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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성이후入城以後 (33/66)

입성이후入城以後

1

그날 호윤천 부자는 측근들을 모두 물리친 채 머리를 맞대고 밀담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그럼 그 두 계집이 빠져나간 게 확실하냐?”

“예, 아버님. 지금쯤이면 적어도 효명성엔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효명성주 상림호는 여태 제거하지 못했느냐?”

“예, 그것도 아직…….”

“쯧쯧쯧!”

못마땅한 표정으로 호윤천은 세차게 혀를 찼다. 아들이 하는 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점을 익히 알고 있기에 호유진은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만약 그 두 계집이 효명성으로 들어간다면 곧바로 광운에게 인도될 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막주는 우리에게 반기를 들게 돼. 그런데도 가까이 있는 상림호 하나 여태껏 제거하지 못하다니. 이래서야 다른 성을 맡고 있는 장수들이 우리를 따르려고 하겠느냐?”

“지금 당장 군사를 동원해 효명성을 포위하겠…….”

“바보 같은 소리!”

호유진의 말을 호윤천이 큰 소리로 막아 버렸다.

“너는 파양주의 대장군이다. 어느 대장군이 자기 부하 장수를 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한단 말이냐!”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계집 둘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많은 돈을 들여 키워 둔 사병私兵들이 있지 않느냐. 그들에게 은밀히 효명성을 감시하라고 해라. 공격하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절대로 못 하도록 하고!”

“하오면 사병은 얼마나 동원해야…….”

“천 명이다! 그들로 하여금 효명성에서 나오는 수상한 자들은 누구도 놓치지 말고 잡아들이라고 일러라.”

“즉시 실행하겠습니다.”

“은밀히 진행하도록 해라. 만약 이 일이 알려지면, 우리에게 등을 돌리는 장수들이 속출할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연방 머리를 조아리는 아들을 보며, 호윤천은 길게 말을 끌었다.

“지금 허주를 치고 있는 편월의 근황에 대한 보고는 있었느냐?”

“허주의 대인성을 차지하고 농성 중이라고 합니다. 그 후로는…….”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그 후의 보고가 아직까지 없단 말이냐?”

“그게… 율천국의 원군까지 가세한 포위망이 워낙 엄중해 우리가 보낸 간인이 도저히 대인성에 잠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걸 뚫고 나갈 수 있어야 제대로 된 간인이라고 할 수 있지. 이젠 사람 보는 눈조차 흐릿해진 게냐?”

“하지만 그자가 가장 뛰어난 간인이었는지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보다 율천국의 가겸후가 정말 허주를 도와줄 마음에서 원군을 보냈을까요?”

“허주는 늑대를 쫓으려고 호랑이를 끌어들인 것이다. 머지않아 가겸후는 허주를 집어삼킬 게 분명해.”

“그, 그렇다면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대책의 첫 번째가 벌써 어긋나 버렸다. 그 두 계집만 단단히 잡아 뒀으면 광운이나 편월을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을걸.”

그 말에 호유진의 머리가 다시 아래로 숙여졌다. 그 모든 일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그건 그렇고, 그 두 계집이 달아나는 데 도와줬던 놈들에 대한 처벌은 모두 끝냈느냐?”

“예. 그 자리에 있던 농민들과 천민들을 모두 진남후의 이름으로 참수형에 처했습니다.”

호유진의 목소리에 힘이 조금 실렸다. 비로소 자신이 제대로 해낸 일이 화제에 올랐으니, 조금은 면목이 서는 것 같았다.

“애썼다. 이로써 백성들은 마국립에게 정이 떨어졌을 게다. 우리 부자가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지.”

“그렇다면 우리들이 거사를 할 때가…….”

“서둘지 마라.”

어깨를 추켜세우며 설치는 아들을 호윤천은 세차게 억눌렀다.

“성급함이 일을 망치는 근원이 된다. 아직은 윤 대부인이나 마국립에게 충성을 바치는 무장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포섭하는 걸 게을리 하지 마라.”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송용조는 어떻게 처리할 작정이십니까? 이 기회에 제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만…….”

“흐음!”

아들의 질문에 호윤천은 무거운 침음성을 토했다. 송용조의 문제만큼은 그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아무튼 그는 온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거상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자신들도 상당한 금액을 송용조로부터 신세 지고 있는 참이다. 그가 죽영과 유화를 빼돌린 장본인 중 한 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 두 계집이 광운에게 가는 걸 막는 일이 급선무다. 다행히 사주의 함월성과 풍소성엔 우리의 심복들이 들어가 있으니, 반드시 그년들을 잡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윤주와 긴밀하게 연락하는 걸 잊지 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윤주만은 반드시 우리가 장악해야만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윤주를 지키고 있는 주 장군에게 황금 열 관을 보냈습니다.”

“돈으로 장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믿지 마라. 보다 인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해라.”

떨떠름한 표정으로 호윤천은 아들을 가볍게 질책했다. 그 역시 파양주의 대장군 직을 수행했을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었기에 장수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무장들은 비교적 단순한 성격인 경우가 많다. 이익을 따지기에 앞서 의리를 내세우고, ‘충성’이라는 관념 앞에 쉽게 목숨을 걸기도 한다.

하긴 모든 무장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들도 인간이기에 출세욕이나 권력 혹은 금전적 욕심 탓에 자기의 의지를 굽히기도 한다.

그러니 무장과 친교를 맺을 때는 무엇보다 그 성격부터 세밀히 파악해야만 한다. 곧은 절개를 가진 사람에게 재물을 보낸다면 오히려 반감을 사는 경우가 있고, 겉으로야 어떻든 세속적 욕망을 가진 자에게 의리니 충성이니 하면서 떠든다면 냉소를 받기 십상이다.

‘마용승이 죽었으니, 각 성에 나가 있는 무장들은 군세를 확장하느라 여념이 없겠지.’

마용승의 후계자인 마국립이 성인이라고 해도 혼란은 피할 수 없는 게 전국난세의 기풍이다. 그런데 아직 어린 애에 불과하니, 비록 진남후의 자리를 계승했다지만 그 밑에서 오로지 충성 하나로 일관할 무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호유진이 윤주에 황금을 보낸 것도 의미가 전혀 없는 일은 아닐 터였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쓰임새가 많을 테니까 말이다.

“이 애비는 그만 마가 꼬마 놈에게 가 봐야겠다. 너도 나가서 일을 보도록 해라.”

