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국개입姜國介入
1
맹아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닷새 뒤인 시월 이십삼 일이었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밀사로 왔던 사내의 말 중, 적어도 이환이 이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천강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환은 이달 말일 자정을 기해 연합군의 배후를 치기로 했습니다. 그때 우리들도 적중 돌파를 감행하라고…….”
“알겠소.”
맹아의 뒷말은 사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역시 문제는 적중 돌파를 감행해 강국의 군사들과 합류한 다음이었다. 과연 증두신이 밀사가 전한 말대로 할 것인지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이었다.
“송 군감, 남은 군량은 얼마나 있소?”
“하루에 주먹밥 하나씩만 배급한다고 해도 앞으로 닷새를 버티기 어려울 정도요.”
대답하는 송지나 듣는 편월이나 모두 표정이 무거워졌다. 말일까지는 앞으로 칠 일, 이틀간은 병사들을 완전히 굶겨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게다가 그 전까지도 하루에 주먹밥 하나로만 견뎌야 한다. 어떤 형태든 전투가 계속된다는 걸 감안하면, 병사들이 과연 이 사실을 납득할지 어떨지…….
“다시 한 번 맹 장군을 보내 강국이 보다 빨리 움직이도록 요청하는 게 어떻겠소?”
두건득이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정허군의 보급대를 맡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감도 막중하게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잔재주는 한 번으로 족하오. 적들도 이번엔 속지 않을 거요. 더욱이 강국군은 이만에 달하오. 그러니만큼 쉽게 계획을 변경하기가 어려울 거요.”
담개가 두건득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섰다. 아무래도 정규군 출신이니 편법을 쓰는 것에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정면으로 자신의 제안이 묵살당한 두건득이 대들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상장군께서 대안을 제시해 보시오.”
“대안이라고 할 건 없소. 다만 지금부터 일절 전투를 중단하고, 병사들에 대한 보급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 만에 하나 병사들의 이 왕성한 사기를 꺾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막상 적중 돌파할 때 고전을 면키 어려울 거요.”
“병사들은 벌써 굶주림을 겪고 있소.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을 하는 자는 없소.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자고 설득한다면 모두들 아무 말 없이 따를 것이오.”
“지금 성중엔 적의 간인들도 들어와 있을 것이오. 그런데 적중 돌파를 감행할 날짜를 병사들에게 알리자는 말이오?”
“누가 그걸 알리자고 했소! 다만 병사들에게 조금만 더 고생하자고…….”
“그만 됐소!”
두 사람의 언쟁을 편월이 묵직한 어조로 제지했다. 이 역시 그동안 대장군 노릇을 하면서 붙은 관록이었다.
“병사들의 설득은 각 부대의 장수들이 맡으시오. 그리고 적중 돌파를 감행한다는 것도 알리도록 하시오. 다만 날짜를 다음 달 삼 일이라고 하시오. 그때까지만 참아 달라고 한다면, 크게 반발하는 병사들은 없을 것이오.”
“그걸로는 결코 병사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오 일을 굶어야 한다면 이탈병들이 속출할 것이오. 하니 그 명은 거두어 주시오.”
편월은 자신의 명에 반박하는 두건득을 빤히 쳐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납득하지 못하는 병사들을 납득시키는 게 지휘의 기본이라 들었소. 상가웅, 그렇게 말했었지?”
“예, 옛!”
“옳거니!”
상가웅의 짓눌린 듯한 대답과 무릎을 치는 담개의 감탄사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두 장군, 죽을 자리인 줄 뻔히 알면서도 명에 따라 진격하는 병사들은 왜 그러겠소? 바로 이 전쟁에 대해 납득을 했기 때문이오. 목숨을 아끼지 않는 병사들에게 배고픔 정도를 납득시키지 못한다고는 생각지 않소.”
‘이 꼬마 놈이!’
순간적으로 두건득은 울컥하는 심정에 얼굴이 붉어졌다. 전쟁의 경험이나 지위야 어떻든, 열세 살 난 꼬마에게 훈계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은 결코 좋은 게 못 되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두건득은 터질 듯한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어느새 편월이 이만큼 성장했다 싶으니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해졌다.
“알겠소. 이 두건득, 대장군의 말씀을 듣고 보니 여태 헛살았다 싶소이다. 암! 모름지기 장수 된 자는 납득하지 못하는 부하들까지 납득시킬 수 있어야지. 우리 청월대는 염려 마시오. 한 번 말해서 안 되면 열 번, 그래도 안 되면 골백번이라도 되풀이해서 설득할 테니까.”
“자, 그럼 다음으로 중요한 문젠데… 적중 돌파 시의 작전을 이 자리에서 세워야 되지 않겠소? 거기에 맞춰 병사들을 훈련시켜야 되지 않겠소?”
송지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거북한 얘기는 얼른 접고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의도였다.
“작전 같은 건 필요 없소, 총군감.”
“예? 하지만 대장군, 우리 군의 사활이 걸린 적중 돌파를 앞두고…….”
“우리 군율의 첫째가 뭐요?”
“군율? 그야 싸우면 이긴다…….”
“바로 그거요! 농성이든 적중 돌파든, 우린 반드시 이겨야만 하오. 그에 대한 건 각 부대의 장수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고.”
“아!”
돌연 송지의 입에서 기성이 토해졌다. 편월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탓이었다.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이게 바로 정허군 군율의 첫 조항이다. 그걸 적중 돌파에 적용한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야 한다는 말로도 통한다. 그걸 위한 보다 세세한 것들은 각 부대의 장수들에게 맡긴다는 것이니, 듣기에 따라서는 무책임한 것처럼, 또 그 이상 좋은 작전도 없는 것처럼 인식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작전에 대한 건 장수들끼리 의논하기로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병사들을 납득시키는 일이오. 막상 적중 돌파를 감행할 땐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할 테니, 그 전에 하루 이틀은 온전히 굶을 각오를 해야만 할 거요.”
“그렇다고 생으로 굶으면서 전투를 치를 순 없으니… 어떻소? 병사들을 세 개 조로 나눠, 직접 전투에 나서는 병사들에게만 식량을 지급하는 것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구려. 모두를 굶기는 것보다는 설득하기도 쉬울 듯하오.”
서진청의 말에 두건득이 찬성의 뜻을 표하고 나섰다.
“어떻소, 대장군? 어디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있다면 말씀을 해 주시오.”
이걸로 회의를 끝내려는 듯 송지는 편월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편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얼 그리 생각하시오, 대장군?”
