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편월 3-막주토벌莫州討伐 1 (17/66)

편월 3

막주토벌莫州討伐 1

1

적금각을 물러 나오면서 서수는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틀림없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바로 이게 남의 녹을 먹고 사는 자의 고달픔이다. 상전이 뭔가 한 가지 지시를 내리면, 그 이면의 이면까지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서수는 명색이 파양주의 군사다.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용승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광운과 편월을 떼어 놓으라니? 그게 가능키나 한 얘긴가?’

그랬다. 오늘 마용승이 서수를 불러 내린 지시는 광운과 편월을 서로 떼어, 각기 다른 전장으로 보낼 방법을 강구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서수가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라지만, 광운과 편월은 혈육 이상의 끈끈한 정으로 엮여 있다. 차라리 성 하나를 단신으로 함락시키라면 혹 가능할지 몰라도, 그 두 사람을 떼어 놓는다는 건 시도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이었다.

하긴, 서수의 진짜 고민은 두 사람을 떼어 놓을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애당초 되지도 않을 일을 시도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으니까 말이다.

‘대체 성주의 의도는 뭘까?’

이걸 모른다면 파양주의 군사 노릇은 물론, 밥 한 그릇 빌어먹을 수도 없게 될 터였다.

서수는 입맛이 썼다. 손댈 수 없을 정도의 말괄량이 악동에게 고약한 수수께끼를 하나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만약 스승께서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문득 서수는 죽은 구양파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떤 난제難題에 직면하더라도, 스승이라면 반드시 해결책을 찾았을 터였다. 그건 마용승의 속내를 정확하게 짚어 냈을 것이란 얘기와도 통한다.

‘그동안 난 뭘 배웠단 말인가?’

무장이 아닌지라 직접 전쟁에 참가하진 못하지만, 그동안 구양파에게 배운 게 바로 이 난세의 천하를 경영하는 것이었다. 달리 얘기하자면 그건 강력한 왕이나 제후, 패주를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신은 그토록 긴 시간 모셨던 마용승의 마음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자괴감이 서수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적금각을 나서 집무창으로 향하던 서수는 별안간 발길을 돌렸다. 지금 집무창에 가 봐야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건 하나도 없다.

‘차라리 유화에게 가서 상의해 보자.’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살아생전 스승인 구양파는 유화의 명석함을 극구 칭찬했었다. 이럴 때 상의해 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일단 목적지가 정해지자 서수는 더 이상 번민하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마치 유화를 찾아가라는 명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죽영루를 향해 걸었다.

죽영루에 들어선 서수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오늘따라 유난히 붐볐기 때문이다.

물론 서수가 걱정할 일은 없었다. 붐벼서 좀 시끄러울 뿐, 자신이 유화와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은 언제나 마련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어서 옵쇼-!”

길게 끌리는 점소이의 목소리를 등 뒤로 흘리며, 서수는 천천히 죽영루 안으로 들어섰다. 눈은 연방 죽영과 유화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렸다.

그들은 곧 눈에 띄었다. 손님이 많으니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는 게 낫겠군.’

너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을 붙잡고 자기 문제를 상의하는 것도 못 할 짓이다 싶어 서수는 발길을 돌렸다.

“어머나, 선생님? 너무 바빠 미처 영접도 못했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서수가 밖을 향해 막 발길을 떼는 것과 동시에, 유화의 해맑은 목소리가 그의 귀청을 울렸다.

“아, 아니다. 보아하니 많이 바쁜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오마.”

“아니에요, 선생님. 이제 바쁜 일은 대강 끝났어요. 그러니 어서 들어오세요.”

“아, 아니! 난 다음에 다시…….”

“어서 오세요, 선생님. 오늘은 좀 복잡하니 후원으로 가세요.”

“아, 이런…….”

죽영까지 가세해 제지하자 서수는 어쩔 수 없이 유화의 뒤를 따라 후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혹시 광운 아저씨나 편월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아니, 아니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유화에게 서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실은 너와 상의할 일이 좀 있어서 왔단다. 아니 상의라기보다는 네 생각을 듣고픈 일이 좀 생겨서…….”

말꼬리를 늦추며 서수는 죽영을 흘낏 쳐다보았다. 자리를 좀 피해 달라는 의미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차를 준비해 올게요.”

확실히 죽영은 둔한 여자가 아니었다. 서수가 뭘 원하는지 깨닫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죽영이 가고 난 뒤 서수는 어떻게 말머리를 열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여기 오고 나서야, 유화와 상의하겠다는 생각이 조금 후회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녀는 너무 어리니까 말이다.

“무슨 일인가요?”

유화의 재촉을 받고 나서야 서수는 비로소 말할 결심이 섰다. 그것도 말을 꾸미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기로 했다.

“다른 게 아니라, 성주로부터 이상한 말을 들어서. 광운과 편월을 떼어서 각기 다른 전장에 내보내라시더군.”

“예? 말도 안 돼.”

처음 얘기를 들은 유화는 웃었다. 그녀의 표현대로 말도 되지 않는 얘기였던 탓이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화의 웃음이 점차 굳어져 갔다.

“왜 그러느냐?”

“그러고 보니 광운 아저씨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어요.”

“이상한 말이라니?”

“지난번, 그러니까 영창원년에 편월이랑 광운 아저씨께서 율천국에 사자로 다녀오셨잖아요. 그때 이후로 성주께서 편월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셨다고…….”

“흐음!”

자기도 모르게 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화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역시 짚이는 바가 없지 않았다.

‘맞아. 그때부터 광운 장군과 편월은 지독히 위험한 전장에만 보내졌지.’

그건 사실이었다. 지나간 일이야 제쳐 두고서라도, 이번에만 해도 교대하러 왔던 광운과 편월을, 무장도 풀기 전에 다시 막주와의 전쟁터로 내보냈다.

“광운 아저씨는 마 성주께서 편월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시더군요.”

“해코지라니?”

“자세한 말씀은 안 하셔서 정확한 건 모르겠어요. 어느 날 술에 취해서 하신 말씀인지라…….”

“분명히 광운 장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지?”

“네.”

“광운 장군은 어인 연유로 그런 해괴한 말씀을 하셨을꼬?”

혼잣말을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서수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우리가 사자로 다녀온 이후 편월에 대한 성주의 태도가 변했다고?’

율천국으로 간 사자였다면 다름 아닌 서수 자신이 정사였다. 그 과정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에 성주의 태도가 바뀔 만한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니, 있다. 밀서!’

