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월 6
휘군창설輝軍創設
1
윤주성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호윤천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지금껏 서방정변을 진압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 더욱 넋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선 마국립의 이름으로 문책사를 파견했다. 내용은 진남후인 마씨가 지배하는 땅을 무력으로 찬탈했으니 당장 병력을 거두고, 그 수괴인 편월은 영욱성으로 와서 처벌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편월이 그걸 고분고분 받아들이리라는 달콤한 생각 따윈 호윤천 부자에겐 없었다. 다만 문책사를 보냄으로써 정허군이 진남후에게 반기를 든 반도라는 걸 천하에 알리고자 함이었다.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당장 윤주에 산재한 세 개 성에 동원령을 내렸고, 그 이웃한 건주에는 호윤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항려恒麗에게 군사적 전권을 위임해 급파했다.
한편으론 황실에 대한 공작도 더욱 줄기차게 시도했다. 중간에 가겸후가 방해를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보다 은밀하고 치밀하게 황제와 직접 끈이 닿을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는 중이었다.
그 일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 호윤천에겐 한 가지 소득이 있었다. 바로 상국相國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자신이 꿰찬 것이었다.
이게 시사하는 바는 작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호윤천 부자는 명실 공히 파양주 전체를 쥐고 흔들게 되었다. 아비인 호윤천은 안에서 직접 마국립과 윤 대부인을 압박할 수 있고, 아들인 호유진은 대장군으로서 병권을 쥐고 실질적인 힘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호윤천의 마음을 조금도 편하게 해 주지 못했다. 안에선 아직도 윤 대부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고, 밖에선 광운과 편월이 들쑤시고 있다. 아직은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볼 수 없지만, 결코 좌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이 커진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에 한 가지 고민이 더 호윤천을 덮쳐 왔다. 바로 아들인 호유진의 문제였고, 그걸 질책하기 위해 지금 대장군부로 가마를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호윤천의 기분이 다시 일그러진 건 집무창의 정문을 지날 때였다. 의당 가마를 세우고 수하를 해야 하건만, 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그저 군례를 갖추기에 급급했다. 사기가 어느 정도인지 극명하게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수문 위사들에게 한마디 하려고 가마를 세웠던 호윤천은, 그러나 생각을 고친 듯 다시 출발시켰다. 장수나 병사 한둘을 질타해 봐야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은 탓이었다.
대장군부에 들어선 호윤천의 기분은 더욱 엉망이 되고 말았다. 입구에까지 음악과 질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오늘도 호유진은 술과 향락에 젖어 있음이 분명했다.
“이놈을!”
호윤천은 재빨리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여기서도 장수나 병사들은 그저 장식품처럼 서 있을 뿐, 누구 하나 용무를 물어보는 자는 없었다.
호유진이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호윤천은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방탕도 이런 방탕이 없었다. 한 구석을 가린 휘장 뒤에선 연방 음탕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어디서 불러들였는지 시중드는 여자들은 모두 발가벗은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 아들인 호유진과 십여 명의 장수들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중요한 부분만 가린 차림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호윤천으로선 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 숨을 곳을 찾았고, 장수들은 반라의 몸으로 그 자리에 부복했다.
“아, 아버님…….”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잔뜩 꼬부라진 혀로 호유진은 호윤천을 불렀다.
“네 이노옴!”
재차 언성을 높이던 호윤천은 다음 순간 뜨끔해서 입을 닫았다. 여기 있는 사람은 비단 자신과 호유진만이 아니다. 다른 장수들과 여자들도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아들을 나무라는 건 삼가야만 할 일이었다.
“꼴 보기 싫다! 다들 물러가라!”
우선 호윤천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부터 물리쳤다. 아들을 나무라는 건 그 후에 할 작정이었다.
“아버님…….”
마치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것처럼 호유진은 아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일어서라. 파양주 대장군의 무릎은 그리 쉽게 꺾여서는 안 된다.”
속마음과 달리 호윤천의 어조는 의외다 싶을 만큼 부드러웠다. 이 역시 지금 물러가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한 탓이었다.
“대체 왜 이러느냐? 지금 서방정변은 하루가 다르게 불길이 커지고 있고, 윤주성까지 떨어졌다는 걸 몰라서 이러느냐?”
“아, 알고 있습니다.”
“아는 놈이 여태 그 계집을 잊지 못해서 부하 장수들에게 이런 못난 꼴을 보이느냐?”
“하, 하오나…….”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느냐? 그년은 고작 자객으로 키워졌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처럼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니!”
기어이 호윤천은 노성을 터뜨리며 아들인 호유진의 뺨을 강하게 쥐고 흔들었다.
이들이 말하는 그 ‘계집’이란 다름 아닌 한때 마용승의 첩으로 있다가 그를 죽이고 달아난 기씨 부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 여자를 잊지 못해 호유진은 이처럼 방탕한 생활에 빠져 든 것이다.
그게 호윤천은 같잖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아들의 젊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너무 가까이 뒀다는 자괴감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호유진을 마음껏 질타할 수도 없었다. 자기반성에 겹쳐 하나뿐인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생에 걸쳐 추구했던 일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걸 이어 갈 아들을 한때의 방탕을 탓하며 질책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틀이다! 그 안에 대장군부를 예전의 모습으로 돌려놓도록 해라. 불러온 계집들도 모두 내보내고. 그때 다시 점검해서 그래도 군기가 해이한 곳이 있으면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문책을 하겠다.”
실은 이 말을 하려고 호윤천이 대장군부까지 온 건 아니었다. 아들의 상태가 도저히 다른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오늘은 이만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들놈이 속히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호윤천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방정변과 윤주성이 떨어진 건 당혹스러웠지만, 이건 한편으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마용승의 진남후 직을 이은 마국립의 무능력을 만천하에 내보였으니까.
그렇게 되면 역시 문제는 아들인 호유진이었다. 계속 저런 꼴을 보인다면 파양주의 무장들도 머지않아 등을 돌릴 것이고, 그건 앞으로의 일에 지대한 차질을 빚게 된다. 아직은 힘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난세니까 말이다.
만약 모레까지 호유진이 저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어딘가에 격리라도 시킬 결심이 호윤천의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며, 명심 하, 하겠습니다. 아버님.”
호유진이 간신히 대답하는 걸 듣고서야 호윤천은 그때까지 움켜쥐고 있던 아들의 볼을 놓았다.
징, 지잉, 징!
돌연 아릿하게 징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집무창의 정문에서 나는 것으로, 또 어딘가 전장에서 전령이 왔다는 의미였다.
호윤천은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연무장에서 직접 그 전령을 만날 생각이었다.
