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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흔적出生痕迹 2 (14/66)

출생흔적出生痕迹 2

1

순간적으로 광운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가겸후가 직접 나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파양주에서 온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의 의도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성문을 순시한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명분일 뿐이다. 속내는 어떻게든 파양주에서 온 사자들을 먼저 만나려는 것일 터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겸후를 먼저 만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저편이야 성문 순시 중에 우연히 만나 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쪽은 꼼짝없이 인사를 해야만 한다. 힘의 차이이자 신분의 차이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자가 과연 진짜 율천국왕일까요?”

여태 마차에서 내리지 않던 서수까지 광운의 옆에 붙어 서며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그 역시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예? 뭐라고 하셨소?”

그제야 광운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오히려 되물었다. 그리고 서수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내뱉었다.

“설마 가짜는 아닐 것이오.”

확신을 가지긴 했지만, 광운도 지금 나타난 자가 가짜 가겸후이길 바랐다. 난세에선 자신과 닮은 자를 내세우기도 하니 말이다.

하긴, 그렇더라도 이 상황이 달라질 건 별반 없다. 자신들이 먼저 공격했고, 그 와중에 몇몇 백성들이 희생된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란 얘기다.

“왕이 나왔으면 잘됐네. 저놈만 쳐 죽이면 끝나잖아!”

편월이 또다시 나섰다. 상황이 불리할 땐 적의 장수를 노리라는 광운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려는 기세였다.

“지금은 아니다, 편월.”

“왜 아냐? 당장 달려가서 목을 잘라 올게. 약간만 도와…….”

“잊었어? 넌 어엿한 파양주의 진상사야! 그러니 전장에서처럼 함부로 행동해선 안 돼!”

광운은 엄격한 어조로 편월을 억눌렀다. 일부러 일개 병사가 아닌 공식적인 임무가 있다는 것도 깨우쳐 주었다.

그게 효과를 봤다. 말처럼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 같던 편월이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숨결은 마치 성질난 황소처럼 씩씩거렸지만 말이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싸움이라면 몰라도 이런 경우의 일은 잘 알지 못하는 광운이다. 서수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서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역시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과는 틀어져 버린 터라 당장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뭘 어째? 놈들이 하는 꼴을 봐서 싸우든 달아나든 하면 되지!”

씩씩거리고 있던 편월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가겸후의 목을 따러 가지 못한 불만을 그렇게 토로한 것이다.

“허허허!”

광운은 웃고 말았다. 편월의 말에 기가 차기도 했고, 또 그 말이 맞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간단한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들의 사고가 너무 딱딱해져 버렸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있을 때 가겸후가 있던 곳에서 일기의 장수가 달려와 고함을 질렀다. 가겸후의 지시를 받고 온 전령임이 분명했다.

“율천국왕 전하의 하명이시다. 어디서 온 자들인지 정체를 밝혀라!”

‘빌어먹을!’

그 말을 들었을 때 광운은 혀를 깨물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누구며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묻는다는 건, 우선 그만큼 사람을 무시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함으로써 자기의 체면은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이쪽의 인사를 받겠다는 수작이었다.

“다시 묻노라! 어디서 온 자들인가?”

“파양주 진남후의 사자인 서수라고 하오!”

“파양주의 사자가 이 율천국엔 무슨 용무인가?”

“율천국엔 용무가 없소이다. 우리는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왔소!”

“누구의 허락을 받고 황제 폐하를 알현하겠다는 건가? 그 허락한 자의 이름을 대라!”

“허허허!”

전령 장수와 문답을 하던 서수는 돌연 소리 높여 웃으며 귀를 후볐다.

“무엄한 자로다! 이건 율천국왕 전하의 하문이시다. 어찌 대답은 하지 않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가? 어서 대답하렷다! 경우에 따라선 그 목을 베어 죄를 묻겠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 태어나서 이렇게 웃기는 얘기는 처음 들었소!”

“뭐라고? 에잇!”

더 이상 참지 못한 전령 장수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쓱 뽑아 들었다.

그대로 보고 있을 광운이 아니었다.

“칼로 하는 문답이라면 이 몸이 받겠노라!”

한소리 외침과 동시에, 전령 장수가 탄 말의 콧잔등에 역시 칼을 바짝 디밀었다.

“참으시오, 부사! 이래서는 사자로 온 우리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되오!”

“정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명에 따르긴 하겠소. 하지만…….”

말꼬리를 흐리며 광운은 전령 장수를 노려보았다. 마지못해 물러서긴 하지만, 언제든 다시 나설 수 있다는 뜻을 비친 것이다.

그러나 속으론 웃고 있었다. 서수가 웃어서 전령 장수를 자극한 것도, 자신을 말린 의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쪽도 만만치 않은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상대에게 보이고자 함이었다.

“좋다! 들어 보자. 어째서 그렇게 웃었던 겐가?”

“생각해 보시오. 신하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데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이오? 그럼 내가 묻겠소. 율천국에선 왕을 뵐 때 대체 누구를 찾아가서 허락을 받소? 그 허락을 해 주는 사람을 뵙고 싶구려.”

“끄음!”

전령 장수의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괴상한 소음이 치밀었다. 당장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그러니 우리를 이대로 황제 폐하께 보내 주시오. 그러지 않으면 아까와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오!”

내친김에 서수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슬쩍 오늘 벌어졌던 싸움의 원인이 율천국에 있다고 내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서수를 보며 광운은 혀를 내둘렀다. 과연 그가 노숙을 겁내고, 싸움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갈!”

돌연 전령 장수가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광운이 다시 앞으로 쓱 나섰다. 전령 장수가 덤빌 것에 대한 대비였다.

하지만 그건 광운의 기우였다. 전령 장수는 칼을 휘두르기 위해 고함을 지른 게 아니라, 스스로 용기를 돋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네놈은 아직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서 온 누구냐?”

“이것도 이상한 일이구려.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 많은 병사들을 창일성 안까지 안내해 왔단 말이오? 만약 그렇다면 중주를 책임지고 있는 소우기란 자의 목을 베시오. 그자야말로 이 율천국의 배신자…….”

