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편월 4-서전지난緖戰至難 (24/66)

편월 4

서전지난緖戰至難

1

두두두둥! 지잉, 지잉! 꽤꽤꽤꽤앵-!

고요하던 석축산石築山이 돌연 요란한 북소리와 징 소리 그리고 꽹과리 소리로 들썩거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소라고둥 소리가 연방 부우, 부우 울리며 대기를 밀어 올리고, 그 사이로 숱한 인마의 소리도 요란스레 끼어들었다.

“저쪽으로 간다! 청월대 쪽이다!”

“와아, 잡아라! 놓치지 마라!”

“더 달려! 청월대 놈들에게 저만한 멧돼지를 넘겨줄 셈인가?”

사람들은 저만치 달아나고 있는 멧돼지를 잡으려 연방 이리 뛰고 저리 달렸다.

“절대로 놓치지 마라! 만약 놓친다면 정허군 선봉을 맡은 우리 백월대의 수치다! 기병은 진로를 막고, 보병은 창으로 찔러 대라! 활의 사용은 용서치 않는다!”

백월대장 강숙은 목이 터져라 부하들을 독려하며 기치를 흔들었다. 윤주에 있는 이 석축산까지 오면서 이런 사냥은 수도 없이 해 왔다.

그사이 새로 모집한 잡가군 오천 중 백월대에 소속된 천 명과 보병 이백의 손발은 저절로 척척 맞아 들어가, 이젠 기치의 작은 움직임 하나로도 일천이백의 백월대원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 사냥은 상대가 없는 게 아니었다. 오늘은 청월대가 그 대상이었고, 이왕 시작한 거면 이기고 싶었다.

“우익의 움직임이 늦다! 더욱 죄어들어 가라!”

또 한 번 명을 내린 후에야, 강숙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투구는 쓰지 않았지만 완전한 갑옷 차림인지라 이제 막 시작된 오월의 햇살을 견디기 힘들었다.

돌연 쫓기던 멧돼지가 방향을 바꾸는 게 보였다. 동시에 그놈은 거꾸로 돌진했고, 뒤에서 놈을 쫓던 보병 십여 명이 일제히 튕겨 나갔다.

“바보 같은 놈들! 저깟 멧돼지 한 마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내뱉던 강숙은 말꼬리를 흐리며 웃음을 지었다. ‘저깟 멧돼지’라고 했지만, 그 크기가 황소만 하다면 가히 맹수라고 할 만했다. 손쉽게 다루지 못할 건 뻔한 일이다.

“부상병을 빼내라! 기병은 멧돼지를 보병에게서 떼어 내!”

기치 신호를 보낸 후, 강숙은 고개를 돌려 높직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본대 쪽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젠장, 저걸 보고 누가 우리더러 잡가군이라고 하겠어?’

정말이지, 본대는 정연한 기치 아래 도열하고 있었다. 그 어떤 정규군보다 무장도 화려했고, 군기 역시 엄격하기 짝이 없었다.

‘꼴랑 둘뿐인 군율이 사람을 이토록 묶어 둘 줄이야.’

강숙은 체질적으로 정규군이 싫었고, 군율이란 게 싫었다. 그래서 막주의 싸움에 처음 투입되었을 때부터 대열이고 뭐고 없이 그저 최선두에 나서서 싸우기만 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정규군보다 더 정연한 백월대라는 부대를 맡고 말았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게 또 잘 되지 않았다.

‘묘하단 말이야.’

본대의 맨 앞, 야전용 의자에 앉아 사냥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편월을 생각하며 강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막내 동생뻘밖에 되지 않는 그 앞에 서면 이상하게 주눅이 들어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곤 했다.

그 점이 강숙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가 그리 과묵한 성격은 아니었다. 막주전에 신병으로 투입되어 광운과 편월이라는 묘한 존재를 만나면서부터, 이상하게 입이 붙어 버린 듯했다.

자연적으로 행동은 더욱 과격해졌다. 말을 할 수 없는 만큼 더욱 용맹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다. 대오를 흩트렸다는, 군율에 벗어났다는 질책을 들어도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그게 바로 광운과 편월을 위하는 것같이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장, 위험하오!”

씨이옷-!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화살의 파공성이 강숙의 귓전을 때렸다. 깨닫고 보니 황소만 한 멧돼지가 정면으로 돌진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활은 안 돼! 물러서라!”

누차 말하지만 이 사냥은 청월대라는 상대가 있다. 그들도 이 멧돼지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터, 혹 화살이 빗나가면 아군을 다치게 할 소지도 없지 않다.

명을 내린 후 강숙은 말안장에 비끄러매 두었던 창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멧돼지를 향해 정면으로 말을 몰았다.

바로 이게 강숙의 성미다. 일단 싸워야 할 대상이 정해지면 그게 사람이든 짐승이든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다.

꿰에엑!

와두두둑!

멧돼지의 포효에 이어, 강숙이 탄 말의 발굽이 지축을 울리며 서로를 향해 빨리듯 접근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강숙은 멧돼지의 정수리를 향해 창을 세차게 내밀었다.

콰작!

창이 멧돼지의 정수리를 꿰뚫는 것과 동시에, 강숙은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단단한 갑옷을 입은 적병을 찔렀을 때도 이만한 반탄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멧돼지의 돌진이 멈추었다. 그렇다고 놈이 금방 바닥에 쓰러진 건 아니었다. 창을 정수리에 꽂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사냥터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비록 멧돼지라지만, 저처럼 큰 짐승의 최후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빛엔 일말의 경외감까지 떠올랐다.

휘청!

이윽고 멧돼지의 다리가 흔들렸다. 뒤이어 앞다리가 꺾인다 싶더니,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무너져 버렸다.

“와아!”

“잡았다!”

“산개하라, 산개해! 아직 사냥이 끝난 건 아니다! 오늘 청월대 놈들에게 진다면 다들 단단히 각오하랏!”

멧돼지가 넘어지자 우르르 몰려 함성을 올리는 부하들에게 강숙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대장군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과 아군들이 지켜보고 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마라!”

재차 고함을 지른 후, 강숙은 힐끗 편월이 있는 곳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만한 멧돼지라면 오늘 사냥 시합에선 청월대에 이겼다 싶어서였다.

강숙의 예상대로 편월은 백월대와 청월대의 사냥 시합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과 달리 뇌리에는 전혀 엉뚱한 생각이 들어차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저기 야트막한 구릉만 없다면, 여기다 성을 하나 지어도 될 것 같은데.’

과연 그랬다. 이곳 석축산은 전체가 천혜의 요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편월이 앉아 있는 뒤편은 천 길은 족히 될 듯한 낭떠러지이고, 이 산의 정상인 포호봉抱湖峯은 이름 그대로 거대한 호수를 갖고 있어 식수 걱정이 없다. 거기다 한 가지 장점을 더 들자면, 석축산은 윤주의 끝 자락에 위치해 있어 허주와 강국, 즉 삼국의 국경에 위치한 절묘한 완충지대다. 교통이 발달되어 힘이 있으면 어디로든 뻗을 수 있고, 쫓겨서 움츠러들면 쉬이 접근이 어렵다.

