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삼년星霜三年
1
광운이 서방정변의 한 축으로 대륙의 서쪽에서 활약하고 있던 영창구년에서 십일년까지의 삼 년은, 편월로선 탄금성 일대에 지반을 굳히기 위해 사력을 다한 세월이었다.
어떤 면에서 서방정변은 편월에게 크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광운의 의도야 어떻든 천하의 이목은 이 치열한 파양주의 내전에 쏠려, 강국의 서쪽 변두리에 있는 작은 성의 움직임 따위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세월 동안 천하의 내로라하는 세력들은 각자 만만찮은 적을 상대로 치열한 공방을 거듭했다. 간신히 가겸후, 마용승, 증두신, 조환이라는 네 명의 걸물들에 의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던 전국이 다시 암울한 난세로 역행해 버린 느낌도 없지 않았다.
사실 그 삼 년간은 편월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콩알보다 작은 땅덩이였지만 탄금성 주변만이 싸움이 없는 곳이었으니, 백성들의 이주 신청은 물론, 송용조 상단의 모용추까지 그 땅을 중심으로 움직였을 정도였다.
그런 모든 호재들을 편월과 그 측근들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영창구년 가을부터 영내에선 어느 정도 추수가 이루어졌고, 십년부터는 세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세미에다가 송용조 상단의 도움을 얻어, 편월은 탄금성이 관할하는 지역의 경계에 성벽을 축조했다. 그건 강국에 대해 완전히 독립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임과 동시에, 적어도 영내에 거주하는 백성들만큼은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맹세이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편월의 어깨를 가볍게 한 건, 대인성 탈출 시 연락이 끊어졌던 유군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에게서 최초의 전령이 온 건 영창구년 유월, 즉 강국의 서쪽 국경을 봉쇄하고 있던 연합군이 물러가고 난 한 달 뒤였다.
유군에게서 전령이 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허군에겐 반가운 일이었는데, 그 내용을 듣고선 다들 함성을 올렸다. 그들은 별다른 피해 없이 석축산에 구축해 뒀던 영채로 물러가 웅거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다만 식량이 부족해 곤란을 겪고 있을 뿐, 달리 불편한 점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편월은 안타까웠다. 그때는 정허군도 강국에서 보내 주는 오 일 치의 보급에만 의존해 있었기에, 유군을 돕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적어도 정허군과 유군 간에 원활한 소통로는 확보해 둬야만 했다. 그걸 위해선 이천강에 걸린 다리를 점령하는 게 급선무였다.
알다시피 이천강에는 두 개의 다리가 걸려 있다. 윤주와 허주를 잇는 괘공교와 역시 윤주와 강국을 연결하는 제운교除雲橋다.
그중 중요한 것은 물론 제운교지만, 편월은 두 개의 다리 모두를 확보하려고 했다.
이건 순전히 모용추의 건의에 의해 결정한 일이었다. 다리만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으면, 그 통행료를 징수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건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리가 정허군에 중요한 만큼, 윤주나 허주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특히 허주는 대인성주를 도연각으로 교체해서 서쪽 국경을 더욱 견고하게 방비했다.
윤주도 마찬가지였다. 광운이 사주와 본격적으로 싸우게 된 영창구년이 저물 즈음 호윤천은 윤주성주를 심복인 오치吳治로 바꿔 버렸다. 광운과 한통속일 게 분명한 편월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이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호윤천의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오치는 군사를 성 밖으로 내보내 석축산과 제운교를 동시에 누를 수 있는 함지陷地라는 곳에 튼튼한 영채를 세워 정허군과 유군의 연결을 차단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편월은 유군과 연락이 닿은 영창구년 유월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이천강으로 병력을 출동시켰다. 그렇게라도 윤주군의 주의를 흩어 놓지 않으면 당장 석축산의 유군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리적 이점을 안은 견고한 영채라도, 오백 남짓한 인원으론 버틸 수 없다.
오늘은 편월이 직접 근위대와 청월대를 이끌고 이천강으로 나가 진을 쳤다. 금방이라도 도강을 할 듯 수많은 뗏목들을 준비해 뒀고, 제운교 이편에도 적월대를 따로 배치시켰지만 아직 도강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름 아닌 병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동안 부상에서 회복해서 복귀한 자도 있고, 새로 약간의 병사를 충원해서 그럭저럭 오천은 맞추었다.
하지만 그 정도 병력으로 강을 건넌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강을 통해서든 다리를 건너든 간에 저편에 닿기도 전에 거의 전멸당할 게 분명하다. 도강은 그만큼 많은 희생이 따르는 작전인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편월은 오히려 윤주군이 도강해 올 것을 걱정하는 형편이었다. 많은 병력과 물자를 동원해서 넘어온다면, 정허군으로선 막아 내기 힘들 터였다.
“대장군, 여기!”
강 건너편에 있는 윤주군의 영채를 살피고 있는 편월에게 맹아가 대통에 든 물을 권했다.
“음, 날씨가 덥군.”
투구 속에서 턱까지 흘러내린 땀을 훔치며, 편월은 대통을 받아 들었다. 이제 열여섯, 그사이 키는 훌쩍 커지고 탄탄한 근육도 적당히 붙어 정허군 내에서도 큰 축에 속할 정도로 성장한 모습이었다.
햇살이 그리 따가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오월도 중순에 이르면서 대기는 본격적으로 습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곧 장마가 시작된다는 징후였다.
“그 후로 광운 장군은 어떻게 됐을까요? 올해 들어 이렇다 할 소식이 없으니 답답합니다.”
대통을 다시 건네받아 목을 축인 맹아가 입을 열었다. 그도 올해 열여덟으로 덩치가 크다는 점에서는 편월 못지않았다.
“광운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는 자네 부친에 대한 소식은 듣지 못했나?”
두건득은 병사들을 돌보느라 자리를 떴고, 둘만 있게 되자 편월은 맹아에게 편하게 말을 붙였다.
맹아의 아비는 정허군이 영욱성을 출발할 때 같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광운을 따라간 것도 아니었고, 그 후로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대장군께서 광운 장군을 걱정하지 않으시듯, 소장도 아버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뭐?”
“올해도 대체로 풍년이 될 것 같군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편월의 시선을 슬쩍 외면하며, 맹아는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그 눈에 어린 쓸쓸한 기운은 지울 수 없었다.
