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창칠년永昌七年 (16/66)

영창칠년永昌七年

1

영창칠년.

지루하게 끌던 파양주와 막주와의 전쟁은 드디어 그 마지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곽준방이 이끄는 파양주군이 목철린의 막주군을 그들의 본성인 침사성에 몰아넣고 연일 항복을 권유하며, 한편으로는 맹공을 퍼부었다.

천하의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파양주의 마용승은 그 군세가 삼십만으로 불었고, 그 세력권도 훨씬 넓어졌다. 서쪽으론 윤주까지 장악하고 연일 허주를 압박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이미 상기上記한 대로 곧 막주까지 병탄하게 될, 명실 공히 천하의 서쪽을 고스란히 차지한 막강한 패주가 되었다.

또한 마용승은 치세에도 능했다. 이 난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군사력이라는 걸 꿰뚫어 보고 꾸준히 병사들을 끌어 모았다.

다만 그뿐이었다면 마용승이 치세에 능하다는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그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기에, 그는 영내에 있는 백성들에게 농업과 교역을 강력하게 권장했다. 새로 황무지를 개간하면 오 년간 세미를 감해 주는가 하면, 각 성은 물론, 관문과 십 리 정에 이르기까지 시전을 형성해 백성들로 하여금 교역에도 힘쓰게 했다.

그 결과 마용승이 일 년에 거둬들이는 세미는 천만 석을 호가하고, 교역에서 얻는 세금 또한 엄청나며, 기존의 광산에서 나오는 금과 철까지 보태면 가히 세인들의 상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강병 삼십만이라는 숫자는 오히려 검소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성들도 꾸준히 늘었다. 난세의 힘없는 백성들이 원하는 건 강력한 군주의 슬하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었다. 천하의 서쪽을 차지하고 단단히 눌러앉은 마용승만 한 보호자도 드물기에, 오늘도 피난 짐을 싼 백성들의 행렬이 줄을 이어 영내로 들어왔다.

사실 이런 피난민 무리는 통치자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툭하면 도적으로 변해 기존에 있던 영민들을 약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용승은 이들을 내치지 않았다. 들어오는 대로 황무지에 정착시켜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량난을 해결하려는 의도로 활용했다.

게다가 막주까지 거의 병탄한 지금 식탁엔 해산물도 올라왔다. 서북방 산만 있던 영지에다 드넓은 바다까지 손에 넣었으니, 인구가 아무리 늘어도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마용승은 그사이 혼인도 하여 정실 외에 두 명의 측실을 두고 삼남 이녀를 얻었다. 마흔을 바라보게 되면서 서서히 몸집이 불기 시작한 그는 요즘 바야흐로 왕이 될 꿈에 젖어 있었다.

그 공작의 일환으로 끊임없이 황실에 줄을 대려고 했지만, 가겸후의 방해로 그 일만은 지지부진이었다.

서쪽에서 마용승이 크게 활약하고 있는 사이, 대륙의 최강자인 가겸후도 잠만 자고 있었던 건 아니다. 북으로는 융주戎州를 정벌해 오랫동안 골칫거리로 있던 북방을 정리했다.

남으로도 연일 군사를 보내 세력 확장을 시도하지만, 거긴 증두신이 단단히 버티고 있어 가겸후의 이마에 붙은 혹 노릇을 톡톡히 했다.

중앙으로도 부단히 세력을 넓히려 했다. 언젠가 마용승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봐야 하는 건 뻔한 노릇, 먼저 허주를 점령해 두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러나 새로 허주를 장악한 조환曺煥은 결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마용승과 가겸후라는 절대 강자들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히려 영산英山 전투에서는 홀로 가겸후가 있는 본진까지 쳐들어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크고 작은 방해 속에서도 가겸후가 지배하는 율천국은 점차 천하에 그 영향력을 더해 갔다. 황제라는 막강한 이름을 등에 업고 대륙을 호령하는 것이다.

증두신이 다스리는 강국도 이 열강들의 뜀박질에 뒤처지지 않았다. 마용승과 가겸후가 버티고 있어 땅 덩어리를 넓히지는 못했지만, 그사이 바다 건너 상초국祥招國과 국교를 맺고 날로 교역을 확대해 갔으며, 유사시엔 서로 군사적 지원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사실 증두신은 천하 쟁탈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누대로 이어받은 이 강국을 잘 유지하고, 그 안의 백성들을 기르는가 하는 데 전념했다.

하긴 증두신이라고 해서 왜 천하에 대한 욕심이 없겠는가. 다만 마용승과 가겸후의 세력이 너무 크기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은 것에 불과했다.

오늘도 증두신은 보리가 절반은 넘게 섞인 밥과 고작 서너 개에 불과한 반찬으로 끼니를 챙기며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일에 전념했다.

대륙의 배꼽이라고 할 수 있는 허주는 요즘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환이라는 강력한 지도자를 만난 덕이었다.

이 난세에서 지리적 위치가 한가운데라는 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다. 사방에서 적을 맞는 상황인지라, 조환의 고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조환의 능력은 뛰어났다. 지난번 율천국이 침입했을 때 영산에서 이를 맞아 격퇴시켰고, 그 일을 계기로 허주는 이 난세에 새로운 강자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백성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원래부터 대륙의 중앙에 있다는 우월감이 있는 데다 조환의 지휘 아래 천하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율천국군을 물리쳤으니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허주 어디를 가나 연일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낡은 것은 부수고, 새로이 건설에 착수하여 허주의 얼굴을 바꾸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든 걸 지켜보면서 조환은 오늘도 인재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사람을 보냈다. 허주라는 작은 땅으로 전국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인재가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 * *

“작다, 작아…….”

요즘 들어 입에 붙은 듯한 편월의 저 말이 광운은 신경에 거슬려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은 막주와의 전쟁에서 다른 군세들과 교대하고 영욱성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승전을 축하하는 인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가운데 말을 몰아가면서, 편월은 이 영욱성이 작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열두 살이 된 편월은 훌쩍 키가 자라 거의 육 척에 이르렀다. 몸은 그에 따라가지 못해 다소 야윈 듯 보이는 그는, 마치 털 빠진 장닭처럼 어설퍼 보이기도 했다.

“네 눈엔 이 성곽이 작게만 보이냐?”

이제 광운도 마흔을 지났다. 이마와 입가에 주름살이 하나둘 자리 잡기 시작한 모습이었다.

“작아.”

“그럼 큰 곳은? 궐주 창일성?”

