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류일보逆流一步
1
승낙을 하긴 했지만, 편월로선 당장 혼례를 올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직 석축산에 있는 유군과도 합류하지 못한 형편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계절은 본격적으로 장마철에 접어들어 연일 비가 내렸다.
당연히 이천강의 물도 불어 당분간은 이쪽에서 윤주군을 을러 볼 수도 없었다.
그게 편월은 걱정이었다. 이쪽의 견제가 없다면 윤주군은 온전히 석축산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유군이 위험해진다는 얘기다.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며 맹아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하긴 편월이 있는 곳에 이처럼 예의 없이 드나드는 건 그뿐이었다.
“대장군, 들으셨소?”
“뭘?”
자신의 고민과는 동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은 맹아가 지금 이 순간만은 조금 귀찮아진 편월이었다.
“이번에 붙은 해전에서 가겸후가 크게 이겼다고 하오!”
“그게 뭐 어때서?”
편월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벌써 오늘 아침에 그 보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알고 계셨소? 그렇다면 얘기하기가 편하겠군. 당장 증두신에게 사자를 보내서 그 딸과의 혼담을 파기한다고 통보하시오. 정 갈 사람이 없다면 소장이…….”
“가겸후가 해전에서 한 번 승리한 것과 이 혼담이 무슨 상관인가?”
“정말 몰라서 하는 말씀이오? 그나마 증두신이 가겸후와 싸워 밀리지 않았던 건 해전에서의 승리 때문이었소. 그런데 이젠 해전에서도 패했으니, 강국이 가겸후의 손에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일 거요. 그런데 지금 증두신의 사위가 된다면, 이다음 가겸후의 칼날을 피하기 어려울 거요.”
“이건 맹 장군의 생각인가?”
조용한 편월의 반문에 맹아는 내심 찔끔했다. 사실 이 말은 조금 전에 장수들이 모였던 자리에서 나온 얘기를 그대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의 생각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요는 앞으로의 처신이오! 자, 어떻게 하시겠소? 물론 당장 혼담을 거절하시겠지요?”
“맹 장군.”
편월은 다시 한 번 조용한 목소리로 맹아를 불렀다.
“맹 장군은 그렇게도 가겸후가 겁이 나는가?”
“뭐?”
맹아의 눈이 커다랗게 부릅뜨였다. 다른 말은 몰라도 겁이 나느냐는 말은 대장군인 편월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그냥 들어 넘길 수 없었다.
“내가 가겸후 따위를 두려워해서 이런 말을 하는 줄 아시오? 이건 모두 우리 정허군의 앞날을 생각해서 나온 충정 어린 말이오. 그걸 왜 모르시오?”
“나도 맹 장군이 가겸후를 겁내서 이러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가겸후를 의식해야 하나? 겁나지도 않는 존재인데.”
맹아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편월의 말대로 두렵지 않은 대상은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뒤가 켕기는 건 또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전쟁의 승패는 결코 같은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대장군은 정말로 증두신의 딸을 아내로 맞을 생각이오?”
“준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만약에, 만약에 말이오. 가겸후가 강국을 집어삼키고 우리에게 창끝을 돌린다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그땐 모든 걸 걸고 한바탕 싸울 수밖에.”
가겸후와도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편월의 말에 맹아는 입을 다물었다. 뾰족이 반박할 얘기도 없었다.
그래도 뭔가 미진한 맹아였다.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았다.
“아마도 맹 장군은 유화의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군.”
“맞다, 유화 누님!”
맹아의 속내를 눈치 챈 편월이 한마디 하자, 맹아가 기성을 지르며 받았다.
“말씀 잘하셨소! 그래, 유화 누님은 어쩌실 거요?”
잠시 수그러들었던 맹아의 어투가 다시 강하게 변했다. 해전에서 이긴 가겸후에 대해서만 신경 쓰다 보니 유화에 대해선 잊고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혼담이라고 하는 건 저쪽 얘기고, 난 그저 주는 사람을 받아 두는 거라고.”
“예?”
맹아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을 데려온다는 건 그저 말의 꾸밈에 지나지 않는다. 편월이 증두신의 사위가 된다는 건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누가 됐든 일단 데려다 놓으면 이쪽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딱히 내가 사랑해 줘야만 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이 혼인을 핑계로 증두신이 자기 대신 나가 싸우라고 하면 어쩌실 거요?”
“자기 딸을 데리고 있는 건 우리 쪽이다. 증두신이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할 턱이 없지.”
“목적을 위해선 육친 한둘 정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없애는 세상이오. 그 점을 잊지 마시오.”
“세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럼 정말 증두신이 무리한 요구를 해 올 때는 그 딸을 베고 강국과 싸우겠다는 말씀이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증두신이 무리한 요구를 해 온다면, 그다음에 벌어질 일들은 모두 그들의 책임이겠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맹아는 머리 꼭대기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너무나 정략적이고 싸늘한, 이성만 내세우는 편월의 말과 행동 때문이었다.
맹아가 생각하는 혼인이란 이처럼 정략의 냄새가 농후하게 배어 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이 치 떨리는 난세를 사는 구슬픈 인간들끼리 서로의 시선을 마주 보며 의지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편월이 그 혼인을 누구보다 차가운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맹아의 젊은 피는 강한 거부감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맹아도 조금씩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편월의 말에 하등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편월의 말대로였다. 이 혼담 자체가 증두신이 원한 것이었으니, 만에 하나 잘못된다 해도 그 책임은 그쪽에 있지 이쪽이 신경 써야 할 일은 아니다. 사람으로서 참 못 할 짓이다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다. 생존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세상이니, 살기 위해 도모하는 수단이 질책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 얼굴이군. 그럼 나가서 이천강의 물이 어느 정도 불었는지 보고 오도록!”
“조, 존명!”
올 때와는 달리 머리 숙여 복명하는 맹아의 모습은 풀이 죽어 보였다.
