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전이후勝戰以後
1
공격은 사시 정각에 개시되었다.
그 전에 전국의 관례에 따라 공격군과 수비군 사이에 정중한 예를 갖추는 의식이 선행되었음은 물론이다.
다른 게 아니라, 수비를 하고 있는 막주군은 내성에 있는 각종 기진이보들을 공격군에게 내주는 것이었다. 전화로 소실되거나 파괴되면 아깝다는 물질적 측면도 있지만, 이처럼 가진 걸 모두 내줌으로써 한 명도 살아남을 생각이 없다는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의식이었다.
그 답례로 공격군은 양곡 열 수레와 식수 열 수레 그리고 투항하는 자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각서를 막주군에게 보냈다. 전자는 농성하는 자의 기갈飢渴을 풀어 준다는 의미에서, 후자는 헛된 희생을 최대한 막아 보자는 의미였다.
이 의식은 다분히 목철린의 신분에 기인한 점이 없지 않다. 과거야 어떻든 지금 그는 황제의 정식 칙명을 받은 정북후다. 저 혼자 감투 쓰고 설치는 여타 패주나 국왕들과는 분명 다르니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줘야만 했다.
그럼 왜 침사성 외성 공략 시엔 이런 의식이 없었을까? 다른 사소한 것들도 많겠지만, 그땐 승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는 게 주된 이유다. 혹시 이길지도 모르는 싸움에 막주군이 성내의 보물들을 포기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침사성의 내성에서 실려 나온 보화의 양이 공격군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일흔 대의 수레에 싣고도 모자라, 극도로 조심해야 될 것들은 따로 백 명의 사람이 한 점씩 조심스레 들고 나왔다. 비적단 두목 출신인 목철린의 과거를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정말이지, 치열한 공격이었고 결사적인 방어였다. 그게 바로 창끝을 맞대고 싸우는 상대에 대한 전국의 예의 중 하나이니, 곽준방도 목철린도 단 한 치의 사양이나 양보가 없었다.
“네? 대장, 제발 허락해 줘요!”
허공을 꿰뚫는 화살의 날카로운 울부짖음과, 양군에서 지르는 함성 속에서 맹아는 편월의 뒤를 졸졸 따르며 연방 보채고 있었다.
“이럴 거면 여기까지 뭐 하러 왔어요? 그러니 우리도 공격군에 가담해요, 네?”
“시끄러! 네 눈엔 지금 우리가 싸울 수 있을 것처럼 보여?”
“그러니까 제게 백 명만 붙여 달라고 하잖아요. 그럼 공격군 사이에서 마음껏 활약하고 올게요. 절대로 우리 잡가군의 수치가 되지 않게 할게요, 네?”
“넌 네 애비 걱정도 안 돼? 그렇게 싸울 힘이 있거든 네 애비를 구할 방도나 강구해!”
“내가 아버지를 걱정하나요? 아버지가 날 걱정해야지.”
“뭐?”
“하하하!”
아무렇게나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오강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떻소, 대장? 이왕 예까지 왔으니, 한바탕 싸워 보는 것도 좋을 듯한데. 맹아도 보다 많은 공을 세워 그걸로 부친을 구하려고 하는 걸 거요.”
“닥쳐!”
맹아의 마음을 짐작한 오강이 그의 역성을 들었지만, 편월은 한마디로 잘라 버렸다. 그러고는 편한 자리를 골라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다고 편월이 마냥 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눈을 번뜩이며 공격군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주시했다.
사실 이런 호기는 흔한 게 아니다. 늘 진두에 서서 싸웠던 편월이기에, 다른 사람이 세운 작전이나 용병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편월은 이내 씁쓸한 실망감을 베어 물었다. 역시 정규군의 전법은 너무 형식화되어 있고, 또 지나치게 예의에 얽매어 있다는 걸 발견한 탓이었다.
당장 곽준방이 펼쳐 둔 진만 해도 그렇다. 다섯 개 부대 중 중앙에 주력인 두 개 부대, 양 날개에 두 개 부대를 펼쳐 두고, 나머지 한 개 부대는 그 후방에서 소위 지원군 역할을 한다는 식이었다.
저래서는 빠른 낙성을 기대하긴 힘들다. 정면공격을 하겠다면 네 개 부대를 투입하고, 일 개 부대만 지원으로 돌리면 된다. 험한 끝을 보겠지만, 그래도 시간을 질질 끌어 양측의 피해를 늘리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편월의 생각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편월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 이상 곽준방의 병법을 볼 것 없다 싶어서였다.
여전히 주변엔 부상당한 잡가군이 널브러져 있었고, 성한 병사들이 그들 사이를 누비며 치료를 하느라 분주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저들을 내성으로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데…….’
최후의 승리, 전쟁의 대미를 찍는 함성을 올리는 것은 누가 뭐래도 내성의 망루다. 편월은 잡가군 모두를 그곳까지 데려가고 싶었다.
그런데 공격은 뭉그적거리기만 하고, 그사이에도 중상을 입은 잡가군은 하나 둘 죽어 나간다. 곽준방의 전법이 마음이 들지 않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다 편월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다시 공격군들의 진용으로 눈을 돌렸다. 동시에 그의 고개가 미세하게, 그리고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래서 이런 건가?’
침사성이 동문을 깨뜨릴 때 잡가군은 별다른 진용을 갖추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몸에 익은 대로 공격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그 결과가 지금 편월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오천에는 못 미친다지만, 그 많은 인원 중 멀쩡한 자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다.
‘광운이 얘기했던 병법이란 게 바로 이런 걸까?’
다시금 공격군의 배치를 눈여겨보며, 편월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잡가군이 보다 제대로 된 진용을 갖추고 공격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낙성되는 시간은 훨씬 길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피아간에 그처럼 많은 인명 손실을 냈을까 하는 질문에 이르러 보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편월은 다시 공격군들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정면의 두 개 부대 중 하나가 좌우 중 어느 쪽으로 빠지면, 후미에서 지원하던 부대가 그 자리에 투입된다. 양 날개 쪽에서 움직이던 두 개 부대 역시 교대로 후미의 지원으로 빠지고…….
‘저렇게 하면 우리 편의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겠군.’