마용승이 황제로부터 받은 밀서가 변화라면 유일한 변화였다. 그걸 받은 사람의 태도가 달라졌다면, 그 내용 때문임이 틀림없다.

‘황제가 편월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는 편월을 아주 귀여워했었다.

‘그렇다면 이건 단순한 성주의 시기일까?’

황제가 밀서에 편월을 칭찬하는 내용만 잔뜩 적어 뒀다면, 그걸 시기할 사람도 없지 않으리라. 어쨌든 지상 최고의 지위를 가진 사람의 칭찬이니 말이다.

하지만 마용승은 그처럼 작은 그릇이 아니다.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면 오히려 편월을 더욱 끔찍이 아껴 줄 만한 아량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아무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주는 광운과 편월을 떼어 놓으라 하고, 광운은 마용승이 편월에게 해코지를 할까 걱정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 서수로선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 오늘은 유화에게 의논을 하러 왔다. 허심탄회하게 저 아이의 얘기를 들어 보자.’

생각을 굳힌 서수는 곧바로 유화에게 말을 던졌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냐?”

“예? 무슨 말씀이신지…….”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유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광운 장군께서 하셨다는 얘기에 대해서 네 생각은 어떠냐는 말이다.”

“전 광운 아저씨께서 없는 얘기를 하셨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후로 광운 아저씨나 편월은 쉴 사이 없이 전쟁에 참가했어요. 그것도 아주 위험한 곳에만!”

“흐음!”

서수는 또 한 번 깊은 침음성을 삼켰다. 유화까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다른 사람의 눈에도 마용승의 처사가 보인다는 얘기다.

‘만약 이 일이 잘못 와전되면 성주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버린다.’

이건 큰일이다. 파양주의 정규군이든 혹은 돈에 의해 모여든 잡가군이든 간에, 마용승이 특정인을 골라 위험한 곳에 내보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를 진심으로 따르던 사람들까지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자칫 파양주군 전체가 내부로부터 붕괴될 소지도 없지 않다.

“그럼 넌 왜 성주께서 편월을 그렇게 대하신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 광운 아저씨의 말씀에 의하면 황제 폐하께 받은 밀서의 내용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시더군요.”

“밀서? 광운 장군께서도 분명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말을 들은 서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리고 또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혹시 밀서의 내용을 아시는 것 같지 않더냐?”

“광운 아저씨께서도 그건 모르시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 더 답답해하셨죠. 어쩌면 광운 아저씨와 편월은 막주와의 전쟁이 끝나면 파양주를 떠날지도 모르겠어요.”

“뭐라고? 파양주를 떠나다니?”

“전에 얼핏 죽영 언니께 하시는 얘기를 들었어요. 같이 떠나지 않겠느냐고.”

“안 돼!”

서수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광운과 편월이 떠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솔직히 지금까지 파양주가 승리했던 전쟁의 칠 할 이상이 광운과 편월이 참전한 것이었다. 그만큼 파양주군이 그 두 사람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다.

지금 당장도 그렇다. 광운과 편월은 막주군을 침사성에 몰아넣어 승리하기 직전에 곽준방과 교대했다. 거기엔 곽준방에게 공을 돌리기 위한 의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곽준방은 크게 패해 기껏 침사성으로 몰아넣었던 막주군의 포위를 풀고 기호산에 후퇴해 있는 실정이다. 광운과 편월은 그 지원을 위해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다시 출동했고…….

‘아니, 이건 단순히 파양주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이상의 문제다.’

광운이나 편월은 어디까지나 잡가군이다. 만약 다른 나라나 다른 주로 넘어가 거기에 소속된다면 파양주로선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수단을 강구하더라도 떠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광운과 편월은 잡가군이다. 하나의 전쟁이 끝나면 그대로 계약이 끝난다는 얘기다.

물론 잡가군을 해체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경비가 무척 많이 들고, 또 무한정 잡아 둘 수도 없다. 하나의 전쟁만 완수하면, 승패에 상관없이 그에 소속된 잡가군은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쟁도 하지 않고 편하게 돈을 벌겠다는 자들은 남겠지만 말이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을!’

이제 광운과 편월을 떼어 놓는 방법이나, 혹은 편월에 대한 성주의 태도 같은 건 서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막주는 곧 병탄될 것이고, 그때 두 사람이 떠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편월은 성을 갖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작은 성을 하나 떼어 준다면?’

지금 당장 서수의 머리에 떠오르는 건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작다고 해도 명색이 하나의 성이다. 적어도 한 개 이상의 현을 다스리는 독립된 영지를 준다는 의미니만큼 마용승과 상의를 해야만 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서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곧장 마용승을 찾아가 편월에게 성을 하나 주라고 설득할 작정이었다.

‘광운 장군과 편월을 다른 나라, 다른 주로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아마 마용승도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서수는 생각했다. 비록 기꺼운 심정으로 성을 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서수가 다시 마용승을 찾았을 때, 그는 부인과 이제 네 살 된 장남인 마국립馬國立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모쪼록 사람들을 물리쳐 주시기 바랍니다.”

서수의 말에 마용승보다 그 부인이 먼저 반응했다. 아들을 데리고 재빨리 방에서 나갔던 것이다. 남편이 서수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아는 까닭에서였다.

“무슨 일이오?”

가족들과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받았으면 조금은 짜증 낼 만도 한데, 마용승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편월의 일 때문입니다. 그게…….”

“오, 광운과 편월을 떼어 놓을 방법을 찾았소?”

말허리가 잘리자 서수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막주와의 전쟁이 끝나면, 광운과 편월은 이 파양주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그보다 먼저 소생의 질문에 대답부터 해 주십시오. 어째서 성주께서는 편월을 전과 달리 대하십니까? 이건 소생만의 생각이 아니라, 광운 장군이나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깁니다.”

“뭣이? 내가 편월을 전과 다르게 대하다니?”

강하게 부정했지만, 마용승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서수의 질문이 아픈 곳을 찌른 것이다.

서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마용승을 쏘아보았다. 바라는 대답을 듣지 않으면 한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가 여실한 얼굴이었다.

“끄흐음!”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마용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실내를 서성거렸다. 그 역시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서 군사에겐 사실을 털어놔야 되지 않을까?’

이 경우의 사실이란 물론 밀서의 내용을 뜻한다.

