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세일상亂世日常 3 (29/66)

난세일상亂世日常 3

1

편월이 출격한 걸 성루에 있는 송지나 지두룡이 모를 턱이 없었다.

“대장군께서 밖으로 나가셨다! 황월대는 나를 따르라!”

“지 장군, 어딜 가려는 거요?”

북채를 던져 버리고 성루에 있는 병사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지두룡을 잡아채며, 송지가 매섭게 다그쳤다.

“보면 모르시오? 대장군께서 적중에 계시오! 구하지 않고 어떻게 하겠소!”

“안 돼!”

“안 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오! 대장군께 무슨 변고가 생기면 우리 정허군은 그길로 끝이오. 그걸 모르시겠소?”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우리 모두 달려 나가 봐라. 몽땅 전멸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차라리 여기서 적에게 계속 공격을 퍼붓는 게 대장군을 돕는 길이란 걸 모르겠나!”

“모르겠소! 아니, 안다고 해도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할 수는 없소!”

“정신 차려! 그렇게 대장군께 도움이 되고 싶다면, 당장 삼백 기를 이끌고 냉큼 대인성으로 철수해! 그럼 적은 그 뒤를 쫓겠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요컨대 송지의 말은 지두룡에게 철수하면서 미끼 노릇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비로소 지두룡의 가슴을 울린 모양이다. 다시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지금까지 아군의 피해는 약 이백 정도. 거기서 내가 삼백을 빼 가면 남은 병사는 고작해야 오백이오. 게다가 그 피해는 앞으로도 늘어날 게 뻔하고…….”

“염려 마라. 여기서 대장군을 위한 지원 공격을 하다가, 멋들어지게 철수해 보일 테니!”

호기롭게 얘기하는 송지의 눈을 지두룡은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자신이 있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두룡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소!”

“뭣이? 그럼 기어이 쳐 나가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송 군감과 함께 행동하겠다는 거요! 그게 대장군께 가장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으니…….”

“오, 깨달아 주었는가? 역시 지 장군일세!”

“자, 명을 내려 주시오. 그대로 따르겠소이다.”

“다른 명이 뭐 필요하겠나! 대장군이 움직이는 곳 주변의 적을 쓸어버리면 되지!”

“알겠소. 그럼!”

가볍게 예를 갖춘 후, 지두룡은 조금 전에 내팽개쳤던 북채를 다시 주워 들었다.

“공성 무기 따위는 내버려 둬라! 대신 대장군 주변으로 모든 공격을 집중하도록! 알겠나? 우리의 지원에 따라 대장군과 근위대의 목숨이 산다!”

둥둥둥둥-!

고함을 지르는 한편으론 북을 울리면서, 지두룡은 연방 병사들을 독려했다.

“와아!”

재차 둑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함성을 올리며, 병사들은 다시금 불화살의 비를 적군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편월이 있는 곳을 알아보지 못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가 가지고 나간 흑유를 적절히 이용해 불을 질렀기에, 그 근처는 훤하게 밝았던 것이다.

그래도 병사들의 공격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적의 투석이 연이어졌고, 무시하라고는 했지만 충차를 비롯한 다른 공성 무기에 대한 대비도 잊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정허군 황월대의 피해는 점차 커져만 갔다. 무엇보다 성루와 성벽을 곧바로 타격하는 적의 투석기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자기의 위치를 떠나는 자는 없었다. 지금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처절한 기백의 항전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이제 됐다! 대장군께서 맹 장군과 합류하셨다!”

돌연 송지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편월과 맹아가 서로 말 머리를 나란히 한 채 적진을 돌파하고 있는 모습을 본 탓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소?”

“지금부터는 철수해야지. 그게 대장군께 반드시 도움이 될 걸세.”

“그럼 송 군감이 먼저 부상병들을 이끌고 출발하시오. 내가 뒤를 끊으며, 한편으론 적들의 이목을 끌겠소.”

“그 몸으론 말을 탄다는 것 자체가 벌써 이상한 일! 그러니 후미는 아무래도 이 몸이 맡아야겠네.”

“그래도 쭈그렁 늙은이보다는 빨리 움직일 수 있소!”

“뭐야? 이래 봬도 한쪽 소매 펄럭거리는 팔 병신 같은 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언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격앙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도 서슴없이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을 한 겹만 벗겨 보면, 바로 이게 전장을 누비며 살아온 사나이들의 깊은 정이다. 만약 죽는 곳에 가라고 했다면 이들은 반대로 서로 자기가 가겠다고 우겼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살 가망성이 있는 걸 선택하라니 거친 언사까지 마구 해 대며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송 군감께 한 말씀 올리겠소.”

“뭐야? 허튼소릴 지껄이면 용서치 않겠다! 말해 봐!”

마흔이 갓 넘었을 것 같은 병사 중 한 명이 자기들의 언쟁에 끼어들자 송지는 신경질적으로 그 말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황월대에 소속된 병사들이오. 그러니 이 문제만큼은 우리 대장에게 맡겨 두시는 게 어떻겠소?”

“뭐?”

송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이 어떤 결정을 하든 움직이는 주체는 황월대다. 그러니 그 대장에게 자신들의 지휘를 맡기라는 논리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걸로 결정됐소!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나?”

송지가 잠시 말이 없는 틈을 타 지두룡은 서둘러 결정을 내려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피해 파악에 들어갔다.

“경상자를 포함해서 약 육백 명 정도요.”

“알겠다! 송 군감, 저들 중 이백 기를 이끌고 부상병을 대인성으로 호송해 주시오. 그사이 희생이 두 배로 늘었소. 더 이상 망설이다가는 우리 모두 생각 없는 놈이라고 욕을 먹을 것이오.”

이제 지두룡은 더 이상 철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부상병 호송으로 바꿔 그의 마음을 달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금차호琴次豪, 적진 돌파를 감행할 수 있는 병사 사백을 차출하라! 지금부터 적진으로 뛰어든다!”

“존명!”

송지에게 말을 했던 자의 이름이 금차호인 것 같았다. 지두룡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날쌘 토끼처럼 빠르게 성루를 뛰어다니며 병사 각 개인의 상태를 살폈다.

