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간난籠城艱難
1
어쨌든 진위 여부는 확인해야 된다는 편월의 고집으로, 윤주에 파견했던 사자들은 정확하게 보름 만에 돌아왔다.
보낸 자들만 돌아온 게 아니었다. 송용조가 보냈다는 사람까지 함께였다.
그들의 보고로 인해 마용승의 죽음이 기정사실로 확인된 뒤, 편월은 따로 송용조가 보낸 사람을 불렀다. 누구보다 궁금한 죽영과 유화의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대장군을 뵈옵니다.”
이제 막 삼십 줄에 접어든 것 같은 사내는 편월 앞에 불려 오자 바닥에 그대로 납작 엎드렸다.
“편하게 앉으시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소.”
편월은 사내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의자를 권했다. 이 역시 달라진 점의 하나로, 예전 같았으면 다짜고짜 듣고 싶은 것부터 물었을 터였다.
“송 공은 잘 계시오?”
“제가 영욱성을 떠날 때까진 별 탈이 없으셨지만, 호 대장군 부자의 압력을 심하게 받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떠실지…….”
“혹시 죽영루라고 들어 봤소?”
“아, 듣다마다요! 안 그래도 주인께서 그 일로 대장군께만 따로 말씀드리라는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
“따로?”
“예. 서 군사와 의논해서 어떤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죽영루에 계시는 두 분은 안전하게 보호할 테니 너무 염려 마시라고, 이게 바로 주인께서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가슴을 누르고 있던 커다란 바윗돌 하나가 치워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들은 소문입니다만, 말씀 올려도 될는지요?”
사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보는 어디까지나 정확해야 된다는 걸 몸으로 체득한 언행이었다.
“소문? 그렇다면 확인한 건 아니란 얘기로군. 그래도 말해 보시오.”
“예. 제가 파양주를 막 벗어날 즈음에 영욱성 인근에 살던 농민들과 빈민들이 한꺼번에 집무창으로 모였다고 들었습니다.”
“집무창에 모였다면, 그들 모두가 군문에 들겠다고 했단 말이오?”
“아닙니다. 죽영루의 두 분이 곧 잡혀갈 거란 소문이 돌아서, 그분들을 구하고자 집무창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뭐? 농민과 빈민들이? 아니, 왜 그들이 두 사람을 구한단 말이오?”
“평소 죽영 아씨께서 베풀어 주신 마음을 잊지 못한 탓이겠지요. 그분은 해마다 재해를 만난 성 밖의 백성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그들이 집무창에 있는 죽영루를 에워싸고, 한 발짝도 비켜서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군사들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까지가 제가 들은 소문입니다.”
잠시 밝아졌던 편월의 가슴이, 사내의 이 말로 인해 다시 조금 흐려졌다. 서수와 송용조가 손을 쓴다면 안심해도 좋을 테지만, 농민과 빈민들로선 미덥지가 못했다. 여차하면 병사들은 창칼로 그들을 다스릴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그대로 묘한 감흥을 편월에게 던져 주었다. 이 난세에 가장 미약하고 비천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농민과 천민들이 다른 사람을 구하고자 한데 뭉쳐 병사들이 내민 창칼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 보라. 게다가 지금은 벼 이삭이 한창 무거워지는 계절이다. 겨울이 빠른 파양주는 벌써 추수가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참에 농민들은 생업까지 팽개치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걱정과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젖어 그 눈은 비둘기처럼 젖어 있으리라. 난세의 희생은 병사나 군주들만의 몫이 아니라, 이처럼 뜻하지 않은 곳에도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난세의 진정한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충을 잊고, 의를 저버리고, 절개 굽히기를 스스럼없이 해치우는 무장들은 오히려 살아남아 출세를 거듭한다.
오직 땅에 매인 농민이나 태어난 곳을 떠날 수 없는 빈민들만이 무장들의 모략과 배신이 낳은 전쟁이라는 피해를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없다.
“휴우…….”
편월은 긴 한숨을 토했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사내의 말에 의해 이 시대가 갖는 비극의 단면 하나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아직은 어리다지만 지나치게 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살아온 탓에, 이제야 자기 자신도 그 난세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무장이라는 자각이 든 탓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만 더 묻겠소. 막주의 침사성에 가 있는 광운 장군도 이 사실을 아시오?”
“예. 주인께서 그쪽에도 사람을 보냈습니다만, 무사히 당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여기까지 오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던지라…….”
“알겠소.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 돌아가도록 하시오.”
“그 점에 대해 긴히 청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청하고 싶은 것? 그래, 그게 뭐요?”
“저를 이대로 정허군에 배속시켜 주십시오. 대장군께 전갈만 드리고 나면 그 뒷일은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주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굳이 어지러운 파양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고… 이는 주인께서 저더러 정허군에 남아 미력한 힘이라도 보태라는 걸로 알아들었습니다.”
의외의 말에 편월은 사내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굵은 쌍꺼풀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몹시 낯익은, 어디선가 본 듯한 눈매였고 눈빛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 모용추!’
그랬다. 사내의 눈빛은 송용조의 뒤를 이은 모용추와 흡사했다.
“혹시 모용추 대인과는 어떤 연관이 있으시오?”
“바로 가형家兄입니다. 저는 모용기慕容基라고 합니다.”
“그렇군. 어쨌든 오늘 하루는 푹 쉬시오. 군에 배속되는 문제는 쉬면서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고.”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이건 일종의 축객령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더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모용기가 나가자 편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용승이 죽은 게 확실해진 이상, 여기서 농성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정허군이 전멸당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쯤에서 냉큼 성을 버리고 돌아가는 게 좋다.
그리고 편월에겐 반드시 돌아가야만 될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죽영과 유화, 그 두 사람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보호해 줘야 한다. 그걸 위해서라도 여기서 미적거릴 순 없다.
“맹아… 맹 장군! 각 장수들을 부르시오!”
무의식중에 이름을 부르던 편월은 급히 호칭을 고쳐 소리를 질렀다.