“그것도 작아. 나라면 이보다 배는 더 크게 성을 지을 거야!”

“아이고, 어느 천년에?”

“두고 봐!”

“두고 보라는 놈치고 제대로 하는 놈 없더라!”

“계속 그렇게 비꼴 거야?”

“그러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우리가 무슨 성이냐, 성이…….”

“난 가질 거야!”

단호하게 내뱉는 편월의 옆얼굴을 광운은 망연히 쳐다보았다. 전장의 먼지와 햇볕에 타서 피부가 검게 반질거렸다.

‘그저 어릴 때의 치기 어린 생각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까지도 편월은 성을 갖겠다는 말을 했다.

기실 이번만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입버릇처럼 ‘성, 성’ 하고 다닌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광운은 그 말이 와 닿는 것 같았다. 지난번 출전 때 마용승에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내가 막주의 침사성을 떨궈 가져도 되겠소?

마용승은 그때 웃어넘겼다. 그 웃음 뒤에 번뜩이는 살기를 남겨 두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황제의 밀지를 받은 후로 마용승의 눈치가 이상했어.’

사실이다. 죽을힘을 다해 사자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영창원년, 마용승은 대대적인 환대를 해 줬다.

그러나 편월을 대하는 눈빛은 그때부터 분명히 달라졌다. 밀지의 내용이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 틀림없었다.

‘지금 마용승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게 없는데, 편월은 철없는 소리만 해 대고…….’

말이 좋아 성을 떨궈 가진다지,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당장 어디서 군사들을 구한단 말인가?

성을 갖는다는 건 독립을 하겠다는 얘기니 군사를 빌리기도 어려울 게다.

“곧바로 죽영루로 갈 거야?”

불쑥 편월이 물었다.

“그럼 넌 안 갈 거야?”

“난 들러 볼 곳이 있어!”

“어디?”

“나중에 얘기할게.”

그렇게 말한 후, 편월은 곧바로 말을 몰고 대열에서 이탈했다.

사실 이건 군율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교대해서 복귀한 병사들은 한군데 모여 인원 점검을 받고, 정식으로 해체식을 갖는다. 그 후에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광운이나 편월에겐 그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전투 때마다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또 잡가군 사이에선 전설적인 존재로 통하기에 이 정도는 눈감아 준다.

멀어지는 편월을 보며, 광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투에 참전했을 때도 간혹 저렇게 혼자 사라지곤 했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인지…….’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다. ‘나중에’라는 게 그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광운의 시선이 다시 앞으로 향했을 때였다.

“급전이오! 길을 비키시오!”

전령 한 명이 황급히 행렬을 지나쳐 성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무슨 일일까?’

아마도 저 전령은 지금 전투가 한창인 막주 침사성에서 오는 게 분명할 터다. 전황에 변화가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광운은 관심을 끊어 버렸다. 이제 교대해 왔으니 앞으로 한 달간은 휴가다. 전투는 지금 침사성에 파견되어 있는 곽준방이 잘 이끌어 갈 것이다.

행렬을 따라 좀 더 가던 광운도 이내 이탈해 곧장 죽영루로 방향을 잡았다.

죽영루 앞엔 죽영과 유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편월은요?”

광운 혼자 온 것을 본 죽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전쟁터에서 혹시 무슨 일을 당한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들를 곳이 있다고 잠깐 갔소.”

“아휴, 아이도 참! 유화가 이렇게 기다리는데.”

“어머, 언니는…….”

죽영의 말에 유화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눈에 확 띄는 미모에, 열일곱 살 처녀티가 물씬 풍기는 자태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유화는 말에서 내리는 광운에게 인사를 했다. 전투에서 교대해 돌아올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그래, 유화도 잘 있었고?”

“네.”

“들어가자!”

광운이 죽영루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며 들려왔다.

“아뢰오! 광운 장군은 지금 즉시 출두하라는 성주님의 명이시오!”

“뭐?”

광운의 미간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보다는 죽영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지만.

“이제 막 집에 오셨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있다 가시면 안 될까요?”

죽영을 대신해 유화가 전령에게 말을 했다. 그사이 많이 똑똑해지고, 당당해진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소관은 그저 명받은 걸 전할 뿐이오! 판단은 광운 장군께서 하실 일!”

말을 마친 후, 전령은 그대로 말을 몰아 돌아갔다.

“우선 좀 씻고 가세요. 그 꼴로 어떻게 성주님을 뵙겠어요?”

죽영이 광운을 잡아끌었다.

실제로 광운은 거지 중 상거지 꼴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성에 들어오기 전에 새로 무장을 했었지만, 그와 편월은 전장에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성에 들어올 때 전령도 급하게 들어오는 게 보였소. 아무래도 전황에 변화가 있는 것 같으니 가 봐야겠소.”

이대로 머물러 있어 봐야 마음이 편치도 않을 광운이었다. 차라리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는 게 낫다.

“편월은 뭐 하느라 여태 안 오지?”

“그 아이 걱정은 마시오. 이제 다 컸으니.”

“열두 살이 다 큰 거예요? 키만 껑충하니 크지.”

“하하, 어쨌든 다녀오리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저씨.”

유화가 또 귀엽게 인사를 했다.

“그래, 네 언니의 마음을 잘 좀 풀어 드려라.”

“네에.”

명랑한 유화의 대답을 등으로 들으며, 광운은 말을 몰았다.

‘이렇게 급하게 찾는 걸 보면 사태가 심각한 것 같은데.’

생각하던 광운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혹시 곽준방이 전사한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광운은 박차를 가했다. 지난번 궐주에 사자로 갔다가 질풍을 잃고 오자 마용승이 한 마리 하사해 준 말이었다.

물론 그 이름도 질풍으로 지었다.

광운은 곧장 집무창으로 말을 달렸다. 전시에 마용승이 소집하면 주로 거기서 모인다. 이 일도 군사에 관련된 것이 분명할 테니, 그도 집무창으로 내려와 있으리라.

집무창이 빤히 보이는 곳에서 광운은 돌연 말을 세웠다.

‘저 아이가 웬일로?’

지금 광운의 눈엔 집무창을 빠져나와 마구 말을 달리는 편월이 보였다. 이왕에 여기 올 것이면 성문 앞에서 대열을 이탈할 일이 뭐 있는가. 해체식은 여기서 하는데.

게다가 편월은 무척이나 서둘고 있었다. 광운의 모습도 발견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말을 몰아갔다.