* * *
윤주성에 입성한 이후로, 편월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처음부터 동조해 줬던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정작 힘들었던 건 윤주성에 딸린 농경지 및 백성들의 생업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중요한 일이다. 그 점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세미를 비롯해서 각종 조세를 부가할 수가 없다. 탄금성처럼 빌려 든 성이 아니니, 이 일을 최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병사들의 숫자도 부쩍 늘었다. 윤주성의 병력 중 투항한 자들 대부분이 정허군에 종군하길 원했고, 그 바람에 강국의 지원군 오천을 빼더라도 그럭저럭 일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병력이 늘었다는 건 단순히 전력만 강화되었다는 차원에서 바라봐선 안 된다. 거기에 맞게 새로 부대를 재편성하고, 기존의 병사들과 손발을 맞춰 보는 훈련도 필요하게 된다.
장수들의 이동도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부대야 따로 신설할 것도 없이 기존의 다섯 부대에 병사들을 보충시키면 된다. 하지만 늘어난 인원을 보다 적절하게 통제하려면 그에 맞춰 지휘관들도 늘려야만 한다.
이 경우 가장 걸리는 건 역시 투항한 장수들이다. 적어도 한 부대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기존 장군들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에 불만이라도 품게 되면 그야말로 전군의 결속력이 흩어질지도 모른다.
‘그 문제는 각 장수들에게 맡겨 둘 수밖에 없겠고, 문제는 사 장군인데…….’
기실 사문기의 불만은 편월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는 문제였다. 특히 그는 증두신의 딸과 혼약이 결정된 이후론 작전 회의상에나 겨우 얼굴을 내밀고 있을 뿐, 자신을 극력 피하는 기색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는 노릇인지라, 오늘은 담개와 송지를 불러 같이 그 문제를 의논하는 중이었다.
“사 장군의 심정이야 익히 짐작이 가지만, 장수가 그처럼 개인감정에 휘둘린다는 것도 문제요. 그러니 우선 사 장군부터 질책하는 게 순서일 듯하오.”
담개는 먼저 사문기의 태도부터 문제 삼았다. 확실히 정규군 출신다운 말이었다.
편월과 송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치야 그렇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논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감정의 지배를 더 많이 받을지도 모른다. 험한 세상에서 무장으로 크고 작은 전쟁에 참가하다 보면 심성은 더욱 거칠어만 진다. 그걸 다독일 수 있는 인정과 현실적인 이득도 함께 챙겨 줘야만 한다.
“왜 입들을 닫고 계시오? 내 말에 무슨 하자라도 있소이까?”
“담 장군의 말씀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지금 사 장군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걸 나라고 왜 모르겠소? 그렇지만 그렇게 육친의 원수만을 갚자고 설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장수와 군대는 흉군이나 폭병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래서야 전쟁 자체의 의미가 애당초 사라져 버리고 마오. 그따위 전쟁은 나라면 하지 않겠소!”
담개의 말은 점차 과격해졌다. 대부분이 잡가군 출신인 정허군 내에서 정규군 출신 장수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사문기도 그중 한 명이니, 보다 모범적인 태도를 보여 줬으면 싶었다.
편월과 송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명분 없는 전쟁에 병사들을 몰아넣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장수로서 취할 바가 못 된다.
“이 문제는 역시 대장군께서 푸셔야 될 것 같소이다. 증두신의 딸과 혼인을 하겠다고 하셨을 땐, 나름대로의 각오가 계셨을 거 아니오. 우린 군인이니, 대장군의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
이건 송지의 말이었다. 자칫 길어질지도 모르는 얘기를 조속히 매듭짓고 싶었다. 그는 또 다른 중요한 용건을 편월에게 말하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내 생각으론 이 윤주성을 사 장군에게 주면 어떨까 싶소이다. 이번에 투항한 병사들 일부를 붙여서.”
“뭐요?”
“그, 그렇게까지나?”
대경실색해서 눈을 부릅뜬 건 담개였고, 송지 역시 너무 파격적인 편월의 말에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게다가 송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윤주성을 손에 넣음으로써 생긴 발상이었다. 그걸 사문기에게 준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선뜻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의 입으로 편월의 명에 따르겠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담개는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사문기의 태도부터 고치는 걸 주장했으니까 말이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이제 겨우 서쪽으로 향하는 발판을 마련했는데, 사 장군에게 그걸 줘서 어쩌겠다는 거요? 설마 대장군은 앞으로 장인이 될 증두신에게 창끝을 겨냥하겠다는 건 아니시겠지?”
“내가 강국과 싸운다면 가장 좋아할 사람은 사 장군일 테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그를 달래기 위해 윤주성을 주겠다는 거요.”
“강국과 싸우지 않겠다는 대장군의 뜻은 잘 알겠소.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소장도 찬성할 수 없소이다.”
편월의 말에 이어 반대의 뜻을 비친 건 송지였다.
“옳거니! 송 군감도 소장과 같은 생각이구려. 자, 이래도 계속 고집을 부리시겠소?”
송지까지 자신과 뜻을 같이하자, 담개의 목소리는 저절로 높아졌다.
“앞으로도 우린 계속 싸울 거고, 이렇게 성을 하나씩 차지할 때마다 내가 모두 지킬 수는 없지 않겠소. 누군가를 주둔시켜야 하고, 그걸 미리 앞당기자는 얘기요. 그게 사 장군이라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윤주성과 탄금성은 지척지간이오. 누구에게 상주시킬 필요 없이 교대로 지키게 해도 충분하오.”
사실이 그랬다. 국경 지대에 있는 성들인지라 거리가 비교적 가까웠다. 윤주성과 탄금성은 제운교를 사이에 뒀고, 또 괘공교를 건너면 곧바로 대인성이다. 따로 장수를 주둔시켜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얘기다.
담개는 더욱 언성을 높였지만, 편월의 말을 들은 송지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계속 싸울 거라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오늘 자신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과도 지대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뜻을 밝혔소. 그게 안 된다면 나로선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두 분 노장들께서 알아서 하시오.”
“이건 또 무슨 말씀이오? 대체 사 장군이 누구의 부하요? 부하의 잘못된 태도를 꾸짖는 건 의당 대장군의 몫이오. 다른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외다!”
말하는 담개의 얼굴은 온통 노기로 가득 찼다. 수염과 머리카락까지 뻣뻣하게 곤두선 것처럼 보여, 저러다 칼을 뽑아 들지나 않을까 하고, 보는 송지는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송지는 담개를 말리지 않았다. 하나의 성을 누구에게 준다는 건 사실적으로 독립을 인정하는 거나 비슷하다. 그러니 식읍 이십만에 가까워 탄금성보다 더 윤택하다고 할 수 있는 윤주성을 사문기에게 준다는 건 아직은 안 될 말이다. 그걸 발판으로 해서 그는 틀림없이 강국을 칠 병사들을 일으킬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지금 정허군은 예전보다 사정이 더 열악해진 상황이다. 거의 배 가까이 불어난 병사들을 먹여 살리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사 장군의 문제는 일단 더 두고 보기로 합시다. 이 자리에서 얘기해 봐야 결론은 없고 우리끼리의 감정만 상할 우려도 없지 않으니…….”
송지는 우선 잔뜩 흥분해 있는 담개부터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더욱이 지금은 우리끼리의 내분이 될 수도 있는 일은 극력 피해야만 할 때요. 간인들의 보고에 의하면 이 윤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다른 성에서 병력이 출발했다니까, 그걸 어떻게 막을지부터 고심해야만 하오.”
