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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강시제血江屍堤 2 (26/66)

혈강시제血江屍堤 2

1

여명이 눈을 뜨기 전에, 이천강에서 피어오른 젖빛 안개가 먼저 조휴령 전체를 휘감아 돌았다.

정말이지 짙은 안개였다. 손을 내밀어 한 바퀴 휘저으면, 끈적끈적한 질감이 느껴질 것만 같았다.

투구를 벗은 편월의 머리카락에서도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마치 갑옷을 입은 채 목욕을 한 것처럼 전신이 흠뻑 젖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때맞춘 것 같은 안개로군.’

이 정도 안개라면 근위대원들이 하기에 따라선 성병들 몰래 성벽을 넘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편월은 다시 대인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채는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불타고 있는 곳만 안개가 벌겋게 물들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편월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시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기억 속에 새겨 둔 대인성의 모습을 안개 장막 위에 그려 놓고 있는 것이다.

‘삼면에서 동시에 넘어가야겠지.’

사방은 조용했다. 안개가 피어오른다고 느꼈을 때부터 모든 공격을 중지시켰기 때문이다.

“대장군, 하늘이 돕고 있소. 공격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갑옷 자락을 철커덕거리며 달려온 맹아가 편월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 역시 이 안개를 이용하는 게 좋다고 판단할 정도의 머리는 갖고 있었다.

“맹아, 아니, 맹 장군.”

“예, 대장군!”

편월이 부르는 소리에 맹아의 얼굴엔 얼핏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너무도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을 맹 장군이라 부르는 품이 예사롭지 않다 싶어서였다.

“말씀하십시오, 대장군!”

불러 놓고 한동안 말이 없는 편월에게 맹아는 채근했다. 거기엔 조금이라도 빨리 싸우고 싶다는 투지가 어쩔 수 없이 묻어 있었다.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살려서 귀환하시오.”

“대장군?”

편월을 부르는 맹아의 말꼬리가 올라갔다. 사뭇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잘 싸워라!’라는 말은 할지언정 이처럼 약한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로 인해 가슴 한편에 뜨거운 응어리가 맺히는 건 맹아도 어쩔 수 없었다. 싸움에 임하면 가장 선두에 서서 마치 악귀처럼 설치던 편월이 이런 말을 했다. 그 속에 녹아 있는 근위대에 대한, 정허군의 병사들에 대한 끈끈한 정이 후끈하게 온몸을 달궈 왔다.

맹아인들 그 정이 없을까. 대답하는 그의 음색은 심하게 떨려 나왔다.

“대장군, 며, 명심하여… 설사 이 몸이 죽더라도 동료들은…….”

차마 맹아는 말을 맺지 못했다. 더 이상 입을 열었다가는 자칫 흐느낌이 먼저 토해질 것 같아서였다.

“그럼 근위대장 맹아, 대장군의 명을 받들어…….”

“웬 놈이냐! 청산靑山!”

“계수溪水! 우린 본대에서 온 사람들이오. 그러니 창을 거두시오.”

맹아가 작전을 시작하겠다는 인사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맹아는 벌떡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편월의 마음씨에 감복한 자신의 기분이 깨진 것에 대해 무럭무럭 화가 치밀었다.

“대체 웬 놈이냐? 대장군이 계시는 곳이다! 조용히 하지 못할까!”

화나는 대로 쏘아붙이는 맹아의 목소리는 글자 그대로 질그릇이 깨지는 것처럼 거칠었다.

“글쎄, 이자가 한사코 대장군을 뵙게 해 달라면서, 밤새 자해自害까지 했습니다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데리고 왔습니다.”

“이놈은 포로가 아니냐?”

“예. 그런데 어제부터 밤새도록 뭐에 홀린 놈처럼…….”

장막처럼 드리워진 안개로 인해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편월은 대강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어제 낮에 정허군에 배속시켜 달라고 했던 포로가 자신을 보기 위해 밤새 감시병을 괴롭힌 모양이었다.

“맹 장군, 이리 불러오시오.”

편월은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봐야 열세 살, 변성기가 막 지난 목소리였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 말에 따라 맹아는 뒷결박이 지어진 남자 한 명을 끌고 왔다. 자해를 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얼굴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머리는 흰 천으로 감싼 모습이었다.

“대장군이시다. 할 말이 있거든 어서 고하여라!”

맹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포로는 얄미운 존재였다. 작전을 수행하기 직전이었던지라, 재수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팔짱을 낀 자세로 편월은 포로의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정허군에 배속시켜 달라는 말을 반복할 테니까 말이다.

“대인성을 떨굴 방법이 있소!”

“뭐?”

의외의 말에 편월은 물론 맹아도 놀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고얀 놈! 여긴 진중이다! 허튼소리를 지껄이면 용서치 않겠다!”

맹아가 오랏줄 한쪽 끝으로 포로의 뺨을 철썩 갈기면서 날카롭게 말했다. 혹시라도 놈이 속임수를 쓸지 모른다는 경계심의 발로에서였다.

“거짓말이 아니오! 대인성에 공급되는 물길을 끊을 곳을 알고 있소이다.”

“거짓말 마라, 이놈! 저만한 큰 성에 어찌 우물이 없겠느냐? 얼렁뚱땅 우리 군에 배속되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도…….”

“잠깐, 맹 장군!”

포로를 닦달하는 맹아를 편월이 제지했다.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 식량보다 더 중요한 건 물이다. 먹지 않고는 열흘 혹은 그 이상도 견딜 수 있지만, 마시지 않고는 사흘을 넘기기 힘들다.

그처럼 중요한 물을 끊을 수 있다면, 대인성도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떨어질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아니, 무엇보다 근위대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낙성시킬 가능성이 생겼으니 편월이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대장군! 이자는 요언妖言을 흘려 우리 군의 사기를…….”

“그건 확인해 보면 알 일. 송 군감!”

맹아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편월은 송지를 불렀다.

“예, 대장군!”

“이자와 함께 가서 그 물줄기를 끊는다는 곳을 확인해 보시오. 만약 이자의 말이 맞는다면 다시 데려오고, 거짓이라면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리시오. 맹 장군도 같이 가시오.”

“같이 가라니요? 그럼 공격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물을 끊을 수 있다면 굳이 희생을 내면서까지 성벽을 넘을 필요가 없지 않겠소. 그러니 같이 가서, 이자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되면 내게 물을 것도 없소.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리시오!”

“하지만…….”

“자, 맹 장군. 그만 가 봅시다. 이런 일은 서두르는 게 좋소.”