‘무슨 일이지?’

그러나 혼자 생각해서야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는 일, 이번엔 단단히 물어보리라 마음먹고 광운은 집무창 안에 있는 대장군부로 향했다.

지난번 대장군이었던 호윤천은 돌운성 공사 중 불의의 사고로 부상을 당했고, 그걸 핑계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때 광운은 호윤천이 뭘 생각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무장에게 그 정도 부상은 물러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만 호윤천은 그 아들에게 대장군 직을 물려주고 싶었을 터였다.

그리고 호윤천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다. 지금 대장군은 그의 장남인 호유진胡由溏이 승계했으니까 말이다.

다만 호유진은 너무 젊기에 실제적인 대장군 일은 곽준방이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부를 지키던 젊은 정규군 장수 한 명이 광운에게 깎듯이 군례를 갖추며 말했다.

사실 이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규군과 잡가군은 그 신분상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저 장수가 광운에게 군례를 취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 신분을 떠나 누구든 광운이나 편월을 가볍게 대하지 못한다. 군인에겐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 존경받는 법, 두 사람은 이미 파양주군 사이에서도 흠모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수고하시오.”

가볍게 답례를 하고 광운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벌써부터 후끈한 열기 속에서 격론이 한창이었다.

“지금 당장 증원군을 급파해야 하오!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한다면 목철린은 곧장 사주를 지나 이 땅까지 쳐들어올 것이오!”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 건 새로 대장군이 된 호유진이었다. 그 아비와 비슷한 성격으로 급하고 과격했다.

“고정하시오. 곽 장군은 보기 드문 명장이오. 우선은 그 분을 믿고 좀 더 지켜보는 게 좋겠소.”

이건 스승인 구양파의 뒤를 이어 파양주의 군사軍師 노릇을 하는 서수의 말이었다.

구양파는 작년에 여든하나라는, 보기 드문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버렸다. 그가 죽을 때 일부러 광운을 머리맡으로 불러 편월을 잘 키우라고 누누이 부탁했었다.

“어서 오게!”

마용승이 먼저 광운을 발견하고 알은체를 했다. 살진 얼굴에 턱이 두 겹으로 접히는 중이었다.

“진남후를 뵙습니다!”

광운은 가볍게 예를 갖췄다. 편월을 전과 달리 대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자신들이 파양주에 머물고 있는 한 마용승에게 밉보여선 안 된다.

“편월은?”

“무슨 볼일이 있는지 따로 떨어져 나갔습니다만.”

“볼일?”

마용승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밀서가 내려진 이후 편월의 얘기만 나오면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였다.

“그보다 무슨 일입니까?”

광운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편월에게 집착하는 마용승의 관심을 돌리려는 의도였다.

“곽 장군이 침사성 전투에서 참패하여 포위를 풀고 기호산騎虎山으로 물러났소.”

“뭐요?”

서수의 대답에 광운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2

정말이지 이건 큰일이었다. 침사성을 포위하기 위해 들인 희생과 수고를 생각한다면, 그 포위를 풀었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막주의 목철린 부대는 원래가 변방을 돌던 도적들이다. 그만큼 야전에 능숙하다는 얘기다.

당연히 그들을 침사성으로 몰아넣기 위해 이번에 교대한 부대는 상당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수성에 서툰 막주군의 약점을 노려 그들을 성안으로 몰아넣고 섬멸할 작정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곽준방은 그 포위를 풀었다고 한다. 그만한 희생이 따른 패전이었으니 그랬겠지만, 그래도 너무 뒤를 생각지 않은 행동이었다.

“도대체…….”

“병력의 절반을 잃었소. 곽 장군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요.”

“대체 어쩌다가…….”

“야습을 당했소. 곽 장군으로선 드물게 허를 찔린 셈이지.”

털썩!

광운은 비어 있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곽준방만 한 명장이 야습을 당해 병력의 절반을 잃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고, 이제 포위가 풀린 막주군이 야전에서 설칠 생각을 하니 아득하기만 했다.

“그래서 말인데…….”

문득 마용승이 입을 열었다. 뭔가 어려운 부탁이 있는 듯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이번에 교대해 왔던 병력들이 다시 가 줬으면 좋겠네.”

이건 무리한 얘기였다. 이제 갓 돌아온 병사들에게 무슨 힘이 있어 다시 전장으로 가겠는가 말이다.

“허주와의 국경에서도 문제가 생겨 도저히 다른 병력을 돌릴 수가 없네. 그러니 자네가 잡가군을 잘 설득해 주기 바라네. 정규병이야 동원령을 내리면 어떻게 되겠지.”

이왕 꺼낸 말이다 싶었는지 마용승은 끝까지 뱉어 내고 말았다.

광운은 짜증이 치밀었다. 기껏 놈들을 성안으로 몰아넣어, 굶겨 죽이든 성을 떨구든 이쪽 마음대로 할 수 있게끔 해 뒀는데 포위를 풀다니?

평소 좋아하던 곽준방만 아니었다면 욕이라도 한마디 했을 터였다.

“지금으로썬 광운 장군밖에 믿을 사람이 없소. 그러니 부탁드리겠소!”

호유진이었다. 자기 아비와 달리 광운이 잡가군이라고 해서 무시하는 일은 없었다.

광운으로선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막바지에 이른 싸움을 완전히 매듭짓기 위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죽영이 화를 내겠군.’

지금 광운의 뇌리를 가득 메운 건 죽영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짱알거리며 잔소리를 할 것이다. 어쩌면 편월을 데려가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며 광운은 고소를 머금었다. 편월이 전장에 나가고 나면 유화가 그토록 마음을 졸인다는 것이다. 어느새 그녀의 가슴에도 여자로서의 꽃이 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별안간 광운은 몸을 일으켰다. 이왕 갈 바엔 서두르는 게 좋다. 전쟁이란 변화무쌍한 생물이라 일각을 지체하면 그만큼 피해가 커질 수도 있다.

“즉시 잡가군을 소집하겠소. 단, 보수는 배로 줘야겠소.”

이런 혜택마저 없다면 이제 막 무장을 풀고 있을 잡가군을 설득할 건더기가 없었다.

“그 점은 염려 말게. 충분히 생각하고 있네.”

마용승의 대답을 들은 후, 광운은 가벼운 예를 갖추고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우선 편월부터 찾아야겠군.’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광운은 생각에 잠겼다. 물론 포위를 풀고 나온 막주군을 어떻게 상대해야 될까 하는 점이었다.

