 않았다. 혹 부하들 중에서 누군가 왔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강 장군, 주군께서 오셨소.”
맹아가 낮지만 힘찬 어조로 말했고, 그제야 강숙은 고개를 돌려 편월을 올려다보았다.
“주군…….”
마치 이상한 물건을 보는 듯한 강숙의 표정과 말투였다. 그러다 벌떡 일어서 군례를 갖추며 한 걸음 비켜섰다.
“앉으시오.”
강숙이 앉아 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며, 편월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 말에 따라 맹아와 강숙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편월은 말이 없었다. 그저 어둠 저쪽에 마치 섬처럼 떠 있는 합진성의 불빛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쉬었으니 내일은 백월대가 힘을 써야 되지 않겠소?”
정적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맹아가 강숙에게 말을 붙였다. 약간의 불만을 띤 음색이었다.
사실 맹아에게 있어 강숙은 특별한 존재였다. 막주전 때 너무 용맹하게 싸운다고 늘 타박을 받았던 자신에겐 거울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강숙은 전혀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싸움은 물론이거니와 매사에 전혀 의욕이 없어 보였다.
역시 이번에도 강숙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화톳불만 쑤석거리고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강 장군, 백월대는 우리 위휘군의 선봉 부대요. 그런데 장군께서 이렇게 맥이 없으면 어떡하겠다는 거요?”
맹아의 음성이 조금 높아졌다. 성질 같아서는 예전처럼 형이라 부르며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는 위치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강숙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맹아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나는 왜 싸우는지 모르고 싸웠었지.”
돌연 편월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합진성에 고정된 채라 두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건 죽음이었던 같아. 바로 눈앞에서 목이 잘렸지. 그게 내 기억의 첫 번째야.”
처음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두 사람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자신들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비록 전장에서 뒹굴고 있지만, 병사들 누구를 잡고 물어도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 한 조각쯤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편월에겐 그런 게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난세라지만, 세상에서의 첫 기억이 목 잘려 죽은 시체라는 건 또 얼마나 무참한가 말이다.
“그때부터였을 거야. 광운이 내게 어떤 경우든 살아야만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던 건.”
편월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밤이 아니고 주변에 병사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면 두 사람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편월이 입을 열 때마다 전신을 긴장시켰다. 주군이라는 직책을 떠나서, 자신들보다 훨씬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한 인간의 얘기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난 광운의 말에 따랐지.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오직 살기 위해 싸웠지. 이건 얼마 전부터 떠오른 생각인데, 난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거든. 그러면서 오늘도 이 전장에서 밤을 맞고 있지.”
화르륵!
바람이 불었는지 화톳불이 거세지며 사방으로 불똥을 흩날렸다.
패앵!
돌연 맹아가 세차게 코를 풀었다. 밤이 서서히 그 특유의 냉기를 머금기 시작했지만 콧물이 흐를 정도는 아니었다.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재미있는 건 아주 최근에야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 왜 싸워야 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거야.”
“왜 싸우시는 거유?”
맹아가 불쑥 물었다. 목이 잔뜩 잠겨 있어 쇳소리가 났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편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죽영이라고 있어. 눈 밑에 늘 눈물 한 방울을 매달고 사는 사람이지.”
나도 안다고 맹아는 말하고 싶었다. 그 역시 정허군이 출동하기 전에 죽영루에서 한때 신세를 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맹아가 기억하는 죽영은 늘 웃는 얼굴이었다. 편월의 말과 달리 슬픈 기색은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맹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편월이 자신보다 죽영과 더 친밀하다는 걸 아는 까닭에서였다.
“어릴 때의 난 그게 궁금했지. 왜 매일 울고만 있을까, 하고. 막상 물으면 또 환하게 웃으니 나로선 도무지 알 수 없었어. 그런데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바로 내가 치르고 있는 이 전쟁이 그 사람의 눈에 항상 물기를 가득 채우는 거였어.”
“어디 그분뿐이우? 유화 누님은 어떻고.”