“오늘은 백월대가 이긴 것 같소이다, 대장군.”

“뭐? 뭐라고?”

담개의 말에 비로소 편월은 생각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아니, 여태 뭐 하셨소이까? 소장이 그토록 진형의 움직임과 병사들의 진퇴를 설명해 드렸건만.”

드물게도 담개의 음성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었다.

싸움이라면 몰라도, 진형이니 병법 같은 건 전혀 모르는 편월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병사들의 움직임을 가르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정작 학생(?)이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있었으니 맥이 풀릴 수밖에…….

“알아. 백월대가 나만 한 멧돼지를 잡았더군. 오늘은 이만 철수시켜.”

“여기서 야영을 하시렵니까?”

“응. 장소가 마음에 들어.”

“호오!”

놀랍다는 듯 담개의 주름진 눈이 조금 커졌다.

“대체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드셨소이까?”

“여기다 성을 하나 쌓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흐음…….”

담개의 숨결이 깊어졌다. 단단한 무장을 갖춘 그의 눈이 투구 아래에서 빛을 발하며 편월을 쏘아보았다.

기실 담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수성守城의 명인은 석축산을 보자마자 한눈에 천혜의 요지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쨌든 원정 길이니, 성에 대한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싶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데 편월 역시 이곳의 지리적 가치를 알아보고 있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예순이 넘은 자신이나 겨우 알게 된 걸 고작 열세 살 어린 나이에 깨치게 만든 이 미친 시대를 원망해야 되는 건지, 담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여하튼 명이 내려졌으니 일단 사냥을 하고 있는 백월대와 청월대는 철수시켜야 한다.

“나머지 부대는 이 주변을 정리하라! 오늘은 여기서 야영한다!”

상장군 담개의 명에 따라 남은 세 개 부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벌목을 한다, 주변의 크고 작은 돌들을 치우느라 한차례 부산을 떨었다.

전쟁을 치르기엔 부족한 숫자지만, 그래도 근 칠천에 이르는 인원이다. 거기에 말들을 수용할 공간까지 만들자면, 상당히 너른 지역을 정리해야만 한다.

그래도 일은 척척 진행되었다. 파양주에서 여기 윤주의 끝 자락까지 오는 두 달여 동안, 이런 일은 수없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사냥을 마친 백월대와 청월대가 기치도 정연하게 복귀하고 있었다. 두 달 전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엄청나게 변한 위용이었다.

‘모두 담 장군의 덕이지.’

서두르는 편월을 한사코 말려 최대한 천천히 진군시킨 건 담개였다. 더운 날씨의 행군은 기병이든 보병이든 지치게 하니, 쉬어 가면서 진군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한편 이런 사냥 시합도 아주 뛰어난 훈련이 되었다. 이제 석축산을 내려가 한 발짝만 떼면 거기서부턴 허주다. 곧장 싸움이 시작된다는 얘기다. 손발도 제대로 맞지 않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치른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니, 돌이켜 보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백월대 귀환!”

“청월대 귀환!”

높직이 앉아 있는 편월 앞에 도열한 백월대와 청월대가 귀환을 보고하며, 그날의 사냥감을 내려놓았다.

“수고했다.”

편월은 그저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언제부턴가 그의 상징처럼 굳어져 버린 그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다.

“백월대 해산! 주변 정리를 도와라!”

“청월대 해산! 취사 준비를 하라!”

젊은 강숙이 자신의 부대에 주변 정리를 명하는 동안, 보다 나이 든 두건득 휘하의 청월대는 취사를 준비했다.

편월은 그 모든 광경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전투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일이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확실히 황월대의 움직임이 굼뜨군.’

황월대장은 지두룡이다. 한쪽 팔이 없어 항상 누군가가 옆에서 그 팔을 대신해야 했고, 그만큼 명령이 전달되는 속도도 다른 부대에 비해 느렸다.

이 점은 중요했다. 막상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어느 부대를 어디에 위치시키는지를 결정하는 단초가 된다. 이걸 그르치면 자칫 전체가 동요되어 걷잡을 수 없는 패배로 치닫게 될지도 모른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대장군!”

맹아가 여름 볕에 탄 얼굴로 편월에게 취사 준비가 되었음을 보고했다.

“알겠다. 가자.”

편월이 몸을 일으키자, 근위대원 중 한 명이 의자를 접어 들고 뒤를 따랐다.

요즘 정허군의 식사는 파양주의 야전식이 아니었다. 그건 유사시를 대비해 아끼기로 했고, 대개의 경우 사냥감을 요리해 먹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잡아 온 사냥감과 근처에서 구한 야채를 커다란 솥에 한꺼번에 넣고 부글부글 끓였고, 멧돼지와 같은 큰 사냥감은 고기를 발라 불에 굽고 있었다. 그걸 열 명, 혹은 스무 명씩 둘러앉아 먹는 것이다.

대장 급들은 좀 달랐다. 처음엔 부하들 사이에 섞여 같이 먹었지만, 최근 들어 천막을 치고 따로 모여 식사를 했다. 내일 할 일을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먹을거리가 다른 건 아니었다. 다만 솥이 좀 더 작고, 고기도 적을 따름이었다.

“어서 오시오, 대장군!”

편월이 들어서자 모두 분분히 일어서서 예를 갖췄다. 오늘 사냥에 대한 강평을 하던 참이었는지, 청월대장 두건득의 표정이 약간 굳어 있었다.

“어쨌든 이젠 우리의 갈 길을 정해야 될 때가 온 것 같소. 허주야 이 산만 내려가면 그야말로 한 발짝 거리, 더 이상 시일을 연기하는 것은 사기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오.”

편월이 의자에 앉자, 그 역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며 송지가 말했다.

“불가하오. 이대로 허주와 부딪치면 우린 단 열흘도 견디지 못할 거요.”

“누가 허주와 부딪치자고 했소? 갈 길을 정하자는 거요.”

담개가 반발을 하자, 송지가 부드러운 어조로 자기의 취지를 말했다.

“소장이 비록 잡가군으로 늙은 몸이지만, 그 정도의 정세는 볼 줄 아오. 내 말은 마냥 이렇게 사냥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얘기요. 총군감으로서 살펴본 병사들의 사기는 비할 데 없이 충천하고 있소. 뭔가 돌파구를 주지 않는다면, 자칫 진중 소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어서 하는 말이오.”

송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한 부대의 대장으로서 부하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니, 병사들의 심정을 들먹일 것도 없었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강숙이나 맹아부터가 손이 근질거려 미칠 지경인 요즘인 것이다.

“담 장군, 지금 허주 대인성大刃城을 친다면 어떻게 될까?”

“뭐, 뭐요?”

질문을 받은 담개뿐 아니라 같이 식사를 하던 사람들까지 한결같이 경악한 표정이었다.

대인성이 어떤 곳인가. 허주의 조환이 서쪽의 마용승과 남쪽의 증두신을 견제하기 위해 그 경계인 조휴령鳥休嶺에 지은 거대한 성으로서, 거느리고 있는 부성만 해도 세 개나 된다. 게다가 그 지리적 위치도 이 석축산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훨씬 더 험준한지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나는 새까지 쉬어 간다는 이름이 붙었겠는가.

