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웅지초석雄志礎石 (37/66)

웅지초석雄志礎石

1

정허군이 애써 세운 영채를 뽑고, 제운교와 석축산까지 장악했다는 소식은 윤주성을 자욱한 위기의식으로 휩싸이게 만들었다.

특히 성주인 오치의 불안은 컸다. 정허군이 곧바로 성을 공격할 것 같은 분위기도 마음에 걸렸지만, 무엇보다 파양주에 있을 호윤천 부자의 질책이 걱정되었다.

오치에게 있어 호윤천 부자는 생명줄의 다름 아니었다. 고작 이천 명을 이끄는 소규모 부대의 아장에 불과하던 자신을 일약 윤주성의 성주로 만들어 줬으니, 그 끈을 놓친다면 앞으로의 출셋길은 물론 어쩌면 목숨까지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당장 정허군을 칠 군사를 낼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비록 어리다고는 하지만 무명武名에 있어선 자신보다 월등한 편월이 대장군이었고, 또 그를 따르는 자들은 대부분 막주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성을 나가 싸운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노릇이었다.

결국 오치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부하들을 닦달해 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일 말이다.

부하들 중에선 파양주가 어려우면 윤주의 다른 성에라도 원군을 청하자는 의견을 내놓은 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오치는 그 의견을 단호히 묵살해 버렸다. 윤주의 다른 성에 지원을 청해도 그 소식은 곧 호윤천 부자의 귀에 들어가고 만다. 애당초 말을 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성의 병사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하면, 그 안에 사는 백성들이 편할 턱이 없다. 툭하면 군자금 조달이니 군량 마련이니 하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을 축내기 일쑤였고, 각 대장간에서 연일 무기를 만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쯤 되면 어떤 군벌이든 간에 흉군凶軍이나 폭병暴兵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말로는 군용으로 징발한다는 것이었지만, 기실 약탈을 해 가는 병사들이 윤주성 내에서 점차 늘어만 갔다.

자연히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고, 마침내 약탈을 하던 병사들 십여 명이 백성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런 경우 성주가 취할 수 있는 방도는 대개 두 가지뿐이다. 문제점을 철저히 조사해, 약탈에 가담한 병사들의 혐의가 인정되면 그 지휘관을 처벌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는 게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더더욱 위압적으로 백성들을 누르는 것이다.

당연히 오치는 후자를 택했다. 목전에 정허군이라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그에겐 단 한 명의 병사라도 아쉬웠기 때문이다.

이 그릇된 처사가 결정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떠나가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신이 나서 더욱 약탈에 열을 올렸고, 급기야 장마가 끝나 갈 무렵에는 몰래 성에서 달아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때마다 더 강한 억압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게 이 경우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오치는 남은 백성들을 열 가구씩 묶어 그 책임자를 정했고, 만약 한 가구가 달아나면 남은 아홉 가구에서 쌀 한 섬씩 내는 걸로 책임지게 만들었다. 그게 안 될 때는 그 책임자를 참수형에 처한다는 포고까지 내렸다.

오치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조치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 것 같았다. 당장 달아나던 백성들이 근절되었고, 불만을 노골적으로 입에 담는 자들도 없어져 버렸다.

게다가 백성들을 더욱 강하게 쥐어짠 덕에 창고는 가득 차고 병기 또한 넘칠 정도로 마련되어, 마침내 윤주성 전체가 철옹성이 되었다고 오치는 믿었다.

하지만 오치가 모르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그처럼 견고한 윤주성의 성곽 내부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석축산에 지어 뒀던 정허군의 영채에서 아주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드높게 울려 퍼졌다.

“이건 불공평한 시합이었소. 삼 년 동안 여기 웅거하고 있었던 유군은 아무래도 지리에 익숙하지만, 우린 그렇지가 못하오. 그러니 오늘 시합은 무승부요!”

이건 백월대의 강숙이 한 말이었다. 오늘 유군과 가졌던 사냥 시합에서 진 그의 어조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아니, 이건 강 장군답지 않은 말이군. 아무리 지리에 밝다고 해도 짐승들이 있는 곳까지 어떻게 알겠나? 그러니 오늘 시합은 우리 유군의 승리일세!”

담개도 지지 않았다. 그 역시 오랜만에 가진 이 시합이 흡족했는지 젊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래서는 결론이 나지 않으니, 이 판정은 아무래도 대장군께 맡겨야겠소이다.”

“맡기나마나, 이건 누가 봐도 우리 유군의 승리일세!”

강숙과는 달리 느긋한 웃음을 띤 얼굴로 담개는 편월이 있는 막사로 향했다.

안에는 편월과 송지가 지도를 펴 놓고 무슨 얘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쯤이 좋을 듯하오. 여기라면 괘공교와 윤주성을 동시에 누를 수 있는 곳이오.”

“하지만 윤주성에 너무 가까운 것 같지 않소? 아직은 싸울 때가 아니라고 보는데…….”

“우리가 먼저 도발하지 않는다면, 오치는 결코 쳐 나오지 않을 거요. 아, 담 장군의 생각은 어떠시오? 이쯤에 우리가 영채를 세우면 오치가 과연 쳐 나올 것 같소?”

안으로 들어선 담개와 강숙을 발견한 송지가 쾌활한 어조로 물었다.

“어디 봅시다.”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으며, 담개는 송지가 가리키는 지도에 시선을 주었다. 석축산의 북쪽 기슭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과연 여기라면 요지임에 틀림없지만, 윤주성에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말끝을 삼키면서 담개는 지도의 다른 곳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정확하게 석축산과 윤주성 그리고 괘공교의 세 군데 중심부였다.

“거리만 생각한다면 전혀 손색이 없는 곳이오. 하지만 여긴 들판이라 영채를 세워 봐야 별로 효과를 보기 어렵소. 우리들은 병사들의 숫자가 적으니, 아무래도 이곳에 영채를 세우는 게 나을 듯하오.”

“그곳이라면 윤주성의 공격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오.”

“오치는 결코 쳐 나오지 않을 것이오. 설사 쳐 나온다 해도 여기서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요.”

“오치를 겁내는 게 아니오. 윤주성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괘공교 너머 허주군이 우리들의 배후를 친다면 어쩌시겠소?”