공격을 하지 못해 불만인 맹아를 송지가 마구 잡아끌었다. 성질을 뻔히 알기에, 혹 편월과 언쟁이라도 벌일까 싶어서였다.

와두두둑-!

아직도 불투명한 안개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십여 기의 근위대가 포로를 호송하여 물줄기를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다.

“우린 계속 공격해야 되지 않겠소? 놈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라도…….”

“이 정도 안개라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놈들에겐 보이지 않을 거요. 그러니 헛심 빼지 말고 병사들을 쉬게 하시오.”

서진청의 말을 편월이 가볍게 받아넘겼다. 이런 안개 속에선 불화살 공격도 그리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터였다.

“그럼 부하들 아침이라도 든든히 먹여 둬야겠군.”

‘앞으로 사흘! 성이 먼저 떨어질까, 조환의 원군이 빠를까?’

어젯밤에 수령성에서 봉화가 올랐다. 그건 조환이 이곳의 위급을 알고 있다는 얘기와 통한다. 낙성이냐, 원군 도착이냐 하는 시간 싸움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허주의 원군은 조휴령을 넘어올 게 분명하다. 오천 이상의 병력이 움직일 만한 길은 거기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만약 대인성을 떨군다면, 수령성도 서둘러 낙성시켜야겠군.’

이런 생각을 이어 가다가 편월은 흠칫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처럼 대인성에 집착하는 게, 성에 대한 자신의 욕심이 반영된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아니라고 자신 있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갖기 시작한 성에 대한 집착은 나이를 더할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거기다 광운은 벌써 성을 하나 가졌다. 비록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침사성과 그 주변을 마용승 대신 다스리게 되었다. 그게 새로운 자극이 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걸 알기에 편월은 다시 자기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이 대인성 공격에 있어 자신의 욕심이 얼마만큼 작용하고 있는지, 또한 이 공격이 꼭 필요한지를 곱씹어 보았다.

‘못 떨군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얻을 수 있다면 석축산보다는 여기서 농성하는 게 좋다.’

결코 욕심만이 아니라는 걸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고 나서야, 편월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많이 옅어졌다지만, 동녘 하늘에서 떠오른 태양이 뿌옇게 보일 정도의 안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장군, 아침 식사입니다.”

근위대원 중 한 명이 편월의 식사를 날라 왔다.

“황월대와 적월대에 전달하라. 병사들의 취사가 끝났으면 곧 공격을 개시하라고.”

“존명!”

성 공격에 대해선 이미 스스로 납득한 편월이었다. 미적거릴 이유가 없었기에 단호하게 명을 내렸다.

‘백월대와 흑월대가 잘하고 있는 것 같군.’

대인성의 부성 중 병사를 움직인 곳은 조휴령의 정상에 가까운 수령성뿐이다. 다른 곳의 적병은 강을 끼고 대치하고 있는 아군이 잘 못 박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편월이 천천히 음식 접시를 끌어당겼을 때, 함성과 함께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벼르고 있던 황월대와 적월대가 다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일부러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편월은 맹아와 송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 결과에 따라 대인성을 공격하는 방법도 달리할 작정이었다.

문득 편월은 광운의 얼굴을 그렸다. 막주의 그 염천에서 한창 배를 만들고 수군을 조련하느라 여념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광운은 배를 타 봤을까?’

지금까지의 기억으론 광운이 배를 타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수군을 양성한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웃음이 치밀었다.

그래도 편월은 광운을 믿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침사성으로 가는 것 자체를 거부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거기엔 자신을 비롯한 이탈병들의 문제가 얽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뿐 아니라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죽영과 유화도 인질로 잡혀 있다. 겉으론 너그러운 것 같은 마용승이 실은 이처럼 철저하게 광운과 자신의 손발을 묶어 두고 있다는 건 어린 편월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빚이겠지.’

광운은 전장에서 동료들에게 목숨 빚을 지지 말라고 했다. 하루가 다르게 피아가 갈리는 잡가군 생활에서, 그건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 말을 이제 편월은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 내 목숨을 구해 준 동료가, 내일 적군 속에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 망설임과 번민을 갖지 않으려면 애당초 그런 목숨 빚은 지지 않는 게 좋을 게다.

“대장군!”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편월은 화들짝 깨어났다. 동시에 요즘 들어 왜 이리 생각이 많아졌는지 스스로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들어 부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맹아와 포로를 따라갔던 근위대원 중 한 명이었다.

“뭔가?”

“포로가 얘기한 곳에 확실히 수맥이 있었습니다. 총군감의 말로는 그 수맥이 향하는 곳이 바로 대인성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 그럼 포로의 말이 맞았군. 그런데 뭣 때문에 왔나? 수맥을 끊어 버리지 않고.”

“그 주변이 온통 바위라 저희들만으로는 힘겨웠습니다. 보병 중 일백 정도를 지원해 달라고 전갈하라는 명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알겠다.”

말이 끝나자마자 편월은 전령을 불러 본대의 사문기에게 보냈다. 내용은 물론 보병 중 돌 깨는 일을 해 본 적이 있는 일백 명을 차출해서 대인성으로 통하는 수맥을 끊는 데 투입하라는 것이었다.

그 모든 수배를 끝낸 뒤에 편월은 임시 진막에서 나왔다. 식사는 반도 하지 않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자니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힘이 들었다.

안개가 상당히 옅어졌고, 오늘 하루도 뜨겁게 달굴 태양이 벌써 조휴령에 이어진 산봉우리 위로 훌쩍 솟아 있었다.

그 속에는 인간이 낼 수 있는 온갖 소음이 섞여 있었다. 고함 소리, 욕지거리 소리, 불화살이 날면서 내는 둔탁한 파공성, 더러 비명도 섞여 편월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비로소 편월은 기분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전쟁이라는 이 참혹한 지옥도가 그려진 곳에서만 간신히 머리가 차가워지고, 반대로 혈관 속의 피는 용솟음치는 듯한 활기를 띠어 간다.

오늘 황월대와 적월대는 성문에 집중적으로 불화살을 쏟아 붓는 중이었다. 지난밤 사이 보급이 이루어졌으니, 어제처럼 화살이 부족해지는 사태는 없을 터였다.

적들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대응하지 않고 있어 봐야 불타는 건 성안의 건물이고 잔교였으니, 필사적으로 화살을 쏴 대고 있는 중이었다.