지금의 편월은 스스로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 아침에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깨닫기엔 아직 너무 어렸다. 잡가군의 신뢰에 보답해야 된다는 책임 의식도, 또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답답하더라도 병법에 따르는 게 좋다는 자각도, 아직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뇌리 깊숙이 새겨진 건 사실이었다. 당장 부상당한 잡가군 모두를 내성 망루에 데려가겠다는 것만 해도 대장으로서 책임감의 발로였다.
돌연 앉아 있는 편월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군가 그 앞에 와서 섰다는 의미였다.
“뭐야?”
우선 소리부터 지르고, 나타난 자를 본 편월은 내심 뜨끔했다. 한쪽 팔이 잘린 지두룡이 서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이대로 계실 거요? 금방이라도 성문이 깨질 것 같은데.”
“일 없어! 우린 구경이나 하다가 천천히 들어갈 거야.”
“그렇다면 자원자들만이라도 싸우게 해 주시오. 강숙 대장을 모시고 한바탕 잡가군의 위용을 보여 주겠소.”
“그 몸으로?”
말해 놓고 편월은 또다시 뜨끔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입에서 튀어 나가 지두룡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 같아서였다.
‘말도 함부로 내뱉을 게 아니군.’
“오기 전에 말씀드렸소. 난 오른손잡이요. 그러니 무기를 휘두르는 데는 하등 지장이 없소.”
“그래서? 한칼 휘두르고 나서, 그다음엔?”
“답답하군! 싸움에 가담시키지 않을 거면 애당초 왜 데리고 왔소?”
“다 생각이 있어. 그러니 가서 푹 쉬어 둬. 막상 움직일 때 낑낑대지 말고. 그리고 강숙을 불러!”
생각이 있다는 데야 지두룡도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다시 물러가며 대신 부름을 받은 강숙이 표정 없는 얼굴로 편월 앞에 와 섰다.
“네가 꼬드겼어?”
“꼬드겨? 뭘 말이오?”
다짜고짜 내지르는 편월의 말에 강숙이 뚱한 얼굴로 되물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태도였다.
“맹아와 지두룡이 설치는 거 말이야!”
“그야 그들은 병사고, 더구나 잡가군이니 싸우려 들지 않는다면 도로 이상한 일이 아니겠소.”
“하여튼 더 이상 꼬드기지 말고 내 명령을 기다려. 돌아가!”
“그런데 정말 싸움엔 가담하지 않을 거요?”
“꺼져!”
가라는데도 한 번 더 질문을 던진 강숙에게 편월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사실 지금 누구보다 싸우고 싶은 사람은 편월 자신이었다. 공격군의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내성에 돌입하고 싶었다.
그걸 편월은 잔뜩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명령 한마디에 죽음까지 불사하는 부하들 목숨의 무게를 비로소 조금은 알 것 같아서였다.
여전히 공격군과 농성군 사이에선 밀고 당기는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반 각도 버티지 못할 거야.’
사시에 시작된 공격이 이제 오시로 접어들려는 중이다. 정오쯤이면 막주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리란 게 편월의 생각이었다.
다시금 하늘로 시선을 던진 편월은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날짜로는 벌써 동짓달, 그러나 남국의 태양은 고도를 높일수록 갑옷으로 감싼 몸을 후끈하게 만들었다.
‘지금쯤 영욱성엔 벌써 눈이 내렸을 텐데.’
차가웠던 눈의 기억으로 더위를 달래며, 한편으론 유난히 추위에 약한 유화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때,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함성이 주변을 진동시켰다.
편월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깨졌다!’
예상보다 훨씬 빨랐지만, 이건 분명히 성문이 깨져 공격군이 바야흐로 내성으로 돌입하고 있다는 신호에 다름 아니었다.
“두건득, 서진청! 모두 준비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내성으로 들어간다!”
“존명이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건득은 반 장난스럽게 제꺽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두건득은 분명히 편월의 속내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까지 올 때는 보이지 않던 들것이며 수레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부상병을 옮길 수단으로 마련한 것들이 틀림없다.
웃으며 그것들을 지켜보았지만, 편월은 또 한차례 따끔한 무언가가 가슴을 찌르는 걸 느꼈다.
‘광운이 뭘 생각하는지 아무도 몰랐었는데. 나도 그랬었고.’
바로 이 점이었다. 비록 어리다지만, 그동안 광운이 어떻게 적을 기만하고 이용하는지 익히 봐 온 터였다.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아군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아하!’ 하며 이마를 쳤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두건득은 마치 자신의 배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준비를 갖춰 두고 있었다.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일까?
“끝났소, 대장! 곧장 출발할 거요?”
“좋아. 출발해! 하지만 성문 밖에서 대기한다. 먼저 돌입한 부대가 성문 주변을 정리한 뒤에 우리가 입성한다!”
“존명이오!”
재차 장난스러운 대꾸를 하며, 두건득은 대기하고 있던 잡가군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 행위에 있어 편월은 곽준방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로부터 잡가군은 아무 곳에서나 싸워도 좋다는 허락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처음 침사성 동문을 출발했을 때보다는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기묘한 행렬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웃지 않았다. 심지어 공격군은 잡가군의 행렬이 접근하면 길을 비켜 주기까지 했다.
성문 안쪽에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악이 받친 고함 소리, 죽이고 죽어 가는 자들이 내지르는 처절한 단말마 등, 그저 듣고 서 있는 것만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때 돌연 강숙이 편월을 제치고 맨 앞으로 나서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보라! 여기 파양주 잡가군 대장 편월이 왔노라! 그 용맹한 이름을 귀로 들어 아는 막주군이 있으면 지금 당장 투항하라! 거역하는 자는 일거에 짓밟아 놓을지니, 때를 놓치지 말고 모두 투항하라!”
한마디로 이건 강숙의 공갈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너덜거리는 잡가군을 이끌고 어떻게 전투를 치른단 말인가?
강숙인들 그 점을 모를까. 그의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이쯤 되면 편월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게 뻔하다. 아무리 상징적인 입성이라지만, 그래도 전투가 완전히 끝난 뒤에 들어가면 맥이 풀릴 수밖에 없다. 그 전에 돌입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과연 강숙의 계책은 그대로 먹혀들었다. 전쟁에 관한 것이라면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을 발휘하는 편월인지라, 싱긋 웃으며 돌입의 명을 내렸던 것이다.
“와아-!”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의외로 강숙도 맹아도 아니었다. 한 팔을 잃은 지두룡이, 과연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싶은 박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그대로 달려 들어갔다.
“이 번 돌입, 주개!”