그걸 눈치 챈 편월도 더 이상 그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고 뒤에 펼쳐진 들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득 편월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온 들판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모가 쑥쑥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였다.
그 속에서 마치 새가 앉은 것처럼 하얗게 움직이는 건 농부들이었다. 아무 걱정 없이 저처럼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편월이었다.
지금의 편월이 정치에 대해 알 턱이 없다. 다만 자신을 믿고 의지하러 온 백성들만큼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결의를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질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할 일은 자연적으로 정해진다.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강국이야 어떻든, 눈앞에 있는 윤주와 허주의 위협만큼은 눌러둬야만 한다.
“대장군, 백성들이 묘한 걸 가져왔소이다!”
다시 시선을 돌려 윤주군의 영채를 보고 있는 편월의 귀에 두건득의 목소리가 들렸다.
“묘한 것이라니?”
“글쎄 이걸 병사들에게 나눠 주라면서 가져왔소이다.”
“술이오?”
편월이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 두건득이 끌고 온 우마차 다섯 대에 실린 건 모두 술통이었기 때문이다.
“술은 아니라고 하오. 나도 잘 모르겠으니 직접 불러 물어보시오.”
말과 함께 두건득이 손짓하자 화응이 십여 명의 백성들을 데리고 왔다.
“성주를 뵈옵니다!”
편월 앞에 나선 백성들은 일제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일어서시오.”
소질풍에서 뛰어내리며, 편월은 가장 앞에 있는 백성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황공하옵니다. 이건 저희들의 작은 성의이오니, 더위에 고생하는 병사들에게 나눠 주시옵소서.”
아마 농민들의 대표인 모양이었다.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이 우마차에서 통 하나를 내려놓았다.
“잠깐!”
맹아가 통에 든 걸 바가지에 따르려는 농부를 제지했다. 그리고 근위대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눈짓을 받은 근위대원 두 명이 재빨리 나가 통을 받아 들고 바가지에 따랐다.
진갈색의 걸쭉한 액체였다. 시원하게 만들어 왔는지, 따르자마자 바가지 가장자리에 맑은 액체가 맺혔다.
그걸 근위대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마셨다. 편월에게 주기 전에 먼저 시식을 하는 것이다. 물론 독이 들었는지를 판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근위대원은 같은 통의 액체를 따라 편월에게 권했다.
“이상 없습니다.”
약간은 씁쓸해진 기분으로 편월은 바가지를 받아 들었다. 자기 영내에 사는 백성들도 믿지 못하는 세태가 암담하기만 했다.
어쨌든 백성들이 정성껏 마련해 온 걸 물리칠 수는 없어, 편월은 그 액체를 마셨다.
시원하고 달았다. 게다가 바가지 하나를 다 비우니 배까지 든든하게 찼다.
“대체 이건 뭐요?”
“예, 미숫가루를 탄 물이옵니다.”
“미숫가루? 어떻게 만드는 거요?”
편월은 이 미숫가루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여차하면 병사들의 식량 대용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서였다.
“예. 찹쌀과 콩 등을 볶아서 가루로 만든 것이옵니다. 이처럼 더운 여름에 기갈을 해소하기엔 좋은 음식이옵니다.”
“맹 장군! 이분들에게 이 미숫가루의 제조법을 상세히 알아 두도록 하시오.”
“존명!”
“고맙소. 아직은 형편이 여의치 않아 답례는 하지 못하오. 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 주시오. 곧 다들 더 좋아지게 될 것이오.”
“황송하옵니다. 소인들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사옵니다. 지금도 다른 땅, 다른 나라에선 이렇게 살지도 못하는 백성들이 수두룩한데…….”
노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다시 부복했다. 이처럼 성주와 직접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저처럼 젊은 성주는 거기에 더해 자신들에 대한 위로도 잊지 않고 있다. 평생을 흙에 묶여 살면서 이처럼 인간적인 대접을 받은 적도 드물었다. 이 땅이라면, 저런 성주라면 뼈가 닳도록 일해도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소인들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스며 나온 눈물을 때 묻은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노인은 몸을 일으켰다.
“부지런히 생업에 종사하시오. 이 땅을 유린하려는 자들은 단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을 테니.”
편월의 마지막 말에 노인은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주름 잡힌 얼굴에 떠오른 그 미소에는 한없는 신뢰가 담겨 있었다.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도록! 마시면 힘이 되는 음식이군.”
그 말에 따라 근위대원 몇 명이 미숫가루가 든 통을 병사들에게 나눠 주기 시작했다.
뜻밖의 미숫가루 한 잔은 병사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서 갑옷을 단단히 차려입은 그들의 더위를 일거에 몰아내 주었던 것이다.
“과연 이거라면 휴대하기도 간편하고, 여차할 땐 식량으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겠군요.”
농부들과 같이 가서 미숫가루의 제조법을 알아 온 맹아가 한마디 던지며, 작은 보퉁이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미숫가루요.”
눈으로 ‘이게 뭔가?’ 하고 묻는 편월에게 맹아가 웃으며 말했다.
편월은 보퉁이를 풀었다. 곱게 빻은 갈색의 분말이 또 한 겹의 종이에 싸여 있었다.
“그 정도 양이면 스무 번 정도는 물에 타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사흘 치 끼니로 충분할 듯싶습니다만…….”
“간편해서 좋긴 한데, 이만한 양을 만들자면 양곡도 그만큼 들 게 아니오?”
보급대를 맡은 만큼 두건득은 조금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양곡이 조금 많이 들어도, 전투 시에 이처럼 간편한 먹을거리가 있다면 전력에 많은 보탬이 될 것이오. 오늘부터 조금씩이라도 이 미숫가루를 만들어 보도록 하시오.”
“참, 대장군!”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맹아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 미숫가루는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보관해야 된다고 합니다. 안 그러면 벌레가 생긴다고…….”
“그건 모든 곡식이 마찬가지요.”
더 이상 언급할 것도 없다는 듯 두건득이 맹아의 말을 잘랐다.
“대장군의 명이시니, 지난해 거둔 세미 중 묵은 양곡 쉰 섬만 우선 만들어 보겠소. 병사들의 반응도 봐야 하고, 또 이걸 취급하는 방법도 연구를 해 봐야겠고.”