편월은 그것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제 낮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허주군의 활 솜씨는 가히 좋은 게 아니었다. 저처럼 높은 성루에서 쏘면서도 아군을 맞히는 화살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 예로 편월이 서 있는 곳까지 힘없는 화살이 후둑후둑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군이 성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위로부터 쏟아지는 화살의 비가 워낙 무성하다 보니, 방패를 벗어나면 곧장 고슴도치 신세를 면치 못할 것만 같았다.

이건 분명 아군이 불리한 싸움이었다. 아무래도 높은 곳에서 쏘면 화살이 멀리 나간다. 아군의 불화살은 성벽 너머로 날아가지 못해도, 적의 화살은 아군의 머리 위에 쏟아진다는 얘기다.

그래도 괜찮다고, 편월은 생각했다. 어제부터 적병이 쏘아 댄 화살의 수만 해도 족히 십만 발은 넘을 터였다. 무기를 얼마나 비축해 뒀는지 모르지만, 성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는 그것도 곧 바닥날 것이다. 하루 이틀 사이에 허주의 원군이 오지 않으면, 대인성은 저절로 무장해제가 될지도 모른다.

“대장군, 위험한 곳에 왜 나와 계시오?”

편월이 물끄러미 싸움을 구경하고 있을 때, 송지가 달려오며 타박을 주었다.

“어떻게, 물길은 끊었소?”

“일단 포로가 가르쳐 준 곳은 끊었소이다. 이제 하루 정도 지나면 그 말이 맞는지 어떤지 표가 날 거요. 그보다 그곳에 병사 오백 정도를 주둔시켜야겠소. 만약 거기가 대인성으로 들어가는 물길이 맞는다면, 놈들이 틀림없이 다시 탈환하려고 할 거요.”

“그럼 보병 중에서 이백을 더 뽑아 투입시키시오. 여차하면 유군을 출동시키면 되니까.”

“존명!”

복명한 후, 송지는 전령을 불러 그 취지를 본대에 전하게 했다.

“놈들, 무작스럽게 쏴 대는구려. 제대로 맞히지도 못하면서! 지휘자가 누군지, 정말 한심스러운 놈이오.”

대인성에서 쏟아지는 화살의 소나기를 보며 송지는 쯧쯧쯧, 혀를 찼다. 적이지만, 너무 한심하게 싸우고 있는지라 오히려 가련하다는 표정이었다.

* * *

송지가 혀를 차면서 한심스러워하고 있는 대인성의 지휘관은 역시 편사중이었다.

“쏴라, 쏴! 봉화를 올렸으니 이제 곧 원군이 온다! 그때까지 버텨라!”

편사중은 연방 지휘 채를 휘두르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악이 받쳤다기보다는, 반쯤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심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당세홍은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지휘는 그가 해야 되지만, 조환의 처남이자 성주인 편사중에게 밀려 지휘권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래도 어젯밤에는 편사중이 응전하지 말자는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부질없는 화살이나 기타 무기의 낭비를 줄이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밖에서 날아온 불화살에 전각 몇 채가 소실되자, 편사중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안개가 옅어져서 겨우 시야가 트였다 싶자 곧바로 화살 공격을 시작했다.

그게 당세홍은 못마땅했다. 편사중의 말대로 수령성에서 봉화를 올렸으니, 이 위급은 허주성에 있는 조환의 귀에 벌써 들어갔을 터였다.

아니, 딱히 조환이 아니라도 괜찮다. 대인성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성은 허주의 노장이자 명장인 도연각陶淵珏이 지키고 있는 담전성淡田城이다. 하다못해 거기서라도 원군이 올 게 분명하다.

담전성이라면 여기서 이백 리 길, 병력을 수습하는 시간이 걸린다 쳐도 오늘 저녁이면 도연각은 대인성에 도착할 수 있다.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화살을 낭비하는 편사중이 못마땅하기만 한 당세홍이었다.

한참 편사중을 지켜보던 당세홍은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이제 한나절도 버티기 힘든 화살의 재고를 생각지 않고, 연방 ‘쏴라!’만을 연발하는 꼴은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들었다.

“아니, 너희들은 왜 돌아오느냐? 불을 끄라고 하지 않았더냐?”

시선을 돌린 당세홍의 눈에 성루로 올라오는 일단의 병사들이 보였다. 성중의 건물에 붙은 불을 끄라고 보낸 병력이었다.

“물이 없는데 무슨 수로 불을 끄겠습니까?”

“물이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한 방울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물이고 성중을 흐르는 작은 하천이고 간에 모두 말라붙었습니다.”

‘아뿔싸!’

병사의 보고를 들은 당세홍은 다리에 힘이 풀려 자칫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만큼 심적인 타격이 컸다는 얘기다.

지금은 오뉴월 염천이다. 이런 날씨에 물이 없다면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들다.

‘적이 성의 수원지水源地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도 망설이고 있을 까닭이 없다. 당세홍은 급하게 병력 오백을 수배하여 성의 뒤쪽, 즉 절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에 수원지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전에 편사중에게 보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도 아주 바보는 아닌지라, 두말도 하지 않고 병력을 쪼개 나가는 걸 허락했다.

‘늦어도 내일이면 도 장군이 도착하시리라. 그때까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버텨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수원지를 다시 확보하는 게 급선무다. 당세홍의 발길은 저절로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2

삐이이이잇-!

대인성의 후미에 있는 절벽의 중간쯤에서 한 발의 향전이 쏘인 건 정허군이 점심 취사를 마치고 막 오후 공격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저긴 우리가 끊은 수맥이 있는 곳이오!”

“뭐?”

송지의 보고를 들었을 때, 벌써 편월은 그곳으로 쪼개 나갈 병력을 계산하고 있었다.

‘없다!’

아침부터 들썩거리기 시작한 수령성을 누르기 위해 유군은 이미 출동한 상태였고, 쏟아지는 적의 화살 때문에 황월대와 적월대는 아직 대인성의 성문도 불사르지 못했다. 거기서 병력을 뺀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렇게 꼽아 가니 남는 건 단 하나, 근위대뿐이다.

“좋아, 맹 장군! 출동이다. 근위대를 준비시켜!”

“존명이오!”

싸우러 가자니 벌써부터 신이 나서, 맹아는 춤이라도 추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진막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직접 가시려는 거요?”

“그렇소. 적들이 이처럼 다급하게 공격을 감행한 걸 보니, 포로가 말한 게 정확했던 모양이오. 그런데 어떻게 거길 갔을까?”

편월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안 그러면 송지가 틀림없이 대장군은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 전체에 공급되는 물의 수맥이라면, 거기로 통하는 비밀 통로도 있지 않겠소?”