“크흠!”
침음성을 토하는 담개의 얼굴에서 서서히 노기가 거둬졌다. 송지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윤주의 다른 성에선 연일 병사들을 모으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이건 나잇값도 못하고 소장이 너무 흥분했던 것 같소이다. 그럼 이대로 작전 회의를 진행하시겠소이까, 아니면 다른 무장들을 불러서…….”
“정식 작전 회의를 열기 전에 소장이 한 말씀 드릴까 하오. 우리 정허군은 진남후인 마용승 공에 의해 창설된 부대요. 그런데 지금 우린 다름 아닌 파양주와 싸우고 있소. 이유야 어쨌든 말이오.”
편월과 담개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눈앞에 적이 있으니까 싸운다는 식이었지, 송지와 같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송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한 군을 대표하는 이름에는, 그 속성까지 포함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린 앞으로도 계속 파양주와 싸워야 될 것이오. 그 대상이야 물론 호윤천이고, 이건 사주에서 분전하고 계시는 광운 장군에 대한 도리이기도 하오.”
“송 장군의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이 몸은 나잇값을 하지 못한 것 같소이다. 작은 일에 연연해 큰 것을 놓치고 있었으니. 밖에서 적을 맞는다면 당분간 사 장군도 어쩔 수 없을 것이오. 그러니 지금은 공격해 올 적을 막을 방도부터 강구하는 게 급선무요.”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우리도 나라를 하나 세워 보는 게 어떻겠소? 이 윤주성과 탄금성의 식읍을 합치면 족히 삼십만 호는 넘을 것 같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닐 듯하오만…….”
송지는 말꼬리를 흐렸다. 혼자서는 많은 생각을 거듭했지만, 아무래도 나라를 세운다는 건 너무 엄청난 얘기였다. 당장 군대를 운영하는 것과는 천양지차니까 말이다.
당연히 두 사람은 송지의 말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중 담개가 먼저 입을 연 건 그래도 편월보다 오래 산 세월의 관록이었다.
“소, 송 군감. 나, 나라를 세우자고 하셨소?”
더듬거리며 묻는 담개의 말에 송지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제안한 말이었지만, 솔직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결의를 다진 듯 입을 열었다.
“못 할 것이 뭐 있소? 따지고 보면 강국도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땐 식읍이 고작 오십만 호에 불과했소. 삼십만 호라면 가히 부족한 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건 백 년도 훨씬 넘은 일이오. 지금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지.”
반문한 담개의 말도 맞았다. 강국이 설 때만 해도 고만고만한 군웅들이 서로 왕이나 제후를 사칭하고 있었던 터라 병사 일만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혼란스럽던 군웅의 각축이 네 명으로 압축된 상태다. 그것도 증두신과 조환은 마용승과 가겸후 사이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건 시대가 그만큼 안정되었다는 면에선 고무적인 일이다. 다만 그처럼 큰 세력들 사이에서 하나의 나라를 세우거나, 혹은 이름 하나 떨치는 것도 더더욱 어려워졌다는 말과도 통하니 담개는 송지의 말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잘 아는지라 송지는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당장 나라를 세워서 천하에 선포하자는 건 아니오. 다만 우리 군의 이름을 정할 때 미리 그 점을 염두에 두자는 말이오.”
사실 이건 송지가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접은 말이었다. 실제로는 대뜸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너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서 이 정도로 완화한 것이었다.
이번엔 두 사람의 얼굴에 어느 정도 납득한 것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당장 나라를 하나 세우자는 게 아니라, 그 준비만 해 두자는 얘기였으니 말이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이 난세의 무장들치고 누가 한 성의 주인이 되기 싫고, 나라 하나 갖는 걸 싫어할까. 다만 그 일이 너무 어렵고, 설사 가능성을 가진 자라고 해도 그 꿈을 간직한 채 전장의 이슬로 스러진 경우가 많았을 뿐이었다.
“좋아. 곧 작전 회의를 열고 그 문제도 함께 얘기해 보도록 하지.”
비록 편월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송지와 담개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두 노장은 서로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원대한 계획을 공유했다는 것과 모처럼 편월의 얼굴에 소년다운 홍조가 떠오른 것도 보기 좋았다.
“작전 회의는 석축산이 좋겠소. 그렇게 알고 모든 장수들을 모으도록 하겠소이다.”
말해 놓고선 남은 두 사람의 반응도 기다리지 않고 송지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 경우 송지의 말처럼 석축산에서 회의를 갖는 게 가장 타당하다. 윤주성과 탄금성의 중간 지점인지라, 두 곳에서 어떤 불의의 일이 발생해도 빠른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득 편월의 상기된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벌써 나라를 하나 가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좋았고, 또 곧 닥쳐올 싸움으로 잠시나마 사문기의 일을 잊을 수 있을 터였다.
이래서 편월은 전쟁이 좋았다.
2
석축산에 모인 모든 장수들은 곧 닥칠 윤주군에 맞설 작전을 세움과 동시에, 장차 나라를 갖게 되면 국명을 휘輝라고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로부터 정허군은 휘나라를 위한다는 뜻의 위휘군爲輝軍이 되었고, 그들은 연일 맹렬한 훈련을 거듭했다.
위휘군의 훈련 목적은 딱 두 가지였다. 지원군이 강군과 손발을 보다 원활하게 맞추는 것과 예전 정허군에 소속된 병사들에게 주변 지형을 정확하게 익히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겐 시간도 부족했다. 지금 곧바로 윤주군이 몰려온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기에, 훈련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도 단단히 제 몫을 해냈다. 부서진 해자를 수리한 것은 물론 성내의 파괴된 건물을 다시 세웠고, 불탈 만한 곳엔 물을 갖다 놓거나 다른 적절한 대책을 강구해 두었다. 그 덕에 윤주성은 빠르게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편월도 침식을 잊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성내의 보수 상황은 물론 무기들까지 일일이 점검하고 다녔다.
편월이 특히 신경을 쓴 건 주변의 지형이었다. 출운평의 벼는 아직 익지 않았다. 그러니 평야에서의 싸움은 가급적 피하는 게 저처럼 고생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일일 터였다.
그래서 출운평을 둘러싸고 있는 고만고만한 야산이 결전장으로 선택된 건 당연한 일이었고, 병사들의 훈련도 주로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탄금성의 수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증두신이 자신의 배후를 치려고 했다면 이 윤주성을 공격할 때가 적기였지, 이미 차지하고 난 뒤라면 그건 모험의 다름 아닌 것이다.
다만 괘공교 쪽은 늘 경계해야만 하기에, 이제 이천으로 불어난 황월대에 그 일을 맡겼다. 지두룡은 이번에도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편월도 강경하기 짝이 없었기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각지로 보냈던 간인들의 보고도 꾸준히 들어왔다. 윤주군이 노리는 거야 뻔한 일이니, 편월은 적의 숫자만은 정확하게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이 일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웠다. 장마가 끝난 뒤의 태양은 가히 살인적이라 할 만했고, 조금만 움직여도 갑옷 속의 육체를 통째로 익혀 버리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더웠다.
