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인군략求人軍略 (34/66)

구인군략求人軍略

1

해가 바뀌고, 대과산맥의 각 계곡에 눈 섞인 물이 흐르기 시작했을 때에야 탄금성의 개축 공사는 완전히 끝이 났다.

그사이 병사들의 가족들도 꾸준히 이주해 왔다. 송용조 상단의 모용추가 백방으로 노력한 덕이었다.

그 사람들은 각기 농지를 배당받아 벌써 땅을 일구고 있는 중이었다. 두건득이 빠듯한 보급품 중에서도 아껴 모은 양곡을 종자로 받아서 말이다.

그리된 데는 물론 국경의 안정이 절대적이었다. 정허군으로선 그 속내를 속속들이 알 길이 없지만, 연합군은 내부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의 군사행동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 탄금성으로 들어온 이후론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도 편월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여태 유군에 대한 소식이 단 한 줌도 잡히지 않아서였다. 지금이 영창구년 이월이니, 벌써 넉 달째 종무소식인 셈이다.

비록 안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국경의 상황도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연합군의 봉쇄가 풀려야, 석축산까지 세력을 확장하겠다던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편월을 괴롭히는 건 사문기의 불만이었다. 지금 율천국과 크고 작은 분쟁과 전투를 거듭하고 있는 증두신의 배후를 치자는 게 그의 주장이었고, 그걸 들어주지 않자 노골적인 반감을 입 밖에 내뱉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심정을 편월이 모르지는 않았다. 사문기로서는 지금이 옛 땅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겠지만, 자신과 다른 장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상초국의 지원까지 얻은 증두신의 세력을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게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송지의 의견이 특히 강했다. 모처럼 이주시킨 병사들의 가족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호하고 보살피는 게 급선무라는 얘기였다.

송지의 말에 따르면, 지금처럼 증두신의 보급에만 의존해서는 정허군의 병사를 단 한 명도 늘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주한 백성들에게 나눠 준 종자만 해도 병사들의 배를 굶기며 마련한 것이니, 그것들을 다시 수확할 때까지만이라도 일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걸 위해 송지는 손이 남는 병사들까지 은연중에 농사일로 빼돌리는 눈치였다.

그건 누가 들어도 합당한 이유였다. 게다가 그 말속에 이 가을부턴 세미를 거둬들일 수 있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증두신의 배후를 치든, 아니면 다른 일을 벌이든 간에 군사를 일으키려면 일단 군량의 뒷받침이 우선시되어야 하니, 사문기도 공식 석상에선 송지의 의견에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겐 고향에서부터 행동을 같이했던 부하들이 있다. 대부분 보병에 소속되어 있어 희생이 컸던 만큼, 그 불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사문기는 그들의 불만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군사들에 대한 훈련만큼은 끊임없이 시켰다. 고작 사천이 될까 말까 한 숫자로 이 탄금성을 지켜 내려면, 병사들 개개인이 일당백의 강병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훈련의 대부분은 대과산맥을 누비며 사냥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병사들을 단련시키고, 또 부수적으로 나오는 고기와 가죽 등은 먹거나 송용조 상단을 통해 팔아서 비용을 저축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었다. 각 부대끼리 편을 나눠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병사들 개개인에게 하루 삼십 대 이상의 활을 쏘게도 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이기려면 활만큼 효과적인 무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비되는 무기들은 부상으로 실전에 참가할 수 없는 병사들이 도맡았다. 개중에는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도 더러 있어 활과 화살은 물론, 각종 무기를 너끈히 제작해 냈다. 지금도 그걸 만드는 망치 소리가 대장간을 떠들썩하게 울리고 있을 터였다.

“대장군!”

얼굴도 보이기 전에 벌써 복도에서부터 부르며 방으로 들어선 건 맹아였다. 탄금성을 개축하면서 새로 지은 이 대장군부에서 저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는 건 그뿐이었다. 다른 장수들은 편월의 권위를 세워 주기 위해서 은근히 조심해 주는 눈치였다.

“무슨 일이오?”

“오늘도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주를 허락해 달라고 청원해 왔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요? 평소처럼 처리하면 되지.”

“그런데 이번엔 좀…….”

맹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뭔가 미심쩍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이라면 다그쳤겠지만, 편월은 말없이 기다렸다. 이것도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었다.

“이번에 온 사람들은 병사들의 가족들만이 아니라 동네의 이웃들도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 혹시 적의 간인이라도 섞여 있으면…….”

“적의 간인은 벌써 들어와 있을 거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모두 받아들이시오. 벌써 농사가 시작되었으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요.”

“그럼 대장군은 성에 잠입해 있을 간인들을 색출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용할 구석이 있을 거요.”

편월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적의 간인들을 멋지게 이용했던 광운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다.

무슨 말인가를 할 것 같았던 맹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편월에게선 선뜻 말을 붙이기 어려운 뭔가가 느껴졌다. 그래서 대장군부 내에서 일부러 방약무인하게 행동하는 것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들 모두 들여놓겠습니다.”

그렇게 맹아가 나가자마자, 그와 엇갈리듯 송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뭔가 급한 일이 있는지 다소 들뜬 기색이었다.

“연합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이다!”

“응?”

편월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보고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격이라도 해 올 것 같소?”

“아니, 그 반대요! 아무래도 물러갈 것 같소이다. 아침부터 기치가 어지러이 움직인다 싶더니, 이젠 영채와 진지를 불태우고 있소이다.”

“가 봅시다!”

편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에 나서니 새로운 재목과 횟가루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집 특유의 향취였다.

대장군부의 복도를 빠져나오자마자 널찍한 연무장이 펼쳐졌고, 전각 앞에는 편월의 애마인 소질풍이 매여 있었다. 이것도 탄금성을 개축한 후에 생긴 변화 중 하나였다.