그렇게 맹아가 물러가려는 찰나…….
“대장군, 송지요! 들어가겠소이다.”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송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농부로 보이는 기골이 장대한 청년과 함께였다.
“성주님 앞이다. 예를 갖춰라!”
어느새 근위대장 본연의 표정으로 돌아간 맹아가 청년에게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는 청년을 제지하며 편월은 송지를 쳐다보았다. ‘누구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서, 성주를 뵈, 뵈옵니다.”
편월이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청년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원래부터 그런지, 아니면 긴장한 탓인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소, 소인을 저, 정허군에 배, 배속시켜 주십시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일세. 그런데 그대는……?”
“예, 지난봄에 이주해 온 자인데 요상한 얘기를 하기에 데려왔소이다.”
“어떤 말을 했기에?”
“이천강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밧줄을 걸 수 있다고 합니다.”
“뭐?”
편월만이 아니라 맹아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청년을 다시 보았다. 덩치가 유난히 크다는 것을 빼면 여느 농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자의 말에 의하면, 자기 고향은 어약칠협魚躍七峽인지라 물에는 아주 익숙하다고 하더이다.”
심하게 말을 더듬는 청년 대신 송지가 설명했다.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약칠협에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그곳의 물살이 거칠고 험하기론 천하에서 으뜸이라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거기서 자랐다면 이천강 정도를 건너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하지만 몇 마디 말만 듣고 청년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대는 우리 군이 저따위 강 하나를 도강하지 못해 여태 이러고 있는 줄 아는가?”
냉엄한 편월의 어조가 의외다 싶었는지, 청년은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다 다시 송지에게 눈길을 돌렸다. 대신 얘기를 좀 해 달라는 의미였다.
“이자는 처음부터 우리 군에 배속되고 싶어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고 하오. 다만 봉양해야 될 노모가 계셔서 지원을 못 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노모가 돌아가시자 비로소 청원을 해 온 것이오. 나름대로는 병법도 좀 공부를 한 것 같고, 각종 무예도 어느 정도 익힌 것 같았소이다.”
“그렇다면 장마로 물이 불은 저 강을 정말 건너갈 수 있다는 말인가?”
“헤엄을 쳐서 건너는 건 일도 아니지만, 윤주군이 강물 위에 방울 그물을 쳐 뒀으니 그건 어려울 테고. 이자의 말에 의하면 강바닥을 걸어서도 건너갈 수 있다고 하더이다.”
그 역시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는 듯, 송지는 말을 하면서도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뭐? 강바닥을 걸어서 건너간다고?”
“뭐, 말이 그렇다는 거요.”
“미, 믿어 주, 주십시오. 다, 당장 보, 보여 드릴 수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대화에 청년이 끼어들었다. 뜻대로 얘기가 되지 않아 답답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자신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시험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곁에서 보고 있던 맹아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청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보다 좋을 게 없고, 설사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손해날 일은 아닌 것이다.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충분히 시험해 볼 수 있을 터였다.
“정말 자신 있느냐? 만약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시, 시험해 주, 주, 주십시오.”
매서운 어조로 몰아붙이는 송지에게 청년은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더듬거렸다.
“좋아. 맹 장군, 준비하도록!”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굳이 이천강까지 나가지 않아도 되겠지. 내성 뒤편에 제법 큼직한 연못이 있으니 거기서 시험해도 될 거야.”
“알겠습니다. 자, 가자!”
편월의 명을 받은 맹아는 청년을 끌다시피 해서 밖으로 나갔다.
“출신은 확실하오?”
“근위대의 화응이 보증을 해 줬소이다. 고향이 같다고 하더이다.”
“그렇다면 안심해도 되겠군.”
일반적인 간인이라면 벌써 이 탄금성에도 몇 명인가 들어와 있을 터이고, 또 편월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용해 먹을 구석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천강의 저편에 밧줄을 거는 건 다른 일이다. 만약 청년이 적의 간인이라면, 이건 함정이다. 아군이 건너편에 도착하기도 전에 윤주군의 밥이 되고 말 테니까.
하지만 화응이 보증을 했다니 편월은 마음을 놓았다.
“자, 가 봅시다.”
청년의 신원이 확실해진 마당에 더 이상 망설일 건 없었다. 당장 시험을 해 보고, 가능성이 보이면 곧바로 도강을 위한 작전에 착수하면 그만이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려, 내성 전체가 우계 특유의 후줄근하게 젖은 표정으로 무성한 빗줄기를 견디고 있었다.
그 비를 그대로 맞고 걸으며, 편월은 입을 열었다.
“참, 그자의 이름은 뭐라고 하오?”
“초염楚琰이라고 하더이다.”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아장 정도로 발탁해도 될 것 같소. 병법도 배우고 각종 무예에도 능하다며?”
“그거야 대장군의 재량 아니겠소.”
“그리고 이 시험은 실패한 거요. 난 초염을 질타하고 하옥시킬 것이오.”
“예? 뭐라고 하셨소?”
너무 엉뚱한 편월의 말에 송지는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렸다.
“이 성에도 아마 각지에서 보낸 간인들이 들어와 있을 거요. 만약 오늘 시험이 성공했다는 걸 알면, 그건 곧 밖으로 새어 나갈 거요. 그러니 초염이 성공을 한다고 해도, 실패를 하는 거요. 미리 슬쩍 귀띔이라도 해 두시오.”
편월은 낮고 빠르게 말했다. 어느새 시험 장소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연못에 갔을 때, 편월의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미 초염의 기상천외한 얘기가 많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보며 송지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이건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편월의 말대로 초염에게 다가가며, 송지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이제 고작 열여섯 살짜리 소년이 벌써 적의 간인들 눈을 의식하고, 또 그걸 역이용까지 하려 한다. 일군의 대장군으로선 우수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적으론 좋은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람은 각자의 나이에 맞는 사고와 행동이 있는 것이다.