그 속에선 역시 예전 정허군 소속 병사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대부분 막주의 그 지독한 더위 속에서 싸워 본 경험 덕이었다.
그렇게 되면 새로 합류한 병사나 원군들도 분발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그들 역시 후끈 달아오른 채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했다.
이윽고 윤주군의 보다 명확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세 개 성에서 모인 총 사만의 병사들이 합진성合珍城을 발판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첩보였다.
보고를 받자마자 편월은 즉각 장수들을 소집해 최종 작전 회의를 열었다. 합진성은 윤주성에서 삼백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나흘 만에 도착할 터였다.
사실 할 말은 별로 없었다. 병사들은 언제 싸우나 기다릴 정도로 사기가 높았고, 훈련도 잘되어 있었다. 오히려 지금부터는 충분히 쉬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야 실전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보다 편월이 엄격하게 주의를 준 것은, 쓸데없이 농경지를 짓밟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건 몇 번이나 강조해도 부족한 얘기였다.
장수들은 모두 별말 없이 수긍했다. 그것 때문에 출운평을 둘러싸고 있는 야산들을 결전장으로 정하고, 그처럼 매섭게 짓밟으며 훈련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간략한 작전 회의를 끝낸 위휘군은 백성들의 열렬한 격려를 받으며 윤주성을 출발했다.
일단 성을 나서자 위휘군은 각 부대별로 맡은 지역으로 이동했다. 논길 사이로 난 좁고 너른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진군하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일일이 눈으로 인사를 한 후, 편월은 본대를 이끌고 본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실 본진이라고 해 봐야 별다를 것도 없었다. 영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흔한 장막을 둘러친 임시 진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위휘군의 배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고, 지휘하기 가장 수월한 곳일 따름이었다.
물론 진지는 있었다. 적의 숫자는 많고, 출운평을 짓밟게 하지 않기 위한 작전으론 당연히 기습이란 답이 나온다. 그래서 주변의 야산엔 온통 위휘군의 매복과 은신을 위한 참호등으로 빼곡히 들어찼다.
그 속에서 위휘군이 준비하는 걸 지켜보며, 편월은 문득 미소를 지었다. 이름도 없는 야트막한 야산에서 장차 휘국이라는 나라를 세울 첫 싸움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무량한 감개가 어린 가슴 속에도 요동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고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싸움에서 진다면 나라고 나발이고 간에 모두 탁상공론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대강 아군의 준비는 된 것 같소이다. 이제 적이 오기만 기다리면 되는데…….”
“병사들의 보급선은 확실하게 점검해 봤소?”
투구를 벗은 얼굴 가득 맺힌 땀을 닦으며 다가온 송지에게 편월은 잔뜩 무게 잡은 어조로 물었다. 따로 보급대를 편성할 만한 인원도 없고, 또 그만한 거리가 아니었기에 그쪽은 백성들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었다.
“염려하실 건 없을 듯하오. 자원한 백성들이 오히려 더 열심이니까.”
송지의 말에도 편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윤주성엔 단 한 명의 병사도 없다. 윤주성을 떨굴 때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백성들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에선 일말의 후회도 없지 않았다.
‘과연 이래도 좋을까?’
자고로 후방의 대비를 소홀히 한 장수들은 모두 패전의 길을 걸었다. 자신도 그렇지 않나 싶은 반성이 편월을 힘들게 했다. 그처럼 많은 도움을 줬던 백성들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기도 했다.
“우습지 않소?”
문득 송지가 질문을 던졌다.
“응? 뭐가 말이오?”
“이 작은 산들과 저 좁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치르는 싸움이 우리 휘국군의 첫 전투가 된다는 게 말이오.”
“그렇군. 그런데 저 개천의 이름이 뭐요?”
“아직 이름은 없소이다. 하지만 곧 있을 윤주군과의 전투가 끝나면 이내 그럴듯한 이름이 붙을 거요.”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에 산재한 지명 중 상당수는 크고 작은 전쟁과 관련된 게 많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저 이름 없는 개천도 곧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게 뻔하다. 위휘군이 이기든 지든 말이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얕을 것 같은 저 개천은 초염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조되었다. 지난번에 이천강을 건너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흑월대의 편장이 된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저 개천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었던 것이다.
“놈들의 선봉은 분명 기마대일 게고, 멋모르고 저 개천을 건너려고 달려왔다간 물귀신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오. 그러고 보니 우리 위휘군의 서전은 수공水功이 되는 셈이구려.”
“후후후…….”
문득 편월은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말끝마다 위휘군을 들먹이는 송지가 재미있어서였다. 나이가 들어도 역시 나라를 세운다는 것엔 마음이 설레는 모양이었다.
“역시 대장군도, 아니 주…군도 적을 섬멸하실 생각에 즐거운 모양이구려.”
송지는 지금 편월의 심중을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편월을 부르는 송지의 호칭이었다. 그는 분명 ‘주군’이라고 했다.
이건 시사하는 바가 컸다. 나라를 세운다는 가장 기본적인 합의에 도달한 장수들이 그 수장을 주군이라고 부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게 편월이란 점이 의외다. 비록 처음부터 대장군이었고 지휘 능력에도 아무 하자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어리다. 제장들이 승복했다는 게 사뭇 이상할 따름이었다.
그런 호칭을 받은 편월도 어색한 표정으로 명을 내렸다. 아직은 부르는 쪽이나 듣는 편 모두 익숙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한 바퀴 돌아보시오. 별다른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철저한 대비가 우선이니…….”
“존명!”
송지가 물러가자마자 근위대원들이 우르르 편월을 둘러쌌다. 그사이 군기도 바뀌어 황금색 달을 군君 자가 멋들어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근위대도 정확하게 천 명으로 숫자가 늘었다. 당연히 맹아의 입은 귀에 걸렸고, 갑옷을 입은 어깨 위에 터질 듯한 힘이 실렸다.
“주군, 언제쯤 적들이 몰려올 것 같소?”
편월을 부르는 목소리도 유난히 컸다. 주변에 들으라는 의도였다.
“길어야 사흘이겠지. 그런데 적의 대장군이 누구라고?”
“모충毛忠이란 자라고 들었소이다.”
“그자의 이름을 물은 게 아니오. 어떤 자인가를 물은 거지.”
그 말은 맹아의 입을 닫아 버렸다. 모르기는 서로 마찬가지 아니냐는 시선으로 편월을 빤히 보았을 뿐이다. 적은 세 개 성에서 모인지라 대장군이 누가 되었는지는 간인들도 불과 오늘 아침에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맹아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건 단순히 간인들의 보고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편월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자신들도 알아봤어야 옳았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 탓이었다.
생각을 마친 맹아는 슬쩍 편월의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눈치 빠른 부하 몇 명을 합진성 근처까지 보내 볼 작정이었다.
