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월 5
각자립장各自立場
1
그날 밤, 광운은 기어이 잠을 설치고 말았다.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남국의 모기 탓이 아니라 마음에 들러붙는 심려 때문이었다.
광운이 침사성에 들어온 지 어느덧 오 개월, 이제 막주의 인심도 서서히 얻어 가고 있는 중이고, 수군 양성을 위한 배 건조도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 침사성에 들어왔을 때 광운은 막막하기만 했다. 배를 타 본 경험도 몇 번 없는 자신이 수군을 양성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긴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모르는 건 배우면 되고, 없는 경험은 쌓으면 되니까 말이다.
정작 큰 문제는 막주 백성들의 엄청난 반감이었다. 어쨌든 목철린은 이 땅을 이십 년 이상 지배했고, 생각과는 달리 민심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들어간 광운은 그야말로 옛 주인을 죽인 원수 대접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광운은 특단의 대책을 내놓았다. 큰 전쟁의 뒤끝이라 쓰임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삼 년간 세미를 면제해 준 것이 그것이었다.
이 난세에 어딜 가나 백성들의 가장 큰 고민은 그날 하루를 연명할 수 있는 먹을거리다. 당연히 광운의 정책은 환영을 받았고, 민심도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도 건조하고, 수군에 충당할 병사들도 모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즈음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이 날아들었다. 바로 마용승의 죽음이었다. 서수의 걱정과 달리 광운은 상림호를 통해 진즉부터`—`정확하게는 마용승의 장례가 끝나자마자`—`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때 광운의 솔직한 심정을 두 글자로 표현하라면 ‘자유’였다. 잡가군 이탈병 오백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차원에서 맡은 침사성이었으니, 마용승이 죽으면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지워 버렸다. 경위야 어떻든 이제 겨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 막주의 백성들이다.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위정자가 온다면 그들은 다시 혼란에 빠질 게 뻔하다. 다행히 좋은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포학한 자가 온다면 폭동이 일어날 소지도 다분하다.
그 폭동은 이 땅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마씨 일족의 근심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사는 백성들도 모두 도탄에 빠지고 만다. 오랜 전쟁 뒤에 간신히 붙잡은 그 안정의 기틀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 줘야만 한다.
죽영과 유화도 광운이 섣불리 막주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쐐기였다. 벌써부터 그녀들에 대한 심상치 않은 소식이 간혹 들려오고 있다. 자신이 한 걸음이라도 거취를 그르치면 당장 그녀들에게 화가 미칠 터였다.
물론 그녀들에 대해선 서수와 송용조가 음으로 양으로 손을 쓰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거기에 효명성주 상림호도 여차하면 한손을 빌려 주겠다는 약속을 해 왔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들에게 의지해서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그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면에는 자신이나 편월이 쉽사리 마씨 일족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럴 때 편월이 있으면 좋으련만…….’
곁에만 있다면 자신은 막주에 남아도 편월에게 그동안 모은 군사들을 딸려 영욱성으로 보낼 수도 있을 터였다.
‘벌써 보름이 가까워지는군.’
이 대륙의 남단은 태양도 달도 강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욱이 지금은 팔월, 정월과 더불어 달이 가장 밝은 시기이기도 했다.
그 밝음이 오늘의 광운에겐 감상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남국에는 있을 턱이 없는 눈가루를 뿌린 듯 새하얀 달빛을 받으면서도, 가슴은 오히려 먹물을 푼 것처럼 어둡게 젖어 들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죽영과 유화 때문이었다.
그게 언제가 됐든, 자신의 마지막은 죽영에게서 마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도 그걸 알기에 지금까지 묵묵히 지켜봐 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그처럼 간단한 약속조차 지키기 힘들게 되었다. 시대의 엄격함은 개인의 달콤한 미래까지 일그러지게 만들어 버렸다.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고 뒤에서 마구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약속 하나 접는 걸로 막주의 백성들이 이 차가운 시대의 바람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다면, 죽영 역시 웃으며 자신을 용서해 줄 게 틀림없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역시 관건은 죽영과 유화의 안전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설사 앞으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들이 안전하다는 소식을 들어야만 맘이 편해질 것 같은 광운이었다.
저 아래 순라를 도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축시가 되었나 보군.’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겠다며, 광운은 침소로 걸음을 옮겼다.
반짝!
뜻하지 않은 한 줄기 빛이 침소의 어둠을 가른 건 바로 그때였다.
‘웃!’
터져 나오려는 경악성을 삼키며, 광운이 그대로 몸을 굴린 건 순전히 전장에서 익은 반사 신경 덕이었다.
쉬잇!
날카로운 파공성과 서늘한 냉기가 밀려든 건 그 직후였다.
‘암습이다!’
생각이 미치는 것과 동시에 광운은 커다란 의혹에 사로잡혔다. 마용승도 그랬지만, 전국의 왕이나 패주들은 이처럼 암살의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광운의 경우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 지방의 패주도 아니고 왕은 더더욱 아니기에 이런 노림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누가? 왜?’
의혹투성이였지만 거기에 매달려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암습자는 혼자가 아닌 듯, 뒹구는 광운을 노리고 연방 칼날이 날아들었다.
광운은 정신없이 굴렀다. 애당초 예기치 못했던 공격이었기에 이렇게밖에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바닥만 구르는 건 아니었다. 암습자의 공격을 피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무기가 있는 곳으로 접근해 갔다.
하지만 광운이 무기를 잡는 것보다 더 빨리 십여 명의 병사들이 우르르 방으로 뛰어들었다.
“웬 소란… 앗, 성주님!”
그들은 바로 오늘 밤 성내 순찰을 맡은 순라군들이었다. 성주의 거처를 순시하다가 싸우는 소릴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삐이이잇, 삐잇!
순라군 중 한 명이 급하게 호각을 불었다. 성주의 위기는 곧 성 자체의 위기로 통하는 것이니, 지금 성내에 있는 병사들에게 비상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병사는 호각을 더 이상 길게 불지 못했다. 상반신이 절반 이상 쪼개져 피 구덩이 속에 뒹구는 사람에겐 더 이상의 호흡이 있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그사이 광운은 무기를 쥘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과 함께 전장을 달렸던, 창보다 더 예리한 병기였다.
일단 병기를 쥔 광운은 암습자들에게 덤벼들었다. 성주라는 직책을 생각하면 직접 싸우기보다는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성격상 그렇게 되질 않았다.
이제 당황한 건 암습자들이었다. 광운의 거친 공격도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조금 전에 울려 퍼졌던 호각 소리도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니었다. 서둘러 일을 끝내려 했지만, 달려온 순라군들이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되었다.
“모두 다섯이다. 반드시 생포하도록!”
