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지비행適地飛行 (15/66)

적지비행適地飛行

1

육우맹이 저처럼 굳어진 가겸후의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그 처음은 물론 아비를 쳤던 열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도 되기 전에 진무각에 나타나 총동원령을 내리는 가겸후의 얼굴은 열여덟 그때와 똑같았다.

내린 명령도 육우맹으로선 이해가 힘들었다.

-파양주의 사자단을 주살하라. 적어도 편월이라는 꼬마는 반드시 죽여 그 목을 가져오라!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시행하긴 했지만, 육우맹에겐 약간의 불만도 없지 않았다. 불과 몇 시진 전에 그토록 죽이자고 했을 땐 반대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각 성과 관문에는 봉화 신호를 올렸고, 추적대 천오백을 급하게 선발하여 보냈으니 이제는 그 이유를 물어볼 차례다.

“전하, 어인 연고이옵니까?”

육우맹의 질문은 짧았다. 이 이상 길게 질문한다는 건 가겸후를 무시하는 일이다.

“수배는 어찌 되었소?”

“놈들은 우리 땅에 있사옵니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이니 심려치 마옵소서. 곧 그 발칙한 꼬마 놈의 모가지를 바치겠나이다!”

“그 꼬마 놈!”

“예.”

“바로 황제의 일족이오! 방금 가 황후가 알려 왔더이다.”

“앗!”

자신도 모르게 육우맹은 기성을 질렀다. 그만큼 가겸후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가겸후가 무능력한 황제를 끼고돌고, 또 동생을 황후로 만든 이유는 하나뿐이다. 자기 핏줄로 차기 황제를 만들어 권세를 더하고, 나아가 양위讓位를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만약 황제에게 다른 핏줄이 있다면 그 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면서 그냥 있을 육우맹이 아니었다.

“소장이 직접 병력을 수습하여 소 장군의 뒤를 받치겠사옵니다. 가납嘉納하여 주소서!”

이미 출발한 추적대의 지휘관은 소우기다. 그만으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육우맹은 직접 나서기로 작정했다.

“육 장군까지 나서지 않아도 될 거요. 어차피 파양주의 사자단은 중주를 지나야 할 테고, 중주는 오랫동안 소 장군이 다스리던 땅이오.”

“하오나…….”

“됐소. 육 장군은 따로 할 일이 있소. 지금부터 황궁을 포위하여 누구 하나 허락 없이는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존명!”

“또 하나, 아직 파양주 사자단이 이끌고 온 상단과 기예단이 남아 있을 것이오. 그들까지 데리고 가지는 않았을 테니, 모두 잡아들이시오!”

“존명!”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 명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육우맹이었다. 약간 상기된 얼굴로 진무각을 나서는 그의 어금니는 지그시 맞물려 있었다.

그날 창일성에선 때 아닌 ‘사람 사냥’이 벌어졌다.

송용조의 상단이 우선이었다. 사람은 물론 그 엄청난 화물들이 고스란히 율천왕부로 압송되었다.

다음은 기예단이었는데, 이 경우는 일이 약간 거칠었다. 그들 중엔 더러 무예에 능한 자들도 있어 상당히 드센 저항을 벌였던 것이다.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백성들의 반응도 의외였다. 그들은 기예단의 공연에 흠뻑 빠져 있었던 터라, 갑작스레 등장하여 그들을 마구 진압하는 병사들에게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일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병사들은 황궁까지 포위하고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물론 황제를 보다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게 그 명분이었다.

* * *

삐죽!

편월의 입술이 또다시 이지러졌다. 도무지 이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뭐야? 채 이천도 안 될 것 같은 추적대가 무서워 이렇게 달아나기만 하다니, 내게 삼백만 주면 매복해서 섬멸할 수도 있는데 광운도 이제 늙었어!’

물론 편월도 이게 후퇴전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불만이었다.

후퇴전이라 해서 이처럼 한 덩어리로 달아나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혹은 매복도 하고, 혹은 유격전도 벌이면서 추적대를 혼란시켜야 효과적이다.

그래서 편월은 지금까지 몇 차례 그걸 광운에게 얘기했었다. 정 사람이 없으면 자기에게 삼백만 달라고, 그럼 유군으로 활약하며 본대의 안전을 확보하겠다고.

그때마다 광운이 거절했음은 물론이다. 도대체 여섯 살 꼬마가 유군을 지휘한다는 게 말도 안 되고, 지금은 이처럼 무작정 달리는 게 가장 유리한 것이라면서 말이다.

‘씨이, 꼬마라니.’

그 말도 편월의 어린 가슴에 부아를 질렀다. 평소에는 몰라도 이처럼 싸움에 임했을 땐 한 번도 광운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일부러 말의 속도를 늦추며, 편월은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제 추적대와의 거리는 사오 리 정도에 불과했다.

‘저 속에 어제의 그 영감탱이가 있을까?’

아군이 달리며 내는 먼지에 가려져, 추적대는 기치만 언뜻언뜻 확인이 가능할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천은 안 되는데…….’

저 정도 숫자에 쫓기기만 하는 광운이, 편월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매복이고 유격전이고 벌일 것도 없이 일제히 돌아서서 화살 한 대씩만 쏴도 전멸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잇!”

더 이상의 생각을 작은 머리로는 감당하지 못한 편월은 그대로 말고삐를 돌려 방향을 바꿨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앙증맞은 활이 들려 있었다.

와두두두둑-!

돌연 정연한 말발굽 소리만 가득하던 잡가군 대열이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개중엔 편월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자들도 있었던 듯, 이백여 기가 일제히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그걸 느낀 편월은 신이 올랐다. 혼자 방향을 바꾸면 광운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올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그게 적중하지는 않았지만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발사!”

편월의 입에서 저절로 명령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진즉부터 겨누고 있던 활을 쏘았다.