“아, 앞으로 파양주가 어찌 될 것인지 생각해 봤소.”
“흐음!”
“그야 뭐…….”
편월의 말에 좌중의 사람들은 일제히 침음성을 토하거나 한마디씩 내뱉었다.
맹아가 이번에 다녀오면서, 단순히 강국군과의 제휴만 맺고 온 건 아니었다. 호윤천 부자가 파양주 전체의 군권을 장악하고, 서서히 진남후의 직위를 손에 넣으려는 음모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하고 돌아왔다.
“이대로 파양주는 호윤천의 손아귀에 떨어질 공산이 크겠지?”
“아마도 그럴 거요.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오. 진남후의 지배를 받던 각처의 무장들이 과연 호윤천에게 승복을 할는지… 대장군의 생각은 어떠시오? 만약 호윤천이 무슨 명령을 내리면 순순히 따르실 생각이오?”
“아니!”
편월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대장군이라는 직책을 내세워 거만스럽게 광운과 자신을 대했던 호윤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긴 호윤천의 명을 따를 것 같았으면 강국과 제휴를 하지도 않으셨을 테지.”
“잘된 일이오. 이 기회에 호윤천 부자와 완전히 손을 끊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소. 왠지 난 그자만 보면 배알이 꼴렸소.”
아무래도 여기 모인 장수들은 하나같이 호윤천에게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나 보다. 송지의 말에 너나없이 한마디씩 불평을 토해 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편월만이 말이 없었다. 예의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천장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대충 얘기가 끝난 것 같으니 각자 부대로 돌아갑시다. 병사들을 설득하는 게 중요하니, 이 점을 유념하시오.”
편월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눈치 챈 송지가 장수들을 해산시키고, 그 자신도 밖으로 나갔다.
“대장군께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던데, 혹시 아는 바 있는가?”
송지는 앞서 걸어가는 맹아를 불러 세워 물었다. 비록 며칠간 자릴 비웠다지만, 근위대장이니만큼 편월에 대해선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아마도 그 두 분 때문일 거요.”
“그 두 분이라니?”
“아시잖소. 죽영루에 계시던 두 분.”
“아하!”
송지는 자신의 이마를 세차게 두드렸다. 왜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는지 스스로도 한심할 지경이었다.
물론 송지도 죽영과 유화를 알고 있다. 정허군에 편입되기 전에 한때 죽영루에서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껏 그녀들을 생각지 못했던 건 아무래도 정허군 총군감으로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였다.
“내가 호윤천이라고 해도 그 두 사람을 인질로 잡았을 텐데.”
송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라는 게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처럼 엄중하게 포위된 상태에서는 달리 강구할 수 있는 방책도 없다.
‘이건 우리들이 함부로 입에 올려서 될 문제가 아니다.’
설사 죽영과 유화를 구해 올 방도가 있다고 해도, 쉽사리 실행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 명의 여자 때문에 정허군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적중 돌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다시 생각해 보자.’
송지는 죽영과 유화에 대한 생각을 거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민해 봐야 하등 도움이 될 것도 없었다.
“우리 근위대원들은 이틀에 한 번만 배급을 해 줘도 될 거요.”
“응? 그래서야 되겠나. 아무리 군량이 부족해도 근위대원들을 굶겨서야…….”
“괜찮소. 막주의 그 밀림 속에서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오.”
“하긴…….”
송지는 고개를 끄덕여 맹아의 말에 수긍을 표했다. 근위대는 막주전에서의 이탈병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에겐 이틀에 한 번이 아니라 지금부터 계속 굶으라고 해도 누구 하나 불만을 토하지 않을 터였다.
“일단 서 장군의 의견대로 근위대도 세 개 조로 나누게. 최대한 아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틀에 한 번씩이라는 건 너무 심하네.”
사실 이치적으로 따지자면 세 개 조로 나눠 배급하는 것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사흘에 한 번 정도밖엔 먹을 수 없으니 이틀은 그냥 굶어야만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이성적으로만 따졌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서로에게 목숨을 맡겨 적과 싸워 온 병사들 사이에선 소위 전우애라는 게 있다. 배식을 받으면 결코 혼자 먹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동료들과 나눠 먹을 게 틀림없다.
이건 두 가지 측면에서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는 당연히 군량을 아낀다는 점이고, 둘째는 전우애를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다. 막상 적중 돌파를 감행했을 때 그건 무서운 힘을 발휘하리라.
물론 부작용도 없지 않다. 만약 누구 하나라도 제 욕심만 차린다면, 지금까지 왕성하게 유지되던 사기가 한꺼번에 무너질 우려도 없지 않다.
‘병사들을 믿어 볼 수밖에.’
행여 혼자만의 욕심을 부리는 자가 나온다고 해도 제지할 방법은 딱히 없다. 책임을 묻는다면 애당초 군량을 적절하게 안배하지 못한 장수들을 추궁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송 군감, 잠깐 드릴 말씀이 있소.”
고민에 잠겨 있는 송지의 귀에 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강 장군.”
“내게 한 가지 생각이 있소. 일단 들어 보시고, 괜찮다 싶으면 채택해 주시오.”
“의견이 있다면 왜 아까 회의석상에서 말하지 않았나?”
“그야 뭐…….”
얼버무리는 강숙을 보며, 송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가 그런 자리에선 말이 많지 않다는 걸 떠올린 탓이었다.
“그래, 의견이란 건?”
“지금 우리에겐 많은 포로들이 있소. 그중엔 조환의 처남도 있고, 또 당세홍이라는 장수도 있소이다. 그들을 넘겨주는 대신 식량을 좀 달라고 하면 어떻겠소?”
“뭐? 포로와 식량을 교환하자고?”
처음엔 깜짝 놀란 듯 크게 벌어졌던 송지의 눈이 점차 가늘게 좁혀졌다. 방금 들은 강숙의 말은 음미할수록 새로운 맛이 느껴졌다.
포로들 중엔 분명 편사중과 당세홍이 있다. 이 두 개의 이름만 해도 적들은 쉽사리 이편의 제안을 물리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포로들도 먹여야 한다.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한 판이니, 교환이 성립만 된다면 입도 줄이고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게 된다.
“당장 대장군에게 가세. 되든 안 되는 우리로선 그다지 손해 볼 게 없으니, 이 일을 대장군께 상주해 추진해 보도록 하세.”