암습자 중 한 명에게 공격을 퍼부으며, 광운은 순라군들에게 명을 내렸다. 행여 모두 죽여 버리면 배후를 캐내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명이 오히려 암습자들을 돕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 탓에 순라군들의 공격이 무뎌진 사이 그들은 창을 넘어 도주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걸 보면서도 광운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호각 소리로 인해 이미 병사들에게 비상은 알려졌을 터이고, 이 시각엔 성을 빠져나갈 수도 없을 게다. 철저히 수색만 한다면 암습자들을 잡는 건 시간문제다.
“성주,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새로 모집한 휘하 장수 중 한 명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광운에게 물었다.
“난 괜찮네. 그보다 성내를 철저하게 수색해서 절대로 놈들을 놓치지 말도록!”
말을 하면서 광운은 침의를 벗고 전복을 입기 시작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성주? 설마 직접 놈들을……?”
“그렇다. 병사들에게만 맡겨서는 안심이 안 돼.”
“안 됩니다! 밖에 놈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경솔한 행동은 안 됩니다! 놈들을 색출하는 일은 소장에게 맡겨 주십시오. 실수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그보다 성주께서는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날 노리고 온 자들이다.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소장을 못 믿으십니까? 성주께서 처음 이 성에 오셨을 때부터 모신 저를?”
“진 장군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닐세.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내가 직접 나서 철저하게 조사하겠다는 걸세. 그래야 병사들도 분발할 테고.”
“병사들을 분발시키기 위해 성주께서 위험에 노출되는 건 안 될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디 자중을!”
진 장군이라 불린 진도수陣導壽의 고집도 어지간했다. 광운의 말에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그를 제지했다.
광운은 진도수의 눈을 쳐다보았다. 외줄기 충정이 번뜩이는 눈빛이었다.
“그래야겠나?”
마침내 광운은 진도수의 열정에 지고 말았다. 전복 차림 그대로 침상에 걸터앉았다.
“아무래도 여긴 너무 넓어서 경비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적어도 놈들을 모두 잡아들일 때까지만이라도.”
“어디가 좋겠는가?”
“보정각補政閣이 좋겠습니다.”
“보정각? 거긴 안 될 말일세.”
“그쪽이 여기보다 경비하기가 쉽습니다. 부디 소장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거듭된 진도수의 말에 광운의 미간이 난감하게 일그러졌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보정각이란 침사성에 딸린 시비들이 머무는 곳이다. 여자들만 기거하고 있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그곳은 안 되겠네. 그러니 다른 곳을 알아보게.”
“현재로썬 거기가 가장 안전하게 모실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속히 납시기를!”
“그렇다면 여기 있겠다.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선 거론하지 말도록!”
광운은 단호하게 진도수의 말을 잘라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들만 있는 곳으로 몸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이 침사성에 처음 입성했을 때부터 광운에게 여자를 권하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명색이 막주를 지배했던 성인지라 내전 역시 엄연히 존재하고, 거기의 여자들을 단속하기 위해서라도 성주가 총애하는 여인이 한 사람쯤은 있어야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광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아가 시녀들의 시중도 극도로 제한적으로만 받았다. 스스로를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죽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판이니 진도수의 말에 강한 거부감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성주!”
진도수가 세찬 어조로 불렀지만, 광운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진 장군도 나가 보도록!”
“예?”
“밖의 상황을 알아보란 말일세. 암습자들이 생포되는 걸 바라지 않을 우리 편도 있을 테니까.”
“핫!”
돌연 진도수의 입에서 기성이 터져 나왔다. 광운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른 게 아니다. 암습자들이 성주의 침소까지 잠입해 왔다는 건 내통자가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하나, 내통자가 있다면 암습자들이 생포되어 배후를 불 경우 위험해진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고자 무리를 해서라도 놈들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 광운의 말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도수는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러고 있나? 얼른 나가 보라는데도.”
“성주의 하명은 다른 사람을 불러 시키겠습니다. 소장은 성주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요컨대 자신은 어디까지나 광운을 지키겠다는 말이었다.
불현듯 광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만약 전장에서 두 사람이 적으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 탓이었다.
물론 진도수도 명장이라고 하기에 하등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러니 광운이 특별히 발탁해 수족처럼 부리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광운의 상대는 아니다. 채 열 합도 버티지 못하고 목이 잘릴 게 분명하다.
그런 진도수가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옆에 붙어 있으니, 광운으로선 우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밖에 누가 없는가? 당장 호기군虎旗軍의 방 장군을 불러오너라!”
돌연 진도수는 바깥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자신을 대신해 밖의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할 작정이었다.
진즉부터 비상이 걸려 있던 침사성이다. 진도수의 명은 즉각 시행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반 무장 차림의 장수 한 명이 뛰어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호기 장군 방필方必, 부르심을 받잡고 대령했습니다!”
이제 갓 스물을 넘었을 것 같은 얼굴과 달리, 방필의 체구는 여느 장정들보다 훨씬 컸다. 당연히 완력도 남달리 뛰어나 젊은 나이에 벌써 호기 장군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대는 지금 즉시 밖의 상황을 감독하도록 하라. 절대로 암습자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명심해라! 우리 편 중에서도 명을 거역하고 놈들을 죽이려는 자가 나올지 모른다. 그러니 결코 방심하지 말도록!”
“존명!”
방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복명하고 물러갔다. 그로선 진도수가 말한 그 이면의 의미까진 생각지 않았다. 다만 적이니까 우리 편이 죽이는 게 당연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방필이 물러가자 진도수는 허리에 찼던 장군도를 손에 쥐고 광운 앞에 버티고 섰다. 몸을 방패 삼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광운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비웃음이 아니라 진도수의 다소 지나치다 싶은 충성심 때문에 웃은 것이었다.
다른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진도수 역시 광운이 침사성에 와서 뽑아 쓴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 긴 시간을 함께 지낸 게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도 진도수는 마치 누대를 이어 모신 것처럼 광운을 대하고 있었다. 처음 침사성에 들어왔을 때의 반감을 생각하면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물론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렇게 차차 하나의 마음으로 뭉친다면 머지않아 막주도 패전의 상처를 씻고 새로이 번영할 수 있을 터였다.
돌연 광운의 침소로 통하는 복도의 입구 쪽이 떠들썩해졌다.
“아마도 놈들을 생포한 것 같습니다!”
말과 함께 진도수가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주께 보고드립니다! 효명성의 상 장군으로부터 사자가 왔습니다!”
“뭣이? 효명성에서? 이 밤중에?”
광운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상림호가 이 밤중에 사자를 보냈다는 건 뭔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는 뜻이고, 그건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게 뻔하다.
“당장 모시고 오너라!”
광운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세 명의 병사가 한 사람을 떠메다시피 하고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먼 길을 한숨도 쉬지 않고 달려와 의식이 가물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성주께… 과, 광운 장군께 데려…….”
“정신 차리시오! 성주께서 바로 앞에 계시오.”
“서, 성주께 아, 안내를…….”
“물부터 가져오너라.”