맹아가 또 끼어들었다. 편월이 증두신의 딸과 혼인하겠다고 선언한 이후로 틈만 나면 유화의 얘기를 꺼내곤 했다. 혹시 잊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래. 유화도 있지. 처음엔 예쁘장한 여자 애가 와서 좋기만 했어.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유화가 어떻게 죽영루에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지. 그 역시 이 전쟁 때문이야.”
툭, 투둑!
강숙이 화톳불에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불똥이 다시 날렸고, 이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밤 벌레들이 후두둑, 후두둑 소리를 내며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래서 난 싸우고 있는 거야.”
“예?”
얘기 자체가 너무 비약적이었기에 맹아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여전히 깊숙이 잠긴 채 풀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나는 최근에야 결심했어. 그 두 사람의 눈에 다시는 눈물 따윈 보이지 않게 하겠다고. 그러자면 이 전쟁이 없어져야겠지. 그때까지 싸울 거야. 이 세상에서 전쟁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편월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담담했다.
하지만 듣고 있는 두 사람은 그렇지가 못했다. 편월은 죽영과 유화를 예로 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야말로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이미 죽어 버린 모체의 태를 끊고 태어났고, 그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건 목 잘려 죽은 시신이었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이 더 이상 울지 않게 되면,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눈물 흘리고 있을 누군가도 웃을 수 있게 되겠지. 그때까지는 누가 뭐래도 난 싸울 거야.”
패앵!
다시 한 번 맹아가 코를 풀었고, 강숙은 또 한 무더기 장작을 불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내일 선봉은 우리 백월대의 몫이오. 반드시 합진성의 동문을 깨뜨려 보이겠소.”
“웬일이우? 지금까지 털 뽑힌 닭처럼 의기소침해 있더니, 갑자기 무슨 용기가 생겨서?”
맹아가 비아냥거렸지만 강숙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합진성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 눈엔, 강한 의지의 빛이 일렁거렸다.
‘전쟁을 없애기 위한 싸움이라면…….’
싸우고 또 싸워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강숙 자신도 이 난세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땅이 황폐해져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주린 배를 참지 못하고 잡가군에 지원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최대의 가해자였던 이 빌어먹을 전쟁을 없앨 수만 있다면,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무력감이나 허탈감 따위는 얼마든지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강숙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또 한 뼘 성장을 한 셈이었다. 바로 이게 명분을 가지고 싸우는 자와 그러지 못한 자의 차이기도 했다.
강숙이 입을 연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맹 장군, 방금 주군의 말씀은 근위대가 나서 전군에 퍼뜨리는 게 좋을 것 같군. 우리가 세울 휘국의 목표가 이 개 같은 전국난세를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병사들도 더욱 힘을 내서 싸울 테니까.”
그 말에 맹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편월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되냐?’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편월은 말이 없었다. 여전히 소나기 같은 소리를 내면서 불길 속으로 제 몸을 던지는 불나방의 최후를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좋아. 우리 근위대는 아예 깃발에 ‘난세종식’이라고 써넣어야지.”
“배가 고프군.”
한술 더 뜨는 맹아의 말끝을 이어 편월이 입을 열었다. 여태 식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먹지 않고 있던 참이오. 곧 준비를 시킬 테니 들어가 기다리시오.”
강숙의 말에 편월은 순순히 진막 안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자신의 얘기를 한 게 멋쩍어서일지도 모른다.
“울었나, 맹 장군?”
“우, 울긴 누가 울었다고…….”
“괜찮네. 나도 한순간 울컥했던 적이 있으니까.”
펄쩍 뛰며 부정하는 맹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강숙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병사들을 불렀다. 물론 식사를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사실일 것 같소?”
“뭐가?”
“주군께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울지 않으셨다는 말이.”
“글쎄, 나도 이해가 되진 않지만 광운 장군께선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네.”
“정말 묘하군. 어떻게 살면서 한 번도 울지 않을 수 있지?”
“나도 그 점이 이상하네. 갓 태어난 아이가 울지 않으면 숨을 못 쉬어 죽는다고 아는데, 광운 장군의 말에 따르면 주군은 태를 끊는 그 순간에도 울지 않았다고 하니…….”
