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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강시제血江屍堤 1 (25/66)

혈강시제血江屍堤 1

1

율천국 진무각!

여름이라지만, 새벽의 대기는 선선하다 못해 싸늘하게 느껴졌다. 너르디너른 진무각 안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흐릿한 장명등長明燈이 연방 깜박거리며 간신히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진무각, 거기에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을 감고는 있지만,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눈초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앙상하게 여윈 어깨가 연방 격렬하게 출렁거리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벌써 이레째였다. 이 사람이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은 뒤로, 이미 일곱 개의 낮과 밤이 교차되었다.

여름의 밤이 짧다는 건, 거기엔 짧은 새벽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벌써 궐운평야가 끝나는 곳에 있는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로써 이 사람은 진무각에서의 여드레째를 맞게 된 것이다.

날이 밝음과 동시에 율천국의 대소 신료들이 하나 둘 등청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도 꿇어앉은 사람이 보일 텐데,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장식물인 것처럼 무감각하게 지나치고들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그는 꿇은 사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이보시오, 하河 공. 이미 왕야의 뜻은 결정되었소.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이만 물러가서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말을 건 자의 얼굴에선 수염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그 목소리도 마치 기름 위를 걷는 것처럼 미끄러웠다.

당연한 일이다. 말을 건 자는 바로 율천국의 환관宦官 우두머리인 보차普差였으니 말이다.

하긴 그의 본명은 보차가 아니다. 환관이 된 이후, 스스로를 비하해 바꾼 이름이 그것이었다.

원래 환관은 왕과 대소 신료들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엔 들어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차가 이처럼 진무각에 자유로이 드나드는 건 가겸후의 특별한 허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재능이 뛰어나다는 의미였다.

“허주로 원군을 보내 주신다는 말씀을 듣기 전에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소!”

하 공, 즉 하정河靖은 깔깔하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허, 허주의 조 공은 우리 왕야와 영산에서 서로 적대를 했었소. 그런 전력이 있는데 왕야께서 쉬이 원군을 내시리라 보시오?”

그렇다. 하정은 지금 율천국에 원군을 청하기 위해 이 자리에 무릎 꿇고 있는 중이었다. 파양주에서 허주를 치기 위해 군세를 출동시켰다는 정보를 접하자마자, 그는 조환의 명을 받고 여기로 왔다.

그동안 수십 차례 말을 했지만 가겸후는 전혀 들어주지 않았고, 그래서 하정은 최후의 수단으로 이처럼 진무각에 꿇어앉아 먹지도 자지도 않고 버티는 중이었다.

“영산의 전투는 작은 일이오. 하지만 허주가 파양주에게 망한다면, 그땐 이 율천국도 위태로울 거요. 허주는 바로 율천국의 서쪽 방패, 사직을 보전하게만 해 주신다면 우리 주공은 결코 율천국의 은혜를 잊을 분이 아니오!”

어찌 보면 해괴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불과 몇 년 전에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전쟁을 치렀던 나라에, 오늘은 당당하게 큰소리치면서 원군을 청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게 전국이고 난세다.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바로 어제까지 동지였던 자의 배후를 오늘 치는가 하면, 아침에 격렬하게 싸우던 핏빛 한을 잊고 저녁이면 서로 같은 술자리에 앉기도 하는 혼란함!

그래서 울고 있는 하정의 목소리도 자못 당당할 수 있었다.

“율천왕 전하는 보 공을 철석같이 믿고 계시다 들었소. 그러니 보 공께서 부디 이 뜻을 잘 전해 주시기 바라오.”

“하 공께선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오. 이 몸이야 갖출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미천한 환관, 어찌 왕야께서 이 몸의 말을 들어주시겠소?”

“세상이 다 아는 일을 어찌 그리 매정하게 말씀하시오! 나를 불쌍타 여겨 달라고는 하지 않겠소. 다만 율천국의 앞날을 생각해서 말씀 올려 달라는 거요.”

“전하의 말씀을 전하옵니다!”

하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늘고 길게 끄는 환관 특유의 목소리가 진무각에 퍼져 나갔다.

“오늘 전하께옵서 심기 미편하시어 조회를 폐하신다 하옵니다! 그러니 대소 신료들은 각자의 맡은 부서로 돌아가시라는 하명이옵니다!”

명을 전한 환관은 하정을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누가 봐도 오늘 가겸후가 조회에 나오지 않는 건 그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보 내관은 즉시 왕야께 가 보세요. 급히 찾고 계시니.”

보차에게도 한마디 한 후, 그 환관은 급히 진무각을 빠져나갔다.

와락!

돌연 하정이 보차의 손을 움켜쥐었다.

“부탁드리겠소, 보 공! 부디, 부디…….”

“늦으면 왕야께서 신경질을 내십니다. 그러면 될 일도 안 되겠지요.”

하정의 손을 가만히 밀어내며, 보차는 나직이 말했다. 가겸후에게 얘기를 해 주겠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한 셈이었다.

“고맙소. 고맙소이다!”

하정은 걸어가는 보차의 뒷등에 대고 연방 머리를 조아렸다.

심기가 미편하기는커녕, 그날 가겸후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각지에서 보낸 진상품 중에서 썩 마음에 드는 검을 한 자루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부르셨사옵니까, 왕야?”

“오, 보차냐? 그래, 그자는 여전하던가?”

“예. 지원군을 약속받기 전에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이옵니다.”

“흥!”

가겸후는 코웃음을 날렸다. 가벼운 행동이었지만 이제 마흔에 바짝 다가선 그의 나이나, 그동안 왕으로 군림한 관록이 배어 결코 경망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허주의 조환은 지난날 영산 전투에서 짐의 본대까지 홀로 쳐들어와 칼을 휘둘렀던 놈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원군을 달라고?”

‘그건 우리가 먼저 침공을 했기 때문에…….’

목구멍까지 치민 이 말을 보차는 간신히 꿀꺽 삼켰다. 유난히 활짝 갠 듯한 가겸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 싫어서였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차? 내가 원군을 보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가겸후가 물었을 때 보차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런 질문이 던져지리란 걸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탓이다.

“당장 마용승과 자웅을 결하실 생각이라면, 원군은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그 반대시라면, 허주는 충분히 마용승의 창끝을 막아 줄 방패 역할을 해낼 것이옵니다.”

“너는 하가 놈에게 설복당했구나!”

말의 내용은 질책이었지만, 가겸후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예. 그 열정에 소인도 모르게 그만… 하오나 단순히 설복만 당했다면 이런 진언은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옵니다. 국익을 생각하고, 천하의 정세를 생각하여…….”

“건방지다!”

“황송하옵니다.”

“네놈에게 듣지 않아도 뭐가 이득이고, 천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쯤은 환하게 알고 있다. 요망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말라!”

“황송하옵니다.”

거친 어조로 보차의 말을 막은 후, 가겸후는 또다시 수중의 장검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물러가라는 말도 않는다.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검에만 열중하고 있는 가겸후를 보면서, 보차는 일말의 희망을 느꼈다. 허주에 원군을 내겠다는 말이 곧 내려질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세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갑작스러운 가겸후의 질문에 보차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대답할 성질의 하문이 아니었다.