부축해 온 병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연방 광운에게 안내해 달라는 사자를 보며, 진도수가 재빨리 명을 내렸다.
촤악!
돌연 광운은 탁자에 놓여 있던 주전자를 들어 속의 식은 찻물을 사자의 얼굴에 끼얹었다. 물을 대신한 것이었다.
그건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확 풀어져 있던 사자의 동공이 서서히 제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했다.
그걸 확인한 광운은 찻주전자를 사자에게 건네주었다. 약간 남은 차로 갈증을 달래라는 의미였다.
분명 목구멍을 찢을 듯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을 사자였지만, 주전자에 든 차는 아주 천천히 마셨다. 성급하게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은 자신의 몸 상태를 아주 잘 아는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사자에 대한 신뢰가 더욱 증가되었다. 차를 마시는 사소한 행동에서도 예사 인물이 아니란 걸 간파한 탓이었다.
“사람을, 사람을 물리쳐 주십시오.”
어느 정도 갈증이 풀리자 사자는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광운에게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금방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소. 그러니 사자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용건을 말씀하시오.”
진도수가 이렇게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말처럼 불과 얼마 전에 광운의 목숨을 노린 암습자들이 잠입했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들이 사자로 가장하지 말란 법도 없을 터이니, 조심하는 게 최선이었다.
사자는 진도수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광운의 눈만 빤히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을 물리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겠다는 기색이었다.
“모두 물러가도록 하라.”
“성주!”
“진 장군, 됐네. 나가서 밖의 상황이나 그르치지 않도록 하게.”
“하지만 성주! 아직 이 사자의 신분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도 아니고…….”
“진 장군은 그토록 내가 염려스러운가?”
불쑥 던진 광운의 말에 진도수는 황급히 군례를 갖췄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성주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기 때문이다.
“날 믿는다면 나가서 밖의 상황을 살펴라. 사자에게 중요한 용무가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을 지체해서야 쓰겠느냐!”
“존명!”
어쩔 수 없이 진도수는 복명을 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여기도 성주의 목숨을 노린 암습이 있지는 않았는지요?”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자 사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시오?”
“실은 우리 효명성에도 암살자들이 잠입해 왔습니다. 다행히 성주께선 미약한 부상에 그쳤지만… 그보다 이걸 먼저 읽어 주십시오.”
“상 성주도 암습을?”
놀란 표정을 지으며 광운은 사자가 내민 서찰을 받아 들었다. 상림호의 직인이 찍힌 채 봉함된 게 확실히 보였다.
광운은 재빨리 서찰을 꺼내 펼쳤다. 내용은 비교적 간단했다.
하지만 그걸 읽은 광운의 얼굴에선 핼쑥하니 핏기가 가셨다.
호가 부자가 파양주의 병권을 장악, 역모의 기미가 있음!
보다 길었지만, 요약하면 이 한 줄이 되는 내용이었다.
“이, 이에 대해 상 성주께서 달리 하신 말씀은?”
“네, 앞으로 호가 부자의 어떤 명도 듣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운 성주께서 염려하고 계시는 두 분에 대해선 따로 손을 쓰고 계시다고…….”
“두 분?”
사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광운의 시선이 갑자기 빛을 발했다. 바로 죽영과 유화에 관한 얘기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런가? 상 성주께선 거기까지 마음을 쓰고 계시는가.”
광운은 망연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은 예기하고 있었지만, 막상 호윤천 부자가 역모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얘길 들으니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져 버렸다.
“성주께서는 또, 암습자를 보낸 것도 호가 부자의 소행이 아닌지 의심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광운 성주께서도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시고 유사시를 대비해 군사들을 동원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알겠소. 어쨌든 고생했으니 한 며칠 푹 쉬다 돌아가시오.”
“그럼 달리 전하실 말씀은…….”
“당장은 없소이다. 그러니 우선은 좀 쉬도록…….”
“소장은 이대로 돌아갈까 합니다.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소장만이 한가로이 쉬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허어, 그런가. 그럼 머물렀다 가라고 할 수도 없구려. 상 성주도 부디 몸조심하시라고… 또 이쪽에서 전할 얘기가 있으면 사자를 보내겠소.”
“그럼 소장은 이만.”
“수고했소. 조심해서 돌아가시오.”
사자가 물러가자 광운은 생각에 잠겼다. 죽영과 유화의 일도 걱정되지만, 무엇보다 편월이 마음에 걸렸다.
‘편월에게도 암습자들을 보냈을까?’
상림호의 예상대로 암습자를 보낸 게 호윤천 부자라면 편월도 안심할 수만은 없다.
문제는 현재 편월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마지막 소식을 접한 건 석축산에서 맹훈련 중이란 것이었다.
‘역시 사람을 보내야겠군.’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어설프게 서찰을 보내거나,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복을 하나 뽑아서 파견해야만 될 것 같았다.
생각이 결정되자 이미 광운의 뇌리엔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금 전에 진도수가 불렀던 방필이었다.
광운이 막 사람을 부르려 했을 때, 복도를 달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성주, 암습자들이 모두 자결을 했습니다. 숫자는 총 열 명!”
진도수였다. 생포하라는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당혹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광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리되리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참이었다.
“너무 염두에 두지 말게. 그리고 방필 장군을 다시 불러 주게.”
부드러운 어투로 진도수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광운은 곧장 방필을 찾았다.
광운의 지시를 받은 방필이 침사성을 빠져나간 건, 날이 채 밝기도 전이었다.
2
시린 달빛은 송용조 상단의 총본산이랄 수 있는 송가장에도 깊숙이 젖어 들고 있었다. 그만큼 지상에 드리워진 그늘도 짙었다.
문득 그 그림자 속에서 몇 명의 사람이 빠르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다들 검은색 야행복에, 어디 먼 길을 가는 듯 단단히 행장을 꾸린 모습들이었다.
“조심하십시오, 마님. 이미 이 집에도 감시자가 스며들어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 중 누군가가 뒤따르는 그림자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알았어요. 유화야, 조심해서 따라오너라.”
“예, 언니.”
그렇다. 그들은 죽영과 유화를 영욱성에서 빼내려는 송용조 측 사람이었다.
그들은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송가장인 걸 감안하면 다소 이상하다 싶지만, 호윤천은 벌써 여기에도 밀정들을 심어 두었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일행의 선두에 선 자는 대문에 이르러 협문을 살며시 밀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낮에 미리 경첩에다 기름을 듬뿍 발라 뒀기 때문이다.
그는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골목길의 이쪽저쪽을 유심히 살폈다.
실은 이건 필요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송가장 내부에까지 밀정을 심어 둔 자들이 골목길이라고 그냥 내버려 뒀을까. 다만 몸에 붙은 습관일 뿐이었다.
“제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십시오. 보이지는 않지만 감시자들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알았어요.”
“너희들도 단단히 조심해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두 분을 오늘 밤 중으로 이 성에서 빠져나가시도록 해야 된다는 것도 명심하고.”
