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룡유천猛龍遊天
1
편월이 잡가군 오천과 근위대 백예순두 명을 이끌고 파양주 영욱성을 나선 건 보리가 파랗게 색을 더해 가는 영창 팔 년 삼월 이 일이었다.
그 병력은 모두가 기병이었다. 광운이 송용조에게 부탁해서 말이 없는 잡가군에게도 모두 한 필씩 지급했기에, 탁월한 기동력을 갖추게 되었다.
조환도 이 일을 벌써 알겠지만, 어쨌든 목적을 당당히 알린 뒤의 출발이었다.
허주 정벌!
그 이유는 황명을 받들어 막주를 칠 때, 목철린과 내통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편월은 영욱성을 나서자마자 부대를 재촉하여 빠른 속도로 동쪽을 향해 달렸다. 될 수 있으면 오늘 중으로 작미성을 통과하고 싶었다.
‘작미성을 통과하면, 사문기가 일천의 정병을 거느리고 합류하기로 했다고?’
생각을 하면서 편월은 옆에서 달리는 광운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사문기만이 아니라, 송용조의 협력까지 얻어 낸 그의 능력이 새삼 우러러 보였다.
일단 같이 영욱성을 나오긴 했지만, 광운은 작미성까지만 가기로 했다. 거기서 그는 길을 돌려 곧바로 막주 침사성에 수비 장수로 취임하게 되어 있었다.
영욱성을 벗어나, 예전 건주의 침입을 받아 격전을 치렀던 괴룡산을 지나칠 때쯤이었다.
“전방에 정체불명의 군세 출현!”
선두로부터 이런 보고가 들어왔다.
“숫자는?”
대수롭지 않게 물으면서 광운과 편월은 앞으로 나섰다. 여긴 파양주다. 적이 여기까지 올 리 없을 터, 아군이 틀림없을 테니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과연 전방엔 뽀얀 먼지가 피어오르며, 일단의 군세가 빠르게 접근하는 게 보였다.
“대략 삼백? 오백은 안 될 거 같고.”
편월의 말에 광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광운은 그 기치에 집중했다. 아군은 틀림없겠지만, 어디의 군사이기에 이처럼 급하게 달려오는지 궁금했다.
“앗, 저 기치는?”
광운보다 먼저 편월이 접근하는 군세의 기치를 알아보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 뭘 생각했는지 갑자기 입을 다물며 표정을 굳혔다.
“호오, 확실히 저건 효명성의 기치다. 장수기까지 있는 걸 보니, 상 성주가 직접 나선 것 같군.”
말과 함께 광운은 질풍을 몰아 다가오는 효명성 병사들을 맞으러 갔다.
“오랜만이오, 광운 장군!”
파양주의 정규군이자, 효명성의 성주인 상림호가 먼저 군례를 갖췄다. 막주전을 승리로 이끈 광운이라는 이름은 그만한 대우를 받아도 좋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시오? 공자도 같이?”
그러고 보니 상림호는 아들인 상가웅도 데리고 왔다. 그것도 단단한 무장까지 갖추게 하고서 말이다.
“바쁜 길을 지체하게 해서 미안하네. 안 그래도 이 아이를 부탁하고자 왔다네.”
광운에게 가볍게 눈짓을 한 후, 상림호는 곧장 편월에게 얘기했다.
“부탁?”
“다른 게 아닐세. 아들놈도 이번 원정길에 넣어 달라는 걸세.”
“예?”
이 말은 편월과 광운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만큼 상림호의 말은 두 사람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얘기였다.
“워낙 문약한 놈이라 직접 싸울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 병법을 가르쳤으니 쓸모가 있을 걸세.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게끔 여기 엄선한 삼백 기의 정예를 데려왔네. 그들이 가웅이를 보호할 걸세.”
문약한 아들을 강하게 키워 보고픈 뜻을 밝히는 상림호의 말을 들으며, 편월은 상가웅을 쳐다보았다. 자기보다 두 살 많은 열다섯 살, 단단하게 무장을 갖추고 있지만 선천적인 나약함은 숨길 수 없어 파리한 얼굴엔 벌써 땀이 흥건했다.
“이들에 대한 보급도 걱정하지 마시오. 이 몸이 책임지고 그걸 담당하겠소. 결코 끊어지지 않게 하리다.”
광운으로서야 더 바랄 것 없는 상림호의 얘기였다. 정예병 삼백에 그 보급까지 책임진다니, 귀가 번쩍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상림호쯤 되는 사람이 후방에서 버티고 있어 준다면, 나가서 싸우는 편월도 마음 든든할 터였다.
“무조건 내 말에 복종할 수 있나?”
불쑥 편월이 상가웅에게 물었다.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신분도 높은 사람에게 하는 말투치곤 상당히 불손했다.
광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상가웅에게 불손한 편월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애써 어른 흉내를 내려는 그 표정과 말투가 마음에 걸려서였다.
안 그래도 전쟁이 편월의 아이다움을 앗아 간 거 같아 내심 안타까워하던 광운이었다. 그게 막주전 승리를 계기로 대놓고 어른 노릇을 하려고 하니 가슴 한편이 아리기까지 했다.
“그 점은 내가 누누이 강조해 뒀다네. 마음껏 부리게. 가웅이는 결코 반항하지 않을 걸세.”
이어진 상림호의 말에 광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약한 상가웅이 억세기 짝이 없는 편월에게 반항한다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한 가지만 명심해 둬! 전장에선 그 누구도 네 목숨을 지켜 주지 않아. 그러니까 네 목숨은 네 스스로 지켜야 돼. 그럴 각오가 되었다면 따라와도 좋아.”
“편월!”
너무 방약무인한 편월의 말에 광운이 억센 어조로 그를 불렀다.
“놔두시오, 광운 장군. 얼마나 씩씩하오. 부럽소이다, 부러워!”
나약한 아들을 둔 무장인 상림호는 편월이 그저 좋은 모양이었다. 연방 싱글벙글하며 오히려 광운을 말렸다.
그렇게 다시 삼백의 숫자를 더한 편월의 군세가 작미성에 도달한 건 짧은 봄 해가 느릿하게 서쪽으로 기대기 시작하는 신시경이었다.