그 전의 탄금성은 이보다 훨씬 협소했다. 국경에 인접해 있으니 백성들의 편의보다는 군사적 효용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탓이었다.

그걸 이번에 무려 다섯 배 이상 확장했다. 이주해 오는 가족들을 성 밖에 살게 할 수 없다는 병사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한 것이었다.

그 결과 탄금성은 제법 성다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대장군부를 중심으로 한 내성도 쌓고, 그 바깥으론 상가나 민가 그리고 그럴듯한 집무창까지 갖췄다.

편월과 송지는 바람처럼 달려 내성을 빠져나왔다. 거기엔 벌써 사람들의 그림자가 무성했다. 길 양편으론 연방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는 중이고, 엉성하게나마 난전도 형성되어 있었다.

“물러서시오! 대장군의 행차시오!”

어느새 따라붙은 십여 기의 근위대원 중 누군가가 앞장서 달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마치 물살이 갈라지는 것처럼 사람들은 길 양편으로 물러서며 분분히 예를 갖췄다. 자신들에게 살길을 열어 준 편월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편월은 더욱 빨리 소질풍을 몰았다.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왠지 낯이 뜨거워지고, 한편으론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그렇게 백성들의 거주지를 벗어나자마자 내성에 있는 것보다 훨씬 너른 연무장이 눈앞에 확 펼쳐졌고, 그 한편에 거대한 창고처럼 생긴 집무창이 우뚝 서 있었다. 그제야 편월이 가고자 하는 탄금성의 동문이 멀찍이 보였고, 그보다 더 먼 곳에선 시커먼 연기가 연방 피어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동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동문에 당도하자마자 편월은 말에서 뛰어내려 곧장 망루로 오르는 돌계단을 딛고 달렸다.

여기서도 그동안의 변화가 여실히 느껴졌다. 외성벽을 쌓은 돌들은 예전의 것과 새것이 뒤섞여 마치 묘한 그림을 그려 둔 것 같았고, 새로 판 해자엔 이제 절반 정도 물이 들어찬 상태였다.

내성이든 외성이든, 성벽을 볼 때마다 편월은 송용조 상단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곤 했다. 성 개축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의 거의 대부분을 모용추를 통해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대장군을 뵈오!”

오늘 동문의 수문 장수인 지두룡이 망루에 올라선 편월에게 군례를 갖췄다.

“적의 동정은?”

“보시는 바와 같소이다.”

한쪽만 남은 팔로 국경 쪽을 가리키며 지두룡은 싱긋 웃었다. 그 역시 적군이 물러갈 것 같으니까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편월은 아스라이 보이는 국경을 향해 눈매를 좁혔다. 먼저 정연하게 기치를 세운 강국군의 후미가 보였고, 그 훨씬 전방에선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합군이 영채와 진지를 불태우고 있는 게 확실했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연합군 중 일부가 동북쪽으로 길게 꼬리를 끌며 철수하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라면 승패를 도외시하고 저 후미를 쳐 볼 텐데.’

이게 편월의 생각이었지만, 강국군을 지휘하는 이환의 입장은 또 다르다. 그는 결코 연합군에 더 이상 싸움을 걸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보다는 곧바로 강국의 주성인 거죽성으로 철수하는 게 더 급할 것이다. 어쨌든 증두신과 가겸후는 지금 연일 싸움을 계속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환이 철수할 때가 문제다.’

연합군이 완전히 물러가면, 이환도 군사를 돌려 철수할 게다. 그땐 이 탄금성을 통과할 게 뻔하고, 만에 하나 공격을 받는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 성을 통과시키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하지만 그건 편월의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이 성이 강국의 것이라 그런 게 아니다. 이만이나 되는 대군이 행군해 갈 길이 주변에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이만이나 되는 강국군을 어떻게 통과시키느냐’이다. 당장 오늘내일의 일은 아니지만, 이건 분명히 대비해 둬야만 한다.

“오늘 예비대는 어느 부대요, 송 군감?”

“예, 오늘은 백월대올시다만…….”

대답하는 송지의 말끝이 약간 수그러들었다. 백월대 중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농사일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비상대기 시키시오.”

“예?”

다소 놀란 표정으로 송지는 편월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성에 들어온 건 유군을 빼고 여섯 개 부대뿐이다. 그중 근위대는 늘 편월과 함께하고, 나머지 다섯 개 부대가 성의 네 개 문을 돌아가면서 지키고, 한 부대는 휴식을 취한다.

그러니 근무에 투입된 부대만큼이나 비번인 병사들의 휴식도 중요하다. 나흘 근무 뒤에 하루 쉬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들까지 동원하라니, 혹시 적이 철수하는 게 아니라 다시 쳐들어오는가 싶어 새삼 확인했을 정도였다.

“강국군에도 틀림없이 허주나 율천국의 간인들이 스며들어 있을 거요. 강국군의 뜻이야 어떻든, 그들이 이 성을 통과할 때 간인들이 설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거요.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하자는 말이오.”

편월은 극도로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로 곁에 있는 송지와 지두룡의 귀에도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여기에도 있을 적의 간인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말은 그걸로 충분했다. 다들 이 난세의 험악함을 몸에 새긴 사람들인 것이다.

“소장은 지금 곧장 강 장군을 찾아가 백월대를 소집하겠소.”

돌연 송지가 급하게 망루를 달려 내려갔다. 농사일에 투입한 백월대의 병사들을 소집하려면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백성들도 무장시켜야겠군.’

병사들을 총동원한다고 해 봐야 채 사천이 되지 않는다. 이편이 약해 보이면 처음부터 적의가 없더라도 쳐 보고 싶어지는 게 난세 군벌의 생리다. 겉으로라도 강하게 보여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의 동태는 물론, 강국군의 동정도 매시간 보고하도록!”