그와 함께 방향을 바꿨던 이백 기도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게 저절로였다. 달리던 기세가 있으니 양측의 기마대는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급격히 그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달리면서 편월은 자기 몸에 맞춰 제작된 대도를 꺼내 들었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이렇게 혼자 병기를 들고 적과 기병전을 벌이는 건 처음이었다. 입술이 바짝 마르며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 갔다.

‘안 돼!’

이게 가장 위험하다고 광운은 가르쳐 줬었다. 이게 바로 적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두려움이 느껴질 땐 절대로 싸우지 말라고도 했었다. 적이 크게 보여서 도저히 찌르거나 벨 수가 없다고…….

편월은 대도를 쥔 자그마한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저절로 입이 벌어지며, 어디서 그처럼 큰 소리가 나는지 자신조차 의아할 정도의 기합성도 터져 나왔다.

“우야아압-!”

그 순간 양측의 선두는 서로 격돌했다.

편월은 눈을 부릅떴다. 광운은 이때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기고, 그러면 이미 목이 달아난 뒤라고 했었다. 적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라고, 적의 병기 끝을 따라 숨결을 나누라고 가르쳤었다.

‘보인다!’

정말 이글거리는 적의 눈이 보이고, 적이 찔러 오는 창끝이 편월의 눈에 선연히 잡혔다.

고개를 숙여 적의 창끝을 피한 편월은 망설이지 않고 대도를 휘둘렀다.

써걱!

뭘 잘랐는지 편월은 알지 못했다. 다만 쥐고 있는 대도의 자루를 타고 전해진 설명하기 힘든 느낌에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졌다. 눈앞엔 또 다른 적이 대도를 거칠게 휘두르고 있었지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의 움직임은 계속되어 죽고 죽이며, 쓰러져 짓밟히는 것의 연속이었다.

앞에 있는 적이 뭐라고 하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지만, 그저 보이는 게 다였다. 그가 휘두르는 대도도 선명히 보였고!

편월은 급하게 고삐를 당겼다. 말이 앞발을 곤두세우며 크게 울부짖는 느낌이, 타고 앉은 등을 통해 전해졌다.

말의 앞발이 내려지는 것과 함께, 편월도 수중의 대도를 위에서 아래로 힘껏 떨구었다.

파앗!

이번엔 분명히 보았다.

자신의 작은 대도가 적의 투구를 쪼개고, 두개골을 바스러뜨려 진홍빛 피가 솟구치는 것을…….

“와아-!”

“죽여라, 죽여!”

“저 꼬마다! 저 꼬마를 놓치지 마라!”

바로 그 순간 전장의 온갖 소음이 편월의 여린 고막을 터뜨릴 듯한 기세로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편월은 의아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겼는지, 조금 전의 고요보다 지금의 이 소음은 또 왜 이리 친숙한지.

의혹과 함께 편월은 자신의 몸이 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입고 있는 갑옷도, 들고 있는 대도도 무게가 전혀 없는 공기처럼 느껴져 훨훨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느낌으로 편월은 전장을 누볐다. 누구를 베었는지, 혹은 자신의 몸이나 탄 말에 부상을 입었는지는조차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이런 상태가 좋았다.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교차하면서 내는 온갖 소음들, 그 소음들에 떠받쳐 둥실둥실 허공을 노니는 듯한 이 자유가 좋았다.

싸운다는 생각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대로 어디까지든 달려가도 좋을 것 같은 해방감이 작은 가슴과 토실한 뺨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이노옴!”

“목을 놓고 가거라!”

두 마디 외침도 들렸고, 두 명의 적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덤벼드는 것도 분명히 보였다.

그러나 편월은 웃었다. 흑요석보다 더 반짝이는 눈빛으로 웃었다.

웃으며 편월은 대도를 휘둘렀다. 휘두르면서도 그걸 의식하지도 못했다.

왈칵!

이제 한 뼘 정도 솟구친 아침 햇살 속으로 선명한 피 무지개가 그려졌다.

편월은 그대로 달렸다. 아침 태양 속으로 뛰어들려는 것처럼 마구 달렸다.

그 뒤에 남은 건 도저히 자신의 처지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부릅뜬 눈으로 뒹굴고 있는 두 구의 궐주군 시신이었다.

광운은 미칠 지경이었다. 눈알이 뒤로 돌아가 붙을 정도로 말을 빨리 달려도 도저히 편월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인가?’

빤히 눈으로 편월을 보고 있으면서도 광운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저놈은 전신戰神이다! 아니 귀신이다. 전귀戰鬼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런 생각으로 광운은 전신에 오슬한 소름이 돋았다. 그만큼 전장을 누비는 편월은 대단했다.

저건 여섯 살 꼬맹이가 아니다. 귀신 쓰인 악동惡童이, 귀신 들린 대도를 들고 설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편월은 상당히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궐주군은 그만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기에, 실로 적의 한가운데 홀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편월은 전혀 개의치 않고 움직였다. 가로막으면 베고, 길이 트이면 달렸다. 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처럼 도무지 막히는 구석이 없었다. 당장 광운이 보는 앞에서 거꾸러뜨린 적의 숫자만 해도 스물에 가까웠다.

‘말려야 한다!’

딱히 편월을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게 광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저대로 두면 궐주군이 모조리 전멸당할 것 같은, 적을 위한 묘한 위기감의 작용이었다.

“이랴, 하아!”

광운은 질풍의 배를 연방 걷어찼다. 평소라면 이처럼 과격한 발길질은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질풍은 그야말로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전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광운은 전체를 조망하며 지휘를 해야 한다는 자신의 위치를 잠깐 잊고 말았다.

아직도 편월은 자신을 망각한 채 달리고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이 자꾸만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 같아 멈출 수가 없었다.

한순간 편월의 흑요석 눈동자가 아침 햇살을 튕겼다. 그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뭔가를 말하려는 듯했다.

엄…마…….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했던 그 말은, 그러나 소리가 되어 뱉어지지는 않았다.