이제 담개에게 있어 사냥에 대한 판정은 뒷전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는 데 급급했다.

“강 장군은 어떤가? 어디에 우리 영채를 세우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가?”

담개와의 대화가 답답하다는 듯 송지는 강숙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장에겐 별다른 의견이 없소이다. 대장군과 두 분 노장께서 정하신 대로 따를 뿐.”

강숙은 솜씨 좋게 이 언쟁에서 한발 빠졌다. 어느 한 사람 편을 들었다가는 나중에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건 역시 대장군께서 결정하실 문제로군. 우리 두 고집쟁이 영감들이 싸워 봐야 결론도 안 날 테니.”

말과 함께 송지는 지도를 슬쩍 편월 앞으로 밀었다. 지금껏 한마디도 안 했으니, 이젠 결정을 내리라는 표정이었다.

편월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상세한 게 아니라 몇 군데 중요한 곳만 표기해 뒀지만, 이 근처의 지리는 일목요연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중 편월의 시선을 끄는 건 세 개의 붉은 점과 네댓 개의 검은 점이었다. 붉은 건 이미 정허군이 장악한 탄금성과 제운교 그리고 이 석축산을 의미했다. 나머지 검은 점들은 새로 영채를 세울 후보지들이었다.

‘흐음!’

편월은 내심 침음성을 삼켰다. 어느 한 곳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병력만 충분하다면 이 모든 곳에 영채를 세워, 단단한 지반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론 그게 불가능하다. 그러니 최적의 장소를 골라야 한다.

“대장군, 잠시 나와 보십시오!”

갑자기 문밖에서 맹아의 목소리가 들린 건 편월이 막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무슨 일이오? 할 말이 있으면 들어와서… 어?”

재빨리 밖으로 나간 강숙이 약간 놀란 듯 말을 맺었다.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음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들 강숙과 마찬가지로 놀라고 말았다.

“저들은 누군가?”

맹아 곁으로 바짝 다가간 송지가 나직이 물었다. 산 아래 쪽에서 족히 오백 명은 넘을 듯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이어 올라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탄금성의 백성들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다른 지방에서 난을 피해 온 것 같소이다만.”

“아니면 적병들이 변장한 것일지도 모르네. 우선 병사들을 보내 봐야겠네.”

“그거라면 우리 백월대가 가겠소이다.”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강숙은 곧바로 백월대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달렸다.

“만약 난민들이라면 대장군께서는 저들을 거두어 주실 거요?”

적이 변장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걸 스스로도 잘 알기에 송지는 편월의 생각을 물었다. 미리 결정을 해 둬야 저들이 이 영채에 도착했을 때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

“여기에 둘 순 없겠지. 거둔다고 해도 탄금성으로 보내야 할 거요.”

그런저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사이에 백월대는 말을 타고 산길을 달려 내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성들의 행렬은 멈췄다. 아마도 강숙이 그들을 제지하고 간단한 조사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몇 명을 데리고 돌아오고 있군. 대장군께 직접 말씀드리려나 보오.”

손을 이마에 드리운 채 지켜보고 있던 송지가 나직이 말했다. 확실히 몇 기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백성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나머지는 여전히 제지당한 상태였다.

“의자를!”

송지는 근처에 있는 근위대원에게 명했다. 편월이 앉을 의자를 내오라는 얘기였다. 다수의 백성들을 맞기에는 실외가 나을 터였다.

편월은 묵묵히 근위대원이 가져온 의자에 앉았다. 영채를 세울 곳을 정해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깃든 표정이었다.

오래지 않아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열 명의 백성이 편월 앞에 당도했다. 다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었다.

“그만 멈춰라! 대장군이시다. 예를 갖추도록!”

더 가까이 다가오려는 백성들을 맹아가 큰 소리로 제지했다. 아직은 어떤 자들인지 알 수 없었기에, 편월 가까이 세워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대들은 어디서 왔소?”

필요 이상으로 무게를 잡으며 편월이 물었다. 이런 경우엔 반드시 필요한 일 중 하나였다.

“예, 소, 소인들은 윤주성의 영내에 살던 백성들이옵니다.”

“뭣이?”

편월보다 송지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불과 조금 전까지 그 윤주성에 들어앉아 있는 오치의 심중에 대해 얘기하던 참이었다.

“윤주성의 백성들이 왜 여기까지 왔소?”

“그, 그건 성주의 학정虐政 때문에…….”

“학정? 오치가 그대들을 가혹하게 다스렸소?”

“아이고, 말도 마시옵소서. 그놈은…….”

백성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이 최근 오치의 실정失政과 윤주성의 실태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던 참에 저희들은 편월 대장군님의 명성을 듣게 되었사옵니다. 그래서 여기라면 우리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왔사옵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들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거두어 주시옵소서!”

노인의 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이마를 땅바닥에 갖다 대며 말했다.

편월은 담개와 송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들이 거두어 달라고 말하리란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윤주성의 분위기와 오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편월의 시선을 받은 송지는 눈을 껌뻑거렸다. 적당히 상대하라는 뜻이었다.

“알겠다. 여기까지 온 사람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맹 장군, 우선 모두 영채로 들이도록 하시오.”

“존명!”

군례를 갖추는 맹아의 목소리도 필요 이상으로 컸다. 백성들 앞에서 군기가 잘 잡힌 정허군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게다가 맹아에겐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이들 백성 중에 적의 간인이 없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대장군, 잠깐 안으로!”

백성들을 이끌고 맹아가 사라져 가자, 송지가 편월을 안으로 들게 했다.

“영채를 짓는 문제라면 좀 더 있다가…….”

“영채 따위는 잊어버리시오!”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으며 내뱉은 편월의 말을 송지가 강한 어투로 잘라 버렸다.

“영채를 짓는 것보단 이참에 아예 윤주성을 치는 게 좋겠소. 성내의 분위기가 그렇다면 쉽게 떨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소장도 송 군감과 같은 생각이오. 다만 서두를 건 아니라고 생각되오. 저 백성들이 혹시 적의 간인일지도 모르니, 우선 그 점부터 밝혀야 할 것 같소이다.”

“물론 그 점은 당연히 밝혀야지!”