‘이도 저도 모두 이 빌어먹을 시대 탓이겠지.’
스스로 위안하면서, 송지는 초염에게 몇 마디 나직이 속삭였다. 물론 남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처음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던 초염은 이내 수긍한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보다 큰 덩치와 심한 말더듬이라 조금 어수룩하게 느껴져도, 기실 머리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자, 시작하도록!”
편월과 송지가 도착하자, 맹아는 초염에게 지시를 내렸다.
초염은 옷을 입은 그대로 연못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팔 하나 길이의 갈대 줄기뿐이었다.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한차례 돌아본 후, 초염은 그대로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쏴아아-!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졌다. 멀리 대과산맥 정상 쪽에는 시퍼런 뇌전도 이따금씩 작렬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태풍으로 변할 것 같은 기세였다.
돌연 사람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초염이 물속으로 들어간 지 벌써 한 식경 가까이 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잘못된 게 아닐까?”
누군가의 입에서 우려 섞인 말이 새어 나왔다. 연못의 물은 맑았지만, 빗방울이 일으키는 파문으로 인해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초염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사람들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었다.
“누군가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소?”
송지까지 이렇게 물었을 때 연못의 물이 크게 출렁인다 싶더니, 초염의 머리가 불쑥 솟구쳤다.
“푸하!”
콜록, 콜록!
밖으로 나오자마자 초염은 연방 거친 호흡과 기침을 토했다. 그때마다 물이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당장 저놈을 포박하라!”
여전히 기침을 토하며 괴로워하는 초염을 가리키며 편월은 고함을 질렀다.
“대장군!”
그 역시 궁금해서 나와 있던 화응이 세찬 어조로 편월을 불렀다. 초염이 같은 고향 사람인지라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저놈은 요망한 거짓말로 우리 정허군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 적의 간인이 분명하니 당장 하옥시켜라! 뒤에 내가 친히 문초하겠다!”
그렇게 말한 후, 편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장군부로 발길을 옮겼다.
“송 군감!”
이제 화응은 송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송지 역시 차갑게 대꾸했다.
“대장군의 명이니 어쩔 수 없네. 또 자네도 보지 않았나? 비록 물속에 좀 오래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만한 시간으론 이천강의 반도 건너지 못할 걸세. 게다가 물살도 있으니. 자, 어서 저자를 묶어라! 성주를 속이려고 한 적의 간인이다! 한 치의 사정도 봐줄 것 없다!”
송지까지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몇 명이 후다닥 연못으로 뛰어들어 초염을 단단히 결박해 버렸다.
그날 밤, 낮부터 잔뜩 벼르고 있던 비는 기어이 폭풍을 몰고 와 탄금성에 드리워진 어둠을 찢어발겼다.
벌레 한 마리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이 세찬 폭풍우 속의 탄금성에서 몇 개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미리 준비를 해 뒀는지 그들은 어디에서도 수하를 당하지 않고 성을 빠져나갔다.
번쩍!
성을 빠져나온 그들이 한참 달렸을 때, 한 줄기 뇌전이 허공을 가르며 명멸했다.
그 순간 사람들의 얼굴이 확연히 보였다. 각기 굵직한 밧줄을 잔뜩 짊어진 송지와 맹아 그리고 초염이었다.
그들은 곧장 이천강으로 향했고, 거기서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와 합류했다.
2
격렬한 수중 야간전투였다. 함월성에서 일격을 당한 막주군은 부득불 흑암성까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선이 끊길 우려가 있어서였다.
그동안 막주군은 연전연패였다. 사주의 각 성은 물론, 호윤천 부자의 입김이 미치는 곳에 있는 모든 성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지원군을 보내, 이제 사주군은 십만에 다다랐다. 이만이 조금 넘는 막주군으로선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렇게 흑암성까지 밀리고 나서야 전세는 조금씩 회복되었다. 무엇보다 연일 비를 쏟아 내는 날씨의 도움이 컸다.
막주는 어느 곳보다 비가 흔한 지역이다. 거기서 나고 자란 막주병은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반면, 사주군엔 여간 곤란한 장애가 아니었다.
물론 사주를 비롯해 다른 지방도 비는 내리고, 지금은 장마에 접어든 상태다.
하지만 막주만큼은 아니었다. 새파랗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가히 어른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빗줄기가 연일 쏟아진다면, 어떤 강병이라고 해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사주군은 비가 조금 긋기 시작한 저녁을 기해 총공격을 감행해 왔다. 이 밤이 새기 전에 흑암성을 떨굴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그건 성급했고, 일기도 제대로 살피지 않은 부주의한 공격이었다.
잠시 그친다 싶었던 비는 해시경이 되자 강한 폭풍우까지 동반해 다시 밀어붙였던 것이다.
이건 공격군에 있어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비에 젖어 성벽이 미끄러워진 데다 간신히 밧줄이나 운제에 의지해 있던 병사들도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 속절없이 떨어져 버렸다. 막주군으로선 그야말로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사주군이 기세를 늦춘 건 아니었다. 이런 대규모 공격은 준비하는 것만도 시간이 걸리니, 시작한 김에 끝을 보겠다며 밀어붙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수중전이 되고 보니, 단연 수비하는 막주군이 유리했다.
게다가 따로 양성해 둔 이만의 수군이 흑암성 싸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원차 출발했다는 소식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화살을 아껴라! 적의 모습이 확실히 보이지 않을 때는 쏘지 말라!”
성루를 뛰어다니며, 광운은 연방 병사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흑암성은 적지라고 할 수 있는 사주의 성이다. 언제 보급로가 끊길지 모르니 최대한 물자를 아껴야만 한다.
“와아!”
돌연 성의 북문 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올랐다. 일만이나 이만의 병사가 올리는 게 아니었다. 사주군 십만이 거의 동시에 고함을 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소리는 기분 나쁘게 비에 젖은 대기를 울리고 있었다.