청산유수로 흐르던 서수의 말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광운이 그의 소매를 슬쩍 끌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이 아니었다. 가겸후가 타고 있는 수레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걸 본 까닭에서였다.

광운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겸후가 움직인다면 그를 호위하는 군사들까지 움직일 건 뻔하고, 방향이 이쪽이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이끌고 온 잡가군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가겸후의 담대함도 광운을 질리게 했다. 저만한 신분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적군이나 다름없는 곳을 향해 오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 군사의 호위를 받는다지만, 난전이 되고 보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예를 갖춰라! 국왕 전하의 행차시다!”

전령 장수는 재빨리 말에서 내려 정중한 군례를 갖추며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가겸후가 없는 자리라면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겠지만, 그가 면전에 서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번 사자들의 신분을 엄밀히 따져 보면 진남후 마용승의 신하다.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신하의 신하란 얘기다.

그에 비해 가겸후는 황제의 신하로서, 같은 신하인 진남후보다 오히려 한 직급 높다. 신하의 신하인 사자들이 예를 갖추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것도 보통의 예를 갖춰서 될 일이 아니었다. 신하라면 이런 장소에선 선 채 예를 갖춰도 무방하지만, 그 이하라면 의당 바닥에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문제는 그렇게 예를 갖출 것 같았으면 오늘 이 창일성에 와서 한 일들의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잘해야 졸장부들의 객기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 바람에 희생당한 백성들의 애꿎은 목숨들만 서럽다.

광운의 뒤에 포진해 있던 잡가군이 술렁거렸다. 그들 역시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는 까닭에서였다.

“선 채로 그냥 예를 갖추시오!”

나직하게 서수에게 속삭인 광운은 가장 먼저 깎듯이 군례를 갖췄다. 잡가군에게 자신을 따라 하라는 의미에서였다.

광운의 의도는 기대 이상의 효과로 나타났다.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참이라 지시하자마자 그대로 따랐다.

“무엄한 놈들!”

당연히 질타가 뒤따랐다. 수레 곁에 바짝 붙어 움직이던 육우맹의 입에서 터진 것이었다.

“어째서 무릎을 꿇지 않는가? 예의를 모르는가?”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광운은 번쩍 고개를 들어 육우맹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자고로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했소. 우리는 진남후의 대리로 왔으니 그분과 같은 신분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는다면 지나친 예의, 오히려 국왕 전하를 욕보이는 짓임을 모르시겠소?”

“뭐라고? 감히 국왕 전하 면전에서도 그 요망한 주둥이를 놀리느냐?”

“그만두시오, 육 장군!”

계속될 듯한 육우맹의 질타를, 수레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제지했다. 당연히 가겸후의 음성이리라.

“그대들이 파양주에서 온 사자들인가?”

“그, 그렇소이다.”

가겸후의 질문에 대한 답은 정사인 서수가 했다.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누니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진남후는 잘 계신가?”

“황제 폐하의 성은에 힘입어 무사히 지내고 계십니다.”

“그런가? 황제… 폐하의 성은이란 말이지? 그처럼 성은에 감읍하고 있는 진남후가 어찌 국혼에는 불참했는가?”

“아시다시피 지금 파양주는 전쟁 중인지라 진남후께선 도저히 몸을 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저희들을 보내 황제 폐하께 사죄를 청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사죄사謝罪使란 말이군. 그런데 사죄사가 어인 연고로 저처럼 군사들을 거느리고 왔는고?”

“아직은 각처에서 난리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사죄사라고는 하나 소생들은 황제 폐하께 가는 소중한 사자의 몸,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병력이 필요했습니다.”

어디까지나 황제를 내세우는 서수의 말에 가겸후는 잠시 말이 막힌 모양이었다. 수레 안은 조용한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침묵은 잠시뿐이었고, 이내 가겸후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대들은 이 창일성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하문하실 것도 없는 말입니다. 이 하늘 아래 누구를 잡고 하문하셔도 똑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바로 황제 폐하이십니다.”

“무어라?”

가겸후의 음성이 격렬하게 높아졌다. 왕이기에 앞서 무장이고, 그보다는 누구보다 격렬한 성미를 지닌 사나이였기에 보인 반응이었다.

“이 창일성은 물론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건 천자이신 황제 폐하의 것입니다. 아무리 여흥이라도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하시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 이노옴!”

수레 밖에서 듣고 있던 육우맹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칼자루에 손을 댔다.

“영감탱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편월이 빼액 소리를 지르며 구르다시피 해서 육우맹 앞에 딱 버티고 섰다.

이제 당황한 것은 서수였다. 어쨌건 지금은 율천국왕인 가겸후와 파양주의 정사인 자신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제삼자가 나선다는 건 이만저만 큰 결례가 아니었다.

물론 먼저 시작한 건 육우맹이지만, 어쨌든 그는 율천국의 오기총감장이다. 창일성 안에서 어떤 짓을 하든 밖으로 새어 나갈 염려가 없고, 또 그를 나무라거나 처벌할 수 있는 사람은 가겸후뿐이다. 편월이 이렇게 나선 건 이쪽의 커다란 흠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몇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편월이 나섬으로 인해 양쪽의 병사들 사이에서 또다시 긴장감과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삼가라, 편월!”

그 점을 광운도 놓치지 않고 편월을 제지했다.

“호오, 맹랑한 꼬마로군. 이름이 뭔고?”

갑옷 차림인 편월이 가겸후에게도 이색적으로 보였나 보다. 지그시 노기를 억누른 음성으로 편월에게 물었다.

“파양주의 진상사!”

편월의 대답은 짤막했다. 이름이 아니라 이번에 맡은 직책을 대는 걸 보면 나름대로는 꽤나 애착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예의에 벗어난 행동임에 분명하다. 가겸후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번 사자단 전체가 불경스러운 무리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 가겸후는 그리 속이 좁은 위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찬 편월의 언행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 사자단의 모든 사내들보다 저 꼬마가 더 낫구나. 언젠가 저 아이가 네놈들의 머리 위에 올라설 것이다! 가자!”

