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승군략爲勝軍略
1
광운이 어렴풋이 이탈병들의 활동을 알게 된 건 한 달 정도가 지나서였다.
하지만 그걸 다른 병사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편월이 이탈병이라는 오명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쓴 건 어디까지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일 게다. 그걸 맹아 아비가 확인해 준 바도 있었다.
‘틀림없이 우리 군사들 사이에도 적의 간인은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병사들에게 편월의 활약을 알릴 수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편월의 행동은 너무도 파격적이었다. 그 바람에 광운은 진남후인 마용승에게서 추살의 명이라도 내려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방법밖에 없었을까? 가뜩이나 편월을 대하는 마 성주의 태도가 이상한 이때에…….’
그처럼 께름칙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광운의 막사로 여상계가 찾아들었다. 들어서자마자 그는 입을 열었다.
“역시 우리의 예상이 맞았던 거 같소. 꼬마, 아니 편월 대장의 이탈은 숨겨진 군이 되어 적들을…….”
“쉿!”
광운이 재빨리 여상계의 말을 막았다. 조금 전의 생각처럼 공공연히 입에 올릴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한 까닭에서였다.
여상계도 그 점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연 것은 막사 안에 광운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보이지 않아서였다.
“더 이상 쉬쉬할 일이 아닌 것 같소. 곽 장군의 의심도 여전하고, 이제 곧 주공의 귀에까지 들어갈 것 같소이다. 그러니 미리 손을 써 두는 게 좋지 않겠소?”
“미리 손을 쓰다니?”
“우리가 먼저 주공께 보고를 드리자는 거요. 그래야 편월 대장이 복귀했을 때 일이 쉬워질 거요.”
“딴은…….”
광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들의 보고가 있기 전에 마용승이 편월의 이탈을 안다면 어떤 오해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 전에 미리 귀띔을 해 두자는 여상계의 말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하지만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 보고를 곽 장군께서 직접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분도 편월을 오해하고 있으니…….”
바로 이 점이 광운의 마음에 걸렸다.
편월과 광운의 사이는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판에 자신이 직접 마용승에게 보고를 한다면 그 신빙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 무단으로 이탈한 자를 감싸고돈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여상계가 할 수도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곽준방의 부장 중 한 명이다. 마용승에게 보고를 하려면 지휘 체계를 통해야만 한다.
“그러게나 말이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보다가는 주공께서 어떤 오해를 하실지…….”
“조속히 이 전쟁을 마무리 짓는 게 상책이오.”
여상계의 동조에 광운은 단호한 어투로 내뱉었다. 마용승이 이 일을 알기 전에 전쟁을 승전으로 이끈다면 그도 달리 할 말이 없으리라.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전시에 군을 이탈한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오.”
“일단 이기고 나면, 그 이탈병들에게 대한 건 이 광운이 책임지겠소.”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말씀이오? 전장 이탈은 이유를 불문하고 참수요. 설마 광운 장군께서 그 죄를 뒤집어쓰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이 광운이 생각해 낸 작전이었다고 할 참이오. 울창한 수림에 숨어 유격전을 전개하는 적들을 상대할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말이오.”
“흐음…….”
침음성과 더불어 여상계는 생각에 잠겼다. 광운이 말한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하다. 과연 곽준방이 그걸 승인해 주느냐 하는 문제가 남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곽준방은 지독한 열등감에 휩싸여 있는 게 여상계의 눈에도 여실히 보였다. 호윤천이 물러난 후 파양주의 실질적인 대장군 노릇을 하면서도 막주군에 패해 기껏 침사성으로 몰아넣었던 적들을 다시 풀어 주고, 심지어 기호산까지 후퇴를 했으니 그 심정도 이해할 만했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곽준방은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툭 하면 광운의 작전 건의를 묵살하고, 사사건건 그의 행위에 트집을 잡았다. 그처럼 용렬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게다가 편월은 이번의 과감한 행동으로 막대한 전과를 올리고 있다. 막주군은 편월이 데리고 간 오백의 이탈병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또 그들의 지독한 손 속에 공포감까지 느끼고 있는 징후가 뚜렷했다.
‘그 점도 곽 장군은 못마땅해하고 계신다.’라는 게 여상계의 생각이었다. 자신이 패한 전쟁에서 광운과 편월은 막대한 전과를 올리고 있다. 가뜩이나 심기가 뒤틀려 있는 판에, 편월의 이탈이 작전의 일환이었다고 광운이 아무리 말해도 그게 곽준방에게 그대로 통할 리 만무했다.
“휴우…….”
문득 여상계는 긴 한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광운 장군의 말씀대로 우선 이기고 봐야 할 것 같소. 그것도 단시일 내에.”
어쨌든 이건 전쟁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 놓고 봐야 뒤에 할 말도 있을 터였다.
“그래서 모레 총공세를 감행할 예정이오. 마침 며칠간 비도 내리지 않았으니, 병사들이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거요. 이 뜻을 곽 장군께 잘 전해 주시오.”
“곽 장군은 움직이지 않으실 게요.”
“뭐? 그게 무슨 말씀이오?”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하는 여상계에게 광운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곽 장군이 움직이지 않으신다니? 대체 전쟁을 하겠다는 거요, 말겠다는 거요?”
연이은 광운의 질타에 여상계는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고개를 수그릴 뿐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시오! 저 수림 속에 들어앉은 막주군은 편월의 활약으로 잔뜩 위축되어 있는 상태요. 여기서 총공격을 감행한다면 그대로 괴멸시키거나, 최소한 놈들을 다시 침사성으로 몰아넣을 수 있소이다!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대체 곽 장군은 병법을 아시는 분인지 의심스럽소!”
“진정하시오, 광운 장군. 아까 그 말은 어디까지나 소장의 생각이었소. 누구도 곽 장군의 심중을 모르니, 소장이 다시 한 번 목숨 걸고 간언諫言을 드리겠소.”
“지고 이기는 건 어느 장수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오. 곽 장군만 한 무장이 어찌 한 번 패퇴했다고…….”
말을 잇던 광운은 갑자기 입을 닫았다. 더 이상 언급한다는 건 곽준방 개인에 대한 모독이다. 그것만큼은 반드시 삼가야 한다.
곽준방의 심정은 광운도 물론 안다. 다 이긴 전쟁에서 한차례 패해 군사를 물렸다는 수치심과, 그 후에도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초조감, 거기에 연전연승하는 자신에 대한 질투도 없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감정이다. 전장에 나선 장수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 서서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 그걸 하지 못하고 있는 곽준방이기에 광운은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한 것이다.
“아무튼 총공격은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소장이 오늘 중으로 기호산으로 가서 곽 장군께 간언을 드리리다. 정 가납嘉納되지 않으면, 소장 단독으로라도 휘하의 장병을 이끌고 광운 장군을 돕겠소!”