송지가 담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편월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편월도 대체로 두 사람의 생각에 동감이었다. 윤주성 내부의 인심이 그만큼 이반되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공격하기엔 적기일 듯했다. 일을 할 때에는 모두 그 시기가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 전에 백성들에 대한 철저한 사전 조사가 선행되어야겠지만, 왠지 편월은 그들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윤주성에 어느 정도의 병력이 있을 것 같소?”

“투항자의 말에 의하면 팔천 정도라 하지만, 공격을 하려면 일만 정도로 보고 작전을 짜는 게 좋을 듯하오.”

편월에게 윤주성을 칠 의사가 있음을 간파한 송지가 대뜸 이야기를 진척시켰다.

“일만이라…….”

편월의 미간에 주름이 그려졌다. 통상 성 공격은 세 배 이상의 병력이 되지 않으면 어렵다.

그런데 그 병력에 있어 윤주군이 두 배 가까이 많다. 이건 심각하게 생각해서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그렇지만 방금 백성의 말에 의하면 윤주의 백성들이 오치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 같았소. 이 점을 잘 이용한다면 병력의 차이는 크게 문제시되지 않으리다.”

송지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로선 지금이 윤주성을 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병력의 수에서 편월을 위축시켰다고 여겨 백성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건 맹 장군의 조사가 끝난 후에 거론할 문제요.”

여전히 담개는 윤주의 백성들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약간은 무거운 어조로 송지의 말을 받았다.

“그야 당연한 말씀이오. 내 얘기는 윤주성을 칠 것 같으면 미리 써 둘 손은 써 두자는 것이오.”

“그 미리 써 둘 손에 관해서인데… 송 군감은 윤주성을 찌를 급소가 어디라고 생각하오?”

여전히 미간에 주름을 세운 채 편월이 입을 열었다. 병력의 차이는 당장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 다른 수를 강구할 수밖에 없다.

“말할 것도 없소. 오늘 온 백성들의 신분만 확실하다면, 그들을 통해 성안에 있는 백성들을 움직일 수 있을 거요. 병기창에 불만 질러도 얼마든지 유리한 싸움을 할 수 있을 거요.”

송지의 말은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어떤 군사든 농성 시에 백성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몇 배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게다가 지금 윤주성은 백성들과 군병들이 견원지간처럼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탈하거나 이적 행위를 하는 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병사들을 따로 배치해야 될 테니, 지금 공격한다면 오치는 이중 삼중의 곤욕을 치를 게 분명하다.

“어쨌든 오늘 이 석축산으로 온 백성들은 탄금성으로 옮기시오. 간인이 끼여 있더라도 거기선 어쩔 도리가 없겠지.”

“그럼 윤주성을 치실 작정이오?”

“그건 며칠만 더 지켜보도록 합시다. 만약 윤주성을 치게 되면 탄금성과 이 제운교의 수비도 염두에 둬야 하오. 도연각을 배후에 두고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겠지.”

편월의 이 말도 가장 기본적인 것 중 하나였다. 윤주성을 치는 것보다 이미 내 것으로 굳혀 놓은 것들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 난 맹 장군에게 가서 대장군의 명을 전하리다.”

담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진즉부터 미심쩍어하던 백성들을 직접 심문해 보고 싶은 것이리라.

“아까 하던 얘긴데, 말을 꺼내셨으니 그에 대한 대비는 생각하고 계시는 거요? 대체 누굴 남겨서 탄금성과 제운교를 지키게 할 작정이오?”

담개가 나가자마자 송지가 재빨리 물었다. 군감으로서 편월의 의중을 알아 둬야 나중에 실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황월대와 청월대 일부.”

“역시…….”

편월의 대답에 송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알겠소. 그럼 소장도 탄금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겠소.”

밖으로 나가는 송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편월은 문득 광운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도 하고 있어.’

광운이 사주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은 벌써 알고 있었다. 비록 멀리 떨어진 윤주 땅이지만, 여기서 자신이 움직인다면 그만큼 광운에게 걸리는 부담이 줄어들 건 뻔하다. 그래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윤주성을 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광운의 영상이 조금 흐릿해지자, 그 뒤를 이어 유화와 죽영의 얼굴이 망막을 채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2

근자에 이르러 증두신의 가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지워지질 않았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처음엔 도와주러 왔던 상초국 병사들의 은근한 위협 탓이었다. 시작부터 십만 대군을 상륙시켰던 그들은, 해전에서의 첫 번째 패전을 핑계로 다시 오만의 병사들을 증파하겠다고 알려 왔고, 며칠 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원군의 숫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엄청난 비용이 들긴 했지만, 가겸후와 당당히 겨루면서 강국의 지반을 더욱 굳혔다는 점과 비교하면 손익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비옥한 강회 지방에서 나는 곡식들은 지원군의 군량을 충당하기에 충분했고, 해안의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다른 나라 다른 지방으로 그야말로 금값으로 팔려 나가 군자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증두신은 상초국의 원군을 부른 자신의 행위가 과연 잘했는가 하는 의혹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바로 그게 자신의 딸과 편월의 혼례를 추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늘도 거죽성의 망루에 올라 멀리 북쪽을 바라보는 증두신의 고심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였다. 저 아스라이 펼쳐진 강주평야의 끝엔 율천국과의 국경이 있고, 거길 지키고 있는 상초국의 대원수 소촌은 어제도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의 조세 및 형벌과 부역의 면제를 요청하는 장계狀啓를 올렸다. 이유는 물론 보다 원활한 군자금의 조달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일견 그것도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거죽성에 있는 세미를 최전선까지 이동시키는 것만 해도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든다. 현지에서 바로 조달하게 한다면 많은 경비를 절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만치 만약 그게 편월이 이끄는 정허군의 요청이었다면 증두신은 보다 쉽게 승낙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사위가 될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어쨌든 그들은 같은 피를 나눈 같은 민족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상초국은 분명 다르다. 사용하는 말도 다르고, 혈관 속을 흐르는 피는 물론 피부색도 조금 다르다.

바로 그 점이 증두신이 고민하는 핵심이었다. 비록 몇 개의 나라로 쪼개져 이백여 년에 걸친 난세가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땅은 이민족의 발길에 더럽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이민족의 발길을 자신이 끌어들인 것 같아 증두신은 불안하기도 하고 염려스럽기도 했다.