“그건 두 장군이 알아서 하시오.”
“전령, 성에서 전령이 옵니다!”
편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근위대원 중 한 명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전령? 무슨 일이 있었나?”
맹아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과연 성 쪽에서 전령기를 등에 꽂은 일기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 가득 긴장의 빛을 띤 채 맹아는 직접 전령을 맞으러 말을 달렸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에 온갖 불안한 상상들이 그의 뇌리를 어지럽혔다.
그건 편월이나 두건득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들 역시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 속에 불안과 의문이 가득했다.
“보고! 강국의 사신 일행이 지금 체영관滯營關에서 입경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을 군사께서 보내셨습니다.”
“서신을?”
편월은 전령이 내민 서신을 받아 펼쳐,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며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이 공부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글을 읽는 건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읽던 편월의 안색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싶더니, 조금씩 하얀빛을 띠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내용이오?”
편월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본 두건득이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최근 들어 편월이 이처럼 속마음을 얼굴에 나타낸 적은 드물었다.
그러나 편월은 서신을 다 읽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올려다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한숨도 몇 차례 내쉬었다.
“대장군?”
이번엔 맹아가 조심스럽게 편월을 불렀다. 그 역시 서신의 내용이 무진장 궁금했다.
편월은 읽은 서신을 말없이 내밀었다. 말로 할 수 없으니 직접 읽어 보라는 표정이었다.
맹아와 두건득은 동시에 서신을 받아 들었다. 송지가 보낸 게 아니라 강국의 사신이 보낸 것이었다.
“뭐야? 혼담을 청한다는 내용이잖아! 뭐? 우리 대장군과 증두신의 딸이?”
“하하하, 이거 재미있구만!”
같은 내용의 서신을 읽은 두 사람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맹아가 얼굴을 붉히며 노기를 터뜨린 반면, 두건득은 배를 잡고 웃었다.
“뭐가 그리 우습소?”
“재미있지 않나. 증두신이 우리 대장군을 탐내고 있으니 말이야. 하하하!”
“그래서 이 혼약을 승낙하자는 말이오?”
“못 할 이유도 없겠지. 대장군도 이제 가정을 꾸릴 나이도 됐고, 또 증두신의 딸을 볼모로 잡아 둔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나.”
“뭐요?”
아무래도 나이 차이만큼이나 견해도 서로 동떨어져 있었다. 맹아는 두건득의 사고를 불결하게 여길 정도로 젊었고, 두건득은 그런 맹아가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로 보였다. 이렇게 되면 결정은 편월이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편월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에 파란 힘줄이 돋아 있는 걸 보니, 이 혼담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 표정을 확인한 맹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건득을 돌아보았다. ‘그것 봐라!’ 하는 얼굴이었다.
“이곳은 두 분 장군께 맡기겠소.”
말을 마치자마자 누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소질풍에 훌쩍 올라 그대로 달려가는 편월이었다.
“따르라!”
동시에 화응도 고함을 지르며 말에 박차를 가했고, 근위대원 중 십여 기가 편월의 뒤를 따랐다.
편월은 성을 향해 달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혼인을 심각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었고, 혹 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유화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이런 혼담이 나왔으니 편월로선 뜻밖이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소질풍은 어느새 성문 근처에 이르렀고, 서쪽 산등성이 너머에선 짙은 먹구름이 잔뜩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야흐로 우계雨季의 시작이었다.
2
가겸후에게 있어 지난 삼 년은 악몽 그 자체였다. 융주의 반란은 그럭저럭 더 커지지 않게 눌러둘 수 있었지만, 바다와 남쪽의 강국과의 전쟁은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우선 바다에선 그동안 상초국과 크고 작은 해상 충돌이 일곱 차례 있었고, 모두 패했다.
그건 가겸후에게 커다란 타격을 줬다. 배의 건조와 해군의 양성으로 엄청난 국력이 소비된 건 물론, 두 번씩이나 궐운평야 끝 자락에 상초국의 병사들이 영채를 짓는 걸 허용하기도 했다.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가씨 가문은 율천국을 세운 이래로 단 한 번도 외부의 군벌에 침략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기 대에 이르러, 그것도 바다 건너 이민족에게 한때나마 국토의 일부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가겸후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결국 총력을 기울여 상초국 해적들을 다시 바다로 밀어내긴 했지만, 그처럼 비옥했던 궐운평야의 삼 할 가까이가 황폐해지고 말았다.
당연히 민심도 이반離叛되었다. 난세의 백성들이야 강력한 보호자 아래에서 보다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바라는 것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까지의 율천국은 그 기능을 충실히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상에서 연전연패하고, 마침내 나라 안에까지 적을 들여놓게 되니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가씨 왕조에 대한 신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곧바로 각지에서 도적들이 창궐하게 만들었다. 내일의 삶이 불안해진 사람들은 오늘의 소유물에 집착하게 되고, 그 심리는 곧바로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졌다. 강제로라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두지 않으면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풍조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물론 가겸후는 그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반하는 민심을 잡기 위해 조세를 감면해 주기도 하고, 소재가 파악된 도적의 무리들은 철저하게 소탕해, 괴수는 극형에 처하고, 그 추종자들은 강제로 수군에 배속시켰다. 연전연패하는 수군에 소속되는 걸 누구나 꺼려해서 인원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같은 형편이니 남쪽의 강국과의 일도 잘 풀릴 리 만무했다.
아니, 그쪽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이리라. 상초국의 파격적인 지원은 바다뿐 아니라 육상으로도 이어져 일진일퇴의 지루한 공방을 거듭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지난 삼 년간 가겸후에게 나쁜 일만 일어난 건 아니었다. 허주의 국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원군을 파견했던 의도는 어느 정도 맞아떨어져 마침내 영산까지 수중에 넣었다.
이게 시사하는 바는 컸다. 그 옛날 한차례 허주를 침공했던 가겸후가 바로 여기서 조환에게 혼쭐이 났었다. 그 영산을 점령함으로써, 마침내 서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었다.