귀환한 부대를 맞아 들떠 있던 영욱성이 다시 한 번 북적거렸다. 병사들이 무장을 채 풀기도 전에 다시 소집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막주 침사성을 치기 위한 병사들이 출발한 때는 다음 날 아침인 영창칠년 윤유월 칠 일이었다.

그 선두는 변함없이 광운과 편월이었다.

* * *

막주 침사성.

대륙의 남방에 치우쳐 있어 이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기온도 상대적으로 높아 윤유월의 염천 속에서 행군해 온 파양주군은 도착한 것만으로도 벌써 진이 빠졌을 정도였다.

“이곳에 영채를 세우고, 기호산에 계시는 곽 장군과 연락을 취한다!”

명을 내리면서 광운은 문득 우스워졌다. 여기엔 정규군 장수들이 있음에도 잡가군인 자신이 명을 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성에서 기어 나와 이 밀림 속에서 설쳐 댈 놈들을 어떻게 다시 몰아넣을 거야?”

편월이 광운 곁으로 오며 물었다. 땀에 젖어 사람도 갑옷도 다 같이 후줄근한 모습이었다.

“지난번과 같은 유격전은 안 먹힐 거야. 놈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나도 그 점이 고민이다. 편월, 너라면 어떤 방법을 쓰겠냐?”

“몰라!”

“몰라? 그건 편월답지 않은 말이군. 전쟁에 관한 거라면 뭐든 막히는 게 없는 녀석이…….”

“모르는 건 모르는 거야. 모르는 걸 괜히 아는 척했다간 패해 달아나기 딱 좋지, 뭐!”

“하하하-!”

광운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문답이 너무 즐거웠다. 이제 열두 살에 불과하다지만, 평생(?)을 전장에서 살다시피 한 편월은 훌륭한 군사적 상담자였다. 전략과 전술은 물론 실제 전투를 시켜 봐도 척척 소화해 냈다.

“모르겠다는 건 거짓말일 테고… 어때? 우리 서로의 생각을 말해 보기로 할까?”

광운의 말에 편월은 흘낏 그를 쳐다보았다. 싫지만은 않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셋 하면 동시에 말하는 거다. 하나, 둘, 셋! 화공!”

“불!”

“하하하-!”

광운은 또다시 소리 높여 웃었다.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게 그저 즐거웠다.

“그럼 이 근처의 나무들부터 싹 베어 내야겠군.”

화공이라고 해서 그저 불만 지르는 게 아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태워야 효과가 크다.

게다가 그 불이 아군이라도 덮치는 일이 생긴다면 여간 낭패가 아니다. 적어도 영채 주변은 깨끗이 청소해 둬야 한다.

“백성들의 반감이 커지겠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뭐.”

화공을 하고 난 뒷자리는 말 그대로 초토화가 된다. 이 땅에 붙박여 살아야 하는 백성들에겐 그 이상의 고역도 없을 터였다.

‘참 못할 짓이군.’

광운은 새삼 회의감이 들었다.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 모든 걸 던져 버릴 수 있는 편월의 젊음이 부럽기까지 했다.

그때 얼핏 고운 주름이 잡힌 죽영의 얼굴이 떠오른 건 우연이었을까.

‘전에 없던 일인데…….’

정말이다. 전장에 나서면 광운은 오롯이 전쟁에만 집중했다. 이처럼 여자나 떠올리진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오늘 불현듯 죽영의 얼굴이 떠오른 건 왜일까. 초토화된 땅에서도 살아가야만 될 이 땅의 백성들과 그녀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그러다 광운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영이나 이 땅의 백성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건 바로 광운의 나이였다. 지금까지는 의식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의식적으로 무시해 버리려고 했던, 마흔을 넘긴 나이가 그의 마음을 보다 약하게 만들어 버린 결과였다.

광운은 바로 옆에 서 있는 편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적진을 쏘아보고 있는 그는 터질 듯한 젊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용케도 이만큼…….’

처음 편월을 주웠을 때만 해도 솔직히 어디까지 키워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느 전장에서 이내 시신을 눕히게 되면, 바로 그게 이 아이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편월은 기대 이상으로 자라 주었다. 자신이 나이를 의식할 때, 그는 당당한 한 명의 전사가 되어 있었다. 감회가 새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아무래도 놈들이 기습을 해 올 것 같아.”

“뭐?”

생각에 잠겨 있던 탓에 편월의 말을 미처 듣지 못한 광운이 재빨리 물었다.

“아군의 꼴을 봐! 삶아 놓은 호박 같잖아. 나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습할 거야.”

“그래.”

광운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자신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교대를 했다지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이 염천을 뚫고 다시 막주까지 내려온 병사들이다. 움직임 하나에도 지친 기색을 역력히 보이고 있었다.

오늘이 영창칠년 윤유월 스무이틀, 무려 보름을 넘긴 강행군을 한 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너라면 어떤 대비책을 세울래?”

“매복!”

편월은 딱 잘라 대답했다. 기습을 감행해 올 적을 매복으로 역습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좋아. 그 매복을 편월에게 맡기지. 몇 명이 필요해?”

“오천!”

이번에 동원된 총 군세가 삼 만이다. 그중 오천이라면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숫자다.

게다가 이 지원군에 딸린 잡가군의 숫자가 마침 오천이다. 편월은 그들을 이끌고 갈 심산이었다.

“허락한다, 오천. 잘해라!”

“고마워!”

대답한 후 편월은 말을 몰아 잡가군이 영채를 세우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출발은 곧 이루어졌다. 이 더운 날씨에 영채를 세우는 것보다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매복하는 게 더 낫기에 잡가군은 재빨리 움직였다.

일단 잡가군을 데리고 본대에서 빠져나온 편월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갔다. 거기서도 다시 나무 위에 올라 사방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오천으로 펼칠 수 있는 매복은 다섯 군데인데.’

한 곳에 천 명 이하의 매복이라면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 밀림 지대에 익숙한 막주군을 상대하려면 천 명도 오히려 부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관찰해 본 지형은 공격할 수 있는 길이 너무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적어도 열 군데에 매복을 펼쳐 두고 싶었다. 그걸 다섯으로 줄여야 한다는 게 편월의 고심이었다. 최대한의 가능성이 있는 곳 위주로 매복을 심어 둬야 한다는 말이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곳은 세 군데였다. 본대의 후면과 양 측면이었다.