그 험지에 버티고 서서 삼국의 교통로를 누르면서, 한편으론 호시탐탐 그 세력을 뻗치려는 조환이 심혈을 기울여 지은 성인 것이다.

“불가! 설사 강병 오만이 있어도 대인성을 떨군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오.”

“담개 장군의 말씀이 옳소. 정 뭐하다면, 그 부성 중 하나를 건드려 보는 게 좋겠소이다.”

이건 사문기의 말이었다. 사실 그로선 허주를 치는 게 별로 달갑지 않았다. 이대로 병력을 몰아 차라리 강국을 노리는 게 훨씬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정허군이란 이름이 있고, 또 자신은 천 명의 수하를 각 부대에 나눠 보냈다. 자신의 의견을 곧바로 얘기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란 의미였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오. 아무래도 대인성을 곧장 치는 건 무리니까, 그 부성을…….”

“부성을 친다면 곧바로 대인성과 다른 부성에서 지원이 나올 걸세. 자칫 앞뒤로 적을 맞을 우려가 있어.”

싸우자는 말에 벌써 설치기 시작한 맹아를 담개가 무거운 어투로 눌러 버렸다.

“아니, 이건 좀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소. 병력이 적어서 좋은 게 뭐요? 바로 기동력이오. 일단 보병은 예비대로 두고, 기병만으로 대인성의 부성 중 하나를 쳐 봅시다. 그러다 적의 지원이 나온다 싶으면 곧바로 빠지는 거요. 그담엔 또 다른 부성을… 이런 식이라면 해 봄 직한 것 같은데, 어떻소?”

서진청의 말이었다. 요컨대 유격전을 시도하자는 얘기였다.

다들 찬성이었다. 다만 담개와 사문기만 표정이 어두운 건, 이들이 정규군이기 때문이었다. 잡가군식 유격전엔 익숙지도 않았고, 또 마음에도 들지 않았으리라.

“유격전이라지만, 마냥 떠돌면서 싸울 수는 없겠지.”

지금까지 무표정하게 듣고만 있던 편월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술렁거리던 좌중이 일시에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방금 편월이 한 말의 이면에는 그 역시 유격전에 찬성한다는 뜻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대인성의 부성을 건드리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하나를 낙성시켜 차지하겠다는 거요?”

두건득이었다. 그는 지난번 건주 무융성과 막주 침사성을 칠 때 돌입대에 있었으니, 성 공격엔 자신 있다는 표정이었다.

편월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칠천으로 공격해서 떨어질 성도 아닐 테고, 설사 성을 차지한다고 해도 그 뒤엔 농성전이야. 그런 어리석은 싸움을 왜 해!”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새로운 성을 하나 쌓는 거지.”

“새 성을? 아니, 성 쌓는 게 어린애 장난인 줄 아시오?”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외로 꼬았다. 성을 쌓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이런 혼란한 시대에 성주가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오!”

유격전을 하자는 말이 나온 이후로 입을 닫고 있던 담개가 한마디 불쑥 던졌다.

담개의 이 짧은 한마디는 묘한 설득력과 무게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눌러 갔다. 말할 것도 없이 지난 두 달여 동안 그가 보여 줬던 능력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천혜의 요지요. 여기라면 해자를 팔 이유도 없고, 돌로 쌓은 성벽도 필요 없는 곳이오. 그저 목책만 세워도 훌륭한 성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오.”

“흐음…….”

“그런가?”

담개의 말에 사람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어둠이 시작되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앞으로 필요하다면 제대로 성다운 성으로 만들어야겠지만, 아쉬운 대로 여기라면 허주군을 상대하는 발판으로 충분할 게요.”

“그렇지! 다른 건 몰라도 여긴 윤주 땅이오. 성 따위가 없어도 우리가 대인성의 부성을 치다가 철수해 오면 놈들은 여기까지 추적하지 못할 거요.”

“맞아! 우린 정허군이고, 어차피 이건 전쟁이야.”

“우리가 아무리 도발해도, 조환은 아직 마용승 공에게 전면전을 걸 입장은 아니오. 그러니 우린 마음껏 유격전을 전개하여 상대를 두들기다가, 여차하면 이곳으로 냉큼 돌아오면 되는 거요.”

일단 하나의 작은 실마리가 보이자 사람들이 일제히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지난 두 달여, 싸움 없이 보낸 시간이 지겨웠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좋아. 그럼 어디부터 건드릴지 그걸 정해 봐.”

편월이 단숨에 얘기를 몰고 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두가 싸움 얘기다. 다른 말을 한다는 건 입만 피로하게 할 뿐인 것이다.

“아니, 그 전에 할 일이 있소, 대장군.”

“할 일이라니?”

“우선 이곳에 견고한 진지를 짓는 일이오. 이대로 있다가 만약 비라도 내리면 낭패가 아니겠소?”

어디까지나 신중한 담개였다. 계절은 오월, 이제 슬슬 비가 잦아지는 시기이니 그에 대한 대비부터 하자는 얘기였다.

“상장군의 말이 옳소. 내일부터 한 며칠 진지부터 지어 놓고 공격을 합시다.”

“좋아. 그럼 최우선적으로 저 시야를 방해하는 언덕부터 치워 버려.”

“존명!”

대장군 편월의 한마디에 의해, 다음 날부터 석축산엔 때 아닌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2

그즈음 마용승은 첩을 하나 얻었다. 진남후라는 정식 관직과 그 이상 되는 힘을 가졌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서수가 그 일을 마뜩찮게 여기는 건, 첩으로 들어앉은 여자의 신분이 확실치 않아서였다. 이 성 저 성을 떠돌아다니는 기예단에 속해 영욱성에 들어왔다가 마용승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하긴 편월을 위해선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새로 얻은 첩과의 신혼(?) 재미에 빠져, 요즘 마용승은 편월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석 달만 군비 지원을 하겠다고 했지만, 이대로라면 더 이상 해 줘도 괘념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편월은 칠천도 안 되는 병력으로 허주를 칠까?’

마용승에게 보고를 하진 않았지만, 서수는 새로 편월에게 가담한 군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정허군과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전령을 통해 파악한 것이었다.

그들 중 서수가 의외라고 생각한 건 상림호의 아들이 가세한 것과 사문기가 동원한 병사들의 수였다. 보병 일천이라면 유사시 성내에서 커다란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사문기가 전 병력을 이끌고 편월에게 합세한 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소란을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을 몽땅 끌고 갔으니까.

다만 마용승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광운의 중재로 사문기와 몇몇 부하들이 영욱성의 거주를 허락받았지만, 그 부하들의 존재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건 나중에 마용승이 알았을 때 고민할 문제고, 지금 서수는 앞으로의 천하 정세에 온 정신을 쏟아 부었다.

‘만약 편월이 성질 그대로 허주를 친다면, 강국의 증두신도 그냥 있지는 않을 텐데.’