작미성의 수비 장수는 미리 통보를 받고 있었던지라 편월이 이끌고 온 군병들의 숙식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행은 작미성을 그냥 통과했다. 기다리고 있을 사문기의 군세와 조금이라도 빨리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광운과 상림호는 작미성에 남았다. 그들에겐 각기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작미성 망루 끝에 걸려 있는 태양의 마지막 온기를 등으로 느끼며, 편월은 작별할 때 광운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절대적으로 전면전은 피하라고? 그러니까 유군이 되란 얘긴데, 육천이 넘는 유군이 어디 있어?’
지금의 인원에 사문기의 천 명까지 합치면 병력은 육천이 훌쩍 넘는다. 그만한 군세를 유군으로만 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이 군세로 곧바로 조환의 허주군과 부딪칠 만큼 편월은 어리석거나 어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나름대로의 활로를 찾아 부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선 보급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대륙 제일의 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송용조에게 지원을 약속받았고, 또 최악의 경우 상가웅의 아버지 상림호도 있다. 아들이 속해 있는 군세를 설마 굶기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아직 어리지만, 편월은 이게 자기에게 주어진 다시없을 기회란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막주 원정 시절,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리지 말라고 질타하던 서진청의 목소리가 귓전에 감돌았다.
침사성을 함락시킨 직후의 비참했던 잡가군의 모습들도 떠올랐고, 적이지만 당당했던 목철린의 최후도 망막에 아른거렸다.
‘실망시킬 순 없다!’
자신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 줬던 잡가군, 어리다고 여기지 않고 한 명의 장수로 대해 주며 웃으며 죽어 간 목철린…….
이 모든 이의 기대에 부응해야 된다는 생각이 편월의 어린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무턱대고 마용승의 지시에 따를 수만은 없는 일이다. 최악의 경우 말 그대로 유랑하는 군세가 되더라도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생각을 거듭하던 편월의 미간이 문득 살짝 일그러졌다. 급작스럽게 유화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질이라고? 내가 배신을 하면 죽일지도 모른다고?’
이 말은 광운이 한 게 아니었다. 죽영루가 왜 이사 가느냐고 편월이 물었을 때, 서진청이 자못 분개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 것이었다.
“횃불을 밝혀라!”
막주 원정 이후로 자신의 곁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맹아가 돌연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편월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졌고, 달리는 말발굽 밑에서부터 어둠이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이쯤에 사문기가 있을 텐데…….’
바로 그게 약속이었다. 파양주에서 서로 합류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니, 편월이 건주에 들어서자마자 합류하기로 했다.
한데 아직 아무 연락이 없다. 작미성을 지났으니 여긴 벌써 건주 땅, 이만큼 왔으면 전령이 와도 벌써 왔어야만 했다.
“두건득, 척후를 보내라!”
“척후? 대체 뭣 때문에 척후를 보내라는 거요?”
“합류하기로 했던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다. 그걸 알아봐.”
“알겠소.”
두건득을 비롯한 소부대 대장들도 사문기가 합류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두말도 않고 열 명을 뽑아 전방으로 척후를 보냈다.
아직 정확하게 부대를 나눈 건 아니지만, 척후를 보낸 후 본대`—`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는 속도를 늦췄다. 혹 너무 빨리 달리다 사문기와 만나지 못할까 저어해서였다.
“이 기회에 취사를 허락하는 게 어떻겠소? 우린 점심도 먹지 못했소. 마침 개울도 있으니, 척후를 기다리며 병사들 배나 채우도록 합시다.”
서진청이 편월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편월도 배가 고팠다. 앞날에 대한 생각과, 최대한 빨리 사문기의 일천 군세와 만나고 싶다는 욕심에서 점심도 굶고 달렸다.
“좋다. 취사를 허락한다. 주변의 논밭에 주의하면서, 최대한 빨리 마치도록!”
병사들 각자 지니고 있는 식량은 하루 치밖에 없다. 마용승이 지배하는 윤주까지는 별다른 보급이 필요 없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병사들을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 일부러 제한을 했다. 같은 편의 땅에서부터 무겁게 꾸려 몸과 말이 피곤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일단 취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 자리에 제꺽 장막이 둘러쳐졌다. 대장인 편월을 위한 것이었다. 요컨대 장군의 진막이란 얘기다.
“각 소부대의 대장들은 즉시 집결하도록!”
진막 안으로 들어서며 편월은 명을 내렸다. 새로 만들어진 근위대의 전령 중 한 명이 재빨리 달려갔다.
사실 아직 정식으로 부대를 편성한 건 아니었다. 막주 원정 때부터 하나의 작은 부대를 맡았던 사람들이 그대로 소부대 대장으로 불리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청과 오강, 두건득과 강숙이 한꺼번에 진막 안으로 들어왔다. 새삼 막주전에서 전사한 소부대 대장들의 빈자리가 허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송지와 맹아도 부르도록!”
그 말에 따라 가장 어린 강숙이 밖으로 달려 나갔고, 곧 두 사람이 불려 왔다.
“정식으로 부대를 편성해야겠다. 방법은 전과 같이 일천 명 단위의 소부대로 나눠 각기 하나씩 맡아.”
편월의 말투는 마치 찍어 누르는 듯했다.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을 정도였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을 하진 않았다. 어쨌든 편월은 허주 정벌의 총대장이다. 위엄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근위대는 맹아가 맡고, 송지 노인은 총군감總軍監이야. 나머진 알아서 정해.”
한마디 툭 던진 편월이, 마련된 야전용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군감이라니? 저로선 역부족이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물색해 보시오.”
바닥에 붙어 있던 엉덩이를 끌어 앞으로 나서며 송지는 기겁한 듯 손사래를 쳤다.
군감이 어떤 자리인가? 전군의 군기를 통솔함은 물론, 전투 시엔 지휘관의 능력까지 판단하는 자리다. 송지가 펄쩍 뛸 만도 했다. 그에 비해 맹아는 희희낙락이었다. 백육십여 명에 불과하지만, 명색이 근위대다. 그 대장에 임명한다니 입이 귀에 가 걸렸다.