그 뒤를 이은 건 한쪽 발로 껑충거리며 달려간 주개였다. 그의 손엔 창이 잡혀 있었지만, 그건 무기라기보다는 지팡이의 역할밖에 수행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뒤에야 강숙과 맹아가 들어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상병을 부축하거나, 그들이 탄 수레를 끌고 들어갔다. 맨 마지막은 편월이었다.
“전령이오!”
편월이 내성으로 들어가자마자 맹아가 낯선 자를 한 명 끌고 와 바닥에 무릎 꿇렸다.
“어디서 온 거야?”
“목철린!”
“뭐?”
어디 공격군 대장 중 한 명이 보낸 전령이려니 생각했던 편월은 깜짝 놀라 다시 무릎 꿇고 있는 자를 보았다. 확실히 막주군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비록 창끝을 서로 맞대고 싸우는 적이라도 전령은 통과시켜 주는 게 관례다. 적이 항복할지도 모르고, 또 다른 중요한 전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예컨대 휴전을 청한다든지 하는…….
“용건은?”
놀란 표정을 황급히 지우며 편월은 짐짓 굵은 목소리를 가장해 물었다. 얼굴 표정으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우리 주공께서 개인적으로 파양주 잡가군의 대장을 뵙고 싶다 하셨소.”
“이유는?”
“침사성 동문 공격 시에 보여 준 용맹이 남달랐다면서,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잔 나누자고 하셨소.”
“장소는?”
“조양대釣陽臺! 내성의 가장 가운데 있는 건물이오.”
“시간은?”
“빠를수록 좋을 것이오. 낙성이 임박했다고 보고 조양대로 가신 주군이시니… 아!”
전령은 그제야 편월의 얼굴을 본 모양이었다. 파양주에 귀신같은 꼬마 장군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니 그건 하나의 경이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곧 간다고 전해라. 서진청은 전령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바래다 주도록.”
편월의 말투는 무뚝뚝했다. 자신이 어리다는 걸 알아본 전령을 의식한 탓이었다.
“존명!”
그 점을 눈치 챈 서진청 역시 극도로 정중한 군례를 갖추고 전령을 데려갔다.
“정말 갈 거요, 대장?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입성한 후에도 싸움에는 가담하지 않고 편월의 곁을 떠나지 않던 두건득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적장의 초청을 거부할 수도 없잖아? 그것도 칭찬을 하면서 말한 건데.”
“칭찬받는 게 그렇게 좋수?”
“좋지! 그것도 적으로부터 받은 칭찬이야. 그게 어디 쉬운 일이야?”
말은 어린아이처럼 하면서도 편월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이었다.
“나도 같이 가겠수!”
행여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두건득이 따라가겠다고 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맹아가 좋아. 맹아를 불러.”
“저렇게 설쳐 대는 놈을 어떻게 부른단 말이오?”
말과 함께 두건득은 한 곳을 가리켰다. 지두룡과 보조를 맞춘 맹아가 악귀처럼 설치며 막주군을 마구 베어 넘기고 있는 게 보였다.
“불러와. 나를 알고 부른 적장이라면, 맹아와 같이 가는 게 좋아.”
편월의 말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자신이 어리다는 걸 익히 알고서 부른 목철린이기에, 어린 맹아와 더불어 가는 게 좋다고 여긴 것이었다.
맹아를 부르러 가면서도 두건득은 연방 혀를 찼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도무지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2
“오! 왔구만, 왔어! 잘 왔소. 자, 여기 앉으시오.”
편월과 맹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목철린은 그 청수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반가이 맞았다.
이미 무장 차림이 아니다. 주변을 경계하듯 둘러서 있는 그의 부하들은 엄중한 갑옷 차림이었지만, 정작 목철린은 그 얼굴에 어울리는 수수한 평복이었다.
그 모습에서 편월은 뭉클한 뭔가를 느꼈다. 비적단 출신이라기에 구레나룻을 거칠게 기른 험상궂은 얼굴로만 생각했던 탓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패전한 장수가 흔히 보이는 초조함이나, 반대로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릴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철린은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글방에 들어앉아 책이나 읽는 게 어울릴 듯한 외모였고, 패전 뒤의 죽음을 앞둔 사람이 갖기 마련인 들뜬 기색도 전혀 없었다.
“어리다고 들었지만, 술은 한잔 할 수 있겠지. 자, 받으시오. 막주 특산인 청련주淸蓮酒요.”
제법 큼직한 잔에 따른 술은 푸른 빛깔이 선명한, 조금 걸쭉해 보이는 액체였다.
“먼저 시음을!”
잔이 채워지자마자 편월을 따라온 맹아가 나섰다. 혹시 독이 들어 있을지 모르니 자신이 먼저 마셔 보겠다는 뜻이었다.
“물러서라, 맹아!”
편월은 맹아를 꾸짖었다. 패전과 죽음을 앞둔 적장이 마지막으로 마련한 자리다. 설사 독배라 해도 부하에게 시음을 시킨다는 건 커다란 실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니오, 아니야! 과연 좋은 부하로군. 자, 이걸 선물로 내리지. 내 애검인 절풍검折風劒일세. 변방을 떠돌 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던 거지만, 아직은 쓸 만할 걸세.”
맹아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목철린은 곁에 세워 두었던 검을 들어 선뜻 건네주었다.
맹아로선 어리둥절해지는 순간이었다. 적장의 초청이었고, 또 와 본 자리엔 백여 명의 적들이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내심 마음을 단단히 다지며, 적의를 불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다름 아닌 바로 그 적장이 자신의 행동을 칭찬하며 애검을 선뜻 건네준다. 어찌할 바를 몰라 편월의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
“감사히 받아라. 혼이 담긴 물건이니 소중히 간직하고.”
편월의 말에 따라 절풍검을 받는 맹아는, 이번엔 다른 이유로 얼떨떨해졌다.
‘대장이 달라졌다.’
확실히 그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만 해도 싸우지 못해 툴툴거리던 자신을 상대했던 편월은 이렇게 어른스럽지가 못했었다. 표정은 평소보다 굳어 있었지만, 말투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막상 목철린을 대하고 있는 편월은 정규군의 여느 장수와 다른 바 없는 언행을 보이고 있다. 과연 같은 사람인지, 맹아는 몰래 눈을 비비고 다시 봤을 정도였다.