짤막하게 한마디 남긴 후, 편월도 망루에서 내려갔다. 이제부터는 병기창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백성들을 무장시킬 정도의 무기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 * *

원단元旦이 지나면서, 효명성주 상림호에 대한 호윤천 부자의 압박은 노골적으로 가중되었다.

거기엔 물론 이유가 있었다. 다른 주라면 몰라도, 파양주 내에 있으면서 원단에 마국립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림호는 그리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연말부터 효명성 주변은 물론, 성내에도 수상한 그림자가 부쩍 늘었다는 걸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는 참이었다.

‘단순히 내 목숨만 노린다면 괜찮다. 경우에 따라선 일전을 불사할 수도 있고.’

하지만 호윤천 부자의 목적이 단순히 자신의 목숨만은 아님을 잘 알기에 상림호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죽영과 유화까지 노리고 있다. 그 두 사람만은 결코 넘겨줘서는 안 된다.

사실 영욱성을 탈출한 죽영과 유화는 천신만고 끝에 효명성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상림호는 두 사람을 환영했고, 그동안의 노고를 풀어 주기 위해 성심을 다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그녀들이 오자마자 곧바로 빼돌렸다면, 혹 지금쯤 막주의 광운에게 안전하게 가 있을지도 몰랐다. 너무도 지쳐 있는 그녀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는 사이 효명성은 포위를 당해 호윤천 부자의 감시하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들에게 불상사가 생긴다면 광운 장군에게 면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두 사람을 이 효명성 밖으로 빼내려는 시도를 할 수 없는 상림호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마냥 둘 수도 없다. 호윤천 부자와의 갈등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고, 어느 쪽에서든 작은 불씨만 던지면 곧바로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이어질 판이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그녀들이 어떤 불상사를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성주!”

상림호의 깊은 생각을 깬 건 심복 편장 중 한 명인 기진祁珍이었다. 뭔가 다급한 보고가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드디어 공자가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지금 그쪽으로 급파할 사람을 수배하고 있습니다.”

다소 들뜬 듯한 기진의 보고에도 상림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지난해 시월 말일, 정허군이 대인성을 포위한 연합군을 돌파하여 강국의 탄금성으로 들어갔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상림호의 아들인 상가웅이 속해 있던 유군이 따로 떨어져 행적이 묘연하다는 보고도 진즉부터 듣고 있었다.

“어찌 말씀이 없으십니까, 성주? 공자를 찾았습니다. 그러니…….”

“설치지 마라, 기진!”

억센 어투로 상림호는 기진을 나무랐다.

“가웅이는 정허군에 소속된 병사다. 그가 어디에 소속되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간에 그건 정허군의 문제! 우리가 나설 것까지 없다.”

“성주!”

기진의 말투도 상림호 못지않게 높아졌다. 자신의 독자에게 이처럼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고, 또한 불만이었다.

“그 정허군의 대장군인 편월은 공자가 소속된 유군만 적중에 남기고 냉큼 강국의 탄금성으로 달아난 자입니다. 어찌 그런 자를 믿고…….”

“닥쳐라!”

기어이 상림호의 입에서 세찬 호통이 터져 나왔다.

“명색이 효명성의 편장으로 있으면서 그렇게도 병법을 모르는가? 나라도 전군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자식이 아니라 부모까지도 버릴지 모른다. 다른 군의 작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앞으로 삼가도록!”

기진은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지금 상림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상림호 역시 아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다만 그 문약함이 마음에 걸렸고, 그걸 고쳐 보자고 스스로 정허군에 떠맡겼다. 거기에 대해 새삼 미련을 갖는다는 건 무장으로서 취할 바가 아니었다.

“하오면 소장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씹어뱉는 듯한 어투로 자신의 불만을 표현한 기진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기 장군!”

돌연 상림호가 기진을 불러 세웠다.

“오랜만에 사냥이라도 나갔으면 좋겠군.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하게.”

“사냥? 존명!”

이 역시 의외였지만, 기진은 두말도 않고 복명했다. 그것도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의 하나였다.

2

엄선된 이백의 부하를 이끌고 효명성 주변으로 와 있는 건 이번에도 방필이었다.

물론 모두 다른 신분으로 가장하고 있다. 싸움을 하자는 게 아니라 기회를 봐서 죽영과 유화를 빼내는 게 목적이니까 말이다.

자연히 그들은 효명성의 동정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기울였고, 그 결과 이 두어 달 사이에 성주인 상림호가 유난히 자주 사냥을 나간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방필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리 즐기지 않던 사냥을 최근 들어 부쩍 자주 다닌다는 건 상림호도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규모도 날로 커지고 있다. 병사들의 훈련도 겸한 것이라지만, 방필의 눈으로 봐도 조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그건 호윤천이 효명성을 감시하라고 파견한 사병들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사냥 규모는 그대로 다른 곳으로 전쟁하러 나선 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그 사실을 그들은 연방 영욱성으로 보고하는 눈치였다.

그 덕을 톡톡히 본 건 방필이었다. 그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호윤천 사병들의 숫자와 면면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죽영과 유화를 빼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을 게다. 그때까지는 최대한 신중하고 은밀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와 더불어 방필은 은밀히 막주로 사람을 보내 광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파악된 호윤천의 사병만 해도 천 명에 가까웠다. 이백으로는 어떻게 해 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숫자였다.

‘성안으로 잠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게 방필로선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어떻게든 성내의 공기나, 나아가 죽영과 유화의 근황이라도 알 수 있으면 다음 행동을 결정하기가 쉬울 터였다.