사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힘없는 황제가 보내는 밀서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자기를 억압하고 있는 자를 누르고, 황실과 억조창생을 구하라는 게 그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난 영창원년에 마용승이 받았던 밀서에는 거기에 한 가지 사실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 다름 아닌 편월의 신분에 관한 것이었다.

편월은 황제와 사촌 간이다.

황제의 밀서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황실로서도 귀한 핏줄이니 부디 잘 대해 주라는 부탁도 함께였다.

이건 마용승의 생각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편월 그 자체야 싫어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전쟁에 내보내면 연전연승하는 그가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다만 편월의 혈관 속에 황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건 보다 많은 걸 음미하게 했다. 당장 뜨거운 불덩어리 하나를 안고 있는 것 같은 입장에 처한 마용승인 것이다.

‘그때 가겸후가 편월을 죽였더라면…….’

오히려 마용승의 입장은 훨씬 나아졌을 터였다. 황족을 시해한 죄를 물어 천하에 당당하게 명분을 세울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의 입장이 될 것만 같다. 편월을 위험한 전장으로 내몬 것도 바로 불리한 위치에 서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누가 뭐래도 마용승 역시 전국난세의 효웅 중 한 명이다. 황실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기회가 오면 나도 한 번!’이라는 야망이 훨씬 큰 사람이다. 그런 참에 알게 된 편월의 신분이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그렇다고 편월을 직접 제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겸후가 율천국을 완전히 뒤엎다시피 하면서까지 파양주 사자단을 잡으려고 했던 건, 그 역시 편월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판국에 마용승이 직접 편월을 죽인다면, 그야말로 가겸후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위험한 임무를 줘서 적의 손에 죽게 만드는 게 상책이었다.

이 모든 걸 종합해 봤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뿐이다.

‘아직은 말해선 안 된다.’

편월이 적의 손에 죽은 뒤에 사실을 얘기해도 늦진 않다. 그때 편월의 신분을 밝히고, 그를 죽인 적들을 당당한 명분 아래 괴멸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 성주께서는 편월을 예전과 다름없이 대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마다! 내가 편월을 달리 대할 이유가 뭐 있겠소? 최근 막주와의 싸움도 그렇고, 허주의 조환도 만만치 않는 실력으로 도전해 오고 있으니 더러 위험한 곳에 투입되기도 했소. 그걸 가지고 예전과 달리 대한다고 하면, 앞으로 어떻게 사람을 부리겠소?”

“흐음…….”

이번엔 서수가 말문을 닫았다.

마용승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빤히 보이지만, 그걸 따지고 들 빌미가 없었다.

“그보다 서 군사께서는 내가 한 얘기에 대해 생각을 해 보셨소? 아무래도 광운 장군과 편월을 한 전장에 투입한다는 건 낭비요. 그러니 그 둘을 따로 떼어 각각 다른 전장에 내보냈으면 하는데…….”

“그 점이라면 소생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서수는 유화와의 대화 도중 떠올랐던 생각을 얘기했다.

“최근 들어 편월은 부쩍 성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편월에게 사주의 자그마한 성 하나를 줘서 들어가게 가고, 광운은 그대로 막주와의 전쟁에 투입해 두면 우선 그 둘을 떼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그건 안 돼!”

마용승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가뜩이나 편월의 신분에 대해 께름칙해하고 있던 참이다. 그에게 성을 하나 준다는 건, 용에게 여의주를 물려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 방법 외에는 소생에게도 달리 생각이 없습니다.”

서수는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자신이 제시한 방법이 결코 편월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진 않을 것이란 믿음이 뒷받침된 주장이었다.

“아무튼 편월은 열두 살짜리 어린아이요. 벌써 성 하나를 준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얘기요.”

“그게 아니라면 소생에게도 두 사람을 떼어 놓을 방도가 없습니다.”

“내가 군령으로 그리하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것 같소?”

“우리에겐 광운 장군이나 편월을 막을 수단이 없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잡가군이니까요.”

“크흐음.”

마용승의 침음성이 길게 끌렸다. 최근 들어 더욱 몸이 불은 그의 얼굴엔 굵은 땀방울이 가득했다.

이마를 흥건히 적신 땀을 닦아 내던 마용승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 편월에게 성을 하나 준다면 다스려 나갈 수 있을 것 같소?”

“편월의 나이가 어린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전장에서 궁리하는 전략 전술을 보면 작은 성 하나쯤은 충분히 꾸려 갈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주 땅에서 어디 궁벽한 성 하나를 주시면…….”

“사주는 안 되오! 그 땅은 이미 우리가 병탄한 곳이니, 아직 우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곳의 성 하나를 쳐서 가지라고 해야겠소.”

“예? 그렇다면 거기에도 상당한 지원이 필요할 터인데, 성주께서 그 지원을 해 주시렵니까?”

“잡가군 오천과 석 달간 소요될 군비는 지원하겠소. 그 이상은 불가하오! 그렇군. 이왕이면 비옥하고 땅도 너른 성을 치는 게 좋을 거요. 이 기회에 허주를 치라고 하는 게 어떻겠소?”

“예?”

서수의 목소리가 불경스럽다 싶을 정도로 높아졌다. 방금 전에 들었던 마용승의 말 때문이었다.

‘오천의 잡가군으로 석 달 만에 허주를 치라고? 이건 죽으라는 얘기와 같다!’

사실이 그랬다. 삼십만에 달하는 파양주의 전력 중 절반을 쪼개 공략하고 있음에도 여적 떨구지 못하고 있는 허주다. 그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군세로 떨구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래도 아직은 얘기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막주와의 전쟁을 좀 더 지켜보다가, 승세가 완전히 굳어진 후에 알리도록 하시오.”

“조, 존명!”

서수는 어쩔 수 없이 복명하고 말았다. 마용승의 결심이 단단한 것을 그 얼굴에서 확인한 까닭에서였다.

그렇게 다시 적금각을 물러 나오면서, 서수는 코끝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감도는 걸 느꼈다. 마용승이 뭘 의도하고 있든, 그의 뜻대로만 일이 풀리지는 않을 것이란 예감도 머릿속을 복잡하게 헝클어 놓았다.

2

불길은 맹렬했지만, 그게 파양주군의 본대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진즉부터 주변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내 널찍한 공지를 조성했고, 불길이 일자마자 그 벤 나무들을 공지 주변에 쌓아 일종의 방화벽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지휘는 광운이 했다.

문제는 아직도 우거진 삼림 가운데 흩어져 있는 잡가군이었다. 그들은 고스란히 불길에 노출되어 큰 혼란에 휩싸였다.