편월에게서 온 마지막 전령에 의하면 그들은 윤주 석축산에 주둔하고 있다고 했다. 삼국의 경계 지점이니, 허주의 국경이 시끄러워지면 강국도 결코 좌시할 수만은 없는 곳이다.

사실 서수는 허주를 치는 데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조환은 동쪽의 패자인 가겸후를 막는 완충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으니, 오히려 제휴를 하고 싶었다.

물론 지리적인 이점은 있다. 지금 마용승의 힘이라면, 대륙의 배꼽인 허주를 차지하면 충분히 왕을 칭할 수도 있다. 스스로 그러기 뭐하면, 황실에 압박을 가할 수도 있을 터였다. 게다가 편월과 광운을 떼어 놓으라는 마용승의 직접적인 지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과는 달리 허주 정벌에 찬성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직은 가겸후와 자웅을 결할 때가 아니다.’

마용승이 강병 삼십만을 자랑한다면, 가겸후는 더하면 더하지 결코 그에 못지않을 것이다. 게다가 가겸후는 황제를 등에 업고 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진남후의 관작官爵을 받아들인 마용승으로선 한쪽 팔이 묶인 셈이었다. 신하가 됐음을 인정한 것이니, 군사행동에 대한 명이 내려오면 따라야만 한다. 그런 상태로는 도저히 싸울 수 없는 노릇이다.

‘가겸후와 황제를 떼어 놓을 수는 없을 게고, 율천국 내에서 약점이 될 만한 곳을 찾아야 되는데…….’

천하의 정세를 그린 지도를 내려다보며, 서수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당장 율천국 내에서 소란을 일으킬 곳은 융주뿐이었다.

문제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이었다. 율천국의 최북방인 융주는, 파양주에서 보자면 가장 먼 곳에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연락을 취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강국의 증두신을 움직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강국의 지리적 위치는 묘했다. 대륙의 남단에 위치해서, 나머지 세 개 열강과 그 국경을 모두 접하고 있다.

그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힘이 강할 때에야 별로 문제 될 게 없지만, 힘이 약하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침입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국이 당당히 전국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 순전히 증두신 개인의 능력이었다.

‘증두신은 내치內治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어떤 미끼를 줘도 움직이지 않으리라.’

“서 군사님?”

생각에 잠겨 있던 서수는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새로 마용승의 첩이 된 기씨杞氏 부인이 서 있었다.

‘끄흠…….’

서수는 내심 침음성을 삼켰다. 기씨 부인과 같이 있는 것이 마용승의 정실 귀에라도 들어가면 그야말로 귀찮아진다. 여자들의 질투 싸움에 대한 건 배운 적도 없거니와 적응되지도 않을 것이다.

“웨, 웬일이시오?”

자신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서수는 몸을 일으켰다.

“대부인께서 절 부르신다는데, 무슨 일인지 혹시 모르시나 해서요.”

“그, 그걸 내 어찌 알겠소.”

서수는 계속 더듬거렸다. 마주 서서 얘기하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씨 부인이 미인인 탓이었다.

‘미모도 너무 지나치면 나라를 망친다고 했는데…….’

바로 이게 서수의 걱정이었다. 마용승이 몇 명의 첩을 두든 그건 하등 이상한 일도 아니고, 말릴 일도 아니다. 마씨 집안의 융성을 위한다는 측면에선 오히려 권장할 만한 사안이다.

그러나 첩치고 기씨 부인은 너무 미인이었다. 하긴 그 용모가 마용승의 눈에 띄어 내전으로 들어앉은 것이지만, 서수는 왠지 달갑지 않았다.

‘저 미간의 도화선挑花線만 보이지 않았어도…….’

스승인 구양파에게 관상 보는 법을 배운 적이 있는 서수였기에, 기씨 부인의 미간에 세로로 희미하게 그어진 줄 하나가 크게 마음에 걸렸다.

“휴우…….”

기씨 부인이 긴 한숨을 토했다. 정실부인이 첩을 부르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미 스물을 넘긴 그녀는 잘 알고 있는 까닭에서였다.

그 순간 서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기씨 부인의 근심이 그대로 자신의 것인 양 느껴지며, 그녀를 위해 마용승의 정실부인에게 대신 변명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정신 차리자!’

만약 서수가 평소에 여색을 탐하는 성격이었다면 선뜻 약속을 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무 걱정 말고 내게 맡기시오.’라고 말이다. 그만큼 기씨 부인은 숨결 하나에까지 교태와 유혹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평소 쌓은 수양의 두께가 있어 서수는 간신히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그보다 주, 주공께서는 어디 계시오?”

“예, 아직 침소에…….”

“그럼 오늘도 나오시지 않는단 말이오?”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기씨 부인에게 서수는 약간 언성을 높였다. 첩을 들인 이후 마용승의 얼굴을 본 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아무리 늦바람이 무섭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예. 오늘도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한차례 서수를 흘낏 보면서, 기씨 부인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서수는 또 한 번 숨결이 막히는 걸 느꼈다. 물론 기씨 부인의 눈길 탓이었다.

‘저러니 주공이 떨어지려고 하질 않지.’

생각은 그랬지만, 솔직히 서수도 기씨 부인이 자기 첩이라면 바깥일은 몽땅 때려치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얼른 가 보시는 게 좋을 거요. 윤 대부인은 얌전하신 성미지만, 한번 화가 나시면 주공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니.”

“아, 내 정신 좀 봐!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어요.”

축객령 비슷한 서수의 말을 듣고서야, 기씨 부인은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시비 두 명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휘이유…….”

기씨 부인이 나간 후 서수는 긴 한숨을 토했다. 가슴속에서 커다란 뭔가가 쑥 빠져나간 듯한 허전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편월에게 보낼 보급을 어느 성에 있는 누구에게 명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정허군이 석축산의 진지 건설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군사행동에 나선 건 파아란 벼에 하나 둘 이삭이 패기 시작한 유월 이십오일이었다.

유월의 태양은 이곳 윤주의 끝에도 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길바닥을 하얗게 태우고, 그것도 모자라 날리는 먼지까지 그대로 재로 만들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편월을 비롯한 근위대원들의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여기보다 훨씬 남쪽인 막주의 그 살인적인 더위를 경험했기에, 오늘의 날씨는 차라리 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쯤 선봉인 백월대와 이대인 흑월대는 이천강泥遷江에 당도했겠지?”

편월의 나직한 질문에, 곁에서 말을 몰던 송지가 하늘을 보며 시각을 가늠했다.

이천강이란 대인성이 위치한 조휴령 바로 앞에 흐르는 비교적 큰 강이다. 엄청난 양의 진흙이 섞인 탁류만 흐르기에 붙은 강 이름이다.

물론 강이니 다리도 엄연히 있다. 세 개의 큰 다리가 걸려, 삼국을 통행하는 사람들이 활발하게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정허군까지 그 다리를 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칠천에는 미치지 못한다지만, 이만한 군세가 움직이면 대인성에서도 눈치 채지 못할 턱이 없다. 한꺼번에 다리를 건너다가는 고스란히 화살 밥이 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오늘 군사행동의 목적은 대인성을 치는 게 아니다. 그 부성 중 하나인 소인성을 건드려 볼 요량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천강은 바로 그 소인성에서 불과 십 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으리라.