맹아가 뭘 하든 편월은 그저 묵묵히 결전장이 될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산에서 약 이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이름 모를 개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은 확 트인 황무지였다. 땅이 척박해 질긴 잡초만이 자라고 있었다. 전장으론 그만인 곳이었다.
지금 그곳엔 적을 유인하기로 되어 있는 유군이 마구 말을 달리면서 최종 훈련에 돌입하고 있었다. 그들도 인원이 늘어 저대로 전면전에 투입시켜도 제 몫을 톡톡히 해낼 수 있을 듯했다.
유군 중 절반 정도는 그 이름 없는 개천을 자유로이 넘나들기도 했다. 아군만 아는 통로로, 저게 없으면 유인의 효과는 반감될 터였다.
일단 유군의 역할이 끝나고 나면 그다음은 선봉인 백월대가 맡는다. 그들은 개천까지 전진해서 적과 첫 접전을 벌이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첫 접전에서 백월대는 패배를 가장하여 이 야산까지 적들을 깊숙이 끌어들이는 역할이었다.
그다음은 매복에 걸린 적들을 마음껏 두들긴다는 작전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편월의 뇌리에 그림처럼 그려졌다.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 * *
편월의 예상이 맞았다기보다는 전쟁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알듯이 윤주군이 밀어닥친 건 정확하게 사흘 뒤인 칠월 이일이었다.
황무지 저 끝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사만에 이르는 윤주군의 위용은 과연 엄청났다. 그들이 일으킨 먼지로 일시지간 뜨거운 여름 태양이 잠시 가려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편월은 그 모습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만하고 있다.’
윤주군의 진형을 본 편월의 생각이었다. 사만의 대군을 이 열로 배치한, 소위 이중의 학익진鶴翼陣이었다. 적의 사기가 그만큼 높다는 얘기도 되지만 선봉이나 본대, 후미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특히 기본 중의 기본이랄 수 있는 척후도 내보내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그 이중의 학익진이란 것도 전면에 기병을, 그 뒤를 보병이 받친다는 식이었다. 저래서는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벌어지고 만다.
어쨌든 그건 편월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거릴 전쟁이란 괴물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데에만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
“주군!”
편월의 옆에서 맹아가 나직하지만 억센 말투로 불렀다. 명을 내려 달라는 표정이었다.
“기다려! 이미 작전은 세워 뒀으니 이제 저쪽의 움직임만 기다리면 돼.”
편월의 말투도 거칠어졌다. 전쟁에 임하는 그의 신경이 그만큼 곤두서 있다는 의미였다.
“건방진 놈들. 저런 꼴로 우리 윤주성을 한꺼번에 포위하겠다는 수작이겠지.”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 중 누군가 투덜거렸다.
“누구냐!”
맹아가 날카롭게 물었다. 자칫 근위대의 군기가 해이해진 걸로 보일까 염려스러웠다.
“위휘爲輝요.”
퉁명스러운 대답이 뒤를 이었다.
“무슨 이름이 저래?”
이건 목소리를 낮춘 편월의 질문이었고, 역시 나직하게 웃으며 맹아가 대답했다.
“하하하, 이번에 새로 배속된 자인데 우리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이름을 저렇게 고쳤다고… 앗,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소!”
말끝과 손끝이 동시에 적군에게로 향하는 것 같은 맹아였다.
“좋아, 유군 출격!”
맹아에게서 복명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장수기가 한차례 크게 휘둘렸을 뿐이었다.
그게 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개천의 하류 쪽에서 뽀얀 먼지가 피어오른다 싶더니 이내 유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편월이 내려다보고 있는 곳까지 달려온 유군은 기치도 정연하게 방향을 바꿔 개천을 향해 돌진했다. 곧바로 적의 본대에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그 펄럭이는 깃발들을 통해 연방 노호를 터뜨리는 담개의 얼굴이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지금쯤이면 편월의 피가 끓어올라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 반대였다. 오히려 냉정한 관찰자가 된 듯한 눈으로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단순히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탓만은 아니었다. 한 군의 대장군 입장이 아니라 한 나라 왕의 시각으로 보니 감정을 억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유군의 도발에 대한 적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때까지 비교적 뒤편의 보병과 보조를 맞추던 기병들이 왈칵 속도를 높였던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학익진도 거의 일자형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이걸 노리고 있었던 터, 유군도 둘로 갈려 일부는 개천을 건너기 시작했다. 기치까지 어지럽게 흐트러져 얼핏 전군의 보조가 엉망인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적들은 흡사 자석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유군에 덤벼들었고, 그 근처는 삽시간에 먼지에 뒤덮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기조차 어려웠다.
“주군!”
다음 명을 내리라는 맹아의 부름에도 편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전쟁 경험이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렸고, 담개를 믿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뒤로 처졌던 유군도 거의 개천을 건넜을 무렵 마침내 편월의 입이 열렸다.
“백월대 출격.”
냉정한 이성 탓일까. 명을 내리는 목소리도 처음 유군을 충돌시켰을 때보다 더욱 차분했다.
“백월대 돌격!”
“와아!”
동시에 함성과 더불어 백월대가 야산의 그늘에서 달려 나갔다. 이 역시 곧장 적에게 덮쳐 갈 기세였다.
물론 허장성세에 불과한 것이었다. 적의 공격을 보다 바짝 끌어당기기 위해서 말이다.
“와아아아!”
마치 둑 터진 봇물과도 같은 함성이 갑작스럽게 황무지를 진동시켰다. 양군이 격돌 직전이라는 의미였다.
‘바로 지금!’
자신도 모르게 편월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바로 지금이 유군이 뒤로 빠질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먼지구름 한복판에서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싶더니 유군의 후미가 말 머리를 돌렸다. 본격적인 유인이 시작된 것이다.
그걸 기다리며 기세를 올리고 있던 백월대는 오히려 빠른 속도로 개천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마치 한편 싸움이라도 벌일 것만 같은 태세였다.
하지만 저게 정석이다. 어떤 싸움이든 기세란 게 있기 마련, 이제 적은 설혹 유군의 유인을 눈치 챘다고 해도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적들은 개천의 함정에 곧장 빠질 게고, 그때를 기해 타격을 가하려면 지금 출발하는 게 맞다.
“와아아아-!”
적군은 더욱 우렁찬 함성을 올렸다. 소리만으로도 족히 이 싸움판 전체를 삼켜 버릴 듯했다.
“매복!”
편월의 입에서 세찬 명령이 터져 나왔다. 흥분해서 언성을 높인 게 아니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정도로 전장의 소음이 컸다.
진즉부터 기다리고 있던 기수였다. 명은 즉각 깃발을 통해 전 부대로 전달되었고, 그들은 야산에 마련해 둔 은신처에 각기 몸을 숨긴 채 손에 침칠을 하고 있을 터였다.
“와아악!”
천지를 진동시킬 듯하던 적의 함성은 돌연 급박하게 그 끝을 맺었다. 드디어 개천의 함정에 걸린 탓이었다.