‘상초국의 병력이 십삼만에 달한다.’

이 점도 증두신의 숨을 막히게 하는 부분이었다. 지난 삼 년간 상초국 원군 십만 중 이만 정도가 전사했다. 거기에 다시 오만의 병력이 추가로 바다를 건너오고 있으니, 이젠 강국 전체의 병사 수보다 훨씬 많아지게 되었다.

물론 최악의 경우 상초국과 총력전을 벌일 수는 있다. 그들의 보급을 끊고 지리적 이점을 동원해 싸운다면 병사들의 수적 열세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다. 국력을 총동원해 싸워 이긴들 뒤에 남는 건 율천국이나 다른 나라들에 괴멸당하는 것뿐이다.

아니,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같은 민족에게 망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약 패해 버린다면?

상초국의 무력과 그 병사들의 용맹성을 생각하면, 그들은 강국을 발판으로 이 나라 전체를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강주 증가는 이 나라에 이민족을 끌어들인 장본인으로 역사에 그 오명을 길이 남길 게 뻔하다.

더 이상의 지원군을 받지 말고, 이미 와 있는 상초국 병사들도 조금씩 철수시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전쟁의 양상은 증두신의 머리를 지나쳐 율천국과 상초국의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강국이라는 땅만 빌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전하, 급보이옵니다! 정허군이 윤주성을 치기 시작했다고 하옵니다!”

반 무장 차림의 이환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와 다급한 어조로 보고를 했다.

“이대로 지켜보고 있어도 될는지요?”

탄금성에 들어 있는 정허군의 세력 확장은 강국의 입장에서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국경의 한쪽을 지켜 주는 방패 역할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들도 식읍 십만 호로는 빠듯하겠지.”

증두신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정허군의 행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편월이 세력을 확장해, 강국과 상초국이 싸우는 날이 온다면 한 힘이 되어 줬으면 싶었다.

“그럼 전하께서는 정허군의 발호를 그대로 지켜볼 작정이시옵니까?”

“그들은 이제 우리와 한편일세. 같은 편이 힘을 키우는 걸 방해할 이유는 없겠지.”

“하오나 그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사옵니다. 혼례를 승낙하고도 그 후 인사는커녕 혼례 절차를 상의하는 사자도 한차례 보내지 않은 자들이옵니다.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 이참에…….”

“이 장군.”

증두신은 이환의 말을 조용히 막았다. 그러고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이 장군은 정허군과 상초국 중 어느 쪽을 더 믿고 있소?”

“예? 그건 또 어인 하문이신지…….”

이환으로선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얘기였다. 아니, 도대체가 갈피조차 잡을 수 없는 증두신의 말이었다.

“주위에 듣는 사람은 없소. 그러니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그, 그야 상초국 병사들은 오늘도 우리 강국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반면, 정허군은…….”

여전히 증두신의 심정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 이환의 대답은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상초국이 우릴 위해 싸워 주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이제 이환은 곧바로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증두신의 속내를 짐작하려고 노력했다.

그 심정에 아랑곳없이 증두신은 독백을 하는 것처럼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우리 강국은 이쯤에서 망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소.”

“전하!”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는지라, 이환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 장군은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상초국의 군세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오? 무려 십만이 넘는 대군을 상대로 이 나라 사직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오?”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물론 소장은 전하께서 싸우라 하신다면 그 상대가 누구든 기필코 쳐서 승리를 할 것이옵니다만!”

“믿음직스럽소.”

자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이환을 칭찬하면서도, 증두신은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지우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환은 섬뜩한 냉기가 등골을 스치는 걸 느꼈다. 번개처럼 뇌리를 스친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은 곧바로 이환의 입을 통해 뱉어졌다.

“그렇다면 전하께선 상초국이 우리나라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옵니까?”

“아직은 확실치 않소. 하지만 이민족의 원군을 너무 많이 나라 안에 불러들이고 보니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구려.”

그 말은 이환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계산을 하게 만들었다.

‘상초국의 원병은 곧 십삼만이 된다.’

거기에 비해 강국은 싸울 수 있는 모든 백성을 동원한다고 해도 이십만을 바라기 어렵다.

아니, 이 경우 병력의 다과多寡는 별개 문제일 수도 있다. 상초국과 싸우게 되면 그 전장은 강국이 될 게 분명하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전쟁을 치르고 나면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도 대부분 학살당하거나 이 땅을 떠날 것이다. 설사 겉으로 승리한다고 해도, 속내는 지독한 패배에 다름 아니게 된다. 나라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대왕께선 그걸 고심하고 계셨구나.’

증두신의 마음을 알게 되자, 이번엔 이환의 가슴이 비수에 찔린 듯 아려 왔다. 최측근에 있으면서도, 증두신이 무엇을 고민하는지도 알지 못했다는 자책감 탓이었다.

일단 알고 나면 이환은 증두신이나 강국에 있어 둘도 없는 충신이었다.

“전하, 소청이 있사옵니다.”

돌연 이환은 그 자리에 부복하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청이라니?”

“소장에게 군사 오천을 딸려 정허군을 지원토록 하소서.”

이환의 말이 너무 뜻밖이었는지라, 증두신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허군의 세력 확장을 견제해야 된다는 뜻을 비쳤던 그였으니까 말이다.

“전하의 깊은 심중을 소장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사옵니다. 이제 알게 되니, 비로소 눈이 뜨인 듯한 기분이옵니다. 하오니 소장으로 하여금 정허군을 돕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는 언젠가 우리나라의 부마가 되실 분이라서가 아니라, 장차 있을지도 모를 이민족의 우환에 대비코자 하는 마음이옵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런가? 이 장군은 그런 마음으로 정허군을 돕겠다는 것인가?”

“이렇게 정허군을 도와주는 일이 결코 헛일은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부디 윤허해 주시옵소서!”

“알겠소. 하지만 이 장군은 이 나라의 기둥이니, 이 장군을 보낼 수는 없소. 정허군을 지원하는 거라면 오지형 장군으로도 충분할 거요. 그쪽의 지리에도 밝을 테니.”