“비밀 통로라면, 잘하면 우리 편도 이용할 수 있겠군.”

“근위대 출동 준비 완료!”

편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맹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지간히 서둘렀던 모양으로, 나간 지 한 식경도 되지 않아 준비를 마친 것이다.

“다녀오겠소. 그동안 이곳의 지휘를 부탁하오. 섣불리 접근하지 말고, 오늘 공격은 성문을 태우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시오.”

“대장군!”

송지가 제지할 뜻으로 불렀지만, 편월은 무시해 버렸다.

밖으로 나가니 맹아가 이미 소질풍을 끌고 와 있었다. 그 역시 오늘은 편월이 직접 나설 거라고 예상한 모양이었다.

푸르륵, 푸륵!

오랜만의 출동을 알았는지, 소질풍도 연방 투레질을 하며 앞발로 땅바닥을 긁었다.

“너도 그동안 몸이 근질거렸구나. 좋아, 오늘은 마음껏 달려 보자꾸나!”

소질풍의 긴 얼굴을 한차례 쓰다듬어 준 후, 편월은 훌쩍 그 등에 올라탔다.

“자, 출동이다! 맹 장군, 길을 안내하시오!”

근위대원들 앞인지라 맹아에 대한 말투를 다시 바꾸며, 편월은 그에게 안내를 명했다. 어제 수맥을 끊으러 갔다 왔기 때문에 지리를 잘 알 터였다.

그걸 마다할 맹아인가. 대뜸 말을 몰아가면서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대장군이 나가신다! 길을 열어라! 근위대 출동!”

그 말과 함께, 맹아 곁을 따르는 근위대의 기수가 깃발을 앞으로 조금 숙였다.

오늘 대장군기는 일부러 가져오지 않았다. 그저 진막 앞에서 펄럭거리기만 해도 아군에겐 용기를, 적에겐 위축감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소질풍이나 근위대의 말들은 빠르게 달렸다.

모두가 뛰어난 명마는 아니지만, 다들 솜씨 좋은 기수들임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들은 막주전에서부터 호흡을 같이했던 사람들이다.

서로의 눈빛만 봐도 뭘 얘기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달리 명이 없어도 그들의 질주는 질서 정연하게 각자의 위치를 잡으며 달렸다.

한동안 길을 따라 내려가던 맹아는, 돌연 말 머리를 돌려 산길로 접어들었다.

말 한 필이 간신히 달릴 수 있는, 초부樵夫나 사냥꾼들이 이용하는 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길도 없이, 그저 우거진 수목들만 빽빽이 들어차 있던 막주에서도 말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이다. 이 정도 길이라면 탄탄대로나 다름없었다.

‘명궁의 활 공격을 받으면 꼼짝없이 당하겠군.’

속도는 여전하다지만, 길이 좁으니 근위대원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전방에 적의 사수가 있어 활을 마구 쏴 댄다면, 정말이지 오도 가도 못한 채 화살 밥이 될 만한 위치였고, 진형이었다.

그 점은 누구보다 선두에 선 맹아가 가장 절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연방 말에 박차를 가해 최고의 속도로 달렸다. 이윽고 나무들 사이에서 사람 그림자가 알찐알찐 비치는 게 보였다. 달리는 말들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서로 격렬히 싸우고 있다는 건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대로 짓밟도록!”

맹아의 뒤에서 편월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이미 이 정도까지 접근했으니 아군과 적의 구별은 확연하다. 망설일 것도, 사정을 둘 것도 없는 싸움이었다.

“우오와아!”

돌연 편월의 뒤에서 달리고 있던 근위대원들이 이상한 함성을 질렀다.

그사이 맹아가 그렇게 훈련을 시켰는지, 그 소리는 묘한 위압감을 사방으로 풍겨 내었다.

동시에 전방에서 싸우고 있던 쌍방의 동작이 뚝 멈췄다. 서로 죽고 죽이는 순간들의 교차 속에서, 근위대가 오는 걸 미처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근위대로선 더 바랄 나위 없는 일이었다. 적과 아군이 뒤섞여 싸우고 있다면, 곧바로 치고 들어가기가 사뭇 곤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처럼 동작을 멈추고 떨어져 있으니, 그야말로 좋은 밥이었다.

“하이압!”

최초의 일격은 당연히 맹아의 몫이었다. 목철린에게서 받은 절풍검을 휘둘러 가장 가까이 있는 적병의 목을 그대로 허공 높이 쳐 올렸다.

그다음부터는 기세에 실린 움직임이었다. 달려오던 탄력을 조금도 죽이지 않은 채 각자 가장 가까이 있는 적을 베거나, 말발굽으로 짓밟으며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그 좁은 길에서, 달리는 말의 방향을 바꾼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근위대원들은 능숙하게 방향을 바꿨고, 이번엔 거꾸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편월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오른편 조금 아래로 약 오백 평에 이르는 공지가 있고, 그 주변을 적병이 단단히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저기가 수맥이로군!’

생각과 동시에 편월은 말 머리를 돌렸다. 오늘은 피아간의 수맥 확보 싸움이었다. 적병의 소탕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길 따위는 없었다. 막주와는 다른 수종樹種, 다른 잡목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편월과 소질풍에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앗, 적이다!”

설마 이런 곳으로 말을 몰고 올까 싶었던지, 편월이 지척지간까지 접근했을 때에야 적들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대경실색하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이미 늦었다!’

그렇다. 적의 대응은 늦어도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혹 편월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선두에 창이라도 세워 뒀으면 이처럼 쉽게 짓밟히지는 않았으리라. 일단 적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자, 소질풍은 이미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흉기가 되고 말았다.

번쩍!

대도가 하늘 가운데 걸려 있는 태양 빛을 튕겨 냈다. 여타의 것보다 훨씬 큰 만큼 그 위력도 강해, 한꺼번에 네댓 명의 적병이 갑옷째 잘려 나가며 피 보라를 뿌렸다.

“장창수들은 적의 말을 찔러라! 말부터 거꾸러뜨려라!”

‘적장이다!’

적의 한복판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터져 나왔을 때 편월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오랜 전쟁 경험으로 적장을 먼저 베어야 한다는 게 몸에 익은 동작이었다.

“정허군의 대장군 편월이 바로 나다! 졸자들은 상대하지 않겠다! 적장은 썩 나서서 목을 늘여라!”

