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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일상亂世日常 2 (28/66)

난세일상亂世日常 2

1

조휴령의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수령성엔 그날 밤이 찾아오지 않았다. 성을 포위한 정허군이 피운 엄청난 화톳불 때문이었다.

수령성의 수비 장수는 당윤홍唐潤鴻으로서, 다름 아닌 당세홍의 동생이었다.

흔히 형만 한 아우 없다지만, 이들 형제에겐 그 말이 적용되지 않았다. 형인 당세홍이 대세를 보지 못하는 비교적 용렬한 성품이라면, 동생인 당윤홍은 장수로서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대국적인 시야를 갖춘 건 물론, 그 용맹성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당윤홍은 지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단순히 적들에게 성을 포위당한 탓만은 아니었다. 싸움이라면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게 그의 성격이니까 말이다.

당윤홍의 미간에 깊은 골을 패게 한 건 바로 밖에서 들려오는 말 때문이었다. 한때 같은 편이었지만, 투항해서 적군에게 배속된 자들이 지르는 고함 소리가 듣기 괴로웠다.

“다시 한 번 성에 계시는 분들께 알리겠소! 대인성주께서는 벌써 투항을 하셨소! 그러니 쌍방이 더 이상 헛된 희생을 낼 필요가 뭐 있겠소? 속히 투항하시오! 아니, 투항하기 싫다면 동문의 포위를 풀어 두었소! 거길 통해 어디로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시오!”

당윤홍의 관자놀이 힘줄이 다시 꿈틀거렸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성병들의 동요가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대인성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이미 한차례 출격했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호되게 당하고 돌아왔던 성병들이다. 그렇게 꺾인 사기 위에 보태진 투항자의 저 말은 지금쯤 그들의 가슴을 도려내고 있을 터였다.

“장군, 저 괘씸한 자를 이대로 놓아둘 생각이오? 당장 활로…….”

“그만두시오!”

편장 중 한 명이 밖에서 고함을 지르는 자를 쏘려고 하자 당윤홍은 급히 제지했다.

“저자에게 무슨 죄가 있겠소? 죄가 있다면 이런 시대를 만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오!”

“그 무슨 약한 말씀이오? 평소의 장군답지 않소이다. 아무리 전국난세라지만, 불과 오늘 낮까지 한편이었던 자가 투항을 권유하다니, 있을 법이나 한 얘기요?”

“그렇기 때문에 난세라는 것 아니겠소. 저렇게 말하고 있는 저자도, 지금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거요.”

당윤홍은 담담하게 말했다. 같은 편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이제는 서로가 다른 위치에 서서, 한쪽은 말하고 다른 쪽은 듣는 입장이 되었다. 아무리 난세를 사는 인간들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일이라곤 하지만, 이건 분명 양측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형벌임에는 틀림없다.

“내 명을 성병들에게 전하시오. 말단 졸자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에게 알리시오. 적은 동문의 포위를 풀었다고 했소. 그러니 투항하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갈 병사들은 지금 성을 나가라고 하시오.”

“이건 또 무슨 말씀이오? 소장은 결코 승복할 수 없소이다!”

“잠자코 내 말을 따라 주시오. 어쩌면 이건 적장의 자비인지도 모르겠소. 그러니…….”

“자비라니? 주성主城인 대인성을 함락시키고, 이렇게 우리까지 포위한 적에게 무슨 자비가 있단 말이오! 그러니 장군께서는 명을 거두시길!”

“아니요. 여기서 일전을 벌인다면 저자의 말처럼 쌍방에 많은 희생자만 내고, 결국은 성이 함락될 거요. 그걸 뻔히 알면서 부하들에게 성을 지키라는 명을 나는 내릴 수가 없소.”

“하지만…….”

“서두르시오. 적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을 터, 모처럼 보여 주는 호의를 거절해서 병사들을 전멸시킨다면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이오.”

편장은 말없이 당윤홍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역시 이천강변으로 출격했던 소인성과 진동성鎭東城`—`이 역시 대인성의 부성 중 하나다`—`의 병력이 지리멸렬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 적과 싸운다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 또한 잘 안다.

하지만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해 보지 않고 병사들을 성 밖으로 내보낸다는 건 너무 허망하다. 적어도 일전을 벌여 매서운 무장의 고집을 보여 준 후 투항을 해도 늦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당윤홍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여기서 싸우게 되면 싫든 좋든 희생자가 나오게 된다. 이 경우 전원이 옥쇄玉碎할 각오로 싸운다는 건 듣기엔 좋을지 몰라도, 지휘하는 장수는 너무 뒤가 없는 싸움을 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부하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모해 주는 게 진정한 무장이 할 도리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장군의 명을 곧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그래도 남겠다는 장병이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단호한 어조로 편장이 물었지만, 당윤홍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의 장졸도 남지 않길 바라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혼자 남아, 조용히 자결함으로써 성을 적에게 넘긴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게 바로 최후를 맞는 무장이 택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당윤홍이 대답이 없자 편장은 거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물론 방금 받은 명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장졸들이 떠나고 있소.”

예의 편장이 되돌아와 노기 띤 어조로 보고했다. 사세가 불리하다고 지금까지 몸담고 있던 성을 버리는 자들이 그의 눈엔 고깝게 보였던 것이다.

당윤홍은 시선을 동문 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도 정허군이 피워 둔 화톳불이 어둠을 사르고 있었지만, 보이는 건 모두가 수령성을 지키는 병사들뿐이었다.

‘적장이 약속은 잘 지키는군.’

하긴 동문 밖에 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곧 성을 나간 부하들이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적이 마음만 먹는다면 멀찍이 매복을 둘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왠지 당윤홍은 적장에게 믿음이 갔다. 불과 이틀 사이에 대인성을 함락시킨 솜씨라면, 그까짓 잔재주를 부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씩, 혹은 삼삼오오, 더러는 떼를 지어 동문을 나가던 병사들의 행렬이 뚝 끊어졌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오? 지금까지 나간 병사들의 숫자는 다 합쳐 봐야 고작 천 명에 불과할 텐데.”

“그렇소. 장군의 명을 전했을 때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힌 자는 천여 명에 불과했소. 나머지는 여기서 장군과 함께 싸우다 죽을 결심으로 남았소.”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편장의 말을 들으며, 당윤홍은 눈을 감았다. 수령성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의 숫자는 도합 이천이다.

그렇다면 그들 중 절반이 죽기를 각오하고 남았다는 얘기다.