“허허허! 장수만 어린, 아니 젊은 줄 알았는데, 그 부하도 이처럼 젊다니. 앞으로 파양주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 갈 것이오.”
호탕하게 한바탕 웃고 나서 목철린은 잔을 들었다.
“자, 듭시다! 오늘 동문을 공격할 때 귀하의 군병은 참으로 용맹하더이다. 그 용맹에 올리는 잔이오.”
“들겠습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앞에 놓인 잔을 단숨에 쭉 비웠다.
편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까지 술을 마셔 본 적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청련주는 그가 마시기엔 너무 독했다.
그래도 전혀 내색은 않은 채, 이번엔 편월이 술병을 들었다. 순전히 옆에서 광운이나 다른 사람이 술좌석에서 하던 걸 흉내 내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어색하고 서툴기 짝이 없었지만, 목철린은 정중하게 잔을 받았다. 나이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한 명의 적장으로서 편월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투항하시라고 한다면… 거절하시겠지요?”
“투항이라… 허허허!”
편월의 말을, 목철린은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사주의 주인인 천세기 일족을 풍소성에서 그토록 잔혹하게 죽인 내가 투항해서 살기를 바랄 것 같소?”
“그렇다면 가족들이라도…….”
“내 가족들도 지금쯤이면 저 위에서 이 술을 마시고 있을 게요. 거기엔 독이 들었겠지만.”
오 층으로 된 조양대의 위쪽을 눈으로 가리키며 목철린은 담담하게 내뱉었다. 모든 것을 포기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고 말투였다.
마치 그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철린은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나는 변방을 떠돌던 비적이었소. 그랬던 자가 이만큼이나 되었으니, 죽을 자리치고는 멋진 곳 아니겠소. 허허허!”
또 한차례 웃음을 토하며, 목철린은 편월이 채운 잔을 들어 단숨에 쭉 비웠다.
편월도 재빨리 따라 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봐 왔던 술좌석의 사내들이 모두 그렇게 했으니 말이다.
“예로부터 이 막주는 정해진 주인이 없었소. 힘 있는 자가 빼앗아서 차지하면 그만이었지. 그래서 백성들의 기질도 거칠기 짝이 없소. 다스리기는 힘들겠지만, 그들의 마음만 얻는다면 세상에 구하기 힘든 강병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오.”
다시 편월의 잔을 채우며, 목철린은 새삼스럽다는 듯 주변에 한 바퀴 눈길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막주를 얻은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었군. 이젠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 때도 됐지.”
마치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듯한 목철린의 술회가 이어지자, 둘러선 막주군 사이에서 누군가 억누른 흐느낌을 토하고 말았다.
“어허! 진객珍客이 계시는 자리다. 못난 꼴은 보이지 마라!”
목철린이 가볍게 나무랐지만, 어느새 그 흐느낌은 모두에게로 번져 누구 할 것 없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소리는 비록 크지 않았지만, 투구 속의 눈을 보면 온통 젖어 있을 게 분명했다.
“허허, 이래서야 제대로 된 작별도 못 하고, 못난 꼴만 보이게 된 모양이오. 오늘 장군을 부른 건 특별히 드릴 게 있어서였소. 자, 받으시오.”
돌연 목철린은 서둘렀다. 자신은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감상에 젖은 부하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여 주기 싫다는 게 역력히 느껴졌다.
“정북후의 인수印綬요. 가겸후의 농간으로 받은 거지만, 난 딱히 그렇게만도 생각지 않소. 다 이내 몸의 욕심 탓에 사주를 멸하고, 파양주를 넘봤소. 난 오늘에야 깨달았소. 이 몸이 망하고, 막주가 파양주에 귀속되는 건 그 욕심에 대한 응보라고 말이오. 허허허! 자, 듭시다. 본의는 아니지만 이게 마지막 잔이 되겠구려.”
잔을 마주 들긴 했지만, 편월은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런 경우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배운 바가 없었다.
“안녕히…….”
다만 이 말만 간신히 내뱉고는 목철린이 내놓은 인수를 집어 들었다.
“사양할 건 없소. 아직 내겐 저만한 병력이 남았으니, 마음껏 공격하시오. 이 아침에 동문을 공격했던 그 용맹을 다시 한 번 보고 싶구려.”
일어선 편월에게 목철린이 호방하게 말을 붙였다.
편월은 그저 정중한 군례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적이라면 무조건 죽여야 할 상대라고만 알고 있던 그에게, 또 다른 적의 모습이 생생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몸을 돌리고 몇 발짝 걸었을 때, 편월은 왜 내성을 공격하기 전에 쌍방이 그처럼 번거로운 예의를 갖췄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백구십팔, 채 이백도 되지 않는 병력이었다. 그중엔 지두룡이나 주개 같은 중상자도 섞여 있었다.
그래도 편월은 잡가군만으로 막주군이 마지막으로 웅거하고 있는 조양대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그가 목철린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였다.
‘백 명이면 된다.’
마지막까지 목철린과 함께 있던 막주군의 숫자가 그 정도였다. 이쪽도 더 이상 몰고 간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긴, 더 데려가고 싶어도 사정이 허락지 않았다. 직접 공격에 가담시키지 않을 구십팔 명은 부상자들을 이끌고 조양대로 가야 했으니까 말이다.
처음 그 뜻을 비쳤을 때, 광운은 물론 곽준방도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편월은 억지로 밀어붙였다. 잡가군이 어디서 싸우든 마음대로 결정하라고 했던 곽준방의 말을 물고 늘어졌다.
그 결과 이처럼 잡가군만의 조양대 출격이 이루어졌다.
따지고 보면 출격이라는 말도 웃긴다. 서로가 빤히 보이는 곳에서 대치하고 있으니, 그저 출전이라고만 해도 너무 거창한 표현일 수밖에 없었다.
“공격!”
여전히 표정을 감춘 무뚝뚝한 얼굴로 편월은 명을 내렸다. 예전처럼 고함을 지르는 게 아니라, 그저 조용히 내뱉었다.
그러나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싸워라!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다! 적도, 아군도!”
“자, 공격이다! 사양이나 양보는 필요 없다! 사력을 다해 싸워라!”
강숙이 가장 먼저 수비 형태를 갖추고 있는 막주군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어깨엔 발목 잘린 주개가 매달려 껑충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맹아도 뒤지지 않았다.
