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계난항作計難航 (20/66)

작계난항作計難航

1

광운과 편월이 서로 얼굴을 맞댔을 때, 그 둘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광운은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뭐 하고 있어! 어서 놈들을 추적해!”

“뭐?”

광운의 말에 편월은 울컥했다. 칭찬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고했다.’라는 말 한마디는 해 줄 줄 알았다. 그동안의 전공이라면 그 정도 말을 들을 자격은 충분했다.

그런데 첫마디부터 질타다. 그간의 고생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발심이 목구멍을 부풀리며 치밀어 올랐다.

그사이에 재빨리 끼어든 건 눈치 빠른 서진청이었다.

“대장! 적들이 달아나고 있소. 추적해서 치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웃음을 살 것이오. 자, 갑시다!”

서진청이 은근한 말로 잡아끌었지만, 편월은 쉬이 응하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어조로 광운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건득은?”

“누구? 몰라!”

“모른다고? 복귀하지 않았어? 부상병들이랑?”

“이탈병 중에 복귀한 자가 있었다는 보고는 아직 없었어! 그보다 놈들을 추적하지 않을 거야?”

“자, 대장. 두건득이 같이 갔으니 부상병들은 무사할 게요. 우선 광운 장군의 말대로 적들부터 칩시다!”

대화가 다시 거칠어진다 싶자, 서진청이 재차 끼어들어 편월을 달랬다.

“좋아. 일단 놈들부터 치고 보자고!”

전쟁에 나선 편월이 뭘 우선시해야 될지 모를 턱이 없다. 먼저 돌려보낸 부상병들이 걱정되었지만, 여기선 적을 치는 게 급선무다.

몸을 돌린 편월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사백에 가까운 이탈병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놈들이 등을 보였다! 쳐라! 작전은 따로 하달하지 않겠다! 무조건 놈들을 섬멸해!”

얼핏 책임감 없는 명령 같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이탈병들은 각종 압박에 시달려 왔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또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조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것에 대한 배출구를 필요로 했고, 그 점을 놓칠 리 없는 편월이 유효적절한 명을 내린 셈이었다.

“와아아-!”

“나를 보라! 여기 강숙이 간다!”

“맹아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함성을 올릴 때, 강숙과 맹아는 적의 피로 번들거리는 창을 휘두르며 벌써 앞장서 달리고 있었다.

“뒤처지지 마라! 처지는 놈들은 앞으로 겁쟁이로 취급하겠다!”

편월 역시 대도를 휘두르며 이탈병들을 마구 독려했다.

그뿐 아니었다. 편월 자신도 이탈병들 사이에 섞여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대장? 편월 대장?”

정신없이 치닫는 편월의 발길을 누군가가 뒤에서 불러 세웠다.

“뭐야?”

“말이오. 소질풍이오!”

그 말에 편월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낯익은 잡가군 한 명이 소질풍을 끌고 와 있었다.

“다른 말은?”

“뒤에서 오고 있소. 우선 대장부터 말에 오르시오!”

“좋아. 추격전이다! 때를 놓쳐서는 의미가 없어. 모두 말에 타게 해라!”

그 말을 남기며 편월은 훌쩍 말에 올랐다.

푸르르, 오랜만에 주인을 태운 소질풍도 반가운지 세찬 투레질을 해 댔다.

편월은 새삼 대도를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소질풍을 타면 이처럼 또 다른 활력이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자, 간다!”

한소리 크게 외치며 편월은 소질풍의 옆구리를 발꿈치로 찍었다.

끼히히히힝-!

한차례 앞발을 왈칵 쳐든 소질풍은 이름 그대로 아군을 따라잡으며 곧장 적의 배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대장!”

그 모습을 본 맹아가 편월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자신도 소질풍에 태워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편월은 무시하고 그냥 달렸다. 뒤에 끌고 올 말 중엔 맹아의 것도 있을 터였다. 얼마나 많이 달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추격전에서 소질풍을 지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질풍은 확실히 명마였다. 어두운 밤, 우거진 수림 사이를 달리면서도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정말이지,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 물이 흘러가는 듯 도무지 막히는 구석이 없이 달렸다.

저만치 낙오병처럼 보이는 적의 후미가 보였을 때,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숙이 소질풍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달리며 적을 베어 넘기는 걸 본 탓이었다.

그 순간 편월의 뇌리에 말처럼 빨리 달릴 수 있으면 혼자 싸우게 해 주겠다던 광운의 말이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그땐 그저 하는 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혼자 싸우지 못하게 하려는 핑계였지, 실제로 사람이 말처럼 빨리 달릴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강숙은 예외였다. 걸리는 적군을 베어 넘기지 않고 그냥 달리기만 한다면 결코 말에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사이 소질풍은 편월을 적의 낙오병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았다.

이제 편월은 엉뚱한 생각 따위는 지워 버렸다.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적을 베며 소질풍을 몰고 전진했다.

“와아앗, 당황하지 마라! 적은 단 두 명이다! 당황하지 말고 적을 쳐라!”

적의 낙오병 중 누군가가 자기편을 독려했다. 정작 그 말을 외치는 목소리는 심하게 떨려 비명인지 발악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막주군도 군병이다. 그 말을 듣자 달아나던 발길을 돌려 편월의 앞에 창을 곤두세웠다.

물론 그게 놈들에겐 불행이었다. 그대로 달렸으면 단 몇 각이라도 생명을 더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저항을 택함으로써 편월의 대도 아래 그 목숨을 디미는 결과가 돼 버렸다.

우선 편월은 소질풍을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맴돌게 했다. 적이 창을 겨누자 본능적으로 앞발을 치켜들려 했기 때문이다.

그건 위험한 일이다. 앞발을 들면 질풍의 배가 훤히 드러나고, 적의 창 중 하나가 찌를 수도 있다. 그걸 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편월의 대도도 손에 들린 장식물은 아니었다. 질풍이 한 바퀴 맴을 도는 사이 대도 역시 커다란 원을 그렸고, 그 궤적 안에 걸린 건 모두가 잘려 나갔다.

왈칵!

적들이 무너지며 피비린내가 새삼 편월의 후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이제 새벽이 머지않았음을 얘기해 주는 것일 터였다.

“대장, 앞장은 이 몸이!”

편월이 뛰어들자 강숙도 주변의 적들을 후려 베며 곁으로 다가왔다.

“닥쳐!”

차 던지듯 강숙의 말을 자른 후, 편월은 곧장 소질풍을 몰아 다시 앞으로 달렸다.

“조심하시오! 적의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오!”

강숙이 재차 고함으로 주의를 줬지만, 편월은 무시하고 달렸다. 이미 무너져 퇴각하고 있는 적이다. 매복을 펼친다고 해도 어설플 게 틀림없다. 그게 두려워 추적의 발길을 늦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편월은 강숙이 아닌 적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게 섰거라! 막주에는 사람이 없느냐? 여기 파양주 잡가군의 대장 편월이 있노라! 막주에 그 이름 있다고 알려진 자는 내 칼을 받으라!”