광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이 흑암성은 북문이 가장 취약했다. 그건 후방에 사주가 있기에 대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절대로 적의 도발에 호응해 섣불리 화살을 쏟아 붓지 마라! 이제 곧 막주에서 원군이 온다! 그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병사들에게 다시 한 번 주의를 준 후, 광운은 그대로 북문 쪽으로 달렸다.
북문을 수비하고 있는 사람은 상림호였다. 그가 맡고 있으니만큼 쉽게 뚫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성주, 적의 예비대가 움직이고 있소이다!”
광운이 미처 북문에 닿기도 전에, 성의 서문 수비를 맡았던 진도수가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뭣이? 적의 예비대가?”
깜짝 놀란 광운은 진도수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입에서 자연스레 사주군을 적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확실히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한 떼의 횃불 무더기가 서서히 남쪽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적이 우리의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의도인 듯합니다!”
자기 생각을 피력하는 진도수의 말은 한껏 격앙되었다. 이 마당에 보급로가 끊기게 되면 막주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아사餓死할지도 모른다. 막주를 출발했다는 지원군과는 합류도 못하고 말이다.
진도수의 다급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광운은 그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성 공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사주군이 다음에 취할 행동은 보급로를 끊는 일이란 건 굳이 듣고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광운이 생각하고 있는 건 그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지금 그의 뇌리엔 자욱한 위기감과 동시에,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육감이 격렬하게 교차하는 중이었다.
‘이 비바람 속에서 적의 예비대가 움직인다. 적의 주력은 북문에 집결되어 있고.’
바로 여기에 이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이 있다고 광운의 육감은 강하게 속삭였다.
이런 느낌은 결코 광운에게 있어선 낯선 게 아니었다. 그동안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 이런 육감은 수시로 작용했다.
“진 장군, 기병 오천을 급히 동문으로 집결시키게.”
“오천을? 대체 어쩌시려는 거요?”
“물어볼 것도 없는 일, 적의 예비대를 친다!”
“예? 적의 예비대는 적어도 이만은 될 것 같소이다. 그런데 고작 오천으로 그들을 친단 말씀이오?”
“이 비가 우릴 돕고 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도록! 난 북문에 갔다가, 곧바로 동문으로 가겠다!”
말을 마치자마자 광운은 곧장 북문을 향해 달렸다. 적의 예비대를 치는 것도 이 성이 무사하고 나서의 일이다. 그 전에 뚫린다면 모든 게 허사인 것이다.
“전황은 어떻소?”
연방 병사들을 독려하는 상림호를 발견하자마자 광운은 다급하게 물었다.
“염려 마시오. 설사 놈들이 몽땅 이 북문에 달라붙는다고 해도 지켜 내 보일 테니!”
“믿겠소! 그리고 나는 곧 기병 오천을 이끌고 동문 밖으로 쳐 나갈 것이오!”
“아, 적의 예비대를 치는 것이오?”
확실히 상림호는 예사 장수가 아니었다. 광운의 한마디로 제꺽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소. 적은 분명 우리의 보급로를 끊으려는 작정일 게요.”
“오천으로는 적지 않겠소? 이곳을 수비하는 병사들 중 이천 정도를 더…….”
“그만하면 충분하오. 유군으로 활용하자면 숫자가 많은 것도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알겠소. 그럼 성 밖의 일을 부탁드리겠소.”
“나야말로 상 성주에게 이 북문을 잘 지켜 달라고 부탁드려야겠소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 속에는 한없는 신뢰가 빛을 발했다.
“자, 그럼!”
짤막하게 내뱉은 광운은 그대로 성루를 달려 내려갔다. 직속부대원들이 재빨리 따라붙었고, 그중 누군가는 어느새 질풍을 대기시켜 놓았다.
광운은 곧장 질풍에 올라 가타부타 말도 없이 동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채찍처럼 세차게 얼굴을 두들겼다.
동문에는 벌써 진도수에 의해 엄선된 오천의 기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듣거라! 우리의 출격 목적은 적의 예비대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사적으로 싸우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다른 적은 쳐다보지도 마라! 오직 적 예비대의 진로만 막는다! 알겠나?”
“오오오!”
광운의 말에 기병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대답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지난 삼 년간 사주에서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기에, 광운과 병사들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다.
“문을 열어라!”
광운의 외침과 동시에,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보병들이 흑암성의 동문을 열며 잔교를 내렸다.
“하아!”
잔교가 절반쯤 내려졌을 때 광운은 그대로 질풍을 몰았다. 저게 땅에 닿으면 적병들이 성으로 난입해 올 수 있다. 그 전에 재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와두두둑!
광운의 뒤를 이어 오천의 기병들도 일제히 잔교로 말을 몰았다.
적병들도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한창 전투 중에 잔교가 내려진다는 건 성병들이 치고 나오는 걸 의미하니, 해자가에 몰려들어 일제히 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가장 먼저 달려 나온 광운은 대도를 최대한 길게 잡아 휘둘렀고, 잘려 나간 창들 사이로 뚫고 들어간 질풍은 마구 설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광운의 주변으로 널찍한 공간이 생겼고, 그 사이로 속속 기병들이 뛰어내렸다.
기병들이 어느 정도 나왔다 싶자, 광운은 곧장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서문 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적의 예비대를 앞지르려는 의도에서였다.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막아라!”
사주군도 악을 쓰며 막주의 기병들 앞을 막아섰지만, 보병들로선 애당초 무리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사주군은 기병들을 거의 동원하지 않았다. 날씨도 좋지 않았고, 또 성 공격은 보병들이 보다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기엔 십만에 달하는 병력을 상대로 막주군이 성 밖으로 치고 나오지 않을 거란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런데 막주군은 뛰어나왔고, 그건 사주군의 의표를 찌르는 행동이었다.
광운이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막주의 기병들은 주변에 몰려드는 사주군을 상대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적중 돌파를 감행하는 것처럼 오직 앞으로만 달렸다.