서방정변 역시 가겸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마용승에겐 그 기량이 미치지 못하지만, 호윤천도 예사 무장이 아니었다. 만약 광운이 막주에서 들고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허주를 장악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율천국으로선 서쪽으로 통하는 숨구멍이 졸리는 셈이니, 가겸후의 입장에서 보자면 광운이 어떤 의미에선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겸후를 기쁘게 한 일은 작년, 그러니까 영창십년에 일어났다.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황제의 아들이 가 황후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다.
가겸후는 자기 아들을 얻었을 때 이상으로 기뻐했다. 이로써 자신의 원대한 계획이 크게 한 걸음 내디뎌진 기분이었다.
‘이놈이 다섯 살만 되면…….’
처음 황제의 아들을 외숙外叔의 자격으로 대면했을 때, 가겸후가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누가 뭐래도 그 아이는 태자였다.
그 태자가 다섯 살이 되면 지금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보위를 잇게 한다는 게 가겸후의 계획이었다.
그다음이야 뭐 뻔한 수순이다. 어린 황제를 좌지우지하다가, 적당한 기회에 양위를 받으면 그만이다.
황태자의 탄생으로 얻은 부수적인 수입이 있다면, 황제의 이름으로 천하에 대사령을 내린 일이었다.
통상 해 오던 일이었지만, 영창십년에 내려진 대사령은 다분히 호윤천을 의식하고 견제하려는 수단의 하나였다. 서방정변이 시작된 이후, 호윤천은 광운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천하의 의군을 동원하자는 상소를 연방 황제에게 올렸다.
당연히 그 상소들은 진남후를 계승한 마국립의 이름으로 올려졌지만, 그 배후에 황실과 어떻게든 연결 고리를 만들어 보려는 호윤천의 입김이 짙게 배어 있음은 물론이었다.
그 의도를 가겸후는 대사령 한 장으로 끊어 버린 것이다. 그 사면 대상에는 광운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는 호윤천을 상대로 마음껏 싸울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게다가 황태자가 태어남으로 해서 가겸후는 또 하나의 부담을 덜었다. 바로 편월의 존재였다.
만약 황태자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황위의 다음 계승자는 당연히 황제의 사촌인 편월이 되어야 한다. 그건 황제 자신이 확인해 준 것이니 이설異說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황제에게 후사가 생겼으니, 편월은 자연스레 황위 계승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게 가겸후를 어느 정도 안도하게 만들었다.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너무 강하다는 인식을 심어 준 그 꼬맹이가 황제가 된다면, 자신의 계획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일들이 지금 당면한 가겸후의 곤란을 덜어 주지는 못하니만큼, 그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 육우맹과 폐포자를 불러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나는 이만 융주에서 손을 떼고 싶소. 차지하고 있어 봐야 별다른 이득이 없으니, 거기에 소용되는 경비를 차라리 수군에 충당할까 하오.”
“불가하옵니다!”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육우맹은 단번에 반대를 부르짖고 나섰다.
“모름지기 싸움이란 나의 강한 것으로 적을 끌어들여 싸워야 하는 법이옵니다. 그런데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이기지 못한 수군을 다시 양성하신다는 건 언어도단, 차라리 상초국의 해적들을 상륙시켜 육상에서 깨는 게 병법의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옵니다.”
“논리야 그렇지만, 그 육전에서도 우린 결코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소이다.”
“뭣이? 그렇다면 선생의 말대로 수군을 키운 결과는 어떻소? 막대한 군비만 소모하고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소! 그런데 또다시 수군을 양성하라니? 도대체 선생은 어느 편이오?”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폐포자를 향해 육우맹은 거품을 물었다. 실제로 상초국이나 강국에서 보낸 간인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말이 지나치오, 육 장군! 우린 지금 상초국과 전쟁 중이오. 어떻게 하든 수군은 있어야만 하오. 그런데 선생, 육 장군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이다. 이처럼 수군이 계속 패해서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오. 무슨 대책이 없겠소?”
“지금까지 우리들이 고전을 한 건 사실이오. 하지만 그사이 상초국 해적들의 강하고 약한 점만은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소. 육전은 육 장군께서 더 잘 아실 테니 달리 말씀드리지 않겠소. 다만 해전은…….”
“해전은?”
어디든 틈만 있으면 물어뜯겠다는 표정으로 육우맹이 성급하게 폐포자의 말을 받았다.
“상초국 해적들의 전법은 배를 서로 바짝 붙여 상대의 배에 뛰어드는 것이오. 그 좁은 공간에서는 병법이고 작전이고 써 볼 겨를이 없는 것이오. 그에 비해 상초국 해전들에겐 익숙한 전법이고, 또 그들의 독특한 무예도 그처럼 좁은 공간에 맞게 발달한 것 같았소.”
“지금 적의 전법이나 무예에 대해 듣자는 게 아니오. 그래서 대책이 뭐요?”
“요컨대 상초국 해적들이 아군의 배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게 요점이오. 그러자면 원거리 공격이 불가피…….”
“그게 대책이오? 그걸 몰라서 우리가 당한 줄 아시오! 상초국 해적들의 배는 우리 수군의 배보다 훨씬 빠르오! 원거리 공격을 해 볼 틈도 없단 말이오!”
“지금까진 그 원거리 공격이란 게 우리 병사들이 사용하는 활 공격이었지요. 그래서 이런 걸 고안해 봤소이다.”
어디까지나 느긋하게 육우맹의 말을 받아넘기며, 폐포자는 품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펼쳤다.
“이건 그냥 쇠뇌가 아니오? 근데 이건 뭐요?”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본 육우맹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누가 봐도 그림은 쇠뇌를 그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쇠뇌가 맞소이다. 다만 그 크기가 일반적인 것보다 열 배는 크지요. 그래서 장전하기 위해선 이런 장치가 필요한 거고.”
폐포자는 쇠뇌 바로 옆에 그려진 이상한 도구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육우맹으로선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톱니바퀴 같은 걸 손으로 돌리게끔 되어 있는 장치였다.
“이 장치를 돌려 장전을 하는 거지요. 크기가 열 배이니만큼 거리도 그 정도 날아갈 겝니다. 이걸 단순히 아군의 배에만 장착할 게 아니라, 해안에도 설치하면 대단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오.”
“시험은 해 봤소?”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육우맹은 거친 눈길로 폐포자를 쏘아보았다.
“벌써 이백 개를 제작해서 시험까지 마쳤소이다.”