“군도옥의 목을 받은 맹아가 여기 있노라! 이름 있는 자라면 썩 나서서 내 칼을 받아라!”
그 역시 지두룡과 함께 적진을 향해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 뒤에야 편월도 소질풍을 출발시켰다.
‘목철린은 싸우지 않을 거야.’
일부러 이별의 자리를 만들어 정북후의 인수까지 넘겨준 목철린이다. 그 자신이 직접 창을 들고 싸움판에 뛰어들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어쩌면 예의 그 탁자에 앉아 얼굴 가득 청수한 미소를 띠고 청련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충분히 그렇게 자신의 최후를 지켜볼 만한 인물이었다.
“막아라! 주군께는 한 발짝도 접근시키지 마라!”
“주군의 마지막 시간이시다! 적병들의 발길로 어지럽힐까 보냐!”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막주군인지라 말려도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강숙과 맹아에 맞서 창을 겨누며 선두가 왈칵 밀려 나왔다.
순식간에 강숙과 맹아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 둘이 무모한 용맹으로 날뛰는 형이라면, 막주군은 주군의 마지막 자리를 정갈하게 하기 위해 목숨을 건 자들이었다.
어느 쪽의 각오가 더 단단한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땐, 숫자가 얘기를 한다. 그 점에 있어선 강숙과 맹아가 분명 열세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의외의 분전을 한 건 지두룡이었다. 한쪽 팔로만 휘두르는 박도에 무슨 위력이 있을까만 그 처절한 투지에는 적들도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주개도 그냥 장식으로 따라간 건 아니었다. 한쪽 다리로 이리저리 껑충거리며, 수중의 창대로 적을 후려친다거나 마구 찍어 넘겼다.
당연히 부상도 그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입었다. 제 한 몸 가누기도 어려운 처지에 박도와 창을 휘두르고 있으니, 애당초 수비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몸에 하나의 상처가 생길 때마다 정확하게 되갚아 주었다. 마치 적과 나, 어느 쪽의 목숨 줄이 더 질긴지 시험해 보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지두룡과 주개를 죽이지 마라! 네놈들의 손발은 얼음 덩어리냐? 공격, 공격하라!”
돌연 공격하고 있던 잡가군 중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송지였다.
송지는 고함만 지르는 걸로 끝내지 않았다. 뒤에 따라붙은 적병이 내지른 창에 등에 부상을 당하면서도 그는 곧장 지두룡과 주개가 고전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이십여 명의 잡가군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모든 광경을 보면서도 편월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더 이상 내릴 명은 없었다. 초의 마지막 심지가 타들어 갈 때처럼, 각자가 서로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면 그만이었다.
소질풍은 천천히 싸움터로 접근해 갔다. 그 뒤엔 부상병들을 부축하거나 태운 수레가 줄줄이 따라왔다.
편월도 이 싸움엔 직접 가담할 생각이 없었다. 조금 전 목철린은 자신을 한 명의 장수로 대우해 줬다.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만 한다.
“적을 쫓지 마라! 쫓지 마! 주군께 접근하는 적들만 물리쳐라!”
막주군 중 누군가가 발악에 가까운 외침을 발했다. 이제 그 숫자가 훌쩍 줄어 갓 서른 명 남짓한 그들로선, 최후의 최후까지 파양주군을 목철린 곁에 접근시키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막주의 호기대장護旗大壯 고강, 파양주의 편월 대장에게 도전이오!”
그렇게 집결하는 막주군 사이에서 한 명이 튀어나와 편월의 말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름을 밝힌 대로 그는 고강이었다.
“그 칼은 이 몸이 받겠다!”
“이름을 밝혀라!”
“파양주 잡가군의 오강!”
요구에 따라 이름을 밝히며, 오강은 싱긋 웃었다. 자신과 고강의 이름이 같다는 것에 묘한 친밀감이 들어서였다.
그 점은 고강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남국의 강한 햇볕에 탄 검은 얼굴에 새하얀 이가 드러나는 웃음을 지으며, 창을 한차례 쭉 훑었다.
“좋다. 상대해 주겠다!”
“오오, 얼마든지!”
그렇게 두 사람은 맨바닥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서로 얽혀 들었다.
그것에도 편월은 관심이 없었다. 오직 목철린이 있는 곳으로 소질풍을 천천히 몰아갈 뿐이었다.
“길을 열어라! 파양주 잡가군의 편월 대장이 나가신다!”
편월의 뒤를 따르던, 그나마 성한 잡가군 중 몇몇이 소질풍 앞으로 나서며 고함을 질렀다. 자신들이 싸우겠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창 공격하고 있는 아군에게 들으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 고함을 들은 잡가군들은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편월이 가는 길 쪽으로만 집중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사실 그건 전혀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남은 막주군은 고작 서른 명 정도, 한차례 왈칵 밀어붙이는 것만으로도 간신히 네댓 명이 남았을 정도였다.
그 네댓 명도 사력을 다해 목철린 주변을 감쌌다. 자신들의 시신을 밟지 않고는, 결코 그들의 주공 곁에 단 한 명의 적병도 들이지 않겠다는 각오가 단단히 서린 얼굴들이었다.
후미에서 오강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막주의 호기대장 고강의 목을…….”
처음엔 우렁찼던 오강의 목소리는, 그러나 차마 뒤를 잇지 못했다. 성은 다르지만, 같은 이름을 가졌던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말을 하려니 갑자기 목이 꽉 메었기 때문이다.
“막아라! 놈들을 더 이상 접근시키지 마라!”
아마 막주군도 오강이 고강의 목을 베었다는 외침을 들었으리라. 그 바람에 그들의 전의와 적개심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래도 편월은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앞에 나섰던 잡가군은 점차 막주군을 압박해 들어갔고, 마침내 두 진영의 대치는 창 한 자루의 간격만 남기게 되었다.
거기서 편월은 소질풍을 멈췄다.
“물러서라!”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명을 내린 후, 편월은 말에서 내렸다. 적장이 최후를 마치는 자리다. 말에 탄 채 그걸 볼 수는 없었다.
“그만 됐다!”
때를 같이해 목철린도 네댓 명 남은 부하들에게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라고 명했다.
“잘 싸워 주었소. 끝까지 이 몸의 체면을 세워 주어 고맙게 생각하오.”
대꾸하는 대신 편월은 정중한 군례를 갖췄다. 달리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지도 못했다.
