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막주토벌莫州討伐 2 (18/66)

막주토벌莫州討伐 2

1

막주군의 저항은 완강하기 짝이 없었다. 광운의 지원군이 도착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적들은 울창한 수림 속에서 유격전을 감행하며, 끊임없이 파양주군을 괴롭혔다.

하긴, 이 정도 저항은 광운도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한차례 침사성으로 밀려들어 가 괴멸 직전의 위기까지 처했으니, 이 정도도 저항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사이 마용승의 독촉도 몇 차례 있었다. 한 번 이길 뻔했던 전쟁을 왜 그리 오래 끄느냐는 얘기였다.

물론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 쓸 광운은 아니었다. 무릇 전장에 나온 장수는 그 상황에 따라 황제의 명이라 해도 거부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 전쟁에서 광운이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건 바로 명령 체계의 이중성이었다. 곽준방이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사사건건 작전에 관여하였고, 때로는 단독 전투도 불사했기 때문이다.

이 점이 광운으로선 화가 나기도 했고, 또 안타깝기도 했다. 곽준방처럼 뛰어난 장수가 사소한 감정에 져서 전쟁 자체의 그림을 다시 그리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병사들의 사기도 점차 떨어져 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최근 들어 이틀이 멀다 하고 쏟아져 내리는 더운 지방 특유의 소나기였다. 진구렁 속에 발이 빠지고, 온통 눅눅히 젖은 상태에서 두 달간이나 싸움이 지속되니 점차 지쳐 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점도 광운으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벌써 팔월, 비록 더운 지방이라고 해도 이렇게 연일 비가 내리는 철은 끝날 때다. 적어도 지난번 막주와의 싸움 때는 그랬었다.

그런데 지금도 밖엔 비가 내린다. 이런 실정이니 화공으로 수풀을 불 싸지르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은신에 능한 적들의 매복이나 기습에 대처하는 게 고작이었다.

‘타개책을 찾아야 되는데…….’

이번에 새로 지은 영채 안에서 지도를 펼쳐 놓은 광운은 고민에 휩싸였다.

사실 이 지도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침사성과 그 주변의 지형을 그린 것인데, 적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울창한 수림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 한 장으로 그들을 찾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보고! 기호산의 곽 장군에게서 전령이 왔습니다!”

“뭣이? 곽 장군께서? 어서 모시도록!”

가볍게 놀라며 광운은 곽준방의 전령을 맞았다. 어쨌든 신분의 차이가 나니 정중한 어투였다.

“곽 장군께선 별일 없으시오?”

“연일 군무에 전념하시느라 조금 수척해지셨지만, 건강은 여전하십니다.”

“그거 다행이오. 그런데 전갈은…….”

“이참에 침사성을 먼저 떨구기 위해 병사들을 움직이겠다는 전갈이셨소. 기호산을 비우게 될 것 같으니, 광운 장군께 뒤를 부탁한다고 하셨소.”

“그건 안 되오!”

전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광운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언성도 자연스레 커졌다.

“안 되다니? 이건 작전 회의가 아니라, 곽 장군의 명이셨소. 명에 따르시오!”

“어찌하여 곽 장군은 그처럼 서두르시오? 지금 침사성을 떨구고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면, 놈들은 곧바로 사주로 치고 들어갈 것이오. 사주는 지금 무인지경이나 마찬가지, 어떻게든 놈들을 여기 묶어 둬야만 하오. 침사성을 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요!”

“하지만 이처럼 연일 비가 내리니 병사들의 꼴이 말이 아니오. 성을 떨군다면 우선 이 비는 피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도 계셨소이다.”

“전장에서의 일기 변화는 당연히 병사들이 떠안아야 할 몫이오. 이까짓 비에 굴복하여 대세를 그르치지 말라고 전해 주시오!”

단호한 태도만큼이나 광운의 어조는 점차 거칠어졌다. 그 간단한 원리도 생각지 못하고, 그저 비를 피하겠다는 곽준방의 의도가 한심스러웠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고 광운은 확신했다. 만약 파양주군이 침사성으로 치고 들어가면, 막주군은 분명 그 병력을 둘로 가를 것이다. 그 일대는 침사성을 포위하고, 나머지는 텅 비어 있다시피 한 사주로 치고 나갈 게 분명하다.

광운이 두려워하는 게 바로 그 점이다. 어차피 파양주군 입장에서 이건 소탕전이다. 적을 너른 곳에 흩어져 있게 하는 것보다는, 좁은 곳에 몰아 두는 게 좋다.

게다가 사주는 이미 파양주 마용승의 지배를 받는 곳이다. 그 땅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어쩔 수 없이 그 피해는 백성들이 고스란히 입게 된다.

“어쨌든 난 곽 장군의 명을 전했소. 뒷일은 광운 장군께서 알아서 하시오.”

“안 되겠군. 내가 직접 가서 곽 장군을 뵈어야겠소. 편월을 불러라!”

광운은 편월을 찾았다. 곽준방에게 같이 가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런 기회에 보다 많은 병법을 가르쳐 두기 위함이었다.

그 생각으로 우장雨裝을 갖추고 있을 때, 편월이 토끼처럼 빠르게 뛰어 들어왔다. 이 역시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는 탓이었다.

“준비해라, 편월! 곽 장군께 같이 가자.”

“응? 싫어!”

“싫다고? 뭐 다른 할 일이 있는 건가?”

예상과 다른 대답을 하는 편월에게 광운이 궁금한 듯 물었다. 작전 회의 자리라면 기를 쓰고 참가하려던 평소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달리 할 일은 없지만… 어쨌든 가기 싫어! 비도 오고.”

그 말에 광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를 뚫고 기호산까지 다녀오자면 누구든 인상부터 찌푸릴 테니까.

“좋아. 그럼 나 혼자 다녀오겠다. 그동안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그리고 잡가군도 잘 통제하고 있도록.”

“응!”

제법 준엄하게 내뱉은 광운의 말에 편월은 가볍게 대꾸했다.

광운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들어 더욱 반항적이 된 편월이었다. 이처럼 고분고분한 적이 없었기에 조금은 불안해졌다.

그러나 군사 문제에 있어선 실수가 거의 없었다. 파양주의 정규군이야 다른 지휘관이 있으니, 편월에겐 잡가군만 맡기면 된다.

하기야, 이런 날씨 속에 불만을 터뜨리고, 혹은 사소한 문제들을 일으키는 건 대개 잡가군이다. 군율의 지엄함은 그들에게도 적용되지만, 아무래도 떠돌아다니는 습성 탓이었다. 그래도 편월이라면 그들을 잘 통제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다녀오마.”

“조심해.”

간단한 말로 광운을 배웅한 편월은 그대로 곧장 빗속을 걸어 어디론가 향했다.