“명심하여 봉행하겠나이다.”

이환으로선 불만이 없었다. 여기선 정허군에 원군을 낸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누가 가느냐는 건 별 상관 없었다.

증두신 앞을 물러 나온 이환은 즉시 오지형을 찾아 정허군을 지원할 병력을 수배하기 시작했다.

“명심하시오. 정허군을 힘껏 돕되, 그들의 허실을 정확하게 염탐하는 것도 잊지 마시오. 이건 나중에 반드시 힘이 될 것이오.”

확실히 이환은 용장이자 지장智將이라 할 만했다. 정허군을 돕는다는 명분을 얻는 것과 동시에, 그 강하고 약한 걸 파악하려는 현실적 이득도 결코 잊지 않았다.

어쨌든 거죽성 안은 갑작스러운 북소리와 소라고둥, 인마의 소음 때문에 한동안 떠들썩했다.

그리고 강국의 오천 병사가 거죽성을 떠난 건 다음 날 새벽. 전날 해질 무렵에야 원군을 보내겠다는 사자가 갔으니 파격적으로 빠른 파병이었다.

* * *

이마 가득한 땀을 닦으며 광운이 실내로 들어오자, 죽영과 유화는 하나같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후끈 달아오른 남자의 냄새와 갑옷에 먹인 기름 냄새, 거기다 말 냄새와 함께 불에 탄 냄새까지, 한마디로 전쟁의 냄새가 한꺼번에 후욱 끼쳐 왔기 때문이다.

어느 여자가 전쟁을 좋아할까? 그래서 그녀들도 천성적으로 전쟁이 싫었다.

하지만 유화부터 먼저 웃으며 광운에게 달려가 그의 손에 들린 투구를 받아 들었다.

“아저씨, 수고하셨어요. 이제 갑옷을 벗고 편히 쉬세요.”

그 말을 듣고서야 죽영도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광운에게로 걸어갔다. 그가 벗을 갑옷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아니, 간단히 식사만 하고 곧 나가 봐야 하오.”

여느 때와 달리 광운은 갑옷을 입은 채 탁자에 와 앉았다. 갑옷의 무게까지 견뎌야 하는 의자가 조용히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럼 오늘 밤에도 또 싸움을…….”

조금은 맥 빠진 음색으로 말하던 죽영이, 그 끝을 깊은 한숨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제 마흔도 중반을 바라보는 그녀의 나이였다. 외모적인 아름다움은 시들 때도 되었건만, 젊을 때와는 또 다른 원숙미가 그녀의 전신에 차분하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음, 아무래도 오늘 밤엔 사주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을 것 같소. 그러니 준비를 단단히 해 두시오.”

유화가 재빨리 차를 마련해 놓은 후 밖으로 나갔다. 음식을 가지러 가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광운과 죽영에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죽영은 천천히 주전자에서 차를 따랐고, 광운은 묵묵히 마시기만 했다.

사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사주군의 예비대가 유인에 걸려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지 벌써 한 달이 가까워 온다.

그사이에도 싸움은 계속되었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소강상태를 유지했다는 게 정확하다.

그렇게 사주군이 주춤하고 있는 사이, 막주의 원군과 합류한 광운은 견고한 흑암성의 포위를 뚫고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거기엔 상림호와 진도수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는 건 새삼 말할 것도 없었다.

막주의 원군은 달랑 병사들만 온 게 아니었다. 엄청난 군량과 무기, 각종 물자 등을 함께 가져와 농성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한껏 고무시키기도 했다.

거기에 비해 그 이후의 사주군은 한심스럽다 싶을 정도였다. 하루 저녁의 싸움에서 이만에 가까운 병사들을 잃었으니 사기가 꺾이는 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거기에 더해 이탈하는 군벌까지 생겼다. 주로 허주나 강국과 경계를 가까이 둔 곳에서 온 병력이었다.

그 이유를 광운은 알 것 같았다. 편월에 대한 소식 중 가장 마지막에 들은 게 탄금성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성을 하나 얻었다고 만족해할 성격이 아니니, 그 주변을 들쑤시고 있을 게 틀림없다.

바로 그게 이 먼 곳의 사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광운의 부담은 한결 줄었다.

그래도 아직 사주군은 육만에 가깝다. 그들이 총공세를 취한다면, 원군까지 합쳐 사만을 조금 웃도는 막주군으로선 고전을 치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성이라는 든든한 보루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싸움은 영욱성에도 영향을 미치겠죠?”

역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죽영이 나직이 물었다. 얼굴엔 수심이 가득 드리워진 모양이었다.

“옛날의 영욱성이 아니오.”

죽영의 심정이 어떤지 익히 알 수 있기에, 광운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성의 주인은 바뀔지 몰라도 거기 사는 사람들은 바뀌지 않겠죠. 전마戰魔가 할퀴어도 제 한 몸 지킬 수조차 없는 가련한 백성들…….”

서방정변이 시작된 이후로 상림호의 상가군에서부터 흑암성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병사들을 돕고 있었던 터에, 죽영은 현재 파양주가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니, 설사 모른다고 해도 영욱성의 집무창을 빠져나올 때 봤던 농부들과 천민들의 희생은 결코 잊지 못할 터였다.

광운은 할 말이 없었다. 마음으로야 그 희생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스스로 생각해도 확신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죽영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 역시 시대의 아픔을 온몸에 새겨 뒀는지라, 하루라도 싸움 없이 지낼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 하늘 아래의 어느 곳이든, 전쟁이 없는 곳만 있다면 광운과 둘이 가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곳이 있을 턱이 없다. 굳이 있다면 내 힘을 강대하게 만들어 그 주변의 다른 이들이 침략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게 만드는 일뿐이다.

그걸 잘 알기에 죽영은 결코 광운에게 싸움을 그만두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적이라도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지는 마세요.”

다만 이렇게 말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때마다 광운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로 내뱉어 약속할 정도로 자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결코 달콤한 감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냉철한 이성으로 수행되는 것도 아닌, 온갖 감정과 계산이 뒤엉켜 전혀 엉뚱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다. 이쪽에서 인정을 베풀어 살상을 하기 싫다고 해서, 적이 적게 죽는 게 아니란 얘기다.