“전령! 전령!”

그 불길과 그을음 속에서 편월은 황급히 전령을 불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잡가군에게 한군데로 모이라는 전갈을 하려던 참이었다.

“제삼 대 전령, 도착!”

“제이 대 전령…….”

편월이 부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각 부대의 전령들이 속속 도착했다.

“각 부대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내 뒤를 따르라고 해! 동남쪽이다. 동남쪽의 불길이 가장 약해. 어영부영하다가는 통구이가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전달해.”

편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령들은 사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덮쳐 오는 불길의 기세는 맹렬하고 급박했다.

“날 따라와!”

자신을 따르던 천 명의 잡가군을 이끌고 편월은 동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실제로 편월의 관찰은 정확했다. 동남쪽이 그나마 불길이 약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그쪽이 안전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불길이 약하다는 건 바로 거기에 적의 매복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도 하다.

‘이대로 불길에 타 죽는 거보다는!’

차라리 적과 일전을 벌이다 죽는 게 훨씬 낫다고 편월은 생각했다.

“이쪽 아군의 피해는?”

바로 옆에서 달리고 있는 자가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편월은 물었다.

“아직까지는!”

“다른 곳으로 갔던 동료들의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될까?”

“아직은!”

“무슨 놈의 대답이 그따위야?”

그제야 편월은 버럭 언성을 높이며 옆에서 달리는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

옆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편월은 기성을 토하고 말았다.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앳된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이름 따위는 잊었어요. 그냥 맹아猛牙라고 불러 주세요.”

“무슨 뜻이야, 그건?”

“사나운 이빨이란 뜻으로,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겁니다.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란 뜻으로요.”

“흐음… 그건 그렇고, 보고나 제대로 다시 해!”

“첫째, 아직까지는 여기 있는 아군의 피해는 없습니다. 둘째, 아직은 다른 곳으로 간 아군의 피해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 보고를 그따위로 했어? 대체 몇 살이야?”

“열넷! 대장보다 두 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멍청한 놈!”

그렇게 내뱉은 편월은 미간을 찌푸렸다. 맹아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건 웃기는 일이다. 나이도 자신보다 많고, 또 벌써 몇 차례 전쟁 경험이 있는 듯한 맹아를 편월이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전쟁이라면 편월은 어느 노숙한 장군 못지않다. 설사 상대가 어른이라 해도 걱정했을 터였다.

“너 혼자 이 전쟁에 참가한 거야?”

“이 부대의 후미에 아버지가 따르고 계십니다.”

맹아는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전장에 나선 사나이들의 말은 거칠고, 눈엔 살기가 감돈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보기 싫은 그 낯짝 들고 네 애비 곁으로 가! 앞엔 적이다. 싸움이란 말이다. 누구도 널 살펴 줄 수 없어!”

“그래서 용감하게 싸우라고 제 이름을 그렇지 지어 주셨잖아요!”

“미친놈! 썩 뒤로 빠져! 이건 명령이다!”

“이미 늦었어요. 적이요!”

그 말에 편월의 시선이 재빨리 전방으로 향했다. 과연 적들이 삼림지대 특유의 짤막한 단궁短弓을 겨냥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전방 적 출현! 적 출현!”

미리 시키지 않았음에도 맹아가 후미를 향해 경고를 주었다.

그 와중에 편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주군의 전법과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 탓이었다. 밀림지대에서 그들은 통상 더운 지방 특산인 큼직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거나, 지면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적들을 깊숙이 끌어들여 일거에 괴멸시키려는 전술을 즐긴다. 물론 밀림을 벗어나면 우수한 기동력을 앞세운 전술을 펼치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 눈앞에선 화살이 날아오기 직전이다. 그것부터 막아야 한다.

“방패! 방패!”

그러나 급하게 말을 세우며 내린 편월의 명령은 필요가 없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백 명으로 구성된 방패 조가 아군의 선두에 벽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밀고 들어간다! 전진, 전진!”

그 방패의 벽 뒤에서 편월은 연방 고함을 질렀다. 불길을 피하기 위해 이쪽으로 왔다. 앞에 적이 있다고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느렸지만, 편월이 이끄는 잡가군은 서서히 전진했다. 전체적으로 지르는 함성이나, 공포감에 휩싸여 정신을 놓은 자가 지르는 발작적인 고함도 없었다.

그래도 그건 육중한 무게감으로 활을 겨누고 있는 막주군을 압박해 갔다.

‘이상한데?’

방패 뒤에서 소질풍의 등에 바짝 엎드린 편월의 고개가 다시 갸웃거렸다. 왜 지금까지 막주군이 활을 쏘지 않느냐는 의문이었다.

그 순간, 번쩍하고 편월의 뇌리를 때리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함정이다! 정지, 정지!”

생각은 그대로 입을 통한 명령이 되었다.

동시에 선두의 방패 조가 그 자리에 멈췄고,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 타라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막주군이 쏜 화살이 날아와 방패에 꽂혔다.

“사방을 철저히 경계해! 특히 위장하고 있는 놈들을 놓치지 마!”

편월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 나무, 저 수풀 사이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일더니 막주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의 명은 필요 없었다. 막주군을 발견한 것과 동시에 파양주의 잡가군들은 저돌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뒤에선 맹렬한 불길이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으니, 갈 곳은 앞쪽뿐이다. 더 격렬해지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거기다 또 하나의 변수가 생겼다. 이쪽으로 움직이기 전에 전령을 통해 명을 내려 뒀던 잡가군 부대가 화염을 뚫고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곧바로 난전이다. 또한 그것은 잡가군의 특기 중 하나이기도 한 터, 파양주군은 그야말로 아귀 같은 모습으로 막주군에게 달라붙었다.

물론 그 선두에 편월이 달리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기질적으로 이런 난전을 좋아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장은 빠져요! 선두는 내가 맡을 테니까!”

한창 신 나게(?) 설치는 편월의 곁에 바짝 다가선 맹아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싸움판의 소음이 그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지 않고서는 상대에게 뜻을 전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뭐라고?”

“대장은 지휘를 하는 거요. 그것도 모르남?”

“뭐?”

어이가 없어진 편월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휘를 한답시고 지금까지 한 번도 중간이나 후미로 빠졌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선두에 서서 적진을 유린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오늘 선두에서 빠지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도 자기보다 겨우 두 살 더 먹은, 그래서 같은 소년이라고 불릴 사람에게 말이다.