“대장, 재고해 주시오.”
“명령이야. 듣지 않겠다면 돌아가!”
“대, 대장…….”
다시 반박할 듯하던 송지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편월이 대장된 이후 처음으로 시행하는 인사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항명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그의 뇌리에 번뜩 떠올랐다.
“오천을 다섯 대로 나눈다면, 대장감이 한 명 부족하오.”
“그건 군감에게 물어봐. 나보다 더 잘 알 테니까.”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을 편월은 송지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라고 있는 군감이 아니었던가.
“송 군감?”
“지두룡이 적임이긴 한데… 몸이 그 모양이고, 또 근위대에 소속되어 있으니…….”
“뽑아 가!”
“뭐? 그럼 지두룡에게 정말 한 부대를 맡길 작정이오? 한 쪽 팔이 없는데?”
“양팔이 다 있는 놈보다 더 잘 싸우면 되는 거야. 지두룡은 이미 그걸 증명했고.”
“알겠소. 그럼 이 자리에 지두룡을 부르리다.”
몸을 일으키려는 송지를 대신해, 맹아가 토끼처럼 빠르게 진막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진막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두룡은 근위대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늘 편월의 측근에 붙어 있어야 된다. 그래서 맹아와 그의 목소리가 안에까지 들렸다.
“지두룡!”
갑자기 편월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을 정도였다.
“예!”
“지금부터 잡가군의 한 부대를 맡긴다. 잘해!”
“예?”
갑작스러운 편월의 말에 지두룡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맹아가 거기까진 얘기하지 않았나 보다.
“앉게. 오늘부터 천 명 단위의 한 부대를 맡게 됐네. 실수하지 말게.”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명령이다, 지두룡! 거역하면 용서치 않겠다.”
또다시 편월은 내리누르듯 말했다. 비록 앳된 얼굴이지만, 거기엔 여느 장수 못지않은 위엄이 흐르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편월과 같이 행동해 왔던 두건득과 서진청, 오강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말하는 건 한결같았다.
변했다!
바로 이게 지금 세 사람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그럼 앞으로 합류하게 될 부대는 어디에 소속되는 거요?”
역시 먹은 나이만큼이나 송지가 가장 침착했다. 군감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앞으로 편입될 사문기 군세의 성격부터 규정하려고 했다.
“그들도 일천 정도라니깐, 따로 운영하도록 하면 돼. 굳이 이름 붙이자면 사가군이나 양원군 정도면 되겠지.”
“한 가지만 더! 만약 군율을 어기는 병사나 지휘관이 있다면 어떻게 처분하면 되겠소?”
“영감에게 맡긴다. 그러라고 군감 자리를 준 거야.”
“그럼 우리 군이 지켜야 할 군율은?”
“간단해.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백성 및 타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끝이야.”
“에?”
너무 간단한 말이라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뿐이오? 자고로 군율이란 병사들의 기강 확립을 위하여…….”
“그거면 돼!”
군감의 임무상 보다 세세하게 군율을 세우려는 송지의 입을 편월은 단호하게 막아 버렸다.
그 기세에 압도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보니 편월의 말이 새롭게 인식되는 것 같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두 개 외에 달리 무슨 규율을 더 세울 수 있을까!
“새로운 군병이 합류하는 대로 대대적인 사냥이라도 한번 벌여 보는 게 어떻겠소? 아직은 서로 손발이 맞지 않겠지만, 산과 들을 달리다 보면…….”
서진청이 아군의 보조를 맞추기 위한 의견을 제시했을 때, 갑자기 바깥이 왁자하니 소란스러워졌다.
귀를 기울여 보니 멀리서 말발굽 소리도 들려왔다.
2
“근위대 집합!”
갑작스러운 변고에 가장 신을 내며 설치는 사람은 맹아였다. 새로 대장이 되었다는 걸 강조라도 하듯 큰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적이냐, 아군이냐?”
두건득이 재빨리 따라 나가며 물었다. 예기치 않았던 일에 대한 반응은 전장에 있는 것처럼 예민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후방에서 나타난 걸 보니 적은 아닌 것 같아요.”
맹아가 말했을 땐, 벌써 두건득도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횃불의 무리를 보는 중이었다.
“족히 이백 기는 넘겠군. 무슨 일일까?”
사실 달려오는 횃불 자체가 이백이 되는 건 아니었다. 서너 사람꼴에 하나씩 들었다고 치고, 그 숫자를 짐작한 것이었다.
“모르는 자는 전부 적이지, 뭐. 친위대, 나가서 저들이 누군지 확인해!”
명을 내려 두고서도 자기가 가장 먼저 횃불을 향해 달려가는 맹아였다.
“총대장이나 근위대장이나!”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젓던 두건득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너무 변해 버린 편월의 모습을 떠올린 탓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예전 같았으면 지금쯤 달려 나와 맹아처럼 직접 확인하려 들었을 편월이다. 하지만 지금은 진막에 들어앉아 꿈쩍도 않고 있다.
“누구냐? 여긴 파양주의 편월 장군께서 계시는 곳이다! 썩 정체를 밝히지 못할까?”
달려오는 횃불을 벌써 정지시킨 맹아가 터무니없이 큰 소리로 호통 쳤다. 미리 음어를 정하지 못한 탓이었다.
“우린 수상한 자가 아니오! 여기 광운 장군의 편지도 있소이다. 편월 장군의 예하에 소속되고 싶어 왔소이다.”
“뭣이? 광운 장군의 편지? 이리 내!”
여전히 맹아는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그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목소리만으로 그 나이가 느껴지는 창노한 음색이었는데도 말이다.
“편지는 편월 장군께 직접 드리겠소. 소관은 담개라고 하오. 그렇게 전해 주시오.”
“담 장군!”
자신도 모르게 두건득은 기묘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고는 곧장 맹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물러서라, 맹아. 네가 상대할 분이 아니다!”
담개라면 두건득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건주 무융성이 무너질 때 최후까지 저항하려는 걸 광운이 간신히 설득시킨 명장이었다.