아니, 그런 값싼 동정심에 젖어 있다간 오히려 이편의 희생을 더욱 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 자체가 비정해서 이 난세의 지옥도를 도처에 그려 내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전쟁이라는 묘한 이름의 유기체가 사람으로 하여금 비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부추기는 것일 터였다.

결국 이 난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누가 더 비정해지느냐 하는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다. 그들은 더욱 치열한 각축을 벌일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지상에 그려지는 지옥의 그림은 더욱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다.

“식사하세요.”

어느새 유화가 음식을 준비해 와 광운 앞에 내려놓았다.

광운이 먹는 거라고 해서 여느 병사들과 다를 건 없었다. 보리와 콩이 섞인 밥 한 그릇에 소채 두 가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광운은 아주 맛있게 그릇을 뚝딱 비웠고, 그의 식사가 끝나자마자 두 여인은 재빨리 치우기 시작했다. 오늘 밤엔 야간전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병사들은 야참을 필요로 할 터였다. 그 준비를 돕기 위해 그녀들은 서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광운은 밖으로 나갔다. 조심하라는 말 따위는 새삼 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그녀들이 더욱 잘 알기 때문이었다.

벌써 장마가 끝났지만, 비가 흔한 막주에 가까운 흑암성의 하늘은 짙은 먹구름을 잔뜩 안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의 야간전투는 수중전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3

뜻하지 않았던 강국의 원군은 정허군의 사기를 한껏 치솟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때는 귀순해 온 백성들을 통해 윤주성 내부는 물론, 성 바깥에 사는 사람들과도 기별을 통하고 있던 참이었다. 또한 부족했던 공성 무기들도 충분히 장만해 둔 뒤였다.

그런 사전 준비를 모두 끝내 놓고도 선뜻 윤주성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던 건 역시 병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아무리 성안에서 백성들이 호응한다고 해도, 사천으로 농성하는 일만의 군사들을 공격한다는 건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강국에서 바라지도 않았던 원군을 보내 주겠다는 사신이 오더니, 그다음 날 제꺽 오천의 병사가 도착했다. 편월과 정허군으로선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로써 그 즉시 작전 회의가 개최되어, 각각의 부서가 정해졌다.

우선 남아서 탄금성과 제운교를 지킬 병사는 총 천오백으로, 황월대 전원과 청월대 오백이었다. 그 장수는 물론 지두룡이었다.

다음으로 윤주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또 다른 성과 연락을 끊는 책임은 유군이 맡았다. 거기엔 남은 청월대 오백도 배속되어 윤주성에서 가장 허술하다고 판단되는 서문에 대한 공격도 겸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견고하고, 또 저항 역시 가장 격렬할 게 분명한 성의 동문 공격은 편월과 남은 정허군이 맡았다. 거기에 배속된 인원은 삼천이백 정도.

그 나머지인 성의 북문과 남문은 강국의 원군 오천이 각각 이천오백씩 나눠 치기로 했다.

이건 누가 봐도 나무랄 데 없는 배치였다. 정허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두 곳인 남문과 북문을 맡았으니, 명분과 더불어 승전 시 공훈을 모두 챙길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원군의 입장에선 비교적 손쉬운 곳을 공격하게 되었으니 병력의 손실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어쨌든 이 싸움의 주체는 정허군이지 강국군이 아니니까 말이다.

아무튼 작전이 수립되자 편월은 곧바로 병사들을 진발시켰다. 이미 시기는 무르익었으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유군을 보낸 편월은 지두룡을 가만히 불렀다.

“우리가 출발하는 즉시 괘공교에 흑유 통을 갖다 놓도록 하시오.”

“흑유 통을?”

의외의 말에 지두룡은 깜짝 놀란 듯 편월을 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윤주성 공격에 참가하지 못한 불만도 섞여 있었다.

“그렇소. 그 흑유 통을 쌓아 놓고 있다가, 도연각의 허주군이 다리를 건널 기미가 보이거든 곧바로 불을 지르시오.”

“뭐? 그럼 정말 괘공교를 불태우란 말이오?”

한층 더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지두룡을 보며 편월은 환하게 웃었다.

“아니, 그렇다고 진짜로 괘공교를 불태운다면 난처해지는 건 우리 정허군일 게요. 그러니 불 지르는 척만 하란 말이오. 그것만으로도 도연각은 절대 다리를 건널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오.”

편월의 설명을 듣고서야 지두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디에 놓여 있든 다리란 소중한 시설이다. 게다가 이천강은 물살이 센 탓으로 나룻배도 없다. 그래서 연일 싸움이 계속되는 요즘에도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제운교와 괘공교를 통해 동쪽 혹은 서쪽에 있는 각자의 목적지를 찾는다.

물론 이 두 개의 다리가 없다고 동서쪽의 교통이 완전히 차단되는 건 아니다. 바다를 이용할 수도 있고, 또 대과산맥을 올라 좁은 협곡에 걸쳐진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방법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다리들을 통해 한나절이면 왕복할 수 있는 걸, 바다나 산을 통하게 되면 짧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닷새 이상 걸린다. 심지어 그 와중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니 어느 쪽이 됐든 다리를 불태우거나 파손한 군벌은 백성들의 엄청난 원성을 사게 된다. 그게 당장의 전력에는 큰 차질이 없을지 몰라도, 두고두고 손해가 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편월은 불을 지르는 척만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랬다가 만약 허주군이 정말로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겠소? 다리를 불태워도 괜찮겠소?”

지두룡의 이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무리 전쟁엔 변수가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된다지만, 지금은 정허군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 자칫 자그만 실수 하나로 인해 전군이 전멸을 당할 우려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맞춰 둬야만 한다.

“괘공교를 불태울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도연각이 다리를 건너지는 않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탄금성에 있는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막으시오. 그래도 안 되겠다는 최악의 경우에 몰리게 되면, 그땐 지 장군의 판단대로 하시오.”

“그 점은 잘 알겠소이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만약 탄금성을 모두 비웠을 때 그 배후를 강국이 찔러 오면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소?”

“바라지도 않았던 원군까지 보내 준 증두신이오. 설마 배후를 찌르지는 않을 거요.”

“그 바라지도 않았던 원군을 보내 준 게 더욱 수상쩍어서 묻고 있는 거요.”