그 뒤에 창을 앞세운 백월대가 덮어씌우듯 달려들었다. 정말이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군과 교대를 한 것이다.
다음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적의 기마대에 대한 일방적인 도살이 시작되었단 얘기다.
요행히 통로를 건넌 적군도 없지 않았지만, 숫자가 너무 적어 아군에겐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이만에 이르는 적의 기병이다. 유군과 백월대의 인원이 늘었다고 해도 불과 삼천오륙백. 그처럼 많은 적을 일거에 섬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뒤를 받치던 적의 보병들도 곧 들이닥친다. 이쯤에서 후퇴하는 게 세워 둔 작전을 훌륭하게 마무리 짓는 요점이 된다.
그 점에 있어 담개와 강숙은 누구의 지시를 기다릴 만큼 우둔한 장수가 아니었다. 장수기가 몇 차례 펄럭인다 싶자 꽹과리 소리가 뒤를 이었고, 그 즉시 유군과 백월대는 철수하기 시작했다.
‘칠천 정도 살상했겠군.’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면서 편월은 투구를 찾아 썼다. 적이 여기까지 추적하지는 않을 거라는 염려 따위는 전혀 없었다. 서전에서 저 정도 병력을 잃었다고 물러설 지휘관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다.
예상대로 적은 자기편의 시신과 말들로 메워진 개천의 함정을 짓밟고 그대로 밀어닥쳤다. 어쩌면 지나치게 흥분해서 적장들의 명령 따위는 이미 들리지 않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건 위휘군엔 바라지도 않았던 호재일 수밖에 없다. 먼저 유군이 매복지를 지나쳤고, 그 뒤를 이은 백월대의 꼬리를 물 듯이 적군이 밀려들었을 때…….
“와아!”
“쳐라!”
함성과 욕설을 뒤섞어 내뱉으며, 잔뜩 대기하고 있던 위휘군이 일제히 창을 세우고 매복지에서 뛰쳐나갔다. 동시에 지나쳤던 유군과 백월대가 말 머리를 돌린 건 물론이다.
편월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도를 휘두르며 싸움판에 뛰어들자마자, 벌써 이 기의 적 기병과 그 뒤를 따르던 보병 서너 명을 그대로 쓸어버렸다.
“주군을 따르라! 주군의 곁에 적을 접근시키지 마라!”
맹아도 편월을 따르며 연방 근위대를 독려했다. 그로선 이런 난전의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일이다. 이 기회에 마음껏 무공을 세울 작정이었다.
거기엔 또 다른 목적도 없지 않았다. 새로 편입된 병사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봐 두는 것도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순식간에 편월 주변으로 널찍한 공터가 생겼다. 그래서인지 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처럼도 느껴졌다. 아니, 그건 단순히 느낌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하나의 함정과 하나의 매복에 걸린 적들이 일제히 깃발을 접고 후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와아!”
“이겼다! 와아아-!”
그 정적이 부담스럽다는 듯 이번엔 위휘군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승리를 확인하는 외침이었다.
거의 동시에 적측에서도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군.”
맹아가 한마디 던지는 걸 귓등으로 흘리며, 편월은 재빨리 명을 내렸다.
“승리의 함성은 아직 이르다! 지금부터 추격전이다! 진은 어린진!”
그 명은 맹아가 즉각 기수에게 하달했다.
“들은 대로다. 각 부대에 주군의 명을 전달하고 말을 대령하라. 소질풍을!”
짧은 편월의 명이었지만 맹아는 제꺽 알아듣고 말까지 준비시키는 걸 잊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일대의 야산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번엔 공격을 위해 위휘군이 대오를 정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 부대의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는 채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전달되었다.
“진격!”
편월의 명에 위휘군은 오후로 기울어진 햇살을 튕겨 내며 야산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3
윤주군의 대장군인 모충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바로 눈앞에서 사만 대군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게 뻔했다.
“대장군, 조속히 철수의 명령을…….”
“뭐? 뭐라고 해, 했소?”
모충은 아예 듣는 기능까지 마비된 모양이었다. 바로 옆에서 윤주의 또 다른 성인 포란성주抱卵城主 거규巨奎의 말에 혼이 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미 이 싸움은 졌소이다. 이대로 두면 아군은 전멸! 그러니 조속히 철수 명령을 내려 합진성으로 철수하는 게 좋을 듯하오.”
자기 성에서 기다린 모충과는 달리 이번에 병력 일만 이천을 이끌고 참가한 거규는 냉정하게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기실 거규는 이번에 윤주군이 펼친 학익진에 반대했었다. 아무리 적인 위휘군의 숫자가 적다고 해도 그렇게 엉성한 진법으로는 깨부수기 무리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대세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숫자를 지나치게 믿기에 가장 많은 이만 삼천의 병력을 낸 모충을 비롯하여 제장 모두 위휘군을 일거에 윤주성으로 밀어붙여 단번에 함락시키자고 했다.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정말이지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머물 곳이 없을 정도로 대패인 것이다.
그나마 거규가 거느리고 온 거가군巨家軍은 피해가 덜한 편이었다. 애당초 학익진엔 반대였으니, 부하들에게도 너무 깊숙이 뛰어들지 말라고 미리 얘기해 뒀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규는 애가 말랐다. 대장군인 모충의 곁에서 지켜봐도 거가군은 족히 이천쯤 되는 병사들을 잃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전장 이탈이라도 감행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대장군!”
다시 한 번 거규가 힘차게 불렀을 때에야 모충은 더듬거리며 철수 명령을 내렸다.
“처, 철수. 전군 철수!”
그건 일군의 대장군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패한 전투에서 몸을 빼는 일개 아장보다 못한 꼴이었다.
어쨌든 그 명은 거규에 의해 전군에 전달되었다.
“이대로 합진성까지 곧장 후퇴하시오. 소장은 후미를 맡겠소.”
모충이 뭐라 하기도 전에 거규는 말을 달렸다. 후퇴 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자청했지만, 저처럼 멍청한 대장군 곁에 보좌관이란 명목으로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우리 병사들을 집결시켜라.”
모충의 곁을 떠나자마자 따라붙은 편장들 중 한 명에게 거규는 재빨리 명을 내렸다. 우선 병사들부터 모아야 반격을 하든 후미를 끊든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거규가 달리 명을 내리지 않아도 괜찮을 뻔했다. 그를 상징하는 거巨 자가 수놓인 장수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거가군은 저절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군기가 어떤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속속 모여드는 부하들을 의식하면서 거규는 마구 퇴각하는 아군의 물결을 거슬러 개천 쪽으로 달렸고, 도착했을 즈음엔 거가군은 거의 집결을 끝낸 상태였다.
‘일만이 채 안 되겠군.’
“듣거라!”
모여든 부하들의 숫자를 대충 파악한 뒤, 거규는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왁자한 전장의 소음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우리는 아군의 철수를 돕는다. 이 점을 명심하고, 우리 거가군의 이름에 욕됨이 없도록 행동하라.”
“전사자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부상병은 거둬야 하지 않겠소?”
