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세일상亂世日常 1 (27/66)

난세일상亂世日常 1

1

지난 며칠간 담전성의 성주인 도연각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삼천 혹은 오천씩 무리를 지어 속속 입성하는 율천국의 병사들 때문이었다.

‘주공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가?’

허주의 서쪽 방벽이라고 할 수 있는 대인성에서 위급의 봉화가 오른 건 어젯밤이었다. 그때 곧바로 담전성의 병력을 이끌고 출동했으면, 지금쯤 아군을 구해 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환은 벌써 며칠 전부터 병력의 출동을 엄격히 금했다. 그리고 율천국의 병사들을 맞아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조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른 지시 사항도 있었다. 이번 싸움에선 일절 허주의 병력을 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정허군은 율천국의 원군에게 맡기고, 그 원군의 안내만 하라는 내용이었다.

바로 이런 점들이 노장 도연각의 심기를 건드렸다. 얼핏 생각해 보면 싸움은 율천국의 원군이 다 해 주니, 허주로선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만약 율천국의 힘으로 정허군을 몰아낸다면, 그때부터 가겸후는 노골적으로 허주의 내정에 간섭을 할 게 뻔하다.

아니, 내정의 간섭만이라면 어떻게든 참을 방도도 있을 것이다. 힘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이런 전국난세에선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니까 말이다.

문제는 원군의 탈을 덮어쓰고 들어온 율천국의 병사들이 그대로 침략군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데 있다. 오늘까지 이 담전성으로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 병력만 해도 삼만이다. 기병 일만과 보병 이만, 그만한 숫자가 일을 벌인다면 이 근처 백여 리가 온통 초토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일 게다.

‘주공께서 이번엔 판단을 그르치셨다!’

물론 도연각이 조환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전국사패戰國四覇라고 할 수 있는 자들 중 가겸후나 마용승, 증두신은 각기 황제로부터 관직을 받거나, 혹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있다.

그중 조환만이 유일하게 관직을 받지 못했고, 왕이라고 자칭할 힘도 아직은 부족한 상태다. 어떻게든 황실과 줄이 닿아 관직을 얻어야만 한 지방에서 군림하는 도적 같은 패주가 아닌, 전국난세의 각축에 뛰어든 웅주雄主로 천하에 이름을 내세울 수 있게 된다. 그걸 위해 가겸후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심정을, 도연각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몇 번을 양보하고, 또 한발 더 물러서서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어제의 적과 동료가 오늘은 뒤바뀌는 세상이라지만, 이렇게 약한 모습을 상대에게 보이고 인정받기를 바랄 수는 없다.

전국난세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를 한없이 요구한다. 그게 한 지방, 혹은 한 나라에 군림하는 사람이라면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하고, 마침내 쓰러질 때는 웃으며 죽어 가야 한다. 그렇게 강하게 살아야만 간신히 제 한 몸 걸어갈 만한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게 일흔 가까운 평생 동안 이 난세를 헤치며 살아온 도연각이 몸으로 체득한 진리였다.

지금도 조휴령에선 봉화가 오르고 있다. 아직 대인성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저 불도 피어올랐다 싶어 일견 안심도 되지만, 보다 빨리 원군을 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더더욱 도연각의 늙은 가슴을 졸아들게 했다.

‘그저께부터 입성한 율천국 병사가 삼만에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이끌 대장군은 왜 여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건가?’

원군인 율천국 병사들을 이끌 대장군은, 가겸후에 의해 자결을 명받았던 형인 소우기의 뒤를 이어 중주를 지배하고 있는 소우종蘇宇宗이다.

그는 진즉부터 이 허주에 들어와 있었다. 하정이 칠 주야에 걸쳐 가겸후를 설득했고, 원군을 보내겠다는 허락이 떨어진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소우종은 허주성으로 들어가 조환과 만났다.

거기까지는 좋다. 어느 곳이든 지원군의 총대장은 지원받는 곳의 우두머리와 회견을 하는 게 상례니까 말이다.

그런데 한번 허주성으로 들어간 소우종은 궁둥이가 무겁게 눌러앉아 도무지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그사이 삼만에 달하는 원군만 담전성으로 이동시켰을 뿐이다.

그 점이 또 불안해지는 도연각이었다. 가뜩이나 조환이 율천국에 원군을 청한 것 자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그였다. 그 총대장인 소우종이 허주성에 들어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도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원군 삼만.’

가슴속 불안을 떨쳐 버리려는 듯 도연각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을 돌렸다.

말이 쉬워 삼만이다. 평소 오천의 병력과 인근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담전성은 그만한 원군을 수용하기에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들에 대한 보급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허주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원군이다. 그들을 굶기거나, 혹은 헐벗게 한다면 허주에 사람이 없다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지난 삼 년간 애써 비축해 뒀던 군량과 물자가 바닥나겠군.’

이 험한 난세를 사는 대륙의 어느 성주가 그렇지 않을까만, 도연각 역시 엄청난 절약가였다. 먹는 것에서부터 입는 것, 심지어 차 한 잔까지 아껴 오천의 병사와 성민들이 유사시에 일 년은 너끈히 농성할 정도의 식량과 물자를 비축해 뒀다.

그런데 그처럼 어렵사리 모아 둔 것들을 원군의 밑구멍 채우는 데 쏟아 붓게 생겼다. 아깝다기보다는, 차라리 허탈해지는 도연각이었다.

그런 심정으로 망루에 서서 입성하는 원군들의 얼굴을 보니 하나같이 아귀처럼 보였다.

‘응? 전령인가?’

입성하고 있는 원군의 후미에서 한 줄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일기의 무장을 보는 도연각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비로소 뭔가 움직임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자는 율천국의 전령이었다. 등에 전령기를 꽂고, 햇볕에 그을리고 먼지에 찌든 얼굴로 성문 앞에서 말을 멈췄다. 망루에 우뚝 서 있는 도연각을 본 모양이었다.

“담전성주 도 장군은 들으시오!”

“내가 도연각이다! 전령은 전달 사항을 말하라!”

전령을 맞는 도연각의 말투는 곱지 않았다. 원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어투였다.

“약 반 시진 후면 율천국의 대장군이신 소우종 장군께서 오실 거요! 그 영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시오!”

“진중의 영접에 소홀하고 말고가 어디 있다더냐! 가서 전하라! 이 도연각은 오직 장수로서 율천국의 대장군을 맞겠노라고!”

“이건 우리 대장군의 말씀이 아니오! 허주의 조환 공께서 하신 말씀을 대신 전달해 드린 것뿐이오! 일단 소장은 임무를 완수했으니 돌아가겠소! 부디 실수가 없으시길!”

이 말을 남기고 전령은 왔던 길을 되짚어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다.

도연각의 미간에 그어져 있던 주름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건방지다면 이처럼 건방진 전령도 달리 없을 터였다.

그러나 원군이 되고 보면 말단 졸병들까지도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전령의 언행은 애교로 봐줘도 무방할 정도였다.