“천 명이면 원 없이 싸워 볼 수 있는 숫자요! 그러니 지금 당장 성문을 닫아걸고 농성할 준비를 합시다!”

아까보다는 조금 들뜬 어조로 편장이 말했다. 그로서도 천 명이나 남을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당윤홍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편히 죽지도 못하게 되었구나.’

싸우면 진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당윤홍이었다. 그러기에 아군이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떠나 주길 바랐다.

그런데 무려 천 명이나 남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피아 합쳐 그 이상의 희생이 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장군, 어서 명을 내려 주시오. 이러는 동안에 적군이 열린 동문으로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시려오?”

“가 봅시다!”

편장의 채근에 못 이긴 듯, 당윤홍은 무겁게 한마디 내뱉었다. 물론 남은 천 명의 장졸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는 얘기였다.

“알겠소. 그 전에 우선 성문부터 닫아걸고…….”

“성문은 그냥 열어 두시오. 적들에게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벌써 밀고 들어왔을 거요.”

서두르는 편장을 제지하며, 당윤홍은 망루에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은 병사들은 모두 성문에 면한 연무장에 집결해 있었다. 명령만 내리면 당장에라도 맡은 곳으로 달려가 죽겠다는 다부진 표정들이었다.

“모두 듣거라! 알다시피 대인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성주께서는 적에게 투항하셨다! 또한 이 수령성 역시 적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심정이야 어떻든 당윤홍의 목소리는 도열한 병사들의 머리 위로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돌연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피워 둔 화톳불과 횃불이 크게 일렁거리면서, 사람들의 그림자도 이리저리 휘청대며 춤을 추었다.

“다행히 적장에게 한 가닥 온정이 있어 피아간에 헛된 희생을 줄일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니 망설일 것 없다! 모두 성을 버리고 가고 싶은 길로 가도록 하라!”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린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키려고 남았소이다! 장군의 그 말씀일랑은 거두어 주시기 바라오!”

“그렇소이다, 장군! 부디 우리의 마음을 거절치 말아 주시오!”

“여기서 싸우다 죽는 것만이 충성이라고 생각지 마라! 다음이 있다! 정히 싸우고 싶다면, 당장 여기서 나가 담전성으로 가라! 그래서 뒷날 이기는 싸움을 하라! 모두 살아남으란 말이다!”

“그럴 바엔 애당초 남아 있지도 않았소!”

“옳소! 누가 뭐래도 나는 여기를 내 죽을 자리로 삼았소! 그러니 장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소용이 없소이다!”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당윤홍은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 저들을 여기 묶어 두는 것은 조환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의리일 것이다. 그걸 알기에 저들의 목숨을 결코 가벼이 다룰 수 없었다.

“그럼 모두 나를 따르겠는가?”

“두말하면 잔소리요!”

“내가 지옥으로 가자고 해도 이의가 없는가?”

“무슨 이의가 있겠소! 장군께서 가자고 하시면 웃으며 따라갈 뿐!”

“알겠다! 나는 지금부터 이 성을 나가 담전성으로 가겠다! 모두 나를 따르겠다고 했으니, 이의가 없을 줄 안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당윤홍의 말에 수령성의 장졸들은 얼이 빠졌다. 그들의 예상을 통렬하게 뒤집은 얘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당윤홍이 말을 타고 천천히 동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졸들은 서로의 얼굴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하나 둘 당윤홍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허주의 간인이 대인성으로 곧장 가지 않고 수령성에 먼저 들러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전했으면, 과연 당윤홍이 이처럼 쉽게 성을 포기했을까?

만약 인간사를 관장하는 조물주가 있다면 그 존재는 틀림없이 아주 짓궂거나, 혹은 너무 해학적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당윤홍과 수령성의 운명이 이처럼 얄궂게 꼬이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당윤홍과 천여 명의 수령성 장졸들은 그 밤중으로 조휴령을 넘어 담전성으로 향했다.

* * *

수령성에 입성하자마자, 편월은 백월대와 유군에 작전을 하달했다.

“백월대는 조휴령을 넘어 그 입구에 매복하시오. 굳이 적에게 타격을 입힐 필요는 없소. 그들의 발길을 조금 늦추면 되니까, 너무 오래 싸우지는 말고 후미의 보급대나 공성 무기를 노려 공격하시오.”

“존명!”

“유군은 정상에 대기하고 있다가, 백월대를 쫓아오는 적들의 배후를 치시오. 이 역시 목적은 보급대와 공성 무기들이오.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 싶으면 길을 돌아 대인성으로 들어가시오. 길 안내는 새로 배속된 포로들에게 맡기면 될 거요.”

“존명!”

명이 떨어지자마자 강숙과 담개는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전령은 지금 즉시 청월대로 달려가 보급 물자를 대인성으로 넣고, 그곳을 지키라고 일러라.”

전령에게 지시를 내린 뒤, 편월은 서진청과 오강을 불렀다.

“두 분 장군은 조휴령 정상에서 일 리 정도 내려온 곳에 매복하시오. 적이 온다면 사양할 것 없소. 마음껏 싸우고, 대인성으로 철수하시오.”

“여기가 아니라 대인성으로?”

“그렇소.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이 삼만 오천이오. 그만한 대군을 맞아 싸우기엔 이 성이 너무 좁아. 그러니 결판은 대인성에서 낼 것이오.”

“그럼 농성하실 생각이오?”

“이왕 차지한 대인성이오. 일부러 버릴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여기는 적지요. 삼만 오천의 대군에게 포위되어 장기전을 벌인다면 절대적으로 불리하지 않겠소?”

“만약 농성이 불리하다 싶으면 적중 돌파라도 감행하겠소. 아니, 우리가 대인성을 차지했다는 걸 알면 마 성주도 뒷짐 지고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오.”

“난 도무지 그 마 성주를 믿을 수가 없소. 허주를 치라고 하면서 고작 병력 오천에 석 달간만 지원하겠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서진청이 심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건 그 혼자만이 아니라 정허군에 소속된 모든 장졸들이 마용승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 마 성주의 마음이 최근 바뀐 것 같소. 석 달만 지원해 주겠다던 보급을 꾸준히 보내 주고 있는 게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소. 그러니 다른 생각은 말고, 우선 곧 들이닥칠 적을 요리할 것만 생각합시다.”

“존명!”

열세 살치고는 너무 똑 부러지게 얘기하고 지시를 내리는 편월에게 두 사람은 길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명령대로 서둘러 군사를 수배해 성을 나섰다.