당연히 편월은 허락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이 담개가 사자로서 교섭을 위해 적진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른 건 강숙과 상가웅이었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교섭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도연각의 심정이야 어떻든, 연합군의 대장군인 소우종은 시종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편사중이나 당세홍을 소중하게 여길 곳은 허주이지 율천국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담개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미 연합군, 특히 소우종이 이 싸움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걸 간파한 이상 이 제안은 반드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었다.
“자, 벌써 점심때구려. 우선 식사부터 하고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소우종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 담개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해가 벌써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아침 일찍 시작된 교섭이 별다른 진전 없이 시간만 끈 셈이 되고 말았다.
소우종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음식들이 진막으로 날라져 왔다.
꼴깍!
가장 나이가 어린 상가웅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역시 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늘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만 했고, 지금 눈앞에 진열된 음식들은 하나같이 군진에선 보기 드문 진수성찬이었다. 군침이 돌지 않는다면 정상이 아니었다.
“자, 마음껏 드시오. 사자로 오신 분들을 굶겨 보낸대서야 우리 체면이 뭐가 되겠소. 그러니 어서…….”
소우종이 먼저 젓가락을 들면서 음식을 권했다.
그러나 담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나무로 깎아 놓은 사람처럼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고 앉아 있었다.
“왜 그러시오? 객이 들지 않으면 주인 된 입장인 우리들도 먹을 수가 없지 않겠소. 그러니 조금이라도 드시구려.”
“아시다시피!”
소우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개가 그 끝을 잡아챘다.
“지금 성에 있는 아군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소이다. 그런 와중에 비록 사자로 왔다고 해서 우리만 좋은 음식을 먹을 순 없소. 그러니 우린 괘념치 마시고 마음껏 드시오.”
“허어!”
소우종의 입에서 탄성이 토해졌다. 사실 이건 일부러 마련한 일 중 하나였다. 군량이 부족해 허덕이는 정허군을 시험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소우종은 음식이 들어올 때부터 담개는 물론, 그를 수행해 온 두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 결과 소우종은 낭패감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한눈에도 어려 보이는 상가웅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음식 따위에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사자로 온 자들이 음식에 혹해 허겁지겁 먹으리라곤 소우종도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사자라고 해도, 그처럼 의지가 약해서는 적진에 사자로 들어올 엄두도 낼 수 없었을 테니까.
소우종이 감탄한 건 담개와 강숙의 표정이었다. 아무리 꾸민다고 해도 사람의 오감은 속일 수 없다. 배를 곯고 있다는 건 쌍방이 뻔히 아는 사실이고, 이런 진수성찬 앞에선 눈과 코가 힘들어서라도 뭔가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없다. 전혀 없다. 아직은 철부지일 것 같은 한 명만 제외하면, 두 사람의 표정은 그야말로 그들 눈앞엔 사람도 음식도 없는 것 같았다. 흔히 ‘철석같은 의지’라고 하는 걸, 소우종은 비로소 직접 확인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좀 들지 않겠소? 이래서야 차린 우리들의 성의가 무색해지지 않겠소.”
“그 성의는 이미 우리들 가슴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소이다. 그러니 편하게 드시오.”
담개의 말을 듣자, 이번엔 소우종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런 적이라면, 최선을 다해 쳐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소우종의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울린 생각이었다.
어쨌든 객이 먹지 않겠다는데 주인 혼자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점심상은 그대로 물려졌다.
그 후에야 비로소 교섭은 조금씩 진척되어 갔다. 담개가 원한 건 포로의 석방과 양곡 일만 섬의 교환이었지만, 결국엔 오천 섬으로 낙찰되었다.
그래도 담개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처음 일만 섬이라고 주장한 건 연합군을 방심시키자는 의도였다. 보다 확고한 농성 의지를 보여 줌으로써, 말일 날의 적중 돌파를 간파당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오천 섬이면 적중 돌파를 감행하는 날까지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는 수량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만족한 속내를 감춘 교섭의 결과는 그날 중으로 전격 진행되었다. 해가 지기도 전에 포로들이 대인성에서 줄지어 나왔고, 엇갈리듯 양곡을 실은 짐수레가 먼지를 일으키며 성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쌍방 간에 싸움다운 싸움이라곤 전혀 없었다.
2
문제의 시월 말일, 강국의 왕인 증두신은 직접 친위 부대를 이끌고 정허군을 들여놓을 탄금성을 둘러보고 있었다.
“전하, 오늘 밤 중으로 여긴 정허군이 들어올 것이옵니다. 하오니 속히 물러가시는 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이렇게 말한 건 얼마 전까지 탄금성의 성주로 있던 오지형吳志衡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염려 마라. 그리고 이 탄금성에 딸린 식읍은 어느 정도라고 했나?”
“땅은 너르지만 국경 부근이라 식읍은 채 십만 호가 되지 못합니다.”
“십만 호라… 만약 이 성에 정허군이 들어온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주하는 백성들도 늘겠지?”
“그야 아무래도 다른 군벌의 지배를 받기는 싫어할 테니, 상당수의 백성들이 이주를 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래도 십만 호라면 정허군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겠지.”
“대왕 전하의 판단에 만에 하나라도 실수는 없겠지만, 이대로 성을 비워 준다면 정허군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을는지요?”
“당분간 정허군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게다. 연합군은 체면 때문에라도 이 탄금성을 칠 게 분명할 테니까.”
“그렇다면 적들을 우리 영내로 끌어들인다는 말씀이옵니까?”
“그사이 우리는 율천국과의 경계에 있는 각 성채들을 강화한다. 그러면 되지 않겠나?”
“하오나 이 탄금성이 무너지면 우리나라의 서쪽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이옵니다. 이 성에 정허군을 넣을 거라면, 그에 합당한 지원도 하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후후후…….”
오지형의 말에 증두신은 나직하게 웃었다.
“오 장군은 의외로 걱정이 많은 성격이로군.”
“전하! 소장을 어찌…….”
오지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걱정이 많다는 말이 그의 귀에는 겁이 많다는 걸로 들렸기 때문이다.
전국난세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문관보다는 무관이 우대를 받는다. 오지형도 그 무장 중의 한 명이니, 겁이 많다고 인식되면 앞날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증두신의 말에 표정이 굳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걱정 말게, 오 장군. 가겸후는 당분간 다른 곳엔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걸세.”
“그건 어째서 그렇사옵니까?”
“우선 가겸후는 허주를 노리고 있다. 그걸 수중에 넣기 전에는 결코 우릴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초국의 수군이 움직여 주기로 했다. 바다로부터 궐운평야에 상초국의 수군이 상륙한다면, 아무리 가겸후라 할지라도 다른 곳엔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게다.”