말과 함께 호윤천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요즘 그의 일과는 거의 대부분 마국립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물론 엉뚱한 자들의 접근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호윤천을 배웅한 호유진은 다시 예의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렇게 아버지에게 한차례 질책을 받고 나면 전신의 맥이 풀려 한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딸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릿한 향 내음이 호유진의 코를 스치고 방 안 가득히 번져 갔다.

“대장군은 또 아버님께 꾸중을 들으셨군요.”

말과 함께 호유진의 눈앞으로 얼굴을 불쑥 내민 건 놀랍게도 마용승의 첩이었던 기씨 부인이었다.

“아니?”

호유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아니겠는가? 마용승을 죽인 흉수로 지목된 기씨 부인이 영욱성의 집무창에 있는 대장군부에 버젓이 모습을 보였으니, 만약 이 일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호윤천 부자는 파양주 전체에 설 땅이 없어지고 말 터였다.

“여긴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일렀느냐! 누가 보면 어쩌려고.”

“호호호!”

기씨 부인은 소리 높여 웃었다. 겁에 질려 있는 호유진의 모습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쉿! 조용히 해라, 조용히!”

자신의 입을 막으려는 호유진의 손을 기씨 부인은 매섭게 떨쳐 냈다. 표정 역시 언제 웃었냐는 듯 차갑기 짝이 없었다.

“두 분의 얘기는 다 들었어요. 그토록 광운이나 상림호가 마음에 걸린다면 나를 그곳으로 보내 줘요. 마용승을 죽인 것처럼 그들도…….”

말꼬리를 흐리며, 기씨 부인은 자신의 목을 검지로 긋는 시늉을 했다.

“뭐라고?”

가뜩이나 놀랐던 호유진의 눈이 더욱 커다랗게 불거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 동안에 불과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듯하더니,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눈이 빛을 발했다.

그러나 말은 눈빛과 달리 아주 신중했다.

“최근 들어 몇 번 자객들의 암습을 받았으니, 효명성이고 침사성이고 간에 경비가 삼엄할 게다. 그런데 어떻게 뚫고 들어갈 방법은 있느냐?”

“듣자니 사병들로 하여금 효명성을 감시케 한다고요? 일단 그들과 효명성까진 같이 가겠어요.”

기씨 부인으로선 영욱성을 빠져나가는 게 가장 위험한 난관이다. 그러니 호윤천 부자가 보내는 사병들 속에 섞여 효명성까지 가겠다는 얘기다.

“그다음엔? 막상 효명성에 스며드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그건 내가 하기에 달린 것 아닌가요? 영욱성의 내전에도 들어갔는데 그까짓 효명성 정도야… 호호호!”

말끝에 기씨 부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직이 웃었다.

순간 호유진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기씨 부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교태와 유혹의 냄새를 맡은 탓이었다.

와락!

본능에 끌려 호유진은 기씨 부인의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그녀의 목덜미에 벌써 달궈진 입술을 갖다 댔다.

“아…….”

기씨 부인의 입에서도 달뜬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이걸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두 팔은 호유진의 목을 강하게 조이고 있었다.

탁자에 있던 찻주전자와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그 위에서 두 사람이 짐승처럼 서로에게 얽혔기 때문이다.

* * *

도저히 앉은 채 기다릴 수 없어 광운은 직접 침사성의 북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지난 팔월에 편월의 동정을 알아보라고 보냈던 방필이 돌아온다는 보고가 있어서였다.

“성주, 천천히 가십시오. 사람들이 있습니다.”

뒤를 따르던 진도수가 광운을 제지했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황급히 몸을 피할 정도로 속도가 빨랐던 것이다.

그러나 광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벌써 시야에 들어온 성의 북문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기에 더욱 급하게 질풍을 몰아 댔다.

“앗, 성주님이시다!”

“성주님께서 오셨다!”

북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부산스럽게 광운을 맞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성주가 직접 문까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수고들 한다.”

병사들의 인사를 가볍게 받은 광운은 곧이어 목소리를 약간 높여 주변에 대고 말했다.

“방필은 어디 있나? 방필은…….”

“소장, 성주께 삼가 문안드리옵니다!”

광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질풍 앞으로 썩 나서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자신도 모르게 광운은 말고삐를 당겨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자신을 방필이라고 밝히며 무릎을 꿇은 자가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는 방필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보다 기골이 장대했던 그의 육신은 반쪽이 됐다 싶을 정도로 여위어 있고, 얼굴에 온통 수염이 뒤덮여 있어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오오…….”

광운의 입술을 비집고 기묘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람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불과 석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그 점이 가슴 아파 광운은 질풍에서 훌쩍 뛰어내려 방필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고생했네. 수고가 많았어.”

“감읍하옵니다. 성주께서 걱정하시던 편월 대장군은…….”

“아니, 우선은 쉬도록 하게. 보고는 천천히 듣기로 하지.”

그 자신이 급해서 여기까지 달려 나왔다는 걸 잊고 광운은 방필을 위로했다. 그만큼 그는 지쳐 보였다.

“아니옵니다. 화급을 다투는 보고가 하나 있사옵니다.”

말과 함께 방필은 날카로운 눈매로 사방을 살폈다. 사람들의 눈을 꺼리는 행동이었다.

“자, 그럼 이쪽으로. 진 장군, 주변을 감시하게.”

“존명!”

광운은 방필을 이끌고 성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진도수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엄격히 감시하고 있었다.

“가장 급한 보고는 영욱성을 빠져나온 두 분 마님께서 효명성으로 무사히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오, 그래? 그것참, 반가운 일이군.”

“그런데 그게…….”

말꼬리를 흐리며 방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성벽에 비치는 오후의 따스한 햇살 탓만은 아니었다.

광운은 초조해졌다. 만약 이게 여자와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면 벌써 방필을 다그쳤을지도 몰랐다.

“제가 영욱성을 지나며 그 소식을 접한 건 이달 열이틀, 직접 효명성에 가 본 건 열이레였습니다.”

“그럼 직접 효명성에 들어가 봤다는 말인가?”

“그러지는 못했사옵니다. 성의 경계도 엄중하고, 또 성 주변을 은밀히 포위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에…….”

“성 주변을 포위하다니?”

“소장이 정탐한 바로는 호윤천 부자가 보낸 사병들 같았사옵니다.”

“크흠!”

광운은 침음성을 토했다. 효명성의 경계가 엄중해진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곳 침사성만 해도 지난 팔월부터 지금 동짓달(음력 11월)까지 무려 네 차례나 암습 시도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성이 포위당했다는 말은 실로 의외였다. 그것도 호윤천 부자가 몰래 양성한 사병들 같다고 했다.