“예.”
죽영과 유화의 뒤를 따르던 네 명의 사내들이 다부지게 대답했다. 하나같이 눈빛이 날카로운 걸 보니 예사 사람들은 아닌 듯했다.
실제로 이들은 송용조 상단에 딸린 무장 세력으로, 일신에 출중한 무예를 갖춘 건 물론, 실제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자들도 허다했다.
그중에서 가려 뽑은 다섯 명이었으니, 숫자가 적다고 만만히 덤비다가는 상대가 누구든 낭패를 면치 못할 터였다.
“자, 그럼!”
그들의 인솔자인 듯한 사내가 짤막하게 내뱉고는 재빨리 대문 밖으로 나갔다. 죽영과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나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골목에도 빛과 어둠은 극명하게 교차되고 있었다.
거기서 일행은 조금 거리를 두었다. 선두에 두 명이 먼저 나서고, 나머지는 그들의 신호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가지 못했다.
예상했던 대로 양쪽 골목 끝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포위해 버린 것이다. 평복을 하고 있으나 한눈에 병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은 말도 하지 않았다. 불문곡직, 대뜸 수중에 든 밧줄로 죽영 일행을 포박하려고 덤벼들었다.
바로 그게 병사들의 실수였다. 죽영과 유화의 호위자들은 모두가 출중한 무예를 갖춘 자들이었다. 쉬이 당할 턱이 없었다.
“사정 둘 것 없다. 저들 역시 불의의 병사들, 막는 자는 죽이고 길을 터라!”
인솔자의 한마디에 호위자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두 손을 떨쳤다.
“허억!”
“큭!”
억눌린 비명을 토하며 병사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그들의 몸에 각기 한 자루씩의 비도가 꽂혀 달빛을 튕겨 내고 있었다.
“앗, 놈들이 저항한다! 쳐라, 쳐!”
지휘관인 듯한 자 역시 목소리를 높였다. 송가장을 빠져나가는 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말라는 명을 받은 터라, 의외의 반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땐 벌써 양쪽에서 좁혀 들어간 포위망 중 한 곳이 허물어져 버렸다.
호위자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일단 뚫린 포위망으로 파고든다 싶자, 사정없이 병기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맑은 달빛은 비명과 핏물로 젖어 들었다. 앞을 막아섰던 병사들의 것이었다.
“자, 빨리!”
전방의 병사들을 쓰러뜨린 일행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죽영과 유화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쫓아라! 절대로 놓치지 마라!”
삐이잇, 삐잇!
한순간 밤의 정적은 사람들의 외침과 호각 소리로 찢겨 나가 버렸고, 골목에 면한 집들에선 하나 둘 황급히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물론 밖의 소란 탓이었다.
그게 죽영 일행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이 일을 은밀히 진행하려고 할 때가 좋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온다면 아무래도 무사하게 빠져나갈 확률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렇다면 우선은 최대한 빨리 달려야만 한다. 성문을 통과할 때야 어쩔 수 없이 충돌해야겠지만, 그 전까지만이라도 다른 제지는 받기 싫었다.
하지만 그건 호위자들의 바람에 불과했다. 송가장은 성내에서 상가로 구획 지어진 곳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남문으로 통하는 대로로 접어들자마자 일단의 병사들이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송가장에서 나온 자들이다! 절대로 놓치지 마라!”
뒤에서 추적해 온 지휘관이 앞을 막아선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로선 같은 편의 출현이 반가웠을 터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새로 호위자들을 막아선 병사들이 뒤에 쫓아오는 자들에게 화살을 발사한 것이다.
“우린 효명성주께서 보낸 사람들이오. 우리를 따라오시오.”
“아!”
누구보다 먼저 죽영의 입에서 탄성이 토해졌다. 효명성주 상림호에 대해선 광운을 통해 귀가 따갑게 들었다. 위기인 줄 알았던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되니, 오히려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언니, 힘내세요.”
휘청거리는 죽영을 유화가 재빨리 부축했다.
“괜찮아. 넌 어떠니?”
“저도 괜찮아요, 언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놈들의 지원병이 오기 전에 속히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하오.”
효명성에서 온 병사들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죽영과 유화를 채근했다. 깨닫고 보니 뒤를 추적해 왔던 자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그래요. 서둘러요.”
“잠깐!”
효명성 병사들을 따라가려는 죽영을 호위자들의 인솔자가 제지했다.
“말로만으론 당신들의 신분을 믿을 수 없소이다. 그러니 보다 명확한 증거를 보여 주시오.”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말이었다. 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믿기엔 작금의 세태가 너무 험악했다.
“시간이 없어 성문을 빠져나간 뒤 보여 드리려 했지만… 여기 상 성주께서 죽영루의 주인마님께 쓴 편지가 있소이다. 읽어 보시오.”
효명성에서 온 자는 품속을 뒤져 한 통의 서찰을 꺼내 죽영에게 건네주었다.
“지금쯤이면 아군이 성문을 장악하고 있을 거요. 서둘러 주시오.”
아무리 달이 밝다고 해도 그 빛에만 의지해 서찰을 읽을 수는 없다.
게다가 서찰의 말미에 수결手決이 되어 있긴 했지만, 그게 상림호의 것이 확실한지 알 길이 없었다.
삐이잇, 삐이이이-!
이제 사방에서 연방 들려오기 시작한 호각 소리가 죽영의 결심을 재촉했다. 더 지체했다가는 다시 파양주 영욱성의 병사들에게 포위를 당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지금쯤 성문에서도 효명성의 병사들이 싸우고 있을 거라고 했다. 이쯤 되면 뒤야 어떻게 되든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다.
“앞장서세요. 얼른 가도록 해요.”
결국 죽영은 효명성에서 온 병사들의 뒤를 따라 다시 달렸다. 그 전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돌아본 건, 자신들 때문에 애꿎은 생명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죄책감 탓이었다.
그 후로 일행은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남문에 이를 수 있었다.
“벽산碧山!”
“청해靑海!”
이미 효명성의 병사들은 남문을 장악한 모양이었다. 일행이 접근하자 누군가 수하를 해 왔고, 즉각 이쪽에서 답이 나갔다.
“오 장군이시오? 모셔야 될 분들은?”
“다들 무사하시네. 그보다 문은?”
“협문은 확보해 뒀습니다. 서둘러 나가시면…….”
“저기 있다! 놈들을 쳐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문을 확보했다는 자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렸다. 확인할 것도 없이 영욱성의 병사들이었다.
“오 장군은 어서 그분들을 모시고 성을 빠져나가시오. 여긴 우리가 맡겠소.”
“부탁하겠소.”