소질풍의 방향을 바꾸는 것과 고함을 지르는 것, 주변의 보병을 짓밟는 걸 동시에 해내며, 편월은 또 한차례 대도를 휘둘렀다. 거기에 걸린 건 여지없었다. 방패든 병기든 혹은 사람의 몸이든 간에 편월이 휘두른 시퍼런 대도의 날에는 견디지 못하고 잘려 나갔다. 게다가 맹아를 비롯한 근위대 오십여 기가 뛰어들었다.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적병을 소탕하는 것 같았다.

“맞상대하지 말고 수원지를 보호하라! 한두 명은 성으로 달려가 구원을 청하라!”

목소리의 크기만으로 따진다면 당세홍 또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가 고함을 지르자 주변의 산들이 메아리를 불러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달리 대인성으로 구원을 청할 병사를 보낼 필요도 없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목소리만 컸을 뿐, 전쟁의 전술 면에선 형편없는 당세홍이었다.

어차피 막힌 수원지는 포기하고 산개해서 근위대를 상대했다면, 혹 조금은 긴 시간 동안 버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세홍은 부하들을 수원지 주변으로 집결시켰다. 그로선 목숨 줄과도 같은 수원지를 보호하겠다는 뜻이었겠지만, 기병인 근위대에겐 이보다 더 좋은 먹잇감도 달리 없었다.

“정허군 근위대장 맹아, 돌입!”

이번에도 맹아가 가장 먼저 설치며 덤볐다. 그 뒤를 다른 근위대원들이 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와중에 편월은 적장을 찾았다. 그를 베어야 이 싸움도 빨리 끝낼 수 있을 터였다.

애당초 오백여 평에 불과한 공간이다. 거기에 이백 명이 넘는 사람과 말이 들어차 있으니, 숨쉬기도 답답할 것처럼 느껴졌다. 싸움을 빨리 끝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아군의 피해도 염두에 둬야 한다. 좁은 공간에서 피아가 서로 부대끼다 보면, 사람은 어떻게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다손 쳐도 말들은 많이 상할 수밖에 없다. 기병으로서의 위력이 반감될 그 일 역시 최대한 피해야만 한다.

“길을 비켜라! 졸자들에겐 볼일이 없다!”

운집해 있는 적병 가운데로 뛰어든 편월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지난 몇 달간 싸우지 못해 움츠러들었던 전신 근육들이 새로 눈을 뜨면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적의 저항도 완강하기 그지없었다.

상대의 병기에 찔려 죽나 갈증으로 목말라 죽나 똑같다고 여긴 탓에, 하나같이 필사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며 대항해 왔다.

“대장군은 물러서시오!”

어느새 곁으로 치고 들어온 맹아가 편월의 신변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미 피 맛을 본 편월이었다. 고분고분 물러설 턱이 없었다.

“말리지 마시오, 맹 장군! 저자가 적장이오! 저자를 베어야 해!”

그나마 말을 놓지 않은 건, 대장군으로서의 한 가닥 이성이 편월에게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내게 맡기고 뒤로 빠지시오! 전체를 보시오, 전체를!”

강한 어투로 맹아가 타박을 주었을 때, 편월은 벌써 적병을 헤치고 적장에게 훌쩍 다가서고 있었다.

“이자가 적의 대장군이다! 이자를 쳐라!”

“와아!”

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편월이 스스로 자기의 정체를 밝혔으니, 삽시간에 그 주변에 창의 숲이 만들어졌다.

끼히히힝-!

돌연 소질풍이 우렁차게 부르짖으며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주변을 에워싼 창들을 보고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으리라.

그렇다고 편월이 흔들일 이유는 없었다. 소질풍의 이런 움직임이야 어느 전장에서고 한두 번은 있었던 것이고, 오히려 그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부러 대도를 휘두를 것도 없이 그저 말의 움직임에 맡겨만 둬도 효과는 충분했다.

순간적으로 편월의 주변에 널찍한 공간이 생겼다. 미친 듯이 펄쩍거리는 소질풍의 발길에 차이고, 거기에 따라 움직인 편월의 대도에 적병들이 잘려 나간 탓이었다.

“하아!”

운신할 폭이 생기자 편월은 재차 소질풍의 머리를 적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했다. 하지만 적장은 벌써 그 자리에 없었다. 어디론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그제야 편월은 비밀 통로가 있을 것이라는 송지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조속히 적들을 소탕하라!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일단 적장이 사라졌다는 걸 알자, 편월의 가슴속에 들끓던 투지도 절반 정도 삭감되었다. 비로소 대도를 거두며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비밀 통로로 가는 입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건 쉽게 발견되었다. 적장이 다급하게 달아나면서 너무 많은 흔적을 남겨 놨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입이 저절로 벌어질 것만 같이 교묘한 곳에 위치한 비밀 통로의 입구였다. 주변에 자라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몇 그루 그리고 위로부터 자연스레 처져 내린 칡넝쿨로 인해 바로 앞에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이 없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터였다.

“멈추시오, 대장군!”

말에서 내린 편월이 그 입구로 막 들어서려 할 때, 급하게 달려온 맹아가 갑옷 자락을 잡으며 제지했다.

적들을 모두 소탕했는지 갑옷과 얼굴까지 피가 튀어 있는 모습이었다.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들어가려고 하셨소? 그리고 싸움의 뒤처리가 우선이오! 포로도 있고…….”

“또?”

포로란 말에 편월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한마디로 그들은 처치 곤란이었다. 무장해제를 시킨 후 어디로 가라고 해도 가지 않았고, 딱히 가둬 둘 곳도 없으니 그들을 관리하기 위한 병력을 따로 빼는 것도 아까웠다. 하기야 이 수맥을 알려 준 그 포로 같은 자도 있었다. 그건 고맙지만, 하여튼 골치 아픈 존재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않소! 투항한 자를 벨 수도 없고…….”

말꼬리를 흐리는 맹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어제 자신이 포로들을 몇 명 베었던 걸 떠올린 탓이었다. 그들끼리의 싸움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지만, 너무 과격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무장해제시키고 쫓아 보내! 더 이상은 수용할 수 없어!”

“존명!”

복명을 했으면서도, 맹아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편월이 혼자 비밀 통로로 들어갈까 싶어서였다.

“혼자 가진 않겠다! 그러니 가서 시킨 일이나 잘 처리해!”

“다른 사람들도 귀가 있소. 그러니 내가 달리 지시하지 않아도 될 거요.”

“허어, 참! 근위대는 피해는?”

“전무! 말을 두 필 잃었습니다만.”

“다행이군. 그런데 이곳을 가르쳐 준 그 포로는 아직도 우리 군에 배속되길 원하고 있나?”