그렇다고 정면을 비워 둘 수는 없으니, 우선 네 군데에 천 명씩 배치하자고 마음먹었다.

‘남은 천 명은 유군이다.’

매복이라고 마냥 죽치고 앉아 적을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 천변만화하는 전장에선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그에 대한 대비도 해 둬야 한다.

나무에서 내려온 편월은 잡가군에게 빠른 어조로 명을 내렸다.

재미있는 건 잡가군의 반응이었다. 열두 살짜리 아이가 내리는 명령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 사이엔 의사소통도 빨랐다. 긴 시간 동안 잡가군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같이 싸우고, 같이 잠자며 뒹군 탓이리라.

편월의 명에 따라 잡가군은 모두 말을 버렸다. 이 밀림 속에서의 말은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또 매복엔 말이 필요 없다.

남은 천 명 중 백 명을 고른 편월은 그 말들을 본대로 옮기게 했다. 다만 유군으로 남을 잡가군은 모두 말을 탄 상태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위장을 해! 사람과 말 모두!”

재차 편월이 명을 내렸을 때, 남은 천 명의 잡가군은 나직이 웃었다. 막주군과의 전투라면 이골이 났기에 위장의 중요성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갔다. 달리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또 어디에서 위장한 채 대기하고 있어야 할지 잘 알기에 그 움직임들은 민활했다.

편월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을 가늠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선 하늘을 보기도 힘들었다. 빽빽한 수림에 가려 간신히 콧구멍만 하게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태양의 강도도 다르다. 시간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신시 중간쯤 된 거 같은데…….’

여름 해는 길다. 신시 중반이라도 아직 햇발이 한참이나 남아 밤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밤이 되기 전에 놈들은 반드시 온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전장을 뒹굴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편월의 육감이 강하게 호소하는 소리였다. 잔뜩 지친 상태에서 영채를 세우느라 바쁜 아군들은 적들에게 좋은 먹잇감으로 비칠 테니 말이다.

문제는 놈들이 어디서 공격을 개시하느냐다. 비록 본대의 사방에 매복을 두고, 달리 유군까지 운용하고 있지만 막주군은 야전과 밀림전에 능하다. 어디서 어떤 형태로 튀어나와 공격을 감행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뚝딱뚝딱 하는 도끼질 소리가 본대 쪽에서 어지럽게 들려왔다. 광운이 영채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 내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편월의 뇌리에 불현듯 한 가지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놈들이 화공을 가한다면?’

애당초 이편도 화공으로, 성에서 나와 밀림 속에 도사리고 있을 막주군을 공격하려고 했었다. 막주군이라고 해서 같은 생각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아군은 벌목 작업을 위해 병력의 절반이 밀림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미처 다 세우지 못한 영채 주변도 마찬가지고…….

이런 상황을 하나씩 꼽아 가다 보면 화공은 아군이 아니라 적들이 가해 올 공산이 컸고, 또한 그 효과도 훨씬 클 게 분명하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편월은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곁에서 대기하고 있는 전령들을 불러 황급히 명을 내렸다.

“매복은 중지다! 지금부터 수색으로 전환한다. 백 명씩 한 조가 되어 본대 주변의 밀림을 철저하게 수색한다! 이 사실을 본대에도 알려!”

전령은 물론 유군으로 편성된 잡가군은 편월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내려진 명이니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전령들은 마치 튀는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말을 몰았다.

따지고 보면 우스운 광경이었다. 항상 죽음을 동반하는 전쟁으로 먹고사는 잡가군이 열두 살 먹은 편월의 명에 복종하는 것이나, 고작 열두 살짜리 소년의 말투가 어른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나, 분명 둘 다 정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에겐 하등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편월의 전쟁 경력은 십이 년이다. 이번에 참가한 잡가군 중에서 그 이상의 경력을 지닌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이는 어리지만, 편월이 최고참에 속하니 그 명을 듣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편월은 전쟁도 잘한다. 작전이면 작전, 용병이면 용병, 또 실전에도 강하다. 지금 같은 전국난세에서 전쟁 잘하는 사람이 대우받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우리 유군은 네 개 조로 나눠 수색하는 아군의 뒤를 받친다. 특히 적의 화공에 유념하도록! 언제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출발!”

재차 명을 내린 편월은 대기시켜 둔 소질풍에 훌쩍 뛰어올랐다.

이 경우 달리 인원을 할당한다느니, 각 소부대의 지휘자를 뽑는다느니 하는 일은 필요 없다. 물경 칠 년에 걸친 막주와의 전쟁을 통해 잡가군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자연스레 몸에 익혔다. 비록 그 얼굴들은 많이 바뀌었지만, 한 번 세워 둔 그들의 질서는 새로 투입되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말 위에 탄 채로 편월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저들 중 대부분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게 애석하다는 건 아니었다. 아니 애석함을 느끼기엔 편월이 아직 어렸다.

그렇다고 상실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비록 그게 새로운 사람들에게 다시 적응하려면 번거롭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이지만 말이다.

바로 이게 전쟁의 속성이다. 인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인정에만 매달리게 되면 결국 남는 건 후회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편월은 제대로 배웠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과 마음이 적응되어 버린 셈이었다.

“갑자기 화공이라니, 놈들이 자신들의 본거지를 불사를 것 같나?”

편월 곁으로 말을 붙이며,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몇 년 전 사주 풍소성에서 함께 싸웠던 두건득이었다.

“나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짤막한 편월의 대답에 두건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군은 모두 이 밀림 속에 들어와 있으니, 불씨만 확 댕기면 그대로 통구이가 되겠구먼.”

그러다 목소리를 낮춰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가?”

“응. 그사이 죽은 사람도 있지만, 지금까진 별문제 없어.”

“광운 대장도 알고 계시고?”

“아니!”

“그럼 아직까지 말씀드리지 않았단 말인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는 편월에게 말한 두건득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아직은 모르는 게 나을 거야. 얘기하면 틀림없이 반대할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일이 성공한 후에 얘기할 거야. 그땐 광운도 어쩔 수 없이 우리 뜻에 따를 거야.”

“흐음…….”

확신에 찬 편월의 말에 두건득은 긴 침음성을 토했다. 뭔가 마뜩찮은 표정이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자, 그럼 편월 대장! 우리는 본대의 전방을 수색하는 아군을 지원하면 되나?”

대신 두건득은 이렇게 물었다. 빤히 아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건, 남은 이백오십 명의 아군들에게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그 말에 편월은 뒤에 대기하고 있는 잡가군을 돌아보았다. 긴장보다는 곧 있을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번들거리는 눈빛들이었다.