돌연 도연각은 북채를 들고 옆에 있는 큰북을 마구 두드렸다.

둥둥둥둥둥-!

갑작스레 들린 북소리는 담전성의 성병은 물론 원군들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들 허둥거리다가 망루에 서 있는 도연각에게 시선을 모았다.

“율천국에서 온 원군은 듣거라! 비록 힘이 달려 우리가 그대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걸 빌미로 혼란을 조성하는 자는 단연코 용서치 않겠다! 이 말을 명심하고, 각자 배당된 대기소에 집결하도록!”

도연각의 말에 원군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웅성거렸다. 지원을 받는 곳의 장수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 겪어 본 탓이었다.

“뭣들 하느냐? 원군은 속히 대기소로 가라! 다시 올 사람들이 있을 터, 어서 빨리 성문을 비워라!”

칠십 가까운 세월 동안 난세를 헤치며 살아온 도연각의 호통이었다. 원군들은 흠칫 움츠러들며, 그때부터 태도가 은근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와주러 왔다는 건방진 태도를 벗고, 성병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담전성의 편장頿將과 아장亞將들은 뭐 하고 있는가? 속히 원군들을 각자의 위치로 안내하라! 이만한 군병이 성에 들어오면 백성들이 놀란다는 걸 모르는가!”

“존명!”

삼만이나 되는 원군의 위용에 잔뜩 위축되어 있던 담전성의 편장과 아장들이었다. 도연각의 한마디는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성병들에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 후로 성병들은 바삐 움직였다. 자연히 원군들도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순식간에 담전성에 그득히 넘칠 것 같던 원군들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도연각은 눈을 돌려 길 저 너머를 지그시 응시했다. 원군의 총대장인 소우종이 나타날 곳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거만한 태도로 나타날지, 또 설사 그렇다 해도 한발도 양보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간혹 우연은 일부러 만든 것보다 더 절묘하게 시기를 맞춘다. 마치 도연각의 눈길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길 저 끝에 백여 기의 병사가 나타났다. 장수기가 펄럭이는 걸 보니 소우종이 틀림없었다.

도연각은 마음을 다잡았다. 만에 하나 소우종이 무장으로서 조금이라도 틈을 보인다면, 그 점을 신랄하게 비웃어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작심하고 있는 도연각의 시선 속에서 소우종은 점차 가까워졌고, 이윽고 성문께 이르렀다.

동시에 말에서 내린 소우종이 자기를 따라온 백여 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말에서 내려라. 허주의 노장께서 계시는 성이다. 말을 타고 들어간다는 건 큰 실례니, 어서 내리도록!”

그 말을 들은 도연각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성에 들어왔던 소우종의 부하들은 한결같이 거들먹거리며 건방을 떨었다.

그런데 원군의 총대장이라는 소우종은 자신을 의식해 도보로 입성하려고 한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이번에 율천왕 전하의 명을 받잡고 중주의 원군을 이끌고 온 소우종이라 하오! 부족함이 많은 인간이니 앞으로 잘 보살펴 주시기 바라오!”

소우종은 망루에 서 있는 도연각에게 정중한 군례를 갖추며 말했다. 뒤를 따랐던 백여 기도 같이 예를 취했다.

“어, 어서 오시오! 원로遠路에 노고가 크셨소이다!”

도연각은 말을 더듬거렸다. 예상과는 너무도 다른 소우종의 태도 탓이었다.

말한 대로 소우종은 걸어서 입성했고, 곧바로 여러 장수들과 작전 회의를 열었다.

* * *

비록 백 명에 불과했지만, 그들 모두는 막주전에서 생사의 고비를 몇 차례씩 넘긴 사람들이었다. 난전이 시작되자 그들은 양 떼 속에 뛰어든 호랑이처럼 설치기 시작했다.

가장 치열하고 처절하게 싸우는 건 역시 맹아였다. 선두에 선 그는 절풍검을 휘둘러 벌써 십여 명의 적병을 도륙해 버렸다.

그렇게 되자 근위대원들도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오와아!”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맹아의 뒤를 따라 적병들을 마구 베어 넘기며 전진했다.

“누가 적을 많이 죽이느냐 하는 내기 시합이 아니다! 성문부터 확보하라!”

편월이 커다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아무리 용맹하고 싸움에 도가 텄다고 해도 백 명에 불과한 숫자다. 길게 싸우면 모두가 전사할 건 기정사실, 그 전에 성문을 열어 아군을 불러들여야 한다.

반쯤 이성을 잃은 것처럼 싸우고 있던 맹아도 그 점은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의 적들을 마구 베어 넘기면서도, 발길은 꾸준히 성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민가가 없는 게 다행이군.’

덤비는 적병 둘을 한꺼번에 대도로 자르면서, 편월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가가 없으니 대인성의 내부 구조는 횅댕그렁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했고, 그건 지리에 어두운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당장 목표로 하고 있는 성문만 해도 저 멀리 빤히 보였으니까 말이다.

이 순간 편월이 가장 걱정하는 건 적들이 활로 공격해 오는 경우였다.

“적들에게서 떨어지지 마라! 놈들의 활 공격에 주의를 기울여!”

명을 내리고 있는 사이, 선두에 섰던 맹아가 편월의 우려대로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맹 장군!”

세차게 부르며 맹아를 향해 달려가던 편월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지금은 부상자를 돌볼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화살을 쏜 자를 찾아야만 한다.

주변을 둘러보던 편월의 눈에 보통보다 큰 각궁角弓을 들고 서 있는 자가 보였다.

‘저자는?’

분명 밖에서 적을 지휘하던 자다.

편월의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었다. 일부러라도 찾아 헤맸어야 될 판에 이렇게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편월은 곧장 활을 쏴 대고 있는 적장에게로 달려갔다.

“앗, 적이다! 막아라!”

“당 장군을 보호하라!”

편월이 달려오는 걸 발견한 적병들이 우르르 앞을 막아섰다.

이 역시 꺼릴 일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당장 적장의 활 공격에 당할 염려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앞을 가로막고 파리 떼처럼 성가시게 구는 적들을 살려 둘 만큼 편월이 관대한 것도 아니었다.

쓰와웅-!

대도가 한차례 공기를 울리자, 서너 명의 적병이 갑옷째 잘려 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졸자들에겐 볼일 없다! 정허군의 대장군 편월, 적장의 목을 받겠노라!”

편월은 일부러 큰 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적장의 주의를 끌려는 의도에서였다.

그건 성공을 한 것 같았다. 근위대원을 쏘아 맞히던 적장의 활이 편월에게로 겨눠졌다.

그래도 편월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달리는 발길을 더욱 빨리해서 적장에게 접근해 갔다.

적장이 한 대의 화살을 발사했다. 정확하게 편월의 미간을 노리고 쏜 것이었다.

편월의 손에 들렸던 대도가 빛을 쪼개며 날아드는 화살을 두 동강 내 버렸다.