“예. 하도 고집스럽게 우겨서 감시병이 고초를 겪고 있는 것 같더군요.”

“어떻게 생각하나, 맹 장군? 그자를 받아 줄까?”

“적의 간인일지도 모릅니다. 이 수맥을 알려 준 것도 우리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요.”

“맹 장군의 생각도 나와 같군. 하지만 단순히 환심을 사기 위해 이처럼 중대한 비밀을 알릴 수 있을까?”

두 사람만의 대화가 되자 편월의 어투는 다시 편해졌다. 그래도 이름은 부르지 않고 꼬박꼬박 ‘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여 줬다.

“소관도 들은 얘기지만, 고육지계苦肉之計라는 게 그처럼 무서운 것이라더군요.”

“고육지계? 그게 뭐지?”

“아니, 그것도 모르시오?”

“모르니까 묻지!”

맹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편월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그러지 말고 설명을 해 봐. 고육지계가 뭐야?”

“차암 나! 고육지계란 말이오, 그러니까 그게… 같은 편에게 당해서… 에잇, 나도 모르겠소. 나중에 담 장군에게 물어보시오!”

“싱거운 놈! 저도 모르면서.”

오히려 같잖다는 눈빛을 보내는 편월을 보며, 맹아는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알긴 하는데, 말로 표현하지 못해 답답하다는 뜻이었다.

“포로들을 모두 쫓아 보냈습니다.”

“아군 보병의 피해는?”

근위대원 중 한 명이 보고를 하자, 편월은 급하게 물었다. 보병의 피해가 크다면 사문기에게 미안한 일이다. 가뜩이나 그는 허주가 아닌 강국으로 치고 들어가길 은근히 바라고 있던 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사망 스물둘, 부상자는 쉰 명이 넘습니다.”

“알겠다.”

하마터면 ‘빌어먹을’이라고 내뱉을 뻔했던 걸 간신히 참으며 말을 돌린 편월이었다.

“성한 병사 이백만 남기고, 나머지는 부상병을 호송해 본대로 돌아가라고 일러라. 전사자의 시신은 나중에 거두도록.”

“존명!”

편월의 명을 받은 근위대원은 빠른 걸음으로 보병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말은 이곳에 두고, 근위대원은 이 통로를 따라가 보자. 대인성으로 통하고 있다면 의외로 쉽게 성을 떨굴 수도 있을 테니까.”

“소관이 앞장서겠소!”

편월의 말이 끝나자마자 맹아가 나서며 말했다.

“흐흐흐, 이런 일엔 졸자들이 먼저 나서는 거요. 두 장군은 우리 뒤에 따라오시오.”

근위대원 중 한 명이 맹아의 말을 받았다 싶자, 한꺼번에 십여 명이 우르르 몰려 비밀 통로의 입구로 들어갔다.

“조심해!”

근위대원의 뒤에서 편월이 주의를 주었다. 그 순간 왠지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가득 메웠지만 이내 떨쳐 버렸다.

3

통로 안은 어두웠다. 어딘가 불을 켜는 곳이 있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거나 찾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횃불을 만들어라!”

맹아의 말은 아직 통로로 들어서지 않은 근위대원들에게 즉각 전달되었다.

“틀림없이 매복이 있을 거요. 그러니 대장군은 뒤에서 따라오시오!”

“알았소. 목소리나 낮추시오.”

“흐흐흐.”

편월과 맹아의 대화를 들은 근위대원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춰 웃었다. 장군들은 뒤로 빠지라면서 가장 먼저 통로로 뛰어든 사람이었다.

“왜 웃나?”

“어른 흉내를 내는 두 분의 말투가 우스워서 웃었소.”

“하긴 나도 어색하긴 해. 키키킥!”

맹아도 그자의 말에 동조하며 묘한 소리로 웃었다. 그 역시 ‘장군’이란 호칭은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닥치시오, 맹 장군!”

편월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가 억지로라도 말투를 고친 건 정허군을 보다 체계적인 군으로 만들어 보자는 의도에서였다.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 맹아가 도리어 답답했다.

맹아도 움찔 놀랐다. 너무도 격렬하고 진지한 편월의 반응 탓이었다.

“허어, 이거 난 농담을 한 거였는데. 미안하오. 내가 잘못한 거 같소. 편월 대, 아니 대장군!”

말을 꺼냈던 근위대원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편월은 대꾸하지 않았다. 화를 낸 대상은 맹아였지, 막주 토벌 때부터 생사를 같이한 근위대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은 지금도 정겹기만 했다.

“횃불이 만들어졌습니다.”

만약 이 보고가 없었다면 세 사람은 사뭇 어색한 시간을 보다 오래 끌었을 터였다.

“좋아. 백 명만 같이 간다. 나머지는 돌아가서 송 군감에게 이 사실을 전하도록.”

편월의 말이 끝나자마자 근위대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통로 안으로 들어왔다. 개중에는 서로 자기가 가겠다고 티격태격하는 자들도 있었다.

“횃불을 밝혀라.”

편월의 명에 따라 준비된 홰에 불이 댕겨지고, 통로에 웅크리고 있던 어둠이 화들짝 놀라 저만큼 물러섰다.

“거기까지! 그 뒤에 있는 사람은 지금 즉시 송 군감에게 돌아가 보고하라. 말들도 끌고 가.”

눈으로 대충 숫자를 헤아린 편월은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키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들은 결코 돌아가려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과연 백 명 속에 끼지 못한 근위대원들은 투덜거렸다. 그래도 묵묵히 발길을 돌리는 건, 지난 석 달간 정규군처럼 훈련시켰던 결과인지도 모른다.

“자, 서두르자!”

세 명에 하나 꼴로 횃불을 들고 있는지라 어둠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한마디 던지며 맹아가 가장 앞장서서 통로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편월은 맹아를 말리려고 했다. 매복이 있을 게 뻔한 곳인지라, 차라리 자신이 앞장서고 싶었다.

그래 봐야 듣지 않을 게 뻔하기에 맹아의 바로 뒤에 붙어 걸음을 옮겼다.

“대장군은 뒤로 좀 더 빠지시오.”

“그게 좋을 거요.”

맹아의 바로 뒤를 따르는 것도 편월에겐 허용되지 않았다. 근위대원들이 마구 추월해 어느새 그를 행렬의 가운데에 위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놈들, 멋은 있는 대로 다 부리는군.’