그게 또 사주군을 당혹 속으로 몰아넣었다. 개중에는 엉뚱한 명을 내리는 장수도 있었다.
“돌아가라! 돌아가서 성문을 지켜라! 놈들은 포위망을 뚫고 달아날 생각이다. 어서 돌아가!”
이처럼 막주군을 쫓는 병사들에게 오히려 되돌아가라고 호통을 치기까지 했다.
광운으로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고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시간이 상당히 절약되었다.
“방 장군, 척후를 보내 적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도록!”
“존명!”
두 번의 사명을 무사히 마친 뒤부터 직속부대를 총괄하게 된 방필은 복명을 하자마자 광운의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부하들에게 지시할 것도 없이 직접 척후에 나설 작정이었다.
방필은 곧 돌아왔다. 그만큼 사주의 예비대를 찾기가 쉬웠던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지리에 익숙지 못한 사주의 예비대는 그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많은 횃불을 밝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에 달하는 인원의 진군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방필의 안내로 예비대가 빤히 보이는 곳에 부대를 정지시킨 광운은 여기가 어디쯤인지 생각해 내려고 미간을 찌푸렸다.
‘계하鷄河 근처겠군.’
마치 닭 대가리의 형상으로 물결이 굽이쳐 흐르기에 계하라는 이름이 붙은, 제법 큼직한 하천은 지금쯤 물이 잔뜩 불어 있을 터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광운은 한 가지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모두 들어라. 우린 적 예비대의 선두를 치고 바로 빠진다. 목적은 적을 계하로 유인하는 것이다.”
“그렇지! 이 정도 비가 내렸으니 계하 주변은 온통 진흙 구렁일 게야!”
광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맞장구를 쳤다.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이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만큼 전투 경험이 많다는 의미였다.
“맞다! 반드시 명심해라. 우린 싸우려는 게 아니다. 놈들을 진흙 구렁 속으로 유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놈들은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꼼짝하지 못할 것이다. 유인하려다가 도리어 진흙 구렁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만치 빤히 보이는 적에게 들릴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다들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예비대의 발을 묶어 두고 성으로 돌아가 지원을 해야만 한다.
“그럼 지금부터 적을 유인한다. 작전이 성공하면, 우린 그대로 유군이 되어 성병을 지원한다. 혹시라도 낙오가 된다면, 절심애絶心崖로 집결하도록!”
마지막 말이 그대로 공격 명령이 되어 막주군은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사주의 예비대에 부딪쳐 갔다.
“한 놈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마라!”
“와아아!”
속마음과 전혀 다른 광운의 외침에 막주군은 한층 더 우렁찬 함성으로 호응했다.
비까지 내려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든 밤이었다. 거기에 갑작스레 터져 나온 함성은 막주군의 숫자를 실제 이상으로 많게 느껴지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그 증거로 당장 사주의 예비대는 우왕좌왕했다. 한차례 병기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저 정도라면, 그들의 동요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했다.
‘이대로 싸워도 크게 이길 수 있겠군.’
가장 먼저 부딪친 사주병 둘을 한꺼번에 자른 광운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흑암성엔 바득바득 위기가 닥쳐올 터, 이곳에선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는 게 상책이다.
“당황하지 말고 적을 맞아라! 적은 고작… 크악!”
부하들을 독려하던 사주의 장수 중 한 명이 방필이 내지른 창에 찔려 그대로 허공을 부여잡으며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게 결정적으로 사주의 예비대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오천의 막주군에 직접 타격당한 선두는 연방 물러서기 바빴고, 반대로 후미는 불의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마구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래서 잘된 기습 공격은 언제나 기대 이상의 효과를 올리는 법이다.
“하아!”
광운은 곧장 질풍을 내몰았다. 더 이상의 명령은 필요 없었다. 막주의 기병들은 자기 몫을 십분 이상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놈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쫓아라! 놓치면 사기에 관계된다. 반드시 궤멸시켜라!”
이건 사주 예비대의 중군쯤에서 터져 나온 고함이었다. 총대장일 게 분명했다.
그 고함을 등 뒤로 들으면서 광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되면 생각보다 훨씬 일찍 이곳이 정리될 것 같았다.
“성주, 적의 화살 공격이오!”
방패를 위로 쳐들어 광운을 가려 주면서, 방필이 소리를 질렀다. 깨닫고 보니 빗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파공성이 사방에 자욱하게 퍼지고 있었다.
“거리를 유지해라! 너무 빨리 달리지 않도록!”
혹시라도 너무 떨궈 버리면, 지리에 익숙지 못한 사주의 예비대가 추격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계하로 유인하려는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 밤중에 쏘는 화살이 제대로 맞을 리 만무하다. 횃불이라도 있으면 표적이 되겠지만, 지리에 밝은 막주군은 애당초 불꽃 하나 피우지 않았다.
“이제 곧 계하입니다!”
“알았다. 모두 하마下馬!”
명은 즉각 시행되었고, 약 오백 두에 이르는 빈 말들만 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계하를 향해 달렸다.
나머지는 모두 말을 끌고 도보로 우측으로 빠졌다. 바로 이게 유인전의 기본이고 핵심이다.
게다가 오늘은 세찬 비가 내리니 마음 놓고 움직여도 흔적을 남길 염려가 없었다.
막주군은 재빨리 우측의 야트막한 구릉을 넘어갔다. 아무래도 도보이다 보니 시간이 걸렸고, 사주의 예비대가 스쳐 지나갈 때까지도 전원이 은신할 수는 없었다.
이때도 폭풍우는 많은 도움이 되었고, 게다가 사주의 예비대가 쏘는 화살도 막주군이 내는 소음을 상당 부분 가려 주었다.
“대성공입니다, 성주! 낙오병도 없고!”
“사상자는?”
“경상자가 약간 발생했을 뿐 전사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알겠다. 조금 더 적을 지켜보고 곧장 철수하자. 아무래도 북문 쪽이 마음에 걸린다.”