‘호윤천이 드디어 마각을 드러내려는가?’

광운으로선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벌써 우리 침사성에도 적의 간인은 물론이고, 은연중에 포위를 당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점 각별히 유념하시길.”

“방 장군의 생각까지 말할 건 없다. 보고 들은 사실들만 정확하게 말하라.”

조금은 무거워진 어조로 광운은 방필을 가볍게 나무랐다. 보고자의 사견이 끼어들면 자칫 정보의 생명이랄 수 있는 정확성이 희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송구하옵니다. 그럼 다음으로 편월 대장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방필은 화제를 돌렸다. 그 역시 자신의 말이 주제넘었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

“편월은 직접 만나 보았는가?”

“아니옵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겠다 싶어, 말단 졸병으로 가장하고 정허군과 연합군 측을 정탐했사옵니다.”

“딴은…….”

광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방필이 정허군의 편월이나 다른 장수들과 접촉했다면, 왜곡된 정보를 수집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불리함을 강조하여 무리한 원군을 청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큰소리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럴 땐 객관적 입장에서 냉정하게 관찰하는 게 좋다.

“무엇보다 의외인 것은 강국의 증두신이 개입했다는 사실이옵니다.”

“뭐? 증두신이? 그가 왜?”

광운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십삼 년 전 평사릉 전투에서 증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게 바로 자신이 아닌가 말이다. 혹시 그때의 감정을 그대로 편월에게 풀려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사옵니다. 하지만 대인성에서 농성하며 식량 부족을 겪고 있는 정허군을 도왔을 뿐 아니라, 지난달 말일을 기해 연합군에 공격을 가했고, 또 탄금성을 비워 정허군을 거기에 받아들이기도 했사옵니다.”

광운의 미간에 곤혹의 주름이 또렷이 새겨졌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증두신의 처사는 이해 불능이었다.

“소장이 살펴본 바에 의하면, 증두신은 정허군에 탄금성을 내줬을 뿐 아니라 거기에 딸린 십만 호에 달하는 식읍까지 붙여 줬으며, 조세와 형벌, 부역을 면해 준다고 했사옵니다.”

이어진 방필의 보고가 광운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말에 의하면 증두신은 탄금성을 완전히 독립시켜 줬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닌 줄로 사료되옵니다. 증두신이 탄금성을 정허군에 내줬다는 걸 알자, 거기 살던 백성들의 이탈이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옵니다. 식읍이 십만 호라고 하지만, 아마 실제 살고 있는 백성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런가…….”

자기만의 상념에 사로잡혀 광운은 방심 상태로 망연히 대꾸했다.

그러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수고했네. 지금부터 푹 쉬도록 하게. 의문 나는 점이 있으면 생각해 뒀다가 그때 묻기로 하지.”

“하오나…….”

뭔가 얘기할 듯하던 방필은, 그러나 이내 군례를 갖추며 복명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판국에 쉴 틈이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육신은 엄청난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방필이 물러가고 나서도 광운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전개에 과연 자신은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지 가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선은 효명성에 있는 죽영과 유화부터 안전하게 빼내 와야겠군. 계속 거기 머물게 되면 상 성주에게도 부담이 될 테니.’

겨우 한 가지 시급한 일을 결정지은 후에야 광운은 비로소 진도수를 불렀다.

2

탄금성에 들어온 지 벌써 이십여 일, 연합군의 발길은 국경에서 멈춰 선 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편월의 마음이 편한 건 결코 아니었다. 아니, 입성한 이후 남에게 얘기하기 힘든 고민에 잠겨 있었다. 다름 아닌 식량 문제였다.

공식적으로 이 탄금성에 딸린 식읍은 십만 호였고, 그건 고스란히 증두신에게서 양도받았다.

하지만 속내는 전혀 달랐고, 오히려 한심하다고 할 정도였다.

우선 벌써 겨울이 시작되었지만 추수를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대인성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 이미 증두신이 백성들에게 명해 모두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백성들도 문제였다. 그들만 땅에 붙어 있다면 올해는 어떻든 내년엔 세미를 거둘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백성들 역시 정허군이 탄금성으로 들어오자 대거 이동해 버렸다. 타 지방, 다른 나라에서 온 군세의 지배를 받기 싫다는 게 이유였으니 어떻게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정허군이 굶고 있다는 건 아니다. 식량은 증두신이 꾸준히 보급을 계속해 줬다. 단 오 일 치씩만 보내 준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환이 이끄는 강국군이 국경에서 연합군을 막아 주고 있을 때 어떻게든 백성들을 불러 모을 방도를 강구해야겠는데.’

편월의 생각은 늘 거기서 막히고 말았다. 전쟁이나 싸움이라면 또 몰라도 백성을 다스리는 법, 다시 말해 정치는 그에게 있어 도무지 생소하기만 한 것이었다.

게다가 편월의 고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적진을 돌파할 때 낙오해 버린 유군의 소식이 그 후로 묘연하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물론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전투 중에 병력의 일부분이 낙오하거나 소식이 두절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게 유군이라면 일부러 떨어져 나가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때라도 본대와의 연락은 유지한다. 낙오가 되건, 아니면 단독 행동을 하건 간에 말이다.

그런데 이십여 일이 지나도록 그들에게선 어떤 연락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전멸했는지 아닌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대장군, 강국에서 보낸 식량을 모두 창고에 넣었소이다.”

편월의 깊은 생각을 깬 건 보급을 담당하고 있는 두건득과 송지였다.

“또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고 계시오? 담 장군은 결코 유군을 위험에 빠뜨릴 분이 아니니, 너무 심려 마시오.”

“그것만이 아니오.”

짐짓 가벼운 어조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 내 주려는 두건득의 말을 편월은 무겁게 짓눌렀다.

“대장군의 고민은 익히 알고 있소. 하지만 그 문제는 시간을 두고 해결할 수밖에 없을 테니, 미리 마음 썩이지 마시오.”

송지의 말을 듣고서야 두건득은 편월이 유군의 문제 외에 다른 고민이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왜 이러는 거요?’

두건득은 송지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백성들은 익숙한 위정자에게 지배받는 걸 원하고 있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난세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하니, 애써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오.”

“아하!”

송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두건득은 편월이 뭘 고민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두건득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른인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까지 시선이 미치는 편월이 새삼스럽게 보여서였다.

