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침사낙일沈沙落日 (21/66)

침사낙일沈沙落日

1

비록 해자가 없는 성이라 해도 충차가 단 한 번 충돌한 걸로는 성문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효과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 한 번의 격돌이 성문 자체는 물론 성을 지키고 있던 막주군에게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이건 충분히 곱씹어 볼 만한 부분이다. 막주의 주성主城인 침사성이 해자도 없는, 조금 가장해서 말한다면 발가벗은 성인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부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얘기다.

비적 시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목철린은 늘 밖에서 적을 맞아 싸웠다. 침공을 당하는 것보다, 자기가 쳐들어가 땅을 빼앗고 노략을 하는 기질인 것이다.

그 같은 성격인 목철린에게 성이란 자기과시를 위한 하나의 장식물일 뿐이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부하들과 약탈해 온 물건을 나누고, 또 다음 전쟁을 위해 휴식을 취하는 곳에 불과했다.

그러니 성을 지을 때부터 해자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고, 당연한 일로서 여장이니 마면, 단루 따위는 그저 형식적으로 지어 둔 상태였다. 성벽이나 성문의 수리는 가끔 했지만, 그 역시 목철린의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지, 침입군에 대비한 건 결코 아니었다.

쿠웅-!

또 한차례 충차가 부딪쳤을 때, 목철린은 자신의 심장 역시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건 곧 평생에 걸쳐 이룩한 모든 기반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기도 했다.

그러나 목철린도 대륙의 남방을 장악했던 패자이자, 일생을 거칠 것 없이 살았던 풍운아였다. 패배는 인정할지언정 결코 굴복을 모르는 사나이였다.

으드득!

어금니를 갈면서 목철린은 오늘 이런 결과를 가져온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간인이 가져온 정보 탓이었다.

그래도 목철린은 그게 세작의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신들을 기호산으로 몰아 협공하겠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적의 장수가 뛰어났을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목철린은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심하게 질책하고 있었다.

‘반간계反間計 따위에 속다니…….’

반간계란, 말 그대로 역정보를 적의 간인에게 흘려 적이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걸 말한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지만, 워낙 흔한 수법이라 그만큼 간파되기도 쉽다.

그처럼 얕은수에 속아 목철린은 이 침사성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으니, 다른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쿠웅-!

그사이 파양주군의 충차가 다시 한 번 침사성 동문을 두들겼다. 이번엔 강철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역시 강철을 넣어 제작한 빗장이 심하게 휘어졌다. 다음번엔 틀림없이 성문을 깨뜨릴 것이다.

“성루에 있는 모든 병사들은 성문에 집결하라!”

목철린은 더 이상 성루에서 수비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기에 진즉에 다른 성문을 수비하고 있던 병사들도 모두 이쪽으로 집결하라는 명을 내린 상태였다.

그게 의미하는 건 딱 한 가지였다. 목철린은 이 침사성을 바로 자신의 관으로 삼을 결심이었다.

성루에 있는 부하들이 모두 내려간 뒤에도 목철린은 밖에서 공격하고 있는 파양주군을, 오만하게 버티고 서서 내려다보았다. 다음 돌격을 위해 충차들이 뒤로 썩 물러났고, 아직도 여기저기에선 아군들을 겨냥한 소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목철린은 문득 심한 요의尿意를 느꼈다. 비로소 전쟁의 참모습을 본 것 같아서였다. 천하를 위한다느니, 황제의 뜻을 받든다느니 입으로 지껄이는 말들은 한결같이 당당하게 치장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의 본질은 언제나 하나였고, 또 하나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인간의 욕심!

이 간단한 철칙을 패한 전쟁 끝에 죽을 결심을 했을 때야 깨닫게 된 자신이 혐오스러워 오줌이라도 갈기고 싶었다. 아니 그 간단한 것조차 여태 깨닫지 못하고 서로 죽고 죽이는 아비지옥을 그려 내고 있는 발아래 인간들에게 ‘자, 바로 이게 내 깨달음이다!’ 하고 크게 고함이라도 지르며 시원한 방뇨를 해 주고 싶었다.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인가.’

전쟁은 지금 보고 있는 곳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하의 한구석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음모되고 있을 게고, 여기보다 훨씬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곳도 있을 게다. 바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주공, 모두 모두 집결했습니다!”

“알겠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동원된 백성들과 아녀자들 그리고 애들은 지금 당장 서문으로 내보내라.”

“이미 지시해 뒀습니다!”

“그래? 그럼 병사들에게 알려라. 투항을 원하는 병사들이 있으면 거리낄 것 없이 떠나도 좋다고.”

“주공! 무슨 말씀이시오이까?”

“알겠느냐? 내 눈치 볼 것 없다. 마음껏 떠나라 전하고, 남을 자들 역시 웃으며 그들을 보내라고 일러라.”

“주공!”

“목소리 높일 것 없다, 고강. 이제 허주의 조환이 출병을 한다 해도 이길 수 없다. 패한 전쟁이다. 패한 전쟁에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죽었다면, 후세 사람들이 날 비웃는다. 내 비록 비적단 출신이지만, 지금은 어엿한 정북후이니, 정북후다운 죽음을 맞고 싶다.”

“끄흐흐흐…….”

기어이 고강은 기묘한 소리로 오열을 토했다. 지난밤의 전투에서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패배를 했어도 이처럼 분하지는 않았다.

“오, 적의 충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견디지 못하리라. 서둘러 내 명을 병사들에게 전해라. 나도 곧 내려가겠다.”

“조, 존명!”

군인이 된 이후, 가장 정중한 군례를 갖춘 고강은 달려 내려갔다. 그 자리엔 그의 눈물 몇 방울이 닳고 닳은 성루의 돌바닥에 젖어 들었다.

“나 같은 놈이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모처럼 깨달았을 때 죽어 보기로 할까.”

마치 하나씩 딛고 내려가는 성루의 계단에게라도 하는 것처럼 나직이 말하며, 목철린은 아래로 내려갔다. 태연한 안색이었고 몸가짐이었지만, 한순간 발을 헛디딜 뻔했던 건 역시 가족들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쯤 모두 어디로 피했거나, 아니면 자결했겠지.’

두 명의 처와 그들의 배를 빌려 태어난 일곱 명의 자식들 중 위로 세 아들은 아마 자신과 더불어 최후까지 싸울 결심으로 남은 병사들 속에 섞여 있으리라.

그러나 아직 어린 아들 둘과 딸 둘의 처신에 대해선 이미 정실에게 일러뒀다.

‘몸을 피하지는 않았을 테지.’

정실인 염 부인의 성격이라면 절대로 적을 피해 달아나진 않을 터였다. 오히려 웃으며 일가족과 더불어 죽을 만큼 강한 성정이었다.

문득 목철린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처자식까지 최후를 함께할 수 있다면, 저승길이 결코 외롭진 않을 터였다.