“자, 이제 슬슬 죽어야겠는데… 잘 봐 둬라! 바로 이게 패한 무장이 죽는 방법이다!”
마지막 말은 부하들에게 한 듯 목철린은, 사람들이 ‘앗!’ 하고 놀랄 사이도 없이 품에서 소도를 꺼내 그대로 자신의 목을 그어 버렸다.
엄청난 양의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사람의 몸속 어디에 그처럼 많은 피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주공!”
막주군 중 한 명이 무너지는 목철린의 시신을 받아 땅에 길게 눕혔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전포를 벗어 그 위에 덮어 주었다.
“우리도 주공 뒤를 따라, 지옥에서도 충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장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꿰뚫었다. 다른 자들이 그 뒤를 따랐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편월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말릴 일도 아니었다. 죽어서까지 주공에게 충성하겠다는 병사들은 차라리 죽게 놔둬야 한다. 그게 예의다.
이제 더 이상 적들의 움직임은 없었고, 잡가군 역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목철린과 막주군의 최후가 너무나 비장했기 때문이다.
“기치를 세워!”
나직하게, 그리고 깔깔하게 메마른 음색으로 명을 내린 후 편월은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 잡가군의 기치가 세워졌다. 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엄청난 피에 전 그 깃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왔던 때와 같은 모습으로 줄줄이 편월의 뒤를 따랐다. 잡가군 중 누구도 승리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함성을 지르지 않았고, 어떤 누구도 땅을 향한 시선을 들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누더기처럼 펄럭거리기만 했다.
남국의 강렬한 햇살 아래, 찢어진 병사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걸어가는 모습은…….
다 해진 누더기들의 거친 펄럭임이었다.
* * *
사망 일만 칠천삼백구 명, 중경상 오만 이천육백칠십이 명, 그 외에 말과 무구, 양곡, 건초, 각종 부수 기재에 대한 소비가 빼곡히 적혀 마용승에게 보고되었다. 바로 막주와 칠 년 전쟁을 치른 파양주의 대차대조표였다.
그리고 막주 원정군이 파양주의 영욱성으로 개선한 것은 그해도 저물어 가는 섣달 열이레였다.
3
영창팔년 정월 스무하루.
개선군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과, 곧이어 닥친 원단의 흥청거림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영욱성엔 새로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름 아닌 막주전의 총결산, 논공행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논공 그 자체는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 막주 원정군의 총대장이랄 수 있는 곽준방이 일등, 지원군을 이끌고 간 광운이 잡가군으로선 파격적으로 이등, 나머지는 각기 불만 없이 자기에 대한 행상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편월에 대한 처분이었다. 제장들이 하나같이 그의 무죄와 더불어 오히려 상을 줘야 한다고 했지만, 마용승은 한사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군법은 자명하고, 그 법은 엄격히 시행되어야 하오. 편월 및 오백의 이탈병 중 생존자에 대한 처벌을 상신하시오.
논공행상이 시작된 첫날, 마용승으로부터 내려진 지시였다. 하도 엄격한 말투라 누구도 선뜻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게다가 편월과 오백의 이탈병 중 생존자들은 집무창에 연금된 상태로 있었다. 말이 좋아 연금이지, 거의 투옥된 죄수의 신분이나 다름없었다.
이 경우 마용승에게 직접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대장군 직을 맡고 있는 호유진을 빼놓고선 달리 없다. 곽준방은 벌써 몇 차례 언급을 했음에도 모두 거절을 당해, 아예 입을 닫아 버린 상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호유진도 그 점에 대해선 애써 외면하고 있는 눈치였다. 막주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는 자격지심 탓인지, 아니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곽준방에 대한 사양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바람에 답답해진 건 광운이었다. 잡가군이라기보다는 지원군의 총대장으로서 논공행상에 참석하고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편월의 편을 들어 줄 수 없는 입장이기도 했다.
“서 선생, 잠깐 뵐 수 있겠소?”
마용승이 자리를 비운 사이, 광운은 서수를 밖으로 불러냈다. 공식적으론 말하기 힘드니 사적으로 그에게 부탁해 보려는 것이었다.
“편월에 대한 얘기라면 아예 꺼내지도 마시오. 그 문제에 대해선 주공께서 너무 단호하시니…….”
“그러니까 마 성주의 마음을 알고 싶은 거요. 왜 그렇게 편월을 미워하시는지. 따지고 보면 이탈을 한 것도 승리를 위한 거였소. 그 점은 성주께서도 잘 아시지 않소.”
“잘 아시지요. 하지만 주공은 삼십만에 달하는 정병을 거느리고 계시오. 또 이번에 막주까지 병합했으니, 내일은 사십만이 될지 오십만이 될지… 아무튼 그 많은 병사들을 통솔하기 위해서라도 편월의 무단이탈은 용납하실 수 없을 게요.”
“흐음…….”
광운으로선 긴 침음성을 토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군에 대한 일벌백계의 차원에서 편월과 이탈병들을 다스리겠다니 딱히 반박할 길도 없었다.
사실 마용승으로선 그편이 훨씬 이득이다. 정규군은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는 건 물론, 최소한 편월과 이탈병들에 대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래도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광운이었다. 지금으로썬 서수 말고는 달리 부탁할 사람도 없었다.
“뒤에 공을 세웠다지만, 전시에 전장을 이탈했다는 게 워낙 큰일이라… 게다가 주공의 진노도 만만찮으니…….”
서수는 했던 얘기를 반복했다. 고개까지 가로젓는 품이 정말로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광운은 무언가 암시를 느꼈다. 두 번씩이나 꼬리를 길게 늘이는 서수의 말에서 뒤가 있음을 예민하게 감지한 것이다.
“서 선생, 부탁이오! 이 목숨을 달라면 드릴 수도 있소이다. 그러니 편월의 일만은 어떻게 좀 해결해 주시오. 아니 죄를 완전히 씻어 달라는 건 아니오. 다만 그에게 예전의 잡가군 신분을 주어 가고픈 곳으로 갈 수 있게만 해 주시오. 부탁이오!”
그답지 않게 광운의 말은 길었다. 절박해지니 어쩔 수 없었다.
“광운 장군께선 정말로 편월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셨소?”
“말씀하실 것도 없는 일!”
서수의 말에서 일말의 희망을 느낀 광운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이 몸이 적극 추천할 테니, 광운 장군께서 당분간 막주를 다스려 보시는 게 어떻겠소? 주공께서도 우선 단목우檀木宇를 파견해 두기는 했지만, 그로선 역부족이라 불안해하고 계시오.”