두 사람의 대화는 짧았다. 어쩌면 미리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서로의 행동을 계획해 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오 장군이라 불린 사람을 필두로 일행은 영욱성의 남문을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안전해졌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성 밖에서도 여기저기 늘어서 있는 민가의 곳곳에 병사들이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죽영 일행의 숫자가 약 쉰 명 정도로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모두들 무예도 출중했다. 어지간한 영욱성의 병사들은 그 앞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긴 전쟁으로 치자면 적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이편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할 수밖에 없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포위망을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오! 이제 곧 본 상단의 비밀 지점이오. 거기엔 송 대인께서 모종의 준비를 해 두셨을 거요.”
“바로 그게 문제요. 어떤 준비를 해 두셨는지 몰라도 이러다간 거기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오.”
“우린 어떻게 되어도 두 분만은 반드시 막주의 광운 장군께 보내 드려야만 하오.”
“소장의 생각도 같소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어렵소.”
“흐음!”
오 장군의 회의적인 말에 송가장에서 죽영과 유화를 호위해 왔던 자는 침음성을 토했다. 뭔가 할 말이 있지만, 차마 표현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뭔가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 소장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따르겠소이다.”
그 점을 민감하게 눈치 챈 오 장군이 다그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그만큼 사태는 긴박했다.
어쩌면 지금쯤 영욱성의 남문에 남겨 두고 온 효명성 병사들은 모두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본격적인 추격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일행의 발길은 곳곳에 매복하고 있는 자들에게 번번이 막히고 있다. 이러다간 전멸을 면치 못할 것만 같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이 길의 끝에 있소. 그러니…….”
“알겠소. 그러니까 우리더러 여기 남아 미끼 역할을 하라는 거겠지. 그리하리다. 저 두 분만 무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목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오.”
호위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 장군은 시원스레 말한 뒤,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더 이상 사양할 것 없다! 마음껏 공격하고, 마음껏 소란을 피워 놈들의 이목을 우리에게 집중시켜라!”
미끼 역할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성 밖에 매복하고 있는 자들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게 뻔할 터, 이편에서 소란을 크게 피우면 그들의 시선을 충분히 잡아 둘 수 있을 터였다.
“와아아-!”
“쳐라! 더 이상 움츠러들 것 없다!”
애당초 송가장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효명성의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본격적으로 매복자들에게 덤벼들었다.
“마님, 이쪽으로! 서두릅시다.”
삽시간에 시가전 형태를 띤 난전이 벌어진 걸 뒤로하고 호위자들은 죽영과 유화를 마구 밀고 끌며 달렸다.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았다. 더 이상 별다른 제지 없이 그들은 얼핏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 안은 밖에서는 보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화려하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로 넘쳐 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눈에 띄게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아니었다. 족히 백여 명은 될 듯한 인원들이 이 어둠, 저 그늘 속에 은신한 채 신중히 움직였다.
개중에는 몇 명의 여자들도 눈에 띄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도 세 대나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걸음이 느린 죽영과 유화를 위한 배려인 듯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듯, 호위자들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자, 타십시오!”
그들은 마차 한 대에 죽영과 유화를 태웠다. 나머지 두 대에도 다른 여자들이 올라탔다.
“자, 출발!”
인솔자의 명에 따라 다른 마차가 한 대 출발했고, 이어 죽영과 유화가 탄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이건 일종의 교란책이다. 너무도 흔해 빠진 만큼 그만한 효과도 담보된 방법이었다.
“혹시 마차를 몰아 보신 적 있소이까?”
어자석으로 통하는 창을 열며 인솔자가 물었다. 만약 자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여자 둘만은 무사히 파양주를 벗어나게 한다는 생각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죽영과 유화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의 몸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녀들은 큰 잘못이나 저지른 것 같은 눈빛이 되었다.
인솔자도 어떤 기대를 가지고 물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그대로 창을 닫았다.
세 대의 마차를 이용한 교란책이 먹혔을까? 아니면 뒤에 남겨진 효명성 병사들이 잘 싸워 준 까닭일까?
어쨌든 죽영과 유화가 탄 마차는 더 이상의 방해 없이 영욱성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모든 게 끝난 건 결코 아니었다. 효명성까지는 몇 개의 관문과 성이 남아 있다. 그걸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 * *
도연각은 기어이 노기를 터뜨리며 소우종의 진막을 벗어나고 말았다.
“삼만 오천이나 되는 대군이…….”
거칠게 내뱉던 도연각은 흠칫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의 귀를 의식한 탓이었다.
이래서 장수 된 자의 언행은 어렵다.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곧바로 전군의 사기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기실 도연각이 분통을 터뜨린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하다 만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만 오천이나 되는 대군이 고작 육천이 될까 말까 한 정허군을 상대로 싸움을 너무 오래 끈다는 것이었다.
지금이 벌써 구월 구 일 중양절, 그사이 대인성에 비축해 뒀던 양곡과 물자는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렇다고 지원군을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쯤 허주에 있는 곳곳의 성에서 조달한 군량과 물자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전쟁이라고는 개뿔도 모르는 놈들…….’
소우종의 진막을 돌아보며 도연각은 내심 욕을 퍼부었다. 만약 자신에게 전군의 지휘권이 있다면 보름 안에 대인성을 떨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오천의 허주군만으론 그게 어렵기에, 도연각은 수원지를 장악하자고 했다. 적들도 그렇게 대인성을 점령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연합군의 대장군인 소우종의 생각은 달랐다. 대군을 이끌고 온 만큼,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겨야 한다고 했다. 식수를 끊는 건 최후의 수단이라는 말이었다.
‘이건 혹시나 싸움을 오래 끌려는 수작이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크든 작든 병사들이 동원된 싸움에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호시탐탐 허주를 노리던 가겸후가 선뜻 삼만에 달하는 원군을 보내 준 것이 허주가 비축한 국력을 축내는 데 목적이 있는 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도연각은 갑자기 조급해졌다. 만약 이 상태의 대치가 두 달만 더 지속된다면 전 허주에 비축되어 있는 군량과 물자는 바닥을 드러내고 말 터였다. 바로 그때에 가겸후는 마각을 드러낼 것이다.
아니, 딱히 가겸후가 아니더라도 남쪽의 증두신은 물론, 지금은 주인이 없다고 할 수 있는 파양주도 허주를 넘볼 게 뻔하다.
‘속히 주공께 파발을 보내야 한다.’
조환이라고 해서 아주 바보는 아니다.
자신이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면 모종의 조치를 취할 게 분명하다.
도연각은 빠른 걸음으로 자기 진영으로 걷기 시작했다.
도연각의 심정이야 어떻든 소우종의 생각은 확고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겸후의 명령이 명료했다.
‘적어도 올해를 넘길 때까진 이 싸움을 끌어야 한다.’
바로 이게 가겸후가 소우종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그 저의에 대해서 소우종은 애써 생각지 않았다. 짐작이야 없지 않았지만, 그걸 입 밖에 낼 만큼 어리석은 성품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소우종에게 문제가 되는 건 무장으로서의 체면이었다. 자신의 짐작이 맞는다면 가겸후는 머지않아 허주를 칠 것이다.