‘삼만 오천 대 칠천.’

두 사람이 가고 나자 편월은 새삼 적과 아군의 병력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아군은 새로 귀속된 포로를 합쳐서 겨우 칠천이 조금 넘고, 더 이상 불어날 건덕지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적은 아군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숫자다. 게다가 대인성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조환에게 알려지면 허주 각처에서 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적의 병력이 얼마만큼 늘어날지 추측조차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마용승이 원군을 보내 줄 거라고 오강과 서진청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그 점은 편월로서도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자신들이 버림돌 신세란 건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고, 그래서 죽영과 유화가 인질로 잡혀 있음에도 앞으로 가야 할 길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쨌든 칠천을 상회하는 군세다. 이 정도라면 지휘하기에 따라 이삼만의 적군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만에 하나 농성에 실패한다면?

‘그땐 유랑 군세가 되더라도 어쩔 수 없겠지.’

그렇게 되면 떨어져 나가는 병사들도 속출할 것이다. 칠천의 절반만 남아도 고마워해야 할 터였다.

그래도 좋다고 편월은 생각했다. 마음이 떠난 병사들은 아무리 많은 숫자가 있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동안의 전쟁 경험으로 충분히 절감하고 있었다.

‘청월대마저 동원시킨 싸움이다.’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지면 보급대까지 곧바로 최일선이 될 대인성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던 편월이다.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여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을 상대할 결심의 표현이었다.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오, 대장군?”

“아! 송 군감, 어서 오시오. 그 뒤로 적의 움직임에 대한 다른 보고가 있었소?”

“아직 적이 움직이고 있는 기척은 없소이다. 담전성으로 율천국의 원군 삼만이 들어간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적어도 오늘 밤과 내일 낮 동안은 적의 공격이 없겠군.”

삼만 오천의 군세라면, 그들을 모두 진발進發시키는 데에도 한나절은 족히 걸릴 터였다. 게다가 이 염천에 이백 리 길을 행군한다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그 정도 군세가 움직이면, 이 근처의 길은 물론 논밭이 온통 인마로 뒤덮일 게 뻔했다. 속도를 내서 걸을 수가 없다는 얘기다.

“포로들이 생각보다 협조적이라 다행이오. 허주군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고향이 허주가 아닌지라 조환이나 허주군에 원한을 가진 자가 많더이다.”

“그래도 적의 간인은 조심하시오. 그리고 불에 탈 만한 건물은 우리 손으로 태워 버리는 게 좋겠소. 물도 많이 비축해 두라고 하시오.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이 오면 그들도 가장 먼저 각 성의 물길부터 끊을 것이오.”

“지금쯤 병사들이 건물들에 기름을 끼얹고 있을 거요. 물도 총력을 기울여 확보하고 있소이다. 그런데 소인성과 진동성은 어찌할 생각이시오?”

편월이 명을 내리기도 전에 송지는 벌써 병사들에게 건물을 태울 것과 물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려 둔 모양이었다. 그래서 선뜻 다른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그 점이 나도 고민이오. 송 군감에게 좋은 생각이 있으시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편월이 오히려 송지의 생각을 물었다.

“이참에 허물어 버리는 게 어떻겠소? 적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주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듯하오. 지금 대인성에 들어가 있는 청월대에 맡기면, 내일까지 중요한 곳은 대부분 부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게 좋을 듯하군. 당장 청월대의 두 장군에게 전령을 보내시오.”

“알겠소이다. 병사들이 건물을 태우기 전에 한숨 주무시오. 불이 붙으면 연기가 매워 잠도 제대로 못 잘 터이니.”

한마디 던지고 밖으로 나가는 송지의 말에 편월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전쟁에 이골이 난 몸이라, 연기 아니라 썩어 가는 시체들 옆에서도 잘 수 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그의 나이가 의식되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잠을 좀 자 두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부터 내일까지가 그나마 한가할 게다. 그 뒤론 또 정신없이 싸워야 할 테니 말이다.

편월은 성벽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곧 태워질 건물 안에선 잘 수가 없으니,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 섞여 잘 생각이었다.

“대장군, 대장군은 어디 계시오?”

편월이 막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누군가 숨 가쁜 고함으로 찾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다, 여기!”

귀찮았지만, 편월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는 바람의 변화 하나에라도 신경을 써야만 한다.

“모용추 대인의 상단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그래?”

편월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모용추가 보낸 사람이라면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을 게 틀림없다.

사실 모용추가 보낸 사람이 가져온 정보는 편월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아니, 짐작하고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게다. 삼만에 달하는 율천국의 원군이 담전성으로 들어갔다는 것과 내일 아침 출동을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예상하고 있던 것과 사실로 확인된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새롭지도 않은 소식이었지만, 그걸 전해 들은 정허군 사이에선 보다 강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2

그날도 아침을 먹기 무섭게 외출을 나가는 기씨 부인을 보며, 서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러면 점점 더 윤 대부인의 눈 밖에 날 텐데.’

서수는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윤 대부인과 기씨 부인이 사이좋게 마씨 집안의 융성을 도모했으면 좋겠다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서수가 간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설사 할 수 있다고 해도 하기 싫었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마용승과 기씨 부인을 떼어 놓을 방법을 강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게만 되면 잃어버린 건강은 저절로 되찾게 될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어떤 땐 간혹 기씨 부인보다 훨씬 더 예쁜 여자를 소개하고 싶기도 한 서수였다.

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는 것만큼 소비적이고 머리 아픈 것도 없다. 서수는 애써 생각을 돌렸다.

‘그런데 그 후로 편월에게선 전혀 소식이 없군.’

역시 지금 서수의 마음이 가장 쏠리고 있는 건 편월, 즉 정허군의 동정이었다. 율천국에서 원군을 내는 건 거의 확실한 것 같으니, 그 뒤로 무슨 연락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전혀 소식이 없다. 석축산이 있는 윤주의 성주에게 문의도 해 봤지만, 그들 역시 보급만 맡아서 할 뿐 세세한 건 모르고 있었다.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해야겠군.’

이 생각은 지금 막 즉흥적으로 떠오른 게 아니었다. 사부인 구양파가 죽은 이후,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을 때부터 쭉 생각해 왔던 문제였다.

그러나 거기에도 걸림돌은 있다. 바로 기씨 부인의 치마폭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마용승이었다.

간인은 저절로 만들어지거나 부려지는 게 아니다. 훈련부터 시작해, 그들이 활동할 때는 엄청난 돈이 든다. 서수 개인의 힘으로 감당할 만한 액수가 아니다.