실제로 지금 편월은 태양에 투영된 한 여인의 미소를 보고 있었다. 다른 부분은 햇살에 가려졌지만, 입가의 웃음만은 포근하고 따스한…….

그 미소를 향해 지금 편월은 질주하는 중이었다. 가로막는 건 뭐든 베어 넘기고, 오직 그 미소가 풍기는 따듯함을 가슴 가득 받아들이기 위해 전장이라는 살벌한 가시덤불을 헤쳐 핏빛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

오물거리던 입술이 드디어 소리를 뱉어 냈다.

주변은 아직도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말울음 소리, 비명 소리들로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편월은 자기가 방금 뱉은 말을 분명히 들었다. 입을 통해 나온 그 말은, 다시 귀를 통해 들어가 그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울렸다.

반짝!

다시 한 번 편월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아니 그건 눈빛이 아니었다. 그건 눈 가득 고여 있는 한 방울의 눈물이 아침 햇살에 반사된 것이었다.

울고 있다!

모태母胎의 자궁 밖으로 밀려나던 순간에도, 태가 잘리던 그때에도 울지 않던 편월이, 이 전장의 한가운데서 얼굴을 적시고 있다. 육 년 만의 눈물이었다.

물론 편월은 의식하지 못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래도 여인의 미소만은 선명히 보였다.

깡!

불쑥 내밀어진 적의 언월도 날이 편월의 옆구리를 때리며 불꽃을 튕겼다. 피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보지도 못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연한 일로 편월의 그 작은 몸뚱어리는 말에서 떨어져 바닥에 처박혔다.

그래도 편월은 웃었다. 비록 낙마하여 바닥을 뒹굴지만 해가 보이기에, 그 미소가 보이기에 작은 입술 끝을 말아 올릴 수 있었다.

“죽여라!”

“모가지는 확실하게 베어라!”

살벌한 외침과 함께 적들이 주변으로 밀어닥쳤을 때에야 편월의 미소는 지워졌다. 그들에게 가려 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죽어!”

이렇게 외치며 벌떡 몸을 일으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마대에 둘러싸인 여섯 살짜리 꼬마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발작적으로 대도를 휘두르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무력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조심스럽게 다뤄라! 전하께서 놈의 목을 원하신다!”

“내가 원하는 건 네놈들의 목이다!”

적일 게 분명한 자의 명에 뒤이어, 곧바로 광운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핫, 막아라!”

“장군을 보호하라!”

궐주군에게 있어 그건 분명 한 줄기 미친바람이었다. 이제 막 왕의 명령을 완수할 수 있겠다 싶을 때 광운이 뛰어들어 한바탕 휘저어 놓았으니 말이다.

“가자, 편월!”

광운으로선 싸울 이유가 없었다.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편월의 갑옷 깃을 당겨 안장 뒤에 앉히자마자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편월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웃음을 지었다. 해가 보이며 그 미소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이 까무룩 꺼져 버려 이미 닫힌 편월의 눈꺼풀 속에 맺힌 미소였다.

툭!

다시 한 방울 눈물이 감은 편월의 눈에서 흘러나와 질풍의 등에 떨어져, 땀에 젖은 고운 털에 번져 갔다.

2

뻐억-!

편월의 턱이 홱 돌아가며, 그대로 휙 날아가 처박혔다.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광운의 주먹은 회를 거듭할수록 그 강도를 더하는 것만 같았다.

아팠다. 뼛속까지 아픔이 파고들었지만, 편월은 다시 일어나 휘청거리며 광운 앞에 섰다.

뻐억-!

광운의 주먹이 다시 편월의 얼굴에 작렬했다. 단 한 점의 사정도 두지 않은 일권一拳이었다.

“그만 고정하시오, 광운 장군! 그러다 정말 죽이겠소.”

“말리지 마시오. 저놈 때문에 잃은 병력이 사백이 넘소. 그런데 어떻게 진정할 수 있단 말이오!”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어린아이요. 그리고 그만하면 알아들었을 거요!”

모용추는 한사코 광운을 말렸다. 정말이지 그냥 두면 편월을 때려죽일 것만 같아서였다.

“비켜!”

이 말은 광운이 한 게 아니었다. 어느새 다시 걸어온 편월이 모용추에게 한 말이었다.

모용추는 기가 막혀 입이 쩍 벌어졌다. 기껏 위해서 광운을 말리고 있는 자신에게 편월이 비키라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보면, 모용추는 편월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모용추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편월의 두 어깨를 쥐며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코고, 또 입술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이봐, 편월. 이제 너도 알아들었지. 응? 그럼 됐어. 됐으니까…….”

“비켜!”

“뭐?”

“광운이 맞아. 내가 잘못한 거야!”

이미 제 형체를 잃어버린 입술인지라 편월의 말은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뜻만은 제대로 전달되었다.

모용추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처럼 지독한 아이는 난생처음이었다.

턱!

주춤거리며 일어서는 모용추의 옆구리를 짚어 한편으론 밀어내고, 한편으론 의지하며 편월은 다시 광운 앞으로 걸어갔다.

“묻겠다. 전쟁은?”

다시 주먹을 날릴 줄 알았던 광운은, 그러나 이번엔 질문을 던졌다.

“싸워 이기는 것.”

“이기기 위해선?”

“철저하게 작전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결국엔?”

“살아남는다.”

“살아남으려면?”

“냉정해야 한다.”

뻐억-!

편월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광운의 주먹이 편월의 작은 얼굴에 작렬했다.

“그렇게 잘 아는 놈이 혼자 움직였나? 그래서 얻은 결과가 뭐야? 사백이 넘는 아군이 희생되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

“미, 미안…….”

“뭐? 네놈의 그 말 듣자고 사백의 목숨이 희생되었나?”

“…….”