편월이 간 곳은 잡가군이 사용하는 영채 중 한 곳이었다. 이 역시 정규군과는 달리 허름하기 짝이 없어 여기저기서 비가 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거긴 영채라고는 하지만, 죄를 지은 병사들을 가둬 두는 임시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고작 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평소 이 영채엔 수인囚人 두 사람을 지키는 약간의 병사들만이 기거하지만, 오늘은 북적거렸다. 근 쉰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들어와 있는 까닭에서다. 모두들 잡가군이었고, 야릇한 긴장 속에서 그들은 편월을 맞았다.

“광운 장군께서는 왜…….”

편월이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두건득이 물었다. 광운이 왜 갑자기 편월을 불렀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곽 장군께 같이 가자고 했소.”

묘하게 두건득을 대하는 편월의 말투가 평소와는 달랐다. 무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만큼 컸다는 의미도 없지 않았다. 같은 잡가군 소속이라도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겐 말을 높여야 된다는 것쯤은 알 만한 나이인 것이다.

“곽 장군께?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 편월 대장의 생각은 어떻소?”

“알 게 뭐요! 요즘의 곽 장군이라면 달리 생각하기도 싫소. 그건 그렇고, 모두 모인 거요?”

“그렇소. 비록 인원은 얼마 되지 않지만,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오.”

은근한 자부심이 깃든 목소리로, 두건득은 모여든 사람들을 손으로 한차례 가리켰다.

“게다가 용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오. 여차하면 오백 명 이상의 힘을 낼 용사들이오.”

“저들은 아직이오?”

두건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편월은 영채의 가장 안쪽을 시선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바로 유일한 수인인 두 사람, 맹아 부자였다. 그들은 벌써 두 달 정도 저렇게 수인의 신분이 되어 갇혀 있는 중이었다.

“아직도 고집을 꺾지 않고 있소. 하지만 바로 그게 무장다운 점 아니겠소. 벌써 두 달 정도 갇혀 있었으니, 이쯤에서 용서해 주시는 게 어떻겠소?”

이 말은 두건득의 입을 통해 벌써 몇 번이나 광운, 혹은 편월에게 전한 것인지 모른다.

물론 그게 받아들여진 건 아니다. 광운은 편월에게 미뤘고, 편월은 여적 단호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상관을 우습게 알고, 해 주는 말에도 도무지 승복하지 않는 자들은 필요 없어!”

“그렇다면 지금 당장 저들을 끌어내 그 목을 베어 버리시오!”

“뭐라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보다는 방금 전에 했던 말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두건득의 말에 편월의 어조는 자연스레 날카로워졌다.

“지금부터 우리가 할 얘기는 극도의 기밀을 요하는 것들이오. 대장의 말처럼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이라면, 더 이상의 얘기는 진행시킬 수 없소. 저들도 듣는 귀와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진 자들이니까.”

요컨대 앞으로 이 자리에서 나오게 될 비밀을 지키려면 시원히 두 사람을 용서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거나, 혹은 아예 베어 버리라는 뜻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편월은 생각에 잠겼다. 두건득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편월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 역시 두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부하 잡가군이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대든 그 행위만을 엄격히 다스리고 싶었을 뿐이다.

굳이 거기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목숨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맹아 부자의 근성도 고쳐 주고 싶었고.

태어나면서부터 전장을 누볐던 편월이다. 죽음, 특히 아군의 죽음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그리 기분 좋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살아남으라고 했던 광운의 가르침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저들을 불러라! 다시 한 번 내가 직접 말해 보겠다.”

일단 지휘자의 위치로 돌아가자 편월의 어투는 다시 바뀌었다.

“존명! 그 둘을 대장에게 끌고 오너라!”

두건득의 말에 영채 가장 깊숙한 곳에 임시로 설치해 둔 감옥 안에서 두 사람이 끌려 나와 편월 앞에 무릎 꿇렸다. 그때도 맹아 부자는 가슴을 편 당당한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아직도 생각을 고친 것 같지 않군.”

“다름 아닌 무장의 고집을, 무장의 입을 통해 뱉은 말이오. 쉽게 고쳐질 턱이 있겠소?”

“방금 두건득의 말을 들었겠지? 오늘 우린 할 일이 있어 부득이 그대 부자의 목을 칠 수밖에 없다.”

“그 또한 군령을 어긴 벌이라면 부득이한 일. 이 몸부터 베어 주시오. 다만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은, 설사 우리 부자가 여기서의 일을 알았다 하더라도 결단코 입 밖으로 내진 않았을 거요. 남의 비밀을 팔아 뭘 추구한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소이다. 구차하게 이 말을 하는 건, 하지 않고 죽는다면 남의 비밀이나 캐고 다니는 간인처럼 취급될까 싶어서요. 자, 이젠 더 이상 미련이 없소이다. 마음대로 하시오!”

여전히 맹아 아비의 말은 장황했다. 그래도 한마디 틀린 구석은 없었다.

“그래? 그렇게 죽기가 소원이라면…….”

“대장, 잠깐만!”

편월의 말을, 두건득이 옆에서 성급하게 잘랐다. 어쨌든 편월은 대장이다. 그에게서 극단적인 명이라도 떨어진다면 두 번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정말 이들의 목을 치실 생각이오? 정 그렇다면 그 아들만이라도 살려…….”

“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편월의 고함이 비 새는 영채 안에 짜랑하게 울려 퍼졌다. 아직 변성기 전이라지만, 전장에서 익은 목소리는 여느 장수들 못지않았다.

두건득으로선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말을 또 바꾸자니, 평범한 두께에 불과한 얼굴 가죽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두건득이 찔끔한 표정으로 물러가자, 편월의 시선이 다시 두 사람에게 돌아갔다.

“여전히 무장답게 죽고 싶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단 말이지?”

“그렇소이다!”

“알았어. 그런데 무장이 옥에 갇혀 참수당하는 건 창피하지 않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다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군령의 적용에 따른 참수라면 부득이한 일이라고도 했소!”

“좋아. 이들을 끌어내서 당장 목 베고, 그 목을 효수해! 죄목도 적어서.”

“존명! 하지만 아군 병사의 참수는 대장군의 직접 지시가 있어야만 하오. 그게 비록 잡가군이라 해도 예외는 될 수 없을 터, 광운 장군이 곽 장군께 가셨다 하니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행함이 가한 줄 아오.”

“하지만 광운은, 아니 광운 장군은 돌아올 때까지 내게 모든 걸 책임지라고 했어! 그러니…….”

“그건 일반 군무에 대한 것이오! 병사들의 생명은 설사 일국의 왕일지라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법이오.”

“명령이야. 그러니 당장 시행해!”

“그렇게 되면 이번엔 편월 대장이 군령을 어긴 죄로 처벌을 받을 것이오!”

“뭐?”

대뜸 편월의 안색이 굳어졌다. 지금 맹아 부자에게 걸린 죄명은 군령을 우습게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된다면,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노릇이다.

“정말 그래야 하나?”