“역시 돌아가는 겁니까?”
“웃! 거기 있었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맹아의 목소리에 편월은 화들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모용기를 안내해 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장수들의 의견을 들어 보고 결정할 거요.”
“들어보나마나 반대할 겁니다.”
“뭐? 그걸 맹 장군이 어떻게 아시오?”
“잊으셨소? 우리가 잡가군이란 걸! 애당초 돌아갈 곳 따위는 없다는 얘기요.”
맹아의 어투가 조금 거칠어졌다. 지난 몇 개월 사이 편월이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을 잊은 것 같아 조금은 서운해서였다.
편월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생각해 보니 맹아의 말도 맞았다. 자신들을 고용했던 마용승이 죽었으니, 정허군 자체가 허공에 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몇 특별한 사연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면, 당장 이 자리에서 각자의 갈 길로 가겠다고 해도 말릴 재간이 없다.
“어쨌든 모두 불러오시오. 앞으로 정허군을 어떻게 해야 될지도 상의해 봐야 하니까.”
“만약 대장군이 돌아가시겠다면 나도 따르겠소. 내 아버지도 지금 영욱성에 계시니까.”
혼잣말처럼 나직이 내뱉으며, 맹아는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각 부대의 장수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였다. 상가웅의 얼굴도 보이는 걸 보면 담개가 특별히 데려온 모양이었다.
“알다시피 마 성주가 죽었소. 그래서 사후 대책을 논의하고자 불렀소.”
편월이 말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용승의 죽음을 확인하는 지난 보름 동안 온갖 경우의 일들을 염두에 두고 각자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누구도 선뜻 ‘이거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험험!”
담개가 헛기침을 토했다. 이럴 땐 아무래도 노장인 자신이 먼저 나서야 된다는 의무감 비슷한 걸 느낀 것 같았다.
“누가 뭐래도 지금은 비상시국이오. 비상시엔 그에 따른 대처도 달라져야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들의 결속이오. 그러니 각 부대의 장수들도 이 점을 명심하고 부하들을 통솔하는 게 중요하오.”
“옳은 말씀이오. 우리끼리의 결속만 철석같다면 여하한 어려움도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게요.”
담개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만의 의견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정허군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하는 문제가 남았는데, 내 생각은 이렇소. 무엇보다 빨리 이 대인성을 버리고…….”
“잠깐만, 송 장군!”
담개의 뒤를 이은 송지의 말을 편월이 가볍게 잘라 버렸다.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소. 바로 정허군 자체를 유지하느냐, 해체하느냐 하는 거요.”
“뭐라고? 정허군을 해체하다니? 대장군 머리가 어찌 되신 거 아니오?”
강숙이었다. 이런 자리에선 거의 입을 열지 않던 그가 정허군을 해체한다는 얘기엔 언성까지 높이며 나섰다.
그게 편월로선 조금 의외였다. 평소의 강숙은 정허군 체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해체에 찬성까지야 하지 않겠지만, 이처럼 격렬하게 반대할 줄을 몰랐다.
딱히 강숙만이 아니었다. 모인 장수들 중 몇몇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마디씩 술렁거렸다.
“다들 조용히 해 주시오! 왜 정허군을 해체할 생각을 하셨는지, 대장군의 말씀을 들어 보도록 합시다.”
송지가 약간 목소리를 높이고 나서야, 장내는 잠잠해졌다.
“알다시피 정허군은 잡가군이 주축이오. 그런데 마 성주가 죽어 버렸으니, 당장 급료도 지불할 수 없소. 그런 판에 계속 유지를 한다는 건 무리라고 보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시오?”
“그따위 급료는…….”
격렬하게 반론하던 강숙은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이야 어떻든, 부하들의 입장은 다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잠시 동안 누구도 말이 없었다. 잡가군은 돈에 목숨을 판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급료 없이 따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우리끼리 얘기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소. 각자의 부대로 돌아가 부하들의 의사를 물어본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게 좋겠소.”
“아무래도 그 수밖에 없을 듯하오.”
송지의 말에 두건득이 찬성하면서, 잡가군 지휘관들은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편월은 남아 있는 담개와 사문기에게 물었다. 그들은 각자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온 사람들이다. 잡가군과는 향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린 모두 광운 장군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오. 끝까지 대장군을 따르는 게 도리라고, 벌써 우리끼리 얘기를 끝냈소이다.”
“소, 소장도 끝까지 대장군과…….”
“가웅이는 돌아가!”
더듬거리며 따를 뜻을 밝히는 상가웅에게 편월은 다소 매몰차게 말했다. 앞으로의 상황이 불투명할 때이니만치, 짐이 될 소지가 있는 그를 떼어 놓고 싶었던 것이다.
“아,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가, 가친家親께…….”
“상 공자는 이 몸이 책임지겠소. 그러니 계속 같이하게 해 주시오!”
담개가 나서자, 편월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휴우…….’
편월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보면 상가웅 역시 이 시대가 낳은 기형아 중 한 명일 게다. 대대로 무명武名을 떨친 무가에 태어났지만, 성격이나 체질은 아주 동떨어져 적응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그에게도 이 난세는 지겨운 업業일 게 분명할 터였다.
“그보다 대장군, 우리가 이 성을 버리고 나간다면 적이 과연 우릴 무사히 보내 줄 것 같소?”
사문기가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조상 대대로 영위했던 땅을 한번 잃은 경험이 있는 그로선, 만사가 그리 쉽게 믿기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건 우리가 아니라 적들이 내놓은 조건이었소. 속일 이유가 없겠지.”
편월 대신 담개가 강한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지금껏 교섭의 사자들은 자신이 응대했으니, 그 점에 대해선 염려 말라는 투였다.
“우리 근위대원들은 모두 남기로 했소!”