지휘자는 부대의 중간에 듬직하게 위치해야 한다는 원칙은 편월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때로는 선두에 서서 전군을 호령하기도 해야 하고, 때로는 가장 후미에 자리 잡고 아군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관찰해야 될 때도 있다. 편월은 그중 전자를 유달리 좋아할 뿐이다.

“네 애비에게 가라는 명을 듣지 못했나? 전장에서의 항명은 참수다!”

소질풍의 앞을 막아선 두 명의 막주군을 유난히 큰 대도로 베어 넘기며 편월도 고함을 질렀다.

“명을 어긴 건 아니오. 여기, 아버지가 계시잖아요! 움직인 사람만 다르지, 결과는 같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큰 무기는 이런 싸움에선 어울리지 않아!”

악이 받친 듯 한마디 남기고선, 맹아는 훌쩍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순간 편월은 멍청해지고 말았다.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대도의 단점을 정확하게 꼬집은 맹아의 말 때문이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막주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온통 밀림이다. 물론 이 싸움터는 말할 것도 없고…….

그건 곧 전장에서 적들 외에도 장애물이 엄청 많다는 얘기다. 혼자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이 나무, 저 넝쿨이 거치적거린다. 다른 것보다 유난히 큰 병기를 휘두를 공간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편월은 새삼 손에 든 대도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음을 토하며, 저만치 앞서 싸우고 있는 맹아의 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보 같은 말만 지껄이는 놈이군. 이건 이것대로 유용하게 쓰인다는 걸 알지도 못하면서!”

“방금 그 말은 내 아들놈에게 한 거요?”

“뭐? 넌 또 누구야?”

“저 앞에서 미친 듯 설치고 있는 게 바로 내 못난 아들놈이오!”

“응?”

그 말에 편월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가 광운과 비슷한 또래로 보인 탓만은 아니었다. 아들을 살벌한 전장에 내몰고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을 보는 게 신기하다는 눈빛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내 아들놈에게 길을 열라고 정식으로 명해 주시오, 편월 대장!”

“그건 안 돼! 이게 겨우 열네 살짜리 아이가…….”

“흐하하하하! 이거 참, 우스운 얘기로군! 편월 대장의 나이를 생각해 보시오. 하하하하!”

맹아의 아비는 고개를 젖힌 채 크게 웃었다. 여기가 전장이라는 것도 잊은 듯한 호탕한 웃음이었다.

편월의 미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이건 분명 나이 어린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내 편월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이럴 때 딱 한마디로 상대를 제압하는 말을 알기 때문이다.

“이봐! 대체 몇 번이나 전쟁에 참가했어?”

그 말은 이번에도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금번에 참가한 잡가군 중에서 편월보다 전투 경험이 많은 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자, 누가 가서 저놈을 잡아 뒤로 끌어내!”

맹아의 아비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명을 내린 후, 편월은 소질풍의 엉덩이에 박차를 가했다.

“대장을 따르라!”

곧 편월의 주변엔 이십여 기가 따라붙었다. 편월이 막주와의 전쟁에 참가한 이후 늘 같이했던, 비교적 나이가 든 잡가군의 병사들이었다. 그래 봐야 광운과 비슷하거나, 서너 살 많을 뿐이지만 말이다.

“거치적거린다! 나이 든 것들은 뒤로 빠져서 구경이나 해!”

아주 어릴 때부터 전장에 나선 편월의 언사는 거칠었다. 그게 요즘은 더욱 심해져 전장이 아닌 곳에서도 존대를 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주변의 어느 누구도 싫어하지 않았다. 잡가군은 물론이고 정규군까지 존경해 마지않는 광운에게도 마구 대하는 편월이니만치 오히려 그걸 즐기는 듯한 기색도 없지 않았다.

“대장, 오늘 저녁은 뭘로 먹을 거유?”

“닥치고 전쟁이나 잘해! 그러지 않으면 통구이 된 네놈들의 갈비를 뜯을 테니까!”

“하하하!”

악이 받친 편월의 대꾸에 주변에 있던 잡가군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 순간, 그들 중 누구도 바로 이런 게 사기 진작이라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전장에선 나이보다 월등히 성숙한 모습을 늘 대해 왔으니까 말이다.

편월 역시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저 어릴 때부터 배운 대로, 주변의 병사들이 하던 그대로 흉내 내다 보니 저절로 몸에 밴 습성이었다.

“대장, 우측에 적군!”

“나이 든 놈들이 알아서 처리해! 난 전방이다!”

확실히 이들은 노련했다. 웃고 떠들면서도 적들의 움직임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맡겨 두슈!”

그 말과 함께 대여섯 기가 편월의 곁을 떠났고, 그들의 부하로 소속된 자들 역시 그 뒤를 따라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편월도 그냥 있지 않았다. 맹아가 빠져나온 선두의 자리에 그대로 뛰어들며, 마구 대도를 휘둘렀다.

첫 번째 조우전遭遇戰을 벌였을 때보다 적들의 저항은 비교적 완강했다. 그때 적들은 편월의 모습만 보고서도 꽁무니를 빼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부러 노리고 있는 것처럼 편월에게 집중 공격을 퍼부어 댔다. 어쩌면 조우전에서의 그 모습은 지금 상황을 노린 함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건 편월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적들이 이처럼 덤벼드니 더욱 신명이 오를 따름이었다.

이쯤 되면 한마디 하지 않을 편월이 아니다.

“파양주의 잡가군 대장 편월이 여기 있노라! 개 같은 막주의 오합지졸들은 목을 늘이고 내 칼을 받아라!”

빽빽한 수림樹林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고함을 지른 편월은 그 자리에서 소질풍을 한 바퀴 맴돌게 했다. 물론 터무니없이 큰 대도를 휘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휘와우웅-!

대도의 파공성에 따라 왈칵 솟구쳐 오른 건 막주군 다섯의 선연한 핏덩어리였다. 절각도로 소질풍의 다리를 노리던 자, 질긴 밧줄로 짠 그물로 편월을 잡으려던 자들이었다.

사실 이런 게 파양주군을 괴롭히는 점이었다. 우거진 수림을 막주군은 잘 이용한다. 소위 ‘제 집에선 똥개도 명견에게 충분히 대적한다’란 얘기다.

방금 전의 매복은 편월도 지척에 이르렀을 때에야 겨우 알아챘을 정도였다. 그처럼 경험이 많아도 이 지경이니, 다른 파양주군의 희생은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편월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눈에 익은 얼굴들은 여전히 보였다.

“계속 밀어붙여!”