가겸후는 여태 정식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 다만 선대인 아버지의 후궁을 그대로 얻어 내전을 꾸렸고, 그사이 사남 삼녀의 자식을 얻었다. 그중 장남인 가인평嘉仁平을 세자로 책봉해 두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네가 생각하는 세자는 어떠냐고 묻지 않았느냐? 꺼릴 거 없으니 솔직히 말을 하라!”

“하오나 소인이 어찌…….”

“어허, 괜찮다는데도! 솔직히 평아 그놈은 너무 약한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예나 학문이 달린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만.”

“아직은 보령寶齡이…….”

“그래? 아직 어리니까 더 지켜보라는 말이냐?”

이 질문도 역시 보차가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좋다. 결정했다. 허주에 원군을 내겠다!”

“전하!”

“이건 허주를 위한 것도, 천하 정세를 읽고서 내린 판단도 아니다. 세자가 아직 어리다. 아직은 큰 싸움을 해서는 안 될 때, 당분간 허주로 하여금 마용승의 창끝을 막도록 해 둬야겠지. 잘 들어 둬라, 보차! 이건 바로 이 애비가 세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알겠느냐?”

“전하,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가서 그 고집 센 하가 놈에게 전하여라. 즉시 중주에 명을 내려 원군 삼만을 허주에 보내겠다고.”

“명심하여 봉행하겠나이다, 전하!”

“물러가랏!”

때려 붙이듯 보차를 보낸 후, 가겸후는 다시금 장검에 눈길을 주었다. 그 예리한 날과 쇠의 강도에 취한 듯한 눈빛이었지만, 정작 그는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여름 싸움은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든다. 허주에서 전쟁이 난다면, 한창 피기 시작한 벼 수확은 하지 못할 터, 올겨울 허주는 기근에 시달릴 것이다.’

확실히 그렇다. 여름은 모든 농작물이 쑥쑥 성장하는 계절이다. 그런 때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논밭이 인마에 짓밟힌다면, 가을에 수확할 게 있을 리 없다. 세자를 위한 선물이니 뭐니 했지만, 정작 가겸후가 노린 건 바로 그 점이었다.

허주는 가겸후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곳이다. 율천국의 서북쪽 국경은 언제나 만년설이 쌓여 있는 대과산맥大山脈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걸 넘어 쳐들어온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높고 험한 산맥이다.

남쪽은 곧바로 강국과 연결되어 있다. 증두신은 밖으로 힘을 뻗기보다는 내치에 치중하는 눈치니, 당분간은 안심해도 별 탈이 없을 터였다.

그렇게 따지면 허주야말로 율천국의 입장에서는 대륙의 서쪽으로 통할 수 있는 숨구멍이자, 적의 입장에선 율천국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인 셈이다. 마용승과 가겸후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땅이라고 단정한 건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내년 봄, 허주를 친다.’

그때까진 원군이나 보내서 마용승의 예봉만 막아 두는 걸로도 충분하다.

‘황제에게, 마음대로 군사를 움직인 마용승을 질타하는 조서라도 한 장 쓰라고 해야겠군.’

그렇게 해 두면 조환은 더더욱 자신에게 매달릴 것이고, 그 방심을 꿰뚫으면 일거에 허주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겸후는 장검을 칼집에 넣었다. 눈앞에서 사라지자, 이미 그것은 그의 관심 밖으로 내팽개쳐졌다.

* * *

이런 경우의 전쟁엔 대개 정해진 순서가 있다. 우선 침략을 당한 쪽에서 장수를 내보내 상대의 정체를 묻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인성 병사들 중에서 일기의 장수가 등에 백색의 작은 삼각기를 꽂고 빠르게 달려 나왔다.

“대체 어디서 온 도적놈들이기에 감히 이 허주 땅을 침공하는가? 썩 물러가지 않으면 네놈들의 시체로 육젓을 담겠노라!”

그에 대한 응대는 담개가 했다. 정규군이니만치 이런 일엔 익숙한 까닭에서였다.

“진남후의 명을 받들어 천하의 역적 조환을 치러 온 군사에게 도적이라니, 불경스럽다! 황명을 거스르고, 목철린을 도우려 한 조환은 썩 나와서 목을 늘여라!”

“하룻강아지 같은 놈들! 고작 몇천의 군세로 우리 허주를 넘보느냐? 가소롭도다, 가소로워!”

“우린 선봉대일 뿐, 뒤에 파양주의 삼십 만 강병이 곧 도착할 게다! 그러니 성문을 열고 우리 정허군을 맞으라! 그러면 그대들의 안전만은 보장하겠다!”

“아무리 전장에서 적으로 만났기로서니, 장수 된 자가 거짓말을 하느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흥, 말한 보람도 없는 놈이로다! 그렇다면 이젠 싸움터에서 창칼로 얘기를 주고받을 뿐!”

말과 함께 담개는 벼락같이 빠른 솜씨로 화살 한 대를 날렸다.

쉬잇, 파앗!

날아간 화살은 보기 좋게 적 장수가 등에 멘 흰 깃발을 찢고 땅에 박혔다.

“와아!”

황월대와 유군이 동시에 함성을 올렸다. 그만큼 담개의 활 솜씨는 절묘했다.

‘그까짓 깃발을 찢은 게 뭐 대수냐?’라는 말 따위는 하지 마라. 이십 장이 넘는 거리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손바닥만 한 삼각기를 맞힌다는 건 여간한 명궁이 아니고선 힘든 일이다.

당연히 먼저 나왔던 적의 장수도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대로 말을 돌려 적진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와아!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구나!”

“에라 이, 배알도 없는 놈아!”

적장이 달아나자, 아군 측에선 또 한차례 함성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지두룡의 표정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바로 전장, 즉 싸움터가 불리하다고 느낀 탓이었다.

그를 비롯한 잡가군 대부분은 정해진 전장에서 싸우는 게 상례였다. 가장 위험한 최일선에 투입되긴 했지만, 그래도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곳에서 싸웠다.

그런데 여긴 길이다. 그것도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국경의 대로다. 범위가 정해진 전장에서도 이탈을 하는 잡가군이 많은데 하물며 이처럼 확 트인 길에서는 전황이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몸을 빼는 자들이 속출할 것이다.

지두룡이 이처럼 졌을 경우부터 생각하는 건, 적과 아군의 숫자가 너무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선봉으로 나선 백월대도 훨씬 많은 숫자의 적과 강을 끼고 대치하고 있고, 여긴 배가 넘는 적을 맞고 있다.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괘공교를 건너 철수해야겠지만, 솔직히 그것도 문제였다. 유군과 합쳐 천육백 명이다. 그들이 한꺼번에 다리를 건널 수는 없는 일이고 보면, 황월대의 희생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만 한다. 정규군 출신인 유군이 먼저 철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니 말이다.

지잉-!

돌연 적진에서 한차례 강한 징 소리가 울린다 싶더니, 적장 한 명이 창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나는 허주에 그 사람 있다고 알려진 표기장군豹旗將軍 위근장魏根丈이노라! 어디의 도적들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상대할 자 있거든 썩 나서라!”

“정허군의 유군 비장裨將 모두엽牟頭葉이 가노라! 위근장은 목을 늘이고 기다리거라!”