“내가 사백 기를 이끌고 먼저 적에게 진격하겠소. 그사이 송 군감은 부상병들과 함께 정해진 대로 움직여 대인성으로 가시오. 잘 부탁하오!”

“건투를…….”

빠르게 제 할 말만 하고 달려가 버리는 지두룡의 뒤에서, 송지는 짤막한 한마디밖에는 내뱉을 수가 없었다.

부대의 편성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따로 집결한 게 아니라 성루에서 여전히 공격을 퍼부으며, 송지를 따라갈 이백만이 천천히 움직여 지두룡을 따를 병사들과 조금씩 간격을 두었다. 그들 대부분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적과 맞붙어 싸우기엔 무리라고 판단된 자들이었다.

그사이 부상병의 선별도 이루어졌다. 죽은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방치되었지만, 살 가망성이 있는 백 명 정도는 각기 운송 수단에 태워졌다. 그래 봐야 말 등에 묶어 두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안타까운 건,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아날 가망성도 없다고 판단된 백이십여 명에 이르는 중상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기를 쓰고 성루에 달라붙어 활을 집어 들었다. 죽기 전까지 단 한 발의 화살이라도 적군에게 더 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걸 송지나 지두룡은 말리지 않았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들도 같은 행동을 했을 테니까.

“자, 출발이다!”

갑자기 지두룡이 서둘러 성루를 내려갔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중상자들 앞에서 자칫 눈물을 보일 것 같아서였다.

그 심정은 다른 모두에게도 통한 것 같았다. 지두룡을 따르기로 했던 병사들은 물론, 떠나갈 다른 자들까지 모두 빠르게 성루에서 모습을 감췄다.

꽈앙, 꽈아앙!

투석은 쉴 새 없이 성루를 두드렸고, 마침내 한 곳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 * *

“와아앗!”

비명에 가까운 아군의 외침이 들렸을 때, 도연각은 새삼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살아온 세월의 절반 이상을 전장에서 보내왔지만, 이런 전쟁은 처음이었다.

‘적을 너무 얕봤다!’

수치상 최대한으로 잡은 정허군의 병력은 일만이었다. 게다가 이 수령성에서 농성한 적병은 고작 일천에 불과했다. 물론 그 전에 몇 차례 매복 공격을 당했지만, 그건 모기에게 소 엉덩이를 깨물린 정도에 불과했다.

당연히 삼만 오천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온 것만으로도 적은 주눅이 들어 별다른 저항 없이 성을 내주거나 혹은 항복할 거라고 예상한 것도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적들도 이 좁은 수령성보다는, 보다 견고하고 너른 대인성에서 결전을 치르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일천에 불과한 적의 반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매서웠다. 그 귀한 흑유를 물 쓰듯 하면서 가한 화공으로,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삼천 이상의 병사가 죽거나 엄중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총병력의 일 할을 서전에서 잃고 말았다는 얘기다.

그 점에 있어 도연각은 솔직하게 적인 정허군의 장수에게 감탄하고 말았다.

‘적장이 어떻게 농성을 하는지 볼만하겠군. 또 어떤 대비를 해 뒀을까?’

이런 궁금증 속에서 유리한 바람 방향을 이용해 매운 연기를 피우며 공성전을 개시해 보니, 이 역시 한 치의 틈도 없는 저항을 해 왔다. 쌍방의 화살 공격이야 이 경우 정해진 순서나 다름없었고,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아군의 충차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불태워 버리는 솜씨는 ‘과연!’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감탄은 잠시 후 희석되고 말았다. 성에서 나와 저돌적으로 아군에게 부딪쳐 온 일단의 기병들 때문이었다.

한순간 도연각은 혹시 적장이 전사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까지 품었을 정도였다. 그 행동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너무 무모했고, 일군의 장수로서 결코 시도해서는 안 될 작전이었다.

그나마 도연각이 인정한 건, 정허군의 용맹성이었다. 고작 오십여 기로 삼만이 넘는 대군 속을 헤집으면서도 그들은 위축되지 않았다.

‘적의 의도가 뭘까?’

그 용맹함에 이끌려 도연각은 비로소 적장이 뭘 노리는지 궁금해졌다. 저처럼 무모한 행동 뒤에는 반드시 다른 뭔가가 있다. 소위 양동작전이란 것으로, 어쩌면 기병 오십을 희생물로 삼아 나머지 적군은 성을 빠져나가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는 도연각이었다. 쉰을 희생시켜 나머지가 살 수 있다면, 작전의 좋고 나쁨을 떠나 그 의도만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애당초 피아간의 병력 차이를 생각지 않은 무모한 도발일 수밖에 없다. 쉰 명이 아무리 일당백의 기세로 싸운다 해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반 시진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쳐 줘서 그렇다는 얘기다.

‘훌륭한 적장이었는데 마지막에 그르쳤군.’

적장이 이미 죽었다면 애석한 마음으로, 살아 있다면 마침내 흔들린 용병술에 탄식하며, 도연각은 뒤로 젖혀 두었던 투구를 천천히 내려 썼다. 방금 성을 뛰쳐나온 오십여 기의 적병은 자신과 허주군이 직접 칠 작정이었다.

하긴 도연각의 결심이 없었다고 해도 이 일은 허주군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성 공격은 보병이 유리한 터, 그래서 소우종은 율천국에서 데려온 보병 이만 중 일만을 동원해 공성전을 개시했다.

기병과 보병의 전투력 차이가 엄청나다는 건 이 전국난세에 한 그릇 밥을 먹은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조금 전 도연각이, 적병들이 일당백으로 싸울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뒤에 대기시켜 뒀던 율천국의 기병을 동원한다는 것도 우습다. 어쨌든 상대는 고작 오십여 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점에 있어 도연각의 노련한 전쟁 경험은 빛을 발했다. 유람 나온 셈치고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 소우종은 말했지만, 뭔가 걸리는 게 있어 허주의 기병 오백을 이끌고 이 공성전에 참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예감은 기가 막히게 적중했고, 당장 적의 기병들을 치는 건 그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적의 숫자는 고작 오십이다! 단숨에 치지 못한다면 원군의 비웃음을 받는다! 공격!”