여상계도 이름난 장수다. 비록 군명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직속상관인 곽준방의 실수와 실책이 조금이라도 감해지는 일이라면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을 각오로 한 말이었다.
그걸 익히 알기에 광운은 여상계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여 장군의 뜻은 감사하나, 그러실 필요 없소이다. 이 몸이 이번에 이끌고 온 지원군만으로 작전을 전개하겠소. 행여 적이 성으로 들어가는 대신 사주로 치고 들어갈 우려가 있으니, 그때 놈들을 막아 주시오.”
“그런 우려를 미리 차단하고자 소장 단독으로라도 참가하겠다는 거요.”
“그래 봐야 곽 장군의 심기만 더욱 어지럽힐 뿐이오.”
“곽 장군의 심기를 어지럽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면 몇 번이라도 어지럽히겠소.”
광운은 말이 없었다. 직속상관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여상계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설사 곽 장군께서 소장의 간언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해도, 다른 부장들 중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요.”
“그건 안 되오!”
광운은 재차 언성을 높였다. 만약 다섯 부장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여상계에게 동조해서 움직인다면, 곽준방은 그걸 진중반란陣中叛亂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모레, 이 몸이 총공격을 감행해 적들을 기호산 쪽으로 몰아 보도록 하겠소. 적이 눈앞에 나타나면, 곽 장군도 싸우지 않을 수 없으실 게요.”
이건 다분히 곽준방을 의식한 광운의 말이었다. 공을 세우지 못해 안달하는 그에게 적을 몰아주어 최후의 승리를 장식하게 해 주려는 의도였다.
하긴, 곽준방만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 밑에 소속된 다섯 부장들의 공훈도 자연스레 빛을 발한다. 제 몸의 안위를 잊고 자신의 뜻을 따르려는 여상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광운은 생각했다.
“그게 말씀처럼 그리 쉽겠소? 저 수림 속에선 귀신같이 움직이는 놈들인데…….”
“그 귀신같은 놈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조각달도 그 속에 있지 않소.”
“뭐? 하하하!”
광운의 농담 말에 여상계는 그만 웃고 말았다. 확실히 적군이 수림 속에서 귀신같이 움직인다지만, 편월은 놈들보다 분명 한 수 위였다.
물론 이들은 알지 못했다. 정작 저 수림 속의 귀신이 된 건 바로 편월과 그가 이끄는 오백의 이탈병이란 것을…….
“그럼 모레 공격에 남은 군사들을 총동원할 생각이오?”
웃음의 끝 자락을 여상계는 그대로 질문으로 돌렸다.
“오천 정도는 남겨 영채를 지키도록 하고, 나머지 이만은 모두 투입하겠소. 적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니, 최대한 많은 군사를 동원할 생각이오.”
“그러니 소장도 뜻을 같이하는 다른 장수들과 함께 돕겠다고 하지 않소?”
“그건 그만두시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군사의 숫자가 아니라, 아군의 단결이오. 그게 없다면 이길 전쟁도 지게 되는 것이오.”
“끄흐음!”
여상계는 신음 같은 침음성을 토했다. 광운의 말이 맞기에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알겠소이다. 그럼 소장은 이 길로 기호산으로 돌아가 광운 장군이 몰아올 적군을 기다리겠소. 그때도 만약 곽 장군이 출동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그분의 고삐를 잡아끌겠소!”
단호하게 내뱉은 후 여상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막사를 빠져나갔다.
그 등에 광운은 착잡한 눈길을 보냈다. 모레 출동은 하겠지만, 정작 적군을 몰아넣겠다고 작심한 곳은 침사성이었다. 기호산으로 몰겠다고 한 건 다분히 적의 간인을 의식한 말이었다.
‘여 장군과의 대화는 아군 속에 섞여 있는 간인도 모두 들었을 터!’
미안했지만, 바로 이게 여상계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였다. 적을 속이려면 우선 같은 편부터 속이라고 했으니까.
‘편월이 내 뜻을 알아줘야 할 텐데.’
자신의 의도를 모르고 편월이 침사성으로 들어가려는 적의 앞을 막는다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 같은 편끼리의 싸움이 전개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일은 광운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편월을 믿고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날 광운의 막사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아군의 투입과 이동 경로에 대한 세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 * *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목철린은 어제 있었던 광운과 여상계의 대화 내용을 송두리째 보고받았다. 광운의 예상이 적중한 셈이었다.
“그럼, 놈들이 어디서부터 공격을 시작할 것 같더냐?”
“그, 그건 알 수가 없었사옵니다. 광운이란 자가 밤새 혼자서 정한 거라 도저히 탐지할 수 없었사옵니다.”
목철린의 질문에 파양주의 군복을 입고 있는 간인이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며 대답했다.
의외인 건 목철린의 외모였다. 변방을 약탈하던 비적단의 수뇌라기보다는, 방에 앉아 글이나 읽는 선비처럼 청수한 인상이었다. 비록 오십 줄에 접어든 탓에 얼굴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눈만은 예외였다. 그처럼 청수한 얼굴에 비해, 그의 눈은 잔혹하고 영악한 빛을 연방 번뜩이고 있었다.
‘우리를 기호산으로 몰아 협공을 하겠다고?’
목철린은 간인의 보고를 철석같이 믿었다. 자신이 파양주군이라도 같은 작전을 세웠을 테니 말이다.
“흥, 내가 그처럼 호락호락하게…….”
혼잣말을 내뱉던 목철린은 문득 입을 닫았다. 아직도 간인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걸 발견한 탓이었다.
“수고했다. 물러가 있으면 포상을 내리리라.”
“존명!”
“고강!”
간인이 물러가는 가는 걸 보며 목철린은 커다란 목소리로 고강을 불렀다.
“대령이오!”
제꺽 안으로 들어서며 고강은 정중한 군례를 갖췄다.
“파양주 놈들의 작전을 알았다. 지금부터 지시를 내릴 테니, 한 치의 어김도 없도록.”
“명심하겠사옵니다!”
“내일 놈들은 이만의 군사로 우리들을 기호산 쪽으로 밀어붙일 것이다. 물론 협공을 하려는 속셈이지.”
속으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고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듣는 얘기였으니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내일 그대에게 오천의 군사를 딸려 줄 테니, 매복해 있다가 놈들의 본대를 쳐라.”
“하온데 어디에 매복하면 좋으리까?”
“내가 놈들을 그대가 있는 곳까지 유인하겠다.”
“존명!”
복명하는 것과 동시에 고강은 군례를 갖췄다. 명이 모두 내려졌으니 물러가려는 것이다.
“기다려!”