한번 오른 기세를 타고 전진을 명하면서도, 편월은 가슴에 어두운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걸 느꼈다. 이 싸움에서 파양주군이 월등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불길에 쫓겨 온 파양주군이 필사적인 건 사실이다. 또한 난전이 되면 잡가군은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일방적이다. 워낙 적들이 은신을 잘하고 있어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긴 힘들지만, 아군보다 많다는 건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함정을 파고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함정이 있는 걸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기세를 탄 파양주군을 제지할 수도 없거니와 등을 지지고 있는 불길은 더욱 맹렬한 기세를 떨치고 있다. 적들이 지옥보다 더 지독한 함정을 파 뒀다고 해도 이대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 심정을 눈치 챈 것일까. 뒤따르고 있던 파양주군이 일제히 적들을 밀어붙였다.

“와아아아-!”

당연히 편월은 그들의 선두에 섰다. 덤비는 적들을 베어 넘기며, 그러면서도 연방 전황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만한 화공으로, 또 이런 함정까지 준비한 적들의 뒤가 너무 약하다. 자신에게는 여전히 사납게 덤비지만, 막주군은 마치 얇은 판자 같았다. 선두가 무너지자 뒤를 받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와아아-!”

“이겼다, 이겼어!”

돌연 잡가군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비록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긴 했지만, 아직은 승리한 게 아닌데도 말이다.

“누구야? 아직은 이르다! 긴장을 풀지 마!”

소질풍의 안장에 한쪽 발을 딛고 올라서며, 편월은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아직은 두 번째 있을 함정에 대한 우려를 떨쳐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다 편월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어리둥절해졌다.

‘저건 곽가군, 별동대의 기치인데?’

곽준방이 이끄는 곽가군은 지금 기호산까지 후퇴해 있다. 광운이 연락을 했다고 해도, 파양주군이 막 도착한 오늘, 여기에 모습을 보일 턱이 없다. 아마 적들은 별동대가 출현하니까 그리 쉽게 물러갔나 보다.

“주변 정리를 하고, 경계를 확실히 해! 몇몇은 날 따르고!”

근위대라고 하기엔 초라하지만, 잡가군 중에서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하는 오십여 기를 거느리고, 편월은 별동대의 기치가 다가오고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3

별동대를 이끌고 온 사람은 곽준방 예하에 있는 다섯 비장 중 한 명인 여상계였다. 그사이의 공훈만으로도 자기 이름을 세운 한 부대를 맡을 만했지만, 본인이 한사코 곽준방 밑에 있고 싶다 해서 여전히 별동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하긴, 여상계만이 아니라 다섯 비장이 모두 곽준방 예하에 머물러 있었다. 나이도 어리고, 전쟁 경험 역시 별로 없는 호유진 아래에서 장군 노릇은 하기 싫다는 반감도 없지 않아서였다.

“오, 꼬마 장군! 재미 좋으신가?”

“흥!”

반갑게 인사를 하는 여상계에게 편월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꼬마라는 말에 기분이 상한 탓이었다.

“그런데 여긴 어인 일이오? 빨라도 이삼 일 뒤에나 합류할 줄 알았는데.”

제법 어른스러운 어투로 편월이 물었다. 거기엔 또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사춘기 소년의 반항기도 묻어 있었다.

“자네들이 도착하기 전에 주공께서 사자를 보내셨더군. 오늘쯤 도착할 거라고.”

“성주께서?”

편월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내용의 군사軍使라면 응원군 쪽에서 보내야 한다. 물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마용승은 그런 원칙을 무시하고 제 편에서 곽준방에게 군사를 보낸 모양이다. 적에게 몰려 기호산에 들어앉아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보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본대는 저쪽인데.”

“본대엔 우 장군이 갔네. 원군이 도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적들이 물러가서, 비교적 쉽게 움직였지.”

“곽 장군은 어떠시오?”

“무량하시네. 내일쯤 기호산에 있는 병력을 모두 이끌고 이쪽으로 오실 걸세.”

“기호산을 버린다고? 이왕 점거한 거라면 거기에도 병력을 주둔시키는 게 좋을 텐데.”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일단 침사성에서 나온 막주군들을 다시 몰아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요. 여차하면 놈들은 기호산에 들어가 유격전을 벌일지도 모르오. 그리되면 이 전쟁은 또 길어지겠지.”

“흐음!”

여상계는 침음성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전 끝에 온 원군 덕에 들떠 있어서 미처 그 점을 생각지 못했다. 놈들은 기호산에서 물러갔을 뿐, 완전히 항복한 건 아니었다.

“전령!”

여상계는 돌연 소리를 높여 전령을 불렀다.

“대령이오!”

“지금 당장 기호산으로 달려가라. 곽 장군을 찾아뵙고 그냥 계시라고 말씀드려라. 그게 이 전쟁을 일찍 끝내는 비결이라고, 우리 꼬마 장군께서 말씀하셨다고 전하라.”

“존명!”

“헤헤헤!”

전령이 복명하고 달려간 후에야, 편월은 아이다운 웃음을 흘렸다.

편월은 이들이 좋았다. 단순히 파양주에서 처음으로 같이 싸웠다는 인연 때문만은 아니다. 비록 어린 자기의 말이지만, 그게 맞는다면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게 좋았다.

“그런데 어쩌다 놈들의 매복에 걸렸나?”

“매복을 하려다가 역으로 적의 화공에 걸렸소. 아무래도 함정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소.”

“함정이라면, 적들이 자네들의 움직임을 미리 읽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그게 이상하오. 도착하자마자 유군을 이끌고 적의 기습에 대비한 매복을 펼쳤는데…….”

“어쨌든 일단 본대와 합류하세. 적들이 간파했다면 유군은 무용지물일세.”

“그럴 작정이었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꾸한 후, 편월은 도열하기 시작하는 잡가군을 돌아보았다.

“모두 본대로 철수한다! 언제 적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니 충분히 조심하도록! 피해 보고는 가면서 듣겠다!”

“잠깐, 대장!”

편월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누군가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맹아였고, 팔에 부상을 당했는지 피가 밴 천을 둘둘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야?”

“이대로 당하고 돌아가는 건가요? 적들을 찾아 한바탕 혼을 내놓고…….”

“닥쳐!”

편월은 커다란 목소리로 맹아를 억눌렀다.

“방금 여 장군의 말씀을 듣지 못했나? 이미 움직임이 간파된 유군은 쓸모가 없다! 이대로 돌아가는 게 군략에 맞아!”