바로 그 담개가 광운의 편지를 들고 편월의 예하에 들고자 이 시간에 찾아왔다. 눈으로 빤히 보고, 귀로 확실히 들었으면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편월 대, 아니 대장군께 전하라. 담개 장군께서 오셨다고!”
막사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근위대원 한 명에게 이르고는 두건득도 곧바로 담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담 장군, 소인은 두건득이라 하오. 무융성이 함락되었을 때…….”
숨 가쁘게 달려가 담개에게 알은척을 하던 두건득은 갑자기 입을 닫았다. 무장에게 패전한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건 실례임을 떠나 잔인한 짓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허허허, 괜찮소. 팔 년 전의 패배로 인해 이미 죽은 몸이오. 너무 괘념치 마시오.”
“자,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대장군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신분의 차이 때문에 두건득이 자신을 소인이라고 낮춘 건 이해할 만하지만, 그는 한사코 편월을 대장군으로 칭했다. 그럼으로 해서 허주 정벌에 나선 자신들 군세의 성격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을 터였다. 잡가군의 모임이 아니라, 진남후의 명을 받은 당당한 원정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과연 편월은 진막 밖에까지 나와 서 있었다. 그 역시 다섯 살 어린 나이에 봤던 담개의 무장다운 모습이 강렬하게 기억에 새겨져 있던 참이었다.
“급한 김에 광운 장군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가지고 왔소이다. 견마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을 터이니, 부디 물리치지 마시오.”
편월 앞에 선 노장군은 정중한 군례를 갖추며 편지를 내밀었다.
“잘 왔소!”
편지를 받아 그대로 품속으로 넣으며, 편월은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진막 안으로 들어갔다.
잡가군은 깜짝 놀랐고, 담개가 이끌고 온 삼백 기에 가까운 군세는 술렁거렸다. 편월의 언행이 너무 방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편월이나 담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들어가겠소.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지 말도록!”
술렁거리는 부하들을 단속한 후, 담개는 진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분분히 예를 갖추며 담개를 맞았지만, 편월은 그대로 의자에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부탁드리겠소. 담개 이하 삼백 기, 편월 장군의 예하에 배속시켜 주시기 바라오.”
“좋아. 마침 유군이 필요했던 참이야.”
“감사하오! 목숨을 아끼지 않겠소이다.”
대뜸 말을 놓는 편월의 태도에 다른 사람들은 술렁거렸지만, 정작 담개는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사실 지금 담개는 조금 감탄하고 있었다. 파양주를 진동시킨 꼬마 장군 편월이란 이름은 귀가 따갑게 들어 봤지만,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꼬마가…….’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열세 살 소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건 가장된 것이겠지만, 전신으로 풍기는 무게감은 흉내 낸다고 해서 될 게 아니다. 수시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사이 자연히 몸에 밴 것이리라.
‘비로소 이 늙은 목숨을 바칠 곳을 찾은 것 같군.’
솔직히 담개는 옛 주인이었던 건주의 고씨 일가에게 실망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돈에 눈이 어두워 성을 넘겨준 고촉은 말할 것도 없고, 숱한 부하들의 목숨은 도외시한 채 일가만 빠져 달아난 고욱교에게도 정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던 참에 편월이 오천의 잡가군을 이끌고 허주 원정에 나선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허전함과 울적함을 달랠 길 없던 담개는 곧바로 예전의 부하들을 수습했고, 대략 삼백 기 정도를 모아 부대다운 면모를 갖췄다 싶었을 때 광운을 찾았다.
하지만 그땐 이미 편월이 출정한 뒤였다. 광운도 그를 작미성까지 전송한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래서 부랴부랴 달려 작미성에서 광운을 만나 편지 한 통을 받아 들고 여기서 합류한 길이었다.
물론 작미성을 통과할 땐 사소한 시비가 없지 않았다. 삼백 기나 되는 군사들이 성문이 닫힌 후에 지나가겠다니, 누구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건 당연했다. 광운과 상림호가 없었다면 이 밤중으로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터였다.
“참, 담 장군에겐 부탁할 일이 있어. 가서 상가웅을 불러와!”
편월이 턱짓으로 맹아에게 명을 내렸을 때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상가웅을 떠올렸다. 그만큼 그의 존재감은 희미했다.
“그렇지 않아도 작미성에서 상 장군을 뵈었소이다. 이 늙은이에게 상 공자를 신신당부하시더이다.”
“잘됐군. 아, 마침 오는군. 보는 것처럼 약해 빠진 놈이니, 신경 많이 쓰일 거야.”
“그렇다면……?”
“저놈 아비가 신신당부하더라며? 유군이 삼백이라면 조금 모자란 감도 없으니, 저놈과 합쳐. 전쟁이 뭔지도 좀 가르치고…….”
“허어…….”
상가웅은 아예 입도 열지 못했고, 사람들도 그저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상가웅에게 이놈 저놈 하는 건 그렇다 쳐도, 그 부친인 상림호는 결코 편월이 ‘아비’라고 낮춰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묘하군. 심한 반발이 생길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게 별로 느껴지지 않으니. 아직은 어려서인가?’
편월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담개는 새삼 그 앳된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에게나`—`심지어 자신에게도`—`함부로 대하지만, 거기에 대해 누구도 심한 반감을 나타내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겨우 열세 살인 편월인지라 후천적인 수양으로 그런 면을 갖췄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이라고 봐야 한다.
‘어쩌면 이 아이는 세상을 놀라게 할지도 모르겠군.’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이 만들어 간다. 특히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는 인간의 모든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길 요구한다. 그래서 천하의 뭍 열왕패주들은 거금을 들여서라도 인재를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편월은 커다란 이점 한 가지를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에 혹해, 혹은 사람에 반해 모였던 인재들도 흩어지기 마련인 세상이다. 아무렇게나 대해도 반감을 가지지 않는 성품을 타고났다면 주변에 사람을 모으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왜 대답이 없어?”
다시 편월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담개는 흠칫하며 생각에서 깨어났다.
“알겠소. 상 공자는 이 늙은이가 틀림없이 맡았소. 다름 아닌 상장군의 자제시기도 하니. 상 공자, 이 늙은이만 믿으시오.”