그 말과 동시에 가겸후의 그 거창한 행렬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육우맹을 비롯한 소우기는 매서운 눈길로 째려보는 걸 잊지 않았지만.

“편월!”

가겸후의 일행이 지나치자마자 광운은 매서운 어조로 편월을 불렀다. 조금 전의 행동을 질책하는 음색이었다.

“흥, 저따위가 무슨 왕이야? 작다, 작아!”

“뭐라고?”

부르는 소리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하는 편월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광운이 물었다.

“맞잖아! 저게 무슨 왕의 행차야? 파양주의 마 성주만 해도 저보다는 훨씬 좋은 수레에, 훨씬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닐 수 있겠다, 뭐!”

점입가경인 편월의 말에 광운은 잠시 말을 잊었다.

“두고 봐. 내가 광운만큼 자라면 저보다 훨씬 크고 좋은 수레 타고, 더 좋은 옷 입고, 더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닐 테니!”

“하하하-!”

여전히 멍하니 편월의 눈만 들여다보는 광운 대신 서수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서 선생은 뭐가 그리 우습소?”

“율천국왕의 말이 맞다 싶어서 웃었소이다. 언젠가는 이 아이가 우리들 머리 위에 올라설 거라던 말… 하하하-!”

“아, 그 말…….”

“그렇소이다. 적어도 사내로 태어났으면 저 정도 포부는 가져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런데 서 선생이 보시기엔 이 아이가 무사히 장성할 수 있을 것 같소?”

광운은 이 점이 걱정이었다. 벌써부터 저렇게 설치는데, 좀 더 자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였다.

“그거야 천명! 천명은 하늘에다 묻는 게 좋을 거외다. 하지만 뒷날 이 아이가 천하를 향해 눈길을 돌려 발을 내디디면 틀림없이 커다란 바람이 불 것이외다!”

서수의 이 말에 광운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스승인 구양파에게서도 이 비슷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광운의 우려를 더욱 짙게 했다. 어쨌든 지금은 단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난세, 채 피우기도 전에 흩어져 버린 꽃잎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편월도 그중 하나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편월은 불과 여섯의 나이로 벌써 몇 차례의 전쟁을 경험했고, 조금 전에 보여 줬듯이 싸움을 재미로 알고 있다. 꽃을 피워 향기를 풍기기도 전에, 피 냄새에 찌들어 버린 것이다. 피가 피를 부르는 난세를 살기에 무척이나 힘겨울 것이란 얘기다.

“어쨌든 이제 곧바로 황제 폐하를 알현해도 될 것 같구려. 이것도 다 이 아이 덕인 거 같지만.”

“아-!”

멍하니 생각에만 잠겨 있던 광운은 서수의 말에 따라 다시 잡가군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자리엔 광운의 근심이 흥건히 남아 고여 있었다. 편월이 오늘 가겸후의 눈에 찍힌(?)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권력자는 자신의 눈에 든 사람은 결코 잊지 않는다.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싹이 보이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의식하며 항시 경계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 편월과 가겸후는 너무 일찍 만난 건지도 모른다.

특히 편월의 입장에서 그랬다.

2

계속해서 편월은 투덜거렸다. 입고 있는 예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이게 무슨 옷이야? 헐렁하니 크기만 하고…….”

말을 하던 편월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필요 이상으로 긴 예복의 바지 자락을 밟은 탓이었다.

“시끄러워. 황제 폐하를 알현할 땐 다 이렇게 입는 거야!”

“그렇잖아. 이런 옷 입고 있다가는 칼을 뽑기는커녕 화살 한 대도 쏘기 힘들겠다, 뭐!”

그 말 그대로였다. 원래 예복이란 게 소매가 넓고 길어 손을 완전히 덮고, 바짓가랑이도 치마처럼 풍성하고 길다. 그러니 싸움으로 어린 뼈가 여물어 가는 편월이 불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게 법도라는 거다. 이제부턴 편월도 그 법도를 하나씩 알아 가야지? 그러니 잠자코 가르쳐 준 예의나 잘 기억했다가 그대로 해.”

말해 놓고 광운은 피식 웃고 말았다. 솔직히 자신도 법도에 대해선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쉬잇-!”

앞서 가던 서수가 뒤를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지금은 황실 공경 중 한 명의 안내를 받으며 황제에게 가는 중이었다. 시끄럽게 떠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 서수는 자세까지 공경처럼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구부정하게 걷고 있었다.

편월은 그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그보다는 옷이 너무 불편해서 웃지 않고 있을 따름이었다.

복도는 왼쪽으로 구부러지고, 거기 있는 거대한 기둥 앞에서 일행은 잠시 기다리게 되었다.

“폐하! 파양주 진남후의 사자들이 입시했사옵니다-!”

안내해 왔던 공경이 먼저 들어가 길게 늘어지는 말투로 황제에게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땐 편월도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리며 그 말투를 입술로만 따라 했다. 아마 서수의 제지가 없었다면 소리 내어 웃었을지도 몰랐다.

“오, 진남후의 사자가? 들라 이르라!”

허락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어리다 싶어 광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어쩌랴? 어리든 늙었든 잠시 후에 만나야 하는 황제는 이 땅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비록 난세로 인해 그 존재감이 희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앞에선 부복해야만 한다.

“진남후의 사자는 들어와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시오!”

부르는 소리에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공손한 태도로 대전大殿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편월만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얼굴을 든 모습이었다.

그걸 눈치 챈 광운이 슬쩍 편월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지금까지 누누이 강조했던,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하라는 의미였다.

그걸 순순히 들을 편월이 아니었다. 그대로 꼿꼿이 얼굴을 든 채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이상한 건 황제나 늘어선 공경들의 태도였다. 의당 한마디 호통이라도 나올 법한데 누구도 편월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편월이 너무 어려서거나 아니면 오랜 유랑 생활로 인해 지방 패주들의 눈치를 보는 데 익숙해진 탓이리.’

이렇게 생각되자 광운의 마음은 조금 편해졌다.