“당연히 그래야만 될 일이오.”

“알았어. 그럼 광운 장군이 돌아올 때까지 다시 가둬 놔.”

“어디 다른 곳에 묶어 두는 게 어떻겠소?”

“왜? 우리 비밀이 누설될까 봐? 들었잖아. 남의 비밀을 쉽게 입에 올리지는 않는다고. 목숨까지 쉽게 버리는 자들이 뭐가 두려워 거짓말을 하겠어. 그냥 가둬만 둬.”

“존명! 이들을 다시 가둬라!”

이의를 제기할 두건득이 아니었다. 편월의 마음이 다시 바뀔세라 얼른 명을 내렸다.

사실 여기엔 두건득의 억지도 상당히 작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편월이 대장이니 극단적인 명을 내리지 못하게 말린 걸 떠올리면, 스스로도 낯이 붉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병사들 생명의 소중함과 군령을 들먹였지만, 편월에게 맹아 부자를 살리고픈 마음이 없었다면 애당초 씨알도 먹히지 않을 얘기였다. 어찌 되었든 전장에선 직속상관의 명이 최우선이니까.

그러고는 모여든 사람 전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모두 전장 이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각오로 이렇게 모였다. 그 점에 대해 불만은 없는가?”

“예!”

“그게 있었다면 애당초 여기 오지도 않았소!”

“이 전쟁을 보다 빨리 끝낼 수만 있다면!”

두건득의 말에 영채 안에 모인 오십여 명의 잡가군 입에서 나직한 대답과 함께 한마디씩의 얘기가 터져 나왔다.

“질문이 있소!”

“뭔가? 사양치 말고 궁금한 건 뭐든 물어라.”

“편월 대장은 정말 이게 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확신하시오?”

“대장이 한 말씀 해야겠소.”

지금까지 잡가군을 상대했던 두건득이 편월에게 말을 돌렸다.

“지금처럼 싸워서는 수림 속에 쥐새끼같이 웅크리고 있는 적들을 섬멸할 수 없어. 그러니까 우린 다음 전투 때를 기해, 파양주군에서 이탈한다. 즉 존재하지 않는 부대가 된다는 얘기지.”

“그럼 우리의 이탈에 대한 처벌은…….”

“이기면 돼! 우리 덕에 이겼다면 상은 있을지언정 벌이 있을 게 뭐람!”

또 다른 누군가의 질문에, 잡가군 중 한 명이 당찬 어조로 편월을 대신해 대답했다.

“하지만 우린 불과 쉰 명뿐이오. 이 인원으로는 유격전을 감행하기도 힘들 거요.”

“난 방금 두건득에게 여기 있는 쉰 명이 유사시엔 그 열 배의 힘을 낼 수도 있는 용사라고 들었어. 그런데 벌써부터 겁먹었어?”

“겁을 먹다니? 아무리 대장이라고 해도 그런 말은 용납하지 못하겠소. 난 다만 인원을 좀 더 보강할 필요가 있다는 걸 강조했을 뿐이오.”

“그 점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소! 실은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잡가군이 보다 더 있다고 알고 있소. 그들을 포섭하는 게 어떻겠소?”

“믿을 수 있는 자들인가? 일이 틀어졌을 때, 전장을 이탈했다는 오명을 각오할 정도로?”

이번에 재우쳐 물은 건 두건득이었다. 그 역시 인원 보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터, 같은 취지의 질문이 나오자 선뜻 나선 것이다.

“우린 잡가군이오. 비록 내일 당장 적이나 아군으로 갈라질 수도 있지만, 같은 편에서 싸울 땐 결코 서로를 배신하는 일은 없소!”

“좋다. 그럼 그대가 포섭할 수 있는 인원은?”

“족히 열 명은 넘을 거요.”

“그 정도 인원이라면 나도 가능하오!”

“나 역시 그 정도라면!”

말을 꺼냈던 자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자신에 찬 말들이 쏟아졌다.

“모두 조용히! 그렇다면 다음 출동 전까지 각자 열 명씩 포섭하도록 한다. 어떻소, 편월 대장?”

편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숫자가 많으면 적들도 의심하겠지만 오백이라면 전쟁이 지겨워 이탈해 버린, 지워진 군대로 인식될 수 있을 터였다.

“한 말씀 올리겠소!”

돌연 갇혀 있던 맹아의 아비가 고함을 질렀다.

“이 몸에겐 어떤 처벌을 내려도 달게 받겠으나, 아들놈은 아직 무장으로서 꿈도 펼쳐 보지 못한 상태요. 부디 간청하건대 그 일에 아들놈도 참가시켜 주시오. 결코 실망시키진 않을 거요. 대장도 말하지 않았소? 무장이 참수를 당하는 건 수치임에 틀림없소. 그 수치는 모두 이 몸이 감당할 것이니, 아들놈은 부디 데려가 주시오.”

여전히 길게 말하는 맹아 아비의 말투는 끝이 조금씩 갈라졌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은 두건득은 말없이 편월을 지켜보기만 했다. 눈빛만은 맹아 아비의 말을 받아들이라고 강력하게 호소하면서…….

편월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에 따라 영채 안은 때 아닌 긴장감으로 정적이 흘렸다.

“좋아! 단, 내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어떤 게 전쟁이고, 그 전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똑똑히 가르쳐 주지.”

그 말에 하마터면 두건득은 실소를 토할 뻔했다. 사정이야 어떻든 맹아는 편월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다. 가르친다는 말은 어딘지 엉뚱하게 들렸다.

그러나 결코 웃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부자 중 맹아만은 살아남게 되었으니, 두건득은 재빨리 그 명을 시행했다.

2

잡가군의 충돌은, 퇴락된 영채에서 편월을 비롯한 쉰 명이 모였던 날로부터 이틀 뒤였다.

마침 날이 활짝 개어 오늘은 잡가군 전체가 막주군이 있을 법만 수림을 뒤지는 수색전에 참여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물론 그 대장은 이번에도 편월이었다.

출격하기 직전에야 편월은 옥에 갇혀 있는 맹아를 은밀히 불러 옆을 따르게 했다. 미리부터 석방해서 데리고 있다가는 자칫 엉뚱한 의심이나 오해를 받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두건득이 데려온 맹아는 새빨갛게 상기된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혼자선 못 가겠다고 버티다 억지로 끌려온 듯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자의 갑옷과 무구를 가져오도록!”

이 말은 편월의 기우에 불과했다. 벌써 두건득은 그것까지 챙겨 와서 맹아에게 입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게 끝나자 편월은 맹아의 말고삐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두건득을 말 가까이로 불러 말했다.

“나중에 우리가 버릴 말을 본대까지 끌고 갈 인원도 수배해 뒀어?”

“염려 마시오, 대장.”