‘조환이나 도연각에게 미안하다.’
어디까지나 원군으로 파견된 소우종이다. 비록 모시는 주군의 명령이라지만 그걸 손바닥 뒤집듯 해서 허주를 쳐야 한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환과 도연각에겐 무장으로서 미안한 노릇이다.
‘최악의 경우, 이 목숨으로 사죄한다.’
율천국의 무장으로서 주군인 가겸후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소우종의 결심은 허주를 병탄한 후 조환과 도연각의 처분에 관한 것이었다. 만약 그 둘을 죽인다면 자신도 자결을 하겠다는 뜻이다.
“어찌하오리까? 다시 목책을 세우오리까?”
부하 중 누군가가 큰 소리로 묻는 바람에 소우종은 흠칫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 뭐라고 했느냐?”
“적이 또 불사른 목책을 다시 세울 거냐고 물었소이다.”
“그렇다. 내일부터 당장 시작하라.”
“명이시라면 따르겠소이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 싶소이다. 힘들여 쌓아 놓으면 적들이 나와 불살라 버리니…….”
“바로 그게 우리의 위력을 보여 주는 거다. 아무리 불살라도 끄떡없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적의 사기는 저하되게 마련이야. 그러니 아무 말 말고 명령을 시행하라!”
“존명…….”
말을 했던 부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복명하고 밖으로 나갔다.
‘따지고 보면 재미있는 싸움이기도 한데…….’
지금 소우종은 정허군의 대장군인 편월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나이에 이만큼 잘 싸운다는 게 사뭇 경이롭기까지 했다.
물론 싸울 때 모든 작전을 그 어린 편월 혼자서 세우고 실행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측근에 병법에 능한 자가 한둘은 있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편월은 너무 잘 싸웠다. 장기전을 펴라는 가겸후의 명이 없었다면, 사활을 걸고 승부를 결해 보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게 무장의 욕심이란 걸 잘 알기에 소우종은 마음을 접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엔 적이 어떤 작전으로 나올까?’
요즘 소우종을 즐겁게 하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날 밤이 늦도록 소우종의 진막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3
그날은 올해 들어 첫서리가 내렸다. 새벽에 성 밖으로 치고 나가 적의 목책을 불태우고 돌아왔을 때에도, 땅 위의 서리는 채 녹지 않고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군의 피해는?”
그을음과 땀 그리고 온몸에 스며든 연기 냄새를 풀풀 풍기며 편월은 맹아에게 물었다.
“전사자는 없고, 경상을 입은 자가 이삼십 명 정도 됩니다.”
수건을 건네주며 맹아가 대답했다. 편월의 전신을 흠뻑 적신 땀을 닦으라는 의미였다.
수건을 받아 든 편월은, 그러나 금방 땀을 닦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묘한 싸움이다.’
확실히 이건 지금까지 편월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싸움이다.
처음 허주군과 대인성에서 맞부딪친 게 지난 유월 말. 그사이 율천국의 원군이 파견되었고, 그러고도 싸움은 근 넉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지금은 벌써 시월도 깊어 서리가 내리고, 싸늘하게 식은 바람은 옷깃 속의 살갗에 오들오들한 소름을 돋게 만들고 있다.
‘적은 우릴 괴멸시킬 전력을 충분히 갖추고도 싸움을 지연시키고 있다. 설마 우리 모두를 굶겨 죽일 작정은 아닐 테고…….’
물론 농성하는 적병들을 굶겨서 항복받는 것도 하나의 전략일 수 있다. 게다가 정허군은 지금 서서히 식량 부족을 겪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공격군도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다른 걸 떠나 식량만 해도 하루에 삼만 오천 명분이 드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적은 이편이 환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싸움을 지연시키고 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께름칙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는 편월이었다.
“대장군, 식사요!”
말과 함께 송지가 큼직한 주먹밥 하나를 내밀었다.
“병사들은?”
편월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서서히 식량난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보다는 병사들의 끼니를 먼저 걱정하는 게 몸에 익어 버렸다.
“지금쯤 다들 먹고 있을 거요. 그러니 염려 말고 드시오.”
“식량은 얼마나 남았소?”
이어진 편월의 질문에 송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많이 남아도 불과 며칠분밖에 없다는 무언의 답변이었다.
편월은 말없이 송지의 손에 들린 주먹밥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도 아마 하루에 두 번밖에는 배식되지 않을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전투를 생각해 보면, 병사들의 굶주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 드시오.”
송지가 다시 한 번 권했을 때, 편월은 흠칫 놀라며 그제야 맹아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훔쳤다.
갑작스레 선뜻한 한기가 느껴졌다. 새벽 공격 시에 흘린 땀이 식으면서 실제 이상의 추위를 몰고 온 것이다.
그 후에야 편월은 조심스레 주먹밥을 받아 들었다. 받을 때마다 한층 더 무겁다고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모자라는 군량과, 거기에 한 가닥 목숨 줄을 부여잡고 있는 부하 병졸들의 허기진 배를 상기한 탓이었다.
“염려 마시오.”
고개를 돌리고 있던 송지가 불쑥 내던지듯 한마디 했다.
“웅? 뭐, 뭘?”
이제 막 주먹밥을 크게 한 입 베어 문 편월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말투로 물었다.
“병사들의 사기 말이오. 비록 배불리 먹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왕성한 사기를 과시하고 있소이다.”
“그래? 송 군감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그야 뻔한 일! 우리 정허군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소.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니, 병사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용맹을 떨치고 있는 거요.”
말과 함께 송지는 편월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흠칫 떨며 눈빛을 긴장시켰다.
이 말을 하면 편월이 기뻐하리라고 송지는 생각했다. 어느 대장군이 부족한 식량 속에서도 병사들의 사기가 왕성하다는 말을 듣고 싫어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편월의 얼굴은 그 반대였다. 표정은 무섭게 굳어졌고, 눈빛은 슬퍼 보일 정도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내가 무슨 못 할 말을 했나?’
순간적으로 송지는 자신이 했던 말을 돌이켜 봤을 정도였다.
실제로 지금 편월의 가슴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식량이 부족한 병사들의 왕성한 사기는 그 끝이 종종 두 가지 경우로 나타난다. 크게 이기든가, 아니면 전멸을 당하든가.
현재 정허군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후자일 공산이 크다. 그동안의 사상자를 빼면 간신히 육천 정도 병력으로는,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삼만 오천이나 되는 적에게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편월은 한 입 베어 문 주먹밥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병사들의 왕성한 사기를 계속해서 살리자면 어떻게든 식량을 조달해야만 한다.
“송 군감, 방법이 없을까? 병사들을 굶기지 않을 방법…….”
편월의 목소리는 낮았고, 그 끝도 확실히 매듭짓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긴 왜 없겠소.”
“뭐? 그럼 있단 말이오? 대체 어떤 방법이오?”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송지의 대답에 편월은 다급하게 재우쳐 물었다.