“흐음…….”
깊은 침음성을 토하며 오지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증두신의 말대로라면 과연 가겸후는 강국을 돌아볼 여력이 없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문제는 정허군이 어느 정도 필사적으로 연합군을 막아 주느냐에 달렸다. 되도록 긴 시간을 버텨 줘야 강국의 입장이 보다 편해질 것이다.
“그런데 정허군의 대장군 편월은 아직 어린 아이라지?”
“소장도 그렇게 들었사옵니다. 어리지만 전쟁엔 귀신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들렸사옵니다.”
“한번 만나 보고 싶군. 어째서 그 나이에 그처럼 전쟁을 잘하는지.”
“불가하옵니다!”
증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지형은 큰 소리를 질렀다.
“편월은 바로 광운이란 자의 손에서 자랐다고 하옵니다. 그자는 선대왕을 죽인…….”
“닥쳐라!”
이번엔 증두신이 오지형의 말을 막았다. 노기로 인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이미 그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고 대소 신료들에게 말한 바 있다! 그게 또한 한평생 무장으로 살다 가신 아버님에 대한 최대한의 조의를 표한 거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대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황공하옵니다!”
오지형은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확실히 증두신은 그런 말을 했었고, 그것에 대한 한마디가 이처럼 그를 자극할 줄은 미처 몰랐다.
“다짐 삼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사옵니다. 그러면 대왕 전하께옵선 정녕 그 일을 잊으신 것이옵니까? 그 점을 분명히 알아야 소장도 역시 어떤 마음으로 정허군을 대할지 정할 수 있기에, 이처럼 심기를 미편케 해 드리고 있사옵니다.”
오지형도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여긴 자신이 성주로 있던 탄금성이다. 거기에 정허군을 맞아 안내를 해 줘야 할 판이니, 증두신의 마음 여하에 따라 그 태도를 정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게 하지 마라!”
“그 말씀을 듣고 소장도 마음을 정했사옵니다.”
“소중한 손님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정허군으로 하여금 웃음 사는 일이 없도록!”
“존명!”
“처음부터 이 성은 삼중의 성벽이 쌓여 있었나?”
오지형이 복명하자 증두신은 화제를 돌렸다.
“아니옵니다. 소장이 부임하여 외곽과 내성을 둘러싼 성벽을 다시 쌓았사옵니다.”
“백성들의 부담이 많았을 텐데…….”
혼잣말처럼 내뱉던 증두신은, 그러나 이내 말을 고쳤다.
“하지만 국경의 성이란 모름지기 이리 튼튼해야 되지. 수고 많았네, 오 장군.”
“황감하옵니다.”
“전령! 전령이 오고 있다!”
성의 북문 망루에 올라 있던 병사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그쪽에서 오는 전령이라면 이환이 보낸 게 틀림없을 터였다.
“오 장군, 전령을 곧바로 이리 불러오시오.”
“알겠사옵니다.”
증두신의 명을 받은 오지형은 즉각 사람을 북문으로 보냈다.
이윽고 땀과 먼지로 뒤범벅된 얼굴로 전령이 가쁜 숨을 헐떡이며 증두신 앞에 부복했다.
“대왕 전하이시다. 전령의 전갈 사항은?”
“오, 오늘 밤 해시亥時를 기해 연합군의 배후를 칠 테니, 전하를 비롯하여 다른 장수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단숨에 말해 버린 전령은 또다시 가쁜 호흡을 몰아쉬었다.
“알겠다. 전령을 쉬게 하라.”
병사들에게 일러둔 뒤, 증두신은 오지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나는 일단 출발해서 대수성大水城으로 향하겠다. 오 장군은 몇 명이나 이 성에 남길 생각인가?”
“이환 장군의 병력도 있으니, 소장은 천 명이면 족하옵니다.”
“그럼 나머지 병사들을 조속히 수배하도록 하라.”
“존명!”
복명을 한 후 오지형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조금이라도 빨리 증두신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인간의 행위 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변수가 많은 게 바로 전쟁이다. 즉, 한순간의 앞도 내다보기 어렵다는 말이니, 한 나라의 왕인 증두신을 되도록 멀리 보내야만 한다.
하지만 증두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말로는 떠나겠다고 했고 또 떠나야 되지만, 기실 여기 남아서 편월을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다.
만약 증두신이 일찍 혼인해서 아이를 낳았다면 지금쯤 편월과 비슷한 나이일 게다.
아니, 실제로 증두신에겐 열 살 된 딸이 한 명 있다. 선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마자 중신들의 간청으로 혼인해서 얻은 아이였다. 물론 그 아래로 아들도 둘이나 더 두었다.
‘그 둘과 편월을 비교할 수 있을까?’
증두신의 아들은 둘 다 아홉 살이다. 정실과 후궁의 몸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 둘은 아직 전쟁을 모른다. 비록 각종 무예를 하루도 쉬지 않고 단련하고는 있지만, 지금껏 실전에 투입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듣기로, 편월은 벌써 그 나이보다 훨씬 어렸을 때부터 전장을 누볐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은 정허군의 대장군으로서 대인성에서 농성하고 있다.
‘만약에 우리들이 모두 죽고 아이들의 세대가 된다면?’
증두신의 생각은 비약을 거듭하여,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때 과연 자기 아들들이 편월을 이길 수 있을까? 월등한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문제는 그 힘의 배양을 위해선 지금의 편월을 도와줘야만 한다. 그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선친을 죽인 원수인 광운까지 용서하고 있다. 이 기묘한 역설에 직면한 증두신은 차라리 허탈한 웃음이 솟구쳐 견딜 수가 없었다.
“전하?”
갑자기 들려온 오지형의 목소리에 증두신은 생각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사옵니까?”
“아닐세. 준비는 끝났는가?”
“예, 전하. 곧바로 출발하셔도 되옵니다.”
“알겠다. 곧 출발하겠다.”
그 말을 끝으로 증두신은 발길을 옮겼다. 혹시라도 자신의 허탈한 표정을 오지형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뒤로 성급한 늦가을 태양이 서둘러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 * *
대인성의 분위기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늘 밤에 대대적인 야습을 감행한다고 얘기를 해 뒀음에도 병사들은 침착했다.
하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연합군이 세운 목책은 어느새 부숴야 할 만큼 높직했고, 이런 야습은 감행할 때마다 성공했으니 말이다.