두건득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출동하게 되면, 편월을 비롯한 오백의 잡가군은 모두 말을 버릴 예정이었다. 이런 수림 속에서의 말은 더러 장애 요소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건 막주군도 마찬가지다. 새외 변방을 떠돌며 강력한 기병을 앞세워 대륙의 서남방을 차지했지만, 수림 속에선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말을 버렸다.

한마디로 탈영을 하게 될 오백의 파양주 잡가군은 막주군과 동등한 조건에서 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여차하면 그들로 위장하는 것도 불사한다는 각오였다.

와두두둑-!

요란한 말발굽을 울리며 달려온 사람은, 십여 기의 호위병을 거느린 광운이었다.

“준비는 되었나, 편월?”

“응!”

“명심해라. 수색전은 어디까지나 적을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니 적들을 너무 깊이 추적하지 말고, 되도록 적들을 유인해 내도록 하라.”

“알았어!”

무슨 말을 해도 순순히 수긍하는 편월의 태도가 또다시 광운을 불안하게 했다. 평소라면 적들을 끝까지 추적해 섬멸하겠다고 설쳤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군이 출동하기 직전이다. 대장끼리 오래 언쟁을 하고 있는 건 자칫 사기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좋아. 그럼 출발하라!”

“전군 출발!”

광운의 말에 이은 편월의 명에, 옆에 있던 기수가 장수기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둥둥둥둥-!

뿌우우, 뿌우우-!

동시에 본대의 영채 안에선 북소리와 소라고둥이 울창한 수림을 흔들며 퍼져 나갔다.

우두두두-!

오천의 잡가군이 말발굽 소리도 우렁차게 진격을 개시했다.

싱긋!

편월은 광운을 향해 한 번 웃어 준 후, 소질풍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이렇게 떠나고 나면 그다음은 탈영이다. 그때 광운은 과연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출발한 편월은 이내 소질풍의 속도를 빠르게 했다. 그 손에 여전히 맹아의 고삐가 쥐여 있었음은 물론이다.

* * *

막주군의 총대장이라기보다는, 황제에 의해`—`실제론 가겸후지만`—`정북후征北侯에 임명된 목철린은 의외로 밝은 표정이었다. 괴멸 직전까지 몰려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상하다고 할 만한 일이었다.

‘흐흐흐, 파양주 놈들! 네놈들의 좋은 시절도 이제 곧 끝날 거다. 허주의 조환이 사주로 치고 들어와 네놈들의 배후를 노릴 테니까.’

바로 이게 그 엄청난 고전 속에서도 목철린이 웃을 수 있는 이유였다.

허주와의 제휴, 이 일에 목철린은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곽준방의 포위망을 뚫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도 바로 이것이었다.

당연히 조건은 있었다. 힘을 합해 마용승을 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땅을 서로 나눠 갖기로 했다.

처음 조환은 그 제의에 시큰둥했다. 누가 봐도 패색이 짙은 목철린의 편을 들어 봐야 남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때 목철린은 황제로부터 받은 자신의 관직을 내밀었다. 자신은 정북후고, 조환은 아직 정식 관직을 얻지 못한 지방의 일개 패주에 불과하다. 일이 성공했을 때 황실에 얘기해서 조환에게도 정식 관직이 내려지도록 주선하겠다고 했다.

조환의 마음을 움직인 건 바로 그 말이었다. 가겸후가 황제를 등에 업고서부턴 명색이 한 나라, 한 지방의 패주들은 모두 관직을 얻고 있다. 거기에 끼지 못한다면, 이 열국난세列國亂世에 이름 하나 걸지 못하고 무너지기 십상이다.

목철린은 바로 그 점을 노렸던 것이다. 단독으로 황실에 줄을 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조환의 약점을 파고들어 동맹을 성사시켰다.

‘이제 시간과의 싸움인데…….’

그 문제 역시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고, 목철린은 생각했다. 전쟁은 유격전이 되었고, 그건 지리에 익숙한 막주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 철 그른 비도 적에겐 막대한 타격을 주고 있을 터이니, 목철린으로선 조환이 이끄는 허주군이 사주로 밀고 들어올 날만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적군 출격!”

부하의 보고가 있었지만, 목철린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적들이 출동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알겠다. 달리 지시는 않겠다. 언제나처럼 적당히 두들겨서 쫓아 보내라!”

“존명!”

부하가 복명하고 물러가자, 목철린은 다시 느긋하게 생각을 이어 갔다. 허주와의 동맹이 이루어진 이상, 이 싸움은 어디까지나 지구전持久戰이 되어야 한다. 적과의 직접적인 결판은 기필코 피해야만 한다.

“와아아-!”

“쳐라! 물러서지 마라!”

어디선가 적과 아군이 격돌한 모양이다. 악이 받친 함성과, 병장기가 부딪치며 내는 철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공!”

그제야 측근 무장 중 한 명이 목철린을 불렀다. 비교적 가까운 곳까지 적이 쳐들어왔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 말을 들은 목철린은 천천히 말에 올랐다. 다른 자들은 모두 도보였지만, 명색이 정북후인지라 그만은 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다가, 일제히 물러나도록 해라! 그 뒤로는 새삼 싸울 것도 없다!”

“존명!”

동시에 전령이 마치 쫓기는 토끼처럼 빠르게 수풀 사이로 달려 나갔다.

“네 생각은 어떠냐, 고강高岡?”

“예? 뭐가 말입니까?”

갑자기 자기 이름이 불려 흠칫 놀란 고강은, 목철린이 가장 아끼는 부하 장수였다.

“허주의 조환이 언제쯤 사주로 출병할 것 같나?”

“지금쯤이면 군사들의 정돈이 끝났으리라 사료됩니다. 그래도 파양주의 눈치도 살펴야 할 테니, 빨라야 보름 정도 소요될 것 같습니다.”

“보름. 내 생각과 같군. 그럼 다시 묻지. 우리가 이 싸움을 보름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당연한 말씀! 누가 뭐래도 우리 군사들은 이곳의 지리에 익숙합니다. 성에서 나와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이상, 보름 아니라 육 개월도 버틸 수 있습니다!”

탁!

씩씩한 대답과 함께, 고강은 갑옷을 입은 자신의 가슴께를 탁 소리 나게 쳤다. 그 역시 이 유격전엔 자신 있다는 얘기였다.

“든든하다! 이번 전쟁만 승리한다면 우리 모두 이 지긋지긋한 막주를 벗어날 수 있다. 모두 힘내도록!”

“그보다, 적들이 너무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슬슬 물러서도록 하자. 놈들에겐 이 수림 속의 모기들을 남겨 두고서 말이다. 흐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목철린은 말 머리를 돌렸다.

그 뒤를 온통 진흙투성이인 측근 무장들이 우르르 도보로 뒤따랐다.

그 어느 때보다 편월은 격렬하게 적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뒤를 따르는 잡가군들의 호흡까지 거칠어질 정도였다.

“대, 대장! 이건 너무 깊이 추적하는 거요. 광운 대장군의 명은…….”