‘바로 이게 자리의 차이란 것일까.’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도저히 살길이 없다 싶어 잡가군에 지원한 두건득이다. 그다음부터는 전장에서 전장으로 이어지는 삶의 연속이었으니, 그 역시 정치에 대해 모르긴 편월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점에 대해 고민하는 편월보다 두건득이 속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의 입장이 조금 다르다는 것일 따름이었다. 전군의 앞길을 생각하느냐, 그날그날의 보급에만 신경 쓰느냐 하는 위치의 차이란 얘기다.

“현재 이 탄금성에 들어온 우리 병사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오?”

“아, 그 문제라면 사 장군과 맹 장군이 조사한 걸 가지고 곧 이리로 올 것이오.”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여 일이 지나서야 성에 들어온 병사들의 숫자가 제대로 파악되었다는 건, 부상병들과 낙오병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걸 의미한다.

하긴 그마저 정확한 건 아닐 터였다. 어쨌든 아직 유군이 복귀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오천이나 남았을까?’

편월이 그 점을 궁금해하고 있을 때, 송지의 말대로 맹아를 필두로 한 장수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아, 맹 장군!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얼마나……?”

방금 편월이 궁금했던 점인지라, 송지가 재빨리 맹아에게 물었다.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삼천이백 정도, 부상병들 중 회복되어 전투에 참가할 가능성이 있는 자가 오백 정도.”

“말은 오천 두가 넘소이다.”

인원에 대한 보고는 사문기가 짤막하게 했고, 그 뒤를 이어 맹아가 파악된 말의 숫자를 얘기했다.

사람보다 말이 많다는 게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게 통상적인 일이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에서 빈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게고, 또 말들은 본능적으로 익숙한 무리끼리 뭉쳐서 움직인다. 그러니 한차례 기병전이 끝나고 나면, 병사들은 모두 전멸을 당해도 말들은 고스란히 남는 경우도 없지 않다.

“연합군의 동정은 어떻소?”

“아침에 보신 그대로입니다.”

맹아의 말은 간단했다. 실제로 이 탄금성은 강국의 입장에서 보면 최전선이라 할 만하다. 파양주와 허주의 경계일 뿐 아니라, 거기다 오른쪽으로 길게 누워 있는 대과산맥만 넘으면 곧바로 율천국이다. 그러니 망루에 오르면 강국군과 연합군의 대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새삼 물을 필요도 없었다.

“유군의 담 장군에게서는?”

“그게 이상한 일이오. 담 장군은 분명 우리들이 탄금성에 들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소. 그렇다면 벌써 어떤 연락이 와도 왔을 텐데…….”

서진청이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귀밑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가 가진 전쟁 경험으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당장 걱정해야 할 일은 돌려보내야 될 병사들에 대한 거요.”

사문기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용할 수 있는 병사들을 점검하다 보니, 엄중한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전투에 투입할 수 없는 인원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비단 사문기만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장수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어떻게든 쓸 만한 인원이 삼천칠백이라면, 돌려보내야 하는 사람은 어림짐작으로도 너끈히 오백은 될 터였다. 그들에게 지금까지의 수당과, 또 온전치 못한 몸이니만큼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마련해서 보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정허군의 수중엔 자금이 거의 없다. 하루하루 필요한 군수품은 강국에서 지원을 받는다지만, 그 외엔 술 한 잔도 병사들에게 내려 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돈을 마련할 방도가 없겠소?”

“허어, 이런 때에 대한 대비는 없어서…….”

송지의 질문에 두건득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슬쩍 외면했다. 본의 아니게 맡은 보급대지만, 맡은 이상에는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걸 못했다는 자괴감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증두신에게 부탁해 보는 건 어떻겠소? 이왕 성까지 내준 마당이니 어쩌면 선뜻 들어줄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증두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식량을 고작 닷새 치씩만 보내 주지는 않았을 게요. 증두신에겐 다른 생각이 있는 거요.”

“다른 생각이라니?”

“뻔한 것 아니겠소! 증두신은 우리를 방패로 세워 둔 게 틀림없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우리가 어느 정도 정비가 되었다 싶으면, 지금 국경을 막고 있는 이환은 냉큼 병사들을 빼내 돌아갈 것이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증두신이 자신의 영토를 우리에게 내줬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면 지 장군이 말씀해 보시오. 증두신이 십만 호가 딸린 이 탄금성을 왜 우리에게 줬을 것 같소?”

“그만두시오, 두 분 장군! 증두신의 속셈은 아마 강 장군의 말씀이 맞을 게요.”

서진청이 강숙과 지두룡의 언쟁을 다시 딱딱한 어조로 제지했다. 이렇게 서로 얼굴 붉히면서 얘기하지 않아도, 증두신의 계산 정도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었다.

증두신으로선 강국 혼자의 힘으로 나머지 세 개 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건 견디기 힘든 노릇이리라. 거기다 파양주에선 마용승이 죽은 이후 어떻게 될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이니, 그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이 탄금성에 정허군을 넣음으로써 어떻게든 파양주와 허주는 견제한다는 생각이리라.

아니, 어쩌면 증두신은 보다 깊은 책략으로 이 일을 시행한 건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든 정허군은 파양주에서 파견한 군세. 그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용승이 죽고 없으니 각 성을 다스리는 성주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때 정허군을 앞세우고 오히려 파양주를 공격하거나, 혹은 정허군을 중간에 끼워 넣어 흔들리고 있는 무장들을 포섭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증두신으로선 십만 호의 식읍을 가진 탄금성을 내주고도 그리 손해날 것이 없는 일이다. 다른 모든 걸 떠나서, 그러는 사이에 율천국에 대한 대비를 보다 철저히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모두들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뾰족한 대책을 제시할 수 없으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꼭 그들을 보내야만 할까? 부상으로 인해 싸울 수는 없더라도 농사는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편월의 말이었다. 딱히 누구에게 한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나직한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그게 좌중에 던진 충격은 컸다. 다들 전쟁만 생각했기에, 싸울 수 없는 병사들에 대한 활용은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서도 농사 정도는 지을 수 있는 자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물론 아예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중상을 입은 자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게 좋겠소! 아니, 이참에 병사들의 가족들을 여기로 불러오는 게 어떻겠소? 따지고 보면 다들 먹고살기 힘들어서 잡가군에 지원한 것 아니겠소. 여기에 살던 강국의 백성들 중 태반이 떠났으니 농토는 얼마든지 있소이다.”

“오오, 그게 좋겠소!”

송지의 말에 뭇 장수들이 일제히 찬동하고 나섰다.