오늘의 작전은 이렇다. 우선 선봉인 백월대가 소인성의 정면으로 모습을 보이며 이천강까지 진군해서 멈춘다.

이어 제이대인 오강이 이끄는 흑월대는 길을 약간 돌아 백월대보다 상류에서 대기하며, 말을 탄 채 도강할 수 있을 만한 얕은 곳을 찾는다.

뒤이어 편월과 근위대, 황월대로 구성된 본대가 도착하면, 선봉인 백월대와 더불어 뗏목을 만든다. 그걸 위해 각 부대에 배치되었던 보병들은 모두 본대에 배속되어, 석축산에서 베어 낸 재목들을 운반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뗏목은 다분히 속임수로 활용할 작정이었다. 백월대가 당장 강을 건널 것처럼 행동하여, 실제론 상류로 올라간 흑월대의 도강을 감추는 게 그 목적이었다.

담개가 이끄는 유군은 대인성이 정면으로 보이는 괘공교掛空橋를 건너 적의 시야를 쏠리게 만든다. 선뜻 지원군을 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본대의 뒤편, 즉 후미는 서진청이 이끄는 적월대가 맡는다. 후미라고 하지만, 필요한 곳에 곧바로 투입될 수 있는 지원군 역할도 같이 해낸다.

예비대는 두건득의 청월대. 그들은 평소엔 보급을 담당하고, 소인성을 두들긴 아군이 퇴각할 때 적의 추적을 끊으며 후퇴전을 감행한다.

이상이 오늘 소인성을 칠 작전의 개요였다.

“조금은 염려스럽소. 강 장군이 이만저만 화를 내는 게 아니던데. 혹시 그 성미를 못 이기고 먼저 도강을 시도하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소.”

“흥!”

우려 섞인 송지의 말에 편월은 가벼운 콧방귀만 날렸다.

송지의 말은 다른 게 아니었다. 선봉은 백월대지만, 가장 먼저 도강하여 소인성에 도전하는 건 흑월대라고 미리 정해졌다. 그래서 그들을 상류로 보낸 것이다.

당연히 강숙은 불만이었다. 선봉이면 당연히 가장 먼저 강을 건너 적에게 부딪쳐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싸움은 천변만화, 선봉이라고 해서 꼭 먼저 싸우란 법도 없고, 후미라고 해서 늘 꼬리에 붙어 다니라는 법도 없다. 이길 수만 있다면, 본대를 최전선에 투입할 수도 있는 게 전쟁이다.

“소인성 놈들이 끌려 나와 주면 좋겠는데…….”

공성전攻城戰은 공격하는 측에서 한껏 기분을 낼 수 있지만, 실익이 적고 희생도 만만찮다. 편월은 소인성 놈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주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바랄 걸 바라시오. 아마 놈들은 성문을 꽁꽁 닫아걸고 대인성의 지원을 기다릴 거요.”

“뭐 그것도 나쁘진 않아. 그런데 이 근처가 싸움터로 변하면 사람들이 크게 불편을 겪겠군.”

“그건 우리 군율에 어긋나는 건데, 대장군에겐 어떤 처벌을 줘야 하는 거요?”

아무리 전국난세라지만, 발 달린 사람들은 어디에고 다닌다. 각 주마다 혹은 나라마다 경계선이 있고 관문이 있지만, 그건 주로 적의 군병이나 간인을 색출하고 차단하는 게 목적이다. 일반 백성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서로 왕래를 한다.

“여긴 하루에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오고 갈까?”

“글쎄, 모르긴 해도 일이천 명은 족히 될 게요. 삼국의 교차점이다 보니, 다른 곳보다 번잡하겠지.”

“설마 그 사람들이 우리 움직임을 보고도 이 길을 지나가려고는 생각지 않겠지?”

이 점에 있어 편월은 약간 낙관적이었다. 난세의 백성들은 군병들의 움직임만 보면 곧바로 숨거나 멀찍이 피난 가는 게 습성처럼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편월의 말엔 대답하지 않고, 송지는 다소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보다 시급히 의생을 구해야겠소. 다들 응급처치는 어느 정도 할 줄 알지만, 아무래도 전문적인 의생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 병사들이 늘지 않겠소?”

“의생?”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지금까지 전장을 누비면서 단 한 번도 의생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소. 이제 번듯한 진지도 생겼으니, 거기 데려다 놓으면 될 게요.”

“의생…….”

다시 한 번 입속으로 조용히 되뇌는 편월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새로운 걸 하나씩 알아 갈 때마다 보이던 눈빛도 반짝였다.

지금까지 편월은 산 사람만큼이나 죽은 사람도 많이 봐 왔다. 죽어 가는 사람도 물론이고.

개중에는 정말 제대로 치료만 받으면 살 수 있었던 사람도 많았다. 전쟁 중이라 대충 상처만 싸매고 방치한 탓에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어디 아는 의생 있어?”

“흐흐흐.”

편월의 질문에 송지는 묘한 웃음을 날렸다.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했다.

편월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송지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뭔가 방법이 있다는 의미였다.

전방에서 자글거리는 유월의 햇살을 깨뜨리며 일기의 병사가 달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기치를 확인하라!”

“백월대의 전령이오!”

“백월대의 전령?”

맹아의 즉각적인 대답에 편월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새삼스레 백월대에서 전령이 올 이유가 없었다. 곧 본대가 도착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사이 전령은 바람같이 달려와 편월 앞에 말을 세웠다.

“내리지 않아도 좋다! 그대로 말에 탄 채로 보고하라!”

내려서 예를 갖추려는 전령에게 편월은 재빨리 말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를 받고 싶다는 조급함의 발로였다.

“소인성에서 적병 이천, 이천강을 마주하고 아군과 대치 중!”

“뭐?”

핵심만 보고하는 전령의 말에, 편월은 무표정을 깨고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그 얼굴로 바로 옆에 있는 송지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적병이 우리의 움직임을 어떻게 알고?”

“아, 알고 있었던 것 가, 같지는 않고… 헉헉, 우리가 가자마자 성문을 열고…….”

다급한 보고를 마치자 그제야 전령은 가쁜 숨 때문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알겠다! 전령에게 물을 줘라!”

명을 내리는 편월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이내 다시 무표정을 가장했지만, 가슴속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조금 전에 소인성의 적들이 쳐 나왔으면 좋겠다고 송지에게 얘기했던 편월이다. 그저 바람에 지나지 않기에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저편에서 성문을 열고 나와 강을 끼고 대치 중이라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서둘 수밖에 없겠군. 지두룡!”

“지두룡이 뭐요, 지두룡이? 부하들이 있는 곳에선 지 장군이라 부르시오.”

명색이 황월대장인 지두룡의 이름을 막 부르는 편월에게 송지가 가벼운 핀잔을 주었다.

“부르셨소이까, 대장군?”

한쪽 팔이 없으면서도, 지두룡은 용하게 말을 잘 다뤘다. 불리자 즉각 달려왔다.

“황월대 오백을 이끌고 재목을 운반하는 보병들을 보호해. 우린 먼저 가겠다.”