“존명!”
복명한 후, 방필은 십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직접 척후에 나섰다. 적의 동태를 보다 상세히 알기 위함이었다.
유인전은 크게 주효했다. 계하의 진흙에 갇힌 사주의 예비대는 밤새 꼼짝도 하지 못했고, 그사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달려온 막주 지원군의 선발대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 후로 흑암성에서 대치한 막주와 사주의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3
밤새 퍼붓듯 내리던 비도, 새벽이 되자 추적이며 그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게다가 이천강 전체에 젖처럼 찐득한 안개가 감도는 걸 보니 오늘은 더 이상 비가 내릴 것 같지 않았다.
그 짙은 안개가 돌연 출렁인다 싶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맨 선두는 편월이었다. 오늘은 가벼운 소가죽으로 만든 갑옷 차림이었다.
아니, 편월만이 아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정허군 대부분이 가벼운 갑옷 차림이거나, 아예 속곳만 간신히 걸친 벌거숭이였다. 병사라기보다는 어디 으쓱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도적이라는 게 딱 적당할 듯한 복장들이었다.
그처럼 우스운 차림에는 어울리지 않게, 동원된 병사들의 얼굴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미덥지가 못하오. 소장이 먼저 건너가서 신호를 하리다. 대장군은 그때 건너오시오.”
강숙이었다. 그는 난데없이 나타난 초염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설치했다고 하는 밧줄에 대해서도 믿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맹 장군이 벌써 두 번이나 확인한 일이오.”
“그래도 보다 확실히 하자는 얘기요. 게다가 이런 안개 속이라면 배를 타고 건너도 적도 눈치 채지 못할 거요.”
“이 물살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만약 배를 띄우면 건너편에 닿기도 전에 멀리 떠 내려갈 것이오. 그 와중에 뒤집히는 배도 있을 게요. 그러니 그에 대해선 더 말 마시오!”
강숙의 말에 강한 어투로 대답하며, 편월은 등에 비끄러맨 대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건 곧 전체로 번져 갔다.
얼굴만 마주 봐도 웃음이 치밀 것 같은 몰골들이었지만, 서로의 무기와 장비들을 점검해 주는 표정은 한결같이 진지했다.
그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던 편월은 갑작스레 움직여 물속으로 들어갔다.
“대장군!”
강숙과 맹아가 불렀지만, 편월은 대꾸도 하지 않고 초염이 걸어 둔 밧줄에 의지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다른 병사들도 망설이고 있을 수는 없다. 너 나 할 것 없이 앞을 다투어 강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이게 편월이 노렸던 점이다. 이 안개가 걷히기 전에 도강을 끝내는 건 물론, 가급적이면 윤주군이 세운 영채도 함락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이처럼 서두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란을 피워 들킨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터, 편월은 조용히 하라는 지시만은 확실히 내렸다.
걸린 밧줄은 모두 열 가닥이었다. 한 군데 너무 많은 사람이 매달리면 곤란하다 싶어 송지는 뒤에 남아 병사들의 숫자와 거리를 적당하게 조정했다.
순조로운 진행 속에서 정작 곤란을 겪고 있는 건 편월이었다. 용감하게 맨 먼저 뛰어들고 나서야 자신이 물에 익숙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수영은 할 줄 안다. 하지만 그건 속칭 ‘개헤엄’에 불과할 뿐, 이처럼 물살 강하고 너른 이천강에 적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편월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갔다. 온몸에 와 닿는 새벽녘의 냉기 탓만은 아니었다. 강물이라는 대자연이 가져다준 공포가 온몸을 휘감아 돌아, 손발까지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죽을지도 모르겠군.’
아마 이건 편월이 처음으로 느껴 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전장에서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감정이, 이 황토 빛 짙은 강물 속에서 그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콜록, 콜록!
돌연 편월은 기침을 토했다. 공포에 위축되어 있는 사이 한 모금 물이 그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괜찮소?”
바로 뒤를 따르는 맹아가 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편월보다는 훨씬 물에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편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다시 물이 들어올 것만 같아서였다.
그렇게 간신히 줄에 매달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편월의 발에 갑자기 뭔가가 와 닿았다.
‘헉!’
그 놀람은 곧바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본의가 아니라 또 한 모금 물이 넘어간 탓이었다.
“허둥대지 마시오. 초염이오!”
맹아의 뒤에서 따라오던 화응이 낮지만 강한 어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어약칠협이 고향인지라 그 역시 물에 익숙했기에, 편월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고 초염에게 도우라고 했던 것일 터였다.
어쨌든 편월은 초염의 어깨에 무등을 탄 꼴이 되고 말았다.
다른 때 같으면 자존심이 상했을 편월이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초염이 어떻게 자신을 업고 헤엄을 치는지는 몰랐지만, 뒤따르는 병사들을 돌아볼 여유는 생기게 되었다.
병사들은 비교적 무난하게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혼자서만 허우적거린 꼴이었으니, 편월의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안정을 찾고 나자, 비로소 자신을 업고 있는 초염이 신경 쓰이는 편월이었다. 벌써 제법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한 번도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아하!’
초염이 있는 물속을 내려다보던 편월은 속으로 감탄사를 발했다. 그는 갈대 줄기를 통해 숨을 쉬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하나의 신기한 재주였다.
잔잔한 물속에 들어가도 몸의 수평을 유지하자면 힘이 드는데, 이처럼 세찬 물살 속에 잠수해 있으면서도 가녀린 갈대 줄기로 숨을 쉰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걸 초염이 능숙하게 해내고 있으니, 여태 허우적거렸던 편월로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장군, 잠깐!”