사실 이들 대부분은 고향에 처자나 부모를 비롯해 일가족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즉, 자기의 목숨을 팔아 그들을 부양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하나의 전쟁이 끝나 수당을 받았다고 해서 매번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믿을 만한 사람을 사서 가족들에게 돈을 부친다. 피 값의 일부를 그런 식으로 허비하는 셈이다.

그런 판에 만약 가족들을 여기로 데려올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볼 수도 있을 터였다. 당장 심부름하는 사람에게 들어가는 돈을 줄일 수 있다.

그뿐인가? 가족들을 지킨다고 하면 병사들은 더욱 분발해서 싸움에 임할 테고, 상대적으로 그 가족들 역시 보다 안전한 환경 속에서 가업에 충실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세미 문제도 자연히 해결된다. 이제 시작된 겨울 동안 가족들을 이주시킨다면, 내년 봄엔 농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넉넉잡고 일 년만 고생하면 쥐꼬리만 한 증두신의 보급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그럼 지금부터 가족들에게 연락할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그 전에 맹 장군은 부상자들은 물론, 병사들에게도 물어보시오. 우리의 생각에 찬성하는지를.”

“알겠습니다.”

대답하자마자 맹아는 즉각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이가 가장 어리니 이런 일은 으레 그의 몫이었다.

“자, 각자 의견을 말씀해 보시오.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또 정확하게 가족들에게 연락을 할 수 있겠는지.”

송지가 거듭 재촉했지만, 이번에도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계획은 좋았지만, 구체적인 방법까지는 생각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우리 병사들을 보낼 수는 없을 게요. 한두 명 보내서 될 일도 아니고.”

“차라리 청월대 전체를 보내는 게 어떻겠소?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한다면 될 것도 같은데.”

이렇게 얘기한 사람은 지두룡이었다. 속내야 어떻든 탄금성의 후방은 우호적인 강국이다. 지금 연합군과 대치하고 있는 곳만 피한다면, 어느 나라로든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청월대 전체라면 일천에 가까운데, 아무리 증두신이라도 그만한 병력이 자기 영내를 휘젓고 다니게 놔둘 것 같소?”

“무장을 시키지 않고 내보낸다면…….”

“무장도 갖추지 않고 보낸다는 건 더더욱 안 될 말이오! 증두신은 엉큼한 자요. 우릴 이 탄금성에 몰아넣고, 가겸후나 조환과 타협을 할지도 모르오.”

“무슨 타협을 한단 말이오?”

처음부터 지두룡의 의견엔 반대였던 서진청이 조금은 가련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허주나 율천국의 입장에선 우리 정허군이 이마에 붙은 혹처럼 성가신 존재일 거요. 연합을 했으면서도 치지 못했으니깐. 그럴 때 증두신이 우릴 쳐 주는 조건으로 두 곳을 상대로 모종의 뭔가를 얻을 수도 있을 거요. 그 점도 깊이 고려하여…….”

“우리가 쉽게 당하나?”

강숙이 불쑥 끼어들었다. 다소 소극적인 서진청의 말이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 서 장군의 말씀도 일리가 있소. 솔직히 이 탄금성은 강국 입장에서 보면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오. 그만큼 공격하기 좋은 게 어디 있겠소? 증두신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한다면 우린 얼마 버티지도 못할 것이오.”

“대인성은 허주군이 몰라서 낙성시키지 못했소? 총군감은 병사들의 사기에 관계되는 말씀은 삼가시오!”

“그건 율천국에서 온 원군이 결전을 늦췄기 때문이오!”

“뭣이? 이건 그냥 들을 수 없는 얘기로군! 왜 우리가 용감히 싸운 결과라고는 말하지 않소? 그렇게 얘기하면 무장으로서 체면이 상하지도 않소?”

“그만!”

편월이 여러 제장들의 언쟁을 제지했다. 험한 삶을 살면서 격할 대로 격해진 성격들인지라, 길게 내버려 두면 자칫 칼부림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대인성의 싸움은 서 장군의 말이 맞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율천국군은 너무 느슨했소. 만약 증두신에게 우릴 칠 마음이 있다면 그때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오.”

편월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내세운 주장엔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가 서 있지만, 거기서 그칠 뿐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장군께서 한 말씀 해 주시오.”

송지가 결정권을 편월에게 넘겼다. 비록 어리다지만, 대장군으로서의 지난 몇 달간 그는 크게 낭패를 볼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장수들끼리 결정할 수 없는 일은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지금 당장 착수해야 될 일은 두 가지!”

“두 가지?”

“그 하나는 이 탄금성의 구조를 변경하는 거요. 그건 오늘부터라도 당장 시작해야 될 일이오.”

“과연!”

“그렇지! 그게 급선무지.”

편월의 말에 장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전국 세상에선 대비가 최선인 것이다.

“그리고 맹 장군이 오는 대로 근위대에서 쉰 명을 뽑아 은밀하게 이 성에서 내보내시오. 목적은 송용조 상단을 찾는 것이오. 그들에게 병사들의 가족을 찾는 일을 부탁하도록 합시다. 그게 가장 빠를 거요.”

편월의 말에 다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쩌면 오랜 전쟁으로 굳어 버린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송용조 상단을 보급을 위한 존재로만 생각했던 자신들의 굳어진 머리를 말이다.

편월이 어려서 좋은 게 바로 이런 점이다. 가끔 비약을 하기도 하지만, 분방한 상상력과 사고는 이처럼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절묘한 맥을 찾아내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이 성의 구조 변경이 끝나는 대로 우린 출격을 할 것이오.”

“출격이라니? 뭘 위해서 출격한단 말이오?”

“석축산을 점령하기 위해서! 성 공사가 끝날 때까진 국경에서의 대치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거요. 겨울 대진을 오래 끌 바보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공공연히 파양주를 침공하는 것과 같소이다. 여기선 굳이 적을 늘릴 게 아니라 당분간 이대로 전력을 가다듬는 게…….”

“쳐들어가는 게 아니오. 주인 없는 땅을 주우러 가는 거지.”

“엉?”

제각기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는 중에, 송지만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편월의 말대로였다. 마용승이 죽은 지금, 비록 그 아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단지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호윤천 부자도 들썩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파양주 전체는 주인 없는 땅이나 마찬가지고, 누가 먼저 줍느냐의 경쟁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그 시작을 정허군이 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는 일이다.

“과연 이건 생각해 볼 문제로군.”