자신만만하게 얘기하는 담개에게 상가웅은 그저 고개만 살짝 숙였다. 그 모습이 수줍어하는 소녀처럼 보였다.
“저놈에게 군례부터 가르쳐!”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상가웅에게 편월이 짜증을 냈을 때, 부하들이 진막 안으로 식사를 날라 왔다.
“오, 마침 출출하던 참인데 잘됐군. 우선 대장부터 드리고, 그다음에 담 장군…….”
“같이 먹어. 무슨!”
부하들에게까지 확실한 서열을 심어 두려는 두건득의 말을 편월은 잘라 버렸다. 그리고 자신 앞에 음식이 가장 먼저 놓였음에도 먹지 않고 기다렸다.
이윽고 모두들 앞에 음식이 놓였고, 다들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단 두 사람만 빼고.
그중 한 명은 상가웅이었다. 파양주의 자랑인 야전용 고기 죽의 냄새가 싫은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외면하고 있었다.
“상 공자, 바깥에 나서면 어쩔 수 없소. 배를 채워 둬야 또 말을 타고…….”
“놔둬! 배고프면 먹겠지. 그런데 너는 왜 또 안 먹어?”
역시 음식을 먹지 않고 있는 또 한 사람, 맹아를 보며 편월은 무표정하게 물었다.
“명색이 근위대장이오. 대장이 다 먹기 전에 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어깨에 잔뜩 힘을 실은 상태로 맹아는 의젓하게 말했다.
다들 피식 웃었지만, 그때도 편월의 얼굴에선 표정이라고 할 만한 걸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척후대에선 여태 소식이 없나?”
“그 사문기란 사람은 도대체 쓸모가 없구먼. 이렇게 신용이 없어서야 어디…….”
가장 먼저 식사를 끝낸 두건득이 입가를 손으로 쓱 문지르며 말하자, 송지 역시 뒤따라 한마디 했다. 총군감이니 사문기가 이끌고 올 일천 군세에 대한 기강 확립도 그의 몫이다. 늦은 걸 질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터였다.
“양원과 영림의 옛 주인인 사문기 공이라면 약속을 가벼이 여기실 분이 아니오. 무슨 사정이 있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담개였다. 묵직한 어조로 사문기를 두둔하고 나섰다.
“배를 채웠으면 각자 맡은 부대의 병사들을 단단히 챙겨. 혹 아픈 사람은 없는지, 그새를 못 참고 탈영한 놈은 없는지…….”
“흐흐흐.”
편월의 말에 몇 사람이 나직한 웃음을 토했다.
“왜 웃어?”
“작년 막주를 토벌할 때가 생각나서 말이우. 흐흐흐.”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며 오강이 대꾸했다. 요컨대 작년엔 자신들이 이탈병 신세였는데, 지금은 편월이 병사들의 탈영을 염려하니 그 점이 재미있다는 뜻이다.
“상가웅은 남아!”
다들 우르르 일어서 나가려 할 때, 편월이 상가웅을 불렀다.
“나?”
“그래. 여기 너 말고 상가웅이 또 있어?”
이제 겨우 시큼한 땀 냄새, 퀴퀴한 죽 냄새, 전장을 뒹군 사나이들의 비릿한 체취가 밴 곳에서 나가게 되었다고 안도했던 상가웅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왜? 왜 그래?”
“그건 모두 나간 후에. 그런데 담 장군은 왜 안 나가? 맹아도 근위대로 돌아가고.”
“나는 상 공자를 맡은 몸이오. 그것도 다름 아닌 편월 대장의 명이 아니었소? 그러니 이 자리에 있어야겠소.”
“나도 근위대장으로서 늘 대장의 옆에 있어야 돼.”
담개와 맹아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무표정하던 편월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총대장인 자신의 명이 가볍게 여겨진다 싶어 욕이라도 한마디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편월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노기를 꿀꺽 삼켰다. 여기서 예전처럼 고함을 지른다면 노숙한 담개는 대번에 자신의 기분을 알아챌 것이다.
‘내 마음을 들켜선 안 된다. 광운도 늘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밖으로 표현하지 말라고 했었고.’
이 점을 상기하자 편월의 미간에 그려졌던 주름이 다시 펴졌다.
“좋아. 상가웅!”
“으, 응?”
갑자기 제 이름이 불리자 상가웅은 화들짝 놀라며 편월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책 많이 읽었지? 그중에 병서兵書도 있었나?”
“조, 조금…….”
“그럼 병법도 알겠군. 오늘부터 내게 그 병법을 가르쳐 줘. 알았나?”
“아, 안 돼. 남을 가르칠 만큼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또 병법이란… 책 속에 있는 병법이란 죽어 있는 거라…….”
“허허허.”
상가웅의 대답에 돌연 담개가 낮은 웃음을 토했다.
“상 공자의 말씀이 정답이오. 책 속의 병법이야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거요. 싸움이란 절벽에서 떨어지는 바위와 같은 거요. 어디로 구를지 모른다는 얘기지. 그래서 임기응변이란 말이 있는 거요.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작전을 세우고 대처하는 게 바로 살아 있는 병법이 아니겠소.”
얘기가 병법에 이르자 담개는 마치 귀여운 손자에게 이르는 말투가 되어 조용히 내뱉었다.
예전의 편월이었다면 이쯤에서 한마디 욕을 했을 게 틀림없다. 늙은이니, 영감탱이니 하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 지금의 편월은 달랐다. 담개의 말을 곱씹어 보는 듯 유난히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가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상 공자, 우린 이만 나가 봅시다. 상 공자와 내 군세를 합쳐야 하니 이 밤중으로 할 일이 많소이다.”
담개가 끌었지만, 상 공자는 얼른 따라나서지 않고 편월의 눈치를 살폈다. 그에게서 가도 좋다는 말이 없어서였다.
“괜찮소. 우리가 있으면 편월 장군께 오히려 방해가 될 거요. 자, 갑시다.”
그렇게 말하는데도 편월이 아무런 말이 없자 비로소 상가웅은 담개를 따라 진막 밖으로 나갔다.
“많이 늦는군.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해야 할 것 같다. 맹아, 각 부대에 내 말을 전해.”