“으와앗-!”

편월로선 적을 도발해 달아나는 자들 중 한 놈이라도 더 벨 작정으로 지른 고함이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이미 편월이라는 이름은 막주군 사이에선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 이름을 듣자 적들은 더욱 발길을 빨리해 사방으로 달아났다.

‘놈들은 낙오병에 불과하다. 본대를 찾아야 한다!’

흩어지는 적들을 연방 찍어 넘기며, 편월은 감각기관을 총동원해 사방으로 뻗쳤다. 놈들이 이대로 수림 속으로 사라져 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놈들의 주력을 노려 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적어도 놈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아야만 한다.

“바보 대장, 거기 서!”

다시 발악적인 강숙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그는 편월의 말고삐를 잡고 있었다. 정말이지 날랜 걸음이었다.

“놔라! 놓지 못하겠나!”

“대장은 앞장서는 게 아니오! 내 뒤를 따르시오!”

“이러는 사이에도 적들은 점점 멀어져! 빨리 놔!”

“놓친 적은 다시 찾을 방도도 있겠지만, 대장은 한 번 잃으면 끝이오! 그러니 내 뒤를 따르시오!”

“이건 평소 강숙의 말 같지 않다! 적을 보고도 물러서란 말인가?”

“누가 물러서라고 했소? 내 뒤를 따라오란 말이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와두둑 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어느새 말에 오른 이탈병들이 들이닥쳤다.

“강숙 형, 여기 말!”

그 선두에서 달려오던 맹아가 강숙에게 말 한 필의 고삐를 던졌다.

“잡가군은 게 섰거라! 이번 작전의 선봉은 우리 적기군이 맡았다. 앞지르는 건 용서치 않겠다!”

사백 필에 이르는 말이 달리는 소음 속으로, 누군가의 고함도 섞여 들었다. 선봉을 맡은 적기군 대장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거기에 신경 쓰는 자는 없었다.

“적의 본대를 찾는다. 놈들이 어디로 가는지 파악해!”

“존명!”

근 사백에 이르는 이탈병들이 한꺼번에 내지른 복명 소리는 묘한 중압감으로 수림을 떨어 울렸다.

그때 배후에서 일기의 병사가 쏜살처럼 편월에게 달려왔다.

“전갈이오! 잡가군은 지금 즉시 후미로 빠지라는 명령이오!”

“뭣이? 그건 누구의 명령이야?”

“적기대장의 명이오!”

“그렇다면 들을 수 없어! 우린 잡가군, 총대장인 광운 장군의 직속이야. 그러니 다른 말 하지 마!”

편월은 전령에게 세차게 쏘아붙였다.

사실 이건 잘못된 일이었다. 아무리 편월이 잡가군 대장 노릇을 한다고 해도 정규군인 전령에게 이리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편월도 전령도 그 문제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인 양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어쨌든 명은 분명히 전달했소. 이후의 책임은 편월 대장이 져야 할 것이오.”

“알았어. 돌아가!”

그 말에 전령은 두말없이 말을 몰아 다시 돌아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언쟁이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전령이 가는 걸 본 편월은 등자를 딛고 몸을 세우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대로 적을 쫓는다! 이제 곧 날이 밝을 테니, 적을 놓치지 마!”

“와아아-!”

“간다앗!”

편월의 한마디에 이탈병들은 일제히 말에 박차를 가했다. 오랜만에 탄 말인지라 사기가 더욱 충천한 모습들이었다.

넓게 산개해 가는 이탈병들의 선두로 편월은 소질풍을 달리게 했다. 이대로 앞장서서 적을 추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서진청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대장은 가운데요!”

편월의 고삐를 쥔 서진청은 속도를 늦춰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편월도 순순히 따랐다. 일단 적의 매복을 분쇄한 이상 자신이 진두에 서서 추격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적의 역습에 대비해 전체를 조율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알았다. 너도 얼른 선두로 나서!”

“대장이 염려스러워 갈 수가 없소. 곁에서 지키겠소.”

“걱정 말고 가! 이번에 놈들을 놓치면, 다시 시작해야 돼. 그러니 반드시 따라잡아!”

잠시 편월을 노려보던 서진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승복했다. 지난 한 달여의 고생이 오롯이 그의 뇌리에 떠오른 탓이었다.

“그럼 부디 가볍게 행동하지 마시길.”

다시 한마디 주의를 준 후, 서진청은 곧장 전방으로 말을 몰았다.

기실 서진청은 편월과 함께 전쟁을 치르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나이가 어리면 어떠랴! 지금까지 잡가군으로 떠돌면서 그처럼 완벽한 지휘자는 만난 적이 없는데…….

‘남은 평생을 저 아이와 함께하리라.’

이처럼 굳은 결심이 서진청의 가슴에 서리는 순간이었다.

그즈음 목철린은 벌써 침사성에 들어가 있었다.

“활 부대는 모두 집결하라! 백성들 중에서 활을 쏠 줄 아는 자들은 병기고로 가서 활을 지급받아라!”

유인과 매복이 모두 실패했다는 보고는 아직 목철린에게 도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철린은 침사성 전체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긴 세월 동안 전장에서 뒹군 경험이 그로 하여금 이런 준비를 갖추게 한 건지도 모른다.

“동문을 제외한 모든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라! 불에 탈 만한 것들에는 물을 끼얹어라!”

둥둥둥둥둥-!

그제야 높은 망루에서 우렁찬 북소리가 침사성을 들썩이게 하면서 울렸다.

동시에 말을 탄 기병들이 성내를 마구 달리며 백성들을 깨우랴, 적의 공격에 대비한 준비를 하랴, 성문을 단단히 봉쇄하랴 정신없이 움직였다.

아직 새벽은 멀다. 남국 특유의 젖빛 안개가 스멀거리며 지상 위로 그 범위를 넓히고 있었지만, 동녘 하늘은 여전히 아슴푸레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목철린이 돌아온 이후 침사성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집집마다 불이 밝혀진다 싶더니, 거리의 교차로마다 화톳불이 피어올라 성 자체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풍기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목철린의 명에 따라 한때 종군을 했거나, 아니면 약간의 무예를 익힌 자들은 모두 병기고로 몰려들어 갑옷을 비롯한 무구를 지급받았다.

그렇게 침사성의 백성들과, 목철린을 따라온 병사들이 속속 성루에 배치되었다.

“성 밖 양편에 화톳불을 살라라. 이제 곧 아군들이 복귀한다. 그들이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불을 한껏 피워라!”