말리고 자시고 할 사이도 없이 담개 휘하의 유군 중 한 명이 역시 창을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걱정 마시오, 지 장군! 모 장군이라면 능히 적을 무찌를 수 있을 게요.”

우려 섞인 시선으로 모두엽을 바라보는 지두룡을 담개가 안심시켰다. 자기 휘하의 장수를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그보다 이렇게 일대일로 싸우다가는 장수와 병력이 부족한 우리가 단연 불리하오. 모 장군이 적장을 거꾸러뜨리는 것과 동시에 일제히 치고 들어갑시다. 그러고 나서 지 장군은 황월대를 거느리고 먼저 빠지시오. 후미는 우리 유군이 감당하리다.”

“예? 아니, 그 무슨 말씀을…….”

“그게 좋소. 대신 상 공자는 지 장군이 책임지고 이 싸움터에서 빼내 주시오. 부탁드리겠소!”

“그 점은 염려 마시오. 하지만 후미는 늘 우리 잡가군이 맡아…….”

“우리 모두는 같은 정허군이오. 잡가군, 정규군의 구분이 어디 있겠소!”

“담 장군…….”

약간 감격에 찬 어조로 지두룡이 불렀을 때, ‘와아!’ 하는 함성이 양군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엽이 위근장을 찍어 넘겼던 것이다.

“지금이다! 유군은 그대로 적의 보병을 짓밟아라!”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담개는 명을 내렸고, 저 자신이 가장 먼저 말을 몰아 적진을 향해 달렸다.

이쯤 되면 황월대도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유군에게 뒤처지지 마라! 황월대 돌격! 돌격이다!”

지두룡도 곧바로 황월대를 몰아쳤다. 보병이 주력인 적들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주자면, 한꺼번에 공격하는 게 좋다.

“방패!”

지두룡은 재차 고함을 질렀다. 적은 화살 공격을 감행할 게 분명하기에, 미리 준비를 시킨 것이다.

그 예상이 적중했다고 해서 좋아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보병이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가 활이라는 건, 군사훈련을 한 번만 받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곧이어 엄청난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아직 저물려고 생각지도 않는 여름 해를 가려 주변이 온통 어둑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여긴 확 트인 전장이 아니었다. 한쪽은 조휴령이라는 험하디험한 고개이고, 반대쪽은 이천강이다. 길 가운데서 고스란히 받아야만 되는 화살 공격은 아군의 발길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방패라는 무기가 있으니 그나마 나았다. 비록 화살 받이를 했다고는 하지만,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무방비로 노출된 말들은 여기저기서 무더기로 쓰러져 버렸다.

“말을 잃은 자들은 따로 집결하라!”

‘이대론 안 된다!’

명을 내리면서도, 지두룡의 뇌리엔 암울한 생각만이 가득 찼다. 이대로라면 적들에게 쇄도하기 전에 말들을 모두 잃을 것만 같았다.

지두룡은 재빨리 사방을 살폈다. 어떻게든 타개책을 강구해야만 하고, 그건 바로 이 길에서 아군을 빼내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대로 다리를 건너 본대로 철수한다고 해서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다.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불리한 전장에서 의미 없이 병사와 말을 잃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지두룡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만큼 당했으면 이쪽에서도 뭔가 보답(?)을 해 줘야 한다. 따끔한 칼 맛을 보여 주지 않고는 도저히 물러설 수 없었다.

그렇게 사방을 휘둘러보던 지두룡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수양버들이 일정하게 서 있는 오른쪽 강둑을 타고 내려간 곳에 단단하게 굳은 황토를 발견한 탓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 이천강에서 떠 내려온 진흙이 그대로 굳은 것 같았다.

“나를 따르라!”

더 볼 것도 없이 지두룡은 말을 몰아 강둑을 타 넘었다. 뒤에 몇 명의 부하가 따르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강둑이 적의 화살을 막아 주고, 그렇게 전진해서 적진에 쇄도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만이 뇌리에 가득했다.

“대장, 어쩔 셈이오?”

누군가 묻는 소리가 났을 때에야 비로소 지두룡은 뒤를 돌아보았다. 삼백여 기가 따르고 있었다.

“이대로 적진까지 돌진한다. 기치를 접어!”

“벌써 접었소!”

전투 경험이 많은 잡가군은 이래서 편하다. 강둑을 은폐물로 삼아도 기치가 펄럭이면 적의 눈에 들키고 만다. 그들은 둑 아래 내려서자마자 그걸 알아채고 기치를 접은 것이다.

“좋아, 돌격이다! 늦으면 아군의 피해가 커진다! 서둘러라!”

그다음부터는 달리 명령할 것도 없었다. 삼백의 황월대원들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강둑 아래를 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전히 적들이 쏘는 화살로 인해 여름 태양은 본의 아니게 가려져 있었다.

2

대인성의 성주인 편사중篇辭仲은 무용이 뛰어난 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중요한 곳을 맡고 있는 건 순전히 조환의 처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조환처럼 뛰어난 자가 어쩌자고 편사중 같은 용렬한 자에게 대인성주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겨 국경을 지키게 했을까?

그건 바로 조환이 허주를 장악할 때 처가인 편씨 문중의 막대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조환은 매사 정실인 편씨 부인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편사중이 대인성주라는 막중한 직책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지금 그 편사중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성주가 된 이후로 나름대로 병법도 공부했고, 또 무예도 열심히 연마했다.

하지만 실전을 치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처음 수상한 군세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후들거리던 무릎이, 그 병력이 적다는 걸 알고서는 진정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싸워 보니 아군이 월등히 우세했다. 적들은 아군의 화살 공격에 밀려 제대로 진격도 못 하고 있으니 말이다.

‘역시 전쟁은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는 거로군.’

“성주, 군사를 물리는 게 좋겠소이다!”

처음 흰 깃발을 꽂고 나가 정허군의 정체를 물었던 장수가 편사중에게 다가오며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말이오, 당 장군? 아군이 우세한 게 보이지도 않으시오? 모름지기 싸움이란 기세를 잡았을 때 몰아쳐야 이기는 거요!”

“적병 삼백여 기가 강둑 아래로 내려가는 걸 봤소이다. 아군의 배후를 칠 모양이니, 군사들을 뒤로 좀 물리는 게 좋겠소이다.”

“삼백? 고작 삼백으로 뭘 어쩌겠소? 우린 무려 오천 명이오, 오천!”

당 장군이라 불린 당세홍唐世鴻은 갑옷을 입은 자신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정말이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우린 모두 보병뿐이오. 여기에 적 기병이 뛰어들어 설친다고 생각해 보시오. 당장 아군은 혼란에 휩싸일 것이오! 그렇게 되면 눈앞에 있는 적들도 짓쳐 들 게 뻔하고.”

“어허! 글쎄, 두고 보시오. 이 싸움은 내가 맡아 멋지게 요리해 보일 터이니.”

편사중은 당세홍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마음속 한편으로는 ‘적의 화살 한 대에 겁먹고 쫓겨 온 주제에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다.’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군사를 물리라는 말은 더 이상 않겠소. 다만 성주만이라도 후방으로 빠져 계시오.”