도연각이 투구를 썼을 때부터 허주의 기병들은 대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명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성을 올리며 전장으로 내달렸다.

“율천국의 보병들은 물러서라! 허주 기병들의 출동이다! 모두 물러서!”

선두에서 달리는 기수가 연방 고함을 질러 댔다. 자칫하면 원군이 자신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장군, 저길 보십시오!”

부장 중 한 명이 말을 바짝 붙이며 한 곳을 가리켰다.

“오호!”

그 순간 이 노장의 입에선 짤막한 경탄성이 토해졌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또 한 무리의 적 기병들이 성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번엔 약 일백 기 남짓, 앞서 나온 적병들보다 훨씬 강한 기세로 율천국 보병들 사이를 마구 헤쳐 나오는 게 보였다.

그건 마치 한 척의 거대한 배가 물살을 가르며 질주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아니, 한 폭의 비단을 찢는 예리한 비수처럼도 느껴졌다.

하지만 도연각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저런 무모한!”

용맹하게 싸우고 있는 적을 보면서도, 그의 입에선 강한 질타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연각은 적이 드디어 옥쇄하기로 결심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번에 나온 적 기병의 선두엔 분명히 ‘수帥’ 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깃발이 펄럭거렸다. 적의 대장군이 직접 나섰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도연각이 무모하다고 했던 것이다. 일군의 장수가 옥쇄까지 결심했다면, 왜 그 전에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가 말이다. 성을 버리고 탈출하는 방법도 있을 게고, 최악의 경우 혼자 자결함으로써 부하들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 한순간의 감정에 치우쳐 극단적으로 치닫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고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도연각 역시 어쩔 수 없이 난세를 헤치고 살아온 무장이다. 적의 도발을 보니 혈관 속의 피가 확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적의 숫자가 적어 싱거웠던 판이다! 사정 둘 것 없다! 나오는 족족 목을 날려 버려라!”

재차 명을 내린 도연각은 다짜고짜 말을 몰아 선두로 나섰다.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이제 막 합류한 적들의 한가운데, 장수기가 나부끼고 있는 곳이었다.

“와아!”

“파양주의 침략군을 무찌르자!”

도연각의 뒤에서 허주의 기병들도 연방 함성을 올렸다. 그들로선 정허군이 침략군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율천국에서 온 원군들에게 은근히 짓눌린 감정이 없지도 않았다. 그 분노를 고스란히 실은 창을 휘두르며, 그들은 정허군의 기병들에게 부딪쳐 갔다.

2

성을 나서기 전만 해도 격렬한 저항을 예상했던 편월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기저기 불타고 있는 몇 대의 충차와 여전히 바람을 가르며 돌을 날리는 투석기만 제외하면, 적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맥없이 길을 열어 주었다. 아무리 보병뿐이라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편월은 그걸 불만스레 생각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쉽게 맹아와 합류할 수 있을 판이니 고맙게 여겼다.

“맹 장군, 맹아!”

거리가 좁혀지자 편월은 소리를 질러 맹아를 불렀다.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거의 이성을 잃어버린다는 걸 뻔히 알기에 체면이고 뭐고 없이 이름도 마구 외쳐 댔다.

맹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편월이 출격한 걸 아예 모르는 것처럼, 그저 눈앞에 있는 적들만 후려쳐 넘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실로 후려쳐 넘긴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 맹아의 용전勇戰이었다. 일일이 찍어 넘기기 귀찮으니, 마치 풀을 베는 것처럼 창대로 적병을 두들기며 헤쳐 나가는 중이었다.

편월은 소질풍에 박차에 가해 맹아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그리고 수중의 대도로 그의 투구를 가볍게 몇 차례 두드렸다.

“에잇, 귀찮… 어? 대장군?”

적인 줄 알고 그대로 창으로 후려치려던 맹아의 눈이 투구 속에서 커다랗게 뜨였다.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을 대한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다 이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대체 왜 왔소? 내가 이렇게 뛰쳐나온 이유를 모르겠소?”

“안다 해도 이미 늦었다! 적의 기병들이 출동했어!”

“에잇, 생각해 준 보람도 없는 대장군 같으니! 이제 어쩔 셈이오?”

“성루가 조용한 걸 보니 송 장군이 철수를 시작한 것 같다.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우리도 대인성으로 철수한다.”

“내가 생각했던 게 바로 그거란 말이오! 내 말 듣고 대장군이 철수했다면, 나도 지금쯤 돌아갔을 거요!”

“그만! 입 닥치고 전투 준비나 해!”

사뭇 들이받을 것 같은 맹아의 기세를 편월이 세차게 억눌렀다. 근자에 이르러 누군가를 이처럼 거칠 게 다루는 건 처음이었다.

맹아도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편월의 행동을 납득했다기보다는, 싸움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트인 것이다.

“그따위 눈빛은 치워!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자는 게 아니라,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철수하자는 거니까!”

“철수할 때 하더라도, 그 전까진 생사의 갈림길이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대장군이야!”

“뭐라고? 내가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나? 다만 전체를 총괄해야 되니까 보다 신중해진 것뿐이야! 너야말로 그 보조에 어긋나면 이번에야말로 정녕 용서치 않는다!”

“신중 좋아하네! 언제부터 그리 신중해지셨소?”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원수를 대하는 것 같았다. 완전히 전장 심리에 휩싸여 말투가 거칠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지금부턴 입 닥치고 잘 싸워! 뒈지기만 해 봐라! 저승까지 쫓아가서라도 내 손으로 네놈 목을 베어 버릴 테다!”

“흥, 대장군이나 잘하쇼!”

그게 두 사람이 벌인 언쟁의 끝이었다. 그땐 벌써 도연각과 허주의 기병들이 바로 코앞까지 닥쳐 왔던 것이다.

“우와얍! 정허군의 근위대장 맹아가 바로 나다! 적장은 어디 있느냐? 썩 나서서 목을 늘여라!”

아무래도 목숨을 도외시한 투지 면에선 맹아가 편월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적병을 후려치느라 너덜대는 창을 팽개치고, 대신 절풍검을 뽑아 든 채 무턱대고 적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렇다고 뒷짐 지고 있을 편월이 아니었다. 그 역시 대도를 번쩍 치켜들며 소리를 질렀다.