맹아가 안으로 들어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얼굴 가득 자랑스러움이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편월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근위대원들이야 막주에서부터 삶과 죽음을 함께 나눴던 사람들이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떠나겠다고 했으면 오히려 서운했을 것이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각 부대의 장수들이 하나씩 진막으로 들어왔다. 맹아와는 달리 표정들이 밝지만은 않은 걸 보니 그들의 기대와 부하들의 반응이 엇갈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편월은 일부러 그들을 보지 않았다. 눈빛을 교환해 봐야 서로에게 미안한 감정만 전달될 게 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자, 각자 얘기해 보시오. 몇 명이 떠난다고 합디까?”
송지가 눈치 빠르게 나섰다. 총군감이라는 직책도 있으니, 그로선 남을 병사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해야 될 임무도 없지 않았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남을 자와 떠날 자의 숫자를 얘기했고, 송지는 종이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대장군, 대충 이렇소이다만…….”
송지가 적은 종이를 내밀었지만, 편월은 보지 않았다. 얼마만한 숫자가 어떤 이유로 떠나든, 그들 역시 한때나마 자신을 믿고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웃으며 보내 줘야 한다.
“두 장군, 보급품 중에 돈이 될 만한 게 있소?”
다소 엉뚱한 질문에, 두건득은 의아한 표정으로 편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 말뜻을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떠나는 사람에게 줄 전별금餞別金에 대한 얘기였던 것이다.
“약간의 금은과 동전이 있소이다. 그걸로 모자란다면 포목도 어느 정도 있으니, 그걸 나눠 줘도 될 거요.”
“그걸 떠나는 사람의 숫자에 맞게 나눠 두시오. 그리고 내일은 우리 쪽에서 사자를 파견해야 할 듯한데, 아무래도 담 장군이 수고를 해 주셔야겠소. 누구를 데리고 가시겠소?”
“혼자면 족하오. 아무리 사자의 신분이라지만, 이런 시기에 적지로 간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다른 장수들과 함께 갔다가 만일의 일이라도 당한다면, 이 담 모의 체면이 서지 않소. 혼자 가겠소!”
“저들도 우리 진영에 몇 차례 왔었지만, 무사히 돌려보내지 않았소? 혼자 가신다는 건 아무래도 너무 단출할 것 같으니, 같이 갈 사람을 뽑아…….”
“담 장군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게 전장의 인심이오. 그러니 다른 분은 그냥 계시고, 소장이 담 장군을 수행하겠소이다.”
말한 사람은 사문기였다. 볕에 그을린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눈만은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있는 듯했다.
“알겠소. 그럼 두 분이 수고해 주시오. 두 장군은 내일 타합이 되어 성을 빠져나가는 대로 전별금이 분담되도록 준비해 주시오.”
“존명!”
“그럼 오늘 저녁엔 술이라도 한잔하는 게 어떻겠소? 술이 없지는 않겠지?”
편월의 말에 다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한 번도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편월도 조금 전까진 이런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어리기에 술 맛도 몰랐고, 술을 찾는 그 기분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가겠다는 사람을 보내고 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자 가슴이 무거워지며 술 생각이 났던 것이다.
어쨌든 그날 대인성은 술 향기로 넘쳐 났다. 만취할 정도로 많은 술은 아니었지만,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마신다는 감회가 병사들을 취하게 만들었다.
2
교섭은 무참하게 깨졌다. 처음 담개가 연합군의 진영으로 갔을 때만 해도 녹을 듯한 태도로 반겨 주던 자들이, 성을 버리고 가는 정허군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말엔 인상을 돌변시키며 거절했다.
당연히 담개는 ‘왜?’라고 물었다. 지금까지의 교섭과는 너무나 다른 연합군의 태도가 이 노장을 당황케 했다.
연합군의 대답은 간단했다. 시한이 지났다, 라는 것이었다.
이를 수긍할 담개가 아닌지라 격렬한 설전이 벌어졌다. 연합군 측에서 제시한 기일은 보름이었다. 그동안 마용승의 죽음을 확인하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따졌다.
그때 연합군의 설찬은 능글맞은 얼굴로 대꾸했다. 마용승의 죽음 확인과 그 뒤의 거취를 정하기까지 보름이었다고, 벌써 하루가 지났으니 시한이 지났다는 것이다.
담개는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지난번 설찬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걸 편한 대로 해석한 건 분명 정허군의 실책이었다.
지금 담개는 편월의 진막 앞에서 어깨를 드러낸 채 꿇어앉아 있었다. 무장이 죄를 빌 때 취하는 방식의 하나인 석고대죄席藁待罪였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담개를 말렸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였고, 또 사실 그랬다. 그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 말을 들었던 다른 모든 장수들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담개는 막무가내였다. 대장군인 편월에 대한 속죄도 있지만, 떠나고자 했던 병사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포함된 석고대죄라 중지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 담개의 곁엔 아무도 없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병사들만 이 광경을 보고 있을 뿐, 장수들은 모두 편월에게 몰려갔다. 이걸 중지시킬 사람은 대장군인 그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편월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곁에 앉은 송지와 더불어 앞으로의 일에 대한 논의만 거듭할 뿐이었다.
“대장군, 뭐라고 한 말씀만 해 주시오. 담 장군은 그래도 우리 정허군의 상장군이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저토록… 에익!”
성미 급한 맹아가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얘기하다가, 기어이 탁자에 놓인 찻잔을 진막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그래도 편월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태연스레 송지와 농성에 대한 얘기를 거듭했다.
“수원지에 대한 방비는 이만하면 어느 정도 버틸 거 같고, 이 성의 가장 취약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시오?”
“그건 아무래도 정문일 것 같소이다. 우리가 이 대인성을 칠 때 엉망으로 부숴 버렸으니…….”
“송 장군!”
이번엔 서진청이 송지를 불렀다.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고 편월과 더불어 있는 그를 질타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어찌 그냥 두고만 보시오, 송 장군! 담 장군과 송 장군은 비슷한 연배가 아니오? 가을이라지만, 이 날씨에 저리 계시다간 건강이 상하실까 염려스럽소. 그러니 송 장군께서 대장군께 한 말씀 올려 주시오!”