침사성은 둘러싼 해자가 없다. 목철린의 성격이나, 막주군의 특성상 성에서 적을 맞아 싸우는 것보다는 나가서 싸우는 걸 선호했기에 처음 지을 때부터 허술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 점이 지금 이 순간 목철린의 가슴에 때려 박히는 못이 되었다.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미리 예상치 못했었기에, 오늘의 후회는 더욱 씁쓸한 침이 되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갑자기 성문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목철린의 명에 따라 화톳불을 지피러 갔던 자들이 혼란에 휩싸여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주군, 전방에……!”

부하의 외침이 들렸을 때에야 성내를 살펴보던 목철린의 눈이 성 밖으로 돌아갔다. 짙은 어둠, 그보다 더 짙은 수림의 그림자를 배경으로 일단의 군마가 움직이고 있는 게 확연히 보였다.

“적이냐?”

아직 적이 여기까지 밀고 올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목철린은 나직이 물었다. 그 목소리에 약간의 긴장이 묻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은… 아, 아군입니다. 아군이 틀림없습니다!”

부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아직은 어둠 속이라 기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확신하는 건, 그 군세에 앞서 일기가 재빨리 성으로 접근하는 걸 본 탓이었다. 그건 분명 전령일 게고, 아군의 본대가 성으로 들어오는 걸 알리려는 것이리라.

“아군이다! 아군이 복귀하고 있다! 당황하지 말고 맞아들여라! 사수는 대기하라! 아군의 뒤를 적군이 추적할지도 모른다! 각 장수들은 향전을 준비하여 사수들을 유도하라!”

“사수 준비!”

목철린의 명에 따라 곁에 있던 부하가 대기하고 있는 군병과 백성들에게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명이 있기 전까진 절대로 발사해서는 안 된다! 특히 자원한 백성들은 이 점을 유의하라!”

재차 내지르는 부하의 고함을 들으며, 목철린의 눈길은 성루를 한 바퀴 휩쓸었다.

‘열흘이다. 열흘만 버티면 허주의 조환이 병사를 움직인다.’

하지만 지금 성루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병사들이나 백성들을 보니 그 열흘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자칫 약해지려는 마음을 목철린은 재차 다잡았다. 아직 삼만에 이르는 병사들이 남아 있고, 비록 허술한 성이라지만 넉넉한 양식도 비축하고 있다. 싸우기에 따라선 열흘 아니라, 그 열 배도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와루루루-!

마치 땅이 진동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일단의 부대가 성으로 들어왔다. 저우를 필두로 하는, 적의 본대를 유인하러 갔던 오천의 군병이었다.

“보고! 매복에 나섰던 고강 장군을 비롯한 오천의 아군은 적의 역습에 걸려 고전 중!”

저우의 군 속에 고강의 전령도 끼어 있었나 보다. 망루로 올라오기 전에 벌써 숨 가쁜 보고가 목철린의 귀를 두드렸다.

‘적의 역습?’

공격 뒤의 고전이라면 모를까, 역습이란 건 애당초 계산에 없던 것이었다. 목철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다시 ‘와아-!’ 하는 함성이 수림을 배경으로 들려왔다.

목철린은 재빨리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회청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안개를 뚫고 다시 한 떼의 군마가 성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한눈에도 지독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보였다.

“적이다! 피아가 섞여 있다! 사수들은 신중히 발사하도록!”

명을 내리는 목철린의 음성은 무거웠다. 매복으로 적의 본대에 기습을 가한 고강이 비교적 손쉽게 철수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고강의 부대와 적병이 뒤섞여 난전을 벌이며 철수하고 있다. 선뜻 활을 쏠 수가 없으니 목철린으로선 발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뚜우우-! 뚜우-!

돌연 소라고둥 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막 복귀한 저우의 부대가 다시 성 밖으로 출격하고 있었다. 물론 철수하는 고강의 부대를 돕기 위함이었다.

그제야 잔뜩 굳어졌던 목철린의 어깨가 조금은 풀려 갔다.

2

아침 햇살 속을 달리는 편월의 갑옷엔 서너 대의 화살이 꽂혀 덜렁거리고 있었다.

편월만이 아니었다. 소질풍을 보호하기 위한 앞가리개에도, 또 엉덩이에도 화살이 꽂혀 하얀 깃털이 뒤로 나부꼈다.

“대장, 참으시오! 이건 명령이니 어쩔 수 없소. 그러니 고정하시오!”

편월의 뒤를 따르며, 서진청은 한사코 그를 말리려 들었다. 광운에게 가는 게 아니라, 곽준방에게로 곧장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분명했고, 서진청도 편월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했다. 막주군을 침사성에 다시 몰아넣은 건 광운이 이끌고 왔던 지원군과 잡가군이었다.

그런데 이 아침, 곽준방은 갑자기 기호산에서 내려와 침사성 공격을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 지원군에 공성용 무기가 모자란다는 게 그 이유였지만, 그건 명백한 공훈 찬탈이었다.

그러니 편월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새벽부터 맹렬하게 침사성을 공격하던 중, 물러나라는 명을 듣자마자 이렇게 곽준방에게 따지려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서진청이 앞장서서 곽준방에게 따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공훈 찬탈은 전장에 나선 사나이들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 어쨌든 편월을 비롯한 오백 명은 전시에 부대를 이탈했다. 만약 곽준방이 그 죄를 물어 온다면 난처해지는 건 오히려 이쪽이 된다. 우선은 참고 또 참아서 이탈에 대한 얘기부터 매듭짓는 게 순서다.

“잡아! 아무나 대장을 잡아!”

아무리 기를 써도 편월의 소질풍을 따라잡는 건 무리라고 여긴 서진청은 돌연 전방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미리 철수한 이탈병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한 것이었다.

그 말에 따라 두 사람이 후다닥 달려 나와 곧바로 소질풍의 앞을 가로막았다.

끼히히히힝-!

갑작스러운 방해로 소질풍은 앞발을 번쩍 치켜들었고, 그 등에 몸을 바짝 붙이고서야 편월은 간신히 낙마를 면할 수 있었다.

“비켜! 막으면 베어 버린다!”

앞을 막은 두 사람이 강숙과 맹아임을 알아본 편월은 거칠게 내뱉었다. 수중에 들린 대도가 연방 파르르 떠는 게 정말이지 베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벨 테면 베시오! 대장 손에 죽는 거라면 여한은 없소!”

“나도!”

강숙이 먼저 튕겨 내듯이 대꾸했고, 그 뒤를 맹아가 밉살맞게 따라 했다.

“에이익!”

쉬잇-!

편월의 대도가 기어이 허공을 그으며 떨어져 내렸다.

“아앗!”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탈병들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성이 토해졌다. 개중에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자들도 없지 않았다. 그만큼 편월이 휘두른 대도는 치명적인 살기를 띠고 두 사람에게 날아들었던 것이다.

째앵!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사람들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달려온 서진청이 창날로 편월의 대도를 막은 걸 본 까닭에서였다.