그래도 절만은 시켜야 한다. 그것도 만세를 외치며 아홉 번이나 땅에 꿇어 엎드려야만 한다. 혹여라도 편월이 군례를 취한다면 그야말로 자신들뿐 아니라 마용승의 얼굴에까지 먹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자들은 예를 갖추시오!”

다시 공경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이 자리에서 절을 하라는 의미였다.

아직은 황제와의 거리가 상당히 멀다. 게다가 높직하게 마련된 단상에 놓인 용상에 앉아 있는지라 고개를 들고 있더라도 얼굴조차 정확하게 보기 힘들었다.

어쨌든 세 사람은 절을 올렸다. 이번엔 편월도 했는데, 광운이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눌렀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다섯 번째 절을 올리려 할 때, 편월이 차고 있던 목걸이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맞지 않는 예복을 입은 탓이었다.

“아!”

그 순간 공경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토해졌다.

비록 낮았지만, 광운의 어깨는 저절로 움찔거렸다. 편월에게 억지로 절을 시키고 있기에, 공기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로 달리 변화는 없었고, 세 사람은 절을 마친 후 공손하게 한 곁으로 물러나 시립했다. 물론 이때도 편월은 고개를 들고 있었지만 말이다.

“호오, 매우 어린 사자가 왔구나. 그래, 진남후는 평강하신가?”

황제가 인사에 대한 답으로 이렇게 물었을 때, 기어코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응. 아니 옛!”

편월이 평소에 입에 붙어 버린 대답을 해 버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대전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버렸고, 광운은 그대로 편월의 뒤통수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다. 지금껏 비교적 평온하던 서수의 얼굴이 굳어진 것도 물론이고.

그때 공경 중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단상을 올라가 황제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을 놓칠 광운이 아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가 했더니 이내 식은땀이 축축이 배어 나왔다.

‘이놈을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만에 하나 편월의 실수가 새어 나간다면 당장 가겸후가 그냥 있지 않을 터였다. 가뜩이나 처음부터 인사 문제로 미운털이 박힌 상태에서 ‘황제에 대한 불경을 다스린다.’라는 명분까지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입장은 매우 우스워진다. 처음 만났을 때 명분으로 가겸후에게 저항했었는데, 이젠 거꾸로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여기서 꿇어 엎드려 사죄를 청해야 하는 게 아닐까?’

궁중의 법도를 제대로 모르는 광운인지라 어쩔 줄 몰라 서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 역시 얼굴 가득 납빛 땀만 뻘뻘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별로 노여워하는 음색은 아니었다.

“진남후의 사자들은 가까이 오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제의 부름에 서수는 재빨리 답하며 보다 가까이 갔다. 광운과 편월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귀여운 꼬마 사자로다. 이리 썩 올라오라!”

“폐하, 불가하옵니다!”

공경 중 누군가가 황제를 말렸다. 이런 일은 전례도 없었고, 결코 전례를 만들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괜찮소. 어서 오도록 하라.”

거듭된 황제의 부름에 편월은 머뭇거리며 광운의 눈치를 봤다.

광운은 슬쩍 그 등을 밀어 주었고, 처음엔 다소 주춤거리던 편월이 이내 가슴을 펴고 당당히 단상을 오르기 시작했다. 싸움터에서 몸에 밴 호방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몸짓이었다.

황제 앞에 선 편월도 예를 갖췄다. 비록 군례였지만, 제 딴에는 최대한 정중하게 한 것이었다.

“오, 이리 오너라. 이 목걸이는 어디서 난 것인고?”

“죽은 엄마의 몸에서 나온 거래요.”

황제의 질문은 너무 낮아 잘 들리지 않았지만, 편월의 대답에 광운은 또다시 긴장되었다. 저건 분명 목걸이에 대한 얘기일 테고, 그 순간 여기로 오는 도중 만났던 사문기의 말이 떠올랐다.

황제는 목걸이의 원래 주인을 아는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황제가 그걸 아는 듯하니 광운은 기분이 묘했다. 좋아해야 하는지, 반대로 걱정을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황제가 알 정도라면 편월의 모친은 분명 고귀한 신분의 사람일 터다. 그런 사람이 아이를 출산하기도 전에 살해를 당했다는 점에서도 벌써 난세의 피 냄새가 느껴진다. 비록 힘없는 황궁이지만, 그 속의 권력 암투로 인한 건지도 모른다.

‘황제조차도 조심해야겠군.’

황궁의 권력 암투였다면 황제 역시 개입되었을 게고, 사실대로 대답한 편월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 모친을 죽인 자들이 그 아들을 그대로 둘 턱이 없으니 말이다.

“폐하, 진남후의 진상품 목록이옵니다!”

편월을 가까이 부르려 한 황제를 말렸던 그 목소리가 다시 길게 늘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그만 편월을 내려 보내라는 의미였다.

“굳이 읽을 필요는 없소. 그냥 받아 두시오.”

“황후 마마 납시오!”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됐다. 어서 내려가거라!”

그 순간 황제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몸짓으로 편월을 돌려보냈다. 그리 봐서 그런지, 안색도 좀 전과 달리 약간 질린 것 같았다.

광운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정식 부인인 황후는 가겸후의 동생이다. 두 명의 황비 역시 율천국 충신의 딸들로 채워졌으니 황제가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나저나 서 선생은 황제와 독대를 할 수 있을까?’

사실 황제에게 바치는 진상품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모두 송용조가 마련한 것으로, 세상에서 드문 희귀하고 값진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목록은 어떻게든 가겸후의 귀에 들어갈 게 뻔하고, 그 사용 역시 엄격하게 통제당할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송용조는 따로 은표로 황금 일만 냥을 서수를 통해 황제에게 은밀히 전하라며 줬었다. 가겸후의 눈치를 볼 것 없이 개인적인 용처에 쓰라는 의미였고, 진상품보다 이쪽이 더 황제의 마음을 파양주로 기울게 하는 데 용이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데 황제가 저처럼 마누라(?)들의 엉덩이에 깔려 있어서는 독대를 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모종의 방도를 강구해야겠지만, 평생 전장에서만 뒹군 광운에겐 이 경우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사자들은 이만 물러가 쉬시다가 오늘 밤 연회에 참석하시오.”