“후방으로 빠지라니? 다 이긴 싸움에서 당 장군 혼자 공을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게 아니라, 만에 하나 성주의 신변에 불상사가 생기면 주공을 뵐 낯이 없소이다. 그러니 속히 후방으로 빠지시길.”

이건 당세홍의 진심이었다. 조환은 믿음직스럽지 못한 처남에게 대인성을 맡기면서,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하라고 그를 딸려 보냈다. 이런 같잖은 전투에서 편사중을 전사시킨다면, 그 역시 자결로 사죄하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게 그렇지 않다니깐! 이런 때일수록 성주인 내가 진두에 떡 버티고 있어야 병사들의 사기가… 억! 저게 뭐야?”

말을 하면서 후방에 도열한 병사들을 둘러보던 편사중의 두 눈이 커다랗게 불거졌다. 강둑에서 막 뛰어오른 적병들이 아군들을 마구 짓밟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적이오! 적이 후방을 끊었소! 이제부터 소장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시오!”

당세홍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자, 그 피해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싸움터가 길이란 건 대인성 측에도 결코 유리하게만 작용한 건 아니었다. 지두룡이 이끄는 황월대원 삼백이 그 가운데로 파고들자 당장 그들은 둘로 갈라져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성주인 편사중의 당황은 실로 눈 뜨고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기병이 전쟁을 치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건 조환의 실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변 삼국`—`율천국, 강국, 파양주`—`으로 쳐들어갈 힘이 없었기에 지키기에 급급했고, 농성엔 보병이 훨씬 유리하기에 기병은 아예 주둔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편사중은 눈살 찌푸리게 하는 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당 장군! 저, 저게 뭐요?”

그게 기병이라는 건 편사중도 물론 안다. 다만 그 기병의 주위에 몰린 대인성 측의 보병들이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튕겨 나가거나 짓밟히니 놀라서 물었을 따름이다. 철석같은 믿음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진즉부터 군사를 물리자고 하지 않았소! 하지만 지금은 늦었으니, 소장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시오! 성까지 길을 트겠소!”

아군의 한가운데로 파고든 적`—`황월대`—`들은 산개하여 마구 설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집결하여 전방으로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군의 화살 공격에 막혀 허둥거리던 전방의 적들도 이쪽이 혼란에 빠지자 대오를 갖춰 빠르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군세가 서로 합류하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이 모든 상황을 한눈에 읽어 내며, 당세홍은 편사중의 말고삐를 자신의 말안장에 묶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만은 성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당황하지 마라! 적들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침착하게 전방의 적을 막아라!”

당세홍은 연방 부하들을 독려해 우선 전방의 적들을 그 자리에 묶어 두려고 했다. 가운데 뛰어든 자들보다는 아무래도 그쪽이 숫자가 많으니, 그들까지 뛰어들면 이 자리에서 편사중을 빼내는 게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말에 힘을 얻은 대인성 병사들은 활을 쏘거나, 가까이 접근한 적에겐 창을 지르는 등 나름대로 선전을 거듭했다.

그제야 당세홍은 말 머리를 돌렸다.

“후방도 흔들리지 마라! 뛰어든 놈들을 양쪽에서 침착하게 공격하라!”

명을 내린 것과 동시에 당세홍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을 향해 쳐 나오고 있는 삼백여 기가량의 적병만 통과하면 편사중을 무사히 성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세홍도 무장이다. 결정되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대도를 휘두르며 적들에게 짓쳐 들었다.

“팔 없는 병신 놈아! 여기 당세홍이 간다!”

이게 당세홍이 저지른 최초의 실수였다. 선두에 서 있었고, 또 한쪽 팔이 없기에 만만하게 보고 지두룡에게 덤빈 것 말이다.

“오, 오! 정허군 황월대장 지두룡이 바로 나로다! 사양 말고 덤벼라!”

싸움을 마다할 지두룡인가. 당세홍이 적장이라고 알아본 순간 박도를 휘두르며 주변에 거치적거리는 적들을 마구 베어 넘겼다.

당세홍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바로 눈앞에서 부하들이 썩은 짚단처럼 무너지고 있었으니, 제정신이라면 오히려 이상할 터였다.

한편으론 등줄기를 관통하는 서늘한 전율도 있었다. 외팔이 정도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적은 황월대의 대장인 모양이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당세홍의 뇌리를 스쳤다. 아니, 만약 편사중의 안전만 아니라면 한번 붙어 볼 만한 상대라고 당세홍도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만 지금 당장 그의 급선무는 적장을 베는 것보다는 성주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기에, 강한 상대를 피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벌써 두 사람 사이는 지척지간, 당세홍은 이를 악물고 대도를 위에서 아래로 곧장 내리그었다.

“받아랏!”

“오, 얼마든지!”

차앙!

두 개의 병기가 서로 부딪쳤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양손으로 휘두른 대도를 한 손에 든 박도로 막는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이 현실로 벌어졌다. 신체의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의 힘은 기형적으로 발달된다던가! 지두룡은 당세홍의 대도를 막은 건 물론, 오히려 튕겨 내며 그의 가슴을 향해 박도를 휘둘렀다.

“오옷!”

놀람에 찬 경호성과 함께 당세홍은 다급하게 대도의 자루로 박도를 막았다. 쇠로 만들어졌기에 망정이지, 나무였다면 여지없이 잘려 나갔을 터였다.

바로 그때였다.

당세홍의 후미, 즉 대인성 군사들의 전방에서 와악, 하는 외침 터져 나왔다. 화살 공격에 머뭇거리던 정허군의 유군과 나머지 황월대가 본격적으로 치고 들어온 것이다.

“성주, 이대로 성을 향해 달리시오! 뒤도 돌아보지 마시오! 모두 성주를 보호하여 성으로 철수하라!”

기병이 주력인 적들이 뛰어들어 난전이 되었다면 이미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당세홍은 판단했다. 자신의 말안장에 묶어 두었던 편사중의 고삐를 풀어 주며 다급하게 말했다.

“어딜 가려느냐? 못 간다!”

그걸 멀겋게 지켜만 보고 있을 지두룡이 아니었다. 당세홍의 말을 듣고 편사중이 대인성의 성주임을 알아차린 그의 박도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노리고 허공을 그었다.

그 순간 지두룡은 허벅지에 찡하는 통증을 느꼈다. 적병 중 하나가 갑상 사이를 헤집고 창을 찔러 댄 것이다.

휘청!

말 위에 앉은 지두룡의 신형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생각지도 않았던 불의의 일격이었던지라 그 타격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당세홍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대도를 휘둘러 지두룡을 베어 가며, 한편으론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렸다. 싸워 봐야 실익도 없고, 성주의 안전부터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편승해 최초로 지두룡의 허벅지를 찌른 적병도 또 한차례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창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 전에 벌써 주인의 육신이 둘로 쪼개졌으니 말이다. 어느새 달려온 황월대원 한 명이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삭초도를 휘둘러 댄 결과였다.

그래도 여전히 지두룡에겐 위기가 남았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느라 당세홍의 대도를 막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몸을 뒤로 벌렁 뉘었다. 낙마의 위험성은 있지만, 최악의 경우 당세홍의 대도 아래 죽는 것만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휘이웅-!