“정말 벨 작정이었소?”

“비켜!”

“좋소이다. 이왕에 베려거든 나부터 먼저 베시오! 이런 한심한 꼴의 대장은 더 이상 지켜보기도 지겹소!”

“뭐?”

“언제까지 광운 장군에게 어리광이나 피우고 있을 생각이오? 이제 좀 어른이 되도록 하시오!”

계속되는 서진청의 질타에 편월은 말을 잊어버렸다. ‘어리광’이라는 한마디가 정수리에 얼음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짜릿하게 전신을 조여 왔다.

어쩌면 서진청의 말대로 자신은 광운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광운이 그 뒤처리를 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지녔던 편월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진청에게 정면으로 그 점을 지적당하자 전신이 부르르 떨리는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어리광이란 말이지?’

지금까지 편월은 자신을 어린애 취급 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꼬마 대장’으로 불리면 신경질이 치밀었다.

‘어른이 되라고?’

단순히 키만 껑충하니 자란다고, 덩치만 커진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란 점은 편월도 익히 알고 있다. 남자다운 분별력을 갖추고, 한 사람 몫을 톡톡히 해내야만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편월은 잡가군이라 해도 일군의 지휘를 맡고 있는 몸이다. 따르는 부하들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본다면, 그가 되어 가야 할 어른은 그 누구보다 무거운 짐을 어깨에 싣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장이라면 무엇보다 부하들부터 먼저 건사해야 하는 거요. 그런데 이 꼴이 뭐요? 언제부터 우리 잡가군이 정규군과 공훈을 다퉜소? 우린 그저 지휘관이 죽으라고 한 자리에 가서 죽으면 그만이오!”

“알았어!”

이어진 서진청의 말을, 편월이 세차게 잘라 버렸다.

“알아주겠소? 그럼 이대로 돌아가는 거요?”

“그래, 우린 잡가군이었어. 잠깐 잊었었지만, 이제 다시 생각났어. 돌아갈 것도 없어. 난 여기서 상처나 치료할 거야. 소질풍도 좀 봐 줘.”

말을 마치자 편월은 훌쩍 소질풍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네놈들 상통을 보니 마치 개가 뜯어 먹다 남긴 거 같군. 따라와!”

여전히 이를 악다문 자세로 서 있는 강숙과 맹아를 보며 편월은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러고는 갑옷에 꽂혀 덜렁거리는 화살들을 뽑아 던지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대장께서 오셨다!”

누군가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고, 사람들은 편월에게 길을 비켜 준다, 자리를 만든다 하며 잠시 부산스레 움직였다.

편월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면서 오직 자신만 믿고 이탈병이라는 엄청난 오명을 뒤집어쓴 사람들이다.

그뿐이라면 또 괜찮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이들은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들도 누리지 못한 채 목숨을 걸고 싸웠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없는 백여 명의 목숨들이 그걸 증언해 주고 있었다.

“두건득!”

돌연 편월은 큰 소리로 외쳐 불렀다.

“여기 있소. 뭐 그리 큰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오?”

편월의 바로 뒤에서 두건득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상병을 인솔해서 먼저 철수했던 두건득이었다. 막상 본대로 돌아가 보니 거긴 출동 준비가 한창이었던 터라 합류해 봐야 별 뾰족한 수도 없겠다 싶어 그 근처에 은신하고 있다가, 편월과 이탈병들이 합류한 후에야 그도 복귀를 했던 것이다.

“물을 끓여!”

“뭐요? 마실 물이라면 벌써 저렇게 끓고 있소만…….”

“그게 아냐! 목욕물, 목욕물을 끓여!”

“목욕물?”

“그래. 이놈들 꼴을 좀 봐! 모르긴 해도 붕알에 이가 득실거릴 거야. 그러니 좀 씻자고!”

편월은 다른 이탈병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지만, 실제론 그 자신의 몸에 이가 생겼다. 이제 겨우 거뭇거뭇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성기 주변의 털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곽 장군이 침사성을 공격할 거요. 그런데 우린 목욕이나 하고…….”

“상관없어! 앞으로의 전쟁은 자기들이 하겠다고 했으니, 우린 목욕이나 하면서 구경하자고.”

“알겠소!”

기실 두건득도 그 점을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적군과 싸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내 몸에 있는 기생충과의 싸움은 사람의 피를 말리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비단 두건득만이 아니었다. 편월 주변에서 그의 명을 들은 이탈병들이 일제히 술렁거렸다. 전장에서의 목욕이란 걸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두건득의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어서 준비를 하라는 얘기였다.

그에 따라 이탈병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례가 없는 일을 해치운다는 묘한 흥분에 휩싸인 그들의 사기는 엄청나게 높았다.

비록 공훈을 찬탈당하고, 싸움에 있어서도 후방으로 돌려졌지만 말이다.

목욕이 시작되었다. 전장이라 제대로 된 욕조가 있을 턱이 만무한지라 커다란 구덩이를 몇 개 파고, 그 안을 돌로 엉성하게 감싼 게 전부였다. 그 속에 몇십 명씩 한꺼번에 들어가 몸을 씻는다는 식이었다.

그래도 이탈병들의 기분은 한껏 고조되었다. 이곳 막주의 남단은 더운 지방이라 뜨거운 물이 필요 없지만, 그래도 한 달여 만에 몸을 녹이니 전신의 뼈마디가 하나씩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편월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급조한 욕조에 뛰어들었다. 이제 한창 중천을 향하기 시작한 태양 아래에서의 뜨거운 목욕이 저절로 그의 눈을 감기게 만들었다.

둥둥둥둥둥-!

급박한 북소리가 침사성 쪽에서 들려왔다. 곽준방이 본격적으로 성 공격에 나선 모양이었다.

적과 아군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 지축을 뒤흔들며 달리는 말발굽 소리, 허공을 꿰뚫는 화살의 파공성을 들으며 편월은 끄덕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비로소 지난 한 달여의 피로가 그의 눈두덩을 무겁게 내리누른 것이다.

* * *

그날 곽준방의 침사성 공격은 형편없는 실패였다. 저녁에 작전에 대한 강평講評 회의가 열렸지만, 입에 담을 것도 없을 정도였다.

그 실패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하나는 해자도 없는 벌거숭이 성을 지키기 위한 막주군의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병사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동원된, 한마디로 막주 전체가 목숨을 도외시한 채 수성에 임했으니 어떤 용장이라도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침체된 파양주군의 사기였다. 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전쟁에서 적의 야습에 당해 기호산으로 물러간 지 석 달, 그동안 손도 발도 내밀지 못하고 있다가 지원군이 오고 나서야 겨우 전세를 역전시켰다. 바로 이 점이 파양주 정규군 전체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전쟁에 대한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거기다 오늘 공격은 명백한 공훈 찬탈이었다. 입 열어 말하지는 않아도, 말단 졸자들까지 곽준방의 처사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누구보다 다섯 부장들이 그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으니,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 같은 싸움의 뒤끝이었으니, 강평의 자리라고 해 봐야 누구도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막주 토벌에 나선 파양주군 전체의 총대장이랄 수 있는 곽준방부터 말이 없었다. 그로선 공훈을 찬탈했다는 비난까지 받으며 싸운 뒤의 실패였으니 실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어험, 험!”