편월은 그런 성의 분위기를 세밀히 살피고 있었다. 오늘 밤은 드디어 적중 돌파를 감행하는 날이다. 병사들 하나하나의 움직임과 심리 상태가 중요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각 부대의 보고가 있었소이다.”
송지였다. 그는 각 부대를 한 바퀴 돌며 그 준비 상태를 점검하고 온 참이었다.
“알겠소. 강국군의 공격이 한창일 때 우리도 치고 나갑시다.”
“그런데 저래서야 막상 적중 돌파임을 알게 되면 동요하지 않겠소?”
아무래도 송지는 너무 긴장감이 없는 병사들의 상태가 염려스러웠나 보다.
“염려할 건 없소. 저래 봬도 자기들 대장이 가는 곳은 지옥이라도 따라들 가니깐.”
그 말엔 송지도 이의가 없었다. 배를 주릴 때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던 사기인지라, 포로와 교환된 식량이 성으로 들어오자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공격 명령만 내리면 어디까지라도 전진할 것이다.
“시각이 어떻게 된 것 같소?”
“술시가 다 되어 가는 것 같구려.”
빈틈없이 들어찬 것 같은 별들을 올려다보며 송지가 대꾸했다.
“우리에게 자정을 기해 치고 나오라고 했으니, 강국군의 공격은 그보다 일찍 시작될 거요. 그때 병사들이 설치지 않도록 각 부대의 장수들에게 전하시오.”
“알겠소이다.”
대답한 후 송지는 걸음을 옮겼다.
이런 전갈은 전령을 부리는 게 통례다. 그런데 송지가 직접 가는 건 아직 병사들에겐 적중 돌파를 알리지 않은 까닭에서고, 거기에 따른 주의 사항을 각 부대의 장수들에게 일일이 말해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송지가 가고 난 후, 편월은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각을 가늠했다.
성 밖 먼 곳에서 한 대의 향전이 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거리가 있어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연합군이 술렁거리는 건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강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능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편월은 재빨리 망루로 뛰어 올라갔다.
예감은 적중했다. 연합군의 후방에서 연방 불화살이 쏘아져, 성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대장군!”
맹아가 세찬 어조로 편월을 불렀다. 벌써부터 흥분한 듯 어깨를 크게 들썩이는 모습이었다.
“기다렷! 아직은 이르다!”
편월은 맹아를 억눌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기에, 먼저 그 기세부터 눌러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치고 나가자고 하는 자들도 있고…….”
“그걸 잘 다스려야 한다! 치고 나가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그러니 힘을 아꼈다가 그때 쓰게 해!”
“존명!”
편월의 어투가 워낙 강해서 맹아는 자신도 모르게 군례를 갖추며 복명하고선, 바로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그와 엇갈리듯 송지 역시 다급한 발길로 편월에게 와서 보고를 했다.
“각 부대의 장수들에게 대장군의 명을 기다리라고 해 뒀소이다. 백월대는 벌써 성문에 집결하고 있을 거요.”
“강 장군이 좋아하겠군.”
“이르다 뿐이겠소! 모처럼 선봉 부대가 선두에서 치고 나가게 되었다면서 한껏 분발하고 있소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월대 혼자서 너무 앞서 가는 건 안 돼. 어디까지나 전군의 보조에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일러뒀겠지?”
“그건 강 장군도 잘 알고 있소이다. 이번만은 그 성질을 누르고, 어디까지나 정허군 전체를 이끈다는 심정으로 임하겠다고 거듭 약속을 했소이다.”
그렇게 말한 후, 송지는 편월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왜 웃소?”
“전군과 함께 호흡하는 것은 대장군도 명심해 주셔야겠소이다.”
“뭐?”
“대장군과 근위대는 백월대와 황월대의 뒤를 이어 세 번째요. 이 점 단단히 지켜 주시오!”
다짐을 두는 듯한 송지의 얼굴에서 더 이상의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송지가 가장 걱정한 건 강숙보다 편월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선봉으로 치고 나가겠다는 말은 않겠지만, 대신 후미를 맡겠다고 할 공산이 컸다. 적중 돌파의 경우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하다는 건 한 번이라도 전쟁을 치러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 편월은 송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순간적으로 송지는 멍청해지고 말았다. 이처럼 고분고분하게 따라 주니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후미는, 후미는 유군이 맡기로 했소이다. 아무래도 기동력이 가장 뛰어나니…….”
“보병들과 부상자들은?”
적중 돌파에 있어 가장 희생이 큰 건 역시 보병들과 부상자들이다. 그들을 최대한 안전하게 이동시킬 대책을 철저하게 강구해야만 한다.
“근위대의 바로 뒤를 따를 것이오. 그 주변은 남은 세 부대가 에워싸고, 유군이 후미를 끊는다는 작전이오.”
“괜찮군.”
이번에도 편월은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이 대인성 점령은 완전한 실패라고 할 수 있었다.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차지해 버렸으니 말이다.
‘이런 고전도 없었지.’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편월의 표정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육체적으로 힘이 든 건 여기보다는 아무래도 막주의 밀림 속에서 싸울 때가 훨씬 심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육체에 국한된 일이었지만, 여기서는 그때보다 정신적인 압박감이 심했다. 명색이 대장군이 되고 보니, 근 칠천에 달하는 부하들의 생명과 생활까지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각 부대의 준비가 갖춰진 모양이오. 전령들이 움직이고 있소이다.”
“아!”
송지의 말에 편월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성 밖을 내려다보니 강국군과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좋아!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시오.”
“벌써 모든 준비를 끝내고 명만 기다리고 있소이다.”
“알겠소. 이만 내려갑시다.”
말과 함께 편월은 빠른 걸음으로 망루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송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왜 오지 않소?”
“소장은 정허군의 총군감이오. 그러니 마지막까지 이 자리에 남아서 각 부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유군과 합류하겠소. 그렇게 아시도록!”
“뭐라고?”
“게다가 이렇게 적진을 내려다보며 제때에 맞춰 신호를 보내 줘야 할 사람도 있어야 할 게 아니겠소. 그 일을 해내고, 후미인 유군과 합류할 테니 염려 마시오.”
편월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직책을 다하겠다는 송지의 말이었으니 입이 막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편월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아니, 불안하다고 하는 게 정확했다.
“오, 벌써 자정이 임박했소. 대장군도 얼른 준비하시오!”
편월의 마음을 모를 송지가 아니었다. 어설픈 다짐을 하는 것보다는 시각의 임박을 일깨워 속히 이 자리를 떠나게 만들려고 했다.
그 말에 편월의 시선은 저절로 하늘로 향했다. 과연 시각은 벌써 자정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었다.