당세홍의 대도는 지두룡의 코끝을 스치자마자 그대로 멀어져 갔다.

지두룡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날뛰는 말을 안정시켰다. 당세홍과 편사중이, 밀려드는 황월대원을 헤치며 마구 달려가는 게 보였다.

“막지 마라! 일단 보내고 뒤에서 추적한다!”

명을 내린 후, 지두룡은 말 머리를 돌렸다. 편사중과 당세홍이 갈 곳은 뻔하다. 그들을 추적하기 전에 아군과 아군 사이에 갇힌 적병을 섬멸하는 게 우선이다.

삼백의 황월대에 의해 둘로 잘린 대인성 군세 중 후방에 있던 삼천 정도는 당세홍을 따라 철수 중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약 이천, 거기에 기병 천육백이라면 이건 벌써 싸움이 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도살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적들은 사기도 엉망이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겨우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성주가 먼저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으니, 여기저기에서 항복하는 자가 속출했다.

지두룡은 이제 막 합류한 담개에게 물었다.

“저들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사실 이 포로 문제는 생각해 둔 바가 없었다. 그저 한차례 건드려 보고 다시 석축산으로 철수한다는 게 오늘의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첫 싸움에서 너무 이기고 말았다. 대인성에서 출동한 병력은 두들겨 다시 쫓아 보냈고, 수중엔 오륙백에 달하는 포로가 남았으니 그 처치만으로도 골이 지끈거렸다.

“일단 본대의 대장군께 보고부터 합시다. 송 군감이 계시니 좋은 방도를 강구하실 게요.”

“알겠소. 전령!”

“대령이오!”

“지금 즉시 본대로 가서 이 상황을 보고하고, 어?”

전령에게 명을 내리던 지두룡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본대가 서서히 움직여 괘공교를 건너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따로 보고를 할 필요도 없겠군. 포로를 수습하고, 각자 휴식을 취하라! 대장군께서 오신다! 어지러운 모습은 보이지 말도록!”

그렇게 명해 두고 지두룡은 가장 먼저 강둑의 수양버들 그늘로 들어갔다. 그제야 목구멍을 잡아 찢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황월대와 유군의 싸움을 편월은 낱낱이 지켜보았다. 그 결과 그는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 하나는 지두룡도 느꼈던, 전장이 불리하다는 점이었다. 길에서 싸우게 되니 기병은 그 기동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었다. 빽빽하게 밀집한 적 보병의 화살 공격에 막혀 오히려 숱한 말만 잃었다. 만약 지두룡이 삼백 기를 이끌고 적들을 둘로 차단하지 않았다면, 이 싸움의 승패는 어떻게 됐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머지 하나는 적들이 의외로 약하다는 것이었다. 삼국의 국경이라 강군이 배치되었을 줄 알고 오늘은 그저 건드려만 볼 작정이었는데, 적들은 싸운 지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아 패주하기 급급했다. 약한 적이라면 겁낼 것 없다는 판단하에 본대를 다리 건너까지 이동시킬 작정을 했다.

‘이제부턴 공성전이다.’

길에서의 싸움은 분명 아군에 불리하다.

그러나 공성전이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인성 주변은 분명히 널찍한 공지가 형성되어 있을 게고, 거기라면 기병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을 터였다.

총군감인 송지는 편월의 생각에 반대였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니, 일단 철수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당연히 편월은 그 의견을 묵살해 버렸다. 전쟁이란, 기세가 올랐을 때 그걸 타지 않으면 이길 것도 지게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한번 성으로 쫓겨 들어간 적들은 당분간은 손도 발도 내밀지 못할 터이고, 그사이 낙성은 시키지 못하더라도 허주의 조환에게 정허군의 강함은 충분히 인식시켜 둘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전령!”

다리를 중간쯤 건너던 편월은 갑자기 전령을 불렀다.

“백월대와 흑월대에 알려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적을 못 박아 두라고. 그리고 후미의 적월대에 알려 당장 본대와 합류하도록 전달하라.”

“존명!”

“맹 장군!”

전령이 뛰어가자마자 편월은 맹아를 불렀다.

“근위대장 대령이오!”

“다리를 건너자마자 진막을 치고 길을 차단하도록. 근위대만으로 다른 부성에서 오는 지원을 끊어야 하니까, 각오를 단단히 다져.”

“존명! 그러면 적월대는 뭐 하러 부르셨습니까?”

일단 복명을 하고 난 후, 맹아는 궁금한 듯이 물었다. 편월이 적월대를 부른 이유가 근위대만으로는 약한 본대를 보강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적월대는 황월대와 더불어 대인성을 공격한다. 담 장군의 유군은 말 그대로 유군으로 활동하도록 둬야 해.”

다른 부성에서 나오는 지원군이 꼭 길을 통해 대인성으로 간다는 보장은 없다. 각 성끼리 서로 통하는 길도 있을 터, 담개의 유군에는 그걸 차단하는 임무를 맡기려는 심산이었다.

“그렇다면 본대가 너무 취약하지 않을까요? 예비대인 청월대도 부르는 게 어떨까요?”

“그들은 보급을 책임져야 해. 거리를 좁히는 건 좋지만 합류는 안 된다!”

맹아의 의견을 편월이 매섭게 잘랐다. 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군사들의 용맹성이다. 그건 누구라도 안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최대한의 용맹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보급이 원활해야 한다. 배고픈 병사가 용감하게 싸운다는 건, 아주 없지는 않더라도 무척 드문 일이니 말이다.

“알았으면 즉시 본대의 진막을 준비하라!”

“존명!”

그제야 맹아는 말을 마구 몰아 다리를 건너갔다. 근위대만으로 지원 오는 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고 들으니 벌써부터 손발이 근질거렸다.

“놈들, 제발 많이 좀 기어 나오너라.”

“예? 뭐라고 하셨소, 대장?”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다. 뒤를 따르던 근위대원 한 명이 궁금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근데 이것들은 또 뭐야?”

“포로들일세!”

길 가운데 쭉 앉아 있는 적병을 보며 맹아가 눈썹을 곤두세우자, 지두룡이 다가오며 대답을 해 주었다.

“포로? 이 판국에 포로를 잡아 어쩌겠다는 거요?”

“할 수 없었네. 투항하는 자를 벨 수도 없고 해서…….”

“정허군의 장수 분들께 여쭈겠소!”

포로 문제를 두고 맹아와 지두룡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앉아 있던 포로 중 한 명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높였다.

“앉아서 말해라! 일어서는 자는 목을 베겠다!”

근위대원 중 한 명이 일어선 포로의 어깨를 창대로 세차게 두들겼다. 혹시 저항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포로는 순순히 제자리에 다시 앉았다. 저항보다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말하라!”

“나를 정허군에 배속시켜 주시오! 부하들의 생명은 도외시한 채 자기만 살겠다고 달아난 허주의 장군들에겐 정나미가 떨어졌소!”

“닥쳐랏!”

뒤의 일갈은 담개가 지른 것이었다.

“상황이 불리하니 모시던 상전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놈은 절대로 받아 줄 수 없다! 여봐라, 이놈은 따로 묶어 두도록 해라!”