하지만 그건 꿈에서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만큼 효명성의 경계가 삼엄하다는 얘기였다. 성내에 가까운 친지가 있다고 해도, 성 밖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성문을 통과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사실 그 점은 방필보다 호윤천의 사병들을 더 초조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들은 틀림없이 기회를 봐서 상림호를 죽이라는 명을 받고 온 터에, 아예 접근조차 불가능해지니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사냥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몇 겹의 호위병들이 상림호를 둘러싸고 움직였으며, 최근에는 꼭 필요한 인원만 성에 남기고 출동을 하니 손쓸 도리가 없었다.

“오늘도 움직일 듯합니다.”

효명성 밖에 상설常設되는 난전에 앉아, 만두와 한 잔 차로 요기를 하던 방필의 귀에 누군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침사성에서 함께 온 부하들 중 한 명이었다.

방필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효명성으로 돌렸다. 과연 성문 쪽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상림호가 사냥 나갈 때면 으레 보이는 광경이었다.

“성주에게선 연락이 없었나?”

내려놓았던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방필도 나직이 속삭였다. 주변에 몇 사람 있었지만, 딱히 누구를 쳐다보며 한 말은 아니었다.

“그게 아무래도 사주의 함월성 근처에서 발이 묶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방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사주를 통과할 때도 세밀한 조사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린 탓이었다.

마용승 생전에 함월성에 배치되어 사주 전체를 총괄하게 된 장수는 동곡董鵠이었다. 그 후로는 완전히 호윤천 부자의 막하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 지금 당장 죽영과 유화를 빼낸다 해도 사주를 무사히 지나갈지 의문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들을 무사히 빼낸 뒤에 걱정해야 될 일, 우선은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한다.

“인원은?”

“막주를 출발한 건 오백, 무사히 함월성을 지난 인원은 고작 백 명 정도입니다.”

“백이라…….”

방필은 말꼬리를 흐렸다. 오백 모두가 무사히 도착했다고 해도 손이 모자랄 판이다. 고작 백 명이 온다고 해서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풍소성의 성주도 호윤천의 심복이다. 다분히 이 효명성을 견제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성에 자기 수족을 넣어 둔 것이다.

“알겠다. 일단 백 명이라도 무사히 당도할 수 있게 손을 써 두도록.”

“달리 하실 말씀은?”

“지금으로썬 기다릴 수밖에 없다. 계속 수고를…….”

“그럼…….”

짧은 대화가 끝났다 싶었을 때, 방필의 뒤편에 앉아 있던 농부 차림의 사내가 일어나 난전을 벗어났다.

그사이 성문 쪽의 움직임은 더욱 부산스러워졌다. 몰이꾼으로 동원된 보병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도열했고, 그 앞으로 기치를 든 기병들 역시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행진했다.

‘이제 곧 상 성주께서 나오시겠군.’

이렇게 생각하며 방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주가 나오면 백성들은 예를 갖춰야 하니, 거기에 따라야만 한다.

둥둥둥둥-!

뚜우우, 뚜우-!

망루에서 우렁찬 북소리와 소라고둥이 울림과 동시에 도열해 있던 기, 보병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들의 뒤를 이어 곧 성주인 상림호가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다른 백성들과 더불어 방필은 천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순서가 조금 달랐다. 상림호 대신 다시 한 무리의 기병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왔고, 먼저 행군하던 병사들과 합쳐 순식간에 성 밖에 있던 사람들을 포위하고 말았다.

“한 놈도 빠짐없이 잡아들여라!”

누군가 망루에서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방필은 알 턱이 없었지만, 그가 바로 상림호의 심복 중 하나인 기진이었다.

“성의 다른 문에선 다른 부대들이 움직이고 있다! 그들보다 늦어선 안 된다! 서둘러라!”

급변한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소란을 뚫고 재차 기진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방필은 갈등을 느꼈다.

‘부딪쳐서라도 빠져나가야 할까? 아니면 순순히 따라가는 게 좋을까?’

마음만 먹는다면 실력으로 이 자리를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방필이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잡혀가기로 했다. 예전 상태로 있어서는 아무것도 시도해 볼 수 없다. 이것도 하나의 변화이니, 여기서 어떤 실마리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일은 상림호의 심정을 엿보게 했다. 그 역시 효명성이 감시받고 있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이 같은 급습으로 호윤천의 사병들을 모두 제거하려는 것일 터였다. 그걸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결정되자 방필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겁에 질린 백성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두 명의 병사에게 묶이는 방필의 입가에 여린 미소가 맴돌았다.

방필과는 다른 의미였지만, 병사들에게 잡혀가면서 웃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남자로 변장한 기씨 부인이었다.

* * *

방필로부터 지원 요청이 오자마자, 광운은 즉각 오백의 정예를 골라 보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영내 순시라는 핑계로 군사들을 이끌고 막주 구석구석, 특히 사주와의 경계까지 나가 진을 치고 군사훈련을 하기도 했다.

광운으로선 상당한 위험을 무릅쓴 일이었다. 당장 막주에 산재한 각 성의 성주들 반응이 어떨지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만에 하나 그들이 이 일에 불만을 품고 대항해 온다면, 그야말로 같은 편끼리 다시 한 번 피비린내를 풍겨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다행히 각 성의 성주들은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그들 중엔 노골적으로 호윤천 부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광운에게 군사적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말해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광운의 어깨에 막강한 힘을 실어 주었다. 막주에 오자마자 양성하기 시작한 수군은 어느덧 이만을 바라보게 되었고, 배도 크고 작은 걸 합쳐 천 척 가까이 진수시켰다.

그 일을 하는 데 있어 광운은 결코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비용의 대부분은 목철린이 치부해 둔 엄청난 보화들로 충당했다.