거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편장 중 한 사람이 불만 가득한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그 말엔 거규도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잃은 부하 이천 중 절반 이상은 부상을 당해 이 벌판 어디선가 신음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을 방치한 채 퇴각을 해야만 하는 이 싸움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전군의 안전이 우선이다. 아마 적들도 부상병까지 손대지는 않을 게다. 자, 기치를 정돈하라!”
이어진 거규의 말은 누구의 귀에도 울분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몇몇 거가군의 마음까지 결정적으로 움직였다.
“뭣들 하느냐? 대오를 갖춰라!”
불만을 제기했던 편장이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예하 병사들을 이끌고 최전방으로 나섰다.
그렇게 되면 말단 졸자에 이르기까지 망설이고 있을 거가군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기보병을 막론하고 창끝을 나란히 한 채 개천에 바짝 붙어 섰다. 만약 위휘군이 몰려온다면 몸으로라도 막을 기세였다.
그때 저만치 보이는 야산 위에서 우렁우렁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위휘군의 승리를 알리는 소리였다.
“자, 우리도 한차례 고함이라도 질러라. 우쭐해 있는 적의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우와아아아-!”
동시에 거가군도 일제히 함성을 올렸고, 그건 이상한 중압감으로 전장 구석구석을 진동시켰다.
“적의 기치가 움직입니다. 곧 추적대가 올 것 같습니다.”
“아군과의 거리는?”
“약 이 리 정도.”
“그럼 싸운다. 시간을 벌어야 돼.”
“존명!”
퇴각 시의 후미가 어려운 게 바로 이런 점이다. 적의 동향은 물론 아군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싸우고,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다 싶으면 후퇴해야 되니까 말이다.
“적 출현, 진형은 어린진.”
전방에 나가 있던 편장에게서 보고를 듣자, 거규는 서늘한 냉기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얄미운 놈이다.’
이게 적장에 대한 거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자신의 속내를 고스란히 읽혔다는 기분도 들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거가군은 거규가 그토록 싫어했던 학익진보다 더 못한 일자진을 펼친 상태였다. 개천을 따라 길게 도열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으드득.
거규의 어금니가 소리를 내며 갈렸다. 이제 와서 아군의 진형을 바꾸기엔 늦었고, 이대로 적을 맞아서는 승산이 없다.
“아군과의 거리는?”
“약 오 리.”
“십 리가 될 때까지 이 자리에서 버틴다. 겁이 나는 자는 지금 물러가도 탓하지 않겠다.”
거규의 이 말에 거가군은 잠깐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뿐, 그들은 움켜쥔 창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침내 그들의 시야에 백월대를 선두로 한 위휘군의 기치가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아아!”
위휘군의 최첨단, 즉 선봉에 선 백월대는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고기비늘처럼 단단히 엮여 한 덩어리가 된 자신들을 막겠다고 서 있는 적의 엉성한 일자진을 봤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적의 후미 방어를 뚫고 곧장 본대를 추격한다.”
강숙의 명과 함께 백월기가 앞으로 잔뜩 기울어졌다.
“와아아!”
이미 서전에서 크게 적을 휘둘렀던 백월대다. 그 기세를 고스란히 살려 개천의 통로로 몰려갔다. 마침 적 일자진의 한가운데였다.
강숙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자신들이 치고 들어가는 곳에 바로 적의 장수기가 펄럭이고 있는 걸 본 탓이었다.
‘이걸로 이겼다.’
적장이 있는 곳으로 곧바로 치고 들어가니, 싫든 좋든 적의 일자진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건 또 하나의 승리를 의미하고, 오늘 전투의 수훈갑은 단연 백월대가 될 터였다.
예상대로 적의 일자진이 움직였다. 강숙이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장수기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게 보였다.
“이때다! 단숨에 개천을 건너라!”
소리를 치는 것과 함께 강숙은 말을 내달려 맨 선두로 나섰다. 그의 눈엔 적이 동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때를 틈타 적의 장수를 칠 작정이었다.
드디어 강숙과 편장 몇몇이 개천으로 뛰어들었고, 그사이에도 적장은 꾸준히 뒤로 빠지고 있었다.
그게 강숙의 눈을 뒤집히게 만들었다. 이대로라면 적장에게 닿기도 전에 일자진으로 벌어진 적에게 감싸이게 될 공산이 컸다. 그 전에 쳐야만 한다.
“위휘군의 선봉장 강숙이 가노라! 적장은 꼬리를 보이지 마라!”
한 소리 크게 내지른 순간 강숙이 탄 말은 벌써 왈칵 앞으로 달려 나갔다.
“와아아! 쳐라!”
적들도 허수아비로만 채워져 있는 게 아니다. 강숙이 홀로 앞으로 튀어나오자마자 주변의 거가군이 그를 노리고 일제히 쳐 나왔다.
순식간에 강숙은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홀로 떨어져 적에게 포위당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단 한 발짝이라도 물러설 강숙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설치며 이리저리 창을 내질렀다.
“적장은 어디 있느냐? 썩 나서 목을 늘여라!”
“괘씸한 놈! 옜다, 내 창이나 받아라!”
누군가 설치는 강숙 앞을 막아서며 불쑥 창을 내질렀다.
“오옷!”
입으로 경호성을 내지르는 강숙의 몸이 뒤로 벌렁 자빠졌다. 방금 그 창이 목젖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왼쪽 어깨에 깊숙이 박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숙은 떨어지지 않았다. 낙마 직전에 어깨에 박힌 창대를 붙잡고 버티는가 싶더니, 이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쓸 만한 놈이로다. 이름을 대라!”
놓쳐 버린 자신의 창 대신 놈의 창날 쪽을 쥔 채 강숙은 소리 높여 물었다.
“이 몸의 이름은 지옥에나 가서 물어라.”
놈도 만만찮게 대꾸하면서 창을 확 끌어당겼다.
그걸 놓칠 강숙이 아니었다. 창이 놈의 손에 들어가면 다음에 확실히 자신의 목젖을 꿰뚫을 건 뻔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장군이 위험하시다! 물러서라!”
“비켜라, 이 떨거지들아!”
일대일이라고 해도 강숙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다. 거기다 주변은 온통 적들에게 둘러싸였으니 백월대의 편장들과 병사들이 기를 쓰고 돌파를 감행해 거가군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강숙을 둘러싸고 있던 거가군의 한쪽이 툭 터지며, 이번엔 오히려 백월대가 적장을 둘러싸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모두 물러서라! 누구든 이 싸움에 개입하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강숙은 주변에 다가선 부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모처럼 만난 호적수와의 싸움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건 적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거가군은 적을 맞아 싸워라! 아군을 도와!”
이런 경우는 전쟁에선 왕왕 있는 일이다. 각 개인의 무공이 쌓이고 쌓여 전투에서의 승리를 이뤄 낼 수 있으니, 장수끼리의 일대일 싸움은 이런 난전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당연히 부하 장졸들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양측의 병사들은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다시 치열한 난전을 전개했다.