“장창수長槍手들은 성문 바로 앞으로 집결하고, 사수들은 그 일백 보 뒤에서 준비하라! 혹시 적들이 다른 문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 후방의 병사들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마라! 이게 우리 막주군의 마지막 싸움이다! 적에게 얕보이는 행동은 절대로 하지 마라!”

목철린이 성루의 중간쯤 내려갔을 때, 아래에서 고강이 이리저리 말을 달리며 연방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만 오천? 일만 칠천? 이만은 안 되겠군.’

전장에 익은 목철린의 눈과 감각은 남은 병사들의 숫자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만이면 족하다고 여겼었는데, 고마웠다.

한편으론 애석기도 했다. 이미 져 버린 전쟁에서 일만 오천 내지 일만 칠천에 달하는 부하들을 희생시켜야 된다는 점이 말이다.

그러나 갈 사람은 가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대낮처럼 밝혀 둔 화톳불 빛을 반사하는 투구 속의 눈빛이나, 각자의 무기를 단단히 쥔 그 자세에서 죽음 따윈 도외시해 버린 병사들 각자의 처절한 기백이 여실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앗, 주공이시다!”

“주공이 오셨다! 와아-!”

목철린을 발견한 병사들 사이에서 갑작스러운 함성이 터져 나왔고, 그건 곧바로 침사성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주공! 주공과 함께 죽으려고 백발 위에 투구를 덮어쓰고 이렇게 나섰습니다. 부디 한 말씀 해 주시면, 저승에 가서 자랑으로 삼겠습니다!”

돌연 장창수 속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커다랗게 외쳤다. 그 말대로 투구 사이로 비어져 나온 머리카락이 허옇게 센 노인이었다.

비적단 시절부터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그 노인을 보며 목철린은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동시에 병사들의 함성이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멎었다.

“고 장군의 말처럼 이제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좋은 수의와…….”

목철린은 자신의 갑옷 가슴께를 주먹으로 강하게 쳤다.

“훌륭한 관이 있으니, 마음껏 싸우다 다 함께 죽자!”

이어 자신이 방금 내려왔던 성루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와아, 주공 만세!”

“막주 만세!”

이 경우, 즉 죽음을 각오한 전국의 남자들에게 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같이 죽자는 말이 비장감을 띠게 마련이다.

그것도 막주의 주인인 사람이 한 말이다. 병사들의 입에서 저절로 함성이 터져 나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함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꽈아앙-!

지금까지보다 훨씬 거대한`—`실제로 그건 백 개의 천둥이 침사성 안에서 터진 것 같은 소리였다. 적어도 성내에 있던 막주의 병사들 개개인에겐 그렇게 들렸다`—`충돌음과 함께 성문이 경칩째 튕겨 버렸다.

우지직!

크기에 걸맞은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짝이 자신들을 덮쳐 옴에도 가장 전방에 배치된 장창수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곧이어 치고 들어올 파양주의 기병들을 막기 위해 바닥에 창을 세우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뿐이다.

그 위로 거대한 문짝이 너무 내려앉아 앞의 몇 열이 아래에 깔렸고, 뒤이어 파양주의 기병들이 우두둑 달려들었다.

* * *

성문이 깨진 피해를 가장 크게 본 게 막주군이라면, 그다음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편월이었다. 공훈에 눈이 어두운 파양주군이 한꺼번에 몰려갔기 때문이다. 잔당 소탕도 다 끝내지 않고 말이다.

그 바람에 편월은 글자 그대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비록 군도옥과 싸우고 있을 맹아를 비롯하여 몇몇이 남아 있겠지만, 적 잔당들의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 게 뻔하다.

당연한 일로서 한껏 몰리기만 하던 막주군들이 저우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럴 땐 어떤 수단을 써서든 적장과 떨어져서는 안 된다. 당장은 적의 포위망에 갇힐 수도 있겠지만, 그게 두려워 거리를 둔다면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에 다름 아니게 된다.

“저우, 너도 불알을 찬 놈이라면 달아나지 마라!”

편월은 일단 도발부터 시작했다. 이런 말을 듣고도 저우가 부하들에게 싸움을 맡기고 성으로 들어간다면 조금쯤은 존경해 줄 생각이었다. 그만큼 냉정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지휘관임을 증명한 셈이니까 말이다.

“닥쳐라, 이놈! 네놈 혼자 떨어진 걸 보면 파양주군도 웬만큼 급했나 보구나. 네놈은 내가 상대하겠다!”

가장 먼저 저우 곁으로 달려온 자들 중 한 명이 반달처럼 휘어진 환도丸刀를 휘두르며 편월에게 달려들었다. 벌써 몇 군데 부상을 입어, 절반 정도 이성을 잃은 눈빛이었다.

편월로선 상대할 가치가 전혀 없는, 그저 적장 저우를 잡는 데 거치적거리는 하나의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쓰걱!

두 번 필요 없었다. 한차례 편월의 대도가 전장을 밝힌 화톳불에 번뜩이는 빛을 발했을 때, 이미 놈의 눈에선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까지도 꺼져 들고 있었다.

“놈을 쳐라! 장군은 얼른 성으로 들어가시오! 놈은 하나, 우리들이 죽기로 막아 보겠소!”

적병 중 누군가가 또 저우에게 한마디 남기고 튀어나왔다. 분전에 분전을 거듭했는지 갑옷까지 벗어 던진 알몸으로 거대한 삭초도朔草刀(낫)를 연방 좌우로 휘두르며 빠르게 접근해 왔다.

‘누가 비적단 출신 아니랄까 봐.’

적이 들고 있는 병기나 싸움 방식을 보며, 편월은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전쟁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면서, 단순 무식하게 용맹만 자랑하는 저런 행동은 약탈할 때나 어울리는 짓이다.

하지만 마냥 가소롭게만 여길 수는 없었다. 그 뒤를 따라 십여 명의 적들이 우르르 몰려나왔기 때문이다. 그중 기병도 두 명이나 섞여 있었다.

물론 그자들을 겁내는 건 아니었다. 편월의 눈빛을 긴장시킨 건 저우를 놓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탓이었다.

다행히 저우의 지금 심정은 ‘포기’라는 두 글자였다. 싸워도 죽고, 이 자리를 피한다고 해도 막상 갈 곳이 없다면, 무장은 대개 전자를 택한다.

문제는 죽을 자리다. 죽은 뒤에라도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마지막에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오히려 비웃음을 사게 된다.

‘여긴가? 성인가?’

여긴 수많은 부하들의 피를 흠뻑 빨아들인 곳이고, 성엔 목숨 걸고 모셔야 하는 목철린이 있다. 이 선택을 그르친다면 한 사람의 남자로서`—`무장이기 이전에 비적이었다`—`일생에 먹칠을 하게 된다고 저우는 생각했다.