“그런데 그것과 편월의 일이 무슨 상관 있단 말이오?”
“지금 주공의 고민은 새로 얻은 막주의 안정이오. 거기다 수군을 양성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그걸 무난히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이 몸은 광운 장군을 보고 있소이다.”
“나 말고도 정규군에 좋은 장군들이 많이 계시오. 그분들 중에 물색하시고, 지금 우린 편월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오.”
“이 몸도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오. 정규군의 장군들은 곧바로 다른 임무가 내려질 것 같소. 그러니 눈 딱 감고 내 말대로 하시오.”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오. 내가 침사성으로 가는 게 어떻게 편월에게 덕이 된단 말이오?”
“편월은 따로 할 일이 있소.”
“그게 뭐요?”
“허주를 공략하는 거요.”
“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당장 허주를 떨구라는 건 아니오. 그건 애당초 되지도 않는 얘기고. 당분간만, 그러니까 광운 장군께서 막주로 내려가 수군을 양성할 동안 조환의 군사들만 못 박아 두면 되는 거요. 그렇게 두 사람이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인다면, 이 몸이 나서서 한번 중재해 보리다.”
자신 있게 말을 맺는 서수를 보며, 광운은 다시 입을 닫았다.
솔직히 서수의 제안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편월과 떨어져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편월에게 시키려는 일도 너무 위험하다. 말이 좋아 조환을 묶어 두는 것이지, 한창 기세를 뻗치고 있는 허주군을 상대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막주에서 수군을 양성한다는 건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남쪽으로 길쭉하게 튀어나온 지형 탓에 침사성 주변의 삼면은 온통 바다다. 배를 띄운다면 허주나 증두신이 지배하는 강국으로 곧장 병력을 투입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목철린은 바로 그 점을 간과했다. 아니 드넓은 변방을 누비던 비적 출신이라 체질적으로 물을 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에 비해 서수는 그 점을 잘 꿰뚫어 보고 있다. 정병 삼십만을 갖춘 파양주에서 수군까지 겸비된다면 그야말로 마용승은 날개를 단 듯 세력을 뻗칠 수 있으리라.
그러다 문득 광운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한 것을 깨닫고는 실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서 선생의 말씀은 애당초 실현될 수 없는 얘기요. 허주의 조환을 묶어 두자면 최소한 일만의 군병이 필요할 거요. 마 성주가 그만한 군세를 편월에게 맡길 거 같소?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겠소?”
“그 점이라면 이 몸이 주공께 말씀드려 잡가군 오천 정도를 마련해 보겠소이다.”
“잡가군 오천?”
“그렇소. 현재 주변 정세를 감안하면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소이다.”
“설마 그 병력으로 허주군을 묶어 둘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요?”
“그거야 편월이 하기 나름 아니겠소. 오천이라지만, 쓰기에 따라선 그 열 배, 스무 배로도 활용할 수 있을 테니.”
“말도 안 돼!”
“하지만 그게 이 몸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책이오. 어쨌든 지금은 주공의 마음을 돌리는 게 급선무니, 그러자면 뭐든지 보여 줘야 할 것 아니겠소.”
광운은 다시 말을 잊었다. 어쨌든 칼자루는 마용승이 쥐고 있다. 하다못해 그가 발행한 통행증이 없으면 그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의 통행은 물론, 설사 무사히 빠져나간다 해도 다른 곳에서 잡가군 노릇은 할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산송장이 되어 살아가야 된다는 얘기다.
“편월과 얘기해 보겠소. 만나게 해 주시오.”
“그건 안 되오. 그랬다간 주공의 심기만 더 건드리게 될 뿐이오. 그러니 광운 장군께서 결정하시고, 편월에게 통고만 하도록 합시다. 순순히 따르겠다면 이 몸도 사력을 다해 주공을 설득해 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장담할 수 없소이다.”
“알겠소.”
광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 길로 주공을 뵙고 오겠소. 참! 광운 장군?”
몸을 돌리려던 서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광운을 불렀다.
“장군께선 죽영루에 기거하신다고 들었소. 이참에 그 죽영루를 집무창 내로 옮기는 게 어떻겠소? 그편이 장사에도 훨씬 도움이 될 거외다.”
“죽영루를?”
놀란 표정으로 되묻던 광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신이 서수의 말대로 침사성으로 가게 된다면, 죽영루에 있는 사람들을 인질 삼아 데리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단순히 막주라고 하지만, 그 안엔 침사성을 비롯한 큰 성만도 무려 일곱 개나 있다. 그 부성副城들이나, 그보다 작은 성들은 무려 서른 개가 넘는다.
물론 그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을 광운에게 주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성엔 딴 사람들이 들어갈 테지만, 침사성에 들어가 수군을 육성하려면 어쩔 수 없이 막주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일이 없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마용승의 입장에선 혹시라도 광운이 배신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죽영루에 속한 사람을 인질로 잡겠다는 건 그에 대한 대비책 중 하나일 게다.
“알겠소. 그 점도 돌아가는 대로 얘기해 두리다. 그보다는 편월의 일을 잘 부탁드리겠소.”
“맡겨 주시오.”
그 말을 끝으로 서수는 가벼운 예를 갖춘 후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광운의 눈엔 착잡한 빛이 가득했다. 서수의 말처럼 오천의 병력이라면 운용하기에 따라선 그 몇 배 이상의 효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도 우선은 먹고 입고 할 것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서수는 병참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아니 설사 지원을 해 준다 해도 정규군과 같이 작전을 하는 게 아닌 잡가군 단독의 움직임이라면 그 병참은 아무래도 허술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의지해 싸우다가는 어떠한 강병이라도 패배할 수밖에 없으리라.
‘송 대인을 찾아가 봐야겠군.’
거상인 송용조를 떠올리다, 광운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미 편월에게 오천의 잡가군을 딸려 허주로 보낸다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탓이었다.
‘하긴, 편월도 벌써 열세 살이고,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으니…….’
전장을 뒹굴며 자란 편월은 몸도 마음도 또래보다는 훨씬 숙성해 있다. 거기다 전쟁에 관한 것이라면 여느 장수들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한다. 이쯤에서 혼자 살아가도록 해 주는 게 좋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국난세이니만큼 언제까지나 자신이 돌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송용조를 찾으러 걸어가는 광운의 뇌리에, 오천으로는 병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사문기 공에게 어느 정도 병력이 있을 텐데.’