“정허군의 대장군 편……!”

“닥치시오, 대장군! 우리들의 짐이 되고 싶소? 조용히 가운데 위치하시오!”

편월의 외침은 끝을 맺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강한 질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근위대원이었다.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근위대 소속 구독궁邱督窮이오! 실례!”

스스로 구독궁이라고 밝힌 자는 기수의 손에서 장수기까지 뺏어 저만치 내달렸다. 자신이 대장군인 것처럼 속여 편월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행동이었다.

“이런 무례한 놈! 게 섰거라!”

“멈추시오!”

구독궁을 쫓아가려는 편월의 말고삐를 화응이 재빨리 잡아챘다.

“구 형의 얘기를 듣지 못하셨소? 대장군이 선두에 서면 우리 모두에게 짐이 될 뿐이오! 대장군이 어찌 될까 싶어 마음껏 싸울 수나 있을 것 같소?”

“뭐, 뭐라고?”

뜻밖의 말에 편월이 입만 벌리고 있을 때, 십여 기의 근위대원이 그들을 둘러쌌다. 마치 사람으로 울타리를 만든 것 같은 형상이었다.

편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구독궁이나 화응의 말이 수긍되었다. 만약 이 전투에서 이긴다고 해도, 대장군인 자신이 죽는다면 그건 반쪽의 승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분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 자신이 전장에서 짐짝 취급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전투에 임하면 언제나 선두에 나서서 싸웠었다.

그런데 대장군이란 직위는 편월을 전장의 짐짝으로 만들고 말았다. 난세를 사는 사나이들의 표현이라 이성적으론 이해를 하면서도, 혈관 속을 흐르는 누구보다 우수한 전사의 피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마 예전의 편월이었다면 벌써 소리부터 질렀을 터였다. 하지만 이젠 곧바로 속내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건 순전히 막주에서 잡가군 대장을 지낸 것과 또 정허군의 대장군으로 보낸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만큼 관록이 붙었다는 얘기다.

“적장의 위치는?”

이건 전장에 나선 병사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확인하는 문제였다. 적장의 목을 베는 것 이상의 공훈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 적장을 상대하러 구 형이 간 거요! 그러니 대장군께선 신경 쓰지 마시오!”

화응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편월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는 듯, 대답을 회피했다.

편월은 불쑥 오기가 치밀었다. 자신을 위해 주는 것도 좋지만, 이건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죽을 때까지 적들과 싸워야 한다면, 가장 오랫동안 살아 있을 자신이 있었다.

그 오기가 편월로 하여금 기어이 등자를 딛고 일어서게 만들었다.

‘저쪽이군!’

사실 적장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 건 아니었다. 다만 장수기를 든 구독궁과 맹아의 모습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래도 그걸로 충분했다. 그 둘이 같이 있다는 건, 바로 거기에 적장이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었다.

“하아!”

돌연 편월은 소질풍의 등을 박차며, 고삐를 오른쪽으로 홱 잡아당겼다.

“앗! 어딜 가시오, 대장군!”

“보면 모르나? 맹 장군과 구독궁이 적장을 노리고 있다! 나머지 적들을 차단해야지!”

이건 편월의 진심이었다. 직접 적장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랬다가는 아군에게 방해받기 십상이다. 차라리 적을 둘로 끊어 두들기는 게 맹아와 구독궁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게다.

“뒤로 빠지시오, 뒤로!”

화응이 재빨리 따라붙으며 소리를 질렀지만, 편월은 그냥 무시해 버렸다. 아니, 그 말을 들어주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벌써 편월을 발견한 적병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편월이 그걸 마다할까. 널찍한 대도의 날이 아직도 타고 있는 불꽃을 받아 빨갛게 물들었다 싶은 순간, 적 기병 둘이 한꺼번에 잘려 나갔다.

“우오와아!”

뒤를 이어 근위대원들이 특유의 함성을 지르며 허주의 기병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주변은 기병들끼리의 난전에 휩싸였다. 악이 받친 고함 소리, 병기와 갑옷에서 나는 쇳소리, 주인을 잃고 방향 없이 달려가는 말들이 남긴 울음소리…….

문득 편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장의 이 소음은 언제나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서 좋았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살벌한 공간이 아니라, 마치 좋은 이부자리에 누운 것처럼 생각되었다.

물론 몸은 고달프다. 다만 마음이 그처럼 편하기에 피로 따위는 잊어버리고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적은 고작해야 백 기가 조금 넘을 뿐이다! 당황하지 말고 쳐라!”

적진 가운데서 늙수그레한,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편월은 전신의 털 오라기가 올올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적장이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만큼 전쟁에 익숙한 편월이었다.

그렇다면 맹아와 구독궁은?

이편이 생각하고 실행한 걸 적이라고 하지 않을까. 허주군도 대장군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가 대신 그 노릇을 하고 있을 터였다.

편월로선 반가운 일이었다. 일부러 찾으려 하지 않았는데도 저렇게 나타났으니 상대해 주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허주의 대장군은 어디 있는가? 정허군의 조각달이 그대의 목을 찾고 있노라!”

일단 크게 한소리 내뱉고 나자 새삼 몸에 힘이 솟구치는 걸 편월은 느꼈다. 그 여세를 몰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맴돌며 주위에 몰려든 적병 서넛을 대도 날에 찢긴 고혼으로 만들어 버렸다.

경악을 금치 못한 건 근위대원들이었다. 비록 대장군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저돌적으로 덤벼서는 당하는 건 시간문제일 게 뻔하다. 일말의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대장군이란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니, 근위대원들은 각자 상대하던 적들을 찍어 넘기거나 혹은 따돌려 놓고 편월의 주변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허주군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한 겹을 벗겨 내면, 다시 이중으로 드리워지는 휘장처럼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결국 편월은 고립되었다. 주위에 있는 아군이라고 해 봐야 화응을 비롯한 십여 기가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위축될 편월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기다렸던 것처럼 더욱 거세게 날뛰었다.