그때 그의 결심을 도와주는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라! 적장 군도옥의 목을 파양주의 잡가군 맹아가 베었노라! 파양주의 잡가군 맹아가 적장 군도옥의 목을…….”

‘이곳이다!’

굳이 군도옥의 최후를 확인하지 않은 채, 저우는 결심을 굳혔다. 이곳을 벗어난다면, 이유야 어떻든 숱한 부하들의 피를 딛고 몸을 피한 것밖엔 되지 않는다. 주공인 목철린 곁엔 자신 말고도 같이 죽을 부하들이 수두룩할 터, 바로 이곳에서 부하들의 뒤를 따르고 싶었다.

“길을 열어라! 막주의 대장군 저우가 파양주의 편월에게 내 부하들 생명의 무게를 묻겠노라!”

비록 비적단 출신이라지만, 점잖은 말투의 고함을 지르며 저우는 말을 내달렸다.

“길을 터라! 대장군의 출격이시다!”

“와아-!”

이제 남은 막주군도 더 이상 저우를 만류하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이면으론, 수적으로 우세할 때 필사적으로 싸운다면 한 가닥 활로가 보일지 모른다는 판단이 섰을 수도 있다.

“못 간다! 이건 대장끼리의 싸움, 어설픈 졸자들은 썩 물러나랏!”

한소리 크게 부르짖으며, 편월과 막주군 사이로 끼어든 건 서진청이었다. 불과 두 명의 기병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편월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막주군이 비록 숫자는 많지만, 서진청이라면 그들의 접근을 적절히 막아 자신이 저우에게 갈 수 있게 해 줄 터였다.

거기에 편월로선 반갑기만 목소리가 또 하나 날아들었다.

“방금 군도옥의 목을 벤 맹아가 바로 나다! 대장의 길을 막는 자는 먼저 내 칼에게 물어라!”

맹아였다. 베어 낸 군도옥의 목을 자랑스레 허리춤에 매달고선 막주군 사이에 뛰어들어 마구 설쳐 대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는 편월이었다.

“저우-!”

길게 적장의 이름을 외치며, 소질풍의 옆구리를 강하게 뒤꿈치로 찍었다.

비록 짐승이지만, 그래서 더욱 전쟁의 냄새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소질풍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편월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일직선의 먼지를 피워 올리며 저우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는 말이다.

때마침 편월을 발견한 저우도 말 머리를 돌려 달리며 크게 외쳤다.

“오너라, 애송이!”

“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마치 자석이 당기는 것처럼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해 갈 뿐이었다.

이미 적도 아군도 의식 속에선 지워져 버렸다. 상대에게 맹렬한 적개심을 불태워야 할 적이라는 생각도 없었다. 있다면 두 사람의 눈에 활활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발가벗은 원시적인 투지뿐이었다.

하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전쟁 자체가 인간의 가장 야만스러운 의지의 표출이라면, 그 전쟁을 수행하는 인간 개개인의 사고와 행동은 원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커지니까 말이다.

따앙-!

마침내 두 사람의 병기가 서로 부딪치며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맑은 소리와, 피 구덩이가 된 전장을 정갈하게 씻어 낼 것만 같은 고운 불똥이 튀었다.

순간 편월은 예전 그 어느 때처럼 소리를 잃었다. 대도가 저우의 장군도에 부딪침과 동시에 지상의 모든 소리들은 사라져 버렸고, 대신 사물의 움직임만 평소보다 훨씬 선명하게 망막에 투영되었다. 동시에 마음도 고요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본 저우의 얼굴은 귀신의 형상에 다름 아니었다. 쭉 찢어진 눈초리에 위로 올라붙은 눈동자,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근육과 한껏 벌어진 입…….

하지만 절대 고요 속으로 잠긴 편월에겐 그처럼 무서운 저우의 얼굴도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소리 없이 날아든 저우의 대도를 받아넘기며, 편월은 가볍게 놀랐다. 장군도가 일반 칼보다 큰 건 사실이지만, 일부러 크고 무겁게 제작한 자신의 대도를 이처럼 쉽게 받아 낼 줄은 몰랐다.

그건 분명 관록의 차이였다. 편월의 전신 근육이 십이 년이라는 전쟁 경험에서 단단해진 것이라면, 저우 역시 젊은 시절부터 이십여 년간 비적질과 무장으로 단련된 팔이었다. 그건 의지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합, 일 합의 격돌이 거듭될수록 싸움은 편월에게 점차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왜 그럴까? 전쟁의 경험이든 완력이든 저우가 월등히 나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저우의 마음이 어지러운 것도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죽자고 작정했을 때, 이미 그는 순수한 투사이자 무장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기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뿐이다. 바로 ‘기세’라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는 말은 얼핏 대단한 것 같지만, 한 번만 뒤집어 보면 이미 졌다는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지금의 저우는 지난 새벽부터 단 한순간도 맘 편히 쉬어 본 적이 없어 극심한 피로에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에 비해 편월의 경우는 보기 좋게 성 밖에까지 나와 방어 막을 구축한 저우의 막주군을 뚫고 성문까지 깨뜨려 버렸다. 그것도 오롯이 자기 혼자 지휘를 해서!

편월은 젊다. 그보다는 아직 어리다. 그러니만치 승기를 잡은 그 순간부터 등에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설치기 시작했다. 아니 단순히 승세를 업고 설치기만 했다면 이리 쉽게 저우를 밀어붙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편월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고요함은, 예전 그때처럼 그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었다. 무게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세계에서 훨훨 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은 샘물처럼 그의 육체에 끊임없는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

다시 한 번 두 개의 병기가 부딪치며 미끄러졌지만, 편월에겐 여전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렇게 빗나간 저우의 장군도가 자신의 허벅을 스쳤지만, 일말의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다음에 휘둘린 두 사람의 병기 중, 편월의 대도가 조금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쓰퍽!

대도가 저우의 질 좋은 갑옷을 뚫고 그대로 가슴팍까지 길게 베었을 때도, 편월이 느낄 수 있었던 건 손바닥에 전해지는 익숙한 중량감뿐이었다.

저우는 무너졌다. 미끄러진 칼이 편월을 허벅지에 스치지만 않았어도, 보다 빨리 방어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아니다. 이미 마흔보다는 쉰 쪽에 훌쩍 가까워진 그의 육신은 더 이상의 민첩한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으리라.

말 등에서 시작된 저우의 추락은, 바닥에 닿기 전에 이미 그 시력을 잃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긴, 그가 둔중하게 땅에 떨어졌을 땐 그 혼백도 육신에서 빠져나간 뒤였지만 말이다.

꾸웅!

묘하게도 그때부터 편월의 귀는 다시 제 기능을 발휘했다. 땅에 떨어진 저우의 육신이 저처럼 육중한 소리를 낸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편월의 고막을 강하게 때린 건 맹아의 목소리였다.

“치료부터 해야겠어요, 대장!”