서진청까지 나서자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는지 송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서 장군, 대장군께서 석고대죄를 하라고 명을 내리신 게 아니오. 저건 담 장군께서 스스로 행한 일, 그걸 조용히 지켜봐 드리는 게 그분의 뜻에 맞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뭐? 시키지 않았으니 뭘 해도 상관 않겠다? 그럼 대장군이고 뭐고 필요 없는 거 아니오? 시키지 않은 일을 해도 상관 않으면, 시키는 일 또한 할 필요 없는 거 아니겠소? 그래서는 앞으로 명령 체계가 서리라고 생각하시오?”
“닥쳐라, 지두룡!”
기어이 편월이 소리를 높여 방금 말했던 지두룡을 질책했다. 어떤 경우에도 명령 체계는 확실해야 한다. 그걸 부정하는 언행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좋소이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모두 담 장군을 따를 수밖에!”
이런 경우 강숙은 언제나 말만큼 행동도 빨랐다. 진막을 벗어나기도 전에 벌써 상갑옷을 벗어 던졌다.
그건 다른 장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모두들 강숙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편월의 진막 밖엔 때 아닌 진풍경이 벌어졌다. 송지를 제외한 장수들 전원이 담개의 석고대죄에 참가했으니,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둬도 괜찮겠소?”
장수들이 모두 나가자 편월이 송지에게 물었다. 근심 가득한 음색이었다.
“잘하고 계시오. 아마 담 장군도 이걸 예상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소.”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틀렸다면 장수들의 불만을 어떻게 다스려야겠소?”
“대장군은 벌써 잊으셨소? 막주에서 곽 장군이 우리 잡가군을 어떻게 결속시켰는지를? 그분은 우리들의 불만을 이용하셨소. 이번엔 우리가 그 방법을 쓸 차례요.”
“글쎄, 그걸 난 아직 잘 모르겠소.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해 주시오.”
“장수들은 아니지만, 우리 정허군의 부하 병사들은 분명히 둘로 나뉘어 있소. 남겠다고 한 자들과 떠나겠다고 한 자들로.”
“그것과 장수들의 불만이 무슨 상관 있소?”
“결과야 소장도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소이다. 다만 바로 얼마 전까지 모시던 장수가 석고대죄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다 같이 분노를 느끼겠지요. 일단 그 하나만으로도 합심이 되는 거니까. 그 뒤야 대장군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알겠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편월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깨어진 교섭 탓이라지만, 부하들의 불만에 기대어 단합을 도출해 내야 하니 말이다.
“너무 심려 마시오. 궁지에 몰린 병사들은 강해지는 법이오.”
“우리가 얼마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소?”
“병사들의 사기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단순히 물자의 문제라면, 식량과 식수는 석 달 치 정도 비축되어 있소. 이건 수원지를 적에게 빼앗겼을 경우에 해당되는 거요.”
“식량이야 그렇다 쳐도, 그 많은 물을 어떻게 비축할 수 있었소?”
“손재주가 있는 친구들이 더러 있더이다. 그들이 커다란 통을 만들었소. 백 명이 열흘을 버틸 정도의 물을 비축할 수 있을 만한 통으로 백 개를 만들었소. 게다가 동원할 수 있는 통이란 통엔 몽땅 물을 채웠소.”
“짧은 시간에 잘도 그런 일을 해냈군.”
편월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백 명분의 물통이 백 개라면 만 명이 열흘을 버틸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그건 평시의 쓰임에 대한 계산일 테니, 비상시국을 맞아 엄격하게 통제한다면 너끈히 석 달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정말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였군.”
“그래서 말이 있잖소. 일단 군문에 들어서면 못 하는 일, 안 되는 게 없다고 말이오.”
“어쨌든 오늘은 적의 공격이 없을 것 같군.”
“그럴 것 같소이다. 수원지 쪽도 잠잠하고. 이러다 한꺼번에 밀어닥치겠지만.”
“취약한 성문 쪽의 방비에 보다 치중하시오. 내일 새벽이면 놈들이 그쪽으로 개떼처럼 밀어닥칠 테니까.”
“알겠소이다. 그럼!”
간결하게 예를 갖춘 송지는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내 다시 안으로 들어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대장군, 밖으로 나와 보시오!”
안색까지 변한 송지를 보며, 편월은 얼른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아!”
밖에 펼쳐진 광경을 본 편월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담개와 장수들의 석고대죄를 구경하고 있던 병사들은 물론, 성루에서 적정을 감시하던 자들까지 대장군의 진막을 향해 꿇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건 장엄하다고도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동안의 사상자를 빼고도 육천이 넘는 정허군 전원이 한곳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건, 편월로 하여금 묘한 위압감에 젖게 만들었다.
하지만 편월은 아랫배에 단단히 힘을 넣었다. 바로 이게 송지가 말했던 단합이란 걸 깨달은 까닭에서였다. 지금부터는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도 얘기했다.
“그대들은 한마음으로 담 장군과 여러 장수들을 용서하길 바라는가?”
“우오오오오!”
편월의 질문에 병사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대답했다.
“알다시피 교섭은 결렬되었다! 적들은 교활하게 말의 함정으로 우리를 교란시켰다! 그러므로 떠나겠다고 했던 병사들도 잠시만 더 머물러 줘야겠다! 하지만 약속하마! 이 싸움이 끝나는 대로 반드시 원하는 곳으로 보내 주겠다!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하겠는가?”
“우오오오오!”
병사들은 재차 함성으로 대답했다.
“일어서시오, 담 장군! 그리고 유군을 이끌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문을 지켜 주시오!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 각자 맡은 곳으로 가서 임무를 수행하시오!”
“존명!”
담개는 복명했지만, 다른 장수들은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얼떨떨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장군의 명이 떨어졌소. 각자 맡은 부서로 갑시다.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잖소.”
“알겠소이다!”
“존명!”