나가려는 고강을 목철린이 불러 세웠다.
“우리들을 공격하는 놈들의 정체는 파악했느냐?”
“아무래도 파양주군에서 이탈했다던 오백의 잡가군들 같사옵니다.”
“고작 오백? 아닐 것이다, 아니야! 기껏 오백의 잡가군 놈들에게 당할 우리 병사들이 아니다!”
이번에도 고강은 대꾸하지 않았다. 괜히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가는 자기 군에 대한 우월감에 젖어 있는 목철린의 심기를 건드릴 우려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정작 말을 한 목철린 자신의 눈빛은 약간 질린 기색이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삼천이 넘는 병사들이 정체 모를 그 ‘무엇’에 당했다. 그것도 보는 사람들이 모두 외면하고 구역질을 할 정도로 처참하게…….
막주군 전체의 전력에서 삼천이란 병력은 그리 큰 숫자는 아니다. 다만 그 수법의 잔인함과, 누구에게 당했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는 게 병사들의 사기를 끝없이 저하시켰다.
‘이 수림 속에서 우리 막주군보다 더 은밀하게 움직이는 놈들이 있다니.’
곽준방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수림 속으로 들어왔을 때, 목철린은 이 전쟁에서 적어도 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리와 기후가 모두 같은 편이라고 여겼으니까 말이다.
처음에 그 예상은 적중하는 듯했다. 파양주군은 오히려 기호산으로 밀려들어 갔고, 그사이 허주의 조환과도 끈이 닿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 지대한 방해가 나타났다. 그것도 한꺼번에 둘씩이나!
그 하나는 물론 여태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저 수림 속에 있는 놈들이다. 놈들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은밀하고, 수라修羅처럼 잔인하게 아군을 도살했다. 희생은 삼천에 불과했지만, 남은 막주군 사만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래서는 싸움이 안 된다. 아무리 내일 투입될 파양주군이 이만에 불과하다지만, 이미 사기가 꺾인 아군으로선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고강에게 오천의 병력으로 적의 본대를 치라고 한 것도 그걸 조금이나마 만회해 보고자 함이었다.
다른 하나는 허주군의 출병이 늦다는 점이었다. 지금쯤이면 사주로 치고 들어와 파양주군의 배후를 유린함은 물론, 마용승까지 놀라 자빠지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허주군이 움직일 기미는 전혀 없다. 오히려 당장 내일 자신들을 토벌하기 위해 파양주군이 이만의 대군을 동원한다고 한다.
‘우리가 이처럼 곤궁에 처한 걸 조환이 알아 버린 건가?’
그렇다면 허주군의 출병이 늦는 걸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이미 패색이 짙은 전쟁을 하는 자의 뒤를 받쳐 줄 멍청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의 상황을 조환이 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론은 좀 더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겠느냐? 다른 놈들은 상대하지 마라. 오직 내일 출동할 적의 본대만 쳐라.”
“존명!”
“공을 서두를 건 없다. 적의 본대를 쳐서 놈들이 혼란에 빠지면 그대로 침사성으로 철수하도록 하라.”
“앗! 성으로 말씀이옵니까?”
“그렇다.”
“하오나 그리되면 다시 포위되고 말지 않사옵니까? 어떻게 뚫은 포위망인데…….”
“시간이 필요하다. 허주에서 곧 출병을 할 테니, 그때까지만의 농성이다.”
“하오나 시간을 벌려면 이 수림 속에 흩어져 있는 게 훨씬 더…….”
“그래서 벌써 삼천의 병력을 잃었다! 땅에 떨어진 아군의 사기는 보이지 않는가?”
격한 어투였지만, 목철린의 목소리는 결코 높지 않았다. 행여 부하들이 들을까 저어해서였다.
“알겠느냐? 최대한 부하들의 목숨을 아껴라. 농성을 하자면 한 명의 병사라도 아쉽다.”
“조, 존명!”
마지못해 복명하며 고강은 물러갔다. 그로선 불만이 없지 않은 명이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선 고강은 그 즉시 오천의 병사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2
수림 속의 귀신이 된 건 좋았지만, 편월과 오백의 잡가군에게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먹는 것과 배설의 문제였다.
처음 이탈을 결정했을 때, 이들은 파양주군 특유의 군량을 한껏 챙겨 나왔다. 언제 어디서든 먹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한정이란 건 아니었다. 이탈한 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군량은 바닥을 드러냈고, 그때부터는 지천에 널려 있는 과일로 배를 채워야만 했다.
그만하면 괜찮지 않느냐 하겠지만, 모르는 얘기다. 배는 어떻게든 채울 수 있을지 몰라도, 과일은 고기와 달리 사람의 근육에 힘을 불어넣기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싸움이라는, 전쟁이라는, 인간 체력의 한계를 요구하는 행위를 하려면 다른 먹을거리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하긴, 먹을 게 있다고 해도 쉽사리 취사를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배설의 뒤처리도 역시 문제였다. 막주의 드넓은 수림 속에서 오백의 병사가 눈 똥과 오줌을 처리하는 건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개개인이 볼일을 본 후 땅에 묻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오백의 잡가군이 움직이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막주군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작전을 전개해야 되니, 어제 처리했던 자신의 배설물 바로 위에 다시 매복해야 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 역시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될 문제였다. 비라도 내리면 좀 씻겨 희석되기도 하겠지만, 요 며칠 동안 비도 내리지 않았다. 이 상태라면 적군이 냄새를 맡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만하면 된 거 같은데…….’
부대를 이탈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적병을 죽였는지 알 수 없지만, 적은 대규모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건 큰 소득이었다. 지리에 익숙한 막주군이 이 수림 속에서 산개해 유격전을 벌이니, 파양주군은 고전했었다.
그런데 이제 흩어져 있던 적의 소부대들이 보다 큰 규모로 집결하기 시작했으니, 발견하기 쉬운 건 물론, 한꺼번에 섬멸해 버릴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그게 편월에겐 좋은 일인 것만은 아니었다. 적이 대규모 부대로 집결할수록 은밀히 기습해서 섬멸하는 게 점점 더 힘들어졌다. 최근 들어 아군의 사상자가 부쩍 늘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정이 지나 한차례 더 공격하고 복귀한다!’
현 상태로 싸운다면 더 이상의 실익은 기대하기 어렵고, 오히려 희생자만 늘 뿐이라는 게 편월의 판단이었다.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그동안 세운 공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다.
정말 수풀이라도 된 것처럼 완벽하게 은신하고 있던 편월의 손이 작은 움직임을 보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아무리 위장을 해도 짐승들은 아는지 새소리 한 방울 들려오지 않던 수림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편월의 손짓에 의한 것이었다.
그 움직임은 은밀하게, 그러나 생각보다 신속하게 편월 곁으로 다가왔다.