난세 사나이들의 말에는 꾸밈이 없다. 특히 이런 군사작전에 임해서는 속에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해 버린다. 방금 지두룡의 어투에도 그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때는 지 장군의 판단대로 괘공교를 처리한 후 곧바로 석축산으로 후퇴하시오.”

사실 이건 편월이 미리 계획해 두었던 건 아니었다. 애당초 거기에 대해선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에 우선 떠오르는 대로 얘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막상 얘기를 해 놓고 보니, 그건 그대로 하나의 훌륭한 계획이었다. 일단 석축산으로 들어가고 나면 강국군이든 허주군이든 쉬이 손을 댈 수 없을 게고, 그사이 윤주성을 치던 병력을 돌려 앞뒤에서 협공을 하면 어떤 적이든 무찌를 수 있을 터였다.

“존명!”

불만스러운 와중에도 나름대로 시원해졌는지, 지두룡은 깎듯이 군례를 갖췄다.

“수고하시오. 아마 다음엔 윤주성에서 만나게 될 거요.”

밝게 웃으며 편월은 벌써 아스라이 멀어져 간 유군의 배후를 바라보며 말을 몰았다.

윤주성이 빤히 보이는 출운평出雲坪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야산에 편월이 도착했을 때는, 서편 하늘 가득히 검붉은 노을이 사위어 가는 시각이었다.

아무래도 국경 지방이다 보니 들 자체가 그리 넓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장마가 막 끝났기에 논물은 담뿍 불어 있고, 모는 석양 속에서도 파랗게 자라고 있어 이대로라면 올가을엔 대풍이 들 것 같았다.

그 광경을 보며 올라선 야산 정상에는 어느 전장에나 있기 마련인 진막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강국군 앞에서 정허군의 대장군이 뒤에 빠져 있는 모습은 보일 수 없다는 편월의 강력한 주장 탓이었다.

당연히 각 장수들은 기겁을 하고 말렸다. 강국의 원군과는 한 번도 손발을 맞춰 보지 못했으니 뒤에서 그 점을 잘 조율하는 게 대장군이 마땅히 할 일이라 했지만, 편월은 막무가내로 진두지휘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거기엔 편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강국의 원군과 합쳐 봐야 병력에선 윤주군에 비해 적거나, 간신히 비슷해진 정도다.

그런데 자신이 뒤에 빠져 있으면 근위대 역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싸움에 가담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가뜩이나 모자라는 병력에, 정허군 중에서 가장 용맹하다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손발을 묶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원군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자고로 원군은 적당하게 싸우는 걸로 유명하다. 자신들의 싸움이 아니기에 최대한 희생을 적게 내려고 몸을 사린다.

그럴 때 연합군의 총대장인 편월이 진두에 선다면 그들은 분발하지 않을 수 없다.

곧 강국의 부마가 될 예정이란 걸 감안하면, 그 효과는 배가될 터였다.

편월이 도착한 것을 알자 각 부대에서 속속 전령들이 달려왔다. 보고는 한결같이 준비가 끝났으니 명령만 내려 달라는 것이었다.

“성 밖에 사는 백성들은 어떻게 됐나?”

성이라고 해서 달랑 성곽에 둘러싸인 건물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밖엔 성외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가옥도 있고, 난전을 비롯해서 각종 시전도 들어선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그들이 입는 피해는 피할 수 없을 테니, 편월은 그 점부터 먼저 물었다.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피신시켰고, 성내의 백성들과도 연락이 닿았습니다. 우리가 공격하면 그들은 기회를 봐서 성안 곳곳에 불을 지를 것입니다.”

“그걸 너무 믿지는 마라. 싸움은 어디까지나 우리 손으로 시작해서 우리 손으로 매듭지어야 한다.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존명!”

“적의 동태는?”

“우리들이 공격한다는 걸 알자 일제히 꼬리를 말고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성 밖의 백성들을 피신시킬 때도 고작 화살 몇 대를 날렸을 뿐입니다.”

“적의 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겠군.”

말을 하면서 편월은 윤주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 성 전체를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성에서 빠져나온 백성들에 의해 성의 세세한 구조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국경의 성답게 해자는 깊고 넓었고, 성문도 견고하게 지어졌다.

‘그 해자는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지.’

윤주성의 해자를 만들고, 해마다 보수를 한 사람들이 바로 이 땅의 백성들이다. 그 약하고 튼튼한 곳을 잘 알고 있으니 오늘 피신하기 전에 미리 파괴해 두라고 얘기해 뒀다.

사방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럴수록 불을 환하게 밝혀 둔 윤주성의 모습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저것도 쓸데없는 짓이지.’

야간전투에서 성에 저처럼 휘황한 불을 밝혀 두는 건 적으로 하여금 위축감을 갖게 만들려는 의도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처럼 맹렬한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정허군을 상대로 저러는 건 말 그대로 허장성세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 불빛으로 인해 공격군의 화살 밥이 되기 십상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오치가 저렇게 불을 밝히고 있는 건 이미 바닥에 떨어져 버린 윤주군의 사기를 조금이나마 진작시키기 위함일 터였다.

하긴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한 가지는 있다. 공격군이 성벽에 달라붙었을 때 불씨를 떨어뜨리거나,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지르는 것 말이다.

“대장군, 해자의 물이 거의 빠졌다는 전갈입니다!”

드디어 편월이 기다리던 보고가 들려왔다.

“좋아. 공격 신호를 올려라!”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편월은 벌써 소질풍에 올라 있었다.

“대장군을 따르라!”

근위대원들 역시 진즉부터 대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이들은 편월이 진두에 서서 싸워 주는 게 반갑기까지 했다. 뒤에 빠져 있었다면, 오늘도 근질거리는 손발을 달래며 다른 사람들이 싸우는 걸 구경만 하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우오와아-!”

편월이 말을 달리자, 근위대원들이 특유의 함성을 지르며 뒤를 따랐다.

삐이잇, 삐잇!

동시에 야산에서는 연방 향전이 발사되었다. 공격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보내는 신호임과 동시에, 윤주군을 위축시키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쏴 댔다.

“와아아-!”