“좋아. 우리는 본대의 전방을 수색하고 있는…….”

“와아-!”

“적이다!”

편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본대의 북동쪽 후방이었다.

3

이럴 때 한가하게 명령이나 내리고 있을 편월이 아니었다. 그는 곧장 소질풍의 엉덩이에 박차를 가해 함성이 들려온 곳을 향해 달렸다.

그건 남은 잡가군 중 일부도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명이 없었음에도 그들은 산개하며, 혹은 편월을 호위하며 말을 달렸다.

다만 두건득과 백여 기의 잡가군은 그 자리에 남았다. 혹시라도 저 함성이 적들의 양동작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건 저절로 이루어졌다. 마치 그 함성이 명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대가 움직이면 안 되는데.’

달리는 편월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적들이 기습해 온 건 분명하지만, 틀림없이 소규모다. 본대까지 술렁거릴 이유가 없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다. 이제 막 도착해서 영채도 세우지 못한 본대가 적의 작은 도발에 움직인다면 사기와 직결된다. 지쳐 있는 병사들이라 자칫 들뜨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점은 편월이 염려할 바가 되지 못했다. 광운도 전쟁에 대해선 닳고 닳은 사람이다. 본대를 단단히 단속함은 물론 벌목 작업에 나섰던 병사들까지 벌써 불러들이고 있었다.

아니 그뿐이 아니었다. 기왕에 베어 놓은 나무들을 옮겨 와 본대 주변에 둘러쳐 임시 방책까지 설치하는 중이었다.

그 점을 확인한 편월은 소질풍에게 더욱 박차를 가해 달렸다.

“와앗!”

“적이다!”

편월의 후방, 즉 방금 떠나왔던 곳 근처에서 갑작스러운 함성이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아마 그쪽에도 적의 기습이 가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편월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경우엔 이게 정석이다. 공격해 오는 적들에게 휘둘려 우왕좌왕하게 되면 그야말로 낭패를 면치 못한다.

물론 이건 두건득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되지도 않을 일이었다. 비록 백여 기에 불과하지만, 그는 노련하게 적들의 공격을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었다.

확실히 밀림 속은 말을 타고 달리기에 불편했다. 숱한 나무들과 질퍽거리는 바닥은 생각보다 훨씬 고약한 방해물이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적들보다 더 무서운 복병이라고 편월이 생각한 순간, 소질풍은 벌써 적들이 보이는 곳까지 달려 나갔다. 본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우이이얍!”

편월의 입에서 터질 듯한 기합성이 토해졌다. 동시에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울 것 같은 대도가 그의 손에 휘둘리며 강렬한 햇살을 튕겨 냈다.

번쩍!

그건 하나의 경이였다. 이제 겨우 열두 살, 키는 껑충하게 컸지만 근육은 그에 미치지 못해 왜소해 보이는 편월이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린 대도는 너무나도 가볍게 휘둘렸고, 근처에 있던 굵직한 나무들이 그대로 베여 나갔다.

이건 단순히 과시용이 아니었다.

비록 적들이 보인다지만, 아직은 거리가 멀다. 그 전에 크게 자란 나무들을 베어 넘겨 적들의 주의력을 분산시키려는 편월의 의도였다.

그리고 그 의도는 적중했다.

사람이 먼저 공격하리라 예상하고 기다리던 적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나무가 무너져 내렸으니, 적들은 그대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와두둑-!

그 속으로 편월은 소질풍을 몰아넣었고, 잠시 흔들리던 적들은 일제히 편월을 둘러쌌다.

적들은 기병과 보병이 뒤섞여 있었다. 우선 기병으로 치고, 보병으로 하여금 싹 쓸어버린다는 작전을 세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편월에게 영향을 미친 건 전혀 없었다. 적들이 어떤 작전을 세웠든 여기선 무조건 쓸어버려야 한다. 최단 시간 내에 이곳의 적들을 섬멸하고, 두건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게 유군을 운용하는 가장 기본이고, 핵심이다.

쓰싸아악-!

편월의 대도가 재차 허공을 갈랐다. 아니 가른 건 허공만이 아니라 그 칼날의 궤적 속에 걸린 모든 것이었다. 그게 사람이건 우거진 나무들이건 가리지 않고…….

“겁먹지 말고 쳐라! 놈은 혼자다!”

적의 지휘관이 고함을 질렀다. 동료들보다 앞서 뛰어든 편월이 혼자임을 알아보고 부하들을 독려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목소리는 이내 다른 명령을 내렸다.

“아앗, 물러서라! 물러서! 편월이다! 귀신 붙은 놈이다!”

적 지휘관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귀신을 본 자가 지르는 외마디 비명 같았다. 그만큼 공포에 질려 있다는 의미였다.

왜 아니겠는가. 막주군은 지난번, 아니 지금까지 파양주와 싸울 때마다 편월에게 지독하게 당했었다. 실제 전투에 임해서는 치 떨리게 잔혹한 손을 거침없이 드러냈었고, 세우는 작전은 뱀보다 더 영악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휘관의 그 한마디가 던진 여파는 컸다. ‘편월’이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막주군 전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게 막주군의 불행이었다. 침착하게 편월을 상대했다면 적어도 무사히 이 자리를 벗어날 수는 있었을 텐데, 꼬리를 말고 물러서는 순간 그들이 공격하던 파양주 잡가군의 역습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편월을 따라왔던 백오십여 기의 잡가군까지 가세하자 막주군은 그야말로 썩은 무처럼 베여 나갔다.

어찌 보면 이건 우스운 일이다. 지금 동원된 파양주군은 고작 천오백이 되지 않는다. 수색에 나섰던 천 명, 그 뒤를 지원하던 유군 이백오십, 거기다 편월이 이끌고 온 백오십 기가 전부였다.

그에 비해 막주군은 삼천의 병력이다. 이렇게 정신없이 당할 일은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도출된 건 순전히 편월이라는 한 개인 때문이었다. 막주군의 뇌리에 드리워진 조각달의 그림자는 그처럼 공포스러운 이름이었다.

그 속에서 편월의 흑요석 눈이 번뜩이는 빛을 발하며 싸움터를 휩쓸었다. 적장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미 무너져 버린 적들을 섬멸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된다.

하지만 적장만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처치하겠다는 게 편월의 생각이었다. 그래야 적들도 뒤에 재정비를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 눈에 가장 앞장서서 말을 몰아 달아나고 있는 적장이 포착되었다.