“허주의 대장군은 어디 있느냐! 벌써 겁을 먹고 말린 붕알을 안고 달아났느냐!”

“무엄한 놈!”

연이은 편월의 욕설에 허주군 중 누군가가 창을 내질렀다. 목젖을 노린 제법 세찬 공격이었지만, 그게 먹힐 리 만무했다.

“졸개는 귀찮다! 네놈들의 대장군더러 나서라고 해라!”

마치 귀찮은 파리라도 쫓는 듯한 손동작으로 대도를 휘둘러, 편월은 그 적병을, 내민 창과 함께 잘라 버렸다.

“저놈을 죽여라! 죽여서 저 요망한 혓바닥을 잘라 버려라!”

“와앗, 죽어랏!”

허주군 중에서 누군가 소리쳤고, 그에 따라 다시 편월 주변으로 왈칵 적병들이 몰려들었다.

“물러서라! 네놈들이 상대할 분이 아니다!”

화응과 근위대원들이 재빨리 끼어들어 연방 창을 내질렀지만, 그것만으론 역부족이었다. 허주군의 숫자가 너무 많았고, 또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편월 때문이었다.

“야잇, 허주의 바보 놈들아! 정허군의 대장군 편월은 바로 이 몸이시다! 이 깃발이 보이지도 않느냐?”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맹아도 연방 고함을 질러 댔다. 이 상황이 편월의 위기라 보고, 구독궁과 더불어 스스로 정허군 대장군이라고 자칭한 것이다.

그건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 일단의 허주군이 맹아와 구독궁이 있는 곳으로 몰려갔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위기가 당장 해소된 건 아니지만, 편월은 이 상황에 만족했다. 애당초 허주군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온 건 그들을 둘로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허주의 대장군은 귀머거리 병신인가? 여기 정허군의 조각달이 왔으니 썩 앞으로 나서라!”

재차 고함을 지르며, 편월은 연방 주변의 적병들을 베어 넘겼다.

이쯤 되면 미간 가득 깊은 주름을 새길 수밖에 없는 도연각이었다. 그 역시 부장 중 한 명을 자신의 대용으로 만들어 장수기를 들려 보냈지만, 지금 보고 있는 정허군처럼 무식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대로 하고 있구먼.’

어느 쪽이 진짜 정허군의 대장군인지 그로서도 헷갈릴 지경이었으니, 적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한 셈이었다.

“모두 멈춰라!”

문득 도연각은 공격 중지의 명을 내렸다. 누가 진짜 적장인지부터 먼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건 도연각의 실수였다. 한쪽이 멈춘다고 상대 역시 창을 거두는 건 아니었다. 명을 받은 허주군이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정허군은 맹렬하게 밀어붙였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허주군의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희생되는 자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전쟁에서 한순간의 망설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내가 바로 허주 담전성주 도연각이다! 나를 부른 정허군의 대장군은 썩 앞으로 나서라!”

과연 도연각은 노장다웠다. 당장 위기에 빠진 허주군을 구할 방도를 취하기보다는, 우선 한마디 고함으로써 적장의 그릇을 재려고 했다. 옛날 전쟁에서나 통했을 법한 묵은 방법이었지만, 그래서 요즘에 더욱 가치를 발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번엔 그 묵은 방법이 제대로 통한 것 같았다. 맹렬하게 공격하던 정허군이 무기를 거두고 정연하게 도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과연!’

가볍게 감탄하면서, 도연각은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정허군 쪽에서도 일기가 나오는 게 보였다.

어느새 주변에 있던 율천국의 보병들도 모두 철수했고, 시끄럽게 울려 대던 투석이 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편월이라고 했나? 막주의 목철린을 쳤다는 그 꼬마 장수?”

“그렇소!”

도연각과 마주 선 편월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꼬마’라는 말이 신경을 건드렸지만, 여기선 참아 둬야만 했다. 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전쟁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이다. 비록 적이지만, 거기에 대한 예우는 충분히 갖춰 줘야 한다. 그래야 이쪽도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목철린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나 역시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최선을 다해 싸웠을 뿐이오.”

“그게 바로 무장에 대한 최고의 예우지. 그런데 왜 이 허주 땅을 침공했나? 우리는 파양주의 마 공에게 적대한 적이 없는데.”

“모르오! 이 몸은 근본 잡가군 소속, 명이 내려오면 실천할 따름이오.”

“잡가군… 아깝군. 그대만 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잡가군으로 떠돌다니.”

짐짓 애석하다는 듯 나직이 내뱉는 도연각을, 편월은 그저 묵묵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여기선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적이 가만히 있는데 이편에서 도발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가? 대인성만 내준다면 퇴로는 이 목숨을 걸고 보장하겠네.”

도연각의 말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저 어린 나이에 이만한 실력을 갖춘 편월이 너무나 아까웠다.

“이래 봬도 일군을 지휘하는 대장군의 신분이오. 부하들의 피와 목숨으로 얻은 성을 그대로 내줄 수는 없소.”

“성을 지키자고 고집을 부리면 더 큰 희생이 난다는 걸 모르나? 당장 이 자리만 해도 자네들이 빠져나갈 길은 없네!”

“어쩌면 도 장군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겠소. 나와 근위대는 이 자리에서 모두 죽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만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거요!”

‘흐음!’

편월의 말에 도연각은 내심 침음성을 삼켰다. 궁지에 몰린 자의 유치한 협박이라고 넘겨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았다. 묘하게도 가슴을 누르는 압박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벌써 수령성 공격에서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은 낭패를 면치 못했다. 그 뒤를 이은 기병전에서도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어떻게 하시겠소? 우리 둘만의 싸움으로 끝을 내는 것과 아니면 전군을 몰아 난전을 벌이는 것 중 어느 게 좋겠소?”

“지금쯤 농성하던 병사들은 모두 철수했겠군.”

편월의 질문에 도연각은 다소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렇소.”

대답을 들으며 도연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수를 희생시켜 다수를 구하는 건, 전쟁의 병법에선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일군의 장수가 직접 나서서 그 일을 한다는 건 도연각도 처음 겪는 것이었다.

부하를 사랑하는 편월의 마음이 이 늙은 장수의 가슴을 짜릿하게 울려 왔다.