장내를 짓누른 침묵이 숨 막히는 듯, 구문생이 헛기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곽준방 막하의 다섯 부장 중 비교적 나이가 많으니, 뭔가 한마디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오늘 비록 침사성을 떨구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패한 건 아니오. 자고로 성 공격은 서둘지 말라고 했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해 보기로 합시다. 자, 누구부터 말씀하시겠소?”

“야습!”

구문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편월이 한마디 툭 던졌다.

“조용히 해라, 편월!”

곁에 있던 광운이 재빨리 편월을 나무랐다.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고, 또한 그럴 처지도 되지 못했다. 어쨌든 아직 이탈병들에 대한 처리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오, 광운 장군. 말리지 마시오. 여기는 허심탄회하게 내일의 작전을 논의하는 자리요. 그러니 꼬마 대장의 말을 막지 마시오. 자, 말해 보게. 야습을 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새벽부터 시작된 아군의 공격이 저녁까지 이어졌어. 그러니 놈들도 잔뜩 지쳐 있을 거야. 이럴 때 야습을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어?”

구문생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지만, 묘하게도 편월의 시선은 광운을 향하고 있었다. 구문생에겐 대놓고 반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병사들도 지쳐 있는 건 마찬가지일세. 이래서는 야습도 힘들지 않겠나?”

“잡가군은 낮에 푹 쉬었어. 그들만 붙여 주면, 이 밤 안에 성을 떨굴 수 있을 거야.”

“편월!”

광운이 재차 거친 어투로 편월을 제지했다. 반말을 하는 듯한 그 말투도 문제였지만, 얼토당토않게 하는 장담이 마음에 걸렸다. 사기 진작을 위해 병사들 앞에서 더러 큰 소리를 치는 경우는 있지만, 여기는 작전 회의석이다. 농담이나, 되지도 않을 자신감이 통할 턱이 없다.

“아니, 이건 일리가 있는 얘기인 거 같소. 어떻소, 대장군? 여기 꼬마 대장에게 야습을 맡겨 보면. 실패한다고 해도 내일이면 적들이 더 지칠 테니, 공격하기도 쉬울 것 아니겠소?”

구문생은 잔잔한 어조로 곽준방의 뜻을 물었다. 어쨌든 파양주군 전체에 대한 지휘권은 그에게 있으니 그의 결정이 가장 중요했다.

“하기야 오늘 편월 대장은 부하들과 느긋하게 목욕을 즐겼다고? 참 대단한 뱃심이야! 그 정도라면 야습을 맡겨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거야.”

밝은 목소리로 여상계가 끼어들었다. 그 역시 편월이 야습을 감행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말을 약간 돌려서 한 셈이었다.

“소장도 야습에는 찬성이오. 꼬마 장군만으론 정히 불안하시다면, 이 몸도 가담하겠소.”

우효금이었다. 다섯 부장 중 비교적 신중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편월에게 동조하고 나선 건, 그 역시 파양주군의 사기가 침체되어 있는 게 원인이었다.

“제장들의 뜻이 그렇다면, 잡가군의 야습을 허락한다. 정규군은 그동안 휴식을 취하고, 내일 공격을 대비하도록.”

드디어 곽준방이 묵직한 어조로 명을 내렸다. 비록 잡가군만의 공격을 허락했지만, 편월로선 그걸로 충분했다. 애당초 손발이 맞지 않는 정규군과 같이 작전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할 터였다.

“뭐 필요한 건 없나?”

일단 명이 떨어지자 여상계가 편월에게 물었다. 그로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었다.

“필요한 건 다 있소.”

퉁명스레 대꾸한 편월은 곧바로 밖으로 달려 나가 전령을 불렀다.

채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잡가군은 한 명도 빠짐없이 집결하였다. 낮에 푹 쉬어 둔 덕분이었다.

처음 파양주를 출발했을 때의 잡가군은 정확하게 오천이었다. 그런데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는 사이 혹은 전사하고, 혹은 부상을 당해 지금 모인 인원은 사천이백여 명에 불과했다.

큰소리를 뻥뻥 쳐 놓긴 했지만, 편월로선 걱정되지 않을 수 없는 숫자였다. 침사성에 들어앉은 막주군만 해도 삼만, 거기다 백성들까지 총동원된 상태였다. 고작 사천을 웃도는 병력으로 공격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과연 그들이 곽 대장군의 허락 없이 움직여 줄까?’

야습을 준비하는 편월에게 다섯 부장들은 하나같이 지원을 약속했다. 성문만 확보하면 부하들을 이끌고 공격에 가담하겠다고 말이다.

물론 편월은 그들 개개인을 신뢰하고 있다. 다만 전쟁에서의 군사 움직임은 총대장의 허락이 떨어져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의 곽준방이라면 잡가군이 성에 돌입해서 길을 터 줘도 지원을 해 준다고 바랄 수는 없었다.

‘언젠 정규군의 지원을 믿고 싸웠나, 뭐.’

그렇더라도 지원받을 게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걸 위해 광운을 찾으려던 편월은 문득 발길을 세웠다. ‘언제까지 그에게 어리광을 피우려는가.’ 하고 질타하던 서진청의 목소리를 떠올린 탓이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편월은 발길을 돌렸다. 광운 대신 여상계에게 직접 부탁하려는 것이다.

여상계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편월을 반가이 맞아 주었고, 그의 지원 요청도 흔쾌히 수용했다. 곽준방의 지시가 없어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길로 편월은 잡가군이 집결한 곳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두건득을 필두로 한 각 대의 대장들이 모여 있었다.

“본격적으로 성을 치는 건 지금부터 한 시진 뒤인 자시 정각이다. 그 전까지는 적어도 성에서 일 리까지는 접근해 있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절대로 공을 다퉈 먼저 성에 싸움을 걸지 마라! 자칫하다간 아군의 화살 밥이 되기 십상이니까.”

편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연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바로 여상계가 약속했던 지원이었다.

“다른 공성 무기는 없다. 해자가 없는 침사성, 오직 우리 힘으로 뚫고 들어간다. 하지만 명심해라! 우리의 임무는 성을 점령하는 게 아니다. 성문을 확보하면 정규군을 기다린다. 그들이야 오든 말든, 우린 오직 성문만 사수한다! 알겠나?”

“알았소!”

“성문만 확보하란 말이지? 젠장!”