지금 편월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적장은 분명 명궁이라 할 만한 솜씨를 가졌지만, 자신이나 광운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였다. 한꺼번에 서너 대씩 쏠 수 있는 궁술을 가졌으니, 상대를 비웃을 수 있는 자격은 충분한 셈이었다.

“서랏! 더 이상은 못 간다!”

적병들이 다시 편월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로선 성안에 적을 들인 꼴이었으니 필사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오히려 편월에겐 도움이 되었다. 나머지는 그대로 베어 버리고, 단 한 명만 대도 끝에 꿰어 앞으로 내달렸다. 방패를 대신해 적의 시신으로 적장의 화살을 막자는 의도였다.

달리는 속도는 그만큼 느려졌지만, 퍽퍽, 하고 두 대의 화살이 시신에 꽂혔을 때, 편월은 적장에게 바짝 접근할 수 있었다.

“정허군의 대장군 편월, 적의 장수라고 알고 목을 받으러 왔노라!”

다시 한 번 우레 같은 고함을 지르며 편월은 대도를 휘둘렀다. 단칼에 적장을 두 동강 낼 듯 강맹한 기세였다.

그러나 편월의 대도는 헛되이 허공만 갈랐다. 적장이 뒤로 슬쩍 몸을 뺐기 때문이다.

“대인성의 수비 장수 당세홍이 바로 나다!”

당세홍도 이름을 밝히며, 허리에 차고 있던 장군도를 빼 들었다.

동시에 와앗, 하는 함성과 함께 일단의 적병들이 또다시 편월을 둘러쌌다.

“졸자들에겐 볼일이 없다고 했다! 물러서라!”

매섭게 한소리 지르는 편월의 손에 들린 대도가 허공 가득 너울거리는 빛을 뿌렸다.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해 둔 것처럼 적병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편월의 발길을 막기에는 애당초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편월이 곧장 적장에게 대도를 휘두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기엔 적병들의 수가 워낙 많았다. 그들은 마치 인간 방패라도 된 양 당세홍을 둘러쌌던 것이다.

“대장군, 우리에게 맡기시오!”

“맹 장군은?”

근위대원들이 뛰어들자, 편월은 가장 먼저 맹아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사이에도 수중의 대도는 쉬지 않고 적의 피를 빨았다.

“어깨를 맞았소. 부상은 그리 깊지 않지만, 일단 치료하라고 뒤로 빼냈소이다.”

“좋아! 잘했다!”

맹아의 부상이 깊지 않다는 얘기를 듣자 편월은 부쩍 힘이 솟았다. 아니,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황급히 싸움판을 떠나는 적장의 모습을 발견하고 조급해진 건지도 모른다.

“당세홍! 비겁하게 적에게 등을 보이느냐? 그러고도 네가 대인성의 수비 장수냐!”

온 대인성이 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편월은 고함을 질렀다. 싸움보다는, 도망가는 게 주특기인 당세홍이란 생각도 들었다. 수맥이 있는 곳에서도 그랬고, 지금 여기서도 장수로서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도망가는 게 아니다! 성문 쪽이 더 위급한 것 같아 그쪽으로 가는 것일 뿐이다! 거기서 만나자!”

당세홍도 무척 창피했으리라. 그걸 조금이라도 만회해 보고자 한마디 남기고는 곧장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에익, 길을 비켜라! 막으면 죽는다!”

편월은 불덩어리처럼 타올랐다. 앞을 막는 적병들도 성가셨고, 부하의 죽음을 딛고 제 목숨 하나 살자고 달아나는 당세홍에게도 화가 났다.

자연히 편월의 손 속은 잔혹해졌다. 한칼이면 끝날 상대에게도, 두 번 세 번의 칼질을 연거푸 해 대곤 했다.

“길을 열겠소! 뒤를 따르시길!”

누군가 편월의 곁을 스치고 앞으로 썩 나서며 말했다. 눈을 들어 보니 화응이었다.

“걱정을 끼쳤소!”

또 다른 목소리, 이번엔 맹아였다. 어깨에 피에 젖은 천을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편월은 냉정을 조금 회복했다.

“어때?”

“보시는 바와 같이 멀쩡하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맹아는 창을 재빨리 두 번 내질러 두 명의 적을 거꾸러뜨렸다.

“그래도 조심하도록! 일단은 성문부터 확보한다! 모두 거기에 집중해!”

매섭게 한소리 지르며 편월은 화응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바로 그때, 돌연 하늘이 어둑해졌다. 갑작스러운 먹장구름이 해를 가려 버린 듯, 사방엔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화살 공격이다! 방패!”

가장 전방에 나서 있던 화응이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며,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성 밖으로 쏘던 적들의 화살이, 안으로 들어온 정허군 근위대원들에게로 향한 것이다.

화응이 취한 행동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바로 뒤에 있던 편월을 와락 끌어안아, 자신의 방패 속으로 밀어 넣었다.

타라라락!

화응이 든 방패에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뿐 아니라 편월에게 양보한 공간만큼 드러나 버린 그의 갑옷 등 쪽에도 여지없이 화살이 두들겨 댔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몇 명의 근위대원들이 속절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편월과 근위대원들의 발길을 막았던 적병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편이 쏜 화살에 의해 고슴도치처럼 변한 모습으로 하나 둘 그 자리에 무너져 갔다.

2

“이런 개 같은!”

편월의 눈초리가 길게 찢겨 올라갔다. 입도 거칠어져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욕이 마구 튀어나왔다. 아군의 희생도 물론 안타까웠지만, 같은 편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활을 쏴 대는 적의 소행이 너무도 괘씸했다.

전쟁은 아군과 적이 싸우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편을 도살(?)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분노는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졌다. 한차례 해를 가렸던 화살 비가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편월은 화응의 방패 아래에서 재빨리 달려 나갔다.

“앗, 대장군! 멈추시오!”

화응으로서도 편월의 행동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그 역시 간간이 쏟아지는 화살을 헤치며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맹아도 그냥 있지 않았다.

“모두 대장군의 뒤를 따르라!”

큰 소리로 근위대를 독려한 뒤, 창을 휘둘러 날아드는 화살을 떨구며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근위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막주전에서 이미 목숨 따위는 도외시한 채 함께 싸웠던 그들이다. 그때에 비하면 이런 화살 공격은 어설프기만 한 것, 방어를 위한 수단 따위는 접어 둔 채 무턱대고 편월의 뒤를 따랐다.

그 기세는 엄청났다. 비록 몇 명이 부상으로 빠져 백 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었고 함성도 지르지 않았지만, 활을 쏘던 적병들에겐 상당한 위압감을 주었다.

“쏴라, 쏴!”

이제 편월의 귀엔 적병을 지휘하는 대인성주 편사중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그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얘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성루로 치고 올라가 지휘하는 자를 베어 버리고 싶은 편월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급한 건 성문을 확보하는 일이다. 어쨌든 백 명도 되지 않는 인원으론 길게 싸울 수 없다. 성 밖에 있는 아군을 불러들여야만 한다.