‘우선은 송용조 상단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지만, 다음에 주공을 뵐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말씀드려야겠군.’

이런 시대의 정보는 곧 한 나라의 흥망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수가 이처럼 정보망 구축에 늦은 건 순전히 송용조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상단이 제공해 주는 정보만으로도 지금까지는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걸로 부족할 판이다. 당장 편월이 이끄는 정허군의 움직임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정허군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헛일이다 싶어 서수는 보고 있던 지도를 말아 버렸다.

‘막주 침사성에 들어간 광운 장군은 서서히 그곳의 인심을 얻어 수군을 기르는 일도 착착 진행되어 가고…….’

그렇게 되면 당면한 문제는 아무래도 마용승이다. 지금처럼 첩의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면, 여태 닦아 뒀던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서수는 갑자기 조급해졌다.

‘지금 당장 주공을 뵈어야겠다.’

생각과 동시에 서수는 방을 나섰다. 어차피 마용승이 나오는 건 기대하기 어려우니,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직접 찾아가려는 것이다.

예상대로 내전으로 통하는 문에서 서수는 제지를 당했다. 다만 지난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한 번의 경험을 통해 그가 마용승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는 걸 경비병들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공, 서수이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사옵니다.”

기씨 부인의 방 앞에 선 서수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왔다는 걸 알렸다.

그러나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밤새 육욕에 빠져 있다가 늦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주공!”

서수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서수는 문을 조금 열었다.

“실례되는 줄은 알지만, 긴급한 일이라 들어가겠사옵니다.”

말과 함께 서수는 문을 열었다.

“억!”

기도가 막힌 듯한 경악성이 서수의 입에서 토해진 건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주, 주공…….”

커다랗게 눈을 부릅뜬 채 서수는 마용승을 불렀다. 실제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답은 없었다. 목만 잘려 탁자 위의 쟁반에 올라 있는 사람이 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서수는 황급히 눈을 비볐다.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될 광경이 눈앞에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확인을 해도 그 목은 마용승의 것이 분명했다.

털썩!

서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버렸고,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이 무슨… 이 무슨…….”

멍하니 주저앉은 채 서수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침착해지려고 애를 썼지만, 가슴이 연방 벌렁거려서 진정이 되지 않았다.

“경비병! 경비병은 어서 이리로!”

간신히 서수가 고함을 질러 경비병들을 부른 건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무슨 일이… 앗!”

달려온 내전 수문 장수와 병사 한 명도 방 안의 광경에 경악성을 토하고 말았다.

“쉿! 조용, 조용히!”

소리를 지르려는 수문 장수와 병사를 서수가 재빨리 제지했다. 마용승은 대륙의 서쪽을 지배하고,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진남후에 제수되었던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쉽사리 알려져서는 안 된다.

“지금 곧 이 사실을 은밀히 윤 대부인께만 알려라. 아직은 다른 사람에겐 절대로 알리지 마라.”

“존명!”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복명한 병사는 휘청거리는 발길로 방을 빠져나갔다.

“대, 대장군께 알려야 하지 않겠소?”

수문 장수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직속상관이라면 당연히 현재의 대장군인 호유진이다. 이만한 중대사는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게. 일단 윤 대부인의 말씀부터 들어 보기로 하세. 그보다…….”

비로소 조금씩 냉정을 찾기 시작했는지, 서수의 말투가 조금은 침착해졌다.

“당장 각 관문과 성에 파발을 띄우게나. 이유 불문하고 기씨 부인을 잡으라고.”

“그, 그럼 기씨 부인이 흉수라고 생각하시는 거요?”

“그녀 말고는 달리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네!”

서수의 말투는 단호했다. 마치 기씨 부인이 마용승을 죽이는 걸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물론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시대가 이러니만큼 위로는 황제에서부터, 아래론 각 성의 성주들에 이르기까지 그 부인과 동침을 할 때도 경비원들을 침실에 대기시켜 두는 게 상례다.

그런데 기씨 부인은 처음부터 그걸 거부했다. 경비원이 있는 곳에선 절대로 동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문제에 관해서 마용승은 속수무책이었으리라. 기씨 부인의 미모에 빠져 있었으니, 그녀의 말대로 경비원들을 모두 물리쳤을 것이다.

그게 바로 오늘의 이 흉사凶事로 나타났다. 서수가 대뜸 기씨 부인을 흉수로 간주한 건 하등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호 대장군께 보고를 하지 않고 각 관문과 성에 파발을 띄운다는 건 어렵소이다. 그러니 우선 보고부터 하는 게…….”

내전 수문 장수가 말을 하고 있는 사이, 방을 향해 다가오는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서수는 재빨리 탁자 위에 있는 마용승의 목을 침상으로 옮겨 이불을 덮어 씌웠다. 이 발소리는 윤 대부인의 것이 분명할 터, 그녀에게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 주긴 싫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전갈하러 갔던 병사에게 대강의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윤 대부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방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그 순간 서수는 핏자국을 미처 감추지 못한 자신을 가볍게 질책했다. 시신과 목은 이불로 덮으면 당장 보이지는 않았지만, 침상을 흥건하게 적신 피는 그렇게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 안의 광경을 본 윤 대부인은 ‘헉!’ 하며 숨을 몰아쉬었고, 잠시 휘청거렸다.

“부인!”

서수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그대로 쓰러진다면 탁자에 부딪쳐 크게 다칠 우려도 없지 않았다.

“괜찮아요.”

의외로 윤 대부인은 침착했다. 잠시 멈췄던 숨을 길게 내뿜으며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횡사橫死를 당하신 건 확실한가요?”

“송구하오나…….”

서수는 말을 얼버무렸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죽었다.’라고 확실히 얘기한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로 여겨졌다.

“이불을 걷어 주세요.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셨는지 보고 싶어요.”

“부인, 그, 그건… 우선 의생에게 먼저 보이는 게 나을 듯하옵니다.”

마용승의 시신을 확인하겠다는 윤 대부인을 서수가 극력 말렸다. 목이 잘려 나간 모습을 어떻게 보이겠는가 말이다. 먼저 의생에게 그 목을 다시 봉합하라고 한 뒤에 가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게 좋을 듯했다.

“이런 난세에선 그리 드물지도 않는 일인데, 누구 한 사람도 그 요망한 계집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았나요?”