“달리 생각할 게 뭐 있겠소? 준비만 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거지.”

“아니, 내 말은 만약 우리가 파양주 땅을 점령하면 증두신이 그냥 있겠느냐는 거요.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양도하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독립을 보장하면서 우릴 끌어들인 건 증두신이오.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게 뭐람? 정 엉뚱한 소릴 해 대면 그땐 일전을 불사하는 거지, 뭐!”

아무래도 나이 든 장수들은 비교적 신중했고, 반대로 젊은 측은 성급하고 과격했다.

그러던 참에 맹아가 후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바깥 기온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이곳의 사정을 설명하고 가족들을 데려와도 좋다고 하니깐, 가겠다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소.”

외모만큼이나 들뜬 음색으로 맹아는 간략하게 보고했다.

장수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단순히 금전적 부담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만이 아니라, 이걸로 병사들의 사기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줄 알았지! 그렇다면 소장의 백월대가 선봉답게 성 개축에 착수하겠소이다.”

“성 개축이라니?”

설치기 시작한 강숙에게 맹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뭔가 중요한 논의가 진행된 것에 대한 불만도 묻어 있는 표정이었다.

강숙은 그동안 결정된 사항에 대해 빠른 어조로 설명해 줬다. 그러고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밖으로 달려 나갔다.

“송 군감이 책임지고 공사를 감독하도록!”

과히 밝지 않는 표정으로 편월은 송지에게 말했다.

“존명!”

송지는 두말없이 복명했다. 편월의 어두운 얼굴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병사들이 모두 남아서 일편 마음을 놓았으면서도, 그만큼 가중된 책임감 때문에 단순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으리라.

이미 편월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커 있었다.

3

강국이 개입해서 정허군을 빼돌렸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가겸후는 노기로 펄펄 뛰었다. 당장 강국을 짓밟겠다며 갑옷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쳤을 정도였다.

그걸 측근들이 억지로 말려서 내전으로 보낸 지 이틀 만에 가겸후는 다시 진무각에 나와 정사를 돌봤다.

율천국의 대소 신료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가겸후가 총동원령을 내릴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가겸후는 이틀 동안 뭘 생각했는지 강국에 대한 일은 전혀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이었다.

그 이틀 사이 가겸후는 실로 웅대한 계획을 세웠다. 다름 아닌 허주와 강국을 동시에 병탄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강국이 개입한 것이야말로 다시없는 호기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공공연히 일어설 수 있는 명분을 스스로 제공했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건 마용승이 죽었기 때문에 세울 수 있었고, 또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가 죽음으로써 대륙의 서쪽은 머지않아 벌집을 건드린 것 같은 혼란에 휩싸일 게 뻔하고, 그사이 허주와 강국을 병탄한다는 계획이었다.

가겸후는 그 시기를 명년 봄으로 정했다. 어차피 허주도 그때 칠 작정이었으니, 그와 더불어 강국까지 일거에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당연히 그 준비에도 만전을 기했다. 추수는 이미 끝나 세미로 거둔 곡식은 군량을 충당하기에 충분했고, 그와 대조적으로 허주는 그때쯤 극심한 식량난을 겪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봤을 때 문제는 강국이지만, 그 역시 가겸후는 별로 어렵게 생각지 않았다. 그동안 증두신이 꾸준히 선정을 베풀어 식읍이 삼백만 호 정도로 늘었다지만, 그래도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동짓달에 접어들면서 가겸후의 그 계획을 크게 뒤흔드는 사건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 첫 번째가 율천국의 최북단인 융주의 반란이었다. 겨울이 어느 곳보다 빠른지라, 눈이 내려 길이 끊기자 곧바로 그 지방 토호들이 적비狄飛를 맹주로 내세워 일제히 궐기하고 나섰다.

이건 가겸후가 늘 노심초사하고 있던 문제였다. 대륙의 최북단 융주는 기후와 토질이 험한 탓에 백성들의 기질도 다른 곳보다 난폭하다.

자연 그 융주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가겸후는 무척이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치면 머리를 숙였다가, 철수하면 다시 들고일어나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땅덩어리 그냥 무시해도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땅이 척박해서 농사는 생각지도 못하고, 간신히 유지하는 목축으로는 융주 백성들은 끼니도 잇기 힘들다.

그러니 그들은 끊임없이 주변의 다른 지방을 약탈해서 살아간다. 조금이라도 통제의 손길을 늦추면 융주 근방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고 만다. 그걸 두고서 밖으로 세력을 펼치는 건 무리일 수밖에 없으니, 가겸후로서도 결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규모도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네댓 명의 토호들이 모여 일을 일으켰지만, 이번엔 융주 전체가 들고일어난 모양이었다.

물론 평소부터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즉각 융주와 이웃하고 있는 석주의 병력 오만을 동원해 진압하라고 명을 내렸다.

문제는 계절이었다. 벌써 율천국의 북방은 눈 천지다. 지금도 석주의 병사들은 얼어붙은 산길의 눈을 깨뜨리며 진군하고 있을 터였다.

이쪽의 움직임이 둔하다고 해서 융주도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눈과 거친 지형에 익숙하니, 이 계절도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겨울 내내 석주군은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융주 문제로 부심하고 있던 가겸후의 손발을 결정적으로 묶어 버린 건 바다로부터 전해져 왔다. 바로 해적들의 노략질이었다.

이 역시 건국 이래로 가씨 왕조를 괴롭힌 문제 중 하나였다. 궐운평야 끝 자락과 곧장 이어지는 바다는 율천국의 소중한 자원 중 하나임과 동시에,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어 가는 해적들이 설치는 무대이기도 했다.

그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추수가 끝날 때쯤 습격해 오는 해적들은 백성들이 한 해 동안 지은 농산물을 최대한으로 약탈해 가곤 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율천국도 바다를 끼고 있으니 수군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적들을 소탕하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해전으론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세찬 계절풍에 의해 바다가 거칠어지는 것도 율천국 수군엔 커다란 장애였다. 조수는 잘 알아도, 거센 파도 속에서의 싸움은 해적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적들이 육전에 약한 것도 아니었다. 해전보다는 못하지만, 상륙한 놈들을 치는 것에도 상당한 희생이 필요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원대한 계획을 가진 가겸후를 꼼짝달싹 못하게 해 두고 있는 것이다.

쨍그랑!

맑은 소리를 내면서 가겸후의 손을 떠난 옥 찻잔이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 나 버렸다.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이어진 가겸후의 음성엔 노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전하, 진노하시는 건 지당하오나 그보다는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할 줄로 아옵니다. 그저께만 해도 해안 지방에서 올라오던 세미를 고스란히 해적들이 약탈해 갔사옵니다.”