막주의 내성이 함락되기 직전, 목철린은 사람들의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많은 재보를 공격군에 내줬었다. 그 모든 걸 마용승에게 바치려고 했지만, 그는 그중 진귀한 것 일부만 받고 나머지는 막주 재건에 쓰라면서 받기를 거절했다. 그게 오늘의 수군을 키운 밑거름이 된 것이다.

아니, 그건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엄청난 비용을 들이면서도 백성들에게 단 한 푼도 부담시키지 않았다는 건 인심을 단번에 광운에게 몰리게 만들었다. 병사들의 대부분을 이끌고 성을 비웠어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건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통상 승전국이 패전국의 땅을 지배할 때는, 적어도 삼 년간은 격심한 반란을 겪는 게 상례였다. 특히 막주같이 백성들의 기질이 거친 곳은 내전이라 불릴 만한 규모로 진행되기도 한다.

그걸 광운은 보기 좋게 모면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지지까지 받았다. 가히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훨씬 강한 힘의 뒷받침을 얻게 된 셈이다. 출전한 장수가 두고 온 성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해야 된다면 제대로 싸울 수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쨌든 이번 막주군의 움직임은 광운이 의도한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둬, 사주에 주둔하고 있는 각 군벌의 이목을 일제히 집중시켰다. 이로써 상림호는 물론, 효명성 주변으로 파견한 부하들의 움직임이 다소 용이해질 터였다.

사주와 막주의 경계가 빤히 보이는 곳에 친 진막 안에서, 광운은 지금 전령의 보고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고작 백 명 정도만 효명성으로 갔단 말인가?”

“예!”

“함월성이 그렇다면, 사주의 다른 성들도 마찬가지겠지. 사주의 반감이 그 정도였는가?”

“아무래도 호 대장군의 수족들이다 보니…….”

전령은 말수가 적은 사람인가 보다. 대답이 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좋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전령은 전달 사항만 전하면 된다. 개인의 견해나 감정이 섞이면 듣는 쪽이 오히려 혼란에 빠질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수고했다. 물러가서 쉬도록!”

광운이 전령을 내보내자, 기다렸다는 듯 진도수가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대로 사주는 모두 호윤천 부자의 편이 된 것 같군. 상 성주가 힘드시게 됐어.”

“그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광운의 짧은 말에 진도수는 전령이 어떤 말을 했는지 짐작하고선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뭔가?”

“병사들의 동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심상치 않다니?”

“그대로 두면 사주로 쳐들어갈 기세입니다.”

“그건 안 된다! 우리가 먼저 일을 일으켜선 안 돼!”

“하지만 그동안 너무 억눌러 뒀던 것도 사실입니다. 게다가 지금 병사들은 모두 막주의 백성들로, 파양주에 대해선 씻지 못할 원한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만약 성주님이 아니라 다른 자가 왔었다면 벌써…….”

불현듯 진도수는 입을 닫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심한 말이라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광운은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그 역시 그 점을 충분히 감안하여 백성들과 병사들을 대했다.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은 모았을지 몰라도, 마용승이나 파양주에 대한 그들의 뿌리 깊은 증오는 단시간에 씻길 성질의 것이 아닐 터였다.

“아무튼 병사들은 호윤천 부자를 상대로 일전을 불사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광운의 입장을 배려해서 진도수는 굳이 파양주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병사들 사이에서 광운은 묘한 존재였다. 실제적으로 막주를 멸망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막상 부임을 하자 선정을 베풀어 단숨에 인심을 사로잡았다.

그러니 병사들이 품고 있는 증오의 과녁은 자연히 어긋나게 되었다. 광운도 파양주도 아닌 호윤천 부자에게로 말이다.

그렇게 기름처럼 들끓는 막주 병사들의 감정에 결정적으로 불씨를 던진 건 죽영과 유화에 대한 일이었다.

그건 광운이 생각해도 이상했다. 자신은 그녀들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어느새 그 얘기는 침사성 주변에 퍼져 버렸던 것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난세를 사는 사나이들은 여자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없지 않다. 자기 가족이 아니라면, 여자는 단순히 오늘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해 줄 쾌락의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그런데 유독 죽영과 유화가 막주 병사들의 가슴을 울린 건, 엄밀하게 얘기하면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 죽어 간 영욱성 주변의 농민과 천민들의 희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병사들 누구를 잡고 어떤 집안의 출신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한결같을 게 분명하다. 농부의 자식이 아니면, 천민 집안 출신이라고.

권력이 있거나 부유한 자들은 어떻게든 군무軍務에서 빠져나간다. 설사 종군을 한다고 해도 결코 일반병은 되지 않는다. 장수가 되거나, 하다못해 병참 부대에 배속된다.

그런 병사들이었으니 영욱성 농민과 천민의 희생은 크게 와 닿았고, 그 반대급부로 죽영과 유화를 더욱 돋보이게 했던 것이다.

“진 장군의 생각은 어떤가? 병사들에게 이대로 철수를 명한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명령이라면 따를 겁니다.”

진도수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군에서 명령은 절대적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투였다.

“단순히 명령이니까 복종만 한다는 건가?”

“어쨌든 지금 병사들의 사기는 충만해 있습니다. 훈련도 착실하게 받았으니 이 기회에 패전의 아픔을 좀 씻어…….”

이번에도 진도수는 말을 맺지 못했다. 패전 운운한 것 역시 지나친 얘기였다.

“병사들의 사기가 너무 높은 것도 문제로군.”

이건 광운의 진심이었다. 거친 남자들만 모여,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적군을 보다 더 잘 죽이기 위해 훈련을 받는 곳이 군이라는 특수한 조직이다.