폐포자의 어조는 어디까지나 잔잔했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좋소. 이미 시험까지 마쳤다면 더 머뭇거릴 것도 없소. 당장 제작에 착수하시오.”
“존명!”
육우맹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복명했다. 그 역시 율천국의 오기총감장답게 승리를 위해선 다른 모든 건 덮어 둘 줄 아는 아량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 * *
강국과의 유일한 통로라 할 수 있는 체영관에 머물러 있던 증두신의 사신 일행 세 명은 즉각 탄금성으로 불려 들어갔다.
편월 앞에 나선 사신은 처음부터 고압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자기 나라 맏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감사하라는 태도였다.
“이건 대장군에게 있어선 다시없이 좋은 기회일 것이오. 설마 강왕 전하께서 부마를 이런 궁벽한 곳에 두시겠소이까? 그러니 두말 말고 승낙하시는 게 좋을 거외다.”
증두신이 얼마나 관대한 왕이며, 또 그 딸인 공주의 외모와 심성을 장황하게 칭찬한 후 사신은 강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이런 궁벽한 곳에 두지 않으면? 강국을 통째로 우리 대장군께 넘겨주기라도 하시겠다는 거요?”
맹아가 시비조로 사신의 말끝을 물고 늘어졌다. 그는 처음부터 이 혼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 저처럼 오만한 말을 듣고 보니 노기가 솟구쳤던 것이다.
“에?”
사신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자신의 말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되받아쳐질지 몰랐고, 또 그 말투나 행동이 너무도 무례했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방금 사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 우리 대장군을 이곳에 두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럼 어디의 어떤 곳을 줄 건지 묻고 있는 거요. 그걸 듣고 나서야 대장군도 결심을 하실 거요.”
“맹 장군!”
보다 못한 송지가 억누르는 목소리로 맹아를 질책했다. 어찌 됐든 사신을 맞고 있는 자리다. 너무 큰 결례를 범한다면 나중에 책잡힐 우려도 없지 않았다.
“내가 뭐 못 할 말을 했소? 우리 대장군을 여기처럼 궁벽한 곳에 두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럼 강국을 통째로 넘겨줄 거냐고 물은 거요. 그게 아니라면 확실히 어디의 어떤 땅을 주겠다고 확답을 내 달라는 건데, 그게 뭐 잘못됐소?”
“그래도 예의는 갖춰야 할 것 아니오! 이건 싸우자는 게 아니라 혼담에 관한 것이오. 경사스러운 일이란 말이오.”
“경사 좋아하네! 성사되어야 경사지,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일에 뭐가 경사란 말이오!”
“허어!”
맹아와 송지의 언쟁에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사신들이었다. 아무리 무장들만 모였다지만, 이처럼 무질서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사신들은 편월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그는 대장군이다. 저처럼 거칠고 예의가 없는 부하들의 행동을 나무랄 만도 했다.
그런데 편월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미간에 주름에 잡혀 있긴 했지만, 그건 여러 장수들의 언행 때문이 아니라 사신들이 왔을 때부터 자리 잡고 있는 거였다.
그걸 확인한 사신들은 서서히 질리기 시작했다. 대장군이 그냥 지켜볼 정도라면, 이 같은 언행이 몸에 붙었다는 의미다.
그건 사신들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자기들의 대장군 앞에서 저렇게 행동하는 자들이 다른 사람,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왕인 증두신이라고 해서 그 권위를 인정하고 예의를 갖출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무래도 이번 사자의 임무는 실패할 공산이 크겠군.’
이게 사신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사실 사신 노릇을 하면서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실패할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번 임무는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강국의 왕이 한때 자신의 영토였던 일 개 성의 대장군에게 보낸 사신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나쁜 일로 온 것도 아니다. 자기 나라 공주와 혼인시키겠다는 청혼사請婚使였다. 당연히 감지덕지해서 황감하다는 대답을 갖고 돌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을 듯했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될 이런 일에 실패하게 되면, 앞으로 왕인 증두신의 신임은 희석될 게 분명하다. 더 이상의 출세는 물 건너갔다는 얘기다.
“사신들은 잠시 물러가 주시오. 우리끼리 얘기를 좀 해야겠소.”
송지가 사신들에게 자리를 피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역시 너무나 단도직입적이고 무례한 어투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 사신들은 안내하는 근위대원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대장군, 이건 생각해 볼 것도 없는 일이오! 당장 사자들을 꾸짖어 돌려보내시오!”
“꾸짖어 돌려보내고 나선? 우리가 거절하면 증두신이 가만있을 것 같은가?”
사자들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맹아와 송지는 다시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그나마 형식적으로 서로 존대하는 말투조차 걷어치워 버린 상태였다.
“그럼 우리 대장군께서 증두신을 장인이라 부르며 머리 숙이는 걸 보란 말이오? 난 그렇게 못 해!”
맹아의 어투는 갈수록 격렬해졌다. 젊음의 순수한 감정이 이런 정략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혼인에 대해 불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장군께는 유화 누님이 계신다.’
맹아도 막주에서 철수한 이후 죽영루에 머물렀기에 유화에 대해 잘 안다. 오랜 전쟁에 지친 잡가군을 보살피면서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던 그녀와 편월이 맺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도 있다.
그런데 증두신이 난데없이 자기 딸과의 혼담을 들고 나왔다. 감정으로나 이성으로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만 처리할 문제가 아닐세. 이건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걸세.”
“심각할 것도 없소. 소장도 맹 장군과 생각이 같소이다.”
역시 나이가 든 서진청이 송지의 말에 동조하는 듯하자, 이번엔 강숙이 나서 언성을 높였다. 아무래도 젊은 장수들은 이런 식의 혼담엔 거부감이 강했다.
“생각해 보시오. 지금까진 비교적 우호적이었지만, 증두신의 마음이 언제 돌아설지 모르오. 그 사람 자체가 나빠서라기보다는 시대가 그렇게 만드는 거요. 만약 우리가 이 혼담을 거절한 걸 계기로 증두신이 우리에게 앙심을 품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알다시피 우리의 후방은 텅 비어 있는 실정이오. 증두신이 공격해 온다면 열흘도 버티기 힘들 거요. 그러니 여기서는 두 장군의 말처럼 볼모를 받아 둔다 생각하고 증두신의 딸을 맞아들이는 게…….”