담개의 말에 비로소 다른 장수들도 각기 대답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자, 다시 갑옷 끈을 여미고, 우리들을 보기 좋게 속인 놈들을 혼 좀 내 줄까?”
“사자로 왔던 설찬이란 놈의 목은 내 것이오! 그러니 다른 장군들은 양보하시기 바라오.”
장수들이 각기 분발하여 한마디씩 내뱉을 때, 시원스러운 파공성과 함께 한 대의 화살이 날아와 성루의 전각 기둥에 꽂혔다.
지금부터 공격하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시작됐다! 각자 맡은 자리로! 특히 선봉인 백월대는 최대한 오래 수원지를 확보해 두도록!”
확실히 적의 공격은 예상보다 빨랐지만, 그렇다고 당황할 편월이나 정허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숙이나 맹아 같은 이들은 벼르고 벼르던 기회가 왔다며 창을 쥔 손에 연방 침칠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부터는 눈 한번 돌리기 힘든 전투의 연속일 게다. 제각기 맡은 곳으로 달려가는 정허군의 모습은, 마치 돌팔매에 쫓긴 참새 떼처럼 부산스러웠다.
그리고 잠시 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쏘인 연합군의 화살이 선명한 가을 햇살을 차단하며 대인성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 * *
휘청!
의지와는 상관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죽영은 손으로 탁자를 짚고서야 간신히 진정시켰다.
벌써 며칠째인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꾸역꾸역 모여들어 이 집무창을 거의 메우다시피 한 농민과 빈민들에게 밥을 해 대기 시작한 게…….
처음에 죽영은 그들을 돌려보내고자 부단히 설득했다. 그녀 역시 작금의 파양주 사정이 어지럽고, 그게 자신들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그들까지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여든 사람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죽영과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안전해질 때까지 결코 한발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들의 호의가 순수하고 고맙게 느껴질수록, 죽영은 오히려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힘들 때 자신이 도왔다지만, 정작 그녀는 그들 중 어느 누구의 얼굴도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죽영이 그들에게 준 도움은 그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어쩌면 그 속에 자기만족이라는, 약간의 허영도 들어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목숨을 걸고 그 작은 도움에 대한 보답을 하려고 한다. 창칼을 겨눈 채 명령만 떨어지길 기다리는 병사들의 감시 속에서도, 오늘도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죽영은 감사를 넘은 괴로움에 몸이 떨렸다.
“언니, 괜찮아요? 안 되겠어요. 좀 쉬세요. 이건 제가 할게요.”
유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죽영을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하지만 죽영은 이내 다시 일어서 주방 쪽으로 가며 입을 열었다.
“쌀은 얼마나 남았지? 다른 음식들은?”
실제로 사람들이 모여든 지 채 닷새도 지나지 않아 죽영루의 음식들은 모두 동났다. 죽영과 죽영루에 살던 사람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패물들을 팔아 충당을 해도, 채 보름도 버티지 못했다.
죽영은 좌절했다. 자신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배조차 채워 주지 못한다는 절망이 그녀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하루 세 번 꼬박 나오던 죽영루의 주먹밥이나 만두가 하루에 두 번씩으로 줄고, 그나마 크기도 작아진 걸 알아챈 농민들은 교대로 집엘 다녀왔다. 올 때마다 각기 역량에 닿는 크기의 쌀부대나 다른 음식 재료들을 들고 왔다.
그게 또 한 번 죽영을 울렸다. 아니, 그녀를 보다 강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농민들은 어디에 이 많은 쌀과 곡식들을 비축해 두었을까? 일 년 내내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농사를 지어 봐야 세미로 절반은 날아가 버린다. 그 나머지도 언제 도적을 만나 강탈을 당할까, 혹은 물난리에, 화재에 날려 버리지 않을까 하고 전전긍긍하며 지켜 왔던 것이리라. 그걸 잘 알기에 그녀는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앞으로 사오일은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그보다 언니는 정말 좀 쉬셔야겠어요. 이러다가는 병사들에게 끌려가기 전에 먼저 쓰러지시겠어요.”
“난 괜찮단다, 유화야. 정작 쉬어야 하는 건 저 사람들인데, 저들은 오늘도 눈을 부릅뜨고 우릴 지켜 주고 계시잖니. 그런데 내가 편하게 쉴 수는 없지.”
말이 끝났을 때 죽영과 유화는 이미 후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죽영루의 후원은 진즉에 거대한 주방으로 변한 뒤였다. 최대한 밀착시켜 설치한 솥에서는 연방 밥이 퍼 담아지고, 만두가 쪄지고 있었다.
거기서도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부분 사지 중 하나가 없거나, 혹은 이목구비가 성치 않은 장애인들이었다. 바로 막주전에서 부상당해 더 이상은 전쟁에 참가할 수 없게 된 잡가군들이었다.
신체적 결함이 있으니 그들의 움직임은 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 느린 만큼 많이 움직이는 걸로 충당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죽영과 유화는 이미 수북하게 쌓여 있는 주먹밥과 만두를 부지런히 광주리에 담기 시작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모두 들으시오! 드디어 오늘 저녁을 기해 병사들이 이 죽영루로 난입한다는 소문이 있소!”
“와아앗!”
그 한마디가 불러온 반향은 컸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여든 사람들은 악이 받친 함성을 토해 냈던 것이다.
“조용히 하고 내 말 좀 들으시오! 우리가 이렇게 막고 있다지만, 병사들이 본격적으로 몰려오면 막을 수가 없소! 죽영 아씨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그러니 우리가 이대로 죽영 아씨를 모시고 여길 빠져나갑시다! 어떻소, 여러분?”
“좋소! 그렇게 합시다!”
“어서 죽영 아씨를 모셔라! 누구 가마 있는 사람 없소?”