“전쟁은 누구도 피해 가지 않는다. 전장에서는 누구의 목숨이든 공평하다는 얘기야! 어린아이라고 해서 피해 갈 줄 알아?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목숨은 아까워! 이번에 죽은 아군 사백 명도 마찬가지야! 너 하나의 돌발 행동으로 죽은 사백! 잊지 마라. 절대로!”

그 말을 끝으로 광운은 훌쩍 말에 올랐다.

“출발!”

아직도 서 있는 편월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명을 내렸다.

“자, 가자.”

“혼자 할 수 있어!”

안아서 말에 태워 주려는 모용추의 손을 편월은 뿌리쳤다. 그리고 용케도 주인을 찾아와 있는 애마 소질풍에 힘겹게 올라탔다.

‘왜 그렇게 심하게 했을까? 그렇게까진 하지 않아도 됐는데.’

선두를 달리는 광운은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어떤 말로 포장을 해도 전쟁은 살아 있는 생물이다. 언제 어떤 일이, 혹은 누가 어떤 행동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희생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오늘 편월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그 전에 한 번이라도 원하는 매복이나 유격전을 시도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허락지 않았기에 생긴 일인지라, 자신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소규모 전투는 성공적이었다. 비록 아군 사백을 잃었지만, 적들은 그 배 이상의 병력이 희생되었을 게 틀림없다. 그 수훈갑은 단연 편월이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 자신은 분명 심했다. 승전의 수훈갑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처럼 심하게 다뤘으니, 자칫 사기가 저하될 소지도 다분했다. 어차피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을 기억하기보다는, 살아가야만 될 앞날을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생각을 거듭하던 광운은 문득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자신이 그처럼 편월을 심하게 다뤘던 근본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 모습…….’

흡사 귀신이 된 것처럼 설치던 편월의 모습이 의식 깊숙한 곳에 남아 있었기에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대했던 것이다. 두 번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전장에서는 누군가 앞장서서 적장을 베거나 적진을 돌파해야 한다. 그게 전군의 사기로 이어져 승리로 이끌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편월의 경우는 다르다. 그건 전장에서의 싸움이 아니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한 게 아니라, 개인의 도살을 위한 싸움이었다.

그건 아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도, 편월 개인을 위해서도 결코 그래선 안 된다. 아니 전쟁의 승리 따위는 잊어버려도 좋다. 상당한 신분을 가진 것 같은 편월만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어쭙잖은 전투에서 떨굴 꽃송이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잘한 거다!’

비로소 광운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처럼 모질게 해 둬야 편월도 다음부터는 경거망동하지 않으리라.

“괜찮겠소?”

말달리는 편월을 어느 정도 살펴본 뒤에 따라붙은 모용추가 뒤쪽을 눈길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강한 아이요!”

“그렇더구려. 내 살다 살다 편월 같은 아이는 처음이오. 나라고 해도 광운 장군의 한주먹이면 그냥 혼절할 것 같은데.”

“서 선생은 어떻소?”

“기마술 능한 사람이 하나 붙어 있으니 염려 마시오. 그보다는 병사들 사이에서 조금씩 불만이 나오고 있소.”

“내가 편월을 다룬 것 때문에?”

“아무래도 이긴 싸움이니…….”

졌다면 몰라도, 이긴 싸움의 일등 공훈자를 그처럼 혹독하게 다뤄서 잡가군 사이에 불만이 생겼다며 모용추는 말을 흐렸다.

“그보다 휘주 땅은 얼추 지난 것 같은데… 비연관飛燕關은 멀었소?”

“지난번처럼 무단 돌파하실 거요?”

광운의 질문에 모용추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이제 남은 삼백으로는 어떤 관문도 무단 돌파는 무리인 것이다.

“싸울 일은 별로 없을 거요. 얼마나 남았소?”

비연관은 휘주와 중주의 경계에 있는 관문이다. 율천국으로 보자면 같은 나라 안에 있는 것이니 주둔하고 있는 병력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란 게 광운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한낮이다. 관문이 활짝 열려 있을 테니 그대로 달려서 돌파할 작정이었다.

“이제 한 십 리 정도… 아, 저기요!”

“창대에 옷을 걸어 기치처럼 보이게 해라! 그리고 방패를 앞세우고 그대로 관문을 지나간다. 응전은 불허한다!”

모용추의 말대로 관문의 모습이 아스라이 보이자, 광운은 곧바로 명을 내렸다.

명령은 즉각 전달되고, 시행되었다. 난세를 헤치고 살아남은 사나이들에게 이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관문이 점차 가까워질수록 그쪽의 경계 태세도 확연히 보였다.

예상대로 병사들은 많지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연락을 받고 대비를 갖췄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광운은 망설이지 않았다.

“전속 돌격!”

이제 옷으로 만든 가짜 기치에 적들이 얼마나 오래 속아 주느냐의 문제였다. 방책에 바짝 접근할 때까지만 속일 수 있다면 비연관처럼 작은 관문을 떨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돌연 비연관에서 일기의 기마 무사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성공이다!’

광운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지금 달려오는 자는 틀림없이 척후리라. 이쪽의 정체가 아직은 탄로 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뒤에서 불어 주는 바람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말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앞으로 날아 저기선 이쪽이 잘 보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과연 적의 척후는 무턱대고 먼지를 뚫고 접근해 왔다.

방패를 거두고 활을 꺼낸 광운은 그 척후를 쏘아 거꾸러뜨렸다.

이쪽의 정체를 알고 돌아가게 하는 것보다 아예 죽여 버리면, 같이 돌아간다는 인상을 비연관에 있는 자들에게 줄 수도 있었다.

“화공 준비!”

사실 광운의 이 명은 필요가 없었다. 벌써 삼기三騎가 한 조로 된 잡가군 열 개 조가 선두로 나서고 있었다. 좌우에 있는 두 사람이 방패로 가운데서 불화살을 쏘는 동료까지 보호한다는 식이었다.

발사하라는 명을 광운은 내리지 않았다. 거리가 반 리에 이르자 비연관에서 먼저 화살을 쏘았고, 대답이나 하는 것처럼 선두의 잡가군도 불화살을 쐈다.