맹아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도, 강숙 역시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는 것과는 너무 다른 편월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상한 사람이야, 우리 주군은.”
비교적 젊은 맹아는 그렇게 간단히 치부해 버렸지만, 강숙은 조금 달랐다. 이상하다는 건 어딘가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얘기고, 그 비정상적인 사람의 앞길에 어떤 풍운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일단 배부터 채웁시다. 내일도 식전부터 공격하려면 저녁을 든든히 먹어 둬야 하니까.”
맹아의 말에 강숙이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병사들이 음식을 날라 오고 있었다.
* * *
광운은 밤을 도와 흑암성을 빠져나왔다. 소위 서방정변이 일어난 지 삼 년을 넘기고 있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막주로 돌아가고 있는 길이었다.
행렬은 단출했다. 기병 백여 명과 마차 한 대가 전부였다. 흑암성의 남문을 빠져나오면 바로 막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보급망 확충과 병력 충원의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순전히 죽영 때문이었다. 그동안 계속된 광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리하게 일했다. 그게 화근이 되어 마침내 쓰러져 버렸고, 좀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나질 못하게 되었다.
광운과 유화가 정성을 다해 간호를 했지만 흑암성 자체가 치열한 격전지다. 아무래도 병자를 두기엔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광운은 죽영과 유화만 침사성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편이 싸우고 있는 자신이나 병자에게 모두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죽영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더 이상은 광운과 떨어지기 싫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그녀에게, 광운도 혼자 가라고 강요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상림호가 광운에게 막주 시찰을 제의했다. 지원군으로 와 버린 수군이 그 뒤에도 잘 양성되고 있는지, 또 배들의 건조는 어느 정도 되었는지, 그리고 보급과 병력의 확충 방안을 검토해 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광운은 펄쩍 뛰었다. 아무리 죽영이 중요해도, 코앞에 적을 두고 물러설 성격이 아니었다.
결국 상림호를 비롯한 전 장수들이 나섰다. 아니, 하급 장졸들까지도 죽영의 상태를 염려했다. 그만큼 병사들의 뇌리엔 그녀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쯤 되자 광운도 어쩔 수 없었다. 더 이상의 고집을 부린다는 건 상림호를 믿지 못해 흑암성을 비우지 못한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그래서는 상림호에게 미안한 노릇인지라 광운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번엔 죽영이 반대였다. 아파 누워 있는 것도 죄스러운데, 광운의 손발까지 묶어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한사코 곁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고만 했다.
그때 광운은 불현듯 ‘혹시?’ 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죽영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는 얘기다.
아무튼 광운은 자신이 막주로 가야만 될 당위성을 설명했고, 간신히 죽영을 설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이 한밤중의 출발이었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광운의 표정은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물론 지금 뒤따르는 마차에 누워 있을 죽영 때문이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편월을 찾았다고?’
이건 유화가 해 준 말이었다. 죽영이 혼수상태에서 편월의 이름을 불렀던 모양이다.
그 점이 또 한 번 광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편월에 대한 가장 최근의 소식은 이천강을 사이에 두고 윤주와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호윤천 일가와 맞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었다.
그런 편월을 죽영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불렀다는 건, 자신이 그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것처럼 광운은 느껴졌다.
광운은 뒤에 따라오는 마차를 흘낏 돌아보았다.
‘어떡하든 다시 일어나도록 하시오. 편월은 그리 약한 아이가 아니니 당신이 건강하기만 하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이건 일말의 가식도 없는 사실이었다. 편월은 광운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강하게 성장했다.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어디서 뭘 하든 결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터였다.
‘만약 죽영이 어떻게 된다면?’
문득 떠오른 생각에 광운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죽영이 잘못된다면 과연 편월이 어떤 행동을 할까? 그걸 생각만 해도 목덜미가 선뜩해지는 광운이었다.
말로 표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편월은 죽영에게서 ‘엄마’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판국에 만약 죽영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편월은 자신을 원망할 게 틀림없다. 그때 그걸 감당해 낼 자신이 광운에게는 없었다.
돌연 광운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불길한 생각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 후론 오직 달리는 데만 열중하는 광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