포로로 전락했다고 해서 옛 상관을 욕보이는 자를, 담개는 성격상 용서할 수 없었나 보다. 차마 그 자리에서 베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주어졌던 최소한의 자유까지 박탈해 버리려 했다.

“소인의 말을 좀 들어 주시오! 소인의 고향은 허주가 아니오! 지난번 영산 전투 때 잡혀 와 강제로 군에 배속된 거요! 노모가 계시다고 울며 사정했지만, 허주군은 들어주지 않았소! 그사이 노모는 돌아가시고, 호시탐탐 탈출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소! 내 말을 믿어 주시오!”

그자는 병사들에게 끌려가며 악을 써 외쳐 댔고, 그건 곧바로 포로들 사이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

“소인도 비슷한 처지로 허주군에 배속되었소!”

“소인도 마찬가지요!”

포로들 중 절반 정도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했고, 원래 허주 출신인 듯한 다른 자들이 그들에게 발길질과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조용히 하라! 떠드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겠다!”

담개가 고함을 질렀지만, 한번 시작된 포로들끼리의 한편 싸움은 쉬이 그치려 들지 않았다. 해묵은 서로의 감정이 폭발한 자리이니 말로써 말릴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아!”

돌연 맹아가 말을 몰아 포로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싶은 순간, 시퍼런 섬광이 그의 수중에서 몇 차례 번쩍였다. 지난날 막주의 목철린에게서 받은 절풍검이 햇볕을 튕겨 낸 것이다.

그 뒤를 이어 몇 개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뜨거운 피 보라가 사방으로 내뿜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제야 포로들은 잠잠해졌다. 맹아가 이처럼 다짜고짜, 또 무작위로 자신들의 목을 벨 줄은 생각지 못했던 탓에,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맹아는 바닥에 뒹구는 목 하나를 검 끝으로 찍어 허공 높이 들어 올렸다.

“앞으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모두 이렇게 만들어 주겠다! 알겠느냐?”

그럴 때 편월과 근위대로 이루어진 본대가 도착했다.

“이게 다 무슨 소동이야?”

편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도 눈이 있는지라 길바닥에 앉아 있는 자들이 포로란 건 알 수 있었다. 다만 맹아가 그들 중 몇 명의 목을 벤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의 포로들인데, 이들 중 몇몇이 우리 군에 배속시켜 달라고 하고 있소이다.”

“우리 군에?”

담개의 말에 편월의 미간에 그려져 있던 골이 더욱 깊어졌다. 가뜩이나 진중에 적의 간인이 있는 것 같아 마음 쓰고 있던 참이었다. 출신이 확실치 않은 포로를 같은 편으로 받아들일 순 없었다.

“그건 안 되오! 그냥 저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갑옷을 벗긴 후에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 주도록 하시오!”

편월의 말이 끝나자마자 맹아가 돌연 키킥 웃었다. 어른스러운 말투가 자못 우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편월은 개의치 않았고, 싱거워진 맹아는 명령대로 포로들을 무장해제시키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적월대가 합류했다. 본대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서진청은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왔는지 호흡이 상당히 거칠었다.

“대체 무슨 일로 그리 급히 합류하라는 전령을 보내신 거요?”

“대인성을 공격하겠소.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서 장군.”

“뭐?”

서진청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인성을 친다는 말도 의외였지만, 무엇보다 편월의 말투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렇게 알고 작전을 세워 보시오.”

얼떨떨해하는 서진청을 그대로 둔 채, 편월은 이제 막 지어진 진막 안으로 들어갔다.

3

결정은 야습이었다. 각 부대의 대장들에게 익숙한 것이었기에, 별다른 의견도 제시되지 않았다.

문제는 대인성이 무척이나 견고하고, 또 정허군에 변변한 공성 무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서진청과 지두룡은 야간 성 공격을 강력히 주장했다. 막주 침사성을 떨궜을 때를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편월도 달리 반대하지 않았다. 낙성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한차례 공격만 가하고 철수해도 괜찮다는 생각에 허락한 것이다.

반대다운 반대를 한 사람은 송지뿐이었다. 그 역시 야습이 적절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총군감이라는 직책상 주변 정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는 ‘반대’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편월이나 지두룡, 서진청의 의견이 워낙 강력해, 작전 회의석에선 야습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말할 것도 없이 공격은 황월대와 적월대가 맡았다. 담개의 유군은 다른 부성에서 나올지 모르는 지원군을 차단하고, 괘공교나 길을 이용해서 나오는 적은 근위대가 끊기로 했다.

공격은 술시戌時의 시작과 함께 개시되었다. 서편 하늘을 노을이 곱게 채색한다 싶더니, 이내 어둠이 찾아들었다. 산중의 밤은 그렇게 성급하게 시작되었다.

공격이 한창일 때, 편월은 맹아와 송지만을 대동하고 대인성으로 향했다. 나머지 근위대와 천 명의 보병은 작전대로 괘공교 근처에 주둔시켜 두었다.

대인성 바깥은 엉망이었다. 황월대와 적월대의 병사들이 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허주군에게 연방 욕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입으로 싸우나?”

“놈들이 도무지 상대할 생각을 하지 않아서 말이오.”

어이가 없다는 듯 묻는 편월에게 지두룡이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리 도발해도 꿈쩍도 않는 대인성 놈들이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다.

“대장군께서 오셨다! 임시 진막이라도 가설하도록!”

지두룡이 명을 내렸고, 황월대원 몇 명이 삼면만 천막으로 가린 진막을 급조하고선 그 안에 의자를 하나 갖다 놨다.

“용케도 이 산중에 물을 끌어들였군.”

그 의자에 앉으며 편월이 나직이 내뱉었다. 전면과 윗면이 훤히 트인 임시 진막이라 시야가 확보된 게 좋았다.

“그건 무슨 말이오?”

“저 해자 말이오. 평지에 있는 성보다 더 너른 것 같군.”

“그러게 말이오. 막상 공격해 보니 상당한 장애가 되더이다.”

“어디, 계곡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걸까?”

“아마 그럴 거요.”

“해자가 너르니, 성벽을 타고 넘기도 어려울 게고…….”

“그러니 아군들의 목청이 터지는 거 아니겠소.”

편월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대인성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몇 개의 횃불만이 성루에 밝혀 있을 뿐, 괴괴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어둡군.”

자신도 모르게 편월은 중얼거렸다. 스무닷새 날의 달은 아직 뜨지 않아,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성은 마치 한 마리 거대한 괴물 같았다.

“화톳불을 피울까요?”

곁에 있던 맹아가 편월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재빨리 물었다.

“화살 밥이 될 일 있어?”

“그럼 어둡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든가.”

“어때, 맹 장군? 근위대라면 저 성벽을 타고 넘어 돌입할 수 있을까?”

“맡겨 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편월의 질문에 맹아가 반색을 했다. 어떤 형태로든 싸울 수만 있다면 좋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양동작전이다. 사 장군에게 보병을 맡겨 본대를 지키라 하고, 근위대를 모두 데려와. 서 장군과 지 장군은 그사이 불화살 공격을 하시오. 우선 성문부터 불태우도록!”

“존명!”

“전령, 잠깐만!”

명을 듣고 본대로 달려가려는 전령을, 편월이 급히 불러 세웠다.