다시 들려온 누군가의 말에 따라 세 사람은 대전에서 물러 나왔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하구려.”

황궁 밖에 집결시켜 둔 잡가군에게로 돌아가며 서수가 입을 열었다.

그 뜻을 광운은 잘 알 수 있었다. 황후를 너무 두려워하는 황제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런데 편월은 좀 전에 폐하와 무슨 얘기를 나눴지?”

목걸이의 출처를 물은 이후로 황제와 편월은 몇 마디 더 나눴는데, 광운은 편월에 대한 염려로 미처 듣지 못했었다.

“목걸이를 바꾸자고 했어.”

“뭐? 목걸이를?”

“응!”

“왜 바꾸자고 하시든?”

“몰라. 내가 싫다고 했거든!”

“이런…….”

정말이지 광운은 할 말을 잊었다. 요즘 들어 반항기가 더욱 심해진 것 같은 편월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곤혹스러울 때가 부쩍 많아졌다.

“나도 연회에 참석하라는 말도 했어. 그런데 내게도 술을 줄까?”

“그래?”

대꾸하며 광운과 서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편월에게 오라고 했다면 황제도 반드시 연회에 참석할 것이다. 그때 은표를 전할 방법도 있을 듯했다.

“잘 들어라, 편월. 만약 연회에서 폐하께서 또 목걸이를 바꾸자고 하신다면 거절해서는 안 된다. 알겠지?”

“싫어! 엄마 건데…….”

편월은 이번에도 거절하며 광운을 노려보았다.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싶더니, 이내 눅눅한 습기를 머금어 갔다.

광운은 깜짝 놀랐다. 아기 때부터 단 한 번도 편월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물이라고 하기엔 미흡하지만, 눈자위가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광운은 더 이상 목걸이를 교환하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린 가슴에도 엄마라는 존재는 아리게도 그리워, 그 물건에 집착하는 편월이 너무 애처로웠다.

“알겠다. 내가 잘못했다.”

사과부터 해 두고 광운은 서수와 더불어 연회 때 황제에게 은표를 전할 방도를 논의했다.

* * *

황실의 연회라고 해서 무조건 화려하다고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유랑 황제가 베푸는 연회는 차라리 여느 부호의 생일연生日宴보다 초라한 것 같았다.

그래도 격식만은 엄격했다. 술을 한 잔 마시는 것도, 안주를 한 점 집는 것도 일일이 법도에 따라야만 했다.

그 와중에서 가장 분방한 건 아무래도 편월이었다. 아무리 광운이 제지해도 이런 연회의 의미조차 모르는 어린 그로선 일각 이상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그런데 그게 좌중에 묘한 흥을 불러일으켰다. 딱딱하기만 한 분위기가 천진난만한 편월의 행동으로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인지라 누구도 나무라지 않았다.

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광운에겐 그 점이 무척 다행이었다. 또한 황후와 황비가 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하늘이 도운 것 같았다.

이윽고 힘겨운 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진상물을 헌납한 진남후에 대한 감사와 반드시 승전하라는 황제의 말이 끝나자 서수가 몸을 일으켰다.

“삼가 황명을 받들어 진남후는 반드시 남쪽의 도적을 토멸할 것이옵니다. 그 황은에 감읍하와 진남후를 대신해 소신이 한 잔 술을 받들어 올리겠나이다!”

서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중은 술렁거렸다. 황실의 연회 시 감히 황제에게 직접 술잔을 건네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개 사자의 신분이라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꼭 집어 반대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지금 서수는 진남후를 대신하고 있다. 그 관직이라면 충분히 황제에게 직접 술잔을 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수가 나선 건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이름뿐이더라도 재상을 비롯한 삼공과 숱한 공경들이 있다. 그들 역시 한마디씩 하고, 황제에게 축수祝壽를 올린 뒤에야 제후의 차례인 것이다. 어쨌든 황궁의 법도는 그렇다.

그러나 파양주 사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언제 어떤 방해 인물이 등장할지 모르니, 그 전에 할 일은 해야만 한다.

“정사께서 직접 바치는 건 불가하오. 모름지기 그런 일은 진상사가 할 일인즉, 술잔은 진상사에게 들려 올리는 게 마땅하오!”

예의 편월이 황제에게 가는 걸 막았던 목소리가 다시 서수의 행동을 제지했다.

이건 광운이나 서수 모두 예상했던 일이다.

서수는 잠자코 의자에서 일어나 탁자 앞으로 나아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진남후가 바치는 술이옵니다. 만수무강하옵소서!”

황제에 대한 축수를 하면서 서수가 절을 하고 있는 사이, 편월이 냉큼 그 옆에 가 서며 술잔이 올려진 잔 받침을 들고 섰다.

서수가 정중하게 따른 술잔을 들고 편월이 황제에게 다가가 바쳤다.

“오, 진남후의 이 잔을 짐이 고맙게 받았다고 전해 주오!”

말과 함께 황제는 잔을 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 밑에 작게 접힌 은표를 발견한 것이었다.

오랜 유랑 생활을 해 온 덕에 눈치가 빠른 황제다. 짐짓 잔을 들이켜며, 한 손으론 그 은표를 집어 소매 속으로 넣었다.

“좋도다! 천하가 평안해지면 다시 진남후의 술 한 잔을 마셨으면 좋겠구나. 감사의 뜻으로 짐이 예물 하나를 내리노라!”

말과 함께 황제는 빈 잔 받침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작은 비단 주머니에 싸여 있어 내용물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광운은 그게 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틀림없이 목걸이일 터였다.

“황송하옵니다. 진남후 역시 오늘의 황은을 뼈에 새겨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다시 한차례 사례한 뒤 서수는 자신에게 돌아온 황제의 예물을 받고서야 일어서 원래의 자리에 가 앉았다.

그다음 순서는 뻔하다. 서수의 손에 들렸던 예물은 재빨리 광운에게 전해졌다.