선두에 나서지 못하는 게 불만이었지만, 편월은 겉으로 표를 내지는 않았다. 지난 석 달 동안 대장군이 어떤 위치며,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탓이었다.

그런데 뒤로 밀린 건 편월만이 아니었다. 제일 앞장섰던 맹아도 어느새 곁에서 같이 걷게 되었다. 물론 근위대원들이 한 짓이었다.

“선두, 이런 동굴 속에서의 전투 경험은 있나?”

갑자기 편월이 소리쳐 물었다. 통로 전체가 왕왕 울리며 그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동굴이나 이런 통로에서 싸워 보지는 않았지만, 땅굴을 드나든 경험은 몇 차례 있소.”

선두로부터의 대답을 듣고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성을 공격할 때 도저히 낙성되지 않는다 싶으면 최후의 수단으로 땅굴을 파기도 한다. 그런 경험이 있는 자가 앞장서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정지!”

“뭐야? 무슨 일이야?”

돌연 선두에 선 자가 걸음을 멈췄고, 맹아가 성급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막힌 공간 속에 있으니 조급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길이 꺾였소. 흔히 매복은 이런 곳에 있는 법이지.”

맹아와 달리 그자는 느긋하게 얘기하며 들고 있던 횃불을 꺾인 통로 저쪽으로 힘껏 던졌다.

퓨퓨퓨퓨융-!

강한 파공성과 함께 십여 발의 화살이 날아온 건 거의 동시였다. 사방의 벽이 그 소리를 반향反響시켜 실제보다 훨씬 많은 화살이 날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흐흐흐.”

“매복인가?”

“아닌 것 같소. 그냥 기관 장치인 것 같소이다.”

‘쓸 만한 자다.’

사람이 일단 폐쇄된 공간에 들어오면 어느 정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두에 선 자는 몇 차례 경험 탓인지 여유를 잃지 않고 있다. 매복과 기관 장치를 단번에 구분해 내는 것만 봐도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선두, 이름이 뭔가?”

“막주전에서 같이 뒹굴고서도 여태 내 이름도 기억 못 하시오? 화응華鷹이오, 화응!”

‘화응…….’

그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는 편월이었다. 다만 이름과 얼굴을 결부시키지 못한 건 화응이 이탈병 속에 끼지 않았던 탓이었다.

“좋아, 화응! 기관 장치라면 피해 갈 방법도 있겠지?”

“부수는 게 더 빠를 거요.”

여전히 느긋한 어조로 화응이 대꾸했다. 여유가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한 음색이었다.

“이런 것도 배워 두면 언젠간 쓰일 데가 있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편월은 앞으로 걸어갔다. 화응이 어떻게 기관 장치를 다루는지 봐 두려는 의도였다. 이건 어릴 때부터 광운이 가르쳤던 거고, 자연스레 편월의 몸에 밴 습성 중 하나였다. 잡가군으로 떠돌려면 뭐든 많이 아는 게 좋다. 하나의 지식이 한 번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맹아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편월이 나서자, 그 역시 뒤를 따랐다.

“뭐 하러 왔수? 위험한데.”

가볍게 핀잔을 주었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은 듯한 화응의 표정이었다. 오히려 자기 솜씨를 두 사람 앞에 선보이는 게 자랑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잘 봐 두슈.”

말과 함께 화응은 재빨리 고개를 내밀어 모퉁이 저편을 일별하고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편월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기관 장치라는 말에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화응이 다시 고개를 내밀어도 화살은커녕 돌멩이 하나 날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리 정교한 건 아니군. 간단히 부술 수 있겠소.”

“설명을 해 봐.”

눈을 반짝이며 편월은 보챘다. 이런 모습은 영락없이 지식에 목말라하는 열세 살 소년이었다.

“그러니까 이 기관 장치는 움직임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이 통로 바닥에 실린 무게에 반응하는 것 같소. 그러니 간단하다는 거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 아니, 내가 묻지. 우선 저 화살은 어떻게 해서 발사되는 거야? 또 화살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장전하지?”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기관 장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보다 정교한 게 사람이든 다른 것이든 움직이는 모든 것에 반응을 하는 거요. 아주 잘 만든 건 그림자에도 반응하지. 그런데 저기 있는 건 그처럼 정교한 건 아니고, 통로 바닥에 뭔가가 올라서야 반응하는 것 같소. 그러니까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보다는 조잡하고, 깨뜨리기도 그만큼 쉽소. 화살의 재장전은… 일단 이런 기관 장치도 화살이 동나기도 하오. 얼마나 많은 화살을 재 뒀는지 몰라서 탈이지. 재장전하는 건 통상 통나무의 속을 파내고, 거기에 구멍을 뚫어 일렬로 시위를 만드는 거요. 그러니까 통나무 안에 시위 줄을 여러 가닥 만들고, 거기에 화살을 미리 재 두는 거요. 그걸 벽에 뚫어 둔 구멍에 맞추고… 에잇, 나중에 찬찬히 설명해 드리겠소.”

한창 얘기하던 화응은 갑자기 입을 닫아 버렸다. 설명을 해 줘도 또렷하게 알아듣는 것 같지도 않았고, 또 지금은 편월을 가르치는 것보다 기관 장치를 부수는 게 더 급한 일이었다.

“비켜서슈. 이제부터 부술 참이니까!”

화응은 편월을 멀찍이 밀어냈다. 드물게 이런 식의 기관엔 자폭장치가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때를 대비한 조치였다.

편월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조금 전 밖에서도 맹아에게 고육지계에 대해 물었다가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같은 일이 또 한 번 반복되니, 앞에 있는 화응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중요한 때다. 이 통로를 따라 대인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피아간에 쓸데없는 희생을 줄일 수 있게 된다.

‘백 명이면 충분하다. 대인성주는 우리들이 쳐 나가면 틀림없이 항복할 것이다.’

이게 대인성주에 대한 편월의 평가였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만 하루 동안 지켜본 대인성엔 제대로 지휘를 하는 자가 없는 것 같았다. 적을 맞아 어떻게 싸우겠다는 전술은커녕 단순한 화살 공격에도 줄기가 없었고, 갈래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 된 거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시만 더 기다려 보시오.”

화응이 한마디 툭 던져 놓고는,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갔다.

꽉!

자신도 모르게 편월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바닥에 뭔가가 올려지면 기관이 작동한다는 얘기는 똑똑히 들었다. 그렇게 말했던 화응 자신이 가장 먼저 모퉁이를 돌아갔으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화응이 없다면, 빤히 알면서도 이 통로를 통과하지 못하게 된다. 스스로 자신이 있으니 나섰겠지만, 그래도 보는 사람은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됐소. 오셔도 될 것 같소이다. 단, 여러 명이 한꺼번에 오지는 마시오! 한 명씩 오시오, 한 명씩!”