“존명!”

내려진 명에 대해 항명이나 이유를 묻는 건 군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두룡은 즉각 복명했다.

하긴 딱히 명령 때문에 지두룡이 따른 건 아니었다. 그도 귀가 있기에 전령의 얘기를 들었고, 아군이 적과 대치하고 있다면 마땅히 본대가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말도 않고 황월대원 오백을 수배하기 시작했다.

“그럼 나머지는 달린다! 전진!”

편월의 명이 떨어지자 기수가 곧바로 깃발을 움직였다. 정허군 대장군의 기치인 금월기였다.

와두두두-!

갑작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관도에 울려 퍼졌고, 작열하던 햇살이 화들짝 놀라 투구에 튕겨 저 멀리 허공으로 날아가 깨졌다.

“맹아, 전령을 보내라.”

“존명! 그런데 누구에게, 무슨 내용으로 보냅니까?”

“어리석은 소리 마라. 당연히 강숙, 아니 강 장군에게 가는 전령이다. 내용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말 것.”

“존명!”

재차 복명한 후, 맹아는 편월의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강숙, 조금만 참아라.’

적이 성 밖으로 나온 건 좋았다. 문제는 강 건너 빤히 보이는 곳에 적을 두고 강숙이 과연 그 성미를 참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성급하게 싸우려고 도강을 시도하다가는 어떤 희생을 치를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이천강은 아군에겐 아주 생소한 강이니까 말이다.

“대장군, 이대로 본대를 선봉대와 합류시킬 생각이오?”

편월이 너무 급박하게 달리므로 송지가 재빨리 물었다.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작전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리게 되니, 총군감으로서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어수룩해 보여? 합류할 것 같았으면 전령은 왜 보냈겠어?”

핀잔 섞인 편월의 대답을 듣고서야 송지는 마음이 놓였다. 속으론 ‘역시!’라고 감탄하면서.

“저기 백월대의 기치가 보이는군.”

송지가 말하기 전에, 벌써 편월도 그걸 봤다.

“정지!”

명을 내린 후, 편월은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형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보일 턱이 없었다. 근 칠백에 달하는 인마가 달려와 멈췄기에 사방이 장막보다 더 두꺼운 먼지로 뒤덮였기 때문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편월은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앞엔 길이 둘로 갈라져, 그 하나는 유군이 건너기로 했던 괘공교로 통하고, 나머지는 곧장 백월대가 있는 곳으로 통한다. 갈림길 앞은 무성한 잡풀들이 우거진 공터였다.

“저기에 본대의 진막을 세워라! 총군감, 같이 가서 형세를 살피고 옵시다.”

“어라? 허허허!”

갑자기 달라진 편월의 말투에 송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래서 사람은 직책이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며 웃었고, 또 편월이 자신의 말을 들어줘서 기뻤다.

두 사람이 막 말을 달리기 시작했을 때, 돌연 사방을 가득 메운 파공성이 들렸다. 바야흐로 강을 사이에 두고 백월대와 소인성 병사들의 화살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3

“위험하오! 근위대 열 명, 대장군을 보호하라!”

강 건너에서 쏜 화살 몇 대가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소질풍의 발아래 떨어지자, 송지는 급히 근위대를 불렀다. 그만큼 강폭이 좁다는 걸 의미했다.

“상황은 소장이 보고 오겠소. 그러니 대장군은 여기서 보고를 기다리시오.”

“아니,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소.”

“그런데 계속 그런 말투를 쓰실 거요?”

아무래도 말을 높이는 게 어색한지 송지가 편월에게 기어이 한마디 했다. 함부로 막 대하는 데 익숙해졌다기보다는, 나이를 떠난 신뢰를 느끼고 있는 탓이리라.

편월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흘낏 일별했을 뿐이다. ‘네가 그러라고 하지 않았냐?’ 하는 눈빛으로…….

편월은 그대로 소질풍을 몰아 백월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 하는 거야? 빨리 대장군을 따라잡아!”

맹아였다. 송지의 말에 십여 명의 근위대원을 이끌고 오다가, 편월이 저만치 앞장서 달리자 부하들을 마구 독려했다.

그 모습을 보며 편월은 속도를 늦췄다. 마음 같아서는 보다 빨리 달리고 싶었지만, 자신은 대장군이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움직인다는 게 부하들에게 얼마나 많은 과외의 수고를 끼친다는 걸 알아 가는 요즘이었기 때문이다.

급하게 달려온 근위대원 십여 명이 재빨리 편월의 전방에 방패를 세웠다. 쏟아지는 유시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타라락!

근위대원들의 방패에 부딪치는 화살 소리가, 마치 잘 마른 대지를 두드리는 소나기 소리처럼 들려왔다.

“형편없는 놈들이군!”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적들이 형편없다고 했어! 여기까지 화살을 빗나가게 쏘는 걸 보면 말이야.”

“아, 확실히 그렇군요.”

편월이 있는 곳은 백월대와는 약 반 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적들이 쏘는 화살이 거기까지 온다는 건, 겨냥이 아주 엉터리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거기서부턴 백월대를 지휘하는 강숙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쏴라, 쏴! 화살 한 대에 한 놈씩 꿰뚫는다고 생각하고, 마구 퍼부어 줘라!”

“좋아, 맹아는 돌아가서 본대를 세우는 걸 감독하고, 총군감은 날 따르시오.”

“대장군!”

갑자기 맹아가 버럭 소리를 질러 편월을 불렀다. 뭔가 불만에 찬 음색이었다.

“뭐야?”

“다른 분들은 다 장군이라 부르면서, 왜 나만 이름을 막 부르시우? 내 부하들도 있는데.”

한순간 편월은 멍청해졌다. 하지만 그건 곧 시퍼런 비수로 가슴을 푹 찔린 듯한 날카로운 자기반성으로 바뀌었다.

“알았소, 맹 장군. 돌아가서 우선 본대를 지휘하시오.”

“존명!”

그게 그렇게도 신 나는 일이었을까? 쏟아지는 화살 비 속에서도 맹아는 방패도 꺼내지 않고 달려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송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나하나 고쳐 가고 배워 가면서 정허군은 비로소 제대로 체계가 잡힌 부대로 변해 갈 것이다.

그건 또한 정허군에 대한 편월의 애착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가져 본 부대이기에 성질을 억누르고 말투까지 고치는 정성을 보이고 있는 것일 터였다.

“강 장군, 전황은?”

“아, 대장군! 보시는 바와 같소!”

편월이 십여 기의 근위대원과 함께 접근하고 있는 걸 강숙은 진즉부터 알고 있던 참이었다. 부하들이 세운 방패 뒤에서 환하게 웃으며 맞아 주었다.

“그런데 강 장군이라니?”

그 역시 편월의 말투에 놀란 모양이었다.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지며, 눈이 둥그렇게 뜨였다.

편월은 대답 대신 방패와 방패 사이의 공간으로 강 건너를 바라보았고, 송지가 대신 눈짓을 보냈다.