그러니 병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혹은 좋든 싫든 심한 압박을 받게 된다. 그걸 적절하게 해소해 주지 못하면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광운을 바라보며 진도수는 기다렸다. 이대로 맥없이 철수 명령을 내릴 것 같지는 않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사주의 성이나 병사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용서치 않는다. 하지만 짐승을 쫓다 보면 경계를 넘을 수도 있겠지. 막주와 사주는 다른 나라가 아니니까.”

“아!”

진도수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직접적인 군사행동이 아니더라도, 경계를 넘어선 군사에 대해서 사주는 마땅히 반응을 보일 터였다.

그에 대해 이편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건 막주군의 잘못이 아닌 게 된다. 비록 하나로 통일된 이름은 없지만, 마용승이라는 강력한 지배자가 있었을 때 그들은 하나의 나라로 묶여 있었으니, 설혹 사냥 중 경계를 넘는다고 해도 그건 침범이 되지 않는다.

‘만약 사주의 반응이 미지근하다면 보다 강력한 수단을 취할 수도 있겠지.’

복명하고 물러서는 진도수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역시 막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인지라 마용승이나 파양주, 심지어 광운에게도 강한 적대감을 품었었다.

그래서 광운의 측근으로 발탁되었을 땐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했다. 가까이 있으면 아무래도 암살하기 쉽다고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모셔 본 광운은 진도수의 증오나 적대감을 어느새 희석시키고 있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백성이나 병사들을 생각하는 그의 고뇌나, 위정자로서 한 올의 틈도 보이지 않으려는 자기 절제의 모습 때문이었다.

아니, 그건 진도수가 부득이 찾아낸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저 막연히 광운이 좋아졌다고 하면, 막주를 지키려 싸우다 죽어 간 선열先烈에 대해 미안한 노릇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진도수는 걸음을 빨리했다. 병사들은 지금도 창을 쥘 손에 침을 바르며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을 게다.

다음 날부터 막주군은 사주와의 경계를 넘나들며 대규모 사냥을 벌였다. 때로는 그게 지나쳐 바로 인접한 흑암성黑巖城 근처까지 밀고 들어가, 성 밖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했다.

거기에 대한 사주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각 성에서 전령들이 팔방으로 달린다 싶더니, 착착 군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오월에 접어들자, 마침내 사주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3

광운의 움직임은 호윤천 부자에게 그리 의외랄 것도 없었다. 일어나야 할 일이 당연히 일어난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선 사주 전체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한편으론 광운에게도 사자를 보냈다. 어쨌든 막주는 파양주의 일부고, 막주군도 당연히 대장군부에 소속되어 있으니 허락 없는 군사행동은 용서치 않겠다는 문책사問責使였다.

물론 그걸로 광운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문책사가 사주로 접어들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호윤천 부자는 따로 군사를 일으켰다. 겉으로 내건 명분은 내란을 획책하는 막주군을 토벌한다는 것이었지만, 기실은 효명성을 치기 위한 것이었다. 어쨌든 두 명의 여자만 수중에 장악하고 있으면 광운과 편월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 *

광운의 움직임은 상림호도 세세히 알고 있었다. 성을 감시하던 자들을 잡아들이는 와중에 방필도 만나 보았고, 그를 통해 막주군과 직접 전령을 오가게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막 아침상을 물린 상림호는 방필과 기진만을 불러 은밀한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시기는 언제가 될 것 같소, 방 장군?”

“정확한 날짜를 정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 성주님께서 사주와 맨 처음 접전을 벌인다면, 바로 그때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방필의 대답에 상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점에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을 지켜보는 기진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상림호와 방필은 이 효명성을 버리고 광운과 합류할 시점을 얘기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게 기진의 불만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기반을 닦아 온 터전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도 그렇고, 또 따라가고자 하는 백성들을 모두 데려가는 것도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차라리 막주군을 부르는 게 낫지 않은가. 그들은 병사들뿐이니 이동하기도 편하고.’

이 효명성은 고립되어 사방이 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걸 뚫고 막주까지 가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인데, 거기다 백성들까지 보호해야 한다. 어쩌면 이 일로 인해 효명성 병사들이 모두 전멸할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차라리 소재가 파악된 공자, 즉 상가웅을 구하는 게 병사들을 납득시키기 좋을 터였다.

물론 기진은 틈만 나면 그 점을 상림호에게 간언諫言했다. 지난번에 호윤천의 사병들을 잡아들임으로써 효명성에 대한 감시와 압박이 더욱 가중된 주변 정세와, 그로 인해 상당히 위축된 병사들의 사기까지 세세하게 보고하면서 마음을 돌리라고 얘기했다.

그래도 상림호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였다.

‘이게 모두 두 여자 때문이라니.’

언제나 기진의 불만은 죽영과 유화에게 귀결되었다. 그녀들이 효명성에 오고 난 후로 이 난리(?)가 시작되었다.

‘차라리 두 여자를 죽여 버리는 게…….’

어쩌면 상림호나 효명성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진실로 충성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기진은 몇 번이나 생각했고, 만약 기회가 있었다면 실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점에 있어 상림호는 확실히 신중했다. 죽영과 유화가 효명성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녀들이 있는 곳은 그 혼자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심지어 음식도 자신이 직접 날랐다.

“기 장군, 준비는 다 되었겠지?”

상림호는 기진에게 말을 붙였다. 얼굴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불만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 보자는 의도가 다분한 질문이었다.

“가능한 많은 백성들을 병사로 변장시켰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녀자들과 노약자들은…….”

“동원할 수 있는 마차는 얼마나 되는가?”

“최대한 끌어 모았지만, 필요한 수량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백성들 중에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은?”

“성주!”

이어진 상림호의 질문에 기진이 눈을 크게 뜨며 쳐다보았다.

“괜찮네. 말을 탈 수 있는 백성들에게 기병의 말을 내주게. 병사들은 튼튼한 다리가 있으니 말이 없어도 움직이는 데 과히 불편하진 않을 걸세.”