‘이 일은 반드시 가겸후의 귀에 들어간다.’

예로부터 힘없는 황제의 밀지는 온갖 방법을 통해 밖으로 유출되었고, 또한 더욱 치밀한 방법으로 적발되었다.

광운은 슬쩍 비단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예상대로 편월의 목에 있는 것과 똑같은 목걸이였다.

“황송하오나 이 어린것이 황제 폐하의 어전에서 긴장한 탓에 바지에 실례를 했사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걸 용서해 주소서!”

말이 다소 거친 데다 편월을 오줌싸개로 만들었지만, 광운의 이 청이 황제에게 거부될 턱이 없었다. 당장 허락이 떨어졌고, 둘은 재빨리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거기엔 송용조의 심복이자 사자단의 심부름꾼으로 가장한 모용추慕容趨가 기다리고 있었다.

광운은 그에게 황제의 예물과 송용조에게 전할 말을 들려주고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그 전에 이젠 비어 있는 예물 주머니에 편월의 목걸이를 집어넣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연회장은 연회장이 아니었다. 마치 얼음 구덩이 같은 찬바람만이 쌩쌩 감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름 아닌 가겸후가 와 있었기 때문이다.

광운과 편월이 들어서는 걸 본 가겸후는 온 얼굴 가득 웃음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좋은 선물을 받았다지? 좀 볼 수 있을까?”

말이 끝난 것과 함께 가겸후의 웃음도 씻겼고, 동시에 그가 거느린 도부수들이 광운과 편월, 서수를 둘러쌌다.

* * *

그즈음 송용조는 단신으로 창일성의 성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해 진 뒤의 성문은 다음 날 아침까진 열리지 않지만, 귀신도 부린다는 돈의 조화로 가능할 수 있었다.

3

진무각!

이제는 율천왕부率天王府가 되어 있는 이곳에 이 밤, 살벌한 언성이 오가고 있었다.

“어찌 폐하께서 하사하신 예물을 일개 왕이 함부로 달라고 하시오? 이런 무법이 횡행하니 천하가 난세에 잠기는 거요!”

“닥쳐라! 네놈들에게 찔리는 일이 없다면 못 내놓을 일이 어디 있느냐?”

서수를 닦달하는 목소리는 육우맹의 것이었다. 이미 광운과 편월 및 서수를 율천왕부까지 압송해 왔고, 잡가군 칠백도 억류해 놓은 상태다. 누구의 눈치를 볼 일도 없이 이들을 심문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찔리는 일이라니? 말씀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이래 봬도 파양주의 사자로 온 몸이오. 예를 갖추시오!”

“예를 갖췄으니 이 정도다! 그러니 예를 갖춰 줄 때 어서 그 물건을 보여라.”

“허어, 아무리 난세고 전국 세상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없는 법이오! 어찌 함부로… 커헉!”

말을 받던 서수가 갑자기 억눌린 비명과 함께 저만치 나뒹굴었다. 육우맹이 수중의 법봉法棒으로 그의 어깨를 후려친 탓이었다.

“영감탱이!”

그 순간 홀로 자유롭게 놓여 있던 편월이 그 앞으로 뛰어 들었다.

“네 상대는 나야! 덤벼!”

“어허허허어…….”

어제 성문 앞에서도 덤비던 꼬마가 이 왕부에서도 눈이 새파래서 설치니 육우맹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왜? 전장에서 칼로 만났으면 그 쭈그렁 모가지는 벌써 진흙 속에 뒹굴고 있었을 거다, 영감탱이!”

“네 이노옴-!”

전쟁을 아는 편월의 욕설은 이미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천하에서 가장 큰 땅을 지배하는 율천국의 오기총감장으로서 듣고 참을 만한 게 아니었다.

부웅-!

육우맹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편월의 정수리를 향해 법봉을 날렸다.

“참으시오.”

그때 착 가라앉은 가겸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육우맹의 법봉은 편월의 정수리 바로 위에서 딱 멈추더니 다시 거둬졌다. 실로 백전노장다운 솜씨였다.

문제는 편월이었다.

“말리지 마!”

한소리 외친다 싶더니, 그대로 온몸을 던져 육우맹에게 치고 들어갔다.

“헛!”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에 육우맹은 거뒀던 법봉을 재차 편월에게 날렸다.

만약 어른이었다면 육우맹의 이 공격은 멋지게 성공했을 터였다.

하나 편월은 어린아이, 법봉이 그 작은 키에 닿기 전에 그의 머리가 육우맹의 아랫배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바로 남자의 급소 근처였다.

입이 딱 벌어지며 절로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육우맹은 억지로 씹어 삼켰다. 일국의 병권을 책임진 자가 꼬마에게 당해 꼴사납게 소리나 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바로 옆에서 도부수들에 의해 구금되어 있던 광운조차도 말릴 겨를이 없었다.

“잡아라!”

나직한 가겸후의 명이 다시 떨어졌고, 쭉 도열해 있던 도부수들 중 몇 명이 편월을 둘러쌌다.

“다 덤벼! 떨거지 자식들아!”

하지만 이건 편월의 말뿐인 저항으로 그치고 말았다. 아무리 전장에 익은 몸이라도 좁은 곳에서 비무장 상태로는 어른들을 이길 리 만무했다.

“놔! 안 놔!”

마구 발버둥 쳤지만, 편월은 이미 가겸후 앞에 억지로 무릎 꿇린 상태였다.

“파양주의 진상사라니 묻겠다. 황제에게 뭘 받았느냐?”

“말 안 해!”

“호오, 알긴 아는데 말을 않겠다?”

“거짓말하기 싫어서 말 안 하는 거야!”

“이런 무례한 놈!”

꼬박꼬박 말을 놓는 편월에게, 이제 갓 부상(?)에서 회복된 육우맹이 쳐 죽일 듯 덤벼들었다.

“멈추지 못할까!”

육우맹을 제지하는 가겸후의 목소리가 약간은 신경질을 그리며 높아졌다.