강숙은 자신의 투구를 툭툭 두드렸다. 편월에게 모종의 변화가 있었던 듯한데, 지금은 그걸 알아볼 때가 아니었다. 강을 끼고 적과 대치한다는 건 의외의 복병을 만난 것과 비슷하다. 현 상황의 타개와 차후의 대책을 세우는 게 급선무다.

“놈들은 우리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와 저러고 있소.”

“전령!”

강숙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편월은 전령을 불렀다.

“대령이오!”

“지금 즉시 상류의 흑월대로 가서 상황을 살펴라. 여기와 같은 상황인지 보고 오도록.”

“존명!”

“화살이 아깝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전령을 보낸 후 편월은 나직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고, 그걸 강숙이 백월대 전체에 전한 후에야 아군은 사격을 중지했다.

그러나 소인성 적들은 곧바로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편월이 엉터리 겨냥이라고 말한 그대로, 형편없는 솜씨로 화살을 쏴 대고 있었다. 다분히 이쪽의 도강을 막아 보자는 의도였다.

“총군감, 적병의 숫자가 얼마나 될 것 같소?”

“이천은 안 될 것 같고, 많아야 천오백.”

“강물의 깊이는?”

“하도 흐려서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소. 알아 오라시면, 직접 들어가 볼 수밖에.”

“됐소!”

편월도 빤히 이천강을 보고 있는 중이다. 폭은 간신히 일 리를 넘긴 정도였고, 깊이는 송지의 말대로 들어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아군의 피해는?”

그제야 편월은 강숙에게 물었다. 어쩌면 가장 먼저 해야 했을 질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얼핏 봤을 때 눈에 띄는 피해가 없었기에 뒤로 미룬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전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편월은 재차 적정을 눈여겨 살폈다. 흐린 강물이지만 그래도 햇살은 반사시키고 있는지라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들 중에 부상자가 상당수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후방의 기치가 어지러운 걸 보면 틀림없다.

“전령이오! 본대의 구축이 완료되었으니, 대장군은 속히 귀대하시라는 근위대장의 전갈이오!”

“일단 본대로 돌아가십시다, 대장군. 거기서 각 부대의 상황을 보고받은 후에 다음 할 일을 결정합시다.”

송지의 말에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선뜻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간인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쪽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적이 행동했을 리 만무했다.

‘이럴 때 광운은 어떻게 했더라?’

정말이지 광운은 적의 간인들까지 멋지게 이용했다. 그걸 기억해 내느라 투구 속 편월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기도 한 것이, 적이든 아군이든 간인을 부린다는 건 한편까지 속여야 되는 일이다. 편월이 눈치 챌 정도로 행동했을 광운이 아니었다.

“대장군!”

송지가 재차 불렀을 때에야, 편월은 방패 사이의 간격에서 눈을 떼고 물러섰다.

“적절히 응대하다가 무슨 변화가 있으면 즉시 알리도록.”

“존명!”

강숙의 복명 소리를 들으며, 편월은 다시 말을 달려 이제 막 구축된 본대로 향했다.

“진객이 와 계십니다, 대장군!”

본대로 돌아가자마자 숨을 헐떡이며 보고하는 맹아의 말에,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싸움이 벌어질 판에 무슨 손님이란 말이다.

그보다는 맹아가 표현한 ‘진객’이란 말에 편월은 입맛이 약간 썼다. 그 말은 지난번 막주의 목철린이 마지막을 내다보며 자신을 초청했을 때 했던 말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손님이 와 있다니 가 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 편월은 재빨리 대장군의 진막으로 들어갔다.

“어?”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본 편월의 첫 반응이었다. 맹아의 말처럼 확실히 진객이었다.

“소인을 알아보시겠습니까, 대장군? 모용추올시다!”

그랬다. 온 사람은 확실히 송용조의 오른팔인 모용추였다. 그는 녹을 듯한 미소를 띤 얼굴로 편월에게 예를 갖췄다.

“어서 오시오. 이렇게 험한 곳에 직접 오시다니.”

편월도 모용추에게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영창원년, 사자로 갔던 율천국에서 탈출할 때 큰 신세를 졌고, 지금은 또 보급의 대부분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 예전처럼 쉽게 말을 놓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건 모용추도 마찬가지였다. 어리다고 하지만, 편월은 어엿한 정허군의 대장군이다. 그에 걸맞은 예를 갖춰 대해야만 한다.

“이 무더위에… 병사들의 고생이 많을 듯하여, 새로 보급품을 좀 가져왔습니다. 지금 두건득 장군이 맡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될 겝니다.”

“고맙소. 그런데 정말 어쩐 일로 몸소 여기까지 오셨소?”

“허허허, 마침 강국에 볼일이 있어 지나가던 참이었지요.”

“어서 오시오, 모용 대인!”

뒤늦게 진막으로 들어선 송지가 모용추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윤주까지 오는 동안 보급 문제로 한차례 만나 두 사람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안녕하십니까, 송 장군! 총군감이 되셨다지요? 감축드립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짐짓 놀라는 모습을 보였지만, 송지로선 짐작 가는 점이 없지 않았다. 정허군을 편성한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모용추는 자신의 속곳 개수까지 알아냈을 터였다. 그 정도 정보력을 갖지 않고는 대륙을 누비는 장사치로서 자격이 없다고 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마침 잘 오셨소. 날이 더워 병사들에게 여름 옷감을 좀 나눠 줘야 할 것 같았는데.”

“그럴 줄 알고 준비해 왔습니다. 식량은?”

“식량은 그다지 필요치 않을 것 같소. 윤주를 출발한 보급대가 모레쯤 도착한다는 전령이 왔으니.”

“호오, 그건 이상하군요.”

송지의 말에 모용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알기론 마 성주께서 삼 개월만 지원을 해 주시기로 했다고…….”

이번엔 송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번 원정에 나설 때 마용승은 틀림없이 그렇게 얘기했었다. 영욱성을 떠난 게 삼월 이일이니까 석 달은 지난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보급대가 모레 도착한다는 전갈이 왔다. 마용승의 허락이 없다면 쌀 한 톨 마음대로 낼 수 없는 윤주의 입장이고 보면,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우리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준다는 걸 받지 않을 이유도 없겠지.”

“누가 안 받겠다고 했소? 좀 이상하다는 말이지.”

편월의 말에 송지가 가볍게 반박했다.

“모용 대인은 그만 돌아가 보시오. 이제 곧 이 근처가 싸움터로 변할 테니, 아예 멀찍이 길을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요.”

“예. 그럼 소인은 이만…….”

“보고! 약 오천의 적병, 괘공교를 바라고 쇄도 중!”

“뭣이?”

모용추가 작별을 고하려고 할 때, 밖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편월은 재빨리 송지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송지로서도 이건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잘 가시오, 모용 대인. 자, 갑시다, 총군감!”

이렇게 된 이상 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모용추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편월은 재빨리 진막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벌써 비상이 걸려 어수선한 상태였다. 적이 괘공교를 건너면 곧장 본대로 밀려오게 된다. 다른 호위 부대가 없는 상황인지라, 말 그대로 벌거숭이 상태로 적을 맞을 수밖에 없다. 병사들이 허둥거리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그렇다고 본대를 뒤로 물릴 수도 없다. 병력을 빼내면, 그땐 백월대와 흑월대의 후미를 적에게 내주게 된다.