조용한 밤의 어둠에 잠겨 가던 출운평이 마치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들썩거렸다. 근 일만에 달하는 병사들의 함성과 그들이 내딛는 발길이 대지를 세차게 울린 탓이었다.

“선봉 백월대 출격!”

어디선가 강숙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고, 거기에 호응하듯 충차가 움직이는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른 부대는 활을 쏴라! 백월대를 지원해!”

편월이 고함을 질렀지만, 그 전에 벌써 화살이 공기를 찢는 소리가 그들먹하게 사방을 채우고 넘쳤다.

다들 전쟁엔 익을 대로 익은 사람들인지라 지금쯤 활을 쏴야 할 때라고 판단하고 명을 내리기도 전에 행동에 옮긴 것이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 불화살의 무더기가 보이는 걸 보면, 벌써 성에 바짝 다가간 부대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강숙의 성미를 격발시켰다. 어떤 경우든 선봉인 자신들보다 앞서 간 부대가 있다는 건 무장으로서 참아 넘기기 힘든 일이었다.

“달려라, 달려! 이놈의 말들, 에잇!”

마음과는 달리 충차를 끄는 말들의 속도가 늦자, 강숙은 직접 채찍질을 가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충차가 마음대로 움직여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너른 윤주성의 해자 폭을 감안하여, 그만큼 길고 크게 만들었기에 강숙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서둘지 마시오, 강 장군! 공성 시의 일등 공훈은 누가 먼저 성에 들어가느냐 하는 거요. 화살 따위나 쏘는 게 아니란 말이오.”

송지가 서두르는 강숙을 제지했다. 공성 무기를 제대로 갖춘 선봉대가 무너진다면 그다음 공격이 어려워진다. 충차나 운제는 성병들이 충분히 위축된 다음에 활용되어야만 한다.

편월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건 물론이다. 그래서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손수 활을 잡고 쏴 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다른 부대들도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장군에게 뒤처지지 마라!”

“백월대를 지원하라! 성루에 있는 적병들을 쓸어버렷!”

각 부대의 장수들은 악이 받친 고함으로 부하들을 독려하며, 야수의 표정을 지은 채 마구 말을 몰았다.

성병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연방 북과 함성을 터뜨리며, 그동안 잔뜩 비축해 뒀던 화살을 마구 쏟아 부었다.

하지만 그건 성에 달려드는 공격군의 발길을 전혀 막지 못했다. 전쟁에서 쏘는 화살은 그 하나하나에 쏜 사람의 기백이 실려 있는 법이다. 필승의 신념으로 쏴도 제대로 맞을 둥 말 둥인데, 위축된 마음으로 쏴 대니 그건 물자의 낭비에 다름 아니었다.

“와아앗!”

돌연 공격군이 기묘한 함성을 발했다.

누군가 벌써 성벽에 매달려 기어오르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그게 도화선이었다. 공격군은 누구를 막론하고 일번 돌입의 영예를 생각하고 있을 터. 그 모습을 보자 그들은 한층 광분한 모습으로 말을 달렸다.

특히 강숙은 그야말로 눈이 이마에 올라붙었다. 보기 좋게 성문을 깨뜨리고 성에 가장 먼저 진입하겠다던 꿈이 또다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제 강숙에게 충차 같은 공격 무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마치 백월대를 지휘해야 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미친 듯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측근의 아장 몇몇이 간신히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의 지휘는 무의미해져 버리고 만다. 병사들은 완전히 전장 심리에 휩싸여 생사 따위는 물론, 대체 뭘 위한 전쟁인지도 잊어버린다. 오직 나와 적이 있고, 그 적을 죽여 없애야 된다는 악귀와도 같은 살기만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럴 때 전쟁 경험이 많은 노련한 장수가 필요하다. 말이나 신호는 이미 먹혀들지 않으니, 다만 행동으로 보여 줌으로써 부하들을 이끄는 역할을 잘해 내니까 말이다.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편월이기에, 그 역시 소질풍을 마구 몰아 그대로 물이 빠진 해자로 뛰어들었다. 그게 정허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이미 충분히 계산해 둔 뒤였다.

“으와아앗!”

마치 편월이 해자에 뛰어들길 기다렸다는 듯 또 한차례 함성이 올랐다. 이번엔 공격군이 아니라 농성 중인 윤주군이 터뜨린 것이었다.

“대장군, 성내에서 불이 올랐소! 안에 있는 백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오!”

맹아 역시 해자에 뛰어들어 진흙 속에서 연방 미끄러지는 말을 바로잡으며 숨 가쁘게 보고했다.

편월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농성 중인 성내에 불이 올랐다면 공격군으로선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편월은 이 싸움에 있어 백성들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의 도움은 그대로 가슴에 새겨 두면 될 일, 싸움은 오롯이 자신들의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

편월은 소질풍의 안장에 마련된 밧줄을 성벽 위로 던져 올렸다. 이대로 기어 올라갈 작정이었다.

“왜 이리 경거망동하시오? 대장군이 할 일을 하시오! 에이익!”

한사코 말렸지만 전혀 듣지 않는 편월을 그대로 해자 바닥에 밀어 버린 후, 맹아가 대신 그 밧줄에 매달렸다.

“촌각이라도 전군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말란 말이다, 이 멍청한 대장아!”

매섭게 한마디 내뱉은 후 맹아는 빠르게 밧줄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꽈앙, 와르륵!

그때 최초의 충차가 성문에 부딪치며, 그걸 끌던 말들이 한꺼번에 해자로 추락했다.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 미처 세울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정작 지휘관인 강숙의 모습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충차는 연이어 성문을 격타했고, 마침내 운제가 성루에 걸렸다.

다른 곳의 상황도 비슷할 터, 이제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것 말이다.

“와아, 백월대다! 백월대가 성루에 올랐다!”

“와아아, 이겼다!”

최대한 성에 가까이 접근해 화살로 성벽을 오르는 아군을 지원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강숙이 그 속에 섞여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일단의 백월대 병사들이 성루에 올라 깃발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꽈앙!

그 순간 다시 한 대의 충차가 성문을 들이받았고, 견고하게 석벽에 박혀 있던 경첩이 서서히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서쪽으로 향한 편월의 발길을 막던 문 하나가 그렇게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