맹아는 편월의 허벅지를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우에게 당했던 상처에서 엄청난 피가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에 들어가는 것이 먼저다! 지금쯤 아군이 고전하고 있을 거야!”

맹아의 말을 무시한 채, 편월은 소질풍을 몰았다. 그 전에 저우의 시신을 향해 정중한 군례를 갖추는 걸 잊지 않았다.

2

아군이 고전하고 있으리란 편월의 예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침사성의 다른 성문을 지키던 막주군을 은근히 압박하고 있던 광운이, 성문이 깨진 것과 동시에 병사들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싱겁군!”

잡가군이 깨뜨린 침사성 동문으로 들어선 편월의 첫마디였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대해 보다 격렬한 대답(?)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편월 대장, 우리가 해냈어!”

“오, 편월 대장이 오셨다!”

“비켜요! 대장은 우선 치료부터 해야 돼!”

성문 주위에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잡가군이 마구 몰려들며 편월을 반기자 맹아가 소리를 질렀다.

“치료? 어디 다쳤소?”

“보고도 몰라요!”

“이크! 이 피는?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었군! 어서 내리시오. 이봐, 금창약 가져와!”

“시끄러! 별거 아니니까 호들갑들 떨지 마! 그런데 왜 다들 여기 죽치고 있어? 벌써 싸움이 완전히 끝난 거야?”

아무리 둘러봐도 몰려든 사람 중 두건득을 비롯한 잡가군 소부대 대장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편월이 물었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올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에겐 휴식을 취하며 부상자를 치료하라고 했소. 그리고 대장들은 다 불려 갔소.”

“누구에게?”

“광운 장군이지 누구겠수!”

대답한 사람의 어투엔 약간의 불만이 묻어 있었다. 쉰을 넘긴 나이 같은데도 심중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만큼 화가 났다는 얘기일 게다.

왜 안 그럴까? 전쟁이 싸워서 이기는 게 목적이라면, 단연 그 백미는 승리의 기치를 세우고 이긴 그 자리에서 승전의 함성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광운은 잡가군을 빼 버렸다. 비록 휴식과 치료라는 이유를 대긴 했지만 말이다.

“아군 전사자의 시신은 거뒀어? 대체 피해는 어느 정도야?”

편월은 화제를 돌렸다. 더 이상 계속했다가는 광운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정확하게 알 길을 없지만, 대강 천 명 정도가 전사한 거 같소.”

순간적으로 편월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지금껏 단일 전투에서 그만큼 많은 사상자가 난 건 처음이었다. 전사가 천여 명이라면, 부상자는 그 서너 배에 달하리라. 침사성에 뛰어들었던 잡가군 전체가 피해를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편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광운이 왜 이런 조치를 취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긴 승세를 탄 잡가군이 제 몸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적들에게 덤벼들다간 자칫 전멸을 당할 수도 있다. 그걸 미리 막은 것이리라.

“기껏 내성으로 몰아넣은 적들을 단숨에 치지 않는 것도 이상하오! 승세를 몰아 냅다 한번 지르기만 해도 그대로 무너질 텐데, 이건 일부러 적에게 한숨 돌릴 시간을 주자는 것도 아니고…….”

“그만! 나라도 같은 명을 내렸을 거야.”

여전히 불만에 찬 자의 말을 끊으며, 편월은 소질풍에서 훌쩍 내려섰다.

‘아!’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하마터면 편월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을 뻔했다. 허벅지의 상처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겉으로 드러낼 만큼 편월은 어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을 더욱 활짝 펴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대장, 어디 가요?”

맹아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그는 유난히 엉덩이를 씰룩이며 걸었다. 그때마다 허리에 차고 있던 군도옥의 목이 크게 덜렁거렸다. 자신의 공훈을 동료들에게 자랑하고픈 행동이었다.

“나도 좀 쉬어야겠으니, 저리 가 있어. 그리고 각 대의 대장들이 돌아오거든 내게 오라고 하고. 참, 넌 다친 데 없어?”

“난 괜찮아요. 대장, 그럼 쉬어요.”

묘하게도 선선히 대꾸하며, 맹아는 쪼르르 달려갔다. 그 모습 어디에도 부상당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상처가 몇 군데는 있을 게 분명하다.

편월은 잠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벌써 새벽이 되려는지 하늘이 뿌옇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지상엔 화톳불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짙다. 그 불빛에 의지하지 않고선 발밑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편월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을 듯한 성 벽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비로소 허벅지 상처를 확인했다.

꽤 깊은 상처다. 바깥쪽이라 동맥은 다치지 않았겠지만, 살은 허옇게 뒤집혀 손을 댈 때마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래도 저우보다는 낫지, 뭐!’

그렇게 자위하며, 편월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약 꾸러미를 꺼내 금창약을 찾았다. 지금 치료해 두지 않으면 화농化膿이 되어 고생은 몇 배로 심해질 것이다.

금창약을 뿌리고, 그 위에 늘 지니고 다니는 흰 천을 질끈 동여매자 상처에서 기분 좋은 화끈거림이 전해졌다. 효과가 아주 좋은 약인 모양이었다.

‘이걸로 잡가군은 완전히 해체되겠지.’

지원군 삼만 중 오천이 잡가군이었다. 그사이 크고 작은 전투와 이탈병들의 희생 그리고 오늘 침사성을 낙성시키면서 그들은 전사하거나, 혹은 거의 전원이 부상을 당한 것 같다. 어쩌면 현지인 여기서 곧장 해체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곳에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문득 편월은 유화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돌아가게 되면 한동안 전쟁 따위는 잊고 그녀와 함께 실컷 놀겠다고 작정했다.

이래서 전쟁은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한다. 이런 달콤한 상상을 할 수도 있고, 또 그걸 실행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휴우-!”

마치 다 늙은 영감과도 같은 한숨을 토하는 편월의 전신에서 갑자기 힘이 쭉 빠져나갔다. 비로소 ‘이겼다’는 사실을 실감한 탓이었다.

물론 아직 전투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목철린과 함께 내성으로 밀려들어 간 막주군은 여전히 투항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조금 전에 만났던 잡가군은 말했다.

그러나 그건 더 이상 편월의 싸움이 아니었다. 광운이 잡가군에게 휴식과 정비를 명한 그 순간부터 전투는 지원군, 즉 파양주 정규군의 몫이 되었다.

그렇다고 잡가군의 공이 인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 성문을 깨뜨리고 가장 먼저 돌입해 지원군을 끌어들였으니 단연 수훈갑이다. 두둑한 승전 수당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편월 대장, 어디 있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편월은 얼른 갑상으로 상처를 싸맨 곳을 가렸다. 나이에 상관없이 대장의 몸에 입은 부상은 부하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도 있다.

“여기야!”

“아, 여기 있었군. 컴컴한 곳에서 뭐 하고 있소? 할 얘기가 있으니 나와 보시오.”