“불렀소?”
움직임의 주인공은 두건득이었다.
“오늘 밤 자정을 넘겨 적을 공격한다.”
“좋소이다. 그런데 적이 어디 있소?”
“뭐?”
튕겨 내듯이 쏟아진 두건득의 반문에 편월은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습격할 적은 아직 찾지도 못한 상태였다.
“척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그런데 갑자기 왜 이리 서두르시오? 이 장소라면 매복해 있기 딱 좋은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편월의 말에 이번엔 두건득이 입을 닫았다. 그 역시 이탈한 잡가군이 처한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까닭에서였다.
“오늘 척후대의 대장은?”
“서진청이오.”
“서진청?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는 일은 없겠군.”
서진청 역시 지난날 무융성 함락 때 돌입대에 편입됐던 걸 인연으로 지금까지 오강과 더불어 파양주 잡가군으로 남아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할 거요, 대장? 다 같이 적을 찾아 수색이라도 할 거요?”
“아니!”
“그럼 자정 지나서 공격한다는 건 물 건너간 일이로군.”
“말했잖아. 서진청이라면 반드시 놈들을 발견할 거라고.”
“그럼 기다리겠다는 거요?”
“별수 있어?”
“흥!”
두건득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비꼬거나 비웃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편월의 말에 동조한다는 의미가 강했다.
하기야 달리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적도 찾지 못한 상황인데 공격한다고 해서 빽빽이 들어차 있는 수풀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말이다.
“경계를 세우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하도록.”
돌연 편월이 근엄한 명령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두건득의 콧방귀가 조금 거슬린 듯했다.
그렇게 명을 내린 후 편월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이내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정말 잘도 자는군.’
그 모습을 보며 두건득은 혀를 내둘렀다. 먹을 수 있을 때 미리 먹어 두고, 잘 수 있을 때 미리 자 두는 게 전쟁을 잘하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렇게 보자면 편월은 이탈한 오백의 잡가군 중 누구보다 전쟁을 잘한다는 얘기다.
‘전쟁 경험만으로 치면 나보다도 더 많으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건득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역시 한숨 자 둬야 할 것 같았다. 벌써 구월, 파양주라면 추수를 끝낸 논바닥 위에 제법 쌀쌀한 바람이 감돌고 있을 철이다.
그러나 대륙의 남단에 위치한 이곳 막주는 여전히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있다. 할 수 있을 때 휴식을 취해 두지 않으면 금방 지쳐 버리기 십상이다.
두건득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수림은 다시 예전의 완벽한 정적을 되찾았다. 그 속으로 무심한 새들도 몇 차례 날아들었다가, 다시 날아가곤 했다.
노을이다.
석양이 고운 저녁 다음 날은 아주 맑다는 속설이 맞는다면, 오늘 밤과 내일도 비는 내리지 않을 게다.
그 석양 속을 헤엄치듯 은밀하게 서진청과 척후대가 돌아왔다.
졸고 있던 편월의 눈과 입이 동시에 열렸다.
“적은?”
“우리로선 손댈 수 없소. 약 오천 정도의 병력이 동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소.”
“동북쪽? 거기에 뭐가 있기에?”
“난들 알겠소? 우린 척후대요. 척후대의 임무는 적의 동태만 파악하면 되는 것, 나머지는 대장의 몫이오.”
그 말에 편월은 대꾸하지 않았다. 오천이라면 서진청의 말대로 손댈 수 없는 숫자인 것이다.
“어떻게 할 거요? 배후를 물고 치면 약간의 타격은 줄 수 있을 듯…….”
“수고했어. 가서 쉬어.”
편월은 서진청의 말을 잘랐다. 자정을 넘어 공격을 하든, 놈들의 배후를 물고 치든 척후대는 좀 쉬어야 한다. 어차피 전투는 밤에 치러야 하니깐 말이다.
“쉬고 있을 틈 따위는 없소. 무슨 일인지 놈들 전체가 술렁거리고 있으니.”
“뭐? 적의 본대를 봤어? 목철린을?”
“아니!”
서진청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은 몇 개의 대부대로 나뉘어 있어 본대가 어디인지 확인하진 못했소. 하지만 각 부대별로 전령이 연방 뛰어다니고 있었소. 목철린이 그중 어디에 있는지는…….”
말꼬리를 흐리며 서진청은 재차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마냥 있을 수는 없어. 적의 본대를 쳐서 목철린의 목을 베어야 해.”
편월의 말에 서진청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냔 말이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목철린의 코빼기도 볼 수 없으니 탈이지.
“좋아. 그럼 가장 의심되는 곳은 어디야?”
“아무래도 동북쪽으로 움직이는 놈들이 의심스럽소.”
“근거는?”
“놈들의 사기가 너무 높소. 다른 놈들은 바짝 위축되어 있는데…….”
“그래?”
석양을 받은 편월의 눈에 순간적으로 금빛이 반짝였다. 뭔가를 계획할 때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였다.
“모두 모이라고 해.”
그 명은 달리 할 것도 없었다. 서진청이 온 뒤 각 소부대의 대장들이 벌써 편월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군의 생존자는?”
“사백이십일 명! 그중 싸울 수 있는 자는 삼백팔십 정도뿐이오.”
편월의 질문에 대답한 자는 강숙姜琡으로,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나이였다. 지난번 막주군을 침사성에 몰아넣었을 때부터 편월과 행동을 같이한, 말하자면 새파란 신참이었다.
그런데 강숙은 벌써 한 부대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 그만큼 능력이 탁월하다는 얘기다. 전투에 임해서는 악귀처럼 용맹했고, 계산을 해 보라면 주판처럼 정확했다. 그처럼 능력이 있으니 그를 대장으로 받드는 잡가군도 거부감을 별로 표출하지 않았다.
“지금 동북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적병 오천이…….”
“그건 다 들었어요. 다음으로 넘어가요!”
편월이 입을 열자마자 그 말을 막고 나선 건 맹아였다. 작전 회의를 한다 싶으니 벌써부터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한마디 했을 법도 한데, 편월은 그저 맹아를 한차례 쏘아봤을 뿐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놈들을 공격하고 싶어. 혹시라도 거기에 목철린이 있을지도 모르니깐.”
“듣자니 놈들은 오천이라고 했소. 삼백 조금 넘는 병력으로 친다는 건 무리지 않겠소?”
두건득이 가장 먼저 불안한 빛을 보였다. 어쨌든 병력의 차이가 너무 많다. 이 정도면 그 어떤 기습이라도 기습이 되지 않는다. 소 엉덩이를 모기가 깨문다고 소가 타격을 입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 무슨 약한 말씀이오? 우린 은신한 채 싸우고 놈들은 훤히 드러나 있는데, 뭐가 두렵단 말씀이오?”