“그럼 뒤를 부탁하겠소.”
복잡한 심경과 달리 편월은 간단하게 한마디 한 후 몸을 돌렸다.
‘부쩍 성장하셨군.’
그 등을 보면서 송지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그의 눈에는 정허군의 대장군이 된 후로 편월이 부쩍 커진 것처럼 비쳤다.
방금 전의 말만 해도 그렇다. 이 경우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느니, 몸조심하라는 건 구차한 입놀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부탁한다.’라는 한마디에 그 모든 게 포함되고, 또 대장군의 관록도 살게 되는 것이다. 어느새 편월의 몸과 마음이 그처럼 자랐다 싶으니 송지의 가슴은 뿌듯해졌다.
“자,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서 합류해야겠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송지는 허공에 대고 향전을 한 발 쏘았다. 성문을 열고 쳐 나가라는 신호였다.
“선봉 백월대, 돌격!”
“와아!”
“쳐라! 이번에도 연합군 놈들의 혼쭐을 빼놓자!”
강숙의 명이 떨어진 것과 동시에 거대한 성문이 열렸고, 정허군의 선봉대인 백월대가 일제히 쏟아져 나갔다.
3
“우오와아!”
근위대 특유의 함성과 더불어 세 번째로 성 밖으로 치고 나간 편월은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바로 뒤를 따르고 있을 보병 및 부상자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다른 부대가 있소! 그러니 대장군은 속히 황월대의 뒤를 이어 전장을 벗어나시오!”
진즉부터 편월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던 맹아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어조로 고함을 질렀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강국군의 출현은 연합군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거기에 가해진 정허군의 공격엔 속수무책이었다. 어쩌면 지금쯤 선봉으로 나섰던 백월대는 적중을 완전히 돌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만큼 맹아는 더욱 조바심이 났다. 보다 안전할 때 편월을 이 혼란한 전장에서 빼내려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빠지면 정면이 텅 빈다. 백월대와 황월대를 놓쳤으니, 놈들은 더욱 견고하게 막을 게다. 그런데 저들을 두고 먼저 빠져나가자고?”
편월의 말끝이 기묘하게 높아지며 갈라졌다. 얘기하는 도중에 적들이 덤벼들었고, 대도를 휘둘러 그들을 잘라 버리느라 힘을 쓴 탓이었다.
“대장군, 적의 포위가 더욱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조속히 말을 모시도록!”
말과 함께 맹아는 기어이 소질풍의 고삐를 손에 감아쥐었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맹아에게 자신의 거취를 맡길 편월이 아니었다.
“오, 그렇다면 앞서 간 근위대를 다시 불러라! 보병과 부상자들의 보호가 우선이다! 서둘러 명을 내려라!”
“제기랄!”
편월의 말에 맹아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두 사람 모두 젊다기보다는 아직 어리니만큼 쉽게 흥분한다. 그만큼 전장 심리의 지배를 받는 것도 빨랐다.
벌써 이들의 말투부터가 달라졌다. 주변을 의식해서 각자 꾸민 존칭을 하던 게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편한 대로 마구 서로에게 퍼붓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바보짓을 할 거요? 설사 우리 모두가 전멸한다고 해도 대장군만은 무사해야 되오! 흥, 어느 졸자인지도 모를 자의 칼에 목이 달아나 보시지! 그땐 우리 정허군이 이겨도 지는 거요! 그걸 왜 모르시오?”
“언제부터 입으로 싸웠나, 맹 장군? 뒤에 붙은 세 놈이나 처리하라고!”
비록 목소리는 컸지만, 맹아에게 응대하는 편월의 말 자체는 가벼웠다. 서로 언쟁하는 건 그만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바로 그게 맹아의 피를 한꺼번에 머리 꼭대기에 몰리게 만들었다. 나이로는 자신이 더 많다.
비록 전쟁 경험이 적어 직급이 다르다고 하지만, 어린 편월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자 애써 억눌렀던 성질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만 것이다.
“에이익, 벌레 같은 놈들!”
그 분노는 자신의 배후를 노리고 있던 적병에게 고스란히 덮쳐 갔다. 맹아는 말 머리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절상검을 휘둘러 세 놈의 수급을 그대로 하늘 높이 쳐 올렸다.
“좋소이다! 이제부턴 각자 싸우는 거요. 궁지에 몰렸다고 죽는소릴랑은 내지 마시오!”
확실히 전쟁은 꾸밈이 없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가장 명확하고 절실한 진리만이 남는다.
당연히 그 전쟁을 실제로 치르는 사나이들의 혀도 결코 치장하지 않는다. 속에 있는 말을 여과 없이 그대로 내뱉어 버린다. 바로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아니면 영원히 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이런 직설적인 말이 그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말을 꾸미느라 돌려 대다가는 듣는 사람이 오해할 소지가 많고, 그게 곧바로 전쟁의 승패와 결부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말은 그랬지만, 여전히 맹아는 편월 곁에서 떠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근위대장이라는 직책에 충실하려는 모습이었다.
거기에 정허군의 부상자들을 데리고 보병들이 들이닥쳤다.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요? 한 구덩이에서 몰살당할 일 있소?”
보병의 우익을 담당하고 있던 흑월대 오강이 이 역시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쯤 벌써 편월은 제이 대인 황월대와 합류했을 거라고 예상했던 참이라 몹시도 당황스러운 음색이었다.
“이제 됐다! 움직여! 부상자들과 보병들은 기병과 떨어지지 말라!”
일단 보병 및 부상자들과 합류하자 편월도 더 이상 미련 떨지 않았다. 여기서 더 지체하다가는 지금쯤 적진을 돌파했을 백월대와 황월대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대장군이 가신다! 길을 터라!”
일단 편월의 명이 떨어지자 가장 신 나게 설치는 건 맹아였다. 선두로 훌쩍 나서며 절상검 대신 창으로 앞을 가로막는 적병들을 마구 찍어 넘겼다.
순식간에 주변에 널찍한 공터가 생겼다. 앞뒤로 적을 맞은 연합군으로선 지금껏 대오를 갖추지 못하고 허둥거리고 있는 탓이었다.
“허둥거리지 마라! 더 이상의 적을 한 명이라도 더 놓친다면 모두 내 칼에 죽을 줄 알아라!”
적병들 뒤에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렸고, 그에 따라 어지럽던 연합군의 손발이 차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그냥 두고 있을 맹아가 아니었다. 진즉부터 선두에 나섰던 기세 그대로, 대오를 갖추기 시작한 적병들을 짓밟으며, 곧장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들었다.