쓰와우웅-!

한차례 크게 대도를 휘두른 편월은 곧장 그것을 갈무리하고 활을 꺼내 들었다. 비록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체가 물소 뿔로 만들어진 것이라 위력이 막강한 강궁强弓이었다.

그 활에 편월은 한꺼번에 세 대의 화살을 걸었다. 풍소성 전투 때 광운이 선보였던 바로 그 사법射法이었다.

퓨퓨퓽!

편월의 강궁에서 세 대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되었고, 그건 빨려 들듯이 적장의 배후를 향해 날아갔다.

그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편월은 말 머리를 돌렸다. 활을 쐈으니 빗나갈 일은 절대로 없다고 확신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 확신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 대의 화살은 고스란히 적장의 등과 목덜미에 가 꽂혔다.

“와아앗!”

“장군께서 당하셨다!”

가뜩이나 무너져 버렸던 적들의 대오였다. 적장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은 족제비의 침입을 받은 닭장 안의 닭들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지리멸렬되었다.

말 머리를 돌린 그길로 편월은 곧장 두건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네 개로 갈라진 유군 중 일부가 그들과 합세했을 테니, 적어도 도착할 때까지 전멸을 당할 염려는 없을 터였다.

와두두둑-!

편월을 따라왔던 백오십 기와 유군 이백오십 기는 물론 공격을 당했던 잡가군 중 삼백 기도 뒤를 따라 두건득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적장을 잃고 무너져 버린 막주군은 남은 칠백으로도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역시 절묘한 호흡이었다. 누구 하나 이렇게 하라고 명을 내린 사람이 없었음에도, 명을 받은 것보다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이쯤 되면 누가 지휘를 하건 어깨에 힘이 실리게 마련이다. 전장에서 부리는 병사들이 이처럼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진다는 건 그 지휘자의 능력을 대변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편월의 표정 어디에도 그런 자긍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비를 맞으면 의당 옷이 젖는 것처럼, 잡가군의 움직임 역시 당연히 그리되어야 한다는 얼굴이었다.

예상과 달리 두건득이 거느렸던 백여 기는 거의 괴멸된 상태였다. 유군으로, 수색에 나선 잡가군을 지원하러 갔던 아군이 받쳐 주지 않았다면 그 역시 전사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걸 확인한 편월의 눈은 뒤집혔다. 두건득이 거느렸던 사람들이 결코 잡가군 중 정예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같이 마음으로 편월을 따르던 자들이었다. 일부러 아껴서 뒤에 남겼던 것인데, 거의 괴멸되어 버렸으니 광분할 수밖에 없었다.

“파양주의 잡가군 편……!”

전장에서의 습관대로 고함을 지르던 편월은 돌연 말을 삼키고 말았다. 한 부대를 맡은 지휘자로서 이처럼 이성을 잃고 날뛰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여기 있는 적들은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적개심 탓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 놈들은 조금 전의 적들과 같은 반응을 보일 터, 달아나는 적들을 일일이 추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휘자로서의 냉정을 회복한 편월은 재빨리 피아의 병력 수부터 파악했다.

‘아군은 천, 적은?’

여기도 적은 삼천 정도로 보였다.

그에 비해 아군은 자신이 거느린 칠백 기 정도와 다른 유군에서 가세한 사백 기 정도, 도합 천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였다.

그렇다면 이건 해 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을 때, 벌써 소질풍은 적들의 한가운데로 편월을 실어 놓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의 생각은 필요 없다. 단 한 명의 적들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작정한 이상, 그저 베어 넘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으아악!”

“놈들이 이렇게 빨리… 아악!”

삽시간에 편월의 주변은 적들이 지르는 비명과 고함으로 물들었다. 그들로선 한창 기세를 올리던 판에 갑작스럽게 날아든, 뜨거운 용암과는 같은 파양주의 잡가군이었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그제야 편월은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잡가군이 유군의 역할에만 너무 충실해서, 만약 적들이 무너져 달아나면 쫓지 않을 우려도 있었다.

아니 아예 적들이 달아날 소지를 없애기 위해 내린 편월의 명이었다.

명령 없이도 척척 움직이던 잡가군이었다. 확실한 명이 내려지자 그들 중 일부는 뒤로 빠져, 엉성하긴 하지만 포위망을 형성했다.

이 역시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건 마찬가지다. 모름지기 포위 공격이란 많은 수의 병력으로 적은 수의 적을 칠 때 사용되는 전법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거꾸로다. 채 천도 안 되는 병력으로 삼천의 적들을 포위했으니, 병법을 제대로 배운 자가 본다면 지휘자인 편월이 미쳤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전쟁이란 그 자체가 생명을 가지고 언제나 꿈틀거린다.

한순간의 전기戰期나 한 개인의 돌출된 행동으로 인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바로 지금이 그 좋은 예다. 한껏 기세를 올리던 막주군은 그야말로 의표를 찔렸고, 한 번 허둥거리기 시작하자 그건 이미 물결처럼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전장에 나선 병사라고 해서 모두 용감하라는 법은 없다. 개중에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겁쟁이도 있기 마련이다.

그 겁쟁이들의 심리는 한결같다. 나 하나쯤 슬쩍 빠져 있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커다란 오산이다. 가장 앞장서서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용감한 병사들보다 오히려 꼬리를 말고 뒤로 빠지는 겁쟁이들이 눈에 더 잘 띈다.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나뉘는 전장에서의 비겁자는 그처럼 두드러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을 놓칠 편월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적들 중의 겁쟁이들을 찾아냈고, 그쪽으로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우와앗!”

“살려 주시오. 목숨만 살려… 컥!”

겁쟁이들은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적과 조우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것으로, 그나마 조금 용감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오금이 떨려 달아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 적의 동정을 구하는 자들이다. 제대로 된(?) 겁쟁이 부류다.

어쨌든 편월은 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대도를 휘둘렀고, 그중 용감한(?) 겁쟁이들은 본능대로 행동하기에 급급했다. 자기들 편인 막주군 중 아무나 붙들고 늘어졌다는 얘기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건 막주군의 입장에선 심각한 이적 행위였다. 가뜩이나 들썩이며 무너지려는 걸 수습하기 급급한데, 같은 편이 뛰어들어 방해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적에게 등을 보인 자들은 모두 베어 버려라!”