모두의 예상대로 강숙이 두건득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싸움이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질이 땀구멍에서 솟아나는 땀만큼이나 확연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맞아요!”
맹아도 강숙에게 동조했다. 흔한 일이라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그럼 묻겠다, 강숙! 만약 우리가 놈들을 친다면, 어떤 작전이 좋을까?”
“모르겠소.”
“모르다니? 모르고서 어떻게 싸워?”
“단지 싸울 뿐! 싸움의 방법은 대장이 짜내는 거요.”
“맞아요!”
세차게 부딪쳐 오는 강숙과 맹아의 말에 편월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건 화제가 싸움이 되면 강숙의 의지는 대장간의 철침鐵砧(모루)처럼 단단하기만 했다. 맹아도 거기에 강한 울림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문득 편월은 처음 강숙이 잡가군에 편입됐을 때를 떠올렸다.
막주군을 막 사주에서 몰아 전화가 막주를 본격적으로 불태우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적을 침사성으로 몰아넣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낯선 기후와 지리에 한창 고전하고 있을 당시, 강숙은 보충병의 형태로 광운과 편월에게 합세했었다.
처음부터 강숙은 묘했다. 자기 이름만 말했을 뿐, 신상에 관한 다른 걸 물으면 한사코 ‘모른다’로 일관했다. 게다가 조용한 성격인지 평소엔 있는지 없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든 자였다.
그러나 싸움에 임하면 사람이 달라졌다. 파양주 효명성주 상림호가 스스로 광호란 별명으로 자기를 불렀지만, 정작 미친 호랑이는 바로 강숙이었다. 못 다루는 무기가 없을 정도로 무예에 출중했을 뿐 아니라, 아귀 같은 근성까지 겸비하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야차夜叉란 별명으로 동료들에게 불리기 시작했다.
하루는 광운이 강숙에게 말했다.
-너무 적 깊숙이까지 쳐들어가지 말게. 전쟁은 목숨을 나누는 일일세. 누구도 자네 목숨을 지켜 주지 않으니, 자기 목숨은 스스로 알아서 챙기게.
그때 강숙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목숨? 그딴 게 뭐 그리 중요하오?
-자넨 아직 젊네. 내일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부디 몸을 소중히 하란 말일세.
-내일? 오늘 전장에서의 승리는 알아도, 내일의 삶은 내 알 바 아니오!
이 말을 듣고 광운과 편월은 서로의 얼굴만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로부터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강숙은 벌써 잡가군 내에서 작은 부대 하나를 이끄는 대장이 되었다. 그만큼 세운 공이 혁혁하다는 의미였다.
그런 강숙이니만큼 맹아가 그를 친형처럼 따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둘을 볼 때마다 잡가군의 다른 대장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처치 곤란한 자들이야!
용맹만 너무 앞세우다 보니 간혹 전체의 대오를 무너뜨리는 경우도 없지 않아서 한 얘기였다.
그래도 대놓고 나무라지는 못했다. 이런 전국난세에 그만한 기질을 가진 자는 일부러 구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좋아. 적을 친다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해야 될 게 부상병들의 처치다. 누가 맡을 거야?”
편월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돌아갔다. 두건득을 향한 것이었다. 이런 일, 즉 병사들의 궂은일은 모두 그가 도맡아 하다시피 한 까닭에서였다.
두건득도 별반 이의가 없었다. 전장에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는 게 부상당한 동료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이란 걸 이미 체득하고 있던 참이었다.
“두건득은 열 명을 차출해서 부상병들과 함께 곧바로 본대로 돌아가. 지금쯤이면 광운도 우리의 활동을 알았을 테니, 이탈에 대한 건 크게 뭐라 하지 않을 거야. 나머지는 지금 즉시 동북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놈들의 꼬리를 친다.”
“존명!”
편월을 둘러싼 사람들은 일제히 복명했다.
사방은 이미 어둡다. 하늘 전체를 채색한 듯한 노을이 꺼지자마자, 수림은 별빛 한 점 통과시키지 않는 장벽이 되어 코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속에서 두건득은 부상병들을 호송해 본대로 향했고, 이제 삼백일흔 명으로 줄어든 이탈병들이 적의 꼬리를 잡기 위해 신속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 선두는 서진청과 편월이었다. 위장이 아주 필요 없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다.
“놈들을 따라잡으려면 얼마나 걸릴 거 같아?”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는 거라면 놈들이 우리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명심하시오.”
“글쎄 그들을 잡으려면 얼마나 걸려?”
“빨라도 두 시진.”
“늦어! 속도를 더 내자.”
“그러다 우리 꼬리부터 먼저 잡힐 거요!”
“잡으려면 잡으라고 해.”
시원스러운 대답을 하지 않는 서진청을 놔둔 채, 편월은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왜 이리 서두는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또 적의 숫자가 아군에 비해 열 배가 넘는 걸 알면서도 굳이 공격하고픈 마음이 든 이유도 몰랐다.
‘이게 감이란 걸까?’
냉철한 이성으로 계산해 보면 적을 쳐서 이길 수 있는 조건은 하나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막연하나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드는 건 왜일까?
그것도 예사로운 게 아니었다. 필승의 확신이라고 해도 좋을 감정이 가슴속에서 마구 요동쳐 와 편월은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빨리 치닫고 있는 편월의 곁을 휙 스치고 저만치 앞서 달리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누구야?”
편월이 나직이 물었을 때, 재차 또 하나의 그림자가 그를 추월해 달려 나갔다.
그제야 편월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앞서 달리는 두 사람은 강숙과 맹아가 틀림없을 터, 그렇다면 대오가 무너졌다는 의미다.
물론 강숙과 맹아는 때때로 아군과의 보조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행동할 때가 많다. 그래서 평소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적은 오천, 아무리 용맹한 자라도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승산이 만에 하나도 없다.
게다가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은밀히 싸워야만 한다. 난전이라면 저 두 사람의 행위가 혹 용납될지 몰라도 지금은 안 된다.
“정지!”
돌연 편월은 발길을 세웠다. 달리는 상태로는 두 사람을 아무리 제지해도 듣지 않는다는 건 벌써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군을 세워야만 했다.
그러자 저만치 앞장서 달리던 두 사람도 재빨리 돌아와 대열에 합류했다. 혹시라도 작전이 변경되었다면 알아 둬야 하기 때문이다.
“말해 봐. 우리가 누구지?”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강숙에게, 편월은 마치 동생에게 하듯 말했다. 그래도 어투는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이 수림 속의 귀신…….”
반발할 줄 알았던 강숙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귀신이 그렇게 요란스레 움직이는 거 봤어? 우린 용맹한 거보다 은밀한 게 더 필요하다는 걸 모르겠어?”