약간의 원망이 섞인 윤 대부인의 말에 서수는 다시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말은 조금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이백 년이나 지속된 전국에서의 삶은 부부라고 해도 결코 완전히 믿지 못한다. 정략적인 혼인이 많으니, 여차하면 서로의 목숨을 뺏는 일도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주공께서 기씨 부인에게 너무 빠져 계셔서…….’

이런 핑계를 대지 못할 것도 없는 서수였다.

하지만 윤 대부인의 입장에선 너무 잔인한 말이 될 게 뻔하기에, 서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주공의 시신 처리는 저희에게 맡겨 주시고, 부인께선 공자의 안전에 만전을 기해 주십시오.”

마용승이 죽었다고 해서 파양주가 당장 망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더욱 바짝 차리고 뒷일을 수습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선 윤 대부인도 확실히 대륙의 서쪽을 지배했던 마용승의 정실다웠다. 잠시 침상 쪽을 망연히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렸다.

“알겠어요. 뒷일을 차질 없이 처리하도록 하세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부인과 공자의 안전입니다. 매사에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지금처럼 마용승이 암살당했을 땐, 같은 편들도 조심해야만 한다. 마국립은 이제 겨우 네 살이니, 신하들이나 장수들 중에서 엉뚱한 생각을 갖는 자가 나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소장은 호 대장군께 보고부터 해야 될 것 같소이다. 그래야 각 성과 관문에 비상조치를 취하게 될 테니 말이오.”

“그보다 의생부터 먼저 불러오시게. 대장군에게 보고하는 건 그 뒤라도 늦지 않으니.”

“알겠소이다.”

마음 같아서는 마국립이 완전히 후계 계승을 끝날 때까지 마용승의 죽음을 숨기고 싶은 서수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문 장수의 말처럼 전군에 비상을 걸려고 해도, 또 마국립이 무사히 마용승의 뒤를 잇게 하기 위해서라도 군의 힘이 필요하다. 호유진에게 알리지 않고는 될 일이 아니었다.

‘광운 장군과 편월에게도 알려야 할 텐데.’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껄끄러운 부분이 없지 않은 문제였다. 광운과 편월은 어디까지나 잡가군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마용승의 죽음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편월의 군세는 독립적인 성격이 짙다. 애당초 말도 안 되는 병력과 빈약한 지원만을 약속했으니 어쩌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불러들였을 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

거기에 비해 광운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비록 잡가군이지만 마용승의 명에 따라 막주 침사성의 수비 장수로 부임했으니까. 비록 편월을 비롯한 이탈병들의 죄를 문책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말이다.

‘아니, 이 일을 알리기 전에 먼저 해야 될 일이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집무창으로 옮긴 죽영과 유화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광운과 편월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또한 최악의 경우 그녀들을 이용해 두 사람을 통제할 수도 있을 터였다.

때마침 수문 장수가 의생을 데리고 와서 서수는 곧장 방을 나섰다. 물론 집무창의 죽영과 유화에게 가는 길이었다.

* * *

담전성주 도연각과 원군대장인 소우종의 미간이 재차 일그러졌다. 조휴령의 초입에서 적의 매복에 걸려 한차례 고생했었는데, 이 정상에서 다시 후미를 공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성가시구려.”

대열의 가운데에서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가는 소우종에게 도연각이 말을 붙였다.

“숫자가 적으니 유격전을 벌이는 것이겠지요. 아군의 피해가 그리 심한 게 아니니, 적당히 상대하면서 대인성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는 게 좋겠소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척후병의 보고에 의하면 소인성과 진동성은 거의 파괴되었다고 하니, 결전은 대인성이 될 듯하오.”

“그보다는, 도 장군께선 굳이 출전하지 않으셔도 될 일이었소. 연세가 드셨다는 게 아니라, 원군으로 달려온 우리의 체면도 있으니…….”

“이건 우리 허주의 위기요. 어찌 원군에만 의존해서 뒷짐 지고 있을 수 있겠소?”

“그런데 중간에 합류했던 이 대인성의 병사들은 왜 담전성으로 철수하라고 하셨소?”

“그 병사들은 이미 한 번의 패배를 맛보았소. 그들을 진중에 섞어 두었다간, 자칫 다른 병사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오.”

도연각의 대답에 소우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패전을 경험한 병사들은 적에 대해 위축감을 갖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게 전군으로 확산될 가능성에 대해 이 허주의 노장은 우려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마용승은 대체 무슨 마음으로 일만도 안 되는 병력으로 허주를 침공했을까요?”

“막주를 치고서 기고만장해진 거 같소이다.”

“그런데 허주의 조환 공은 정말 막주의 목철린과 손을 잡을 작정이셨소?”

연거푸 던져진 소우종의 질문에 도연각은 슬쩍 외면해 버렸다. 아무리 원군이라지만, 외부의 사람에게 얘기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소장이 괜한 걸 여쭌 것 같소이다. 근데 도 장군께서는 어떤 작전을 구상하고 계시오? 적군이 두 개의 성을 파괴한 걸 보면 아무래도 대인성에서 농성할 것 같은데…….”

“일만도 되지 않는 적에 비해 우린 삼만 오천이오. 그러니 어떤 싸움을 하든 우리 의도대로 되리라 생각하오.”

“하지만 적들 가운데도 탁월한 장수가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소. 불과 사흘도 지나지 않아 대인성과 그 부성을 다 떨궜으면, 비록 적이라도 그 능력을 인정해 줘야 되지 않겠소?”

“흥! 편사중이 지키고 있는 성이라면, 이 몸도 일천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낙성시켰을 것이오!”

대답하는 도연각의 말투에는 짜증을 넘어선 경멸까지 묻어 나왔다.

“왜 그러시오? 듣자니 편 장군은 조환 공과 인척지간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중요한 곳의 수비를 맡은 게 아니었소?”

“아무리 인척이라지만, 능력도 없는 자에게 군사를 맡기는 건 아니 될 일이오. 그러니 채 일만도 안 되는 적병에게 성을 넘겨줬고, 그 자신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더이다. 최소한 자결할 용기조차 없는 자이니, 달리 말해 뭐 하겠소!”

“아무래도 도 장군께선 이번에 적진에 많은 간인들을 심어 두신 거 같소. 그토록 정보에 밝으신 걸 보니 말이오.”

“적진에 숨겨 둔 게 아니었소. 편사중이 성주로 부임했을 때부터 간인을 파견했었소. 하도 불안해서.”

“그처럼 신뢰를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요처의 성을 맡긴 조환 공의 아픔을 알 것도 같소이다.”