“막아라! 적이 노리는 건 성문이다! 한발도 물러서지 말고 막아라, 막아!”

또 다른 적 지휘자의 목소리가 편월의 고막을 두드렸다. 벌써 두 번이나 눈앞에서 달아났던 자였다.

‘저자만큼은!’

기필코 베리라는 결심을 굳히며, 편월은 달리는 발길에 속도를 가중시켰다. 순식간에 앞서 가던 화응이 뒤로 처졌다.

물론 그 와중에도 몇몇 적병들이 편월의 앞을 막아서곤 했다. 그때마다 고스란히 피 묻은 대도의 시린 칼날 아래 고혼으로 변해 버리곤 했지만 말이다.

성문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 앞에 도열한 이백여 명의 적병들이 일제히 활을 겨냥하는 게 보였지만, 편월은 무시한 채 그대로 달렸다. 여기서 겁을 먹고 주춤거리게 되면, 그야말로 고슴도치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걸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적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근거리인지라 일직선으로 날아왔고, 그만큼 속도도 빨랐다.

“굴러!”

가장 빠른 화살이 코앞까지 날아들었을 때, 편월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뒤따르던 근위대원들도 같은 행동을 취했다.

쉬쉬쉬쉿!

화살들이 공간을 꿰뚫으며 비껴 날아갔고, 몸을 일으킨 편월은 다시 적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을 뒹굴고, 다시 일어나 달린 건 불과 눈 한 번 깜박거릴 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처럼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갑옷을 입으면 아무래도 전신의 관절이 유연하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편월이나 근위대원들은 능숙하게 그 일을 해냈다. 갑옷은 그들에게 일상복만큼이나 편했던 것이다. 전쟁이라는 죽음을 디디고 사는 삶에 익숙한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화살 공격이 한 번으로 끝난 건 아니었다. 적병들은 다시 활을 겨냥했고,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편월은 수중의 대도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이제 적병과의 거리는 이삼십 보에 불과하다. 이 정도 거리라면 쏜 화살에 맞아도 크게 부상을 입지는 않는다. 원거리 공격에 유용한 활이니만치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그 위력도 십분 발휘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몸으로 그 많은 화살을 고스란히 받을 수는 없는 노릇, 다시 적병들이 활을 쏘았을 때 편월은 그 자리에 멈춰 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다. 당연히 손에 든 대도도 같이 돌며 날아드는 화살을 막거나 잘라 냈다.

타라라락!

마치 빨갛게 달궈진 솥에서 콩이 튀겨지는 듯한 소리가 주변에 그들먹하게 들어찼다.

그 와중에 편월은 왼쪽 팔뚝과 왼쪽 허벅지에 각기 한 대씩의 화살을 맞았지만, 무시해 버리고 다시 달렸다.

“와앗!”

적병들 사이에서 잡아 찢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시 화살을 잴 사이도 없이 편월이 뛰어들어 대열을 뭉개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편월은 소질풍이 절실히 아쉬웠다. 말만 있다면 이백여 명에 불과한 적병은 혼자서도 충분히 짓밟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없는 걸 아쉬워해 봐야 소용도 없을 터, 다른 근위대원들이 오길 기다리며 편월은 다시 적장 당세홍을 찾기 시작했다.

싸움 실력은 어떤지 몰라도, 그 싸움을 비켜 가는 데는 어지간히 재빠른 당세홍임에 틀림없다. 어느새 그의 모습은 다시 적병들 사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가 봐야 이 성 안이다!’

편월은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한 당세홍이 대인성 밖으로 나가지는 못할 터, 성이 함락될 즈음에는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성문을 열어라! 빗장을 벗기고, 말뚝을 뽑아라!”

지휘관이 없는 적은 이미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뛰어든 근위대원들과 함께 마음껏 도륙하면서, 편월은 고함을 질렀다.

“나는 성루로 간다!”

맹아였다. 성문을 차지하는 데엔 늦었다고 판단한 그는, 가장 먼저 성루를 점령하기 위해 무턱대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절반은 맹 장군을 따라라! 그를 혼자 싸우게 하지 마!”

명을 내려 놓고, 편월 자신도 성루에 오르는 계단을 딛고 달렸다. 성문을 지키는 적들은 벌써 혼란에 빠져 더 이상 병사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근위대원들에게 맡겨 둬도 탈이 없을 터였다.

성루는 난전이 한창이었다. 맹아와 함께 올라온 십여 명의 근위대원들이 이리 뛰고 저리 구르며 적들을 마구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 광경에 편월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이런 난전이야말로 실력을 가장 확실하게 발휘할 수 있는 것, 커다란 고함과 함께 곧장 적들에게 부딪쳐 갔다.

“정허군의 대장군 편월이 바로 나다! 적장은 썩 나서서 목을 늘여라!”

편월의 고함은 성루에 짜랑하게 울려 퍼졌다.

이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적들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려 다른 근위대원들의 부담을 줄이자는 점도 있었고, 성 밖에 있는 아군에게도 자신들이 이미 성루까지 치고 들어왔다는 걸 알리려는 것이었다. 성문을 여는 순간에도 불화살 공격을 계속한다면, 서로가 곤란해지니까 말이다.

그 의도는 여지없이 성공했다. 적들은 일제히 편월에게 몰려들었고, 성 밖의 아군들은 ‘우와!’ 하는 함성을 올렸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아군이 밀고 들어오기 전에 깡그리 전사한다면 뒤가 없이 싸웠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리라. 적을 많이 죽이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근위대원들을 한데 모을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적은 틀림없이 활 공격을 감행할 테니까.

‘각자가 알아서 해야 되는 싸움이군.’

전쟁 경험이 많은 편월로서도 이런 싸움은 처음이었다. 오백의 이탈병들을 이끌고 막주의 수림 속 귀신이 되었을 때에도 작전은 있었고, 움직임에 대한 통제가 따랐었다.

그런데 이런 공성전에 작전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성문 하나만 확보하겠다고 뛰어들었다. 자칫 밑도 끝도 없는 싸움이 될 공산이 다분했다.

가까이 접근한 적병 서너 명을 한꺼번에 쪼개며, 편월은 열댓 발짝 달려갔다. 한군데 있으면 적의 화살이 노릴지도 모르니 끊임없이 위치를 이동해야만 했다.

“성문이 열린다! 성루의 적들은 남겨 두고, 모두 성문으로 내려가라!”

어느 틈에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당세홍의 목소리가 대인성 병사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와앗, 하는 함성과 함께 성루에 있던 적들이 일제히 계단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성문으로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알면서 보낼 편월이 아니었다. 발 빠른 자 몇 명은 어쩔 수 없이 놓쳤지만, 계단의 입구를 막아서며 그 대도를 마구 휘둘렀다.