“시끄럿!”

누군가의 숨찬 제지를 편월은 세차게 잘라 버렸다. 뭐라고 해도 잡가군의 일 할인 오백 명이 이탈을 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혼란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는 얘기다.

“놔주시오, 대장! 날 놔줘요!”

편월에게 말고삐를 잡힌 맹아가 연방 고함을 질렀다. 이 출동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에 따른 행동도 감당해 낼 자신이 있었다.

“너도 닥쳐!”

맹아 역시 억누른 편월은 더욱 급하게 말을 몰았다.

“더 이상은 안 되오. 지금쯤 전령을 보내 광운 장군에게 적들의 위치를 알려야 하오!”

“그럼 네가 가!”

“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난 잡가군의 선봉으로 뽑힌 몸이오! 그런데 전령으로 가라니?”

“그럼 입 닥치고 적이나 상대해! 네놈의 왼쪽부터 조심하고!”

편월의 주의에 그는 황급히 말을 세우며 왼쪽으로 창을 내질렀다. 막주군 한 명이 그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사이 편월은 벌써 저만치 훌쩍 달려 나갔다.

“놈들이 물러선다! 놓치지 마!”

그렇게 고함을 지르며, 편월은 쏜살같이 수림을 헤집고 달렸다.

편월의 말 그대로였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적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실 이런 적들의 움직임이 편월에겐 낯설지 않았다. 지금까지 막주군은 늘 이처럼 미는 대로 밀려 나가 미꾸라지처럼 수림 사이로 빠져 다니곤 했었다.

이 점이 편월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적들이 좀 더 강하게 붙어 줘야 혼란도 가중될 테고, 그래야 탈영하기로 정했던 부하들이 보다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덤벼라, 이놈들아! 여기 파양주의 잡가군 대장 편월이 있노라! 막주군에 사람이 있거든 나와 창을 맞대라!”

늘 그렇듯 전쟁에 나선 편월은 이미 나이를 잊었다. 적을 자극하는 말투나 행동이 여느 정규군의 장수들 못지않았다.

턱없이 큰 대도를 휘두르는 동작도 입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물러가는 적의 꼬리를 바짝 따라 물며, 한꺼번에 두세 명씩 베어 넘겼다.

“대장!”

정신없이 설치는 편월을 부른 건 두건득이었다. 그 역시 험악한 전투를 치르고 온 듯, 갑옷이 온통 피와 진흙이었다.

“누구냐?”

역시 편월은 벌써부터 전쟁 심리에 휩싸여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두건득도 알아보지 못하고 하마터면 대도를 휘두를 뻔했다.

“나요! 진정하시오!”

“아!”

두건득이 재차 고함을 지르고 난 뒤에야 편월은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

일단 알아보자 편월은 무섭게 빨리 냉정을 회복하고, 곧바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됐어?”

“대부분이 무사히 이탈했소.”

“말은?”

“그 역시 믿을 만한 자에게 맡겨 두었소.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이렇게 설치기만 할 거요?”

“뭐? 설쳐? 말 좀 곱게 못해?”

“지금 말이나 꾸미고 있을 상황이오? 대체 대장은 언제 이탈할 생각이오?”

“지금!”

말을 끝내자마자 편월은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와 함께 맹아도 같이 움직였다.

“소질풍을 잘 부탁한다!”

“염려 마시오. 그럼 집결지에서 뵙겠소.”

그길로 두건득은 두 필의 말을 끌고 수림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멋대로 움직이면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리겠다!”

“무슨 말이오? 이 맹아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알아요?”

“적을 만나면 눈깔부터 뒤집혀서 덤비는 네놈의 근성이 염려스러운 거다!”

“키키킥!”

“왜 웃어?”

“정작 적을 쫓으며 눈이 뒤집혀 아군도 알아보지 못한 건 대장이었잖아요.”

“뭐?”

편월로선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언성을 높였다.

“어쨌든 지금부턴 적들의 눈에 띄어선 안 돼!”

“아군의 눈도 피해야 되는 건 마찬가지지.”

얄밉게 대꾸하며 맹아는 벌써 저만치 앞장서 걸었다. 그 자세가 마치 장수를 호위하는 최측근 무장 같았다.

탈영한 오백의 잡가군이 집결한 곳은 파양주군 사이에서 청오림靑烏林으로 이름 붙여진, 어쩌면 막주에서 가장 울창한 수림 지대일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과연 청오림이라 불릴 만했다. 통상 나뭇잎들은 푸른빛을 띠지만, 이곳은 달랐다. 너무 울창하게 들어차 있기에, 서로의 그림자에 눌려 오히려 까마귀 날개처럼 검은빛으로 보였다.

“모두 집합했소이다, 편월 대장!”

편월과 맹아가 청오림에 도착했을 때, 거기엔 벌써 오백 여 명의 잡가군이 집결을 끝낸 뒤였다.

그걸 보고하는 두건득의 말만 있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편월이 모습을 드러내도 눈으로만 반길 뿐이었다.

이건 사전에 엄격히 지시해 둔 사안이었다. 지금부터 이들은 아예 사라져 버린 군대로 행동해야 한다. 쓸데없는 잡음을 내선 안 된다는 얘기다.

하더라도 편월이 한마디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물론 모두의 귀에 들릴 정도는 되게끔 음량을 조절하는 건 잊지 않았다.

“모두들 각오가 되었겠지? 지금부터 우린 탈영병이 되었다. 만약 이 전쟁을 이기지 못한다면 돌아갈 곳조차 없어져 버린다. 이 점, 단단히 각오했겠지?”

질문인지 다짐인지 모호한 편월의 말에, 오백의 이탈병들은 일제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우린 이 수림 속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 사냥꾼이 되어야 해. 적의 눈에는 물론 아군의 눈에도 띄어선 안 된다. 그렇게 적들이 우리에게 준 그대로 우리도 돌려준다!”

그 말에도 사람들은 눈빛, 혹은 고갯짓으로만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지금부터 각자 위장을 한다. 이 수림 속에 녹아들어. 제대로 하지 않는 놈은 우선 내 손에 모가지가 떨어질 거다!”

그리 길지 않는 편월의 몇 마디 말을 들으며, 두건득은 새삼 혀를 내둘렀다. 이건 심해도 너무 심하다. 아무리 전쟁이나, 부하들을 이끈 경험이 많다고 해도 고작 열두 살이다. 저런 말을 자연스레 술술 내뱉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역시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일까?’

정상적인 것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형적으로 뒤틀려 버린 시대!

그건 그대로 사람까지 기형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부자간의 칼부림도 예사고, 각자의 이득을 노린 부부간의 결합, 한 평 땅을 다투는 형제간의 모략까지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걸 보면, 편월과 같은 괴물(?)이 태어나 활동하는 것도 전혀 이상치 않으리라.

아무튼 그들은 편월의 명에 따라 각자 위장을 하기 시작했다.