“끄으흠!”

마침내 도연각은 침음성을 토하고 말았다. 외부인에게 허주의 치부를 보인 것 같아 내심 께름칙했다.

하지만 편사중이 무능력한 것도 사실이다. 요즘과 같은 난세에서 그건 바로 그 자신만이 아니라 숱한 부하들의 목숨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그러니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후미의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지는 것 같소이다. 소장이 한번 가 봐야겠소.”

소우종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뒤쪽을 살폈다. 거기선 여전히 전투 중인 듯, 싸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내가 가 보리다. 소 장군이 움직이면 아무래도 많은 군사도 같이 움직여야 되니, 보다 빠른 우리 허주군이 가는 게 좋을 듯하오.”

“어찌 노장군께 그런 수고를 끼치겠습니까? 이번 싸움에서 허주군은 훈련 나온 셈 치시고 그냥 지켜봐 주시오.”

얘기를 끝낸 소우종이 막 말 머리를 돌리려 할 때, 후미에서 전령의 깃발을 꽂은 기병 일기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보고! 약 일천에 달하는 적병들이 후미의 보급대에 공격을 가해 상당량의 식량이 불타고, 공성 무기 역시 많이 유실되었습니다! 지금 놈들을 물리쳤고, 약 삼천의 기병으로 그들을 쫓고 있습니다!”

“보급대와 공성 무기를 노렸다니 간교한 놈들이군. 하지만 물리쳤다니 수고했다. 돌아가서 다시 전해라. 보급대를 호송해서 되도록 빨리 대인성으로 집결하라고. 달아난 자들은 쫓지 않아도 좋다.”

“존명!”

“서두르는 게 좋겠소. 아무리 적의 병력이 적다고 해도, 어두워진 뒤에 공격을 받으면 귀찮아지니까.”

전령을 돌려보낸 소우종은 말의 속도를 조금 빨리해서 달렸다.

3

서진청과 오강이 이끄는 적월대와 흑월대의 꼬리를 물듯이 하며 몰려든 적군을 보고 있자니, 편월은 조금 질리는 기분이었다.

사실 삼만 오천이라는 군세를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건 아니다. 다만 그만한 대군의 적을, 막 시작된 석양 속에서 맞고 보니 그 숫자가 실제보다 훨씬 많은 것처럼 느껴졌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미 전쟁의 활시위는 놓였다. 거의 모든 걸 태워 버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 수령성에서 최대한으로 적의 발길을 오래 세워 둬야 한다. 그래야 조휴령 초입에서 적에게 최초의 일격을 가했던 백월대를 비롯한 다른 부대가 대인성으로 복귀할 시간을 얻게 된다.

“좋아, 화살 따위는 아낄 것 없소. 마음껏 쏟아 붓고 우리도 대인성으로 철수하면 되니까.”

“알겠소!”

“존명!”

허주와의 전쟁 이후로 늘 곁에 있다시피 했던 송지와 지두룡이 각기 대답하며 성루로 달려갔다.

이미 대인성까지의 퇴로는 확보해 두었다. 적들이 운제든 충차든 혹은 투석기投石機로 공격한다고 해도 하등 아까울 이유가 없었다. 이미 성안에 있던 건물들은 대부분 태워 버렸고, 성벽이나 성문이 파손된다고 해도 그건 허주군의 손해일 따름이다. 잠깐이라도 그들의 휴식처가 될 수 있는 곳을 스스로 파괴하는 결과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하긴 인명의 피해가 나는 것까지 완벽하게 막을 순 없다. 그 경우에도 적병들이 훨씬 많이 죽어 나가겠지만 말이다.

‘송용조 상단에서 보급받은 흑유黑油(원유)가 제 기능을 발휘해야 되는데.’

낮에 성 밖의 지형을 살피러 나갔던 길에, 적이 진을 치리라 예상된 곳엔 어김없이 흑유를 매설하거나 근처 탈 만한 곳에 뿌려 뒀다. 불화살 한 방이면 그 근처는 온통 화염지옥으로 변할 터, 의도했던 대로만 된다면 그 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물론 적들도 코가 있으니 기름 냄새를 맡을 건 분명하다. 그래도 별로 걱정하진 않았다.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기세다. 율천국에서 삼만이나 되는 원군을 끌고 와서, 고작 기름 따위에 놀라 물러선다면 적군의 사기는 반감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은 연이은 정허군의 공격으로 약이 바짝 올라 있을 게다. 상당한 식량과 공성 무기를 잃었으니, 그 복수전을 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물러서진 않으리라. 어쩌면 그들의 공격이 더욱 강하고 철저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그게 편월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고.

둥둥둥둥-!

돌연 성루에서 전군의 소집을 알리는 북소리가 터져 나왔다. 송지나 지두룡 중 한 명이 울리고 있을 터였다.

그에 따라 성안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각기 한 무더기의 화살을 들고 성루로 달려가는 병사들의 모습에선, 터질 듯한 사기가 느껴졌다.

왜 아니겠나. 그들은 이미 한차례의 싸움에서 대인성과 그 부성들을 모두 빼앗았다. 그 승전의 여파가 아직도 병사들의 눈을 강한 투지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는 반대로 북소리와 더불어 편월 주변으로 모여드는 자들도 있었다. 다름 아닌 맹아와 근위대원들이었다.

“여기 모두 몰려와 있을 필요는 없다. 좀 있다 송 군감도 오실 테니, 그대들도 전투에 참가하도록. 맹 장군, 이들을 이끌고 성루로 가시오.”

“바로 그 송 군감의 명으로 오게 된 거요. 지금은 무엇보다 대장군의 안위가 가장 중요할 때! 그러니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대장군을 모시고 대인성으로 먼저 철수하라는 말씀이셨소.”

“뭐? 나더러 먼저 대인성으로 철수하라고?”

“그렇소. 이 수령성에서의 싸움은 비록 늙었지만 이 송지가 멋지게 해 보일 테니, 대장군은 먼저 물러가 뒷일에 대비하라고 하셨소.”

“안 돼! 그렇게 하면 아군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걸 모르나? 철수할 때가 되면 물러가지 말라고 해도 물러갈 테니, 그 염려는 말고 근위대원들도 모두 전투에 참가하도록!”

바로 그때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어두워 가던 하늘이 훤하게 밝아졌다. 쌍방에 불화살을 쏴 댔기 때문이다.

“자, 전투가 시작되었소! 소질풍은 이미 준비되었으니, 어서 대인성으로 철수하시길!”