“군략에 우선하는 게 사기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돌아가서 사기가 올라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내가 생각해서 결정할 문제야!”

“에잇, 겁쟁이 대장 같으니!”

“뭐? 겁쟁이? 말 다 했나?”

“그래요. 다 했어요!”

금방이라도 병기를 빼어 들 듯 대드는 맹아를 보며 편월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니 입을 열지 못하는 건 비단 편월만이 아니었다. 잡가군 전체는 물론, 여상계가 이끌고 온 별동대도 멀뚱한 눈으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다름 아닌 편월과 맹아의 대화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겨우 열 살이 갓 넘었다. 그런데도 대화의 내용은 전쟁에 나선 여느 어른과 다를 바 없었다.

이건 분명 정상이 아니다. 그 비정상적인 일이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 게 바로 전국난세다. 그 서글픈 현실 앞에서 어른들은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으리라.

“대, 대체 그따위 말버릇은 어디서 배웠어? 나는 대장이야!”

나름대로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더듬거리는 말투가 비로소 자기 나이를 찾은 것 같은 편월이었다.

“누가 대장이야? 난 겁쟁이의 부하는 안 될 거야!”

“무엄하다! 어떤 경우든 지휘관에게 불손한 언동을 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보다 못한 여상계가 맹아를 꾸짖고 나섰다.

실제로 이건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이 불손한 어투가 곧 항명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기에 미리 차단한 것이다.

“어디에 소속된 누구인가? 군기감軍紀監에게 일러 군율로 다스리겠다!”

“여 장군께 한 말씀 올리겠소!”

“누구냐? 소속과 이름부터 밝혀라!”

맹아를 질타하는 중에 끼어든 자에게 여상계는 엄중한 소리로 말했다.

“잡가군에 소속된 이름 없는 졸자요! 편월 대장에 대한 저 놈의 불손한 어투는 평소 이 애비가 잘못 가르친 탓이오. 군기감의 처벌은 이 몸에게 내려 주시오.”

“뭐라고? 그렇다면 부자가 함께 출전하고 있단 말인가?”

놀라움으로 인해 여상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기본적으로 병사를 차출해도 한 집에서 한 명이 원칙이다. 설사 착오로 가족 중 둘 이상이 종군했다 하더라도, 뒤에 그 사실이 알려지면 한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돌려보낸다.

그래도 한 가족에서 여러 명이 종군하는 걸 근절시킬 수는 없다. 그들만의 사정, 특히 난세를 살다 보니 굶주림이라도 면해 보자는 뜻에서, 심한 경우 일가족 전체가 군에 들어오는 일도 없지 않다.

당연한 일로써 그들은 그 사실을 숨긴다. 적발되면 귀가 조치당하는 건 물론, 심한 경우 처벌까지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맹아의 아비는 그들이 부자지간이란 걸 당당히 밝혔다. 이례적인 일이라 여상계도 잠시 말을 잊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평소 이 몸이 아들놈에게 가르치길, ‘전쟁에 참가하면 가장 선두에 서서 싸워라, 전사를 하더라도 가장 먼저 죽어 그 전장을 장식하는 꽃이 되어라.’라고 가르쳤더니 이 모양이 되고 말았소. 그러니 이건 모두 이 애비의 불찰! 군기감의 처벌은 이 몸이 감당하겠으니, 아들놈은 부디 용서해 주시길.”

맹아의 아비가 다시 한 번 간청했을 때, 여상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잡가군의 이름 없는 졸자라고 했지만, 태도나 말투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그대의 신분부터 밝혀라. 처벌은 그 뒤에 다시 생각하겠다.”

“사정이 있어 잡가군에 들어왔소이다. 더 이상의 하문은 감당하기 어렵소.”

“흐음!”

여상계는 더 이상 추궁할 수 없었다.

들은 대로 잡가군에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중엔 더러 말 못 할 사정으로 신분을 감추는 자들도 없지 않고, 그런 건 으레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게 상례다.

“좋다. 더 이상 묻지 않겠다. 또한 그대들의 처벌도 편월 대장에게 맡기겠다. 어쨌든 그가 그대들의 지휘관이니까. 하지만 더 이상의 항명이나 불손한 언행을 보일 시 본관이 직접 죄를 묻겠다!”

“관대하신 처벌에 감사드리오.”

“아직 끝난 게 아냐! 뭐? 제일 먼저 죽어 전장을 장식하는 꽃이 되겠다고? 미친 소리 작작 해!”

여상계를 향해 정중한 군례를 갖추는 맹아의 아비에게, 이번엔 편월이 고함을 질렀다.

“그렇소. 이 몸이 분명히 그리 가르쳤소.”

“그래서 미친 소리라는 거다! 저게 전장을 장식하는 꽃으로 보이나?”

맹아 아비의 대꾸에 편월은 보다 언성을 높이며 바로 곁에 쓰러져 있는 아군의 시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어깨에서 허리 어름까지 베인 상처에선 살이 벌겋게 뒤집어졌고, 거기서 흘러내린 피와 상처엔 벌써 파리가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바로 저게 죽음의 모습이야! 난 걸음마를 겨우 배웠을 때부터 봐 왔지. 저게 이 난장판을 장식하는 꽃으로 보여?”

“저건 그저 겉으로 보이는 껍질일 뿐, 사나이의 참모습은 이 속에, 이 가슴속에 있는 거요!”

“그러니까 미친 소리라는 거다! 죽은 꽃은 필요 없는 곳이 전장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단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죽여만 되는 곳이야!”

자신의 가슴을 탁 치면서 대꾸하는 맹아 아비의 말을, 편월은 그대로 억눌렀다. 그 기세가 마치 커다란 솥을 덮어씌우는 듯 맹렬했다.

듣고 있던 여상계는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전쟁 경험이 많다고 해도 편월은 고작 열두 살이다.

그런데 말을 들어 보면 이건 노회한 장군 이상이다. 설사 자신이라도 저런 발상으로 저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여상계였다.

“치이, 편월 대장도 그랬잖아? 광운 장군께서 대장을 가르치실 때…….”

“모르는 소리 마!”

“무엄하다!”

참다못한 맹아가 대들 듯 입을 열었을 때, 편월과 여상계의 입이 동시에 벌어지며 그를 제지했다.

“얘기해 줄까? 광운은 어떤 경우에든 살아남으라고 날 가르쳤어! 모르는 얘기는 지껄이지 마!”

“어?”