“언제부터 그렇게 약해지셨소?”
송지의 긴 얘기를 맹아가 중간에서 잘라 버렸다.
“막주전을 생각해 보시오. 그땐 고작 오백으로 막주군을 상대했소. 증두신의 강국군이 그들보다 강하다고는 생각지 않소이다. 그런데 뭐? 열흘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증두신이 겁나거든 송 군감은 싸울 때 뒤로 물러나 계시오! 나 혼자서라도 강국군을 막아 보일 테니!”
맹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실내는 각자 내뱉는 말들로 떠들썩해졌다. 주로 젊은층들이 주장하는 일전불사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나이 든 장수들도 결코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그만!”
그 소란은 편월의 한마디로 뚝 끊어졌다. 대장군이어서가 아니라 혼담의 당사자인 그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 혼담은 받아들이는 게 좋겠군. 아직은 증두신을 적으로 돌릴 때가 아냐.”
편월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소리가 모든 사람들의 귀엔 똑똑히 들렸다. 갑자기 실내가 조용해진 탓도 있지만, 그게 편월의 결정이었기에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장군!”
맹아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며 불렀지만, 편월은 가벼운 손짓으로 그걸 억눌렀다.
“이 문제에 대해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도록! 두 장군의 말대로 증두신으로부터 볼모를 하나 잡았다고 생각하면 돼.”
조금 전과는 달리 편월의 이 말은 다소 강한 어투였다. 의견이 대립되었을 때의 무장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언쟁을 벌이는지 잘 알기에 애당초 그 싹을 잘라 버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의도는 주효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사자가 결정했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무장들은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 논의를 하기 시작했고, 그게 끝났을 때 물리쳐졌던 사신들이 다시 불려 왔다.
3
뭇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날도 광운은 진두에 서서 함월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건 처음 사주와 싸웠던 흑암성 전투 이후로 쭉 지켜 왔던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막주군은 병사가 아니라 도살자가 되어 성병이나 백성들을 학살한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보고, 상가군 이천, 함월성 동문에 집결 완료!”
“보고, 적의 퇴로와 보급로를 유군이 확보!”
함월성의 남문이 빤히 보이는 곳에 병력을 집결시켜 둔 광운에게, 각 부대에서의 전령들이 잇달아 보고를 해 왔다.
“성주, 이제 사시가 다 되었습니다. 명령을!”
방필이 곁으로 말을 붙이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얘기했다. 벌써 일 년 가까이 계속된 이 함월성 공격은 마치 정해진 일과처럼 사시에 시작해서 미시경에 끝을 내곤 했다.
상가군, 즉 효명성을 버리고 나온 상림호의 군세와 합류한 건 영창구년의 한겨울이었다. 그때 광운은 함락시킨 흑암성에서 병사들을 휴식시키며, 또 막주와의 보급로를 새로이 정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소식을 접한 광운은 그길로 북진을 시작했다. 성을 버리고 나온 상림호를 조금이라도 빨리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가 데리고 있을 죽영과 유화에게 신경을 쓴 것도 사실이었다.
그건 한마디로 파죽지세라고 할 만했다. 시작하자마자 흑암성을 떨군 기세 그대로 사주의 남쪽에 있는 세 개 성을 함락시킨 게 불과 다섯 달 남짓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함월성에 도전하게 되었을 때, 상가군도 온갖 어려움을 뚫고 후줄근하게 지친 모습으로 막주군과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광운과 상림호의 만남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다. 난세를 사는 무장들에게 있어 이만한 어려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그저 뜨거운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두어 차례 끄덕였을 뿐이다.
하지만 죽영과 유화를 만났을 때는 광운도 그저 담담할 수만은 없었다. 자청해서 상가군의 보급대에 편입된 그녀들은 병사들과 같은 전복을 입고, 막주군으로부터 지원받은 쌀로 한창 밥을 짓고 있던 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광운은 한동안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 성을 버리고 나온 상가군이 변변한 보급품을 챙겨 나왔을 턱이 없다. 그저 곳곳에 인연이 닿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혹은 앞을 막는 사주군을 돌파하며 전리품으로 얻은 게 고작이었으리라. 그렇게 고생한 지난 몇 달간의 자국이 그녀들의 얼굴에 고스란히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망연히 서 있는 광운을 먼저 발견한 건 죽영이었다. 놀란 듯 움찔하는 그 눈매에 금방 뽀얀 물기가 차올랐다.
그때 광운은 죽영이 그대로 달려와 자신의 품에 안길 줄 알았다.
하지만 죽영은 눈물 맺힌 얼굴로 한차례 웃어 주었을 뿐, 다시 부지런히 손을 놀려 계속해서 밥을 지었다.
그나마 인간적인 반가움으로 광운을 대한 건 유화였다. 물을 길어 오는 중이었는지 물지게를 지고 있던 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러다 지고 있던 지게를 팽개치며 광운에게 달려와, 갑옷 입은 품에 그대로 안겼다.
그 순간 광운의 눈매는 화끈하게 달았고, 코끝은 찡해졌다. 열아홉 나이의 몸치고는 너무나 여위고 가벼웠다. 지난 몇 달간 그녀들이 겪었던 고생이 유화를 안은 팔을 통해 확실히 전해진 탓이었다.
그녀들은 곧장 막주군의 진지로 옮겨졌다. 광운의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침사성으로 보내고 싶지만, 그녀들은 완강하게 남겠다고 했다.
뿐 아니라 그녀들은 다시 보급대에 배속되길 원했다. 그녀들이 병사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그거밖에 없다면서…….
“성주, 벌써 각 부대는 배치를 끝내고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방필이 재차 광운을 채근했다. 배도 든든히 채웠으니, 이제 근질거리는 손을 풀고 싶어진 것이다.
“알겠다. 자, 공격!”