편월의 갑옷 자락을 마구 잡아끌며 말하는 맹아의 어조는 거칠었다. 싸움에 임한 전국 남자들의 전형적인 목소리였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편월은, 그러나 그대로 입을 다물며 눈을 감았다. 송지가 이런 말을 해 왔다는 건 그만큼 전황을 어둡게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자신이 처음 적병들의 숫자에 약간 기가 질렸던 걸, 그 역시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편월의 발길을 이 수령성에 머물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신과 송지가 적의 숫자에 위축감을 느꼈다면 병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때 자신이 먼저 대인성으로 철수해 버린다면 아군은 분명히 동요하게 될 테고, 그건 곧바로 패전으로 직결되고 만다.

무릇 일군을 지휘하는 대장군이라면 스스로의 힘을 너무 맹신해서도, 또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개개인의 싸움이 인간의 개인적인 감정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면, 집단 간에 벌어지는 전쟁은 그 위에 냉철한 이성적 계산도 덧붙여진다. 그래서 작전이 있고, 하나의 전투를 위한 앞뒤의 공작도 필요한 것이다.

물론 전쟁의 승패는 냉정한 계산에만 좌우되는 게 아니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아군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그때그때의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다.

바로 지금이 그런 시기라고 편월은 판단했다. 승리 후에 잔뜩 고무된 사기를, 그대로 적에 대한 아군의 우월감으로 이끌어야 할 때다. 턱도 없는 힘을 맹신해서 무리하게 행동해서도 안 되지만, 위축된 모습을 보일 필요는 더더욱 없다. 아니, 이런 땐 오히려 장수의 큰소리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아, 말 그대로 일당백의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려면 말이다.

다시 한 번 성 밖에서 함성이 올랐다. 이건 기세를 돋우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동시에 성의 바깥쪽이 갑작스레 훤히 밝아졌다. 낮에 매설하거나 뿌려 뒀던 흑유에 드디어 불이 붙은 게 틀림없었다.

“맹 장군도 이 소리를 듣고는 싸우고 싶어졌을 거요. 사양하지 말고 마음껏 싸우고, 그 뒤에 철수해도 늦지 않소. 그러니 다 같이 성루로…….”

“그 싸우고 싶은 마음을 이처럼 누르며 철수를 권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전은 대인성에서 하겠다고 대장군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소. 그러니 조속히 물러가서 그 준비를 하는 게 이 전투에서 이기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편월도 그랬지만, 맹아의 고집도 여간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마냥 달래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싸움에 임해 몸을 사린 지휘관의 말로를 맹 장군은 보지 못했나? 그자가 바로 대인성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걸 빤히 아는 내게 그자처럼 가장 먼저 철수를 하란 말인가? 분전하고 있는 부하들을 버려두고?”

기어이 편월은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갑옷 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맹아의 손을 세차게 떨쳐 버리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대장군, 너무 경솔하시오! 어찌 천의 목숨을 아껴, 나머지 육천을 도외시하는 것이오? 에잇,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 바보 대장이다! 근위대는 따르라!”

자신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루로 가 버린 편월의 뒤에서 맹아는 거칠게 내뱉었다. 곧이어 그 역시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성루에는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밖에서 흑유가 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활을 쏘는 병사들의 시야가 상당히 좁아진 건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지두룡은 연방 북을 두드리며, 고함으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팔이 한쪽뿐이니 활을 쏠 수는 없는 노릇, 그로선 최선을 다해 싸움에 임하는 것일 터였다.

“계속 쏴라! 적들은 보기 좋게 우리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숨 돌릴 틈을 주지 말고 계속 쏘아 붙여라!”

“아니, 대장군!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소? 속히 대인성으로 철수하시라는 소장의 전갈을 듣지 못하셨소?”

지두룡 옆에서 활을 쏘며 역시 분전하고 있던 송지가 편월을 알아보고 다급한 어조로 말을 붙였다.

얼굴에 온통 그을음이 앉아 눈의 흰자위와 이만 새하얗게 보이는 몰골이었다.

“어찌 물러갈 수 있겠소? 저 좋은 광경도 보지 않고. 그런데 맞바람이라 다들 고생이 심하군.”

“그리 좋은 광경은 아니오. 저렇게 불타 죽는 자들에게도 딸린 식구가 있을 테니까. 그보다는 지금이라도 대인성으로 철수하시오. 이 연기 속에서는 오래 싸우지도 못할 것 같소. 그러니 우리도 곧 뒤를 따르겠소.”

미리 뿌려 두었던 흑유에 의해 온몸이 불길에 휩싸여 쓰러져 가는 적병들이 안타깝다는 투로 다시 한 번 편월의 철수를 당부했다.

“말해 봐야 이미 헛일이오! 같이 싸우다가, 갈이 철수하는 거요!”

“대장군이 되어서도 여태 직접 적을 상대하고 싶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셨소? 그래 가지고는 전군이 위태롭게 될 수도 있소!”

“대인성엔 담 장군도 있고, 나머지 부대의 대장들도 있소. 누구보다 전투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니, 내가 가지 않아도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 둘 것이오.”

‘말은…….’

어느 노숙한 장군 못지않은 이치와 어투로 내뱉는 편월이라고 송지는 생각했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전쟁에 관한 얘기나 문제에 있어서 편월은 늘 그 나이를 훌쩍 상회하곤 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 지난 몇 달 동안 정허군의 대장군 노릇을 하면서 이상한 관록까지 덧붙여졌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아무에게나 말을 함부로 한다면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슬슬 어린아이티를 벗을 때도 됐지.’

무엇보다 편월은 어리다는 이유로 전장에 나선 같은 편의 사기를 진작시켰고, 상징으로까지 자릴 잡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보면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는 것도 괜찮다.

실제로 그 또래의 늙은 병사들 중엔, 지금의 편월 나이인 열세 살 때부터 창을 잡고 전장에 나섰던 자들이 드물지 않았다.

“좋소이다. 그럼 대장군은 언제쯤 철수할 생각이오?”

“저 불길이 잡히면 놈들은 본격적으로 공성 무기를 동원할 거요. 그걸 최대한 많이 부순 뒤에 대인성으로 물러갑시다.”

편월의 대답에 송지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병력 차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또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있던 참이었다.

요는 적이 갖추고 있는 공성 무기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그것들만 파괴했다. 사전에 최대한 없애 두지 않으면 어차피 대인성에서의 농성 시 그 부담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되기 때문이다.