급기야 막주군의 지휘관은 한편 살해의 명을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껏 들떠서 무너지기 시작한 부하들을 수습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늦은 명이었다. 겁쟁이들은 벌써 막주군의 한복판까지 뛰어들어 설쳤고, 순식간에 그 공포는 군 전체로 번져 갔다.

바로 이게 편월이 노렸던 바였다. 의도대로 맞아떨어졌으니 더욱 기가 살아 그가 휘두르는 대도엔 새로운 힘이 실렸다.

쓰와우웅-!

편월의 대도가 휩쓸고 지나간 뒤엔 어김없이 피가 튀었다. 적이 갑옷을 입었든 투구를 썼든, 방패로 막든 무기로 막든 전혀 상관없었다.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큰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 적들은 그 시신으로 전장을 뒤덮기에 급급했다.

“이 몸은 막주군 호기 대장 윤… 허억!”

아마 적장일 게다. 전장에서의 예의대로 이름을 밝히며 편월 앞을 막아섰지만, 곧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투구 속의 얼굴이 핼쑥하니 질려 버렸다.

편월로선 바라지도 않던 떡(?)이었다. 안 그래도 찾아 나서야 했을 판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말이다.

“펴, 편월!”

“알면 됐고!”

자신을 알아보는 적장의 목을 향해 편월은 대도를 곧장 찔러 넣었다.

이번에도 편월은 확신했다.

겁에 질린 적장의 목을 이 대도가 그대로 관통해 버리리란 걸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그 확신은 편월의 자만심으로 그치고 말았다.

치잉, 쓰콱!

자신의 대도가 적의 병기에 튕겨 나갔다 싶은 순간, 편월은 허벅지에 화끈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적장의 창이 깊숙이 꽂힌 탓이었다.

편월의 눈동자에 불길이 화악 일었다. 지금까지 전장을 돌며 부상을 입은 것도 수월찮이 많았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부상의 거의 전부가 유시流矢나 지독한 난전에 휘말려 누구에게 당했는지도 모르게 상처를 입었다. 지금처럼 일대일 대결에서 당한 게 아니란 얘기다.

그 점이 편월을 더욱 광분케 했다.

“흐이야압!”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기합성이 편월의 입에서 토해진다 싶은 순간 그의 대도는 그보다 더 빨리 허공을 쪼개며 적장에게 날아들었다.

“앗, 대장께서 위험하다!”

“쳐라! 놈을 쳐라!”

막주군이라고 해서 오합지졸만 모인 게 아니다. 병사들은 제 몸의 위험을 돌보지도 않고 적장을 구하기 위해 편월에게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퍼버벅!

이미 편월은 대도를 휘두르고 있던 상태였다. 거기에 적들이 뛰어들었으니, 서너 명이 순식간에 동체가 분리되어 바닥에 뒹굴었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들떠 있던 막주군이 비로소 목표를 발견한 것처럼, 전체가 편월 한 사람을 에워싸고 짓쳐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위축될 편월이 결코 아니었다.

“좋아, 좋아!”

이 상황이 재미있어 미치겠다는 듯 연방 웃음을 흘리며 대도를 휘둘렀다.

그렇게 설치는 편월의 기마술은 놀라웠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좁은 공간 속에서도 결코 배후에 적을 두지 않았다. 전면의 적을 거꾸러뜨렸다 싶은 순간, 그는 벌써 뒤쪽의 적을 향해 대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짓밟아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는 꼬마 장군의 명이다!”

“야, 이 개새끼들아! 이거나 처먹어라!”

위기에 처한 편월을 그냥 두고 볼 잡가군이 아니었다. 기존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자들은 물론 그 안에서 막주군 사냥을 하던 자들까지 일제히 걸쭉한 욕과 더불어 적들을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승패를 논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숫자는 많다지만 쫓기는 입장에 처한 막주군이다. 괴멸되는 건 시간문제, 전쟁에 있어 기세란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적의 병사들이 가해 오던 압력이 줄어들자 편월은 다시 적장을 찾았다. 허벅지에 상처를 입힌 자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적장은 쉬이 눈에 뜨였다.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포위망을 확 좁힌 잡가군을 치고 있었다. 몸을 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못 간다!”

벽력같은 일갈과 더불어 편월은 소질풍의 엉덩이를 뒤꿈치로 찍었다.

와두두둑!

소질풍도 전장에 단련될 대로 단련된 말이다. 적의 보병은 그대로 짓밟고, 적의 기병이 탄 말은 그 이마로 들이받으며 적장을 향해 돌진했다.

“앗, 막아라!”

“대장을 보호하라!”

적장의 측근들은 혼란에 빠졌다. 편월이 이처럼 빨리 따라붙을 줄은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여하튼 그건 적들의 불행, 편월은 일직선으로 적장을 향해 소질풍을 몰았다.

“절각도! 저놈의 말 다리를 베어라!”

적 중의 한 명이 다급한 어조로 명을 내렸다. 지금으로썬 가장 유효적절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게 편월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참마도를 든 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걸 휘둘렀을 땐, 소질풍은 벌써 바닥을 박차고 놈의 머리 위를 넘어가고 있었다.

번쩍, 쓰와웅!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노을빛을 튕겨 내며, 편월의 대도가 힘차게 내리그어졌다. 말과 사람 그리고 칼이 혼연일체가 된 움직임이었다.

적장이라고 해서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까.

한 번 편월의 대도를 튕겨 냈던 창을 옆으로 들어 방어 동작을 취했다.

바로 그게 놈의 목숨 줄을 당겼다. 피했다면 단 얼마간이라도 더 살 수 있었을 걸, 놈은 조금 전에 편월의 대도를 막았다는 기억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다.

써걱, 퍼억!

창대를 잘라 버린 편월의 대도는 그대로 적장의 투구를 베고 가슴까지 긋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그사이 소질풍도 착지를 했고, 거친 뒷발질로 몰려드는 적들을 마구 차 던졌다.

그 바람에 못 쓰게 된 건 적장의 시신이었다.

소질풍의 움직임에 따라 가슴에 꽂혔던 편월의 대도도 흔들렸고, 그에 따라 놈의 몸은 넝마처럼 찢겨 버렸던 것이다.

“불이다. 본대 쪽에 불길이다!”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린 건 편월이 대도를 거둬들였을 때였다.

편월은 재빨리 본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노을 아래에서, 그걸 시샘하는 듯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어이…….’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에 편월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짓깨물었다.

화아악-!

검은 연기가 시뻘건 화염으로 변한 건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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