은밀해야 했기에 편월의 목소리는 결코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질책하는 그의 어조는 한층 더한 무게감을 가졌다.
강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럴 때 그의 모습은 평소의 조용한 성품을 고스란히 반영해 주는 듯했다.
“한 번만 더 대오를 흩트리면 결코 용서치 않겠다.”
단호하게 내뱉은 후, 편월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 더 강하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편월 자신도 더 이상 앞장서 달리지 않았다. 대장은 언제나 대열의 중간에서 전체를 총괄해야 된다는 일도 있었지만, 강숙과 맹아를 옆에 붙들어 두려는 의도가 더 컸다.
“적 발견!”
이 보고가 척후로 보낸 서진청에게서 들려온 건 그로부터 반 시진 뒤인, 축시丑時가 끝나 갈 즈음이었다.
그 보고에 따라 편월은 재빨리 선두로 나섰다.
‘매복하려는 걸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적들의 움직임은 부산했다.
‘대체 뭘 노리고?’
모름지기 매복이란 노리는 대상이 있어야만 한다. 적어도 적이 지나갈 확률이 가장 높은 곳에 펼치는 게 상례다.
그런데 놈들은 이 수림 한복판에 아무렇게나 매복을 펼치고 있다. 편월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좌 후방, 적 출현. 인원 약 오천!”
복잡한 생각을 거듭하는 편월에게 다시 후미로부터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그건 잡가군을 조금 술렁이게 만들었다. 애당초 치기로 했던 오천의 적병도 힘에 겨운 숫자였다. 그런데 다시 오천이 더 출현했다니,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손발이 위축되었다.
뒤에서 다시 나타난 적병은 매복을 펼치고 있던 또 다른 적병을 그대로 지나쳐 앞으로 진군해 나갔다.
“놈들이 노리는 게 대체 뭘 거 같소?”
같이 전방에 나서 있던 서진청이 나직이 물었다.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걸 여실히 알 수 있는 음색이었다.
편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걸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도무지 모르겠지만 편월은 웃었다.
‘뭔가 있다!’
바로 그 알지 못하는 ‘뭔가’가 이 밤, 편월의 피를 화끈하게 달구었다.
3
적의 주력을 고강이 매복하고 있는 곳으로 유인하라는 명을 받은 건 지난날 풍소성 공격 시 선봉을 맡았던 저우였다. 막하에는 역시 지난 시절부터 고락을 같이해 온 부장들 중 유개와 군도옥이 따르고 있었다.
“이쯤에서 적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게 가할 줄 아뢰오.”
역시 유개는 신중했다. 여기서부터 앞으론 파양주군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다. 감시는 물론, 뜻하지 않은 매복에 걸릴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는 주군의 명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하오. 우리들은 분명 적의 본대를 유인하라는 명을 받았소. 적의 모습도 보지 못하고 어찌 본대를 구별할 수 있겠소? 이대로 적의 영채가 보이는 곳까지 군사들을 몰고 나가야만 하오.”
군도옥은 유개와는 반대 의견이었다. 젊은이다운 패기에 넘치는 시선을 그대로 지휘관인 저우에게 돌리는 품이 자기의 의견에 동조해 달라는 뜻이 확연했다.
“이대로 진군하다가 적의 감시에라도 걸리면 유인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리게 되오. 싸우는 거라면 이 유개가 앞장서겠지만, 우리의 임무는 다른 것이오! 군 장군은 이 점을 잘 구분하시오!”
“그럼 여기 죽치고 있으면 적의 본대가 이리로 지나갈 것 같소? 그러니 이대로 밀고 들어가 적의 영채를 불사르고, 본대를 골라 친 다음 후퇴한다면, 놈들은 자연히 우리 뒤를 쫓을 거요!”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팽팽한 설전을 벌이는 두 사람을, 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켜보았다. 이래서 저 둘을 일부러 원해서 데려온 것이었다.
작전은 이래야 한다. 여러 장수들 각각의 의견을 듣고, 그중에서 가장 타당한 것들을 취해 절충해서 세워야 한다. 그래야 실패할 확률이 적다.
게다가 저우 자신은 풍소성 함락 시에 몇 차례 실패를 경험했다. 그걸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 두 사람처럼 서로 상반된 의견을 내놓는 부하가 필요했다.
“장군은 어떻게 하시겠소?”
아무래도 언쟁의 끝이 보이지 않자, 보다 나이 든 유개가 저우의 의견을 물었다. 이런 경우엔 지휘관의 명에 따르는 수밖에 없는 법이다.
“두 장군의 말 중 버릴 건 하나도 없소.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 이 군사를 모두 이끌고 적의 영채가 보이는 곳까지 갈 수는 없소. 우선 척후를 보내기로 합시다. 척후라고 해서 너무 적은 병사를 이끌고 가면 막상 적들을 끌어들이지 못할 테니, 어떻겠소, 군 장군? 천 명을 줄 테니 척후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겠소?”
“맡겨만 주십시오!”
처음부터 적의 영채까지 진군하자고 했던 군도옥이었다. 저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가슴을 탁 치며 자신감을 표했다.
그러다 이내 목소리를 떨궈 다시 입을 열었다.
“가는 도중 만약 적의 감시나 매복을 만나면 쳐부수고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그야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정면으로 조우하지 않는다면, 되도록 피해 가시오. 우리의 목적은 적의 본대를 끌어내는 데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존명!”
즉각 군례를 갖춘 군도옥은 데리고 갈 천 명의 군사를 수배해서 출발했다.
이 임무에 무장으로서의 생명을 걸었다. 또래에 비해 출세가 빠르다지만, 그것도 동급의 장수에 비하면 그 전공 면에서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젊으니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군도옥의 자존심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젊은 만큼 더욱 분발해서 보다 나이 많은 장수들에게 전공으로도 뒤지고 싶지 않았다.
그 조급함이 군도옥의 발길을 빠르고 거칠게 만들었다. 되도록 적의 감시나 매복을 피해 가라고 저우가 말했지만, 그는 가는 길목에 있는 파양주군의 감시나 매복을 일부러 찾아서 괴멸시키며 전진해 갔다.
자연히 그런 진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삐이이잇-!
“적이다!”
호각과 외침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동시에 사방이 훤하게 밝아졌다. 매복해 있던 파양주군이 일제히 횃불을 켠 탓이었다.
그 밤도 광운은 잠들지 못한 채 작전을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때에 들려온 비상 호각 소리와 함성은 그에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게 만들었다.
‘선수를 뺏긴 건가?’
오늘 새벽을 기해 대대적인 수색을 감행한다는 건 이미 간인을 통해 적에게 알려졌을 테고, 은근히 그걸 바랐던 광운이었다.