역시나 맹아의 입에선 불만에 찬 소리가 튀어나왔다. 쳐들어가 성을 떨구는 게 아니라, 성문만 확보하라는 게 직성엔 맞지 않아서였다.

묘한 건 그보다 더 격렬한 성미를 지닌 강숙이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눈엔 강한 불만의 빛이 감돌고 있었지만, 입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굳게 다물려 있었다.

“좋아. 그럼 두건득부터 출발해. 선봉 싸움은 엄격히 금한다! 알겠지?”

어차피 오천도 채 안 되는 병력으로 침사성을 포위 공격할 수는 없다. 정면에 보이는 동문을 집중 공격할 수밖에는…….

마침 막주군도 성 밖에 나와 진을 치고 있다. 해자가 없으니 그렇게라도 성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막으려는 의도이리라.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편월은 생각했다. 적의 숫자는 삼만, 백성들을 총동원했다고 해도 실제 전력에 보탬이 되는 건 그 배를 넘지 않을 터였다.

거기에 침사성은 지켜야 할 성문이 적어도 네 개는 된다. 병력을 그만큼 쪼개야 하니, 첫 전투에서 상대해야 할 될 적은 많아야 일만에 불과할 것이다.

‘그 정도라면 해 볼 만하다.’

편월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선두 출발을 명받은 두건득이 일천의 잡가군을 이끌고 진막을 떠났다. 그 뒤를 다른 부대들이 뱀처럼 길게 꼬리를 물었고…….

여전히 밤의 허공에선 여상계의 병사들이 쏘는 화살이 울어 대고 있다.

그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움직이기 시작한 잡가군은 둔중한 무게감으로 침사성의 동문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3

미리 정해 둔 대로, 자시를 기해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 공격에서 편월은 달리 명령을 하달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최선이었다.

그 점에 있어 편월은 어느 정도 낙관하고 있었다. 우선 누가 말려도 듣지 않을 강숙과 맹아가 있고, 또 막주군은 아침부터 조금 전까지 시달릴 대로 시달렸다. 전쟁이 인간 체력의 극한까지 발휘할 것을 요구하는 행위라면, 적이 느끼고 있을 피로감이 그들에겐 가장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되리라.

실질적인 지원군의 총대장이란 직분 때문에 직접 공격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광운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병사들을 동원해, 다른 성문을 지키고 있는 적병들이 동문으로 지원을 나가지 못하도록 은근히 억눌러 주었다.

그러한 상황 속의 싸움이다. 이것저것 쓸데없는 명을 내려 싸움에 나선 병사들의 손발을 구속할 필요는 없다.

거침없이 말을 몰아 간 편월은 선두로 나섰다. 성과의 거리는 불과 일 리, 눈 깜박할 사이에 성문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 전에 방해물이 없지는 않았다. 진즉부터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던 막주군이 의외로 완강한 저항을 보였다.

‘반 각도 버티지 못한다.’

저항이 완강하면 완강할수록 적들이 느끼는 피로감도 더욱 가중된다. 초반엔 반짝하겠지만, 그건 곧 무너질 게 뻔하다.

각 소부대를 지휘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편월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가 선두로 나섰음에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았다.

“여기를 보라! 강숙이 있노라! 나라고 알아보는 막주의 개들은 길을 비켜라!”

역시 난전에서 가장 설치는 건 강숙이었다. 밤의 정적을 깨는 커다란 고함을 지른다 싶더니, 수중의 창을 귀신처럼 놀려 서너 명의 막주군을 찍어 넘겼다.

“졸자들은 상대하지 않겠다! 막주의 장수는 썩 나서라!”

재차 부르짖는 강숙의 외침을 들으며, 편월의 눈도 연방 번뜩이며 전장을 누볐다. 그 역시 적장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목철린이 성 밖으로 나와 주둔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래도 막주군을 지휘하는 자는 있을 터, 그 목을 베어 진즉부터 피로에 지쳐 있는 적의 사기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겠다는 것이 편월의 생각이었다.

“대장, 충차요! 충차가 왔소!”

편월의 눈이 적의 장수기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가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세찬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광운의 휘하에 있는 파양주 정규군의 부장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이 이끌고 온 건 충차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장작더미를 쌓고 불을 질러, 전장을 훤하게 밝혀 두고 있었다.

“누가 보낸 거야?”

“광운 장군이 곽 대장군에게 부탁을 했다고 알고 있소. 동원된 건 모두 다섯 대, 잘 사용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부장은 다시 달려가 버렸다.

편월은 말을 돌려 충차를 살펴보았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그것들은 마치 침사성을 한입에 삼켜 버릴 듯한 괴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편월은 당장 그 충차를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그걸 운용해 봐야 성 밖에서 저항하고 있는 적들에게 당할 공산이 크다.

게다가 적은 성 밖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성벽 위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방 화살을 날리고 있다.

‘우선 성 밖에 있는 적들부터 친다.’

그래야만 제대로 성을 공략할 수 있게 될 게다.

그렇게 진두에 서서 적장을 찾는 편월의 눈에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적병 일기가 보였다. 그 앞을 가로막은 잡가군은 그대로 베이거나 말발굽에 차여 나가떨어졌다.

“막주의 군도옥, 편월의 목을 받으러 왔노라!”

‘군도옥?’

저만치서부터 고함을 지르는 적의 이름을 들으며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적장 중 그 이름을 아는 건 목철린과 풍소성에서 자신의 손에 죽어 간 저황뿐이란 걸 깨달았다.

‘앞으론 적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군.’

군도옥을 향해 마주 말을 달리는 편월의 눈은 연방 전장을 훑고 있었다. 적들 가운데선 이름 있는 자일지 몰라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는 못할 터였다.

두 마리 말이 서로 비껴 지나갈 때, 편월은 대도를 휘둘렀다. 지금까지의 싸움에서 익숙해진 동작 그대로였다.

편월은 의심치 않았다. 이 한 번의 행위로 군도옥은 두 동강이 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째앵!

강한 쇳소리가 들린다 싶은 순간 편월의 대도는 군도옥의 삼지창三枝槍에 얽히고 말았다.

“닷!”

편월의 입에서 기괴한 일성이 토해졌다. 예상과는 빗나간 결과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 분노는 자연스레 다음 행동을 결정했다. 대도를 아래로 확 끌어내려 군도옥의 삼지창을 떨쳐 낸 편월은, 그대로 다시 쳐올려 말과 사람을 동시에 쪼개려 했다.

“얕보지 마랏!”

군도옥 역시 한소리 크게 내지르며 창을 앞으로 쭉 내질렀다.

이게 더 빨랐다. 편월의 대도가 군도옥의 말에 닿기도 전에 벌써 그의 창은 편월의 가슴을 찍었다. 기형적으로 크고 무거운 병기가 지닌 단점 중 하나가 그대로 드러난 셈이었다.