선량한 군중만큼 선동에 잘 넘어가는 무리도 없을 게다. 불과 몇 마디 말로, 모여든 사람들은 앞으로 해야 될 일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건 사람들을 엉성하게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전령이 황급히 뛰었고, 나머지는 술렁거리는 군중을 창대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죽영루 주변은 온갖 형태의 비명으로 그들먹하게 들어찼다. 창대에 머리가 터진 사람, 창날에 찔려 창자를 비죽하게 드러내며 이미 죽어 가고 있는 사람…….
“자, 움직이시오, 여러분! 죽영 아씨는 이 몸이 책임지고 모시겠소!”
그 말에 따라 군중은 서서히 집무창 입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동하는 자가 누군지 알아볼 생각도 않고, 그저 이렇게 함으로써 죽영이 안전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신념만으로 그들은 발길을 옮겼다.
특히 빈민들의 희생은 처절한 것이었다. 농민들이야 집에 처자식이 있고 일궈야 할 논밭이라도 있지만, 당장 오늘 하루의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해야 될 빈민들에겐 아무것도 없다. 오직 죽영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병사들의 창 앞에 서슴없이 몸을 던졌다.
그 모든 걸 후원에서 듣고 있던 죽영의 낯빛이 핼쑥하니 핏기를 잃었다.
“가 봐야겠어. 선동하는 저 사람을 말려야 해! 이대로 두면 모인 사람들은 모두 죽어!”
주먹밥을 담은 광주리를 내려놓은 죽영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못 가십니다!”
서두르는 죽영의 발길을 막은 자는 언제부턴가 죽영루의 주방에 들어와 취사를 돕던 사내였다.
“밖에서 선동하는 자는 제 동료입니다. 우린 서 군사께서 보낸 사람, 두 분 아씨를 안전하게 모시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러니 저를 따르십시오.”
“그래요. 어서 그분을 따라가세요, 아씨!”
“얼른 가세요. 여긴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염려 마시고.”
주방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미리 귀띔을 받은 모양이었다. 한결같이 죽영과 유화에게 떠날 것을 종용했다.
“전 못 가요! 밖에선 이 비천한 몸을 살리고자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어찌 혼자 살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실례!”
죽영의 말을 자르며, 사내는 그녀의 명치를 주먹으로 가볍게 내질렀다.
“아!”
짧은 신음성과 함께 죽영은 혼절했고, 그녀를 받아 업은 사내는 유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화 아씨께도 똑같은 수단을 써야겠소?”
“아뇨. 전 제 발로 따라가겠어요.”
의외로 유화는 냉정한 얼굴로 사내에게 말했다. 입술까지 꼭 깨문 다부진 얼굴이었지만, 눈자위를 빨갛게 물들인 습기가 눈 속에서 크게 부풀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밖에선 아직도 군중들의 비명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화와 죽영은 이미 죽영루에 없었고, 주방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3
언제부턴가 정허군은 적에게 화살을 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적들이 쏜 화살을 수거해 그중 쓸 만한 것을 고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아무래도 놈들은 장기전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려.”
편월이 있는 성루로 올라오며, 담개가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열흘간에 걸친 연합군의 공격은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성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은 없었고, 그저 화살만 쏴 대는 게 고작이었다. 아니, 한 가지 더 있기는 했다. 지금 편월과 담개가 내려다보고 있는 곳에 그제부터 목책을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그제부터 시작했다지만, 그 높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든 사상자를 빼도 삼만이 넘는 대군이니, 일의 진척이 확실히 빨랐다.
“아무래도 이 성벽보다 높게 쌓을 것 같지 않소?”
“그거야 당연한 일. 그보다 병사들의 사기는 어떻소?”
“조금은 맥 풀려 하고 있소이다.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는데 적들의 공격이 너무 느슨하니까. 그리고 예사로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이 병사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소.”
“담 장군, 그게 무슨 말이오?”
“적의 공격이 느슨한 건 우릴 굶겨 죽이기 위해서다, 라는 소문이 은연중에 돌고 있는 것 같소이다.”
담개의 대답을 들으며, 편월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적들이 이처럼 소극적인 공격을 할 이유가 없었다.
“어떻소, 대장군? 이쯤에서 우리가 한번 쳐 나가는 건?”
“저 목책을 불 싸지르자는 말이오?”
“그렇소. 하는 일 없이 적이 쏜 화살 비나 쓸어 담아서는 사기가 오르지 않소이다.”
“그것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로군. 적보다 숫자가 적어서 유리한 건 기동력이니까. 그래도 아직은 이르오. 며칠 더 있다가 저 목책의 높이가 이 성벽만 해질 때 공격하도록 합시다.”
“허허허, 이제 대장군도 많이 교활해지셨소이다. 지금 불 질러 봐야 적의 수고가 적다는 뜻이겠지.”
편월은 그저 웃고 말았다. 담개가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이틀 공사해서 쌓은 건 이틀 만에 복구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왕 출격하는 위험을 감수할 거라면, 보다 높이 쌓았을 때 하는 게 좋다는 건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일이다.
“급보! 급보요!”
돌연 다급한 외침이 성 깊숙한 곳에서 들려왔다. 눈을 돌려 보니 전령기를 꽂은 아군 한 명이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곳은…….”
“보아하니 수원지를 뺏긴 것 같소이다. 각오했던 바이지만, 어쨌든 지금부터 힘겨운 싸움이 될 것 같소이다.”
비교적 담담하게 말하며, 담개가 먼저 성루를 달려 내려갔다.
“보고! 수원지를 지키던 백월대, 적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패주 중!”
보고를 마친 전령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쉬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온 탓에 호흡도 무척 거칠었다.
“누가 부축해 줘라! 그리고 청월대에 명해 비밀 통로 입구를 지키라고 해라! 백월대의 뒤를 쫓아 들어올 적병은 한 놈도 성에 들이지 말도록!”
명을 내려 놓고 편월은 담개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그 목책은 오늘 밤 태워 버려야겠소.”
“수원지를 다시 탈환하실 생각이오?”
편월의 말에 담개는 엉뚱한 질문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그게 정확했다. 겉으론 적의 목책을 공격하는 척하며, 실제적으론 수원지를 탈환하겠다는 게 편월의 생각이었다.