“정허군의 근위대장 맹아! 적의 장수를 찾노라!”
“오오, 율천국 중주군의 선봉장 개추영介追影이 바로 나로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는 어서 덤벼라!”
마치 서로가 서로를 울리는 북의 공명처럼 각자의 이름을 밝힌 두 사람의 창이 허공에서 딱 소리를 내며 얽혀 들었다.
“와아, 쳐라!”
“적장을 죽여라!”
이 경우 불리한 건 아무래도 맹아 쪽이다. 자기 딴엔 적장과 일대일 승부를 결한다는 계산이었겠지만, 적의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다. 연합군은 한꺼번에 맹아를 에워싸고 말았다.
하지만 적들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정허군의 대장군이 맹아보다 훨씬 격렬한 기질을 가진 편월이란 사실을 말이다.
“맹 장군이 위험하다! 모두 한꺼번에 치고 들어가라! 유군은 보병의 뒤를 깨끗이 정리하도록!”
편월의 명에 근위대와 세 개의 부대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칠천이 채 안 되는 정허군 중 보병 일천을 제하고는 모두가 기병이다. 연합군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앞을 막는 건 애당초 무리다.
물론 연합군도 주력은 기병이다. 다만 그들은 미처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강국군의 기습을 받았으니, 오히려 보병들보다 전력상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우오와아-!”
근위대부터 특유의 함성을 올리며 맹아를 에워싸고 있는 적병들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흑, 청, 적월대의 병사들이 치고 들어갔고, 그래도 남은 적군들은 보병들이 청소하듯이 휩쓸어 버렸다.
아무튼 근 사천에 이르는 기병이었다. 그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치고 나가니, 이미 그 앞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게 정허군에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손발을 둔하게 만드는 건 바로 아군인 보병과 부상자들이었다.
비록 뒤에서 유군이 받치고는 있다지만, 기병과 거리가 너무 벌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거기다 또 하나의 장애물이 정허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허주 담전성의 성주 도연각이 정허군의 대장군 편월의 목을 받으러 왔노라!”
전장 구석구석까지 파고들 듯한 웅혼한 고함 소리가 들린다 싶자, 일단의 정연한 기병 부대가 자욱한 먼지 사이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편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연각이라면 이미 수령성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겐 한차례 씻지 못할 빚을 지기도 했다.
편월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전장에서의 빚은 목숨으로 갚는 게 상례고, 바로 그 채권자라고 할 수 있는 도연각이 앞을 막았으니 가슴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편월만이 아니었다. 그때 수령성에 있었던 사람이든, 아니면 그 얘기를 들었든 간에 그 일을 알고 있는 정허군은 한결같이 술렁거렸다.
편월은 이를 악물었다.
‘이래서는 싸움이 안 된다!’
여긴 전장이다. 빚을 갚아야 될 양심적 가책도 있지만, 자신의 어깨 위엔 아군의 생명도 걸려 있다는 걸 편월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빚을 갚는 건 다음이라도 늦지 않다.’
“오 장군, 적장을 상대하시오!”
생각과 동시에 편월은 오강에게 명을 내렸다. 아무래도 도연각을 직접 상대하는 건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오강으로선 거부할 수도 없고, 오히려 은근히 바라고 있던 참이었다. 명이 떨어지자마자 즉각 창을 휘두르며 도연각에게로 말을 몰았다.
“정허군 흑월대장 오강이 간다! 졸개들은 상대하지 않겠다. 도연각은 썩 나서서 내 칼을 받아라!”
그렇게 외치며 적지를 누비는 오강의 뒤로, 흑월대의 편장 급 무장들이 백여 기 우르르 몰려갔다. 저렇게 혼자 보내다가는 도연각에게 이르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와아아!”
함성과 동시에 오강이 달려간 곳에선 각종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말 울음소리가 마치 터진 둑으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터져 나왔다.
그래도 정허군이 단연 불리한 싸움이었다. 허주군은 어림잡아도 삼천 이상, 거기에 백 기가 덤볐으니 어디에 아군이 있는지 찾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물론 그걸 멀거니 보고만 있을 편월이 아니었다.
“서진청! 서 장군!”
편월은 큰 소리로 서진청을 불렀다.
“대령이오!”
“적월대와 흑월대 전체를 이끌고 허주군을 상대하시오. 난 이대로 적진을 돌파해 선봉인 백월대와 합류하겠소. 딱히 승부를 가릴 건 없소. 적당히 상대하다가 그대들도 몸을 빼도록 하시오.”
“존명!”
서진청은 즉각 대답했다. 단순히 전장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편월이 이 자릴 벗어나겠다는 말이었다. 그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실행에 옮길 작정이었던 것이다.
“적월대는 따르라! 흑월대도 마찬가지다!”
“와아!”
벌써 이들은 지난 삼월에 파양주를 떠날 때부터 하나가 되는 훈련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월대와 흑월대는 서진청의 깃발 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머지는 이대로 적진을 돌파한다. 진격!”
이제 남은 군사는 근위대와 청월대뿐이다. 이들로만 보병과 부상자들을 보호하면서, 뒤를 끊고 있는 유군에게 길을 열어 줘야만 한다.
하지만 적은 어쨌든 삼만 오천에 달하는 대군이다. 허수아비를 그처럼 세워 뒀어도 진군하는 데 거치적거릴 터인데, 그들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고 하나같이 병기를 꼬나 쥐고 호시탐탐 이쪽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말이 좋아 적진 돌파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더했다. 불의의 기습으로 당황했던 연합군도 차츰 대오를 갖춰 체계적으로 정허군을 막아섰던 것이다.
편월은 초조해졌다. 이렇게 되면 허주군을 상대하고 있는 적월대와 흑월대가 위험해질 뿐 아니라, 어쩌면 먼저 돌파했던 백월대와 황월대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 전에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
그게 쌍방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려면 우선 자신이 가장 먼저 빠져나가야 한다고 편월은 생각했다.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지만, 이번엔 그래야 될 것 같았다. 그래야 뭇 장수들도, 병사들도 빨리 이 전장에서 몸을 뺄 테니까 말이다.
“두 장군, 길을 여시오! 뒤는 유군에게 맡기고 이대로 돌파하겠소!”
“진즉에 그러셨어야지! 청월대, 따르라!”