티잉!

가슴을 격타당한 편월은 그대로 말 위에서 뒤로 벌렁 자빠졌다. 꿰뚫리지 않은 건 순전히 갑옷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편월의 대도는 그저 놀고만 있지 않았다. 아래에서 위로 쳐올린 기세가 고스란히 살아 있어 군도옥의 말 목을 깊숙이 그어 버렸다.

쿠웅!

편월이 낙마하여 바닥에 처박혔을 때, 군도옥의 말 역시 그 자리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편월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군도옥의 창에 격중당한 부분이 뻐근하게 아려 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일어나던 탄력을 그대로 살려 편월은 대도를 크게 한 바퀴 돌렸다. 어느새 군도옥의 부하들로 보이는 적병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어서였다.

“차아압!”

편월의 입에서 재차 커다란 기합성이 토해졌을 때, 그의 몸은 훌쩍 허공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거운 병기를 지닌 것에 비해 실로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쉬이잇-!

그렇게 허공에 뜬 상태로 편월은 대도를 휘둘렀다. 물론 목표는 이제 막 몸을 일으키고 있는 군도옥이었다.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며 군도옥은 창을 세웠다. 그 와중에도 약한 창대가 아닌 날로 편월의 대도를 막는 걸 보면 그 역시 숱한 경험과 오랜 수련의 시간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채앵!

두 개의 병기가 부딪치며 재차 불꽃이 튀었다.

그렇다고 편월의 대도에 실린 그 엄청난 힘까지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헉!”

답답한 신음성을 내뱉으며, 군도옥은 일으키던 무릎을 다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군 장군을 구하라! 모두 달려가 군 장군을 구하라!”

편월의 대도가 재차 허공으로 쳐들렸을 때, 몇 대의 화살이 날아와 편월의 갑옷을 두드렸다. 미처 곁으로 접근하지 못한 적병들이 날린 것이었다.

“이때다! 모두 달려들어 저놈을 쳐라!”

“와아아!”

화살에 당한 편월이 주춤거리는 사이, 누군가의 명에 의해 적병들이 왈칵 몰려들었다. 군도옥을 구하기 위한 필사적인 행동이었다.

편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자다!’

이 밤의 야습이 시작된 이후 줄기차게 찾고 있던 적장을 드디어 발견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바로 군도옥을 구하라는 명을 내렸던 자!

밀려오는 적들을 베어 넘기며, 편월은 소질풍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이제 군도옥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다른 곳으로 가 버리기 전에 적장을 베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바쁘기만 할 터였다.

다행히 잡가군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늘 편월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서진청을 필두로 일대의 군마가 군도옥과 그 주변의 적들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그사이 소질풍에 오른 편월은 등자를 딛고 몸을 세워 사방을 살폈다. 화살이 연방 귓전에 강한 소리를 남기며 날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다!’

편월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 빛을 발했다. 눈이 팽팽 돌아갈 것만 같은 난전 속에서도 고요한 섬처럼 뭉쳐 있는 일단의 적병들을 본 탓이었다.

그게 의미하는 건 오직 하나였다. 바로 적의 총대장이라는 것!

“하아!”

본 이상 망설일 것 없는 편월이었다. 곧바로 소질풍의 엉덩이를 걷어차 적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와앗, 적이다! 막아라!”

“대장군을, 대장군을 보호하라!”

아직 거리가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적의 기치가 어지럽게 흔들린다 싶더니, 이 기의 무장이 이끌린 듯 달려 나왔다.

“이름 없는 자는 상대하지 않겠다! 파양주의 잡가군 대장 편월의 칼은 막주군 대장군의 목을 찾는다! 이름을 세워 전장에 나선 자거든 썩 앞으로 나서라!”

큰 소리로 외치는 것과, 대도를 휘둘러 두 명의 적을 베어 가는 걸 동시에 해치우는 편월이었다.

애당초 편월은 그 둘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적의 본대로 보이는 곳에 있는 적장만을 노리고 곧장 달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두 명의 적도, 가리고 뽑혀 막주의 대장군인 저우의 측근에 있게 된 자들이다. 한 명이 편월의 대도를 막는다 싶자, 다른 한 명이 곧바로 그 옆구리를 노리고 창을 내질러 왔다.

“핫!”

편월의 입에서 절로 다급한 외침이 토해졌다. 싸울 작정이 아니었던 적의 매서운 반격은 이처럼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평생을 전장에서 누빈 편월의 현란한 몸놀림이 나타난 건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대도에 얽힌 적의 창을 떨쳐 내며 찌르는 창에 밀려 옆으로 낙마한다 싶더니, 그대로 소질풍의 배 아래를 한 바퀴 빙글 돌아 다시 그 등에 올라앉았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절묘한 기마술이었다.

게다가 편월의 대도도 그냥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말 등으로 오르는 기세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쭉 그어져, 창을 내지른 자의 허벅지를 잘라 그 다리 하나를 바닥에 처박히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자는 낙마했고, 그게 오히려 그에겐 다행한 일이었다. 처음 편월의 대도를 막았던 자는 곧이어 두 동강이 되어 뜨거운 선혈을 허공에 뿌리며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적 본대의 기치가 우르르 무너졌다. 일기의 장수가 달려 나왔고, 그 호위병들로 보이는 자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던 것이다.

“편월이라고 했느냐? 나는 막주의 대장군, 저우! 풍소성에서 죽은 동생의 원한을 갚겠노라!”

바로 이게 저우가 기치를 무너뜨리고 달려 나온 이유였다. 편월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에게 살해당한 동생의 얼굴이 떠올라 머리 꼭대기까지 피가 몰렸다.

편월로선 반가운 일이었다. 조속히 적장을 거꾸러뜨리면, 이미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는 막주군이 한꺼번에 무너질 테니 말이다.

게다가 저우의 작태도 한심스러웠다. 전장에서 서로의 생명을 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패전 끝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갚겠다고 기치까지 무너뜨리는 대장이라면 볼 장 다 봤다 싶었다.

그것도 벌써 육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사이 막주군과 숱한 전투를 치르면서도, 저우와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게 편월은 사뭇 이상할 따름이었다.

푸르르륵-!

편월의 재촉도 받기 전에 벌써 전쟁에 익숙한 소질풍이 거친 투레질을 하며 저우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뭣들 하느냐? 대장군을 보호하라!”

이 말은 뒤늦게 달려온 군도옥이 지른 고함이었다. 나이에 따른 관록과 병법에 조예가 깊어 저우가 대장군 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무예로선 자신보다 훨씬 뒤떨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외침은 더욱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막주군들은 필사적으로 달려 저우를 따라잡았다. 일부가 그의 말고삐를 쥐고 방향을 트는 사이, 나머지는 편월에게 덤벼들었다.