“존명!”
복명을 한 후, 맹아는 곧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야영을 한다고 해서 인근의 민가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장작이든 밥이든 가져오면 반드시 값을 치르라고 해. 내가 말한 군령을 잊지 말도록!”
막 진막을 빠져나가려는 맹아를 불러 세운 편월은 새삼 주의를 주었다.
“알고 있소, 대장. 하여튼 존명!”
세세한 곳까지 신경 쓰는 편월이 우습다는 듯, 맹아는 다소 장난스레 복명한 후 밖으로 달려갔다.
‘임기응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르라고?’
아직도 편월은 담개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이 놓인 위치를 가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 선 곳을 모르면, 앞으로 갈 길도 모호해지기 마련이니까.
물론 편월이 그렇게 어렵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어렴풋이나마 어제와는 다른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기의 한 발짝이 그르치면 따르는 모든 사람의 행보까지 그르치기 십상이라는 점을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화톳불이 지펴졌다. 갑작스레 밤을 밝힌 그 불꽃은 하늘이라도 사를 수 있을 것처럼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하늘 한쪽에 자리를 잡은 편월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3
그 저녁, 유화는 모처럼 서예에 집중하고 있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심란함을 가눌 길 없었다.
집무창 안으로 이전하기 전부터 유화는 죽영루의 일은 하지 않았다. 죽영이 손님이 있는 곳엔 절대로 나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유화의 미모 탓이었다. 이제 열여덟이 된 그녀의 자색은 무융성 내에서 제일이라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러니 죽영루에 오는 손님들은 물론 부호들 중에서도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유화를 첩으로 앉히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죽영은 그걸 꺼려 다른 집을 하나 얻어 그녀를 살게 했다.
“휴우-.”
문득 유화의 입에서 한숨이 토해졌다. 무슨 시름이 있는지 그 고운 미간도 잔뜩 찌푸렸다.
‘죽영 언니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아. 그동안 어떻게 견디셨을까?’
다름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 출정하는 편월을 전송한 이후로 계속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것만 같아 너무나 불안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편월은 전장에 나서곤 했다. 하지만 그 땐 광운이 늘 함께였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이번처럼 혼자만 출정한 건 처음이었기에, 유화의 가슴은 억지로 잡아 찢는 듯 아팠다.
‘어디쯤 갔을까? 벌써 싸움을 시작한 건 아니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새 갑옷이라도 한 벌 지어 줄 걸.’
“작은아씨, 큰아씨께서 오셨습니다.”
“응? 언니께서? 어서 모셔라.”
생각에 잠겨 있던 유화는 화들짝 놀라며 탁자 위에 있는 문방사우를 주섬주섬 치웠다.
“글씨를 쓰고 있었구나.”
“아, 어서 오세요, 언니. 미리 전갈을 주시지 않고요. 지저분해서…….”
“괜찮아. 걱정이 되어서 와 봤더니, 역시 혼자 가슴 앓고 있었구나.”
“아, 아니에요.”
죽영의 말에 유화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바닥으로 떨궜다.
“아니긴, 내가 그 심정을 모를까 봐서? 괜찮아. 미친 구름이 번번이 내게 돌아왔듯이, 편월도 반드시 네게 돌아올 거야.”
“흑.”
기어이 짤막한 흐느낌을 토하며, 유화는 죽영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 얼마든지 울어. 어차피 여자는 눈물로, 남자는 전장에서 흘리는 피로써 자기의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야. 그렇게 미친 세상이야.”
죽영의 말끝은 자신도 모르게 격앙되어 나왔다. 몇 번을 고쳐 말해도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이 난세는 여자들에겐 견디기 힘든 천형의 유배지였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견디셨어요, 언닌?”
눈물 가득한 얼굴을 들며 유화는 물었다. 흐느낌으로 잠겨 들기만 하는 그 목소리는 차라리 절규하는 것만 같았다.
이번엔 죽영의 눈망울이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자신이 죽영루에 팔려 왔을 때와 똑같은 열여덟 나이인 유화의 심정이 아프게 와 닿았던 것이다.
왜 모를까? 이제 소녀티를 벗고 한 명의 여자가 된 유화의 방심芳心을, 비록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편월이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는 걸…….
“울었지. 참 많기도 많은 나날을 채운 내 눈물 속에서 밤을 지새웠었지. 이쯤 하면 말랐겠지, 이 한 방울만 더 흘리고 나면 마르겠지… 하지만 눈물은 도무지 끊이질 않더구나.”
“언니…….”
“강해져야 한다, 유화. 그것만이 여기 없는 사람을 그리는 마음의 위안이 되고, 또 우리 처지에 대한…….”
죽영은 문득 말을 끊었다. 마지막 말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땐 벌써 유화가 눈물을 거둔 뒤였다. 얼굴엔 여전히 눈물 자국이 있었지만,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
“알아요, 언니. 우리가 왜 이 집무창으로 이사를 와야 했는지.”
“유화야.”
“전 강해질 거예요. 언닌 울면서 광운 아저씨를 기다리셨다지만, 전 웃으며 편월을 기다리겠어요. 그리고 만에 하나, 편월이 남자의 포부를 펴기 위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전 웃으며 죽을 거예요. 그게 편월을 위하는 길이라면요.”
“어쩜…….”
죽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껏 이처럼 강한 유화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사내들이 아무리 서로를 죽이고 또 죽여도, 세상엔 다시 태어나는 생명도 있어요. 죽음은, 싸움은 언젠가 끝이 나겠지만, 생명은 끝없이 이어질 거예요. 그 생명은 바로 여자의 몸에 깃드는 것, 그만큼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죠.”
말을 마친 유화의 볼은 발그레하게 상기되었고, 그 눈은 마치 세상 너머의 세상을 보고 있는 듯 묘한 빛으로 물들었다.
‘이 아이, 설마 편월과…….’
유화의 입에서 생명의 잉태란 말이 나왔을 때, 죽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오해한 게 틀림없겠지만, 설사 그렇게 되었더라도 괜찮다고 여겼다. 그 하나의 기억만으로도 여자는 평생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약 편월이 전사라도 한다면?’