모퉁이 저편에서 화응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편월은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내가 먼저 가겠다.”

이번에도 맹아가 나섰다. 근위대장이라는 직책이 마음에 든 만큼, 그 수행에도 온 정성을 쏟는 게 여실히 보였다.

그렇게 한 사람씩 기관 장치가 있는 곳을 통과하니, 이번엔 둔중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꽤나 단단해 보이는군.”

말과 함께 맹아가 문을 두드렸다.

“손대지 마시오!”

동시에 화응이 맹아를 덮쳐 그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쓰왕!

쇠끼리 서로 문대면 바로 이런 소리가 날 게다. 섬뜩한 소음과 함께 문 전체에서 쇠침이 빽빽하게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얼핏 불빛에 비친 쇠침의 그 뾰족한 끝이 시퍼렇게 변색된 것이, 극독이 발려 있는 것 같았다.

“함부로 손대지 마시오! 내가 그러라고 하기 전에는 숨도 함부로 쉬지 말란 말이오!”

화응은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얼떨떨해하는 맹아에게 마구 쏘아붙였다.

“저게 만약 발사되는 기관이었으면 어쩔 뻔했소? 여기 있는 사람들 절반은 희생되었을 거요!”

딴은 화응의 말이 맞다고 편월은 생각했다. 자기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조차 못 했으니, 만약 문에서 나왔다 사라진 쇠침이 발사되었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으리라.

“대개 이런 건 어린애 장난 같은 수준인데.”

고함을 질렀던 게 자기 딴에도 미안했던지, 화응은 곧장 벽면을 살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대장군.”

겸연쩍은 표정으로 맹아가 사죄를 했고, 편월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해 봐야 상대가 더욱 창피해할 것 같아서였다.

“아하, 여기 있었군!”

화응이 벽면의 한 곳을 주시하며 묘한 웃음을 날렸다.

편월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지 절묘한 곳이었다. 평소엔 유등을 켜 놓는 곳인 듯했다. 불을 켜 두면 그 불빛 탓에, 지금처럼 꺼져 있으면 그을음 때문에 사람들이 발견하기 어려운 위치였다.

“방패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시오. 혹시 무슨 일이 또 생길지 모르니까!”

벽에 묻은 그을음을 떨어내면서, 화응은 주의를 주었다.

그 말에 따라 방패를 소지한 근위대원들이 다른 사람을 둘러쌌고, 다들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편이 불의의 공격에 보다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다.

그을음을 떨어낸 곳의 벽면을 화응은 조용히 뽑아냈다. 아무리 살펴봐도 돌인 것 같았는데, 손을 대자 너무도 맥없이 열리는 상자의 뚜껑과도 같았다.

그 속을 들여다본 화응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엄지손톱만 한 돌기가 세 개나 보였기 때문이다.

“흐음,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 이건데…….”

아무래도 긴장이 된 탓이리라. 입으로 연방 중얼거리며, 화응은 가장 왼쪽에 놓인 돌기에 손가락을 얹었다.

하지만 그걸 선뜻 누르지는 못했다. 대신 그의 이마에 납빛의 끈끈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화응은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이 세 개의 돌기 중 하나만이 문을 열 수 있는 장치고, 나머지는 틀림없이 암기를 발출시키는 기관일 게다. 그 선택이 어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화응의 긴장감은 편월을 비롯한 다른 근위대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파되었다.

‘차라리 돌아갈까? 수맥만 지키고 있으면 놈들은 저절로 항복할 텐데,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될지 모르는 이런 일을 계속해야 될까?’

긴장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은 화응의 뒷모습을 보는 편월의 뇌리에 스친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편이, 뒤에 현명한 지휘였다는 얘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혈관 속에 흐르는 뜨거운 피는 그걸 납득하지 못했다. 이성적으론 수맥만 단단히 지키면 이기는 싸움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투지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대인성으로 밀고 들어가라고 한다.

전쟁의 승리란 싸워서 이겨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여기 있는 근위대원들도 편월과 같은 가슴을 가졌을 게다.

적을 기갈飢渴의 상태로 몰아넣어 항복받기보다는, 당당하게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기는 걸 더 좋아할 게 분명하다.

“젠장, 아무거나 눌러!”

통로로 들어온 이후 조금 들뜬 것처럼 행동하던 맹아가 거칠게 한마디 내뱉었다. 터질 듯한 긴장감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화응은 여전히 망설였다. 자신의 손길 하나에 동료들의 목숨이 오간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몸이 굳어져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다. 밖에서 공격하는 아군들은 성문만 불사르면 곧바로 돌입을 시도할 것이다.

그때가 가장 많은 피해를 내는 순간이다. 그 전에 대인성으로 뛰어들어 최대한의 혼란을 일으켜야만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차례로 눌러 보고 싶겠지?’

왼쪽에서든 오른쪽에서든, 우선은 차례차례 건드려 보려는 게 사람의 심리일 게다. 그걸 이용해서 만든 기관 장치라면…….

‘가운데!’

이제 더 이상은 망설일 수 없었던 화응은 가운데 돌기를 힘껏 눌렀다. 동시에 그의 눈은 저 자신도 모르게 질끈 감겼다.

쿠르릉-!

육중한 굉음과 함께 철문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심하시오! 이 문이 성으로 통하는 마지막 관문이라면 반드시 매복이 있을 것이오!”

화응이 재빨리 주의를 주었고,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방패수들은 일제히 전방으로 몰려 하나의 벽을 형성했다.

편월은 그 방패의 틈 사이로 전방을 주시했다.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와, 어둠에 익은 눈을 시큰하게 만들며 시야를 흐렸다.

그래도 그 빛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건 볼 수 있었다.

“매복이다!”

편월이 고함을 질렀을 때, 타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수들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엄청난 수의 화살과 창 등이 날아와 꽂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맹아의 본능이 격발되었다.

“물러서지 마라! 밀고 나가!”

커다란 목소리로 연방 근위대원들을 독려하며, 그 자신이 먼저 방패의 벽에서 벗어나 빠르게 뛰어나갔다.

그게 도화선이었다.

“대장을 따르라!”

“뒤처지지 마라! 대장이 위험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한소리씩 크게 외치며, 근위대원들은 일제히 맹아의 뒤를 따라 대인성으로 밀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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