편월로선 눈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이 싸움을 보다 쉽게 끝낼 수 있는 방편이 바로 코앞에서 사라지려 하니 앞뒤 가릴 것도 없이 소리부터 냅다 질렀다.

“비겁하게 도망치느냐? 네놈의 동생은 비록 내게 목을 바쳤지만, 용감한 장수였다! 그런데 형이란 작자는 동생보다 못하구나! 그러고도 막주의 대장군이라고 할 수 있느냐?”

전장에 나서면 저절로 거칠어지는 편월의 입이었다. 비록 원색적인 욕은 없었지만, 저우의 입장이라면 오장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편월이나 저우나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한 사람은 가로막는 적병들의 방해 때문에, 또 한 사람은 한사코 고삐를 놓아주지 않는 부하들 때문에 속만 끓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거기다 결코 만만한 상대라고 볼 수 없는 군도옥까지 가세했다. 편월로선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진 셈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편월이 아니었다. 서너 명의 적을 베어 넘겨 공간을 확보한 편월은 대도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활을 꺼내 들었다.

편월의 동작은 눈부시게 빨랐다. 대도를 입에 물고, 꺼낸 활에 세 대의 화살을 재어 쏘기까지는 실로 눈 한 번 깜박이는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화살이 저우를 맞혔는지 어땠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활을 갈무리하기 바쁘게 다시 대도를 휘둘러, 날아드는 적의 병기들을 쳐 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편월에게 빛과도 같은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졌다.

“대장, 안심해요! 맹아가 왔어!”

그 말과 함께 편월을 에워싸고 있는 적병들을 후방에서부터 마구 후려 베어 넘기며 맹아가 뛰어들었다. 투구와 갑옷이 온통 적의 피로 범벅된 모습이었다.

그게 편월에게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정작 귀가 번쩍 트이는 고함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여기를 보라! 파양주의 잡가군 강숙이 적장 유개의 목을 베었노라! 눈이 있는 자는 여길 보라!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적장 유개의 목을…….”

연방 고함을 지르는 강숙의 목소리는 적들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움찔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유개는 저우가 총애하는 막주의 용맹한 장수 중 한 명이니,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 틈을 놓칠 편월과 맹아가 아니었다.

“맹아, 뒤를!”

“염려 말아요!”

짤막한 말과 간단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편월은 저우를 향해 소질풍을 몰아갈 수 있었다. 무예의 정교함이야 다소 뒤떨어질지 몰라도, 목숨을 도외시한 맹아의 저돌성이라면 군도옥은 물론 막주군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거기에 또 하나, 편월의 마음을 가볍게 하는 요소가 작용했다. 이미 패색이 짙어 가는 막주군을 몰아 댄 파양주의 잡가군이 속속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충차! 충차를 끌어라! 성문을 깨뜨려!”

성 밖에 주둔한 막주군을 확실히 물리쳤다고 확신한 편월은 그제야 충차를 동원할 것을 명했다.

이건 단순히 침사성의 성문을 깨뜨리는 걸 노리고서 내린 명은 아니었다. 누적된 피로로 인해 연방 물러서는 막주군의 퇴로를 끊는 것도 충분히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 명은 충차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오강에 의해 실행되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서 이제나저제나 때를 기다리고 있던 충차는 둔중한 굉음과 함께 서서히 그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막아라! 충차를 막아!”

저우 역시 커다란 목소리로 연방 부하들을 독려했다. 낮에 성이 함락되지 않은 건 저 충차를 적절히 막았기 때문이다. 해자가 없는 성문이라 곧바로 성문에 충돌한다면 결코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뻔하다.

그러나 성 밖에 주둔했던 막주군의 피로는 이미 한계를 넘고 있었다. 눈앞에서 충차가 달리는 걸 빤히 보면서도 제지하려고 움직이는 자들은 불과 몇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 인원으로 충차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달려드는 족족 충차에 깔리거나 파양주군에 의해 희생될 따름이었다.

곁눈으로 그 광경을 확인하며, 편월은 소질풍을 몰아 저우를 보호하려는 막주군을 마구 짓밟아 나갔다.

“막아라! 대장군을 보호해!”

“놈은 혼자다! 두려워할 것… 으악!”

저우의 측근들이 필사적으로 편월을 막았지만, 그건 인간 방패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피로감으로 인해 손발이 무거워져 있으니, 제대로 된 저항을 할 턱이 없었다.

“부하들의 생명이 아깝지 않나? 적장은 비겁하게 뒤로 빠지지 마라!”

편월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별 저항도 하지 못하는 적을 죽이는 건 마음에 걸렸다. 얼른 저우의 목을 베는 걸로 성 밖에서의 전투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편월의 그 외침이 간신히 진정되기 시작한 저우의 피를 다시 거꾸로 튀게 만들었다. 한사코 제지하는 측근들을 뿌리치고, 그는 곧바로 편월을 향해 말을 몰아 달려들었다.

그 순간 저우는 자신들이 패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처럼 편월과 직접 싸우려는 것도, 뒤가 없음을 알아 버린 자포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엔 한 가닥 형제애도 없지 않았다. 비록 시신을 개에게나 줘 버리라고 했지만, 먼저 죽은 동생에 대한 애틋함조차 지워 버릴 정도로 몰인정한 저우는 아니었다.

“대장군!”

“에잇, 대장군의 뒤를 따르라!”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전장에서 대장의 마음이 그대로 부하들에게 통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지금, 저우의 측근들은 그들이 모시는 대장군의 마음을 알았다. 패배할 것을 알고 옥쇄玉碎를 각오한 그 마음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히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되어 편월에게 몰려들었다.

편월도 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죽을 각오로 덤비는 적은 최선을 다해 상대해 줘야 한다. 그게 바로 전장에서의 예의다.

최초의 격돌은 편월과 저우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각자 휘두른 대도와 창이 엇갈린다 싶었을 때, 이미 두 사람은 서로를 지나쳐 각기 적들 한가운데로 빠진 꼴이 되고 말았다.

“물러서라! 내 상대는 오직 저우뿐이다!”

적들에게 둘려싸였다 싶은 순간, 편월은 벌써 저우의 측근 두 명을 베어 넘기며 소질풍의 말 머리를 돌렸다.

“모두 물러서라! 이건 적장과의 일대일 싸움이다! 간섭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소질풍을 몰아 대며 내지른 편월의 명에 파양주의 잡가군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저우를 내버려 두고 대신 그 측근들을 둘러싸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장수끼리의 일대일 대결에선 입보다는 서로의 병기가 얘기를 나누는 법이다.

“차압!”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렁찬 기합성을 토하며 두 사람은 얽혀 들었다.

차앙!

두 사람의 병기가 다시 한 번 어둠을 쫓는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을 때, 가장 선두를 달리던 충차가 침사성의 동문에 그대로 격돌했다.

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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