어쩌면 유화는 따라 죽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광운을 만났을 땐 기녀의 신분이었다. 간다면 보내야만 했고, 그리워하면서도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야만 했을 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설사 광운이 어느 산야의 전투에서 전사를 했다고 해도, 자신은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하지만 유화는 다르다. 비록 팔려 왔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녀만은 여염집 규수처럼 키웠던 죽영이었다. 편월이 전사한 뒤의 일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아직 차도 한 잔 내놓지 않았네.”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마저 지우며, 유화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죽영은 애써 말리지 않았다. 지금의 유화라면 뭐든 하는 게 좋다. 그래야 한군데 편중된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열린 창에서 아직은 싸늘한 밤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죽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결에 밀려가는 구름 사이로, 작은 조각달이 부침浮沈을 거듭하며 헤엄치고 있었다.
‘하늘의 구름과 달은 늘 저 자리에 있건만…….’
지상의 미친 구름과 조각달은 이 밤도 낯선 대지 위를 질주하고 있을 터였다.
* * *
언제부턴가 편월은 진막 안의 의자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불편하지만, 한 부대의 지휘를 맡은 이후로 생긴 습관이었다.
잠을 잘 때 편월은 거의 꿈을 꾸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신기하게도 유화의 얼굴이 감은 눈꺼풀 속에 그려졌다. 아니 얼굴만이 아니었다. 출정 전날 자신의 침소로 은밀히 찾아왔던 그녀의 알몸도 보였다.
그때 처음으로 편월은 남자와 여자 몸의 차이를 알았다. 그리고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았다가, 더할 나위 없이 창피해지기도 하고, 가슴병 환자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과, 종내는 아득한 절벽에서 추락하는 듯한 아찔한 쾌감과 그 뒤의 허무감까지…….
도시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감정의 뒤엉킴을 맛보았다. 유화는 그렇게 많은 경험을 한꺼번에 편월에게 가져다줬다.
기묘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미 유화는 가고 없었고, 그러나 편월은 어제와는 다른 자신을 발견했다. 낯이 간지럽기도 하고, 괜히 가슴이 활짝 펴지기도 했다. 이부자리의 핏자국을 봤을 땐 잠시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냥 무시해도 될 것 같아 지나쳐 버렸다.
그렇게 떠나온 이번 출정 길, 편월의 꿈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비상! 정체불명의 군세 출현! 비상!”
갑자기 진막 밖이 어수선해진 것은 편월의 꿈이 세 번인가 네 번째 반복될 때였다.
편월은 눈을 떴다. 조금만 더 꿈에 젖어 있고 싶었지만, 야밤의 비상인지라 뻐근하게 당겨 오는 아랫배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진막 밖으로 나섰다.
“대장을 보호하라!”
나서자마자 맹아가 서른 명가량의 근위대를 이끌고 와 편월을 에워쌌다.
“귀찮다. 어느 쪽이냐?”
달콤한 꿈에서 곧바로 튀어나왔으니 편월의 감각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저쪽입니다. 저 산기슭께 움직임이 보이십니까?”
편월은 맹아가 가리키는 동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아득한 들판을 껴안듯 하고 있는 산 아래 일대의 군마가 움직이는 횃불의 행렬이 보였다.
“보병이로군!”
갑자기 편월은 자신의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쳤다. 뭔가를 깨달았다는 의미였다.
“어디의 군세인지 알아보라 할까요?”
“그럴 것 없어. 사문기 부대다!”
“예? 그걸 어떻게?”
의아해하는 맹아에겐 대꾸조차 하지 않고, 편월은 다시 진막 안으로 들어갔다.
맹아는 재빨리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다시 물었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만약 대장의 말씀대로 사문기 공의 부대라면 이쪽에서 영접을 나가도 좋겠는데…….”
근위대장에 임명된 후 편월을 대하는 맹아의 말투와 행동은 확연히 달라졌다. 마치 누대에 거쳐 섬겨 온 주인을 대하는 듯했다.
“저들은 보병이지?”
“그야 움직이는 속도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생각해 봐. 사문기는 제 땅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중이다. 그 부하들이 말을 탈 여력이 있겠어? 그리고 이 오밤중에 저만한 보병을 이끌고 접근하는 군세라면 사문기 말고 누가 있겠나?”
“아하!”
이번엔 맹아가 제 이마를 세차게 탁 쳤다.
조금 전에 봤던 편월의 행동을 흉내 낸 것이지만, 실제로 감탄하기도 했다.
“일부러 영접을 나갈 것까지는 없다. 대신 화톳불을 더 사르고, 모두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해. 특히 음식을 충분히 장만해 두도록!”
“존명!”
복명하고 맹아가 달려 나가자, 잠시 후 진막 밖이 술렁거렸다. 화톳불이 더욱 훤하게 밝아지는 걸 보니 명을 시행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인질이라고?’
여전히 편월은 꿈의 끝 자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마용승의 명을 따르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병사들을 돌린다면 유화와 죽영은 죽임을 당할 게 뻔하다. 아니 어쩌면 죽영은 살지도 모른다. 광운이 침사성에서 마용승의 지시를 거부하지 않는 한, 그녀에겐 손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고작 칠천도 되지 않을 군세로 허주의 조환에게 부딪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유화 하나를 살리자고, 그 많은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할 수도 없다.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가슴엔 유화를 담아 둔 채, 편월은 아주 냉정하게 자신들의 병력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적을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땐, 우선 내 힘부터 먼저 헤아려 보라던 광운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잡가군 오천, 근위대 백육십둘, 상가웅의 상가군이 삼백, 담개의 담가군 삼백, 곧 합류할 사문기의 군세가 천…….’
아무리 계산을 거듭해 봐도 칠천이 되지 않는 병력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 손발도 맞지 않을 게 뻔하다. 지휘관의 성격에 따라 훈련법도 천차만별일 게고, 또 작전을 수행하는 능력도 차이가 날 것이다.
병사들 개개인의 신분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야 자신을 따르겠지만, 부하 장병들은 정규군과 잡가군으로 나뉜다. 이들 사이에 분쟁이라도 생긴다면 걷잡을 수 없고, 곧바로 이 부대는 지리멸렬되고 말 것이다.