“딱히 탈환하지 않아도 괜찮소. 다만 그렇게 보여야 병사들의 동요가 적을 것이오.”
“호오!”
진정으로 감탄했다는 듯 담개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적은 일단 확보한 수원지를 결코 쉽게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무리하게 되찾으려 하다가는 이쪽의 피해만 키울 뿐 별 실익이 없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으면 아군의 사기가 말도 못 하게 떨어져 버린다. 가뜩이나 적이 정허군을 굶겨 죽일 작정을 하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는 판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편월은 그 점을 적절하게 이용하려는 모양이다. 잘만 된다면 목책도 태우고 수원지도 다시 확보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이고, 최악의 경우라도 병사들의 사기만은 저하시키지 않을 수 있다.
“목책을 불태우는 건 우리 유군이 맡고 싶소이다만…….”
편월의 생각을 읽었다 싶자, 담개는 단번에 얘기를 진척시켰다. 성공 여부에 상관없는 수원지 확보보다는, 아무래도 목책 공격이 어렵다. 그걸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편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담개에게 그 일을 명하려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기동력은 유군이 가장 우수하니까 보다 적은 희생으로 목책을 불태울 수 있을 터였다.
“수원지 탈환에 백월대는 꼭 끼워야 할 거고, 또 어느 부대를 동원하실 생각이오?”
“청월대가 좋을 것이오. 그들은 늘 뒤에서 보급에만 치중했었으니, 한 번쯤 전투를 맛보게 해 줘도 괜찮겠지.”
“그게 좋겠구려.”
“그보다 성문의 보강은 끝난 거요, 담 장군?”
“놈들이 공격의 손길을 늦춰 주는 바람에 비교적 손쉽게 끝냈소이다. 결코 전보다 약하지는 않을 것이오.”
“다른 문들은 어떻소?”
“그건 성문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그저 작은 통용문通用門에 불과하오. 적도 그쪽은 공격하지 않을 거요. 한다면 소규모 부대 정도일 텐데, 그 정도라면 성에 들어오자마자 전멸시킬 수 있소이다.”
“수고 많으셨소. 그럼 오늘 밤 공격에 대한 수배를 해 주시오.”
“존명!”
총총히 물러가는 담개를 보던 편월은 다시 걸음을 옮겨 성루에 올랐다.
‘저 목책은 내가 불 지르고 싶었는데.’
사실이었다. 그저께부터 오늘까지, 편월은 저 목책이 얼른 솟구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 성벽보다 훨씬 높아졌을 때 야습을 감행하여 불태워 버린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그런데 아무래도 그 희망은 버려야 할 것 같았다. 담개가 맡은 이상 자신을 끼워 줄 턱이 없으니까 말이다.
대신 수원지 공격엔 꼭 참가할 작정이었다. 백월대와 청월대에만 맡겨 두면 자칫 꼭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덤빌지도 모른다. 자신이 함께 가서 그걸 적절히 통제해 줘야만 한다.
성 안쪽, 즉 비밀 통로가 있는 곳이 소란스러워졌다. 백월대가 후퇴를 마쳤고,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적들을 청월대가 공격하고 있는 게 분명할 터였다.
‘마용승이 죽었다는 사실을 광운도 어떻게든 알았을 테고, 유화와 죽영은 어찌 되었을까?’
요즘 들어 한가해지면 편월을 괴롭히는 문제였다. 병사들을 두고 그녀들에게 달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 대신 인질로 잡혀 있다시피 한 그녀들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광운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사실 그동안 광운에게 밀사를 보내자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그라면 효명성주를 움직여 얼마간의 원군을 보내 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편월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제 와서 다시 광운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지난 몇 달간 대장군 노릇을 하면서 절실히 느낀 건, 남자는 어떤 경우라도 오직 자신의 두 발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무사히 적중 돌파를 할 수만 있다면 영욱성으로 가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제기랄, 졌소! 수원지를 뺏겼소이다!”
편월의 생각을 자르며 백월대장인 강숙이 성루로 올라와 투덜거렸다. 갑옷은 물론, 얼굴과 벗어 버린 투구 탓에 머리칼도 온통 피에 젖은 모습이다.
“수고했소. 우선 좀 쉬고, 이따 밤에 다시 탈환하러 갑시다.”
“뭐?”
강숙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반드시 한마디 질책이 있으리라 여기고 있던 탓이었다.
그러나 편월은 그뿐, 다시 점차 높이를 더해 가는 목책에 시선을 집중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아직 편월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어느새 대장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시대가,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럼 오늘 밤 중으로 다시 수원지를 탈환하러 갈 거란 말씀이오?”
“그렇소. 그러니 충분히 쉬어 두었다가, 밤에 제대로 힘을 발휘하시오.”
“존명!”
강숙은 그야말로 신이 나서 성루에서 달려 내려갔다.
‘응? 저건 뭐지?’
목책에서 적군이 밀집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편월의 눈동자가 그대로 고정되었다. 적의 후미에서 몇 개의 기치가 움직이는 걸 본 탓이었다.
‘출동하는 걸까?’
아니었다. 그건 출동이 아니라 합류하는 적의 몇몇 부대였다.
‘그렇다면 저건 수원지로 나갔던 적들이 분명한데, 벌써 합류한다는 건……?’
“전령! 지금 당장 물을 확인하라! 아무도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지속적으로 독이 들어 있지는 않은지 조사하도록!”
고함을 지른 것만으론 성이 차지 않아 편월은 자신이 직접 성루에서 달려 내려갔다. 전시에 적의 우물이나 수원지에 독을 푸는 건 흔한 일이었고, 애써 확보한 걸 적들이 그냥 두고 철수하지는 않았으리란 판단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편월의 염려는 기우에 그치고 말았다. 물은 여전히 풍족하게 솟아났고, 독을 푼 기미도 전혀 없었다.
‘이건 또 뭘 의미하는 걸까?’