“전군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성 밖으로 치고 나가 적의 보급대를 치는 거요. 전멸당할 공산이 크겠지만, 어차피 이대로 있어도 굶어 죽긴 마찬가지니 한번 시도해 봄 직하지 않소?”
송지의 말은 약간 꼬여 있었다.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묻는 편월에 대한 세찬 야유였다.
편월의 표정이 보다 무겁게 가라앉았다. 최악의 경우 적중 돌파를 감행해야겠지만, 전멸을 각오한 그러한 작전은 대장군으로서 신중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당장 배가 고프다고 해서 무턱대고 감행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염려 마시오.”
편월의 표정이 안됐다 싶었는지 송지는 위로의 말도 덧붙였다.
“우리 군사들은 대부분 잡가군이오. 한 번씩은 흙을 퍼먹으며 싸웠던 경험들이 있을 테니, 군량이 떨어졌다고 해서 당장 옥쇄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설치진 않을 거요.”
“흙을 먹는다고?”
“물론 아무 흙이나 먹는다는 건 아니오. 하지만 흙 중에서도 먹을 수 있는 게 있고, 다행히 이 성의 뒤편 절벽 아래엔 그 흙이 많이 있더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흙을 먹고 싸워?”
평생을 전장에서 뒹굴다시피 한 편월이지만, 흙을 먹고 싸워 본 경험은 전혀 없었다.
어쩌면 광운은 그런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어린 편월에게까지 결코 흙을 먹이지는 않았으리라.
“송 군감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우리가 적중 돌파를 감행해야…….”
“대장군, 수상한 자를 잡아 왔습니다!”
편월이 송지에게 뭔가 물으려고 했을 때 밖에서 커다랗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던 말을 꿀꺽 삼킨 편월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한 손에 먹다 만 주먹밥이 들려 있어 사뭇 어색했지만,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수상한 자라면 알아서 처리할 일이지, 어찌 대장군을 번거롭게 한단 말인가!”
편월을 대신해 송지가 커다랗게 호통을 쳤다. 성내에는 종종 적의 간인들이 섞여 들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일일이 대장군이 상대한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터였다.
“하오나 이자가 하도 요상한 소리를 해 대서 끌고 왔습니다!”
“적의 간인이라면 어떤 얘기를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다. 썩 데리고 물러가거라!”
“아니요. 송 군감, 그자를 데려오라고 하시오.”
부하들을 돌려보내려는 송지를 편월이 제지했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조금 전까지 뇌리를 맴돌던 우울한 생각들을 떨쳐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송지가 뭐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들의 대화가 밖에까지 들린 듯, 근위대원 두 사람이 오라에 묶인 한 사내를 끌고 들어왔다.
“무릎을 꿇어라! 정허군 대장군이시다!”
근위대원은 사내의 어깨를 창대로 쳐서 그 자리에 무릎 꿇렸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간인이 아니라 강국의 밀사요!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시오!”
“어허, 헛소리는 집어치우라는데도!”
사내의 말에 근위대원은 다시 한차례 세차게 창대를 휘둘렀다.
“그만.”
편월은 조용한 어조로 근위대원을 제지했다. 그러고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시선 역시 편월의 눈에 딱 달라붙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눈빛이었다.
‘호오!’
편월은 내심 탄성을 삼켰다. 전장에서 창칼로 맞서는 적과는 또 다른 기백을 사내의 눈에서 발견한 탓이었다.
‘이건 믿어도 되지 않을까?’
이 대인성에서 농성하는 동안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에서 파견한 간인들을 몇 명 상대했던 편월이다. 그들과는 사뭇 다른 사내의 태도와 눈빛에 신뢰감이 들었다.
“그대들은 물러가라! 맹 장군도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오. 주변에 사람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엄중히 감시를 하고.”
근위대원들은 물론 맹아까지 내보낸 후 편월은 재차 사내에게 입을 열었다.
“좋아. 강국의 밀사라고? 인정하지. 그런데 증두신은 무슨 일로 그대를 파견했나?”
“대장군!”
사내보다 송지가 먼저 언성을 높였다. 편월이 너무 쉽게 사내의 말에 빨려 들어간다 싶어서였다.
그러나 편월은 손으로 송지를 제지했다. 더 이상 끼어들지 말라는 강한 암시가 묻어 있었다.
“자, 말해 보라. 증두신은 무슨 목적으로 그대를 파견했는가?”
“정허군을 돕기 위해서요.”
재차 묻는 편월의 말에 사내는 튕기듯 대답했다. 눈에 불이라도 켜진 듯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를 돕는다고?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곤란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편월이 이처럼 능숙하게 사내를 대하고 있는 것도, 그동안 몇 차례 적의 간인을 다뤄 봤던 경험 탓이었다.
“우선 정허군은 지금 당장 군량의 부족을 겪고 있소. 그런데 싸우면 이기기만 하는 병사들은 대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무거운 부담일 거요. 그리고 그 이긴 것도 따지고 보면…….”
사내는 여기서 잠시 말을 맺었다. 차마 하기 곤란한 얘기인 듯 그때까지 편월의 눈에 달라붙어 있던 시선도 약간 돌려졌다.
“율천국의 원군이 승부를 미루고 있기 때문이었소.”
사내의 말에 편월은 곧바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니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닥쳐라! 우리 정허군의 용맹을 무시하는 그따위 말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는가? 당장 이놈을 끌어내 목을 쳐라!”
편월의 당황을 눈치 챈 송지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로선 이 문답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방금 사내의 말 한마디를 기화奇貨로 자리를 수습하려고 했다.
“아니, 이건 좀 더 들어 둘 필요가 있을 듯하군. 그럼 그대는 왜 율천국의 원군이 이 싸움을 지연시킨다고 생각하는가?”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우리 주군의 생각이시오.”
“증두신이? 그가 어떻게 이곳의 전황을 안단 말인가?”
“정허군이 윤주를 출발한 그 순간부터 우리 주군은 주의를 기울이셨소. 이 싸움의 전황에 대해서도 매일 보고를 받고 계시는 중이오.”
“그가 왜 이 싸움에 관심을 둔단 말인가? 강국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만약 허주가 망한다면, 다음에 율천국의 창끝이 향할 곳은 바로 우리 강국이 될 것이오. 그렇게 본다면 이 싸움은 우리 강국과 전혀 무관하지도 않을 것이오.”
“허주가 망한다고? 그럼 율천국이 싸움을 오래 끄는 것도…….”
“말할 것도 없이 허주의 힘을 빼자는 수작! 늦어도 내년 봄이 되기 전에는 가겸후가 마각을 드러낼 것이라는 게 우리 주군의 생각이시오.”
사내의 말을 들은 편월은 송지를 돌아다보았다. 확실히 일리가 있다는 표정이었다.
송지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그 또한 편월보다 더 깊이 율천국의 지원군이 싸움을 오래 끄는 저의에 대해 고민을 거듭해 오던 참이었다.