순식간에 네댓 명의 적병이 수중의 무기 대신 허공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 적병의 수가 너무 많았다. 몇몇 근위대원들이 아수라처럼 날뛰고는 있지만, 한꺼번에 계단으로 몰리는 적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편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사적으로 계단 입구에 버티고 서서 적을 막아 보려 했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이럴 땐 적장을 치는 게 최선인데.’

몰라서 못 치는 게 아니다. 바로 코앞에 적이 너무 많고, 적장이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몰라서 치지 못하는 것이다.

한 칸씩 계단에서 밀려 내려갈 때마다, 편월은 점차 불리해져 가는 자신의 입장을 느껴야만 했다. 적을 벨 때마다 피가 얼굴에 튀어 시야를 가렸고, 앞으로 무너지는 적의 시신은 자칫 자신의 발까지 헛디디게 할 것만 같았다.

“우이얍!”

두어 계단 오르며, 편월은 대도를 좌우로 힘차게 휘둘렀다. 이번엔 적병들의 다리만 노리고 공격했다.

난간이 없는 계단이다. 앞서 내려오던 적들이 왈칵 무너지며, 아래로 떨어지거나 혹은 계단을 굴렀다.

그게 편월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계단을 굴러 떨어지던 적병 중 한 명과 강하게 부딪쳤기 때문이다.

“어엇!”

다급한 경호성이 저절로 편월의 입에서 토해졌다.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닥치자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이 적과 한 덩어리가 되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깔리면 안 된다!’

서로의 신체가 부딪치는 육박전肉薄戰에선 밑에 깔리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수비든 공격이든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편월은 발버둥 쳤다. 또래에 비해 덩치가 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열세 살이다. 어른인 적병과 서로 얽혀 뒹구니 힘에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이나마 편월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식의 몸싸움은 무지막지한 대도를 휘두르는 것과는 또 다른 힘을 요구했다. 대도야 무게중심만 잘 이용하면 큰 힘 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의 몸이 부대끼는 싸움은 확연히 달랐다. 이건 정말이지 순수한 육신의 힘만을 요구했다. 편월이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쿠웅!

등부터 바닥에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편월은 수중의 대도를 놓으며 세차게 몸을 뒤챘다. 어떻게든 적에게 깔리는 걸 면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적 위에 올라앉을 수 있었고, 항상 옆구리에 차고 다니던 소도`—`이건 어렸을 때 광운이 만들어 줬던 칼이다. 성장함에 따라 소도의 기능밖에 못하게 되었지만`—`를 뽑아 들었다.

적인들 가만히 당하고 있겠는가. 아래에 깔린 상태에서 손을 뻗어 편월의 울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컥!’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며, 아찔한 현기증이 엄습해 오는 걸 편월은 느꼈다.

아니 지금 편월에게 닥쳐오는 가장 큰 위기는 호흡곤란이나 현기증이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적병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 상황을 타개해야만 한다.

사력을 다해 밀어붙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목을 잘린 놈치고는 놀라운 투지였고, 분전이었다.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진 채, 편월은 수중의 소도를 휘둘렀다. 목을 쥐고 있는 적병의 팔을 노린 것이다.

쓰걱!

잘라 내진 못했지만, 적병의 팔에 상당히 깊은 상처를 준 모양이다. 편월의 울대를 쥐고 있던 놈의 손에서 급격히 힘이 빠져나갔다.

편월은 서둘렀다. 이제 계단을 내려오는 적병들의 발소리까지 또렷이 들려왔다.

꽈악!

어금니를 강하게 짓깨물며, 편월은 적의 갑옷과 갑상 사이로 소도를 깊숙이 찔러 넣은 후 확 끌어당겼다. 우두둑, 걸리는 감촉이 팔에 전해진다 싶었을 때, 적병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축 늘어졌다. 내장이 잘려 죽는 자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자신의 대도를 향해 편월은 몸을 날렸다. 이편이 빠르고, 또 언제 배후를 찌르고 들어올지 모르는 적의 공격을 피하기에도 용이했다.

대도를 쥐고서도 편월은 두어 차례 더 바닥을 굴렀다. 이 역시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동작이었다.

마침내 몸을 일으켰을 때, 편월의 눈에 성문으로 새카맣게 몰려가는 적병들이 보였다.

그러나 편월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는 이미 성문이 활짝 열렸고, 일번 돌입을 다투는 황월대와 적월대의 병사들이 마구 짓쳐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기마병이 투입되자 벌써 승패는 극명하게 판가름 나기 시작했다. 민가도 내성도 없는 대인성인지라, 황월대와 적월대의 병사들은 기마술을 마음껏 뽐내며 적병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편월도 구경만 하고 있진 않았다. 벌써 몇 차례나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적장을 찾기 위해 연방 눈을 번뜩이며 적들 속을 누볐다.

“대장군! 멈추시오, 대장군!”

적병들을 마구 베어 넘기며 적장을 찾고 있는 편월의 귀에 송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기가 가득한, 한껏 질책하는 음색이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요? 고작 백여 명만으로 성으로 뛰어들다니!”

“아군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소! 그리고 보기 좋게 성공했잖소!”

“듣기 싫소! 어서 말에나 타시오!”

호통을 치면서 송지는 끌고 온 다른 한 마리 말의 고삐를 던져 주었다. 소질풍은 아니지만 훈련이 잘된 군마인지라 편월을 태우고도 별 거부감을 표하지 않았다.

일단 말에 오르자 편월은 전신에 새로운 힘이 용솟음치는 걸 느꼈다. 이래서 기병에겐 말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하아!”

“어딜 가려는 거요, 대장군?”

“적장을 찾으러!”

“그 무슨 경솔한 짓을! 거기 서시오! 당장 말을 멈추란 말이오!”

적장인 당세홍을 찾아 나선 편월의 뒤를 쫓으며, 송지는 연방 고함을 질렀다. 대장군이 직접 나서서 싸워야 할 때가 아니다. 난전이 벌어진 대인성 안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고, 어쩌다 눈먼 화살에 맞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말이다.

급하게 편월을 따라잡은 송지는 말의 재갈을 잡아 그 자리에 세웠다.

“지금은 대장군이 나설 때가 아니오! 보시오! 이제 적들은 하나 둘 투항하고 있소! 그러니 조금만 진중하게 전체를 관망하시오!”

송지의 말에 편월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세홍이란 놈은 꼭 내 손으로 베어 버리고 싶었는데.”

“예? 뭐라고 하셨소?”

“아니요. 그보다 투항하는 자를 관리하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인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아마 이 대인성엔 감옥다운 감옥이 있을 거요. 장수 급 인물들은 거기 가두고, 병사들 중에서 우리 편에 가담하려는 자는 받아 주는 게 어떻겠소? 이 대인성을 뺏었으니,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있는 세 개의 부성도 쳐야 할 거요.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병력은 많을수록 좋을 거요.”