편월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원지에 병사들이야 주둔시켰겠지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으려면 무엇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격을 감행했을까?
‘어쩌면…….’
적은 지금 장기전을 꾀하고 있다. 그 속내야 이쪽에선 알 수도 없고 알 바도 아니지만, 물이 없다면 싸움은 생각보다 일찍 끝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삼만이 넘는 대군이 몰려와서 활만 쏘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들도 병사들의 사기를 생각해 수원지를 공격한 건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목책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거 재미있게 될 거 같은데.’
편월은 싱긋이 웃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오늘 밤 중으로 수원지를 다시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보름에 가까운 달은 시리도록 밝았다. 낮과는 또 다른 음영을 지상에 그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을 보듬고 있었다.
푸드득!
돌연 밤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고, 화들짝 놀라 비킨 달빛과는 대조적으로 숲을 진동시키던 벌레 울음소리가 자른 듯 뚝 그쳤다.
동시에 편월의 손도 수평을 그리며 허공을 휘저었다. 모두 엎드리라는 신호였다. 새는 괜히 날지 않고, 벌레도 그냥 울음을 그치지는 않는다. 뭔가가 그들을 방해했다는 의미였고, 그건 사람일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적이다!’
그렇다 해도 이 얼마나 경박한 적이란 말인가. 놈들은 야간 행동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수칙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들과 싸워야 하는 정허군 입장에선 불평할 것도 아니었다. 막주의 밀림에서 밤 귀신이 되었던 경험이 있는 근위대원들에겐 이러나저러나 별 차이가 없지만 말이다.
편월의 손이 다시 허공을 누볐다. 새하얀 달빛을 몸에 두른 나비의 날갯짓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고운 손놀림이 낳은 결과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신호를 받은 근위대원 십여 명이 기척도 없이 움직인다 싶었을 때, 달빛은 혈 향으로 젖어 들고 말았다.
다시 숲은 정적을 되찾았다. 야조는 날개를 접었고, 풀벌레들은 제각기 삶을 영위하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근위대원들에게도 적용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달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 속을 헤엄치는 은어처럼 영활하게 움직였다.
물론 그 움직임의 마무리는 적의 죽음이었다. 막주의 수림 속에서 익은 근위대원들의 몸놀림은, 나무들이 하나 둘 잎사귀를 떨구기 시작하는 허주의 숲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렇다고 편월의 기분이 좋아진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보고, 청소 끝!”
가라앉은 편월의 기분엔 아랑곳없이, 맹아가 장난스럽게 보고를 했다.
“적은 모두 몇 명이었소?”
“대략 오백.”
“대략?”
“아직 근위대는 다 집결하지도 않았소. 모두 모여 봐야 정확하게 몇 놈을 죽였는지 알 거 아니겠소.”
“확실히 근처의 적은 모두 소탕했소?”
“적어도 이 맹아의 눈에 띄는 적은 없었소. 이쯤에서 백월대와 청월대를 부르는 게 어떻겠소?”
“아니, 아직이오!”
“아니, 왜 그러시오? 얼른 적의 시신들을 치우고, 이 근처에 방어 막을 구축해야…….”
“조용히! 예감이 이상해.”
편월의 말에 맹아는 뜨끔한 듯 입을 닫고 새삼스러운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맹아는 알고 있었다. 그것도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뼈에 새겨 둔 사실이었다. 싸움터에서 발휘되는 편월의 육감은 아침이면 해가 뜬다는 것만큼이나 정확하다는 것을 말이다.
“뭐요? 적이요?”
맹아가 극도로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곁에 있는 편월도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편월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부정하는 게 아니라,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움직이시오, 얼른.”
갑자기 맹아가 채근했다. 이제 좀 있으면 여기로 근위대원들이 모여들 터였다. 만약에 적이 있다면 그때를 노릴 공산이 크다. 그 전에 편월을 다른 곳으로 빼내려는 것이다.
“서둘지 마시오. 그보다 백월대와 청월대는?”
“비밀 통로의 입구에서 대기 중이오.”
“알았소. 조용히 정해진 위치로 이동시키도록.”
솔직히 이 수원지에서 얼른 철수하고 싶은 편월이었다. 그만큼 한번 시작된 불안감은 강하고 끈덕지게 눌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단독 작전이 아니다. 이제 조금 후면 담개의 유군이 성 밖으로 치고 나가 목책을 불태울 것이다.
그땐 여기서도 같이 싸워야 한다. 그래야 적들의 이목이 분산될 테니까 말이다. 이젠 싸울 일도 없어져 버렸지만, 불을 지르고 고함이라도 질러 줘야만 한다.
편월의 명에 따라 맹아는 마치 깃털처럼 가볍고 소리 없이 멀어져 갔다.
‘왜 이럴까? 이런 기분은 처음인데.’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 사방을 살펴봐도 적이 있다는 낌새는 어디에도 없다. 그 흔한 밤 짐승조차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안하다. 심장은 적장과 창을 맞댔을 때보다 더 빨리 뛰었고, 혈관 속의 피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라 잉잉거렸다.
다시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백월대와 청월대가 움직이고 있는 탓이었다.
“부대의 배치가 끝났소. 늦지 않아 다행이었소. 두 분 장수께서 기다리다 지쳐 잠들기 직전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맹아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근위대만으로 수원지를 다시 탈환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난 돌아가겠소, 맹 장군. 명심할 것은 이 수원지를 꼭 확보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요. 적이 몰려오거든 적당히 상대하면서 철수하시오.”
“대, 대장군…….”
어이가 없다는 듯 맹아는 나직이 내뱉었다. 싸움을 앞둔 편월이 이처럼 물러서는 건 처음 본 탓이었다.
그러나 편월은 못 들은 척하며 천천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까닭은 몰랐지만,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편월의 모습이 비밀 통로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대인성 쪽에서 갑작스러운 함성이 올랐다. 바야흐로 담개의 유군이 목책을 불태우기 위한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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