“추적에 숙달된 자들은?”

그 역시 위장을 하면서, 편월은 두건득에게 물었다. 어쨌든 이 탈영병으로 구성된 부대의 관건은 적들을 먼저 찾아내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들의 흔적을 놓치지 않는 추적술에 능통한 병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쉰 명 정도 확보해 뒀소.”

“그럼 우선 그들에게 백 명을 딸려 척후의 임무를 부여해서 앞장세우고, 이각 뒤에 본대도 출발하도록!”

“존명!”

명에 따라 병사들을 출발시키면서, 두건득은 다시 한 번 편월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만에 하나라도 추적술의 달인들만은 잃지 않으려는 척후대의 배치는 자신으로선 떠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출발한 건, 남국 특유의 짙은 석양이 숲을 어둑하게 채색할 때였다.

오백의 이탈병들은 편월이 바란 대로 수림 속에 녹아 천천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3

비슷한 시각!

광운은 편월을 비롯한 잡가군 오백이 전장을 이탈했다는 보고를 듣고 망연자실해 버렸다.

‘믿을 수 없다.’

어떻게 믿겠는가? 누구보다 전쟁을 좋아하고, 또 대장 자리에 애착을 갖는 편월이 전장 이탈을 감행했다는데?

‘이건 필시 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편월이 전장을 이탈할 턱이 없다.

하지만 그 ‘뭔가’가 또 광운을 괴롭혔다. 혹시라도 전사를 했거나, 아니면 아군에 의해 뒤에서 당하는 경우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험악한 세상인 것이다.

“광운 장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광운의 막사로 들어선 사람은 진즉부터 와 있던 여상계였다.

“나도 영문을 모르겠소.”

“편월이, 꼬마 대장이 전장을 이탈했다니, 이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오! 부하들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잘못 보고했거나, 아니면 다른 일이…….”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던 여상계는 문득 말문을 닫았다. 그 뒷말을 하는 게 스스로도 두려웠다.

“실은 나도 여 장군과 같은 생각으로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소.”

여상계가 차마 못 한 말을 광운이 대신 했다.

“그렇다면… 꼬마 대장이 전사를 했다면 보고가 있었을 터, 이건 아군에게 당한 걸 거요. 바로 그자인가?”

“여 장군께 짚이는 게 있소?”

“지난번 우리가 왔을 때 꼬마 대장에게 불경했던 자들이 있었소. 군율에 의해 처벌하고자 꼬마 대장에게 맡겼었는데, 그중 아들인 맹아가 이번에 출전했다고 들었소. 아군에게 당했다면 그 맹아란 자가 가장 의심스럽소.”

“그자의 아비는 아직 옥에 갇혀 있소. 당장 불러 심문해 봅시다!”

여상계의 말에 광운은 허둥대며 서둘렀다.

편월이 전장을 이탈한 건 예삿일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총대장 직을 수행하고 있는 광운은 물론, 그가 이끌고 온 파양주군 전체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떻게든 서둘러 그 전모를 밝혀야만 한다.

두 사람 앞에 끌려 나온 맹아 아비는 평소와 달리 말이 없었다. 마치 입술이 붙어 버린 사람 같았다.

“어서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할까? 이번에 출동할 때 대체 너는 네 아들에게 뭐라 말해서 보냈느냐?”

그러나 이번에도 맹아 아비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의에 가까운 반항심이 번뜩이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쏘아볼 뿐이었다.

여상계는 답답했다. 처음 봤을 때 군율 운운했지만, 어디까지나 당당했던 맹아와 그 아비의 강한 기골에 은근히 호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그 호감과 이번 일은 별개의 것이지만 말이다.

“보아하니 이자와 그 아들에겐 죄가 없는 것 같소. 저처럼 당당한 눈빛과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소. 다만 내가 알고자 하는 건…….”

재차 질책하려는 여상계를 제지하며, 광운은 맹아 아비 앞으로 걸어갔다.

“듣자니 편월이 출동하기 전에 바로 그 영채에서 회합을 가졌다고 들었소. 그때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 알고 싶을 뿐이오. 말해 주시겠소?”

광운의 어투는 은근했다. 같은 잡가군 신분이란 것도 있었지만, 그도 지금까지 처벌 문제로 두어 번 맹아 부자를 만나면서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탓이었다.

“차라리 이놈의 목을 시원스레 베어 주시오! 장부로서, 무장으로서 남의 비밀을 입에 올리는 짓은 차마 하지 못하겠소. 다만 한 가지, 편월 대장은 결코 뜻 없이 이탈한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시오. 그러지 않았다면 이놈도 아들을 딸려 보내지 않았을 거요.”

여태 다물려 있던 맹아 아비의 입이 일단 한 번 터지자 역시나 그 말은 길어졌다.

“그럴 줄 알았어! 꼬마 장군이 생각 없이 전장을 이탈할 리가 없지!”

“잠깐, 여 장군!”

자신의 말에 동조한 여상계가 주위를 돌아보며 한마디 하자, 맹아 아비가 급히 그를 제지했다.

“뭔가?”

눈빛에 궁금증을 담은 채 여상계는 다시 시선을 맹아 아비에게 돌렸다.

“만약 이 일이 새어 나간다면, 편월 대장의 뜻이 살지 못하오.”

“뭐라고?”

그제야 흠칫 놀란 여상계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 딴에는 편월의 무고함을 알리려고 짐짓 큰 소리로 말했는데, 맹아 아비는 좀 다른 말을 뱉었다. 그 속내를 세세히 알 길은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친 섬뜩함은 그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염려 마시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믿을 만하오. 그러니 안심하고 얘기해 주시오.”

하지만 그땐 맹아 아비의 입이 다시 닫힌 뒤였다.

어쩔 수 없이 광운과 여상계는 그를 다시 투옥시키고 막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일까?’

편월이 불상사를 당하지는 않았다는 안심과 교차해서, 도대체 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오백이라는 적은 수의 병력으로 뭘 할지 하는 걱정이 광운의 가슴을 뻐근하게 채웠다.

광운이 곁에 있어도 툭 하면 저돌적으로 싸움에 임했던 편월이다. 이제 옆에서 통제해 줄 사람조차 없으니 어디까지 폭주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전사나 하지 말았으면…….’

석양을 건너온 어둠이 벌써 발치까지 깔리는 게 왠지 불길하기만 한 광운이었다.

* * *

수림 속의 귀신이 된 오백의 탈영병들이 최초로 적과 조우한 건 그로부터 사흘 뒤 한밤중이었다.

척후로부터 적을 발견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편월은 부하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소도 한 자루씩만 지참하게 했다. 대신 위장은 보다 치밀하게 했고…….

그렇다고 모두 무장을 해제한 건 아니었다. 부하들 중 활을 잘 쏘는 자 백 명은 무장 상태로 대기시켜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사백의 파양주군은 적들이 야영하고 있는 곳으로 은밀히 접근해 갔다.