“하지만 그래서는 적의 간인들이 스며들까 두렵소. 이번에 우리들의 움직임도 이미 놈들이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진중에 스며든 적의 간인 한둘을 겁낼 건 없을 듯하오. 그건 어디나 있기 마련이니까. 우리들이 기밀을 보다 잘 유지한다면, 오히려 그들을 이용할 수단도 있을 거요. 하지만 병력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거 아니겠소?”

“알겠소. 한데 투항자 중 당세홍이란 자가 있으면 반드시 내게 데리고 오시오! 적의 장수 중 한 명이니까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요.”

“그럼 대장군께서 직접 싸우시는 일은…….”

“아, 그만두겠소! 역시 대장군은 듬직하게 전체를 지휘해야 되지 않겠소!”

“존명! 그럼 즉시 투항자들을 정리하겠습니다.”

직접 싸우지 않겠다는 편월의 말에 송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즉시 군례를 갖추고는, 말을 몰아갔다.

아직 싸움은 끝난 게 아니다. 투항한 숫자만큼이나 많은 적병들이 여전히 격렬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승패는 판가름 나고 말았다. 남은 자들도 기껏해야 반 시진 이상은 버티지 못할 터였다.

거기까지 판단한 편월은 큰 소리로 전령을 불렀다.

“백월대와 흑월대에 알려라! 대인성을 접수했으니, 강을 끼고 대치하고 있는 적들을 놓치지 말라고! 만약 적들이 움직인다면 도강하여 싸움을 벌이라고 전하라! 그리고 유군의 담 장군에게도 수령성 적병들의 움직임에 각별히 유념하라고 전하도록!”

“존명!”

복명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전령은 쏘인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갔다.

그럭저럭 대인성의 싸움은 끝나 가고 있다. 이럴 때 다른 부성에서 적의 원병이 온다면 승패는 또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 없다. 무리인 줄 알면서도, 경우에 따라서 백월대와 흑월대에 도강을 하라고 지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가 정리되는 대로 군사를 나눠 백월대나 흑월대와 대치하고 있는 적병들의 배후를 쳐야겠군. 수령성은 당분간 유군으로 눌러 두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보고, 성주인 편사중을 비롯한 모든 적병이 투항했습니다!”

“모두 몇 명인가?”

“예, 약 일천 명에 이를 것 같습니다.”

“좋아. 송 군감에게 가라. 가 보면 무슨 지시를 내릴 것이다. 그 지시에 따르도록!”

“존명!”

편월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채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적들은 모두 항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천 명이라면 이건 숫자가 좀 많다. 제대로 된 지휘관만 있었다면, 훌륭히 싸울 수도 있는 병력이니까 말이다.

“성루에 우리 정허군의 기치를 내걸어라! 그리고 각 부대의 장수들을 소집하도록!”

불과 얼마 전까지 대인성 장수들의 지휘소로 쓰였을 것 같은 건물로 들어서며, 편월은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처음부터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대인성을 손에 넣었다. 지금부터는 새로운 각오와 작전으로 앞날에 대비해야만 한다.

3

내전으로 통하는 입구에 서서 서수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도록 언성을 높였다.

“주공의 얼굴을 뵙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째다! 오늘은 기필코 뵈어야겠으니, 어서 길을 열어라!”

“여기는 내전이오! 모든 남자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라는 주공의 명이 계셨소! 그러니 돌아가시오!”

“이 파양주의 중대사다! 그러니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주공을 뵈어야겠다!”

서수는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이 소란을 안에 있는 마용승이 듣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게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것일까. 안에서 시비 한 명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기씨 부인께서 나오십니다.”

그러나 시비의 말은 서수가 바라던 게 아니었다. 기씨 부인은 오늘도 외출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또 옷이나 장신구를 사러 가는 거겠지.’

기씨 부인은 사치가 심했다. 기예단에서 곡예를 부리던 천박하고 가난했던 신분에서 일약 마용승의 첩이 되었으니, 그동안 해 보지 못한 것과 가져 보지 못한 것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려는 것처럼 이틀이 멀다 하고 외출을 하곤 했다.

마치 시비의 통고가 끝나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전으로 통하는 복도에 기씨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양옆엔 기예단에서 데리고 온, 비교적 나이가 든 시비 두 명이 따르고 있었다.

“부인을 뵈오!”

서수는 물론이고 문을 지키던 장수와 병사들까지 예를 갖췄다. 과거의 신분이야 어떻든 지금은 마용승의 애첩이다. 결코 소홀히 대할 수가 없었다.

“서 군사께서는 들어가 보셔요. 주공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의 사람을 홀릴 듯한 미소와 함께 기씨 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알겠소이다.”

짐짓 무뚝뚝하게 대꾸한 후, 서수는 내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기씨 부인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칫 그 고혹적인 매력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황급히 자리를 피한 것이다.

“주공, 서수이옵니다.”

“오, 어서 들어오시오.”

기씨 부인에게 주어진 방 앞에서 왔다는 걸 알리자, 안에서 마용승이 반가운 목소리로 맞아 주었다.

“아!”

안으로 들어가 마용승의 얼굴을 본 서수는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경악성을 토하고 말았다. 한 달 남짓 못 본 사이에 너무도 수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 놀랄 것 없소. 살이야 좀 빠졌다지만, 몸엔 아무 이상 없으니까. 자고로 영웅은 호색하다고 하지 않소, 하하하하!”

서수의 우려를 날려 버리는 듯 호탕하게 웃었지만, 마용승의 얼굴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눈자위는 움푹 꺼지고 축 처졌으며, 풍만하던 볼 살도 내려앉아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색에 찌들어 몸을 망친 전형처럼 보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오? 허주를 치러 갔던 편월에게서 무슨 연락이라도 있었소?”

‘역시 잊고 계신 건 아니었구나.’

그 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편월을 위해선 좋지 않다고 생각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서수는 입을 열었다.

“바로 그 편월의 일이옵니다. 허주를 치러 간 병사들이 출발한 것과 동시에, 조환이 가겸후에게 원군을 청하는 사자를 보낸 것 같사옵니다.”

“뭣이? 조환이 가겸후에게?”

“그러하옵니다. 사자는 하정이란 자로, 꽤나 완고한 성격이라고 하더이다!”

“하하하, 이거 우습구려. 지난번 영산 전투 때의 앙금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을 텐데, 가겸후가 쉬이 원군을 내주겠소? 이건 무시해도 될 얘긴 거 같소.”

“그게 그렇지가 않은가 보옵니다. 율천국에 파견해 두었던 간인이 급히 알려 온 보고에 의하면, 가겸후는 원군을 낼 듯한 눈치라 하옵니다.”

“하긴 어제의 적이 오늘의 한편으로 변하는 건 전국난세의 다반사니까, 가겸후가 원군을 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거요?”

“어떻다니요? 고작 일만도 안 되는 편월의 병력으로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을 상대하면 전멸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옵니다. 그들을 모두 죽이실 작정이십니까?”