뒤 바람은 지금도 유용했다. 앞에 기름 뭉치가 있어 상대적으로 무거운 잡가군의 불화살도 쉽사리 방책에 가 꽂혀, 대번에 불길이 화악 일었다.

“도끼!”

명을 내리며 광운은 눈으로 편월을 찾았다. 어느새 바로 곁에 붙어서 작은 방패를 앞세워 말만 달리고 있었다. 싸움엔 가담치 않을 모양이었다.

‘효과가 있는 걸까?’

풀이 죽은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렸지만, 이대로가 좋다고 광운은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뒤를 봐줄 수 없다면 일찌감치 조심성을 심어 두는 게 편월에게도 나을 터였다.

“뚫렸다. 돌입!”

“와아-!”

그사이 관문의 문이 깨진 모양이다. 불타는 방책에도 아랑곳없이 잡가군은 마구 쏟아져 들어갔다.

“가…….”

‘가자’고 편월에게 말하려다 광운은 급히 입을 닫았다. 대신 먼저 말을 달려 관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지금은 이래야 한다. 어설픈 위로를 한다는 건 조금 전 그처럼 심하게 다뤘던 편월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그때 한 사람의 병사, 한 명의 성인처럼 대했으니 지금도 그래야만 한다. 그게 이 전국 세상의 사나이들을 위한 진정한 배려다.

편월도 뒤처지지 않았다. 왼손엔 방패, 오른손에 대도를 단단히 쥐고 방책의 불길을 뚫고 말을 달렸다.

사실 지금 편월은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광운에게 맞아 두 눈이 퉁퉁 부어, 보이는 것이라곤 한껏 좁아진 세상뿐이었다.

이건 치명적이었다. 언제 어디서 적의 병기가 날아들지 모르는 전장에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채 싸운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편월은 퉁퉁 부은 입술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죽어도 절대 광운을 미워하지 않으리라고 편월은 생각했다.

‘사나이는 불평하는 게 아니라고 광운이 그랬어!’

앞이 보이지 않아도, 온몸이 으스러질 듯 아파도 편월은 조금도 억울하지 않았다. 어린 가슴에도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졌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었다.

“조심해라, 꼬마!”

누군가 곁에서 소리를 질렀다.

편월을 공격하려는 자를 대신 거꾸러뜨린 아군 중 한 명이었다.

‘우이 씨-!’

편월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로써 전장의 목숨 빚 하나가 생긴 셈이었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목숨 빚을 지는 거’라고 광운이 그랬는데!

편월은 두 눈을 확 부릅떴다. 그래 봐야 나아질 것도 없었다. 그래도 비로소 관문 안의 전경이 보였다. 매캐한 연기, 여느 전장이나 다를 바 없는 죽고 죽이는 지옥도, 그 속에서 놀라 껑충거리는 주인 잃은 말들의 울음소리…….

비로소 편월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는 숨죽어 있던 심장이 이제야 다시 세찬 박동을 시작한 것 같았다.

뛰어들고 싶었다. 저 연기 속에, 저 아수라장 속에 뛰어들어 마음껏 대도를 휘둘러 대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오늘 벌써 광운을 한 번 실망시켰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오늘 잘했어. 꼬마!”

“최고였다!”

깨닫고 보니 편월의 주변엔 서너 명의 잡가군이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그를 보호하려는 듯이 말이다.

“안 싸우고 뭐 해?”

편월은 소리를 질렀다. 부어터진 입술이라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잡가군은 알아들은 모양이다.

“싸움은 끝났어. 이제 정렬 중이야. 가자!”

그 잡가군의 말처럼 벌써 이 비연관 안의 적들은 섬멸된 뒤였다.

“보고! 사망 열하나, 부상 일곱!”

사람들이 집결한 곳으로 가니 광운은 전투 후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좋아. 부상자는 수습하고, 사망자는 안타깝지만 두고 간다. 여기서부턴 중주 땅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를 테니 정신 바짝 차리도록! 출발!”

광운의 말처럼 비연관을 지났으니 이젠 중주다. 율천국으로 보자면 서쪽 담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른 곳보다 경계가 삼엄한 건 물론, 병력도 훨씬 많을 게 분명하다.

특히 광운이 걱정하는 건 곳곳에 있을 매복이었다. 관문이야 빤한 곳에 빤한 적이 있는 것이니 그리 신경 쓰이지 않지만, 매복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우선 입장이 달라진다. 지금까지는 이쪽이 기습을 가했지만, 매복이라면 반대로 당하는 입장이 된다.

게다가 아군은 숫자도 적다. 이 작은 비연관 하나 떨구는 데도 벌써 열여덟의 사상자를 내고 있다. 통과하기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는 중주에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까?

‘과연 갈 수 있기나 한 걸까?’

문득 진득한 회의감이 광운의 가슴을 채웠다. 중주는 너른 땅이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달린다 해도 족히 사오 일은 걸린다. 삼백도 채 남지 않은 인원으로 과연 통과할 수 있을지…….

“자, 서두릅시다. 준비해 둔 음식이 이 오월 염천에 쉬어 빠지겠소!”

모용추가 한발 앞서 가며 광운을 채근했다.

불타는 비연각을 뒤로한 삼백의 잡가군은 그렇게 중주 땅으로 뛰어들었다.

* * *

무너진 비연각을 보면서도 소우기의 표정은 그리 심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이런 작은 관문으로 놈들을 막을 수 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소우기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 아침에 있었던 전투였다. 배 이상의 병력을 가졌으면서도 참패를 당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천오백에서 육백이 남았다!’

이건 두고두고 소우기의 경력에 먹칠을 할 일이었다.

으드득!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소우기가 소리 나게 어금니를 갈았다.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라! 놈들을 막지 못하면 참수로써 죄를 묻겠다고!”

“존명!”