“하지만 그래서는 기병들의 전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사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지금쯤이면 전령이 광운 장군에게 도착했을 걸세. 최초의 접전과 동시에 우리도 성을 버리고 나간다는 걸 아실 테니, 막주군도 모종의 조치를 취할 걸세.”

“성주께서는 가장 중요한 점을 놓치고 계신 듯합니다. 막주군과 사주군이 싸운다고 해도, 그걸 여기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설사 안다 해도 며칠 지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니, 이 점에 대한 대책도 듣고 싶습니다.”

“기 장군은 대체 군문에 얼마나 있었나?”

다소 한심스럽다는 어투로 반문하는 상림호를 보며, 방필은 싱긋 볼을 허물어뜨렸다. 상림호가 뭘 얘기하려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실례란 걸 깨닫고는 황급히 표정을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장은 부하들을 돌아보겠습니다. 그들에게도 이 자리에서의 회의 결과를 알려 줘야 할 테니까요.”

“그렇게 하시오.”

상림호는 방필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창피를 당할지도 모를 기진을 위해 자릴 피해 주는 게 고맙기까지 했다.

“방금 그 말씀은 무슨 뜻이었는지요?”

방필을 배웅하고 온 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로서도 조금 전에 들었던 상림호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기 장군은 만약 막주군과 사주군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흑암성에서 봉화를 올리지 않으리라고 보는가? 그게 오르면 우리도 봉화를 피워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앗!”

기진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기성이 토해졌다. 그 점을 미처 생각지 못한 자신의 부주의함에 대한 반성도 곁들여진 외침이었다.

확실히 상림호의 말 그대로였다. 딱히 사주만이 아니라 파양주가 지배하는 어떤 곳에서든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면 봉화를 올려 영욱성에 알리게 되어 있다.

게다가 그 발원지가 사주라면, 이곳 효명성도 봉화가 거쳐 가는 곳 중 하나다. 막주군과의 충돌이 발생하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오늘부터 남쪽 하늘을 유심히 살피게. 봉화가 오르면 누구보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네.”

“존명!”

복명한 기진이 막 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웬 소란이냐!”

커다란 호통과 함께 기진은 문을 벌컥 열었다.

“어?”

동시에 그의 눈은 커다랗게 불거졌다. 대여섯 명의 병사들에게 호위를 받고 있는 것처럼 서 있는 여인을 본 탓이었다.

“성주님 계신가요?”

한마디 툭 던지고선, 기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안으로 쓱 들어섰다.

“어? 어?”

기진이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그만큼 그녀의 등장과 행동은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고, 그보다 그녀의 미모에 한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자, 잠깐!”

화들짝 정신을 차린 기진이 그녀를 제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벌써 성주인 상림호의 맞은편에 앉은 뒤였다.

상림호 역시 말없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로서도 이건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림호는 확실히 일성의 성주다웠다.

“이분은 뉘신가?”

침착한 어조로 문밖에 도열해 있는 병사들에게 물었다.

“일전에 사람들을 잡아들일 때 같이 잡혀 온 모양인데, 알고 보니 여자였습니다. 저희도 오늘에야 처음 알았고, 막무가내로 성주님을 뵙겠다면서…….”

기어들어 가는 병사의 대답에 상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로선 눈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막을 수 없었으리라. 기진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신 역시 마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무슨 일이오?”

자칫 목소리가 떨릴 것만 같아 긴장하면서, 상림호는 물었다. 그러면서 왠지 여인이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왜 저를 잡아 오셨죠? 그리고 언제까지 잡아 두실 건가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여인은 물었다.

순간 상림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여인의 단순한 동작과 짧은 말속에 깃든 뇌쇄적인 분위기 탓이었다.

어금니를 악다물며 상림호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낯이 익은 것 같은 이 여인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아니,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 익숙한 느낌은 뭘까?’

그 점이 스스로도 이상해진 상림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이 변한 건 상림호만이 아니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여인의 눈매에도 서늘한 한기가 서렸다.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기씨 부인!’

여인이 상림호를 향해 움직인 것과 동시에, 상림호의 뇌리에 그녀의 정체가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영욱성에서 각 성에 돌린 그녀에 대한 인상착의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스팟!

한 가닥 빛줄기가 기씨 부인의 손에서 폭사되었다.

“핫!”

지켜보고 있던 기진의 입에서 경호성이 토해졌고, 앉아 있던 상림호가 그대로 뒤로 벌렁 넘어졌다.

쉿!

기씨 부인의 손에서 발출된 빛줄기가 공간을 갈랐고, 한순간 몸이 굳어 있던 기진이 그대로 그녀의 배후를 덮쳐 찍어 눌렀다.

“그 여자다! 마 성주를 죽인 흉수!”

간발의 차로 기씨 부인의 암습을 피한 상림호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뭐? 아, 그러고 보니……!”

기씨 부인의 팔을 단단히 꺾어 쥐며 그 얼굴을 확인한 기진도 비로소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어떻게 여기에…….”

“성주, 풍소성에서 봉화가 올랐소이다!”

기진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의 보고가 들렸다.

“뭐라고?”

뜻밖이라기보다는 너무 빠른 것 같다는 생각에 잠깐 당황하던 상림호는 이내 명을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바다! 곧바로 출동이다!”

이미 모든 준비는 갖춰져 있다.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유리할 터였다.

“이 여자는 어떻게 할까요?”

“끌고 간다!”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말해 놓고, 상림호는 빠른 손길로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럼 소장도 준비를!”

기진 역시 기씨 부인을 거칠게 끌고 밖으로 나갔다.