“이번에 패한 수군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침몰하거나 파손된 배가 이백여 척, 수군 일만 오천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사옵니다.”

“이백 척? 대체 해적의 규모가 얼마나 되기에?”

“정확한 규모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하옵니다. 하지만 여느 때보다 대규모인 건 확실하옵니다.”

“크흠!”

가겸후의 침음성을 들으며, 동석하고 있던 폐포자廢布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기총감장 육우맹이 너무 곧이곧대로 보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사료되옵니다. 그보다는 앞으로 있을 해적들이나 융주의 반란을 완벽하게 제거할 방책을 세우는 게 급선무인 줄 아옵니다.”

가겸후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폐포자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소이까?”

반색하는 가겸후를 보며, 이번엔 육우맹의 반쯤 센 수염이 꿈틀거렸다.

육우맹은 이제 갓 쉰을 넘었을까 말까 한 이 폐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과 석 달 전에 홀연히 나타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가겸후와 사흘간 밀담을 나누더니 제꺽 군사 대접을 받았다.

그것만 해도 배알이 뒤틀리는데, 가겸후는 사사건건 이 폐포자에게 한발 양보하고 있다. 그가 무슨 의견만 제시하면 거의 그대로 수용된다는 얘기다.

당연히 율천국의 무장들 사이에 험악한 공기가 감돌았다. 개중 성급한 자는 폐포자를 죽여 버리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폐포자를 가겸후가 얼마나 신임하고 있는지 잘 아는 까닭에 수하 장수들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보좌했는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인지도 모를 작자가 가겸후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였다.

그렇더라도 그 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석 달간 폐포자는 율천국의 군제軍制 및 법령 몇 가지를 개혁했고, 그건 일반 병사들이나 백성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가겸후의 신임이 날로 두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 방법이란 게 뭐요?”

“무릇 일에는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근원이 있는 법이옵니다. 융주의 문제는 당장 손길이 미치기 어려우니 더 이상 크게 번지는 걸 막는 정도로 그쳐야겠지만, 해적의 문제는 그 근원을 쳐야 해결될 듯하옵니다.”

“허어, 알아듣게끔 얘기를 좀 해 주시오!”

가겸후는 답답하다는 듯 의자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비록 해적들이지만, 항상 바다에서 사는 것만은 아니옵니다. 그들도 정박할 항구가 있어야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고, 다른 일들도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야 그렇겠지.”

“바로 그들이 정박하는 항구를 치지 않고는 해적 문제는 근절시킬 수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그럼 해적들이 어디에 정박하는지 선생은 아신단 말이오?”

다그치는 가겸후의 질문에 폐포자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육우맹은 그 미소도 싫었다. 별호대로 폐포자는 허름한 옷을 입었고, 외모 또한 초췌했다.

그런데 저 미소를 지을 때 그의 모습은 전혀 달라 보였다. 얼굴 자체가 느긋한 여유로 가득 차고, 입고 있는 허름한 옷조차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선인仙人을 장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해적들의 배후엔 분명 상초국이 있을 것이옵니다.”

“흐음!”

아예 단정을 지어 버리는 폐포자의 말을 들은 가겸후와 육우맹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사실 대륙의 북쪽과 서쪽을 제외한 곳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에서 설치는 해적들의 배후에 섬나라인 상초국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의심되었던 점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확인하지는 못했다. 상초국까지 갈 만한 항해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쪽의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면, 천하에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터였다.

바로 그 상초국을 폐포자가 해적의 배후로 지목했으니, 가겸후와 육우맹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이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해적을 근절하려면 상초국을 쳐야 한다는 얘기와 통하기 때문이고, 그게 어려운 문제였다.

육전과 해전은 분명히 다르다. 배를 한 척 건조하려 해도 많은 시간과 인력, 자금이 소요된다. 상당히 많은 국력이 소비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선 해전에서 이기면 그나마 다행이다. 패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육전의 패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타격을 입는다. 당장 배 한 척에 실린 사람과 물자만 해도 엄청난 것이다. 과연 그 일을 가겸후가 해치울 수 있을지 어떨지…….

상대가 상초국 하나라면 가겸후의 성격상 어떤 무리를 해서라도 정벌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강국이 허주의 일에 뛰어들더니, 융주가 일어서고, 바다에선 해적들이 설치고 있다.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지 않고는 이렇게 짜 맞춘 듯 한꺼번에 움직일 턱이 없다.’

강한 의심이 들긴 했지만, 그게 누구일까를 생각하면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혹 마용승이나 목철린이 살아 있었다면 또 모를까.

“증두신이옵니다!”

“뭐라고?”

난데없이 들려온 폐포자의 말에 가겸후는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러다 예의 가는 눈매로 웃는 폐포자의 미소를 본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읽혔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럼 선생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강국의 증두신이 있다는 말이오?”

“증두신의 손이 융주까지 미쳤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해적들의 배후에 있는 상초국은 분명 강국과 손을 잡고 있습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시도록.”

자신도 모르게 가겸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강국과 상초국이 서로 동맹을 맺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상초국이 강국을 위해 군사를 내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전국시대에 맺은 동맹이 그대로 지켜진다는 건 지극히 힘든 일이고, 또 상초국의 입장에선 그만한 이득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있을 것 같지 않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선생의 말은…….”

“사양하실 것 없사옵니다. 이 기회에 강국을 치시옵소서.”

“하면 융주와 해적들의 일은?”

“석주의 병력 오만이 융주로 가고 있사옵니다. 당장 진압은 하지 못하더라도, 겨울 동안은 적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수군엔 더 많은 배를 건조하도록 명하시옵소서. 이럴 때일수록 율천국의 위력을 더욱 과시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이제 추수도 끝났으니, 한가해진 백성들까지 동원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전보다 훨씬 막강한 수군을 보유할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

폐포자의 어투는 어디까지나 담담했다.

하지만 그 말의 규모는 듣는 사람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장 지난번 해전으로 잃은 이백여 척에 대한 건조나 수리만 해도 엄청난 비용이 들 터였다.

거기에 더해 지난번의 몇 배에 달하는 수군을 보유하라는 것이었으니, 가겸후가 아니었다면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그 점에 있어 가겸후는 확실히 범인과는 달랐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각 폐포자의 의견을 수렴했다.