별안간 맹아가 바짝 다가와서 속삭였다. 이젠 못 쓰게 되었지만, 방울 달린 그물이 보이는 걸 보니 어느새 건너편 기슭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편월이 멈추자 물속에 있는 초염도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래도 조금도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강바닥을 걷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다음은 미리 정해진 대로 움직였다. 강숙이 백월대 오십 명을 이끌고 먼저 뭍으로 올랐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감시병들을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편월은 조용히 기다렸다. 물속에서 전전긍긍했던 걸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지만, 이미 그 같은 개인적 감정은 누를 줄 알게 되었다.
탁, 탁!
돌연 편월이 쥐고 있던 밧줄에 두 차례 가벼운 진동이 전해져 왔다. 올라와도 좋다는 강숙의 신호였다.
편월은 재빨리 줄을 당겼다. 어느새 초염은 약간 떨어져 고개를 물 밖으로 내밀었지만, 그땐 벌써 발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일단 허리 깊이 정도로 나가게 되자 편월은 등에 멘 대도를 끌러 쥐었다. 그제야 비로소 혈관 속으로 따뜻한 피가 돌고, 새로운 힘이 근육을 채우는 것 같았다.
“맹아, 안내하라. 이대로 곧장 윤주군의 영채를 친다.”
뭍에 오르자마자 내려진 편월의 명에, 맹아는 가장 앞장서 달렸다. 초염이 쳐 둔 밧줄을 확인하기 위해 두어 차례 왕복하면서, 이쪽의 지리에는 밝았다.
“잠깐, 대장군! 병사들을 기다려 같이 가는 게 좋지 않겠소?”
먼저 와 있던 강숙이 편월을 제지했다. 감시병을 처치할 때 묻었는지, 그의 손엔 피가 흥건했다.
“시간이 없어.”
“적은 병사로 가서 어설프게 쳤다가는 오히려 잠자고 있는 적들만 깨울 거요. 이럴 때일수록 한 번에 치고 들어가야만 하오.”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 곳에 송지가 흠뻑 젖은 몸으로 다가왔다. 나이가 든 그에겐 아무래도 물살 센 강이 추웠는지 전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건 강 장군의 말이 맞는 것 같소. 다들 갓 물에서 나와 손발이 굳어졌을 거요. 그걸 풀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막상 전투 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거요.”
“좋소. 병사들을 집결시키고 앞서 간 맹 장군도 다시 불러오도록.”
지시를 내리는 사이에도 병사들은 속속 도착했고, 보급대인 청월대와 두건득이 남들보다 훨씬 많은 짐을 진 모습으로 다가왔다.
“흑유의 양은?”
“맹 장군의 말을 참고해서 충분할 정도로 준비했소이다. 제대로 뿌리기만 한다면 한 시진 내에 놈들의 영채는 잿더미가 될 거요.”
“수고했소. 보급대가 가장 먼저 움직여야 될 테니 빨리 준비시키시오.”
“존명!”
그렇게 두건득은 안개 속을 휘적거리며, 보급대와 더불어 멀어져 갔다. 그들은 전투보다는 가져온 흑유를 설치하는 게 주 임무이니 따로 몸을 풀 필요가 없었다.
“대장군, 어째서…….”
“근위대는 준비가 되었소?”
맨 먼저 달려갔다가 다시 불려 온 맹아가 좀 불퉁스러운 어조로 내뱉는 걸, 편월이 재빠른 질문으로 눌러 버렸다.
“근위대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소. 근데 대체 언제 공격할 거요? 여기서 미적거리다가는…….”
“그럼 근위대는 곧장 청월대와 합류하도록. 가장 먼저 적의 영채에 불화살을 당기는 건 근위대의 몫이오.”
“존명!”
찌푸려져 있던 맹아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첫 번째 화살은 근위대의 몫이라는 편월의 말 때문이었다.
“송 군감!”
맹아의 모습을 짙은 안개가 지우기도 전에, 편월은 송지를 불렀다.
“미리 준비해 두라고 했던 전령은?”
전투를 앞둔 편월의 어조는 날카롭고 간결했다.
“진즉부터 대기하고 있소이다.”
“그럼 적의 영채에 불길이 오르는 즉시 출발시키시오.”
“그 점은 염려 마시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전갈에 담 장군이나 유군이 동요하지 않겠소? 소장은 그게 염려스럽소.”
“그들은 유군이오. 이 정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때려치워야지.”
“허어!”
송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종종 편월이 독단적인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건 어린 나이에 갖는 치기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정허군의 대장군 직을 맡은 이후로 나름대로 수련과 관록을 닦은 편월이, 이처럼 감정을 노출시킨 건 근자에 이르러 드물었다.
그러니만큼 송지는 더욱 긴장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편월의 기분이 왜 저런지는 몰라도, 이럴 때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낭패를 면치 못할 터였다.
“준비가 되었다는 두 장군과 맹 장군의 전갈입니다.”
“좋아. 신호를 보내라!”
화응의 보고가 있자마자 편월은 명을 내렸다. 이 싸움은 속전속결이 생명이다. 이 영채만이 목적이 아니라 윤주성에서 나올 지원도 끊어야 하고, 제운교도 눌러둬야 한다. 그러니 여기선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다.
삐이잇-!
한 발의 향전이 올랐다 싶자, 곧장 전방의 안개가 벌겋게 물들었다. 두건득과 맹아도 이 싸움의 성격을 잘 알기에 최대한 서두르고 있는 것일 터였다.
“와아!”
그다음부터는 따로 명을 내릴 것도 없었다. 정허군은 곧장 함성을 올리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차림에 모두 무기를 들고 있으니 영락없이 산적처럼 보였다.
편월도 달리기 시작했다. 늘 타고 다니던 소질풍이 없어 아쉬웠지만, 도보라고 해서 싸우지 못할 것도 없었다.
후끈한 열기가 전해진다 싶었을 때 벌써 전방은 싸움터였다. 아직 잠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윤주군의 저항은 미미했지만, 그렇다고 정허군이 확실한 우위를 점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저 불길이 목책의 일부를 허물어뜨렸을 때가 승패의 고비가 될 게다.