두건득이었다. 화톳불로 인해 그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탓인지 왠지 심각해 보였다.

“뭐야? 좀 쉬려는데…….”

일부러 짜증 섞인 목소리로 언성을 높이며, 편월은 의지하고 있던 그늘에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거기엔 두건득을 비롯한 소부대 대장들과,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잡가군 몇몇이 모여 있었다.

“방금 광운 장군을 뵙고 왔소.”

“들었어.”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편월은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 화톳불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벌써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여기다 화톳불까지 피워 둔 모양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이번 막주 공략에 있어서 우리 잡가군의 공은 없소! 모두 곽 장군의 공으로 돌리라는 광운 장군의 말씀이셨소. 지원군에 대한 건 다시 얘기하기로…….”

“뭐야?”

날카로운 반문으로 편월은 두건득의 말을 잘랐다. 가뜩이나 막주군을 침사성으로 몰아넣은 공훈도 이미 지워진 상태였다. 그런데 이 무슨 개 같은 경우인가 말이다.

“우선 이야기부터 들어 보시오. 광운 장군은…….”

“내가 광운에게 갔다 올게!”

다시 입을 연 두건득을 무시한 채, 편월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광운을 찾아가 단단히 따질 결심이었다.

지금 편월의 가슴은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모든 것에 우선해서 그에겐 이탈병 오백에 대한 책임이 있다. 누구보다 고생했고, 그만큼 많은 희생을 치렀기에 전쟁에서 이긴 후엔 그만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이렇다. 의당 보상을 해 줘야 할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 그의 어린 가슴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글쎄, 얘길 끝까지 들어 봐!”

평소와 달리 두건득의 어조는 거칠었다. 게다가 목소리도 높아 주변에서 쉬고 있던 잡가군들의 이목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을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편월은 기가 막혔다. 아무리 어려도 이들은 꼬박꼬박 자신을 대장으로 여기고 말투도 행동도 삼가 줬었다. 그런데 지금의 두건득의 말을 듣고 보니, 높은 지붕에서 떠다박질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다음에 편월이 보일 반응은 한 가지였다.

“너, 이, 야, 영감탱이!”

잠시 말을 더듬던 편월은 봇물 터진 듯 빼액 소리를 지르며 한쪽 무릎을 세웠다. 손은 어느새 허리에 찬 칼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참으시오, 대장!”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듯한 편월의 손목을 억누른 건 서진청이었다.

“놔! 안 놔?”

“칼을 뽑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두건득을 벨 거요? 무릇 대장이라면 그냥 집어넣을 칼 따위는 부하들 앞에서 뽑는 게 아니오!”

“뭐?”

편월의 어깨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번엔 시퍼런 칼날이 등줄기를 한차례 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어쨌든 자신은 이들의 대장이다. 부하의 행위에 화를 내고 칼을 뽑는다면, 반드시 거기에 걸맞은 처벌이 있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전시엔 두건득을 베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좋아! 얘기해 봐. 만약에 한마디라도 납득이 되지 않으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알았어?”

“납득하지 못했다면 우리들이 대장을 설득하려고 들지도 않았을 거요.”

“군말은 빼!”

편월의 질타에 서진청은 두건득에게 눈짓을 보냈다. 얘기를 계속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한 번 닫혔던 두건득의 입은 제꺽 열리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말머리를 풀어 나가야 할지 약간은 곤혹스럽다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우린 이탈이라는 무거운 죄를 지었소. 아, 결과에 대해선 얘기하지 마시오. 글쎄, 내 말을 좀 더 들어 보시오. 광운 장군의 말씀은 이번에 우리가 세운 공로로 이탈의 죄를 씻어 주겠다는 거요. 뭐, 결국은 곽 장군의 결정에 달렸지만. 그래서 이번 막주전의 공로는 모두 곽 장군에게 돌리자는 거요. 내 말에 더 보태실 게 있으면 지금 하시오.”

두건득의 마지막 말은 편월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한 것이었다.

“달리 뭐가 있겠소? 요지를 잘 말씀하셨구먼.”

“나 역시 달리 할 말이 없소.”

모두들 한마디씩 하고 있을 때, 편월의 단정한 이마엔 굵은 힘줄이 꿈틀거렸다. 신경질이었다.

자신이 이탈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때의 전황은 교착상태였다. 아니 엄밀히 얘기하면 지리를 이용한 막주군의 유격전에 파양주군이 밀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걸 타개하기 위해 이탈을 감행했고, 그 후의 활동으로 은근히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고 있던 참이었다. 실제로 이탈병들의 활약이 막주군에게 지대한 타격을 주기도 했고!

“좋아. 다 좋은데…….”

편월의 입이 열리자 다른 사람들은 말을 끊고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이탈한 사람들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니 그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백의 죄를 씻기 위해 나머지 사천오백의 공로가 모두 없어져도 괜찮은 거야? 오늘 이 성에서만 해도 벌써 천 명 넘게 죽었어! 그들의 공훈은 하나도 없는 거야? 이건 참을 수 없어! 이탈한 죄라면 나 하나 죽으면 돼! 부하의 잘못은 그 대장의 책임이니까 내 모가지를 바쳐 죄를 대신하고, 다른 사람들의 공훈은 그대로…….”

“잠깐!”

격렬하게 이어지는 편월의 말을 누군가가 잘랐다. 시선을 돌려보니 이 성에 막 들어왔을 때 광운의 처사에 불만을 토로했던 바로 그 잡가군이었다.

“뭐야?”

“이 몸은 송지宋志라고 하오. 아깐 미처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소.”

노기에 찬 편월의 채근에도 송지라고 소개한 자는 느릿한 어조로 내뱉으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말부터 해!”

“편월 대장이 오기 전에 우리는 모두 그 얘기를 들었소. 그리고 다들 공감했소.”

“뭐?”

“왜인지 아시오?”

뭔가 반박하려는 편월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제지하며, 송지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우리 잡가군은 기본적으로 돈 때문에 모여들지만, 이번만은 조금 달랐소. 물론 돈도 좋지만, 그보다는 광운 장군과 편월 대장에 대한 신뢰로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내 말이 믿기지 않거든 어디든 가서 물어보시오. 저기 한쪽 팔이 잘린 지두룡地斗龍이 있구려. 그에게 가서 물어보시오. 장이張二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소. 죽기 전에 그에게도 물어보시오. 그들이 과연 오늘의 이 처사를 납득했는지. 아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어보시오. 무엇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무엇 때문에 한쪽 팔을 날렸는지를…….”

그리고 송지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해가 떠오를 듯 남국의 아침 태양이 동녘 바다를 벌겋게 달구고 있었다.

그 속으로 훌쩍이는 소리가 몇 개 녹아들었다. 참고 참았다가 송지에 말에 기이어 터져 버린 듯, 그건 한참이 지나도록 멎질 않았다.