“대장군, 어떻게 하실 거요?”

“뭘 어떻게 해? 막아야지!”

편월의 언사가 다시 거칠어졌다. 여전히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관자놀이의 힘줄이 연방 꿈틀거렸다. 처음부터 어긋난 작전에 대한 신경질이었다.

“사수 총출동! 놈들이 괘공교에 들어서면 일제사격을 가한다!”

명을 내리는 것과 소질풍에 올라타는 것 그리고 달리는 걸 거의 동시에 해내는 편월이었다.

“앗, 근위대는 대장군을 따르라! 사수는 집결하는 대로 따르도록!”

다행이라면 이제 재목을 나르던 천 명의 보병이 본대에 합류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활 실력은 아무래도 기병보다 나을 터였다.

본대 주변에 갑작스러운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기병인 근위대가 앞서 달리고, 그 뒤를 보병들이 미처 도열할 사이도 없이 따랐기 때문이다.

“대장군, 천천히 가시오! 근위대와 보조를 맞추시오!”

소질풍을 마구 몰아가는 편월을 뒤따르며, 송지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편월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만약 적들이 먼저 괘공교를 점령한다면 여간 낭패가 아니다. 오천이나 되는 적을 막아 내자면, 다리에 올라오는 족족 하나씩 쏴 떨궈야 한다. 그래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으리라.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건 속도 싸움이다. 어느 쪽이 먼저 다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싸움의 향방이 갈릴 수도 있는 것이다.

과연 편월의 의도는 그대로 적중했다. 마구 앞서 가는 대장군을 보호하기 위해 근위대와 황월대 역시 사력을 다해 달렸고, 괘공교에 도착했을 때 아직 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까마득히 높은 조휴령에 위치한 대인성에서 기치와 병력의 물결이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게 보였다.

‘적들은 보병이 주력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더욱 잘된 일이다. 이쪽은 기병이 주력이니, 한바탕 난전을 벌인다고 해도 크게 지지는 않을 터였다.

“우왕좌왕하지 마랏! 대장군기를 세우고 기치를 정돈하라! 보병은 백 명씩 열 줄로 도열하라! 활을 준비해!”

어느새 도착한 맹아가 큰 소리로 부하들을 정돈시켰다.

“사문기, 사 장군은 어디 계시느냐?”

돌연 편월이 큰 소리로 사문기를 찾았다.

“여기 있소.”

“보병은 원래 사 장군의 병사들, 오늘은 우선 그들의 지휘를 맡으시오. 다리 이쪽에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가 철수할 때 뒤따르는 적들에게 화살 공격을 하시오.”

제법 어른스레 말하지만, 편월의 어투는 부자연스러웠다. 차라리 마구 반말을 할 때가 훨씬 나았다.

하지만 지금이 그걸 따지고 있을 계제인가! 사문기는 즉각 복명하고 보병들이 도열하고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근위대와 황월대는 다리를 건너 저편에서 적을 맞는다. 전진!”

“대장군과 근위대는 남으시오!”

진두에 서서 다리를 건너려는 편월의 말고삐를 송지가 거칠게 낚아챘다. 이 자리에 잡아 두려는 의도에서였다.

“무슨 말이오?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 판에! 적들은 보병이 주력인 것 같으니, 여차하면 한바탕 난전을 벌여도 될 것 같소. 난전이라면 나도 한몫하지!”

“그래서 여기 계시라는 거요! 나는 총군감, 설사 대장군이라 해도 전군의 움직임에 방해가 된다면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소!”

“뭐?”

의외로 세찬 송지의 말에 편월의 눈초리가 찢어져 올라갔을 때, 후방에서 한 줄기 뽀얀 먼지가 보였다. 일대의 군마가 급속히 전진해 오는 게 분명했다.

“담 장군의 유군이 온 모양이오. 그러니 대장군은 여기서 전군을 지휘하시오. 건너가서 싸우는 건 황월대와 유군만으로도 충분하오!”

이어진 송지의 말에도 편월은 납득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기실 그 역시 지난 석 달 동안 싸움다운 싸움은 해 보지 못했다. 오늘 한바탕 설쳐 근질거리는 손을 풀어 보고 싶었다.

“명심하시오! 오늘 싸움은 적의 성을 떨구거나, 혹은 적병을 섬멸하는 게 아니오. 그저 적을 한번 건드려 보는 거요. 그런데 대장군이 선두에 서겠다는 말씀이오? 이야말로 언어도단, 총군감으로서 절대 허용할 수 없소!”

어디까지나 송지는 단호했다. 이 싸움이 정허군의 사활이 걸린 거라면 또 모를까, 전체가 한꺼번에 기동해서 손발을 맞춘다는 훈련의 의미가 더 강하니, 편월을 진두에 내세울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눈먼 화살에 맞기라도 하면 어쩌느냔 말이다.

그사이 황월대는 지두룡의 지휘하에 착착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석 달에 불과했지만, 그동안의 훈련이 효과를 봤는지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좋아. 알았어.”

“근위대는 즉시 보병의 후미에 휘장을 치고 임시 진막을 마련하라!”

편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송지는 근위대원에게 명을 내렸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 싶어 잽싸게 해치운 것이다.

그러나 근위대원들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막주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라 누구보다 용맹하고 강한 투지의 소유자들이었다. 싸움을 앞두고 손을 접고 있으라니,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건 편월이었다. 어떤 경우든 군은 명령 체계의 엄수가 생명이다. 일부러 뽑아서 총군감의 자리를 맡긴 송지의 명을 근위대가 가볍게 여기는 건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오늘 나가지 않겠다. 그러니 근위대는 진막 준비를 서두르도록. 되도록 사방이 잘 보이는 높은 곳에 자릴 잡아라.”

지나칠 수 없다고 해서 질타를 해서도 안 된다. 지금은 전시, 적을 앞에 두고 자칫 아군의 사기를 꺾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월은 부드러운 어투로 진막을 준비시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장군의 명이다. 아니, 막주전 때부터 삶과 죽음의 언덕을 함께 넘나들었던 편월의 말이다. 다소의 불만이 없지 않겠지만, 근위대원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월대가 다리를 모두 건넌 것과 짜 맞춘 듯, 담개가 이끄는 유군이 본대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담개는 거기서 부대를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꼬리를 물듯 황월대의 뒤를 따라 다리로 접어들었다.

“저, 저…….”

너무도 의외의 사태인지라 송지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유군에서 삼 기가 떨어져 나와 편월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보, 보고! 담개 이하 유군 육백 전장 도착,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됨!”

보고자는 상가웅이었다. 지난 삼 개월의 훈련에도 여전히 군대식 언행엔 익숙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알았어.”

간단하게 대꾸했을 뿐, 편월은 더 이상 상가웅을 상대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대해 앞으로의 작전을 구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쭈뼛거리는 상가웅을 다른 이 기의 무장이 재촉해 데리고 유군과 합류했을 때, 조휴령을 내려오던 적들도 진군을 멈췄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대치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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