도연각은 편월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대부분 어둠에 가려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얼추 자신의 손자랑 비슷한 나이인 것 같았다.

“나도 그대만 한 나이였을 때 처음으로 한 자루 창에 의지해 전장에 나섰었지.”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을 줄 아오. 자, 오시오!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겠소.”

“허허허!”

문득 도연각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부터 망막에서 어른거리는 손자의 얼굴이 그대로 편월로 변해, 지금 자신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도연각은 엄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라! 내일 아침엔 대인성을 포위할 터인즉, 그 전까지 성을 비워라! 아니면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다시 만나자!”

말을 끝내기 무섭게 도연각은 말 머리를 돌려 허주군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가기 시작했다. 배후에서 정허군 중 누군가가 화살 한 대만 쏴도 당장 위태로워질 판인데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의외의 상황 전개였지만, 편월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처음 도연각과 대면했을 때부터 마음 한편에선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것도 일종의 어리광일까?’

그거야 어쨌든, 오늘 싸움은 이걸로 끝난 것이다. 편월과 근위대원들은 부상병들을 부축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전사자들에 대한 처리는 승전군이라 할 수 있는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이 맡아 줄 터였다.

* * *

도연각이 단독으로 편월과 근위대를 놓아준 일에 대해 연합군의 뭍 장수들 사이에선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다. 특히 원군인 율천국의 무장들은 칼부림까지 마다 않겠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걸 잠재운 건 역시 소우종이었다. 그는 노장에 대한 예우를 모른다는 점과 어느 전장에서고 지켜야 될 최소한의 예의를 배워야 한다는 점을 들어 오히려 휘하 장수들을 꾸짖었던 것이다.

그처럼 살벌한 분위기의 밤이 지새고 새벽이 겨우 졸린 눈을 떴을 때, 연합군은 벌써 대인성을 엄밀히 포위해 버렸다.

그러나 싸움은 곧 시작되지 않았다. 성에 갇혀 있는 조환의 처남 편사중을 비롯한 허주의 몇몇 장수와 병사들을 구출하려는 교섭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섭은, 수령성 싸움이 끝난 지 한 달이 넘는 지금까지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3

황제의 조문 사신`—`실질적으론 가겸후가 보낸 것이지만`—`까지 맞은 마용승의 장례는 물론, 그 아들 마국립이 진남후를 계승하는 일은 아무 탈 없이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서수에겐 한층 더 불안해진 나날의 연속이었다. 병권을 장악한 호유진, 호윤천 부자의 동태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돌운성 공사 때 입은 부상을 핑계로 일선에서 물러났던 호윤천은, 마용승이 죽자 아직 경험이 적은 아들인 호유진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파양주의 병권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스승님께서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지는 게 아닐까?’

살아생전 스승인 구양파는 호윤천을 무척이나 경계했었다. 시기와 질시가 심한 상이라 결코 남 밑에 있을 위인이 아니라고 말이다.

송용조 역시 몇 차례 비슷한 말을 서수에게 했었지만, 그건 상인의 시각에서 본 지극히 현실적인 불만에 대한 트집거리라 여기고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마용승이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일선에 복귀한 호윤천을 보자, 구양파와 송용조가 했던 말들이 서수의 가슴에서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물론 어린 마국립이 모든 정사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 윤 대부인이 섭정攝政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데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마용승이라는 거인의 그늘에만 가려져 있던 한낱 아녀자가 무얼 알겠는가? 아무리 당찬 성미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힘이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남후의 이름으로 내려지는 모든 명령은 적금각이 아니라 집무창의 대장군부에서 나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아침이면 호윤천 부자는 꼬박꼬박 조회에 참석하고, 저녁이면 그날 있었던 일을 마국립과 섭정인 윤 대부인에게 보고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서수는 이다음에 벌어질 일을 익히 알 수 있었다.

‘호윤천은 찬탈을 꾀할 것이다.’

예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다고 해야 할 판이다. 당장 율천국의 가겸후만 해도 제 친아버지를 내몰고 왕위에 올랐으며, 지금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던 과거엔 한 달 사이에 그 땅의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는 얘기도 없지 않았다.

하긴 그러한 일들이 연거푸 일어나고, 또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시대이니 난세라고 하는 것이다. 혼란에 혼란이 거듭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할 수조차 없으니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국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무력만이 진정한 가치이자 절대적 진리가 되고 말았다.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게 생각만 한다고 해서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니다. 실제적인 힘이 없기로는 서수나 마국립 모자나 같은 처지니까 말이다.

‘광운 장군이라면?’

지금 영욱성에 있거나, 혹은 인근의 각 성에 들어가 있는 장수들은 믿을 수가 없다. 어느새 호윤천의 입김이 닿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 점에 있어 광운은 신뢰할 수 있다. 마용승 생전부터 호윤천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보다는 부귀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그 성품이 믿음직했다.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이 난세에 어딜 가도 성 하나쯤은 너끈히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여전히 잡가군으로 떠돌고 있는 것만 봐도 그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광운은 지금 막주 침사성에서 수군을 양성하고 있다. 딸려 준 병력은 없지만, 그가 키운 병사들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현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무력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어떻게든 광운 장군과 손이 닿아야 할 텐데.’

하지만 광운은 지금 멀고 먼 남쪽의 끄트머리인 막주 땅에 가 있다. 벌써부터 요주의 인물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호윤천 부자의 눈을 피해 거기까지 사람을 보낸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 당장 효명성주인 상림호에게 사람을 보내는 것도 힘든 판이었다. 광운과 친분이 돈독한 그에게라도 연락이 닿는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군사께서는 바쁘셔도 외인의 접견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소. 그러니 돌아가시오!”

갑작스레 들려온 수문 병사의 목소리가 서수의 깊은 생각을 깨웠다.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지만,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해 뒀었다.

“서 선생께서 많이 바쁘신 건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송용조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오.”

‘응?’

찾아온 사람이 스스로 신분을 밝혔을 때, 서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모셔라! 그분을 당장 안으로 모셔라!”