명령과 동시에 광운은 가장 진두에 서서 말을 달렸다. 장수기가 움직였고, 동시에 직속부대가 자욱한 먼지와 더불어 함월성의 남문으로 쇄도해 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진즉부터 성을 포위하고 있던 각 부대들이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맡은 곳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건 지난 일 년간 판에 박은 듯이 반복된 일이었다. 이렇게 기세를 올리며 쳐들어가지만, 막상 성을 심하게 공격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놀고먹기가 미안하니깐 정해진 일과처럼 막주군은 공격을 하고 성병들은 수비를 했다. 그게 서로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막주병들은 처음부터 불만이었고, 지금 당장 떨굴 수 있는 성에 왜 이처럼 시간을 끄느냐며 노골적인 불평을 터뜨리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광운은 듣지 않았다. 큰 은혜를 입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용승의 아들을 향해 창을 겨누고 있다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보급로가 지나치게 길어졌다. 사주는 예로부터 척박한 땅인지라 현지에서 군량이나 물자를 조달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빨리 진군하는 바람에 미처 떨구지 못한 사주의 성에서 호시탐탐 그 보급선마저 끊으려고 노리고 있다. 더 이상 진군한다면 전군을 위험에 빠뜨릴 공산이 크다.
“성주, 적입니다!”
돌연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방필이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며 전방을 가리켰다.
광운은 재빨리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함월성의 병사들이 성문을 열고 쳐 나오고 있었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이 함월성에 도전했을 때 성병들은 지금처럼 밖으로 쳐 나왔다.
그 결과 그들은 크게 패했고, 그 후론 성문을 꽉 닫아건 채 소극적인 수비로만 일관했다.
그런데 오늘은 밖으로 치고 나온다. 이렇게 되면 전력을 다해 상대할 수밖에 없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 싸움엔 피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특히 서로의 육신이 직접 부딪치는 접전이나 난전이 되면, 승패를 떠나 피아간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군사를 돌리면 아군의 피해만 커질 뿐이다. 최대한 강하게 부딪쳐 이쪽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상책이다.
“각 부대로 전령을 보내라! 최선을 다해 사주군을 치라고 해라!”
“존명!”
방필로선 지난 일 년간 학수고대했던 명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광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각 부대로 전령을 놓아 보냈다.
광운도 새삼 투구 끈을 조였다. 어차피 제대로 싸우자고 작정한 이상, 진두에 서서 한바탕 해치울 작정이었다.
“성주께선 직속부대를 이끌고 뒤로 빠지시길!”
전령들을 보낸 방필이 다시 광운 곁으로 접근하며 말했다. 요컨대 위험한 싸움은 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광운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질풍을 더욱 빨리 몰았다.
“성주!”
방필이 광운을 세차게 부르며 바짝 따라붙었다.
그 바람에 전군의 진군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성주가 가장 선두에서 달리니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사주군과의 거리가 약 백 보 정도로 좁혀졌을 때, 양측의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와아아아-!”
“쳐라아앗-!”
광운도 힘차게 고함을 질렀다. 정말이지 모처럼 질러 보는 함성이었고, 오랜만에 휘둘러 보는 대도였다.
서로 마주 달리던 두 개의 군세가 얽힌다 싶자, 이내 주변에 함성과 비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 소음 속에서 광운은 대도를 휘둘렀다. 표적은 구레나룻을 무성하게 기른 사주군의 장수였다.
“감히 우리 땅을 더럽힌 막주 놈들을 모조리 주살하라! 쳐라, 쳐!”
구레나룻은 광운이 접근하는 줄도 모르고 연방 부하들을 독려했다. 보기에도 섬뜩한 커다란 쌍도끼가 그의 두 손에서 마구 춤을 추고 있었다.
광운은 그대로 대도를 휘둘렀다. 사주군의 입장에선 장수일지 몰라도, 자신의 눈으로 보면 이름조차 밝히기 아까운 한낱 무장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광운의 첫수는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구레나룻이 급작스레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가는 바람에, 대도가 그의 갑옷을 스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동시에 구레나룻이 방향을 홱 바꾸며 고함을 질렀다.
“웬 놈이냐? 이름도 밝히지 않고 덤비다니, 무례하다! 이 몸은 함월성에 그 사람 있다는… 크아악!”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구레나룻은 고함만큼이나 큰 비명을 남기고 말에서 벌렁 나가떨어졌다. 광운이 재차 휘두른 대도에 목이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로 깊이 베인 탓이었다. 전장에서 지나치게 예의를 따지는 자의 말로였다.
“성주께서 적장을 치셨다! 모두 힘을 내서 밀어붙여라!”
저만치 다른 적을 찾아 대도를 휘두르며 달려가는 광운의 뒤에서 방필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물론 아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였다.
“와아!”
또 한차례 우렁찬 함성이 막주군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전장 심리란 건 묘한 구석이 있다. 그때까지 우열을 점치기 어렵던 전황이, 방필의 한마디로 홱 바뀌어 버렸다. 더욱 세차진 막주군의 공격에 사주군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사주군이 꽁무니를 말고 위축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들도 악귀 같은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자세가 문제였다. 기를 쓰고 수중의 병기를 휘두르고 있긴 하지만, 이미 사주군의 두 다리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마음의 동요가 심하다는 얘기다.
물론 광운은 그 모든 걸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있었다.
‘더욱 세차게 몰아쳐야 한다!’
얼핏 보기엔 곧 사주군이 무너질 듯하지만, 그건 속단이라고 할 수 있다. 저처럼 병사들의 마음이 들떠 있으면 자칫 모든 걸 도외시하고 덤비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서 저런 상태의 군사들이 싸우면 크게 이기거나, 반대로 크게 패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여기선 더욱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조금만 여유를 준다면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끼히히히힝!
돌연 질풍이 앞발을 번쩍 쳐들며 그 자리에 멈췄다. 사주의 보병들이 창을 곧추세우고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고삐를 확 잡아채 방향을 바꾸면서, 광운은 대도를 횡으로 힘차게 휘둘렀다. 이걸로 사주의 보병들을 벨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디밀어진 창대는 충분히 자를 수 있을 터였다.
타라라락!
광운의 예상대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대가 잘려 나갔다.
그다음부터는 몸에 익은 타성대로의 행동이었다. 방해물이 없어져 활짝 열린 공간으로 질풍이 뛰어들었고, 마치 메뚜기처럼 흩어지는 보병들을 마구 짓밟거나 베어 넘겼다.
비단 광운만이 아니었다. 방필을 필두로 직속부대들 역시 거칠 것 없이 설치기 시작했다.