서수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뻔히 알면서도 시큰둥하게 대하는 마용승의 태도가 얄미워서였다.

“편월이 그처럼 군략에 어둡다고는 생각지 않소. 불리하면 후퇴를 할 것이고, 유리하면 쳐 나갈 것이오. 그렇게 믿었기에 서 군사도 편월에게 허주 토벌을 맡기는 데 찬성하지 않았소?”

서수는 말문이 콱 막혔다. 비록 광운과 떼어 놓기 위해 취한 방편이었지만, 편월이 허주를 치는 것에 자신이 찬성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후퇴하는 편월의 꼬리를 물고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이 우리 영내를 침입한다면 어떻게 하실 것이옵니까?”

“그때는 싸워야지!”

“그렇다면 미리 준비를 해 두시는 게 좋지 않겠사옵니까? 어지러운 세상이고 보면, 대비가 최선이라 사료되옵니다만…….”

이건 서수가 마용승에게 한 방 먹인 것이었다. 첩의 치마폭에서 그만 빠져나오라는 충고이자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아직 편월이 본격적으로 허주와 전쟁을 시작한 것도 아니지 않소! 그러고 보니 석 달만 지원해 주기로 했는데, 싸움이 너무 늦는 거 아니오?”

“바로 그 점입니다. 주공께선 석 달만 지원하라 하셨지만, 소생의 임의대로 또 한 달분의 지원을 보냈사옵니다.”

“뭣이? 아직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은 병사들에게 그 무슨 지원이란 말이오?”

“우선 소생의 말부터 들어 보시옵소서.”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는 마용승을 진정시킨 뒤, 서수는 편월의 현재 입장을 설명해 주었다. 거기에 가담한 군세와, 정허군이라는 이름으로 석축산에 주둔하며 맹훈련을 하고 있는 듯하다는 얘기를 말이다.

“어쨌든 주공의 이름으로 낸 허주 정벌군이옵니다. 그 병사들을 굶긴다면, 천하 사람들은 주공의 용렬함을 비웃을 것이옵니다.”

“크흐음!”

딱히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용승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확실히 서수의 말 그대로였다. 편월에게 오천의 잡가군을 딸려 출정시킬 때, 분명히 조환이 목철린을 도우려 했다는 죄를 힐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정허군이라 명명된 군세는 마용승이 정식으로 파견한 관군이 되는 셈이다. 황제까지 들먹였으니, 이건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옵니까? 그래도 정허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오리까?”

마용승의 얼굴에서 그 심기 변화를 읽은 서수가 재우쳐 물었다. 이 기회에 정허군에 대한 보급 문제만은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하긴 마용승이 지원을 중단한다고 해도 정허군이 당장 어려움을 겪을 일은 없었다. 서수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송용조는 물론 효명성주 상림호도 은밀히 돕고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게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을 따라갈 수는 없다. 무엇보다 시일이 오래 걸린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지금 즉시 윤주에 총동원령을 내리시오. 정허군에 대한 보급도 계속하도록 하시오.”

“윤주만 동원해서 어찌 큰일에 대처하겠사옵니까. 이럴 땐 성주께서 직접 영내에 있는 모든 성에 파발을 띄우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그만한 일에 내가 나설 것까지는 없겠지. 전결권專決權을 줄 터이니, 서 군사가 알아서 처리하시오.”

‘결국 첩의 치마폭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얘기로군.’

마음은 그랬지만, 어쩔 수 없이 서수는 허리를 굽혔다.

“명심하여 봉행하겠나이다!”

오늘은 정허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은 걸로 충분하다. 이쯤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마용승은 틀림없이 화를 낼 터였다.

서수는 조용히 내전 기씨 부인의 방을 빠져나왔다.

* * *

이십여 명의 적장을 포함, 투항한 자는 구백이 채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정허군에 투입되기를 바라는 자가 오백여 명, 편월은 그들을 유군인 담개에게 보냈다. 아무래도 경험이 많으니, 새로 배속된 자들도 잘 다룰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편월은 편사중에게 조환이 내렸던 대인성주의 인수를 거둬들였다.

사실 이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정식 관작이 없는 조환이고 보면, 그가 내린 인수라고 해 봐야 별 효과도 없기 때문이다.

그 뒤에야 편월은 문제의 당세홍과 자리를 같이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참수하여 그 목을 높다랗게 효수하고 싶었다. 비겁한 장수의 전형이라는 팻말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당세홍은 항장이다.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줘야만 한다.

당세홍이 불려 와 앞에 꿇어앉혀졌음에도 편월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그를 노려보기만 했을 뿐이다.

불려 온 당세홍이 처음 지은 표정은 황당하다는 것이었다. 비로소 자세히 보게 된 적의 대장군인 편월이 너무 어리다는 걸 안 탓이었다.

그게 당세홍에게 모종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노려보는 편월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당세홍의 눈길은 점차 아래로 향했다. 저렇게 어린 상대에게도 이기지 못한 패장이라는 자신의 위치가 새삼 절실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당세홍, 그대는 스스로 장수라고 칭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숙인 당세홍의 정수리를 노려보던 편월이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자신과 대치했을 때, 몸을 빼서 달아났던 걸 비꼬고 있는 중이었다.

그 점은 당세홍도 알고 있었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서로의 입장이 달랐을 뿐이다.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었다.”

“장수에게 싸우는 것 말고 달리 무슨 할 일이 있단 말인가?”

“나는… 나는 성주를 보호해야만 했다.”

“오, 같은 편이 있는 곳에 화살을 쏘도록 명령했던 그 바보 같은 놈 말인가?”

“그렇게 얘기하지 마라! 그래 봬도 그분은…….”

격렬하게 언성을 높일 듯하던 당세홍은, 그러나 이내 뒷말을 삼켜 버렸다.

“편사중이란 작자가 대단한 신분이라도 되는가 보군. 허주의 조환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나?”

이건 편월이 그저 떠본 것에 불과했다. 깊이 생각지도 않은, 그저 즉흥적으로 떠오른 질문이었다.

그런데 당세홍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편월로 하여금 ‘뭔가 있다’란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 말해 봐라. 편사중의 신분이 대단하다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겠다.”

그 말에 당세홍은 고개를 번쩍 들어 편월을 쳐다보았다. 진심인지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물론 편월은 진심이었다. 그 ‘합당’이란 말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가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분은 바로 주공의 처남이시다!”

‘응?’

당세홍의 대답을 들었을 때, 편월은 내심 의아해졌다. 처남이라면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알고 있다. 적어도 한 장수가 자신의 명성이나 부하들의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보호해야 될 대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그 아닐 것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확실히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 문제는 담 장군이나 송 군감에게 물어봐야겠군. 그들이라면 조환과 편사중에 대해서 보다 잘 알 테니까.’

사실 편월은 더 이상 당세홍과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조환의 친인척이라지만 그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장수가 적에게 등을 보이고, 또 숱한 부하들의 목숨을 속절없이 잃게 만들었다.