문으로 통하는 복도를 달리다시피 하면서, 서수는 고함부터 질렀다. 혹 그사이 병사들이 강제로 송용조를 밀어낼까 저어해서였다.

“어서 오시오, 송 공! 어인 일로 예까지 오셨소이까?”

“그 얘기는 잠시 뒤에…….”

곁에 있는 병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송용조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 들어가십시다. 자, 이리로!”

서수는 직접 송용조를 안내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 집무창에서 오는 길이오.”

“집무창? 송 공께서 집무창엔 대체 무슨 일로…….”

“내가 가진 것을 전부 내놓으라고 하더이다.”

송용조의 어투는 불쾌하게 가라앉았다. 상인에게 가진 걸 몽땅 내놓으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명목으로 그런 무리한 얘기를 하더란 말이오?”

“군자금이 모자란다고 했소. 나뿐 아니라 손이 미치는 곳에 사는 큰 부호들도 앞으로 차례차례 불려 올 거요.”

“아니, 선대가 비축해 둔 그 많은 자금과 물자는 어쩌고? 아니, 그보다 대체 송 공은 뭐라고 대답하셨소?”

“한 푼도 없다고 했소이다. 못 믿겠으면 집을 뒤져도 좋다고 했더니 인상이 변하더이다.”

“그 말을 듣고도 그들이 가만히 있었소이까?”

“난 선대 마 공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오. 당대 진남후 마마를 위한다면 모를까, 다른 사람에게 낼 돈은 정녕 한 푼도 없소이다.”

‘아!’

송용조의 대답을 들으며, 서수는 내심 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비록 상인이라지만, 무장들도 제대로 갖추기 힘든 기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새삼스러워 보였다.

“그보다 집무창을 나서다 이상한 말을 들었소이다.”

“이상한 말이라니요?”

“죽영루를 철저히 감시하라는 말을 들었소이다.”

“죽영루를?”

서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동안 한차례 죽영루를 찾아가 그녀들에게 주의를 주긴 했지만, 마용승의 장례 등 일이 많아서 잠시 잊고 있던 문제였다.

그런데 호윤천 부자가 그녀들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거 큰일 났구려!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광운 장군이나 편월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나도 그 점이 걱정되어서 이렇게 왔소이다. 내 문제는 스스로 처리할 수 있지만, 그 두 사람이 이 파양주로 창끝을 겨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둬선 안 되오!”

“거기에 대해 무슨 생각이 있으시오?”

“생각이나마나, 우선 그녀들부터 안전하게 구해 내야 하오.”

“그 점엔 이견이 없소. 하지만 그녀들을 구해 낸다고 해도, 대체 어디에 숨길 작정이오? 광운 장군이나 편월에게 보내는 게 제일 좋겠지만…….”

“송 공의 상단을 이용하면 어떻겠소?”

“그게, 난처하오. 상단들에게 당분간 파양 땅엔 들어오지 말라고 했소.”

“흐음!”

서수는 침음성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녀들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후회만이 가슴 가득 번져 갔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것이든 수단은 강구해야 할 터, 서수는 냉정을 되찾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녀들을 집무창에서 빼내는 게 우선이오. 그리고 사람을 좀 구해 주시오.”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광운 장군과 편월에게 알려야겠소. 그들은 여태 선대 주공께서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오.”

“그 점이라면 염려 마시오. 돌아가는 대로 바로 사람을 출발시키겠소.”

“고맙소.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하오.”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을 두는 것처럼 서수는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서 선생은 죽영루에 있는 두 사람을 구할 방도를 강구해 보시오.”

말과 함께 송용조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재산을 압수하겠다는 것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고, 오직 죽영과 유화의 안전만 염려하고 가는 셈이었다.

“멀리 나가지 않겠소. 그리고 앞으론 우리들의 만남도 조심해야 할 거요.”

한마디 당부의 말을 한 뒤, 서수는 방에서 송용조와 작별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겨, 저녁을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 * *

대인성을 사이에 둔 양측에선 화살 한 대 날지 않았지만, 수원지를 둘러싼 크고 작은 공방은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오늘도 교섭을 위한 연합군의 군사軍使가 대인성으로 들어왔다. 정사는 지난번에도 왔던 자로서, 허주에서는 문무겸전으로 이름난 설찬薛贊이었다. 막 오십 줄에 접어든 관록이 그대로 내비치는 인물이었다.

“아직도 날씨가 덥군요. 농사야 풍년이겠지만, 전장에선 고역이로군요.”

연무장에 마련된 임시 진막으로 들어온 설찬은 권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날씨에 대한 불만부터 터뜨렸다.

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일상적인 계절 인사에, 이제 그만 이 지루한 대치를 끝내자는 의미를 살짝 섞은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더우시오? 우리 정허군은 그날그날의 일기에 흔들리지 않소이다만.”

설찬뿐 아니라 지금까지 연합군에서 보낸 사자의 응대는 늘 담개가 했다. 정규군 출신이라 경험도 많았고, 성격이 대쪽 같아 어떤 회유에도 쉽사리 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 딱딱하게만 굳어 계시니 얘기가 진척되지 않는 거요. 비록 서로가 창을 겨누고 있지만, 지금 와서 숨길 게 뭐 있겠소? 그러니 오늘은 결말을 봅시다.”

“무슨 결말을 보잔 말이오? 무장의 결말이란 전장에서 칼로 보는 것밖에 더 있겠소!”

“허어, 참! 담 장군도 지금의 상황은 잘 아시지 않소. 지금 밖엔 삼만이 넘는 대군이 이 성을 포위하고 있소. 그렇지만 지원군의 소 장군이나 우리 도 장군께선 너그러우신 분들이라 포로만 내주면 포위망을 풀어 주시겠다고 하셨소. 그러니 이쯤에서 얘기를 끝냅시다.”

“이거 참으로 우스운 얘기를 들었소이다. 사자의 말을 들어 보니 마치 빚을 받으러 온 사람 같구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정허군은 승전군이오. 뭐가 아쉬워서 그쪽의 말을 따르겠소!”

“뭐라고? 이건 가볍게 들어 넘길 얘기가 아니군. 어째서 정허군이 승전군이란 말이오? 지금도 이처럼 성에 포위되어 장병들이 기갈에 시달리고 있는데.”