“강숙이라고 했느냐? 제법 호기가 있는 놈이로구나.”
“내가 할 말이다. 에익!”
적장의 말에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강숙은 쥐고 있던 창대를 그대로 확 밀어 버렸다. 어깨에 꽂혔던 창날이 빠져나가면서 화끈한 통증이 전해져 왔지만, 그런 것에 연연할 틈이 없었다.
이번엔 적장이 낙마할 듯 휘청거렸다. 잔뜩 힘줘 당기고 있던 창이 맥없이 확 끌려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강숙은 어깨의 아픔을 무릅쓰고 앞으로 돌진하며 옆구리의 칼을 뽑아 휘둘렀다.
난세의 비정함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결국엔 각자의 목숨을 노려야만 하는 것 말이다.
강숙은 이 일격이 성공하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상에서 완전히 중심을 잃은 적장이 이걸 피할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적장은 확실히 예사 장수가 아니었다. 강숙의 칼이 번뜩이는 걸 보자 그대로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쉬잇!
강숙의 칼은 애꿎은 적장의 말 목에 상처만 남기며 허공을 그었다. 비단 헛손질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어깨의 통증을 가중시켜 띵한 현기증까지 동반했다.
그렇다고 공격의 손길을 늦출 강숙이 아니었다. 그 역시 말 위에서 그대로 몸을 날려 이제 막 몸을 일으키려는 적장을 덮쳐 버렸다. 손에 쥔 칼이 다시 한 번 오후의 햇살에 반짝이는 빛을 발했다.
적장으로선 생각지도 못했던 일격이었다. 설마 강숙이 그처럼 무식하게 공격할 줄은 정녕 몰랐다.
바로 이게 정규군과 잡가군의 차이다. 정규군의 장수라면 말에서 몸을 날려 바닥을 뒹굴면서까지 싸우려 들지는 않는다. 아무리 전장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에겐 지켜야 할 명예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가군에 있어 싸움이란 어떤 형태의 것이든 곧바로 생존과 직결된다. 명예를 따지기보다는 이런 ‘개싸움’을 통해서라도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얘기다.
그 차이가 두 사람의 생사를 갈랐다. 강숙의 칼은 허망하다 싶을 정도로 손쉽게 적장의 투구 밑 목을 꿰뚫어 버렸다.
“백월대의 강숙이 적장……!”
쭈그리고 앉은 채 적장의 목을 높이 쳐들며 외치던 강숙의 고함이 문득 그쳐 버렸다. 생각해 보니 그 이름을 몰랐던 것이다.
“…적장의 목을 쳤노라!”
기어이 말을 맺긴 했지만, 이미 강숙의 목소리는 외침이 아니었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것처럼 무겁게 깔리기만 했다.
어깨의 통증 탓은 결코 아니었다. 전신의 맥이 탁 풀리며 이대로 무너질 것만 같은 허망함이 전신을 싸고돌았다.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이처럼 허탈한 기분은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미운 감정으로 베었다면 손끝까지 저려 오는 피로감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장군!”
백월대의 편장 중 한 명이 강숙의 말을 몰고 오며 불렀다.
“아니, 부상을 당하셨소?”
어깨에서 피를 흘리는 강숙을 본 편장은 그대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가벼운 부상이다. 신경 쓰지 마라.”
상처를 살피려는 편장의 손을 떨쳐 내며, 강숙은 수중의 적장 목을 내밀었다. 소중히 보관했다가 장사를 지내 주라는 의미였다.
“전황은?”
“적들이 퇴각하기 시작했소이다.”
“좋아. 따르라.”
강숙은 말에 훌쩍 뛰어올랐다. 자신의 감정이야 어떻든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선 이상 죽을 때까진 싸워야만 한다.
“기치 정렬! 적의 후미를 놓치지 마라!”
편장이 강숙의 뒤를 따르며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그에 따라 한차례 흩어져 전투를 치렀던 백월대는 다시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전령, 본대의 전령이오!”
“뭔가?”
“오늘 백월대의 공훈은 단연 으뜸이니 후미로 빠져 청월대와 교대하시라는 주군의 명이시오.”
“알겠다.”
아마 평소의 강숙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왠지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느껴졌기에, 순순히 말 머리를 돌려 후미로 빠졌다.
“장군, 여기서 우릴 빼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명령이오? 왜 승복할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소?”
“아군의 피해는?”
항의하는 편장을 억누르는 강숙의 어조는 조용했다. 자칫 주변에 가득한 말발굽 소리에 묻혀 버릴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이러시오, 장군? 부상이 그렇게 심하시오?”
“피해는!”
기어이 강숙의 음성이 높아졌다.
흠칫, 편장의 어깨가 출렁거리며 갑옷 자락이 철커덕 소리를 냈다. 강숙이 저처럼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뭔가 한마디 더 할 듯 입술을 씰룩이던 강숙은, 그러나 그대로 말을 몰았다. 지금 자신의 심정은 스스로도 납득하기가 어려우니 편장이 알아주길 바란다는 건 무리였다.
“전령!”
돌연 강숙은 소리를 높여 전령을 불렀다.
“지금 곧바로 본대로 달려가 주군께 전해라. 우리 백월대는 이대로 전투에서 빠져 전장 정리를 한 후에 합류하겠다고.”
“저, 이대로 전장 정리를……?”
“그렇다.”
“조, 존명.”
이해할 수 없는 명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전령은 곧장 말을 달렸다. 자신의 임무는 지시의 전달에 있으니까 말이다.
“사상자 약 칠백 추정.”
예의 편장이 옆으로 말을 붙이며 보고를 했다. 그러다 그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차 물었다.
“정말 이대로 전장 정리나 하실 생각이시오?”
그도 전령에게 하는 강숙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강한 불만이 드리워진 표정이었다.
하긴 이건 누가 들어도 이상한 명령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적을 쫓아야 한다는 건 한 번이라도 전쟁에 참가해 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아군 부상병부터 우선 구하고, 시신 역시 적과 아군을 구분하여 잘 묻어 주도록.”
자신이 벤 그 이름 모를 적장을 비롯하여 이 전장에 시신을 뉘인 모든 자들에게도 가족이나 친지들은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를 거둬 줘야 한다는 게 이 순간 강숙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의 전부였다.
이건 확실히 예전의 강숙이 아니었다. 어쩌면 한낱 잡가군에서 백월대를 맡은 장수가 됨으로써 생긴 변화일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부족하다.
강숙은 아직 모른다. 전쟁은 시시각각으로 사람을 변하게 하고, 그 와중에 그 자신도 조금씩 바뀌었다는 사실을…….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다.
백월대가 전장 정리를 어느 정도 마쳤을 때 본대로부터 또 다른 전령이 당도했다. 위휘군이 합진성 인근까지 진격해 영채를 세우고 있으니, 늦어도 새벽까지는 백월대도 도착해야만 된다는 전갈이었다.
기분이야 어떻든 일단 내려진 명에는 따라야 한다. 벌써 사방은 어두워졌지만 밤길 행군이라도 감행해서 아군과 합류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