어떻게 쉬이 멈춰지겠는가? 거기엔 이미 죽은, 친했던 사람에 대한 애도도 있고, 잡가군이라 겪어야 하는 부당한 처사에 대한 억울함도 있고, 전장을 누비는 억센 사나이들인지라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비탄도 섞여 있는데…….

깨닫고 보니 편월을 제외한 모두의 눈자위가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믿어 주나?’

불꽃보다는 새하얀 재가 더 많이 남은 화톳불로 눈길을 옮기는 편월의 기분은 묘했다. 가슴을 꽉 메운 뜨거운 불덩어리 하나가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았다.

애꿎은 재를 쑤석거리며, 편월은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느낌은 난생처음이었다. 예전 한때 이 비슷한 감정을 가져 보긴 했었지만, 지금과 똑같은 건 결코 아니었다.

“자, 대장! 모두의 마음이 이렇소. 그러니 이 일은 광운 장군께 맡겨 둡시다.”

서진청이 매듭짓듯 한마디 했지만, 편월은 여전히 재만 쑤석이며 처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직은 모두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제후나 패주들처럼 누대에 거쳐 부렸던 신하들도 아니다. 자신의 돈으로 고용해서 부리는 사람들 역시 아니다.

그런데 이처럼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다. 걸핏하면 짜증 내고, 툭 하면 사지로 뛰어들라는 명만 내렸던 자신을, 이들은 자기들의 명줄이 짧아지는 줄도 모르고 믿어 주고 있다.

아직은 이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다. 적어도 그들의 믿음에 보답할 만한 뭔가가 있기 전에는, 이처럼 땅을 향해 처박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아니, 다 좋다. 적어도, 금방이라도 목구멍 부풀리며 올라와 입 밖으로 토해질 것만 같은 이 가슴속의 뜨거운 뭔가가 사그라질 때까진, 얼굴 들고 말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대장! 해가 떴소. 또 하나의 전쟁이 끝났다는 걸 알리는 태양이오! 저 해를 보며 승리의 함성이라도 한바탕 올려야 하지 않겠소! 자, 고개를 드시오!”

어깨를 토닥이며 해 준 두건득의 말에, 편월은 발작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좋아. 남은 사람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모아. 시신 한 구 빠뜨리지 말고.”

“장소는 어디가 좋겠소? 시신까지 모으려면 성내는 아무래도 좀…….”

“그럼 성 밖으로 해!”

냅다 소리를 지른 후, 편월은 그대로 성문을 향해 달렸다.

“같이 가요, 대장!”

서진청의 눈짓을 받은 맹아가 허리에 찬 군도옥의 목을 덜렁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밤엔 몰랐는데, 날이 훤히 샌 후에 보는 그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괴한 전율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무작정 내달리던 편월의 발길은, 그러나 성문을 벗어나자마자 멈춰지고 말았다. 장수기를 앞세운 곽준방이 전 병력을 이끌고 막 입성하고 있는 걸 본 탓이었다.

“대장?”

곧바로 뒤따라온 맹아도 그 광경을 봤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묻는 투로 불렀지만, 편월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가장 앞서 오고 있는 곽준방에게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대장! 가요, 가!”

편월의 성격을 익히 아는 맹아가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편월은 맹아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놔!”

거칠게 맹아의 손길을 떨쳐 버린 후, 그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 꼬마 대장이로군!”

마상에 앉은 곽준방이 알은체를 했다.

하지만 편월은 그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의당 갖춰야 하는 군례도 하지 않았다.

그 뒤에서 맹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곽준방에게 정중한 군례를 갖췄다. 그러고는 재빨리 편월의 뒤를 따랐다.

해는 이미 침사성 동쪽 망루에 절반쯤 그 푸짐한 몸을 걸치고 있었다.

3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목철린이 침사성의 내성으로 들어가 여태 항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내성 공략의 진두지휘는 당연히 광운이었다. 지난밤을 기해 잡가군이 침사성의 동문을 공략할 때, 그는 지원군을 총동원해 다른 문을 지키는 성병들을 압박했다.

마침내 동문이 깨졌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광운 역시 총공격의 명을 내렸다. 오천도 채 되지 않는 잡가군이 동문을 확보하고 버틸 수 있는 시각이 얼마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다행히 지원군은 쉽사리 문을 깨뜨리거나, 혹은 성벽을 넘을 수 있었다. 목철린이 동문 수비에 전력을 기울이느라 적병들이 모두 그쪽으로 몰려간 탓이었다.

그렇다고 일이 척척 손쉽게 풀린 것만은 아니다. 동문에 집결한 막주군은 근 이만에 달했고, 그들은 한결같이 목숨 따위는 돌보지 않고 처절하게 저항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막주군의 손발을 무디게 만든 건 피로였다. 제아무리 용맹무쌍한 의지를 지녔더라도, 육체가 따라 주지 않는 데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막주군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내성으로 들어가 다시 농성을 준비하는 기척이었다.

여기서 광운은 일단 공격의 매듭을 지었다. 반발이야 많았지만, 그에겐 다른 생각이 있었다. 이 아침에 편월이 듣고 분노했던 바로 그 계획 말이다.

그러니 곽준방이 전 병력을 이끌고 입성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광운은 미리부터 진막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곽준방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오, 광운 장군! 수고했소, 수고했어.”

군례를 갖추는 광운에게 곽준방은 호방한 어조로 노고를 치하했다. 다른 병사들의 눈을 의식한 탓인지, 호칭이나 말투가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다섯 부장들도 각기 반가운 얼굴로 광운과 인사하고 있을 때, 곽준방이 입을 열었다.

“저게 내성이오?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졌군.”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병사들이 보고 있는 곳에선 작전이고 뭐고 할 수가 없다. 광운은 우선 곽준방을 진막 안으로 안내했다.

안에는 커다란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 그리고 지원군 대장임을 표하는 장수기가 한쪽에 세워져 있었다.

몸에 밴 행동으로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던 곽준방의 시선이 돌연 광운에게로 향했다.

“왜 의자가 하나뿐이오? 광운 장군도 앉으시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대장군. 그저 예전처럼 대해 주십시오.”

“무슨 말이오? 내가 원정군의 대장군이라면, 그대는 지원군의 대장군이오. 신분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이오? 여 장군, 광운 장군에게도 의자를 갖다 드리게.”

“아, 아닙니다. 소인은 일개 잡가군…….”

“존명!”

광운이 사양하고 있는 사이 여상계가 싱글벙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물론 의자를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벌겋게 상기되어 있던 광운의 얼굴이, 다시 핼쑥하니 핏기가 가셨다.

정규군의 부장이 잡가군을 위해 의자를 가지러 간다는, 이 듣도 보도 못했던 사태(?)에 대한 당혹감을 그대로 드러낸 셈이었다.

“자, 앉으시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손수 의자를 가져온 여상계가 광운의 어깨를 찍어 누르다시피 해서 앉혔다.