소우기의 명에 부하 장령 한 명이 즉각 복명하고 달려갔다.

‘중주에선 반드시 잡는다!’

중주는 오랫동안 소우기가 가겸후를 대신해 다스렸던 땅이다.

여기서까지 놈들을 놓친다면 무장으로서의 생명은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이백 리까지 가진 못했다.’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생각을 깨우는 부하의 보고에 소우기는 번쩍 고개를 쳐들고 전방을 쏘아보았다. 익숙한 중주의 하늘과 땅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었다.

문득 소우기는 코를 씰룩거렸다. 견디기 힘든 악취가 풍겼기 때문이다.

깨닫고 보니 비연각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였고, 그 속에서 시체가 타는 노린내가 고약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부터 놈들을 잡는다! 출발!”

광운 일행이 출발한 지 정확하게 두 시진 후, 소우기가 이끄는 추적대도 비연각의 불길을 등으로 받으며 중주로 접어들었다.

3

광운이 인솔하는 파양주 사자단은 말을 달리면서 먹고 마셨다. 그야말로 불면불휴不眠不休의 질주였다.

중주에 접어든 지 벌써 이틀째, 그동안 부상자 중 세 명이 강행군을 이기지 못해 죽었고, 거품을 토하며 쓰러진 말만 해도 백여 마리에 이르렀다. 송용조의 수배가 없었다면 진즉에 적들에게 걸려 모두 전멸당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다행이라면 그동안 단 한 번도 검문이나 매복에 걸린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모용추가 길을 잘 잡은 덕이었고, 그 바람에 예상보다 하루 이상 일찍 중주를 벗어나게 될 것 같았다.

모두들 벌겋게 충혈된 눈이었고, 얼굴은 가면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지만, 그중에서 광운의 피로는 남달랐다.

사실 광운은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다. 사자단, 특히 서수를 무사히 귀환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인해 잠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은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더러 말을 달리면서도 잠깐씩 눈을 붙인다. 그 정도는 가장 어린 편월도 할 줄 안다.

‘아주 잠깐만이라도…….’

자신도 눈을 좀 붙였으면 좋겠다 싶은 유혹이 끊임없이 광운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광운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 이틀간 단 한 번의 공격도 없었다는 점이 더더욱 그의 신경을 저릿하게 당겼다.

‘언제 시작될까?’

이대로 중주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는 건 꿈에 불과하다. 어떤 형태로든 놈들은 공격을 감행해 올 게 분명하다.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광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흐릿해지는 게 곧 새벽이 될 것 같았다.

‘사흘째! 늦어도 내일이면…….’

생각하다가 광운은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혹시 놈들은 이쪽이 방심하길 기다리는 게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중주에 들어오자마자 격렬한 공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다 같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벌써 이틀, 조금 있으면 사흘째 날이 밝을 텐데도 아무 공격이 없으니 차라리 맥이 풀린 감도 없지 않다.

누구를 지목할 것도 없이 당장 광운 자신만 해도 그렇다. 잠의 유혹에 시달린다는 것 자체가 순간순간 방심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광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지금 지나가고 있는 곳이 매복의 적지가 아닌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사방이 어둡다. 비록 동녘이 희뿌예졌다지만 새벽은 아직 이르다.

‘잠깐 설까?’

지금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가면 진짜 적의 매복이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의 지형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았다.

광운은 생각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정지!”

“정지!”

바로 뒤를 따르던 자가 곧장 뒤로 전달했지만, 명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와두두두둑-!

철벅, 철퍼덕!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새벽을 깨우며 수십 기가 그대로 광운을 지나쳐 갔고, 더러는 어디 진창에 빠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확실히 모두들 방심하고 있었다는 게 여실한 모습이었다.

그 와중에 여기저기서 호통 소리가 들렸다. 각기 소부대 하나씩을 맡고 있는 자들이 자기 부하들을 질타하는 소리였다.

그 덕에 대열은 서서히 정비되었다.

“무슨 일이오?”

모용추가 광운 곁으로 오며 물었다. 찐득찐득한 피로감이 가득한 가운데서도,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긴장이 묻어나는 음색이었다.

“예감이 이상해서 그렇소.”

대답을 하면서 광운은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보다는 사방이 밝아져 간신히 주변의 지형을 식별할 수 있었다.

탁 트인 평야인 것 같았다. 마차 열 대는 족히 지나다닐 것 같은 드넓은 대로 양쪽은 논이었고, 아직은 어둠에 묻혀 있는 먼 곳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일단 논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나오도록 하시오!”

광운은 조금 강한 어조로 모용추에게 말했다. 이제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한 모는 농부들의 피땀이다. 망치게 둘 순 없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긴 아무래도 초우평炒雩坪인 거 같구려. 여기서 이백 리만 가면 초우산이 있고, 그걸 넘어 진강도陣畺道를 통해…….”

“알고 있소!”

광운은 다소 퉁명스레 모용추의 말을 잘랐다. 순전히 피로 탓이었다.

진강도란 바로 자신들이 파양주를 출발해 궐주로 갈 때 이용했던 도로다. 폭이 지금 서 있는 곳보다 적어도 서너 배는 너른, 가겸후가 서쪽 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소문까지 떠도는 병참로兵站路라고 할 만한 길이었다.

‘초우산…….’

아무리 바보라도 사방이 온통 논뿐인 이런 곳에 매복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금 들었던 초우산에 매복이 있을 공산이 컸다. 이백 리가 남았다니 가다 보면 날이 샐 터이고, 그렇게 되면 다소나마 유리해진다. 적어도 적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당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좋소. 출발합시다! 모두들 정신 단단히 차리고, 무장도 다시 한 번 점검하라고 하시오! 부상자들도 따로 챙기고!”

“알겠소. 자, 출발!”

“출발!”

명은 전달되었고, 삼백 기는 다시금 지축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여름의 아침은 빠르다.