“그럼 도대체 증두신은 어떻게 우릴 돕겠다는 건가?”
“말씀을 삼가 주시오! 우리 주공은 강국의 국왕이시오. 예의를 갖춰 주시오.”
편월이 연방 증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자 사내는 기어이 언성을 높였다. 어디까지나 주군의 체면을 구기지 않겠다는 당당한 태도였다.
“알았다, 알았어. 그래, 그대의 왕은 어떻게 우릴 돕겠다는 건가? 저 공격군의 포위망을 뚫고 군량이라도 보급해 주겠다고 하던가?”
“이미 우리의 이환 대장군께서 이만의 군사를 이끌고 이천강 주변에 집결하고 있소이다. 그러니 편월 대장군께선 적중 돌파를 감행하여 그들과 합류해서 우리나라로 들어가십시오.”
“뭐?”
너무나 뜻밖의 말인지라 편월과 송지는 입을 벌린 채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렇게 말해서는 대장군께서 의심을 하시는 게 당연하오. 하지만 염려 마시오. 우리 주군께서는 정허군을 맞기 위해 탄금성彈琴城을 비워 두셨소이다.”
말을 한 후 사내는 편월과 송지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처럼 험악한 전국난세에 성을 하나 비워 적이 될지도 모르는 군세를 불러들인다는 말은 누가 들어도 쉬이 납득하기 어려울 터였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시겠거든 부하 중 누구든 내게 딸려 주시오. 직접 이환 대장군을 뵙게 해 주겠소.”
“증두신이, 아니 강왕이 왜 우리에게 그런 친절을 베푸는가? 대체 무슨 이득이 있기에?”
“우선은 허주를 구하자는 게 그 목적이오. 허주가 망하면 우리 강국은 고스란히 율천국의 창끝에 노출되고 마니깐.”
“딴은……. 하지만 단지 그 이유로 강왕이 그처럼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소. 아시다시피 탄금성은 우리 강국과 허주 그리고 파양주의 경계 지점이오.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우리 주군은 거기에 정허군을 넣어 만에 하나 파양주나 허주의 침공이 있을 시 그들을 막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오.”
“뭐라고? 그럼 우리 정허군을 화살 막이로 쓰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걸 알고도 좋다고 끄떡거리며 갈 줄 알았는가?”
“잠깐, 송 군감!”
언성을 높이며 당장이라도 허리에 찬 칼을 뽑으려는 송지를 편월이 조용한 어조로 제지했다.
“저자의 말을 좀 더 들어 보기로 합시다.”
“더 들어 보실 게 뭐 있소. 우리를 이용하려는 증두신의 간계를 스스로 실토한…….”
“그러니 더욱 저자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일단 끝까지 들어나 봅시다.”
편월은 사내의 말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 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병사들이 안전할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분명히 우리 주공은 정허군을 화살 막이로 쓸 작정이시오. 하지만 그만한 보상은 충분히 제공할 예정이오. 우선 탄금성에 부속된 영지에서의 조세와 부역, 형벌을 면제해 주겠다고 하셨소. 이만하면 화살 막이가 된 보람이 있지 않겠소?”
사내의 그 말이 또 한 번 편월과 송지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탄금성을 정허군에 주는 것과 동시에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얘기였다. 정말이지 파격적인 제의가 아닐 수 없었다.
“솔직한 말로 지금 파양주는 진남후께서 횡사를 당하신 후 주인이 없는 상태요. 게다가 최근엔 병권을 장악한 호윤천 일가가 자신들과 뜻을 달리하는 무장들을 제거하고 있다고 들었소. 그렇게 되면 설사 정허군이 이 대인성에서 무사하게 된다고 해도 그 뒤를 장담하기 어렵소. 그런 상황에서 파양주의 원군을 기대하고 있다면, 일찌감치 꿈을 깨는 게 좋으실 거요.”
지독한 독설이었지만, 편월과 송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도 호윤천 부자에게 결코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탓이었다.
“우리 주군은 호윤천 일가도 경계하고 계시오. 만약 그가 헛된 생각을 품고 동쪽으로 군사를 낸다면, 그때 정허군과 허주가 그들의 예봉을 막는 방패가 될 거요. 바로 이게 우리 주군께서 정허군과 허주를 구하려는 의도요.”
사내는 이제야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꿇어앉은 채 가슴을 활짝 젖혔다.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는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적중 돌파를 감행하면, 강국의 이환 장군이 적의 배후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건가?”
“당연한 것을 입에 올려 무엇 하겠소. 약속만 된다면 정허군보다 먼저 우리 강국의 이만 대군이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 배후를 칠 것이오. 그때를 노려 정허군은 일제히 성 밖으로 밀고 나오시오.”
“지금까지는 좋아.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듣기로는 광운이 강왕의 아버지를 죽였다는데, 지금의 강왕은 그 원한을 잊어버린 건가?”
“우리 주군께서도 대장군과 광운의 관계에 대해선 소상히 알고 계시오. 하지만 선왕의 죽음은 전장에 나선 무장에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일! 우리 주군은 진즉부터 그 원한은 씻어 버리셨소.”
“알겠다. 여봐라! 이자를 데려가 쉬도록 해 줘라.”
“쉬기를 바라진 않소이다. 지금 이환 장군은 조금이라도 빨리 내가 가져갈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거요. 그러니 내게 사람을 딸려 주셔서, 내 말의 진위를 확인해 주기 바라오.”
“그 점은 생각해 둔 바가 있다. 그러니 물러가 우선 쉬고 있도록!”
편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맹아가 예의 근위대원 둘을 이끌고 진막 안으로 들어왔다.
사내는 곧 근위대원들에게 끌려 나갔다. 편히 쉬라고 했지만, 그에게 엄중한 감시가 붙는 건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대장군, 정말 저자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다 믿지는 않아. 그래서 누군가를 저자에게 딸려 보내야겠는데…….”
“소장을 보내 주십시오! 다른 사람으로서는 미덥지 못합니다.”
편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맹아가 가슴을 치며 소리를 높였다. 아무래도 밖에서 안의 대화를 모두 들은 것 같았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편월은 송지를 돌아보았다. 그의 의견을 묻는 눈빛이었다.
보일 듯 말 듯 송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사라고 주장했던 사내의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걸 파악하려면 장수 급 인물이 가는 게 좋다.
그리고 그 장수들 중에선 최일선에서 싸우지 않는 맹아가 가장 적격이었다.
“좋아, 맹 장군. 오늘 밤 우린 야습을 감행하겠소. 그때 저자랑 같이 슬쩍 빠져나가시오.”
“존명!”
허락이 떨어지자 맹아는 신바람이 난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날 밤 정허군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대대적인 야습을 감행했다.
겉으로는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 보급대를 노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강국의 밀사와 맹아를 빼돌리기 위한 거짓 공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