이것도 파격이었다. 그저 고함 한 번 지르면 부하들이 알아서 가져올 터인데, 여상계가 직접 즐겁다는 얼굴로 의자를 가져왔다. 광운으로선 머릿속이 팽팽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지도를 보니, 내성도 여느 성채 못지않게 단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같군. 여기가 망루, 여긴 집무창 같고, 이 표시들은 뭐요?”

침사성의 내성을 그린 지도를 보던 곽준방이 지휘채로 한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그건 우, 우물을 표시한 곳입니다.”

대답하는 광운의 말투는 더듬거렸다. 곽준방이나 다섯 부장들의 언행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우물이 모두 다섯 군데라… 지금 내성엔 몇 명이 들어가 있소?”

“약 칠천으로 보았습니다. 많아 봐야 칠천오백은 넘지 않을 것입니다.”

“칠천오백의 병사에 우물이 다섯 군데면, 적들은 당장 식수 부족을 느끼고 있겠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곳 막주 땅은 비가 많으니 물 부족을 겪을 일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이 침사성 아래로는 수량이 풍부한 지하 수맥이 흐르고 있다 합니다. 그 지하수가 이 성내에 있는 각 집마다 식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호오!”

광운의 말에 곽준방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통상 식수는 성내에 몇 개, 성 밖이라면 마을 단위로 한두 개 있는 게 통례였다. 이처럼 가가호호 식수가 공급된다는 말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럼 식량은?”

“거기까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만 식량 창고에 손을 댄 흔적이 없는 걸로 봐선, 내성엔 그리 많은 식량이 있을 거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장기전을 펼쳐야 된다는 얘긴데…….”

“불가하오!”

길게 끄는 곽준방의 말꼬리를 잡아챈 사람은 팽요였다. 서른을 넘긴 지 몇 해 되지 않는 젊음과 패기를 온몸으로 풍기는 그의 눈도 아침 햇살에 번쩍이는 빛을 발했다.

“대군을 이끌고 막주 정벌에 나선 우리들이오. 이제 궁지에 몰려 내성에 들어앉은 적들이 굶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씀이오? 그랬다가는 파양주군은 적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겁쟁이들이라고 세상이 욕을 할 것이오!”

“그렇다면 팽 장군의 생각은?”

“정면공격이지요!”

“광운 장군의 생각은 어떻소?”

“저 역시 정면공격이 좋다고 봅니다. 다만 적들은 하나같이 죽을 각오를 세운 자들이라,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알겠소. 그럼 정면공격을 감행하기로 합시다. 각자 이 지도를 보고 취약한 곳을 찾고, 또 맡아서 공격하고픈 곳과 필요한 병사의 수를 말하도록.”

곽준방의 말이 끝났을 때, 광운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되긴 했지만, 정작 하고픈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 회의가 끝나는 대로 곧장 군사행동으로 들어간다면, 말할 기회는 더욱 멀어지고 말 것이다.

“지원군은 아직 아침 식사들을 하지 못했을 것이오. 우리가 공격하는 사이에, 병사들의 배부터 채워 주도록 하시오.”

성 밖 영채를 출발하기 전에 이미 곽준방은 병사들에게 아침을 먹을 것을 명했다. 그러니 곧바로 공격을 시작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잡가군 문제인데, 그들 중엔 이탈병들도 있고…….”

“오, 잡가군! 그들이야말로 이 침사성 공격의, 아니 막주 토벌에 있어 단연 수훈갑이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어느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소?”

말끝에 목소리를 떨궈 묻는 곽준방의 질문에, 광운은 도리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도대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 다시 한 번 그를 살펴봤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까지 곽준방은 사사건건 트집이나 고집을 부렸었다. 마치 공훈에 혈안이 되어 사람이 미친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여태까지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같은 사람인지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은 그들에게서 청원이 있었습니다.”

광운은 말을 꾸몄다. 이 모든 게 자신이 계획한 것이지만, 잡가군이 청원한 걸로 곽준방에게 얘기할 작정이었다. 그게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 모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저간의 경위야 어떻든 전장을 무단으로 이탈한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 그래서 수림 속에서 사력을 다해 적들을 쳤고, 또 침사성 공격에 목숨을 돌보지 않은 건 그 죄를 조금이라도 씻기 위함이었다고. 그 성의를 생각해서 이탈한 죄를 면케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동안 그들이 세웠던 공훈은 인정받지 않아도 좋다는 말과 함께…….”

“무슨 소리! 누가 뭐래도 이 막주전의 일등 공훈은 잡가군이오. 세상이 다 아는 일을 굳이 숨기려 할 것 없소.”

“그렇지만…….”

“난 장수요. 모든 장수가 다 그렇듯이, 나 또한 강한 군사들을 갖고 싶소.”

“예?”

화제와는 동떨어진, 너무 엉뚱한 곽준방의 말에 광운은 그저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 내 처사에 대해 광운 장군은 불만이 많았을 거요. 내 다섯 부장들도 온통 불만에 차서, 항명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

“하하하!”

곽준방의 말에 다섯 부장들은 모두 가벼운 웃음을 토했다.

그러나 광운은 여전히 뜬구름 잡는 기분이었다. 곽준방에 대한 불만과 강병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특히 나는 잡가군에 주목했었소. 궂고 위험한 일은 모두 도맡아 하기에, 그들의 사기는 곧바로 전군의 사기와 연결된다고 믿었소. 그래서 난 잡가군을 지휘하는 꼬마 대장에게 힘을 실어 줘야겠다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그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더군. 대놓고 칭찬만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다시 말꼬리를 흐리며, 곽준방은 빙그레 웃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광운이 재미있다는 듯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잡가군의 불만을 이끌어 내자는 것이었지. 불만에 찬 병사들은 아주 강해지거나, 혹 탈영을 하는데, 꼬마 대장이 이끄는 잡가군은 탈영을 걱정할 것까지는 없었소. 나에 대한 불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들은 꼬마 대장을 중심으로 더욱 뭉치게 되리라고 생각했소. 내 예상이 멋지게 적중했지!”

“아!”

그제야 광운은 무릎을 치며 탄성을 토했다. 갑상이 호응하듯 쩔그럭 울리는 소리를 냈다.

과연 그렇다. 지금의 잡가군이라면 편월이 불 속으로 뛰어들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모두 곽준방이 의도한 것이었을 줄이야!

새삼스러운 눈길로 곽준방을 보며, 광운은 입을 열었다.

“그럼 이탈병들에 대한 처분은…….”

“말했잖소! 그건 그들의 공훈이 될지언정 죄가 될 일은 아니라고. 참, 그보다 입성할 때 꼬마 대장을 봤는데 풀이 죽어 있더군. 마지막 싸움의 고삐를 죄지 못해서 그런 듯하던데, 어떻소, 광운 장군? 이번 내성 공격에 잡가군도 참가시키는 것이?”