“근위대원들은 물론 보병 삼백을 따로 뽑아, 가져온 재목도 여기로 운반하라고 전하라.”

“재목은 또 왜 운반하라시는 거요?”

“해자를 메울 거요.”

송지의 질문에 편월은 가볍게 대꾸했다. 그것도 생각지 못했느냐는 눈빛이었다.

송지는 내심 한숨을 지었다. 자신인들 왜 그걸 몰랐을까. 다만 그는 이 야습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낮에 한차례 혼을 내 줬으니 이제 그만 돌아갔으면 싶었던 것이다.

‘대장군은 역시 어리다.’

그 능력은 나이에 비해 탁월한 편월이었다. 이처럼 싸움을 앞두면 조금 이성을 잃는 것 같은 점만 제외하면, 정말이지 나무랄 데 없는 대장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꼭 이 성을 떨궈야겠소?”

송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대인성을 낙성시킨다면 그때부턴 본격적으로 허주와 전쟁을 치러야 된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고, 또 피하자고 각 대장 급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았었다.

“적의 사기가 이 정도라면 떨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안 되오!”

자기도 모르게 송지는 언성을 높였다.

“정말 칠천의 병력으로 허주와 전쟁을 치를 생각이오? 이 대인성을 떨궈 보시오. 조환이 당장 허주의 전 병력을 동원해 공격해 올 것이오. 그때 뭘로 그들을 막을 작정이오?”

“허주와는 전쟁 안 할 거요.”

“이게 벌써 전쟁이오!”

격한 송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돌연 사방이 훤하게 밝아졌다. 황월대와 적월대가 불화살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이미 늦었소, 총군감. 우리 병사들의 솜씨나 구경합시다.”

마치 어린 동생에게 타이르는 듯한 편월의 어투는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발사!”

누군가의 입에서 명이 떨어졌고, 불화살은 곧장 성벽을 넘거나 성문에 날아가 꽂혔다.

“계속 쏴라! 두더지처럼 들어앉은 놈들의 엉덩이를 아예 볶아 버리자!”

“와아!”

화살을 쏟아 붓는 와중에도 적에 대한 야유를 멈추지 않는 정허군이었다.

특히 황월대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많은 화살을 쏴 대고 있었다. 낮에 적의 보병들에게 당했던 기억 탓인지도 모른다.

그사이 근위대가 각자 재목을 하나씩 가지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보병들은 좀 늦을 모양이었다.

“해자를 메워라!”

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 한마디에 근위대원들은 지고 온 재목을 모조리 해자에 처넣었다.

그 뒤를 이어 보병들 역시 차례로 재목을 가져와, 해자는 순식간에 메워져 버렸다.

그러나 적들도 그냥 멀겋게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해자가 메워진다는 걸 알자 그들은 성벽 위에서 기름을 쏟고 불화살을 당겨 재목을 몽땅 태워 버렸다.

“돌입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재목을 불태우는 화염으로 인해 얼굴을 온통 시뻘겋게 물들인 맹아가 마구 설치기 시작했다.

말이 쉬워 재목 운반이지, 저 밑에서부터 여기까지 지고 올라오려면 여간 고생이 아니다. 그게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걸 보고 있자니 맹아는 피가 거꾸로 튈 것만 같았다.

“기다려!”

맹아를 눌러 둔 편월은 다시 한 번 대인성을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어둠에 묻혀 있다가, 불화살과 재목이 타는 불길로 인해 사방이 밝아져 그나마 어렴풋이 보였던 것이다.

‘낮에 미리 봐 둘 걸 그랬나?’

이 점을 편월은 가볍게 후회하며, 대인성 주변의 지형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백 장은 족히 넘을 듯한 높이라, 거기서 성으로 침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성의 삼면은 모두 널찍한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은 견고하고 높았으며, 잔교도 성문도 안은 모두 쇠로 만들어졌는지 불에 잘 타지도 않았다.

‘송 군감의 말대로 낮의 승리만 가지고 철수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만약 대장군께서 꼭 저 성을 떨구겠다면, 성병들을 아예 굶겨 죽이는 방법도 있소. 시일이 오래 걸려서 탈이지만.”

여전히 불만에 찬 어투로 송지가 한마디 내뱉었다. 편월이 그런 방법은 절대로 채택하지 않으리라 믿었기에 한 얘기였다.

“보고! 대인성의 부성 중 하나인 수령성守嶺城에서 약 이천의 병력 출동!”

고심하고 있는 편월의 귀에 전령이 나는 듯 달려와 보고를 마치고는 다시 재빨리 돌아갔다.

수령성은 조휴령의 정상, 즉 대인성의 배후를 지키는 부성이다. 거기서 병력이 나왔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지원을 위한 것일 터였다. 게다가 그 수령성엔 지금 봉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대인성의 급변을 알리는 게 분명했다.

“담 장군에게 출동하라고 일러라! 이천이라면 육백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게다!”

편월의 명에, 본대에 소속된 전령 중 한 명이 토끼처럼 빠르게 달려갔다.

“수령성뿐이 아닐게요. 이제 곧 다른 부성에서도 지원이 올 거요. 그런데도 성 공격을 고집하실 작정이오?”

“다른 부성의 지원은 도중에 끊어 버리면 돼.”

여전히 성과 주변의 지형을 살피면서 편월은 가볍게 대꾸했다.

“흐음!”

송지는 침음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 편월이 자신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대꾸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유군 출격!”

그러고 있는 사이 담개가 이끄는 유군이 출동했다. 수령성에서 내려온 적병들도 어차피 여길 지나야 대인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적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차단하는 게 유군의 임무였다.

“민가가 없는 게 다행이군.”

“여긴 국경이오. 어느 정신 나간 사람들이 여기 붙박여 살겠소.”

“송 군감.”

조용한 목소리로 불렸을 때, 송지는 까닭 없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편월의 목소리나 태도가 너무 잔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허주와 전쟁을 치르고 싶진 않소이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고 있으면, 마 성주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난 허주와의 대치 상태를 되도록 오래 끌고 싶소. 적어도 광운이 막주에서 수군을 기를 때까지만이라도.”

“광운 장군이 수군을 양성하는 것과 우리들이 허주와 싸우는 게 무슨 상관 있소?”

“수군이 갖춰지면, 마 성주는 틀림없이 강국의 해변에 그들을 상륙시킬 것이오. 강국은 혼란에 휩싸이겠지. 그때 우린 강국의 변방 한 곳을 차지하고 들어앉는 거요. 싸움은 파양주의 수군이 하겠지. 우린 구경이나 하면서 병사들을 모으고, 훈련시키면 될 게요.”

“그, 그럼 이 대인성 공격은…….”

“그때까지의 시간 끌기일 뿐이오. 성을 차지한다면 여기서 허주의 지원군을 맞아 농성하고, 떨구지 못해도 괜찮소. 조환의 지원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려도 냉큼 철수할 테니.”

‘이, 이게 과연 열세 살짜리 아이의 생각인가?’

전쟁에 관해서 이미 도가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편월이란 건 송지도 익히 알고 있다. 그래도 열세 살이라는 나이는 어쩔 수 없이 의식하게 되어,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거듭 놀랄 수밖에 없는 송지였다.