아마도 본대에서 떨어져 따로 움직이는 별동대나 유군인 듯했다. 한눈에도 이백여 명의 적들이 방심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뒹굴며 잠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편월은 재빨리 두건득을 불렀다.

“백 명을 데리고 주변에 잠복해 있어.”

“잠복이라니? 불복이오! 적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잠복은 다른 사람에게 명해 주시오. 난 적들을 치고 싶소.”

두건득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건 역시 적과 얼마나 용맹하게 싸우느냐에 있다. 그래서 ‘일 번 돌입’이니, ‘첫 격돌’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 마음은 잘 알아. 하지만 저들은 본대가 아니야. 혹시라도 가까운 곳에 적의 본대나 다른 유군들이 있다면, 기습을 하다가 도로 기습을 당하는 수가 있어. 그걸 방지하자는 거니깐 그 공은 적 백 명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큰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 명을 제대로 수행하면 이번 싸움의 일등 공훈으로 치겠다. 잠복한 백 명 모두.”

“하지만 이건 기습이 아니오? 최대한 빨리 적을 섬멸하자면 아무래도 숫자가 많은 게 좋지 않겠소?”

“아무리 봐도 적들은 이백을 넘지 않아. 백 명이 잠복해도 아군 백 명은 뒷짐 지고 있어야 할 판이야.”

“스, 승복…….”

불만 가득한 얼굴로 두건득은 마지못해 명을 받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인원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일등 공훈으로 치겠다는 말 때문에 승복한 건 결코 아니었다. 전투란 어떤 변수가 작용할지 모른다. 편월의 말처럼 근처에 다른 적들이 있다면, 이 잠복으로 인해 부대의 전멸은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한 두건득과 백 명의 부하들이 잠복을 끝낼 때까지, 편월은 조용히 기다렸다.

“대장, 언제 시작해요?”

잠복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는 편월에게 맹아가 다가오며 나직이 물었다.

“네놈을 기다렸어.”

“에? 나를? 왜요?”

“싸움만 시작하면 미친 말처럼 설치는 네놈의 기질 때문이지.”

“에계? 이건 야습이오, 대장.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

“정말이지? 이번에도 광분해서 설치면 정말로 목을 베어 버린다?”

“약속할게요.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찍소리 한마디 안 하겠다고.”

“좋아. 전령!”

“대령이오.”

“대령.”

“각 부대에 전해라. 선두 다툼을 하느라고 적들에게 들키게 소란을 피우면 어떤 공을 세우든 참수에 처한다고. 어디까지나 은밀하게 적들을 섬멸해야 한다.”

“존명.”

“존명.”

조용한 명이었고, 전령들 역시 조용하게 복명하고 은밀하게 각 부대로 흩어져 갔다.

약 일각을 더 기다린 후, 편월은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를 맹아가 바짝 붙어 따랐음은 물론이고.

그건 한마디로 침묵 속의 도살이었다. 철저하게 위장한 잡가군이 은밀히 잠입하여, 있는 둥 마는 둥 한 불침번을 제거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른 적들도 마찬가지였다. 적들보다 백 명이나 많은 잡가군이다. 각기 한 명씩의 적을 제거해도 순식간에 적병 이백의 목은 동체와 분리되어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승리에 도취된 아군들이 함성을 지르거나, 서로의 공훈을 외친다면 만사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전군 정숙.”

편월의 입에서 나직한 한마디가 새어 나왔고, 그건 곧바로 가까이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멀리까지 전달되었다.

효과가 있다. 우려했던 일들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그제야 편월은 적들의 목을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라고 지시했다. 너무 비정하다 싶었지만 적에게 최대한의 공포심을 불어넣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였다.

“전령!”

“대령.”

“지금 즉시 두건득에게 달려가 은밀히 철수하라고 일러라. 만약 적들과 마주치더라도 최선을 다해 결전만은 피하라고 해.”

“존명.”

전령이 어둠을 뚫고 달려갈 때, 편월은 공격에 참가했던 잡가군에게도 같은 명을 내렸다.

피해는 전무했다. 이만하면 첫 싸움의 전과치고는 대단히 훌륭한 편이다.

남은 건 아군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며 은밀히, 다시 수림의 귀신이 되는 것이다. 그편이 적들에게 위축감을 보다 크게 주고, 아군의 사기를 극도로 향상시킨다.

잡가군들이 전장의 흔적을 지우고 철수하자마자, 두건득에게 보냈던 전령이 다시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보고! 북동쪽에서 약 오백가량의 적 출현. 빠른 속도로 접근 중.”

그 보고에 편월은 잠시 말을 잊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새로운 적과 싸워야 할지, 아니면 처음의 계획대로 조용히 물러서야 할지 당장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편월은 재빨리 잡가군의 상태를 살폈다. 비록 침묵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기세만은 터질 것처럼 밤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이걸 꺾는다면 다음 싸움이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오백이다. 이쪽과 같은 숫자라지만, 그냥 싸운다면 아군도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는다. 적은 숫자인지라 단 한 명의 손실도 아쉬울 수밖에 없다.

“대장?”

옆에서 맹아가 조심스레 불렀을 때, 편월은 결정을 내렸다.

“두건득에게 전해. 일단 궁수들을 대기시켜 둔 곳까지 은밀히 철수하라고. 결판은 거기서 낼 테니, 그 전에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해.”

“존명.”

전령이 재차 달려갔고, 남은 잡가군들의 철수가 보다 빨라졌다.

“창공蒼空!”

본대라고 할 수 있는, 편월이 이끄는 삼백이 대기시켜 둔 궁수들 가까이 접근했을 때 어둠 속에서 불쑥 수하 소리가 들렸다.

“벽월碧月.”

가볍게 대답하며 편월이 접근했을 때, 거기엔 벌써 두건득의 얼굴이 보였다.

“흔적은?”

“적당히 남기며 왔소.”

“좋아. 다들 활로 무장시켜.”

두건득이 적당한 흔적을 남겼다면 적병 오백은 기를 쓰고 추적을 감행할 게 뻔하다. 게다가 조금 전에 몰살시켰던 이백 적병의 시신까지 발견한다면 금상첨화다. 적들이 이성을 잃고 설칠 테니 말이다.

이건 중요한 문제다. 방금 편월은 활로 잡가군을 무장시키라고 했다. 적들이 이성을 잃고 설치면 설칠수록 그 화살의 좋은 먹이가 되고 말리라.

게다가 잡가군은 어디까지나 잠복한 상태에서 은밀한 전쟁을 치르겠다는 계획이다. 이성이 마비된 적들이 날뛴다면 그만큼 이쪽이 노출될 염려도 적다는 얘기다.

“사거리 내로 적 접근.”

“조금 더 기다려.”