“하지만 그들은 피해가 워낙 막심해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오백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공격에 가담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아니, 위험한 곳에 투입하려는 게 아니오. 전투는 우리들이 하겠소. 잡가군은 그저 싸우고 싶은 곳에서 싸우라고 하시오.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며 고생했는데, 마지막 싸움에서 쏙 뺀다는 게 말이나 되겠소?”

“당연한 말씀! 난 목철린을 만나도 그냥 피하겠소. 꼬마 대장이 그와 싸울 때까지.”

“나도 마찬가지요. 적의 망루에 일착으로 오를 일이 있어도, 난 거기 주저앉아 낮잠이나 한숨 잘 거요.”

곽준방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섯 부장들도 일제히 한마디씩 했다. 모두가 잡가군의 공훈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장 편월에게 전령을…….”

말을 채 끝맺지도 않고, 광운은 막사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마지막 말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것인지, 전령에게 한 것인지 모호하기만 했다.

“갑시다, 대장!”

“잘됐어. 역시 이래야지!”

광운이 보낸 전령의 말을 들은 잡가군의 반응이었다. 개중에는 성급하게 풀었던 갑옷 끈을 다시 고쳐 매는 자도 있었다.

편월이라고 해서 다를 게 뭐 있겠는가. 당장 두건득을 비롯한 소부대 대장들을 불러 놓고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각자 판단해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최대한 모아. 단 열 명이라도 괜찮아.”

말을 하는 편월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침에 느꼈던 신뢰에 대한 보답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더 이상의 사람이 죽거나 다칠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미 이 전쟁은 끝난 것이다. 적의 마지막 숨통이 끊어지는 그 최후의 순간에, ‘여기 잡가군이 있다!’라는 걸 보여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자, 그럼 준비! 공격은 곧바로 시작된다. 이대로 공격군과 합류한다!”

“대장, 여기 말!”

어느새 맹아가 눈치 빠르게 소질풍을 끌고 와 고삐를 건네주었다.

“필요 없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가는데, 말은 무슨…….”

“그래도 대장은 말에 타는 거요.”

걸어가려는 편월에게 서진청이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대장으로서의 권위를 갖추라는 반 공갈(?)이었다.

사실 편월로서도 별반 반대할 일은 아니었다. 훌쩍 소질풍의 등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를 높였다.

“자, 가자! 어? 뭐야?”

막 진격 명을 내리려던 편월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질풍 바로 앞에 딱 버티고 서는 사람을 봤다.

“이보게, 지두룡! 이번만은 참게나. 그런 몸으로 어떻게 싸우겠다는 건가? 그러니 우선 부상부터 제대로 치료한 후에…….”

“부모께서 주신 육신 중 한 팔을 잃어버렸소. 이대로 돌아가면 어머님께서 절 용서치 않을 것이오. 적어도 내 팔 하나 값은 막주 놈들에게서 받아 내야겠소!”

과연 소질풍 앞을 막아선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은 왼팔이 없었다. 과다한 실혈失血로 인해 안색이 창백했지만, 그래서 두 눈은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고, 말투도 자못 당당했다.

편월은 소질풍 위에서 지두룡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물었다.

“한 팔로 싸울 수 있어?”

“잘린 건 왼팔이오!”

요컨대 자신은 오른손잡이니깐 무기를 휘두르는 것엔 지장이 없다는 얘기였다.

“좋아. 허락한다. 단, 낙오가 되거나 적에게 포위당해도 구원을 바라지 마라!”

“나도 가겠소!”

지두룡의 종군을 허락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껑충껑충 뛰어 편월 앞에 모습을 보였다. 한쪽 발목이 날아간 이십 대 중후반의 사내였다.

“여보게, 주개朱介! 아무래도 자네는…….”

“뒤처지지 않을 자신 있나?”

주개라고 불린 사내를 제지하려는 송지보다 편월의 말이 더 빨랐다. 다소 잔혹하다 싶은 질문으로 그 역시 데려갈 뜻을 내비친 것이다.

그렇게 시작이었다. 두 사람이 나선 것을 계기로 부상을 당했지만, 조금이라도 운신할 수 있는 잡가군은 모두가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소인도 데려가 주시오. 이래 봬도 명사수요!”

한쪽 눈을 피 묻은 천으로 가린 자가 나서며 외쳤다. 하긴, 활을 겨냥할 땐 대개 한쪽 눈을 감는 게 상례긴 하다.

“기, 기어서라도 가겠소. 그러니 나, 날 여기 두고 가지 마시오!”

정말이지, 누군가가 바닥을 기어 앞으로 나오며,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 미약한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대장?”

두건득이 편월을 불렀다.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아니 그건 묻는 눈빛이 아니었다. 이들 모두를 데려가고 싶다는 간절한 애원이 담긴 시선이었다.

“좋아. 모두 데려간다! 움직이지 못하거나, 기절한 사람들은 업고서라도 데려가!”

“와아-!”

편월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잡가군은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저 광경을 보면 누군가 물을지도 모른다. 정신 나간 게 아니냐고, 저들을 데리고 어떻게 전쟁을 치르겠냐고.

만약 그런 자가 나타난다면 편월은 그놈의 턱주가리를 돌려 놓을 생각이었다.

이미 저들은 전쟁을 치렀고, 승리로 끝낸 몸들이다.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해서, 마지막 승리의 깃발을 꽂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게 부상병들을 종군시킨 이유기도 하다.

편월로선 내성 공격에 나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싸워야 한다면, 성한 자들만 참가시킬 계획이었다.

그래도 저들 모두는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편안히 앉아 공훈만 챙기려는 정규군에게, 오늘의 승리가 잡가군의 피와 살로 쟁취했다는 걸 똑똑히 보여 줘야만 한다. 그런 자리에 누구 하나를 뺀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 출발!”

편월의 명에 따라 잡가군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묘한 행렬이었다.

발목 잘린 자는 팔 없는 자의 어깨에 의지하고, 눈 잃은 자는 허리가 부러져 움직이는 못하는 자를 등에 업고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잡가군이 공격군에 가담했을 때, 공격군들은 한결같이 놀란 표정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다 왈칵 몰려들어 부상병들을 부축하려 했다.

“물러서!”

세찬 편월의 외침에, 부축하려고 나섰던 공격군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하하하!”

그걸 보며 편월은 소리 내어 웃었다. 공격군에 동정을 받을 생각이었으면 애당초 이 공격엔 가담하지 않는 게 좋았다. 잡가군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발로 서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들 희생의 의미가 제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허허허!”

“후후후!”

편월에 이어 그 뒤를 따르던 잡가군들도 제각기 특유의 소리를 내며 웃었다.

거듭 말하지만 그건 실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하나같이 토하는 웃음소리…….

그러나 그건 망가진 병사, 누더기 부대의 발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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