두건득 역시 편월이 속히 이 자릴 빠져나가는 걸 반겼다. 제꺽 휘하의 청월대를 이끌고 앞을 가로막는 율천국의 병사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근위대는 보병과 떨어지지 마라! 후미의 유군엔 거리를 더 바짝 당기라고 신호해!”
명령을 내린 것과 동시에 편월은 소질풍을 마구 몰아 맹아에게 접근했다. 개추영이란 적장과의 싸움이 결코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월이 가세하자 상황은 단번에 역전되었다. 대장군과 근위대장이 같이 적중에 있으니, 근위대원들 역시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맹 장군, 따르라!”
일단 연합군의 포위망이 출렁거린다 싶자, 편월은 더 이상의 적들은 상대하지 않았다. 그대로 소질풍을 몰아 전장을 벗어나려고 했다.
예전의 편월이라면 이런 일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게다. 싸움을 버려두고 전장에서 몸을 빼는 것 말이다.
하지만 지난 삼월부터 지금까지 대장군 노릇을 하면서, 편월은 그 자리가 얼마나 막중한지 깨닫게 되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곧바로 전군에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론 모든 게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목숨을 보다 소중히 하게 되었다. 자기 하나만의 것이 아니라 전군의 운명과 함께한다는 걸 알았기에 지금처럼 전장에서 몸을 빼려는 결심도 하게 된 것이다.
그 결정에 맹아가 흔쾌히 따른 건 결코 아니었다. 개추영이란 적장과 승부를 결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맹아 역시 뭐가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여기서 편월이 마음을 바꾼다면 정허군 전체가 난처해지고 만다.
“대장군의 명이시다! 이 승부는 뒤로 미루자!”
내질린 개추영의 창을 세차게 떨쳐 낸 맹아는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렸다.
“게 섰거라! 비겁하게 도망치느냐?”
졸지에 상대를 잃어버린 개추영은 연방 고함을 지르며 맹아의 뒤를 쫓았다.
그게 바로 개추영의 불행이었다. 한 덩어리가 되어 정허군의 보병들을 헤친 건 좋았지만, 자기가 너무 깊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콱, 하는 충격이 느껴진 것과 동시에, 개추영은 종아리에 가득 번져 가는 짜릿한 통증을 느꼈다. 정허군의 보병 중 한 명이 내지른 창에 의한 것이었다.
“에익!”
개추영은 수중의 창을 세차게 휘둘렀다. 이 한 수로 자신의 종아리에 상처를 입힌 자는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개추영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하찮은 보병으로 여겼던 자는 실은 사문기였던 것이다.
물론 개추영도 중주군의 선봉을 맡을 만큼 용맹한 장수지만, 애당초 사문기의 상대는 아니었다.
두 자루 창이 서로 딱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싶은 순간 사문기는 곧장 앞으로 뛰어들어 개추영의 다리를 잡아 그대로 당겨 버렸다.
“어억!”
마상에 앉은 개추영의 전신이 크게 흔들린다 싶더니, 이내 낙마하고 말았다.
개추영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창을 한차례 쭉 훑어 사문기의 미간을 딱 겨눴다.
“흥!”
그 모습을 보면서 사문기는 가벼운 코웃음을 날렸다. 기병이 말에서 떨어지면 그 위력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줄어 버린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개추영의 창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닷!”
한소리 크게 외치며 사문기는 그대로 창을 내질렀다. 어쨌든 급한 건 자신이었다. 개추영에게 잡혀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당찮은, 웃!”
사문기의 공격이 너무 단순했기에 슬쩍 몸을 움직여 피하려던 개추영은 움찔하며 동작을 멈췄다. 찌르는 듯한 종아리의 통증 때문이었다.
그다음은 뻔했다.
콰악!
힘차게 내지른 사문기의 창이 그대로 개추영의 목젖을 꿰뚫고 뒤통수에 그 삐죽한 첨단을 내밀었다.
“와아!”
동시에 주변에선 함성이 울렸다. 정허군의 보병들이 지른 것이었다.
“뭘 구경하고 있나! 서둘러라!”
사문기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사이 기병들과의 거리가 부쩍 벌어졌기 때문이다.
“달려라! 근위대를 따라잡아!”
사문기는 설치기 시작했다. 보병들이 이렇게 처져 버리면, 후미를 담당하는 유군의 부담이 크게 늘어난다. 자칫하면 그들을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사문기의 독려는 효과를 발휘했다. 부상자들을 앞세운 보병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달렸다.
그렇다고 희생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보병도 보병이지만, 허주군의 기병과 부딪친 적월대와 흑월대의 타격은 가벼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병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 어떻게든 몸을 뺄 수 있었다.
편월 역시 두 번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상황이 어떨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적중 돌파 시엔 통상 병력의 절반 정도가 희생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나마 상당한 도움이 된 건 강국군이었다. 그들이 먼저 연합군의 배후를 쳐 줬으니, 정허군의 희생은 최소한으로 줄어들 터였다.
“와아-!”
돌연 전방에서 커다란 함성이 편월의 귓전을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먼저 갔던 백월대와 황월대의 병사들이 올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강국군도 왈칵 밀고 나왔다. 정허군의 대장군인 편월이 온다는 걸 알고선, 그 뒤를 쫓고 있는 연합군을 막기 위함이었다.
“대장군, 이쪽이오!”
선봉장인 강숙이 낯선 장수를 한 명 대동한 채 저만치서 편월을 불렀다.
“이분은 강국군의 편장 중 한 분이오.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기다리고 있었소.”
“아군은?”
질문을 던지고선, 그 대답도 듣지 않고 편월은 말 머리를 돌려 전장을 관찰했다.
‘유군이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 많은 희생은 치렀을망정 보병은 어느 정도 철수를 완료했다.
그런데 후미를 담당했던 유군의 모습은 강국군과 연합군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담개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수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장군, 서두르시오! 유군은 말 그대로 유군이오! 너무 염려하실 건 없을 게요!”
편월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익히 아는 강숙인지라 고함을 지르면서 소질풍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거기에 서진청과 두건득이 갑옷에 피 칠갑을 한 모습으로 달려와 가세했다.
뭐라고 소리를 지를 듯 편월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뿐, 그는 묵묵히 장수들이 하는 대로 맡겨 버렸다.
강숙의 말처럼 뒤에 남은 건 유군이다. 게다가 지휘는 노련한 담개가 하고 있으니,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을 터였다.
“소장을 따르시오.”
강숙과 함께 있던 강국군의 장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정허군에 탄금성을 내주는 게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편월을 필두로 한 정허군은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를 받치면서 강국군도 서서히 후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