보고하는 나직한 소리가 들렸을 때, 편월 역시 작은 소리로 대기할 것을 명했다. 적들을 최대한 가까이 끌어들여, 활로 채 죽이지 못한 자들은 직접 병기를 휘둘러 섬멸해야 한다. 그것도 최대한 은밀하게!

명을 내린 직후 편월은 조용하게 움직여 대열의 선두로 나섰다. 보다 정확하게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편월은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적병이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들을 정확하게 간파하기는 어려웠다.

‘놈들도 바보만 모아 둔 건 아니군.’

어쩌면 적병도 아군의 매복을 짐작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보고를 받은 편월이 선두까지 나서는 그 짧은 순간에도 이처럼 훌륭한 은신을 한 것이리라. 하긴, 위장술이 또 하나 막주군의 장기이기도 했지만.

온 전신의 감각을 총동원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정확하게 잡히는 적의 기척이나 동태는 없었다.

그렇지만 적은 지금도 꾸준히 거리를 좁히고 있다. 짧은 삶 거의 전부를 전쟁으로 지새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편월의 육감은 그렇게 속삭였다.

‘적병이 오백 정도라고 했지. 우리와 비슷한 숫자니, 첫 공격에서 최대한 타격을 주지 못하면 이 전투의 승패는 장담할 수 없다.’

이 순간에도 부지런히 움직이는 편월의 뇌리에 스친 생각이었다.

동시에 편월은 뒤에 대기하고 있는 잡가군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다른 한 손으로 입에 작은 나무토막을 문 건,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공격하겠다는 의도였다.

편월의 신호는 빠르게 잡가군들에게 전달되었고, 군병이라면 필수적으로 하나씩은 가지고 다니는 나무토막을 입에 물었다.

그사이 편월은 화살 한 대를 재었다. 이건 따로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그의 동작을 본 몇몇이 따라 했고, 곧바로 잡가군 전체의 행동으로 옮겨졌다.

‘은밀한 공격은 안 되겠지만, 놈들의 정확한 동태만은 이걸로 파악할 수 있겠지.’

아군이야 입에 나무토막을 물었으니 소리를 낼 턱이 없다.

하지만 적군은 다르다.

화살 공격을 당하면 개중엔 비명을 지르는 자도 있을 게고, 함성을 올리며 미친 듯이 육박해 오는 놈도 없지 않을 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편월은 첫 번째 화살을 발사했다. 적이 있다는 육감이 가장 강하게 풍기는 곳을 겨냥한 것이다.

퓨퓨퓨퓨우웅-!

그와 함께 오백의 잡가군도 일제히 화살을 쏴 댔다.

“크아악!”

“적이다! 적의 화살 공격… 으악!”

예상대로 적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거기에 대고 화살 한 대를 더 쏜 편월은, 곧장 대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와앗! 쳐라!”

“파양주의 쥐새끼들! 거기 숨어 있었구나!”

막주군도 이편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화살 공격에 얼마만큼 타격을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파양주군이 치고 나가자 그들 역시 선뜻 은신을 깨고 나와 대응하기 시작했다.

편월로선 반가운 일이었다.

만약 적들이 달아나거나, 혹은 다른 곳에 신호를 보냈다면 난처했을 터였다. 어떤 경우든 이쪽의 존재가 노출될 위험성이 있으니 말이다.

우선 눈에 띄는 적병 서너 명을 잘라 넘긴 후, 편월은 잠깐 주변을 살폈다. 이제 피아간이 모두 노출된 상태라 그 움직임을 훤히 알 수 있었다.

적들은 옆으로 쭉 늘어선, 소위 일자 진을 형성한 모양이었다. 그게 숨어 있는 적들을 수색할 땐 가장 효율적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아군인 잡가군은 뒤죽박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제각기 은신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적에게 달려들었으니, 이건 어떤 진을 갖추기는커녕 대오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게 의외의 효과를 발휘했다. 처음 화살 공격을 받았던 막주군은 잡가군이 정연한 대오를 갖추고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던 참에 이처럼 마구잡이로 덤비니 대번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이건 이긴 싸움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대로 둬서는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어떻게든 대오를 갖춰 체계적으로 적을 짓밟아야 한다.

“퉤!”

편월은 물고 있던 나무토막을 뱉어 버렸다. 적들이 일으킨 소음으로 인해 이미 은밀한 싸움은 물 건너가 버렸다. 무질서한 아군을 정돈하자면 고함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두건득, 이백을 데리고 후미로!”

솔직히 두건득이 어느 구석에서 싸우는지 알지도 못하고 내린 명이었다.

그러나 복명하는 소리는 제꺽 들려왔다.

“존명!”

이미 대장인 편월이 먼저 소리를 지른 터였다. 거기다 이백을 수습해 뒤로 빠지려는 두건득의 목소리가 가세하자, 잡가군들 역시 일제히 악이 받친 함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머지 삼백은 여기로 집결! 집결해!”

편월은 재차 수림에 드리워진 어둠이 화들짝 놀랄 만큼 큰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그건 즉각 먹혀들었다. 어차피 유리한 싸움이었으니, 몸을 빼 편월의 곁으로 모여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마 편월의 명은 막주군도 들었을 게다. 그들 역시 대오를 정비하며, 선뜻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걸렸다!’

적군은 분명 이백을 거느린 두건득이 뒤로 빠져 모종의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으리라 여긴 게 틀림없다. 그러니 선뜻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편월이 내린 명은 그게 아니었다. ‘후미로!’라고 말한 건 뒤로 빠진 두건득에게 적의 배후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그처럼 간단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뜻이 통할 정도로 함께한 세월이 길었다는 말이다.

“한번 건드려 봐야 되지 않겠소, 대장?”

오강이 특유의 세모꼴 수염에, 세모꼴 눈을 반짝이며 편월에게 말을 걸었다.

그 역시 지난번 광운과 무융성 돌입대에 편입됐던 걸 계기로 쭉 같이 움직이고 있던 참이었다.

“기다려! 두건득이 움직인 다음에.”

편월이 오강을 제지했을 때, 대치하고 있던 막주군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두건득이 그들의 후미에서 공격을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좋아. 지금이야. 단숨에 놈들을 짓밟고 그대로 빠진다!”

이건 진즉부터 편월이 염두에 두고 있던 작전이었다. 적군을 완전히 섬멸할 필요는 없다. 공포감은 요 앞에 전멸시켰던 이백의 적병들로 충분할 터, 여기선 아군의 희생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게 급선무다. 그리고 다시 은밀하게 종적을 감추는 게 보다 중요한 일이고…….

그렇게 앞뒤에서 막주군을 친 파양주군은 중간에서 서로 만나 다시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파양주군은 그 어둠이 새기 전에 다시 수림 속의 보이지 않는 귀신이 되었다.

그들이 공격했던 오백의 막주군 중 살아남은 자는 오십여 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물론 파양주군의 희생도 없지 않았다. 사망 아홉, 중경상자 합쳐 열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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