하지만 그게 적의 기습을 불러온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비록 병사들의 준비는 다 갖춰졌다 해도, 그 출동 직전이 바로 가장 방심되는 때이기도 하다. 마지막 한순간까지 휴식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디냐? 적의 숫자는?”
진막을 뛰어나오며 광운은 급히 물었다.
“남서쪽에 나가 있던 매복에 적들이 걸린 모양입니다. 숫자는 아직 모릅니다!”
누군가 황급히 달려오며 광운에게 보고했다. 오늘 밤 숙직 장령이었다.
“대기 병력 중 삼백을 이끌고 즉시 가 보시오.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전령을 보내 보고하고!”
“존명!”
복명과 함께 숙직 장령은 엎어질 듯 다급하게 달려갔다.
“고둥을 불어라! 북을 쳐라! 이대로 곧장 수색에 임해야 할지도 모르니, 각 부대별로 철저히 준비하라고 전갈하라!”
“존명!”
뚜우우-! 뚜우-!
두두두두두둥둥-!
광운의 명에 따라 돌연 영채 안팎은 소라고둥과 북소리가 채우고 넘쳐 근처의 수림까지 진동시켰다.
그건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오늘 새벽의 출동을 위해 어젯밤부터 준비를 갖추고 있던 파양주군이 그 즉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선봉 적기군 이천, 집결 완료!”
“좌익 황기군 이천, 집결 완료!”
“우익 백기군…….”
집결을 마친 부대부터 전령이 달려와 차례차례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선봉인 적기군은 영채를 나가 이 리 정도 진군해서 대기하도록! 별명이 있을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마라!”
“존명!”
집결을 보고하러 왔던 전령은 그길로 곧장 말을 몰아 선봉 부대인 적기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출동이오?”
이번에 말을 달려온 건 주력이 출동한 후에 영채를 지키기로 되어 있는 파양주군의 장수 조항曺恒이었다. 이대로 광운이 출동한다면 그 역시 즉각 대비를 갖춰야 하기에 몸소 말을 달려 나왔던 것이다.
“아무래도 곧장 투입될 것 같소. 하지만 척후를 보냈으니 그 보고를 기다려 봅시다.”
“적의 유인계가 아닌지 의심스럽소. 이 영채를 불사르거나 차지하기 위해서…….”
“그 점도 생각하고 있소. 아무튼 척후대의 보고를 기다려 봅시다.”
주력이 빠져나간 영채를 지키는 게 조항의 임무다. 그러니 이런 의구심을 가진 건 당연하지만, 광운은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적에 대해 알기 전에는 어떤 결정도 행동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돌연 소라고둥과 북소리가 또다시 요란하게 밤공기를 밀어 댔다. 선봉대가 영채 문을 열고 명에 따라 이 리 정도 진군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과 교차하듯, 쏘아 보낸 화살처럼 빠르게 일기의 기병이 영채를 향해 달려왔다. 등에는 전령기가 꽂혀 있었다.
“보고! 약 일천의 적이 이 영채를 노리고 진격 중! 그 사이에 있던 아군의 감시병과 매복조는 모두 전멸!”
그 보고는 전군을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어떤 경우든 아군이 전멸했다는 얘기는 병사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이니 말이다.
“동요하지 마라! 다음 보고를 기다려 명을 내리겠다! 동요하지 마라!”
커다란 목소리로 광운은 병사들을 억눌렀다. 만약 매복조나 감시병 중 자기와 절친한 친구가 있다면 광분해서 설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니 미리 방지해야만 한다.
“아, 저건?”
“아군이다. 척후대다!”
동요하는 군사를 진정시키려던 광운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마침 척후를 나갔던 삼백의 아군이 수림 속에서 벌목을 해 둔 곳으로 마구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들썩이지 마라! 전방엔 선봉대 이천이 나가 있다! 적은 고작해야 일천! 예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진정하라!”
광운은 연방 고함을 지르며 곁에 따르고 있는 기수에게 장수기를 흔들게 했다. 병사들이 금방이라도 짓쳐 들 듯 기세를 돋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지른 광운의 고함은 효과가 있었다. 하긴, 장수기까지 흔들었으니 그 말에 따르지 않을 병사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번엔 선봉대가 말썽이었다. 삼백의 척후대가 밀려나온 것과 동시에, 선봉으로 나선 적기군이 왈칵 수림 속으로 치고 들어가고 말았다. 요란한 북과 소라고둥은 그 뒤에나 광운의 귀를 때렸다.
“이런 바보 같은! 적은 유인군이다! 속지 마라! 적의 유인군에 당하지 마라!”
그렇게 고함을 지르면서도, 정작 광운 자신이 말에 박차를 가해 달리고 있었다. 물론 선봉인 적기군을 말리기 위함이었다.
“와아, 광운 장군의 뒤를 따르자!”
“흑기군 출동! 나를 따르라!”
“황기군 앞으로!”
광운이 움직임으로 해서 이제 파양주군을 제어할 수단은 아무것도 없어져 버렸다. 이 새벽, 수색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도와는 멀지만, 전체 군의 움직임에 대해 광운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작전과 수색할 지역은 미리 지난밤에 각 편장들에게 지시해 뒀다. 시간이 좀 더 빨라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전령! 각 편장들에게 일러라! 대오를 흩트리지 말고, 각자 맡은 지역으로 이동하라고! 정해지지 않는 움직임을 보이는 군세는 결단코 용서치 않으리라!”
“존명!”
광운의 명을 받은 전령들은 돌팔매를 한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그제야 광운은 뒤로 천천히 물러나 본대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부터는 전군의 상황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파악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 지루한 막주와의 전쟁도 그 끝이 보이리라.
* * *
본대가 있는 쪽의 그 요란한 소동이 편월에게 전해지지 않을 턱이 없었다.
“대장?”
가장 먼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연 것은 맹아였다. 본대에서 들려오는 북과 소라고둥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잘 알기에 그의 눈은 벌써부터 전의를 불태우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다려!”
“뭘 기다려요? 본대가 움직이고 있어요. 안 보여요? 자칫하다가는 놈들이 쳐 놓은 저 매복에 걸려요! 그러니 지금 공격하자고요. 네?”
“글쎄 기다렷!”
설치는 맹아를 억세게 눌러놓고 편월은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매복하고 있는 자들을 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아군을 유인하러 간 자들을 치는 게 좋을까?’
바로 이게 편월의 고민이었다.
여기서 가장 좋은 방법은 여기 매복하고 있는 적과, 아군을 유인하러 간 적 사이에 파고들어 양측을 모두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면 적은 대번에 혼란에 휩싸여, 잘하면 한편 싸움으로 유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망설이고 있는 건 역시 병력의 부족이었다. 앞뒤 합쳐 적병은 무려 일만, 거기에 아군은 채 사백도 되지 않는다. 적의 양 군세 사이에 끼이게 되면 흔적도 없이 녹아 버리고 말 게다.