“육 장군의 심정은 익히 알고 있소. 하지만 이 율천왕부에서 저런 꼬마를 죽였다고 한다면 무슨 낯을 들고 천하의 뭍 왕과 제후들을 대하겠소? 그러니 고정하시오!”

“이깟 놈들을 죽였다고 어찌 소문이 나겠습니까?”

“기억나지 않소? 이들은 여기까지 오면서 각 지방에 무성한 소문을 뿌리고 왔다는 걸! 아마 천하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없을 것이오. 그러니 그들을 죽인다면 당장 소문이 퍼질 거요. 그냥 황제에게 받은 물건이나 찾아 조사를 하시오.”

육우맹을 타이르는 가겸후의 어조는 조용했다. 그 역시 이들을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만 더 큰 야망을 위해선 천하의 인심을 얻어야 하기에 살려 주려 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이들에게 줬다는 물건은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게 뭔지는 동생인 가 황후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저들이 바로 그 물건을 내놓는지 확인하기 위해 말을 않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그는 동생 가 황후에게 왜 황제가 이번 사자들에게만 물건을 줬는지도 알아내게끔 지시해 두었다. 더러 다른 왕이나 제후, 패주들에게서 사자들이 왔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하오나 이 발칙한 어린것을 이대로 살려 보내면 반드시 뒷날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옵니다. 이놈의 팔을 하나 자르는 걸로 이 사자단의 죄를 묻는 게 가한 줄 아옵니다!”

육우맹은 집요했다. 그 나이에 아직도 젖비린내를 물씬 풍길 것 같은 편월에게 그처럼 당했으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아무리 야심을 가진 가겸후라도 그것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

“좋도록 하시오.”

“잠깐!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가겸후의 허락과 동시에 도부수 한 명이 편월에게 걸어갈 때, 광운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뭔가?”

“드리겠소! 폐하의 하사품을 드리겠으니, 그 애만은 손대지 마시오!”

“어차피 그건 찾아낼 수 있는데, 과인이 그대와 거래를 할 일이 뭐 있는가?”

“조금 전에 말씀하셨지 않소? 천하에 퍼질 율천국왕의 명망을 생각하시오! 만약 그 아이에게 손 하나라도 댄다면, 폐하의 하사품은 이 몸의 배 속에서 찾으셔야 할 게요!”

비록 연기에 불과했지만, 정말 편월이 털끝 하나 다친다면 광운은 목걸이를 삼킬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새로 조성된 이 율천왕부 진무각에 자신의 피로 그림을 하나 그려 놓을 결심이었다.

“흐음-!”

가겸후의 침음성이 길어졌다. 아이의 팔 하나와 황제의 하사품과의 교환이라면 분명 이득이다. 물론 육우맹의 기분을 풀어 줘야 한다는 문제는 남지만 말이다.

“육 장군, 아무래도 과인을 위해 오늘의 노기는 눌러 주셔야겠소.”

가겸후의 판단은 빨랐다. 우선 육우맹에게 약간의 사정 조로 그를 달랜 후, 광운을 구금하고 있는 도부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사이 편월이 풀려난 건 물론이다.

광운은 비단 주머니를 건네주었고, 곧장 육우맹에게 전달되었다.

육우맹은 주머니를 열고 그 속에 있는 목걸이를 꺼내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눌러 보고, 비틀어 보고, 불에 비쳐 보기도 하고, 심지어 불길에 갖다 대 보기도 했다.

그 모습을 가겸후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동생에게 들은 대로 물건은 목걸이가 틀림없었다. 이제 그 속에 있을 황제의 밀지만 찾으면 된다.

하지만 애당초 같지만 다른 물건이니 밀지 같은 게 나올 턱이 없었다. 아무리 살펴도 나오지 않자 육우맹은 그걸 바닥에 놓고 도부수의 도끼를 하나 받아 들었다. 부수려는 것이었다.

“무슨 짓이오? 감히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물건을 부수려 하다니, 정녕 이래도 되는 것인가?”

새파랗게 질린 편월을 대신해 서수가 언성을 높였다. 어깨의 통증 탓에 일그러진 표정이었지만, 그 말투만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이 한마디에 육우맹도 주춤거렸다. 아무리 난세라도 황제는 황제다. 그가 내린 물건을 부순다는 건 쉽게 행할 일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소?”

여태 관심 있게 지켜보던 가겸후가 물었다.

“예.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사옵니다.”

“그럼 돌려주도록 하시오. 황제의 물건을 그리 험하게 다뤄서야 안 되지.”

밀서가 나오지 않자 가겸후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른 밀담이 없었다는 건 황제 주변에 심어 둔 심복들에게 들었기에, 저들은 그저 막대한 진상품을 바치고 예물이라는 이름의 하사품 하나 챙겨 가는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엉뚱한 오해 탓에 파양주의 사자들이 곤욕을 치렀구나. 돌아가거든 진남후에게 과인이 안부 전한다고 일러라!”

이로써 세 사람은 풀려나게 된 셈이다.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을 끝낸 가겸후가 일어서려는 순간, 서수가 던지듯 한마디 내뱉었다. 그리 고운 말투가 아닌 건 여태 당한 게 억울하다는 무언의 항변이었다.

“청? 말해 보라!”

“우리들은 오늘 밤중으로 창일성을 떠나고 싶습니다. 성문 통과증과 각 관문의 통행증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유는?”

“전하께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 오해가 병사들에게도 생기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를 불상사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어쨌든 여기는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곳이니…….”

“그리하라. 육 장군, 통행증을 내주시오!”

가겸후는 간단히 승낙했다. 서수의 말처럼 지금 양측의 병사들 사이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자칫 일이 벌어진다면 황제를 모시며 보호한다는 명분이 희석되고 만다.

그리하여 파양주에서 온 사자단과 칠백의 잡가군은 그날 밤 창일성을 빠져나왔다. 올 때와 달리 그들은 최대한 빠른 귀로를 잡았다. 안내는 사자단의 심부름꾼인 모용추가 했다.