출발하자마자 날이 밝는가 싶더니, 초우산에 접어들 즈음엔 벌써 두어 뺨이나 떠올라 투구 쓴 이마에 땀이 흥건히 고이게 만들었다.

“정지!”

초우산 초입에 접어들자마자 광운은 행렬을 세웠다.

“편월!”

“응?”

“유군으로 유격전을 전개하고 싶다고 했지? 기회를 주겠다! 편월을 따를 사람?”

이처럼 갑작스러운 광운의 말에 편월은 물론 잡가군 전체가 어리둥절해졌다. 정말이지 파격적인 얘기였다.

그러나 이내 잡가군 중 오십여 기가 편월을 따를 뜻을 비쳤다.

퉁퉁 부어 실을 붙여 놓은 것 같은 편월의 눈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새어 나왔다. 광운의 말이나 자신을 따르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이목구비는 구분할 수 없지만, 환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어때? 오십 기면 괜찮지? 내가 정면으로 치고 올라가겠다. 넌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적의 매복을 그 배후에서 공격하는 거다! 성공할 수 있겠지?”

편월의 어깨가 잔잔하게 떨렸다. 비록 오십 기에 불과하지만, 전쟁을 안 이후 처음으로 지휘를 하게 된 감격이 여실히 묻어 나왔다.

그러나 편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

“왜? 겁먹었나?”

“겁은 안 나! 하지만 전쟁은 장난이 아냐. 유군의 지휘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

편월의 대답에 잡가군은 또다시 술렁거렸다. 그가 얼마나 지휘를 원하는지 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어린 꼬마의 입에서 설마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아무도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광운은 웃었다. 전쟁이나 싸움에 임하면 편월이 얼마나 성숙해지는지 사람들은 모른다. 자기 자신도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예상치 못했지만, 마음만은 흡족했다.

“좋아. 그럼 유군의 지휘는 내가 하겠다! 넌 다른 사람을 이끌고 그대로 초우산을 통과한다. 그건 할 수 있겠지?”

“응!”

이번에야말로 편월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쉬워 지휘를 한다고 하지, 유군의 지휘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변화무쌍한 전장의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되기 때문이다.

“좋아. 자, 출발!”

“출발!”

이번에 내려진 광운의 명은 편월이 받았다. 전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따르게 될 이백오십 기에 내린, 지휘자로서의 엄연한 명이었다.

그다음은 또다시 폭염을 잊은 질주였다.

달리면서 모용추는 웃었다. 광운이 편월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고개를 돌린 모용추는 옆에서 달리는 편월을 바라보았다. 앙증맞은 무장을 한 모습이 그대로 꼭 깨물어 주고 싶었다.

‘내가 죽더라도 이 아이만은…….’

반드시 살리겠다는 결심이 까닭 없이 모용추의 가슴에 불타올랐다.

첫 공격은 통나무였다. 편월이 이끄는 본대(?)가 초우산 정상 칠 부 능선까지 올랐을 때, 위에서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마구 굴러 떨어졌다.

“달려! 그대로 달려!”

선두에 선 편월은 연방 명을 내렸고, 그 옆의 모용추는 충실하게 그걸 뒤따르는 잡가군에게 전했다.

그렇게 본대는 ‘밀어, 밀어!’ 하는 식으로 초우산 정상을 향해 꾸준히 말을 몰았다.

다음은 화살이었다. 공성 시에 사용하는 기계장치를 이용해 발사하는, 창만 한 굵기의 화살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문 편월은 연방 ‘달려’를 연발했고, 그 어린 투지에 감복한 잡가군 역시 서로 화살 밥이 되려고 경쟁하는 것처럼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절반의 사상자를 초우산에 남기고 정상에 올랐을 때, 거기엔 광운이 이끄는 유군이 승리의 함성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함성은 이내 잦아들었다. 여기서의 희생이 너무 컸던 것이다.

그에 비해 적의 매복이란 건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광운의 유군이 섬멸한 적들의 숫자는 불과 이백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른 곳에 또 있다! 어디일까?’

아니, 어디가 아니다. 지금부터 달리게 될 진강도 전체가 적의 매복지라고 봐야만 한다.

힘을 담은 눈으로 광운은 생존자들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앞으로 가야 할 길의 험함에 대한 각오를 다진 표정이었다.

“서 선생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편월과 서수만은 살려야만 될 광운이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 여기 있소. 괜찮으니 염려 마시오.”

어디서 얻어 썼는지 투구 하나 달랑 덮어쓴 서수가 잡가군 사이에서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좋아. 모두 잘 들어라! 여기서 연천강까지의 진강도 칠백 리는 죽음의 길이라고 생각하라! 누구도 타인의 목숨은 챙겨 주지 않는다. 제 몫은 스스로 챙겨 달고 가도록 하자! 모두 알겠나?”

“와아-!”

광운의 말에 잡가군은 초우산이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대답했다.

“자, 투구를 똑바로 쓰시고…….”

일부러 서수에게 다가간 광운은 그의 투구 끈을 단단히 고쳐 매 주었다.

“자, 다시 출발이다! 죽음의 길을 달려 보자!”

“와아-!”

이제 백오십 기로 줄어든 파양주 사자단은 죽은 자를 위한 공양으로 우렁찬 함성을 남겨 두고 초우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길은 그야말로 지옥의 길이었다.

초우산에서 내려와 백 리쯤 달렸을 때부터 시작된 중주군의 공격은 마치 악마의 발톱처럼 광운과 잡가군을 괴롭혔다. 아니, 괴롭혔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면 광운은 차라리 고맙다는 말이라도 했을 터였다.

적들로 도배가 된 것 같은 길을 달린다는 건 그처럼 처절한 희생을 강요했다.

어쨌든 그들이 찢어진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연천강이 빤히 보이는 곳에 도착한 건 밤이 깊어진 뒤였다.

“정지!”