정허군의 불화살 공격은 계속되었다. 송지의 제안으로 화살 끝에 작은 병을 달아 그 속에 흑유를 조금씩 담은 게 상당한 효과를 보는 듯했다. 영채 안 여기저기서 연방 시커먼 연기가 치솟고 있는 것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우와아아앗!”
돌연 화응과 초염이 우렁찬 함성과 함께 불타는 목책으로 달려들었다. 그 둘의 손에는 보통의 것보다 무려 열 배는 클 것 같은 도끼가 들려 있었다.
“근위대, 두 사람을 보호해!”
화응과 초염이 뭘 하려는지 깨달은 편월은 근위대에 고함을 지르며, 그 역시 목책으로 달려갔다.
쾅, 꽈앙!
최초의 불화살 공격을 개시했던 근위대는 물론 청월대원 몇 명이 방패로 두 사람을 보호하는 사이, 화응과 초염은 연방 그 거대한 도끼로 불타는 목책을 찍어 댔다.
그게 주효했다. 멀쩡한 목책이라도 저만한 도끼에 찍히면 견디기 힘들 텐데, 불에 타기까지 했으니 이내 왈그럭 소리를 내며 일부가 무너져 버렸다.
“간다앗!”
자신도 모르게 편월의 입에서 튀어나온 고함 소리였다. 강물 속에서 낭패를 봤던 감정과, 소질풍이 없다는 초조감이 그렇게 표출된 것이다.
그렇다고 대장군으로서의 지휘를 잊고 있는 건 아니었다.
“강 장군, 백월대를 이끌고 적의 퇴로를 끊으시오!”
목책 안으로 돌입하자마자 곁으로 모여든 장수들 중 강숙에게 재빨리 명을 내렸다.
이건 여기 주둔하고 있는 윤주군을 완전히 소탕하자는 것만은 아니었다. 윤주성과의 연락을 끊어, 그들의 지원을 조금이라도 늦춰 보자는 의도도 있었다.
만약 맑은 날씨였다면, 혹시 이 불길과 연기가 윤주성에서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일 장 앞도 정확하게 분별하기 어려운 안개가 깔려 있다.
윤주성으로 가는 연락만 제대로 차단한다면, 하루 이틀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터였다.
“마구간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편월은 재차 고함을 질렀다.
이 역시 미리 세워 둔 작전의 일부였기에,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이제 막 목책을 부순 화응과 초염이 십여 명의 근위대원과 더불어 마구간이 있음 직한 곳으로 달려갔다.
마구간을 확보해서 좋은 건 두 가지다. 그 하나는 물론 윤주군 전령의 발을 묶어 두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을 타고 싸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뻔했다. 목책 안의 저항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고, 이제 막 무장을 갖추고 달려 나오던 윤주군은 그대로 투항하기에 바빴으니까 말이다.
지금 정허군은 오히려 타오르는 불길을 걱정해야 했다. 안개가 걷히기 전에 끄지 못한다면, 윤주성에서 이곳의 상황을 눈치 챌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 일은 송지와 두건득이 맡았다. 그들은 항복한 포로들을 무장해제시켜, 곧바로 진화 작업에 투입했다.
싸움이 격렬하진 않았지만, 편월이 한가해진 건 아니었다. 화응이 끌고 온 말에 오르자마자, 그는 곧장 달려 목책을 빠져나왔다. 그 뒤를 말을 확보한 근위대원부터 하나 둘 따르기 시작했다.
편월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제운교 쪽이었다. 거기에 주둔하고 있는 윤주군도 조속히 제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건 합동작전이었다. 이쪽에서 치는 것과 동시에, 강 건너편에 대기하고 있는 지두룡이 황월대를 이끌고 제운교를 건너기로 되어 있었다.
“서둘러라!”
어쩌면 제운교에 주둔하고 있는 윤주병 중에서 누군가가 윤주성으로 달릴지도 모른다. 강숙의 백월대가 지금쯤 퇴로를 차단했겠지만, 이처럼 짙은 안개 속이라면 한둘은 놓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애당초 누구도 출발시키지 않는 게 상책이란 얘기다.
그 격돌도 생각보다 일찍 이루어졌다. 제운교에 나가 있던 윤주병이 목책의 급변을 눈치 채고 철수해 오던 중에 정허군과 맞부딪친 것이다.
“와앗!”
사방을 분별하기 어려운 안개 속의 조우전이었다. 정허군과 윤주군은 모두 이처럼 빨리 격돌하게 되었다는 점에 놀라면서, 수중의 병기를 휘두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경우엔 역시 선두에 선 편월이 가장 위험하고 다급해질 수밖에 없다. 처음 두어 명은 엉겁결에 놓쳐 버렸고, 대도를 휘두르기 시작했을 땐 벌써 윤주군의 한가운데 위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물러서거나 위축될 편월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부쩍 힘이 솟는 듯 주변의 윤주군을 마구 베어 넘겼다.
그러면서도 사방에 대고 연방 고함을 질렀다.
“조심해라! 곧 황월대가 온다! 한편 싸움을 벌이지 않도록!”
편월로선 그게 가장 걱정스러운 점이었다. 이처럼 짙은 안개 속에서 저렇게 광분해서 설치는 병사들이라면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울 게 뻔하다.
자칫 방심하고 있다가는 아군이 휘두른 무기에 다치거나 죽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격돌은 황월대가 제운교를 건너기 전에 끝나고 말았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윤주군은 변변한 싸움 한번 해 보지 못하고 투항하거나 속절없이 죽어 갔다.
“황월대에 전령을 보내라! 석축산에선 아직 연락이 없는가?”
공격을 시작하고 한 시진 남짓, 아직 이천강에 드리워진 안개가 모두 걷히기도 전에 정허군은 윤주군의 영채를 불사르고 제운교를 확보했다. 삼 년을 끌었던 것치고는 너무 허망하고 손쉬운 공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