“적도 이 불길을 이용하는 것 같군.”

“예? 아, 그렇구려.”

갑자기 들려온 편월의 말에 송지는 의아한 듯 되묻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바람이 불고 있는 점을 이용해 적이 미처 잡히지 않는 불길 속에다 고춧가루나 인분 같은 걸 집어넣은 것 같았다.

“흔한 일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오. 또 불길도 거의 꺼져 가는 듯하니, 놈들이 다시 공격을 해 올 것이오.”

별일 아닌 것처럼 송지는 말했지만, 막상 당하고 있는 병사들은 고역이었다. 눈물, 콧물에 연방 재채기를 해 대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따지면 송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바람의 방향이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불을 질러 그 속에 적병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온갖 물질을 넣어 태우기도 한다. 화공의 일종이지만, 적을 태워 죽이는 것보다는 무력화시키는 데 더 중점을 둔 공격이란 점에선 약간 차이가 난다.

그래도 병사들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잘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이처럼 매운 연기 속에서도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한 적의 충차를 향해 불화살 쏘는 걸 멈추지 않았고, 일부는 운제를 밀어낼 장대를 들고 대기했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말이다.

“적의 피해가 얼마쯤 될 것 같소?”

“흑유에 의해 타 죽거나 부상을 당한 자들이 족히 삼천은 넘을 것이오.”

“우리 측 피해는?”

“아직 정확한 보고는 받지 못했지만, 이백은 될 것 같소이다. 적이 투석기를 가동시킨다면 아마 피해는 훨씬 늘어날 거요.”

송지의 말을 들으며, 편월은 그만하면 괜찮은 전과戰果라고 생각했다. 아군 이백에 적군 삼천이면 한 명이 열다섯을 상대한 셈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싸울 수 있다면,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 정도는 거뜬하게 물리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처럼 쉬운 싸움을 계속할 수 있느냐는 데에 있다. 당장 대인성으로 철수할 때만 해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게 틀림없다. 어떤 경우에도 후퇴전은 지극히 어려우니까 말이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성벽이라는 구조물을 의지 삼아, 미리 준비해 뒀던 여러 가지를 이용한 공세였다. 당연히 적의 피해가 아군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퇴전은 그야말로 자기 자신만 믿고 싸울 수밖에 없다. 쌍방이 비슷한 숫자라고 해도 물러가는 입장인지라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십상인데, 숫자가 차이 나도 너무 난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군의 피해가 막심할 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드디어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소이다!”

다급한 송지의 말에 편월은 성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어둠과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속에서 적의 충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충차의 뒤에선 운제를 든 병사들의 모습과, 투석기가 틀림없을 거대한 구조물들이 무성하게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걸 확인한 편월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달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오늘이 칠월 초하루, 달이라고 해 봐야 초저녁에 살짝 모습을 보일 초승달이다.

본격적인 철수가 시작되면 그땐 완전히 어둠에 잠길 터였다. 이 역시 아군에게 유리하면 유리하지, 결코 불리한 요소는 아니었다.

다시 성 밖이 훤하게 밝아졌다.

병사들의 집중적인 불화살 공격을 받은 적의 충차 세 대가 불타고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편월은 충차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지금 적의 투석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적은 이 성루를 곧바로 노리고 투석을 할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아군의 피해가 발생한다. 어떻게든 그게 최소화되길 간절히 바랄 따름이었다.

꾸웅, 와르륵!

둔중한 굉음과 함께 타다 남은 건물의 잔해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드디어 적이 투석기를 가동시킨 것이다. 그걸 기점으로 적들은 무수한 바위 덩어리를 쏘아 댔다.

하지만 편월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아직 적은 성루를 제대로 겨냥하지 못한 상태다. 본격적인 피해는 놈들이 정확한 거리 측정을 끝낸 후가 될 게다.

“보고, 근위대장인 맹 장군께서 방금 오십여 기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갔소이다!”

“뭐?”

누군가의 말에 편월은 그쪽으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화응이었다.

“왜 말리지 않았나?”

“미처 손쓸 사이도 없었소. 원래는 혼자 출격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나마 근위대원 쉰 명 정도가 그 뒤를 따라갔소이다.”

“뭐 때문에? 대체 뭘 하려고 성 밖으로 나간 거야?”

“대장군께서 대인성으로 철수하실 때까지 바깥의 적들을 치고 있겠다고 큰소리치면서…….”

“그런 멍청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편월은 발을 구르며 언성을 높였다. 맹아가 설마 그런 극단적인 방법까지 쓸 줄은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앗, 저기 맹 장군이오!”

갑자기 송지가 소리를 지르며 성 밖을 가리켰다. 어둠과 연기에 가려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문드문 아직 타고 있는 불길이 비칠 때마다 얼핏 드러나는 얼굴들은 분명 맹아와 근위대원들이었다.

“송 군감, 흑유는 얼마나 남았소?”

“많이 사용했지만 아직은 상당히 남았소. 최악의 경우 이 성을 완전히 태워 버리기 위해 남겨 둔 거요.”

“화응은 당장 그 흑유를 몽땅 가지고 맹 장군이 나갔던 문에 대기하고 있도록! 나머지 근위대원들에게도 그렇게 전하라!”

“대장군, 대체 어떻게 하실… 웃!”

꽈아앙!

송지가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근처 성루에서 무서운 굉음과 함께 돌가루가 마구 튀었다. 가까운 곳에 적의 투석이 적중한 모양이었다.

“송 군감, 서둘러 병사들을 대인성으로 철수시키시오! 작전은 낮에 세워 뒀던 그대로요!”

말이 끝나자마자 편월은 그대로 성루에서 구르듯이 달려 내려갔다. 뒤에서 뭐라고 고함을 지르는 송지의 말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적의 투석은 연방 성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쪽이오!”

성루에서 내려오자마자 화응이 편월을 불렀다.

“흑유는?”

“다른 대원에게 시켰소! 그런데 정말 어쩌시려는 거요?”

“어쩌긴, 맹 장군을 구해야지!”

“뭐요? 아무튼 다들 미친 사람들 같군!”

“미치지 않고 이 전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같은 미친놈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여기 남아!”

마치 예전의 성격 그대로 되돌아간 듯한 한마디를 쏘아붙이며, 편월은 근위대가 집결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젠장, 저러니 따르지 않을 수도 없고! 퉤!”

투덜거림 끝에 침을 한차례 뱉은 후, 화응은 이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대장군께서 출격하신다! 문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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