“알겠소. 곧 수군에 명을 내리겠소. 물론 백성들에게도 동원령을 내리고.”

말한 다음 가겸후는 그대로 육우맹에게 시선을 돌렸다.

“육 장군, 들은 대로요. 지금 당장 전군에 동원령을 내리시오. 준비가 되는 대로 곧 강국을 치겠소.”

“저, 전하! 그렇다고는 하오나 아직 허주에 원군으로 나간 소 장군도 복귀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그 점은 어떻게…….”

“그대로 주둔시켜 두시오. 어차피 허주도 언젠가는 쳐야 될 곳, 미리 진을 빼 두는 것도 좋을 거요.”

“존명!”

육우맹으로선 자신의 의견을 한마디도 제시하지 못한 게 불만이었지만, 달리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묵묵히 군례를 갖추며 복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부터 궐주를 중심으로 율천국 전체가 들썩거렸다. 각 주의 산에서는 배를 건조할 재목들이 베여 연방 운반되었고, 군사들 역시 여느 때보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각각의 성으로 집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 *

강국의 증두신도 그해 후반부는 느긋하게 쉴 틈이라곤 전혀 없었다.

우선 정허군을 탄금성으로 들이는 일은 그럭저럭 마무리되었다. 처음엔 격심한 반대를 하던 신하들도, 차츰 증두신의 속내를 알고는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강국의 입장에서 탄금성을 내준 건 전선의 축소를 의미한다. 파양주와 허주라는, 부담되는 두 개의 적을 정허군에 맡기고 북방의 강국인 율천국만 상대해도 괜찮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엔 다소 위험도 따른다. 정허군이 강국의 배후를 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바로 이게 정허군에 대한 군량 지원을 오 일 치로 제한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오랫동안 우호를 유지했던 상초국과의 외교도 더욱 돈독히 했다. 그 결과 증두신 자신도 반신반의했던 원군이 오기도 했다.

그것도 강국의 상상을 뛰어넘는 대규모였다. 크고 작은 배 오천 척에, 동원된 병사만도 물경 십만 명이었다.

배의 숫자에 비해 병사들이 너무 적은 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배들의 칠 할 정도엔 무기와 식량 같은 게 실려 있으니, 십만의 숫자는 오천 척이 수용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할 수 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증두신은 나라 안은 물론, 천하에 산재해 있는 상단을 통해 식량을 대대적으로 사 모으기 시작했다. 상초국이 그만한 병력을 파견해 준 것은 지난 삼 년간 계속된 흉년 탓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상초국에서 원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획득한 것만을 그대로 인정해 달라고 했다.

증두신은 흔쾌히 그 일을 수락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처럼 대규모적인 식량 매입을 시작했다. 상초국의 사정을 빤히 알기에, 이런 식으로 은혜를 느끼게 함으로써 양국의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상초국의 대원수가 강국에 들어오는 날이었다.

이를 몸소 영접하기 위해 증두신이 진파구鎭派口까지 나갔을 때 이미 배는 도착해 있었다.

“상초국 대원수 소촌蘇寸이 삼가 대왕께 문안드리오.”

“수군도독 송평宋平이라 하옵니다.”

미리 둘러쳐 둔 장막 안으로 증두신이 들어서자, 두 사람의 상초국 무장이 깍듯한 군례를 취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아무래도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말은 다소 어눌했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정확하게 발음하려는 기색이 두 무장의 얼굴에 역력히 보였다.

“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자, 편히 앉으시오, 앉아!”

증두신은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최상의 환영 인사였다.

“이번에 우린 율천국 수군과 해전을 벌여 적선 이백여 척과 적병 약 일만을 살상했사옵니다.”

의자에 앉자마자 상초국 수군도독 송평은 전과부터 보고했다.

“그 얘기는 벌써 들었소. 정말 노고가 크셨소이다. 이로써 가겸후는 당분간 움직일 여력이 없을 것이오.”

“하지만 가겸후는 그 후로 수군을 대대적으로 증가시키고, 나라 안의 병력도 속속 우리나라와의 국경으로 집결시키고 있다 하옵니다.”

옆에서 배석하고 있던 오지형이 약간 무거운 어조로 끼어들었다. 증두신이 너무 낙관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불안했던 것이다.

“율천국의 수군이라면 얼마가 됐든 이 몸이 책임지고 격파해 보이겠사옵니다.”

오지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송평이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오오, 과연 믿음직스럽소! 그럼 바다는 그대들에게 맡기고, 우린 육상의 대비만 철저히 하면 되겠구려.”

“대왕께 한 말씀 올리고자 하옵니다.”

소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점에 대해 우리 상초국의 대왕 전하께서 특별히 내린 명이 있사옵니다.”

“그래, 그게 뭐요?”

“이번에 온 병사들 중 육만을 상륙시켜 육상에서도 강국 전하를 도우라는 분부이셨사옵니다.”

“오호! 그렇다면 해전에서 불리해지지 않겠소?”

“그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해전이라면 상초국 병사들은 너끈히 일당천의 힘을 발휘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나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오. 이로써 과인도 베개를 높이 베고 잘 수 있게 되었구려. 하하하!”

증두신은 호탕하게 웃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육상에서 율천국과 싸워야 된다는 건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육전까지 지원해 주겠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물자가 소비되겠지만, 이미 막대한 양의 식량을 구입해 놓고 있던 참이었다. 어차피 상초국으로 보낼 생각이었으니 아까울 건 전혀 없었다.

“알겠소. 그럼 곧 상륙할 상초국 병사들을 위해 이곳에 막사를 짓도록 하겠소.”

“아니옵니다. 우리들을 곧바로 전선에 투입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그래야 병사들도 더욱 분발할 것 같사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먼 바다를 건너왔는데 조금은 쉬어야 하지 않겠소?”

“바다는 우리들에겐 요람과도 같사옵니다. 그러니 그 점은 너무 괘념치 마옵소서.”

소촌의 이 말도 증두신의 마음을 흡족게 했다. 육만, 아니 해군까지 포함해서 십만의 병사가 하루를 지체하면 그만한 식량과 물자가 헛되이 소비된다. 그걸 줄이게 된 셈이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어, 그렇다면 과인으로서도 더 바랄 게 없소이다. 여봐라! 마련해 둔 주안상을 이리 내오너라! 오늘은 두 분 장수들과 더불어 대취해 보리라!”

그 말에 따라 즉각 각종 요리와 술이 진막 안으로 운반되었다.

그사이 상초국의 배와 거기에 탄 병사들이 속속 상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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