만약 송용조가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겠다면, 병력은 좀 더 모아도 괜찮을 터였다. 그중 사문기는 알게 모르게 상당한 병력을 이끌어 유랑하고 있었다. 그걸 광운은 자신의 소개로 파양주에 정착시켜 둔 터였다.
광운의 발길이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서수가 얘기했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지못한 표정으로 마용승이 허락하자마자, 영욱성 전역엔 잡가군을 모집한다는 방이 대대적으로 나붙었다.
그제야 광운은 마용승과 서수가 미리 계획한 일에 자신이 말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만큼 모든 게 너무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이미 자신은 허락을 했고, 그 얘기를 들은 편월은 아예 뛸 듯이 기뻐했으니깐 말이다. 오천 명을 이끄는 장수가 되어 혼자 전쟁에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벌써부터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일을 함에 있어 광운이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죽영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집무창 안으로 옮기라고 했을 때, 그녀는 아예 새파랗게 질려 버렸으니까.
그러나 그녀도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잡가군으로 떠돌 수밖에 없는 어린 편월의 장래를 생각해서도, 또 백오십여 명이 넘는 이탈병 생존자들의 구명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송용조와 만났던 일도 그럭저럭 좋은 결과를 낳았다. 거의 은퇴하다시피 한 송용조 대신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모용추가 편월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벌써 재정적인 문제는 해결이 된 셈이었다.
거기다 사문기를 만난 건 의외의 성과를 거두게 했다. 그와 몇몇 측근만이 영욱성 거주를 허락받았지만, 신분을 속이고 파양주에 스며들어 있는 옛 부하들이 천여 명을 상회한다고 했다.
광운은 그들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사문기는 흔쾌히 승낙했다. 허주의 일이 끝나는 대로 구 영토인 양원과 영림을 수복하는 걸 도와준다는 걸 조건으로, 그들은 편월에게 절대 복종하기로 했다.
그날로 여형은 길을 떠났다. 물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옛 부하들을 정해진 시일까지 모으기 위함이었다.
광운이 일을 여기까지 진척시키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고, 정월 스무나흘 날이 되자 비로소 집무창에 연금되었던 편월과 이탈병 생존자 백예순두 명이 풀려나왔다.
광운은 이들을 모두 죽영루로 데려갔다. 가뜩이나 이사 준비를 하느라 바쁘고 어수선한 곳으로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려갔으니, 죽영이 짜증을 내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은 포상은커녕 정해진 보수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자신이 이등 공훈으로 받은 것들을 이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려는 게 광운의 의도였다.
사실 광운은 이들이 아까웠다. 부상자들이야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내야겠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잡가군 중에서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을 그대로 편월에게 묶어 두고 싶었다.
어쨌든 그리 크지 않는 죽영루에 백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들어 죽영에게 좋은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집무창으로의 이사가 뚝딱 해치워졌다는 점이다. 부상자는 빼더라도, 백여 명의 장정들이 하나씩만 운반하니 그 많던 죽영루의 짐이 말끔하게 옮겨졌던 것이다.
그편이 광운은 편했다. 짐이 모두 빠져나가니, 그럭저럭 모두 수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겨우 하나 남은 탁자와 두 개의 의자에 광운과 편월이 앉았을 뿐 모두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는 않았다. 불만은 그만한 공을 세우고도 전혀 인정받지 못한 것이 훨씬 컸다.
그들을 보며 광운은 품속을 뒤져 커다란 봉투를 하나 꺼내 놨다.
“이 안엔 약간의 은표가 들어 있소. 만족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번 막주 정벌로 인한 노고를 달래 주시오.”
“돈 따위는 필요 없소! 그보다는 편월 대장이 곧 출정한다고 들었소. 그 때문에 파양주에서 다시 잡가군을 모집한다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광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사람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턴가 이탈병들을 대변하게 된 송지였다.
“그건 사실이오. 곧 편월은 오천의 잡가군을 이끌고 모처로 출병할 것 같소.”
“아-!”
광운의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웅성거렸다. 갑작스러운 열기가 후끈하게 좌중을 감도는 건 묘한 기대감이 작용한 탓이리라.
“부탁이 있소!”
돌연 송지는 광운과 편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 모두는 이미 편월 대장과 생사를 같이한 적이 있었소. 앞으로도 계속 그러고 싶으니, 이번 원정에도 우리를 꼭 끼워 주시오.”
“끼워 주시오. 부탁드리겠소!”
송지에 말에 이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거야말로 광운이 바라던 바였다. 그래도 입으론 다른 말을 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막주 원정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소. 휴식도 취해야 하고, 또 부상자들도 있으니…….”
“그런 걸 따졌다면 이런 부탁은 드리지도 않았소. 허락해 주시오. 편월 대장, 뭔가 한 말씀 해 주시오!”
광운에게 부탁하던 송지는 말머리를 편월에게 돌렸다. 그를 대장으로 해서 죽음의 능선을 같이 넘었으니, 거절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까닭에서였다.
그러나 편월은 무표정했다. 처음 출병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그 점을 마음에 걸려 하면서 광운은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부상자들은 어쩔 수 없소. 마음뿐인 성의지만, 이걸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시오.”
“그 무슨 말씀이오?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기도 전에 우린 창을 들고 편월 대장과 같이 싸웠소. 지금은 다 나았는데, 돌아가라니? 그럴 수는 없소이다!”
막주 원정에서 한쪽 팔을 잃은 지두룡이었다. 그 옆에 선 주개와 함께 결연한 표정으로 광운을 빤히 노려보았다.
광운은 편월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지 묻는 눈빛이었다.
편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에도 얼굴엔 일말의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알겠소. 그럼 백예순두 명, 확실히 잡가군에 편입되었소!”
“그냥 잡가군은 싫소이다. 지금 모집하는 자들과는 따로 편월 대장의 직속부대로 해 주시오!”
광운의 말에 송지는 또 다른 요구를 했다.
이 역시 광운이 은근히 바라던 바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송용조를 대신한 모용추가 그 경비를 지불해 줄지는 아직 의문이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공식적인 잡가군이 한창 모집 중일 때, 죽영루에선 벌써 백예순두 명의 편월 직속 근위대가 만들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