“대장, 빨리 결정을!”
서진청과 오강도 편월의 결단을 촉구했다. 전방에서 ‘와-!’ 하는 함성이 오르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예까지 들려왔기 때문이다. 벌써 파양주군과 막주의 유인군 사이에 난전이 벌어졌다는 의미였다.
“좋아. 우린 매복해 있는 적의 배후를 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아군이 이 매복에 걸렸을 때 일제히 치고 나간다. 그러니 지금은 좀 더 기다려.”
“보고! 좌 전방 적 출현!”
“그냥 흘려 보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들려온 보고를 편월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이는 분명 아군을 유인하러 갔던 적일 터였다. 일부러 부딪칠 필요는 없었다.
다시 전방에서 ‘와아-!’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적의 유인군에게 이끌린 아군이 매복이 있는지도 모르고 뛰어드는 소리였다.
“대장!”
“조금만 더!”
다시 설치는 맹아를 편월이 세찬 어조로 제지했다. 벌써 강숙도 연방 수중의 창을 흔들고 있었다.
이윽고 아군의 함성 속에 비명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적의 매복에 걸려 고전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좋아. 지금이다. 쳐라! 치고 들어가! 마구 베고 들어가서 아군과 합류한다!”
그제야 편월은 격렬한 어조로 명을 내렸다. 눈초리가 찢겨 올라가며, 그 안에서 별빛 같은 불똥이 마구 튀어나오는 듯했다.
“와아앗!”
돌연 비명과 같은 함성을 지른 맹아가 가장 먼저 창을 휘두르며 매복해 있는 적의 배후로 달려들었다. 강숙 역시 비슷하게 뛰어든 건 물론이고.
편월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건 혼란을 일으켜 적의 매복에 걸린 아군의 활로를 열어 주는 싸움이다. 달리 작전 지시도 하지 않고 난전으로 휘몰아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와왓! 뭐, 뭐야?”
“웬 놈들이냐? 소란은 용서치 않는다!”
갑자기 배후를 찔린 적들은 일시지간 피아를 구분하지 못했다. 개중엔 같은 편이 공을 서둘러 앞으로 치고 나온 것이라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진중반란이냐? 대, 대체 어느 부대 소속… 으아악!”
눈알을 까뒤집고 일갈을 내지르는 적장을 두 조각으로 쪼개며, 편월은 침을 탁 뱉었다. 피아도 구분하지 못하는 장수 밑에서 싸우고 있는 막주군이 얼핏 가련해지는 순간이었다.
“아앗, 적이다! 적이 배후를… 커헉!”
막주군 중 눈치 빠른 놈 하나가 할 말도 채 하지 못하고 비명에 스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외침이 가져온 반향은 컸다. 이제 막 걸려든 파양주군을 공격하고 있던 막주군은, 그들의 배후에서 적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자 대번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쳐라, 쳐! 옆도 돌아보지 말고 돌파해! 자, 앞으로! 앞으로!”
“우리가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고는 이 싸움에 달렸다! 이탈병으로 죽을 텐가, 아니면 공을 세우고 당당히 돌아갈 텐가! 비록 잡가군이지만, 그 이름 있다고 생각되는 자는 내 뒤를 따르라!”
악이 받쳐 독려하는 편월의 뒤를 이어, 서진청도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한마디 외쳤다.
그 소리가 결정적으로 잡가군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비로소 그들이 아직은 이탈병 신분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부상병이 복귀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전쟁과 부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고 보면, 적의 부상병도 치료해 주는 게 상례다. 하물며 부상당한 아군의 복귀를 말릴 사람은 없을 게고, 또 최악의 경우 싸우다 부상을 당했다고 둘러댈 수도 있다.
그러나 멀쩡한 육신으로 돌아간다는 건 우선 스스로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설사 지금까지 수림 속의 귀신이 되어 막대한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그건 아직 인정받지 못한 부분이다. 여기, 바로 이 자리에서 파양주의 주력과 함께 싸워 지금까지의 공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당당하게 얼굴 들고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뒈져라, 막주의 개새끼들아!”
“이 쌍! 꺼져, 이 후레아들 놈아!”
약속이라도 한 듯 잡가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손은 그보다 더욱 거칠게 막주군의 목숨을 노리며 각자의 병기를 휘둘렀다.
그건 정말이지,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처절한 모습들이었다. 은밀한 싸움을 하느라 억눌렀던 가슴속의 울화, 공을 세우지 못하면 돌아갈 곳도 없다는 절박함이 한꺼번에 표출되어 한 폭의 지옥도를 그려 가는 듯했다.
“강숙, 맹아! 정신 차렷! 자칫하다 한편 싸움이 벌어진다! 거기서 멈춰!”
이미 적이 펼친 매복의 한복판을 지나친 편월이 돌연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자기보다 앞서 나간 강숙과 맹아가 벌써 적의 선두를 돌파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경우 가장 조심해야 될 게 바로 한편 싸움이다. 앞에서 치고 들어오는 아군과, 적의 배후에서부터 돌파한 잡가군이 서로 부딪치게 되면 피아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하더라도 매복한 막주군이 느낀 당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막 파양주의 주력이 매복에 걸렸다고 쾌재를 부르고 있던 참에 뒤통수를 맞은 꼴이었으니, 그들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싸움, 특히 전쟁에 있어서 한순간의 망설임은 그대로 승패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전방에선 파양주의 주력이 치고 들어왔으니, 고강이 이끄는 오천의 매복조는 그 즉시 밀리기 시작해 점차 패색이 짙어졌다.
이렇게 되면 싸움은 일방적이 된다. 바로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장수들은 허풍도 치고 고함도 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막주군은 그 어떤 약도 통하지 않을 상황에 처하고 말았고, 그 점은 지휘를 하고 있는 고강이 가장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후퇴다, 후퇴! 대열을 흩트리지 마라!”
으드득, 이를 갈아붙이며 고강은 명을 내렸다. 적의 본대는커녕 선봉대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 기껏 매복한 보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다.
그나마 철수할 곳이 있다는 게 고강으로선 큰 다행이었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목철린의 명에 따라 침사성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대오를 흩트리지 말고 날 따르라! 되도록 적과의 접전은 피해라!”
명을 내린 후, 고강은 가장 앞장서서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부하들도 침사성으로 들어간다는 건 모르고 있으니, 철수 장소를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적들도 들을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고강이 이끄는 막주의 매복조는 저우가 이끄는 유인군의 꼬리를 물 듯이 하여 침사성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