“막주에서 그 이름난 방필이 바로 나다! 이 이름을 알겠거든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수중의 창을 공중에 치켜들고 마구 휘두르면서, 방필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 기실 덤비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광운의 측근에 있으면서, 그가 싸움에서 희생된 병사들을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잘 아는 까닭에 투항을 권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 한마디가 먹혀들어 갈 구석은 이 전장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완전히 전장 심리에 젖어 버린 병사들은 자칫하면 한편끼리 싸움도 불사할 정도로 설쳐 대고 있었다.
그건 그대로 좋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이런 식의 싸움은 일방적으로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 적어도 아군의 피해가 줄어드니까 말이다.
“방 장군, 길을 뚫어라! 이대로 곧장 성으로 진입한다!”
“함락시키는 겁니까? 알겠습니다!”
즉각 대답한 방필은 연이어 직속부대를 독려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뚫고 성으로 진입한다! 뒤는 돌아보지 마라! 오직 앞만 보고 달려라!”
“와아-!”
직속부대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그들도 이 싸움판에서 드잡이질을 벌이는 것보다는 직접 성을 공격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에, 눈앞에 있는 적을 베어 넘기며 마구 앞으로 내달렸다.
이게 결정적으로 사주군을 뒤흔들었다. 가뜩이나 들뜬 마음으로 싸우던 그들의 눈에, 막주군이 성을 향해 곧장 진격하는 걸 보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미 승패는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성을 빼앗길 걸 두려워한 사주군의 일부가 광운의 직속부대를 막으려고 몸을 돌렸고, 그건 그대로 전체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방 장군, 다시 한 번 각 부대에 전령을 보내라! 무의미한 살생은 피하고 투항자들은 최대한 보호해 주도록!”
“존명!”
복명을 하고서 전령을 불러 지시를 내리면서도, 방필은 결코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우선 광운이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일번 돌입의 영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경쟁적으로 달리는 막주군에게 성과의 거리는 결코 먼 게 아니었다. 순식간에 성의 남문으로 육박해 갔고, 그제야 성병들은 다급하게 잔교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달려라, 달려! 놈들이 성문을 닫기 전에 치고 들어가야 한다!”
방필이 수하들을 마구 독려해 바람처럼 성문으로 쇄도해 가고 있을 때, 돌연 성의 오른쪽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막는 자는 죽는다! 길을 열어라!”
“방 장군, 잠깐! 아군이다! 상가군이다!”
몰려나온 병사들 사이를 그대로 뚫고 들어가려는 방필을 광운이 황급히 제지했다. 그들은 바로 함월성의 동문을 담당했던 상가군인 것이다.
“그렇다면 상 성주가 패했다는 말씀이오?”
이미 피를 본 뒤의 거칠어진 성정과 놀람으로 인해 방필의 어투도 평소 광운을 대할 때와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의식하지는 않았다. 전장에서는 말이 간결해지고 거칠어지기 마련이니까.
“우선 병사들부터 정돈시켜라! 자칫하다가는 한편 싸움이 벌어진다!”
패해서 쫓겨 오는 것이든, 아니면 작전에 의한 것이든 간에 이처럼 맹렬히 돌진하는 군사들 앞에 아군이 불쑥 나타난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같은 편끼리의 싸움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때인 것이다.
“상가군은 당장 그 자리에 멈춰라! 그러지 않으면 벨 수밖에 없다!”
같은 편이라도 두 개의 부대가 뒤섞여 버리면 우선 명령 체계가 어지러워진다. 자연 병사들도 우왕좌왕하게 되고, 거기에 만약 적이라도 치고 들어온다면 손쓸 사이도 없이 패주해 버리고 만다.
“방 장군,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삼킨 광운은, 질풍의 방향을 바꿔 밀려오는 상가군을 거슬러 달렸다. 이제 함월성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면 막주군 전체의 존립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상 성주는 어디 계시나?”
광운은 밀려오는 상가군의 기병 중 한 명의 고삐를 낚아채며 상림호의 소재를 물었다.
“뒤쪽, 뒤에서 적을 맞아 싸우고 계십니다!”
“뭣이? 장수가 싸우는데 네놈들은 도망을 친단 말인가?”
“하지만 적의 지원군은 오만 이상이라 어떻게 대항할 수도…….”
“지원군이라고? 안내하라! 상 성주가 계시는 곳으로 안내해!”
광운은 그 기병의 고삐를 마구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렇게 애쓸 필요도 없었다. 기병과 보병이 마구 뒤섞인 한 무리의 상가군이 다시 왈칵 밀려 나왔고, 거기엔 분명 상림호를 상징하는 장수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광운은 정신없이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상림호의 안부도 염려스러웠고, 무엇보다 오만이 넘을 것 같다는 지원군의 존재를 확인해 봐야 한다.
“성주, 너무 깊이 들어가시는 건 위험하오!”
장수기를 든 병사가 광운을 제지했을 때, 상림호 역시 몇몇 기의 무장들에게 둘러싸여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요?”
“호가 부자가 대대적인 원군을 보낸 듯하오. 아무래도 이 함월성이 떨어지면 사주 전체가 무너지는 거나 마찬가지니…….”
“원군의 규모는?”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웠소. 하지만 적어도 오만은 될 것 같았소.”
“알겠소. 우선 병사들을 여기서 빼냅시다.”
아무리 막주군이 증오감으로 뭉쳐 용맹하게 싸운다고 해도, 그 숫자는 고작 이만을 조금 넘을 뿐이다. 그것도 상가군까지 합쳐서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의외의 역습을 당해 혼란에 빠진 상태다. 이 이상 싸운다는 건 패배를 자초하는 일의 다름 아니다.
다행히 광운과 상림호가 한 덩어리가 되자 병사들도 점차 안정되어 갔다.
“병사들을 오십 리 밖으로 빼내도록 각 부대에 알려라!”
너무 빨리 성으로 쇄도하는 바람에, 이젠 오히려 포위를 당한 형국이 된 상태에서 광운은 재빨리 명을 내렸다.
징지지지지지잉-!
동시에 후퇴를 알리는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서방정변 이후 막주군이 처음으로 패주하는 순간이었다.
아마 함월성을 지원하기 위해 온 원군도 막 도착했던 게 틀림없다. 막주군이 물러나자 그들 역시 군사를 거둬 성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