효명성 전체를 들썩이게 하는 북소리와 소라고둥이 울린 건 그로부터 반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오늘도 상림호가 사냥을 나간다고 생각할 게 틀림없다.

* * *

그건 광운으로서도 의외의 발단이었다. 막 기상한 병사들이 취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좌익左翼이 주둔하고 있던 수왕산樹王山의 기치가 들썩거렸던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수도 있다. 어지럽던 좌익의 기치가 일단 정렬된다 싶더니, 이내 한곳으로 몰려가기 시작하자 광운은 그대로 진막에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전령! 전령을 좌익으로 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

그렇게 명을 내렸을 때, 수왕산 쪽에서 일기의 병사가 빠르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등에 전령기가 꽂혀 있었다. 좌익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하러 오는 것일 터였다.

“보고! 좌익의 표기군豹旗軍, 진중에 스며든 적병 약 삼백을 상대로 접전 중!”

“적이라니? 어디의 적이란 말인가?”

“흑암성에서 나온 적들로, 지난밤부터 진지에 잠입…….”

“적이란 말은 온당치 않다! 그럼 표기군의 안 장군은 벌써 전투를 시작한 건가?”

일단 전령의 말실수를 질책한 후 광운은 재차 물었다. 엄밀히 얘기하면 막주와 사주는 서로 적이 아니다. 최악의 경우 싸울 수는 있겠지만, 그 점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하지만 전령은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듯 질문에 대한 대답만 계속했다.

“예. 이대로 적을 쫓다가 어쩌면 흑암성에 곧바로 도전할지도 모른다면서, 본대는 거기에 따라 적절하게 움직이시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이제 광운은 더 이상 전령의 말투를 나무라지 않았다. 이걸 기다리기도 했고, 벌써 불은 댕겨졌다. 이 흐름을 그대로 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성주!”

옆에 서 있던 진도수가 광운을 불렀다. 어서 서두르자는 독촉이 섞인 음색이었다.

광운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전군 취사 중지! 이대로 곧장 출동해서 표기군을 지원한다! 흑암성의 저항이 심하면 떨궈도 좋다!”

“존명!”

진도수를 비롯한 모든 막주병이 이 순간을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명은 즉각 하달되었고, 아침을 굶게 되었다는 불만도 없이 병사들은 출동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봉화가 올랐습니다, 성주!”

“흑암성의 병력만으로 우릴 막기엔 힘드니 지원을 청하는 것일 테지. 준비는?”

“명령만 내리십시오!”

“이건 전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한편끼리의 우발적인 충돌일 뿐이다. 이 점만 명심하고 있으면 쌍방 간에 큰 피해는 나지 않을 게다.”

“존명!”

제꺽 복명을 했지만, 진도수는 광운의 말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한편이든 적이든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어떤 변수가 개입될지 아무도 모른다. 설사 흑암성을 깡그리 허물어뜨린다 해도 둘러댈 핑계는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그보다 성주께서는 본대와 더불어 여기 남으시기 바랍니다. 소장은 우익과 더불어 적을 치겠… 아니, 표기군을 지원하겠습니다!”

황급히 말을 바꾸며, 진도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만약 광운이 진두에 서겠다면 막주의 병사들은 마음껏 싸울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에, 그를 후미에 두고자 하는 의도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광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암성에서 봉화가 올랐으니, 사주의 다른 성에서 지원이 올 게 뻔하다. 자신은 본대와 함께 그걸 끊을 작정이었다.

출격은 즉각 이루어졌다. 마치 취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다들 출동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빠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광운은 내심 ‘아차’ 싶었다. 저런 기세라면 흑암성 정도는 금방이라도 떨어지고 말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중지시킬 수는 없었다. 다소 지나치더라도 밀고 나가는 수밖에는…….

들썩거리는 본대의 불만을 누르는 것도 광운으로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도 공격에 가담하게 해 달라고 한결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광운은 그들의 요구를 엄격하게 눌렀다. 다른 곳에서 올 게 분명한 사주의 지원군을 본대가 막아야 한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그러는 사이, 흑암성엔 벌써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철수하는 병사들을 거두기 위해 성문을 늦게 닫은 게 막주군을 그대로 불러들이는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까지 확인한 광운은 천천히 본대를 이동시켰다. 막주군이 돌입했다면, 이미 흑암성은 함락된 거나 마찬가지다. 사주의 지원군이 온다고 할지라도 굳이 여기서 맞을 필요는 없었다.

성으로 들어선 광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성주 일가는 벌써 참수되어 버렸고, 흑암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물론 거주하던 백성들도 상당히 희생되었다.

“진 장군! 진 장군을 불러라!”

광운은 서둘러 진도수를 찾았다. 더 이상 두고 본다면 싸움이 아니라 광태로 변할 것 같아서였다.

“대령이오!”

“조속히 군사들을 집결시켜라! 더 이상의 살육은 내가 용서치 않겠다! 투항하는 병사들은 그대로 수용하고, 백성들을 해치는 자가 있으면 그 대장까지 내 손으로 직접 참수하겠다!”

광운의 명은 서릿발 같았다. 불려 왔던 진도수가 움찔 놀라 두어 걸음 물러날 정도였다.

“뭘 하고 있나? 즉각 실행하라!”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연방 쥐었다 놨다 하면서, 광운은 재차 고함을 질렀다.

“조, 존명!”

진도수는 더듬거리는 어투로 복명하며 서둘러 달려갔다.

‘이로써 호윤천 부자와의 일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군.’

광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호윤천과는 맞지 않았지만, 이처럼 극단적인 대립까지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일이다. 안 한다면 모를까, 일단 하기로 결정하면 광운 역시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사나이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삼 년간 대륙 전체를 긴장시킨 서방정변西邦政變은 그렇게 사주의 자그마한 성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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