명을 내리는 광운의 목소리도 강한 쇳소리를 내며 갈라져 나왔다. 투구며 갑옷이며 심지어 얼굴까지 피 칠갑된 모습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생존자는?”

“총 열두 명.”

모용추의 대답이었다.

“서 선생은?”

“나, 나도 여, 여기에…….”

이건 서수가 직접 대답한 것이었다.

“편월?”

“난 괜찮아!”

의외로 활기에 찬 편월의 목소리였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

‘과연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명을 내려 놓고, 스스로 회의감을 가지는 광운이었다. 그만큼 모두가 지쳤고, 온통 부상투성이였다.

“연천강은 어떻게, 어떻게 넘을 생각이시오? 허주까지만 가면 아마 송 대인이 기다리고 계실 게요.”

모용추가 말하는 그 연천강이, 광운에겐 또 하나의 지옥처럼 여겨졌다.

‘칠백이었다!’

자신의 어깨 위에 지워졌던 목숨의 개수를 담보로 해서 넘어야만 할 지옥 말이다.

“광운 장군께 생각이 없다면 이 몸의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소?”

“말해 보시오.”

모용추의 말에 광운은 약간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혀를 놀리는 것도, 입술을 움직이는 것도 도무지 귀찮고 힘들었다.

“사실 이 연천강엔 우리 상단만이 아는 비밀 통로가 있소.”

“뭐?”

그 말에 반쯤 감기려던 광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비밀 통로가 있다면 더 이상 희생자를 내지 않고 허주까지 갈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반가운 말은 없었다.

“상단에서는 더러 금품禁品을 취급할 때도 있소. 그때를 대비해 각 나라의 경계마다, 혹은 중요한 관문마다 비밀 통로를 확보해 두고 있소이다.”

“에이익!”

모용추의 말이 끝나자마자 광운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등운관에서 죽은 아군은? 초우산에서 죽은 아군은?”

“이, 이거 노, 놓으시오! 이, 있다면 마, 말했을 것이오. 크읏!”

목이 졸린 모용추는 간신히 내뱉었다. 요컨대 지금까지 돌파했던 관문에는 비밀 통로가 없다는 얘기였다.

하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금품이란 건 각 나라, 혹은 각 주에서 반출이나 반입을 금한 물품을 말한다. 율천국 하나로 구획 지어진 곳에 있는 관문에 굳이 비밀 통로를 만들 이유는 없었을 터였다.

광운은 거칠게 쥐고 있던 모용추의 멱살을 풀었다.

“안내하시오.”

“무, 문제가 있소.”

“문제?”

“말은 갈 수가 없소. 말은 버려야 하오!”

“뭐라고?”

광운은 다시 모용추를 쏘아보았다. 질풍이 어떤 말인가. 벌써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같이 전장을 누볐던 말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버리라니?

그러나 바닥에 널브러져 헐떡이고 있는 열둘의 생명을 생각하면 자기의 욕심만 차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쏘아보던 광운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걸 본 모용추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럼 출발합시다. 송 대인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소.”

“잠깐!”

광운은 재차 모용추를 제지했다.

“이별할 시간을 주시오!”

그 말에 모용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가 명장보다는 명마가 우선이다.

명장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명마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극소수의 말들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장은 자신의 애마를 목숨만큼이나 아낀다.

광운은 천천히 질풍 앞에 가 섰다. 편월도 소질풍 앞에 가 섰다.

푸르륵-!

동물의 발달된 감각으로 벌써 이별을 알아차린 것일까. 질풍과 소질풍의 그 긴 얼굴은 벌써 눈물에 젖어 있었다.

“고생 많았다, 질풍!”

“고생 많았다, 소질풍!”

광운과 똑같은 말을 한 편월은 아래로 길게 목을 늘어뜨린 소질풍을 껴안았다.

“됐다. 물러서라, 편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차디찬 한광이 달빛을 튕겨 냈다.

쿠웅!

목이 잘린 질풍이 먼저 무너졌고, 다시 빛이 번쩍이자 소질풍도 뒤를 이었다.

두 마리 말을 벤 광운은 힐끗 편월의 눈치를 살폈다. 하늘을 우러러 달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 얼굴에 별다른 감정은 떠올라 있지 않았다.

‘잘 견디는군.’

“자, 갑시다. 달이 있을 때 가는 게 좋을 거요.”

광운이 편월을 대견해할 때 모용추가 일행을 재촉했고, 사람들은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정말이지,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용추는 성큼성큼 걸어갔고, 거기엔 어김없이 길이 나왔다.

때로는 절벽도 만났다. 잔도棧道를 걸을 때도 있었고, 외가닥 칡넝쿨로 연결된 절벽과 절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기도 했다.

‘이래서 말은 올 수 없다고 했군.’

광운이 회상 속에서 질풍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다 왔소!’라는 모용추의 말이 마치 꿈속에서 듣는 목소리처럼 여겨졌을 때, 거기엔 장막을 친 채 기다리고 있는 송용조의 환한 웃음이 있었다.

“광운 장군의 무사 귀환을 경하드리오.”

송용조의 인사를 듣는 광운의 무릎은 저절로 접혀 바닥을 찧고 있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살아서 돌아왔다는 안도감으로 그들은 하나같이 시체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버렸다.

유독 편월만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그 길에서 죽은 자들을 회생하는 듯이, 혹은 지금까지의 고생을 잊지 않으려는 듯이…….

* * *

그날, 광운 일행이 무사히 허주로 탈출한 바로 그날 율천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온 나라를 뒤져 파양주 사자단을 찾아라!

국경의 어느 관문으로도 파양주의 사자단이 지나간 흔적이 없기에, 아직 율천국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해 내려진 명이었다.

이후 율천국의 군관민은 하나가 되어 샅샅이 수색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수색 한 달째, 추적대의 지휘관 소우기는 가겸후로부터 한 자루 비수를 하사받았다.

전통적인 자결의 명이었다.

그렇게 영창원년은 무르익었고, 다시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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