* * *

상단과 기예단을 떼 놓은 일행의 움직임은 빨랐다. 심지어 서수까지 서툰 기마술로 말을 탔으니, 동이 터 올 때는 벌써 창일성에서 족히 이백 리 이상은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광운은 연방 일행을 재촉했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뒤통수에 들러붙어 달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범의 아가리에서 벗어났으니, 토끼는 무조건 달리는 수밖에 없다.

“광운 장군, 여기서 우선 식사부터 하고 갑시다!”

연방 서두르는 광운의 곁으로 달려온 모용추가 말을 건넸다.

“그럴 시간이 없소. 조금이라도 빨리 창일성에서 멀어져야 하오!”

“그건 알고 있소. 하지만 허기지면 사람과 말이 다 같이 지쳐 발길은 더욱 더딜 것이오. 지금쯤 모두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이각이면 식사를 끝낼 수 있을 게요.”

“준비? 이각?”

“그렇소. 주인께서 어젯밤에 성을 빠져나와 곳곳에 준비를 일러두시고, 파양주로 가셨을 게요. 게다가 준비를 해 둔 곳은 우리 상단과 인연이 깊은 곳이니 안심하셔도 좋소. 다는 아니더라도 말도 갈아탈 수 있을 게요.”

“좋소. 안내해 주시오.”

‘송 대인에게 큰 신세를 지는군!’

허락을 해 놓고 광운은 송용조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떠올렸다.

지난밤 그에게 부탁했던 건 황제의 하사품을 안전하게 보관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길로 창일성을 빠져나가 파양주로 향했나 보다.

사실 그 일만 해도 송용조는 큰일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덧붙여 이런 수배까지 해 놓았으니, 광운이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송용조의 수배는 광운에게 너무도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적지에서 벗어날 땐 한가하게 취사를 할 여유가 없었다. 굶더라도 그대로 뭐 빠지게 달릴 수밖에 없단 말이다.

그런데 이각 만에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손을 써 뒀다면 그만큼 시간이 절약된다. 이런 수배를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말먹이 준비도 잊지 않았으리라.

‘추적이 없으면 좋으련만…….’

가겸후도 사람이니만치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이 아침, 잠에서 깨어 지난밤의 일을 후회하고 자신들을 다시 잡아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창일성에서 그처럼 모욕을 줬으니 말이다.

바로 그런 경우가 광운은 염려스러웠다. 추적만 없다면 앞에 놓인 숱한 관문은 가겸후가 발행해 준 통행증으로 그냥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추적이 붙는다면 거느리고 있는 잡가군으로 무단 돌파할 수밖에 없고,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지체된다.

벌써 이만큼 왔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얘기는 재고의 가치도 없었다. 봉화도 있고 연기 신호도 있으니, 자신들이 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각처의 관문에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저기요!”

모용추의 말에 광운은 고개를 들어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모았다.

거대한 장원이었고, 벌써 그 앞에 무언가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음식과 건초!’

하얗게 보이는 건 사람 머리통만 한 만두나 주먹밥일 게 뻔하고, 갈색으로 보이는 건 말에게 먹일 건초이리라.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광운은 지금까지의 피로가 절반은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이각 동안 식사를 한다! 말 위에서 말과 같이 먹어라!”

장원 근처에 이르자 광운은 커다랗게 명을 내렸다.

모용추의 말은 한 치의 어김도 없었다. 장원 주변으로 빙 돌아가며 이중 삼중으로 음식과 건초를 쌓아 뒀고, 또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까지 배치되어 있어 칠백여 명의 일행과 말이 먹고 마시는 데 이각이면 충분했다.

“자, 배를 채웠으면 다시 출발이다! 곧 등운관等雲關이다! 달리면서 무장을 한다! 자, 출발!”

등운관은 앞으로 만나게 될 숱한 관문들 중 하나다. 이름처럼 등운산等雲山에 위치한, 가히 성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아직 관문은 열리지 않았으리라.’

등운관은 창일성에서 가장 가까운 관문 중 하나이자 요충지다. 관문의 열고 닫음이 엄격할 것이란 얘기다.

그것도 광운의 마음에 걸렸다.

이왕 열려 있는 곳이라면 그냥 통행증을 보여 주고 통과하면 그만이지만, 설사 당장 연다 해도 그 큰 문이 완전히 열릴 때까진 시간이 걸린다.

어쨌든 가 보면 알 일, 우선 광운은 자신도 마상에서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이건 다른 잡가군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광운의 말은 등운산의 초입으로 접어들었다. 이 산을 넘어야 궐운평야를 완전히 벗어나 이웃 휘주揮州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이다.

저만치 관문의 목책과 그 위에 꽂힌 기치가 보일 때까지도 광운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단 돌파냐, 통행증을 보이느냐.’

그러나 그 답은 굳이 광운이 내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관문 앞 일 리 정도에 이르자 화살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우려했던 일이 이렇게 현실이 되어 버렸다.

“좋다! 무단 돌파다. 공격!”

“으와아-!”

“쳐라!”

창일성에서 잔뜩 억눌려 있던 잡가군이었다. ‘공격’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목숨 따위는 도외시한 치열한 선두 경쟁이었다.

그 와중에 광운은 높은 곳에 올라 뒤를 돌아보았다. 등운관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벌써 추적이 붙었다는 얘기다. 그게 어디까지 왔는지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과연 아스라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새벽 여명을 배경으로 세 줄기 먼지구름이 솟구쳐 있는 게 보였다.

‘빠르군. 그런데 가겸후가 왜 변심했을까?’

그러나 이런 의문은 당장 풀지 않아도 되고, 풀리지도 않는다. 우선은 등운관을 깨뜨리고 휘주로 넘어가야 한다.

‘휘주는 작은 곳이라 관문 따위는 없을 게고…….’

생각을 정리하며 돌아섰을 때, 싸움은 벌써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울분에 이끌린 잡가군의 거센 공격 앞에 등운관의 목책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활활 불타오르는 등운관에, 잡가군은 시신 백여 구를 남기고 휘주로 들어섰다.

그렇다고 광운의 걱정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사이 추적대가 꼬리를 바짝 물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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