“사자는 수령성 싸움을 잊었소? 아직은 노망할 나이가 아닌 듯한데 어찌 그 기억을 못 하시오. 그때의 싸움은 명백한 우리 정허군의 승리였소!”

“그건 우리 도 장군의 아량이 있었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정허군의 대장군은 그 자리에서 목 없는 시신이 됐을 것이오!”

“흥, 그거야 모를 일! 그리고 아량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쪽에선 도 장군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고 있소!”

“뭣이?”

탕!

설찬은 탁자를 세차게 내려쳤다. 아무리 전시의 담판이라지만, 이건 말이 너무 심했다.

그 바람에 진막 안의 분위기가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설찬이 거느리고 온 열 명의 무장은 제각기 무기를 손에 쥐었고, 그건 임석臨席하고 있던 정허군 측의 무장들도 마찬가지였다.

“하하하하!”

돌연 설찬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감정이 격해서 소중한 사자의 임무를 잊을 뻔했소이다. 오늘 온 것은 포로에 대한 타합打合도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 알려 드릴 게 있소이다. 뭔지 궁금하지 않소?”

“알려 주러 온 건 그대들이오. 우린 듣기만 할 뿐, 설사 말해 주지 않더라도 궁금할 건 없소이다.”

여전히 담개는 뚝뚝 부러지는 어투로 말을 받았다.

“파양주의 마용승 공이 살해당했소. 벌써 한 달도 넘은 일인데, 우리도 어제야 비로소 알았소. 만약 내 말이 믿기지 않거든 가까운 윤주로 사자를 보내 보도록 하시오. 그 길은 막지 않겠소.”

“흐하하하하!”

이번에는 담개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갑옷 자락이 철커덕거리고, 앉아 있는 의자가 삐걱거릴 정도였다.

“아무래도 오늘 사자의 임무는 우리를 웃기는 것인가 보오. 삼만이나 되는 대군이 포위를 했다고 공갈을 친 것이 대체 언제요? 그런데 이제 와서 마 공이 돌아가셨다고? 내 평생 이렇게 웃기는 얘기는 처음이오. 하하하하!”

“당장 믿으라는 말은 않겠소. 오늘 중에라도 윤주에 사자를 파견해서 진위 여부를 확인해 보시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설찬을 보고 있었지만 지금 담개의 가슴은 새파란 단도로 푹 찔린 것처럼 써늘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보름이오! 윤주로 사람을 파견해 내 말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고, 거취를 결정하는 데 내줄 수 있는 시간이 말이오. 그동안 우리 연합군은 어떤 공격도 하지 않겠소. 그러니 잘 상의해서 진퇴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시오. 그만 가자!”

자신의 임무를 마쳤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설찬은 진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수행해 왔던 무장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겉모습이야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담개는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마용승이 죽었다는 소식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상장군, 대장군께 보고해야 되지 않겠소?”

임석했던 송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입술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직 이르오.”

담개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진막 안에 남아 있는 다른 장수들에게 말했다.

“잠시 나가 주시겠소? 송 장군과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렇소. 그리고 방금 들었던 얘기는 잠시 동안만 대장군께는 말씀드리지 마시오. 때가 되면 내가 직접 보고하리다.”

담개의 말에 사문기와 상가웅을 포함한 정허군 각 부대 대장들은 잠시 술렁거렸다. 중요한 회의에서 배제된 듯한 소외감 탓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하나 둘 진막을 빠져나갔다. 그만큼 담개와 송지를 믿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모두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담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적어도 두 가지 경우에 대한 대책은 우리 노장들이 확실히 정한 뒤에 보고를 해도 해야 될 것이오.”

“두 가지 경우? 그렇군요. 마 성주가 죽었을 경우와 사자의 말이 거짓일 경우. 그 대책은 확실히 정해 둬야겠지요.”

“난 사자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되지 않소. 삼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와서 그런 계책을 꾸미지는 않을 것이오. 송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소장의 생각도 같소이다.”

송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대책도 두 가지로 강구해야 되겠는데, 먼저 마 성주가 살아 있을 경우와…….”

“아니, 잠깐만!”

돌연 송지가 담개의 말을 끊었다.

“소장이 생각하기엔 경우야 두 가지지만, 우리가 취할 바는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되오.”

“뭣이? 한 가지라니?”

“하루속히 이 성을 버리고 빠져나가는 거요. 담 장군은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소? 저렇게 엄중한 포위를 당하고서는 보급품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할 것이오.”

“흐으음!”

약간은 불만인 듯 담개는 긴 침음성을 토했다. 이 수성의 명인은 어떤 경우라도 성은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송지의 말처럼 보급의 문제도 있었지만, 수원지도 그리 오래 지켜 낼 것 같지 않았다. 쌀과 물이 없으면, 싸우는 병사도 없다는 게 당연한 이치다.

“알겠소. 그럼 우선 이 사실을 대장군께 보고합시다.”

두 사람은 서둘러 진막 밖으로 나갔다. 아직 점심때도 되지 않은 여린 햇살 속에서 까마귀 몇 마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짖고 있었다.

* * *

그즈음 소우종은 자신의 진막에서 율천국의 왕인 가겸후가 보낸 밀사를 맞고 있었다.

그가 전한 내용은 간략했다. 어떻게든 대인성 전투를 오래 끌라는 것과 정허군의 대장군인 편월을 반드시 죽여 그 목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소우종은 선선히 응낙했다. 첫 번째 얘기야 중주를 출발하기 전에 가겸후에게서 한차례 언질을 받았던 것이었고, 두 번째는 편월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형인 소우기의 자결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수령성 전투에서 편월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대로 놓아준 건 바로 첫 번째 사안 때문이었다. 정허군의 대장군을 죽여 버리면 싸움은 그대로 끝나 버리고 말 터, 그렇게 되면 가겸후의 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이 된다.

밀사를 돌려보낸 소우종은 천천히 진막을 걸어 나가 대인성을 올려다보았다. 견고하게 지어진 그 성이, 마치 수수깡으로 지은 것처럼 허술하게 보였다.

그 위로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서서히 덮쳐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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