전쟁터에서 만난 적이라는 위치를 떠나, 인간적으로 정나미가 떨어졌다. 게다가 누군가를 심문하는 것도 익숙한 게 아니었다. 당세홍의 얼굴을 똑똑히 쳐다보면서 창피를 줬으니 이젠 그만두고 싶었다.

문득 편월은 막주의 목철린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 난세의 장수들은 모두 그와 같은 줄 알았다.

그러기에 전쟁은 쓰리고 아프지만, 그 속에서 살다 간 무장의 이름과 향기는 오래도록 남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당세홍은 어떠한가. 명색이 대인성의 수비 장수이면서 패전의 뒤처리를 책임지려는 기색은 없고 변명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아니, 다 좋다. 편사중을 보호하기 위해 당세홍이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고 치자.

‘바로 그게 틀렸지.’

편사중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그의 곁으로 달려갈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떻게든 적인 자신들을 물리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을 일이라고 편월은 생각했다. 이처럼 성이 함락되고 나니, 성주는 물론 부하들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되지 않았나 말이다.

“여봐라! 이자를 다시 하옥시켜라!”

“성주께는, 성주께는 그 신분에 합당한…….”

근위대원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당세홍은 편사중의 걱정만 했다. 그 점 하나만 따진다면 높이 사 줄 만도 했다.

“아뢰오! 황월대가 성 밖에서 수상한 자를 잡아 왔습니다. 지금 송 군감께서 심문을 하고 계시니, 대장군께서도 참석하시라는 전갈입니다!”

“수상한 자가?”

“예. 아무래도 적의 간인 같다는 송 군감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알겠다. 앞장서라. 같이 가도록 하자.”

편월은 곧바로 보고자의 뒤를 따랐다. 이 기회에 송지가 어떻게 심문하는지 그걸 봐 두고 싶었다.

과연 연무장 한편엔 송지가 앞에 꿇어앉은 자에게 뭔가를 묻고 있었다.

편월은 찬찬히 그자를 살펴보았다. 들일할 때나 입는 허름한 옷차림이었지만 그 눈은 번쩍이는 빛을 발했고, 체구는 당당했다. 농부로 가장한 무장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너도 보고 있는 것처럼 대인성은 이미 우리 정허군에게 떨어졌다. 그러니 네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또 전달할 내용이 무언지 순순히 실토하는 게 좋으리라.”

“흐하하하하!”

송지의 말에 농부 차림의 사내가 목젖을 드러내며 웃었다.

“무엄한 놈! 웃지 마라!”

옆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원 중 한 명이 사내에게 발길질을 가했다.

“그렇게 난폭하게 다루지 마라! 자, 들어 보자. 내 말이 그렇게 우스웠느냐?”

“그렇다. 너무 우스워서 웃었다.”

사내는 매섭게 송지의 말을 받았다.

“뭐가 그리 우습더란 말이냐?”

“이 대인성을 차지했다고 오만을 떠는 그 꼴이 우스웠다! 이제 곧 율천국의 원군 삼만과 담전성의 오천, 도합 삼만 오천의 연합군이 이곳으로 밀어닥칠 것이다! 그때까지뿐이니 실컷 즐거워하도록 해라!”

“하하하, 네놈이야말로 사람을 웃기고 있구나. 그런 얄팍한 유언流言에 속으리라고 생각했더냐? 정말이지 웃기는 놈이로구나.”

송지 역시 웃음으로 사내를 대했다.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얘기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는 편월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이게 사내의 언행을 지켜본 편월의 판단이었다.

“이자를 따로 가두고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라.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놈이니, 다른 포로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라!”

근위대원에게 지시를 내린 후, 송지는 편월을 향해 걸어왔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소.”

가까이 온 송지는 극도로 목소리를 낮춰 편월에게 속삭였다. 그걸 알면서도 주변의 눈을 의식해 사내가 유언을 흘린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곧바로 수령성을 쳐야 하지 않겠소?”

송지가 재차 속삭였다.

“수령성을 치는 것과 동시에 할 일이 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편월 역시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그게 뭐요?”

“배후의 적을 치는 것.”

“배후의 적? 아하!”

그제야 편월의 말뜻을 알아챈 송지는 나직한 탄성을 토했다. 이천강을 끼고 백월대, 흑월대와 대치하고 있는 대인성의 두 부성의 병력에 대한 얘기였다.

“황월대와 적월대를 보내 그들의 배후를 치라고 하시오. 백월대와 흑월대도 더 이상 기다릴 것 없이 도강하라고 하고. 최대한 빨리 적을 무찌르고, 수령성 공략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오.”

“그럼 그때까지 수령성 공격은?”

“유군과 근위대만으로도 충분하오. 이미 담 장군에게 한번 두들겨 맞은 적들이니, 사기가 많이 꺾였을 거요.”

편월은 거침없이 명을 내렸다.

이런 경우엔 촌각도 허비할 수 없다는 걸 오랜 전쟁 경험이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유군과 근위대만으로 수령성을 치는 건 위험하오. 그보다 적들을 설득하면서 시간을 좀 끌어 보는 게 어떻겠소? 적어도 남은 적들을 칠 때까지만이라도.”

“설득?”

“새로 유군에 편입된 포로들을 이용하는 거요. 그들이 현 상황을 조리 있게 설명한다면, 한때 동료였던 수령성의 성병들은 반드시 크게 동요할 거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군.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그럼 곧 수배하겠습니다. 아무튼 저 간인의 전갈이 적에게 닿기 전에 우리가 잡은 게 다행이오.”

말을 마치자마자 송지는 큰 소리로 전령을 부르며 저만치 달려갔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수령성을 떨궈야겠는데.’

중천에 떠서 그 높이를 자랑하던 여름 태양도 서편으로 훌쩍 기울어진 시각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뒤에 남은 적들을 두들기고, 수령성에 야습을 감행하고 싶은 편월이었다.

이건 단순히 기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율천국과 허주의 연합군이 온다면 조휴령을 넘은 곳이나, 적어도 정상에서 맞고 싶었다.

그러자면 최대한 빨리 수령성을 떨궈 발판을 마련해 둬야만 한다.

뚜우우, 뚜우!

둥둥둥둥!

돌연 요란한 소라고둥과 북소리가 대인성 전체를 떨어 울렸다.

“황월대 출격!”

“적월대 출격!”

그 속에서 각 부대의 기수들은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며 정연하게 성문을 나갔다.

“맹 장군!”

편월은 맹아를 불렀다. 이젠 근위대도 수령성을 향해 출격을 해야 될 때였다.

“여기요, 대장군!”

“부상은?”

“가볍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좋아. 우리도 가자.”

“존명!”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 것과 동시에, 근위대 백여 기도 수령성을 바라고 말을 달렸다.

나머지는 가둬 둔 적장과 포로들의 감시를 위해 대인성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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