‘유화의 문제는 일단 미뤄 두자. 우선 내 발밑부터 굳혀 두자.’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돌연 바깥이 왁자하니 소란스러워졌다.
“사문기 공 이하 일천 도착!”
누군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는 게 들렸다.
그제야 편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막 밖으로 나갔다.
한때 두 개 현을 지배했던 사문기의 신분 때문이 아니라, 일천이나 되는 병력을 데려와 준 답례로 영접을 나갔던 것이다.
밖으로 나선 순간, 편월은 크게 놀라 걸음을 멈췄다.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일천의 보병을 본 까닭에서였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각자가 하나의 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잡가군에겐 이런 면모는 찾으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양원, 영림의 일천 군병, 편월 대장의 휘하에 들기를 바라오!”
도열한 보병들의 선두에 서 있던 사문기가 편월의 모습을 보자마자 깍듯한 군례를 갖추고 소리를 높였다. 거기엔 그 옛날 편월을 ‘아이 새끼’라고 불렀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어서 오시오!”
“고맙소.”
짤막한 인사를 나눈 후, 편월은 그대로 몸을 돌려 진막 안으로 들어갔다. 달리 말은 없었지만, 각 부대의 대장과 송지가 뒤따라 우르르 들어와 앉았다.
“보시다시피 보병이 주력이라… 또한 우리들은 대놓고 모일 수도 없어 늦었소이다.”
이제 서른넷, 스물하나의 젊음을 주체 못해 무모하게 평사릉 전투를 치렀던 패기는 사라지고, 지금의 사문기에게선 분별을 갖춘 장년의 모습이 역력히 보였다.
“됐어. 총군감?”
“예.”
늦은 이유를 대는 사문기에게 가볍게, 그것도 반말로 대꾸한 후 편월은 곧장 송지를 불렀다.
“지금 우리 부대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뭔가?”
“단결이지요!”
마치 이런 질문이 나올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송지의 대답은 빨랐다. 그 역시 조금 전 편월이 생각하고 있었던 걸 걱정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역시 그렇군. 하나로 뭉칠 뭔가가 필요해.”
“단결을 위해 가장 시급한 건 우리 군의 성격이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우선 우리 군의 이름을 정허군征許軍으로 하고, 부대를 총 일곱으로 나눠 각기 이름을 갖도록 하는 게 좋겠소. 이름이 있으면 병사들은 그 아래 하나로 뭉치기도 쉬울 거요.”
“그럼 정규군의 체제를 갖는다는 말씀이신데…….”
불쑥, 그러나 나직한 강숙의 말이었다. 이런 경우 거의 말이 없는 그의 음색엔 약간의 불만이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잡가군이 그의 성격엔 맞는 것 같았다.
“일단 편월 장군의 휘하에 든 이상, 겉으로야 어떤 형태를 취하든 속은 잡가군일 수밖에 없소. 그러니 체제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 게 좋겠소.”
“좋아. 그럼 진용을 짜 봐.”
강숙을 달래는 담개의 말이 끝나자마자 편월이 송지를 보며 말했다.
“우선 대장군엔 편월 대장, 상장군엔 담 장군, 오기대장엔 지금 각 부대를 맡고 있는 분들이 있으니 달리 정할 건 없고, 문제는 방금 합류하신 사문기 공이신데…….”
“소장은 어떠한 직책이라도 기꺼이 받겠소이다.”
말꼬리를 흐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송지에게 사문기는 시원스레 웃어 보였다.
“꾸물대지 말고 말해 봐. 술술 풀어 놓는 걸 보니 진즉부터 생각한 바가 있었던 것 같은데.”
편월이 재차 채근했고, 그제야 송지는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대장군 편월, 예하에 근위대 일백육십이.
상장군 담개, 예하에 상가군 포함 유군 육백.
백월대 강숙, 예하에 잡가군 일천. 선봉 비장군飛將軍.
청월대 두건득, 예하에 잡가군 일천.
적월대 서진청, 예하에 잡가군 일천.
흑월대 오강, 예하에 잡가군 일천.
황월대 지두룡, 예하에 잡가군 일천.
총군감 송지.
여기까지가 송지가 계획한 체제였고, 역시 사문기의 일천 군세가 빠져 있었다.
“기병만으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을 거요. 내 군세를 다섯으로 나눠 각 부대에 이백씩 배치하면, 여차하면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거요.”
사문기의 말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말이 좋아 부대를 나누는 것이지, 병사가 없는 대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너무 큰 희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사문기는 담담히 웃었고, 그 뜻은 그대로 관철되었다.
“그럼 군기를 제작해야겠는데, 대장군은 금월, 상장군은 은월, 각 부대는 그 색대로 하는 게 어떻겠소? 물론 달을 그려 넣어야 하고, 그 달은 편월이오.”
말을 하며 송지는 편월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일부러 부대 명칭에 달을 넣은 건 바로 이걸 위해서였던 것이다.
다들 찬성이었다. 대장군의 이름이 편월이었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그건 됐고, 이대로 병사들을 전투에 투입해도 되겠나?”
“불가하오!”
편월의 질문에 담개가 대뜸 반박하고 나섰다.
“정허군은 오늘에야 겨우 집결이 완료되었소. 그러니 전체적인 훈련이 필요하오.”
“그 점이라면 다들 알고 계실 거요. 다만 방법이 문제요. 널찍한 연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땐 사냥이 최곤데…….”
서진청의 말에 강숙이 다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로선 정말 드문 일이었지만, 지난번 서진청이 했던 얘기를 반복한 것이도 했다.
“그렇군. 사냥이 있었군. 이 부대 저 부대 섞여 한바탕 뛰고 달리다 보면 서로 정도 들고, 손발도 맞겠지. 어떻소, 대장군?”
“사냥?”
편월로선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좋겠지. 그럼 그렇게 결정하고, 출발은 내일 인시다!”
“존명!”
마지막 결정을 내린 편월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렇게 정허군은 결성되었다. 작은 조각달, 바로 편월의 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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