“날이 밝으면 모용 대인을 찾아 주시오. 아무래도 군마가 더 필요할 것 같으니.”

“조, 존명!”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송지의 머리가 숙여졌을 때, 저 먼 곳에서 다급한 함성이 올랐다. 바야흐로 유군이 수령성에서 나온 적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성문을 불태우지 못했나? 서둘러라! 서둘러!”

“성문을 사른다고 거기로 돌입할 것도 아니잖소. 그러니 우리 근위대에 성벽을 넘으라고 명을 내려 주시오. 쥐 죽은 듯 조용한 놈들이 무슨 저항을 하겠소?”

편월이 채근하자, 기회다 싶었는지 맹아가 잽싸게 그 말을 받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싸우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이었다.

편월은 주변에 도열한 근위대를 쭉 훑어보았다. 막주에서부터 삶과 죽음의 공기를 함께 호흡해 왔던 사람들!

더 이상은 이들 중 단 한 명도 잃고 싶지 않은 게 편월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직 좀 더 기다려! 성벽을 넘더라도 새벽에 하는 게 좋아. 밤새 불화살 공격을 퍼부어 대면 놈들은 잠도 자지 못할 테니, 놈들이 지쳤을 때 성벽을 넘도록 해.”

마음과 달리 편월은 새벽을 기해 근위대가 성벽을 넘는 걸 허락하고 말았다. 바로 이게 전쟁이고, 난세의 참모습이다. 인간이 자기의 본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뭇 가련키만 한 순간들의 연속.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일수록 빨리 여의고, 사랑하는 만큼 무거워진 눈물로 울어야만 하는 시대!

새벽 공격을 준비하겠다며 설치는 맹아와 달리, 편월의 표정은 잔뜩 흐려졌다. 성벽이 ‘어서 옵쇼!’ 하고 기다려 주는 건 결코 아니다. 공격에 가담한 근위대원 중 몇몇의 얼굴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게 뻔하다.

불현듯 철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편월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되면 목숨도 쉽사리 맡길 수 있는 근위대원들을 잃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전쟁이 끝나기만 한다면…….’

여기 대인성만이 아니라, 땅 끝까지라도 철수하고 싶은 편월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게 뻔하다. 이유야 어떻든 정허군은 허주를 건드렸고, 조환은 그 보복을 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허주군은 반드시 마용승에게 귀속된 윤주로 군사를 낼 것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전쟁이었으니, 자신이 죽은 뒤에도 영원히 지속될 게다.

그렇다면 이겨야 한다. 영원히 지속될 전쟁 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대명제는 생존이고, 그걸 위해서라면 오롯이 승리만을 지향해야 한다.

편월은 다시 한 번 근위대원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하나같이 정겨운 얼굴들이고, 익숙한 웃음들이다.

그러나 승리를 위해서라면 이들의 시신이라도 딛고 서야 한다. 이들의 피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죽은 자는 말할지 모른다. 죽은 뒤의 승리가 무슨 소용이냐고…….

그 말이 맞다. 어느 전장, 어느 성벽에서 시신으로 누운 뒤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산 자의 기억에서 망각되어 갈 뿐이다.

아니, 아니다.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 승리를 한다면 그건 바로 죽은 자들이 남긴 유품이다. 그 시신으로, 그 피로 쌓아 올린 크나큰 기념품이다.

산 자들은 결코 죽은 자들을 잊지 않는다. 기억 속에 지니고 다니기엔 너무 무거워서, 너무 창백하니 서러워서 가슴에 묻어 두고자 할 뿐이다. 애써 잊은 척하고 있을 뿐이다.

눈앞에 있는 근위대원들도 그럴 게다. 그들은 막주성을 떨군 걸 기억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죽어 갔던 옛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게다. 그래서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임무를 웃으며 받아들이고 있는 걸 게다. 예전의 동료들도 그렇게 죽어 갔으니까.

“대장군, 근위대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새벽에 공격을 하려면 좀 쉬어 둬야…….”

“좋도록 해.”

무의식적으로 대꾸하던 편월은 화들짝 생각에서 깨어났다. 깨어나 보니 주변에 후드득후드득, 화살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성병들이 반격을 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장군, 조금 물러서시는 게 좋겠소.”

송지가 편월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리 급박한 어조는 아니었다. 화살이 주변에 떨어지긴 했지만, 그건 이미 힘을 잃은 것들이다. 맞아도 부상을 당할 정도는 아니란 얘기다.

그걸 알기에 편월도 고개만 끄덕였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전황을 살폈다. 그동안의 꾸준한 불화살 공격이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성벽에 걸쳐 있는 잔교가 벌겋게 녹아들고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녹고 있었다. 안에 쇠 심을 박은 게, 더 이상의 열기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곧장 성안이 빠끔히 보이는 건 아니었다. 잔교 안에 있는, 성문이라는 또 한 겹의 장애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화살이 모자란다! 기름과 화살!”

이제 피아간에 본격적인 사격전이 시작되었다. 그 속에서 서진청은 화살의 보급을 청하느라 연방 고함을 질렀다.

“땅에 꽂힌 적의 화살을 이용하라! 일부는 땅에 꽂힌 적의 화살들을 회수해!”

편월의 곁에 있던 송지가 목청껏 외쳐 댔다. 바야흐로 양측의 사격전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느 세월에 두건득이 있는 보급대까지 화살을 가지러 갔다 온단 말인가.

송지의 말에 따라 황월대와 적월대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빠르게 화살 비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삼 인 일 조를 이뤄 둘이 방패를, 하나가 땅에 꽂힌 화살을 회수한다는 식이었다.

그건 커다란 효과를 발휘했다. 아군 측에 화살을 지원해서가 아니라, 적들의 사격이 뚝 멈췄기 때문이다.

‘적도 아주 바보는 아니군.’

쏴 봐야 상대만 이롭게 할 뿐이란 걸 알면서도 사격을 계속했다면, 편월은 웃어 주었을 것이다.

“전령! 당장 청월대로 가서 화살을 보급하라고 전달하라. 기름과 식량도!”

“존명!”

새벽에 근위대를 투입시키자면, 이 공격은 밤새 지속되어야 한다. 적이든 아군이든 배가 고파질 게 뻔하니, 교대로 취사를 시키겠다는 게 편월의 생각이었다.

“유군 귀대!”

“멋모르고 어정어정 기어 나오는 놈들을 멋지게 두들겨 쫓아 보냈소이다. 하하하하하!”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동안 담개의 유군은 수령성에서 나온 적병을 다시 성으로 몰아넣었나 보다. 호탕하게 웃으며 경과를 보고했다.

그 웃음도 지금의 편월에겐 씁쓸하게만 들렸다.

‘몇 명이나 죽었을까?’

어떤 싸움이든 일단 시작하게 되면 아군의 피해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평소라면 심상하게 넘어갈 것을, 오늘 밤의 편월에겐 이상스레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 피해 정도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승리하리라 마음먹었고, 그 승리를 위해서라면 아군의 피에 발을 적시는 걸 피하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피로 강을 만들고, 시체로 제방을 쌓아도 결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이 밤의 편월이었다.

이윽고 스무닷새의 이지러진 달이 하늘 한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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