분발해서 설치던 맹아의 입이 딱 벌어졌다. 들었던 얘기와, 또 자기 예상과 다른 얘기를 들었을 때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 그대로 맹아는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날 볼 것 없다! 말은 저리 하지만, 편월 대장이 싸우는 걸 너도 보지 않았느냐? 편월 대장이야 태어나면서부터 광운 장군의 갑옷에 싸여 전장을 누빈 몸, 네놈은 이제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밖에는 전쟁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런 놈이 편월 대장을 따라가려면 목숨을 걸지 않고는…….”

“닥쳐! 이 두 놈을 묶어라! 본대로 돌아가는 즉시 군령으로 다스리겠다!”

아들을 훈계하는 장황한 말을 자르며, 편월은 명을 내렸다. 당장 참수를 명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한 표정이었다.

명은 즉각 시행되었다. 잡가군 중 몇 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맹아 부자를 단단하게 결박했다.

“지금은 아무 말도 말고 따르시오. 뒤에 내가 두 사람을 대신해 죄를 빌어 드리겠소.”

잡가군 중 한 명이 맹아 아비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작미성에서 함께 농성했던 두건득이었다. 그 후로도 쭉 광운과 행동을 같이한 그는 오늘 유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동정은 원치 않소. 처벌받을 일을 했다면 당당히 목을 내놓는 게 군문에 발을 들인 자의 도리. 이 몸은 잘못했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소이다.”

“어쨌든 아직은 어린 대장이오. 자칫 생각과는 다른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으니… 하여튼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납시다.”

두건득은 서둘러 두 사람을 끌고 갔다. 맹아 아비의 기질이 자칫 편월이나 여상계의 신경을 다시 건들까 저어해서였다.

“저들을 어떻게 처벌할 생각인가?”

두건득이 두 사람을 끌고 사라지자, 여상계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알아서 하겠소.”

“되도록 가벼운 처벌을 내렸으면 좋겠네. 저 맹가 부자는 제법 기개가 있는 것 같으니.”

“내게 맡긴 이상 내가 하는 대로 두고 보시오!”

편월은 단호했다. 당장에라도 두 사람을 참수형에 처할 것만 같은 눈빛과 표정이었다.

아쉽지만 여상계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들은 자네에게 소속된 사람들이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네. 그보다 광운 장군은 적들을 어떻게 소탕하겠다는 작전을 세우고 계시던가?”

“화공으로 이 안에 틀어박혀 있는 놈들을 태우려다가, 오히려 우리가 당했소.”

“딴은, 화공이라… 그게 가장 효과적이겠군.”

“그걸 아시면서 왜 여태 시행하지 않았던 거요? 그나마 기호산을 점거한 건 잘한 일이지만.”

“크흠!”

곽준방을 비롯하여 자기들을 비판하는 듯한 편월의 말투에, 여상계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렇다고 달리 반박할 말도 없었다. 침사성 포위 공격에 실패한 건 자신들이었으니까 말이다.

“피해 보고! 제일 대, 사망 열일곱, 중경상 쉰다섯!”

“제이 대, 사망 스물셋, 중경상 일흔여섯!”

“그만! 피해 보고는 좀 있다 해!”

연이어 피해를 보고하는 소리를, 편월은 묵살해 버렸다. 어차피 본대에 돌아가면 다시 세밀한 인원 점검을 해야 한다. 지금은 여상계와 얘기하는 게 더 좋았다.

“어쩌다 침사성에 몰아넣은 놈들을 놓쳤소?”

편월이 질문을 던졌을 때, 여상계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적들을 놓친 자신들의 실책과, 또 너무도 어른스러운 편월의 말투 때문이었다.

“야습을 당했네.”

“고작 야습을 당했다고 놈들을 성 밖으로 풀어 놓았단 말이오? 아니, 기호산까지 물러나야만 했소?”

“놈들이 워낙 영악했네. 곧 항복할 것처럼 꾸미고선, 대규모 야습을 감행해 와 손쓸 도리가 없었네.”

“전장에서의 야습 대비는 장수의 당연한 마음가짐인데 어쩌다, 쯧쯧쯧…….”

혀까지 차 대는 편월의 머리통을 여상계는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뒷감당이 두렵기도 했고, 또 편월은 엄연히 유군을 지휘하는 대장이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어린애 취급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곽 장군이나, 또 나라고 해서 그걸 모르겠나? 다만 놈들이 그만큼 교활했다고 알아주게.”

“뭐,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소. 성에 매달려 공격하는 것보다, 밖에 기어 나온 놈들을 곽 장군과 우리가 포위 공격하면 의외로 쉬울지도 모르지.”

“목철린을 우습게보지 말게. 여우보다 영악한 놈일세.”

“흥!”

여상계의 말에 편월은 가벼운 콧방귀를 날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해 본 적 없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런 편월이, 여상계는 걱정되었다.

전쟁의 승패는 어쩌면 신조차도 모를지 모른다.

패배를 모르는 사람이 지휘하다가, 자칫 그 첫 패배가 곧바로 죽음과 직결되는 걸 흔히 봐 왔다. 광운이 늘 곁에 있으니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본인이 깨닫는 것보다는 못하다.

‘언젠가 찬찬히 얘기를 한번 해 봐야겠군.’

이제 편월은 단순한 잡가군이 아니다. 파양주군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결코 전사시켜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럼 곽 장군께서 거느리고 계신 장병은 얼마나 되오?”

“그만 본대와 합류하세. 광운 장군과 나눌 얘기가 많네.”

여상계는 편월의 질문을 흘려버렸다. 자신들이 실패한 전투에 대해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은 까닭에서였다.

“만약에 병사들의 숫자가 적다면, 지원병을 곧 보내야 할 것이오. 기호산은 그만큼 중요한 요충지…….”

“광운 장군과 얘기한다고 하지 않았나! 만약 지원군을 보낸다고 해도 자네가 그 지원군을 내줄 수 있는가?”

약간 짜증스러운 반문을 받고서야 편월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 지원군을 파견하고 말고 할 권한이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 그건 이번 전쟁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광운이 결정할 일이다.

“복귀한다! 사방을 충분히 경계하면서 가도록!”

편월의 한마디에 잡가군은 재빨리 움직였다. 부상자들은 어떻게든 챙겼지만, 전사자들의 시신은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이글거리는 화염이 그들을 처리해 줄 터였다.

석양과 더불어 벌겋게 타는 불꽃을 뒤로하고 그들은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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